저자 소개

 

* 김교빈

1953 년 서울 출생

1978 년 성균관대학교 유학과 졸업

1992 년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 졸업(철학박사)

현재 호서대학교 철학과 교수

주요 저^5,23^역서: “국민 윤리”(방송통신대학 교재, 공저), “하곡 철학 사상에 관한 연구”(박사논문), “중국 고대철학의 세계”(공역), “중국 의학과 철학”(공역), “기의 철학”(공역), “현대중국의 모색”(공동편역)

 

* 이현구

1957 년 경북 상주 출생

1980 년 성균관대학교 유학과 졸업

1993 년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 졸업(철학박사)

현재 호서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강사

주요 저 역서: “최한기 기학의 성립과 체계에 관한 연구”(박사논문), “중국 의학과 철학”(공역), “기의 철학”(공역), “현대중국의 모색”(공동편역)

 

 

머리말

‘나는 왜 동양 철학을 공부했는가?’

승려들이 길어진 머리를 깎으면서 출가할 때의 결심을 되새기는 것처럼, 가끔씩 혼돈스러울 때면 나 스스로를 되짚어 보는 물음입니다. 아직 철모르던 시절, 우연히 “논어”를 읽고서는 막연히 동양 철학을 공부해 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 내 마음속에는 성인도 있었고 도사도 있었습니다. 성인은 엄청난 사람이었고, 도사는 신비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양 철학을 직접 공부하면서 고전에 나오는 사람들이 내가 생각하던 성인이나 도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성인이란 무엇일까요? 성인은 동양의 이상적 인간형입니다. 하지만 결코 현실을 벗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성(성스러울 성)은 이(귀 이)와 구(입 구)와 왕(임금 왕)을 합친 글자입니다. 글자 그대로 귀와 입을 가진 사람이 임금 노릇을 한다는 뜻입니다. 귀와 입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자주 봅니다. 누구 얘기든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귀를 갖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입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아이들에게 말할 때와 노인들께 말할 때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정말 귀다운 귀와 입다운 입을 가진 사람은 남을 지도하고 다스릴 만합니다. 동양 고대의 성인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도사는 또 어떤 사람일까요? 도(길 도)는 착(쉬엄쉬엄 갈 착)과 수(머리 수)를 합친 모습입니다. 착(쉬엄쉬엄 갈 착)에서 위에 붙은 삼(터그럭 거릴 삼)은 흩날리는 머리카락이고, 복(점 복)은 걸을 때 한 팔이 뒤로 빠져나온 몸체를 그린 것이며, 맨 아래 인(사람 인)은 걸어가는 앞발과 뒷발의 모습입니다. 여기에 머리 수자가 붙어 있습니다. 즉 걸어가면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도는 생각과 실천을 함께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사란 끊임없이 머리 속으로 생각하면서 옳은 길을 찾아 실천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사실 동양에는 철학이라는 용어가 없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철학이라고 번역한 필로소피(Philosophy)는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동양의 사유들은 도를 깨닫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철학이 아니라 도학이라고 했어야 합니다. 동양에서 도를 깨우치는 데 필요한 것은 지혜가 아니라 수양을 통한 덕이었습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보다 어진 사람을 높였던 것입니다.

서양에서 말하는 지혜의 대명사는 솔로몬입니다. 그의 지혜를 나타내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같은 또래 아이를 가진 두 여인이 한 집에 살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여인이 잠을 자다 잘못해서 자기 아이를 깔아 죽이고는 남의 아이를 자기 아이라고 우겨서 소송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솔로몬은 그 아이들 둘로 갈라 반씩 가지라는 판결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아무리 뒤를 내다본 지혜로운 판결이라 해도 아이를 둘로 나누라는 결정은 잔인해 보입니다. 동양식 판결은 혹시 이렇지 않았을까요? “그럼 너희 둘 모두가 그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아이를 참답게 키워라!”

요즘 서점에 가 보면 제자백가가 명성을 누리던 춘추 전국 시대로 되돌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빈틈 하나 없을 만큼 근엄한 공자와 맹자, 언제 봐도 냉소적이며 입만 열면 비유를 내뱉는 노자와 공자,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심오해 보이는 명상 서적, 책만 사도 미래가 다 보이고 복이 곧 굴러들어올 것 같은 역학 및 운세에 관한 책들, 기쓰고 읽게 만드는 기를 주제로 한 책들, 보는 것만으로도 건강해질 듯한 단전 호흡이나 기공 같은 수련 책들, 그 밖에 상당히 전문적인 신과학 운동 계열과 전통 의학 관련 책들까지 없는 게 없습니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잘 팔리는 모양입니다.

서양물이 들어온 뒤 동양 철학이 오늘처럼 전성기를 누린 적이 있을까요? 그러나 대부분 상품화된 도덕과 상품화된 신비주의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책이든 저자나 해석자의 세계관이 담겨 있는 법인데, 전면 부정이나 부분 부정은 드물고 대체로 긍정적인 입장에서 쓰여져 있습니다. 잘못된 시각과 잘못된 지식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도 적지 않으며, 이런 책들은 사실 정신적인 공해입니다.

“동양 철학 에세이”는 인류 역사에서 학문적으로 가장 자유롭고 화려했다는 춘추 전국 시대 제자 백가의 사상을 다루었습니다. 이 책은 동양 철학을 신비적으로 해석하거나 시대를 넘어선 보편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각 사상의 시대적 한계와 의미를 긍정적인 면과 아울러 부정적인 부분까지 드러내 보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쉽고 간결하게 동양적 특징을 지닌 사상들을 하나하나 다루어 갈 것입니다.

이 책을 오랫동안 호흡을 같이 해 온 두 사람이 썼습니다. 바로보기, 노자, 장자, 법가, 주역은 이현구가 썼고, 공자, 묵자, 맹자, 순자, 명가는 김교빈이 썼습니다. 그리고 돌아보기는 둘이 함께 썼습니다. 글쓰는 동안 여러 가지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은 도서출판 동녘의 이건복 사장님과 편집부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1993 년 6월

지은이

 

 

현대인은 철부지?

 

음력은 달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만든 달력입니다. 우리가 오늘 보름달을 보고 다음 보름달을 볼 때까지는 29.53일쯤 걸리는데, 음력은 이것을 한 달로 잡습니다. 그러므로 12 달을 합치면, 양력의 1 년보다 10일 이상 짧아집니다. 이 차이를 그대로 두고 달력을 쓰면 불편한 일이 생깁니다. 어느 해에 양력과 음력이 같은 날을 1월 1일로 잡아 출발한다면 3 년 뒤에 음력은 양력과 한 달 이상 차이가 나고, 16 년쯤 지나면 음력 1월은 한여름이 됩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동서양이 다 19 년에 7번의 윤달을 넣는 역법을 개발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윤달법을 쓰더라도 음력의 숫자는 계절을 양력만큼 정확하게 알려주지 못합니다. 1993 년 6월 1일은 음력 4월 12일이었습니다. 음력과 양력이 거의 두 달 차이를 보이는데, 이 해에는 음력 4월 바로 앞에 윤 3월이 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달력에 24절기를 표시하여 태양의 움직임을 알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전통력인 태음 태양력입니다. 태음은 달을 가리키는 말이고, 태양은 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전통 달력의 동지는 항상 양력 12월 22일에 해당하고, 청명은 대개 식목일(4월 5일)과 겹칩니다. 우리는 청명, 한식, 식목일 무렵에 봄날의 화창한 햇살을 받으며 야외로 나간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명이란 글자를 풀이하면 바로 ‘맑고 밝은 날’입니다.

하지를 지나고 한 달쯤 뒤가 대서인데, ‘한창 더운 날’이란 뜻입니다. 동지를 지나고 한 달 뒤는 대한인데 ‘가장 추운 날’이란 뜻입니다. 국민학생들이 보는 과학 이야기 책에 하지 때 태양의 고도가 가장 높아서 태양열을 가장 많이 받지만 땅이 데워지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한 달쯤 뒤가 가장 덥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대서라는 절기 이름을 정확하게 붙인 셈입니다.

이 이야기를 음미해 보면, 우리가 흔히 친한 사람의 생일이나 약속을 표시해 두는 달력, 그리고 늘 우리 위에 떠 있는 해와 달이 훨씬 가까이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는 바쁜 생활 속에서 달력의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해의 고도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또 달이 차고 기우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달력을 이용하는 방식은 100 년, 200 년 전의 선조들이 이용한 방식과 다릅니다. 달력을 보고 지금 무슨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밤하늘의 별들의 위치나 달의 모양을 그려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달력을 보고 내일 날씨를 예측해 보는 사람은 더욱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그런 일을 했고, 그 이상의 정보를 달력에서 끌어내 썼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24절기를 모르면 ‘철부지’라고 했습니다. ‘철을 모른다’는 것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무엇을 해야 할 때인지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씨를 뿌려야 할 때인지 추수를 해야 할 때인지, 채소밭을 갈아야 할 때인지, 김장을 담가야 할 때인지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철을 모른다’는 말은 때를 모른다는 의미에서 때와 장소를 모른다는 의미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름에 털옷을 입거나 겨울에 짧은 치마를 입으면 철부지가 되고, 말을 조심해야 할 자리에서 함부로 지껄이면 철부지 소리를 듣습니다. 어른들이 한겨울에 아이들을 밖에 내보내려면 아이들과 한참 실랑이를 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따뜻한 옷을 입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철부지라고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우리들 중에도 철부지가 많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쌀밥을 먹으면서도 벼를 만져 볼 기회가 적습니다. 지금 농촌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지금이 어느 철인지 생각할 필요도 별로 느끼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겨울에도 얇은 옷을 입습니다. 난방 장치가 된 차로 이동하고, 난방이 잘 된 사무실에서 일하기 때문입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우리가 하는 일에는 특별한 차이가 없습니다. 해가 서쪽에서 뜨고, 달이 두 조각이 나도 별 관계가 없을 것처럼 삽니다. 도시의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달은 어쩐지 맨송맨송하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분명 옛 사람들과 다르게 살고 있습니다. 이른바 ‘현대’에 살고 있습니다.

 

 

문화 전통이라는 것

 

우리가 지금 쓰는 달력은 ‘그레고리력’입니다. 이것은 1582 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 13세 때, 실제 천체와 10일이나 차이가 난 기존의 ‘율리우스력’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고치면서 새로운 윤년법을 도입한 것입니다. 이 새로운 윤년법의 도입으로 앞으로 몇 천 년을 써도 계절과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해졌습니다. 그러나 과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불합리하고 부정확한 면이 있습니다.

1954 년 7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연합 경제 사회 이사회는 ‘세계력’ 안건에 대한 60개국 정부의 의견을 받아 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세계력 안은 20세기 초에 독일 사람 폰 츠하르트가 제출했고, 1930 년 뉴욕의 엘리자베스 아켈리스라는 여성이 세계적인 운동으로 전개했습니다. 이 안은 그레고리력의 여러 가지 불합리한 점을 개선한 것이었습니다. 매달 노동 일수가 일정하여 작업 능률과 경비 계산이 간단해지고, 매년 매계절의 요일이 일정해지는 편리함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세계력 안에 대한 각 나라의 입장입니다.

 

반대: 미국, 영국, 캐나다, 프랑스, 서독 등 20개국

조건부 찬성: 일본, 이탈리아 등 10개국

무조건 찬성: 소련, 인도, 태국 등 10개국

무응답: 20개국

 

이른바 현재의 G7 중에서 일본과 이탈리아를 빼고는 모두 반대하였습니다. 대체로 동양측은 거의 찬성이었는데, 우리 나라도 공식 투표권은 없었지만 뉴욕 주재 대표를 통하여 적극 찬동의 뜻을 표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찬성 20개국, 반대 20개국으로 이 안은 부결되었습니다.

세계력을 반대한 나라들의 가장 큰 이유는 주 제도가 파괴되는데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유태교에서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정하였고, 일요일은 그리스도교의 주일이며, 금요일은 이슬람교의 집회일이어서 주 제도는 이미 사회 생활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계력 운동은 요일의 질서를 중시하는 문화 전통의 벽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이 달력 이야기 속에서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전통력은 양력(그레고리력)에 쉽게 밀려났지만, 그레고리력은 세계력에 밀려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전통력보다 그레고리력이 과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 보면 ‘과학적’이라는 말은 간단한 게 아닙니다. 그 말은 오히려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문화적인 것 같습니다. 천체의 움직임을 잘 반영한 것으로 따지면,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함께 고려한 우리의 전통력도 뒤질 게 없습니다. 물론 음력을 주로 하고 양력을 가미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우리는 전통력이 그저 음력인 줄로 잘못 알기도 하고, 이제 더 과학적인 양력이 있으니 음력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양력을 만든 서양인들이 세계력에 반대하고, 자신들의 문화 전통을 지키려고 한 의도까지도 과학적이라고 믿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서양인들의 전통이 끈질기듯 우리의 전통도 끈질깁니다. 음력을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심리 속에 음력의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요?

 

 

동양 철학에 대한 오해들

 

어떤 사람들은 동양 철학을 음력과 같은 옛 유물 정도로 생각합니다. 동양 철학은 골동품 같은 것이어서 나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는 태도입니다. 이것이 동양 철학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첫 번째 오해입니다. 우리는 이런 태도를 버리고 한 번쯤 진지하게 우리의 전통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를 권합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강의를 끝내고 복도로 나오는데 뒷문으로 한 학생이 급히 나오더니 쭈뼛쭈뼛 다가왔습니다. 언뜻 보니 철학과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축에 드는 학생이었습니다.

“할 이야기가 있나 보군?”

“예, 선생님. 어려운 부탁인데 말씀 드려도 될까요?”

나는 계속 걷고, 학생은 어정쩡한 자세로 따라왔습니다.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겠지만 안 들어 주면 큰일날 것 같구나.”

“저어 선생님, 이름 지어 보셨어요? 친척 분이 부탁을 해서 다음 주까지로 약속을 했는데 저는 아무리 해 봐도 안 되어서요”

“나도 우리 큰애 말고는 이름을 지어 본 적이 없는데. 우선 부르기 쉽고 듣기 좋은 게 기본이겠지.”

“선생님, 그것보다 5 행에다 획수를 따져서 짓는 것 있지 않습니까? 돌림자는 정해져 있으니까 한 글자만 찾으면 되는데요.”

학생이 어렵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끝냈을 때, 나는 부담이 없어졌습니다.

“어째서 나한테 부탁할 생각을 했지? 내 강의에서 그런 냄새가 났나?”

“아닙니다. 그렇지만 동양 철학을 하시니까 아실 것 같아서 다른 데 부탁할 데도 없고  어떻게 좀 해 주십시오.”

“그건 나도 못 하겠어. 내가 아는 방식은 자네도 할 수 있는 것뿐이야.”

학생이 복도에 서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날렵하게 방으로 들어와 버렸습니다. 미안한 마음을 전혀 느끼지 않으면서.

동양 철학을 사주, 관상, 작명과 떼어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길거리에 붙어 있는 간판 탓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동양 철학 연구자들 탓도 있을 것입니다. 유교 경전 가운데 주역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런 혐의에 빠지기 쉬운 편입니다. 요즈음은 ‘명상술’이다 ‘기공’이다 ‘단’이다 하는 유행이 일어난 덕분에 동양 철학이 더욱 신비한 것으로 눈길을 끕니다.

우리가 이 책에서 말하는 동양 철학은 이러한 유행에 관한 것이 아니며, 점이나 사주, 관상, 궁합 등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공자나 노자는 신비주의나 미신을 말하지 않았고, 만일 그랬다면 철학사에서 다루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 책의 내용을 통하여 해명될 줄 믿습니다. 여기서는 동양 철학에 대해 흔히 갖고 있는 몇 가지 오해들을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오해 1: 동양 철학은 옛 유물이다. 골동품이나 음력 같은 것이다. 나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

오해 2: 동양 철학은 점이다. 운명학이다.

사주 관상 수상 족상 궁합 작명 등등이다. 나는 심심풀이로 점을 친 적이 있는데, 아주 엉터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 경험 과학이 가진 통계적 예측력이 있을 것이다.

오해 3: 동양 철학은 심오하다. 그러나 논리적이지 않다. 무언가 이치가 있는 것 같지만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특별한 수행을 쌓은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신비한 무엇이다.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독특한 영역이 있는데, 그것은 과학이 더 발달하면 해명될지도 모른다.

 

 

 

진리는 몸으로 얻어라

 

환공이 어느 날 서재의 창가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뜰에서 수레를 손질하던 늙은 일꾼이 그것을 보고 일손을 멈추고 환공에게 말을 걸었다.

“어르신이 읽고 계시는 것은 무슨 책입니까?”

“성인의 말씀이 적힌 책이다.”

“그 성인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그러면 그 책에 쓰여 있는 것은 성인의 찌꺼기 같은 것이군요.”

환공은 벌떡 일어서며 칼자루를 잡고 말했다.

“일꾼 주제에 무례한 말을 지껄이는구나. 잘 해명하지 못하면 네 목숨은 없을 줄 알아라.”

그러자 늙은 일꾼은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제 자신의 경험에서 그렇게 생각했을 뿐입니다. 제가 만드는 수레바퀴는 너무 꼭 끼이게 하면 잘 돌아가지 않고, 너무 느슨하면 겉돕니다. 꼭 끼이지도 않고 너무 느슨하지도 않고, 손에도 마음에도 딱 맞는 그 정도를 맞추는 요령은 도저히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 아들 녀석에게도 가르칠 수가 없어 이 나이가 되도록 직접 수레바퀴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성인이라는 분도 진정한 것은 말하지 못하고 죽어 버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책에 쓰여 있는 것은 성인의 찌꺼기 같은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동양의 철학자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 말을 이 늙은 수레 제조공의 말로 이해해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도 하고 ‘몸으로 얻어야 한다’, ‘체득해야 한다’고도 하는데, 이 말을 곧장 눈감고 명상으로 들어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합니다. 또 ‘몸으로 얻어야 한다’고 해서 책을 버리고 역사 경험을 무시하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도 곤란합니다.

수레 제조공이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다’고 한 것은 많은 경험을 쌓은 뒤에 얻은 가장 미묘한 작업, 가장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동양의 철학자들은 대개 천하를 경영하는 문제를 연구 주제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사업 중에서도 큰 사업입니다.

수레 제조공의 이야기처럼 자기가 할 수는 있지만 남에게 설명하여 대신 시키기 어려웠던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해 보았을 것입니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상대방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하물며 일의 규모가 커진다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우리는 동양 철학의 역사 속에서 신비적이고 주관적인 탐구 방법을 추구한 경향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이러한 경향의 사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비판은 더 많이 있었습니다. 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을 해결하는 방법의 하나로 명상, 내성, 성찰을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일 속에서 벌어지며 일과 연관된 것입니다. 그렇게 보아야 중심 흐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노자, 장자의 도가 사상이나 선불교까지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상들은 결코 세상과 무관하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동양 철학

 

우리는 보통 ‘동양’이라는 말을 한국, 중국, 일본 등 근대화 이전에 중국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중국 문화와 다른 전통을 가진 인도를 동양에 포함시키는 데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랍 지역은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반대로 서구인들은 ‘동양(오리엔트)’이라고 할 때 맨 먼저 아랍을 떠올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서를 나눈 기준이 지중해였기 때문입니다.

일제 시대에 ‘동양학’이란 말을 쓴 것이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드는데 기여했을 것입니다. 일본은 실질적으로 중국 침략을 전제한 ‘동양학’ 개념을 만들었으므로 그 내용이 ‘중국학’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동양 철학’이라고 말할 때 언뜻 ‘중국 철학’을 떠올리는 것은 이런 이유일 것입니다.

이처럼 동양 철학이란 용어가 명료한 개념이 아니기는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 불편할 만큼 혼란스러운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이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동양과 서양의 철학적 특성을 양분하여 설명하는 논리입니다.

‘동양은 정신적이고 서양은 물질적이다. 동양은 종합적이고 서양은 분석적이다. 동양은 실천적이고 서양은 이론적이다. 동양은 윤리적이고 서양은 주지적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열거하면 할수록 동양 철학에 대한 오해는 깊어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서양 문명의 기본 논리는 이분법이어서 서양 문명이 퍼질수록 정신 분열증 환자가 늘어 가고, 이 병에는 종합적으로 생각하는 동양의 전통이 좋은 치료제가 될 것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그런데 이 말 자체가 오히려 이분법으로 보이는 것은 어떻게 해명할지 궁금합니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대개 성급하게 상대방을 설득시키려는 욕심에서 나옵니다. ‘특징만 부각시켜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달더라도 이런 설명은 해롭습니다. 정신-물질, 종합-분석, 실천-이론, 도덕-지식 등의 개념까지도 혼란 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계속 듣는데 열중할 것이 아니라 ‘종합이 무엇이고 분석이 무엇인지 설명해 보라’고 차근히 따지는 것이 유익하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 속에도 철학에 대한 제 나름의 이해가 들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동양 철학은 과거의 유산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객관적으로 과거의 사상을 복원하는 것이 연구자들의 과제라고 합니다. 동양 철학을 연구하는 목적은, 객관적이고 정확한 철학사를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과거 우리에게는 훌륭한 철학이 있었는데, 그 속에서 현대 사회의 병폐를 고칠 수 있는 지혜를 찾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양 철학을 서양 철학과 비교하여 장점을 밝히려 하고, 과거의 철학으로 현대의 사회 문제에 대하여 말합니다. 현실은 바뀌어도 철학은 바뀌지 않으며, 새로운 문제에 대한 처방도 이미 과거의 철학 속에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양 철학은 마치 알라딘의 램프와 같습니다. 책장을 넘기면 그 위대한 정신이 거인으로 변하여 ‘주인님. 무슨 문제를 해결해 드릴까요?’하며 나타납니다. 우리는 과거의 것이 이렇게 쉽게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철학은 현실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현실을 인식하고 그 토대 위에서 어떻게 살 것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문제 삼는 것은 동양 철학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철학을 공부하고, 철학 공부를 통하여 우리의 정신을 단련합니다.

우리는 동양 철학을 과거의 철학 또는 골동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동시에 과거의 철학에 이 시대의 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동양 철학을 알지 못하고 감성적으로 거부하는 태도를 비판하며, 동시에 동양 철학을 영원한 우주적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비판합니다. 이 책은 이러한 비판의 의도를 깔고 있으며, 독자들 또한 이 취지를 이해하고 읽기 바랍니다. 우리의 바람은 동양 철학을 올바른 시각에서 많은 사람들이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이 공간, 이 세상을 좀더 살 만한 곳으로 바꿔 보려는 사람들이 정신을 단련하고, 주변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재료를 제공하려는 것입니다.

 

공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어느 날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죽음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삶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느냐?”

자로가 다시 물었다.

“귀신 섬기는 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사람도 다 못 섬기는데 어찌 귀신을 말하겠느냐?”

 

공자가 제자들과 더불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도덕과 예의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부국 강변의 논리가 아니라고 받아들여 주지 않는 무도한 임금에 실망을 느끼고, 다시 자신의 뜻을 받아들여 줄 새로운 임금을 찾아가는 고단한 여행길이었습니다. 얼마를 가자 앞에 큰 강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일행 가운데 나루터가 어디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침 저 만치에 밭을 가는 두 사람이 보였습니다. 혼탁한 세상을 떠나 숨어 사는 장저와 걸닉이었습니다. 공자는 제자 자로를 불러 그들에게 가서 나루터 가는 길을 묻도록 했습니다. 자로가 두 사람에게 다가가서 나루터 가는 길이 어디냐고 묻자 장자가 되물었습니다.

“저기 수레에 올라 앉아 점잖게 고삐를 쥐고 있는 사람은 누구냐?”

“공구이십니다.”

“노나라의 공구란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그는 나루터 가는 길쯤은 알고 있을 텐데?”

장저는 더 이상 대꾸도 않고 부지런히 제 할 일만 했습니다. 답답해진 자로가 이번에는 걸닉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걸닉도 자로에게 물었습니다.

“나루터 가는 길을 묻는 너는 누구냐?”

“중유입니다.”

“공구란 사람의 제자인가?”

“예, 그렇습니다.”

“온 세상이 물처럼 거세게 흘러가는데 누가 감히 고칠 수 있단 말이냐. 그러니 자네도 나쁜 사람이나 피해 다니는 그런 공자 같은 사람을 따라다니지 말고 차라리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우리들과 같이 지내는 게 어떠한가?”

걸닉도 더 이상 자로를 거들떠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머쓱해진 자로가 돌아와서는 공자에게 그들이 한 얘기를 전했습니다. 말을 다 듣고 나서 공자가 탄식하면서 말했습니다.

“날짐승이나 길짐승과 더불어 살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내가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지 않고 누구와 더불어 살겠느냐. 온 세상에 질서가 잡혀 있다면 내가 구태여 바꾸려 애쓰지도 않을 것이다.”

 

공자가 살던 춘추 시대는 엄청난 혼란기였습니다. 그 혼란은 경제적 변화로부터 왔습니다. 당시에는 이미 주 산업인 농사에 소를 쓰기 시작했고, 새롭게 발견된 철이 농기구로 등장했습니다. 비료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고, 관개 시설이 훨씬 좋아져서 농토에 물을 대기가 쉬워졌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고도의 경제 발전을 가져왔으며 아울러 농업, 공업, 상업의 분화를 활발하게 했습니다. 이 같은 경제 발전은 토지를 잠시 점유하고 이용한다는 생각에서 토지를 영원히 소유한다는 생각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따라서 힘이 센 나라들은 더 많은 토지와 그 토지에서 일할 수 있는 더 많은 사람을 구하게 되었고, 이 욕심을 채우는 방법으로 전쟁을 택했습니다.

땅과 사람을 빼앗기 위한 전쟁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신분제를 비롯한 기존의 많은 제도를 무너뜨렸고, 그 결과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대부분의 군주들은 부국 강병을 위한 온갖 정책을 동원하여 민중으로부터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어 들이면서, 그들을 전쟁터로 내몰았습니다. 힘이 약한 나라는 금방 무너졌고, 신하들이 틈을 보아 제후를 쓰러뜨리고 땅을 나누어 갖기도 했습니다.

마치 홍수가 나서 뻘건 흙탕물이 거세게 흘러가듯 도도하게 흐르는 춘추 시대의 엄청난 사회 경제적 변화와 여기서 비롯된 어마어마한 혼란을 보면서,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살아간 사람이 공자였습니다.

그는 당시 세상을 버리고 숨어 살던 은사들, 바로 장저와 걸닉 같은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비난도 ” 아침에 온 세상에 질서가 잡혔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바람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불행한 삶에서 피어난 위대함

 

동양에 살면서 공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공자는 소크라테스, 예수, 석가와 함께 세계 4 대 성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공자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끼던 제자가 먼저 죽었을 때 정신을 잃고 통곡하기도 했고, 못된 인간들에 대해서 불같이 성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뜨거운 가슴을 지닌 사람이었으며, 아주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진리를 찾았던 사람입니다. 알고 보면 매우 친근한 느낌이 드는 사람입니다.

공자는 2500여 년에 걸쳐 인류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중심 문화였던 유가 사상의 대표자입니다. 공자는 중국 문화의 출발점이었고, 주류였습니다. 한때는 한나라에서 신격화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 사마천이 “사기”에 공자의 생애를 기록하면서 다시 인간으로 끌어내렸습니다. 공자의 위대성은 그가 성인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었다는 데에 있으며, 공자의 생각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인간 관계에서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공자는 기원전 551 년에서 기원전 479 년까지 일흔세 해를 살았습니다. 공자는 주나라의 여러 제후국 가운데 약소국인 노나라 창평향의 추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은 지금의 산동성 곡부에 해당합니다. 본래 노나라는 주나라 초기의 공신인 주공의 후손에게 주어진 땅이었습니다. 공자가 꿈에도 그리던 인물이었던 주공은 주나라의 문물 제도를 완비하여 통치 기반을 다진 사람입니다. 따라서 곡부는 비록 작은 땅이기는 해도 상당한 문화 수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자 사상의 성립은 이러한 문화적 토양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공자라고 부르는 까닭은 성이 공씨이기 때문이며, 뒤에 붙은 ‘자’자는 선생님이라는 뜻의 존칭입니다. 공자의 이름은 구였습니다. 공자의 어머니가 니구산에 빌어 공자를 가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공자의 집안은 몰락한 귀족이었고, 아버지 숙량흘은 하급 무사였습니다.

공자의 출생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자에게는 10 명이라고도 하는 많은 누나들과 몸이 성치 못한 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공자가 어른이 되었을 때 붙여진 또 다른 이름이 중니인데, 중은 둘째라는 뜻이며 니는 앞에서 말한 니구산에서 따온 것입니다.

공자의 아버지는 튼튼한 자식을 갖고 싶어서 뒤늦게 안징재라는 여자에게서 공자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때 숙량흘은 70세가 넘었고, 안징재는 나이 어린 소녀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마천은 공자의 출생에 대해 ‘야합해서 낳았다’고 하였습니다. 야합이란, 말 그대로 들에서 합쳐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이는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었음을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사생아였다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예전 학자들은 차마 공자를 사생아라고 할 수가 없어서 온갖 주장을 통해 미화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생아였다고 해서 공자의 위대성이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 점에서 더 돋보일 것입니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잃은 공자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떤 일본 학자는 공자의 어머니가 무당이었거나 아니면 잔치 자리에서 춤추는 무녀였고, 맹인이었을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행사가 있는 곳들을 찾아 다녀야 했는데, 어려서부터 공자가 맹인인 어머니 손을 잡고 잔치 자리들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일찍부터 예절에 밝았던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아무튼 공자가 어린 시절에 가난하게 자랐던 것은사실입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 정원을 관리하고 가축을 돌보는 일도 했고, 창고에서 물건을 내주고 받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가 가축을 돌보는 일을 했을 때 가축들이 살지게 잘 자랐고, 창고 출납을 맡았을 때 셈이 정확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경험은 백성들의 어려움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공자는 꾸준히 독학을 했던 것 같고, 20세 무렵부터 제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자가 살던 시대의 혼란은 주나라 초기의 굳건했던 신분제가 크게 흔들리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주나라는 농경이라는 사회적 조건이 만들어 낸 강력한 가족제를 국가에 확대 적용한 봉건제 국가였습니다. 중국은 일찍부터 농경 사회로 자리잡았습니다. 농사에는 씨를 뿌릴 땅이나 열매를 맺도록 돕는 비와 햇빛도 필요했지만, 이것은 인간이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노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농업은 많은 노동력을 요구했습니다. 많은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집단화가 필요했고, 이를 위한 가족 제도가 대가족제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만 많다고 농사가 잘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농업 중심의 대가족제는 효율적인 노동력의 통제가 중요했고, 농업 노동의 효율적 통제란 사실 대가족제의 효율적 통제였습니다. 그런데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농사 경험이었고, 가장 많은 경험을 가진 사람은 노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효율적인 통제를 위해 노인 중심의 대가족제 윤리인 종적 윤리, 즉 가부장적 윤리가 자리잡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모계 사회로부터 부계 사회로의 사회 변화도 있었습니다.

이 같은 부자 중심의 종적 윤리를 국가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 봉건제였습니다. 기원전 1100 년 무렵에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등장한 주나라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라고 불리는 종가집을 중심에 놓고서 정복한 여러 땅에 집안의 형제, 작은아버지, 조카 같은 친척이나 아니면 결혼으로 맺어진 사돈 식구들을 제후로 임명했습니다. 각각의 제후들은 자기가 받은 땅에서 다시 자기 집을 작은 종가집으로 놓고 자기의 형제, 친척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통치의 꼭대기에 천자의 친족인 종가집을 두고, 다시 그 종가집과 혈연 관계를 바탕으로 한 제후들의 작은 종가집이 있고, 또 제후들의 작은 종가집과 혈연 관계로 연결된 귀족들을 둠으로써 통치 체계 전체가 가족 관계를 이루는 강력한 지배력을 가진 국가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가족 관계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효제, 즉 부모와 자식 사이의 효와 형제들 사이의 공경을 의미하는 제가 강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시간이 갈수록 혈연 관계가 멀어지면서 점점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땅을 처음 나누어 가진 것은 형제였지만, 200-300 년 지나 10 대를 내려가서는 남과 다름없는 20촌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혈연 관계가 더 이상 힘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공자가 태어난 제후국 노나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노나라는 노나라 왕실로부터 땅을 나누어 받았던 세 명의 대부 집안이 정원을 틀어쥐고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인 계손씨가 자기 집 뜰에서 천자의 의식에서만 출 수 있는 팔일무를 추게 하는 것을 본 공자는, 더 이사 그 무도함을 참고 볼 수가 없어서 고향을 떠났습니다. 공자 나이 35세 무렵이었습니다.

제나라를 시작으로 공자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왕들을 만났고, 그 왕들이 자기의 사상을 받아들여 세상을 바로잡아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 사이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기도 했지만, 아무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고생스러운 여행길에서 불현듯 고향 생각이 난 공자는 51세 무렵 아직 익지도 않은 생쌀을 챙겨서 급히 노나라로 돌아옵니다. 아마도 노나라가 어느 정도 질서 회복 기미를 보이고 있었던 듯합니다.

고향에 돌아온 공자에게 계손씨는 지금의 법무 장관이나 대법원장에 해당하는 대사구라는 높은 벼슬을 맡겼습니다. 공자가 그 일을 맡은 지 얼마 안 가 노나라는 서서히 강력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공자가 평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뜻을 펼쳐 보이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나라가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이웃 제나라가 방해 책동을 해 공자는 다시 고향을 떠나 여러 나라를 떠돌게 됩니다. 그는 68세 무렵에 고향에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편찬하다가 몇 년 후 죽었습니다.

공자는 참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정말 사생아였는지도 모릅니다. 또 그의 어머니는 무당이거나 춤추는 여자, 게다가 맹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려서는 집이 가난하여 하찮은 직업들을 가졌습니다. 그의 외아들은 공자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더구나 그가 가장 아꼈던 제자인 안회와 자로도 공자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공자의 부인이 도망갔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논어 ‘향당’편에는 공자의 평소 생활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는 음식이 간이 맞지 않거나 반듯하게 썰려 있지 않으면서 먹지 않았고, 옷도 법식에 맞지 않으면 입지 않았으며, 자리도 반듯하지 않으면 앉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쩌면 공자의 부인이 그 까다로움을 이기지 못해 도망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공자는 무려 30여 년 동안 72 명의 임금을 만나 자신의 사상을 피력했지만 아무도 받아들여 주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중국에서 도가 실현되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가겠다고까지 했겠습니까. 그렇게 돌아다니는 동안 죽을 고비를 만나기도 했고, 굶주림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공자를 보고 당시 어떤 사람은 되지 않을 줄 알면서도 애쓰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비웃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삶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공자의 사상은 그가 남긴 책들과 그이 제자들을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공자에게는 3000 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3000 명은 과장이겠지만 아무튼 많았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새로운 지식을 갈구하여 공자를 찾아왔습니다. 어떤 이는 공자를 비난하기 위해 찾아왔다가 감복하여 제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공자가 죽은 뒤 대부분 공자 무덤 옆에서 3 년상을 지냈습니다. 그 뒤 일부가 남아서 또다시 3 년상을 지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각기 고향으로 돌아가 제자들을 길렀습니다. 바로 그 제자들에 의해 공자의 사상이 중국 각지로 퍼져 갔습니다. 이것이 공자 사상을 중국 사상의 주류로 만든 힘이었습니다.

 

 

동양의 지혜

 

공자 이전의 전적으로 국가가 틀어쥐고 있었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귀족뿐이었습니다. 이 점은 책도 마찬가지여서 민간에서는 책을 만들어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당시의 달라진 사회적 조건에 힘입어 일정한 예를 갖추고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받아들여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중국에서 처음으로 사립 학교를 세운 셈이었고, 아울러 보통 교육, 평등 교육을 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공자 학당의 교과서로는 주로 공자가 편찬한 시경, 서경, 주역, 예기 등이 쓰였습니다. 이밖에도 공자는 당시 242 년간의 역사를 ‘옳고 그름’이라는 관점으로 다시 기록한 춘추라는 역사책을 짓기도 했습니다.

공자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책은 논어입니다. 반고가 지은 “한서 예문지”에 따르면 논어는 ‘의논해서 편찬한 말’이라는 뜻입니다. 진시황의 분서 갱유를 지낸 한나라 초기에는 세 종류의 논어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제나라 사람들 사이에 전해 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나라 사람들 사이에 전해 온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공자가 살던 옛집의 벽 속에서 찾아낸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전해지는 논어는 그 가운데 제나라 본과 노나라 본을 합친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논어는 모두 20 편으로 되어 있습니다. 각 편의 이름은 첫머리에 나오는 두 글자 또는 세 글자를 따서 붙인 것입니다. 논어는 송나라 때 이르러 대학, 중용, 맹자와 더불어 4서라고 칭해졌습니다. 그 내용은 대체로 공자의 말과 행동, 공자와 제자 또는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제자의 말, 제자들 사이의 대화 등으로 이루어져 습니다.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제자들일 것으로 짐작됩니다.

한문으로 쓰여진 대부분의 동양 고전들이 그렇듯 논어도 많은 함축을 지니고 있습니다. 막스 베버는 논어를 읽으면 마치 인디언 추장의 말을 보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많이 쓰는 ‘살신 성인’이라든가 ‘극기 복례’ 같은 교훈적인 말들은 대부분 논어에 들어 있습니다. 논어는 도가 사상이 휩쓸던 위진 남북조 시대에도 노장, 주역과 더불어 지식인들이 널리 읽었고, 예전 우리 나라 승려들도 논어를 필독했습니다.

 

 

사람다운 사람

 

공자의 중심 사상은 인입니다. 논어에는 인이라는 글자가 무려 106번이나 나옵니다. 인은 보통 ‘어질다’는 뜻으로 새기지만 사실 그 풀이만으로는 공자가 말한 인의 뜻을 다 담을 수 없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인을 자비심, 인정, 박애로 해석되는Benevolence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도 마찬가지로 공자가 말한 의미를 다 담지 못합니다.

역대 학자들은 인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을 했습니다. 맹자는 ‘사람이 사는 편안한 집’이라고 했고, 주자는 ‘하늘과 땅이 만물을 만들어 내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근대 중국의 학자 강유위는 ‘사랑의 힘’이라고 했고, 호적은 ‘사람이 가야 할 길을 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밖에도 풍우란은 ‘완전한 덕’이라고 풀었고, 채원배는 ‘완성된 인격’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현대적인 어감이 아니어서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을 어떻게 새겨야 공자의 사상이 잘 표현될까요? 공자는 어떤 점에서는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비슷합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소아시아 대륙을 중심으로 한 자연 철학이었습니다. 당시 철학자들의 관심은 자연에 모여 있었으며, 그들은 만물의 본질을 자연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대표적인 학자는 만물의 본질을 물이라고 했던 탈레스 같은 사람이고, 그 밖에도 여러 사람들이 물, 불, 흙, 공기 등을 가지고 자연의 본질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이 같은 자연에 대한 관심을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돌려 놓은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비록 자신이 만든 말은 아니었지만’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명제를 제기함으로써 문제의 핵심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공자도 그 점에서 마찬가지였습니다. 공자 이전의 관심은 자연 또는 귀신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자가 문제의 중심을 인간으로 돌려 놓았던 것입니다. 이 점은 논어 ‘선진’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느 날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죽음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삶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느냐?”

자로가 다시 물었다.

“귀신 섬기는 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사람도 다 못 섬기는데 어찌 귀신을 말하겠느냐?”

 

이 대화를 통해 공자의 관심이 귀신이 아니라 사람에, 사람에서도 죽음이 아니라 삶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자가 주의를 기울였던 문제는 사람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공자가 얻은 해답이 인이었던 것입니다.

논어에 보이는 인은 대부분 공자 스스로 말한 것이거나 남의 질문에 대답한 것입니다. 어떤 경우도 철학적인 말을 쓰면서 어렵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렇게 또는 저렇게 행동하하고 했을 뿐입니다. 인은 두 이자와 사람 인자를 합쳐 놓은 것으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공자의 관심은 사람 이상이나 사람 이하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신본주의자가 아닌 인본주의자였습니다.

중용에서는 인을 ‘사람’이라고 풀었습니다. 이 말은 맹자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여기서는 그냥 사람이 아니라 ‘사람답다’는 뜻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을 ‘어질다;’로 풀어서는 의미가 제대로 살지 않습니다. 인은 ‘사람다움’이라고 풀어야 합니다. 공자의 관심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움을 실현하는 길인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공자가 추구한 사람다운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까? 공자는 사람을 4 등급으로 나누었습니다. 그중 맨 아래가 소인이고, 그 다음이 군자입니다.

논어에서는 군자와 소인을 여러 곳에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소인은 이로우냐 해로우냐를 따지는 데 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군자는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데 밝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이로움이 될 만한 일을 보면, 먼저 그 일이 옳은 일인가를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또 소인은 남들과 같아지기는 잘하지만, 남들과 어울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군자는 남들과 잘 어울리되 같아지지는 않습니다. 남과 같다면 자신의 존재 의미는 없습니다. 자신이 참다운 가치가 있다면, 자신의 역할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야 합니다. 군자는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반대로 소인은 누구라도 그 사람을 대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남들과 참답게 어울린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주체가 될 때만 가능합니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주체를 잃고 남에게 얽매인다면, 그것은 참답게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군자는 다스리는 계층, 즉 군주의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지배 계층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군자의 의미를 지배 계층이 아니라 덕을 쌓은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공자는 군자가 되려 하는 사람도 때로 사람답지 못한 짓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소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사람다운 일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소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사람다운 일을 하는 경우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군자도 항상 사람다운 것은 아니며, 군자 위에 사람다운 사람이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군자가 되기도 어려울 텐데 그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사람다운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공자는 논어 ‘이인’편에서 오직 사람다운 사람만이 정말 남을 좋아할 수도 있고 남을 미워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가 “너희들 중 죄 없는 자, 이 여인을 돌로 쳐라”고 한 말과 비슷합니다. 정말 사람다운 사람은 자신의 사리 사욕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좋아하거나 미워하더라도 치우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자는 또 사람다운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지만, 용기 있는 사람이 반드시 사람다운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의 용기는 참용기입니다. ‘진정한 용기란 아니라고 말해야 할 때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라는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분명히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겪습니다.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은 정말 그 일로 해서 피해를 입거나 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더라도, 아니라고 해야 할 자리이면 아니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참다운 용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다운 사람은 맞설 자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공자는 뜻 있는 선비와 사람다운 사람은 구차스럽게 살기 위해 사람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며, 몸을 죽여서라도 사람다움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참된 용기를 지닌 사람은 일생에 딱 한 번 죽을 뿐입니다. 그의 숨이 끊어지는 날이 정말 죽는 날입니다.

그러나 비겁한 사람은 일생 동안 두고두고 죽습니다. 그가 사람답기를 포기할 때마다 그의 존재 의미는 없는 것이며 따라서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다움이란 개인에게는 자신의 존재 이유입니다. 이처럼 인을 실천하는 일, 즉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공자가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일에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공자의 인은 사람다움을 구현하는 과정입니다. 공자는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예절을 갖추어야 무슨 소용이 있으며,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음악을 잘 연주해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답지 못한 사람들을 낮추어 개 같다, 돼지 같다 하는 표현을 씁니다.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아무리 겉이 번드르해도 아무 소용이 없으며,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아무리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만들거나 훌륭한 글을 쓴다고 해도 기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제 시대, 훌륭한 글을 쓴 사람들이 한편으로 정신대나 학도병에 지원하라고 열심히 외치고 다녔던 사실이 있습니다. 그렇게 좋은 일이고 옳은 일이라면, 남에게 권하기 앞서 자신이 먼저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임이 분명하고 또한 사람다운 행동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일이 자신의 임무이며, 죽은 뒤에나 그만둘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공자는 사람다운 사람 위에 다시 성인을 두었습니다. 사람다움의 완성이 성인인 것입니다. 논어 ‘옹야’편에 공자와 제자 자공의 대화가 나옵니다.

 

“만일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어서 모든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면,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어찌 사람답다고만 할 수 있겠느냐. 반드시 성인의 경지일 것이다. 요순도 오히려 그렇지 못할까봐 항상 근심했다.”

 

이 대화를 통해 공자의 목표가 성인에 있고, 성인이란 현실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실천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다움의 실천

 

공자는 사람다움의 출발을 부모에 대한 효와 형제간의 우애라고 보았습니다.그리고 구체적인 실천 방법으로 충과 서를 말했습니다. 먼저 효와 제를 봅시다.

공자는 부모의 몸을 받드는 것을 효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짐승도 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정성을 다해 부모의 뜻을 받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재아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3 년상이 너무 길지 않느냐고 하면서 1 년만에 상을 마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공자는 재아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게 하고서 쌀밥을 먹고 비단 옷을 입어도 편하겠는가?”

“예, 편할 것 같습니다.”

“군자가 상을 당했을 때는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맛있지 않고,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으며, 마음이 편히 안락하게 거처할 수 없기 때문에 3 년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네가 편하다면 네 생각대로 해라.”

재아가 나가자 공자는 다른 제자를 향해 말했습니다.

“재아는 사람답지 못하구나. 자식은 태어나서 3 년이 지나야 부모 품을 벗어날 수 있다. 3 년상은 세상 사람이 다 지내는 것이다. 재아도 부모에게 3 년 동안 사랑을 받지 않았는가?”

공자가 말하는 효는 인간의 감정에 기초한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야 스스로 편하기 때문에, 또 부모의 은혜에 보답해야 스스로 편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효와 제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그 실천 방법인 충과 서는 어떠한 것일까요?

어느 날 만년의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나이 어린 제자 증삼을 불렀습니다.

“삼아, 내 도는 하나로 꿰뚫어져 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공자가 나가자 다른 제자들이 증삼에게 조금 전 선생님의 말씀이 무슨 얘기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증삼이 말했습니다.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일 뿐입니다.”

증삼은 공자보다 마흔여섯 살 아래인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후에 공자의 학문을 정통으로 이은 사람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충이란 무슨 뜻일까요? 충의 본래 뜻은 국가에 충성이 아닙니다. 충은 가운데 중자 밑에 마음 심자를 붙인 것입니다. 글자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음속에 중심을 하나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반대는 환입니다. 환은 중자를 두 개 겹쳐 놓고, 그 아래에 심자를 쓴 것입니다. 즉 마음 속에 중심이 둘이나 되어서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기 때문에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충은 무엇이 옳은지를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에 전혀 흔들림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성실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제대로 다 발휘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서는 어떤 뜻일까요? 서는 같을 여자 아래에 마음 심자를 쓴 것입니다. 즉 남의 마음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배고픈데 저 사람은 얼마나 배고플까, 내가 힘들데

저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이처럼 남의 입장을 생각해 보는 것이 서입니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공자는 자식이 내게 이렇게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부모를 대하고, 반대로 부모가 내게 이렇게 해주었으면 하는 것을

가지고 자식을 대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인, 즉 사람다움의 충서의 실천이며, 충서의 실천이란 내면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다하는 일이고 밖으로는 남과의 관계에서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부모와 형제 관계입니다. 따라서 효와 제가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근본이었습니다.

 

 

‘답게’하는 정치

 

공자는 사람다움의 사회적 실현을 통해 당시의 혼란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공자에게 정치란 사람답게 되도록 바로잡는 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바로잡는 것일까요?

제나라 임금이 공자에게 정치가 뭐냐고 물었을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정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치고는 참으로 추상적입니다. 그러나 각각이 자신의 ‘다움’을 실현할 수 있도록 맡은 일을 다할 때 질서는 저절로 잡힐 것입니다. 실제 윗사람이 윗사람답게 아랫사람을 대하면, 아랫사람은 진정으로 윗사람을 섬기는 법입니다.

공자는 도둑이 많아서 걱정이라는 임금의 이야기를 듣고서 “당신이 백성들의 물건을 욕심내지 않으면, 백성들은 상을 준다고 해도 도둑질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일갈했습니다. 공자는 정치란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며, 그 질서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배 계층을 중심으로 사람됨됨이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바로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논어 ‘자로’편에 이에 대한 유명한 대화가 나옵니다.

 

위나라 임금의 초청을 받은 공자가 제자들과 더불어 위나라를 향해 가고 있을 때,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모시고 정치를 해보려 하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떤 일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명분을 바로잡겠다.”

“선생님은 사정에 너무 어두우십니다. 어째서 명분 같은 것부터 바로잡으려고

하십니까?”

“거칠구나, 자로여.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일에는 함부로 나서는 것이 아니다.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할 수 없고, 말이 순하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질 수 없고,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문화가 일어나지 못하고, 문화가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적절할 수 없고, 형벌이 적절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데가 없다.”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선생님이라는 호칭만큼 좋은 말도 드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가 교육자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서 선생님이라는 호칭도 값이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선생이라고 부르게끔 되었습니다. 그뿐인가요. 선생님의 부인을 부르는 호칭인 사모님은 제비족들도 애용하는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말의 인플레입니다. 호칭이 바르지 못하면 그런 호칭을 가진 사람의 말이 권위가 없어집니다. 말이 권위를 잃으면 그가 한 말대로 그런 문화에 바탕을 둔 법이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피해는 마침내 대다수 민중이 입게 된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법이나 힘으로 강제해서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덕과 예절로 바로잡으려 했을 뿐입니다. 공자는 정치와 형벌로 이끌면 백성들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처벌만 피하면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지만, 덕으로 이끌고 예절로 다스리면 백성들이 부끄러움을 알게 되기 때문에 벌주지 않아도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는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실정법 만능 사회에서 양심에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법에만 저촉되지 않으면 죄인이 아닙니다. 공자는 법에 앞선 도덕을 말했으며, 실천에서는 윗사람이 모범을 보일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윗사람의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더라도 아래서 행하지만, 윗사람의 몸가짐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명령을 내리더라도 따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물론 공자의 생각에는 당시의 시대적 한계 때문에 귀족제를 옹호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 사상의 가치는 보편적인 인간의 도덕성을 강조한 데 있습니다. 공자는 사회 관계가 사람 사이의 신뢰에 바탕을 둔다고 생각했습니다.

섭나라 임금이 공자에게 자기가 다스리는 어떤 마을에서 아버지가 남의 양을 훔쳤는데 그 아들이 증인을 섰다고 하면서 자기 나라 백성들의 정직함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 마을의 정직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숨겨 주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 줍니다. 정직이란 바로 그 속에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논어 ‘안연’편에 보이는 제자 자공과의 대화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정치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경제를 풍족하게 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백성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세 가지 중 어쩔 수 없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하시겠습니까?”

“국방을 포기하겠다.”

“둘 가운데 다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하시겠습니까?”

“경제를 포기하겠다. 예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이지만 믿음이 없으면 아예 사회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서로간의 믿음을 바탕으로 각각의 역할을 다하는 사회, 이것이 공자가 바란 대동 사회였습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실천

 

공자 사상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동양에서의 영향은 한나라 때부터 유학을 공부한 사람들을 등용한 정책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특히 송나라 때 성리학이 나오고, 주자가 해설을 붙인 4서와 5경이 과거 시험의 기본 교과서가 되면서부터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공자의 영향은 동양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라이히바인은 공자 사상이 18세기 서구 계몽 사상을 뒷받침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중국에서도 문화 혁명기 동안 비판 받았던 공자가 개혁 개방과 더불어 다시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 일본, 싱가폴, 대만, 홍콩처럼 유교 문화권에 들어 있는 국가들의 수준 높은 자본주의적 발전을 보면서, 유고가 비록 전근대에서 나온 사유체계이기는 하지만 자본주의에도 여전히 이바지할 점이 있다고 주장하는 유교 자본주의론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공자 사상은 봉건제 사회의 군제 군주제를 합리화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어 왔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현대에서도 계층간의 질서를 강조함으로써 사회적 모순을 감추고 경제적 지배를 확고히 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이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공자 사상의 가치는 인문 정신의 극치라는 점에 있습니다. 그의 사상은 신본주의가 아닌 인본주의였습니다. 공자에게는 인간다움의 회복을 통해 사회 혼란을 바로잡으려는 열정이 있었고, 그 열정이 교육을 통해 열매맺음으로써 오늘날까지 인류의 도덕 의식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또한 공자 사상은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이데올로그들이나, 이론을 좀더 치밀하게 다듬어 낸 이름난 사상가들에 의해 맥을 이어 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답게 살려고 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실천을 통해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역사 속에서 쉼없이 이어져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실천이 자기 마음 속의 만족 외에 달리 보상받는 것이 없다는 점에 공자 사상의 비극이 들어 있습니다. 공자 사상에는 내세가 없습니다. 따라서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는 대답밖에 들을 수 없습니다.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흉노에게 항복하여 포로가 된 장군 이릉을 변호하다가 남자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을 받은 사마천은, 그가 지은 “사기”를 통해 유교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비극적인 면을 잘 드러내 보였습니다. 사람다움을 실천함으로써 사람다움을 이루었다고 공자가 극찬한 백이 숙제에 대해, 사마천은 옳은 일을 하고도 불우한 삶을 살았다고 평가했습니다. 또 공자의 가장 뛰어난 제자 안회는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던 반면, 이름난 도적 도척은 온갖 못된 짓을 다하면서도 수천의 부하를 거느리고 부귀 영화를 누렸다고 썼습니다. 이런 예를 들면서 사마천은 하늘의 도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라는 문제 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점이 바로 유교의 낙관주의에 대한 비판인 셈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공자 사상의 강점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이 결과적으로 내게 이로울 것인가 해로울 것인가를 따지지 말고, 오직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라는 것이 공자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옳다면, 비록 그 일을 하다 해를 입을 지라도 꼭 해야만 하는 것이 사람다움을 이루는 길입니다. 공자 사상에는 행위에 대한 인과응보가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당위가 있을 뿐입니다. 그 당위는 사람이 마땅히 갖는 책임이나 사명 의식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그 당위를 따라간 많은 실천들은 굽히지 않는 비판 정신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우리 나라 학자들은 전통적으로 학문의 정통 맥을 사림파에 두었습니다. 그 까닭은 사림파가 앎과 실천을 일치시켜 간, 옳고 그름에 따라 행동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한말 의병 운동이나 항일 무장 투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현대식 화력으로 무장한 외세와 맞서 싸우면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다만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이처럼 보상을 바라지 않는 실천이 공자 사상의 알맹이입니다.

 

 

노자: 인생의 보배를 간직하라

 

모기가 물어 대면 밤새 잘 수가 없다. 지금 인의 도덕을 말하는 것은 귀찮게 인심을 어지렵혀 혼란만 더하는 것이다. 백조는 매일 목용하지 않아도 희고, 까마귀는 매일 물들이지 않아도 검다. 하늘은 저절로 높고, 땅은 저절로 두껍고, 해와 달은 저절로 빛나고, 별은 저절로 늘어서 있고, 초목은 본래 종류가 여럿이다. 거기에 다시 인의를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것은 마치 북을 두드려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과 같다.

노자와 장자의 사상은 제가 백가 가운데 도가 학파를 이루었습니다. 도가는 특히 공자와 맹자가 대표인 유가 사상과 대결하였습니다. 유가와 묵가의 싸움, 유가와 도가의 싸움, 유가와 법가의 싸움 등으로 이어진 전국 시대의 논쟁은 진한대를 거치면서 정이 과정에 들어갑니다. 평등의 이념을 강하게 내세웠던 묵가는 거의 자취를 잃었고, 유가는 법가 등 여러 학파의 이론을 흡수하면서 지배 이념으로 자리잡습니다. 또한 노장 사상은 민간의 주술적 신앙과 결합한 도교에 이용되면서 변형된 형태로 대중 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립니다.

그러므로 진나라의 통일 이후 중국 역사에서 유가와 도가는 중국 사상의 커다란 두 흐름을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교는 지배층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잡고, 도교는 민중의 의식 속에 ‘잡초와 같은 철학’으로 살아 남은 것입니다. 그러나 노장 사상은 단지 민간에서만 살아 남은 것이 아니라 지배 계층에서도 읽혔기 때문에 전국 시대에 나온 어떠한 학파의 저술보다 다양하게 해석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자”의 저자인 가장 인물 노자는 신비화되고, 도가 학파의 상징적 존재가 됩니다. 특히 도교에서는 노자를 높이 받들어 중국 민중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게 됩니다. 우리가 ‘대륙적 기질’이다 ‘허허 실실’이다 ‘외유 내강’이다 하는 용어를 쓸 때, 그 의미는 노자의 사상과 연관이 깊은 것입니다.

 

 

고전 중의 고전

 

맹자라는 책은 맹자의 사상을 담고 있고 순자라는 책은 순자의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 노자라는 책도 노자라는 인물의 사상을 담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노자라는 인물은 맹자나 순자만큼 행적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 인물의 전기가 사마천의 “사기”에 들어 있는데, 이 기록에서 이미 노자는 전설적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먼저 노자의 성명을 이이라고 해 놓고, 다시 초나라 사람 노래자나 주나라 역사학자 담이란 인물이 노자일지도 모른다고 하여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노자의 나이가 160세 또는 200세라는 소문이 있다고 기록하여 노자를 신선처럼 여기게 하였습니다.

“사기”의 다른 기록에 비하여 노자에 관한 기록은 매우 못미덥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노자의 전기를 거의 의심합니다. 예를 들어, 공자가 젊은 시절 주나라 도서관 관리자로 있던 노자에게 ‘예’를 물으러 갔다는 이야기나,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노자는 직책을 사임하고 길을 떠났는데 그 도중에 관문의 경비 책임자 윤희라는 사람의 간절한 요청을 못 이겨 도덕에 관한 책을 상하편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신빙성이 없습니다.

이 기록에 나오는 ‘도덕에 관한 책 상하편’이 바로 “노자”라는 것인데, 지금 학자들은 이 책이 대개 기원전 350 년에서 200 년 경 사이에 집단 작업으로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이렇게 되면 공자와 같은 시기에 공자보다 선배였던 노자가 “노자”라는 책을 쓴 것이 아니게 됩니다. 노자에게 예를 물으러 간 공자가 노자로부터 ‘교만하게 나서서 설치지 말라’는 내용의 주의를 듣고 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노자를 용과 같은 위대한 인물이라고 말했다는 대목도 논란이 많습니다.

중국 고대에는 족보책 두꺼운 집이 양반이라는 식의 논리가 통하여서, 자기학파가 오랜 전통을 가졌다는 것으로 학파의 우월성을 증명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묵가는 우임금, 유가는 요순, 도가는 황제를 끌어와 연원이 갚음을 경쟁하였습니다. 노자가 공자보다 선배라는 이야기도 이러한 사고 방식에서 만들어진 허구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지금 노자라는 책을 지은 사람과 노자라는 인물에 대해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다만 노자라는 책을 초기의 도가 사상을 연구하는 자료로 삼을 수 있을 뿐입니다.

지금의 “노자”는 81개 장, 5000자가 조금 넘는 분량이며, 각 장은 대개 짤막한 운문체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노자”를 ‘노자 도덕경’이라고 부르는데, 제1장에서 제37장까지가 상편으로 ‘도경’이고, 제38장에서 마지막 제81장까지가 하편으로 ‘덕경’이 된다는 것입니다. 제1자의 첫 문장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로 시작하고, 제38장의 첫 문장은 “최상의 덕은 스스로 덕이 있다고 여기지 않으니, 이 때문에 덕이 있는 것이다”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중국 장사라는 곳에 있는 한나라 때 고분에서 나온 책은 이것과 배열이 다릅니다. 장사 마왕퇴 고분은1972 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하였고, 이때 2000여 년 전의 여자 미이라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굴되어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1973 년 2 호, 3 호 묘를 계속 발굴하였는데, 3 호 묘에서 나무 조작에 쓴 글, 비단에 쓴 글이 나왔고 여기에 의학책과 “노자” 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마왕퇴 고분에서 나온 “노자”는 비단에 쓰여 있기 때문에 ‘백서 노자’라고 합니다. 백서 노자에는 상하편의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자”는 원형이 이루어진 뒤에도 다시 정리되고 개정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노자”의 문장은 시구처럼 아름다우면서 내용이 의미 심장하여 기이한 책으로 아려졌습니다. 도교와 불교가 성행하던 시기에 노자, 장자, 주역을 ‘삼현’, 즉 깊은 이치를 담고 있는 세 책으로 높였습니다. 그 때문에 도가 사상가들뿐 아니라 유가와 불교 쪽에서도 “노자”를 연구하고 주석을 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노자”를 일관되게 해석하는 데 어려움을 주기도 하지만, 하나의 책이 이처럼 여러 입장의 사람들에게 주목받았다는 것은 그 책의 무게를 알려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공자의 도와 노자의 도

 

큰 도가 사라지니 인의가 나오고 지혜가 생겨 큰 거짓말이 있게 되었다. 가까운 친척이 서로 화목하지 않자 효도니 사랑이니 하는 말이 생기고, 국가가 혼란하니 충신이 나오게 되었다.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온 천하에 미치게 하면 천하가 태평해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공자가 강조한 도덕은 큰 도가 무너지고 가정이 불화하며 나라가 어지럽게 된 뒤에 그것을 수습하려는 것이었지만, 노자는 그것을 큰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갔을 때 노자는 이렇게 말하였답니다.

 

모기가 물어 대면 밤새 잘 수가 없다. 지금 인의 도덕을 말하는 것은 귀찮게 인심을 어지럽혀 혼란만 더하는 것이다. 백조는 매일 목욕하지 않아도 희고, 까마귀는 매일 물들이지 않아도 검다. 하늘은 저절로 높고, 땅은 저절로 두껍고, 해와 달은 저절로 빛나고, 별은 저절로 늘어서 있고, 초목은 본래 종류가 여럿이다. 거기에 다시 인의를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것은 마치 북을 두드려 잃어버린 양을 찾은 것과 같다.

 

공자는 주나라의 통치 질서가 무너져 신하가 임금을 몰아내고,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빼앗는 사태를 보고, 주나라의 예법을 회복하기 위한 도덕 의식 개혁 운동에 몸바쳤습니다. 노자는 공자의 이런 노력이 백성들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하는 모기와 같다고 보았습니다.

노자는 잃어버린 양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북을 치면서 찾으면 양이 있는 곳을 더욱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만물을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큰 도를 찾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노자는 “마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유가의 도덕 규범은 그들이 지어낸 도일 뿐, 진정한 도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천지는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만물을 추구로 여긴다. 성인은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백성을 추구로 여긴다.

 

‘추구’는 풀로 만든 강아지인데, 제사 때 만들어 쓰고 아무데나 버립니다. 이 주장은 유가에서 “하늘의 뜻은 인이다”, “성인은 인의 실현자다” 하고 말하는 것을 비판한 것입니다. 노자의 도는 인간에 대하여 어떤 자애의 감정을 가진 존재가

아니며, 인간의 일에 대하여 무정하고 냉담합니다.

도는 공평 무사하여, 선인이니 악인이니 아름다우니 추하니 하는 인간적인 기준들에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가에서 ‘지성이면 감천’ 또는 ‘인자 무적’이라 하여 하늘이 착한 사람을 편드는 것처럼 말하지만, 노자의 도는 인간의 바람이나 기대에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착하다 악하다 하고 구분한 것도 도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노자의 도는, 악하다고 비난받는 사람이 잘살고 착한 사람이 고생하는 것에 대하여 인간적인 정의감을 발동하여 분노하고 벌을 내리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도의 형상, 도의 작용, 도의 속성

 

큰 덕의 모습은 도와 같다. 도는 오직 황홀하기만 하여 그 형상을 분간해 인식할 수 없다.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그 속에 물이 있다. 잡을 수도 없는 그 속에 형상이 있다. 도는 아득히 멀고 그윽이 어둡기만 한데, 그 속에 정기가 있다. 그 정기는 지극히 진실하다. 그 속에 믿음이 있다.

 

혼합하여 이루어진 것이 있는데, 천지보다도 먼저 생겼다. 고요히 소리도 업소 형체도 없다. 짜고 없이 홀로 있다. 언제나 변함이 없다. 어디나 안 가는 곳이 없건만은 깨어지거나 손상될 위험이 없다. 그것은 천하 만물의 어머니가 될 만하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저 부르는 이름이 ‘도’이다. 억지로 이름붙여 ‘큰 것’이라 한다.

 

보려 해도 보이지 않으니 ‘이’라고 한다.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니 ‘희’라고 한다. 손으로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으니 ‘미’라고 한다. 이 세 가지는 마로 밝힐 수 없다. 그래서 뒤섞어서 ‘하나’라고 한다. 그것은 위가 더 밝지도 않고, 아래가 더 어둡지도 않다. 긴 끈처럼 꼬여서 이어져 있으니 이름 붙일 수가 없다. 결국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간다. 이것을 꼴 없는 꼴이라 하고, 실체 없는 형상이라고 한다. 이것을 황홀이라고 한다.

 

도는 일을 낳고, 일은 이를 낳고, 이는 삼을 낳는다. 만물은 음기를 겉에 가지고 야기를 안에 간직하며, 충기로 조화를 이룬다

 

천하 만물은 유에서 나오고, 유는 무에서 나온다.

 

도는 비어 있는 듯하나 그 작용은 가득 찬 듯 또는 아닌 듯하다. 깊고 아득하여 만물의 근원이며, 맑아서 있는 듯 없는 듯하다. 나는 그것이 누구의 자신인지 모른다. 하느님보다 먼저인 듯하다.

 

도는 혼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이고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이지만 사람의 감각으로 느낄 수 없고,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 ‘황홀’하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표현들을 보면 노자는 남들이 말하지 않았던 무엇을 본 듯하고, 그것에 ‘도’라는 이름을 붙이면서도 이름 붙이기를 몹시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이 명확하지 않아 우리가 그 뜻을 분명히 이해하고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글 속에 철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인격신인 ‘상제’에 대한 관념을 바꿔 놓는 내용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자연’이란 말로 도의 성질을 나타내 도가 무한하고 객관적인 존재라고 한 것입니다.

중국 고대에는 자연계의 운행도, 인간 세상의 사건도 모두 상제의 의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왕은 상제의 뜻을 받아 지상을 지배하는 하늘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왕을 천자라고 하였습니다.

천자는 상제에게 제사를 올리고, 상제의 뜻을 받들어 정치를 시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 제사를 게을리하거나 상제의 뜻에 어긋나는 정치를 하면 상제는 가뭄과 홍수, 그 밖의 천재 지변으로 왕에게 벌을 내립니다. 개인의 경우일지라도 사람답지 못한 행위를 한 자는 천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노자의 도는 인간적인 감정이나 의지가 없습니다. 인간의 기대나 의지에서 독립하여 존재합니다. 도란 인간의 역사에 관여한다고 믿어 온 상제를 부정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면서 만물의 근원입니다. 감각에 들어오는 만물은 총괄하여 ‘있는 것’에서 나옵니다. ‘있는 것’은 인간의 감각에 잡히고 인간이 이름 붙일 수 있는 한정된 것입니다. 도는 인간이 한정할 수 없는 존재, 이름 붙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성격이 무한한 것,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한 성격을 무’라고 하였습니다. 도는 또한 다른 것에 의존하거나 무엇에서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립’한다고 하고, 그러한 성질을 ‘자연’이란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도가 크고 하늘이 크고 땅이 크고 인간도 크다. 우주 안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인간이 그 하나를 차지한다. 인간을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고,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

 

노자에서 말하는 ‘자연’이란 우리가 ‘자연 과학’ 혹은 ‘자연 보호’라고 할 때의 ‘자연’과 전혀 다른 뜻입니다. 노자의 자연은 대상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도의 상태와 성질을 나타낸 말입니다. 글자 그대로 ‘저절로 그러하다’, ‘스스로 그러하다’, ‘본래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도가 다른 것에 의존하여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어떤 존재의 영향도 받지 않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노자는 세계를 설명하는 범위를 넷으로 크게 나눈 다음 그 사이에 단계를 두었습니다. 인간과 땅과 하늘은 결국 도를 본받지만, 도는 더 이상 본받을 것이 없고 스스로 그러한 존재입니다. 다만 인간은 언어, 지혜, 기교를 씀으로써 도의 자연에 거슬리고 어긋나는 행위를 한다는 것입니다. 노자의 사상은 이 도 개념을 근거로 유가를 비판하면서 정치와 인생에 독특한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노자의 정치론

 

나라는 작고, 백성 수는 적어야 한다. 온갖 도구가 있지만 쓰지 않게 하며 백성들이 중시하도록 하면, 살던 곳을 버리고 멀리 옮겨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배나 마차가 있어도 탈 필요가 없고, 갑옷과 무기가 있어도 쓸 일이 없다.

노끈을 묶어서 글자 대신 쓰던 고대의 소박한 상태로 되돌아가게 하면, 먹는 그대로 맛있고 입는 그대로 아름답고 사는 그곳이 편하다고 여기고 그 풍속을 즐겨서, 이웃 나라가 바라보이고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가 없을 것이다.

 

총명과 지혜를 끊어 버리면 백성의 이익이 백 배로 늘어날 것이다. 인과 의 같은 도덕을 끊어 버리면 백성들이 옛날처럼 효성스럽고 자애롭게 될 것이다. 정교하고 편리한 물건들을 없애 버리면 도적이 없어질 것이다. 이 세 가지 소극적 방법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외모는 수수하고 마음은 소박하게 하며, 이기심과 욕망을 줄이게 한다.

똑똑한 사람을 높이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이 다투지 않게 만든다. 얻기 힘든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이 도적질하지 않게 한다. 욕망을 일으킬 만한 것을 보여 주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혼란시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우며, 의욕을 줄이고 뼈를 튼튼히 하여 늘 백성들이 무지하고 욕심이 없게 만들며, 지식인들이 제멋대로 주장할 수 없게 만든다. 무위로 다스리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천하는 불가사의한 그릇이어서 인위적으로 어찌할 수 없다. 잘하려고 애쓰면 실패하고, 꽉 잡고 장악하려 하면 천하를 잃고 만다.

 

언뜻 보면 원시적 자연 부락의 생활로 되돌아가자는 주장을 하고, 백성들을 아무 생각이 없고 그저 배부르면 좋은 ‘행복한 돼지’로 만들려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노자의 ‘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이 말들을 새기면, 단순히 원시 사회로 돌아가자거나 우민 정치를 해야 한다는 주장만은 아닙니다. 이 말들이 겨누고 있는 현실 상황은, 생산력의 발달로 주나라의 종법 제도가 무너지면서 옛 귀족과 새롭게 신분 상승을 꾀하던 신흥 지주 사이에 이익 다툼이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나온 여러 가지 정치적 이론들이 서로 논쟁하면서 직접 일하지 않고 지식을 밑천으로 살아가는 계층이 인기를 얻고 확대되어 간 상황입니다.

노자는 학자라는 자들이 학파를 만들고 서로 논쟁하는 것이 천하를 위하여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옳고 그름도 각기 달라 혼란만 더 한다고 본 것입니다.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맬 때 길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선 잘못 들어섰다고 생각되는 지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천하를 평안하게 할 방도를 놓고 이론이 분분하여 어느 도가 올바른 도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노자는 이미 잘못 들어선 길을 포기하고 원점으로 돌아와서 생각하자고 주장합니다. 노자는 이러한 입장을 이론화하였습니다.

노자는 만물의 근원인 도의 성질이 ‘저절로 그러함(자연)’이듯이 인간을 다스리는 정치의 도는 ‘무위’, 즉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인위적으로 계획하고 조장하고 간섭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가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정치를 한 요순 임금은 ‘남쪽을 향하여 앉아 있는 것’으로 천하를 평안히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을 ‘남면의 통치술’이라고 하는데, 임금이 자기 자리에 앉아 완전한 인격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들에서 일하는 백성들까지도 착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자가 말하는 ‘무위’는 유가의 도덕적 모범과 다른 뜻입니다. 노자의 도는 유가의 도덕과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위’의 통치술을 좀더 설명하면, ‘요점’이란 곧 노자의 ‘도’이며, 그것은 저절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천하를 천하에 맡기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저절로 그러한 것을 따르지 않고 사사건건 간섭하여 바로잡아 주는 것은 도를 잃었다는 증거입니다. 노자는 정치를 생선 굽는 일에 비유하여, 자꾸 이리저리 뒤적이면 생선이 다 부숴지고 타 버리는 것과 같이 정치가 백성들에게 끼어들수록 천하는 뒤죽박죽이 된다고 합니다.

도가 천지 만물에 대하여 인정 사정이 없는 것처럼 ‘무위’의 정치도 백성들에 대하여 인정 사정이 없습니다. 무위의 이 ‘공평 무사’라는 관념은 나중에 법가 사상의 법 개념에 영향을 미칩니다. 법가는 지위와 신분을 따지지 않고 인정 사정 없이 법을 적용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법가의 법이 국가의 이익을 가치 기준으로 삼은 반면, 노자의 무위는 백성들의 본래 그러한 삶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백성의 본래 그러한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 노자의 정치입니다.

 

큰길은 넓으나 백성들은 샛길을 좋아한다. 관청은 깨끗하게 지였으나 논밭은 황무지가 되었고, 창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데 권력자들은 종은 옷을 입고 고급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밤마다 연회를 열어 음식이 싫증날 정도이다. 그러고도

재물은 남도록 가졌으니, 이것은 도둑질하여 사치에 쓰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도가 아니다.

 

무위의 정치는 통나무와 같은 자연 상태를 유지하여야 하고, 어쩔 수 없어 관청에 기구를 설치하더라도 가능한 한 기구를 축소하여 자연 상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야 위태롭지 않다고 합니다. 놀고 먹는 자가 많거나 일하는 사람보다 감독자가

잘사는 것은 거꾸로 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점을 지키는 정치를 가리킨것입니다.

 

정치가 너그럽고 간섭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순박해진다. 정치가 자질구레한 구석구석까지 감시하면 백성들은 불만을 품게 된다.

 

최고 수준의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가 있다는 것만 알게 할 뿐이다. 그 다음 수준의 통치자는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고 칭송을 듣는다. 그 다음 수준은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그 아래는 백성들이 그를 경멸한다.

 

노자의 이러한 정치론은 현대 사회의 정치와 매우 거리가 먼 주장입니다. 인류 역사가 흘러온 방향과도 맞지 않으며, 기본적으로 인간의 계획과 노력의 가치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노자의 무위의 정치는 ‘예측할 수 있는 정치’나’위로부터의 개혁’ 같은 방법과 180 도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노자의 ‘대도’라는 것은 전제 군주의 교묘한 통치술의 모습을 띠기도 합니다.

 

장차 그것을 축소시키려면 먼저 그것을 확장시켜야 한다. 장차 그것을 약화시키려면 먼저 그것을 강화시켜야 한다. 장차 그것을 없애려면 먼저 그것을 진흥시켜야 한다. 장차 빼앗고자 하면 먼저 주어야 한다. 이러한 것을 은미한 지혜라고 한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긴다. 그러므로 강한 물고기가 부드러운 물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국가를 이롭게 하는 수단을 백성들이 보게 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노자의 ‘대도’는 전제 군주의 비밀 정치를 옹호하고 군주의 통치술에 의존한 정치만을 논하였으며, ‘대도’ 자체가 매우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민주적인 논의와 제도적 장치를 통한 합리적 통치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정치론은 전제 군주를 위한 ‘제왕학’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원초적 인간의 모습

 

호사스런 생활을 즐겼던 중국의 어떤 왕은 한끼 식사에 200가지 반찬을 놓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우리는 어쩌면 고대의 제왕들보다 더 잘 먹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중국의 왕이라 해도 아르헨티나에서 생산된 바나나 북태평양에서 잡아온 참치를 먹지는 못했을 것이고, 브라질산 커피의 맛은 몰랐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중국의 왕들이나 특별한 사람들만이 볼 수 있었던 책을 손쉽게 구해서 읽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노자라는 책을 그런 성격이 강합니다. 노자에서 말하는 도와 덕은 일반 백성들을 위하여 말해진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그 시대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왕이 된 기분으로, 노자가 인생을 어떻게 강의하였는지 살펴봅시다.

 

최고의 덕을 가진 사람은 의식적으로 덕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래서 덕이 완전하게 나타난다. 수준이 낮은 사람은 의식적으로 덕을 얻고자 하며, 또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안달한다. 그래서 덕이 완전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최상의 덕은 덕을 얻고자 애쓰지 않고 또한 그것을 바깥으로 자랑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낮은 덕은 덕을 얻고자 애쓸 뿐 아니라 그것을 바깥에 나타내어 남에게 과시하려 한다.

 

높은 덕은 오히려 골짜기처럼 낮아 보이고, 넓은 덕은 부족한 것처럼 보이고, 꾸준한 덕은 불건전한 것 같아 보이고, 진실한 덕은 변하기 쉬워 보인다.

 

정말로 덕을 지닌 사람은 갓난아이와 같다. 갓난아이는 무지하고 무심하므로 독충도 찌르지 않고 맹수도 덤벼들지 않고 사나운 짐승도 발톱을 대지 않는다. 뼈는연약하고 근육은 부드러우나 꽉 움켜쥔 주먹은 단단하다. 아직 남녀의 성교도 모르는데 고추는 서 있다. 정기가 최고로 충만해 있다는 증거이다. 하루 종일 울부짖어도 목이 쉬지 않는다. 자연과의 조화가 최고로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자연의 도를 따르는 사람은 총명하고 지혜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덕은 자연의 도가 인간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최고의 덕을 지닌 인간이 곧 본래 모습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사람은 어린이이와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지혜와 총명은 이러한 본래 모습을 해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혜는 도의 입장에서 보면, 단순한 장식물에 지나지 않고 인간을 어리석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지식과 분별심이 발달하고 나서 인간의 기교에 의한 큰 거짓이 나타났다.

 

안다는 것이 사물의 실상을 아는 게 아님을 아는 것은 최상의 지혜요, 안다는 것이 사물의 실상을 아는 게 아님을 모르는 것은 착오다. 착오를 착오로서 자각하는 그것에 의해 비로소 착오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도를 체득한 사람은 착오에 빠지지 않는다.

 

인간은 분별하고 순서와 등급을 매기고 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자기 위주로 생각하게 되어 자연스런 덕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그러한 자연의 세계를 인간의 잣대로 평가하면서 사람들은 원래 없던 것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만물을 창조한 인격적 존재 같은 것을.

 

제나라의 전씨가 저택 뜰에서 어떤 사람의 송별회를 열었다. 손님이 1000 명이나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 물고기와 기러기를 선물로 가져온 사람이 있었다. 전씨는고마워하면서 말했다.

“아, 하늘의 은총은 참으로 깊도다. 인간을 위해 오곡을 만들고, 물고기와 새를 길러 인간에게 쓰이게 해 주시는구나.”

둘러선 손님들이 입을 모아 전씨의 말에 찬동하였다. 그때 포씨의 열두 살짜리 아들이 나서며 말했다.

“당신의 말을 틀렸습니다. 천지 만물은 모두 우리들과 같은 동료입니다. 동료들 사이에 귀천의 차별은 없습니다. 다만 크고 작은 차이, 지혜와 힘의 차이에 따라 서로 잡아먹고 있을 뿐이지, 다른 것에게 소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제멋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을 잡아먹을 따름이지 하늘이 인간에게 먹이기 위해 그것들을 만든 것은 아닙니다. 모기나 파리 떼가 인간의 피를 빨고 호랑이와 늑대가 동물들을 잡아먹는다고 해서, 하늘이 모기와 파리를 위하여 인간을 만들고, 호랑이와 늑대를 위해서 동물들을 만든 것은 아닙니다.”

 

원초적 인간의 모습은 서로 평등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누가 누구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자는 더 나아가 가장 도에 가까운 인간은 물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에게 큰 이익을 주면서도 자기를 주장하여 다투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장소에 머무르고 있다. 그래서 도의 본래 모습에 가깝다.

 

만들어 내고도 소유하지 않으며, 일을 하고도 공로를 자랑하지 않으며, 윗자리에 있으면서도 마음대로 간섭하지 않는다. 이것을 ‘심원한 덕’이라고 한다.

 

원초적 인간은 평등한 관계일 뿐 아니라 이기적이지 않고 양보하며 겸손하다고 합니다. 노자는 ‘원수를 은혜로 갚으라’고 하였는데, 공자는 ‘은혜는 은혜로 갚고, 원수는 정의로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노자는 세상에서 말하는 악이란 ‘선이 결핍된 상태’를 말하는 것일 뿐이고, 도는 선과 악을 갈라서 악을 박멸하자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악을 박멸하겠다는 강직한 태도를 갖는 것은 죽음의 무리라고 하였습니다.

공자는 ‘사람의 삶은 본래 곧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노자는 사람의 삶이 본래’부드럽고 약한 것’이라면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부드럽고 약하며, 죽음에 가까울수록 단단하고 강해진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나 새싹처럼 부드럽고 약한 것이 삶의 본래 모습이며, 이것을 지키려고 한 것이 노자의 철학입니다.

 

 

인생의 무게를 지키는 방법

 

정말로 흰 것은 언뜻 보면 물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큰 사각형은 각이 보이지 않는다. 큰 그릇은 완성이 더디다. 큰 소리는 귀에 들리지 않는다.

 

정말로 똑바른 것은 마치 굽어 있는 것 같고, 정말로 능란한 것은 마치 몹시 서투른 것 같고, 진정한 웅변은 오히려 말주변이 없는 것 같다.

 

원초적인 삶의 모습을 잃고 세상이 지혜와 총명의 격전장으로 변해 갈 때, 진정한 인생의 무게를 지키려는 사람은 먼저 통속적인 가치를 뒤집어서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을 세상 속에서 실현할 특별한 방법이 필요합니다.

 

수컷의 강함을 알고 암컷의 약함을 지켜 가면, 온갖 냇물이 모여드는 계곡이 된다. 그러면 도가 몸에서 떠나지 않고, 무심한 갓난아이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영광이 무엇인지를 다 안 다음에 치욕의 입장을 지켜 가면, 만물을 포용하는 골짜기가 된다. 그러면 도가 완전히 그 몸에 실현되어, 인공이 가해지지 않은 통나무같이 자연 그대로의 소박한 상태로 되돌아간다.

 

세상에서 물만큼 부드럽고 약한 것이 없지만, 단단하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 물을 능가하는 것이 없다.

 

재주의 날카로운 칼끝을 누르고 마음의 이해 타산을 버리고 지혜의 빛을 감추고 속세의 먼지 속에 묻혀 산다. 이것이 도와 일체가 된다는 것이다.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운동 모습이며, 약하고 부드러운 것이 도의 작용 방식이다.

 

모든 현상은 세계의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자식이다. 모든 현상의 근원인 도를 알아야 그 자식인 사물을 알고, 그래야 일생을 통해 불행이나 재난을 만나는 일이 없는 것이다.

 

노자는 어린아이나 새싹처럼 부드럽고 약하게, 물처럼 겸허하게, 골짜기처럼 포용력 있게, 통나무처럼 본래 모습을 지키는 것, 즉 근원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인생의 무게를 간직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장자는 세속적 가치를 버리고 나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은 반면, 노자는 분명하게 우리에게

행동 지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성적이고 수동적이며,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가치들로서 어떤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데, 노자는 이것으로 분열된 세상의 거짓으로 치닫는 도도한 흐름을 잠재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노자는 자기의 방법을 세 가지로 요약하였습니다. 첫째 포용하여 사랑할 것, 둘째 요점을 단단히 지킬 것, 셋째 천하의 앞에 나서지 말 것입니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물러서는 것이 전진하는 것이다.’ 이런 노자의 말이 모택동의 유격 전술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국민당의 초토화 작전에 밀리면서 모택동 군대는 2 만 5000리 대장정에 올랐습니다. 그때 유격 전술의 전법은 ‘적이 공격해오면 달아난다. 적이 쉬고 있으면 괴롭힌다. 적이 후퇴하면 쫓아간다’였습니다. “한비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송나라의 한 시골 사람이 가공하지 않은 옥돌을 주워 대신인 자공에게 선물로 바치려 했다. 그런데 자공은 극구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나이가 자공을 만나 말했다.

“이것은 값비싼 보물입니다. 대신 같은 고귀한 분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지 우리 같은 천한 자들이 가질 물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째서 거절하시는 겁니까?”

자공이 대답했다.

“자네는 옥돌을 보배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것을 받지 않는 것을 보배라고 생각하네.”

 

노자의 철학에서는 세상에서 추구하는 가치들이 모두 값진 것이 아닙니다. 명예나 권력이나 돈이나 모두 쓸데없는 것들입니다. 노자가 추구한 것은 공자처럼 도덕을 닦아 훌륭한 인격을 완성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인격도 남들의 입방아에 날리는 쭉정이 같은 것입니다. 노자가 보배라고 생각한 것은 기본적인 생명의 욕구, 자연스러운 생명 활동을 완전하게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끝으로 인생의 본래 모습을 지키며 살다 간 노자의 독백을 들어 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치 진수 성찬이라도 받아 놓은 듯 신바람이 났네.

화창한 봄날 정자에 올라 꽃 구경이라도 하듯이. 그러나 나만은 담담하고 조용하고 마음이 동하는 기미도 없네.

마치 아직 웃을 줄도 모르는 갓난아이처럼.

마치 아주 지쳐 돌아갈 집도 없는 강아지처럼.

사람들은 무엇이든 남아돌 만큼 가지고 있지만.

나만은 모든 걸 잃어버린 것 같네.

아, 나는 바로 같구나. 아무것도 모르고 멍하니.

세상 사람들은 똑똑한데, 나는 그저 멍청할 뿐.

남들은 딱 잘라 잘도 말하는데, 나만은 우유 부단, 우물쭈물.

흔들흔들 흔들리는 큰바다 같네.

쉴 줄 모르고 흘러가는 바람이네.

 

 

묵자: 약자를 지키는 방패

 

만일 당신이 무슨 일 때문에 어디론가 떠난다고 해 보자.

맡은 임무가 위험하고 길이 험해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면, 당신은 처자식을 어떤 사람에게 맡기겠는가? 자기 가족이나 다름없이 당신 가족을 돌봐 줄 사람에게 맡기겠는가. 아니면 당신 가족보다 자기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에게 맡기겠는가?

 

초나라에 공수반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천민 출신인데도 기술이 뛰어나서 대부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공수반은 아무리 높은 성에도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구름까지 닿을 만큼 높은 사다리에 제작해 놓고 송나라를 공격하려 했습니다. 제나라에 있다가 이 소식을 들은 묵자는 발에 물집이 잡히도록 꼬박 열흘을 걸어 초나라로 왔습니다.

“선생은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오셨습니까?”

“북쪽 지방에 사는 어떤 사람이 나를 귀찮게 하는데, 당신이 그 사람을 없애 주었으면 합니다.”

이 말을 들은 공수반은 아주 불쾌해 했습니다.

“그렇게 해 주면 천금을 드리지요.”

“나는 의기가 있는 사람이라서 남을 죽이지 않습니다.”

묵자는 마음속으로 비웃으면서도 겉으로는 탄복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수반에게 두 번 절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듣자하니 당신이 구름 사다리를 만들어 송나라를 공격하려 한다던데 송나라가 무슨 죄를 지었나요? 땅과 백성이 남아돌 정도로 많으면서 땅도 좁고 백성도 적은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더구나 죄 없는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어질지 못합니다. 지혜롭지도 어질지도 못한 일임을 알면서도 임금에게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고, 잘못임을 지적하면서도 임금을 끝내 설득하지 못한다면 강직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한 사람도 죽일 수 없다고 하면서 왜 많은 송나라 사람을 죽이려 합니까?”

묵자의 말을 들은 공수반은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하지만 이미 구름 사다리 공격 계획을 왕에게 보고한 뒤라 이제와서 취소할 수는 없다고 난감해 했습니다. 묵자는 공수반과 함께 초나라 왕을 만났습니다.

묵자가 왕에게 말했습니다.

“좋은 것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남이 가진 보잘것없는 것을 훔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도벽이 있는 사람이겠지요.”

“제가 보기에 넉넉하고 풍요로운 초나라가 가난하고 약한 송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도벽과 다를 게 없습니다. 더구나 임금께서는 포악하다는 비난만 듣게 될 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수반은 내게 구름 사다리를 만들어 주면서 반드시 송나라를 이길 수 있다고 장담했소.”

묵자는 허리띠를 끌러 원형으로 둘러 놓고 그 안에 들어가선 다음 품속에서 첩이라는 이상한 도구를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공수 반더러 모형 구름사다리를 이용해 공격해 보라고 했습니다. 공수반이 아홉 가지 방법을 써서 공격했지만 묵자는 다 막아냈습니다. 공수반의 공격 기술이 바닥이 났는데도 묵자에게는 아직 쓰지 않은 방어 기술이 여러 남아 있었습니다.

공수반이 묵자에게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내가 선생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알기는 하지만 말하지 않겠소.”

“나도 당신이 얘기하는 그 방법이 무엇인지 알지만 얘기하지 않겠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왕이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그 방법이라는 게 도대체 뭡니까?”

“공수반의 생각은 저를 죽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만 죽여 없애면 송나라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 송나라에서 제가 훈련시킨 제자 300 명이 이 도구로 무장한 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를 죽여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초나라 왕은 공격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화는 묵자의 사상을 잘 나타내 줍니다. 또 묵자가 매우 실천적인 인물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묵자가 살던 때는 강대국들이 약한 나라를 집어 삼키는 겸병 전쟁이 극심하던 시기였습니다. 대다수 약소국들은 엄청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큰 나라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민중들의 고혈을 짜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여야 했으며, 성을 쌓거나 직접 전쟁에 나가 싸우는 일 또한 민중의 몫이었습니다.

묵자는 대다수 피지배 민중과 약소국의 편에 섰습니다. 그는 강대국과 지배 집단을 향해 서로 사랑하고 함께 나누라고 외쳤습니다. 묵자가 주장한 것은 정치적 평등과 경제적 평등이었습니다. 당시로 볼 때 묵자의 주장은 가히 혁명적이었으며, 그는 민중의 편에 가장 가깝게 선 사상가였다고 하겠습니다.

 

 

피지배층의 대변자

 

묵자는 성이 묵이고, 이름은 적입니다. 공자, 맹자, 순자, 노자, 장자는 잘 알려져 있지만 묵자는 약간 생소한 느낌이 듭니다. 묵자는 태어난 나라도 불분명하고, 태어나고 죽은 해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대체로 공자보다 조금 뒤, 맹자보다 조금 앞이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사마천의 “사기”에도 묵자는 아주 간단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묵자의 사상이 지배층에게 반가운 사상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묵자의 성이 본래 묵씨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묵’자에는 검다는 뜻이 있고, 또 붓글씨 쓸 때 사용하는 먹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어떤 학자는 그가 묵형이라는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묵씨라 불렸다고 말합니다. 우리 나라 조선 시대에도 도둑질을 하면 얼굴에 ‘도’자를 문신처럼 새겨 넣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주나라에서는 지배층은 형벌로 다스리지 않았고, 피지배층만 형벌을 가했습니다. 그렇다면 묵자는 형벌로 다스려지는 하층민이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또 어떤 학자는 묵자의 피부가 검었기 때문에 묵씨라 불렸다고 합니다. 오늘날 노동자를 블루 칼라라고 부르듯이, 피부가 검다는 것은 그가 노동을 하는 계층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아무튼 묵자는 피지배 계층이었던 것 같습니다. 묵자의 주장 속에 먹줄 같은 노동 도구들이 비유로 많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생각을 하게 해줍니다. 또한 그의 사상을 따른 그룹이 대부분 하층 무사 집단이나 기술자 집단이었던 점도 묵자의 출신 계층을 짐작하게 합니다. 공자가 기술자 집단이었던 요임금과 순임금을 높인 것과, 달리, 묵자는 황하를 다스리는 데 공이 컸다는 우임금을 높였습니다. 이 점도 묵자가 기술과 효용을 중시했음을 보여줍니다.

묵자도 처음에는 공자의 학문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곧 공자를 배격하고 새로운 주장을 세웠습니다. 공자의 사상이 지배 계층을 중심으로 한 것과는 달리 묵자의 사상은 일관되게 피지배 계층을 옹호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묵자 사상은 피지배 계층의 엄청난 호응을 받아 공자 이후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맹자가 “세상에 양주와 묵적의 주장이 가득 찼다”고 한탄한 것을 보면, 당시 묵자의 영향력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한비자, 순자, 장자 같은 책에서도 ‘유묵’이라고 하여 유가와 묵가를 나란히 놓고 있습니다.

묵자는 뛰어난 기술자였고, 많은 도구들을 개발했습니다. 한 번은 그가 3 년 동안 공들여 만든 정교한 연을 하늘에 띄워 놓고, ‘하루 걸려 만든 수레보다 쓸모가 없구나’ 하고 개탄했습니다. 묵자는 그런 점에서 철저한 공리주의자였습니다. 묵자가 만든 도구 가운데는 전쟁 무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공격 무기가 아닌 방어용 무기였습니다. 묵자가 만든 방어용 무기들은 약소국 제후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그래서 그는 송나라의 대부 벼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묵자의 사상을 볼 수 있는 책이 “묵자”입니다. “묵자”는 본래 71 편이었다고 하는데 18 편이 없어져서 오늘날에는 53 편만 남아 있습니다. 묵자 자신이 쓴 글도 있지만 대부분은 제자들이나 후대 사람들이 썼다고 합니다. 대화체로 된 글도 있고 논문 형태의 글도 있습니다. 주목되는 것은, 방어 위주의 병법이 11 편에 걸쳐 서술되어 있는 것과 6 편이 논리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 점입니다. 특히 논리학적 내용이 담긴 6 편을 묶어 ‘묵변’이라고 부릅니다. 이 밖에도 “묵자”에는 수준 높은 고대 과학 기술의 성과가 들어 있습니다. 도구 제작에 관련된 기하학, 빛의 굴절 등에 대한 광학적 분석 등도 보입니다.

묵자는 춘추 전국 시대의 다른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사상을 펼쳐 보려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힘있는 제후들은 대부분 그를 반기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은 그가 비천한 계층 출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이 사상이 지배층의 이익을 위한 부국 강병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민중을 옹호한 묵자의 사상은 진나라에 의한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어 가면서 약해지기 시작했고, 통일 이후 중앙 집권적 전제주의가 강화되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묵자 사상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청나라 고증학자들에 의해서이며, 오늘날 중국에서는 사회주의와의 유사성에 초점을 맞추어 활발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강철 같은 조직

 

묵자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집단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집단의 우두머리는 거자라고 불렸는데, 거자는 구성원을 죽이거나 살릴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남자”라는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묵자를 따르는 무리가 180 명인데, 그들은 우두머리의 명령이 떨어지면 불 속에 들어가는 일이건 칼날을 밟고 서는 일이건 절대 주저하지 않을 사람들이다.

 

또 “사기”에서도 묵가 집단의 무사들은 말이 믿음직하고 용감하며,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고, 몸을 아끼지 않고 위험에 뛰어들었다고 했습니다.

묵가 집단의 초대 지도자가 바로 묵자였습니다. 묵가 집단은 거지를 뽑을 때 선임 거자가 지명하기도 하고, 때로는 집단 구성원들이 직접 선출하기도 했습니다. 집단 구성원들은 대부분 하층민이었으며, 하급 무사나 기술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집단적 결속을 통해 자신들이 처한 예속적 지위를 벗어나려 했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엄격하게 통제되었습니다. 그들은 비좁은 방에서 살았고, 기둥에 조각을 하거나 벽을 화려하게 꾸며서는 안 되었습니다. 음식은 흙으로 빚은 그릇에 담긴 옥수수나 조밥, 그리고 국 하나뿐이었습니다. 옷도 여름에는 베옷, 겨울에는 사슴 가죽만을 입어야 했습니다. 노래나 오락은 철저히 금지되었고, 장례도 얇은 관 하나만 가지고 검소하게 치러야 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금욕적인 규율을 철저히 지켜야 했고, 오로지 남을 위해 일해야 했습니다. 규율을 어겼을 때는 조직으로부터 엄한 벌을 받았습니다. 구성원 중 누가 어떤 나라에 가 벼슬을 하면 봉록의 일부를 집단에 바쳐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벼슬자리에 있다가 묵가 집단의 금기 사항인 공격 전쟁에 참가했다 하여 거자로부터 소환당하기도 했습니다.

묵가 집단의 엄격한 조직력을 잘 보여 주는 일화를 두 가지 소개하겠습니다.

 

진나라의 복돈이 거자를 맡고 있을 때 그의 아들이 살인죄를 저질렀다. 복돈은 나이도 많은데다가 대를 이을 사람이라곤 아들 하나 뿐이었다. 진나라 혜왕이 복돈에게 말했다.

“당신은 늙었고 또 외아들이니 죄를 감해 주겠소.”

“묵가의 법에 따르면 남을 죽인 자는 죽어야만 하고, 남을 해친 자는 벌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온 세상의 대의입니다. 나는 묵가 사람이니 묵가의 법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복돈은 이렇게 대답하고 자기 아들을 처형하였다.

 

거자 맹승은 형나라의 양성군과 아주 가까이 지냈다. 양성군은 맹승에게 성을 지켜 달라고 부탁하고 왕의 장례에 참석하러 갔다가,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돌아오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망명해 버렸다. 그러자 형나라에서는 양성군의 땅을 몰수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맹승은 양성군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면서 묵가 집단에게 성을 사수할 것을 명령했다.

한 제자가 반론을 제기했다.

“우리가 여기서 모두 죽는 것은 양성군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안되고, 그러다간 묵가 집단이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묵가의 지휘권은 송나라에 있는 전양자에게 계승할 것이니 묵가가 끊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양성군과의 약속을 어긴다면 앞으로 그 누구도 묵가 집단과 약속을 하지 않을 것이다.”

맹승은 이렇게 말하며 그대로 싸울 것을 명령했다. 그 말을 들은 제자는 자기 잘못을 깨닫고 자결했고, 맹승과 그 부하들도 모두 전사하였다. 전양자에게 거자 자리를 넘겨 준다는 맹승의 서신을 전하러 간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서신을 전하고 나서 전양자에게 말했다.

“저희는 이제 다시 돌아가 싸우다 죽겠습니다.”

전양자가 그들을 말렸다.

“이제는 내가 거자이니 내 말을 들으시오.”

그러나 두 사람은 극구 돌아가서 자결하고 말았다(그러나 이 두 사람이 보인 행동은 후대 묵가들에 의해 거자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잘못된 행동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한자어에 묵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철저하게 끝까지 지킨다는 뜻인데, 이 말은 묵가 집단의 이러한 행동 양식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묵가 집단에는 하급 무사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보통 군인과는 달랐습니다. 보통 군인이라면 어떤 전쟁이든 가리지 않고 참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묵가 집단에게는 오직 강자의 횡포로부터 약자를 지키는 방어 전쟁만이 의미 있는 전쟁이었습니다. 또 보통 군인들에게 군인이란 지위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직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묵가 집단에게는 군인 생활이 자신들의 철학을 실현해 가는 실천이었습니다. 일반 군인들은 누구를 위한 싸움인가를 따지지 않고 오직 이기겠다는 생각에만 머물러 있었지만, 묵가 집단은 전쟁의 윤리를 승화시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철학으로 높여 갔습니다. 이 점은 묵자와 공수반의 대화에서 잘 나타납니다.

묵자는 자신의 사상을 인과 의라는 말로 자주 표현하였습니다. 어느날 공수반이 이를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해전에서 상대방의 배를 잡아당기는 갈쿠리와 상대방의 배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밀어내는 밀대를 만들었습니다. 선생은 걸핏하면 인이니 의니 하는데 선생이 떠드는 인의에도 내가 만든 갈쿠리나 밀대 같은 것이 있소?”

“내가 만든 갈쿠리와 밀대는 당신이 만들어 낸 것들보다 더 훌륭하지요. 나는 사랑을 이용해서 남을 끌어들이고, 겸손을 이용해서 남을 막아냅니다. 사랑이 아니면

남들이 당신을 가까이하지 않고, 겸손이 아니면 당신에게 대들게 되지요.”

평범한 기술자의 논리와 묵가 집단의 논리가 어떻게 다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군인이나 기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철학자들이었으며,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강철 같은 조직의 동지들이었습니다. 사실 묵가 집단의 결속은 그들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던 셈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이익을 나누자

 

묵가 집단을 이렇게 강한 힘으로 결속시키고 끌고 나간 철학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 철학의 핵심은 겸애와 교리였습니다. 겸애는 서로 사랑하자는 뜻으로 정치적인 평등의 요구였고, 교리는 서로 이익을 나누어 갖자는 의미로 경제적인 평등의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겸애가 이루어지면 교리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묵자는 겸애의 반대를 별애라고 했습니다. 겸애가 무차별적인 사랑이라면, 별애는 차별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면 묵자는 무엇으로부터 겸애 철학을 끌어냈을까요? 앞에서 말했듯이 묵가 집단에는 하급 무사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학자는 묵자의 무차별적인 사랑 철학이 바로 이 하급 무사 집단의 행동 양식에서 온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군인들이 전쟁을 한다고 해 봅시다. 특히 묵가 집단처럼 방어 전쟁을 할 때 성벽에 둘러서서 적을 맞아 싸우는데, 성의 어느 한쪽이라도 무너지는 날이면 결국 다같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편 누구 하나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며, 서로 사랑으로 아끼고 돕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바로 이 같은 극한 상황에서 동고 동락하던 체험을 철학화한 것이 겸애라는 주장입니다. 묵자는 겸애란 자기를 위하듯 친구를 위하고, 내 부모를 위하듯 친구의 부모를 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차별적인 사랑이라면 자신을 위하듯 친구를 위할 수 없으며, 내 부모를 위하듯 친구 부모를 위할 수 없게 된다고 했습니다.

묵자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증명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무슨 일 때문에 어딘가로 떠난다고 해 보자. 맡은 임무가 위험하고 길이 험해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면, 당신은 처자식을 어떤 사람에게 맡기겠는가? 자기 가족이나 다름없이 당신 가족을 돌봐 줄 사람에게 맡기겠는가, 아니면 당신 가족보다 자기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에게 맡기겠는가?

 

묵자는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공격하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못살게 굴고, 많은 수를 가지고 적은 수를 괴롭히고, 귀한 자리에 있는 자가 천한 자리에 있는 사람을 함부로 부리고, 교활한 자가 어리석은 사람을 이용해 먹는 것은 모두 차별적인 사랑 때문이라고 하면서 이 모두를 겸애, 즉 무차별적인 사랑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묵자는 맹자의 표현처럼 “머리부터 발꿈치까지 갈아 없어진다 해도 그렇게 해서 세상에 이로울 수 있다면 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실천해 나갔습니다. 바로 묵자의 이러한 사랑을 가리켜 겸애라고 하는 것입니다.

묵자는 자기를 위하듯 남을 위하고, 자기 나라를 위하듯 남의 나라를 위한다면, 온 세상이 이로워져서 결국 그 이익이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묵자 사상의 이런 점을 가리켜 공리주의라고 합니다. 사실 묵자의 이런 생각은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이성에 호소한 것입니다. 본래 인간의 감정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따라서 감정에 기초한다면 남보다는 나를, 남의 부모보다는 내 부모를, 남의 자식보다는 내 자식을, 남의 나라보다는 내 나라를 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위입니다. 그러나 묵자는 그같은 차별애가 사회 혼란을 가져오고, 급기야는 자신에게도 해가 된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따져 보자고 했습니다.

묵자는 따져 보는 기준으로 세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첫째, 옛날부터 훌륭한 임금이라고 전해오는 사람들이 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백성을 위해 힘썼던 사람들입니다.

둘째, 백성들이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들이 참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구체적인 정책이나 제도를 통해 어떤 효용이 나타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결과가 국가와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는가, 아니면 해가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묵자가 제시한 세 가지 기준은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피지배계층의 입장에 판정의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이처럼 논리적인 묵자의 주장을 피지배 계층이었기 때문에 문화적 훈련을 쌓을 기회가 적었던 대다수 묵가 집단 성원들이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묵자는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하늘의 뜻을 끌어왔습니다. 하늘의 뜻이 모든 백성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데 있기 때문에, 통치자 역시 백성들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치자가 하늘의 뜻을 잘 따라 모든 백성을 사랑하면 하늘이 상을 주고 복을 내리지만, 안 그러면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고 주장했습니다. 미신적인 이야기처럼 들리지요? 그러나 ‘하늘의 뜻’은 묵자가 자신의 사상을 실현시킬 목적으로 빌려온 것일 뿐입니다. 묵자 사상에서 하늘은 종교적 외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점은 뒤에서 보겠지만 묵자가 운명을 부정하고 사치스런 장례나 제사를 반대하는 데서 잘 나타납니다.

묵자는 무차별의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적 힘인 강력한 통치자의 규제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강력한 통치는 전제 군주의 막강한 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인 무차별의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묵자가 강력한 군주의 통치를 말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묵자는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기준이 다르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제각기 자신의 기준이 옳다고 고집한다면 혼란이 올 수밖에 없겠지요.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마을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을 뽑아 우두머리로 삼고, 그의 결정을 마을 사람 모두가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을들이 모인 큰 부락에서는 각 부락의 우두머리 가운데 가장 현명한 사람을 뽑아 지방의 우두머리로 삼자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 나가면 천자는 온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될 것이며, 그가 진정 현명하다면 그의 뜻은 하늘의 뜻과 같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의 뜻에 따라 통치하는 천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묵가 집단들이 그들의 우두머리인 거자의 명령에 철저하게 복종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제도의 반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묵자의 사상에는 당시 춘추 전국이라는 엄청난 혼란 속에서 중앙 집권의 강화를 통해 혼란을 종식시켜 보려는 바람이 숨어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묵자의 사상은 집단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유가 비판

 

묵자 사상은 매우 합리적이며 실용적입니다. 이런 점은 유가에 대한 비판 가운데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 유묵이라고 병칭된 이유는 두 사상 사이에 대결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묵자는 사람의 죽으면 장례를 후하게 지내고 상복을 입는 기간도 긴 유가의 예제를 반대했습니다. 그 까닭은 장례가 너무도 화려해서 마치 이사가는 사람 같으며, 이것이 재산을 탕진하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 3 년 동안 상복을 입고 일을 안 하기 때문에 산업이 부진해지고, 그 동안은 아이도 안 낳기 때문에 인구가 감소해서 정의의 전쟁에 필요한 사람이 부족해진다는 것입니다.

둘째, 묵자는 유가의 악, 즉 음악을 연주하거나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악기를 만들고 음악을 연주하려면 많은 시간과 돈이 들지만, 생기는 이익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시 사회적 조건에서 화려하게 장사지내고 음악을 들으면서 춤과 노래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지배층뿐이었으며, 묵가 집단은 그런 생활을 할 수 없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묵자가 화려한 장례나 음악과 노래, 춤을 반대한 것은 지배 계층의 특권을 부정한 것이며, 그 까닭은 이런 일들이 모두 피지배 계층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묵자는 철저한 공리주의자였습니다.

셋째, 묵자는 운명론을 반대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명을 하늘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천명이라고 불렀습니다. 천명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지만 그 중 운명적 요소가 강하게 들어 있었습니다. 묵자는 자기가 운명을 반대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여 열심히 일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본뜻은 세습에 의한 차별성을 반대한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당시 사람들은 일찍 죽을 것인가 오래 살 것인가, 세상이 평안할 것인가 혼란할 것인가, 부자가 될 것인가 가난할 것인가 등을 모두 운명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귀족으로 태어나 귀족 신분과 부를 세습하는 것 또한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묵자는 운명이란 포악한 임금이 만들어낸 궁색한 자기 변명이며, 나아가 백성을 속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운명이란 것을 본 사람이 없을 뿐더러, 세상 모든 일은 운명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고, 운명을 믿으면 노력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큰 해악을 일으킨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가장 큰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세습적 신분제에 반대했습니다. 지배층이 항상 귀한 것이 아니며 피지배층이 끝내 천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인재를 쓸 때 차별을 철폐하라고까지 주장하였습니다.

넷째, 묵자는 유가가 하늘과 귀신이 있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신령스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유가에서 말하는 하늘은 모든 것을 낳은 생명의 근원이자 도덕의 뿌리였습니다. 그러나 묵가의 하늘은 겸애의 실시 여부를 살피는 감독의 기능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보았듯이 상과 벌로 평가 결과를 보이는 것입니다. 이는 묵가의 합리성에 비추어보면 맞아떨어지지 않는 주장이지만, 묵자가 자신의 주장에 무게를 싣기 위해 ‘신령한 하느님’을 활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반전 평화론

 

춘추 전국 시대의 혼란은 이기심에서 왔습니다. 이기심은 본질적으로 차별적인 사랑을 낳으며, 차별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 자기 집안, 자기 나라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묵자는 지배 집단의 차별적 사랑 때문에 생간 침략 전쟁의 물결을 거슬러서 무차별적 사랑에 기초한 전쟁 반대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사실 묵자의 전쟁 반대론은 겸애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을 반대한다고 외치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구호도 작은 실천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묵가 집단은 그러한 전쟁에 맞서는 방어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고, 방어를 위한 무기들을 새롭게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어떤 학자는 묵가 집단의 이런 모습을 가리켜 방어전을 위한 전쟁청부업이라고 했습니다.

묵자가 전쟁을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전쟁이 파괴적이고 비생산적이며,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묵자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전쟁을 벌이는 지배 집단을 도둑에 비유했습니다. 남의 집에 들어간 좀도둑이 처벌을 받는 것과

달리 남의 나라를 침략한 큰 도둑은 오히려 칭찬을 받는다고 비난했습니다. 또 죄 없는 사람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고 열 사람을 죽이면 인간 백정이 되는데, 전쟁을 일으켜 수만 명을 죽인 자는 도리어 영웅이 되니 어쩐 일이냐고 했습니다.

침략 전쟁을 막기 위한 묵자의 노력은 첫머리에 소개한 일화에서 보았듯이 눈물겹습니다. 묵자는 그 밖에도 제나라 임금을 설득하여 노나라에 대한 침략을 막았고, 초나라 임금을 설득하여 정나라에 대한 공격을 막았습니다. 묵자의 전쟁 반대 의지는 그만큼 강했던 것입니다.

 

 

꿈으로 남은 묵자 철학

 

묵자 철학은 중국 고대 철학 가운데 피지배 계층의 입장에서 가장 가까이 선 철학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억압과 수탈을 일삼는 지배 계층을 향해 똑같이 사랑하라고 외침으로써 정치적 평등을 확보하려고 했고, 서로 나눠 갖자고 주장함으로써 경제적 수탈에 대항했습니다. 백성들에게 아무런 이익도 주지 못하는 지배층의 음악, 노래, 춤을 반대했고, 화려한 장례를 반대했습니다. 현실적인 지배를 운명이라고 합리화시키는 지배 논리에 맞섰고, 강자의 영토 확장 욕구를 채우기 위한 침략전을 막기 위해 직접 무기를 만들고 싸우기까지 했습니다.

묵자의 사상은 지배층 누구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통일의 기운이 한곳으로 모이지 않았을 때는 많은 약소국들이 묵자의 뛰어난 방어전 기술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묵가 집단을 유지시키는 사회적 조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력 균형이 깨져 몇몇 강대국 중심으로 세력이 재편되면서부터 묵가의 영향력은 약해지기 시작했고,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왕권이 안정되자 묵자 사상은 완전히 소멸하고 묵가 집단도 없어졌습니다. 다만 그 뒤로는 협객들의 집단, 즉 의적 같은 비밀 결사들을 통해 명맥을 이어 나갔을 뿐입니다.

묵자 사상이 소멸된 원인은 다른 사상과의 관계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묵자 사상이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을 때 맹자는 묵자를 맹렬하게 비난했습니다. 맹자는 묵자의 겸애가 자기 아버지와 남의 아버지를 똑같이 사랑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 아버지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공격하였습니다. 묵자의 유가 비판에 대한 유가의 대응이었던 셈입니다. 사실 묵가와 유가 사이의 이러한 대결 의식은 묵가가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는 동안 끝없이 이어졌지만, 그 당시는 정부의 통제 밖에 있는 자유로운 대립이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를 이러 중국을 평정한 한나라는 유가

이론을 통치 원리로 받아들였습니다. 따라서 묵자의 철학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묵자에게는 서로 사랑하고 함께 나누는 사회에 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묵자의 사상은 2500여 년 전이라는 상황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혁명적 사상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

묵자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집단을 만들었고, 강자에 맞서 싸우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묵자는 혁명을 꿈꿀 수는 없었습니다. 이 점은 그의 사상에 혁명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 점은 그의 사상에 혁명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묵자가 피지배 계층에 의한 혁명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공격 전쟁을 의미하게 되고, 공격 전쟁은 겸애에 어긋나는 것이니 스스로 자기 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 점이 묵자의 꿈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내부적 요인입니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 같습니다. 묵자 사상은 사회주의는 아니지만 사회주의와 많은 유사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 전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을 보았습니다. 사회주의는 인간의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면서, 헌신적인 자기 희생과 꿋꿋한 도덕성을 바탕으로 유지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인간 내면에는 또 다른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이기심입니다. 사회주의는 강한 조직력과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여 지탱되었고, 경험과 실천이 그 사회의 추동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직력에 틈이 생기고, 그 틈을 이기적인 욕구 뚫고 나왔을 때 사회주의는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묵자도 이성에 호소함으로써 묵가 집단을 강철 같은 대오로 이끌어 갔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하늘의 뜻이라는 외피도 있었지만, 주된 동력은 이상 사회에 대한 갈망과 꿈이었고, 이를 통해 내적 성실성과 아울러 외적인 배척력을 함께 가질 때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즉 팽팽한 긴장이 강한 단결력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혼란의 종말은 지배 집단의 몰락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강화시켰습니다. 혁명 이론이 없는 묵자의 철학이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지탱될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그러한 틈을 이기적 욕구가 그대로 놓아둘 리도 없었습니다. 결국 2500여 년 전 중국의 획기적인 사상은 꿈으로 남았던 것입니다.

 

 

장자: 광활한 정신 세계의 끝없는 이야기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뒤지고, 궤짝을 여는 도둑에 대비하려면 반드시 끈으로 묶고, 자물쇠를 채워야 한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현명함이다.

그러나 큰 도둑은 궤짝을 쥐고, 상자를 들고, 주머니를 들려 메고 달아나면서 오히려 끈과 자물쇠가 약해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현명함이란 결국 큰 도둑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 아닐까?

몇 해 전에 어느 대학의 철학과 2 학년생들에게 ‘노장 철학’을 강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노장 철학은 노자와 장자의 철학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고, 노자와 장자는 중국 고대 도가 사상의 대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노자와 장자의 철학을 똑같은 철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도 있고, 노자나 장자라는 인물이 어디서 무엇을 한 사람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개 “노자”와 “장자”라는 책을 중심으로 강의를 하게 됩니다. 그때 한 여학생이 “장자”를 읽고 써낸 독후감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지금 기억에 남아 있는 대로 일부분을소개합니다.

 

아프리카에는 양과 닮은 스프링 복이라는 야생 동물이 있답니다. 그놈들은 수백, 수천 마리씩 떼를 지어 풀밭을 찾아 다니는데, 풀밭을 만나면 뜯어먹고 다 먹으면 또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풀밭이 있어도 계속 달리는 경우가 있답니다. 그건 앞쪽에서 풀을 죄다 뜯어먹어 버려 먹을 게 없어진 뒷놈들이 앞에 가는 놈들을 밀어붙이기 때문이랍니다.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점점 더 빨라져 새로운 풀밭이 나타나도 먹지 못하고, 떼를 지어 계속 달리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한꺼번에 몰살하는 수도 있답니다.

장자의 눈으로 우리 현대인들을 본다면, 바로 이 스프링 복이라는 양떼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우리는 날마다 바쁘게 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토록 바쁘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고, 대부분은 이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장자와 함께 산에 오르면 이런 대화를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저 아래 차들과 사람들을 보게. 분주히 무엇인가를 쫓아 다니지 않는가. 저들이 무얼 찾고 있는지 알겠는가?”

“저 사람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며,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여 바쁘게 뛰고 있습니다. 벌건 눈으로 권력과 명예와 부와 사치 향락을 쫓는

자들도 있겠지만, 저나 선생님처럼 실업자가 되어 산기슭이나 어슬렁거리는 것보다는 부지런히 살아가는 게 좋지 않습니까?”

“답을 모르면 모른다고 할 것이지 왜 딴소리를 하는가. 나도 실업자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은 아닐세. 그건 그렇고 나는 저 사람들이 저렇게 바삐 찾아다니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네. 저들은 매우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게 분명해. 그러니까 열심히 찾아다니는 것 아니겠나. 그런데 저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이제 자기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아.”

 

 

우리가 잃어버린 것: 도

 

도는 길입니다. 길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다니면 길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이 길을 넓히지, 길이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길 아닌 곳으로 가면 가시 덩굴이나 진흙탕에 빠져 고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길로 가야 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가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도리입니다. 요즈음은 인도보다 차도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사람이 갈 길에 차들이 점점 쳐들어와 인도가 차도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도를 잃어 가고 있습니다.

공자가 말한 인도는 ‘효제 충신’이었습니다. 공자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윗사람을 공경하며, 스스로 최선을 다해야 하고 남을 미더워야 한다. 이 인도를 잘 닦으면 어진 사람이 된다. 어진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이고, 남과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남의 감정과 고통과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는 인도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은 모든 도덕의 근원이다.’

차는 사람이 몰고 가는 것이므로 차도도 결국 인도입니다. 공자는 어진 사람이면 차를 타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바람이 치는 날 막 뒤집힐 듯한 우산을 요리조리 가누면서 인도로 걸어가는 사람과 자가용 뒷자리에 편안히 앉아 음악을 들으며 차도로 가는 사람을 상상해 봅시다. 얼마나 불공평합니까? 그러나 공자는 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이 걸어가는 사람에게 흙탕물을 튀기지 않도록 주의하는 정도의 배려만 있다면 이런 불평등은 문제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자는 길을 넓히는데 반대하지 않으며, 때로는 새 길을 만들 수도 있다고 합니다.

장자는 공자의 말이 그럴듯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속임수라고 합니다. 사람다운 사람은 차도로 가도 좋고 길을 넓힐 수도 있다는 공자의 말은, ‘사람다운 사람’의 이름을 빌린 인간들이 길을 넓힌다는 명목으로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것을 옹호해 주고, 가난한 백성이 부역과 전쟁에 동원되어 가족과 떨어져 객지에서 죽고 마는 상황을 합리화시켜준다고 장자는 생각하였습니다. 공자가 군대(군사력), 식량(경제력), 백성들의 신뢰(권력의 정당성) 가운데 정치가가 끝내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은 백성들의 신뢰라고 한 것을 생각해 보면, 장자의 비난은 너무 심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장자는 ‘부국 강병’을 외치는 법가나 ‘도덕 장치’를 외치는 유가나, 춥고 배고픈 백성들의 눈으로 보면 그놈의 그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자의 생각은 이랬습니다.

‘길이란 무엇인가. 공자가 말하는 길은 진정한 길이 아니다. 진정한 길은 어떤 사람만이 만들 수 있고, 또 어떤 사람만 편하게 가는 그런 길이 아니다.’

한번은 장자가 문혜군이라는 왕을 초청해 놓고, 소 잡는 기술자를 강사로 내세워 도를 강의하게 하였습니다. 강사는 먼저 실기로 왕에게 시범을 보였습니다. 그이 손놀림과 자세, 칼을 쓰는 동작은 마치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 같았습니다.

문혜군이 경탄하며 말했습니다.

“아아, 훌륭하도다! 기술이 이런 경지에 이를 수도 있는가?”

소 잡는 기술자가 칼을 놓고 말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입니다. 기술이 아니지요. 제가 처음 소 잡는 일을 시작했을 때는 보이는 것이 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나자 소가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마음으로 소와 만날 뿐 눈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감각의 작용은 멈췄고, 마음만이 움직입니다. 오직 소의 결대로 칼을 움직여 살고 뼈 사이의 큰 틈을 쪼개 벌리고, 뼈와 뼈 사이의 빈 곳에 칼을 밀어넣고, 소의 몸 중 원래부터 빈 곳을 따라가니 뼈나 살이 엉겨붙은 곳에 칼이 닿는 일이 없고, 하물며 큰 뼈에 닿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솜씨 좋은 사람도 해마다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살이 엉긴 곳을 베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백정은 다달이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의 칼은 지금 19 년이 되었습니다. 잡은 소는 수 천 마리가 됩니다. 그런데도 칼날은 금방 숫돌에 갈아 낸 것 같습니다. 원래 소의 뼈마디 사이에는 빈 틈이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이 있는 곳에 집어 넣으니, 거기에는 자연히 넉넉하고 넓어 아무리 칼날을 휘저어도 반드시 남는 구석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19 년이나 쓴 칼날이 아직도 금방 숫돌에 갈아낸 것 같지요.

하지만 살과 뼈가 얼키고 설킨 곳에서는 저 역시 어려워집니다. 두렵고 조심스럽기만 하고, 눈이 한곳에 고정되어 손놀림이 더뎌집니다. 따라서 칼의 움직임도 매우 미묘해집니다. 그래서 찢고 벌려 다 가르고 발라내면, 마치 흙덩이가 땅에 쌓이듯 고깃덩이가 쌓이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저는 칼을 들고 서서 사방을 돌아보며 흐뭇해 합니다. 그리고는 칼을 닦아 넣어 두지요.

“정말 훌륭하다. 나는 그대의 말을 듣고 비로소 양생의 비결을 알았다.”

위의 예화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도는 빈 것이다. 그것은 무이다. 그러므로 만물을 낳고 포용할 수 있다. 만물 중 하나인 인간은 도를 따라야 한다. 도를 벗어나면 오직 스스로를 상할 뿐이다. 도를 따르지 않고 쓴 칼날이 무디어지듯이.”

“도는 원래 그런 것이고, 인간이 이렇게저렇게 넓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가에서 말하는 도는 자기들이 지어낸 도이다. 그들은 ‘이것이 사람이 갈 길이다’ 하고 가르치지만 ‘도는 이것이다’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도는 말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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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감각과 사유로 알 수 없다.

 

“장자”에는 ‘혼돈의 죽음’이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쪽 바다의 황제는 숙이고, 북쪽 바다의 황제는 홀이며, 중앙 땅의 황제는 혼돈이다. 숙과 홀이 때로 혼돈의 땅에서 만나면 혼돈이 극진히 대접해 주었다. 숙과 홀은 혼돈의 덕에 어떻게 보답할까 의논한 끝에 이렇게 결정했다.

“사람은 모두 일곱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데, 혼돈은 홀로 이것이 없으니 우리가 뚫어 주세.”

그리하여 날마다 한 구멍씩 뚫었는데, 일주일째에 혼돈은 주고 말았다.

 

도는 우리의 감각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오관은 각기 외부 사물의 모양과 색깔, 냄새, 맛, 촉감을 받아들이지만, 도는 오관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 하고 말했습니다. 감각뿐만 아니라 생각으로도 도를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장자는 무엇을 위해 도를 가르친 것일까요?

 

우리의 삶은 유한하고, 알아야 할 것은 무한하다. 유한한 것으로 무한한 것을 좇는 일은 위태로울 뿐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알았다고 여기는 것은 더욱 위태롭다. 착한 일을 하더라도 유명해지지 말고, 나쁜 짓을 하더라도 형벌에 걸리지는 말라. 중도를 기준으로 삼으면 몸을 상하지 않고, 생긴 대로 자기를 실현할 수 있으며, 부모를 잘 모실 수 있고, 타고난 수명을 다할 수 있다.

 

장자는 통이 커서 별을 따다 공기놀이를 하는 이야기나 기를 타고 우주 여행을 하는 이야기만 할 줄 알았는데, 이 이야기는 너무 자질합니다. 겨우 몸 다치지 말고 오래 살자는 이야기 아닙니까? 젊은 남자들이 군대 갈 때, 어른들이 한결같이 충고하는 말과 다를 게 없습니다.

“건강이 제일이다. 몸조심하거라.”

“앞에 나서지도 말고 뒤에 처지지도 마라. 그저 중간만 가라.”

이런 이야기는 철학이라기보다는 비굴하고 교활한 처세술 정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무질서한 세상을 건지겠다는 공자의 도를 비웃은 장자의 ‘큰 도’는, 사실 개인의 생명과 그것의 온전한 발현을 이루어 가는 문제와 단짝입니다. 이런 점에서 유가의 문제나 장자의 문제나 모두 인간들 속의 인간의 삶의 문제였습니다. 다만 장자는 유가에서 규정해 놓은 ‘사람이 마땅히 가야 할 길’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누구를 위한 철학일까요?

 

 

기계를 싫어하는 인간 기계들

 

어떤 작품에 이런 이야기가 가옵니다.

“아주 옛날에는 여자들만 살았다. 어느 날 여자들이 모두 모여 토론하였다. ‘우리는 일하느라고 시간을 죄다 써버린다. 힘든 노동을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긴 토론을 끝에 말도 잘 듣고 일도 잘하는 동물을 만들기로 결론이 났고,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남자이다.”

역사의 어느 시기엔가 직접 들에서 일하지 않고도 밥을 먹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어떤 숨어 사는 노인이 공자를 “오곡도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비웃은 것이나 맹자가 “육체를 쓰는 사람이 정신을 쓰는 사람을 먹여 주고, 정신을 쓰는 사람이 육체를 쓰는 사람에게 받아 먹는 것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당연한 관계”라고 한 것에서도 이런 사정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맹자는 정신을 쓰는 사람은 육체를 쓰는 사람을 ‘위하여’ 살아야 하고, 엄격한 자기 규율로 정의와 도덕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맹자는 훌륭한 어머니를 만난 덕택에 들에 나가 뙤약볕을 쬐면서 땅을 파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직접 경험해 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장자는 찢어지게 가난했던 모양입니다. 지방 관리에게 쌀 꾸러 갔다가 푸대접 당하는 이야기, 짚신을 엮어서 생활한 이야기, 누더기를 입고 거지꼴로 위나라 왕을 만난 이야기 등이 나옵니다. 장자의 제자들 중에는 직접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사냥도 하고 고기도 잡았겠지요. 그 가운데는 기계 혐오증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춘추 시대에 나온 철제 농기구가 장자가 살던 시대에는 이미 널리 보급되었으며, 소를 농사에 이용하고, 거름을 주는 방법을 개발하는 등 농업 생산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새 발명품 중에 물을 길어 올리는 기계가 있었습니다.

공자의 제자 중 당대에 손꼽히는 부자였던 자공이 길을 가다가 한 농부를 만났습니다. 농부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가뭄으로 시들어 가는 곡식에 뿌려 주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돈버는 재주가 뛰어났던 자공은 새로운 발명품들에 대한 소식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 농부에게 새로 나온 물 긷는 기계를 권했습니다. 농부는 자기도 그런 기계가 있는 것을 잘 알지만 일부러 쓰지 않는다고 대답하여 새소식을 전해 주려 한 자공을 무안하게 만듭니다. 기계를 사용해서 편해지면 인간의 본마음이 변질된다고 하면서, 자기는 땀 흘리는 것을 일부러 선택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장자”에 실려 있는 이 이야기는 기계나 노동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정치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기계를 사용하여 더 많이 생산하는 사회적인 변화가 생산을 담당하는 농부들에게 돌려주는 이득은 별로 없다는 뜻입니다. 옛날 방식으로 살 때는 임금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고, 일한 만큼 수확하여 그에 맞추어 먹고 살았지만, 이제는 관리들이 와 세금도 내라 하고, 일하는 데도 간섭하고, 부역이나 전쟁에 끌러 가려 하니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기계가 가져다 주는 편리함은 인간의 자연스런 자기 발현을 포기하는 대가로 주어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기계와 인간의 문제인 동시에 인간과 인간의 문제였습니다.

사실 기계는 오히려 묵자 학파나 장자 학파에서 더 잘 만들었습니다. 고대인들도 자동으로 일하는 기계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 시기 문헌에는 전쟁 무기용 발명품들도 나오고, 용도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3일 밤낮을 자동으로 날아다닌 모형 비행기 이야기도 나옵니다. 장자의 시대보다 뒤에 쓰여진 것이지만, 역시 도가 사상가들의 저술인 “열자”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나라 제 5 대 천자 목왕이 서쪽 제후국들을 둘러보는 길에 어느 나라에서 언사라는 이름을 가진 기술자를 선물로 받았다. 그는 천자를 위해 특별히 솜씨를 발휘하여 꼭두각시 인형을 만들었다. 걸음걸이도 능숙하고 노래부르고 손을 흔들어 춤추는 모양을 보고, 천자는 진짜 인간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그런데 연기를 한 차례 끝낸 이 인형이 천자를 모시고 있는 총희에게 윙크를 하는 게 아닌가.

천자는 크게 노하여 당장 언사를 죽이려 하였다. 언사는 벌벌 떨면서 인형을 풀어헤쳐 천자에게 보였다. 가죽, 나무, 아교, 옻, 백흑, 단청을 합쳐서 만든 것이었다. 천자가 하나하나 살펴보니, 안에는 간, 쓸개, 심장, 폐, 비장, 신장, 창자, 위장이 있고, 겉에는 근육과 뼈, 마디, 가죽과 털, 이빨과 머리털이 있는데 모두 모조품이었다. 천자가 시험 삼아 인형의 심장을 떼어내니 입으로 말을 하지 못했다. 간을 없애니 눈으로 보지 못했다. 신장을 없애니 발로 걷지 못했다.

천자는 비로소 기뻐하며 말했다.

“사람의 기술이 이처럼 조물주와 같을 수 있는가!”

진짜 사람으로 착각할 만큼 완벽한 인형을 상상한 도가 사상가들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요? 왕과 대신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억지로 물렁뼈가 되어야 하는 광대를 대신할 기계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없었을까요?

“장자”에 매미 잡는 사람 이야기, 호랑이 사육사 이야기, 활 잘 쏘는 사람 이야기 등등이 나오는 것은, 이 책을 쓴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더라도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과 가까웠거나 애착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근대 이전의 기술은 ‘예술’의 의미를 가지듯이 “장자”에는 예술로서의 기술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장자의 무리들은 육체를 쓰는 사람들의 편이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라면 처절하고 한맺힌 것이어야 할 텐데 어째서 장자의 이야기는 그토록 화려하고 황당한 것일까요?

 

 

장자의 우주 여행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을 곤이라 한다. 곤의 크기는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다. 변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의 등은 몇 천리인지 알지 못한다. 한번 떨쳐 날면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남쭉 바다로 옮겨 간다. 남쪽 바다는 하늘의 못이다. “제해”는 괴상한 것을 기록한 책이다. 그 책에 “붕이 남쪽 바다로 옮길 때, 물길을 갈라 치는 것이 3000리요, 요동쳐 오르는 것이 9 만 리이며, 여섯 달을 가서 쉰다”고 하였다.

 

매미와 산비둘기는 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용을 써서 날아도 느릅나무나 박달나무 가지에 겨우 오르며, 때론 거기에도 이르지 못해 땅에 떨어지는데, 어찌 9 만 리를 솟아올라 남쪽으로 간단 말이냐.”

야외로 소풍가는 이는 세 끼 먹고 돌아와도 배가 부르며, 백 리를 가는 이는 밤새 양식을 찧고, 천 리를 가는 자는 석 달 동안 양식을 모은다.

이 두 벌레가 무엇을 알겠는가?

 

너무도 유명한 “장자” 첫 문장입니다. 큰 뜻을 품고 길을 떠나는 위대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할 때 쓰는 ‘봉정 만리’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조선 시대 실학자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매우 신기하게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한 뒤로는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를 벗어나는데 이용하였습니다.

개화기 선각자들도 지구의를 갖다 놓고 빙빙 돌리면서 사람들을 깨우쳤다고 합니다.

“천하의 중앙은 어느 나라일까요? 중국일까요, 미국일까요? 이리 돌리면 이 나라고, 저리 돌리면 저 나라가 됩니다. 우리도 부강해지면 천하의 중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구가 둥글다거나 우주가 넓다는 생각은 이미 2300 년 전에 장자의 머리 속에 있었습니다. 장자는 자기의 우주 여행 보고서를 이렇게 썼습니다.

“하늘의 푸르고 푸른 것이 자기의 본래 모습일까? 저쪽에서 이 땅을 보라. 그러면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장자는 어떤 우주선을 타고 갔을까요? 지네는 다리가 많은데도 뱀보다 느려 뱀을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발 없이 빨리 가는 뱀은 형체도 없이 자기보다 빠른 바람을 부러워하였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발도 없고 형제도 없지만, 우주의 끝까지 달려갈 수 있습니다. 장자는 자기의 정신을 천지 자연의 기를 태우고 여행한 것입니다.

맹자처럼 정신을 쓰는 사람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쓰는 사람도 생각을 합니다. 농부도 이 지구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정신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계가 편리하지만 자기를 빼앗아 간다는 것도 알고, 위정자들이 어떻게 도둑질하는지도 압니다. 장자는 이 정신을 타고 천지를 왕래하였습니다. 맹자가 정신을 쓴 것은 집안 걱정, 나라 걱정, 헐벗고 굶주리고, 외롭고 약한 삶들을 걱정한 것이었지만, 장자가 저 위에 올라가서 보니 두 나라의 전쟁이란 것이 달팽이 뿔 위에서 싸우는 꼴이었습니다. 좀더 올라갔더니 땅덩어리는 물과 흙으로 되어 있고, 다시 더 올라갔더니 마치 하나의 달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더 넓게, 더 멀리 보고 와서 세상을 말하지 시작하였습니다. 육체를 써, 서류나 장부를 만지작거리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동료들에게 정신을 쓰는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

도는 어디에 있는가?

 

동곽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도는 어디에 있는가?”

“없는 곳이 없다.”

“구체적으로 이름을 지적하여 말해 보시오.”

“쇠파리에 있다.”

“도가 어찌 그렇게 지저분한 데 있는가?”

“가라지나 피 같은 잡초에 있다.”

“어째서 더 하찮은 것에 있는가?”

“옹기 조각에 있다.”

“왜 점점 더 심해지는가?”

“똥 오줌에 있다.”

“….”

장자가 말하였다.

“당신의 질문은 본질을 물은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사물을 벗어나 도를 이야기하려 해서는 안 된다. 지극한 도는 이와 같고, 위대한 말도 이와 같다.”

 

도는 바로 우리들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것은 고상하고 깨끗하고 상상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 우리가 만지는 그릇 속에, 농부가 이용하는 거름 속에, 우리와 더불어 사는 하찮은 미물들 속에 있습니다. 도는 많이 배운 사람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육체를 쓰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이들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공자나 맹자가 말하는 도는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고, 땀흘리며 일하는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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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분열시킨 것

 

“장자” 33 편 중 두 번째 편의 제목은 ‘제물론’입니다. 제물론은 모든 이론을 가지런히 한다, 다시 말해 서로 다투는 온갖 의견을 잠재운다는 뜻입니다. 전구 시대는 나라간의 전쟁과 학파간의 이론 경쟁이 치열한 시기였고, 장자는 이러한 상황이 평화와 공존의 상황으로 바뀌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식인들이 자기 주장을 퍼뜨리고 세상을 구제하겠다고 나설수록 세상은 더 혼란스러워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뒤지고 궤짝을 여는 도둑에 대비하려면 반드시 끈으로 묶고, 자물쇠로 채워야 한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현명함이다. 그러나 큰 도둑은 궤짝을 지고 상자를 들고 주머니를 둘러매고 달아나면서 오히려 끈과 자물쇠가 약해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현명함이란 결국 큰 도둑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 아닌가(지식인이란 자들은 나라를 전쟁으로 빼앗는 군주들의 종이 아닌가)?

 

도덕은 명예욕 때문에 흔들리고, 지략은 전쟁 속에서 나온다. 명예욕은 서로 파괴하고, 지략은 전쟁 무기가 된다. 이 두 가지는 흉한 것이니 추구할 만한 것이 아니다.

 

장자는 침략 전쟁으로 나라를 훔치는 군주에게 봉사하는 지식인들의 이론이 어떠한 맹점을 가지고 있는가를 깊이 문제 삼았습니다. 그는 당시 지식인들이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이론들은 어떻게 말해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너와 내가 논쟁을 하여 네가 이겼다면, 과연 너는 옳고 나는 틀린 것인가. 내가 너를 이겼다면, 과연 나는 옳고 너는 틀린 것인가. 우리가 결론을 내릴 수 없어 제삼자를 부른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바르게 판정해 달라고 할 수 있을까. 너와 의견이 같은 사람은 이미 너와 의견이 같으므로 바르게 판정할 수 없다.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은 이미 나와 의견이 같으므로 바르게 판정할 수 없다.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라면, 이미 우리와 다른데 어떻게 바르게 판정할 수 있겠는가. 우리와 의견이 같은 사람이라면 이미 우리와 같은데 어떻게 바르게 판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너와 나와 제삼자가 모두 서로 알 수 없는데, 또 다른 사람을 부른다고 해결되겠는가.

 

논쟁자들은 왜 논쟁을 마무리할 수 없는 걸까요? 그것은 옳고 그름의 표준을 삼을 수 있는 기준이 없고, 언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를 분열시키고 시비를 일으키는

단서이기 때문이다.

 

(세계가 하나라면) 이미 하나라고 했으니 말한 것이 있는가. 이미 하나라고 했으니 말한 내용이 있지 않는가. 하나인 세계와 하나라는 말이 있으니 둘이 되고, 둘과 하나가 셋이 된다. 이 이하는 계산이 뛰어난 사람도 다 헤아릴 수 없는데, 처음부터 여럿일 경우는 어떠하겠는가.

 

결국 언어를 가지고 세계를 말하면, 하나인지 둘인지도 합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장자는 통일된 전체상을 보지 못하고, 만물을 낱낱이 구분하여 한 모퉁이를 본 것을 가지고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는 논쟁을 거부하였습니다.

유명한 논리학자 혜시는 장자의 친구였습니다. 둘은 이런 논쟁을 하였습니다.

 

장자와 혜자가 호의 다리 위에서 한가하게 거닐고 있었다.

장자: 피라미가 자유롭게 놀고 있구나.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지.

혜자: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가 즐거운 줄 아는가?

장자: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을 아는가?

혜자: 나는 자네가 아니니 자네를 모르는 것은 당연하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니니

자네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도 틀림없네.

장자: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세. 자네가 나에게 어떻게 물고기가 즐거운 줄 아느냐고 물은 것은, 이미 내 말을 알아듣고서 물은 것이네. 어떻게 알았는지 말하겠네. 나는 이 물가에서 알았네.

 

느긋한 마음으로 산책하면서 무심코 한 말을 논리적으로 따지는 혜시와 그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 벌건 얼굴로 대꾸하는 장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푸르른 수풀과 맑은 시내, 싱그런 바람을 맞으며 장자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을 아무 부담 없이 보고 있었습니다. 물고기가 그리는 유려한 곡선과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그 모습을 보고 장자는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고, 자유스런 모습이라고 느꼈습니다. 혜시도 장자의 기분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지만 습관적으로 말장난을 걸었습니다. 장자는 이런 말장난이 싫었습니다.

장자는 여기서도 만물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자기의 사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장자는 물고기와 통할 수 있었습니다. 만물이 하나임을 아는 사람만이 시비를 초월하고, 선악과 생사를 초월하여 무한한 자유의 세계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 세상에 쓸모 없는 존재는 없다

 

장자의 ‘만물은 연관되어 있다’는 사상은 만물을 평등하게 보는 기초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꽃은 향기롭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똥은 더럽고 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꽃이란 식물이 물과 햇빛과 영양분을 받아들여 피운 것이고, 식물에게 좋은 영양분은 똥에 들어 있습니다. 꽃은 줄기나 잎, 공기나 물, 거름과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연관을 아는 사람은 단순히 꽃은 아름답고, 똥은 더럽다고 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이 구분되면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추한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또 좋아함과 싫어함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고, 싫은 것을 버리게 합니다. 이러한 분별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좋은 것을 차지하고, 싫은 것을 벗어나려 경쟁하고 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연관되어 있고 세계가 하나임을 아는 사람을 지극한 사람, 달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세상에 쓸모 없는 존재가 없습니다.

장자의 친구 혜시가 선물로 받은 박씨를 심었는데, 지금까지 보지 못한 큰 박이 달렸습니다. 너무 커서 바가지를 만들면 펑퍼짐해서 물을 뜰 수가 없고, 물을 담으면 무게를 견디지 못해 쪼개졌습니다. 쓸모 없는 박이라고 투덜거리는 혜시에게 장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호박에 띄워 놓고 배처럼 쓰지 않느냐?”

박은 바가지를 만들어 쓴다는 사람들의 분별, 선입견에 갇혀서 너무 큰 박은 쓸모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은, 아직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장자는 사람들이 인위적인 분별 규정 때문에 세계의 본모습을 못 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만 따진다면, 우리가 걸아갈 때 필요한 길의 너비는 30센티미터면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강 위에 30센티미터 폭의 다리를 만들어 놓으면, 곡예사의 연기 무대는 될지 모르나 보통 사람들은 다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장자는 이런 비유를 써서 우리가 밟지 않는 땅도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고 설득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주관적인 편견을 벗기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자는 사람들이 미인 대회를 열어 고르고 고른 미인이라고 물고기가 보고는 물 속으로 숨고, 새들에게 다가가면 날아가 버리고, 사슴이 보고는 결사적으로 도망칠 것이니, 미인 대회에서 뽑은 미인은 진정한 미의 기준에 맞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편견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과 동물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판단 차이를 비유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장자는 세상에서 소외된, 세상의 기준에서 비정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온전한 덕과 인간미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장자의 주장은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고, 이름 모를 풀 한 포기나 벌레 한 마리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며, 싫어하고 미워하고 싸우던 사람들이 서로 포용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상대주의의 한계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시비, 선악, 미추의 기준을 허물어 버릴 때, 우리에게 어떤 기준이 남을까요? 장자가 말한 대로 옳고 그름, 착함과 악함, 아름다움과 추함이 우리가 지어 낸 환상일 뿐이고, 세계의 본모습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이 물음이 너무 철학적인 논쟁을 몰고 온다면, 한 걸음 물러나 장자의 말대로 모든 것을 평등하게 바라보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대상이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특별히 어떤 것을 선택하려고 애 쓸 필요도 의욕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달동네에 살든 고급 아파트에 살든, 월급을 50 만 원 받든 200 만 원 받든, 걸어다니든 전용 비행기를 타고 다니든, 남에게 존경을 받든 비난을 듣든, 직위가 높든 낮든 아무 차이도 없는 것이라면, 우리가 지금 추구할 일은 무엇일까요? 이러한 생각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 삶과 죽음도 같은 것인데 우리는 왜 살까 하는 질문에 부딪치게 됩니다.

우리의 이런 질문에 대한 장자의 대답은 ‘그대로 좋다’, ‘모든 것이 좋다’일 뿐입니다. 그러나 장자에게도 기준은 있습니다. 그것은 ‘인위적인 것을 버리고 자연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도가 사상에서 ‘인위’와 ‘자연’이란 말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자연’이란 저절로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소가 네 다리를 가진 것은 자연이고, 코뚜레를 하고 멍에를 쓴 것은 인위입니다.

인간의 행동에서 저절로 그러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자연스런 행동’이라고 할 때 그 기준은 모호합니다. ‘자연스럽다’는 것도 우리의 주관적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노자나 장자의 ‘자연’은 인간 중심의 편견을 벗어난 객관적인 무엇이고, 인간은 그것에 대하여 수동적인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 보입니다. 때문에 순자는 장자의 사상을 ‘자연에 가려서 문명을 팽개친 사상’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순자는 자연의 법칙을 알아낸 인간의 삶에 이용하여 문명을 이룩하는 것이 동물과 다른 인간의 위대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순자의 입장에서 보면, 장자의 사상은 인간을 조직하고 관리하여 문명을 건설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주체적 인간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고, 오히려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그들이 끌고 가는 방향에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장자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옹이가 많고 구불구불한 수천 년 된 고목을 보고 “이 나무는 사람들이 쓸모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서 쓸모 없는 것의 쓸모 있음을 강의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주막에서 쉬는데, 주인이 잘 울지 않는 닭을 ‘쓸모가 없다’고 목을 비트는 것을 보고 장자는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사이’에 처신해야 할 것이라고 강의하였다.

 

학자들은 장자의 사상을 오래 살기 위한 처세술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장생 불사하는 신선 이야기나 특별한 수련을 하여 초인이 되는 이야기는 장자의 아류들이 지어 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장자는 삶과 죽음의 구별조차도 거부한 사상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논쟁도 실은 허무한 것입니다. 장자는 자신의 온갖 주장들도 하나의 헛된 이론일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유명한 ‘호랑나비 꿈’ 이야기를 통해 장자는 우리가 세계를 해석하는,그리고 틀림없다고 믿는 주장들이 실은 꿈일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죽음 이후의 세계가 참세계고, 우리가 삶이라고 생각하는 이 세계는 하나의 꿈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꿈에서 깨어나야 하고, 큰 꿈에서 깨어나야 참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장자의 사상을 상대주의라고 합니다.

장자학파 사람들은 당시의 현실 세력과 정치 문화의 중심에서 소외된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과 자신들의 철학 사이에 커다란 틈을 보았고, 자신들의 철학과 현실적 삶이 이중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장자학파 안에서 현실 타협과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사상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장자의 사상이 상대주의가 아니라 외부 세계의 상대성을 극복하고 세계를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주체성이 강한 사상이라고 봅니다.

 

 

장자가 남긴 것들

 

장자의 사상은 중국의 문학과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고,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중국 불교의 특징인 선불교로 자리잡는 데 큰 매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른바 ‘선불교’는 인도의 불교와 장자 사상의 결합이라고 합니다. 또한 노자와 장자의 사상은 정치 권력의 중심부에 참여하지 못한 소외된 집단의 이론에서 출발하여 그 정서가 민중들에게 잘 들어맞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 역사에서 200 년 주기로 일어난 농민 봉기에서 하나의 혁명 정신으로 나타났습니다. 위진 남북조와 수당 시대에 불교와 도교가 성행할 때는 불로 장생과 신선 세계를 꿈꾸는 신비주의 적 사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한편 현실 정치를 등지고 자연 속에 은둔하는 도가적 전통은,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을 탄생시켜 연단술, 점성술 등을 통해 중국의 의학, 천문학, 농학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장자”에 그림자가 싫어서 계속 도망가는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그림자도 더 빨리 따라오니 그는 더 빨리 달아나려고만 합니다. 장자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당신이 나무 그늘에서 쉬면 그림자도 따라오지 않을 것이라고.

현대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보면서 우리는 장자의 이러한 처방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엄청난 일을 해내고 있습니다. 무인 우주선을 보내 태양계를 탐사하고 전파 망원경으로 우주의 끝을 보려고 합니다. 수십 킬로미터의 입자 가속기를 설치하여 우주의 시초를 밝히려 하며, 유전 암호를 해독하여 생명의 신비를 벗기려 합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굶어죽는 사람이 수천만을 헤아리며, 핵의 위협과 공해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지구의 온도가 점점 높아진다고 하고, 오존층이 파괴되어 극지방에 가까울수록 백내장 같은 눈병이 훨씬 많이 생긴다고 합니다. 머지않아 지금의 농토가 사막으로 변해 갈 것이라고 하고, 쓰레기가 인간을 덮어 버릴 것이라는 경고도 나옵니다.

인간이 개발과 발전이라고 추구한 노력이 결국 이런 문제만 낳는 것이라면, 인간을 쓰레기를 늘리기만 하는 지구의 오염자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할 것 같습니다. 장자는 문명의 그림자인 쓰레기를 만들지 않으려면 나무 그늘 아래서 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대체로 인간을 더욱 편하게 살 수 있게 하면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길이 과학 기술의 발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자의 소극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장자가 추구한 이상은, 꿈은 현실보다 너무 높고 힘은 현실보다 너무 약한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다만 현대인들은 자신이 누리는 편리함과 자유로움 가운데 사치스러운 것은 없는지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장자가 제기했던 주체의 해체 방법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해 온 가치가 한 바탕 꿈이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가 조작해 낸 욕망의 굴레 속에서 진정으로 자기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그저 통속적인 목표를 향하여 쏘아진 화살처럼 날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것은 인간이 소의 코를 꿰고 말에 재갈을 물릴 때 이미 예고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소와 말을 옥죄기 시작할 때 그것이 비자연이며 도가 아니라고 경고한 사상가가 장자입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장자의 사상은 균형잡힌 사상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술가는 될지언정 과학자는 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견디기 어려운 현실의 무게를 정신적으로 견디려 하였습니다. 현실의 모순을 누구보다 잘 감지하였으면서도 한 눈을 감고 지나치려 하였습니다. 때로는 모두 틀렸다고 하고 때로는 모두 옳다고 하여 현실적 대결의 어느 편에 서기 어려웠습니다. 장자 사상의 해체적 성격은 역사 속에서 영원한 재야 세력으로 남을 듯하였지만,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이미 지배 계층 속에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한 것 또한 명백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장자라는 2300 년 전의 어느 육체 노동자가 틈틈이 정신 여행을 하면서 느꼈던 생각의 단편을 훑어보았습니다. 장자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 썼으리라고 생각되는 ‘천하’편의 장자에 대한 평가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맺으려 합니다.

 

세계는 항상 홀연히 흘러가니 일정한 형태가 없다. 모든 존재는 무상하게 변화해가는 것이다. 무엇이 삶이고 무엇이 죽음인가? 나는 자연과 함께 가는 것인가? 정신은 어디로 움직여 가는 것인가? 그들은 훌훌 어디로 가고 총총히 어디로 떠나는가? 모든 존재는 눈앞에 펼쳐 있으되, 돌아갈 곳을 모르는구나! 옛날 도술에 이러한 것이 있었으니 장주(장자)가 듣고서 기뻐하였다.

그는 언제나 터무니없는 환상, 황당한 이야기, 끝없는 변론으로 제멋대로 사설을 늘어놓지만, 편견을 고집하지 않았고, 한쪽 면으로만 이해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이 더러워서 정중한 말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두서없이 흘러가는 말로써 변화 무쌍하게 담론하고, 옛 성현의 말씀으로 진실을 믿게 하고, 비유로써 도리를 펼쳤다.

그는 홀로 천지 자연과 더불어 정신을 교류하였으나 스스로 뽐내어 다른 사물을 경시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세속에 섞여 살았다. 그의 정신은 위로는 천지를 만든 자와 함께 노닐었고, 아래로는 삶과 죽음, 처음과 끝을 넘어서 존재하는 자연과 벗이 되었다. 그이 철학 사상은 원대하고 넓고, 깊고 무한하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조화 적절함에 있으니,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모든 변화에 적응하고 모든 존재를 해석함에 있어 그의 이론은 무진장하다. 그 이론의 전개는 끝이 없고 홀홀 망망하여 다 파악될 수 없도다!

 

 

맹자: 유가의 파수꾼

 

“저는 아무래도 왕도 정치를 할 수 없나 봅니다. 제게는 재물을 좋아하는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어려움이 되겠습니까? 재물 좋아하는 것을 백성과 함께 하십시오. 떠나는 사람이 언제나 임금 창고의 곡식을 가지고 떠날 수 있고, 그대로 머물러 사는 살마들이 언제나 임금 창고의 곡식을 먹을 수 있으면 됩니다.”

전국 시대 강력한 제후국 가운데 하나였던 제나라의 선왕은 천하 통일의 야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제선왕이 맹자를 보고 말했습니다.

“제나라 환공과 진나라 문공이 한 일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공자나 그 제자들이 두 사람에 대해 말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저도 잘 알지 못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잘 아는 ‘참다운 임금의 길’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제나라 환공과 진나라 문공은 춘추시대 초기에 강력한 패권을 쥐었던 제후들입니다. 사실 논어에는 두 제왕에 대한 공자의 평가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공자 문하에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맹자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다만 힘에 의한 통치를 반대하는 맹자로서는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을 뿐입니다.

제선왕이 다시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덕을 가져야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백성을 아끼고 보살피는 왕이라면, 아무도 그가 온 세상의 왕이 되는 걸 막을 수 없습니다.”

“나같이 모자라는 사람도 백성을 아끼고 보살필 수 있겠습니까?”

“하실 수 있습니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제가 전에 어떤 신하에게 들으니, 왕께서 이런 적이 있으셨다지요?”

맹자는 제선왕에게 자기가 호흘이라는 신하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해 줍니다.

 

왕이 하루는 당 위에 앉아 있는데, 그 아래로 어떤 신하가 소를 한 마리 끌고 지나갔다. 물끄러미 보고 있던 제선왕이 신하에게 물었다.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는가?”

“예. 흔종(새로 만든 종의 갈라진 틈을 소의 피로 메우는 의식)에 쓰려고 합니다.”

“놓아주도록 해라. 벌벌 떨면서 죄도 없이 죽으러 끌려가는 모습을 차마 못 보겠구나.”

“그러면 흔종을 그만둘까요?”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느냐? 양으로 바꾸도록 해라.”

 

맹자가 이런 일이 있었는지를 묻자 왕이 대답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이면 참다운 임금 노릇을 하실 수 있습니다. 큰 소를 작은 양으로 바꾸게 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임금이 참 인색하다고들 말하지만, 저는 왕께서 정말 그 소가 불쌍해서 그러신 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백성들이 있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제나라가 작기는 하지만 아무려면 소 한 마리를 아끼겠습니까? 저는 소가 불쌍해서 양으로 바꾸라고 한 것입니다. 선생이 제 마음을 알아주시니 고맙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임금을 인색하다고 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지요. 큰 소를 작은 양으로 바꾸셨으니까요. 그런데 소는 불쌍히 여기시면서 어찌 양은 불쌍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 참, 저도 그 마음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요. 그러고 보니 소가 아까워서 양으로 바꾸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백성들이 인색하다고 하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군요.”

“그렇게 낙심할 일은 아닙니다. 임금께서 소는 보셨지만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셨을 뿐입니다.”

“아, 선생의 말씀을 듣고 나니 마음이 놓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참답게 왕 노릇 하는 데 알맞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어떤 사람이 임금께 자기는 3000근 정도 무게도 넉넉히 들 수 있지만 깃털 하나는 들지 못하며, 아주 작은 것까지도 볼 수 잇지만 수레에 가득 실은 장작 한 짐은 보지 못한다고 말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믿을 수 없지요.”

“왕의 마음 씀씀이가 소에게까지 미쳤으면서도 백성들에게 나타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은 백성들에게 참답게 은혜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훌륭한 정치를 안 하시는 것이지 못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맹자의 말솜씨는 대단했습니다. 누구든 맹자에게 걸리면 빠져나올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앞의 대화에서도 제선왕은 점점 맹자의 의도에 말려들어가 마침내 올바른 임금의 길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게다가 맹자는 의기가 굳센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무 임금에게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강하게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맹자의 뛰어난 말솜씨에 대해 공도자라는 제자가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선생님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들 말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어찌 말하기를 좋아하겠는가. 어쩔 수 없어서 그럴 뿐이다. 우임금은 황하를 다스려서 온 세상을 편하게 했고, 주공은 오랑캐를 막아 내고 사나운 짐승을 쫓아내서 백성을 편하게 했으며, 공자는 춘추를 지어 못된 신하의 불효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나는 이 분들을 본받아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잡고 못된 이론을 막아내려고 한다. 말솜씨가 뛰어난 것이 어찌 말하기를 좋아해서겠는가?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다.”

 

 

공자의 뒤를 이어

 

맹자는 기원전 372 년에 나서 298 년에 죽었습니다. 공자가 죽은 뒤 100 년쯤 지나서 태어난 셈입니다. 앞의 대화에서 보았듯이 맹자 스스로도 공자를 이었다고 자부했으며, 후세 사람들 또한 맹자를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선지 생존 연대가 잘 맞지 않는 문제가 있음에도, 맹자가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인에게서 배웠다고 전해집니다.

맹자는 전국 시대의 철학자였습니다. 전국 시대는 공자가 활동했던 춘추 시대보다 혼란이 더 심했습니다. 봉건 체제 내의 하극상이 매우 잦아졌고, 민중에 대한 수탈이 극에 달했습니다. 맹자의 표현처럼 들에는 굶어 죽는 시체가 그득하고, 살아 있는 민중들도 굶주린 기색이 뚜렷했습니다. 그래서 위로는 부모를 모시기에 부족하고, 아래로는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도 지배자들은 사치와 탐욕, 그리고 침략 전쟁을 일삼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점차 몇몇 세력 있는 제후들에게로 힘이 모아졌고, 맹자는 그 가운데 일부 임금들에게 질서 회복의 기대를 걸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제선왕, 양혜왕, 등문공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제후들은 맹자의 뛰어난 말쏨씨에 걸려들기는 했지만, 그의 말대로 실천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왕들에게 환영받은 주장은 부국 강병 전략인 합종책과 연횡책이었을 뿐입니다.

맹자의 이름은 가이고,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와 아주 가까운 추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추나라는 오늘날 중국의 산동성 남쪽 지역에 해당합니다. 맹자에게는 성장과 관련된 몇 가지 고사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 교육을 위해 애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맹자 어머니도 아들 교육을 위해 무던히 애썼던 모양입니다. 처음에 맹자네는 묘지 근처로 이사를 갔습니다. 거기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은 장사지내는 일이었기에, 맹자는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장사지내는 흉내를 내며 놀곤 했습니다. 이런 모습에 놀란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집을 옮겼습니다. 이번에는 시장 부근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맹자는 물건을 팔고 사는 흉내를 내면서 놀았습니다. 맹자 어머니는 다시 학교 부근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러나 맹자는 공부하는 흉내를 내면서 놀았고, 그제서야 맹자 어머니는 마음을 놓았습니다. 이야기는 유명한 ‘맹모삼천지교’입니다.

‘맹모단기지교’라는 일화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자란 맹자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맹자가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하던 공부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이때 비단을 짜고 있던 맹자 어머니는 틀에 걸린 비단을 칼로 끊어 버림으로써 아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고 합니다.

맹자의 생애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공자가 했던 것처럼 제자들과 함께 여러 나라를 찾아다니면서 도덕을 바탕으로 한 왕도 정치를 부르짖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제나라는 수도의 직문 아래에 학자 단자를 세워 놓고, 훌륭한 선비들을 초빙하여 우대하였습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을 직하학파라고 불렀는데, 맹자도 한때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맹자의 주장에는 임금들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민본 사상이나 혁명 사상이 그랬습니다. 따라서 어느 임금으로부터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맹자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70세 무렵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했습니다.

맹자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는 책 “맹자”입니다. 이 책을 지은 사람이 누구인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맹자가 쓴 글도 있고, 제자들이 정리한 것도 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맹자는 모두 일곱 편이고, 각 편이 상하로 나뉘어 있습니다. 뒤에 주자가 대학, 중요, 논어와 한데 묶어 4서로 만들고 나서 유명한 책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인간의 참 모습인가?

 

공자가 살던 시기에도 인간의 본서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중심 주제는 아니었습니다. 공자는 “인간의 본성은 서로 비슷한데, 습관에 의해 서로 멀어진다”는 말을 했을 따름입니다. 본성론은 맹자에 이르러 철학의 중심 주제로 자리잡습니다.

이 같은 변화는 당시의 급격한 사회 변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혈연 관계에 기초한 강력한 통치력을 갖추고 있던 주나라가 후기에 접어들며 혈연 관계가 점점 엷어지면 큰 혼란에 빠졌고, 이 틈을 타서 제후들은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을 끊임없이 벌여 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자식을 서로 바꿔서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전국 시대 중기와 후기의 사상가였던 맹자와 순자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관심이 논의의 핵심 주제가 된 것은 이런 사회 변동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맹자 이전에는 어떤 것을 인간의 본성으로 보았을까요? 성은 심과 생을 합쳐 만든 글자입니다. 글자대로 풀면, 성의 본래 뜻은 ‘마음속에서 생겨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는 도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리적 욕구의 감정이 같이 들어 있습니다. 원시 상태에서 인류가 본 자신의 모습은 도덕적인 면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보다 생리적인 면과 감정적인 면이 더 자연스러운 본질로 보였을 게 당연합니다. 이 같은 생각은 맹자 무렵까지도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맹자는 여기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습니다. 도덕성을 인간의 본질로 본 맹자의 성선설은 그때까지 내려온 인간의 자기 규정을 뒤엎은 혁명이었습니다.

맹자 당시에 인간의 본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논의들이 있었을까요? “맹자”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견해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첫째, 본래는 착한 요소도 없고, 악한 요소도 없다는 주장입니다.

둘째, 착해질 수 있는 요소와 악해질 수 있는 요소가 동시에 들어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 두 견해는 결과적으로 선으로도, 악으로도 갈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을 채우고 있는 내용을 본다면, 정반대인 셈입니다.

셋째는, 날 때부터 본성이 착한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들에 맞서 맹자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인간의 본성은 착하다고 했습니다. 맹자의 이러한 주장은 공자가 사람의 본질로 내세운 사람다움, 즉 인을 체계화한 것이라고 평가됩니다.

그러면 맹자의 주장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을까요?

맹자는 용자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하면서, 만일 어떤 사람이 누구를 위해 신발을 만들어 준다고 할 때, 그 사람의 발 크기를 모른다고 해서 신발 모양을 삼태기처럼 만들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 까닭은 모든 사람의 발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맹자는 사람의 겉모습에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겉모습만이 아니라, 맛을 보고 소리를 듣고 모습을 보는 데도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외모나 감각 기관에만 공통점이 있을까요?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공통점이 있으며, 이것이 바로 사람들의 도덕적 품성이라는 것입니다.

외모나 감각으로부터 마음의 공통점을 이끌어 낸 것은 뛰어난 유추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비약이기도 합니다. 사실 미각, 청각, 시각 자체는 생리적 본능에 속하는 감각이며, 맛있다거나 아름답다거나 소리가 듣기 좋다거나 하는 느낌들은 감각 능력을 통한 결과로서 의식 형태의 범주에 속합니다. 그런데 맹자는 본질적으로 선의 요소가 마음에 들어 있다는 가설을 입에 맛보는 기능이 있다는 기능이 있다는 생리적 사실과 일치시켰습니다. 이것은 자연 법칙과 도덕 법칙을 하나로 보는 유가의 특징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는 증거로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의 예를 들었습니다. 누구든 길을 가다가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면, 즉시 ‘저런, 저거 안 되는데’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황급히 달려가 아이를 구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나중에 어린애를 구해 준 것을 빌미삼아 그 아이의 부모와 사귀어 보려 해서도 아니고, 동네 사람들이나 벗들에게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사람들로부터 물에 빠지는 아이를 그냥 보고만 있었다는 비난의 소리를 듣기 싫어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모습을 본 순간 생겼던 순수한 마음, 이 마음을 맹자는 ‘차나 하지 못하는 마음’이라고 부르며,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런 마음이 없으면서 사람이 아니라고 규정합니다.

맹자는 이런 마음말고도 자기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다 있다고 합니다. 이 마음들을 잘 기르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것들을 ‘착해질 수 있는 네 가지 실마리’라고 합니다. 맹자는 이 네 가지 단서가 사람 마음에 있는 것은 몸에 팔다리 네 개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맹자는 4 단을 선천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선천적인 요소를 ‘양지’, ‘양능’이라는 말로도 설명했습니다. 양지 양능이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어린 아이가 제 부모를 따를 줄 아는 것처럼, 배워서 아는 것도 아니고 따져 봐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갖춘 것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맹자의 양지 양능은 뒤에 명나라 때 나온 양명학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맹자의 인간 규정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사람이 살아가는 현상은 이상과 다릅니다. 악한 행동과 그로 인한 혼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본래 착한 사람들이 왜 악한 행동을 하게 될까요? 그들의 나쁜 행동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맹자는 사람들이 하는 나쁜 짓은 본질적인 모습이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나쁜 행위 자체는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 환경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맹자는 그 증거로 산을 비유로 들어 말합니다.

본래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무꾼들이 매일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 내고, 소 먹이는 아이들이 풀을 뜯어 먹여서 헐벗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헐벗은 산의 모습을 보면서, 저 산은 처음부터 나무가 없는 산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 산의 본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본성도 매일 나무를 잘라내듯 착한 마음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나쁜 환경 때문에 악한 짓을 하는 것이지, 그것이 본래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맹자가 산을 비유로 든 것은 썩 어울리는 설명은 아닙니다. 하지만 맹자는 환경적 요소에 따라 좌우되는 감정과 욕구를 악의 근원으로 보고, 그러한 힘은 내적인 자발성에 근거하지 않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세워 갔습니다.

 

 

군자의 본성과 소인의 본성

 

맹자가 살던 시대에는 노예부터 귀족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맹자가 본성이 착하다고 한 그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일까요? 보편적인 사람 모두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중 어떤 계층에 강조점이 있는 것일까요?

물론 맹자가 착하다고 한 사람은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맹자는 분명히 남에게 차마 나쁜 짓을 못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라고 했고, 또 4 단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맹자의 말 가운데는 달리 생각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 보입니다.

 

입이 단맛을, 눈이 아름다운 빛깔을, 귀가 밝은 소리를, 코가 향기를 좋아하고 팔다리가 편안함을 원하는 것이 본성이긴 하다. 하지만 그 속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에 군자는 본성이 라고 하지 않는다.

 

맹자는 감각적 생리적인 것도 인간의 본성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에 본성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체를 군자에 한정짓고 있습니다. 맹자가 부정한 감각적 생리적 본성이란 배고픔, 목마름, 피곤함 같은 것입니다. 배고픔을 의지로 참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감각 자체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맹자가 말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란 배고프다고 느끼는 것 자체는 내 의지 밖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본성으로 보지 않는 사람은 군자입니다. 따라서 군자가 아닌 사람은 그런 것을 본성으로 보기도 한다는 말이 됩니다. 맹자는 그런 사람들을 소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군자의 본성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의 예지입니다. 인의 예지는 감각이나 생리적 욕구가 아닌 마음 속의 도덕 의지에서 나옵니다. 맹자는 감각 기관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은 소인이고 마음이 하고자 하는 옳은 방향대로 따라가는 사람은 군자이며, 감각 기관은 천한 것이고 마음은 귀한 것이라고 합니다.

소인은 일정한 생활 근거가 있을 때는 변치 않는 마음이 있지만, 일정한 생활 근거가 없어지면 마음도 변하는 사람입니다. 군자는 이와 달리 일정한 생활 근거가 없을 때도 마음이 변치 않는 사람입니다. 즉 소인은 자기 밖의 변화에 따라 안이 달라지는 사람이지만, 군자는 밖의 변화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맹자는 군자를 선비, 대인이라는 말로도 부릅니다.

그러면 맹자가 말하는 군자, 선비, 대인은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지위에 있고 어떠한 역할을 하는 사람일까요? 맹자는 소인과 대인이 사회에서 하는 역할을 다음과 같이 나눕니다.

 

대인이 할 일이 따로 있고, 소인이 할 일이 따로 있다. 사람이 살아가자면 여러 공인들이 만든 물건이 필요하다. 하지만 만일 그 모두를 반드시 스스로 만들어 쓰게 한다면, 온 세상 사람들을 끌어다가 일에 지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마음을 수고롭게 하고, 어떤 사람은 몸을 수고롭게 한다고 했다.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사람은 남을 다스리고, 몸을 수고롭게 하는 사람은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다.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남을 먹여 주고, 남을 다스리는 사람은 남에게 얻어먹는 것이 온 세상에 통하는 원칙이다.

 

대인은 마음 고생을 하면서 남을 다스리고, 그 대가로 남이 생산한 식량을 먹는 사람입니다. 소인은 몸 고생을 하면서 남에게 다스림을 받고, 자기를 다스리는 사람을 먹여 살리는 사람입니다. 맹자가 본 본성이 착한 사람은, 사실상 통치 지위에 있거나 아니면 통치 지위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맹자는 현실적으로 강한 힘을 가진 지배 계층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그들의 내면에 본질적으로 들어 있는 선의 요소를 완전히 발휘하여 현실의 혼란을 종식시킬 것을 바랐던 것입니다.

이러한 맹자의 주장에는 지배 계층의 입장에 선 군자 대인 선비의 교화에 의해 세상을 바로잡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한계가 보입니다. 실제로 주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지배층을 군자라고 불렀으며, 피지배층은 소인 또는 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춘추 시대의 혼란은 신분 질서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신분 질서의 변화는 지배 계층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피지배 계층에서도 엄청나게 심했습니다. 이러한 신분 변화를 통해 농노의 신분에서 벗어난 계층도 많아졌으며, 이들을 일반 백성과 구별하여 소인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맹자가 모든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고 함으로써 소인과 민까지를 포함시킬 수 있게 말한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은 피지배 계층의 소인과 민에게 지배 계층인 군자 대인 선비의 교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 근거를 주기 위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이런 점이 유가가 민중 중심의 묵가 사상과 본질적으로 다른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맹자의 성선설에는 지배 집단이 피지배 집단보다 도덕적으로 뛰어나다는 의미 외에 다른 가치는 없는 것일까요? 물론 맹자의 주장이 후대 정권 담당자들에 의해 지배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쓰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역사상 지배 집단은 언제나 피지배 집단보다 도덕적으로 뛰어나며, 따라서 피지배 집단을 교화할 능력과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리화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시의 시대적 조건 속에서 맹자 사상의 긍정적인 점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 당시는 엄청난 변화의 시대였습니다. 피지배 계층인 민중도 그러한 변화 속에서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맹자는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이전까지는 노동 도구로서만 의미가 있었던 민중에게도 인간의 본질인 선의 요소가 들어 있음을 인정하여, 민중을 도덕적 실현이 가능한 범주로 끌어올린 것입니다. 비록 교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 정도의 의미이긴 하지만, 민중을 주체적 인간으로 파악하려 한 노력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둘째, 맹자는 군자 대인 선비에게 통치의 역할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의 지배를 합리화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도덕 실천을 통한 자아의 완성이라는 책무를 주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정치 사상에서 보이는 것처럼 민중을 위해 지배 계층의 더 많은 양보를 확보해 내려 했습니다.

셋째, 맹자가 살았던 때는 전국 시대 중기였습니다. 당시는 이미 주나라 왕실이 유명 무실해졌고, 그 틈을 타서 힘을 길러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려는 제후들이 큰 세력을 잡고 있었습니다. 맹자는 그들 가운데 몇몇에게 천하 통일의 기대를 걸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함을 길러서 통일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맹자의 생각과 맞지 않았습니다. 맹자는 이런 것이 모두 이익 추구에서 오는 것이며,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의 생리적 본성을 중시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배 집단 혹은 지배 집단이 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본성이 감각적인 부분이 아니라

도덕적인 부분임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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