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호스피스 간호사 최화숙이 쓴

 

아름다운 죽음을 위한 안내서

인생의 마감시간에 우리는 무엇이 되어서 만날 것인가?

 

월간조선사

 

최화숙 崔華淑

1955년생, 이화여대 간호과학대학 학사, 동 대학원 석사, 중앙대학교 대학원 간호학 박사, 무의촌 진료 간호사, 동대문 병원 정신과 병동 책임 간호사, 세브란스 호스피스 간호사, 한국 호스피스 협회 부회장 역임. 현 京仁女大 정신간호학 겸임교수-이화여대 호스피스 책임자

 

 

머리글

함께 울고 웃고 가슴 조이던 말기 환자들과의 진지했던 시간들

지난 15년 동안 호스피스 활동을 하면서 자기 생의 마지막 순간에 서 있는 수백 명의 말기 환자들을 만났다. 얼마 남지 않은 그들 생의 마지막 시간 동안 그분들을 지켜보면서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안타깝고 가슴 아픈 죽음도 있었으나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멋있는 죽음도 있었다. 필자가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에게 죽음은 ‘두려움’이란 포장지에 싸인 미지 未知의 세계였다. 태어나서 생전 처음 맞이하는 상황을 앞에 놓고 당황하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 때서야 처음으로 인간존재 人間存在 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하기도 하였다. 아직 건강한 이들에게 이런 숨겨진 일들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늘 있어왔으나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2년 전에 한 기자의 부탁을 받고 썼던 글이 “인간은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라는 제목으로 월간조선 2000년 3월호에 게재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때는 ‘영 靈’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그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 형식으로 쓴 글이었는데 많은 분들로부터 강연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었다. 국내에 있는 독자는 물론이고 해외에 있는 동포들로부터도 편지와 전화를 많이 받았다. 여러 곳의 출판사로부터 책으로 출간하자는 제의가 있었으며 한동안은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위의 글과 관련된 이야기가 화제로 나왔었다. 이런 일들을 통해 의외로 많은 분들이 종교를 떠나서 죽음과 관련된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어 이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그러나 이 글을 필자가 썼다고 해서 혼자서 호스피스를 한 것은 아니었다. 함께 이 일을 해온 소중한 분들(호스피스 실무팀과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일은 결코 할 수 없었을 것이므로 그분들에게 먼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또 우리 호스피스에 가입하기로 결정하고 우리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기꺼이 열어 보여주셨던 수백 명의 환자들과 아직도 살아계신 그분들의 가족들, 그들과 함께 울고 웃고 가슴 조이던 시간들이야말로 이 글을 쓸 수 있는 재료가 되었음을 고백하며 남은 유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우리 나라에서 아직까지 호스피스는 제도적으로 정착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화여대에서 가정호스피스센터를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신 은사 김수지 박사님, 시대의 필요를 깨닫고 앞을 내다보았던 모교의 배려, 이 일을 위해 수시로 협력하고 도움을 주신 간호과학대학 학장님을 비롯한 교직원들, 복지관 식구들, 그 동안 물질로 기도로 후원해주시고 관심을 보여주신 동창, 후원자, 그리고 교우들의 사랑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특별히 필자가 처음 호스피스를 시작할 대 시범을 보여주며 자상하게 가르쳐 주셨던 마리안 킹슬리(Marian Kingsly)선생님과 호스피스 사무실에서 그림자처럼 필자의 일을 도와주며 원고 수정을 도와주었던 아름다운 여성 명희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배나 전하고 싶다.

말기 환자들과 함께 하다 보면 때로는 한밤중에 환자의 가족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나가야 할 일이 생기기도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웬만하면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던 사랑하는 두 아들 은과 림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우리 아이들이 아직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에 호스피스를 시작하였는데 이제는 둘 다 아빠보다 훨씬 건장한 청년이 되어버렸다. 또한 이십 년이 넘도록 함께 살면서 가장 가까이에서 ‘인간의 위대함’과 진실되게 사는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말없이 보여주는 남편 남민우 시인에게 고개 숙여 존경과 감사를 표하고 싶다.

끝으로 원고 청탁을 받고 20개월이나 지나서 탈고하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기다려주고 기꺼이 책으로 출판해준 월간조선 조갑제 사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고 이끌어주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2001년 12월 5일

최화숙

 

 

들어가며

사람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은 정상적인 삶의 과정이다. 태어난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죽는다는 것은 아름답다. 혹자는 살아 있다는 것은 좋지만 죽는다는 것은 싫다고 말한다. 그러나 생 生과 사 死라는 시작과 끝을 알고 있다면 인생은 한 편의 아름다운 드라마다. 무대 위의 배우가 자신의 역할을 다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 역할이 무엇이었든, 목적했던 바대로 연기 演技 했다면 그는 그의 인생을 의미 있게 산 것이다. 그런데 인생을 살면서 왜 사는지, 어디로 향해 가는지도 모르고 달려온 사람들은 무대에서 내려갈 때가 되면 아연실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필자가 만났던 말기 환자들이 호스피스 간호를 받은 기간은 평균 2~3개월이었다. 그 기간 동안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는데 우선 건강 상태가 점차 쇠약해져 갔다. 그리고 그들의 관심의 대상이 달라져갔고, 인생을 보는 시각이 달라져 갔다. 옆에서 돌보는 가족들의 건강과 마음과 생각도 달라져 갔다. 그러나 한결 같았던 것은 이 모든 이들이 다 ‘때가 되어’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일이며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종에 직면한 환자들은 심판에 대비하기라도 하려는 듯 자신의 지나온 일생을 파노라마처럼 회상해 보는 것 같았다. 이 때가 되어 후회하기보다는 아직 건강하고 활동할 수 있을 때에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돌아가시는 분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대개는 자신이 살던 삶의 방식대로 떠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 예를 든다면 집을 나설 때 가족들에게 다녀온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급히 나서던 사람들은 돌아가실 때도 그 먼 여행을 떠나면서 간다는 인사말 한 마디 없이 가시곤 했다.

우리 환자들 중에는 자신들의 신념체계에 따라 내세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세관의 유무에 따라 임종을 맞이하는 자세가 서로 달랐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대체로 내세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던 반면에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은 이승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발버둥치다가 비참한 모습으로 떠나곤 했다.

이 책의 사례들은 지난 15년간 가정호스피스에 등록된 말기 환자를 돌보면서 메모해 두었던 것을 토대로 쓴 거짓 없는 글임을 밝혀둔다. 사실 확인을 위하여 진료기록지(chart)를 참고하였으나 개인의 실명을 밝힐 수는 없기에 가명을 사용하였다. 이 책을 쓴 목적이 말기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인지하며 맞아들이는지를 사실 그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기에 가감 없이 기술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필자의 시각에서 본 ‘사실 그대로’ 이기에 가명을 사용하였음에도 내용이 유가족들이나 지인 知人들에게 누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 이 지면을 통해 양해를 구한다. 고인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사례로써 소개하는 이유는 먼저 떠나간 이들의 무언의 부탁을 이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생의 마지막 시간을 필자와 함께 보낸 말기 환자들의 이야기이다. 대체로 호스피스에 처음 가입해서 임종하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하였는데 연구 보고서가 아니므로 독자들이 읽기 쉽게 기술하였다.

제2부는 말기 환자들의 이야기 중에서 영 靈의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던 환자들의 이야기이다. 월간조선 2000년 3월호에 게재되었던 내용 중 제1부의 사례와 겹치지 않는 부분만을 모아서 재정리한 것이다.

제3부는 이니셜로 풀어 본 호스피스에 대한 소개와 함께 건강한 사람들이 죽음을 잘 준비하려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말기 환자의 가족들이 환자를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잇는지, 자원봉사자들이 말기 환자를 도울 때는 어떤 자세로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요약-정리하여 제시하였다. 마지막으로 임종에 직면한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증상과 이에 대한 대처 방안에 대해 기술하였다. 이 자료는 호스피스 환자가 임종 과정을 시작하면 가족에게 알려주는 내용인데 같은 입장에 있는 가족들에게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다.

제1부에서 소개한 사례들 중에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선하게 사는 건데…” 하면서 나누며 살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던 부인이 있었다. 이분을 생각하면 “이 사실을 꼭 좀 건강한 사람들에게 알려주세요” 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눈앞에 아른거리며 떠오르는, 이미 돌아가신 수많은 분들이 “내 이야기를 전해주세요. 내 이야기도 전해주세요” 하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자신들의 삶을 거울삼아 잘 죽을 수 있도록 죽음준비 교육을 해달라는 간절한 부탁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먼저 죽음을 경험한 선배들의 사례를 교훈 삼아 삶의 종착지를 바로 보고 자신의 남은 삶을 잘 설계하는 지혜로운 인생 경주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제1부 사랑하며, 살며

 

제1장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안 되네요

 

자궁암 말기 56세 부인과의 85일

“세계 일주도 못 해보고”

“제 평생의 꿈은 남편과 함께 세계 일주를 하는 것이었어요. 남편이 은퇴하면 같이 하려고 했지요. 그런데 세계 일주도 못 해보고….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착하게 사는 건데…. 사람들한테 못할 짓을 너무 많이 했어요. 특히 친척들에게요….”

먼 속을 바라보며 탄식하듯 이야기하는 우영희씨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영희씨는 56세의 부인으로 자궁암 말기 환자였다. 호스피스에 의뢰할 때 이미 복강 腹腔 내에 암세포가 퍼져 있는 상태였고 오른쪽 하지 정맥에 혈전증 血栓症 도 있었다. 우영희씨는 9월에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호스피스에 의뢰된 3월까지 6개월 동안 방사선 치료와 두 차례의 항암 치료를 받았다. 복부와 오른쪽 다리에 중간 정도의 통증이 있었으나 거동은 가능한 상태였고 의사가 보는 잔여 수명은 6개월 정도였다. 담당 의사는 환자와 그녀의 남편에게 말기 상태임을 설명하였으며 가정호스피스 간호를 받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고 했다.

의뢰 받은 후 병실을 방문한 필자는 우영희씨 부부와 만나서 호스피스에 대해, 또 호스피스 간호사와 자원봉사자들이 해줄 수 있는 도움의 내용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호스피스 가입 동의서에 남편의 서명을 받았다. 첫 만남은 대개가 탐색전이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호스피스 대상자의 입장에서는 담당 의사가 “더 이상 치료에 반응이 없다” 고 설명한 데다 “앞으로 차차 상태가 더욱 나빠질 것” 이라는 완곡한 표현을 들었는데, 퇴원을 하라면서 전에 잘 알지 못했던 호스피스에 대해 이야기하니까 무엇인지 의아해 한다. 호스피스 담당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개는 “아- 퇴원한 후에도 담당 의사와 연계가 끊어지지 않고 또 의료인이나 자원봉사자가 집으로 방문을 해주는 것이구나” 하는 정도로 이해한다. 거기다가 후원은 자유롭게 할 수 있으나 가정 방문에 따른 호스피스 비용은 무료라고 하니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우영희씨 부부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집으로 의료인이 방문해 준다는 데에 포인트를 두고 흔쾌히 호스피스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의료인이 아닌 자원봉사자는 당분간 필요 없을 것 같다고 넌지시 거절하였다. 일단 그들의 의사를 받아들이고 첫날은 그쯤에서 물러 나왔다.

두 번째 만남도 병실에서 이루어졌는데 다음 날 퇴원할 예정이었으므로 신체 상태를 검진하였다. 이는 호스피스에 가입할 당시와 그 이후의 변화를 비교해 보기 위하여 간단하게 체크해 보는 것인데 우영희씨는 오른쪽 다리에 부종이 심하여 오른쪽과 왼쪽 허벅지에 둘레가 9cm나 차이가 났다. 입술은 말라 있었으며 복수 腹水가 차 있었고 머리카락이 빠져서 모자와 베개 위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어디…”

우영희씨가 마른 입술을 떼어 혀로 축이며 운을 떼었다.

이렇게 누워 있으니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할 짓이 아니지요, 뭐. 어떤 때는 차라리 끝장이 나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우영희씨는 끝내 눈물을 글썽였다.

이렇게 환자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적극적으로 경청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그 이유는 듣는 사람의 태도 여하에 따라 조금씩 마음을 열면서 이야기를 계속하기도 하고 오히려 슬며시 열렸던 마음을 도로 닫아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들어주려고 자세를 고쳐 앉자 우영희씨는 계속해서 질병과 관련된 자신의 이야기를 해 나갔다.

“난 건강에 신경을 쓴 편이었어요. 암 검사도 정기적으로 했다구요. 작년에도 국립의료원에서 검사 했는데 정상이라고 하더니…”

우영희씨는 자궁암을 조기에 발견하기 위해 40세 이상의 여성들에게 해보기를 권장하는 팝 스미어 검사를 정기적으로 해왔다고 하였다. 지난 해 6월에 한 검사에서도 ‘정상’ 판정을 받았는데 3개월 뒤인 9월에 자궁암으로 진단받았다는 것이었다.

“그 검사 결과가 맞는 것이었을까요? 만일 맞는 것이었다면 어째서 ‘정상’이라는 통보가 왔을까요? 그 때만 제대로 알았더라도 이렇게까지는 안 되었을 텐데…”

우영희씨는 몹시 속이 상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병이 난 원인에 대해 말하였다.

“남편이 2년 전 정년 퇴직한 후 안절부절을 못 하데요. 집에 있는 걸 견디지 못하고… 그래서 내가 병이 났지요. 속을 많이 끓였어요. 남편이 겨우 안정되니 내가 그만 병이 나서… 남편만 안 그랬더라도 이렇지는 않았을 텐데….”

이것저것 생각하니 화가 나는지 이야기하면서 한숨을 푸욱 쉬며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였다. 우영희씨는 평상시 종교 생활을 조금은 했으나 이렇게 아파서 누워 있으니 경전을 잘 읽게 되지는 않는다고 하면서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쯤 되면 다음으로 미루고 방문을 끝마쳐야 한다. 환자가 지쳐서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집 약도를 받고 퇴원 후 집으로 방문할 것을 약속하고 돌아왔다.

다음날, 우영희씨가 집에 도착한 것을 전화로 확인한 후 약도를 보며 집으로 찾아갔다. 우영희씨처럼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에서 호스피스에 의뢰된 환자의 경우는 가능하면 퇴원 전날과 퇴원한 날에 환자를 방문하기로 정해 놓고 있는데, 그 이유는 말기 통고를 받고 방황하는 마음을 위로하고 신뢰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이다. 많은 환자들이 그 동안 담당 의사가 지시하는 대로 다 시행해 왔는데 이제 말기 상태가 되어 죽게 되니 더 이상 치료도, 입원도 안 된다고 하는 사실 앞에서 혼란스러워 한다. 이 때에 환자가 집으로 돌아가더라도 가정 호스피스 팀이 방문을 하며 담당 의사와 계속 연계가 된다고 하는 것은 어딘가 의지할 데가 생기는 것으로 환자와 가족의 마음에 안심이 되고 큰 위로가 된다. 그래서 병원에서 잠시 만났던 호스피스 팀 요원을 퇴원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서 다시 보게 되면 환자와 그 가족 모두에게 신뢰하는 마음이 생긴다.

퇴원 후 첫 번째 방문에서는 환자가 거처하는 집이나 방 내부도 보게 되는데 이는 환자와 가족이 처한 환경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또한 환자의 집으로 방문한다는 것은 주인과 손님의 위치가 서로 바뀜을 의미하기도 한다. 병원에서는 의료진은 어떻게 보면 주인의 위치였다. 환자는 손님으로서 주인의 보호와 도움을 받는 – 그래서 때로는 약자로 여겨지기도 하는 게 우리 의료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집에서는 환자기 주인이다. 호스피스 팀 요원은 손님으로서 겸손하게 환자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환자와 가족은 편안한 마음으로 홈 그라운드에서 의료진의 방문을 받는 것이다.

우영희씨의 집은 주택가에 위치한, 햇볕이 잘 드는 아담한 양옥이었다. 컹컹 짖는 커다란 개를 묶어 놓고 문을 열어주는 우영희씨의 남편을 따라 현관에 들어서니 현관 입구에 있는 딸 방에 누워 있던 우영희씨가 일어나 안방으로 자리를 옮기며 들어오라고 하였다. 구면이라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안방에 들어가니 우영희씨의 남편 외에도 허리가 굽고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한 분 주방에서 나와 인사를 하며 따라 들어왔다. 우영희씨 남편의 계모인데 우영희씨가 입원하게 되자 집안 일을 거들어 주고 있다고 하였다. 며느리를 바라보고 눈물을 훔치며 좀 어떠냐고 묻는 시어머니의 눈망울에 걱정이 묻어 있었다. 손에 묻은 물기를 앞치마에 닦고 있었는데 손마디가 굵은 것이 일을 많이 한 분 같아 보였다.

우영희씨는 퇴원 전에 복수를 뽑고 와서 배가 날씬해지고 오른쪽 다리의 부종도 조금 빠지기는 했으나 아직도 왼쪽보다 오른쪽 허벅지 둘레가 3cm 더 넓었다. 탄력 붕대를 감아주고 다리를 올리고 있도록 했다. 먹는 약과 음식에 대해 살펴보고 가족에게 어떻게 환자를 다루어야 하는지 알려드렸다. 환자는 다리의 통증도 있는데 처방된 약을 먹었으나 효과가 없었고 담당 의사가 적어준 약은 약국에서 취급하지 않는다고 하여 구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적어준 것을 보니 12시간 지속하는 경구용 마약성 진통제였다. 당시에 마약성 진통제는 약국에서 살 수 없었기에 남편이 병원에 가서 타 가지고 올 수 있도록 담당 의사에게 연락해 조처해 주었다. 그리고 적절한 영양 공급을 위해 우유와 야채즙을 먹으면 좋겠다고 하였더니 남편이 말하였다.

“우리 집사람은 우유와 야채를 싫어해요.”

“내가 왜 야채를 싫어해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야채예요. 없어서 못 먹지요. 더구나 남편이 만들어 준다면야 얼마든지 먹지요. 우유도 먹을 수 있어요.”

우영희씨가 남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말했다. 그래서 우유를 주었더니 한 컵을 주욱 마셨다. 이를 본 남편이 말했다.

“나는 집사람이 야채를 좋아하는 줄 전연 몰랐어요. 집에 녹즙기도 있는데 이제부터는 매일 갈아서 주지요.”

알고 보니 이들 부부는 남편의 직장 때문에 오랫동안 주말 부부로 지내와서 부인은 남편의 식성이나 취향을 잘 알고 세미하게 내조를 해왔으나 남편은 부인의 취향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필자와의 대화를 통해 우영희씨 부부도 그 때에야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어느 정도 환자의 건강 상태와 관련된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필자는 편안한 이웃집 아주머니와 같은 자세를 갖춘다. 환자가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기를 원하는 경우 들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사는 이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많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은 환자의 마음이 열렸을 때에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에 환자가 가장 관심을 가지는 건강 문제에 대한 도움을 주면서 환자가 원할 때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여유를 가지고 편안한 자세를 취해주는 것이다.

그날 우영희씨는 종교에 대한 이야기와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어릴 때 우리 마음에 교회가 있었어요. 나도 갔고 우리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도 모두 갔지요….. 그런데 우리 어머니와 할아버지는 절에 열심히 다니셨어요. 그래서 난 어머니와 불교를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었지요. 그리고 남편이 10남매의 장남인데 제사 지내야 하니까 시댁 식구들도 기독교보다는 불교를 좋아했어요.”

“가만히 누워 생각해보니 남편이 세계 일주 하는 게 꿈이고 지금 시어머니는 계모인 데다 형제가 많으니 재산 빼앗길까 봐 움켜쥐느라고 지금까지 애써왔는데 그게 다 죄인 것 같아요. 어릴 때 교회 가 봤으니까 죽은 후 내세가 있다는 것은 믿어요. 그러나 내 죄 때문에 좋은 데 못 갈 것 같아서…. 이제 다시 건강해진다면, 그럴 희망도 없지만… 만일 다시 건강해진다면 선생님처럼 좋은 일을 하고 싶어요. 그러나 이제 내가 얼마 산다고 또 종교를 바꾸겠어요?”

우영희씨는 때때로 울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다. 자신이 너무 돈에만 집착하여 잘못 살아  왔다고 후회하며 자신은 죄 때문에 죽어도 좋은 곳에 못 갈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는 잠으로 진지한 표정이었으나 다 이야기한 후에는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이날 우영희씨는 지난날을 회상하며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고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는 인간이 영물 靈物 임을 알려주는 일이기도 하다. 필자가 만난 대부분의 말기 환자들이 자신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지하게 되면 내세나 종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였다. 옆에서 이런 이야기를 함께 듣고 있던 우영희씨의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고 시어머니는 중간에 슬그머니 나가 버렸다.

신기한 것은 이렇게 환자가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평소에는 거의 하지 못하던 이야기들을 표출 表出하고 나면 대개 그날 밤에는 잠을 잘 잔다. 일부 호스피스 실무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이를 일명 ‘호스피스 효과’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우영희씨 역시 그날 밤에 잠을 잘 잤을 뿐 아니라 그 후 2~3일 간 편안한 마음으로 잘 지냈다고 했다.

3일 후, 퇴원하고 두 번째의 방문에서는 우영희씨나 남편 모두 전보다 훨씬 친근하게 대하는 모습이 그 동안 필자를 많이 신뢰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퇴원하니까 병원에서보다 더 잘 먹어요. 부담도 없고 또 최 선생님이 먹으면 좋다고 하니까 우유도 먹고 계란, 요구르트, 딸기도 먹었어요. 중국집에서 울면도 시켜서 한 번 먹어 봤지요. 먹은 것 다 적어 놨구요.

우영희씨는 노트를 꺼내 놓으며 말했다. 지난 번 방문했을 때 영양과 음식에 대해 제공했던 교육과 격려의 결과, 먹는 일에 즐거움을 느낀 듯했다. 그리고 우영희씨는 부종과 복수가 있어서 먹는 음식의 종류와 양 및 대소변 횟수 등을 기록하게 하고 있었는데 숙제를 잘하였다고 보여주는 것이었다. 말기 환자라고 하여도 음식을 즐기며 먹을 권리가 있다. 소량씩, 자주, 가족과 함께 먹으면서 살이 있음을 확인하게 해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영희씨와 같이 평생을 절약하고 살아온 주부는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참고, 맛있고 돈이 드는 음식은 가족들이 같이 먹자고 하여도 “난 그런 것 먹을 줄 모른다” 거나 “비위에 안 맞아서…”라고 얼버무리면서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통제해 왔을 터이므로 생의 마지막 순간에나마 영양 있고 좋은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격려할 필요가 있다(얼마 동안이나 먹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또한 입으로 먹을 수 있는 동안은 생명을 유지하고 살 수 있으므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가급적 가족과 함께 즐기며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필자의 경험으로는 대부분의 말기 환자 가족들이 음식 외에도 무엇인가 환자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을 찾아 최선을 다해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수소문하여 구한 약이나 음식을 무조건 환자에게 먹이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대개 그런 말을 안 하고 있다가 조금 친숙해지면 이야기를 하는데, 우영희씨의 남편은 자신이 구해온 알약 형태로 된 인삼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에서 구해 온 것이었으나 부인은 자신이 삼키기에는 너무 커서 먹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도 먹어 보라”고 권하는 남편과 “먹기 어려운데 왜 그걸로 사왔어요?” 하며 다투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마치 사랑 싸움 하는 신혼 부부를 보는 것 같았다.

이날 우영희씨의 신체 상태는 오른쪽 다리의 부종(浮腫)과 더불어 외생식기(外生殖器)에도 부종이 있었고 복수가 조금 차 있었다. 진통제를 바꾸고 난 후 다리의 통증은 가셨으나 다른 곳이 아프다고 하면서 멋 적게 웃었다. 알고 보니 양초치료 때문이었다. 방사선 치료 후 질 내부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양초를 사용하여 자가치료를 하도록 했던 것 같은데 생식기의 부종으로 인하여 양초를 질에 삽입할 때마다 통증이 심했던 모양이었다. 암세포가 항암제에 반응을 보이지 않아 호스피스에 의뢰한 환자이기에 양초치료를 더 이상 계속해야 할 필요는 없었으나 아무리 그만 두라고 말해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것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담당 의사와 상의해서 알려 드리겠어요.”

이렇게 말해 놓고 방문을 마치고 난 즉시 담당 의사와 통화하고 우영희씨의 방사선 치료를 담당했던 의사와도 통화하여 우영희씨에게 더 이상 양초 치료를 계속하지 않아도 좋다고 알려주었다. 이 말을 들은 우영희씨는 “안심이에요. 고마워요”하며 마치 필자가 자신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사실은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질 내부의 공간을 유지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서인 것을..

한편으로 우영희씨는 배에 복수가 차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생의 마지막 여정을 걸어가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복수가 무섭데요. 우리 할머니가 복수 때문에 죽었어요. 난 죽는 건 무섭지 않아요. 내 상태도 알고 있고. 죽으면 내세가 있어서 난 좋은 데로 갈 것만 같은 마음이에요. 단지 고통이 있을까 봐 걱정이지…”

지난 번 이야기할 때와는 달리 오늘은 자신이 죽으면 좋은 데로 갈 것 같다고 하였다.

“어제 이교수 부인(우영희씨의 지인)이 다녀갔어요. 그 양반은 천주교 신자인데 천주교에서는 고승을 청해다가 설법을 듣는데요. 그런데 들어보니까 끝에 가사는 길이 하나로 다 일치하더래 요. 그래서 똑같다나 요? 그냥 이 방에서 저 방 건너가듯 생각하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이제 와서 종교를 바꾸다가는 이것도 저것도 안 될 것 같고… 얼마나 살거라고, 너무 늦었지요?

역시 내세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불교도 좋고 기독교도 좋고 다 좋지요 뭐. 불교에선 극락이 보석으로 되어 있다고 그래요. 난 내세가 있다는 걸 믿어요.”

그러자 옆에 있던 남편이 “영혼이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 하며 기독교의 내세관과 천국에 관한 질문을 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가만히 듣기만 하던 시어머니가 불쑥 말했다.

“있기는 뭐가 있어. 죽으면 그만이지.”

평소에는 잘 안 하던 이야기였을 것 같은데 사랑하는 가족의 마지막을 앞에 놓고 우영희씨의 가족은 이렇게 필자와 우영희씨와 함께 한 동안 죽음과 내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영희씨는 내세가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고 하였으나 지난 번에는 자신이 죄가 많아서 죽으면 좋은 데 못 갈 것 같다고 했다가 오늘은 자신이 죽으면 좋은 곳으로 갈 것만 같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살아온 삶에 대해서는 여전히 후회와 죄책감을 나타내 보였다.

“지금까지 시누이나 시어머니께 한번도 인심이라고는 써 본 적이 없어요. 그게 가장 후회가 돼요. 최선생님은 이렇게 좋은 일을 하고 있는데… 남이 꽃동네 후원 회원 하라고 했을 때도 다른 사람에게 선전만 해주고 나는 우체국까지 가기가 싫어서 못했어요. 언제 죽을지 몰라 한번만 기부하겠다고 했더니 그렇게는 또 안 받는다잖아요. 내가 여태 그렇게 살아왔어요.”

우영희씨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우영희씨는 손아래 시누이가 대학에 붙어서 첫 등록금만 한 번 빌려주면 다음부터는 혼자 힘으로 공부하겠다고 애원하였을 때도 집에 돈이 있었으나 주지 않았다. 그 돈은 세계 일주를 위한 돈이므로 안 된다고 거절하여 시누이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결국 그 시누이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말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시누이의 생모이자 우영희씨 남편의 계모인 시어머니가 지금 집안 살림을 맡아서 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친척들에게 너무 못할 짓을 많이 했고 돈에만 집착해서 살아왔다고 후회하고 있었다. 우영희씨의 통증은 잘 조절되고 있었으나 부종은 발과 발등, 오른쪽 다리와 외생식기까지 점차 심해지고 있었고 복수도 여전하였다.

“아프고 나서부터는 그렇게 어린 시절 꿈만 꿔요. 꿈에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가 보이고…. 그럴 때면 소름이 끼치도록 무섭고 기분 나빴어요. 이러다 내가 죽는 게 아닌가 하고. 그런데 노 선생님(우영희씨를 담당하고 있던 종양내과 의사)이 ‘자신의 병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요?’ 하고 물어볼 때 ‘아이고 이제는 죽을 때 다 됐으니 준비나 하라’ 는 소리로 들렸어요. 그래 그 후로는 나도 각오를 했고 그런 꿈을 꿔도 그리 무섭지는 않았어요. 다만 죽을 때 아플까 봐, 통증이 있을까 봐 제일 걱정이지요. 다리도 이렇게 부으니 이러다 영영 걷지도 못하고 대소변도 남이 다 받아 내야만 되면 어쩌지요?’

담담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다가 몸서리치는 흉내를 내며 “아이 어쩌지?” 한다. 우영희씨는 현재 통증 조절이 잘 되고 있다. 오른쪽 다리와 복부에 통증이 있었으나 진통제로 조절이 되어 음식도 어느 정도 먹고 있으며 낮에는 한두 시간 정도 거실 소파에 나와 앉아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죽을 때가 되면 못 참을 정도로 아플까 봐 겁이 나요”하고 걱정스러워하였다. 우영희씨는 주변에서 암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을 봤다고 하면서 말했다.

“암으로 죽은 사람들 다 고통을 못 이겨 애쓰다가 갔어요. 어제 TV 영화에서도 암 환자가 마지막에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난 집에서 죽고 싶어요. 마지막에 가사 내가 기력이 진하고 달릴 때 노 선생님(우영희씨의 담당의사)과 의논해서 중환자실에 입원시킬 건가요? 그럴까 봐 겁이 나요. 편안히 죽지도 못하고 산소 먹이고 괴로운 시간을 연장할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에요. 이 양반들은(남편과 시어머니를 쳐다보며) 그럴 사람들이에요.”

 남편은 마지막에 입원을 안 시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고 하였다.

통증조절은 호스피스 케어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말기 환자가 24시간 내내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고 있든지 아프지 않게 하는 것이 호스피스에서의 통증 조절의 목표이다. 또한 임종 과정을 시작하면 촉각이 가장 먼지 소실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호스피스 케어를 잘 받고 있으면 대개는 마지막에 오히려 통증을 덜 느끼게 된다. 이런 점을 설명하면서 마지막까지 호스피스 팀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그래요? 정말 요?” 하였다. 말기 환자에게 ‘병이 나을 것’이라는 말을 해줄 수는 없지만, 이렇게 그들이 걱정하는 부분을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마지막까지 함께 할 것이라는 사실은 희망이 된다. 그리고 말기 환자가 죽음을 향해 마지막 과정을 겪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에 입원을 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가족들이 응급실로 모시고 가기도 하지만 우영희씨와 같이 본인이 분명하게 집에서 죽고 싶다고 의사 표현을 하는 경우는 환자의 의사를 존중해 주는 것이 좋다. 우영희씨의 남편은 처음에 얼마간 집에 있다가 상태가 더 나빠지면 입원시켜 병원에서 마지막을 맞게 하고자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으나 부인의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하고 또 환자와 가족이 함께 몇 번 더 토론을 하더니 우영희씨가 원하는 대로 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우영희씨의 남편은 필자에게 격려가 되는 말을 해 주었다.

“사실 말이죠. 서 사람이 저렇게 누워 있으니 온 식구가 다 영향을 받아요. 그래도 최 선생님이 다녀가시고 나면 환자가 아주 편안해 하니까 우리도 아주 좋습니다. 그래서 식구들의 모두 최 선생님이 오시는 걸 기다립니다.”

실제로 오후 2시에 방문하겠다고 약속을 해도 아침 10시부터 환자를 씻기고 기다리다가 필자가 집에 들어서면 반갑게 맞이하며 환자가 누워 있는 주위에 함께 둘러앉는다. 그리고는 필자가 우영희씨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혈압도 재고 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환자에게 “식사는 얼마나 하셨어요?” 하고 묻기라도 하면 때로는 환자보다 얼른 먼저 대답을 해버리기도 한다.

어느 날은 대문을 열어주는 우영희씨 남편의 눈이 퉁퉁 부어 있어서 물어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저 사람(부인을 가리키며)이 다락에서 뭘 찾아다 달래서 꺼내러 갔다가 집사람이 입던 옷들을 보고…. 옷 하나하나마다 추억이 서려 있어서 거기서 그만 목놓아 울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죽어 가는 걸 옆에서 보고 있기가 차-암 마음이 아픕니다. 신앙이 있으면 신앙의 힘으로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너무 고통스러워요. 어떻게 하면 이 고통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제가 위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제발 좀 가르쳐 주십시오.”

우영희씨의 남편은 목 메인 소리로 이야기를 하였다. 우영희씨는 남편의 이런 속마음에 대한 토로를 처음 듣는 듯한 표정이었다. 우영희씨의 남편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지금은 이 사람(부인)이 이나마 라도  살아 있으니 위로가 되지만요. 죽고 나면 참, 어떻게 지내야 할지… 사소한 물건 하나하나에도 눈물이 나고…. 이 사람은요, 재산 모으고 집 사느라고 알뜰히 살았어요. 그래서 가구나 물건 하나하나에도 이 사람 손때가 안 묻은 게 없고…”

자신도 경추 4번과 5번 사이에 디스크가 있는 환자인데 부인이 이러고 있으니 너무 마음이 아프고 부인 죽은 후에 어떻게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하였다. 필자는 한참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우영희씨가 얼굴을 필자에게 향한 채로 말했다.

“최 선생님! 우리 집 양반한테 그런 소리 말라고 해주세요.”

“죽고 나면 그만이에요. 새 출발해야지, 남자가 어떻게 혼자 살아요. 그런 소리 말라고 하세요. 사실 저 양반(남편)에게 미안해서 그렇지 나야 이렇게 남편의 도움을 받으며 죽을 수 있는 게 복이지요. 저는 고맙게 생각해요. 아내가 남편을 끝까지 돌봐드려야 하는 건데 그렇지를 못해서…”

“우리 집사람이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하니까 조금 마음에 위로가 되네요. 나는 그렇게는 생각을 못하고…”

우영희씨의 남편은 필자를 향해 이야기를 하였다. 그날은 그렇게 필자를 가운데 놓고 탁구를 치듯 대화를 하였지만 그 이후로 이들 부부는 점차 서로 허심탄회하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장례절차와 예식에 대해서도 의논을 하였고 우영희씨는 남편에게 자신을 돌봐주어서 고맙다고 하면서 자신이 죽고 나면 너무 빨리는 말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참한 사람 골라서 새 가정을 일으켜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남편은 아내에게 그 동안 아이 키우며 내조 잘 해주고 알뜰하게 살아 주어서 고맙다고 하면서 모아 놓은 돈을 헛되게 쓰지 않고 알뜰하게 잘 쓰겠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였다

우영희씨에게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우영희씨의 집을 방문하는 동안 처음에는 자녀들을 보지 못하였다. 고등학생인 아들은 학교에 간 시간이라서 그렇고 전문대를 졸업한 딸은 집에 있을 때도 있었는데 조심스러워서 나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느 날은 필자가 현관을 들어서는데 딸이 방문을 빼꼼이 열고 쳐다보고 있었다. 하얗고 갸름한 얼굴에 백치미가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서 있더니 잠시 후에 방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다음 방문 때는 거실에 나와 인사를 하였는데 우영희씨의 남편이 딸이라고 소개를 시켜 주었다. 그리고는 우영희씨가 누워 있는 안방으로 따라 들어올 듯하다가 아버지가 눈치를 주자 그만 제 방으로 도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더니 필자가 방문을 마치고 나오려고 하자 외출 준비를 하고 먼저 나가는 것이었다. 잠시 후 필자가 대문을 나서자 우영희씨의 달 수희 양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타났다. 함께 걸어가면서 수희 양은 이야기했다.

“선생님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기회가 없어서 오늘 일부러 기회를 만든 거예요. 엄마 병세는 어느 정도예요? 저희 집은 원래 가족간의 대화가 없고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색대로 다 제각각 이에요. 요즘은 집안이 무덤 같고 집에 있는 게 너무 힘들어요. 머리가 아프고 미칠 지경이에요. 내가 하느라고 해도 아빠는 사사건건 제게 시비예요. 너무 심한 말을 해서 쳐다보면 그런다고 화내세요. 따로 살고 싶지만 그것도 힘들고…”

수희 양은 마치 봇물이 터지듯이 술술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둘러보니 마침 근처에 공원이 있어서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어머니의 질병은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끼치므로 미리 상담을 해두는 것도 좋을 듯싶어서였다. 수희 양은 26세의 처녀였으므로 어머니가 말기 상태라는 것, 그리고 ‘말기’라는 말이 의미하는 내용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고 집안 일도 돕고 아버지와 교대로 어머니 병 수발도 잘 해드리도록 권유하였다. 수희 양은 잠시 울먹거리더니, “저- 사귀는 사람이 있는데요” 했다. 그 사람에 대해 좀 더 말해보라고 하자 부인이 있고 아이도 둘이나 있는 남자라고 하였다. 들어보니 수희 양보다 나이는 조금 많았으나 학력은 더 아래고 직업은 농산물 경매 시장에서 친구 일을 도와주고 있다고 하였다. 수희 양 말로는 그 남자가 실수로 아이가 생겨서 할 수 없이 결혼을 했으나 지금은 부인과 함께 살고 있지 않으며 돌이 조금 지난 쌍둥이 딸은 시골에서 그 남자의 어머니가 키우고 있다고 하였다. 수희 양의 남자 친구인 이씨는 수희 양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부인하고 이혼하는 대로 결혼하자고 하였으며 수희 양도 이씨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미 이씨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듣고 보니 무어라고 할 말이 없었다. 윤리적 측면을 떠나서 이 문제는 우영희씨 부부가 알아서 처리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어머니인 우영희씨는 지금 말기 환자이고, 또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더구나 이 무렵에는 우영희씨의 병이 처음보다 많이 진행되어서 복강 내에는 복수 대신 종양이 많이 차 있고 부분적인 장폐색(腸閉塞)도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만일 우영희씨 부부가 아직 모르고 있는 일이라면, 외부인인 필자가 부모보다 먼저 알게 되어서 이야기를 해준다는 건 그분들의 수치심이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수희 양에게 부모님께 직접 말씀 드리고 의논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였다. 수희 양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저도 그 생각을 해보기는 했어요. 어머니만 건강하셨더라면…. 어머니가 입원해 계신 동안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퇴원하고는 점점 더 저러시니 말씀드릴 기회를 못 얻었어요. 아버지하고는 사이가 나빠서 만일 제가 임신한 사실을 아시게 되면 아마 저를 죽이려고 하실 거예요. 선생님이 좀 도와주세요.”

그날은 그렇게 헤어지고 내내 무거운 마음으로 지내다가 며칠 뒤 우영희씨의 집을 방문하였다. 우영희씨는 하의를 멋은 채로 홑이불을 덮고 있었는데 아래가 많이 붓고 아파서 옷을 입고 입기가 불편하여 벗고 있다고 하였다. 우영희씨는 홑이불을 열고 하체를 보여주며 말했다.

“벌써 이렇게 아프고 두 다리도 못 쓰게 됐으니 어쩌지요? 병원에선 아프다는 말도 못해요. 툭 하면 사진 찍어보자, 검사해 보자 하는데 그게 더 괴로웠어요. 난 그저 편안히 죽고 싶지 괜히 산소 꼽고 억지로 생명 연장시키는 건 싫어요. 내가 이게 사람이에요? 대소변도 방에서 해야 하고… 남이 변기를 대주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우영희씨는 이렇게 말하며 자기 연민에 빠졌다. 우영희씨의 상태가 서서히 나빠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딸의 임신 사실을 말해 주어야 하나? 혹시 눈치채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영희씨가 먼저 딸 이야기를 꺼내었다. 딸이 어려서부터 산만하고 공부하기를 싫어해서 지능이 좀 모자라는 것은 아닌가 하고 전문가에게도 찾아가 보았는데 별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공부를 못해서 전문대학밖에 못 나왔다고 했다. 그나마라도 공부시키느라고 자신이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졸업 후에 몇 번 스스로 직장을 수해서 다니겠다고 하였으나 못 하게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후회가 된다고 했다.

“평소에도 아버지와 떨어져 지내서 서먹한 데다가 내가 아프고 나서는 수희가 늦게 일어나서 아버지가 아침밥을 짓고 하니까 둘 사이가 더 안 좋아진 것 같아요. 아버지는 사사건건 수희에게 시비 걸고 수의는 또 그게 못마땅해서 한 마디씩 하면 아버지는 대든다고 화내지요.”

남편이 옆에 있을 때는 전혀 딸 이야기를 안 하더니 오늘은 남편이 등산을 갔다고 하면서 딸과 남편 사이의 갈등을 조금 이야기했다. 그러 우영희씨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그 날은 차마 딸이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며칠 뒤에 전화 연락도 없이 수희 양이 호스피스 사무실로 필자를 찾아왔다. 자신이 지금 임신 6개월이라고 하면서 어제 아버지가 “너 아무래도 몸이 이상한 것 같으니 나와 병원에 한 번 가 보자” 고 하셔서 짐을 나온 후 친구 집에서 자고 이리로 왔다고 했다. 엄마가 건강하면 자신을 도와주시겠지만 상태가 안 좋으니 차마 말 못하겠다고 하면서 죽어가는 엄마를 위해 옆에서 무엇인가 해드리고 싶지만 이 상태로는 안 되겠다고 하였다. 아버지와는 도저히 말 못하겠고 남자 친구인 이씨가 돈을 해주겠다고 했으니 유산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부모님께 솔직하게 털어놓고 그 사람과 결혼하는 방향으로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자신도 이씨와 결혼하고 싶지만 부모님이 반대하실 거라고 말했다. 남자 친구인 이씨의 부인이 작년 말에 집으로 전화해서 집안이 발칵 뒤집혔었다고 하면서 그 이후로 집안 분위기가 무덤과 같았고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고 토로하였다. 전에 자신과 같은 여자를 보면 비난했었는데 지금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을 생각하니 더욱 견디기 어렵다며 괴로운 모습이었다. 수희 양은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우선 집으로 들어가 있도록 달래서 보낸 후 긴급히 임시 호스피스 팀 회의를 하였다. 아무래도 우영희씨 부부에게 이 일을 알리고 우영희씨 가족이 이 일을 논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아기 아버지와 결혼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미혼모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호스피스 팀의 사회복지사는 미혼모 시설을 알아보기로 하였다.

딸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우영희씨 부부는 깜짝 놀라면서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오히려 필자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우영희씨는 이미 딸의 문제를 신경 쓸 만한 건강 상태가 아니었다. 우영희씨의 남편도 심신이 지치고 약해져서 아내의 병상 곁을 자주 비우고 있던 대였다. 우영희씨의 남편은 허탈해 했다.

“예쁘게 웨딩드레스 입히고 예식장에서 손잡고 데리고 들어가는 모습을 그려보곤 했었는데…”

또한 아이 아빠가 누군지 짐작이 가는데 ‘그 놈’과는 절대로 결혼을 시킬 수가 없다고 하였다. 아이가 둘이나 있는 유부남인데 그럴 수 있느냐고 하면서 ‘그 놈’이 이혼을 한다고 해도 결혼시킬 수는 없다고 분노하였다. 할 수 없이 수희 양은 산부인과 의사의 진찰을 받은 후 A 미혼모 시설에 입소하게 되었다. 우영희씨의 남편은 딸에게 “어머니 장례식에 안 와도 좋으니 그곳에서 잘 지내라”고 당부하였다. 우영희씨 또한 자신이 딸을 돌볼 수 없는 상태라서 그런 시설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고 하면서 제발 잘 적음하고 지내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 일 후로 우영희씨의 남편은 더욱 지친 듯한 모습이었다. 어느 날은 산에 다녀와서는 몹시 괴로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오늘 도봉산에 갔었는데 누워 있는 집사람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려 그 곳에 온 다른 여자들과 비교가 됐어요. 전에는 가까운 뒷산에만 다녀와도 기분 전환이 되곤 했는데 이젠 점점 힘드네요. 집사람이 아직 살아 있어도 내 마음이 이런데 저 사람 가고 나면 어떻게 살까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어요. 아이들 생각해서라도 내가 건강해야 할 텐데 이러다 병이라도 날 것 같아요.”

우영희씨의 남편은 예비적 우울 단계에 있었다. 예비적 우울이란 다가오는 아내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미리 슬퍼하는 것으로 옆에서 누군가가 지지하고 하소연을 잘 들어주어야 한다. 우영희씨의 남편은 아내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사별하면 상처가 심할 것 같다고 말하였다. 아내가 죽고 나서 몇 개월 후에 남편도 따라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느냐고 하면서 생각이 현실보다 빨리 가서 마음이 아픈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호스피스에서 방문하고 나면 아내가 편안해 하는 것 같아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는 한다고 했다. 그래서 따뜻한 말로 위로해 주었다.

“현재는 살아 계시니 우리 서로 최선을 다하십시다.”

“그 말을 들으니 조금 위로가 되네요.”

우영희씨 남편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이날 우영희씨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고 하루에 서너 번씩 변을 본다면서 이곳 저곳 불편한 증상을 설명하였다.

“산부인과 과장님 환자는 약물요법(함암제)부터 하고 방사선 치료를 한다는데 김선생님(산부인과에서 우영희씨를 담당하였던 의사. 후에 우영희씨는 종양내과로 전과하였다) 환자는 방사선 치료를 먼저 하고 약물요법을 한대요. 그래서 난 방사선 치료를 먼저 했는데 어떤 사람은 약물치료부터 해 가지고 7년째 살아 있다잖아요. 차라리 과장님께 봤더라면…”

분노의 감정을 의사의 치료 스케줄에 투사하고 있었다. 딸 때문에도 속이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남편이 잠시 방을 비운 사이에 딸이 잘 있는지 필자에게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 딸이 어려서부터 야뇨증이 있었고 크면서는 외박을 자주 했다고 하면서, “사람 만들어 보려고 애 많이 썼는데…” 하고 눈물을 흘렸다. 우영희씨의 남편은 딸이 임신한 것을 눈치채고 못마땅해 했다고 하였다.

“내가 죽으면 둘이 같이 못 살 거예요. 그래서 결혼 준비 다 해놓고 통장도 따로 만들어 놨어요. 남편에게도 그건 딸 몫이라고 말했어요. 남자가 괜찮으면 나 죽기 전에 결혼해도 좋아요. 선생님이 알아보고 결정해 주세요. 아니라면 그곳 (수희 양이 입소한 A미혼모 시설)에서 애 낳고 평생 봉사 활동이나 하든지…”

우영희씨는 이건 유언이라고 생각해 달라며 말했다. 필자를 은인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앞으로 딸이 종교를 가지고 남은 생을 잘 살 수 있도록 이끌어 달라고 당부하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말하기도 힘든 상태의 환자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그것도 유언이라고 하면서 당부를 하는 모습을 보니 부담감으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한편으로는 할 수 있는 한 수희 양을 도와주어야 할 텐데 어떻게 하는 것이 잘 도와주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수희 양은 잘 적응하기를 바라던 어머니의 기대와는 달리 낯선 A미혼모 시설에서 견디지 못하고 필자의 집으로 찾아왔다. 어머니의 부탁도 있고 하여 하룻밤 재워준 뒤 돌려보내려고 하였으나 수희 양은 “여기서 살게 해 달라”며 며칠을 필자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 후, 이번에는 B미혼모 시설로 갔다. 수희 양이 A미혼모 시설로는 죽어도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여 다른 기관을 소개해 주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아이 아버지인 이씨와 연결이 되어 한 번 만났는데, 이혼을 전제로 부인과 별거 중에 수희 양과 가까워졌다고 했다. 별거 중인 부인과의 사이에 돌 조금 지난 쌍둥이 딸이 있는데 시골에서 이씨의 모친이 키우고 있다고 하였다. 수희 양에 비하면 이씨 자신은 부족하고, 또 자격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혼하는 대로 수희 양과 결혼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함께 만난 이씨의 누나는 동생이 딸 많은 집의 막내아들로 철없이 자라서 일을 만들고 다녔다고 하면서 집에서는 본인이 원하든 대로 해주려고 하니까 수희 양 부모님과 연결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좀 복잡하기는 하지만 남자가 수희 양을 사랑한다고 하고 두 사람이 결혼하고 싶어하는 데다가 남자 쪽 집에서도 그렇게 하겠다고 하니 우영희씨 부부만 허락하면 일은 마무리 지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영희씨 역시 그런 생각을 하였는지 눈으로 동의하는 의사를 나타내 보였으나 우영희씨의 남편이 완강하게 반대를 하고 나섰다. 딸이 평생을 혼자 산다고 해도 ‘그런 놈’과는 혼인을 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희 양은 지방에 있는 우형희씨의 시누이 집으로 보내어졌는데, 그 시누이는 우영희씨가 대학 입학금을 빌려주지 않아서 결국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였던 바로 그 시누이라고 했다. 그녀는 배다른 오빠인 우영희씨의 남편이 부탁을 하자 옛날의 감정에도 불구하고 수희 양을 맡아준 것이었다. 사람이(우영희씨) 죽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하면서 수희 양이 출산할 때까지 돌보겠다고 하며 데리고 갔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 우영희씨는 입맛이 없고 먹으면 토하니까 불편하다고 하면서 미음과 물을 조금씩 마시는 정도였고 부종으로 양다리는 통나무처럼 뻣뻣했다. 돌아눕는 것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다.

우영희씨의 남편은 점차 소진(消盡)되어 갔고 필자가 방문할 때 집에 없는 날도 더러 있었다. 자원봉사자의 방문도 허락하여 남편이 외출하고 없는 동안에는 호스피스 자원봉사자가 우영희씨의 병상을 지키기도 하였다.

이 무렵에는 우영희씨가 내세와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했는데 각 종교의 죽음관이나 내세관에 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아파서 누워 있으니 친지들이 자주 전도하러 온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십여 년 동안 불교를 믿었기 때문에 종교를 바꾸려고 하니 죄책감이 든다고 하였다.

우영희씨는 어린 시절 이야기도 하였는데 자신이 어릴 때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임종 전에 친정 어머니는 자신을 품에 꼭 안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유언을 하셨다고 한다.

“나 죽은 후 얼마 지나면 새어머니가 오실 거야. 엄마가 보고 싶더라고 참고 새어머니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또 새어머니가 동생들을 낳을 건데 네가 큰아이니까 동생들을 잘 돌봐주어야 한다. 그래서 새어머니가 너를 예뻐하셔. 내가 이렇게 먼저 가서 정말 미안하다. 이 다음에 죽어서 다시 만나자.”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있다고 정말 새어머니가 들어왔는데 우영희씨는 돌아가신 친정어머니의 당부 말씀을 지키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고 싶어도 이를 악물고 참았다고 한다. 새어머니 말씀 잘 듣고 새어머니가 낳은 동생들을 업어주며 새어머니와 함께 잘 살아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마음 속으론 돌아가신 어머니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고 하면서 “나중에 죽어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이 없었으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이제 죽으면 그렇게도 뵙고 싶었던 친정어머니를 만날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렌다고 정색을 하며 진지한 얼굴로 말하였다. 이 무렵 다리부터 시작된 우영희씨의 부종은 점점 심해져서 허리까지 올라와 있었다.

우영희씨와 남편은 장례에 대해서도 서로 의견을 나누었는데 매장(埋葬)과 화장을 놓고 결정을 못 하다가 어느 날은 남편이 말했다.

“예식은 불교식으로 하고 화장하는 것으로 80% 이상 결정을 보았어요. 그러나 준비는 매장과 화장 양쪽 다 하고 있고 사진과 검은 양복도 준비 중이에요.”

이때가 임종하기 일주일 전이었는데 우영희씨는 물이 잘 안 넘어간다고 하였다. 입술이 바싹 말라서 보릿물에 적신 거즈를 입술에 대어 주었더니 남편이 옆에서 수시로 갈아주고 있었다. 자꾸 변이 나올 듯하여서 하루에 십여 차례나 앉아서 대소변을 보는데 아주 조금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장이 완전히 폐색된 상태였다. 입으로 먹는 것도, 아래로 나오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먹은 것도 없는데 상당히 많이 토해요. 쑥색 물이 나옵니다.”

남편이 이렇게 말하였고 우영희씨는 토할 때는 힘들지만 토하고 나면 그래도 시원하다고 했다.

그 동안 필지가 방문하면 시어머니나 남편이 안 듣는 데서 소곤거리듯 딸 이야기를 하던 우영희씨가 이 날은 남편 앞에서 말했다.

“나는 이제 걱정 안 해요. 수희 문제는 선생님과 당신에게 맡기고 나는 이제 가요. 최선생님께 너무 큰 짐을 맡겨서 미안해요.”

남은 사람에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자신은 편한 맘으로 간다는 뜻이라고 남편이 옆에서 보충 설명을 하였다. 남편도 왼쪽 아랫배와 횡경막 부위가 아파서 한약방에 가서 약을 지어왔다고 하는데 초췌한 표정이었다. 그 동안 말라서 옷이 헐렁해졌다며 허리에 손을 쑥 넣어 보였다. 우영희씨는 이제 임종 과정을 시작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이제는 몸과 마음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영희씨 몸의 부종은 가슴까지 올라와서 거의 전신이 부어 있었다.

임종 사흘 전에 방문하였더니 남편은 병이 나서 한약을 다려 먹고 잠들어 있고 우영희씨는 물에 적신 거즈를 입술에 덮은 채 누워서 말했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소변이 많이 나와요.”

왼쪽 다리를 제외하고는 그 동안 가슴과 등허리까지 올라와 있던 부기가 모두 빠지고 없었다. 우영희씨는 그 동안 죽음과 내세에 대해 생각하면서 종교를 바꿀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는데 이 날은 그 문제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그 동안 많이 생각해 봤는데…. 어제는 밤새 잠 안 자고 생각해 봤는데… 안 하기로 했어요. 나 하나 편하게 죽으면 그만인 거 같아요. 어머니도 만나야 하고…”

우영희씨는 입에서 거즈를 떼어내고 힘들게 이야기했다. 입 안에 가래가 차서 말하는 동안에도 두어 번 뱉어내었다. 이미 눈동자의 초점이 없어진 상태였다. 우영희씨의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임종 과정(dying process)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임종 과정 중에 나타날 수 있는 증상과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기록된 프린트물을 주며 읽어보도록 하였다. 그리고 혹시 떠나기 전에 만나야 할 친지들이 있으면 연락하여 만나도록 권유하였다. 장례식은 집에서 치르기로 의논이 된 상태였다.

임종하기 전날 방문하였을 때 우영희씨의 얼굴은 볼이 움푹 패인 게 놀랄 만큼 수척해 있었다. 목 아래 양쪽으로 생겨난 덩어리가 전보다 더욱 크게 보였다. 우영희씨는 어눌한 소리로 “몸이 기울어요” 했다.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침상은 평평하게 그대로였으나 우영희씨는 마른 얼굴에 눈을 번쩍번쩍 빛내면서 불안한 듯 안절부절 못하더니 다급한 소리로 필자에게 나가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평소와 아주 다른 태도였다. 우영희씨 남편에 의하면 필자가 방문을 마친 후 곧 숨을 몰아쉬기(Cheyne Stokes Breathing, 임종 직전에 나타나는 독특한 호흡 양상) 시작하였으며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운동을 하고 돌아와 보니 눈을 크게 뜬 채 기다리고 있어서 손을 잡아주니 곧 눈을 감고 아무 말 없이 숨을 멈추었다고 하였다. 딸의 출산일을 한 달 정도 남겨 놓은 시점이었다. 세계 일주 여행은 해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우영희씨는 갔다. 호스피스에 가입한 지 85일 만이었다.

우영희씨의 사망 소식을 들은 수희 양은 망설이다가 임신 9개월의 무거운 몸으로 집에 왔다. 엄마가 보고 싶어서 오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우영희씨의 남편은 딸을 흘깃 쳐다보고는 당장 가라고 했다. 친지들에게 배부른 모습을 보였다고, 딸이 생각 없는 정신 나간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장례식장에 오래 있지도 못하고 수희 양은 눈물을 흘리며 자구 뒤돌아보면서 우영희씨의 시누이 집으로 돌아갔다. 우영희씨의 유해는 국립묘지 안에 있는 납골당에 모셔 놓기로 하였다. 나중에 남편이 돌아가시면 합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우영희씨의 장례식이 끝난 후에 사별 후 지지 모임을 가졌다. 이는 호스피스 환자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 환자를 돌보았던 호스피스 요원들이 모두 모여 함께 차를 마시거나 음식을 먹으면서 그 동안 그 환자를 돌보면서 새롭게 배운 점, 보람 있었던 점, 아쉬웠거나 후회스러운 일 등을 서로 나누고 감정을 정리하여 다른 환자를 다시 돌볼 수 있도록 지지하고자 하는 모임이다. 필자는 이 모임에서 우영희씨가 임종 전에 한 말과 태도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고 토로하였다. 그러자 함께 참석하였던 마리안 킹슬리(Marian Kingsley) 교수(선교사)님이 “몸이 기운다”라는 말은 아마도 자신의 “죽음이 임박하였다”고 하는 사인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하였다. 우영희씨가 “몸이 기울어요” 라고 말한 후에 “몸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했고 다음 날 아침에 사망한 것을 되짚어보니 그렇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 말을 들은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였었다. 도한 교수님은 우영희씨가 필자에게 나가달라고 말한 것은 그 동안 필자가 우영희씨에게 해줄 것은 다 해주었다는 의미라고 해석해 주셨다. 이제는 가족하고만 있고 싶다는 의사 표시였을 것이라고 하면서 죽음이 임박한 환자는 에너지도 얼마 남지 않았고 시야도 점차 좁아져서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남아 있는 사람이나 아주 가까운 가족과 마지막 몇 시간, 혹은 몇 분을 보내고자 한다고 설명해 주셨다. 그런 이유로 인해 볼일을 다 마친 사람에게는 가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다. 사실 우영희씨로부터 나가 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의아하기도 하고 내심 섭섭한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킹슬리 교수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해가 되었다. ‘인간이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말로 사인(sign)을 보내기도 한단 말이지’ 라는 생각을 하며 경이로운 느낌이 들었다. “그랬군요, 우영희씨” 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우영희씨의 사례에서 덧붙이고 싶은 내용이 몇 가지 있다. 우영희씨가 사망하고 한 달쯤 뒤에 고모 집에 머물던 수희 양이 서울에 있는 C미혼모 시설에 와서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외국에 입양되었다. 그리고 우영희씨가 사망한 진 일 년이 채 못 되어 우영희씨의 남편은 사십 대의 직업 있는 여자에게 처녀 장가를 들었다. 새 살림을 차리고 오순도순 살던 어느 날 국립묘지 안에 있는 납골당에 모셔 두었던 우영희씨의 유해를 비워 벼렸다고 했다. 그 이유는 우영희씨의 남편과 함께 묻히고 싶은 새 부인의 권유 때문이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리고 일 년쯤 지나서 수희 양이 한 번 찾아왔는데 환한 표정으로 곧 결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상대가 누구인지 묻자 이씨라고 하였다. 수희 양이 낳아서 입양 보냈던 바로 그 아이의 아빠! – 지금 수희 양은 그 남자와 결혼하여 다른 아이를 낳아 재미있게(?) 살고 있다고 한다. 가끔씩 떠나 보낸 아이가 생각나기도 하지만 애써 잊어버리려 노력하고 있다고 하면서…

 

 

 

노란 은행잎이 떨어지던 날 떠난 70대 담도암 노인

“남북 통일도 못 하고”

말기 담도암 환자인 김선학씨는 모 종교에서 두 번째로 높은 위치에 있는 분이라고 했다. 그는 남북 통일을 위해 모든 준비를 다 해놓고 이제 실행되는 것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자신이 이렇게 되었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중심으로 ‘통일’이라는 대역사를 이루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했다. 김XX이 아직 살아 있을 때였는데, 그와도 다 이야기가 되어서 곧 통일을 위한 무언가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북한에 가야 하는데 이렇게 몸이 아파서 못 가게 되었다고, 원통하다고도 하였다. 김선학씨는 이야기를 들으며 뻔히 쳐다보는 필자에게 말했다.

“최선생은 아직 젊고, 여자라서 생각도 못하겠지만, 큰 일이 진행되고 있어요. 이제 곧 남북 통일이 될 텐데 그걸 못 보고 죽을 것 같아서 억울해요.”

김선학씨는 대학병원의 종양내과 전문의로부터 의뢰 받은 환자였는데 며느리도 의사였다.

“나는 전공이 달라서 호스피스는 잘 몰라요. 이렇게 집으로까지 방문을 해서 도와주시니 참 감사해요. 우리 아버님은 워낙 성격이…”

며느리는 말끝을 흐렸다. 김선학씨를 주로 돌보는 사람은 부인인데 최선을 다해 환자를 편안하게 해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처음 방문하였을 때는 집에서 김선학씨 부부와 일하는 사람만 있었고, 김선학씨는 70세가 넘은 남자 어른인데다가 분위기가 무거워서 신체검진을 하고 방문 일정을 의논하는 정도로 끝냈다. 김선학씨는 평소에 건강하여 감기도 잘 앓지 않았다고 하는데 점차 소화도 안 되고 몸이 불편하여 아는 의사에게 진찰을 하여 보았더니 이미 말기 상태라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혹시나 하고 항암 치료를 해보았으나 별 반응이 없어서 호스피스에 의뢰된 환자였다. 호스피스에 가입한 후 통증은 잘 조절되고 있는 상태였고 식사량이 적은 관계로 당분간 일 주일에 두 번 정도 링거 주사를 주기로 하였다.

그런데 두어 번 방문하면서 보니까 김선학씨가 하루 종일 누워서 한숨만 쉬다가 부인에게 짜증을 부리곤 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환자라도 소일거리가 없으면 더욱 짜증스러운 법이다. 무엇인가 소일거리가 없을까 둘러보니까 김선학씨의 집은 마당이 넓었다. 마침 산책하기에 좋은 계절이어서 낮에 두어 시간 정도 마당에서 해바라기를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김선학씨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마당에 나갈 수 있게 휠체어라도 빌려 드릴까요?”

“그럴 수 있어요?”

김선학씨는 반가운 반응을 보였다.

미국에서는 가정에 있는 환자에게 의료기구를 대여해 주는 회사가 있어서 의사가 처방하면 바로 배달을 해주지만 한국에는 아직 그런 시스템이 없어서 가정 호스피스에서는 기회가 있으면 기증을 받아 두었다가 필요한 환자에게 빌려주곤 한다. 마침 김선학씨가 호스피스에 가입할 무렵에 돌아가신 한 환자의 부인이 비싼 휠체어를 사놓기만 하고 써보지도 못했다고 하면서 기증을 해주셨다.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는 신형 휠체어였다. 그런데 사무실 공간이 좁고 넣어놓을 창고도 마땅치 않아서 난감하던 차에 김선학씨에게 사용하도록 권해보면 어떨까 싶어 제안을 한 것이었는데 의외로 김선학씨가 관심을 보이며 반기는 것이었다. 그 전까지 김선학씨는 필자가 방문하면 신체 상태 검진을 하고 혈압을 측정한 후 복용하는 약을 체크해 주는 동안 묵묵부답으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였는데 그 날은 반가워했다.

“원하시면 다음에 방문할 때 가지고 올게요.”

“그거 좋겠어요. 다음에는 언제 오실 건가요?”

그 날은 휠체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었고 이틀 뒤 커다란 휠체어를 접어서 자동차 뒷좌석에 싣고 갔다. 휠체어를 펴서 사용법을 알려주자 열심히 듣더니 부인에게 접는 법, 펴는 법을 익혀 놓으라고 하면서 이것저것 질문도 하였다. 휠체어로 인해 김선학씨와 대화의 문이 열리고 조금 가까워진 듯 했다. 부인 말에 의하면 휠체어를 가져다 준 이후로 김선학씨는 낮 시간의 대부분을 마당에 나가 휠체어에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몇 시간씩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다고 하였다.

어느 날인가 오후 3시쯤에 방문하였더니 김선학씨가 마당에 있었다. 강마른 노인이 휠체어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뒷모습은 보기에도 안쓰러워 선뜻 마당 안으로 들어설 수가 없었다. 한참을 김선학씨의 등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윽고 김선학씨가 손으로 휠체어 바퀴를 돌려 방향을 바꾸다가 필자를 발견하고는 반가워 하였다.

“아이쿠, 오셨다고 말씀을 하시지요.”

“원하시면 좀 더 계셔도 돼요.”

김선학씨는 이미 두어 시간이나 나와 앉아 있었다고 하면서 들어가자고 하였다.

방으로 들어온 김선학씨는 자리를 잡고 앉아서, 부인에게 차를 좀 내오라고 이르더니 정색을 하고 필자에게 00교에 대해 하느냐고 물었다. 잘 모른다고 대답하자 자신이 00교의 제2인자라고 소개를 하였다. 그러면서 –교의 교리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는 제갈공명을 아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삼국지에 나오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고 대답하자 지금 자신의 입장이 바로 제갈공명이라며 눈물을 주루륵 흘리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북한에 올라갈 참인데 이렇게 되어서 할 수 없이 다른 사람을 보내기로 하였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두어 번 더 김선학씨는 00교의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필자로서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고, 단군을 중심으로 자신의 종교를 통해 남북 통일을 곧 할 수 있다니 도대체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김선학씨가 일생 일대의 무언가 큰 일을 계획하여 추진해 왔고 그것이 곧 실현될 단계에 있는데 완성을 보지 못 하고 그만 죽음을 맞게 되어 몹시 원통해 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필자가 처음 방문하였을 무렵에는 마음에 그런 생각이 가득 차서 침통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되어 필자는 물론 가족도 김선학씨의 옆에 가기가 어려웠던 기간이었다. 그러나 혼자 휠체어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게 되자 김선학씨의 마음에는 ‘인간이 원해도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 같았다. 아무리 원통해 해도, 한숨을 쉬어 보아도, 눈물을 흘려보아도 사태를 바꿀 수 없음을 깨닫고는, “할 수 없지 않겠소. 하늘이 돕지 않는 것을…” 하며 신음소리처럼 나직하게 혼잣말을 하기도 하였다.

호스피스에서는 환자가 무언가 못 다한 일이 있고 그것을 마치고 싶어하면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김선학씨의 일은 호스피스에서 도와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남북 통일이라니! 갑자기 김태환씨가 생각났다. 그는 1988년도에 호스피스 케어를 받았던 분이었다. 시인이고 아동문학가였는데 00일보 창간추진위원이기도 하였다. 김태환씨는 말기 간암 진단을 받고 나서도 자신의 건강을 지키고자 무척 애를 쓰며 노력하였었다. 여러 가지 민간 요법을 쓰며 절제하였고 웃음 또한 잃지 않았었다. T씨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 쓰던 책을 마무리하고 싶어하여 호스피스 팀도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도록 격려하였다. 결국 딸이 삽화를 그리고 병중에 쓴 것을 합하여 동시집을 두 권 출간하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을 기뻐하면서 “안녕”하고 떠났다. 비록 00일보의 창간에는 더 이상 개입할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김선학씨의 경우는 그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일 – 마무리하고 싶어하는 일이 무언지 알고는 있으나 도무지 호스피스에서 개입할 수가 없는 일이라서 안타깝기만 했다. 역시 인간의 도움에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였다. 자꾸만 쇠약해져 가는 자신의 몸을 느끼며 그토록 절망하는 김선학씨를 옆에서 보면서 계획은 인간이 세우지만, 그것을 이루는 이는 인간이 아님을 깊이 깨닫게 된 시간들이었다.

김선학씨가 호스피스에 가입한 지 두 달쯤 되어서는 점차 날씨가 추워지면서 김선학씨의 몸도 휠체어에 앉아 있기에는 힘든 상태가 되어 다시 방안에만 있게 되었다. 쇠약해저서 링거 주사를 주는 것도 부담스러운 상태가 되어 중단하였고 김선학씨의 얼굴과 몸은 황달로 인해 노랗게 착색이 되었다. 임종 과정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하고 노란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지던 날 김선학씨는 떠났다. 죽으면 끝이라고, 내세는 없다고 하더니 계획하던 일이 성취되는 것은 보지 못한 채, 두 눈을 부릅뜨고는 끝내 눈을 감지 못하고 떠나고 말았다. 부인이 애를 써서 겨우 눈을 감겼다는 이야기를 장례식 때 들었다.

 

 

제2장 내세요? 죽으면 끝이지요 뭐

 

유방암 말기 부자 집 부인의 미련과 집착

“난 죽기 싫어요!”

김정숙씨는 대학병원 암센터의 소장인 김교수가 의뢰한 환자였다. 남편이 모회사의 회장이었고 김교수와 절친하여 김정숙씨는 병원에서 VIP 대접을 받고 있었다. 김정숙씨는 특실에 입원해 있었는데 폐전이와 골전이가 있는 상태였고 소변줄도 가지고 있었다. 의뢰를 받고 첫 방문차 병실에 올라가서 문을 여니 손님을 접대하는 거실이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일반 병실보다 훨씬 넓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거실 규모의 병실이 있고 한 가운데에 있는 침대에 김정숙씨가 누워 있었다. 얼굴이 부어서 푸석푸석해 보였고 표정이 거의 없어 보였다. 오랫동안 특실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이제 퇴원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간병인이 옆에 있었고 잠시 후 병실 안쪽에 있는 다른 공간에서 김정숙씨의 남편이 나왔다.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차림이었다. 필자를 한 번 흘깃 쳐다보더니 호스피스 가입 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김정숙씨가 퇴원하면 집으로 방문할 수 있도록 차를 보내겠다고 했다. 그는 부인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나가 버렸는데, 마치 사무적인 일을 처리하는 태도처럼 별 표정이 없어 보였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서 보니 김정숙씨는 울고 있었다. 김정숙씨가 유방암 진단을 받은 것이 3년 전이었고 그 동안 수술과 항암 치료를 하면서 생명을 연장하여 왔으나 이제는 말기 상태가 되어 호스피스에 의뢰된 것이었다.

그날 오후에 김정숙씨가 퇴원하였으므로 다음 날 집으로 방문을 하였다. 당시만 해도 호스피스에 차가 없어서 대중 교통을 이용하던 시절이었는데 김정숙씨의 남편이 영화에서나 보던 커다란 검정색 승용차를 보내왔다. 김정숙씨의 집은 병원에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는데 정원이 넓었다. 기사를 따라 잔디밭을 지나가는데 금붕어가 노는 연못도 있었다. 집은 2층이었으며 거실이 넓은 것이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외국 사람의 집 같았다. 별세계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가정부의 안내를 받아 집안으로 들어갔는데, 김정숙씨는 2층에 자리를 갈고 누워 있었다. 김정숙씨는 쇠약한 중에도 반갑게 필자를 맞아 주었다. 신체 검진을 하고 방광 소독을 해주는 동안 김정숙씨는 계속해서 깊은 한숨을 쉬고 있었다. 무슨 걱정이 있느냐고 하자 그만 울먹이며 물었다.

“내가 살 수 있을까요?”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꼭 살아야 돼요!”

그녀의 눈에 고였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집은 깊은 적막감에 싸여 있었고 분위기가 무거웠다. 가정부와 간병인이 옆에 있었으나 식구들은 보이지 않았다. 자녀가 셋인데 모두 나가고 없다고 했다. 낮 동안 혼자 지내는 모양이었다. 김정숙씨는 머리카락 빠진 것을 가리기 위해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얼굴은 달처럼 둥그런 모습(Moon face)이었다. 아마도 장기간 복용하고 있는 약의 부작용으로 인해 생겨난 증상인 것으로 보였다.

두어 번 방문하면서 보니 김정숙씨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모회사 회장인 남편, 풍부한 물질, 다 키운 자녀 등 김정숙씨는 외형적으로 볼 때 가진 것이 너무도 많았다. 이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이해도 되었다. 또한 남편이 아침, 저녁으로 김정숙씨의 방에 들르기는 하나 함께 자지 않은 지가 오래되어 내심 남편에 대해서도 불안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김정숙씨의 정서는 상당히 우울하였고 희망이 없는 좌절 상태에 있었다. 안주인이 그러니까 가정부와 간병인도 조심스러워했고 집안 분위기는 무거웠다. 김정숙씨는 한숨을 깊게 쉬면서 소리쳤다.

“병원에서 못한다는데 난 이제 어쩌면 좋아요? 난 죽기 싫어요!”

김정숙씨는 종교가 없었고,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나이 오십 세인데 이 세상에서 더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몇 번 방문하면서 김정숙씨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김정숙씨로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생명을 연장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하였다.

어느 날은 김정숙씨 댁을 방문해보니 그녀가 누워 있는 이층 방안에 연기가 가득했다. 이제 막 도사(?)가 다녀갔다고 했다. 방안에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연기가 가득 차 있었고 눈이 매웠다. 문을 열어놓고 조금 연기가 나간 후에야 보니 김정숙씨는 엎드린 채 울고 있었다. 어깨를 만지며 어떻게 된 거냐고 하니까 “눈이 매워서 그래요” 하더니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수소문을 해서 도사를 찾았는데 살 수 있다고 장담을 하니 한 번 해보는 거라고 하였다. 그런데 아파서 정신이 없었다고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김정숙씨의 등에는 지름이 1.5cm 정도 되어 보이는 자국들이 여러 개 있었다. 도사가 허연 가루를 바르고 뜸을 떴다고 하는데 뜸 뜬 자국이라고 하기에는 무척 컸다.  저렇게 해서 환자기 견딜 수 있을지 의아스러웠다. 그날은 필자에게 오후에 오면 좋겠다고 하더니 도사가 오는 시간을 감안해서 그랬던가 보았다. 병원에서 더 이상 치료가 안 되고 말기라고 하니까 무엇이든 붙잡아 보고자 하는 심정으로 ‘용한 의사(?)’를 찾았고, 고칠 수 있다고 하니까 많은 돈을 주고 몸을 맡기기로 하였던 것이라고 했다. 딱했으나 하지 말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다른 대안이 엇는 상황에서 환자가 무언가를 하겠다고 하는데, 살려줄 것도 아니면서 “그것은 나쁘니 하지 마시오”하기도 난감했다.

“그렇게 하면 정말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필자의 물음에 김정숙씨는 힘없이 대답했다.

김정숙씨는 그 동안 사용하던 진통제로 통증을 거의 못 느끼고 있었는데, 도사가 와서 매일 무엇인가를 하는 동안 통증 정도가 높아져서 담당 의사가 약의 용량을 올려주었으나 그래도 계속 끙끙거렸다. 3주 정도 지난 어느 날은 필자가 방문하였을 때 도사가 아직 있어서 밖에서 조금 기다렸는데 잠시 후에 그가 가려고 나오는 게 보였다.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수염도 4~5cm 정도 나 있는 남자였다. 외모는 도사같이 보이기도 하였으나 ‘저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고쳐 주겠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방으로 들어가 보니 김정숙씨의 몸에 있는 동전 크기 만한 자국들이 분화구처럼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쑥이 아직 남아 있는 몇 군데에서 연기가 나는 것이었다. 아프지 않느냐고 물으니 김정숙씨는 눈물을 흘리면서 몹시 아프다고 하였다. 남아 있는 숙을 털어내고 김정숙씨의 몸을 살펴보니 등뿐만 아니라 다리와 무릎 등 몸 앞쪽에도 군데군데 자국이 있었는데 크기도 동전만큼 크거니와 푹 패이고 고름이 생긴 곳도 있어서 저러다가 패혈증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괜찮으세요?”

“이것도 이젠 못하겠어요. 너무 아프고 견디기가 힘들어요.”

필자의 걱정스런 물음에 김정숙씨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염증이 생긴 곳도 있다고 알려주고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김정숙씨는 다음날부터 열이 나고 뜸 자국 근처가 붉어지면서 전신적으로 염증 반응이 생겨서 한동안 항생제를 사용하여 염증을 치료하였다.

염증이 가라앉아갈 무렵 김정숙씨는 여의도에 있는 00교회 목사님이 병을 잘 고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어떻게 연결한 방법이 없는지 찾고 있다고 하였다. 종교에 관심이 있는지 물어보자 단순히 낫고 싶어서 그런다고 하였다. 필자가 알기에 그 교회는 크고 신도가 많아서 신앙 생활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병을 고치고자 청하면 그분이 오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김정숙씨는 아는 사람을 통해 연결을 해 달라고 부탁해 놓았으니 꼭 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 무렵에는 김정숙씨를 방문하는 시간 중 절반 가량은 그 이야기를 하며 보냈다. 도사에게 기대했던 것처럼 김정숙씨는 그 목사가 오면 단번에 자신의 병을 낫게 해 줄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 기대를 하는 동안은 얼마간 김정숙씨의 마음이 안정되어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는 방문하였더니 환자가 풀이 죽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하고 묻자 옆에서 간병인이 손가락을 입술에 대는 시늉을 하면서 “어제 목사님이 다녀가셨어요” 했다.

“그런데요?” 하고 묻자 여러 번 간청을 하니까 겨우 시간을 내서 그분이 오시기는 했으나 김정숙씨가 원하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안 하더라고 하였다. 낫게 해주겠다고 하지도 않았고, 안수기도를 해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저 두려움 없이 잘 죽으려면 믿음을 잘 가져야 한다면서 내세와 종교 이야기만 하다가 가셨다는 것이었다. 그 일로 인해 김정숙씨는 ‘이제 정말로 기댈 데가 없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 것 같았다. 살기 위해 그토록 애를 쓰는 모습을 보니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호스피스에 가입한 지 두 달 가까이 되었을 때인데 처음 병원에서 퇴원했을 때와는 달리 김정숙씨의 남편은 2~3일에 한 번 정도 2층에 올라 온다고 하였다. 사업상의 바쁜 일도 많을 터였다. 자녀들 역시 다 직장에 다니거나 대학생이라서 거의 얼굴 보기가 힘들다고 하였다. 대학생인 막내아이만 매일 저녁 엄마 방에 와서 함께 있다가 간다고 하였다. 김정숙씨는 아무래도 남편에게 여자가 생긴 것 같다고 하면서 울었다. 자신이 병든 것에 대해 화를 내면서 병 때문에 자신이 오랫동안 아니 노릇을 못했으니 남편을 나무랄 수만도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김정숙씨는 자녀들을 두고 가고 싶지는 않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김정숙씨의 몸은 점차 쇠약해지고 있었다. 음식도 미음 정도가 고작이었다. 아직 힘이 있을 때 남편과 자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좀 녹음해 두면 어떻겠느냐고 하였더니 고개를 저었다. 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어떻게든지 살 수 있게만 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방광 세척을 해주고 신체 간호를 해주었으나 심리적으로는 김정숙씨와  크게 가까워지지는 못하였다. 김정숙씨는 계속 생명 연장을 위한 조치를 강구하였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 외에는 관심도 없었다. 토룡탕과 고로쇠 달인 물, 한약 등 할 수 있는 것은 다 구해서 쓰고 있었다. 그러나 김정숙씨의 몸은 점차 쇠약해져 갔고 물도 잘 넘어가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김정숙씨의 남편은 김정숙씨보다는 객관적인 것 같았다. 상태가 나빠지는 것을 눈치채고는 필자에게 아내의 상태가 어떤지 물어왔다. 그래서 임종 과정을 곧 시작할 것 같다고 알려 주었다. 가능하다면 환자 옆에 있고 환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위로해 주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하며 임종 과정과 관련된 프린트물도 주었다. 임종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증상과 그에 대한 대처 방안을 인쇄해 놓은 것이었다. 그날부터 남편이 2층에 매일 올라왔고 부인 곁에서 밤에 함께 자기도 하였다. 남편이 가까이 하는 것이 김정숙씨에게는 안정이 되기도 하였지만 삶에 대한 집착을 더욱 부추기는 작용도 있었던 것 같았다. 임종하는 날도 김정숙씨는 자신은 결코 죽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안 돼!” 하고 소리치다가 숨이 멎어 버렸다. 두 눈을 부릅뜬 채, 두려움과 공포로 얼룩진 얼굴로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그렇게 김정숙씨는 떠나고 말았다. 전혀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떠난,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남편의 재혼 상대까지 정해주었으나… 40대 유방암 여인과 함께 한 57일

“제발 살고 싶어요.”

임영선씨(42세, 여)는 밤에 자다가도 갑자기 기침이 나오면서 숨이 가빠지면, 잠이 깨어 아침까지 다시 잠들지 못한다고 하였다. 12세, 9세 된 두 아들의 엄마인 그녀가 유방암으로 진단받은 것은 호스피스에 가입하기 3년 전이었다. 그때 오른 쪽 유방 절제 수술을 받았고 그 동안 항암치료를 14번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암세포가 전이되어 늑막에 문제가 있었으며 빈혈 증세도 있고 가슴 통증과 경미한 정도의 호흡 곤란 증세가 있었다. 환자와 가족 모두에게 이러한 병황(病況)을 설명했다는 의사의 의뢰서(Medical Form)을 받았다.

의뢰 받은 후 처음 방문하였을 때 임영선씨 가족은 곧 이사 간다고 짐을 꾸리고 있었는데, 친정어머니와 언니가 와서 도와주고 있었다. 임영선씨는 강북의 조그마한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새로 지은 강남의 커다란 아파트로 이사 갈 예정이라고 하였다. 최신식의 새 집으로 이사 간다는 사실이 몹시 자랑스럽다는 듯이 이야기하던 임영선씨는 문득 말을 멈추고 “그런데 내가 그 새 집에서 얼마나 살 수 있겠어요?” 하며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 좋은 집에서 얼마 살지도 못하고 곧 떠날 거라고 생각하니 숨이 막혀요.”

임영선씨는 그 집에서 조금이라도 더 살아보려고 아직 상가나 주변 근린시설이 정비되지 않는 상태이나 서둘러 이사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임영선씨의 가장 큰 고충은 밤에 자다가 새벽 2~3시쯤 되면 갑자기 기침을 하면서 숨이 가빠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자는 남편을 깨우고 창문을 열어달라는 등 소동을 피우는데, 왼쪽 배가 벌떡 이면서 숨이 멎을 것 같은 공포심이 든다고 하였다.

“불안하면 호흡 곤란이 더 와요. 두 달 전부터 감자기 심해졌어요. 살고 싶어요! 정말 살고 싶어요!”

임영선씨는 자신이 죽을까 봐 두렵고 공포스럽다고 하였다. 또 고통이 있을까 봐 두렵기도 하다고 하였다. 아이들이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엄마는 아파서 놀러 가지 못한다고 “아이그 이놈의 병 – ” 하며 주먹을 휘두른다고도 하였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글썽이고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밤에 자주 개고, 호흡 곤란 증세가 나타나면 남편이 함께 일어나 옆에 앉아 있어 주고 화장실에 따라가 주느라고 함께 못 잔다고 하였다. 임영선씨의 이런 상황은 심한 불안에 의해 나타나는 공황 발작과 비슷하였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신체적 원인보다는 심리적인 측면에 의해 더욱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처음 방문했을 때 불안하면 숨이 더 가쁘다고 말하여 활력 징후를 측정해 보니 호흡수가 1분에 36회였고, 맥박수는 156회였는데 한참 동안 자신의 심경을 이야기하고 나서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을 때 다시 측정해 보니까 호흡수가 20회, 맥박수가 116회로 떨어져 있었다. 임영선씨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는 정서가 활력 징후에 대단히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었다.

임영선씨는 자신이 얼마 안 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마무리를 해 놓는다는 의미로 남편의 재혼 상대를 이미 정해 놓았다고 했다. 남편과 나이 차이가 많았던 임영선씨는 친한 친구의 언니가 42세인데 아직 결혼을 안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얼마 전에 그 친구와 친구 언니, 그리고 남편(49세)에게 간곡히 청을 하여 자신이 죽으면 그 언니와 남편이 결혼하도록 이미 약속을 받아 놓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 임영선씨의 호흡 곤란 증세는 오히려 더 심해졌다고 하였다.

“말이 그렇게 해 놓았지만요.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나 봐요. 그때부터 가슴이 죄는 것 같고 호흡 곤란이 심해지곤 했어요. 지금은 그 친구도, 그 언니도 만나기가 싫어요. 오늘 죽을까, 한 달 후 죽을까 걱정이에요. 선생님, 제발 살고 싶어요.”

임영선씨는 말하면 엉엉 울었다. 남편 말로는 호스피스에 가입하기 얼마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면서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처음에는 반응을 안 했으나 부인이 하도 진지하게 졸라서 죽어가는 부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그러겠다고 약속했다고 하였다.

사람의 심리란 이렇게 묘한가 보다. 처음에 임영선씨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의미에서 아이들 옷도 정리하고 유언을 녹음하기도 하다가 남편의 재혼 문제를 아이들 양육 문제와 결부시켜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과 친한 친구의 언니라면 임영선씨네 사정도 잘 알고 아이들에게도 잘 해줄 것 같아서 본인들이 사양하는 것을 억지로 주선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막상 본인들이 그러겠다고 약속을 하고 나자 이번에는 임영선씨의 마음에 심한 갈등이 생겼다고 하였다. 남편과 아이들을 볼 때, 그 여자(친구 언니)와 함께 웃으며 있는 모습이 겹쳐지고, 집안의 손때 묻은 물건들을 볼 때도 그 여자가 자기 대신 만지고 있는 모습들이 겹쳐 보여서 미칠 것 같고, 그러면 갑자기 숨이 가빠져서 창문을 다 열라고 소동을 피우게 된다고 하였다.

임영선씨는 호스피스에 가입한 후로 두 번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두 번 다 밤중에 앰뷸런스로 응급실을 통해 입원하였다. 갑작스런 호흡 곤란 증세가 너무 심하여 집에서 조절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처음 병원에 입원했을 때 임영선씨는 호스피스 팀 멤버이면서 원목실에 근무하던 최 전도사님의 방문을 받고 “제가 종교 생활을 6~7년 했어요. 그러나 신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맨날 성직자 흉이나 보고 다녔지요.” 했다. 그러고 보니 그 동안 임영선씨에게서는 그때까지 전혀 종교적인 냄새가 나지 않았었다. 종교인이라고 짐작할만한 물건도 없었고 본인도 그런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방문하니 임영선씨는 차분한 모습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기도를 해봤어요. 그런데 아이들도 남편도 쌓아 놓은 재물도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생각이 들자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어요. 참 이상하지요 마음이 편안해지니까 의사가 와서 피 뽑는다며 바늘로 여러 번 찌르는데도 그전 같으면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을 텐데 그런대로 참을 수 있었어요. 전에는 아이들 때문에 제일 걱정이 되었거든요. 그리고 난 … 가난하게 자라서 그런지 물질에 대한 욕심이 … 애착이 강했어요.”

퇴원 후 임영선씨는 얼마간 잘 지내는 것 같았으나 다시 호흡 곤란 증세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언니가 속을 썩인다고 하였다. 매일 아침에 와서 늦게까지 임영선씨의 온갖 시중을 다 들어주던 언니가 이제 오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친정어머니도 네가 독차지하지 말고 동생들 생각해서 그만 내려 보내라고 해서 너무 속이 상했다고 했다.  어머니야 그렇다 치고 언니에게는 그저 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 쓰는 것보다 배나 더 돈을 주고 있는데도 그렇게 말하더라고 하며 분하다고 했다. 한편 임영선씨의 언니는 그 동안 자신의 가정 살림은 팽개쳐둔 채 와서 동생 시중을 들어주었으나 이제는 자신이 너무 지쳤고, 또 임영선씨가 조금 견딜 만하게 보이니까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만 와도 될 것 같아서 그랬다고 하였다. 그리고 친정어머니의 경우도 지방에서 동생들과 함께 있었는데 임영선씨 집에 와 있느라고 오래 집을 비워서 동생들이 어마 언제 오시느냐고, 제발 좀 오시라고 조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임영선씨의 입장에서는 이제 겨우 견딜 만한데, 자신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언니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요. 미움 때문에… 그렇게 잘해 줬는데도 언니가…”

임영선씨는 자신의 옷깃을 꽈악 잡은 채 덜덜 떨며 눈물을 글썽였다. 언니가 쉬는 동안 자원봉사자들이 차례로 돌아가며 환자의 집을 방문하여 도와주었다. 며칠 쉰 언니가 미안하다고 하면서 다시 환자의 집으로 출근하여 수발하기 시작하였으나 임영선씨의 마음은 여전히 편안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한번 마음이 틀어지자 다시금 죽음에 대한 공포가 환자의 마음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주 심해요.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가 않아요.”

‘죽음’이란 말을 하고 있을 때 임영선씨의 가슴이 들썩이면서 숨을 가쁘게 쉬고 있었다. 잠시 안정되었던 마음에 다시금 불안과 공포가 자리를 잡았다.

며칠이 지나자 이번에는 왼쪽 팔 안쪽과 손등에 있는, 전에 항암제 맞았던 혈관 부위가 벌겋게 발적(發赤)되고 부어 오르는 증세가 나타났다. 그러자 임영선씨는 벌게 진 부위를 보여주며, “이건 죽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에요.” 하였다.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부분적으로 염증이 생긴 것으로 보여 냉찜질을 해주며 임종 증상이 아님을 설명해 주었으나 막무가내였다. 자신은 곧 죽을 것이라며 친지들을 다 부르고 소동을 떨었는데 언니 말에 의하면 마치 미친 것 같았다고 했다.

“이제 어쩌나? 내 자식, 내 남편은 어찌하나?” 하고 울면서 춤을 추듯 돌면서 소리치고 발광을 하더라고 했다. 언니도 정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담당 의사의 의견은 현재 쓰고 있는 약의 부작용 때문인 것 같다고 하였다. 호흡 곤란을 감소시키고 식욕도 좀 돋우어 주기 위해 호르몬제를 여러 달 째 쓰고 있었는데 그 약의 사용을 중단하기로 하였다.

약의 사용을 중단하고 나서 며칠 동안 임영선씨의 기분은 조금 명랑하여진 듯하였다. 호스피스에서 방문하는 시간에는 가발을 쓰고 아파트 밑에까지 내려와서 마중하여 주었으며 표정에도 조금 생기가 돌았다.

“시댁 족 친지 한 사람을 우리 집에 발걸음도 못하게 유언하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용서의 기도문’이라는 조그마한 책을 읽어 보니 절반 쯤 용서할 마음이 생겼어요.” 하면서 그런 마음이 드니까 조금 안정이 되더라고 했다. 통증은 이제 가셨다고 하였으나 왼쪽 손등의 발적 부위는 여전히 벌겋고, 조그마한 물집도 한 군데 남아 있었다.

그런데 며칠 후, 기분이 이상하다면서 기침을 하였다. 체온이 38도 7부나 되고 가슴이 아프다고 하여 다시 입원을 하였는데 진찰 결과 폐렴이었다. 전신 상태가 쇠약한 호스피스 환자들에게 감기와 폐렴은 흔히 올 수 있는 감영성 질환이었다. 임영선씨는 “이제 병원 안 오고 죽은 후에나 오려고 했는데… 그런 이제는 죽을 때까지 퇴원 안 하고 여기 있을래요” 하였다.

임영선씨는 말기 환자이기는 하지만 그 동안의 상태가 금방 죽을 정도는 아니었는데도 겁이 날 때마다 곧 죽을 것이라고 하며 온 가족을 부르고 유서를 쓰거나 유언을 녹음하는 등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조리게 해 왔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두 번째 입원한 시점에서 ‘죽을 것’이라는 임영선씨의 말을 가족들이 그다지 실감하고 있지는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의료진의 입장에서도 곧 사망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폐렴을 치료하면 조금 더 살아 있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입원 때는 상황이 전과 조금 달랐다. 환자 본인이 느끼는 호흡 곤란의 정도가 전과는 달리 몹시 심하였다. 흡입하는 산소의 양도 조금씩 많아져서 1분에 6리터가 들어갔다. 밤에도 잠을 잘 자지 못할 뿐 아니라 환자인 임영선씨 자신이 스스로 얼마 못 살 것 같다고 하면서 유언하겠다고 친척들을 다 오라고 불렀다. 그리고 히스테리컬 하게 양쪽 눈알을 굴리면서 말했다.

“숨차지 않게 해주세요. 말하고 있으면 말하는 동안에는 거기에 신경 쓰느라고 숨차는 걸 모르니 좀 덜하네요.”

임영선씨는 눈 밑이 갈색으로 변하고 잘 먹지도 못했다. 숨을 헐떡이면서 “이게 사는 거예요? 아무것도 못 먹고 이렇게..” 하며 괴로운 표정이었다. 한편으로 팔과 손에 생겼던 발적과 물집은 다 없어지고 새살이 돋아났다. ‘저 새 살처럼 임영선씨의 마음도, 몸도 건강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지켜 보기에 안타까웠다. 호스피스 팀이 번갈아 임영선씨를 방문하였는데 말을 안 하면 숨이 멎고 죽을 것 같다고 하면서 그렇게 숨쉬기가 어려운 중에도 말을 하려고 하였다. 헐떡이면서도 천천히 자신의 심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중간중간 입을 벌리고 숨을 쉬곤 하였다.

입원한 지 열흘 째 되던 날은 필자에게 꼭 할 말이 있다고 하면서 무언가 말하려고 하였는데 그날 따라 옆에서 수발하던 언니가 숨쉬기 곤란하니 나중에 얘기하라고 자꾸 환자를 말려서 못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임영선씨는 그만 그렇게도 하려고 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알려주지도 않은 채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두 번째로 입원한 지 11일 만이었고 호스피스에 가입한 지 57일 만에 그토록 사랑하던 남편과 두 아들, 그리고 두고 떠나기 아쉬워하던 모든 것을 이 세상에 남겨 놓은 채 그만 가버리고야 말았다. 새벽 5시경 숨이 차서 괴로워하다가 말 한 마디 못하고 “허~억” 하더니 그냥 떠나더라고 했다.

입원해 있는 동안 임영선씨의 친구와 임영선씨가 자기 남편과 결혼 해달라고 부탁했던 친구 언니가 찾아왔었다. 그 언니는 임영선씨가 하도 권하니까 환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그랬던 것이지 다른 마음은 없었다고 하면서 그것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하였다. 임영선씨의 남편도 아내를 안고 위로하면서 그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하였다. 어떻게든 사랑하는 아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자 애쓰는 임영선씨 남편의 모습이 눈물겨웠다. 그러나 그 말을 이해하였는지 못하였는지 말이 없던 임영선씨는 그만 그렇게 훌쩍 가버리고야 말았다.

 

장례식 후 임영선씨의 남편은 필자에게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고인이 생전에 파출부, 가정부 다 써 봤으나 신통치가 않았어요. 그래서 마지막 입원하던 날 아침에도 아이들 도시락을 고인이 싸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아이들을 남에게 맡기겠어요? 내가 해야지요. 할 겁니다. 지금은 방학이라 아이들이 시골에 가 있어요. 집사람이 입원하기 전에 내 양복도 두 벌이나 준비해 놓고 넥타이도 새로 사 놓고 갔어요. 온 집안을 둘러보면 보이는 곳마다 그 사람의 손때가 묻어 있어요. 자다가도 일어나 생각하고… 밤에 못 자던 거 생각하고… 새벽 2~3시에야 잠들곤 합니다. 낮에 일하다가도 생각나고…”

한참 일할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임영선씨의 남편은 마치 넋 나간 사람처럼 허공을 쳐다보며 건조한 음성으로 말하다가 우는 것이었다. 남자들이 중년에 상처하면 ‘에게 웬 복이야?’ 라며 몰래 화장실 가서 웃는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임영선씨 남편의 경우를 통해서 깨달았다.

두 달이 넘도록 아내가 사용하던 이부자리를 그대로 둔 채, 방안의 아무것도 손대지 못하게 하고 가신 이의 환영과 함께 사는 듯 했다. 만일 임영선씨가 들을 수 있다면 말해주고 싶었다.

“걱정 마세요, 임영선씨. 남편이 임영선씨를 너무나 그리워해요….”

 

 

어머니 꿈에 나타나 부른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52세의 폐암 말기 환자

“할 수 없지요, 뭐”

박남식씨는 52세 된 남자 환자였다. 진단명은 폐암(소세포암) 말기. 폐암은 대개 늦게 발견되어 치료할 기회를 잃는 경우가 많은데 박남식씨도 그런 경우였다. 직업이 청소부였던 박남식씨는 고된 일과를 담배 피우는 맛으로 견디어 왔다고 하는데 하루에 평균 2갑 정도를 피웠다고 했다. 스물두 살 대부터 30년 간 피워온 담배를, 폐암 진단을 받고 나서도 끊기가 어려워 호스피스에 가입한 후에도 하루에 서너 개비는 피우고 있었다. (말기 환자들은 담배뿐 아니라 알코올도 원하면 허용한다.)

박남식씨의 주된 증상은 기침과 가래였다. 숨도 조금 차다고 하였는데, 폐에는 통증을 느끼는 세포가 없어서 폐암 환자는 통증 대신 호흡곤란을 호소하게 된다. 처음에는 단순히 감기 정도로 생각하고 기침약을 사 먹었으나 호전되지 않아 병원에 가보았더니 폐암이라고 했고 진단 당시 이미 말기 상태였다고 했다. 혹시나 하고 의사의 권유에 따라 입원하여 치료를 두 차례 해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고 하였다. 두 번째 입원하여 퇴원할 무렵 호스피스에 의뢰되어 퇴원 전 병실에서 한 번 보고 퇴원한 다음날, 환자의 집으로 방문하였다. 박남식씨는 산 동네 전셋집에 살고 있었고 맞벌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퇴원하면서 부인이 일을 그만 두었다고 하였다. 자녀는 셋인데 두 딸은 결혼하였고 아들은 졸업하고 취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박남식씨는 내성적인 사람으로 말이 별로 없었다. 반면에 부인은 활달하고 외향적인 성품이어서 무엇을 물어보면 박남식씨의 대답을 기다릴 시간도 없이 부인이 옆에서 대신 대답을 하곤 하였다. 그래서 필자가 대답을 청하는 눈짓을 하면 박남식씨는 빙그레 웃으면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기만 하였다. 그래도 몇 번 방문하면서 낯이 익으니까 필자가 방문하면 눈으로 반기는 표정을 짓곤 하였으나 여전히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은 부인이 외출하고 없는 사이에 박남식씨가 “내가 얼마나 살 수 있을까요?” 하고 물었다. 박남식씨의 눈이 필자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박남식씨가 말기 상태라는 사실은 부인과 자녀들만 알고 있었고 박남식씨에게는 알리지 않았다고 부인이 전에 귀띔을 해주었었다. 그래도 몸 상태가 나빠지면 환자 본인이 박남식씨처럼 스스로 의심을 하게 마련이다. 박남식씨는 자신의 상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어째서 그렇게 질문하세요?” 하고 되물어 보았다.

박남식씨는 “선생님은 아실 것 같아서요” 하면서 본인이 느끼기에 하루하루 몸이 다르다고 했다. 부인에게는 차마 그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겠더라고 하며 얼마 못살고 죽게 될까 봐 두렵다고 했다. 환자가 스스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는 계속해서 말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박남식씨의 대답을 듣고 필자가 “주는 것이 두려우세요?” 하고 묻자 박남식씨는 갑자기 눈물을 마구 흘리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야기하라는 눈짓을 하자 박남식씨는 몹시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죽으면 끝이잖아요.”

다 큰 남자가, 그것도 가족이 아닌 사람 앞에서 죽음이 두렵다고 울고 있었다. 박남식씨의 옆에서, 그가 충분히 울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얼마 후 박남식씨는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이루어 놓은 거라고는 자식 한 개밖에 없어요.” 했다. 박남식씨의 자녀는 셋이다. 박남식씨는 자녀들 중에서 아들만이 자신의 대를 이를 것이라고 생각해서 ‘자식 한 개’라고 표현을 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고생했는데 이제 전셋집이라도 얻어서 살 만 하니까 가야 된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하다고 했다. 박남식씨가 어느 정도 마음을 털어놓고 나서 부인이 돌아왔다. 부인 소리가 나자 박남식씨는 어느 사이에 평상시에 보던 조용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박남식씨의 증상은 약간 조절되는 듯하다가 다시 나빠져서 산소 탱크를 가져다 놓고 필요할 때는 산소를 사용하고 있었다. 박남식씨가 퇴원해서 집에 있는 시간이 오래되자 박남식씨의 부인은 차차 외출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한 번 죽음에 관해 개방적인 의사 소통을 하게 되자 박남식씨는 부인이 없을 때는 죽음과 관련된 자신의 심경을 한숨을 푸욱 쉬며 이야기하곤 했다.

“희망이 없잖아요.”

그는 죽고 싶지 않다고 했다. 죽은 다음에는 아무 것도 없고 끝이라는 데 안 갈 수는 없느냐고 말할 때는 필자의 마음도 안타까웠다. 박남식씨는 부인이 힘들어할까 봐 부인이 없을 때만 이야기를 하였으나 부인은 부인대로 다 알면서도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박남식씨에게 부인과 함께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으나 박남식씨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박남식씨의 모습이 전과 달라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필자가 묻자 꿈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났다고 했다. 어머니는 박남식씨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셔서 그 이후로는 사진으로만 보아 왔는데 너무나 선명하게 꿈속에서 “남식아, 이틀이 지나면 넌 나 있는 곳으로 올거야. 이틀이 지나면” 하시더라고 했다. 박남식씨는 같은 꿈을 두 번 반복해서 꾸었다고 하였다.

“난 이틀 뒤에 죽을 거예요. 할 수 없지요, 뭐.”

가고 싶지 않지만 어머님이 꿈에 나타나 그렇게 말씀하시니 죽는 것은 당위적인 사실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날 박남식씨는 아직까지 임종 과정을 시작하고 있지는 않았었다. 산소를 사용하고는 있었으나 호흡은 어느 정도 조절되고 있었고 기침과 가래도 통상 담배 피우는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정도로 조절되고 있었다. 그런데 박남식씨는 자신이 이틀 후에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인간이 영물이기는 하지만 글쎄?’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본인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으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부인 말로는 박남식씨가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라면서 어머니를 너무나 그리워했다고 하였다. 이제 어머니가 오라고 했다니 가야지 어쩌겠느냐고 하면서 부인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다음날이 되자 박남식씨의 기력이 전날보다 현저하게 떨어졌다. 미음을 거의 삼키지 못했고 혈압도 60/30mmHg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박남식씨는 심한 호흡 곤란 증세를 보이더니 마치 “엄마!”하고 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운명하였다. 호스피스에 가입한 지 45일 만의 일이었다.

 

 

 

제3장 조강지처를 두고

 

건강도 돈도 잃고 돌아온 남편 옆에는 항상 그녀가 있었다

“자네한테 미안하네”

유선웅씨는 57세 된 남자 환자였다. 말기 담도암으로 황당이 와서 얼굴과 손을 비롯한 온몸의 피부 빛깔이 노랬다. 처음에는 얼굴이 검고 주름지고 누런빛이 돌아서 67세인 줄 알았다.

유선웅씨는 조용하고 말이 없었는데 어디가 불편하냐고 물어도”그렇지요, 뭐” 라고만 했다. 요구하는 것도 없고 어디가 아프다고 이야기 하지도 않았다. 그저 누워서 눈을 지그시 감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유선웅씨의 집은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낮에는 조용하였다. 자녀들은 다 커서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부인만 옆에서 수발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유선웅씨와는 반대로 54세인 부인의 얼굴은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일 만큼 젊어 보였고 환자인 남편과는 그리 친밀해 보이지 않았다. 식사를 제공하고 약을 먹이는 일은 그런 대로 하는 것 같았으나 환자의 체위를 바꾸어 주는 것과 같이 환자의 몸을 만져야 하는 일은 아무래도 어색해 보였다. 부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였으며 종종 깊은 한숨을 쉬곤 하였다. 무슨 걱정되는 일이 있느냐고 묻자 말을 할 듯 말 듯하다가 입을 다물곤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연이 있었다.

유선웅씨는 결혼하고 5년이 채 못 되어 딴 살림을 차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부인이 용서해 줄 테니 정리하고 돌아오라고 하였으나 그러지를 못하여서 양쪽 집에 비슷한 나이의 자녀들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유선웅씨는 아주 그 집으로 옮겨가 보리고 부인 혼자 자녀들을 키우며 살아왔다. 남편이 양육비를 주지 않아서 처음에는 생활이 어려워 부인이 울기도 많이 하였다고 한다. 고생 끝에 이제는 집도 장만하고 먹고 살 만해졌는데 지난 봄에 감자기 유선웅씨가 아프다면서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연락을 해왔다고 한다. 자녀들은 20여 년 동안 연락도 없었는데 이제 와서 돌아오겠다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하면서 반대하였으나 그래도 아버지가 아니냐고 하면서 부인이 받아들였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그래도 잘 치료하면 살릴 수 있으려니 하고 입원을 시켰는데 의사가 가망이 없다고 해서 이렇게 집에 와 있다고 하였다. 병황(病況)에 대해 환자도 알고 있고 가족들도 다 알고 있었다.

입원해 있을 때에는 같이 살던 여자가 오곤 하였으나 퇴원한 후로는 오지 않는다고 했다. 유선웅씨의 부인은 예전에 그녀에게 유선웅씨와 헤어져 달라는 조건으로 돈을 주었다고 한다. 그 여자는 그러겠다고 하고 돈을 받았으나 유선웅씨와 헤어지지는 않고 같이 살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유선웅씨가 병들어 죽게 되자 돌볼 자신이 없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건강 잃고 돈 잃은 후에 돌아온 유선웅씨를 보면서 부인은 한숨을 쉬며 때로는 눈물을 흘렸다. 할 말이 많지만 다 못하는 눈치였다. 속이 상해도 아픈 사람에게 무어라 할 수도 없으니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자녀들 중 장남은 그래도 저녁에 잠깐이라도 방에 들어와 아버지 얼굴을 보고 가는데 차남과 딸은 짐짓 모르는 척하고 있다고 하였다. 저녁에 일찍 들어와도 아예 아버지가 계시는 큰방에는 들어오지를 않는다고 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아버지가 해준 것이 무어 있어요?” 하는 것 같다고 하였다. 최근에는 유선웅씨가 집에 누워 있어서 부인이 일하러 나가지를 못하니까 경제적으로도 어렵다고 하였다.

한 번은 약속한 시간에 유선웅씨 집을 방문하였는데 아무리 벨을 눌러도 응답이 없었다.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아서 그냥 돌아온 적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인은 외출하였고 유선웅씨가 있었으나 전화 받을 힘도 없어서 응답을 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그날 부인은 일하러 나갔었다고 한다. 유선웅씨의 부인은 횟집을 경영하는데 몇 시간만 가게 문을 열어도 제법 수입이 괜찮다고 하였다. 호스피스에서 방문하여 돌보아 주니까 1주일에 2~3일이라도 나가서 일을 해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였다. 장사를 한 지 오래되어서 가게가 많이 알려져 있는 까닭에 그래도 아직은 가게 문만 열면 손님이 오니까 감사한 일이라고 하였다.

유선웅씨의 부인은 그리 미인은 아니었으나 마음이 순박하고 착해 보였다. 지난 날을 생각하며 약이 오르고 화가 나다가도 누워 있는 남편을 보면 불쌍한 생각이 먼저 든다고 했다.

“어쩌겠어요. 할 수 없지…” 하면서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유선웅씨는 황달로 인해 눈동자까지도 노랗게 착색이 되고 복수도 조금씩 차 올랐다. 처음에는 말이 없었으나 여러 번 만나면서 조금씩 이야기도 했다. 주로 신체적인 증상과 약에 대한 것이기는 했으나 질문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깊게 한숨을 쉬며 “선호 엄마(부인)한테 미안해요” 했다. 눈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호스피스에 가입한 지 두 달 정도 되었을 무렵이었는데 유선웅씨의 몸은 많이 쇠약해져 있어서 미음을 겨우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돌아 눕는 것도 부축해서 도와야 했다. 이 정도가 되면 다른 남자들은 부인에게 짜증을 부리거나 화를 내기도 하는데 유선웅씨는 그렇지가 않았다. 아마도 부인에게 면목이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남은 시간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아서 부인에게 작은 아들과 딸은 아버지에 대한 태도가 좀 어떠냐고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며칠 전에 장남이 두 동생을 앉혀 놓고 “그래도 아버지인데 어떻게 그렇게 무심할 수 있느냐”고 나무랐는데 그 후로는 세 자녀가 다 하루에 한 번씩은 아버지가 누워 있는 방에 들어와 본다고 하였다.

하루는 방문하였더니 부인이 옆에서 남편에게 무어라고 말을 하니까 유선웅씨가 고개를 저으며 싫다고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부인이 보기에 자꾸만 쇠약해져 가는 남편의 모습이 보기에 안 되어서 원하는 게 있는지 물어보았으나 없다고 하여서 “영순(남편과 동거하던 여자)이 불러다 줄까?” 하였더니 고개를 저으며 싫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유선웅씨가 부인에게 “자네한테 미안하네” 하더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부인은 마음이 착잡하더라고 했다. 유선웅씨는 그날부터 임종 과정을 시작했는데 깜빡깜빡 졸면서도 눈만 뜨면 부인을 찾고 부인이 옆에서 손을 잡으며 “나 여기 있어요” 하면 “미안하네” 하고는 또 눈을 감아 버리곤 했다. 봐야 될 분들을 모두 오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더니 유선웅씨의 부인은, “우리는 친척도 별로 없어요. 그래도 자식이니 그 집(남편과 동거하던 영순씨 집) 애들도 다 오라고 해야 할까요?” 하는 것이었다. 유선웅씨의 부인은 아들을 시켜 영순씨 집에 전화를 하였는데 영순씨는 오지 않겠다고 하였고 딸(이 집 둘째아들보다 생일이 한 달 정도 늦은)만 다녀갔다고 했다.

유선웅씨는 그날과 그 다음날 계속해서 부인에게 미안하다고 하더니 점차 의식이 없어지면서 혼수 상태가 되었고 그 상태에서 하루 만에 숨을 거두었다. 20년 만에 집에 돌아온 유선웅씨가 부인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부인은 갑자기 통곡하며 말했다. – “아이구, 이 등신아! 너허구 한번 재미나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그래도 우리 집 양반은 좋은 데 갔겠지요?”

선홍수씨(50세, 남)는 위암 말기 환자였다. 키가 크고 인물이 훤하게 생긴, 한량 기질이 엿보이는 외모의 선홍수씨는 의사인 남동생이 소개해 주어서 가정 호스피스와 연결이 된 경우였다. 처음 방문하였을 때는 아직 힘이 있어 보였고 싱글싱글 웃고 있어서 도무지 말기 환자같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 집 양반은 아주 한량이에요.”

부인이 웃으며 말하였는데, 함께 간 호스피스 간호사에게 미혼이냐고 물어보며 눈웃음을 웃는 선홍수씨의 모습이 마치 건강한 ‘한량’ 같아 보였다.

선홍수씨는 평소에 감기도 한 번 안 걸릴 정도로 건강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업차 제주도에 내려갔다가 갑자기 속이 불편한 게 소화가 안 되어서 단순한 소화 불량인 줄 알고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호텔에서 1주일 동안 밥도 안 먹고 술만 먹었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연락을 받은 부인이 제주도에 가서 서울로 데리고 왔다고 했다. 서울에 와서 병원에 가보니 위암인데 이미 말기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항암 치료를 두어 번 하였으나 별 효과가 없어서 집으로 퇴원하면서 의사인 남동생의 권유로 가정 호스피스에 가입하게 되었다고 했다. 늘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아파서 그것도 말기 상태라고 하니까 환자 본인도 실감이 안 난다고 하였다. 선홍수씨의 주증상은 오심, 구토와 복부 통증이었다. 통증은 붙이는 진통제인 듀로제직 패치(durogesic patch)를 사용하여 조절하고 있었다. 식사는 토할까 봐 많이 먹지 못하고 조금씩 자주 먹고 있다고 하였다. 선홍수씨의 경우 부인보다는 큰딸이 더욱 애를 태우며 아버지 시중을 들고 있었다. 부인은 나이보다 아주 젊어 보여서 누가 딸인지 누가 부인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병원에 약 타거 가는 것도 딸이 했고, 옆에서 약을 붙이고 일으키고 눕히는 것도 딸이 다 했다. 딸은 결혼하여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선홍수씨의 부인은 직장에 다니는 딸을 위해 손자를 돌보는 일까지 겸하고 있었다. 늘 할머니의 관심을 독차지하던 손자는 할아버지가 누워 계시니까 큰방에는 잘 못 들어오고 마루에서 할머니 눈치만 보고 있었다.

선홍수씨의 집은 크고 넓어서 대문에서 현관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했는데 현관문을 열면 가로 50cm, 세로 2m 정도 되는 ‘佛’ 자가 쓰여진 액자가 걸려 있었다. 거실도 넓고 아이들도 보아야 하므로 부인이 감당해야 하는 일의 양이 많았다. 그래도 늘 생글생글 웃으며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부인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데 호스피스에 가입한 지 3주쯤 지난 어느 날, 선홍수씨 집을 방문하고 돌아온 호스피스 간호사가 선홍수씨 집에 못 보던 여자가 와 있었고 선홍수씨의 부인은 무슨 일인지 언짢은 얼굴로 울고 있더라고 하였다. 자원봉사자들이 방문하였을 때도 선홍수씨와 부인, 그리고 다른 여자가 함께 있었는데 서로 다투는 것 같더라고 하였다. 그러는 중에 선홍수씨의 부인이 위경련으로 고생을 하였다. 그 일로 인해 병원에 처방한 약 타오는 일을 호스피스 직원이 대신 해주면서 점차 신뢰를 쌓아갔다. 알고 보니 환자를 돌보느라 힘들기도 하였지만 다른 이유로 선홍수씨 부인의 마음 고생이 심하였는데도 부끄러워서 말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선홍수씨는 원래가 한량이라 여자들을 좋아하였고 결혼한 지 이십 칠팔 년이 되었어도 부부가 다정하게 함께 살아본 것은 다 계산해 보니 7년이 채 안 된다고 하였다. 늘 이 여자, 저 여자와 함께 사느라고 부인을 등한시하였다고 하는데 때로는 집을 나가서 따로 살림을 차렸고, 어떤 때는 여자를 데리고 들어와서 함께 산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런 때는 도대체 어떻게 살았느냐고 했더니 “그저, 뭐…” 하며 처음에는 웃다가 이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더니 뚝뚝 떨어졌다. 이번에 제주도에도 희숙이라는 여자와 함께 가 있었는데 술 먹고 아파서 기절하게 되자 그 여자가 집에 연락해줘서 데리고 왔다고 하면서 눈물을 훔쳐 냈다. 그래서 필자가 물었다.

“그 여자보고 치료해 주라고 하지 그랬어요?”

“그래도 남편인걸요. 그런데 거기까지는 다 좋다 이거에요. 창피해서 선생님 모르게 하려고 했는데 이제 다 아실 것 같아서 하는 얘긴데요. 이틀 전까지 그 여자가 왔었어요. 그런데 그 여자가 와 있을 때 저 양반이 다리가 아프다고 다리를 주무르라고 하면 한쪽은 내가 주무르고 한쪽은 그 여자보고 주무르라고 해서 둘이 마주보고 앉아 다리를 주무르는데 저 양반이 그 여자가 주무르는 게 시원하다고, 나보고 너는 왜 그리 못하냐고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는 거예요. 내가 속이 터져서 정말이지 죽고만 싶어요. 저렇게 되어 돌아와서도 그렇게 하니 내 마음이 오죽 하겠어요?”

선홍수씨의 부인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었다. 제 삼자인 필자가 들어도 어이없고 기가 막혔다. 선홍수씨의 부인에게 무어라 위로할 말이 없었다.

선홍수씨의 이런 바람기는 대물림한 것이라고 했다. 선홍수씨의 아버지에게도 여자가 많았다고 한다. 선홍수씨는 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의 아들이었는데 두 분은 이혼하셨다고 했다. 아버지는 이혼한 후로도 몇 여자를 거쳐 현재의 부인과 재혼하였는데 이 어머니는 선홍수씨를 가정 호스피스로 연결해준 남동생의 생모라고 했다. 아버지는 현재의 부인과 결혼한 후에도 바람기로 인해 갈들이 많았으나 부부가 함께 종교를 가지게 된 이후로는 안정되어 잘 살고 있다고 하였다. 선홍수씨는 8남매 중 맏인데 모두가 배다른 동생들이고 10대 때 방황하던 선홍수씨를 사랑으로 붙잡아 준 것은 현재의 어머니라고 하였다. 선홍수씨는 부모님이 이혼한 후 생모 소식을 모르고 지내다가 병 나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선홍수씨의 생모는 이혼한 후 한동안 혼자 살다가 재혼하였다고 하는데, 나이 들어 시를 쓰기 시작하여 시인이 되었다고 했다. 선홍수씨의 생모는 국문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으나 고단한 자신의 삶을 시로 표현한 것이 당선이 되어 아무튼 선홍수씨의 부인으로서는 병든 남편 수발과 함께 감자기 시어머니 두 분을 섬겨야 하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내력이 복잡한 가계였는데 선홍수씨가 병으로 쓰러질 때까지 함께 있었다고 하는 희숙씨는 선홍수씨가 입원해 있을 때는 물론이고 퇴원한 이후에도 선홍수씨의 집에 자주 왔다고 했다. 그러나 선홍수씨의 상태가 차차 나빠져서 환자같이 보이게 되자 무섭다고 하면서 더 이상 오지 않는다고 했다. 희숙씨가 오지 않자 남편은 부인과 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부인보다는 딸에게 더욱 의지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딸도 지치고 일이 밀려서 처음처럼 매일 친정인 선홍수씨 집에 오지를 못하게 되었다. 선홍수씨는 토할 것 같아서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게 되었다. 얼굴은 말라서 눈과 양 볼이 움푹 들어갔고, 엉덩이의 피부도 욕창이 생기려는 것처럼 부분적으로 색깔이 검게 변했다. 좀 더 환자를 편하게 해주려고 부인이 침대를 들여왔고 선홍수씨도 침대가 바닥보다 낫다고 해서 그때부터는 침대에 누워 지냈다. 선홍수씨 집을 방문하는 여자 자원봉사자들은 주로 부인의 말벗이 되어 주었고 남자 자원봉사자는 선홍수씨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는데 선홍수씨가 사업상의 일로 변호사를 찾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 심부름을 해주기도 하였다. 칠순이 다 된 자원봉사자 최장로님은 젊은이 못지 않은 건강으로 거의 매주 선홍수씨를 찾아갔고 필요한 심부름도 다 해주셨다. 선홍수씨는 부동산업을 하고 있었으므로 여기저기 관계된 일들이 많았으나 갑자기 병들어 눕게 되자 마무리를 짓지 못한 일들이 제법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겨울에 호스피스에 가입한 선홍수씨는 봄이 되면서 상태가 급속하게 나빠져서 재판에 걸려 있는 문제들을 거의 처리하지 못하고 떠났다.

선홍수씨가 호스피스에 가입한 것은 1월 10일이었고 소천한 것은 어린이날인 5월5일이었는데 임종 과정을 시작한 지 3주나 지나서였다.  

보통 임종 과정은 2~3일 정도 소요되고 위암 환자의 경우 조금 더 시간이 소요되며 5일, 길어도 대개는 1주일 이내에 사망하는데 선홍수씨의 경우는 유난히 길었다. 환자가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게 되고 잠자는 시간이 길어지고 헛소리를 하며 손발이 차가워지고 근육 이완이 나타나면 임종 과정이 진행되는 것으로 보는데, 선홍수씨에게는 4월 10일이 지나서부터 그런 현상들이 나타났다. 낮에도 자고 있는 시간이 점차 길어지고 가끔씩 없는 사람 이름을 부르며 헛소리를 했다. 음식은 거의 못 먹고 종일 물만 두어 숟가락 삼키다가 나중에는 그나마도 옆으로 흘렸다. 그런 상태가 되고서야 부인에게 짜증을 부리는 것을 그만 두었다.

선홍수씨의 부인은 “힘이 없으니까 화도 못 내나 봐요”했다. 그렇게도 부인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데 가면서도 미안하다고 하고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방문할 때마다 부인에게 남편이 특별히 하는 이야기가 없었는지 물어 보았다. 그런데 4월 20일이 되어서야 선홍수씨는 힘없는 소리로 “미안혀” 라고 하면서 부인에게 손을 내밀더라고 했다.

선홍수씨에게는 결혼한 큰딸 외에도 아들 둘과 딸 둘이 더 있었는데 큰아들은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작은아들은 아버지를 닮아 노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쌍둥이 딸들은 직장 때문에 따로 자취를 하고 있어서 가끔 집에 온다고 하였다. 자녀들도 큰딸 외에는 아버지와 그리 친밀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다 4월 25일부터는 선홍수씨가 허공을 노려보며 손으로 얼굴을 막으며 “저리 가! 저리 가!” 하고 소리를 질러서 자녀들이 무섭다고 아버지 옆에 가려고 하지를 않는다고 하였다 아버지에게 잘하던 큰딸도 무섭다고 하면서 “엄마는 부인이니까 아버지와 같이 주무세요” 했다. 실은 부인도 무서워서 머리털이 쭈삣 서는 것 같다고 하였다. 이 무렵 선홍수씨는 피부가 창백하고 입술이 바싹 말라 있었으며 근육 이완도 상당히 진행되어 있어서 허리근육이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곧 임종할 것같이 보였으나 시간을 끌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손을 내저으며 소리를 쳤다.

“누구여? 누구여?”

“저리 가! 저리 가!”

필자가 방문하였을 때도 그러고 있어서 “누가 왔어요?” 하고 묻자 선홍수씨는 정신이 드는 듯 필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데요?” 하고 묻자 잘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으며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여러 명 왔다가, 가라고 소리지르면 없어지곤 한다고 하였다. 이런 상태가 4월 30일까지도 지속이 되었고 부인은 스트레스를 받아 다시 위가 아프다고 하며 위장약을 먹기 시작하였다. 선홍수씨의 입술은 까맣게 말랐고, “누구여? 누구여?” 할 때의 목소리도 점차 두려움이 깃들어서 이건 영(靈)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인도 소름이 끼치고 너무 무서워서 남편 옆에 가고 싶지가 않을 정도라고 하면서 어떤 사람 말이 ‘정 떼려고’ 그런다는데 맞는 얘기냐고 묻기도 했다. 선홍수씨의 부인에게 이건 아무래도 종교적 상담이 필요한 문제 같다고 하였더니 실은 자기 집안 어른들의 종교가 서로 다르다고 하였다. 선홍수씨의 생모는 0교 신자이고 선홍수씨를 키워준 시어머니는 00교 신자라고 하였다. 양쪽 어머니가 다 자신들의 종교에 따라 선홍수씨를 위해 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하였다. 처음 호스피스에 가입할 당시 선홍수씨는 종교가 없다고 하였고 부인은 0교라고 하였는데 부인의 경우 그다지 신심은 없었으나 선홍수씨 생모의 강권에 따라 0교라고 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종교적 갈등으로 남편이 편안히 못 가는 거라면 성직자와의 상담을 주선해 주어도 좋겠다고 하였다. 부인의 이야기를 들은 다은 선홍수씨에게 성직자와 상담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였더니 검은 옷 입은 사람만 안 나타나게 해준다면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호스피스 팀의 성직자가 방문하도록 주선하였다. 선홍수씨는 성직자와 상담을 한 후 내세에 관한 신앙을 갖게 되었고 부인에게는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사과하였다.

“미안혀, 내가 잘못혔어.”

성직자와의 만남으로 인해 선홍수씨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고 5월1일 밤늦게 장남과 장녀, 그리고 부인이 보는 앞에서 병상세례를 받았다. 그 자리에는 선홍수씨를 종종 방문하던 호스피스 남자 자원봉사자 최장로와 성직자, 그리고 필자가 함께 있었다. 세례 의식이 끝날 때쯤 호스피스 간호사 한 분이 예쁜 꽃다발을 가지고 도착하였는데 적절한 시간에 꽃다발을 들고 온 그녀를 보고 선홍수씨는 미소를 지으며 고마워했다. 신기한 일은 거의 흙빛이었던 선홍수씨의 얼굴이 세례식을 거행하는 동안 차차 변하더니 약간 노랗고 환하게 빛나는 얼굴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부인이 자기도 내세에 관한 신앙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그날 밤 선홍수씨 부인의 영혼 속에도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았다. 다음날 방문하였을 때 선홍수씨의 부인이 말했다.

“이상해요. 어제 밤에는 하나도 안 무섭고 소름끼치던 것이 없어졌어요. 오랜만에 잠을 푹 잤고요. 우리 집 양반도 ‘누구여? 저리 가!’ 하는 소리를 안 했어요.”

선홍수씨는 허리의 근육이 축 늘어져서 침상 바닥에 붙은 것 같은 모습으로 아무것도 먹지 목하고 누워 있으면서도 필자에게 손을 내미는 시늉을 하며 맞아주었다. 선홍수씨 집안은 형제들이 많았는데 이 날부터 이틀 동안은 친지들이 차례로 와서 선홍수씨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갔다. 선홍수씨의 생모도 지방에서 일부러 올라왔는데 장례식에는 오지 않겠다고 하면서 아들을 붙들고 한참을 울다 내려갔다고 했다. 어릴 때 떼어놓고 몇 십 년만에 연락이 되었는데 그 아들이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노모의 마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선홍수씨는 이렇게 부모 형제와 가까운 친지들을 거의 모두 만나고 나서 5월 5일 저녁에 부인과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천하였다. 빈소는 성모병원 영안실에 마련하였는데 입관할 때 선홍수씨의 부인이 오열을 하였다. 남편의 시신을 냉동실에서 꺼내어 목욕시키고 옷 입히는 것을 보면서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눈물만 쏟고 있더니 중얼중얼 넋두리를 하기 시작하였다.

“우리 아저씨가 그래도 고생을 덜 하셨지요?”

“그래도 우리 집 양반은 좋은 데 갔겠지요?” 그 다음에는 흥얼거리듯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잘 가시오, 잘 가시오. 부디 좋은 데로 잘 가시오.”

그러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울었다. 목을 놓아 울면서 소리쳤다.

“아이구, 이 등신아! 나허구 한번 재미나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두 다리를 뻗은 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염이 다 끝날 때까지 엉엉 울고 있었다. 선홍수씨는 집에 돌아와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면서 부인에게 용서도 빌고 친지들도 다 만나고 떠났지만 이제 남은 부인은 진짜로 아버지 없는 자식들을 홀로 여의어야 하는 부담을 다 떠맡은 것이었다.

장례식 역시 남은 자의 몫이었다. 선홍수씨의 부인은 고민을 하다가 장례식은 선홍수씨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종교 양식대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서울에서는 호스피스 팀의 성직자가 장례 예식을 도와주었고 고향 선산에서는 선홍수씨 부모님 가족과 관련이 있는 성직자가 기꺼이 도와주더라고 했다. 선홍수씨의 부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우리 집 양반이 그래도 죽을 때는 좋은 일을 하고 갔어요. 우리 집안 식구들이 종교가 달라서 늘 무슨 일이 있을 때면 다 모이지를 못하고 갈들이 있곤 했는데, 이번 장례식 때는 8남매가 하나도 안 빠지고 다 왔어요. 우리 집 양반이 가면서 식구들 화합하도록 도와준 셈이지요.”

장례식을 끝내고 올라온 이틀 뒤에(가족이 쉴 수 있도록 배려하는 차원에서 기다려 주는 것이다) 선홍수씨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들은 이야기였다. 그 동안 선홍수씨를 돌보아주었던 자원봉사자와 간호사, 병상 세례를 베풀던 성직자 등과 함께 방문하였는데, 선홍수씨가 없는 안방은 침대를 치워서이기도 했지만 유난히도 휑하니 넓어 보였다.

 

 

 

제4장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요

 

집 나간 남편과 끝내 화해하지 못하고 떠난 40대 보험 설계사

“일 년 만 더 살고 싶어요”

폐암으로 진단받은 지 3년 만에 호스피스에 의뢰된 윤연자씨(45세, 여)는 대학생인 작은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큰아들은 군복무 중이고 딸은 지방에서 장사한다고 나가 있고 남편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도 모르고 지낸다고 하였다. 3년 전 폐암이라고 처음 진단받았을 때, 남편은 못 고친다고 생각하여 ‘돈 잃고 사람 잃는다’고 하면서 치료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으나 윤연자씨가 우겨서 입원을 하였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의사가 잔여 수명을 6개월 정도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윤연자씨는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던 작은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살고 싶었다고 한다. 집을 팔아서라도 치료해 보고 싶어서 남편이 반대해도 입원하였다고 했다. 막상 입원을 하고 나니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남편은 모른 척하고 집에서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할 수 없이 고3인 작은아들이 낮에는 학교에 가고, 밤에는 병원에 와서 수발을 해주었는데 윤연자씨는 그런 작은 아들이 안쓰러워서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반면에 윤연자씨의 남편은 가끔씩 아들이 집에 책 가지러 들어가면 담배만 피우고 있다고 화를 내었다. “돈 벌어오지 않고 공부만 한다”고 하면서 아들의 책가방을 마당에 내던지고 꾸짖었으며 때로는 때리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두 달 입원해 있는 동안에 남편이 딱 한 번 다녀갔는데, 침대 옆에 앉아 담배 한 대 피우고는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더니 퇴원 후에 집을 줄여서 이사 가는 날, 집을 나가서는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없는 상황에서 병이 났어도 외롭고 서러웠을 텐데 집에 잘 있던 남편이 자신이 병 나서 치료하는 과정에서 집을 나가 소식이 없었으니 지난 3년 동안 투병하면서 윤연자씨의 마음은 외롭고 상처받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병은 처음 의사가 진단하였을 때보다 그런 대로 경과가 괜찮아서 지금까지 3년 동안 지탱해 왔다. 그러나 보험 설계사로 일하는 수입으로는 생활비와 아들 학비며 입원비를 감당하기 어려워서 두 번이나 집을 줄여서 이사하였다고 한다.

윤연자씨가 살고 있는 집은 채광이 잘 되고 밝은 집이기는 하나 택시에서 내려 계단을 백 개 이상 걸어 올라가야 하는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더구나 조그마한 3층 빌라의 맨 위층에 살고 있어서 좁은 계단을 이용하여 올라가야 하는 형편이었다. 폐암 말기 환자가 혼자서 병원 외래로 다니면서 항암 치료를 받기에는 매우 어려운 환경이었다. 항암 치료는 대개 4주 간격으로 며칠씩 하는데 입원해서 하기도 하지만 외래 주사실에서 주사를 맞고 귀가하기도 한다. 주사를 맞은 후 환자가 귀가할 때는 아침에 주사 맞으러 올 때에 비해 지치고, 항암제 냄새가 코로 올라와 오심(메슥거림)이 생기는 등의 어려움을 경험하게 된다. 윤연자씨의 경우 항암 치료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호스피스에 의뢰되었는데, 아직 한두 번은 더 할 것이라고 하여 처음에는 귀가할 때 자원봉사자가 집까지 동행하여 주고 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도로만 개입하기로 하였다. 자원봉사자는 호스피스 교육 수료생 중에서 오십 대 중반의, 살림 경험이 많고 마음이 너그러우며 따뜻한 성품의 아주머니 두 분을 택하여 연결해 주었는데 두 분 다 아주 많은 사랑과 관심을 윤연자씨에게 베풀어 주었다. 자신들의 돈으로 윤연자씨를 택시에 태워 집까지 데리고 가서 누울 수 있도록 자리를 깔아 주었다. 저녁밥을 지어 차려주고 저녁까지 함께 있다가 돌아왔다. 오랫동안 혼자 치료받으러 다니며 외로웠던 윤연자씨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해 하였다. 그리고 그분들이 자신을 위해 따뜻하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모습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윤연자씨는 호스피스에 의뢰된 후 항암 치료를 두 번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암세포가 약물에 반응을 하지 않아서 더 이상 치료를 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되어 버렸다. 치료에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항암제를 사용하여도 암세포의 크기가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 있거나 심하면 더욱 커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윤연자씨의 경우가 그랬다. 이제 본격적인 호스피스 간호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호스피스 가입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절차를 밟아 가정 호스피스에 가입한 윤연자씨가 어느 날 외출한 김에 호스피스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어머! 난 이때까지 살려고 하였는데…. 호스피스는… 죽는 거네요…”

필자가 놀라서 바라보니 윤연자씨는 사무실 한쪽 벽에 걸려 있는 판넬을 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호스피스란 무엇인가?’ 라는 내용의 글이 있었는데 ‘호스피스란 완치가 불가능하여 더 이상의 치료가 어렵고 잔여 수명이 6개월 내외라고 의사가 판단한 말기 환자와 가족을 위한…’ 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 글이 윤연자씨에게 충격을 준 것이었다. 당시에 우리들은 호스피스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외국의 안내 책자에 쓰여 있는 것을 그대로 직역하여 써 놓았는데 그만 환자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이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으므로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으나 정공법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담담한 표정과 말소리로 설명하면서 윤연자씨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요. 우리들의 맥박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거잖아요?”

사실 그녀는 담당 의사로부터 자신의 병황에 대해 두어 번 통고를 받았으나 본인이 의도적으로 못 들은 체하고 있었던 환자 중 한 사람이었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선별해서 듣는 경향이 있으므로 말기 환자들의 경우 담당 의사가 더 이상 완치를 위한 치료에 반응이 없다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해주어도 아직은 치료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윤연자씨의 경우 처음 진단받았을 때 잔여 수명이 6개월 정도 될 것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나 3년 동안 치료하며 생명을 유지해 왔었기에 자신이 폐암이고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으나 의식 속에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호스피스가 무엇인지에 대한 글을 읽고, 생각하고 싶지 않던 부분이 일깨워진 셈이었다. 쭈뼛거리며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던 윤연자씨는 잠시 후 결심한 듯이 말했다.

“난 아직 일을 해야 돼요. 12월까지는 처리할 것이 있어요.”

처음 의사가 호스피스에 의뢰했을 때가 5월이었고 이때가 7월이었는데 그녀는 정말 자신이 말하던 대로 다니던 회사를 12월까지 다니며 업무를 처리하였다.

그 동안에 그녀는 폐렴으로 한 번 입원하였는데 체온이 섭씨 40도나 되었고 숨쉬기도 힘들어했다. 아들이 응급실로 모시고 와서 입원을 하였는데 고열에 시달리는 동안 울면서 말했다.

“이러다 죽는 건 아닐까요? 난 일 년은 더 살아야 해요.”

이틀 뒤 열이 떨어지고 상태가 호전되어 다음날 퇴원하기로 하였는데, 침대에서 삶은 고구마와 옥수수를 먹고 있던 그녀가 필자를 보자 또 엉엉 울며 말했다.

“이러다가 죽는 건 아닐까요? 겁이 나 죽겠어요. 일 년만, 일 년만 더 살고 싶어요.”

이런 말을 하는 윤연자씨의 옆 침대에는 역시 호스피스 환자인 라명희씨(29세, 위암 말기)가 누워 있었다. 이 무렵 라명희씨는 임종이 가까워 바싹 마르고 볼이 움푹 패인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아직까지 볼에 통통한 살이 남아 있던 윤연자씨의 얼굴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런데도 이러다 죽는 건 아니냐고 하면서 울먹이는 윤연자씨를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그녀의 절박한 마음이 진지하게 와 닿지는 않는 것 같았다.

집으로 퇴원한 윤연자씨의 폐렴 증세는 많이 좋아졌으나 수시로 체온이 올라가서 해열제를 자주 사용하여야 했다. 담당 의사는 종양 자체의 발열인 것 같다고 하였는데, 체온이 올라가려고 하면 몹시 춥다고 하면서 덜덜 떨어서 두꺼운 솜이불을 덮고 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일단 열이 오르고 나면 더워서 입었던 옷도 벗어야 했다. 해열제의 효과가 나타나서 열이 떨어질 때는 땀이 비 오듯 쏟아지면서 온몸을 흠뻑 적시기에 바로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한 번씩 이러고 나면 온몸의 힘이 빠지고 언제 또 다시 열이 오를지 몰라 겁이 나고 이러다가 진짜 죽는 게 아닐까 싶어진다고 하였다. 그렇게 몸이 불편하면서 그녀는 잠시 열이 떨어지면 회사에 나가 일을 보았고 짬짬이 집안 일도 안간힘을 쓰며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윤연자씨는 집을 나간 남편 소식을 알게 되었다. 친지 중 한 사람이 남편의 거처를 알고 만나게 해주려고 연락을 해 온 것이었다. 남편이 집을 나간 후, 주변의 종교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면서 조금씩 종교 생활을 하기도 하였던 윤연자씨는 그들의 권유대로 남편을 용서하고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 노릇도 못했으면서 뭘… ” 하며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었다. 얼마 후 그 친지가 다시 찾아와 흥분하면서 “그 사람 죽었다고 생각하고 찾지 마십시오” 하더라고 했다 알고 보니 윤연자씨의 남편은 남편대로 그 동안 혼자 살면서 한 번도 가족들이 자신을 찾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더라고 했다. 언젠가는 거처를 옮기면서 친지를 통해 연락처를 알려주며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전해 왔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윤연자씨는 ‘일이란 뭐야? 나 죽으면 연락하라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화가 나서 연락처를 적어 놓지도 않았다고 하였다. 그 후 지난 번 집으로 이사할 때는 남편이 오겠다고 하였으나 윤연자씨가 단칸방이라 오지 말라고 하였고,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할 때는 남편에게 오지 말라고 하였고,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할 때는 남편에게 오라고 하였으나 그때는 남편이 오지를 않았다고 했다. 아마 남편은 그때 아들이 모시러 가지 않았다고 불만인 듯하나 아들은 전혀 모시러 갈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윤연자씨가 이렇듯 중병이 들어 있는데도 이들 가족은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어서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하고 있었다.

12월이 되어 윤연자씨가 회사 일을 거의 마무리하고 나자 날씨도 추워졌고 윤연자씨의 병세도 더욱 악화되었다. 마침 겨울 방학이라 아들이 옆에서 수발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파서 누워 있는 중에 호스피스에서 보낸 성탄 카드와 병문안 편지를 받은 윤연자씨는 감격스러워하며 말했다.

“이렇게 편지를 받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몰라요.”

당시 호스피스 책임자였던 마리안 킹슬리(Marian Kingley)교수님은 우리가 돌보던 모든 환자들에게 성탄 카드를 보내게 하였는데, 말기 환자에게 있어서 호스피스 직원의 방문도 반가운 일이지만 자신을 위해 쓴 편지나 카드가 배달되었을 때 더욱 기뻐하였다. 생각지 않은 선물이라도 받은 양 즐거워하는 환자의 모습은 보은 이도 즐거웠다.

한편으로 윤연자씨는 곧 다가올 친정어머니 1주기에 맞춰 친정에 한번 다녀오고 싶어했다. 윤연자씨가 처음 폐암으로 진단 받을 당시에는 건강하던 친정어머니가 작년에 먼저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살아 잇는 동안에 마지막이 될 것 같아 다녀오고 싶은데 건강 때문에 갈 수 있을지 염려를 했다. 그런데 윤연자씨의 염려는 건강만이 아닌 것 같았다. 다녀 올 비용도 걱정인 듯하여 만일 가게 되면 호스피스에서 여비를 보태줄까 생각하기도 하였는데 결국 윤연자씨는 가지 못하고 대신 아들을 보냈다고 하였다. 이제는 몸 상태가 차를 타고 어이를 다녀오기에는 어렵게 되어 외출을 못하고 집에 누워 있다고 하였다. 자꾸 기운이 떨어지고 아랫배가 아프다고 하면서 수시로 변의를 느껴 화장실에 가나 시원하게 변을 보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또 열이 올라가자 겁이 난 윤연자씨가 병원에 입원하기를 원하였다. 그 동안에는 마쳐야 될 일도 있었고 돈 걱정도 되어 항암 치료를 할 때도 가급적 입원은 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이제는 끝내야 할 일을 다 마친 상태였다. 집 정리도 어느 정도 해 놓은 모양이었다. 담당의사와 의논하고 입원하도록 조처해 주었는데 이번에는 환자의 마음이 반반인 것 같았다. 치료하고자 하는 마음과 이러다가 죽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함께 있다고 하였다. 아랫배가 약간 부르고 단단한 상태였으며 계속 열이 오르락 내리락 해서 수시로 덜덜 떨면서 담요를 턱 밑까지 끌어다 덮곤 하였다. 담당 의사는 항생제를 쓰면서 보다가 열이 떨어지면 퇴원시킬 생각이라고 하였고 씨티촬영(CT scan)과 같은 검사는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런데 환자가 자꾸 배가 아프다고 하여서 산부인과에 의뢰하였다. 다음날 윤연자씨를 진찰한 산부인과 의사는 복부 초음파 검사와 팝 스미어 검사를 해놓으면 다시 와서 보겠다고 진찰의뢰서에 결과를 써 놓았다. 그러나 환자의 상태가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을 감지한 담당 의사는 산부인과에서 요청한 검사를 보류해 놓고 있었다. 배 아픈 것은 조금 나아졌으나 열은 계속 올랐다 내렸다 한다고 하면서 윤연자씨는 “이러다가 죽는 거지요?” 하며 그 큰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매달리려고 하였다. “살려 주세요” 하다가 “이번에는 마지막인 거 같아요. 나 죽을 때까지 여기 있을래요” 하면서 상반된 감정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였다. 마음이 흔들리고 많이 약해진 것 같았다. 입원한 지 열흘 쯤 지나 환자기 산부인과 검사는 안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회진하던 담당 의사는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윤연자님은 검사해서 원인을 알아낸다고 해도 더 이상 치료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괜히 돈만 들이고 검사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열나고 배 아픈 것만 치료할 거예요.”

윤연자씨를 치료하던 담당의사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 배운 대로 비교적 환자에게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해 주는 사람이었다. 이런 말들이 충격이 되기도 하지만 자기 성찰이 가능한 환자에게는 현실을 직시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이 말을 들을 당시 윤연자씨는 어린애처럼 와앙 울어 버렸으나 한 동안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 것 같았다. 차분해 보였으며 별로 말이 없었다. 호스피스 직원이나 자원봉사자를 만나면 걱정스러울 정도로 말을 많이 하던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무렵 윤연자씨의 남편이 병원에 한 번 다녀갔다고 했다. 남편이 다녀간 뒤 윤연자씨는 몹시 심란해 하면서 필자에게 말했다.

“그래도 내 생각에 이제는 마음을 고쳐먹고 입원비에 보태라고 돈이라도 얼마 들고 올 줄 알았어요. 그런데 돈은 하나도 없고 더욱 꾀죄죄한 모습으로 담배만 피우면서 2월부터 집에 들어오겠다고 하는 거예요. 나를 도와줄 생각은 않고 오히려 내게 도움을 받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런 모습의 남편을 보니까 앙가슴이 미어지고 꽉 막혀서 음식이 넘어가지를 않아 캔에 들어있는 잣죽초자 못 먹었다고 했다. 용서하고 받아들이려고 했는데 막상 만나서 그런 모습을 보니까 용서가 안 되더라고 도 했다.

남편이 윤연자씨를 방문할 수 있도록 주선한 사람은 시동생이었다. 그 시동생 말로는 둘 다 성격이 못 돼서 만나면 서로 싸우려고만 하니 문제라고 하였으나 그 당시 윤연자씨의 상태는 언제까지 싸울 힘이 있을는지 의문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시동생에게 호스피스에 대해, 윤연자씨의 몸 상태에 대해 설명해 주고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환자 옆에 있어 주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하였다.

남편이 다녀간 후 윤연자씨는 숨쉬기가 어렵다고 하여 산소를 마시고 있었고 큰아들과 딸도 엄마를 보러 왔다. 딸은 입원비를 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자신은 엄마와 만나기만 하면 늘 싸우는 관계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맏딸이니 나가서 돈 벌어서 동생들 공부시켜야 했다면 지금은 엄마가 죽게 됐으니 자신이 져주는 상황이라고 하였다.

“집안에선 저를 ‘돈’으로 봐요. 그러니 엄마 옆에서 계속 돌봐드리고 있을 수는 없었지요. 막내 동생한테만 연락처를 알려줬더랬어요. 저는 아무하고도 의논도 못하는, 의논 상대도 없는 처지예요.”

윤연자씨의 딸은 그 동안 엄마를 잘 돌봐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딸이 입원비를 가져왔고, 윤연자씨의 배 아프던 것과 열 오르는 증세가 가라앉은 상태이므로 담당 의사가 퇴원해도 좋다고 하였으나 윤연자씨는 숨쉬기가 어렵다며 망설였다. 옆에서 보기보다 본인이 느끼는 것이 더욱 심한 것 같았다. 한편으론 집에 가서 혼자 있다가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20일 정도 입원해 있었는데 입원할 때보다 기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고 마음도 심약해져 있었다. 오후에는 휠체어를 타고 담당 의사가 있는 외래 진료실로 가서 ‘선생님과 함께 있겠다’며 어리광을 부리기도 하였다.

“이러시지 말고 퇴원하세요. 그리고 불편하면 언제든지 다시 입원하세요.”

담당 의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윤연자씨는 마지못해 퇴원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환자기 응급실에 있었다. 퇴원 후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서 밤새 한 잠도 못 자고 있다고 새벽에 119을 불러서 두 아들과 함께 응급실로 왔다는 것이었다. 숨이 차서 힘들었다고 하는데 산소를 마시면서도 눕지 못하고 앉은 채로 큰아들이 뒤에서 엄마를 안고 있었다. 얼굴과 손발이 차가워진 상태이고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낮 12시경에 입원실로 옮겨졌는데 이때는 환자가 갑갑하다고 하면서 산소 튜브를 빼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입술을 꽉 깨물어서 아랫입술에 피가 나 있고 간간이 물을 한 모금씩 마시고 있었다. 임종 과정을 급작스럽게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자원봉사자에게 급히 연락하여서 오도록 했고, 자원봉사자가 환자를 돌보는 동안 아들에게 임종과정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관련 프린트물을 주어 읽어보도록 했다. 병원 원목실의 최전도사가 와서 윤연자씨에게 예배 드리기를 원하는가 묻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원목실 직원과 의료진, 두 아들과 호스피스 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윤연자씨의 침대 주위에 빙 둘러서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마침 작은아들의 여자 친구와 친지 두 분도 와 있어서 함께 참여하였다. 윤연자씨는 더 이상 눈 뜰 기력도 없어 보였고 침대에 앉아 있었으나 숨쉬기가 힘들어 헐떡거리고 있었다. 임종예배를 드리는 동안 숨소리가 조용해지더니 살그머니 눕히자 옆으로 누운 채 고르게 숨을 쉬고 있었다. 손목과 팔꿈치 안쪽의 맥박이 잡히지 않았고 혈압도 측정할 수 없는 상태였다. 시동생에게 연락해서 상황을 알려주며 남편에게 연락해 달라고 부탁하였고 작은아들에게는 누나에게 전화하도록 하였다. 오후 3시경에는 턱과 가슴까지 차가워지고 입을 꽉 다문 채 말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가래가 찬 듯 그렁거리던 숨소리도 임종환자 특유의 몰아쉬는 듯한 체인 스톡 호흡 (Chegne Stokes Breathing)으로 바뀌었다. 잠시 후 딸이 병실로 들어와 “엄마, 나야” 하는 순간 윤연자씨는 한숨을 쉬는 듯하더니 떠나 버렸다. 남편은 오지 않은 상태였다. 딸과 다정하게 대화 한번 나누어 보지도 못하고, 남편과도 화해하지 못한 채 그렇게 윤연자씨는 황망히 떠나 버렸다. 큰아들과 딸이 소리 없이 울고 있는 옆에서 작은아들은 “아무도 내 마음을 몰러!” 하며 큰소리로 몸부림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영안실로 시신을 옮겨간 후에도 작은아들은 한참 동안 계단에서 울다가 내려갔다. 딸이 무엇을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의논하러 왔다. 영정 사진은 주민등록증 사진을 주고 의뢰하면 영안실에서 알아서 해준다고 알려주고 묘지는 공원묘지나 값이 저렴한 시립묘지를 알아보도록 했다. 염이나 입관 등은 영안실 장의사와 의논하도록 알려주었다. 조문 꽃바구니를 준비하여 영안실로 찾아가 보니 서너 명의 유족과 친지가 있을 뿐인 쓸쓸한 빈소였다. 작은아들만 상주로서 서있고 누나는 돈 구하러 갔다고 했다. 한쪽 구석에는 윤연자씨 남편이 술에 취한 채 꾀죄죄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고 꽃은 호스피스에서 가지고 간 꽃바구니가 전부였다. ‘저 양반이 부인 살아 있을 때 찾아와서 서로 화해를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또, ‘어머니 살아 계실 때도 늘 작은아들이 수고를 하더니 돌아가시고 나서도 빈소를 혼자서 지키는구나’ 싶었다.

돌아가면서도 저렇게 가족들의 마음이 뿔뿔이 흩어진 채로, 싸매지 못하고 떠나다니… 이렇게 생각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가만히 인사를 전했다.

“잘 가요. 윤연자씨.”

 

 

가출한 아들을 기다리면서 눈을 감은 30대 장암 말기 여인

“빨리 와! 엄마 돌아가셨어”

말기 장암의 치료를 위해 남동생 집에 기거하던 장숙자씨(35세, 여)가 호스피스에 의뢰된 것은 방사선 치료를 담당하던 의사의 소개를 통해서였다. 치료에 회의적이었던 남편과는 달리 꼭 치료를 해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장숙자씨는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은 후 퇴원을 친정집(남동생집)으로 하였다가 통증과 하지 부종, 배뇨 장애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다시 입원하면서 호스피스에 의뢰되었다.

응급실에서 처음 만난 장숙자씨는 온몸이 다 아프다고 하면서 특히 양쪽 다리와 등, 오른쪽 어깨가 아프고 가슴이 조이는 듯 아프다고 하였다. 환자의 통증을 측정하는 방법으로 흔히 VAS(Visual Analogue Scale)을 사용한다. VAS란 0부터 10까지 1cm 간격으로 눈금이 있는 자를 연상하게 하고 0을 하나도 안 아픈 상태로, 10을 견딜 수 없을 만큼 몹시 많이 아픈 상태로 생각할 때 현재 느끼는 통증의 정도가 숫자로 몇이나 되는지 측정하는 방법을 말하는데 장숙자씨의 경우 하루 종일 8~10 정도로 아프다고 하였다. 통증이란 사람마다 느끼는 정도가 달라서 매우 주관적인 것이므로 환자 자신이 아프다고 하는 것 자체를 그 사람의 통증으로 받아들이는데 VAS 8~10이면 통증이 아주 심한 상태를 의미한다. 담당 의사는 폐와 뼈, 목과 겨드랑이의 림프절까지 전이된 상태로 보고 있었으며 통증 조절과 하지 마비 예방을 위해 방사선 치료를 하기로 했다.

호스피스에 가입하는 절차를 밟으면서 장숙자씨는 제발 통증만 좀 없게 해달라고 하였고 보호자로 따라온 남동생은 환자가 편안히 죽을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다고 부탁하였다. 남동생은 이틀 전에 자형(장숙자씨의 남편)이 ‘어차피 죽을 건데 집에 와서 있다가 죽으로’ 고 전화로 이야기했으나 누나가 ‘싫다’고 하였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면서 그 동안의 경과와 환자의 가정 형편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하였다. 직장에 다니던 장숙자씨는 2년 전, 직원 신체 검진 때 장암으로 진단받고 바로 입원하여 인공 항문을 만드는 수술을 하였으며 퇴원 후 계속 직장에 다니면서 일을 하였다고 했다. 그 동안 방사선 치료를 받기 위해 두 번 입원하였고 입원비는 회사와 동료들의 도움으로 해결하였다고 하였다. 병 수발은 친정어머니와 장숙자씨의 올케(남동생의 부인)가 해왔는데 지금은 올케가 해산할 날이 가까워서 그나마도 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하였다. 자형은 누나와 나이 치아도 많고 환자인 장숙자씨와 의견이 달라서 그 동안 환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치료해 왔다고 하였다 진솔한 표정의 남동생은 누나를 진심으로 염려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장숙자씨의 왼쪽 다리는 부어서 통나무처럼 뻣뻣했으며 하복부에도 부종이 있어서 생식기 위쪽이 소복하게 부어 있었다. 아프다고 체위 변경을 잘 하지 않아서 골반 뼈가 있는 엉덩이 뒷부분에 욕창이 생겨 있었다. 외생식기 전체에 부종이 심해서 소변도 잘 보지를 못해 아예 방광에 소변줄을 꽂아 놓았다. 그녀는 밤새 꿈꾸느라고 잠을 못 잤는데 깨어보니 무슨 꿈인지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옆에서 수발하던 친정어머니가 “언제면 일어나 걷겠어요?” 하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자 장숙자씨도 함께 울었다. 친정어머니는 사위가 술 마시고 와서 자신에게 “그렇게 딸을 끼도 도니 끝까지 책임지세요” 라고 하며 화를 내더라고 했다. 딸에게는 마음 상할까 봐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하면서 며느리가 해산 달인데 그쪽 친정어머니가 올 형편도 못 되어 큰 일이라고 하였다. 장숙자씨는 집안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감고 못들은 척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장숙자씨의 남편은 가난하지만 아내를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아내와 함께 있고 싶고 끝까지 돌봐주고 싶어했다. 그러나 삶의 방식이 달랐던 두 사람은 생각하는 방식도 달랐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나이가 열한 살이나 위인 남편(46세)과 혼인 신고만 하고 살림을 차렸던 장숙자씨(35세)는 아들 둘을 낳고 키우면서도 계속해서 직장 생활을 해왔으나 건설업에 종사하던 남편은 3년 전에 실직한 이후로 공사판에 다니면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해 왔다고 하였다. 암으로 진단받고 난 후에도 남편은 그냥 집에서 병원에 다니면서 통원치료를 하라고 하였으나 장숙자씨의 생각에는 그래도 입원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친정어머니와 남동생의 생각도 같아서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퇴원 후 몸조리를 위해 어머니가 계시는 친정으로 퇴원하였는데 그것이 남편의 마음을 상아게 한 것 같았다. 남편은 처가에서 아내를 뺏어 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장숙자씨의 남편은 통원 치료를 하면서 장숙자씨의 친정어머니가 자신의 집에 와서 아내를 돌봐 주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친정 형편은 올케(남동생의 부인)가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친정어머니가 조카를 봐줘야 하기 때문에 장숙자씨 집으로 갈 수가 없고 대신 장숙자씨가 친정으로 갔었던 것이라고 하였다. 상황이 이런데도 사위가 그런 소리를 한다며 친정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서운해하고 있었다. 장숙자씨는 이번에도 퇴원하여 친정집으로 간다면 남편의 서운함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염려하고 있었다. 집으로 가면 장숙자씨 외에 여자가 아무도 없어서 병수발이 용이하지 못한 점도 문제라고 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장숙자씨와 친정어머니 두 사람은 퇴원 후에 장숙자씨가 어느 집으로 갈 것인지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말기 환자가 되어 누워 있으면서 투병만 하여도 쉽지 않을 텐데 퇴원 후에 어디로 가야 자신의 몸을 누일 수 있을 것인지를 걱정해야 하는 장숙자씨의 입장은 딱하기만 하였다.

그러는 중에도 방사선 치료는 계속하였으며 호스피스 팀에서 방문하여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고 머리를 감겨주거나 침상에 누운 채로 몸을 씻겨주고 마사지를 해주는 등의 신체 간호와 휴식 간호(Respite Care)를 제공하였다. 휴식 간호란 가족의 휴식을 위해 일정 기간 호스피시 팀원들이 가족을 대신하여 환자를 돌보아 주는 것을 의미하는데, 장숙자씨의 경우 친정어머니가 집에 가서 하룻밤을 푹 쉬고 올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그 시간 동안은 호스피스 팀의 자원봉사자들이 교대로 환자를 수발하였다. 처음에는 한숨만 쉬며 좀체 말을 하지 않았던 장숙자씨였으나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는 동안 마음이 열려서 이런 저런 사정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장숙자씨의 걱정은 퇴원 후의 거처 문제만이 아니었다. 작은아들이 지금 집을 나가고 없다는 것이었다. 가출한 지 두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 소식이 없어서 몹시 걱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인 아이가 어디 가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혹시 앵벌이를 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걱정이 된다고 하면서 말을 맺지 못하고 울먹였다.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내고 남편이 찾고 있으나 아직 소식이 없다고 했다. 방사선 치료와 진통제 등으로 치료를 하고는 있으나 환자 마음의 심려가 커서 사실상 안정하기가 어려웠다. 전신 통증은 조금 줄어들었으나 왼쪽 어깨는 더 아파졌다고 하였다. 장숙자씨의 몸을 살펴보니 다리의 부종은 빠졌으나 왼쪽은 어깨부터 옆구리까지 부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복부에는 며칠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지름 1cm 정도의 작은 덩어리가 두 개 툭 튀어 나와 있었다. 잘 먹지도 못하고 몸은 약해지는데 암세포만 잘 자라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런 중에 장숙자씨 올케에게 산기가 있다는 연락이 왔다. 남편이 오면 친정어머니가 가셔야 한다고 하였다. 다음날 보니 남편 대신 중학교 3학년인 큰아들이 와 있었다. 아버지가 가라고 해서 학교를 쉬고 온 것이라고 하였다. 장숙자씨의 남편은 전화로 병원에서는 돌볼 사람이 없으니 자기 집으로 돌아와서 통원 치료를 하였으면 좋겠다고 하였으나 장숙자씨는 “통원 치료는 필요 없어요. 선생님이 오셔서 소변줄을 갈아주신다면 그냥 집으로 가겠어요” 라고 하였다. 가정 호스피스에 가입하는 경우 환자의 집이 방문 가능한 거리에 있어야 잘 돌보아줄 수가 있다. 그런데 장숙자씨의 집은 서울이 아니었고 교통시간이 호스피스 사무실에서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장숙자씨의 몸 상태로 보아도 퇴원하면 거의 매일 방문하여야 할 정도인데 집이 멀면 그렇게 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어서 장숙자씨 집 근처에서 방문해 줄 만한 호스피스 기관이 있는지 알아보았으나 적당한 기관이 없었다. 3회 남은 방사선 치료가 끝나면 퇴원하기로 되어 있는데 우리가 잘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다른 좋은 대안이 없었고 장숙자씨 남편의 부탁도 있어서 부족하기는 하지만 장숙자씨가 퇴원하게 되면 가정호스피스 간호를 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숙자씨의 마음은 방사선 치료가 끝나도 도무지 퇴원하고 싶지가 않은 듯했다.

“퇴원하면 남편이 있는 집으로 가려고 마음을 정했어요. 그런데 집으로 가는 것이 무서워요. 이제 가면 다시 못 올 것 같아서… 이제 그만인거 같아서…”

울먹이면서 장숙자씨는 그 동안 그렇게도 살고자 하였는데 집에 가서 돌봐줄 사람도 없이, 작은아들 얼굴도 보지 못하고 죽을 것만 같아서 집에 가기가 꺼려진다고 하였다. 장숙자씨는 어머니가 계시는 친정 집이 자신에게 더욱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편이 있는 집으로 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장숙자씨의 남편이 호스피스 사무실로 찾아왔다. 냄새 나는 옷을 입은 지치고 초라한 모습의 중년사내였다. 외모는 그러했으나 이야기를 해보니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다.

작년에 수술할 때는 몰랐으나 3개월 전에 의사로부터 암이 온몸에 퍼져서 가능성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울기도 많이 했다고 하였다. 마음이 아프지만 돌볼 사람도 없고… 어차피 죽을 건데 병원에 있으면 뭐하겠냐고 하였다. 차라리 퇴원해서 얼마간이라도 자신의 집에 함께 있다가 보내고 싶다고 하면서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마지막 남은 시간을 아내와 함께 있고 싶은 남편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작은아이는 추석 지나고 집 나간 뒤 아직 안 들어오고 있다고 하였다. 작년에도 추석 무렵에 가출하여 4개월 만에 경찰에 의해 집에 돌아왔다고 하면서 두 녀석이 성격이 각각이라고 하였다. 큰 아이는 내성적이고 공부도 잘하는데 작은 아이는 활발하고 외성적이며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고 하였다. 공부는 못해도 좋으니 집에만 어서 들어왔으면 싶다고 하였다. 아내인 장숙자씨가 친정에 있고 싶어하니 자신도 큰아이들 데리고 그곳에 함께 가 있고 싶으나 그럴 수도 없다고 하였다. 큰아이 학교 문제도 있고 무엇보다 작은아이가 언제 돌아올지를 모르니 떠날 수가 없다고 하였다. 혹시라도 아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작은아이가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자신의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있고 싶다고 하였다. 지치고 피로한 모습이었다.

담당 의사를 만나 퇴원하겠다고 말한 장숙자씨의 남편이 병실로 가서 퇴원 이야기를 꺼내자 장숙자씨는 눈을 감으며 듣지 않으려고 하였다. 장숙자씨의 남편은 장숙자씨에게 이제 더 치료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하면서 장숙자씨가 다니던 회사에서 연락이 와서 가 봤더니 퇴직하도록 종용하더라는 이야기를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이야기를 듣는 장숙자씨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울음을 참는 듯해 보였다. 남편의 설득으로 할 수 없이 병원 문을 나서는 장숙자씨를 보내며 다음날 방문하기로 약속을 했다.

다음날 대충 그려진 약도를 보며 물어 물어 찾아간 장숙자씨 집은 넓은 벽돌 공장 한 옆의 가건물이었다. 재래식 화장실이 벽돌 공장의 반대 편 끝에 있고 물은 공사장의 수도에서 호스로 길게 끌어다 쓰고 있었으며 하수도 시설도 제대로 안 되어 있는 집이었다. 말리느라고 늘어놓은 회색 벽돌들을 지나 그 집으로 들어가 보니 방 1칸, 부엌 1칸 의 조그마한 집이었다. 텔레비전과 전기밥솥 등 방안의 물건들 위에는 하얗게 먼지가 쌓여 있었고 방은 덥고 환기가 안 되어 냄새가 났으며 벽 속으로 쥐가 다니며 긁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방안에는 낡은 침대가 있었는데 그 위에 장숙자씨가 누워 있었으며 큰 아들이 옆에 앉아 있었다. 아빠는 일하러 나가셨다고 했다. 링거 주사를 맞고 있었는데 병을 보니 5% 포도당 용액에 비타민 B와 를 섞어 놓은 것이었다. 아빠가 부탁하여 근처 병원에서 와서 달아준 것이라고 했다. 방광 소독을 해주면서 보니 소변줄을 통해 소변은 잘 나오고 있었으나 따뜻한 방바닥에 닿아 있는 소변주머니(urine bag)에 가득 고인 소변에서 냄새가 심하게 나고 있었다. 소변을 다 비워낸 후 아들에게 관리하는 방법을 알려 주고 소변주머니는 방바닥에 닿지 않도록 침대에 매달아 두었다. 장숙자씨의 얼굴은 씻지 못해서 눈곱이 끼고 지저분해 보였으며 몸에서는 쉰 냄새가 났다. 덥고 있는 이불과 베개도 회색빛인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세탁을 하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중학교 3학년인 큰아들이 학교에 못 가고 집에 있었으나 옆에 앉아 있기만 할 뿐 무엇을 알아서 수발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물을 떠다 세수와 양치를 시켜주고 부분 목욕을 해주었는데 손으로 슬슬 문지르기만 해도 굵은 때가 밀가루 밀리듯이 나왔다. 씻긴 후 로션을 발라주고 침상 정리를 해준 후 욕창 치료도 해주었으나 그 이상은 해 줄 수가 없었다. 아름답게 단풍이 든 산의 모습을 찍어서 코팅한 커다란 사진을 가지고 있었는데 장숙자씨가 잘 볼 수 있는 곳에 걸어주고, “이 그림을 보면서 경치 좋은 곳에 있는 것처럼 상상해 보세요.” 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유심히 바라보았다. 얼마 후 장숙자씨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고 쳐다보며 잘 가라고 인사를 하였으나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의 환자를 놓아두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사흘 뒤 자원봉사자 한 분을 모시고 다시 방문하였을 때는 장숙자씨의 모습이 전과 달라져 있었다. 볼이 움푹 패이고 입술에 주름이 져 있었으며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이미 임종 과정에 들어간 것으로 보였다. 얼굴을 찡그리고 있어서 왜 그런가 묻자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아파요” 했다. 몸이 삐뚤어져 있어서 반듯하게 해주고 어개, 다리 등 아프다고 하는 부위를 살살 만져주자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리의 부기가 빠져 있고 전신적으로 탈수 현상이 나타나 있었다. 방광 소독을 해주려고 이불을 들쳐보니 소변줄 밖으로 누런 분비물이 흘러나와 엉덩이 밑의 욕창 부위에까지 흘러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방광 내부에 염증이 심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수건으로 닦아내고 말린 후 방광 소독과 욕창 치료를 해주고 소변줄도 갈아주었다. 얼굴과 몸을 씻겨주고 침상 정리를 해주고 있는데 근처 교회의 교우라고 하면서 이웃집 아주머니 두 분이 오셨다. ‘장숙자씨는 종교가 없었는데…’라는 생각을 하며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장숙자씨의 남편이 너무 답답하고 절박하니까 집 근처의 교회에 몇 번 나갔었고 그래서 교우들이 사정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분들은 장숙자씨 집 형편이 너무 딱한 것 같아서 와 보았다고 하였다. 남편을 만날 수 없어서 일단 아들과 그 두 분에게 환자 상태를 말해주고 돌아왔다. 다음 방문 전에 사망할 것만 같았으나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다음날 다시 방문해 보고 싶었으나 다른 환자 방문 일정이 밀려 있어서 용이하지가 않았고 전날 함께 갔던 자원봉사자가 혼자는 겁이 나서 못 가겠다고 하여 며칠 뒤에 함께 가기로 하였는데 방문하려던 날 아침에 장숙자씨의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새벽 2시에 아내가 사망했다고 하였다. 남편과 큰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하였으며 아침에 교우들이 와서 도와주고 있다고 하였다. 마음이 무거웠다. 어제라도 다른 스케줄을 미루고 가볼 걸 하는 후회의 마음이 생기기도 하였다.

지난번 방문 때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하였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환자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는 의구심과 함께 웬만하면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와야지 하는 마음이 있어서 차마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를 하지 못하였는데 그것이 그만 마지막이 되고 만 것이었다. 급히 유가족 추후 관리 담당자를 찾았더니 마침 자리에 있었다. 상(喪)을 당하게 되면 유가족 추후 관리 담당자와 함께 방문하여 소개해 주고 계속 사별 관리를 받도록 연결해 주어야 하므로 함께 고인의 집을 방문하였다.

장숙자씨네 집은 고인이 살아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방안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고 펼쳐진 병풍 앞에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 근처 교회에서 보낸 화환이 하나 있었고 호스피스에서 들고 간 꽃바구니도 앞에 놓았다. 친지들이 와서 음식을 장만하느라고 부산스러웠고 남편은 수척하나 깨끗한 얼굴로 “어떻게 합니까, 할 수 없지요” 라고만 했다. 충격으로 인해 울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큰아들 역시 멍한 얼굴이었는데 엄마가 아픈 것은 알았어도 돌아가실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을 못해 보았다는 것이었다. 며칠 전에 필지가 방문했을 때 설명을 듣기는 했어도 설마 이렇게 정말로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고 하는 것이었다.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채 어머니의 죽음을 맞닥뜨려야 하는 아들이 몹시도 안 되어 보였다. 또 집 나간 둘째 아들은 엄마가 돌아가신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이 양반이 둘째 아들도 보지 못하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장례식에 온 친지들이 미리 와서 장숙자씨를 돌아가며 조금씩이라도 수발해 주었더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음 속으로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녀의 둘째 아들에게 소리쳐 보았다.

“태수야, 엄마가 돌아가셨어. 빨리 와!”

 

 

 

제5장 최고로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딸-사위와 화합하고 편안히 죽음을 맞은 50대 전이성 말기암 여인

“케네디 대통령도 죽었는데…”

변영순씨(56세, 여)는 한 달 전에 대학병원의 담당 의사가 의뢰하였던 환자였다. 그 의사는 우리 호스피스 팀 멤버이기도 하였는데 변영순씨가 항암제에 별 반응이 없게 되자 호스피스 간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의뢰하였다. 처음에는 보호자인 딸은 동의하였으나 환자가 동의하지 않아 그냥 집으로 퇴원하였었다. 퇴원 후 변영순씨는 집 근처의 개인종합병원에 잠시 입원하고 있었는데 옆구리와 배가 계속 아프고 복수가 차니까 마음을 바꾸어서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고 싶다고 하여 딸이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왔다. 퇴원 당시 변영순씨의 진단명은 원발부위를 알 수 없는 전이성 말기암이라고 하였다. 간, 방광, 직장에 암세포가 전이되어 있었고, 복강 내에 암세포가 퍼져 있는 상태이므로 복수가 찰 가능성도 많았다.

다른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환자의 경우에는 그 병원 의사와의 협력이 필수적인 일이므로 병실로 환자를 찾아가기 전에 먼저 변영수씨를 맡고 있는 담당 의사를 만났는데 그는 호스피스에 관심을 보이며 협조하겠다고 하였다. 변영순씨는 옆구리와 배가 칼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아프다고 호소하였다. 한 달 전부터 부정기적으로 아팠으며 어제 밤부터는 계속 아프다면서 이 병원에서 약과 주사를 주지만 계속 아프다고 얼굴을 찡그리고 신음 소리를 내면서 이야기하였다. 알아보니 비 非 마약성 진통제를 쓰고 있는데 효과가 없는 것 같았다. 변영순씨의 말로는 처음 입원하였던 동기는 아파서라기보다 복수를 뽑으려고 한 것이었는데 며칠 전에 바늘로 찔러보니 물이 아닌 피가 나오더라고 했다. 인공항문으로 가스가 나오면 조금 시원한 것 같고 그렇지 않으면 배가 부른 상태로 이렇게 아프다고 하였다. 변영순씨의 배는 오른쪽 아래 부분이 더욱 불룩하게 나와 있었으며 단단하였다. 아프고 불편해서 통 잠을 못 잔다고 하면서,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고 하였다. 6년 동안 종교 생활을 했고 대세(代洗)도 받았으나 이렇게 아프니 신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고 냉담해졌으며 한편으론 그런 자신에 대한 죄책감도 있다고 말하였다.

변영순씨가 입원하고 있던 병원에서는 경구용 마약성 진통제를 쓰지 않고 있었으므로 담당 의사의 동의를 얻어 변영순씨가 먼지 다니던 대학병원에서 필요한 진통제를 타 쓰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 약을 복용한 후 아픈 것이 진정되자 변영순씨는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퇴원하여 복수를 뽑고 싶다며 대학병원 외래를 방문하였다. 전공의가 복수천자(복부에 바늘을 꽂아 복수를 뽑는 시술)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붉은 색 핏물 같은 것이 나오더니 차차 색깔이 노래져서 그날 2000cc 가량 물을 뽑았다. 복수를 뽑고 나면 조금 지치기는 하지만 대개의 경우 환자가 느끼는 일반적인 몸 상태가 좋아지고 식사도 며칠간은 잘하게 되므로 2~3일 뒤에 자원봉사자와 함께 환자의 집을 방문하기로 약속하였다.

자원봉사자는 환자와 비슷한 연배인 조여사를 선정하였는데 외동딸을 시집 보내고 혼자 사는 변영순씨와 말동무도 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조여사는 기품 있는 귀부인으로 아들이 미국에서 공학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던 중에 백혈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기적적으로 완쾌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아들은 전공을 바꾸어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으며 조여사는 이 감사를 무엇으로 표현할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하게 된 분이었다. 변영순씨를 맡기 전에도 조여사와는 다른 환자를 몇 분 함께 돌보면서 호흡이 잘 맞았던 적이 있어서 서로 신뢰하는 사이였다.

처음 변영순씨의 집을 방문하는 날, 조여사는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비롯한 장신구들을 떼어내고 수수한 차림으로 따라왔다. 아파 누워있는 환자에게, 그것도 비슷한 연배의 건강한 사람이 너무 밝고 화려한 복장으로 찾아가면 환자의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라는 배려 때문이라고 하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변영순씨의 집은 지하철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10분 쯤 올라가는 산동네에 있었다. 서울에 이런 곳도 있는가 싶은 정도로 좁은 골목 사이사이로 많은 집들이 있었는데 약도가 잘 그려져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미리 약속을 하기는 하였으나 불쑥 들어서는 우리들을 보자 부엌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던 변영순씨는 화들짝 놀라면서 일어나 반겨 주었다. 골목에서 문 하나 열면 부엌이고 그 다음은 방으로 연결되는 그런 구조의 집이었다.

“이런 누추한 곳에 진짜로 와 주셨군요.”

그녀는 우리를 잡아 끌어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난 지금 못 죽어요!” 하였다 장문을 열고 커다란 보따리 세 개를 꺼내어 보여주면서 말했다.

“난 이거 다 해결하기 전에는 못 죽어요!”

환자 입에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경우 이 사람이 진실로 죽음에 직면하고자 하는 것인지 두려움을 감추고 그냥 해보는 소리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변영순씨는 의외로 담담하였다. 그녀가 풀어 보이는 보따리 안에는 빨간색 비단, 초록색 공단, 노란색 비단 등 색색가지의 자투리 천이 한아름씩 들어 있었는데 팔다가 남은 것들이라고 하였다.

변영순씨는 20대 초반에 사정이 있어서 남편과 헤어지고 딸 하나만 키우며 살아왔는데 천 공장에서 이런 자투리 천을 얻어다가 조금 이불보나 조각 밥상보를 만들어 수예점에 팔아서 딸 공부도 시키고 생계를 이어 왔다고 하였다. 이제 세 보따리 남았으니 이것으로 무엇을 좀 만들어 딸에게 유품으로 주고 싶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6.25 때 같은 동네에 살던 흑인 장교가 딸을 예뻐하였는데 부대 이동을 하면서 자기에게 주면 훌륭히 잘 키우겠다고 달라고 여러 번 애원하였으나 거절하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당시에 친척들은 그까짓 계집애 주어 버리고 새 인생을 살라고 대부분 찬성하였으나 딸을 보내고는 도저히 살아 갈 자신이 없어서 완강하게 거절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시집 보내고 나서 내 몸이 병들어 아프니 딸은 다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함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자원봉사자 조여사가 갑자기 겉옷을 벗더니 변영순씨 앞에 놓인 보따리를 가리키며 “자, 이리 주세요. 시키는 대로 박을 테니 말씀만 하세요” 하며 방 한쪽에 있는 손때 묻어 반질반질한 앉은뱅이 재봉틀 앞으로 다가갔다. 그 소리를 듣고 조여사를 바라보는 변영순씨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오늘은 그만 두고 다음부터 해요.”

변영순씨는 눈물을 훌쩍이다 말고 그만 웃고 말았다.

당분간 변영순씨를 수발하고자 조카딸이 와 있기로 했다면서 혼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하였다. 그 동안 혼자라서 누구에게 속을 털어놓고 말할 사람이 없었는데 오늘은 참 좋다고 하면서 자신의 질병 경험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였다. 그녀는 처음 인천에 있는 병원에서 수술을 할 때만 해도 자신의 병명을 몰랐는데 대학병원에서 인공 항문 만드는 수술을 할 때에야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낭떠러지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이었어요. 모든 게 귀찮고 말도 하기 싫고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 면회를 사절했습니다.”

변영순씨는 딸과 사위가 진작 자신에게 알려주었으면 좋았을 걸 일 년간이나 숨기고 뭐 먹고 싶은 것이 없느냐,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없느냐고 하면서 좋은 데 구경하러 가자고 만 해서 병이 더 악화된 것 같아 몹시 화가 났다고 하였다. ‘사위 자식은 개자식’ 이라고도 하였다.

“사람이 아프면, 병원에서 못 고친다고 했으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뭐라도 해야지! 안 그래요?”

변영순씨는 그 당시의 화났던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 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소리 지르고, 욕하고, 오지도 말라고 하면서 화를 내었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 동안 화를 내고 나니까 문득 ‘케네디도 죽었는데 너는 왜 이리 안 죽으려고 몸부림치니?’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래, 누구나 한 번은 다 죽는데 나라고 별 수 있나? 때가 되면 가야지’ 하는데 생각이 미치자 그만 그렇게도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던 마음이 슬그머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고 하면서 말했다.

“내가 원래 케네디 대통령을 참 좋아했거든.”

이야기를 하는 동안 변영순씨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생기도 있어 보였다.

일주일 후 변영순씨는 다시 병원에 와서 노란 색깔의 복수를 2500cc 정도 뽑고 귀가하였다. 그 이틀 후 집으로 방문하였더니 한결 편안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식사도 잘하고 아픈 곳도 덜하다고 하며 그 동안 조각 이불을 두 개나 만들었다고 하면서 보여 주었다. 왼쪽 다리는 여전히 저리고 발바닥의 감각이 거의 없으며 둔하게 아프다고 하였다. 아마도 종양이 신경을 눌러서 생기는 현상인 듯하였다. 변영순씨는 이틀 전에 장조카가 죽어서 어제 장례식에 다녀왔다고 하면서 “요 근래 아는 친지가 둘이나 죽었어요. 그래서 잠도 잘 안 오고 마음이 허탈해요. 죽을병에 걸려 죽기만 바라는 나는 아직 살아 있고, 건강하다던 조카는 먼저 갔으니…”하고 한숨을 쉬었다. 별 생각이 다 난다고 하면서 과거 이야기를 했다.

“남편과 생이별했어요. 남들은 복수하라고도 하고, 딸은 고아원에 주고 재가하라고 했지요. 그러나 어려워도 딸만 바라보고 키웠어요. 어찌나 힘들던지 두 번이나 딸과 함께 자살하려 했으나 그때마다 말리는 사림이 있어서 못 했어요.”

이렇게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친지의 갑작스런 죽음이 변영순씨의 마음에 파문을 던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살고 보니 남편은 좋은 날 보지도 못하고 중간에 죽어 버리고 결국 내가 이겼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그런 생각을 털어 버리려고 벌떡 일어나 바느질을 하는데 남들은 나보고 청승 떤다 하지만 모르는 소리예요. 오죽해서 하겠어요? 죽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어요? 할 수 없으니 말을 그렇게 해서 그렇지 속마음은 다 살고 싶은 것 아니에요?”

변영순씨의 눈에 눈물이 그득했다.

며칠 뒤 변영순씨는 복수가 차지 않게 해주는 용한 한의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먼 곳까지 갔었는데 줄만 서 있다가 표도 못 얻고 돌아 왔다고 했다. 표가 있어야 진찰을 받는데 그것을 모르고 그냥 줄 서서 기다렸던 변영순씨는 고생만 하고 온 모양이었다. 약간 우울해 하면서 두 번 다시는 못 가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딸과 사위가 자신을 너무 내버려뒀다, 고작 병원에만 데리고 다녔지 뭐 해줬느냐, 하다 못해 나무 뿌리라도 구해 가지고 와서 먹어 보라는 등 뭔가 급한 게 있어야지 안 그러냐고 하면서 다시금 화가 난다고 하였다.

사실 사위는 장모인 변영순씨에게 잘 해 드리려고 한 것이었다. 처음 말기암이라고 진단 받았을 때 의사가 딸과 사위에게만 그 사실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이제 병원에서는 더 해드릴 게 없으니 퇴원해서 드시고 싶은 것 있으면 드시고 가고 싶은 곳 있으면 가시도록 해서 편안히 돌아가시게 해드리세요”라는 의사의 말대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변영순씨는 사위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화를 냈다.

“사위놈은 개자식이지. 오지도 말라고 했어요. 딸한테도 아이들 다 놔두고 내 옆으로 와 있으라고 했어요. 그래서 요사이는 우리 집에 와 있어요. 낮에는 직장에 가고 저녁에는 이곳으로 퇴근을 해요 딸 얼굴이라도 보니 조금 살 것 같아요” 하며 화난 목소리로 말하였다. 말기 환자들은 자신의 생명이 시한부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손 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몹시 화를 내기도 하는데 대개는 이를 가까운 이들에게 투사하는 경향이 있다. 변영순씨의 경우는 사위가 그 대상인 듯하였는데 이는 평소에 사위가 변영순씨에게 그만큼 가까운 사람이었다는 의미도 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간 변영순씨는 외출하지 않고 집에서 모 교수의 강론 테이프를 들으며 지냈는데 들으면 귀에 잘 들어오고 들어 볼 말이 많다고 하였다. 복수는 일주일에서 열흘에 한 번 정도 병원에 와서 2000cc~2500cc정도 뽑았는데 호스피스에 가입한 지 한 달쯤 지나자 복강 내의 종양이 커져서 복수는 조금밖에 없고, 장도 거의 막혀 있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복수를 뽑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 변영순씨는 몹시 불편해 하다가 다른 병원에 입원하였다. 변영순씨가 입원한 병원은 병원장부터 간호부서의 직원들까지 대부분 호스피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분들이었을 뿐 아니라 딸이 사는 집과도 가까웠기 때문에 환자와 가족이 의논하여 그렇게 결정한 것이었다.

변영순씨가 입원하고 일주일 간은 자원봉사자인 조여사만 방문하고 필자는 휴가 기간이라 쉬고 있었다. 미리 그 사실을 알려 드렸는데도 변영순씨는 한참 만에 방문한 필자를 보고 손을 꼬옥 잡고 말했다.

“내가 이렇게 죽게 되었는데 날 버리고 어딜 갔다 왔어?”

입원하는 날 복수를 약간 뽑았고 이뇨제를 쓰고 있는데도 계속 배가 불러온다고 하면서 장이 막혔다는데 이렇게 불편하니 이러다 죽을까 봐 두렵다고 하였다. 경구용 마약성 진통제는 대학병원서 타 온 것을 쓰고 있었고, 주사는 토하지 않는 것으로 바꾸었다고 수간호사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 병원에서 처음으로 변영순씨의 사위를 만났는데 그는 자신이 딸이 아니고 사위라고 그런지는 모르지만 저렇게 고생하시느니 차라리 발리 돌아가시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못된 생각인 줄 알기에 얼른 마음을 고쳐먹는다고 하면서 자기 부인과는 오래 못 만나니 서먹해진 것 같다고 자신의 입장을 토로하였다. 부인이 둘째 아이 낳고 몸조리하느라 두 달 간 친정에 있었고 그 이후로도 거의 환자 곁에 있으니 부부가 가까이 있을 시간이 별로 없었다고 하였다. 다행히 4개월 된 둘째 아이는 순해서 밤에 잘 잔다고 하였다. 사실 변영순씨의 딸이 시부모에게 두 아이를 다 맡기고 낮에는 직장에 출근하고 밤에는 병든 친정어머니 곁이 있다는 게 옆에서 보기에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외동딸인 줄 알고 시부모님이 뭐라고는 안 하시지만 며느리의 입장에서 편한 것은 아닐 터였다. 그리고 젊은 부부가 오래도록 떨어져 있자니 그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중병으로 오래 누워 있으면 환자뿐 아니라 가족도 상당히 고생을 하게 마련이었다. 변영순씨의 사위는 고등학교 교사인데 마침 방학이어서 낮에는 변영순씨의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변영순씨가 아무리 뭐라고 그래도 묵묵히 장모를 위해 수발하는 사위의 모습이 든든해 보였다.

이곳에 입원하여 변영순씨는 곰곰이 자신을 성찰해 볼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진 듯했다. 어느 날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육체적으로는 안 되겠고, 사방이 막혔으니 이젠 어떡하겠어요? 화도 내고 애도 써봤으나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을 어찌 하겠어요? 종교에 의지하기로 하고 체념하고 나니까 오히려 담담해졌어요.”

단지 고통 없이 살았으면 하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오히려 없어졌다고 하면서 아프지 않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다 하였다. 담담한 표정으로 필자의 손을 꼭 쥐고 때때로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처음에는 변영순씨와 자원봉사자 조여사, 그리고 병원의 종교 혹은 종파가 모두 달라서 갈등도 좀 있었으나 이제는 안 그렇다고 하면서 그분과 나와의 관계가 중요하지 교파가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딸과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때로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니 서글퍼지기도 하지만 화를 내도 소용없으니 이젠 안 낸다고 하면서 “이상하죠? 죽기로 작정하니 오히려 맘이 안정되는 것을 느껴요” 했다. 얼굴이 평온해 보였다.

사위는 자신의 방학 기간이 끝나면 간병인을 두어야겠다고 생각하였으나 변영순씨는 성격상 가족 아닌 사람이 옆에 있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위의 제의에는 대답을 않고 딸네 집에 한 번 다녀와야겠다고 하였다. 자신이 떠나기 전에 딸네 집 살림살이를 한 번 봐 주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딸은 출가 외인이고 시부모와 함께 사는데도 변영순씨의 마음에는 자신이 꼭 챙기고 싶은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변영순씨가 종교에 의지하여 죽음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이후, 한 동안 그녀의 심신은 안정 상태를 유지하였다. 같은 약을 쓰고 있는데도 환자가 느끼는 통증의 정도가 줄어들었으며 웃고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어느 날은 아침에 그녀를 방문한 필자를 보고 환하게 웃으면서 “내 말 좀 들어봐요” 한다. 그 무렵 변영순씨의 상태는 며칠 동안 변이 안 나와서 배가 아프다고 하였었다. 그래서 전날 밤에는 벽을 향해 누워서 잠들기 전까지 “사람이 입으로 먹었으면 아래로 나와야지, 이게 뭐예요?” 하고 울면서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다고 하는데 오늘 아침에 노랗고 예쁜(?) 변이 인공 항문으로 잘 나왔다고 한다. 변영순씨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그 이야기를 하면서 “어쩌면 그렇게 영특하시지요?” 했다. 생전 처음 자신이 기도한 결과를 눈으로 보며 기뻐하고 있었다.

변영순씨의 몸은 많이 수척해졌으나 마음이 안정되고 내적인 평안을 누리고 있었다. 변영순씨가 자신이 죽기 전에 딸네 집에 곡 한 번 다녀오고 싶다고 하여서 담당 의사의 허락을 받고 외박을 하기로 하였다. 딸네 집은 인천에 있어서 사위가 자동차로 모시고 갔는데 일주일 예정으로 갔으나 3일 만에 돌아오고 말았다. 딸의 살림을 정리해 주다가 못 먹고 기운 없어서 도로 돌아왔다고 한다. 사람의 생명보다 귀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일 년 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 만일 더 살 수 있다면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싶다고 하였다. 딸네 집에서 무리하게 살림을 정리해 주려고 하다가 역부족임을 실감하고 죽음에 임박한 자신의 현실을 다시 한 번 직시하면서 자기 연민에 빠진 것으로 보였다.

“사람이 죽을 때 죽더라도 먹을 것 먹다가 죽어야지 이래 가지고 되겠는가? 자식에게도 고생만 시키고, 먹을 수도 없으니…”

변영순씨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벽을 향해 돌아누운 채 울고 있었다. 원망하는 마음이 든다고도 했다.

그러나 병원으로 돌아와 조금 쉬고, 복수도 약간 뽑고, 영적인 지지도 받으니까 우울한 마음이 얼마간 가셔지는 것으로 보였다. ‘병상에 서의 축복’ 이라는 책을 읽어주었는데 바실레아 슈링크가 쓴 인생에는 중한 환자가 되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내용의 책이었다. 흔들리다가 다시 마음을 잡게 된 변영순씨는 이제야말로 다시 딸네 집에 다녀와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어찌 보면 그것은 그녀가 편안하게 떠나기 위한 준비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다시 담당 의사에게 양해를 얻어 딸네 집으로 갔다. 이번에는 딸에게 시시콜콜히 간섭하고 짜증을 부리는 등 까다롭게 굴어서 식구들을 어렵게 하는 것 같았다. 딸네 집으로 전화를 해서 어떤지 물어보았더니 변영순씨는 다리가 무겁고 배가 아프며 기분은 그저 그렇다고 하였다. 전화를 바꾼 딸은 어머니가 사려 깊은 분이라서 자신에게 그러는 것이라고 하며 변영순씨가 화내는 것을 감추려고 하였다. 어쨌든 이번에는 변영순씨가 직접 하지는 않았으나 입으로 시켜가며 원하든 대로 딸네 집을 정리하였고 그 동안 곱게 만들어 놓았던 조각 이불 2개와 조각 밥상보 3개를 딸에게 선물하였다.

병원으로 돌아온 후 변영순씨는 간병인을 쓰는 데 동의하였는데 그것도 낮에만 쓰겠다고 하여 환자가 원하는 대로 하였다. 음식은 호스피스 자원봉사자인 조여사가 가지고 온 곡물 가루를 조금씩 물에 타서 먹는 정도였다. 몸은 더욱 말랐으며 오른쪽 다리가 저리고 아프다고 하여 살살 만져 주면 시원해 하였다. 복부는 단단한 종양 덩어리가 오른쪽 하복부 전체에 퍼져 있고 왼쪽에는 인공 항문을 가지고 있었다. 덩어리는 상복부에서도 오른쪽 엉덩이 아래에서도 만져졌다. 자그마한 것들이 새로 생기는 모양이었다. 이런 변화를 겪으면서 변영순씨는 더 살기를 원하는 마음과 현실을 직시하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일 년 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좋은 일 좀 해볼 텐데…”

변영순씨는 혼자 소리를 하다가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설교 테이프를 듣기도 하였다.

신체적으로는 이제 복수를 소량씩 빼는 것도 어지럽고 견디기가 힘든 상태가 되었다. 복수는 단순한 물이 아니라 단백질이 섞인 체액이기 때문에 복수를 뽑을 때 영양분도 함께 뽑혀 나가게 되어 임종이 가까울수록 환자에게는 힘이 든다.

“입맛이 없어서 못 먹는 게 아니에요. 배가 부르고 속이 거북하니까… 음식을 먹은 후에는 손가락을 입에 넣어 토해내야 돼요. 낮에 조금씩 물이라도 먹으면 저녁 때는 토해야 되는데 그러고 나면 시원해요.”

사실 변영순씨의 몸 상태는 이미 장폐색이 일어나서 물을 한 모금 마셔도 장의 일정 부위 아래로는 내려가지 못하는 상태였다. 토할 때는 초록색이나 누런 색의 토물이 나올 때도 있고 대로는 맹물 그대로 토하기도 하였다. 먹지 못하니 배가 고픈데 참고 있다고 하였다.

호스피스에 가입한 지 3개월이 조금 지나면서부터 변영순씨는 조금씩 잠자는 시간이 많아졌으며 더 이상 옆구리가 결리다거나 배가 아프다는 소리를 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임종 과정을 시작하는 것으로 보였다. 손을 잡고 있으면 깜박 잠이 들었다가 다시 반응을 하곤 하였으며 자는 것 같으면서도 희미하게 눈을 떴다 감았다 하였다. 복수천자를 하였으나 진한 갈색의 액체가 400cc 정도 나왔으며 가스가 많이 나왔는데 냄새가 지독하더라고 간병인이 알려주었다. 다행히 간병인이 임종 환자를 옆에서 지켜본 경험이 많다고 하면서 담담히 환자의 곁에서 수발을 해주어서 변영순씨에게나 딸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변영순씨는 이미 뼈와 가죽만 있는 것처럼 바싹 마른 상태에 있었으며 피부는 탈수 현상이 나타나 주름져 있었고 자주 초록색 토물을 뱉어 내고 있었다. 친지들에게 연락하여 남동생과 올케가 와 있었으나 변영순씨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고 들어오지 말라고 하여 대면을 못한 채 밖에서 기다리고만 있었다. 간병인과 필자, 그리고 딸만 함께 있고 싶다고 하여 그렇게 하였다. 임종 과정을 시작한 지 닷새째 되는 날 오전 11시경에는 변영순씨의 혈압이 잡히지 않았고 정오 무렵부터는 손목의 맥박도 잡히지 않았다. 손과 발이 차가워진 상태였으며 양팔의 상박 부위까지 차가웠다. 딸이 울면서 변영순씨의 손을 잡고 “나 땜에 엄마 일생 망쳤어. 그때 검둥이가 나 달랄 때 줬으면 이렇게 돌아가시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하자 그녀는 딸의 손을 마주잡은 채 빙그레 웃었다. 딸이 계속 울면서 “어머니가 해주신 것의 만분지일도 못했어요. 죄송해요” 라고 하자, 변영순씨가 “됐어” 했다.

병실 밖에서는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서 변영순씨의 장례 절차를 의논하고 있었고 병실에서는 간병인이 조용한 소리로 찬송을 불러 드리고 있었다. 마지막에 환자가 안절부절 못할 때에 이런 조용한 소리의 음악은 환자를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후쯤 되어 변영순씨가 필자에게, “이젠 됐어요. 가도 좋아요” 하면서 딸과 둘이서만 있고 싶다고 하였다. 임종이 가까우면 떠나는 사람의 시야가 좁아져서 아직 작별 인사를 못했거나 마무리 지을 일이 있는 사람하고만 만나려고 한다. 변영순씨도 임종이 임박하여 가장 가까운 사람과만 있고 싶은 것으로 판단되어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물러 나왔다. 얼마 후 자원봉사자인 조여사가 도착하여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 들었다.

“천국에서 만나요.”

“먼저 갈게요.”

“잘 가요.”

변영순씨는 그날 저녁 8시 30분 경 딸과 사위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편안하게 떠났다고 하였다.

다음날 영안실로 찾아갔을 때 딸이 필자의 손을 잡으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밤에 너무 힘들어서 간병인을 24시간 써야겠다고 어머니와 의논을 했는데 그게 어머니 생각은 안 하고 내 자신만 생각한 처사 같아서 후회가 돼요.”

이렇게 돌아가실 줄 알았으면 좀더 잘 해 드릴 걸 그랬다는 후회가 딸의 마음에 가득한 것 같았다. 변영순씨는 일생을 쉽지 않게 살았지만 마지막에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으면서, 좋은 자원봉사자도 만나고, 사랑하는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자신의 믿음을 따라 하늘나라고 잘 이사를 한 것 같았다. 물론 나중에 만나 보아야 알겠지만.

“안녕히 가세요, 변영순씨.”

 

 

 

전 남편과 함께 보낸 마지막 일주일

“그래도 그 때가 최고로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병상 세례를 받은 김순애씨(41세, 여)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 보였다. 말라서 뼈와 가죽만 있는 모습이었으나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옆에 있는 남편의 얼굴도 웃고 있었고 10대인 두 딸도 웃고 있었다. 꽃다발을 안고 함께 사진을 찍는 김순애씨와 가족들은 눈물과 웃음이 범벅이 된 얼굴들이었다.

유방암 말기 환자인 김순애씨를 처음 만났을 때는 이 세상을 비관하고 있는, 불쌍하고 초라해 보이는 독신 여성이었다. 병실에서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화를 내고 샐쭉해 하는, 다루기 어려운 환자 중 한 사람이었다. 대답도 잘 안하고 시니컬 하게 굴기 때문에 병동 간호사들도 다 회피하는 환자였다. 김순애씨는 아직 41세였으나 50세도 더 되어 보이는 얼굴로 온통 찡그리고만 있었다. 병수발 하는 친정어머니에게도 화를 내며 짜증을 부리곤 했다. 유방암 진단을 받은 지는 3년 되었는데 두 번째 재발하여 입원한 후로는 항암 치료도 효과가 없어서 호스피스에 의뢰된 경우였다. 머리 카락은 다 빠져서 하나도 없고, 얼굴 모양은 둥그런 것이 전형적인 보름달 모야(moon face)이었다. 김순애씨는 머리에 스타키넷(스타킹처럼 주름진 붕대주머니)으로 모자를 만들어 쓰고 있었는데 살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김순애씨의 주된 증상은 통증과 호흡 곤란이었으나 정서적으로 분노, 짜증,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돌보는 사람이라고는 친정어머니밖에 없고 그 이에는 가족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들이 요일을 정해 놓고 매일 병실을 방문하여 환자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었다. 조금씩 먹을 것도 해다 주고 멋있는 그림을 침상 옆, 벽에 붙여주고는 김순애씨가 그림 안에 있는 것처럼 상상해 보도록 권유하기도 하였다. 친정어머니가 쉴 수 있도록 일주일에 하루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자원봉사자들이 돌보아 주었다. 씻겨 주고, 함께 있어 주고, 책을 읽어 주기도 했다. 호스피스 치료를 받으면서 김순애씨의 통증을 비롯한 신체적 증상은 조절이 되고 있었으나 부정적인 태도는 여전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은 김순애씨가 혼자서 울고 있었다. 아파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고, 무언가 말 못할 사정이 있어 보였다.

알고 보니 김순애씨에게는 두 딸과 남편이 있었는데 남편과는 10년 전에 이혼하였다고 하였다. 당시 다섯 살과 여덟 살이던 두 딸은 남편이 데리고 있다고 하였다. 이혼인 이유는 남편의 외도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그 후 남편은 재혼하였으나 김순애씨는 혼자 살아왔다고 했다. 이혼한 후 김순애씨는 남편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으며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하였다고 했다. 이혼한 지 10년이나 되었으나 김순애씨는 아직도 마음 속에선 남편을 보내주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에 남편은 잘못했다고 하였으나 결벽증이 있었던 김순애씨는 자신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서 이혼을 강행하였는데 나중에 남편은 외도했던 상대가 아닌, 다른 여자와 재혼을 했다고 하였다. 김순애씨는 자신이 남편 때문에 속 끓여서 병이 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편 뿐 아니라 온 세상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생각이 들어 식사도 제때에 안 하고 잠도 제때에 안 자고 아무렇게나 자신을 학대하며 살아왔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되고 보니 자신이 너무나 불쌍한 생각이 든다고 하면서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남편은 그렇다 치고 자녀들은 그 동안 얼마나 자주 만났는지 물어보았다. 김순애씨는 고개를 저으면서 처음에는 몇 번 만났으나 남편이 재혼한 후 이사를 가고 나서 부터는 연락이 끊어져서 만나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다고 했다. “보고 싶으세요?” 하고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죽기 전에 남편도, 딸들도 한 번 만나 보고 싶은데 어디에 사는지를 모른다고 했다. 생의 마지막에 있는 사람의 간절한 소원이었다.

김순애씨는 긴 방황 끝에 이제야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 것이었다. 딱한 사연을 듣고 보니 사망하기 전에 찾아서 한 번 만나게 해주었으면 싶었다. 그런데 그 전에 김순애씨가 남편을 용서하고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있어야 했다. 도 찾을 수 있다고 해도 남편이 이미 재혼한 상태이므로 현재 부인의 동의를 얻을 수 있어야 했다. 가장 염려가 되었던 것은 오랫동안 보비 못하였던 딸들이 이젠 10대가 되어 있을 터인데 생모를 만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는지 하는 점이었다. 호스피스 팀에서는 그러나 한 번 시도해 보기로 하였다. 김순애씨 가족의 소재를 여러 채널을 통해 알아보는 동안 김순애씨는 호스피스 팀의 성직자와 면담을 하도록 했다. 김순애씨는 종교가 없었지만 용서받고 용서하고자 하는 요구가 있었고, 분노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사랑에 대한 요구가 있는 만큼 영적으로 접근해야 될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주쯤 지나서 김순애씨 전 남편의 소재를 알게 되어 연락이 가능하게 되었다. 김순애씨의 전 남편 정씨는 모 회사의 이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그는 딸들과 현재의 부인과 의논해 보겠다고 하였다. 이틀이 지난 뒤 정씨는 현재의 부인이 쾌히 동의하고 보내주었다고 하면서 두 딸을 데리고 문병을 왔다. 이 무렵 김순애씨는 거의 먹지 못하고 바싹 마른 상태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심리적으로는 성직자와 두어 차례 면담을 하면서 이제는 용서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거의 10년 만에 가족을 만난 김순애씨는 처음엔 조금 서먹한 듯했고 아이들도 중병으로 침상에 누워 있는 엄마를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남편이 먼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 동안 늘 마음 한구석에서 미안하게 생각했소. 나를 용서해 주겠소?”

김순애씨는 울먹거리는 듯하더니 앙상하게 마른 손을 내밀었다. 정씨가 그 손을 잡았고 아이들도 그 손을 함께 잡았다. 김순애씨가 사과를 했다.

“내가 너무 옹졸했어요.”

“아니, 내가 잘못했지. 당신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어.”

김순이씨와 가족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울음을 터뜨렸고 지나온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정씨와 딸들은 김순애씨의 병상을 지키기 시작했는데 가족들이 오고 난 후에 김순애씨는 훨씬 원기를 되찾은 듯해 보였다.

이혼한 후에 김순애씨가 자기 연민과 비탄으로 세월을 보내온 것과 달리 정씨는 재혼한 부인을 따라 신앙을 갖게 되어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종종 김순애씨를 위해 기도해 왔다고 하였다. 김순애씨는 마지막 1주일 간을 사랑하는 남편과 두 딸과 함께 보낼 수 있었는데 이는 정씨의 현재 부인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나타나면 김순애씨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까 봐 문병을 오지는 않았다. 얼마 남지 않는 시간 동안 김순애씨가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남편과 두 딸을 보내 준 것이었다. 이들은 김순애씨와 함께 보낸 1주일 동안 그 동안의 세월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김순애씨에게 지극한 정성으로 대했다. 아침에는 얼굴을 씻기고 양치질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물론이고 대소변을 받아내고 온몸을 쓸어내려 마사지를 해주고 두 시간 간격으로 체위를 변경시키는 등 김순애씨에게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나 했다. 김순애씨의 눈빛만 보고도 서로 도와주려고 하는 모습이 보기에 참 아름다웠다. 김순애씨는 몹시 행복해하며 이들의 수발을 고맙게 받고 있었다. 10년 간의 세월을 훌쩍 뛰어 넘은 것처럼 보였다.

남편과 자녀들을 만나고 나서 김순애씨는 심경에 많은 변화를 일으켜서 병상 세례를 받겠다고 하였다. 성직자에게 부탁하여 병상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김순애씨뿐만 아니라 두 딸들도 몹시 기뻐하였다. 이들은 김순애씨가 자신들과 같은 종교를 가지게 되기를 기도해 왔는데 이제 그렇게 되어 감사하다고 하였다. 김순애씨가 병상 세례를 받던 날은 날씨도 화창하였다. 비록 휠체어에 앉을 힘도 없어서 침상에 누운 채로 세례를 받았지만 김순애씨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긴 방황 끝에 이제야 사랑하는 가족들과 한 자리에서 함께 웃음과 눈물을 나누고 있었다. 김순애씨를 방문한 호스피스 팀은 꽃다발을 주고 함께 축하해 주었다. 김순애씨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행복하다”고 하였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생애 중에서 이때처럼 행복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몸은 비록 죽음에 임박한 상태에 있었지만 김순애씨의 삶의 질은 최고 수준인 것처럼 보였다. 김순애씨는 병상 세례를 받고 이틀 후에 사망했는데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은 “사랑해요”. 최고로 행복한 시간이었어요”였다.

장례식을 마친 후에 정씨의 부인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저도 같은 여자로서 애들 친 엄마가 이해가 됐어요.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요. 그래도 그렇게 좋은 시간을 보내고 가서 다행이에요.”

그녀는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아이들에게도 김순애씨와 보낸 마지막 1주일은 어머니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심어주는 좋은 계기가 된 것 같았다. 김순애씨의 딸들은 울면서도 “엄마, 사랑해요” 했었고 정씨도 무언가 숙제를 해결한 듯한 표정이었다.

“안녕히 가세요, 순애씨! 이 다음에 만나요.”

 

 

일찍 남편을 여의고 평생 시누이 뒷바라지를 했던 70대 할머니의 담담한 죽음맞이

“한 세상 자~알 살았다. 이젠 가도 되겠어”

영아 할머니(70세, 여)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대학 교수인 시누이를 남편 삼아 평생을 살아온 분이었다. 19살에 두 살 연하의 남편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고는 남편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들은 유복자가 됐다고 하였다. 손아래 시누이가 결혼하지 않고 이들 가족을 부양하였고 영아 할머니는 마치 남편에게 하듯 시누이 뒷바라지를 해왔다고 하였다. 딸은 결혼해서 근처에 살고 있었고 아들은 결혼해서 미국에 공부하러 가고 없었다. 모 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시누이는 은퇴하여 전공 관련 서적을 집필 중에 있다고 하였다.

부지런한 영아 할머니는 살림을 하면서 틈틈이 화초도 가꾸어 마당에는 둥그런 꽃밭이 있었고 집안에도 꽃들이 많았다. 오랜 세월 동안 혼자 살면서 아파도 내색하지 않고 자녀들과 시누이 뒷바라지를 해왔는데 지난 봄부터 영 안색이 좋지를 않고 소화도 안 된다고 하여 잠시 한국에 나와 있던 아들이 모시고 대학병원에 갔다고 담낭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하였다. 말기라고는 해도 그 종안 약을 타다 먹고 그런 대로 몸을 움직였는데 이제 아주 눕게 되어서 담당 의사의 조언에 따라 가정 호스피스에 가입 신청을 하였다고 했다.

영아 할머니가 몸져눕게 되자 딸 가족이 집으로 들어와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영아 할머니 수발을 위한 조치였으므로 사위는 자신들의 집과 처가를 오가며 기거하고 있었고 딸은 아이들을 데리고 영아 할머니 집으로 들어와 있었다. 영아 할머니의 딸에게는 여섯 살인 영아와 세 살인 아들이 있었는데 이 두 아이를 양육하면서 영아 할머니가 하던 집안 살림과 영아 할머니의 병수발까지 딸이 맡게 된 것이었다. 시누이는 오랜 세월 독신으로 살면서 바깥일을 하며 경제적 책임을 지고 가족을 부양하긴 하였으나 안살림에는 문외한이었다. 그래서 딸이 아들을 업고 2층과 아래층을 오르내리며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런 딸의 모습을 보면서 영아 할머니는 “내가 오래 살아서 자식에게 고생만 시켜” 하고 안타까워 하였다. 또 워낙 부지런하여 잠시도 쉬지 않고 집안 일을 해온 영아 할머니인지라 누워만 있는 것이 답답하고 불편하다고 하였다. 그런 영아 할머니에게 자그마한 위안이 있었는데 그것은 손녀인 영아와 그녀가 꺾어다 주는 정원의 꽃들이었다.

여섯 살인 영아는 얼굴이 둥그렇고 눈이 큰 것이 제 엄마를 쏙 빼다 박은 듯이 닮았는데 자세히 보니 영아 할머니의 얼굴도 둥글고 눈이 컸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성숙한 영아는 필자가 방문하여 영아 할머니의 신체 상태를 체크하고 복용한 약물의 효과를 측정하는 동안 문을 빼꼼이 열고 쳐다보거나 방 한쪽 구석에 앉아 가만히 쳐다보곤 하였다. 할머니의 얼굴을 한 번 보고 필자의 얼굴을 한 번 보고, 필자가 가지고 있는 청진기나 혈압기 등을 유심히 관찰을 하곤 하였다.

아이는 할머니의 병황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짐작으로, 일의 돌아가는 정황으로, 할머니 상태를 유추해 보려는 것처럼 조용하고 깊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영아는 할머니가 꽃을 좋아하여 늘 가꾸던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할머니가 정원에 나갈 수 없을 정도로 편찮으시다는 것을 알고는 매일 정원에 핀 꽃을 몇 개씩 꺾어다가 영아 할머니에게 보여주었다. 영아 할머니는 손녀인 영아가 정원의 꽃이 핀 상태도 설명해주고 바람이 어떻게 살랑거리는지도 말해준다고 하면서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자신에게는 즐거움이요, 위안이라고 하였다. 영아는 또 필자가 영아 할머니의 상태에 대해 시누이인 이교수와 이야기를 나눌 때도 조금 떨어져 있는 구석에 앉아 조용히 경청하곤 하였다. 영아는 오전에는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침에 유치원에 갈 때면 꼭 제 엄마에게 오늘 선생님(필자)이 오시는 날이냐고 묻는다고 했다. 제 엄마가 그렇다고 하면 유치원에서 돌아온 후에 나가 놀지도 않고 필자가 방문하는 것을 기다리는 눈치라고 했다. 어린 아이지만 하나의 인격으로 다가오는 아이였다.

영아 할머니의 상태는 진통제를 사용하여 통증 조절이 잘 되고 있기는 했으나 한 번식 이유 없이 열이 나곤 했다. 열이 오르기 전에는 먼저 으슬으슬 춥다고 하다가 이불을 두껍게 덮어주어도 이가 마주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덜덜 떨었다. 한참을 떨고 난 뒤에 조용해져서 보면 체온이 섭씨 38도에서 39도 정도 되고 땀을 뻘뻘 흘리는데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정상 체온으로 돌아왔다. 의사는 암세포 자체에서 열을 내는 것 같다고 하였는데 염증이 생긴 것도 아니어서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단 추워지면서 호한이 생기기 시작하면 바로 해열제를 복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그렇게 하도록 조처를 하였다. 미리 해열제를 복용하니까 오한과 발열이 전보다 조금 덜해졌으나 여전히 식은땀을 많이 흘렸고 한 번씩 그러고 나면 몹시 지치는 것 같았다. 또, 열이 나는 현상이 처음에는 2주일, 다음에는 열흘, 그 다음에는 1주일 간격으로 차차 그 주기가 짧아져서 자주 일어나게 되니까 ‘이러다가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하였다. 식욕도 떨어져서 미음을 한 컵 정도 하루에 두어 번 마시는 게 고작이었는데 어떤 때는 영아가 엄마 대신 미음을 가지고 와서 할머니에게 드시라고 권한다고 하였다. 영아 할머니는 딸이 권할 때보다도 손녀가 원하면 입맛이 없어도 귀여워서 할 수 없이 먹게 된다고 하면서 웃었다.

이 무렵 영아 할머니의 딸은 지쳐서 힘들어했는데 대로는 밤에 곤하게 자다 보면 영아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듣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다. 어느 날은 정신 없이 자다가 일어나 보니까 영아가 변기를 들고 있더라고 했다. 새벽에 소변이 마려워진 영아 할머니가 딸을 불러도 못 일어나니까 영아가 듣고 일어나 변기를 대어 드리려고 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후로도 영아는 밤에 할머니가 부르기만 하면 벌떡 일어나 변기를 가져온다고 했다. 엄마가 할머니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도 할머니 상태가 점점 나빠지는 것도 인지하고 있는 눈치였다.

영아 할머니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자 시누이인 이교수도 밤에 잠을 못 이룬다고 하였다. 오빠가 돌아가시고 40년 가까이 같이 살아왔으니 긴 세월이었다. 어떻게 보면 한 평생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동고동락하던 올케와 마지막 시간들을 함께 보내면서 이교수의 마음도 착잡하다고 하였다. 어느 날은 이교수가 마당에서 흙을 만지고 있다가 문을 열어주었는데, 올케가 아프니까 정원의 꽃들도 아무렇게나 되어 버렸다면서 손을 털었다. 그녀는 정원을 한 바퀴 돌면서 올케가 꽃을 가꾸던 모습과 아름답게 꽃피웠던 모습들을 설명해주었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잠시나마 즐거운 표정이었다. 교육학 박사인 이교수는 정원 한쪽에 따로 조립해 놓은 자신의 서재를 열어 보여 주었다.

“언니가 저렇게 아프고 점차 상태가 나빠지니까 이상하게 요새는 집필 작업이 잘 안 되네요.”

자신도 관절염 때문에 고생을 해왔는데 집필 작업을 할 때면 간식도 챙겨주고 약 먹는 것도 간섭하며 늘 자신을 도와주던 언니가 저렇게 되니까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않는 것 같다고 하였다. 같이 살면서 이교수가 영아 할머니를 보살펴야 했던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입장이 이렇게 반대로 되니까 너무 이상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교수는 자신의 가까운 장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생각을 별로 해보지 않았지만 영아 할머니를 보니 죽음이 남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고 하였다. 이렇게 말하는 이교수는 쓸쓸한 표정이었다.

그때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서 이교수가 들어가 받았다. 잠시 후, “뭐라구? 정말이야? 아이구 잘됐다. 네 엄마가 기뻐하시겠구나!”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국에서 온 전화였는데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소식이었다. 호스피스에 가입하고 얼마 안 되어서 영아 할머니는 자신의 삶을 가리켜 “한 세상 잘 살았다”고 표현하였는데, 그래도 “아직 못 이룬 것이 하나 있기는 하다”고 하였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자 아들이 결혼은 했는데 공부하느라고 아직 아이가 없다고 했다. 영아 할머니 생각에는 아직 외아들이니까 빨리 자손을 낳아 주면 좋겠는데, 공부하는데 지장이 있다고 일부러 피임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번에 한국에 왔을 때 이제 피임하지 말라고 야단을 쳤는데 어떻게 되어가고 잇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었다. 그런데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영아 할머니의 기쁨은 컸다. 자신의 귀로 직접 그 소식을 듣고 싶다고 하여 전화기를 영아 할머니의 방으로 가져와 전화를 걸어 수화기를 귀에 대어 드렸다.

“응. 으응. 그~래. 으응.”

응대하는 영아 할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며느리는 임신 5개월이라고 했다. 너무 빨리 알렸다가 혹시 잘못되면 실망하실까 봐 조금 기다렸다가 알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잠시 후 시장에 갔던 딸이 돌아오자 어눌한 소리로 말했다.

“얘. 숙희(며느리)가 애를 가졌대.”

다시 영아 할머니의 딸이 남동생에게 전화를 걸었고 한동안 통화하더니 좀더 소상한 그곳 소식을 영아 할머니에게 보고하였다. 영아 할머니는 “난 이제 할 일 다 했어. 네 아버지 뵐 면목이 생겼다”고 하면서 “한 세상 자~알 살았다. 이젠 가도 되겠어” 하였다. 얼핏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딸은 뻔히 영아 할머니를 바라보다가 부엌으로 나갔는데 필자가 보기에 이제 영아 할머니는 마음으로 떠날 준비를 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다음날부터 영아 할머니의 상태는 서서히 임종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남은 기간이 며칠 안 될 것 같아 보였으나 가족들이 너무 지쳐서 간병인을 두기로 하였다. 영아 할머니는 담담하게 말하였다.

“이제 날 부르시나 봐. 우리 집 양반 곁으로 가야겠어. 오래 기다렸는데…”

이교수의 집안은 3대째 신앙 생활을 해왔다고 하는데 이북이 고향이라 남한에 있는 친척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름을 대면 알 만한 분들이 종교계에도 있었다. 영아 할머니는 결혼하고 난 후에 시댁 식구들을 따라 종교 생활을 해왔다고 하는데 내세가 있다는 것은 확신하고 있었다. 남편이 떠난 후 자식들을 잘 키우는 것이 홀로 남은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자식 키우는 데 최선을 다해 왔다고 하였다. 또 시누이가 결혼도 안 하고 자기애들을 친자식처럼 공부시키고 돌보아 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해했다. 그래서 시누이에 대해서도 온 정성을 다 쏟아 뒷바라지를 해왔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자녀들을 둘 다 결혼시켰고 며느리도 애를 가졌다고 하니 자신의 일은 다 끝났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지금 시누이가 쓰고 있는 책이 잘 되어야 할 텐데 완성되는 것을 못 보고 떠나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시누이가 알아서 잘 할 것으로 믿는다고 하였다.

아무래도 영아 할머니가 며칠 내로 떠나실 것 같아서 미국에 있는 아들에게 연락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더니 딸이 전화를 했다. 아들은 이제 학기가 조금밖에 남지 않아서 들어오기가 애매한 시점이라고 하면서 우선 자기만 먼저 들어오겠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영아 할머니는 안 와도 된다고 하였으나 아들은 비행기표를 구해보겠다고 하였다. 영아 할머니는 이미 기력이 진하였으나 아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숨을 몰아 쉬면서 기다리다가 아들이 도착하여 만나 본 뒤에 며느리의 임신 소식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날 저녁에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나주(나중)에 마나(만나)” 하고는 소천 하였다. 간병인을 쓴 지 닷새만이었고 호스피스의 보살핌을 받은 지 5개월 만이었다.

“안녕히 가세요. 영아할머니! 며느리가 아기를 잘 낳는지 지켜볼게요.”

 

 

 

제6장 웨딩드레스를 입혀주세요

 

84세 담낭암 말기 할머니, 손자며느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 뒤 숨을 거두다

“이젠 쓸모 없는 늙은이지 뭘…”

담낭암 환자인 이순례씨(84세, 여)가 호스피스에 가입하게 된 것은 일본에 거주하는 딸이 잠시 한국에 나왔다가 호스피스 사무실로 찾아와 도움을 청했기 때문이었다. 이순례씨의 딸은 대학병원 의사로 근무하는 김의사의 어머니였다. 이순례씨는 담낭암이라고 진단받은 지 2년 되었고 오른쪽 옆구리에 담즙 배설을 위한 튜브를 가지고 있었다. 이순례씨의 달은 외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순례씨는 손자인 김의사와 함께 살고 있는데 최근 상태가 더욱 안 좋아진 것 같아서 호스피스에 의뢰하고 싶다고 하였다.

환자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종양내과 전문의인 박의사와 함께 환자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진찰 결과 이미 복강 내에 암세포가 상당히 퍼져 있는 상태이며 장폐색도 진전되고 있는 상태라고 하였다.

넓은 잔디밭이 있는 2층집은 이순례씨의 소유로 되어 있었는데 손자인 김교수의 가족이 아래층을 쓰고 있고 이순례씨는 2층에 누워 있었다. 방안에는 사람을 부를 때 쓰는 초인종과 좌식변기, 쓰레기통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순례씨는 물침대 위에 누워 있었는데 바싹 마른 상태이나 욕창이 없는 것으로 보아 피부 관리를 잘 해온 것 같았다. 이순례씨가 사람을 알아보기는 하나 시간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고 말하는 것도 분명하지 않았다. 피부는 건조해 보였고 입술과 혀는 바싹 말라 있었다. 또한 황달이 와서 피부가 노란색이었으며 눈과 눈 안쪽의 점막도 노란색을 띠고 있었다. 가렵다고 하면서 손등을 긁고 있었는데 양쪽 손등에는 붉은색 반점이 많이 생겨 있었다. 눈곱도 끼어 있었으며 얕은 기침을 하면서 가래를 수시로 뱉어내고 있었다. 옆에는 24시간 돌보는 간병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지친 모습이었다. 그녀는 환자가 수시로 이야기를 하고 말을 걸어서 밤에도 잠을 제대로 못 잔다고 하였다.

첫날 이순례씨는 어눌한 발음으로 말했다.

“이렇게 누어 있으니 집안 일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해. 또 내가 뭘 하는 걸 아이들이 원하지도 않아. 이젠 쓸모 없는 늙은이지 뭘… 딸이 하나밖에 없는데 늘 일본 가 있어서 집에 없구… 증손자, 증손녀가 귀여운데 요샌 잘 올라오지도 않아. 와서는 냄새가 난다구 하구…”

웃으며 말했지만 쓸쓸한 모습이었다.

이순례씨는 29세에 혼자 되어서 딸 하나만을 키우며 살아왔다. 그 딸이 외국에 나가 있고 아끼는 손녀딸도 시집가서 나가 살고 있으며 집에는 손자인 김교수와 김교수의 부인인 손자며느리, 그리고 초등학생인 증손녀와 유치원에 다니는 증손자가 함께 살고 있었다. 이순례씨는 평소에 손자며느리인 김영숙씨가 다섯 살 된 증손자를 집에 혼자 두고 외출하며 밥도 굶긴다고 생각하여 못마땅해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실은 손자며느리인 김영숙씨가 외출할 때는 파출부에게 잠시 맡기고 가거나 아니면 아이가 유치원에 간 사이에 나갔다 왔으며, 이런 오해와 잔소리 때문에 이순례씨의 딸(김교수의 어머니)이 종종 어머니에게 김교수가 출근하기 전에는 아래층에 내려가지도 말고 아이들에게 이러니 저러니 잔소리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이순례씨는 부지런한 분이었는데 아파서 거동을 못하게 되면서부터는 가까이 마음 붙일 사람 없이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온 것 같았다. 손자인 김교수가 날마다 문안 드리며 병황을 살펴 드리지만 같은 여자인 딸이나 손녀딸만큼 가깝지 못하고 손자며느리는 오해로 인해 썩 마음을 터놓고 지내지 못하였던 것 같았다.

종양내과 전문의인 박의사가 보기에 병환이 깊어 오래 사시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는데, 필자가 보기에도 마지막 과정을 서서히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연세가 드신 분은 젊은 사람과 달라 서서히 진행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두고 보아야 알 일이었다. 이순례씨는 복부의 통증을 호소했는데 아랫배가 불룩했고 청진상 장음이 다소 크게 들렸다. 아프기 전부터 변비도 있었다고 했다. 박의사는 하리제(下痢劑)와 진통제를 처방하였고 필자는 피부의 건조함을 조절하기 위해 일정량의 수분을 공급하도록 권했다. 원하는 음식을 소량씩 드리도록 이야기해 주고 눈곱을 닦아드리는 등의 개인 위생과 청결에 관해서도 간병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한 가족들의 질문에 답해주고, 궁금증을 말할 수 있도록 해주고 들어주었다.

이순례씨는 웅얼거리듯 말을 했다.

“손녀를 돌봐줄 수도 없고 이젠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야. 병을 못 나수니(안 나을 병이니) 이젠 죽을 수밖에 없지 뭐. 안 그래? 할 수 없지 만. 이젠 주님만 의자하고 가야지.”

또한 지나간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시간에 대한 개념이 불분명하고 치근 일에 대한 기억력은 온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환자의 정서나 마음은 전달이 되었다.

“오늘 사위가 퇴원할 거야. 그러면 딸이 곧 갈 걸 생각하니 너무 슬퍼서 혼자 엉엉 울었어.”

이순례씨는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나 얼굴은 웃으면서 말했다. 사위가 퇴원한다는 이야기를 예전의 기억 한 토막이지만, 딸이 곧 갈 것과 그러면 자신의 마음이 너무 슬프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딸이 와 있어서 외로움을 덜어주고, 또 환자의 기분이 좋아서 몸도 마음도 조금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다시 갈까 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호스피스에 가입한 지 1주일쯤 되었을 때는 환자가 가장 사랑하는 손녀딸이 와 있었는데 옆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면 이순례씨는 귀엽다는 표정을 지으며 즐거워하였다. 사랑하는 딸과 손녀가 모두 와서 이순례씨를 중심으로 대화하고 돌보아주자 처음의 쓸쓸해하며 자신이 무용지물이라고 느끼던 마음은 잠시 사라진 듯해 보였다.

배에서는 꾸룩꾸룩 소리가 나고 간간이 설사도 하였지만 두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환자는 부끄러운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이거 봐! 또 나오네. 빨리 갈아 줘.”

두 사람은 지체 없이 기저귀를 갈아 주었다. 이렇게 즐겁게 2~3일을 보낸 후, 달이 한국에 너무 오래 있었다면서 돌아갈 채비를 하자 이순례씨는 딸에게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으나 몹시 낙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돌아가야 된대. 마음이 슬퍼” 하며 어두운 표정이었다. 편찮으신 어머니를 두고 가야 하는 딸의 마음도 편하지는 못한 듯 간병인과 며느리에게 이것저것 당부를 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딸이 출국하기로 한 날, 이순례씨는 배가 몹시 아프다고 하였으며 전신 상태가 갑자기 가라앉는 듯해서 놀란 딸이 남편만 보내고 환자 옆에 남기로 하였다. 이날부터 이순례씨는 깜빡깜빡 졸았으며 잠자는 시간이 차츰 많아지면서 무어라고 말을 해도 반응이 잘 안 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자꾸 일어나려고 하고 걸어가는 듯이 다리를 움직이며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새벽이 되면 더 심하다고 간병인이 알려주었다. 임종 과정이 진행 중인 것 같아 가족들과 간병인에게 설명해 주고, 임종 시 나타나는 증상과 이에 대한 가족들의 대처 방안을 적어 놓은 ‘죽음의 과정’이라는 프린트물을 주고 읽어보도록 했다.

임종 단계는 지금까지의 마기 단계와는 많이 다르고, 이를 알지 못하면 옆에서 돌보는 사람들이 당황하여 오히려 환자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으므로 호스피스에서는 이에 대한 도움을 적절히 주고 있다. 그 중 한 가지가 임종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알려주고 가족들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려주어 마음으로 준비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어떤 가족들은 자기 혼자 있을 때에 환자의 임종을 맞게 될까 봐 염려하기도 하므로 호스피스 팀이 번갈아 가면서 자주 환자의 집을 방문하여 가족들과 함께 환자를 돌보아 준다. 이순례씨와 같이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안절부절 못할 때는 다치지 않도록 주변 환경 정리를 해주고 조용한 음악을 환자의 발치에서 틀어주면 조금 진정이 되곤 한다. 이순례씨의 경우는 간병인이 환자의 종교에 따라 평소에 이순례씨가 즐겨 듣던 찬송가 테이프를 조용하게 틀어주고 있었다.

다음날 이순례씨는 의자에 앉아 창틀을 붙잡고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진통제를 먹이려고 했는데 물도 잘 삼키지 못하고 뱉어내어서 먹이지 못했다고 하였다. 잠시 후 환자를 침상에 뉘어 드렸는데 여전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숨소리가 달라지며 잠깐씩 숨을 안 쉬다가 몰아 쉬는 양상을 나타내었다. 필자가 방문한 지 한 시간쯤 지나서는 손목의 맥박이 잡히지를 않았다. 팔꿈치 안쪽은 1분에 120회 정도로 희미하게 맥박치고 있었는데 30분쯤 지나자 혈압도 잡히지를 않는 것이었다. 호흡수도 1분에 12회 정도로 차차 감소되고 있었다. 옆구리에 담즙 분비를 위해 가지고 있던 튜브는 환자가 불편해 해서 전 날 밤에 손자인 김교수가 이미 제거해 놓은 상태였다. 이순례씨의 체온은 37도 5부였으나 손과 발은 차가웠다. 김교수에게 연락하는 것이 좋겠다고 딸에게 말해 주었다. 딸이 전화하는 사이에 간병인과 다른 친지 한 분이 환자의 잠옷을 벗기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고운 한복으로 갈아 입혔다.

딸이 울면서 이순례씨에게 말했다.

“엄마, 미안해요. 엄마가 싫어하는데도 억지로 2층에 계시게 한 것 용서하세요. 관 내려갈 때 절대로 안 부딪히게 할 게요. 그리고 아이들에게 잔소리하지 말라고 엄마 구박하구, 철민이(김교수의 이름) 출근 전에는 아래층에 내려가지도 말라고 한 거 잘못했어요. 그래도 어머니가 그렇게 잔소리해서 애들을 저만큼이라도 훌륭하게 됐잖아요.”

이순례씨는 “으~응”하고 대답하였다. 병들고 나서 이순례씨는 아래층에 기거하기를 희망하였는데, 그 이유는 좁은 계단을 내려갈 때 관이 부딪혀서 시신이 흔들릴까 봐 염려해서라고 하였다. 그러나 딸은 아들 가족의 삶에 부담이 될까 봐 가급적 어머니를 2층에만 계시게 하고 새벽이나 밤중에는 아래층에 내려오시지 말도록 했었는데 이제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딸은 환자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울었다. 환자의 옷을 갈아 입히던 친지는 노자 돈이라고 하면서 돈을 주머니에 넣어 환자의 옷에 달아서 손에 쥐어주었다. 그 친지는 울먹이면서 “돈 아끼지 말고 좋은 데 가세요” 했다. 그때 이순례씨가 감고 있던 눈을 서서히 뜨면서 허공을 바라보았는데 뭐가 보이는지 묻자 “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옷을 갈아 입힌 후 온 가족이 환자의 곁에서 울면서 작별 인사를 하는데 환자는 눈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식구 중에 누가 없는지 둘러보니까 손자며느리가 안 보였다. 시장에 무엇을 사러 갔는데 30분쯤 후에나 올 것 같다고 하였다. 이순례씨는 이미 언어적 의사 소통이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눈을 감거나 뜨는 것으로, 혹은 필자의 손 위에 놓은 자신의 손을 꽉 쥐는 것 등을 통해 예, 아니오 로 의사 표시를 할 수 있었다.

이순례씨에게 손자며느리를 찾느냐고 하자 그렇다고 했다. 그녀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임종 환자들은 대로 신체적 기능이 다하였어도 끝마쳐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되면 잠시 더 이 세상에 머무는데 이순례씨의 경우가 그러했다. 필자가 대문에서 기다리다가 얼마 후 돌아온 손자며느리에게 할머니가 찾는다는 이야기를 해주며 급히 2층으로 올라가도록 했다. 함께 올라가보니 손녀딸이 이순례씨에게 말하면서 울고 있었다.

“할머니! 할머니는 좋은 데 가실 거야. 거기는 여기보다 더욱 좋은 곳이래. 잠시 후면 우리도 따라갈 테니 아무 염려 마, 할머니.”

이순례씨는 희미하게 끄덕이는 듯하면서도 여전히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손자며느리인 김영숙씨가 엎어지듯 환자의 곁으로 다가가 울면서 “할머니!” 하고 부르자 이순례씨가 손을 내밀었다. 김영숙씨가 그 손을 잡으며, “나 영호(이순례씨의 증손자, 김영숙씨 아들) 안 굶기고, 외출 안 하고, 애들 잘 돌볼게. 걱정하지마, 할머니” 하고 말하자 이순례씨의 두 눈에서 눈물이 양쪽으로 주르르 흘렀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으응” 하더니 그 순간 눈을 감으면서 길게 한숨을 뒤듯 숨을 한 번 내쉬고는 호흡이 멈추어 버렸다.

연락을 받고 급히 귀국한 이순례씨의 사위는 고개를 외면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고, 손자인 김교수는 이순례씨 주변에 둘러앉은 여자들 뒤에서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다.

“안녕히 가세요, 할머니.

식구들 모두가 할머니를 사랑했어요.

당신은 쓸모 없는 존재가 아니었다구요!”

 

 

결혼도, 아이낳은 일도 과분한 은혜였다는 어느 여교수의 죽음

“웨딩드레스를 입혀주세요”

유방암 말기 환자인 옥설희(40세, 여)는 전문대학 교수라고 했다. 먹는 항암제를 사용하여 좀더 치료해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의료진에게는 있었는데 본인이 원하여 호스피스에 가입한 경우였다. 생전에 그녀가 원하던 대로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관 속에 눕혀졌던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단아한 기품이 느껴졌다. 자신은 유방암 3기에 발견되었는데 수술할 후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틀림없이 항암 치료를 성실하게 했다고 하였다. 그 후 다시 재발한 것이니 약물 치료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면서 환자와 가족 모두가 고생만 할 것이니 약물치료는 원하지 않고 통증 및 증상 완화를 위한 도움만 원한다고 하였다. 당시 담당 의사와 암센터 수간호사가 보기에 옥설희씨는 암세포가 폐와 임파, 복강 내에 퍼져 있기는 해도 항암 치료로서 어느 정도의 생명 연장은 가능하다고 보는 상태였다. 남편도 한 번 더 약물 치료를 해보기를 원했다. 그러나 환자가 안 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처음 만난 날 그녀는 필자에게 말하였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숨쉬기가 어려운 것과 통증이에요. 한때 번민도 많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억지로 끌지 않고 부르심에 순응하려고 해요. 다행히 집에 일하는 아줌마가 7~8년째 성심껏 도와주던 사람이라 믿고 맡길 만하고 시어머니도 계세요. 남편이 지금 마흔두 살인데 어중간한 나이에 일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지금 당하는 게 장래를 위해서도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들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다고 했다.

“아이들이 어리니까 엄마가 옆에서 돌보아 주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돌보아 주지를 못하고 오히려 고통스러워하는 엄마의 모습을 오래 보게 되니까 아이들 태도가 달라졌어요. 아이들을 위해서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일까 모색하던 끝에 입원하기로 했어요.”

옥설희씨의 아이들은 아홉 살, 다섯 살 된 사내아이들이다. 큰아이는 엄마가 주로 키워서 그래도 정이 많이 들고 유대 관계가 있으나 작은아이는 두 돌이 되기 전부터 엄마가 병이 나서 할머니가 데리고 자며 키웠더니 엄마와는 조금 서먹한 것 같다고 하였다. 입원하기 이틀 전에도 숨이 차고 몹시 아파서 괴로워하고 있었더니 작은아이가 방에 들어오려다 무서운 듯 할머니 품에 안기며 울음을 터뜨리더라고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계속 집에 있다가는 아이들한테 엄마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만 남기게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병원에서 마지막을 보내는 게 좋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남편도 겉으로는 ‘그래 넌 이미 죽을 것인데..’ 할 수가 없으니 치료해 달라는 것이지 속마음은 나와 같아요. 그리고 최종 결정은 본인이 내려야지 누가 하겠어요”하고 담담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옥설희씨의 남편은 다음날 호스피스 사무실에 찾아와서 말했다.

“집사람이 저렇게 약물 치료는 안 하겠다고 하니 어떻게 하면 좋지요? 어떻게 저 사람의 마음을 돌이킬 방법은 없을까요?”

남편은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울음을 삼켰다.

“어제 밤에 저는 약물 치료를 해보자고 했고 집사람은 안 하겠다고 하여 다투었어요. 오늘 아침 회진할 때 김선생님(옥설희씨의 담당 의사)이 환자가 거절하니 약물 치료는 안 하겠다고 하더군요.”

이야기 중간에도 한 번 울음을 참지 못하여 화장실에 가서 잠시 울다가 다시 돌아왔다. 옥설희씨의 남편은 부인이 항암 치료를 안 하겠다고 하면 호스피스 간호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호스피스 가입 동의서에 사인을 하고 서류상의 절차를 마쳤다. 그는 자신이 3대째 내려오는 신앙인인데 너무 마음이 아프고 어려우니까 기도도 잘 안 된다고 하였다. 또한 자신도 3개월 전부터 가슴이 빠개질 듯이 아파서 조만간 진찰을 받아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항암 치료를 안 하면 병원도 옮겨야 할 것 같은데 어디로 옮기면 좋은지 좀 안내해 달라고 하였다. 부인이 지금 입원하고 있는 곳이 암센터인지라 완화 요법을 받으며 있을 수 있는 병원으로 옮겨가기를 원하였다. 남은 기간을 계획을 잘 세워서 의미 있게 보내고 싶다면서 앞으로의 진전 상황을 미리미리 이야기해 달라고 하였다.

옥설희씨는 호스피스에 가입하고 나서 며칠이 지나 말기 환자를 주로 받는 다른 병원으로 옮겼다. 그곳은 의사, 간호사들이 대부분 호스피스에 대해 알고 있고, 한때는 호스피스 병동을 열기도 했던 병원이었다. 시설은 아무래도 먼저 입원하고 있던 대학병원보다 초라해 보였으나 옥설희씨와 같은 말기 환자가 남은 시간을 보내기에는 적합한 곳이었다. 옥설희씨가 그 병원으로 옮겨간 다음날 옥설희씨의 시어머니가 근처에 온 김에 들렀다고 하면서 호스피스 사무실로 찾아 오셨다.

“에미(며느리)가 생전 안 그러더니 어제는 병원을 옮긴 후, ‘내가 왜 진작 죽지 못하고 살아서 이 모양인가?’ 하며 울더군요. 내 마음이 어찌나 아픈지….”

시어머니는 말하며 눈물을 훔쳤다. 어제가 마침 옥설희씨의 생일이어서 집으로 가자고 했으나 싫다고 하면서 다른 병원으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집에 가면 동문, 선후배, 제자, 교수들이 오니까 싫다고 하고 모든 사람의 면회를 사절한 채, 이제는 혼자만 있겠다고 하는 거예요. 집으로 오면 좋은데 그 고집을 꺾을 수가 있어야지요. 나도 갔다가 하도 집으로 가라고 해서 그만 오고 말았어요.”

자그마한 몸집의 옥설희씨 시어머니가 울면서 말씀하시는 게 애처로워 어깨를 감싸 안고 토닥거려 드렸다. 가족도 가족이지만 주변 사람들의 생일 축하도 다 거절한 채 작은 병원으로 옮겨 간 옥설희씨의 마음은 어떠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생전에는 마지막 맞는 생일일터였다. 하루 지나기는 했지만 호스피스에서 방문하여 옥설희씨의 생일 축하를 해주기로 계획을 세웠다. 마침 실습 나온 간호학생들도 있어서 함께 가서 재롱(?)을 떨어주기로 했다.

두 명의 간호학생들과 함께 옥설희씨를 방문하였는데 병실 문에는 ‘면회 사절’이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었고 옥설희씨는 별로 기분 좋은 얼굴이 아니었다. 어제는 숨이 많이 차서 산소를 꽂고 있었으나 오늘은 조금 낫다고 하였다. 학생들이 꽃다발을 주고 준비해간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예쁜 카드와 꽃다발을 옥설희씨가 잘 볼 수 있도록 침대 곁에 붙여주며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자 옥설희씨는 활짝 웃으며 즐거워 하였다. 잠시 병실에는 웃음꽃이 피었고 옥설희씨는 학생들에게 먹으라고 권하며 과일을 내놓았다. 병원에서 준 것이라고 하는데 추수감사절이라고 병원에서 입원한 모든 환자들에게 떡과 과일을 돌렸다고 하였다.학생들이 “다른 손님 어면 드리세요” 하고 사양하자 옥설희씨는 “다른 손님은 없기로 돼 있는데…” 하며 방그레 웃었다. 간호학생들의 재롱(?)이 효과를 본 것 같았다.

옥설희씨는 몸 상태가 빠르게 악화되어 갔다. 호흡 곤란으로 인해 누워 있기보다 앉아 있어야 했고 점차 분당 사용하는 산소의 양을 늘려야 했다. 장시간 앉아 있으니 미골(㞑骨)과 천골(薦骨) 부위에 욕창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방문하였더니, “요즘에 손이 자꾸 떨려서 아이들에게 편지를 써 놨어요. 말할 기운이 없어서 녹음은 하지 못했구요. 더 늦기 전에 써 놓아야 할 것 같아서 남편의 도움을 받아서 함께 작성을 했어요” 하였다. 그 편지는 ‘나의 사랑하는 민구(작은아들)와 민석(큰아들)아’ 로 시작하고 있었다.

 

민구를 먼저 불러본 것은 엄마가 민석이보다 민구를 부르면 함께 지내본 기간이 너무 짧아서 안타까워서 그래. 엄마는 지금 병이 회복될 수 없이 악화되어서 병원에서 좀 오래 있게 될 것 같구나. 지난 몇 달 동안 너무 괴로워하는 모습을 어린 천사들에게 보이는 것이 가슴 아팠단다.

엄마와 아빠가 미국에서 서로 귀한 만남을 갖고 세상의 누구보다도 서로를 사랑하며 우리 민석이와 민구를 선물로 받게 되어서 결혼 10년 동안에 우리 집은 실로 너희 둘 때문에 기쁨이 넘쳐 흘렀단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온 식구가 서로 사랑하며 뭉치어 너희들을 그야말로 얼마나 지성으로 키워주셨던지 너희들은 참 특별한 사랑을 많이 받았구나. 아주 어릴 때 이렇게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어른이 되어도 마음이 튼튼한 사람이 될 수 있단다. 밤톨 같은 머리통으로 갓 태어나 엄마 곁에 누워 있는 민석이를 처음 보고 엄마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만치 네가 예쁘더구나. 너무나 맑고 착하게 커주어서 정말 고맙다 민석아. 계속 그렇게 성장해 주기를 기도 드린다.

거무티티한 사나이가 흠잡을 데 없는 얼굴로 사람을 사로잡더니 너무도 씩씩하고 활달하여 마음씨 착하게 자라나니 참으로 고맙구나 민구야. 계속 자존심도 강하고 또 강인하되 남도 깊이 이해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성장하기 바란다.

이렇게 겨우 예쁜 어린 시절밖에 못 키워놓고 하늘나라로 먼저 가게 된 엄마의 마음을 무어라고 표현할 수가 없구나. 아빠가 너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늘 기억하고, 아빠와 같은 훌륭한 인격과 사랑의 소유자를 아버지로 가질 수 있게 된 것을 늘 감사하며 엄마를 잃은 아빠의 슬픔을 너희가 나이 들어가며 깊이 이해해주길 간절히 바란단다. 아빠는 너희들의 이해가 몹시 필요한 분이란다.

아빠와 엄마는 너무도 행복했던 10년을 지내고 갑자기 헤어져야 하는 비극을 통하여 인생을 남보다 한 번쯤 일찍 정리해야 하는 단계를 가져 보았단다.

결론의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서 나타내시는 생사화복의 순서는 우리가 생각하고 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를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까지도 순종하면서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면 당장은 깨닫지 못해도 우리 식구 전체의 긴 인생 행로를 종합하여 볼 때 모두 합하여 선을 이루리라는 믿음을 지키라는 점이란다. 순탄할 때만 믿는 하나님은 자칫 믿음의 차원에 못 미치는 교양이 될 뿐이란다.

둘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이 자기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더욱 정하고 귀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상대방을 만나 깊이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행복한 것이라는 점이야. 엄마는 그 면에서 행복한 사람이지만, 아빠와 너희들에게 이렇게 큰 상처를 남겨주고 떠나게 되니 가슴이 너무 아프단다.

셋째, 이들 두 가지 외에 가장 기본적인 것은 우리는 각자가 하나님께로부터 각기 다르게 창조되었으며 우리가 처한 환경을 극복해 가며 최선을 다하여 각자의 소명(talent)을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소중히 여기어 가꾸어나가 비고(부족하고) 곯은(잘 못된)곳을 스스로 메꾸어 가는 노력을 항상 하는 사람이 가장 귀한 사람이지.

너희들은 이런 세 가지 기본 자세를 마음 속에 꽉 채우고 무엇을 얼마나 하게 되든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니 항상 남을 사랑하는 데에 삶의 목표를 두기 바란다.

아빠에게 속히 새엄마를 맞이하여 밝고 행복한 새 가정을 이어 나가실 것을 신신당부 드렸으니 너희들이 이것을 잘 이해하고 아픔 속에서 보다 큰 사랑과 힘을 창조해낼 수 있는 마음의 소유자들이 되어주길 간절히 바란다.

이 모든 되어지는 일들이 누구의 잘못이나 고의로 되어지는 일이 아닌 이상 우린 그저 받아들이고 그 후에 속히 어떻게 딛고 일어나는가가 중요하겠지?

엄마는 너무 갑자기 떠나야 하는 바람에 너희들 너무 어린 가슴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서서히 병원으로 들어가서 헤어지는 과정을 취해 보았으나 부작용이 없지 않았으리라 믿어. 용서해 주렴.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한 일이니까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엄마의 모습이 너무 예쁜 너희들 가슴에 깊이 새겨지는 게 싫어서 그랬어).

너희들은 특별히 귀하고 착한 아이들이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스럽고 아빠와 할머니 말씀 잘 알아듣고 새 환경에 잘 적응해 갈 수 있으리라 믿고 기도 드린다.

너희를 죽도록 사랑하는 엄마가, 병원에서 (너무 글씨가 엉망이구나).

 

조그마한 스프링 노트 6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글씨가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쓴 편지의 다음 장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흘려 쓰여 있었다.

 

“나의 묘 -올리지 말고 flat.

유지 비용 싼 방법으로.

장례 절차에 들어가는 물건들의 수준은

중간 정도 이상은 쓰지 말 것.

모든 장례 절차는 김목사님(옥설희씨 가족이 나가는 교회의 담임목사)을 따를 것.

사진 – 배타 앨범에 한복 입고 찍은 사진으로.”

 

 

옥설희씨는 자신의 죽음을 수용하고 있었다. 묘지와 장례식에 쓸 사진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벌써 죽었어야 할 사람인데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했다. 결혼도, 아이 낳은 일도 자신에게는 너무나 과분한 은혜였다고 하면서 결혼 이후는 덤으로 산 인생이었다고 하였다.

옥설희씨와 남편은 둘 다 공부하러 미국에 갔다고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 석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어 결혼하였으나 사연이 있었다. 옥설희씨가 몸이 약하여(어릴 때에 큰 병을 앓았다고만 했다) 담당 의사를 정해 놓고 치료를 받았는데 의사가 ‘이 아이는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병이 낫고 스무 살이 넘도록 성장하게 되자 ‘그러나 결혼은 하지 말라’는 조언을 받았다고 한다.

옥설희씨가 결혼을 결심하고 그 의사를 찾아가서 이야기를 하였더니 너무나 놀라면서 만일 임신을 하게 되면 산모와 아이의 생명을 보장할 수가 없으니 ‘그러면 절대로 아이는 낳지 말라’고 간곡하게 말하더라고 했다. 옥설희씨와 남편은 많이 망설였으나 비록 아이를 못 낳더라도 결혼을 하기로 결심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결혼해서 지난 10년 간 건강하게 살아왔고 아들도 둘이나 낳아서 잘 자라고 있으니 자신은 과분한 축복을 누려온 셈이라고 하였다. 결혼하면 안 된다고 하였던 그 의사도 옥설희씨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 것을 보고 ‘이건 기적’이라고 하였다고 하면서 자신은 지난 10년 동안 후회 없이 살았다고 했다. 덤으로 산 인생인데, 스무 살을 못 넘길 것이라던 자신이 마흔 살까지 살았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고 하였다. 다만 두고 가는 남편과 어린 두 아들의 가슴에 너무 큰 상처를 주고 가는 것 같아 마음이 많이 아프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줄 편지를 쓰고 난 후 아이들 문제는 이제 마음에서 많이 정리가 된 것으로 보였다. 그때가 임종하기 16일 전이었다. 욕창 부위에는 도너츠 모양의 에어링(air ring)을 대고 있었고 간병인이 수시로 등마사지를 해주고 있었다.

담당 의사는 옥설희씨의 몸에 있는 암세포가 이제 뇌에까지 전이된 것 같다고 하였다. 필자는 2~3일에 한 번 정도 방문하였는데, 갈 때마다 눈에 보이게 옥설희씨의 모습이 달라졌다. 손톱 색깔이 보라색으로 변하고 손과 발, 다리에 손가락으로 누르면 쑤욱 들어가서 한참 동안 본래의 모양으로 되돌아오지 못하는 부종(Pitting Edema)이 생겼다. 배가 빵빵하게 불러서 복수천자를 하려고 시도했으나 똑바로 누울 수가 없어서 불가능하였다. 옥설희씨가 똑바로 누우면 호흡 곤란이 심하여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상태에서는 장이 눌려 공간 확보가 안 되어서 복수를 뽑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무렵 아이들을 만나려고 옥설희씨의 집을 방문하였다. 아무래도 임종이 가까운 것 같아 사별 관리를 위해 유가족 추후 관리담당자와 함께 갔다. 옥설희씨의 집은 20평 정도 규모의 국민주택이었는데 시어머니가 나와 맞아 주었다. 유가족 추후관리 담당자를 소개하고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초등학교 2학년인 큰아이는 아직 학교에서 안 돌아왔고 작은아이만 집에 있었다. 큰아이는 무릎에 염증이 생겨서 치료받고 있고 작은아이도 요즈음 감기로 유치원을 쉬면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하였다. 작은아이는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품으로 보였으며 도화지에 연필로 로보트를 그리고 있었다.

옥설희씨의 시어머니가 목사님 권유로 지난 토요일 오후에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에 다녀왔다고 해서 작은 아이에게 엄마 만나니까 어떻더냐고 물었다.

“엄마가 엄마 같지 않았어요.”

“엄마가 너를 사랑한다고 전해 달래.”

“나도 엄마 사랑해요.”

잠시 아이와 만난 후에 시어머니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자신도 몸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 당뇨병이 있는데다 심장이 안 좋다고 하였다. 며느리 이야기를 하면서는 “세상에 이럴 수가 있어요?” 하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며느리는 너무나 완벽하고 깔끔해서 나쁘게 말하면 냉정하다고 하였다. 집에 있으면 아무리 오지 말라고 해도 방문객이 끊이지 않고 그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그 눈길이 싫다고, 그래서 병원에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젠 시어머니도 친정어머니도 오지 말라고 해서 나도 갔다 온 지가 1주일이나 됐어요. 어떤 이가 이왕에 죽을 거면 산소도 끊는 게 어떠냐 해서 아들에게 말했더니 펄펄 뛰면서 화를 내더군요. ‘자기들이 그런 입장이 한 번 되어보라지’ 하며 울더군요.”

가정 주부가 아프니까 온 식구가 다 영향을 받고 있었다. 옥설희씨의 작은아들과 시어머니는 모두 어깨가 축 쳐지고 기운이 없어 보여서 마음이 아팠다.

옥설희씨의 몸은 이제 뼈와 가죽만 남아 있었다. 살이 빠져서도 그렇겠지만 뼈에도 전이가 되어 척추 부위는 이제 주먹 한 개 만한 크기로 튀어 나와 있었다. 간병인이 수시로 약을 바르고 마사지를 해주고 있었다. 임종 과정에 관한 프린트물을 간병인에게 읽어보라고 주었다. 다 읽은 후 옥설희씨의 남편에게도 보여주라고 하자, “이제는 옥설희씨가 남편에게도 오지 말라고 하고 오면 빨리 가라고 해요. 그래서 내가 그러시지 말라고 했더니 어제 밤에는 좀 오랜 시간 두 분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하였다. 옥설희씨 말로는 남편이 와서 너무 울기만 하니까 자신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남편을 달래고 위로하느라고 자신이 더 힘들어져서 빨리 가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옥설희씨의 남편은 처음 호스피스 사무실에 왔을 때부터 유난히 눈물을 많이 흘렸는데 지금도 계속 그러는 모양이었다. 그날 방문을 마치고 병원을 나서다가 보니까 옥설희씨의 남편이 승용차 안에서 쉬고 있었다. 필자가 본 그는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말했다.

“죽음이야 기정 사실이지만 마음이 너무 아파요. 이젠 어찌될지 몰라 출근도 못해요. 집사람이 운다고 가라고 하면 차에 내려와 있다가 다시 올라가곤 해요. 어제 밤에도 히터 틀어놓고 차 안에서 잤어요.”

그러는 모습이 엄마 잃은 유치원생같이 풀 죽어 있었다.

옥설희씨는 사망하기 4일 전부터 오른쪽 눈이 약간씩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니 점차 양쪽 눈이 다 안 보인다고 하였다. 담당 의사 말로는 아마도 뇌에 부종이 생긴 것 같다고 하였다. 임종 2일 전에는 옥설희씨가 친지들을 다 오라고 하였다. 밤에는 침상 곁에 둘러선 친지들에게, “나는 이제 죽을 거예요”하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마지막 인사를 다 했다고 하였다. 이 자리에서 옥설희씨가 산소를 빼겠다고 하였는데 옥설희씨의 오빠가 몹시 섭섭해하며 안 된다고 하여서 그냥 꽂고 있기로 하였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옥설희씨의 남편은 약 1주일 전에 산소를 5분 정도 밴 적이 있었는데 그때 청색증(산소 부족으로 코 끝, 입술, 손톱 등이 청색으로 변하는 현상)이 왔다고 하였다. 나중에 옥설희씨가 그 이야기를 남편에게 했는데 “아유, 그때는 죽을 뻔했어요” 했다면 죽을 사람이 죽을 뻔했다니까 우스웠다고 하였다.

옥설희씨가 닷새 정도 임종 과정을 겪는 동안에 모 회사 부장인 남편은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종일 환자 옆에서 어찌하던지 도움을 주려고 애를 썼다. 앞서 그렇게 울던 것과는 달리 차분한 태도로 산소 탱크를 옮기기도 하고 아내에게 다정스럽게 대하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기에 눈물겨웠다.

옥설희씨가 입원해 있던 병원의 의료진 역시 최대한 옥설희씨와 가족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옥설희씨의 남편은 “이렇게 환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병원이 어디 있나요?” 하며 이 병원을 다른 말기 환자와 가족에게 소개해 주어도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필자에게 자신은 한 사람을 보는 것도 이처럼 고통스러운데 최선생님은 어떻게 여러 환자들을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전통적으로는, 부인이 죽으면 남편은 화장실에 가서 웃는다지만 자신은 그럴 것 같지 않다며 울먹였다. 옥설희씨는 마지막으로 갈수록 산소를 꽂고 있으면서도 숨쉬기가 어려워 안절부절 못하였다.

임종하는 날은 웨딩드레스를 가져오라고 해서 갈아입었다. 마지막으로 관에 들어가면서도 남편에게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여주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약물 치료를 거부하면서 “더 이상 끌지 않고 부르심에 순응하겠다”던 옥설희 교수는 호스피스 가입한 지 25일 만에 그렇게 갔다. 결혼식장에 서 있는 새 신부처럼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남편과 간병인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미소를 띤 채.

“안녕히 가세요, 옥설희 교수님. 그곳에서 다시 만나요.”

 

 

먼저 간 남편을 볼 면목이 없다고 시신 기증을 신청했다고 취소하고 남편 옆에 묻힌 여인의 유서

“이 엄마를 용서해라”

김영희(42세, 여)씨는 필자가 호스피스 간호사로 일하던 첫 해에 만난 환자였다. 암 병동에서 연락이 왔는데, 퇴원해도 되는 환자이나 통증 조절이 잘 안 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혹시 호스피스에서 조절할 수 있으면 퇴원하여 가정호스피스간호를 받을 수 있도록 의뢰하고 싶다고 하였다. 병실에 올라가 보니 환자는 얼굴이 새까맣고 입술이 말라서 허옇게 일어나 있었고 옆에서 수발하는 아들은 지쳐서 졸고 있었다. 유방암 말기 환자로 4년 전에 왼쪽 유방 절제 수술을 한 후 항암 치료로 호전되었다고 재발하였다고 했다. 첫 눈에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환자임을 알 수 있었다. 환자의 머리는 수세미처럼 헝클어지고 엉켜 있었으며 며칠이나 양치를 못한 듯 이빨에는 누런 것이 덮여 있었다. 통증 조절을 위해 마취과에서 시술한 카테터(Epidural Boxter)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주사기로 두 시간마다 약물을 주입(경막외 주사) 하는데도 별로 효과가 없다고 하였다. 환자는 얼굴을 찌그린 채 가끔씩 땅이 꺼지도록 깊은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보아 신체적인 통증만이 문제가 아닌 듯해 보였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김영희씨는 10년 전 남편을 사별하였으며 당시 초등학생이던 외아들이 자라서 대학생이 되어 지금 환자의 병수발을 해주고 있다고 하였다. 아들은 열심히 어머니를 돕고자 하는 듯이 보였으나 대학교 2학년인 아들이 시한부 인생을 사는 어머니에게 해 들릴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으리라 쉽게 짐작이 되었다.

“보호자가 총각이라 아무것도 몰라요. 저 엄마만 불쌍하지.”

아들이 잠시 변기를 가지러 간 사이에 옆 침대의 환자가 슬며시 귀띔을 해주었다. 환자도 보호자도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김영희씨는 통증 조절을 위해 시술해 놓은 카테터가 불편하여 빼기를 원하였다. 또, 병원에서 새우잠을 자는 아들이 안쓰럽고 미안하여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김영희씨가 느끼는 통증의 정도는 VAS 7~8 정도였는데 경구용 진통제로 대치하여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아 보였다. 담당 의사와 의논하여 주사기로 주입하던 카테터는 막아놓고 경구용 마약성 진통제를 2~3일간 써보기로 하였다. 김영희씨도 동의하였으므로 그날 저녁부터 먹은 약으로 바꾸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가 보니 환자는 밤새 잘 잤다고 하였다. 환자기 자느라고 깨우지 않으니 아들 역시 조금 편안하게 몇 시간 잘 수 있었다고 하면서 씨익 웃었다.

마약성 진통제를 사용하는 경우, 처음 하루 이틀 동안에는 약의 효과를 살펴서 적절한 용량을 결정하고 부작용이 나타나는지도 살펴서 해소해 주어야 한다. 처방은 의사가 하지만, 약을 투여하고 환자와 자주 접촉하여 투여된 약물의 효과 및 부작용을 살펴서 다음 조처를 취하도록 정보를 주는 일은 간호사가 한다. 또한 이렇게 확인하고 살펴봐 주는 것이 말기 환자와 가족에게는 자신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받아 들여져서 더 이상 외롭다는 감정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심리적 지지는 환자가 인지하는 통증의 정도를 감소시키는 효과도 있으므로 일석삼조(一石三鳥)의 효과를 볼 수 있다.

김영희씨에게 경구용 마약성 진통제를 투여하고 이틀 정도 지켜본 결과 통증의 정도는 VAS 2 정도로 감소되었으며 얼굴 표정이 밝아지고 식사도 조금 할 수 있게 되었다. 죽도 겨우 먹던 상태에서 밥을 몇 숟가락 먹는 정도가 된 것이다. 별다른 부작용의 징후도 없어서 3일째 되는 날 퇴원하게 되었는데, 아들은 마치 어머니가 거의 다 낫기라도 한 것처럼 좋아하였다. 김영희씨에게는 아들 외에 가까이에서 도움을 줄 만한 가족이나 친지가 없었다. 그래서 그날 마침 별로 바쁜 일도 없었기에 퇴원하는 김영희씨를 필자가 집까지 동행하기로 하였다.

김영희씨의 집은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남의 집 문간방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자 오른쪽으로 조그마한 출입구가 있는데 들어가니 바로 부엌이었고 그 다음이 방이었는데 방안에는 작은 책상과 옷장이 하나 놓여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방의 크기도 두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을 정도였다. 방안을 둘러보면서 이들 모자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짐작할 만하였다. 이런 빈한한 살림에 아버지도 없이 살아온 김영희씨의 아들에게 가장인 어머니의 중병은 도대체 얼마만한 무게도 다가왔을까 생각하니 아들을 가진 필자에게는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일단 자리를 깔고 환자가 누울 수 있게 해주고 보니 식사 시간이 가까웠다. 무엇인가 먹을 것을 주어야 할 텐데 부엌을 둘러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아들에게 밥 지을 줄 아느냐고 묻지 고개를 끄덕이길래 그럼 밥을 지으라고 이르고 병원에 있을 적에 김영희씨가 시원한 콩나물 국물이 먹고 싶다고 한 말이 생각나서 급한 대로 콩나물 국을 끓였다(호스피스 직원은 때로 이런 일도 한다. 단 환자를 위해서 곡 필요한 경우에만 국한되는 일이다). 김영희씨는 일어나 앉아 눈물을 글썽거리며 순식간에 밥 한 공기를 국에 말아 맛있게 먹었다. 이렇게 맛있게 밥을 먹어보기는 몇 달 만에 처음이라고 하였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는 입맛이 없어서 죽도 잘 넘어가지 않았는데 집에 오니 입맛이 난다고 하였다. 마음이 열린 김영희씨는 필자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0년 전 회사에서 일하다가 안전 사고로 사망한 남편 이야기를 하면서 그때 연락을 받고 어찌나 놀았던지 그 상황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하였다. 아침에 다녀오마 고 나갔던 남편이 성하지 못한 시체가 되어 누워 있는 모습을 오후에 만나야 했던 그 충격이 몹시도 컸던 것 같았다. 그 보상금으로 아들과 함께 살아왔고, 자신이 보험설계사로 일하면서 수입이 어느 종도 있었는데 몇 군데 빌려주었던 돈을 이자도 못 받게 되어 지금은 형편이 어렵다고 하였다. 아들이 대학을 마칠 때까지의 등록금 정도만 남아있고 생활비가 전혀 없어서 돈을 돌려달라고 해보았지만 자신이 병든 것을 알고는 줄 생각들을 안 하는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당장 생활비도 없는 것 같아 딱한 마음이 들었다. 사회사업가의 개입이 필요해 보였다. 또한 이 가정은 환자를 수발할 수 있는 가족이 아들밖에 없었으므로 매일 누군가가 방문하여 문안하고 식사라도 챙겨줄 사람이 필요했다. 따라서, 우선 호스피스 팀에서 도울 수 있는 부분을 설명해 주고 주위에 도움을 줄 분이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김영희씨의 아들이 근처의 교회에 다니고 있는데 김영희씨 아들과 비슷한 연배인 목사님댁 두 아들(이들 중 한 명이 김영희씨 아들과 친구였다)과, 같은 구역의 교우 두세 분이 방문해 주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교우들이 주 3회, 호스피스 자원봉사자가 주2회, 그리고 필자가 주 2회씩 방문하기로 하고 각자 방문할 요일을 정하였다. 이렇게 요일을 정해 놓은 이유는 환자와 가족에게 지속적이며 정기적인 도움을 제공하기 위해서인데 미리 정해 놓지 않으면 어떤 날은 여러 사람이 방문하여 환자를 피로하게 하고, 어떤 날은 아무도 방문하지 않아 환자가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생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호스피스 환자들은 신체적으로 완치가 어려운 분들이다. 따라서 나을 수 있다는 말을 하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지속적으로, 그리고 정기적으로 당신을 방문하여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라고는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때로는 방문객의 수를 조절하여 매일 누군가가 환자 곁에 함께 있으면서 보살펴 줄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사무실로 돌아온 필자는 호스피스 팀의 사회사업가에게 김영희씨의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아 달라고 의뢰하였다. 그리고 자원봉사자 팀장과 의논하여 김영희씨의 집을 방문할 수 있는 봉사자를 물색하였다. 두 사람을 한 조로 하여 두 조를 선정하였다. 각 조가 1주일에 한 번, 4시간씩 봉사하도록 주선하였는데 그 중 한 조는 주로 침상 목욕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침상 목욕과 머리 감기는 일은 처음에 자원봉사자들을 모시고 가서 시범을 보이고, 다음에는 그분들끼리 방문하여도 할 수 있게 도와드려야 했으므로 함께 모시고 갔다. 사전에 김영희씨와 이야기하여 목욕시키기에 적당한 날을 잡아 놓은 상태였다. 김영희씨는 오랫동안 목욕을 못해서 갑갑하였는데 고맙다고 하였다.

오래 누워 있는 환자의 전신을 목욕시키는 일은 환자나 자원봉사자 모두에게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일이다. 거기다가 김영희씨는 남의 집의 조그마한 문간방에 살고 있어서 수세식 좌변기나 욕실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재래식 방법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부엌에서는 계속해서 물을 데우고 방안에는 전기난로를 켜놓았다. 몇 개의 대야를 이용해서 목욕물과 헹굴 물을 준비해 놓고 얼굴부터 닦아 주었다. 말기암 환자의 경우 구강 내 점막이 약해져 있으므로 칫솔도 부드러운 것을 사용해야 하는데 김영희씨의 경우는 이미 칫솔질을 하기에도 부담스러운 경우였으므로 물에 적신 거즈를 손가락에 말아서 입안 구석구석을 닦아주고 이 사이에 긴 이물질은 물에 적신 면봉으로 일일이 닦아 내었다. 그 다음에 입에 물을 머금어서 양치질을 한 다음 뱉어내게 하였더니 시원하다고 하였다. 몸은 물과 비누로 닦고 물수건과 마른 수건으로 닦아내는데 물이 닿은 김씨의 몸에서는 슬쩍 건드리기만 하여도 굵은 때가 슬슬 밀려 나왔다. 대강 손으로 문질러서 때를 벗기고 씻어주었는데도 금방 대야가 허연 때로 덮이곤 했다. 몸뿐 아니라 팔, 다리와 손가락, 발가락 사이에서도 굵은 때가 둥글게 말리면서 밀려나오는 것이었다. 한자가 힘들어 할까 봐 대충 씻겼는데도 40분 정도 시간이 소요되었다. 시원하다고 말하는 환자의 모습이 피로해 보이고 자원봉사자들도 힘든 것 같아 머리는 다음에 감겨드리기로 했다. 방이 좁아 다 들어가지 못하고 한 사람은 부엌에서 물 데우는 것을 지켜보며 서 있어야 했으므로 자원봉사자 두 분이 번갈아 가며 한 분은 서서 물을 데우고 한 분은 옆에서 목욕시키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 자원봉사자들도 힘들었을 텐데 ‘우리는 괜찮아요’ 하셨다. 필자도 기운이 빠진 상태였으나 마음만은 상쾌하였다.

환자가 목욕시키도록 스스로 자신의 몸을 내어 맡긴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호스피스 팀과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자를 목욕시키는 일은 스킨십을 통해 환자와 더욱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자원봉사자들이 번갈아 가며 김영희씨의 가정을 방문하여 씻겨 주고 음식을 권하며 사랑과 관심을 표현하는 동안 김영희씨의 상태는 많이 안정되어 갔다. 퇴원 후 한 달 정도 살 수 있을 것 같다던 담당 의사의 예상과는 달리 2~3개월이 지나면서 식사도 잘 하고 오히려 기운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반면에 아들은 점차 지치는 것 같더니 외출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책상에 앉아 이어폰을 낀 채 녹음테이프를 듣느라고 어머니가 불러도 대답을 못하고 하였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영어 테이프를 듣는다고 하였다. 대학교 2학년인 아들은 휴학을 하고 엄마를 돌보고 있었다. 그런데 의사의 말과는 달리 엄마는 점점 건강해지는 것 같고 휴학 기간은 끝나가고 있었다. 아들은 이제 복학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앞으로 취직하려면 영어 공부도 부지런히 해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였다.

자원봉사자들이 도와준다고는 해도 여러 달 동안 사내아이가 스스로 빨래하고 밥해 먹으면서 환자인 어머니를 돌보느라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고 지쳐 있었다. 호스피스 간호를 받으면 얼마간은 환자의 몸과 마음이 안정을 찾고 잘 지내게 되어 때로는 환자나 가족의 마음에 이러다가 낫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기는 얼마 안 가서 끝이 나고 시간이 지나면 환자의 몸은 점점 쇠약해지면서 마지막을 향해 가게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아들은 심신이 지쳐서 이제는 엄마가 나을 것으로 믿고 자신의 앞길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호스피스 팀 회의에서 이 문제를 의논한 결과 파출부 겸 간병인을 1주일에 하루씩 쓰고 그날은 아들에게 휴가를 주기로 결정하였다. 비용은 가난한 환자를 위해 써달라고 호스피스에 맡겨진 기금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김영희씨는, 사실은 아들이 우울증으로 약을 먹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자신이 말기 진단을 받고부터는 아들이 약을 끊고 있어서 걱정이 된다고 하였다. 아들이 고등학교 때부터 발병하여 정신과 외래에 다니면서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요즘은 엄마 병수발 하느라고 힘든데도 약을 먹지 않고 있어서 아들의 병이 재발할까 봐 걱정이라고 하였다. 김영희씨는 아들이 쉴 수 있게 배려해 주니 고맙다고 하였으나 아들은 사양하였다.

“제가 아들인데 당연히 어머니를 돌봐 드려야지요. 어떻게 남의 손에 맡깁니까?”

그래서 파출부가 처음 간 날은 종일 아들도 함께 집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파출부가 두 번째 갔을 때는 “정말 나갔다 와도 돼요?” 하고 묻더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럼요. 어서 다녀오세요” 하고 말하자 수줍은 듯 웃으면서 “그럼 저 좀 나갔다 올게요” 하고 나가더니 다섯 시가 채 못 되어 들어왔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아들은 1주일에 한 번씩 나가서 친구도 만나고 도서관에도 가는 등 혼자만의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어떤 날은 전화를 걸어 파출부에게 자신이 조금 늦게 돌아와도 되겠는지 묻는 날도 있었다. 이렇게 아들이 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 말고도 아들이 정신 건강을 위해서 호스피스 팀의 정신과 의사와 면담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이러한 전문적인 면담과 1주일에 하루씩의 휴식은 아들에게 활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어 주었다. 아들은 얼마 안 가서 다시 처음부터 어머니를 잘 돌볼 수 있게 되었다.

김영희씨는 봄에 호스피스에 가입하였는데 어느덧 가을이 되었다. 어느 날은 환자의 집을 방문하기 위해 걸어가던 길목에서 잘 익은 감을 한 무더기 쌓아놓고 파는 상인을 만나게 되었다. 지나치다가 생각하니 감이 탐스럽게 보여서 몇 개를 사 들고 갔다. 김영희씨는 필자가 들고 들어간 봉지를 보고 무어냐고 묻더니 감이라고 하자 벌떡 일어나 눈을 빛내며 닦아 달라고 했다. 그러더니 그 자리에서 한 개를 순식간에 먹어 치우는 것이었다. 떫지 않느냐고 묻자 두 개째를 베어 물며 어릴 때 자신의 집에 감나무가 많았다고 하면서 이런 감 잘 먹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감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진 일을 비롯하여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나씩 쏟아놓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회상하는 그녀의 얼굴이 빛나 보여서 어린 시절에는 행복하게 지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김영희씨가 대구에 사는 언니에게 연락 좀 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하고 살았는데 어린 시절을 회상하다 보니까 만나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도 넌지시 전해 달라고 했다. 기꺼이 수락하고 다음날 전화를 하였다. 언니는 깜짝 놀라면서 집안 정리 좀 해놓고 올라오겠다고 하였다.

환자의 통증이 잘 조절되고 있고 아들도 활력을 되찾을 무렵 언니가 올라왔는데 손수 재배한 푸성귀를 많이 가지고 왔다. 하루는 방문을 하였더니 언니가 끓여준 된장찌개와 호박 잎 찐 것으로 김영희씨가 식사를 맛있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필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픽 하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내가 살면 얼마나 살 거라고 이렇게 열심히 먹고 있어요. 이 모습 보면서 최 선생님이 웃으시지 않을까 생각돼서요” 하였다. 본인 생각에도 시한부 인생을 사는 자신이 살려고 열심히 먹는다는 사실이 우스웠던가 보다. 그러나 필자는 정색을 하고 김영희씨에게 질문하였다.

“지금 살아 있어요? 아니면 죽었어요?”

그러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환자가 말했다.

“살아 있지요.”

“바로 그거예요. 지금 살아 있잖아요. 그러니 먹는 것이 무어 그리 우스워요? 우리가 내일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오늘 하루 살아 있다는 사실이 감사한 것이지요. 저는 환자의 병을 수발하다가 가족이 먼저 돌아가시는 것도 더러 보았어요.”

사실 백혈병에 걸린 딸을 수발하느라고 3년 이상 고생하던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고 딸은 그 이후로 일 년이나 더 살다가 떠난 경우도 있었다. 도 간암인 남편을 수발하다가 교통 사고로 먼저 떠나는 부인의 장례식에 환자복 차림으로 링거병을 단 채 맨발로 뛰어나와 울부짖는 남편을 보기도 하였다. 말리는 가족들도 울고 필자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간염에서 간경화로, 간경화에서 간암으로 진행되어 온 남편의 병수발을 하느라고 평생을 가정에서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지내온 부인이, 염려하던 남편을 남겨 놓고 오히려 자신이 먼저 갔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암’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죽음’을 떠올린다. 의료인들조차 ‘암 환자’ 하면 죽음을 연상한다. 그러나 암은 5년 이상 생존할 가능성이 50%는 된다. 그래서 종양내과 의사들의 경우 암 환자를 볼 때, 치료하면 절반 정도는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말기 상태가 되어 호스피스에 의뢰할 시점이 되면 ‘이제 저 환자는 얼마 안 가 돌아가시겠구나’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호스피스 전문가들은 처음 의뢰되는 환자를 보면 저분은 아직 얼마 동안 살아 계실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환자가 임종과정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이제 얼마 안 되어 돌아가시겠구나 하고 생각한다. 사실 죽은 그 순간까지 우리들은 살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호스피스에서는 죽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 똑같이 사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기 대문에 설혹 지금까지는 잘못 살았다 하더라도, 이제부터 잘 살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것이다.

필자의 반응을 살피던 김영희씨는 귀밑을 약간 붉히면서도 밥 한 그릇을 끝까지 맛있게 다 먹었다.  언니가 와서 머무는 며칠 동안 김영희씨는 몹시 행복해 보였으며 아들도 살림을 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좋다고 하면서 기뻐하였다. 언니와 함께 김영희씨는 지난 시간들을 회상해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즐거워하였다. 하지만 언니 입장에서는 동생이 죽으면 막상 장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조카인 김영희씨의 아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많은 듯 했다. 더구나 집주인은 아픈 동안 있는 것은 좋으나 장례식은 집에서 하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은근히 이 기회에 언니가 김영희씨 모자를 데리고 가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언니는 사정상 그럴 수가 없다고 하면서 임종이 가깝게 되면 곡 좀 알려달라고 당부하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언니가 돌아간 후 김영희씨에게는 오심, 구토 증상이 심해졌으며 시신을 기증하고 싶다면서 알아봐 달라고 하였다. 돌아가신 남편이 묻혀 이는 선산이 있기는 한데 자신은 그곳에 묻히기보다는 몸을 기증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선산이 있는데 그리로 안 가고 시신을 기증하겠다고 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은 방문하였더니 웬 나이든 남자분이 와 계셨다. 그분은 김영희씨 남편의 형님이라고 하였는데 마침 병 문안을 오신 것을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던 것이다. 마당에서 이분과 잠시 이야기 나눌 시간을 가지게  되었는데 먼산만 바라보며 한참을 말이 없던 김영희씨의 시숙이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며 결심한 듯 이야기를 하였다. 그의 말로는 김영희씨가 남편 사별 후 보험 설계사로 일하면서 사귀던 사람이 있었는데 가정이 있는 남자였다고 했다. 이 사람이 가끔씩 와서 자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 당시 사춘기였던 김영희씨의 아들이 우울증이 생겨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옆에서 함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들이 가만히 필자를 바라보다가 그만 고개를 숙였다. 그 남자는 김영희씨가 처음 유방암으로 수술을 받을 때는 입원비도 대어주고 병실에도 찾아오곤 했었는데 이렇게 아주 드러눕고 나자 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선산에 안 가겠다는 건 아마 남편에서 미안해서가 아니겠느냐고 했다. 형님은 많이 망설였지만 그래도 자식이 있는데 제수씨가 동생 옆에 묻혀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먼 산을 바라보았다. 선산은 충청도 어딘가에 있다고 하였다. 김영희씨의 아들은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선산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당시 김영희씨의 몸 상태는 병이 많이 진행되어서 전보다 마르고 식사도 미음을 조금씩 들고 있는 정도였다. 가끔씩 “우야꼬, 우야꼬” 하며 혼잣말을 하기도 하고 아들 이름을 부르면서 “아이고 원철아, 우야꼬? 우야꼬?”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걱정하느냐고 묻자 “차가운 땅속에서 숨도 못 쉬고 우야꼬?”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죽으면 땅 속에 묻힐 텐데 차갑고 어두운 그 곳에서 숨도 못 쉬고 어떻게 살지 걱정이라고 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더니 그 다음에는 혼자 남은 아들 걱정을 했다. 자신이 죽으면 아들 혼자 어찌 살지 걱정이 되어서 그런다고 했다. 충격을 받아 우울증이 재발되면 어떻게 하느냐고도 하였다.

“내가 몹쓸 짓을 했어요. 그 애가 싫어했는데도…” 하면서 사귀던 남자 이야기를 하였다. 자신이 그 남자를 집에 들이지만 않았어도 아들이 우울증에 걸리지는 않았을 텐데, 자신이 몹쓸 에미였다고 후회하는 말을 하였다. 그래서 혹시 그 때문에 선산에 안 가고 시신을 기증하려 했느냐고 하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원철(아들)이 아버지한테 가요. 나는 못해요” 하였다.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김영희씨에게 아들과 시숙은 김씨가 선산에 가기를 원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비추자 가만히 생각하더니 “정말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하고 되물었다. 이번에 김영희씨가 마음을 정리할 차례인 것 같아 방문을 마치고 집을 나오면서 아들에게 어머니와 그 문제를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도록 권하였다.

며칠이 지난 후 김영희씨는 머뭇거리며 전에 시신 기증하겠다고 한 말을 취소해도 되는지를 물었다. 물론이라고 하자 아들과 그 문제를 이야기하였다고 했다. 아들의 권유로 아들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과 상담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였더니 마음이 후련해졌다고 하면서 이제는 원철이 아버지를 만나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아들과 마음을 터놓고 속내를 이야기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김영희씨의 몸은 점차 마지막으로 가고 있었는데 하루는 주인집 아주머니가 필자를 좀 보자고 하였다. 이런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제발 자기 집에서 장례식만은 하지 않도록 해 주면 좋겠다고 사정을 했다. 김영희씨의 아들에게 말하려고 했지만 너무 매정한 것 같아서 그런다고 하였다. 환자가 누워있는 문간방은 군대 간 아들이 오면 쓸 방인데 사람이 죽어서 나간 방이라고 하면 무서워할 것이라고 하면서 더구나 자신들과는 종교가 달라서 어구 안 되겠으니 사정 좀 봐달라고 애원을 했다. 집주인의 입장도 이해가 되기는 하였으나 딱한 일이었다. 김영희씨에게도 집주인에게도.

가정호스피스 팀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임종이 가까워오면 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비용이 적게 들려면 임종 직전에 입원시켜야 하는데 그때를 맞추는 일이 쉽지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동안 호스피스 팀의 사회사업가가 김영희씨를 의료보호 1종으로 신청해 놓았으나 아직까지 응답이 없어서 좀더 기다려야 하는 형편이었다. 만일 의료보호가 되면 국립 병원에 무료로 입원할 수가 있게 되어 문제가 원만히 해결될 수도 있겠으나 당시로서는 그렇지도 못한 형편이었다. 또한 말기 환자가 임종이 가까워 입원하는 경우, 편안히 돌아가실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호스피스에 대한 개념이 있는 의사가 없는 경우에는 임종환자에게 불필요한 온갖 검사를 하게 되고 중환자실로 보내지게 되는 위험 부담도 있었다. 어쨌든 사회사업가는 의료보호 관계를 다시 한번 알아보기로 하고 의료진이 환자의 상태를 잘 살펴 최대한 입원 기간을 줄일 수 있도록, 또 이 문제가 원만히 처리되도록 팀의 목사님이 기도해 주셨다.

한편으로는 입원비가 저렴하면서 호스피스 개념이 있는 의사가 있는 병원을 물색하였는데 김영희씨의 집에서 좀 멀기는 하지만 그런 대로 적합한 병원을 찾을 수 있어서 그 병원에 사정을 이야기하고 필요 시 곧 입원할 수 있도록 조처해 두었다.

얼마 후 겨울이 시작되는 환절기가 될 무렵 김영희씨는 임종과정을 시작하였다. 미음도 먹기 어렵게 되고 두 볼은 움푹 패였으며 숨쉬기도 어려워 하였다.

 가정 호스피스에서 환자의 임종 과정이 시작되면 대개의 경우 간호사가 매일 환자를 방문한다. 상태의 진전 과정도 체크하고 가족들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장례식과 관련된 의논에 응해 주기도 하는데 김영희씨의 경우는 언제 입원시킬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으므로 더욱 신경이 쓰였다. 김영희씨는 유방암이 폐로 전이된 환자였으므로 마지막에 호흡 곤란 증세가 있었는데 임종 과정을 시작하면서 이것이 더욱 심해졌다. 앉아 있으면 조금 덜했으나 이미 혼자 앉을 수 없는 상태였으므로 누군가 뒤에서 안고 있어야 했다. 임종 환자의 경우 이렇게 뒤에서 누군가 가슴으로 환자의 등받이가 되어 주면 환자는 몹시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뒤에서 환자를 안고 있는 사람은 20~30분만 지나도 온몸이 저리고 힘이 든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에 김영희씨의 아들과 다른 두 청년이 번갈아 가며 등받이를 해주는 모습은 보기에 정말 아름다웠다. 아들은 자기 어머니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다른 두 청년은 아들이 다니는 교회 목사님의 아들들이었는데 힘들고 하는 내색도 않고 교대로 김영희씨를 안아서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김영희씨가 임종 과정을 시작한 지 이틀째 되는 날 우리는 김영희씨를 미리 부탁해 놓았던 모 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리고 임종을 위해 입원하는 것이니 불필요한 처치는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였다. 병원에 입원한 그날, 김영희씨의 활력 징후는 아주 미약하였다. 거의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도 있어서 그날 밤을 넘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밤늦게 연락을 받은 김영희씨의 시숙이 왔다. 시숙은 마음이 아픈지 병실에 앉아서도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겠고, 제수씨. 다 가는 길로 가는데… 선산으로 오시오. 내 동상(김영희씨의 남편) 옆에 자리를 드리리다”

시숙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벽을 바라보고 누워 있던 김영희씨가 몸을 돌려달라고 했다. 천천히 눈을 들어 시숙을 바라보더니 시선을 떨구며 말하였다.

“미안해서요.”

“되았소.”

마침 김영희씨의 언니가 도착하자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시숙이 하는 말이었다. 병실 밖으로 나온 시숙은 담배를 피워 물고 서성거렸다. 시숙의 아들들도 와서 차례로 숙모인 김영희씨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병원에서는 그날 밤이 고비라고 하였다. 이미 김영희씨의 손과 발은 차가워졌고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김영희씨의 언니와 아들이 옆에서 지키며 밤을 새웠고 시숙과 조카들은 복도의 의자에서 대기하였다. 그런데 끊어질 듯 약하게 숨을 쉬던 김영희씨가 다행히 그날 밤을 넘기고 아침이 되자 오히려 조금 생기가 돌아온 듯 말도 하고 먹기도 하였다. 낮에는 언니가 먹여주는 대로 죽 반 공기와 달걀 삶은 것을 받아먹었다. 그리고 그 동안 김영희씨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돌보아 주던 교우들과 호스피스 팀의 자원봉사자들이 오자 웃으며 ‘나 먼저 갈 테니 이 다음에 만나요” 하고 인사도 하였다. 오후에는 원목실에서 와서 김영희씨와 모여있는 사람들이 함께 임종 예배를 드렸다. 임종 예배를 일명 천국 환송 예배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사랑하는 가족을 천국으로 떠나 보내는 마지막 예배 – 환자가 살아 있을 때 마지막으로 함께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모교인 이화여대에서는 김활란 선생님께서 임종하실 때 예배를 드리고 “이제 주님을 만나러 가니 립스틱을 발라 달라”고 하신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평소에 화장을 거의 안 하시던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고 또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말고 행진곡을 불러 달라고 하셨다.

김영희씨는 그런 말을 안 하였지만, 그리고 립스틱을 바른 것도 아니었지만 임종이 가까울수록 그녀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아름다웠다. 임종 과정을 시작한 지 4일째 되는 날 밤에는 기운이 진하여서 거의 말을 하지 못하고 호흡이 거칠어지더니 새벽에 아들과 언니, 시숙, 그리고 호스피스 팀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천하였다.

장례식은 그곳 병원 영안실에서 하였는데 김영희씨 시숙과 동서, 언니 가족, 그리고 교우들이 와서 함께 치렀다. 호스피스에서는 흰색 국화로 만든 자그마한 꽃바구니를 하나 만들어서 보냈는데 김영희씨의 빈소에는 꽃이 별로 없어서 호스피스에서 보낸 바구니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상주인 김영희씨의 아들은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고 마치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장례식이 끝난 후 집에 가 보니, 김영희씨가 누워 있던 침상 밑에서 연필로 쓴 유서가 나왔는데 아들에게 남긴 것이었다. 아들이 먼저 발견하고 필자에게 보여주었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노트를 찢어서 쓴 김영희씨의 유서였는데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미안하다는 고백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연필로 쓴 김영희씨의 유서를 보며 어느 날인가 김영희씨가 연필을 입에 물고 침을 묻혀가며 무언가를 쓰다고 필자가 들어가자 침상 밑으로 감추던 모습이 생각났다. 무엇을 쓰고 있었는지 물어도 손을 내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었다. 당시에 ‘유서를 쓰나?’ 하고 생각은 했으나 필자도 그만 잊어버리고 있었다. 김영희씨는 초등학교를 겨우 나왔을 정도의 학력이었다. 연필로 비틀거리듯 슨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원철아, 미안하다.

너 하나도 못 키워놓고

할 일이 많다마는

엄마는 더 이상 견딜 수 없구나.

하나님께 첫째 미안하다.

어차피 못 살 엄마가 너를 너무 고생시켰구나.

엄마도 살고 싶다. 그러나…

원철아, 교회 잘 다니고

앞으로 마음 단단히 먹고

너보다 어린 고아들도 다 살고 있어.

주위에 어른들께 미안하다.

원철아, 이 엄마를 용서해라.

하나님 안에서 우리 이별.

 

 

“김영희씨, 안녕히 가세요. 아드님이 잘 견디는지 당분간 우리 호스피스 팀에서 지켜볼게요.”

 

 

 

제7장 이젠 죽어도 괜찮아요

 

끝까지 자제력을 잃지 않고 죽음을 맞이했던 50대 장암 말기 여인

“이젠 죽어도 괜찮아요, 하고 싶은 것 다했어요”

정순자씨는 차분하고 지적인 여자였다. 담당 의사로부터 의뢰를 받고 전화를 걸었더니 기다려 달라고 했다.

“조금 생각하고 싶어요. 와달라고 할 때 와주세요.”

그럼 언제든지 필요할 때 연락해 달라고 하고 이름과 전화 번호를 남겼다. 그런데 며칠 휴가를 다녀왔더니 정순자씨로부터 방문해 달라는 연락이 와 있었다. 의사로부터 온 의뢰서(medical form)를 다시 살펴보니 정순자씨의 병명은 장암 말기였다. 이미 암세포가 복강 내에 다 퍼져 있는 상태이며 3개월 전에 장루 수술을 하여 인공 항문을 가지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항암 치료를 한 번 하였으나 별 반응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병황에 대한 정보는 환자와 가족 모두에게 주었다고 쓰여 있었다. 의사가 예상하는 정순자씨의 잔여 수명은 2~3개월, 호스피스에 의뢰하는 이유는 완화 간호(palliative care)를 위해서라고 쓰여 있었다.

정순자씨의 집으로 전화를 하니 딸이 받아서 정순자씨를 바꾸어 주었다. 전화 속에서 정순자씨는 필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언제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날 오후로 약속을 하고 찾아갔다. 정순자씨의 집은 고층아파트 1층이었는데 시어머니가 현관문을 열어주면서 반겨 주었다. 시어머니는 수더분하고 인상이 좋아 보였는데 정순자씨가 누워 있는 안방으로 안내하면서 “우리 며느리가 저렇게 아파서 큰일이에요” 하며 걱정스러워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순자씨는 자리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 필자를 맞이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서 놀고 있던 큰딸이 옆에서 수발을 들고 있다고 하였다.

인사를 나눈 후에 정순자씨는 오래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바로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하였다. 의사로부터 항암제가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와 가정호스피스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의뢰서를 써주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고 했다.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이제 어찌해야 할지를 생각하느라고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했다. 필자가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었기에 조금 시간이 필요해서 나중에 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54세인 정순자씨는 어려서부터 몸이 건강하여 잔병치레 없이 잘 살아왔다고 했다. 그런데 지난 봄부터 갑자기 소화가 안 되고 속이 더부룩해지는 것이 아무래도 몸이 좀 이상한 것 같아 혼자 병원에 갔다고 했다. 대단한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혹시?” 하는 생각에 남편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갔다고 했다. 진찰을 한 후에 의사가 몇 가지 검사를 더 해보자고 하였다고 했다. 그래서 의사의 지시에 따라 검사를 하였고 며칠이 지나 그 결과를 보러 갔더니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고 “남편과 함께 오시지요” 하더라는 것이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으나 마음을 다잡아먹고 “각오가 다 되어 있으니 나에게 직접 말해 주세요” 하고 말했다고 했다. 의사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주저하다가 정순자씨가 독촉을 하자 병황을 알려주더라고 했다. 정순자씨의 암은 대장의 바깥 부분에 좁쌀처럼 작은 암세포가 생겨나서 이미 다른 곳에 전이가 되었고 말기 상태가 되어서야 발견된 것이라고 하면서 “일단 항암 치료를 한 번 해보시지요” 했다는 것이다.

그날 집에 돌아가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남편에게 사실을 알렸더니 남편도 놀라면서 그럼 당장 입원하여 치료를 하자고 하여 입원을 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항암제를 투여한 결과는 암세포가 약물에 거의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장폐색으로 인해 인공 항문을 만드는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완치가 아니고 단지 증상의 조절일 뿐이라는 말을 의사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또 수술을 하고 난 후에 의사가 남편에게 잔여 수명이 3개월 정도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남편이 그 말을 정순자씨에게 안 하고 있다고 수술하고 3개월이 지나고서야 의사가 오진 했을 거라고 하면서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 정도면 환자가 자신의 상태에 대해 알 만큼은 다 알고 있는 셈이었다. 또, 지적인 그녀는 지난 며칠간의 숙고를 통해 자신의 죽음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남은 시간을 잘 준비해서 미련 없이 떠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정순자씨는 현재 배가 가장 아프다고 했는데 하루에 세 번 심한 통증을 느낀다고 했다. 아플 때는 통증이 VAS 7 정도이고 약을 먹으면 2 정도로 내려간다고 했다. 복용하고 있는 약을 살펴보았더니 코타이레놀이었다. 코타이레놀은 코데인과 타이레놀을 섞어놓은 약제로서 WHO에서 제시한 3단계 통증 사다리의 두 번째 단계에 있는 약물이다. 통증 조절의 1단계인 비마약성 진통제인 코데인과 비마약성 진통제인 타이레놀을 합성해 놓은 코타이레놀을 쓰기도 한다. 정순자씨의 경우는 이 약을 하루 세 번 한 알씩 복용하고 있었는데 복용한 약의 효과가 8시간 동안 지속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였다. 호스피스에서 통증 조절은 우선적으로 신경을 쓰는 문제이고 웬만하면 잘 조절해 줄 수가 있다. 담당 의사와 의논해서 쓰고 있는 약의 용량과 횟수를 적정 수순으로 늘려 주었더니 하루 종일 통증이 VAS 1~2 정도 (거의 통증을 느끼는 않는 수준)로 유지 되었다.

정순자씨는 딸의 결혼에 관해서도 걱정을 하며 말했다.

“사귀는 아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반대하고 있었으나 이렇게 되니 그냥 결혼을 시켜야 되겠다 싶어요. 그런데 무얼 어떻게 준비해 주어야 할지 내가 이러구 있으니 엄두가 안 나요.”

필자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싶은지 생각하는 바를 말해 보라고 하였더니, “교우들이 도와주겠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될는지…” 하였다. 주위에 도와줄 분이 있으면,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말하고 그분이 딸과 의논해서 준비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하였다. 결혼 준비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사돈 될 분들과도 의논하고 당사자들의 의견도 수렴하여야 하니 직접 물건을 고르고 준비를 하는 것보다야 못 하겠지만 도움을 받아서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필자의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생각하던 정순자씨가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필요하면 호스피스 자원봉사자가 심부름을 해 줄 수 있다고 제의를 하였다. 사실 딸을 낳고 키운 어머니가 그 딸의 결혼을 위해 손수 물건을 장만하고 준비하고 싶은 마음이야 다 마찬가지겠으나 정순자씨의 경우는 건강상의 이유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 결혼식에 참석하려면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 있을 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눈 후 정순자씨는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정하고 우선 사돈댁과 날짜를 잡고 일을 진행시키기로 하였다.

정순자씨에게는 자녀가 셋 있었는데 결혼을 앞둔 딸이 첫 번째 자녀이고 둘째가 대학생인 아들, 셋째는 고등학교 3학년인 막내아들이었다. 살림은 함께 사는 시어머니가 맡아서 해주고 계셨다. 그런데 정순자씨 부부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달랐던 점은 남편에게 있어서 정순자씨는 부인이자 오래 사업을 함께 해온 동업자이며 친구이자 연인이고 함께 신앙 생활을 하는 교우이기도 하였다. 로터리클럽을 비롯하여 부부가 함께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모임도 열 군데가 넘는다고 하였다. 이들 부부는 서로 자신의 삶을 깊숙이 나누며 살아왔기에 정순자씨의 상태가 남편에게는 너무나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는 자녀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정순자씨의 딸은 방문을 마치고 나오는 필자를 현관 입구의 동생 방으로 이끌더니 말했다.

“엄마는 언제나 강하시고, 집안의 모든 일을 흔들림 없이 주관해 오셨기에 마치 거대한 나무가 뿌리 채 뽑히려는 것과 같은 느낌이에요. 엄마가 쓰러지신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어요. 믿어지지가 않아요.”

딸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정순자씨의 시아버지도 베란다에서 서성거리다가 필자가 안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자 현관까지 따라 나와 좀 어떠냐고 물었다. 칠십이 넘은 노인이 며느리의 병을 걱정해서 초조해하며 “나 원 참!” 하셨다.

이런 상황에서, 그래도 현실을 가장 잘 직시하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환자 자신인 것으로 보였다. 정순자씨는 이미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고 자신의 죽음을 위해 몇 가지 이야기를 남편과 나누고 싶어하였다. 생을 마무리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고만 하면 남편이 도무지 들으려고 하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건강 식품을 여러 가지 사 가지고 와서는 억지로 먹으라고 하는데 자신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얘들 아빠와는 30여 녀간 잘 살아왔어요. 서로 대화도 잘 통하고 친하고, … 그런데 이번만은 내가 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도 자꾸 살 수 있다고만 하니 짜증이 나요. 이해가 되기는 하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자기를 이해해야 돼요? 자기가 날 이해해야 돼요?”

정순자씨는 짜증스럽게 말하면서 이렇게 아프니 딸 결혼식 때까지도 못살 것 같아 빨리 마무리를 짓고 싶다고 하였다.

며칠 후 호스피스 사무실에서 정순자씨의 남편과 만났다.

“집사람이 저렇게 될 줄은 정말이지 상상을 못했어요.”

부인과는 하루 24시간 내내 붙어 다녔기에 요즈음에 사무실에 혼자 나가 있으면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않는다고 하였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는데, 한참을 들어준 후에 물어보았다.

“부인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던데 알고 계세요?”

그는 한숨을 푹 쉬더니 부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데, 막상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 그것이 현실화될까 봐 두렵다고 하였다. 자신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녔다고 했다. 병원에서 못 한다니 민간요법이라도 없을까 하여 몸에 좋다는 것은 다 사왔는데 부인이 먹지를 않아서 지금도 냉장고 안에 그대로 있다고 하였다. 느릅나무잎 달인 물, 토룡탕, 인삼환… 또 누가 홍콩에서 가져왔는데 이런 환자에게 먹이면 좋다고 해서 100만원도 넘게 주고 사온 것도 있는데 그건 아무래도 속은 것 같다고 하면서 부인이 그런 것들은 먹지도 않으니 자신의 속이 탄다고 하였다. 정순자씨의 남편은 필자에게 자신이 사다 놓은 그런 민간 요법들을 시행해도 좋은지 물었다. 좋다고 허락해주면 자신도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다고 하였다. 어떻게든지 먹여보려고 하는 남편의 마음이 찡하게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환자가 이미 복강 내에 암세포가 퍼져 있는 상태이며 장폐색이 올 수도 있음을 설명하고 부인이 먹을 수 있는 만큼만 주라고 하였다. 환자가 못 먹겠다면 억지로 주지 말고 먹을 수 있다고 하는 만큼만 주는 것이 좋겠다고 당부하였다.

그 다음에 정순자씨를 방문하였을 때, 그녀는 필자를 보자마자 말했다.

“최 선생님 덕분에 애들 아빠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했어요. 이제는 속이 시원해요. 이젠 죽어도 괜찮아요.”

정순자씨가 남편에게 한 이야기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병원 영안실에서 장례식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급적 집에 오래 머물고 싶다고 하였다.

“가능한 오랫동안 가족과 함께 있고 싶어요. 집에 있다가 죽음이 임박하면 병원에 가서 바로 장례식을 영안실에서 치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언제 병원으로 옮기면 좋은지는 최 선생님이 좀 알아서 이야기해 주세요.”

둘째는 묘지에 관한 것이었는데, 선산이 아닌 교회 묘지에 묻히고 싶다고 하였다. 이유는 선산이 너무 멀고 골이 깊어서 싫다고 하였다. 또한 자신이 사업하느라고 맡겨진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잡사’로 살아왔기에 죽어서나마 찬송 소리가 들리는 교회 묘지에 묻히고 싶다는 것이었다.

셋째는 자신이 죽어도 시골에 계신 친정어머니께 알리지 말아 달라는 부탁인데, 대신 막내아이 학업을 위해 데리고 미국에 갔다고 말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환자의 목숨이 언제 끊어질지 정확하게 예측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정순자씨가 원하는 것처럼 그렇게 정확하게 타이밍을 맞출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또한 남편이 알아본 결과 정순자씨가 다니는 교회는 묘지를 조성한 지가 오래 되어 이미 다 분양되고 쓸 만한 자리가 없다고 했다. 더구나 정순자씨 남편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가장 사랑해 주시는 장모님께 사실대로 말씀 드리지 못한다면 자신은 아내가 떠난 후 다시는 처가에 갈 수가 없을 거라고 하면서 난감해 했다.

“장모님이 가장 사랑하는 사위가 바로 접니다. 저도 장모님을 의지하구요. 집사람이 없는데 가장 가깝게 여기며 의지하는 장모님께 달려가 울 수도 없다면 나는 도대체 어쩌라는 말이에요? 우리 집사람이 해도 너무 하는 것 같아요.”

정순자씨로서는 연로하신 어머니가 병이라도 날까 봐 현재의 상태도 알리지 않고 있는데 만일 죽었다는 사실을 알린다면, 충격을 받아 어머님마저 돌아가실 것이라는 우려에서 알리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으나 세 가지 모두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어쨌든 정순자씨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 할 수 있어서 후련하게 생각하였고 반면에 정순자씨의 남편이나 필자로서는 쉽지 않은 숙제들을 떠맡게 된 셈이었다. 그리고 정순자씨는 남편이 권하는 민간 요법들을 처음에는 조금씩 먹어 주는 듯했으나 차차 안 먹게 되었고 남편이 그에 대해 무어라고 하자, “당신이 내게 해줄 수 있는 건 음식이나 약이 아니라 조용히 내 얘길 들어주고 나와 함께 공감해 주는 거예요” 하며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하였다. 이 무렵 정순자씨의 상태는 인공 항문의 끝부분이 벌겋게 외부로 돌출되어 있었고 변도 잘 나오지를 않아서 3~4일에 한 번 정도 관장을 하고 있었다. 통증은 약을 바꾸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나자 후련해져서 그런 대로 잘 조절이 되고 있었다.

한편, 딸의 결혼 준비는 교우들의 도움과 사돈 될 분들의 이해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는데 정순자씨는 “달이 결혼하는데 내 손으로 해주고 싶은 것도 많지만 못하니 답답해요. 그렇지만 어쩌겠어요? 할 수 없지요” 하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결혼식을 위하여 당사자들과 사돈댁, 그리고 교우들의 도움이 있었으나 정순자씨가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일부 호스피스의 몫이기도 하였다. 정순자씨의 상태를 잘 조절해서 당일에 결혼식하는 동안에는 식장에 앉아 있을 수 있어야 하니까 미리 이에 대해 의논을 하고 준비를 하였다. 결혼식날 입을 옷과 가발, 몇 시에 식사를 하고 몇 시에 약을 먹을 것인지, 누가 모시고 가고 모셔올 것인지 등에 대해 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정순자씨는 집에서 준비하고 있다가 식이 시작하기 직전에 도착하여 참석하고 결혼식이 끝난 후에는 바로 돌아오기로 하였다. 또 휠체어를 사용하기로 하여 호스피스 사무실 창고에 있던 것을 미리 가져다가 준비하였다. 결혼식 당일 날 아침에 전화를 했더니 정순자씨는 밝은 목소리였다.

“오늘은 웬지 기분이 좋아요. 결혼식을 잘 치를 것 같아요.”

다른 환자 방문 일정으로 인해 그날 정순자씨 딸의 결혼식에 가지는 못했으나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신경이 쓰였다. 사실 결혼식에 참석한 정순자씨가 잘 감당하고 있는가 하는 것보다는 집에 돌아온 후에 잘 견딜 수 있을 것인가가 더욱 문제였다. 그래서 정순자씨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쯤 전화를 했더니”기도해 주신 덕분에 잘 치루었어요. 감사해요” 했다.

그러나 저녁 무렵에 방문했을 때는, “막상 딸이 결혼하고 나니 집이 텅 빈 것 같고 못 살겠어요. 24시간 옆에서 손발이 되어 주던 애가 가고 나니…” 하며 한숨을 쉬었다. 딸을 잘 보낸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딸의 입장을 생각하며 어머니 살아 계실 때 결혼을 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또 정순자씨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눈으로 딸 결혼하는 것을 보는 것이 더욱 안심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딸을 보내고 난 저녁 해질 무렵에 혼자 있는 정순자씨의 마음은 자신의 건강 상태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서 자기 연민에 빠지고 있었다. 정순자씨의 곁에는 이제 누구라도 한 사람은 있어 주어야 할 형편이데 딸이 없으니 대책이 필요했다. 우선 낮에는 큰 아들이, 저녁에는 남편이 조금 일찍 들어와서 같이 있어 주기로 하였다. 아들은 휴학할 생각을 하고 수업을 빠진 채 낮에도 어머니 곁에 있겠다고 하였다. 정순자씨를 생각하는 가족들의 사랑이 아름다웠다. 함께 있는 동안 딸과 사위로부터 신혼여행지에 잘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그들도 어머니가 걱정되어 도착하자마자 전화를 한 것이었다. 딸과 반갑게 통화를 하고 난 후 마음이 이렇게 무거워질 줄은 자신도 몰랐다고 하였다.

정순자씨의 심정의 변화를 보며 이날 밤에는 통증 조절을 위한 보조약제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PRN처방(필요하면 쓰도록 의사가 미리 내어놓은 처방) 중에서 진통제와 항울제를 찾아주고 평상시 복용하던 약을 먹고도 통증이 조절되지 않으면 추가로 복용하도록 알려주었다. 정순자씨는 그날과 다음날 통증이 평소보다 심하여 보조 약제를 복용하였는데 딸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은 복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딸을 만난다는 기쁨 때문에 정순자씨의 무드가 상승되면서 통증을 느끼는 정도가 낮아졌기 때문이었다. 정순자씨의 이러한 변화는 평소 알고 있던 “우울 정도가 높으면 통증 정도도 높아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었다. 딸 부부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올 시간쯤에 정순자씨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딸이 전화를 받았다. 신혼여행을 가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남편과 의논하여 전처럼 어머니를 옆에서 돌보아 드리기로 하였다고 했다. 사위가 불편하겠지만 정순자씨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결혼식이 끝나자 정순자씨의 남편은 이제 본격적으로 장지 문제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이들 부부가 다니던 교회의 묘지는 이미 분양이 다 끝난 상태였다. 묘지를 조성한 지가 오래 되어서 남아 있는 자리는 햇빛도 잘 안 들어오고 바닥에 물이 차는 자리라고 했다. 정순자씨의 남편은 손자 자리까지 많은 면적을 분양해간 장로 한 분을 찾아서 한 자리만 자신들에게 분양해 달라고 했으나 거절하더라고 했다. 상심한 남편은 대안으로 선산과 서울 집의 중간 거리쯤에 야트막한 야산을 하나 사서 새 가족묘지로 조성할 생각을 하고 땅을 알아보러 다닌다고 했다. 그러나 정순자씨는 남편의 의견에 반대했다. 자신은 교회 묘지에 묻히고 싶은 것이지 새로운 가족 묘지를 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이 무렵, 하루는 정순자씨의 남편이 필자를 좀 보자고 하였다. 호스피스 사무실로 찾아온 정순자씨의 남편은 필자를 보자마자 대뜸 “세상에 이럴 수가 있어요?” 했다. “네?” 하고 되묻는 필자에게 “글쎄, 우리 집사람이 선산에 안 가겠다는 이유가 알고 보니 아버님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라고 하지 뭡니까!” 했다. 그 동안 매장지에 대해서 이래도 싫다, 저래도 싫다 해서 왜 그런가 하였더니 시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에 그렇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정순자씨의 남편은 상기되어 있었다.

“우리가 결혼한 지 7년쯤 되었을 때, 아버님께서 가산을 다 정리하여 어머님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셨어요. 저한테 한 마디 상의도 없이요. 그때 아버님 말씀은 ‘이제 함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라고 하셨어요. 저도 놀랬어요. 근데 우리 집사람은 그 일을 아버님과 내가 미리 의논하고 자기한테는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했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아니라고 했는데도 안 믿는 눈치더라고요. 그 땐 나도 사실이지 참 당황이 됐어요. 근데 뭐 어쩝니까? 부모고, 또 내가 외아들인데 도로 가시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그날 이후로 모시고 함께 살았지요. 오신 담에, 그 땐 우리도 어려웠으니까요. 집사람과 아버님이 같이 장사를 했어요. 구루마 끌고 다니며… 그때 집사람이 고생 많이 했지요. 아버님도 하셨지만, 한 5년 같이 하다고 그 담엔 나하고 같이 사업을 해왔지요. 그런데 집사람은 아직도 그때 일을 내가 집사람한테 미안해서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고 믿고 있는 거예요, 글쎄.”

정순자씨의 남편은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처음엔 정순자씨가 이유를 이야기 안 해서 몰랐는데 알고 보니 그렇더라고 하면서 설사 언짢은 일이 있더라도 사람이 죽음 앞에서는 다 풀고 정리하고 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였다. 자신도 전에 누구에게 크게 손해를 당한 적이 있었으나 2년이 지난 뒤에는 다 용서하고 화해하여 그 이후로는 형님, 아우 하면서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정순자씨의 남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산 사람도 용서하는데 죽을 사람이 다 용서하고 가야 되는 것 아닙니까?”

평생을 아내와 함께 살아오면서 아내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고도 했다. 그러서는 대상이 자신의 부친인 만큼 당혹스러웠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용서란 인위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날은 정순자씨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정순자씨가 선산에 묻히지 않으려는 이유를 알았다고는 해도 본인이 직접 필자에게 말한 것이 아닌 이상, 아는 척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순자씨 남편의 마음이 몹시 아픈 것을 알지만,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제삼자인 필자로서는 다만 이 부분에 대해 관여해 주시도록 기도할 수 있을 뿐이었다.

여름이 가고 계절이 바뀌면서 정순자씨의 기력은 차츰 떨어지고 있었다. 정순자씨는 그 와중에도 아들 걱정을 하며 말했다.

“전에 인삼을 많이 먹기는 하였으나 이제는 내가 느끼기에도 하루 하루가 달라요. 내 힘으로는 견딜 것 같지가 않아요. 위에서 도와주셔야 가능할 것 같아요. 막내아이가 시험 볼 때까지 살아야지 그 전에 무슨 일이 생기면 걔가 어떻게 시험을 제대로 볼 수 있겠어요. 또 막내는 아직 내가 죽는다고 생각 안 해요. 말 안 했거든요. 그저 ‘엄마가 아프구나’ 그 정도지 곧 죽을 거라는 걸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시험 전에 죽을 수가 있겠어요? 기도해 주세요.”

정순자씨는 이미 장폐색이 와서 입으로 먹은 것이 아래로 거의 나오지를 않았다. 소변도 줄어들었고 관장을 해도 거의 나오는 것이 없었다. 복부 팽만이 있기는 했으나 갈증을 느끼는 며느리에게 시어머니는 식혜를 만들어 차게 하였다고 주셨는데 정순자씨는 국물만 마시고는 옆에 준비해둔 비닐봉지에 대고 토하곤 하였다. 그렇게만 해도 훨씬 시원하고 견딜 만하다고 했다. 정순자씨는 필자에게 마음에 있는 말을 다하곤 하였는데 어느 날은 이렇게 말했다.

“최 선생님이 오시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할 수가 있어서 마음이 편하고 고마워요. 이제는 큰아이도(장남) 다 아니까, 마음 놓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아주 편하고 좋아요.”

정순자씨 자신이 죽음에 대해 개방적인 인지 태도를 가지고 있고 가족들이 이에 호응을 하니까 정순자씨로서는 부담 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가 있었다. 큰아들도 꼭 필요한 만큼만 수업을 듣고 웬만하면 일찍 들어와 자주 어머니 곁에 함께 있으려고 애를 썼다. 어느 날은 가니까, “오늘 아침에는 큰아들이 다 씻겨주고 갔어요. 잘 해줘요. 엄마 때문에 맡고 있던 회장직도 다 그만두고 돌보아 주니 감사하지요.” 했다. 그때까지 정순자씨의 가족들은 고3인 막내에게는 정순자씨의 병황을 알리지 않고 있었는데 “오늘 막내에게 알려 주려고 해요” 하고 말했다. 가족들이 모두 정순자씨의 상황을 알고 있었으나 막내는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아무도 해주지 않았다고 했다. 어머니가 계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막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틀 뒤에 방문해 보니까 정순자씨는 쇠약한 중에서도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막내가 다 컸어요. 제 형이 말했는데 울지도 않고 오히려 엄마를 위로하려고 해요. 전화도 몇 번씩 걸어서 어떠냐고 묻고 생각보다 너무 의젓해요. 놀랬어요.”

정순자씨의 가족은 모두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호스피스에 가입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정순자씨의 장남이 “우리 식구들이 전에는 정기적으로 함께 가정 예배를 드렸었는데요. 요새는 안 해요. 아니 못하는 거지요” 했다. 그 이유는 어머니가 말기 상태인 것을 알고부터는 함께 찬송을 부르면 정순자씨가 자구 우니까 가족들도 울게 되어 환자에게 해로울까 봐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는 것은 슬픔을 표현하는 자연스러운 방법이다. 자신 혹은 가족의 다가올 죽음을 바라보면서 미리 슬퍼하는 일은 가족이 함께 나눌 수 있는 아주 자연스럽고 건강한 기회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해로운 일이 아니라고 알려주고 단지 그 때문이라면 다시 예전처럼 가정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정순자씨 가족은 전에 해오던 습관대로 가끔씩 모여 가정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찬송을 부르다가 정순자씨가 울면, 아들도 울고 딸도 울기는 하지만 그러면서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어느 날은 오전에 방문을 하였는데 정순자씨가 원하여 큰아들과 딸, 시어머니와 함께 예배를 드리는 자리에 필자도 참석하게 되었다. 그날 함께 읽은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중략)…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밪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게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주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중심으로 용서하라’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정순자씨는 이 내용을 가족들이 돌아가며 읽는 것을 잠잠히 듣고 있다고 문득 고개를 들고는 어눌한 말소리로 누구에게인지도 모르게 “나 보고 용서하라고?” 하였다. 필자를 비롯해 모여 앉은 사람들이 모두 정순자씨를 쳐다보았다. 정순자씨가 고개를 끄덕여서 우리들은 다시 한 번 그 부분을 읽었고 예배를 끝마쳤다. 정순자씨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그걸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시켜야 될지 생각 중이라고 하였다. 내용이 마음에 와 닿은 모양이었다.

그 주 내내 정순자씨는 물이나 차게 한 식혜 국물을 마시고, 토하고 했다. 힘들어 보였는데, “아이 시험 때까지 살려고 이렇게 먹고 있어요.” 하였다. 그래도 차게 한 식혜 물을 마시면 일시적이나마 시원하기는 하다고 하였다. “시간은 사람의 손에 달린 게 아닌 것 같다”고 말씀 드리자 영리한 그녀는 “내 고집만 부리지 말라고?” 하였다. 사실 그 무렵 정순자씨의 몸은 거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여서 얼굴은 마치 해골과 같은 모습이었다. 살이 빠지고 수분이 빠져서 앙상해 보였다. 옆에 있는 딸도 지친 것 같았다. 거의 24시간을 어머니와 같이 있는데 가끔 신혼 집에 가서 청소만 해놓고 온다고 했다.  아들 시험 볼 때까지라고 본인이 시한을 정해 놓고 있기는 하지만 정순자씨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막내아들의 시험은 한 달 이상 남아 있었고 묘지도 아직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물론 친정어머니께는 아직 정순자씨가 아프다는 사실도 말씀을 못 드렸다고 하였다. 정순자씨의 목소리가 어눌해졌기 때문에 남편이 가끔 전화를 걸어 근황(정순자씨의 상태는 빼고)을 말씀 드리고 “아무래도 막내가 공부를 못해서 에미가 미국에 데리고 가야 할 것 같아요”라며 뜸을 들이고 있다고 했다. 정순자씨의 친정어머니는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에미가 전화 한 통도 못하냐?” 하며 섭섭해 하시더라고 했다.

그러던 중에 정순자씨 부부와 가장 가깝게 지내는 친구 부부가 방문을 하였다. 두 주 만에 보는 정순자씨의 얼굴이 너무 달라 보인다며 친구 부부는 눈시울을 적셨다. 낮 시간이라 막내와 정순자씨의 남편이 빠지기는 했으나 정순자씨는 친구 부부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싶어 하였다. 정순자씨가 좋아하는 찬송을 함께 한 곡 부르고, 또 친구 부부와 딸과 큰아들이 좋아하는 찬송도 한 곡씩 함께 불렀다. 그날의 말씀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벧전 5:7)’는 내용이었다. 필자의 마음에 ‘어쩌면 이것이 정순자씨가 돌아가시기 전에 드리는 마지막 예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정순자씨에게 염려되는 것이 있으면 그분의 자애로운 얼굴과 손을 상상하면서 한 가지씩 맡기도록 권하였다. 정순자씨는 친정어머니와 막내, 그리고 묘지에 대한 염려를 맡겼노라고 했다. 그 다음으로 가족들에게는 정순자씨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한 마디씩 하라고 하였더니 시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에미야, 넌 좋은 며느리였다. 전에 우리가 갑자기 올라온 것은 네 아버지가 ‘이제는 아들과 함께 살아야겠다’ 고 정하셨기 때문이야. 나는 ‘애들(정순자씨 부부)에게 말한 후에 다음 명절 때 가자’고 했으나 네 아버님이 ‘아, 부모 자식 사이에 말하고 말고 할 것이 뭬 있어? 외아들인데 당연히 함께 살 줄로 알 것 아니여? 칠 년이나 저들끼라 살았으면 이제 함께 살 때도 되었어’ 하여서… 아범두 전혀 몰랐을 거여. 아들은 그렇다 치고 너한테 미안했어. 막상 서울로 올라와서 그 좁은 단칸 방에서 함께 있을라니까 참, 말이 아니었지이. 에미 니가 아부지허거 그 힘든 장사도 하고… 억척같이 살았지이. 그간 오해가 있었다면 풀어 버려, 에미야.”

시어머니는 정순자씨를 보다가 필자를 보다가 하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었다. 다음에는 딸이 말을 하였다.

“엄마, 엄마가 우리를 이렇게 잘 키워 주셔서 감사해요. 아프신데도 결혼도 시켜 주시구… 막내도 이제 다 컸어요. 그리고 우리가 엄마 가신 후에도 막내한테 신경 쓸게요. 막내 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딸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졌다. 큰 아들은 울음을 참으면서 말했다.

“나는 만일 엄마가 돌아가신다 해도 그건 돌아가시는 것이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들 마음 속에 언제나 엄마를 생각한다면, 엄마는 늘 우리 곁에 계시는 거잖아요. 엄마가 하시던 말씀을 기억하고 엄마가 원하시는 대로 우리가 살면, 엄마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거라고 믿어요.”

모두들 울고 있었다. 정순자씨는 시어머니에게, 어른들도 계신데 먼저 가서 죄송하다고 하면서 “어머님이 계셔서 저는 안심하고 가요” 했다. 딸에게는 결혼 생활 잘 하도록 당부하고 자신이 떠나고 나면 당분간 아버지한테도 신경 좀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아들에게는 “네가 장남이니 이 집안을 잘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하면서 어른들을 위로해 드리고 동생에게도 마음을 써주리라 믿는다고 하였다. 정순자씨는 식구들에게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아주 헤어지는 것이 아니야” 했다. 얼마 동안일지는 모르지만 다시 만나게 될 거니까 그때까지 믿음 잘 지키라고 당부하였다. 친구 부부에게도 이렇게 참석해 주어서 고맙다고 하면서 자신이 없더라도 남편과 자녀들에게 지금같이 관심 가지고 옆에 함께 있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친구 부부의 얼굴에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남편 쪽이 먼저 아주 감동을 받은 얼굴로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아름다운 예배는 처음 봐요. 신앙 생활을 몇 십 년 해왔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 봅니다. 어떻게 이렇게 슬픔 중에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지…하였다. 이어서 부인이 정순자씨에게 “그런 말씀 안 하셔도 그렇게 하려고 했어요. 우리가 당연히 그래야지요. 막내 시험 보는 날엔 우리가 태워다 줄 테니 염려 마세요” 했다. 옆에서 남편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있었다.

이틀이 지난 후에(그날은 정순자씨를 방문하기로 계획된 날이었다) 정순자씨의 딸이 흥분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선생님, 묘지 문제가 해결됐어요!” 했다. 전날 밤에 정순자씨가 다니던 교회의 장로(전에 정순자씨 남편이 묘지를 한 자리만 분양해 달라고 했을 때 거절하였던 바로 그분)가 전화를 걸어와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교회의 교우가 그렇게 원하는데 내가 아직 자라지도 않은 손자 자리까지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게 마음에 걸려서요” 하며 한 자리를 분양해 주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너무 놀랬고, 알려 드리고 싶었으나 밤이 늦어서 오늘 아침에 전화한 것이라고 하였다.

오후에 방문하여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너무나 감동적인 사연이었다. 정순자씨는 처음으로 시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분은 한이 많은 분이라고 하였다. 일제 때, 징병 대상이었는데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이유로 동생이 대신 끌려나갔고 그 이후로 동생이 돌아오지 않은 것에 대해 늘 그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자신이 갔어야 하는데 동생이 대신 가서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계신다고 했다. 그래서 술만 드시면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끝내는 눈물을 흘리고야 만다고 했다. 정순자씨는 시아버지와 함께 구루마를 끌고 다니며 몇 년 동안 같이 장사를 하였는데 장사가 잘 되는 날은 잘 되니까 즐거워서, 안 되는 날은 안 되니까 속상해서 술을 드시고는 밤새도록 푸념을 하시곤 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으나 자꾸 반복되니까 너무 견딜 수가 없어서 그만두고 남편과 함께 동업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웃집 할아버지라면 용서할 수도 있으나 같은 식구니까 그게 어렵더라고 했다. 살아서 함께 사는 것만 해도 힘이 드는데 죽어서까지 그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고 했다. 자신의 신앙이 부족하여 교회 묘지에 묻히고 싶다고 했지만 그보다는 시아버님과 같은 장소에 묻히고 싶지 않은 것이 더 큰 이유라고 솔직하게 말하였다. 선산에는 부모님 자리 아래에 정순자씨 부부의 묏자리가 마련되어 있는데 지금은 아버님이 살아 계시지만 이 다음에 돌아가시면 정순자씨 부부의 바로 윗자리로 오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누군가 성묘 와서 술이라도 한 잔 부으면 또 다시 푸념을 하실 것이 자명하므로 안 가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 집 양반은 외아들이고 또 자기 아버지니까, 선산으로 가기를 원하지요” 했다. 정순자씨 남편에게서 들은 바와 같이 정순자씨의 묘지 문제는 시아버지와 맞물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번 용서에 대한 말씀을 들을 이후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던 정순자씨가 시아버님을 용서하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이었다. 어제가 마침 시아버님 생신이어서 식탁에 생신 상을 차리게 하고는 부축을 받아 정순자씨도 식탁에 앉았다고 하였다. 그 자리에서 정순자씨가 아버님의 생신을 축하하면서 용서한다고 말씀을 드렸으며 시아버지께서도 미안했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씀을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시켜야 될지 생각 중이라고 하더니 생신날을 택해 그렇게 한 모양이었다. 이 일로 인해 그 동안 찌푸려 있던 정순자씨 남편의 마음도 펴졌는지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놀라운 일은 또 있었다. 그 동안 필자는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정순자씨에게는 늘 속을 썩여온 시누이가 하나 있었다고 했다. 부부가 함께 툭하면 정순자씨의 집에 찾아와 손을 내밀곤 했는데 포장마차라도 하나 하라고 목돈을 주어도 다 써버리고는 얼마 후에 또 찾아오곤 하여 집안의 골칫거리였다고 하였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하여서 심지어 정순자씨의 딸조차도 “엄마, 고모 일을 잊어버려요. 그런 사람은 용서 안 하고 가도 하나님이 뭐라 않으실 거예요”라고 말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며칠을 곰곰 생각하던 정순자씨는 그 시누이를 오라고 했고 어제 오후에 다녀갔다고 했다. 정순자씨는 그 시누이를 오라고 했고 어제 오후에 다녀갔다고 했다. 정순자씨는 그 시누이에게 그 동안 속 썩인 거 용서한다고 말하고는 마지막 남은 돈 몇 백만 원이 든 통장과 도장을 주면서 “이게 내가 도울 수 있는 마지막이에요. 이제는 더 이상 내게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이걸로 무언가 돈벌이 될 일을 하세요”라고 말하였다고 했다. 이를 본 시누이가 엉엉 울면서 “언니, 미안해요!” 하더라고 했다. 옆에서 딸도 울었고, 시어머니는 시누이를 끌어안고는 눈물만 흘리시더라고 했다. 그날 밤에 자려고 하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려서 받아보니 그 장로(전에 정순자씨 남편이 묘지를 한자리만 분양해 달라고 했을 때 거절하였던 바로 그분) 였다. 이제 그분의 마음이 바뀌어서 교우 중에 그토록 교회 묘지에 묻히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가 손자 자리까지 가지고 있다는 게 너무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분양해 드리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이다.

정순자씨가 교회 묘지에 묻히고 싶다고 그토록 소원하였어도 자리가 나지 않더니 이제 시아버지와 시누이를 용서한 정순자씨가, 정 자리가 없으면 선산에라도 가겠다고 마음을 정한 이 시점에 갑자기 묏자리가 생기다니! 그 동안 묘지 문제 때문에 정순자씨의 남편이 서울 근교와 대전 근방까지 여러 군데의 땅을 보러 다녔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일이었다! 정순자씨 가족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용서’ 에 관한 말씀과 함께 읽었던 구절이 생각났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그 날 정순자씨는 “나는 이제 하고 싶은 것 다했어요. 딸의 결혼식에 잘 참석했던 것도 은혜예요. 묘비가 결정된 것도 감사하고… 최선생님이 옆에 계셔서 내게는 심적으로 정말 큰 위로가 됐어요. 이제 막내아이 문제만 해결하면 돼요”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딸이 주저하다가 “막내 때문이라면 지금 떠나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딸의 생각은 아직 시험이 4주나 남았는데 만일 정순자씨가 견디지 못하고 시험에 임박해서나 혹은 시험 당일에 떠난다면 어쩌면 막내가 시험 자체를 못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지금 떠나면 장례식을 하고 마음을 조금 추스린 다음에 시험을 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그리고 만일 재수를 하게 된다면 자신이 뒷바라지할 것을 약속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제 묘지 문제도 해결되었으니 막내아들 문제만 아니라면 정순자씨로서는 거리길 것이 없는 상태이기는 했다. 이미 정순자씨의 몸은 서서히 임종 과정을 시작하고 있었다. 필자가 이틀 후에 방문할 것을 약속 드리며 혹시 그때 못 만나도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 아느냐고 묻자 정순자씨는 바삭 마른 얼굴을 찡그리듯 펴면서 말했다.

“그럼요. 천국에서 만나지요. 날 천국에 넣어 주시는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데요. 은혜지요.”

이틀 뒤 정순자씨는 소천하였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 아직 숨이 붙어 있었으나 정순자씨의 남편이 병원으로 옮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자녀들도 “이 상태로 조금 더 어머니와 함께 있고 싶다” 고 하여 그대로 두었다. 큰아들이 어머니의 등을 가슴으로 받쳐 안고 있었고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순자씨는 그렇게 하늘나라로 옮겨갔다. 매우 밝고 빛나는 얼굴이었다. 호스피스에 가입한 지 82일 만이었다.

“안녕히 가세요. 정집사님. 이 다음에 다시 만나요.”

 

 

남편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으며 떠난 유방암 말기 환자

“그래도 그 때가 신혼이었어요”

강영실씨(52세, 여)는 유방암 말기 환자였는데 처음에는 가정 호스피스에 가입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대학 교수님의 소개로 말기 환자인데 어디 조용한 곳에 가 있고 싶어하니 연결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고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었다. 그런데 1주일쯤 지나 강영실씨의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곳이 멀고, 또 자리(bed)가 없어서 대기 환자 명부에 이름만 올려놓고 기다리라고 하는데 그 동안만이라도 가정 호스피스에서 방문하여 도와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한두 번 정도 방문하여 조언해 준다는 마음으로 갔었는데 환자와 가족의 마음이 바뀌어 아예 우리 환자로 등록하여 끝까지 보살핌을 받았다.

강영실씨는 유방암 진단을 받은 지 4년 되었다고 했는데 호스피스에 가입할 당시는 폐와 골 전이는 물론이고 뇌에도 전이가 되어 왼쪽 눈이 감으면 안 떠지고 뜨면 못 감는 상태에 있었다. 스스로 떴다 감았다 하지를 못해서 낮에는 안대(眼帶)를 하고 있거나 렌즈를 끼고 있어야 했다. 통증 조절도 잘 안 되어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데 처방 받은 약의 사용법을 잘 몰라서 그랬던 것이었다. 진통제의 올바른 사용법을 알려주고 이틀 정도 효과를 측정해보니 통증이 잘 조절되었다. 처방에 따라 1주일에 두 번씩 링거 주사도 주었는데 마침 우리 호스피스 팀의 의사 부부가 강영실씨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어서 그분들이 퇴근 후에 종종 들러 도움을 주었다. 또, 같은 아파트에 사는 강영실씨의 교우 중 호스피스 교육을 받은 분들이 있어서 1주일에 두 번 정도 방문해 주기로 했다. 강영실씨 부부는 고급 인력인 호스피스 팀 요원들이 무료로 자신들의 집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실제적인 도움을 준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였다.

강영실씨의 집에는 강영실씨를 제외하고는 남자들만 살고 있었는데, 최근에 실직한 남편과 대학 2학년인 큰아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인 작은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강영실씨는 자신의 병황에 대해 남편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지하고 있었던 그녀는 고3인 아들의 대학 입시에 가장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자신은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마지막 시간을 혼자서 조용히 보내다가 죽고 싶다고 하였다. 강영실씨는 기도원은 의료 시설이 아니라서 말기 상태인 자신이 가 있기에는 부담이 크고, 자신과 같은 환자들을 받아주는 간호요양소(nursing home)와 같은 곳이 있다면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잘 구성된 가정호스피스 팀의 도움을 받고 보니 그냥 집에 있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면서 신청해 놓은 기관에 자리가 생겨도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처음에 강영실씨가 집에 있고 싶어하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남편과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 때문이었다. 남편의 실수(외도)를 용서할 수 없었던 강영실씨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남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더구나 죽어가면서 그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아서 집을 떠나 있으려 했다는 것이었다. 강영실씨는 남편이 생활력이 약해서 자신이 많이 노력해 왔다고 하면서 현재 살고 있는 집도 자신이 장만한 것이라고 하였다. 강영실씨의 집을 방문하면서 보니 때로 강영실씨가 남편에게 몹시 짜증을 부리고 그러면 남편은 민망하여 얼굴을 붉히곤 했다. 남편 말로는 부인의 성격이 지나치게 반듯해서 벗어난 것은 절대 용납을 못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남편의 실수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하지만 강영실씨의 남편은 강영실씨를 몹시 사랑하고 있었다. 강영실씨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려고 애를 썼고, 때로는 싫은 소리를 들으면서도 부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려고 했다. 대학생인 아들도 웬만하면 집에서 아버지와 교대로 어머니를 돌보려고 하는 모습이 옆에서 보기에 아름다웠다. 입시생인 막내아들은 학교와 전공을 놓고 저울질을 하고 있었는데 강영실씨는 누워 있으면서도 그 문제에 대해 아들보다도 더욱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쓰고 있었다. 1차로 지원한 곳은 다 탈락되었고 이제 적당한 곳을 골라야 하겠는데… 하며 고심하고 있었다. 강영실씨의 몸은 아주 말랐고 뇌전이로 인해 가끔씩 이상한 소리를 하기도 하였다. 그런 중에서도 강영실씨는 여러 가지를 꼼꼼이 따져본 후에 막내아들이 지원할 학교와 학과를 세 군데 골라주었다. 남편과 당사자인 막내아들도 동의를 해서 그렇게 지원을 하기로 했다.

그 무렵 하루는 강영실씨의 얼굴이 밝고 기쁨에 차 있어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했더니 “글쎄, 제가요. 오늘 동태찌개를 다 먹었어요” 했다. 강영실씨가 평소에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동태찌개라고 했다. 입맛이 없어졌어도 옛 맛이 생각나곤 했는데 마침 오늘 옆집에 사는 호스피스 자원봉사자가 저녁 찬으로 동태찌개를 끓였는데 좀 먹어보라고 하며 가지고 왔더라 는 것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기분이 좋다고 하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 자원봉사자가 가지고 온 것은 한 공기 정도였고, 강영실씨가 먹은 것은 세 숟가락이었는데(그나마 국물만 먹고 건더기는 뱉어냈다고 했다) 그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환자가 기뻐하니 가족도 기뻐하고, 환자가 기분이 좋아 웃으니 가족도 웃고 있었다.

사실 가정 주부에게 있어 찌개 한 공기는 큰 것이 아니다. 이렇게 작은 친절과 배려가 죽음을 앞둔 한 사람과 그 가족에게 이토록 큰 기쁨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호스피스 자원 봉사는 거창한 것이 아님을 다시 배우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강영실씨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없었으면 그날 저녁의 찌개 한 공기는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처럼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없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역시 호스피스 자원 봉사는 정성을 다해야 하는 큰일이 아닌가 하는 상반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강영실씨는 그날 자신이 먹고 싶었던 음식을 먹었다며 그렇게 좋아하였으나 다음날부터 기력이 쇄 해지기 시작하였다. 잠자는 시간이 길어지고 문득 헛소리를 하는가 하면, 혈압도 떨어졌다. 다음날은 가족들이 원해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아마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실제로 그것이 살아 있는 강영실씨와 가족들이 함께 드린 임종 예배가 되었다. 그날은 강영실씨가 평소에 즐겨 부르던 찬송을 부르고, 그녀의 남편이 즐겨 읽는 말씀을 함께 읽었는데 마지막에 가족들을 둘러보면서 강영실씨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하라고 권해 보았다. 대학생인 큰아들은 “엄마! 엄마 없어도 내가 동생 잘 돌볼게요. 그리고 엄마가 선택해 주신대로 지원서 내도록 내가 옆에서 도와줄 거예요” 하고 약속했다. 강영실씨의 눈이 웃고 있었다. 둘째 아들은 “엄마, 엄마가 그 동안 우리들에게 교훈하신 대로 지원서 낼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했다. 작은 아들이 말하면서 울자 강영실씨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지막으로 남편은 “여보, 사랑해! 그 동안 내가 철없는 행동으로 당신 마음 아프게 했던 것 미안해요. 용서해 주구려” 하고 부인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강영실씨의 눈가에서도 눈물이 방울 져 흐르더니 허공으로 손을 내밀었다. 바싹 말라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손이었다. 이미 혀가 말려 들어가서 말을 잘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남편이 아내의 내민 손을 잡으며 “여보, 고마워. 당신이 있어 주어서 고마웠는데 난 이제 어떡하지?” 하며 울었다. 남편과 아내의 손이 공중에서 맞잡아졌고 남편뿐 아니라 강영실씨도 남편의 손을 꽈악 움켜쥐는 것이었다. 남편은 다른 한 손으로 강영실씨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당신과 함께 한 시간들이 행복했어요. 이 다음에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애들 걱정은 말아요. 당신이 한 것만큼은 못하겠지만 내가 최선을 다해 돌볼게요.”

강영실씨는 눈으로 끄덕이는 시늉을 했다. 아이들도 강영실씨의 손을 잡으며 “엄마-” 하고 오열을 터뜨렸다. 그 외에도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조금 더 나누었고 강영실씨는 필자에게도 손을 내밀어 주었다. 강영실씨의 손을 잡아주고 마지막 인사를 한 다음 강영실씨의 집을 나왔는데 그때가 밤 10시 20분이었고 강영실씨는 다음날 새벽에 평화로이 소천하였다. 가족들이 다 옆에 있었고 잠자는 듯이 돌아가셨다고 전해 들었다.

나중에 강영실씨의 남편은 유가족 모임에 와서 그때를 회상했다.

“집사람이 아파서 누어 있던 몇 달 동안 말이지요. 일으켜라, 눕혀라 하며 요구가 많았고, 또 그 요구에 응하느라고 힘은 몹시 들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때가 신혼이었어요. 결혼해서 신혼여행 다녀온 이후로 그렇게 하루 24시간을 종일 함께 있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집사람이 가고 난 후에,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편안했어요. 외롭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면 빙그레 웃어지기도 하구요.”

그가 최선을 다해 부인을 돌보았던 일이 오히려 사별 후 자신의 재적응에 도움이 되고 있었다.

 

 

천국이 보인다며 떠난 폐암 말기 환자

“천국이 보여?”

송영식씨는 58세 된 폐암 말기환자였다. 누이동생이 인터넷 홈페이지를 보고 호스피스 사무실로 전화를 해서 가입하게 된 경우였다.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3개월 정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고 하는데 그 후로도 14개월이나 지나서 호스피스에 가입한 것이었다. 비탈진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계단을 올라가서 2층에 집이 있었는데 송영식씨는 그 집의 작은 방에 누워 있었다.

처음 만난 송영식씨는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민머리에 커다란 눈을 사람같이 순하게 뜨고 있는 인상 좋은 아저씨였다. 전신이 너무 말라서 허벅지에도 살이 하나도 없고 뼈와 가죽만 남아 있는 것이 사진에서 본 아프리카 난민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오래 앓은 환자 같지 않게 표정이 밝았고 사람을 끄는 미소를 지으며 반기고 있었다. 환자의 질병과 관련된 이야기를 부인으로부터 들었고 간간이 송영식씨가 부연 설명을 하였다. 송영식씨는 필자의 손을 꼭 쥐면서 말했다.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 담겨 있는 눈망울이었다. 송영식씨 가족은 부인과 딸 하나, 아들 하나였다.

딸은 결혼하여 근처에 살고 있는데 가게를 하고 있어서 송영식씨가 아프기 전에는 송영식씨 부인이 딸의 가게 일을 함께 도와주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송영식씨가 아파서 눕게 된 이후로는 딸이 가게 일도 하면서 부인과 함께 송영식씨를 돌보아 왔다고 한다. 아들은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저녁에만 잠깐 얼굴을 보는 정도라고 했다. 폐암 말기 진단을 받은 후 지난 14개월 동안 송영식씨의 부인과 딸이 정성스럽게 환자를 돌보아왔으나 이제는 몹시 지쳐 있는 상태라고 하였다.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송영식씨의 부인은 “내가 너무 지쳐서 소진 상태예요. 견딜 수가 없어요” 했다. 그래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자원봉사자가 방문하여 당분간 부인이 좀 쉴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송영식씨 부부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본들이었다. 두분 다 송영식씨의 병환에 대해 알고 있었고 죽음에 대해 마음을 열고 의사 소통하고 있는지 “부르시면 가야지요” 했다. 그러나 방문을 마칠 때쯤 필자의 손을 꼭 잡은 송영식씨의 눈에는 눈물이 슬쩍 비쳤다. 마치 “잘 부탁해요”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퀴블러 로스가 쓴 ‘죽음의 시간(on death and dying)’ 이라는 책에 보면 말기 환자는 여러 가지 심리적 변화를 거치면서도 마음 밑바닥에는 항상 ‘희망’이라는 정서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송영식씨의 경우도 예외는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살아 있으니 혹사나?” 하는 마음이 있어 보였다.

두 분이 모두 종교인이었고 자원봉사자를 같은 종교를 가진 분으로 연결해 주기를 희망하였으므로 그렇게 해 주었다. 내과전문의와 함께 방문하여 환자 상태를 살펴보았고 1주일에 간호사가 2회, 성직자가 1회, 일반 자원봉사자가 2인 1조로 3회 방문하여 부인이 외출하거나 쉴 수 있도록 해주고 욕창 치료와 소변줄 관리 등을 해 주었다.

그런데 2주쯤 지나서 송영식씨의 부인이 환자를 낫게 해 줄 수 있다는 종교인을 소개받아 방문 요청을 하였다. 때로는 호스피스 봉사자나 간호사가 방문하였을 때도 그분이 와서 송영식씨 부부와 함께 장시간 살려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바람에 밖에서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환자의 수명 연장을 위한 그런 노력을 바라보면서 호스피스 팀의 일부 자원봉사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호소를 해오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송영식씨의 부인이 기도원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호스피스 팀의 의사는 송영식씨 부인의 행동은 보통사람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장례식이 끝난 후 호스피스 사무실로 먼저 전화를 걸어 온 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해가 되었다. 부인으로서는 기도원에 가지 않을 수 없었던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고 했다.

“나는 사실 우리 집 양반이 3개월밖에 못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사는 쪽으로 희망을 두고 최선을 다해 왔어요. 기도로 매달리는 것은 물론이고 먹는 것이나 수발하는 것 등 내가 할 수 있는 한 힘을 다했어요. 사실 호스피스에 가입한 후에도 그런 마음이었거든요. 그래서 그분(낫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청했던 분)도 오시라고 했고, 그런데 너무 마르고, 오랫동안 힘들어하는 우리 집 양반을 보니까 불쌍한 생각이 들었어요.” 하며 눈물을 훔쳤다.

“남편의 고생하는 모습이 너무 불쌍하고 안 되어서 차라리 데려 가시는 게 우리 집 양반에게 더 편한 거라면 데려 가시라고 했어요. 내 맘을 그 전에는 살리는 쪽으로만 먹었는데, 정말 너무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고쳐 먹은 것이지요. 그런데 내가 기도하러 간 지 하루 만에 우리 집 양반이 음식을 끊고, 기도원에서 내려온 지 이틀 만에 아주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어요.”

송영식씨의 부인이 그 상황에서 기도원에 갔던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와 신뢰 관계(rapport)가 덜 형성되어서 그만큼 깊이 있게 그녀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하였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송영식씨는 그 동안 그런대로 식사를 잘 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인이 기도원에 가고 나 후 엄마 대신 와서 돌보던 시집간 딸에게 “엄마 오시면 먹을게” 하며 식사를 안 하더라고 했다. 그날 집에 돌아와 하룻밤을 남편과 함께 보낸 부인이 다시 기도원에 가서 이틀을 있다고 내려온 날,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두 분이 방문하여서 부인과 함께 목욕을 시켜주었다. 자원봉사자들이 “목욕 언제 시켜 드렸어요?” 하고 묻자 부인이 고개를 저어서 함께 씻겨 주었다고 하였다. 깨끗이 씻기고 새로 옷을 갈아 입혀주었는데 송영식씨는 부인에게 “당신 수고 많이 했어. 고마워” 라고 하였다. 다음날은 송영식씨의 기력이 평소보다 많이 떨어져서 말로 의사 소통을 하기에는 조금 어려웠는데 갑자기 송영식씨의 큰 눈이 더욱 커지면서 신음하듯 감탄사를 내뱉으며 활짝 반기는 얼굴로 오른손을 들어 흔들더라고 했다. 그래서 부인이 “뭐가 보여?” 하고 묻자 고개를 끄덕이더라고 했다. 부인이 재차 “천국이 보여?” 하고 묻자 송영식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손 엄지 손가락을 세워 보이더라고 했다. 같은 현상이 두 번 반복해서 있었다고 하면서 송영식씨의 부인은 오른손 엄지 손가락을 세워 송영식씨가 했던 것과 똑같은 모습을 해 보였다. 그녀는 눈물을 그렁이면서 말했다.

“우리 집 양반은 반드시 천국에 갔을 거예요. 난 그렇게 확신해요. 돌아가신 모습도 어쩌면 그렇게 잠자는 아기처럼 깨끗하고 예쁜지, 아주 편안한 모습이었어요.”

그녀는 또 남편이 소천하기 이틀 전에 마지막으로 호스피스 봉사자가 가서 남편의 몸을 깨끗하게 씻겨주고 마지막까지 부인과 함께 해주었던 일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거듭 감사하다는 말을 하였다.

“안녕히 가세요.  이 다음에 만나요. 송영식씨.”

 

 

 

제2부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또 다른 세상)”

이 세상에는 보이는 세계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매일매일을 숨가쁘도록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달려가는 종착역은 어디일까? 필자는 호스피스 경험자로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아닌 또 하나의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다. 이것은 영(靈)의 세계로 보이지 않는 세계다. 인간이란 건강할 때는 보이는 세계에 치중하다가도 병이 들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생각하게 되는데 죽음에 임박한 말기환자들에게는 이 세계가 좀더 분명하게 다가온다.

2000녀도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우리 나라에서 연간(연간) 질병으로 사망하는 수는 25만 정도이고 그 중에서도 말기암으로 사망하는 사람의 수는 5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암으로 죽는 사람의 수를 5만 명으로 잡아도 이는 하루에 137.3명, 1시간에 5.7명에 해당하는 숫자다. 임종 환자 한 사람당 가족과 친지를 합하여 10명으로 계산하면 매시간 57명의 사람들이 임종하는 사람 곁에서 마음을 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6개월 혹은 1년 이내에 생명을 마감해야 하는, 생명의 불길이 꺼져 가는 숱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마지막 관심사는 무엇일까? 돈일까? 명예나 출세일까? 수천만 원짜리 모피 코트일까? 15년간 호스피스 실무자로 활동해온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이런 것들은 자기 삶의 마지막 순간을 사는 사람들의 관심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말기 환자들이 때가 되면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었다. 환자들은 자기 몸의 상태가 나빠지면 ‘혹시?’ 하면서 의심하는 마음이 들게 되고, 임종 단계에 이르게 되면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지하게 된다. 대부분 임종 과정이 시작되면 “이미 돌아가신 동네 어른이 와 계신다”고 하거나 “오래 전에 돌아가신 친지가 와 있다”고 하는 등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환자에게는 실재(實在)하는 어떤 대상(對象)이나 존재를 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기 삶의 종착점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생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고 그 답을 찾고자 한다. 호스피스에 가입한 말기 환자들은 처음에는 자신을 괴롭히는 신체적 증상들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너무 아플까 봐 미리 걱정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호스피스 서비스를 통해 통증을 비롯한 신체 증상들이 조절되고 나면 점차 먹지 못하고 기력이 쇠해지는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많은 질문을 하게 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죽음은 어떻게 오나?’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죽은 후에는 정말 내세(來世)가 있는가?’

‘차가운 땅 속에 묻혀서 숨도 못 쉬고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신(神)은 정말로 있는가?’

그리고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어하고 알고 싶어한다. 이들에게는 부귀 영화보다도 이런 것들이 당면한 더욱 큰 문제이고 두려움이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게 되면 지나간 삶을 어린 시절부터 파노라마처럼 회상한다. 그러면서 때로는 시간, 공간, 인간에 대한 혼돈이 와서 지금 있는 곳이 예전 어린 시절에 살았던 그 집인 줄 알고 자신이 지금 어린 아이인 것으로 착각하여 말하기도 한다. 이때 가족들은 ‘환자가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환자에게는 영화 필름이 돌아가듯 지난 시간들이 회상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과 더불어 죽음이 임박한 임종 환자들은 현재 자신이 속해 있는 이 세상과 앞으로 다가올 저 세상(건강한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을 함께 볼 수 있는 듯하였다. 이런 경우는 필자와 이야기를 하다가도 갑자기 허공을 응시하면서 (누군가와) 무어라고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이 세계로 돌아와(?) 필자와의 이야기를 계속할 때는 정확하게 아까 끊어진 그 부분부터 다시 시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영의 세계는 보이지는 않으나 현존하는 세계이다. 많은 이들이 건강할 때는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임종이 임박한 환자들에게는 이 세계가 열린다. 그래서 건강할 때는 미쳐 보지 못했던 보이지 않은 영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었던 환자들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남을 위해 장기를 기증하고 싶다던 유방암 말기 환자

“장기를 기증하고 싶어요”

한씨 부인은 사려 깊고 조용한 여성이었다. 오른쪽 유방암으로 수술 후 1년 동안 잘 지내다가 재발하여 항암 치료를 하였다. 치료 후 3년 정도는 건강하게 지내다가 병이 재발하여 호스피스에 의뢰된 경우였다. 필자는 1주일에 두 번 정도 이 환자를 방문하였는데 라포(Rapport: 의료진과 환자와의 사이에 형성되는 신뢰관계)가 만들어지면서 한씨 부인은 낮은 목소리로 조용조용 자신의 지나온 삶과 질병 경험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남편은 고위 공무원이었으며 자녀들도 다 자라서 막내가 대학생이었던 한씨 부인은 6년 전 처음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이동식 침대에 누워 수술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하나님, 살려만 주신다면 신앙 생활을 하겠습니다” 하고 기도 드렸고 그 후 종교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물론 수술 당시 그녀는 종교인이 아니었으며 더구나 그 수술실 앞에 가기 전까지는 한번도 하나님을 생각해 본 적도, 불러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동식 침대에 누워 곧 수술실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니 지나간 삶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전까지 그녀는 자신이 모든 일을 혼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인간이 노력하면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박봉인 남편의 월급을 가지고도 알뜰하게 살며 최선을 다해 자녀를 양육하는 등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아왔으나 그 순간, 인생에서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절반밖에 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재발하여 항암 치료를 받게 되었을 때는 ‘아! 인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삼분의 일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으며 성직자와 교우들이 방문하여 기도해 주는 것이 마음에 많은 위로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시 재발하여 완치를 위한 치료는 어렵고 증상 조절을 위한 호스피스 치료가 필요한 상태에 이르자 ‘인생이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전부가 그분에 의해서 되어지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호스피스 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 두 달 정도 지나면서부터 한씨 부인은 ‘예비적 우울’을 경험하기 시작하였다. 죽어가는 사람의 심리 상태를 연구했던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퀴블러 로스에 의하면 ‘예비적 우울’이란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면서 미리 슬퍼하는 상태’이다. 한씨 부인 역시 자신이 죽게 될 것을 알았으며 그것을 생각하며 슬퍼하였기에 감정은 한없이 낮아져서 말이 없고 고요하였다.

가끔씩 깊은 한숨을 쉬곤 했는데 들릴 듯 말 듯한 낮은 소리로 천천히 이야기하였다.

“떨-어-지-는-저-낙-엽-을-내-가-다-시-볼-수-있-을-까-나-는-이-걸-생-각 -해-봐-요”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모든 것이 다 생소해 보이고 ‘이게 마지막이구나. 지금 보는 것을 다시는 보지 못하겠구나’라고 생각하니 심각해지고 진지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주변을 살펴보며 문득 생경스럽게 느껴지기도 해서 가만히 그것들을 음미하곤 하였다. 그러면서 이제 서서히 다가오는, 곧 닥치게 될 자신의 떠남을 생각하면서 현재의 세상과 다가올 세상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이런 감정적 분위기는 삶의 일상적인 소란스러움과는 상당한 거리가 먼 것인데 환자는 가족들이 거실에 모여 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하면서 웃고 있으면 ‘저-게-뭣-이-저-렇-게-재-미-있-을-까?’ 의아스러워진다고 하였다.

한동안 ‘예비적 우울 단계’에 머물러 있던 한씨 부인은 어느 날 필자에게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가만히 돌이켜보니 모두가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온 삶이요, 이웃과 국가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서 너무나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하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생애에서 자신이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고 하면서 장기 기증을 하고 싶다고 하였다. 필요하면 시신 전부라도 기증하고 싶으니 방법을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다.

가정호스피스 팀 회의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었고 먼저 가족의 동의가 있어야 하며 그 다음으로 암환자의 장기가 이식될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한씨 부인에게 남편과 자녀들에게 자신의 이런 뜻을 직접 알리고 동의를 얻도록 하였으며 의사 소통이 여의치 않으면 돕겠다고 하였다. 한편으론 장기 기증 및 시신 기증에 대해 알아본 결과 암환자의 경우 각막이식만이 가능하며 시신 기증은 의과대학생들의 해부학 실습을 위해 쓰여진 후에 뼈를 보관하거나 정중하게 장례를 치러 드린다고 하였다. 한씨 부인은 기뻐하면서 이 두 가지를 다 하기 원하였으나 가족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갑작스런 한씨 부인의 말에 가장 충격을 받은 이는 남편인 듯하였다. 자녀들은 울면서도 어머니의 뜻이 그러하다면 따르겠다고 하였으나 남편은 필자를 좀 만나자고 하였다. 호스피스 사무실로 찾아온 한씨 부인의 남편은 이 문제는 생각해 보지도, 상상해 보지도 않은 것이었다고 하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사실 장기 기증을, 더구나 시신 기증을 하고 싶다는 환자의 말을 듣고 그 방법을 알아보는 동안에 이 문제는 필자 자신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호스피스를 시작하고 나서 장기 기증을 제안한 것은 한씨 부인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는 필자 자신도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 같은데 갑작스레 환자가 꺼낸 화두로 인해 내 가슴도 콩닥거리게 된 것이었다.

‘필자인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죽게 되었다고 해서 내 몸 일부를 떼어주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더구나 내 몸을 해부하라고 내어주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

해부학 실습실에서 보았던 사체(死體)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이러한 화두에 대해 필자 역시도 자신을 성찰하고 있던 중이었다. 당시 함께 일하던 왕매련(Marian Kingsley) 교수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였다. 연세대학교 간호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호스피스 책임자를 겸하고 있었는데 이분의 경우 선교지인 한국으로 떠나오기 전 유서와 함께 장기기증서에 서명을 하고 왔으며 안식년 마다 그것을 검토하고 재서명 해 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 경우였다. 그래서 한씨 부인의 남편의 질문에 대한 대답보다는 부인의 이야기를 들은 후 남편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되물어 보았다. 남편은 몹시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자신은 종교인도 아니고 원칙적으로 동의할 수 없으나 사랑하는 아내의 마지막 희망 사항을 무조건 거절할 수가 없어서 고민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남편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준 후 환자를 포함한 가족회의를 열어 의논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하였다. 먼저 한씨 부인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진심으로 그렇게 하기로 원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말할 기회를 주고, 그 다음 나머지 가족이 한 사람씩 자신들의 의견을 말한 후 의논해서 결정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집에 돌아간 한씨 부인의 남편은 그날로 가족회의를 소집하였다.

당시 한씨 부인의 상태는 이미 질환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죽기 2~3일 전에 도달하는 임종과정을 시작하고 있었으므로 본인 스스로 원활한 장기 이식을 위해 병원에 입원할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기력이 너무 떨어지기 전에 가족에게 다시 한 번 자신의 의사를 밝히도록 기회를 줄 필요가 있었다.

가족 회의에서 한씨 부인은 ‘인간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였으며 무의미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기 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을 위해, 인류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한 번 해 보고 싶다고 하였다.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가 밝은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하면서 그렇게 된다면 기쁜 마음으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남편의 생각은 달랐다. 부인이 떠나고 난 뒤 못 견디게 그리움을 느낄 때 산소(山所) 마저 없으며 어디 가서 눈물을 흘리며 아내 잃은 것을 슬퍼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시신 기증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래서 한씨 부인도 남편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로 하여 각막만 기증하고 시신은 기증하지 않기로 절충하게 되었다.

가족회의에서 이렇게 결정이 내려진 후 바로 입원한 한씨 부인은 이튿날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평화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안과 팀이 즉시 각막을 채취하여 한씨 부인의 양쪽 각막은 다른 두 사람에게 각각 이식되어 계속해서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호스피스에 가입한 지 102일 만에 소천(召天, 사람이 죽어서 본향인 하늘나라로 돌아간다는 의미)한 그녀가 남긴 것은 생전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되어 기뻐하는 두 사람의 감사와 나도 우리 어머니처럼 아름답고 훌륭한 삶을 살겠다는 자녀들의 다짐, 그리고 그 아름다운 마음을 길이 기억하는 남편의 그리움이었다. 또한 한씨 부인과 100여 일을 함께 했던 시간들은 필자에게도, 우리 호스피스 팀 전체에게도 인간의 몸이 갖는 의미와 장기 기증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 귀중한 경험이 되었다.

 

 

골수암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한 17세의 소년

“베드로가 보인다”

골수암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였던 이군은 17세였다. 15세인 중학교 3학년 때에 발병하여 열심히 치료하였으나 폐와 뇌에 전이가 되어 결국은 호스피스에 의뢰된 경우였다. 형과 어머니가 극진히 이군을 보살피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어느 날은 성직자와 함께 이군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호흡 곤란이 심한 상태였다. 폐에 병소(病巢)가 있는 환자들은 마지막으로 갈수록 호흡 곤란이 심해지는데 산소나 약을 사용해도 증상 조절이 쉽지 앟은 경우가 많아 애를 태우게 된다. 이군 역시 처방된 약을 복용하고 있었으나 숨이 몹시 가쁜 상태였다. 거기다가 이군은 앞으로 통증이 심해지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다. 이군의 어머니는 울고 있었고 이군은 자신의 걱정을 이야기하며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동행했던 성직자가 이군을 안고 기도해 주자 잠시 후 이군은 잠이 들었고 숨소리도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저녁에 이군이 임종하였다는 연락을 받고 밤늦게 빈소를 방문하였다. 그런데 평소에 조그만 일에도 눈물을 보이곤 하던 이군의 어머니가 전혀 울지 않고 있었을 뿐 아니라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군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를 묻자 뜻밖의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호스피스에서 방문한 다음에 잠을 잘 잤는데 다음날 아침부터 환자가 자구 무엇이 보인다며 하늘을 쳐다보면서 웃고 놀라워하더라고 했다. 전혀 아프다는 소리가 없었으며 호흡 곤란도 별로 없었는데 계속해서 하늘을 쳐다보며 “베드로가 보인다” 고 하면서 “그 옆에 빛나는 분은 누구시냐”고 묻기에 엄마는 “무엇이 보이냐, 엄마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하자 나중에 이군이 “큰일났다. 우리 엄마는. 나는 천국 가는데 우리 엄마는 지옥 가겠다” 고 하면서 엉엉 울더라는 것이었다.

당황한 엄마가 어찌할 수가 없어서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아이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아 저거 말이니? 나도 이제 보인다” 라고 하자 이군이 너무 좋아하면서 자기가 보고 있는 하늘의 모습을 엄마도 보고 있는 둘 알고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하더라고 하였다.

그 후 저녁 무렵에 이군이 어머니의 손을 곡 잡고 “엄마, 저거 보았지요? 나 먼저 갈 테니 나중에 오세요” 하며 숨을 거두었다는 말을 하면서 “아마 우리 아이는 꼭 천국에 갔을 거예요. 확신이 들어요” 라고 했다. 얼른 들으면 이 현상이 이상한 일같이 들리지만 사실 죽음에 임박한 사람에게 있어서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동시에 보는 일은 흔하게 일어나곤 한다. 장갑을 기었다고 벗으려면 손이 빠져 나오는데 조금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우리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갈 때는 대개 2~3일 또는 수 시간이 소요되는데 그때 잠깐 잠깐씩 양쪽 세계를 다 보게 되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돌아가시기 2~3일 전에 이런 현상을 경험하지만 더러는 그보다 훨씬 일찍부터 이런 경험을 하는 분도 있다.

 

 

흰옷 입은 사람이 와 있다던 폐암 말기 환자

“흰옷 입은 사람이 와 있다”

소천 할 무렵에 침상 머리와 발 쪽에 흰옷을 입은 빛나는 사람이 와 있다고 했던 49세의 폐암 말기 환자 김영찬씨의 경우도 있다. 이분은 호스피스에 의뢰될 당시에 밤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나오라고 해서 도무지 잠을 자지 못하겠다고 했었다. 김영찬씨는 진단받았을 당시 1년간 항암제로 치료하여 완치되었다가 재발된 사례로 골전이 骨轉移 가 있었다. 재발되었다는 진단을 받은 김영찬씨는 병원 진료실에서 각목을 휘두르며 화풀이를 하는 바람에 병원 진료를 마비시키기도 했었다. 의료진들은 말기 상태인데다 소란을 계속 피우는 환자를 다룰 수 없어서 호스피스에 의뢰한 것이었다.

1차 방문했을 때 그의 아내는 지쳐있었으며 아이들은 겁에 질려 있는 상태였다. 환자는 심한 기침과 가래, 통증뿐 아니라 불면증이 있어서 밤에도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김영찬씨는 밤에 불을 끄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낮에 일하고 온 아내가 고단하여 잠시 졸면 발로 차서 깨우고 화를 내며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이 밥을 먹고 있으면 갑자기 주먹으로 얼굴을 때린다고 하였다. 얼굴은 초췌하고 잠을 못 자서 그런지 눈 밑이 그늘져 있었다. 통증 때문에, 혹은 기침 때문에 자지 못하나 보다 생각하여 잠잘 수 없는 이유를 질문하였더니 뜻밖의 대답을 하였다.

“3주 전부터 밤이면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 내 이름을 부르며 ‘김영찬, 나와!’ 하고 부르기 때문에 겁이 나서 자지 못해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세 사람인데 남자 같다면서 매일 밤 나타나서 같이 가자고 한다고 하였다. 잠을 자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이분의 대답은 필자를 놀라게 하였다. 당시 우리 호스피스 팀은 김영찬씨의 상태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영적인 고통’ 이라고 보았고 이 문제는 영적으로 접근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환자의 집 근처에 있는 성직자를 찾아가 이 문제를 말씀 드리고 도움을 청하기로 하였다. 마침 환자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한예수교장로회 00교회’라고 간판이 붙은 자그마한 교회가 아니 있어서 담당목사를 찾아가 사정을 말씀 드렸더니 다행히 그분이 쾌히 응낙해 주시고, 즉시 환자를 방문하여 상담해 주셨다. 몇 번의 상담을 통해 김영찬씨는 더 이상 밤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호스피스 치료를 통해 기침이나 통증 등의 증상도 어느 정도 조절이 되자 그토록 못 다던 잠도 잘 잘 수 있게 되었다. 잠을 잘 잘 수 있게 되자 그 동안 가족을 불편하게 하였던 김영찬씨의 짜증과 화내는 것이 누그러졌으며 무엇보다 가족들이 밤에 잠을 잘 수 있게 되어 훨씬 편안해 하였다.

환자의 가정을 방문하는 호스피스 팀과 신뢰 관계가 형성되면서 환자와 부인은 자신들이 살아왔던 고단한 삶의 여정을 토로하였다. 김영찬씨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큰 형님과 함께 살았는데 도시락을 싸주지 않았던 큰형수에 대해, 넓은 과수원이 있으면서도 그 한쪽에 자신이 묻힐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말을 거절한 형님에 대해, 그리고 자신을 치료하였던 의사에 대해 분노와 함께 적어도 그들보다는 오래 살아야 한다는 오기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자신이 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하고 편안해 하자 더 오래 살게 될까 봐 약을 감추고 주지 않았던 형수의 태도에 대해 흥분하며 “내가 반드시 나아서 저들보다 더 오래 살아 저들을 다 죽이고야 말겠다고 마음먹었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노가 쌓여 병원에 와서 큰 소란을 피우며 행패를 부렸다는데 호스피스 치료를 받는 동안, 그리고 성직자와의 영적 상담이 계속되는 동안 환자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환자의 표정이 편안해졌으며 형님과 형수를 용서하기로 하였다. 오랜만에 방문한 큰형님과 형수에게 고아인 자신을 돌보아 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하면서 그 동안 화내었던 것을 용서해 달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형님 역시 그 동안 좀더 신경 써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과수원에 묻힐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고 하였다.

또한 자신을 치료하였던 의사를 용서하기로 하였으며, 임종이 가까워오자 자신이 그 동안 치료받았던 병원에 입원하여 최후를 마치고 싶어 하였다. 그런데 현행 의료 전달 체계는 급성 치료 중심이어서 3차 의료 기관에 말기 환자가 임종을 위하여 입원한다는 것이 용이하지가 않았으며 김영찬씨를 치료하였던 담당 의사 역시 그 동안의 이런저런 일로 이 환자에 대해서는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 병원에 다시 입원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 호스피스 팀은 이러한 사실을 담당 의사에게 알리고 한번 도움을 청해보기로 하였다. 다행히 호스피스에 의뢰된 이후의 환자 상태와 경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담당 의사는 상당히 감동된 눈치였다. 그런 상태라면 자신도 그 환자를 용서하고 싶다고 하면서 입원할 수 있도록 조처해 주었다. 입원 후 회진한 담당 의사에게 환자는 사진의 행동에 대해 용서해 달라고 청하였으며 담당 의사는 응낙의 표시로 환자의 손을 굳게 잡았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밥 먹을 때마다 때리곤 했던 막내아들을 오라고 해서, “아빠가 널 때린 건 네가 미워서가 아니야. 그냥 네가 잘 먹는 모습을 보면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아빠 자신에게 화가 나서 그랬던 거야. 그러나 널 때린 건 정말 미안하다. 아빠를 용서해 주겠니?” 하며 용서를 청하였고 아들은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에게도 그 동안 못 자게 하고 화내고 심하게 굴었던 것에 대해 용서해 달라고 하였으며 사랑한다고 말하였다.

그 다음날부터 환자는 임종 과정을 시작하였는데 소변량이 줄고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는 상태고 체인 스톡 호흡(임종 과정에서의 독특한 호흡 양상으로 잠깐 숨을 안 쉬다가 몰아서 내쉬곤 하는 현상) 양상을 보였다. 그러면서 환자는 자꾸 무언가를 쳐다보는 듯한 표정과 눈이 부신다는 듯한 몸짓을 하였는데 “무엇이 보이느냐?”고 질문하였더니 “흰옷을 입은 사람이 와 있다”고 하였다. 어디에 있는지 묻자 환자의 침상머리 쪽과 발 쪽에 한 사람씩 있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인지를 물어보자 빛이 나고 어깨에 날개가 있다고 하면서 얼굴 표정은 밝아 보였다.

마지막 날 아침에 김영찬씨의 부탁으로 방문한 성직자를 모시고 가족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 자리에서 김영찬씨는 자신의 장례식에 대한 당부를 한 다음, 부인의 손을 잡고 아직 학생인 자녀를 두고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나중에 만나자고 하였다. 김영찬씨의 자녀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네 명이 있었는데 부인이 보험 설계사로 버는 수입으로는 벅찬 형편이었다. 호스피스 팀에서 고3인 큰딸이 취직을 하기 위한 기술을 배우도록 지원하기로 하였고 이 사실을 김영찬씨에게 알려서 안심하고 떠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네 자녀와 부인, 형님과 형수, 담당 의사와 호스피스 팀이 지켜보는 가운데 밝게 빛나는 얼굴로 고요히 숨을 거두는 김영찬씨를 보면서 둘러선 사람 모두가 큰 감동을 받았다. 특히 담당 의사였던 김교수는 이때 받은 감동으로 인해 그 이후로 우리 호스피스 팀에게 자신의 의과대학 수업 시간에 와서 강의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학생들에게는 “육체의 질병만 고치는 것이 의사가 아니다.  이런 세계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면서 우리들을 소개해 주었다.

 

 

 

김영찬씨나 한씨 부인과 같은 경우는 성직자와의 상담이나 자신의 종교적 신념 체계에 따라 내세가 있음을 알고, 확신하고 있었던 경우였으며 이군의 경우 내세를 미리 봄으로써 자신뿐 아니라 주변의 가족까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음을 더욱 확신하게 된 경우였다.

의사로부터 말기 통고를 받고 어린 시절을 비롯하여 지나간 삶의 파노라마가 드라마틱하게 일어나는 환자도 있었는데 김연준씨가 그런 경우였다.

 

지옥에 갈까 봐 온몸이 굳어졌던 간암 말기 환자

“빛이 보인다”

김연준씨는 3개의 회사를 경영해 온 60세의 남자였는데 친구가 의사로 있는 종합병원에서 간암 말기 진단을 받고 입원하였다. 친구인 민박사의 생각으로는 이분이 평소 사리 분별이 정확하고 또 경영하던 회사도 정리하여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본인에게 현재의 건강 상태를 설명해 주고 교과서에 써 있는 바 대로라면 잔여수명이 약 3개월 정도 남았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잠시 수부터 이 환자의 상태가 이상해지더니 온몸이 굳어서 움직이지를 못하고 말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게 된 민박사는 혹시 환자가 자신의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정신과 의사에게 의뢰하였는데도 별 효과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호스피스에 의뢰하였다고 하였다.

빨리 좀 와 달라는 전화를 받고 병실에 올라가 보니 정말 환자는 침대에 똑바로 누워 무릎을 약간 세운 채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덜덜 떨고 있었다. 무언가 무서운 것이라도 보고 있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공포에 질린 얼굴 표정으로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환자에게 다가가 얼굴을 쳐다보면서 “무엇이 그렇게 무서우세요?” 하고 질문하였더니 김연준씨는 덜덜 떨면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지…옥…에…갈..까…봐…서…” 라고 대답하였다. “그럼 지옥에 안 가는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하자 반가운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간단하게 지옥에 가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자 김연준씨는 그 자리에서 그 방법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다음 순간 김연준씨가 갑자기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내 손을 꽈악 쥐길래 다시 한 번 쳐다보니 굳어 있던 온몸이 다 풀려 있었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온몸이 굳었다가 다시 풀릴 수 있었는지 궁금했는데 김연준씨가 의사를 가리키며 좀 앉으라고 하더니 설명을 해주었다. 친구인 민박사로부터 자신이 간암 말기라는 말을 듣고 난 후 갑자기 지나온 자신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자나갔다고 했다. ‘나는 이제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해 보았더니 ‘나는 잘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죽으면 꼼짝없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지옥의 공포가 몰려 와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옥에 안 가는 방법을 선택하고 나니 그만 안도감으로 온몸이 자기도 모르게 풀렸다고 하면서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하였다.

김연준씨는 다음날 부인에게 자신의 통장과 도장을 주고 비밀 번호등과 함께 자신의 재산 상태를 알려주었으며 조용히 있고 싶다고 하여 다른 친구가 원장으로 있는 개인 병원으로 옮겼다. 1주일 후 방문하였을 때는 처음보다 안정되어 보였으며 통증은 잘 조절되고 있었으나 복수가 약간 차 있었다. 정기적으로 성직자와 상담을 하고 있었으며 환자가 편안해 하자 부인도 안정이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1시간 정도로 방문을 마치려 하자 “다음에 한 번만 더 와 주세요” 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회사의 중역들을 오라고 해서 회사 경영에 대한 지침과 권한 이양 및 정리를 하였다고 했다. 1주일 후 세 번째로 방문하였을 때 김연준씨는 “이제 그만, 됐어요. 감사합니다” 라고 했다.

사실 김연준씨의 진행 정도로 보아 아직 시간이 조금 더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김연준씨는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래서 “이제 시간이 없다는 뜻인가요?” 하고 물어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혹시 알 수 없어서 부인에게 “1주일 뒤에 방문할 예정인데 그 동안에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날 김연준씨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을 오라고 해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부인을 잘 부탁한다고 당부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성직자를 청하여서 자신이 떠난 후에도 부인을 위해서 가끔씩 방문해 달라고 부탁하였으며 부인에게는 먼저 갈 테니 나중에 만나자고 하고 장례식에 대한 내용도 미리 원하는 방식을 이야기한 후 “빛이 보인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하였다.

전화를 받고 장례식에 참석한 필자에게 김연준씨의 부인은 “지옥에 아 ㄴ가는 방법을 알려주어서 너무나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해달라”고 한 김연준씨의 마지막 말을 전해 주었다.

 

흙빛이던 얼굴이 환하게 변하며 떠난 유방암 말기 환자

“이제 곧 그분을 만나게 될 거야”

폐전이와 골전이가 있었던 유방암 말기 환자인 영애 엄마의 경우도 특이한 감동을 준 사례였다. 그녀는 항암제 치료를 중단한 대부분의 환자가 그러하듯이 그 동안 빠졌던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기 시작하여 스포츠 머리 정도로 자라 있었다. 임종이 가까워지자 집에서 임종하기 위하여 퇴원하기로 결정하였으므로 집에까지 데려다 주게 되었다. 집으로 가는 앰뷸런스 안에서 산소 마스크를 한 영애 엄마는 눈을 감은 채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으므로 함께 동행하는 필자의 마음도 안타까웠다. 아직 청소년인 두 자녀를 두고 떠나야 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무거운 마음이었는데 옆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떨구던 영애 아버지가 기어이 아내의 짧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 머리 자라면 파마해 주려고 했는데…” 하면서 울부짖고 말아서 함께 있던 필자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집에 도착하여 방 한가운데 이불을 펴고 영애 엄마를 눕혔다. 남편과 고등학생인 딸, 중학생인 아들이 울면서 영애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고 급하게 연락을 받고 달려 온 교우(敎友)들이 둘러앉아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찬송을 불러 주었다. 산소 마스크를 떼고 나니 가쁜 숨을 몰아 쉬는 얼굴은 흙빛에 가까웠다.

그때 나이 많은 여자 교우 한 분이 “영애야, 이제 곧 주님을 만나게 된다. 이제 곧 그분을 만나게 될 거야”라고 하였는데 그 순간 흙빛이던 영애 엄마의 얼굴이 환하게 빛을 내면서 코고 긴 한숨을 한 번 길게 내 쉬고는 끝이었다. 조금 전의 어둡던 흙빛과는 대조적으로 환하게 밝아진 채로 잠든 영애 엄마의 얼굴은 아주 평화로워 보였다.

 

 

 

필자는 대학 시절에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코에 생기(Ruah, Pneuma)를 불어넣자 생령(Holistic Being)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성경에서 읽었는데, 지난 15년 간 수백 명의 임종하는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들 속의 생기가 긴 한 숨처럼 코를 통해 빠져나간 후에는 그들이 더 이상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임종이 가까울수록 이 세계는 차차 닫히고 저 세계는 차차 열리는 모습을 지켜보아 왔다

 

필자도 아직은 죽음을 이야기할 나이가 아니다. 그러나 앞에 열거한 사례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필자가 보아온 생과 사에 대한 이 비밀들을 밝히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것은 보이는 이 세상과 더불어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알고 인생을 진솔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잘 받아들이고 아름다운 이별을 하였음을 밝혀두고 싶다.

 

 

 

제3부 호스피스 관련자료

 

이니셜로 풀어 본 호스피스

호스피스(Hospice Care)란 말기 환자와 그 가족을 전인적(全人的)으로 돌보는 프로그램이다. 호스피스는 생(生)의 마지막 순간을 사는 이들을 위해, 자기 역할을 다 마친 배우가 적당한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무대에서 내려올 수 있도록 산파(産婆) 역할을 해준다. 호스피스는 죽음이 삶의 정상적인 한 과정이고 죽어가는 사람은 따뜻한 보살핌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호스피스는 말기 환자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사람과 함께, 원하는 방식으로 살 수 있도록 돕는다. 또, 아직 끝마치지 못한 일들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생의 본질(本質)에 대한 그들의 질문에 진지하게 답해 준다.

말기 환자는 대체로 신체적으로 두 가지 이상의 불편한 증상들이 있다. 의사와 간호사는 이들의 증상 조절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그 중 한가지가 통증 조절이다. 비록 환치 될 수는 없지만 이들이 남은 생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서는 아프지 않게 도와 주는 것이 우선적인 일이기에 호스피스 교육을 받은 의료인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러나 통증 조절만으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한 인간으로서 그분들이 각각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원하며, 무엇이 필요한지 살펴보고, 할 수 있는 한 적절한 도움을 주어야 하기에 많은 자원봉사자와 성직자 및 다른 전문적 인력의 도움을 크게 필요로 한다.

옆에서 돌보는 가족 역시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이 심신의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이 최선을 다해 환자를 잘 돌보고 편안하게 떠나 보낼 수 있도록 돕는 것도 호스피스의 몫이다. 가족을 지지하고 도와주는 것은 환자가 사망하고 나서도 약 12개월 정도까지 이어지는데 그 이유는 사별(死別) 과정에 개인차가 있기는 하나 대체적으로 그 정도 걸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호스피스(Hospice Care)란 말의 어원은 ‘Hospes’와 ‘Hospitium’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Hospes’는 접대하는 사람을 뜻하는 ‘Host’와 손님을 뜻하는 ‘Guest’의 합성어이고 ‘Hospitium’은 주인과 손님 사이의 따뜻한 마음을 표현하는 장소를 뜻하는 말이라고 하는데, 이 둘이 합쳐져서 ‘따뜻하게 손님을 맞이하고 편안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돌보며 환대한다’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미국 호스피스-완화의료기구(The National Hospice and Palliative Care Organization)에서는 호스피스를 ‘전문적인 의료, 통증 관리, 정서적 지원, 영적 지원 등을 말기 환자와 가족의 요구와 필요에 맞추어 제공하는 자비로운 보살핌’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호스피스는 모든 사람이 고통 없이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철학에서 출발한다. 대부분의 경우에 호스피스는 치료 행위(curing)가 아닌 돌보는 행위(caring)에 초점을 주어 가정에서 제공되며, 독립된 호스피스 시설, 병원 양로원(nursing home) 및 기타 장기 요양 시설에서 제공되기도 한다. 또, 호스피스는 연령, 종교, 인종, 질병의 종류를 불문하고 제공된다.

1981년 세계보건총회(WHA)에서 호스피스를 의료인과 비의료인, 성직자, 환자의 이웃과 친지가 함께 말기 환자와 그 가족을 돕는 사회 의료적인 보살핌으로 규정하고, ‘전인류에게 건강을!’ 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각국의 보건 의료 전달 체계에 이를 포함시켜야 할 것을 선포한 바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그렇지 못하지만 그 이후로 유럽과 구미 선진국뿐 아니라 일본, 싱가포르, 대만 등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서도 호스피스를 제도화하고 확산해 가는 추세에 있다.

 

호스피스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소개하기 위해서 ‘호스피스(Hospice)’란 말의 알파벳을 가지고 개념을 설명하는 이니셜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때에는 마지막에 ‘S’자를 덧붙인다.

 

(1) H – Hospitalization

첫째, 호스피스 케어를 받으려면 호스피스에 가입하여야 하는데, 이것은 병원에 입원하는 절차와 유사하다. 먼저 호스피스 대상자로서 적합한 환자이어야 하고, 가족과 환자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다.

(2) O – Organization

둘째, 호스피스는 다학문적(多學問的)인 팀(Multidisciplinary Team)을 필요로 하기에 적어도 의사, 간호사, 성직자, 사회복지사와 자원봉사자로 구성된 호스피스 팀이 있어야 하고, 팀을 조정하고 관리하는 팀장(조정자)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호스피스 사업을 하려는 사람은 이 팀의 일원으로 소속되어야 하고, 호스피스 사업을 하려고 하는 기관에서는 먼저 이러한 팀을 구성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 팀에 소속된 구성원들은 명목상의 팀원이 아니라 실제로 말기 환자와 가족을 돌보는 실무자여야 한다.

(3) S – Symptom Control

셋째, 호스피스 치료는 증상 조절을 위한 것이다. 말기 환자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신체적 증상을 조절해 주어 편안하게 해주고자 진통제와 보조 약물을 사용하고 방사선 치료도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전문적인 호스피스 교육을 받은 숙련된 의료인이 필요하다.

(4) P – Psychological Support

넷째, 심리적 지지가 필요하다. 환자와 가족이 겪는 부정(否定), 분노, 우울, 슬픔, 두려움, 불안, 염려 등의 심리적 어려움을 이해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희망을 가지고 의미 있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는 호스피스 요원 누구나 감당할 수 있으나 특별히 자원봉사자의 많은 도움이 필요한 영역이다.

(5) I – Individual Care Plan

다섯 째, 개인적인 간호 계획을 세운다. 병명이 같은 환자라도 호스피스 대상자는 각각 처해 있는 환경과 입장이 다르고 살아온 배경이 다르며 연령, 인종, 성별이 다른 독특한 존재이므로 각 사람의 요구에 따라 각각의 간호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 이유는 생의 마지막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가는 각 개인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며, 그에게 남아 있는 시간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6) C – Communication

여섯 째, 의사소통이다. 말기 환자와, 그들의 가족과 그리고 호스피스 팀원들 간에 의사 소통이 원활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모든 호스피스 요원은 효과적인 대인관계 기법과 의사 소통 기술을 공부해야 하고 상대방을 잘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7) E – Education & Research

일곱 째, 호스피스 활동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호스피스 교육을 받아야 한다. 호스피스 개념과 철학, 죽음에 대한 이해, 의사 소통 술에 대해서 뿐 아니라 말기 환자와 가족이 처해 있는 특수한 상황과 이들을 돕는 세세한 방법들에 대해 직능 별로 적절한 교육이 필요하다. 또한 호스피스 서비스의 수준 향상을 위하여 관련 연구가 꾸준히 이루어져야 한다.

(8) S – Spiritual Care

S 는 호스피스(Hospice)라는 단어의 철자에 덧붙여진 이니셜인데 영적인 보살핌을 의미한다. ‘영(靈)’은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모든 인간에게 있기에, 인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 죽음에 가까이 이를수록 이 부문에 대한 인식이 두드러지기에 성직자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다.

 

어떻게 보면 호스피스는 환자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든지 간에, 말기 통고를 받은 순간부터라도 지나간 생을 돌아보고 잘 죽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해하며, 절대자와 화해하고 편안히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며, 그분 생의 마지막 시점까지 함께 동행하여 우리가 잡고 있던 그분의 손을 보다 더 높은 분께로 올려드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남은 가족들을 위로하며 다시 만날 때까지 현실에 잘 정착하여 살 수 있도록 지지해 주는 아름다운 일이다.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려면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하여 가는 존재다. 건강한 사람들은 죽음이 자신과 먼 거리에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은 말기 환자를 수발하다가 오히려 환자보다 먼저 돌아가시는 가족들도 있다. 수년간 백혈병을 앓는 딸을 돌보면서 눈물짓던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고, 평생을 간염으로 고생해온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자신은 찬밥 신세였던 부인이 남편이 말기 간암으로 입원해 있을 때 교통사고로 먼저 떠나시기도 하였다. 위암 말기인 젊은 새댁을 돌보던 친정어머니가 노환으로 딸과 둘이서만 있던 상황에서 돌아가셔서, 죽음이 자신에게 더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딸이 실신 상태에까지 이르렀던 일도 있었다. 이처럼 죽음에는 순서가 없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의 순서대로 떠날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그것은 이 세상에서 머무는 시간의 길이가 모든 사람에게 같다는 가정 아래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살고 죽는 일이 인간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닌 바에야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일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 인간은 주어진 생명이 찬란함을 누리면서 아름다움 죽음을 향하여 준비하며 살아가야 한다.

‘탈무드’ 에서는 출생보다 죽음이 오히려 더 격려와 칭송을 받아야 할 일이라고 역설한다. 출생은 필요한 물품을 가득 싣고 이제 막 출항하는 배와 같아서 앞으로 미지의 세계를 항해하면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죽음은 항해를 마치고 항구에 돌아오는 배와 같아서 비록 낡고 돛이 꺾어지거나 칠이 벗겨져서 상했어도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고 항로의 모든 난관을 다 극복하였으니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필자는 호스피스 활동을 하기 전에 이대부속 동대문병원의 분만실과 3등실만 있는 내과병동에서 일한 적이 있다. 1주일에 절반은 분만실에서, 절반은 내과병동에서 보냈는데 한쪽이 갓 태어나는 새 생명을 보는 곳이라면 다른 한쪽은 황혼기에 병든 어르신들을 보는, 대조적인 묘한 모습을 살펴줄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분만실에는 산모가 분만대기실에 머물다가 분만장에 들어가 출산을 할 때까지 바깥 대기실에서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남편 등 가족들이 초조하게 기다리는 모습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물론 태어날 아기를 위해 필요한 물품들을 다 준비해 놓았다가 아기가 태어나 소실을 알려주면 어떤 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격스러워한다. 잠시 후 태어나 아기를 신생아실로 보내기 위해 데리고 나가면서 얼굴을 보여드리면 그 반가워하는 모습은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의 마음까지 설레게 한다.

반면에 3등실에 입원해 있는 어르신들의 경우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자식이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있다가 나중에 보면 결혼한 아들, 딸들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대개는 가끔 아들이 찾아오고 며느리는 더 가끔 오고, 시집간 딸은 어쩌다가 와서는 울면서 하소연을 하곤 하였다. 돈이 있어서 간병인이라도 붙여주는 경우는 그나마 나은 편이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입원비도 서로 눈치를 보며 내어놓지를 않아서 며칠씩 퇴원을 못하고 기다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 자녀들이 태어났을 때, 지금 입원해 게신 이 어른들도 저쪽 분만실의 산모들과 같이 기뻐하고 감격스러워 하지 않았을까? 이제 막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갓 태어난 생명들이 있는 분만실의 활기찬 북적거림과 따뜻함에 비해 생의 마지막을 행해 가는 병든 어르신들이 있는 3등실은 묘한 적막함과 슬픔이 있어서 대조적인 반응을 실감하였다.

그러나 갓 태어난 아기도 세월이 지나면 3등실의 노인이 되고 언젠가는 죽음 앞에 서게 된다. 내가 살고 있는 오늘 이 하루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기에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 올라온 이상 어차피 내려가야 할 날이 온다.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준비하여야 그것이 가능해지는가?’ 에 대한 생각을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반드시 해 두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앞에서도 말하였지만 필자가 15년간 호스피스 활동을 하면서 깊이 깨닫게 된 것은 ‘잘 살아야 잘 죽는다’는 것이다. 즉, 평상시에 사는 삶이 그 사람의 죽음을 특징짓는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자신의 죽음을 잘 준비하려면 다음의 사실들을 유념(留念)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1.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자.

남이 보아 주든 아니든,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진실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만이 떳떳하게 죽을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자녀들이 보고 있어도 부끄럽지 않은 삶이 되도록,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고 싶다” 던 윤동주 시인의 바람을 가지고 그렇게 살자.

 

2.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며 살자.

이 세상은 서로 사랑하고 살아도 다 못 사는 세상이다. 가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족을 사랑하며 살자. 운전하고 갈 때 동네 꼬마가 갑자기 튀어 나와도 내 자식인 것처럼 따스한 눈길로 기다려 주며, 이웃끼리 서로 얼굴과 이름을 알고, 정을 나누면서 사람 사는 것같이 살아야 나 죽을 때 함께 울어 주는 사람도 많다. 빈소(殯所)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쓸쓸한 죽음, 꽃 한 송이 가져오는 사람이 없는 썰렁한 빈소도 있었음을 알리고 싶다.

 

3.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며 살자.

빈손으로 온 인생이 갈 때도 빈손으로 간다. 내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이라도 굶주리는 사람이 있으면 반으로 나누어 먹고, 내 손으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가급적 서로 도우며 살자. 죽음을 눈앞에 둔 말기 환자와 가족을 위해 관심을 나누고, 내게 있는 건강과 시간과 돈을 나누며 살자.

임종시에 장례식 치를 비용 정도만 남기고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4. 죽음과 관련된 책을 읽고 공부하자.

죽음은 우리 삶의 일부이다. 눈앞에 닥쳤을 때 생경스럽지 않으려면 미리 공부해 두는 것이 낫다. 미국에서 사람들이 죽음과 호스피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 중의 하나가 ‘죽음의 시간(On Death and Dying)’ 이라는 책이 출판된 사건이다. 미국인 정신과 여의사, 퀴블ㄹ 로스(Kubler Ross)가 쓴 책인데 그녀는 죽어가는 사람 200여 명을 대상으로 면담을 하여 그들의 마지막 심리 과정의 변화를 이 책에 심리해 놓았다.

1997년 언론인 미치 앨봄이 ‘Tuesday with Morrie’라는 책을 출간하였는데, 이 책에는 미치가 루게릭 병을 앓는 스승 모리 선생님과 화요일마다 만나 죽음에 관해서 배우던 이야기가 쓰여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도 출간되었다. 그리고 필자가 쓴 ‘인간은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월간조선 2000년 3월호)를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외에도 죽음과 관련된 책들이 수없이 많은데 내세의 문제까지 잘 다루고 있는 책은 ‘성경(The Bible)’이다. 여유 있을 때 다가올 미래를 위해 틈틈이 죽음과 관련된 책을 읽고 공부해 두자.

 

5.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 연습하는 시간을 갖자.

죽음에 대한 느낌과 의미를 나누는 워크숍이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유익한 기회가 된다. 때로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나는 어떤 식으로 죽고 싶은가?” “내 장례식은 어떻게 해주기를 원하는가?” “내가 입던 옷이나 아끼는 물건들을 어떻게 처리해주기를 원하는가?” 등에 대해 서로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밤에 잠드는 것은 죽음에 대한 연습이고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은 부활에 대한 연습이 아닐까?!

 

6. 유언장을 작성해 보자.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고 유언장을 작성해 보자. 생일날 저녁에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매년 생일을 맞을 때마다 지난 1년간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고, 다가올 새로운 한 해의 삶을 계획하면서 ‘금년에 죽을지도 모르니까’ 하는 마음으로 수정해 둔다면 9.11 뉴욕 테러와 같은 예기치 않은 일을 만나게 되어도 일부는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니까. 유언장에는 자신의 재산에 대한 처리 문제와 함께 장기 기증도 포함한다면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쓴 유언장이 실제 효력을 발휘하려면 변호사를 통해 공증해 두어야 하지만.

 

7. 죽음 및 내세와 관련된 종교적 교훈에 유념하자.

죽음은 현실 문제이지만 철학적 명제(命題)요, 종교에서 많이 다루는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죽음이나 내세에 관련된 종교적 교훈에 유념하여 평소의 삶을 잘 꾸려 나간다면, 언젠가 다가올 죽음 앞에서 인간다운 위엄을 가지고 본향(本鄕)에 돌아가듯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가 있을 것이다.

 

 

말기 환자를 어떻게 도울까?

 

1. 가족이 말기 환자라는 진단을 받게 되면…

사랑하는 가족이 말기암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면 환자와 가족 모두다 너무 당황하고 놀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게 된다. 이럴 때는 다음의 사실들을 유념하여야 한다.

 

(1) 담당 의사에게 사실을 확인하고 설명을 요청하라.

환자와 그 가족은 그럴 권리가 있다. 진단명과 병황(병황)에 대해 자세히 알려달라고 요철할 것을 권하고 싶다.

담당 의사에게 남아 있는 치료 방법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요청하라. 할 수 있는 치료가 무엇이며, 그 방법을 선택할 경우 예상되는 치료 효과는 몇 퍼센트나 되는지 문의한다. 당신은 그런 것을 알 권리가 있다. 또한 담당 의사의 입장에서는 어떤 치료 방법을 추천하고 싶은지 자문을 요청한다.

말기 상태임을 통고 받은 경우, 가능하면 다른 의사에게 한 번 더 자문을 구해 보라.

 이 경우 전문가(예를 들어 암인 경우는 종양 내과 의사, 말기암인 경우는 호스피스 교육을 받은 의사)에게 문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가족회의를 하라.

이상 모든 결과를 가지고 가족회의를 하라. 가족회의에는 환자를 포함하여 의사 소통이 가능한 전 가족이 참여하도록 하는데, 이때 환자에게 병황을 알리는 거에 대한 갈등이 있을 수도 있다.

어떤 가족들은 위암을 위궤양이라는 정도로 얼버무리기도 하는데 이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의사가 말하는 모든 사실을 직설적으로 다 이야기해 주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한데, 이 경우는 충격이 커서 오히려 환자가 의사의 예상보다 훨씬 발리 사망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곡한 표현으로 점진적으로 알려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족회의를 통해 서로 충분히 토의를 하였다면 이제 어떻게 할지를 결정하여야 하는데 이 때, 정말로 환자에게 편안한 것이 어떤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기를 권하고 싶다. 만일 완치를 위한 치료의 기회가 아직 있는 경우라면 호스피스보다는 적극적인 치료를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증상 조절을 위한 호스피스 치료를 받는 것이 환자나 가족에게 여러 모로 도움이 된다. ‘그 집 아들 효자’라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어머니(혹은 아버님)이 편안하게 돌아가실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환자 본인이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에 유의하여서 결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3) 호스피스 기관에 가입하라.

만일 호스피스 치료를 받기로 결정하였다면 가까운 호스피스 기관에 문의하여 가입하면 된다. 호스피스 기관은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전국적으로 산재하고 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호스피스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4) 아직 살아있는 동안 현재의 삶을 즐기게 배려하라.

말기 환자라고 하여도 죽음을 준비하는 한편, 현재의 삶을 즐길 권리가 있다. 현재의 시간과 공간 속에 ‘함께 살아 있다’ 는 사실에 감사하고, 가족과 함께 서로의 존재를 가슴 깊이 느끼며 진한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떠나는 사람에게도 뒤에 남는 가족들의 마음에 추억을 만들게 되고, 사별 과정을 더욱 수월하게 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5)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원하는 대로 해주라.

환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는 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여러 가지 걱정되는 것, 염려되는 것들에 대해 혹은 그냥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들에 대해 잘 들어 주고 당부의 말을 하며 그렇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좋다. 혹시 어디를 가보고 싶다거나 무엇을 하고 싶어하면 가급적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다.

 

(6) 예비적 슬픔을 함께 나누라.

환자에게도 가족에게도 곧 다가올 죽음을 생각하며 미리 슬퍼하는 마음이 있다. 혼자 슬퍼하기보다는 환자와 함께 슬픔을 나누는 것이 낫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가족이 슬퍼해 준다는 사실이 오히려 위로가 될 수 있다. 환자가 원한다면 함께 슬픔을 나눌 수 있도록 환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 장례식을 미리 치러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7) 화해하라.

서로 다투었던 일이 있었다면, 먼저 사과하고 화해하는 것이 좋다. 혹시 환자가 화해를 청하면 받아들이고 용서하라. 이 땅에 묶었던 것들을 다 풀고, 편안히 떠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좋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뒤에 남은 사람의 마음도 편안하게 해준다.

 

(8) 최선을 다해 환자를 돌보라.

환자와 함께 보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기억하고 최선을 다하라고 권하고 싶다. 말기 환자가 가지고 있는 신체적 증상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호스피스 간호사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이 좋다. 환자들 돌보는 일이 힘들고 짜증이 나더라도 마지막까지 웃는 얼굴로 대하는 것이 사별 후에 도움이 된다.

 

(9) 필요한 도움을 청하고 받아들이라.

가족 중에 말기 환자가 있으면 온 가족의 삶이 환자에게 매이게 되고, 많은 부담을 느끼게 된다. 주저하지 말고 친지나 지인, 그리고 호스피스 기관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다. 환자를 돌보는 일은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하는 것이 덜 부담스럽다.

어떤 분들은 호스피스 의사나 간호사의 도움은 받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가족이 지치지 않고 끝까지 환자를 잘 돌보려면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정기적으로 쉬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게 되어 한자를 잘 돌 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또한 가족 중 한 사람에게만 환자를 맡겨 놓는 것보다 모든 가족들이 조금씩이라도 돌아가면서 함께 환자를 돌보는 것이 가족애를 나누는 데도 도움이 된다.

 

(10) 때가 되면 “안녕”이라고 말하라.

임종이 가까워 오면 환자를 보내 주어야 한다. 가족이 ‘안 된다’ 고 하며 마음으로 붙잡고 있으면, 환자는 죄책감 때문에 떠날 수가 없다. 죽음에 임박한 환자를 위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배려는 마음으로부터 “당신이 준비가 되었을 때 떠나도 좋다”고 허락해 주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은 가슴이 찢어지고 목이 메이는 일이지만, 시간이 되면 “안녕” 이라고 말해 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 만일 다시 만날 기약이 있다면 이 말은 조금 더 하기가 쉬울 것이다.

 

 

임종 과정이 시작되면 호스피스에서는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려드린다. 해외에 있는 친지들이나 지방에 있는 가족들에게는 이때 연락을 해서 마지막으로 환자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드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임종은 자연스런 일이므로 집에 있던 환자를 병원 응급실로 모시고 갈 필요는 없다.

임종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 기술하였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2. 자원봉사자로서 말기 환자를 돕고 싶다면…

 

건강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나누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하는 일이다. 이는 건강할 때, 아직 가진 것이 있을 때, 먼저 가는 사람들을 보살펴 주고 아울러 자신의 생에 대해서도 반추해보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다. 말기 환자와 가족을 효과적으로 돕기 위해서는 다음의 사실들을 유념하여야 한다.

 

(1) 호스피스 교육을 받는다.

말기 환자와 가족을 돕는 일은 반드시 먼저 교육을 받아야만 한다. 특수 전문 자원봉사다. 호스피스 교육은 전국적으로 수십 개의 호스피스 기관에서 자체적으로 하고 있는데, 한국 호스피스 협회에서 30시간 이상 교육하도록 표준안을 제시해 놓은 것이 있다. 교육 수료 후에는 일정 기간이 지나고 일정 시간 이상 봉사를 하면 자격 인증시험을 볼 수 있는데, 합격하면 인증서를 준다.

 

(2) 호스피스 팀에 소속되어 함께 활동한다.

호스피스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의료인과 비의료인이 함께 다학문적인 호스피스 팀을 구성하여 제공하는 서비스다. 따라서,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하기 원하는 사람은 가까운 호스피스 기관에 회원으로 등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호스피스 팀에 소속되어 팀장(조장)의 지도 아래 함께 활동하는 것이 환자에게도 본인에게도 도움이 된다.

 

(3) 내가 가진 것을 활용하여 돕는다.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건강, 시간, 따뜻한 마음, 음식 솜씨, 미용기술, 운전, 집안일, 청소 등 무엇이든지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봉사하도록 한다.

 

(4) 정기적으로 시간을 할애한다.

말기 환자와 가족에게는 호스피스에서 정기적으로 방문해 주는 것 자체가 희망이 될 수 있다.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시작하기로 했다면, 이 일을 당신 삶의 일부분으로 만들라고 권하고 싶다. 적어도 1주일에 한나절은 따로 떼어두고 정기적으로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시간을 할애하여야 한다.

 

(5) 배운다는 자세로 겸손하고 진실되게 접근한다.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은 말기 환자가 아니다. 교육을 받았다고는 해도, 우리가 만나는 말기 환자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자기 삶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고 있기에 매 순간 배운다는 자세로 겸손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6) 환자와 함께 오늘, 이 시간을 즐기도록 한다.

오늘 이 시간 (hear and now), 환자는 우리와 함께 살고 있음을 기억하라. 그가 비록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해도, 지금 이 시간에는 살아 있는 것이다. 환자의 기분에 따라 다르겠으나 그와 만나는 매 순간을 그와 함께 즐기도록 하라고 권하고 싶다.

 

(7) 가족의 아픈 마음을 표현하도록 하고 들어 준다.

사랑하는 가족을 병으로 떠나 보내야 하는 가족의 마음은 한없이 아프고 슬프다. 기회 있을 대마다 이들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격려하고 잘 들어주는 것이 좋다. 때로는 두 명이 함께 방문하여 한 사람은 환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머지 한 사람은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8) 가족의 신체적 부담감을 덜어 준다.

오랜 병수발로 인해 호스피스에 가입할 때쯤이면 가족들은 신체적으로 지치고 소진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환자를 돌보러 간 경우, 가족에게 봉사자가 있는 동안 가서 쉬라고 말해주는 것이 좋다. 잠시 쉬고 나면 다시금 환자를 잘 돌볼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또한 방문했을 때는 접대를 받지 않도록 가급적 사양하여야 하는데 이 또한 가족의 신체적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해서이다.

 

(9) 가능하면 환자와 가족을 위하여 기도한다.

호스피스 팀이 최선을 다해 열심히 봉사한다고 하여도, 인간의 힘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당신이 만일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환자를 방문하기 전과 후에 잠시 틈을 내어 환자와 가족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 이유는, 기도가 우리의 불완전한 봉사에 마침표를 찍어주기 때문이다.

 

(10) 자기 관리를 한다.

죽어 가는 사람을 대하는 일은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일중의 하나다. 스트레스를 해결하고 심신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잘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곧 임종하려는 환자를 어떻게 도울까?

사람이 임종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상호 연관이 있으면서도 독립적인 두 개의 서로 다른 측면이 죽음의 과정(임종과정)을 진행한다. 그 하나는 신체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정서적-영적 측면이다. 신체적 측면에서는 몸의 모든 기능을 정지하기 위한 마지막 과정을 시작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신체의 이런 변화는 의학적인 응급 조치가 필요하지는 않은 일련의 조용한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신체적 변화는 몸이 스스로 정지하는 것을 준비하는 정상적이고도 자연적인 과정이며 이에 대한 가장 적절한 반응은 편안하게 그 과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임종 과정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정서적, 영적인 측면은 신체적 측면과는 조금 다른 과정을 거친다. 죽어가는 사람의 영혼은 자신이 속해 있었던 몸으로부터 떠나기 위해 준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떠남은 그 자체의 우선 순위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는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을 해결하고, 가까이 지내지 못했던 사람과 화해하는 일이나 가족이 환자의 죽음을 기꺼이 허용해 주는 것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과정은 영혼이 물질 세계로부터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 준비하는 정상적이고도 자연적인 과정이다. 이에 대한 주위 사람의 가장 적절한 반응은 이러한 떠남을 지지하고 격려해 주는 것이다.

사람의 신체 기능이 멈출 준비가 되었을지라도 끝내지 못한 일이 있다거나 누군가 중요한 사람과 화해하지 못했을 때에는 그 일을 끝내기 위해 조금 더 살아 있을 수 있다. 반대로 정서적, 영적으로는 떠날 준비가 다 되었어도 몸이 마지막 신체적 과정을 완전히 끝내지 못했다면 그것을 끝낼 때까지 살아 있게 된다.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과정은 몸이 정지하기 위한 자연적인 마지막 과정을 완전히 끝냈고, 또한 영혼이 화해와 끝마침이라는 그 자신의 자연적 과정을 완전하게 마쳤을 때에 일어난다. 말기 환자를 돌보는 사람들은 환자가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할 때에 환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지, 또 환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가족들이 이에 대해서 알면 환자가 가족의 지지와 이해 속에서 편히 죽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이러한 도움은 환자의 가족이 환자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 된다. 임종 과정이 진행되는 기간은 환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지만 대개 2~3 일이 소요된다.

다음에 언급하는 내용들은 임종 과정 동안 말기 환자들에게 나타나는 일반적 증상과 그에 대한 대처 방안을 기술한 것이다. 모든 말기 환자가 다 똑같은 임종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니다. 임종과정은 사람마다 독특하여 살아온 배경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이런 증상이 모든 환자에게 언제나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비슷한 양상을 나타내는 것을 보아왔다.

 

 

1. 임종과정에서 나타나는 신체적 증상과 적당한 대응책

 

(1) 차가워짐

환자의 손과 발부터 시작해서 팔과 다리의 순서로 점차 싸늘해지면서 피부의 색깔도 변하게 된다(하얗게 혹은 파랗게). 혈액 순환의 저하가 사지로부터 점차 몸의 중요한 기관으로 이행되는 것은 정상적인 순서이다. 이때 환자에게 담요를 씌워 주어서 따뜻하게 해주는 것은 좋으나 전기장판이나 전기담요와 같은 전기기구는 화상의 위험이 있으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2) 수면

환자는 점차 잠자는 시간이 차차 많아지고 의사 소통이 어려우며 점차 자극에 대해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신진대사 변화의 일부로 생기는 정상적인 상태이다. 이럴 때는 환자의 몸을 흔들거나 큰 소리로 말하는 것보다 환자 옆에 앉아서 그의 손을 잡은 채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환자기 반응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정상인에게 말하는 것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3) 혼돈

환자는 시간, 장소,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 혼돈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 역시 신진 대사의 변화로 인해 생기는 결과이다 이럴 때는 환자에게 내가 누구냐고 묻기보다는 내가 누구라고 이름을 밝혀 주는 것이 좋다. 무언가 의사 소통을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지금은 약 드실 시간입니다” 와 같이 부드러우면서도 분명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는 것이 환자의 안위를 위해 중요하며 “당신은 이제 아프지 않게 될 것입니다”라는 식으로 의사 소통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

 

(4) 근육이완

환자는 근육이 무력해져서 대소변을 조절하지 못하고 실금, 도는 실변하게 된다. 이때는 환자와 침상을 청결하고 편안하게 유지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침상에는 홑이불 밑에 비닐을 씌우고 환자에게는 기저귀와 같은 것을 채워 주면 도움이 된다.

또한 척추의 S자 곡선을 지지하고 있던 근육이 이완되어서 허리 밑의 공간이 없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5) 울혈

환자의 가슴에는 돌 구르는 것과 같은 소리가 들리게 되는데, 이는 심각하거나 새로운 통증이 생기게 되어 나는 소리가 아니고 수분 섭취가 적어지고 분비물을 기침으로 내보내는 능력이 저하되면서 나타나는 정상적인 변화 상태이다. 이때는 환자의 고개를 옆으로 부드럽게 돌려주어 분비물이 잘 배출되도록 해주고, 젖은 헝겊으로 입 안을 닦아서 깨끗하게 해주는 것이 좋다.

 

(6) 불안정함

환자는 불안정해지고 같은 동작을 반복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시진대사의 변화로 인해 뇌에 산소 공급이 부족해져서 생기게 된다. 이때 억지로 그런 동작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거나 억제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보다는 환자의 이마를 가볍게 문질러 주거나 책을 읽어 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 혹은 조용한 음악을 침상 발치 쪽에서 들려주는 것이 환자를 차분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7) 수분과 음식물의 섭취량 감소

환자는 점차 음식이나 수분을 잘 먹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환자의 몸이 소화하는 일보다는 다른 기능을 하는 데에 더욱 에너지를 소모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때는 억지로 먹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 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환자를 오히려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대신에 작은 얼음 조각이나 주스 얼린 것 등을 입에 넣어 주는 것이 입안을 상쾌하게 해준다. 글리세린에 적신 솜으로 구강 간호를 해주는 것과 이마에 찬 물수건을 얹어 주는 것, 작은 스프레이에 넣은 생수를 입안에 조금씩 부려주는 것도 도움이 된다.

 

(8) 소변량 감소

수분 섭취가 적어지고 신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수분의 순환도 감소되므로 자연히 소변량이 줄어들게 된다. 이때는 호스피스 간호사에게 의뢰하여 소변줄을 꽂아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만일 이때 일거 주사를 통해 인위적으로 다량의 수분을 공급하게 된다면 환자는 오히려 부종과 통증으로 고통스러워하게 된다.

 

(9) 호흡하는 양상의 변화

정상적인 호흡의 양상에서 중간 중간 무호흡 상태가 동반되는 전혀 다른 형태의 호흡을 하게 되는데 이를 체인 스톡 호흡 이라고 한다. 이는 내부 기관의 순환 감소로 인해 일어나는 일반적은 증상이다. 이럴 때는 머리를 높여주고 환자의 손을 잡아 주며 부드럽게 이야기하는 것이 환자를 편하게 해준다.

 

 

2. 임종 과정에 나타나는 정서적, 영적 변화와 적절한 대응책

 

(1) 위축

환자는 반응이 없어지고 위축되며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런 상태는 환자기 주변의 모든 관계로부터 해방되고 떠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환자는 마지막까지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환자에게 이야기할 때는 정상적인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가족인 경우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좋다. 말할 때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혀 주고 환자가 편안히 죽을 수 있도록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좋다.

 

(2) ‘환상’과 같은 경험

환자는 이미 죽은 사람과 얘기하거나, 또는 다른 이에게는 보이지 않거나 실제로 없는 것을 봤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것은 환상이나 약리 작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환자가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고, 살아 있는 상태에서 죽은 상태로 전환되려고 준비하는 중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환자가 보고 듣는 것에 대하여 무시하거나 따지거나 부정하지 않는 것이 좋다. 옆에 있는 사람이 볼 수 없거나 들리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그 환자에게도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들을 정상적이고 평범한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 주어야 한다. 만약, 그런 것들이 죽어가는 사람을 놀라게 한다면, 그런 것은 정상이라고 설명해 주는 것이 좋다.

 

(3) 안절부절 못함

환자는 자꾸 무언가를 되풀이하고 안정되지 못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이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로 인해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인데, 이런 상태는 환자로 하여금 편안하게 죽지 못하게 한다. 호스피스 직원이나 가족들은 환자로 하여금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는지 살펴보고 끝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평소 환자가 자주 갔던 장소, 좋았던 경험을 상기시켜 주고,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읽어주거나  음악을 들려주고 환자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도 도움이 된다.

 

(4) 대인관계 감소

환자는 몇 사람, 혹은 단 한 사람과만 함께 있으려 한다. 이는 환자기 떠나기 위해 준비한다는 신호이며 그가 죽기 위해서 어떤 사람이 제일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환자가 마지막까지 함께 있고 싶어하는 소수의 사람 속에 포함되지 않았다 해도 그것은 당신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환자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는 당신이 이미 환자에 대해 해주어야 할 책임을 다했으며 이제는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는 때라는 의미이다. 만일 당신이 환자가 마지막까지 함께 있고 싶어하는 소수의 사람 중 하나라면 그것은 환자가 편히 죽기 위해 당신의 지지와 확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5) 환자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사랑하는 가족(임종환자)의 죽음에 대하여 죄의식을 갖지 않고, 죽음을 인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임종하는 환자는 환자 자신에게는 많은 불편이 있어도 가족의 허락이 없으면 더 오래 살려고 한다. 그 순간에, 죽어가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그가 준비되어 있을 때 언제라도 죽을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6) 마지막 인사

환자가 죽을 준비가 다 되었고 가족이 환자를 보낼 수 있으면 이제 “안녕”이라는 인사를 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안녕”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사랑의 선물이 될 것이며 이는 환자가 삶을 마무리하고 육체로부터 떠나는 일을 성취하도록 해준다. 자족들이 환자와 함게 침대에 누워서 손을 잡거나 입을 맞추고 환자를 꼬옥 껴안아 주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것이 좋다. 나중에 ‘왜 내가 그때 그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하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이때 필요한 이야기를 다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냥 간단하게 “당신을 사랑해” 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 말에는 즐거웠던 추억, 장소, 함께 나누었던 행동들이 포함되어 있다.

“내가 잘못했던 일이나 불편하게 해주었던 것에 대해서 미안하게 생각하오.” “~에 대해서 감사하오.” 하는 이야기들이 이때에 할 수 있는 말들이다. 눈물은 “안녕”이라는 말의 일부분이다. 이때의 눈물은 우리의 사랑과 우리가 환자의 죽음을 인정한다는 것을 표현하여 보여 주는 것이므로 눈물을 숨길 필요는 없다.

 

 

3. 사망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숨을 멈추는 듯하다가 몰아 쉬면서 체인 스톡 호흡을 하던 환자가 코로 긴 한숨을 내쉬고는 숨을 멈추어 버린다면 임종하였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아주 작은 솜털이나 휴지 조각을 환자의 코 밑에 대어보면 숨을 쉬는지 안 쉬는지 알 수가 있다. 환자가 사망하는 경우에는 호흡이 없으며 맥박도 없다.

환자가 사망한 경우에는 숨을 쉬지 않고 심장이 뛰지 않으며 항문 괄약근이 이완되어 대소변이 나오기도 한다. 외부의 자극에 대한 반응이 없으며, 눈꺼풀은 약간 열려 있고, 눈은 어떤 한 점에 고정되어 있으며, 깜빡거리지도 않고, 턱은 늘어지고, 입은 약간 벌어져 있다. 동공이 열려 있으며 빛에 대한 반응이 없다.

 

 

 

나가며

죽음이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이를 잘 준비하여 당당하게 맞이하는 것이 아름답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이라는 책에서 모리는 죽음을 ‘여행을 떠나는 것’에 비유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여행을 떠날 때 무엇을 꾸려가지고 가는지 물어보기 위해 자신에게 온다고 하였다. 이 세상을 떠날 때 무엇을 가지고 갈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것들은 대부분 두고 가야 하지만 믿음이나 사랑, 소망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들은 가지고 갈 수 있다. 모리는 죽음을 향해 가는 자신의 마음을 보여 주고 싶다고 하였다.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텔레비전 인터뷰도 했고 찾아오는 사람도 만났다. 대학 시절의 제자인 미치 앨봄을 화요일마다 만나곤 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루게릭 병을 앓고 있었던 그는 마비가 어디까지 오면 자신이 죽게 될지 알고 있었고 또 자연스럽고도 당당하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 분초 分秒를 다투며 멈출 줄 모르는 수레바퀴처럼 살던 언론인 미치 앨봄으로 하여금 멈추어 서서 생각해 보도로고 만드는 그 무엇이 그에게는 있었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그리고 필자는 인생의 마감시간에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자신의 임종을 맞이할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조금 다른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인간에게는 두 개의 눈이 있다. 필자는 그 이유를 인간이 살면서 먼 곳과 가까운 곳을 함께 보고 균형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의 삶을 살면서도 삶과 죽음을, 더 나아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돌부리에 채이지도 말고 진흙탕에 빠지지도 말라는 의미가 아닐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한다. 잘 살려면, ‘내가 누구인가?’ ‘주인이 누구인가?’ 를 알아야 하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를 알아야 한다. 두 눈을 가지고 가까운 곳과 먼 곳을 동시에 바라볼 줄도 알아야 한다.

언제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내려가게 될지, 어떤 모습으로 내려가야 할지 생각해 보고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야 한다.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보다는 사랑하며, 나누며,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에서 죽음에 임박한 자신의 심경을 피력한 말이 생각난다.

 

“관제 灌祭 와 같이 내가 벌써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 義 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主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가톨릭 성경 version: (얼마나 이해하기 쉽습니까?)

(티모데오 에게 보낸 둘째 서간 중에서)

티모데오 2서 4: 6~8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 지금도 ‘필사 筆寫’ 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Disclaimer: 여기에 실린 글은  copyright가 된 책, 기사를 ‘발췌, 전재’를 한 것입니다. 모두 한 개인이 manual typing을 한 것이고, 의도는 절대로 저작권 침해가 아닌, fair use의 정신을 100% 살린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적인 제한,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었고, 목적은 단 한 가지 입니다. 즉 목적을 가진 소수 group (church study group, bible group, book club) 에게 share가 되었습니다. password protected가 되었는데, 만일 이것이 실패를 하면 가능한 시간 내에 시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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