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선생질이 날로 고달파지고 있었다. 파김치가 되어 퇴근한 그를  아내는 늘 조심스럽게 대했지만, 오늘은 그 조심성이 지나쳐 눈치꾸러기처럼 굴고 있다는 걸, 그는 피곤하고  피곤한 가운데도 느끼고 있었다. 마침내 아내가  입을 열었다. 저녁 밥상을  치우다 말고였다. 그가 저녁밥을 달게 먹고 충분히 생기를 회복했다는 싶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동민이 결혼날짜 잡았대요. 팔월 초나흘루다요. 팔월이면 그쪽도  한창 더울 때 아녜요. 왜 하필 복중이냐고 했더니 당신이 참석하려면 암만해도 여름방학이라야 할 것 같아서 신부 쪽에선 오월에 하고 싶어하는 걸 우리 쪽에서 그렇게 하자고 우겼대나봐요. 뭐든지 당신 형편에 맞추고 싶어하는 건 우리  엄마 아빠의 못 말리는 버릇이잖아요.  그렇지만 너무 부담 느낄 건 없어요.”

  될 수 있으면 지나가는 말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싶은  듯, 아내는 고무장갑을 낀 채 말하고 나서 돌아서서 하던 설거지를 계속했다. 동민은 막내처남이고, 처가는 맏딸을 그에게 시집보낸 후 온 가족이 이민을 가 캘리포니아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별로 폐 끼칠 일 아닌 것 가지고도 친정일이라면 우선 저자세로 나오는 아내가 안쓰러워,  그는 짐짓 흔쾌하게 말했다. “잘됐네. 오래간만에 쐬는 바깥바람인데 우리 느긋하게 다녀옵시다. 아이들도 데리고 가지 뭐. 장모님도  사위보다는 손자들이 더  보고 싶어 여름방학으로  정하셨을걸, 아마.”

“정말이에요, 당신? 미국 대사한테 사과 안 받고 미국 가도 괜찮겠어요?”

  아내가 고무장갑을 부랴부랴 벗어놓으면서 심각하게 물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제서야 그는 아차, 싶으면서 아내가 여지껏 왜 그렇게 석연치 않게 굴었는지 알아차렸다. 아내라고 그가 정말로 미국 대사로부터 사과를 받아낼  수 있으리라고 믿고 기다린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반색을 하면서도 실망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아내가 안 잊어버린 걸 그는 깜박 잊고 있었다니. 거기에 대해 아내가 실망하고 있다면 그는 마땅히 그 자신에게 실망해야 했다. 아내는 그가 어쩔 수 없이 끌어들인 입회인이었을 뿐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그는 마치 아내보다 훨씬 못생긴 여자와 정열없는 오입을 하다 들킨 것처럼 아내에게는 화가 나고  자신에게는 정이 떨어졌다. 엉망으로 고약한  기분이었다. 그리고는 지지리 못나게도‘무시당해 싸다니까, 우리 민족은’하고 그의 건망증, 그가  당한 모욕을 민족성에다 뒤집어씌우려고 했다.

  이창구 선생이 김혜숙의 전화를 받은  건 재작년 삼월 중순이었다. 학교  교무실에서였다.

그때 그는 가르치는 게 너무 어렵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건 그의 생각의 버릇일 뿐 최근에 특별히 어려운 일이 생긴  건  아니었다. “선생님, 이창구 선생님  맞죠? 안녕하세요. 건강하시죠? 23회 김혜숙이에요.”상냥하고 상쾌한 목소리였다.“자네가 웬일인가?”

  그는 어정쩡하게 아는 척을 했지만 특정한 얼굴이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그는 사립인  B 여자고등학교에서만 이십년을 넘어 국어 선생 노릇을 해왔고 그동안 그 학교를 거쳐간 졸업생 중 김혜숙이란 이름을 꼽자면 몇십명은 좋이 될 것이다. 김혜숙도 그의 흐릿한 대꾸에서 그런 걸 느낀 것 같다.

  “여기 미국이에요. LA요. 유학 떠나오기 전에도 학교로 인사 갔었는데… 23회 졸업식 때 전체수석 해서 이사장상 받은 김혜숙이라구요.” 생각나다마다. 김혜숙은 그가 담임 맡은 반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본  수석졸업생이었다. 집안 반듯하고,  용모 깔끔하고, 타고난 머리도 우수한데다 좀 융통성 없는 공부벌레이기도 해 서울대학에  무난히 합격을 했다. 담임이 특별히 공들이거나 신경쓸 필요가 없는 모범생이었다. 김혜숙이 누구라는 게 분명해지자 그는 반갑다는 생각보다도 쏜살같이 23회 졸업식 무렵이 떠올라 께름칙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때 일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교장선생을 비롯한 교직원 일동이 입을 모아  한턱내라고 난리들을 쳤다. 전체 수석을 낸  반 담임은 으레 그렇게 하기로 돼  있는데 이번 수석은 서울대학까지 붙었으니 내도 거하게 내야 된다는 것이었다.  고3담임은 처음 맡아봤지만 그거 비슷한 턱은 해마다 얻어먹어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수준으로 내야 하는지는 짐작이 되지 않았다. 이 학교는 워낙 회식이 잦았다. 심지어는 여선생이 새로 산 옷을  입고 와도 잘 어울린다, 얼마짜리 어디 젠가, 한바탕 요란을 떨고 나서 누가 착복식 하라고  조르면 구내식당에서 먹는 점심에 불고기가 얹혀 나오기도 했다.  식당 아줌마한테 고깃값을 얹어주면 그 정도는 봉사를 해준다고  했다. 그도 그 정도의 한턱을  쓸까 하다가 겹경사니까 거하게 내야 된다는 열화 같은 요청이  마음에 걸려 조촐한 대중음식점에서 갈비로  하기로 했다. 초대할 때부터 선생들은 호텔 뷔페가 아닌 걸  이상해하는 눈치더니 갈비를 뜯으면서 한턱을 내는 주체가 김혜숙의 부모가 아니라는 걸 알고 나서는 갈비맛이 뚝 떨어지는 얼굴로 일제히 그를 바보취급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것처럼 분개하는 선생도  있었고, 있는 집이나 공부 잘하는 아이 둔 학부모는 이러저러하게 길들여야 한다는 훈계를 하려 드는 이도 있었다. 눈 깜박할 사이에 맹렬히 씹히고 있는 건 갈비가 아니라 그였다. 그는 죄지은 것처럼 이 모든 비난을 감수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또한 그런 집단의 일원이라는 게 부끄러워 마음이 화끈거렸다.

  그가 교직에 몸담게 된 것은 교육에 대한 남다른 이상이 있어서도 아니었지만, 단지 생계유지 수단만도 아니었다. 그는 격렬한  데모와 휴교가 반복되던 칠십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비록 검거되거나 제적당한 적은 없어도 운동권 노래를 목이 쉬어터지게 부르면서 의롭지 못한 권력을 규탄할 때의 기분을 알고 있었다. 용기가 없다고 해야 할지, 겁이 많다고 해야 할지 운동권에 진한 동류의식을 느끼면서도 붙들려 들어갈 만큼 적극적으로 투신하지도  못한 주제에 대학 다니는 동안 내내 관심은  그쪽에 가 있었다.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을 것 같던 동지들의 하늘을 찌를 듯한 의기도  결국은 일과성 정열로 끝나버렸지만 극히  일부는 위장취업까지 하면서 민중 사이로 파고 들었다. 그는 그 나중 소수가 취한 언행일치가 존경스럽기도 하고, 그 과장된 몸짓이 못 미덥기도 했다. 그는 그런 어정쩡한 생각에 알맞은  진로를 택했다. 한몸 바쳐 민중을 위하는 것도 좋지만 직접 민중으로 살아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교직을 대학교육을 받은  먹물들이 할 수 있는 가장  민중적 삶이라고 생각한 것은, 주로 여학생들이나 듣는 교직과목을 선택하면서 의식하게 된, 안됐다 쩨쩨하다는 식의 주의의 경멸과 실망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교단에 처음 선 날 얻어갖게 된 별명은 계집애였다. 남자로서는 곱살한 편인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얻다 둘지 몰라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여학생들은 총각선생이 즈네들한테 부끄럼을 탄다고 여겼나보다. 손뼉까지 치면서  좋아했다. 젊고 괜찮은 남자를 손아귀에  쥐고 가지고 놀고 싶다는 숨은 욕망이 표적을 찾았다 싶은 득의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억에 의하면 여학생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미처 폭발하지 못한 자유에 대한 미련과, 어쩌자고 교단에 서자마자 분명해진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낭패감 때문에 그렇게 얼굴이  달아올랐던 것이다. 계집애라는 별명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곧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선생으로 변해버렸고, 그보다 먼저 총각딱지도 떼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툭하면 계집애처럼 자신이 없어져 망설이고 수줍어하는 마음은 여전했다. 다만 얼굴을 붉히지 않는다뿐이었다. 얼굴 대신 마음이 얼마나 화끈거리는지는 자신만이 느낄 수 있었다.  결국은 시대와의 충돌을 피해 여기 이렇게 안전지대에 서 있구나 싶은 자격지심은 낯짝보다는 마음을 붉히게 했다.

  “오랜만이군. 무슨 일인가?”그는 LA 아니라 달나라라고 해도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은 시들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을 초청하고 싶어서요. 5월 26일 전후해서  어떠세요?”“고맙긴 하지만 나 미국 구경 실컷 했네. 아이들 외가가 다들 그쪽에 살거든.”“관광 오시라는 게 아니라요, 제가 몸담고 있는 C대학 동아시아학과 세미나에 정식으로 선생님을 초청하려구요. 벌써 삼년째 매년 ‘식민지 체험과 근대성: 한국 일본 중국의 경우’란 주제로 해당국가 작가를 초청하는 모임을 가져왔는데 올해는 한국의 경우고, 제가 주제발표를 하게 돼 있어요.”“날더러 그걸 참관하러  오라는 소리인가?”“설마요. 제 논문이  선생님 소설「삿갓재 마을」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식민지시대를 분석한  거거든요. 제가 얼마나 열렬한 선생님 소설의 애독자이자 성실한  연구자인지 모르셨죠?” “그래서?” 그가 듣기에도 그의 목소리는 울컥 신경질적이었다. 그는 제자나 심지어는  제 자식한테도 헐렁하고 무심한 편이어서 무책임하다는 소리까지 듣는 반면 그의 문학에 관해서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과잉보호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

  “선생님, 그렇게 무섭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꼭 제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추궁받는 것 같잖아요. 그건 그렇구 빨리 본론을 말씀드리자면요, 선생님을  원작자로 초청하는 거죠. 우리 연구모임 참석자들에게 「삿갓재 마을」의 영어번역판을 미리 돌려서 기본 지식을 갖게  하고 제 논문의 요약본도 보내서 그날 토론의 발제문으로  사용할 계획이에요. 당일의 진행순서는 아마 선생님 소개가 있은 뒤, 물론 고등학교  선생님으로서가 아니라 작가 이창구로서 소개되고 나서 제가 발제를 하고 토론이 시작될 텐데, 제 글에 대한 질의응답이 있은  뒤에, 참석자들로부터 선생님께 많은 질문이 쏟아질 것 같아요. 이 단계에서 제가 할 일은 토론의제를 솎아내는 것과 토론과정에서 매개역할을 하는 것이라 생각되는데요, 이 과정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서는 대략이라도 제가 식민지 체험과 근대성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를 어느정도 미리 인지하고 있어야 그때그때 통역이  제대로 될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  그 문제의 대해 이삼십분 분량의 말씀거리를 미리 준비해 오시는 것도 한 방법인  것 같아요. 그러면 또 번역이 문제인데, 선생님께서 미리 초안을 주시든지 하루이틀 먼저  오셔서 저하고 충분히 말을 맞추시든지…전 정말 잘하고 싶어요. 미국 내에서도 특히 캘리포니아 쪽에서 동아시아 문화의 관심들이 많아서 연구자들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거든요.”“그럼 간혹 영역하지 않은 내 소설을 우리말로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친구도 있겠구만.” “아뇨. 아직 그 정도는  아녜요. 약간 알아듣는 친구도 있긴 하지만… 통역문제는 염려 마세요. 제가 잘할 자신 있으니까요.”“「삿갓재 마을」의 영역본이라는 것도 자네가 만든 건가.”“아니지요, 그건.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헬렌 강이 한국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번역해서 이쪽 출판사에서 낸 한국문화단편선집에 그 작품이 포함돼 있잖아요. 혹시 선생님  모르고 계셨어요?” “헬렌 강인가 하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네. 자네 보기엔 믿을 만한 번역가인가?”“그러문요.  일급이에요. 국민학교 다닐 때 이민왔다는데  할머니가 계셔서인지 토속적인 우리말도  잘 알아듣고 영어야 물론 네이티브 스피커 수준이구요. 결혼도 미국사람하고 했으니까요. 제 나이 또랜데도 한국문학을 영어권에 알리는 데 사명감도 있고 야심도 만만찮은 여간 똑똑한 사람 아니에요.”

  그는 거기까지 듣고 나서 정식으로 초청장을 보내주면 가도록 노력하겠다고 성마르게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헬렌 강의 번역본을 사용한다는 소리에  울컥 화가 치밀어 그렇게 조급하게 굴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에 대해 알기로는 이십년 근속의 평범한 교사라는 것은 확실했지만, 소설가로서는 성공한 건지 실패한 건지, 잘 나가는 편인지 못 나가는 편인지, 남이 알아주는지 안 알아주는지, 그 어느 것도 확실한 게 없었다. 그는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못 읽을 정도로  두 가지 이상의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는 젬병이었다. 그런 자신의 주제를 잘 안다고 여기면서도 둘 다 결코 쉽다고 할 수 없는  교사와 문사를 겸직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그렇게 공부 안하고 어떻게 졸업을 할 수 있었는지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로 공부 안하고 대학을 나왔건 만도 그때 배운 걸 밑천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데, 공부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열정을 투자한 이념을 완전히 외면한다면 그건 너무 의리 없는 짓 같아서가 아니었을까.

요컨대 자신에게 정떨어지기가 싫었던 것이다. 교직과 작가는 그의 생계와 자존심을 떠받쳐주는 양쪽 기둥이었다. 자기 확인을 위해서도 일년에 한두  편 정도의 중단편은 어떡하든지 써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지만 시간을 쪼개는 것보다도 교사에서 작가로 완벽하게  변신하지 않으면 한 자도 안 써지는 게 문제였다. 자연히 방학 때 아니면 못 쓰는데 변신하는 동안도 수월찮게 걸리거니와 그 동안은 안절부절 성마르게 구는 게 그의 못 말리는 버릇이었다. 학교에선 그런 일이 없었는데 지금 느닷없이 그 증이 도진 자신이 내심 당혹스러웠다. 오월이면 학기 중인데 왜 그렇게 쉽게 승낙을 했는지 금방 후회가 되면서도 어떡하든지 참석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김혜숙이 뿌리치지 못할 정도로 간곡하게 군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아마 헬렌 강 때문이었을 것이다. 헬렌  강을 만난 적은 없지만 한두 번  전화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 번역을 하면서 미심쩍은 대목을 원작자한테 직접 묻는  태도는 칭찬을 해줄 일일지언정 나무랄 일은 못 됐다. 그러나 오독하기 쉬운 문장이나  작가의 의도가 애매한 은유 따위에 대해 의견교환을 하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 사전만 찾아도 단박 알 수 있는 ‘서까래’나 ‘무리꾸럭’따위 순 우리말의 뜻을 묻는 걸 친절하게 대답해주기란 참을성을 요하는 일이었다. 헬렌 강의 질문이 정신대가 무슨 뜻이냐에 이르러 드디어 그는 말문이 막혔다. 사전적인 해석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정신대가 무언지 모르면서  그 작품을 번역하고 싶어한 번역자라면 그녀가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이건 아니올시다 싶었다.

  정신대 가서 어떤 일을 당했다는 건 작중에 한마디도 안 나오지만 일제 말기의 궁핍한 농촌의 암울하고 희망없는 분위기가 작품의  바탕색을 이루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찢어지게 가난한 친정부모에 의해  팔아 넘겨 지다시피 전실 자식이  주줄이 달린 삼십대 홀아비한테 시집가 내리 삼남매를 낳고  나서 겨우 스물 세살 적인 육이오 때 과부가 되었다. 친정부모가 딸한테 그런 못할 노릇을 하고도 큰소리칠 수 있었던 것은 핑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없는 사람이 딸자식 정신대 안 내보내려니 그 길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해방 후에 태어났으니까 식민지시대에 대해 어렴풋한 기억도  없지만, 그 시대의 가장 억울한 희생자의 몸을 빌려 태어났다. 어머니의 맺힌 한이 고스란히 옮아 붙기를 바라서였을까, 온몸을 원고지에 피나게 비비듯이 쓴 작품이었다. 그렇게 겉핥기로 읽히길 원치  않았다. 영어 좀 한다고 우리말 모르는 것에 대해선 전혀 위축되지 않는 헬렌 강의 당돌한 태도보다도 더 한심한 건 그걸 끝까지 참아낸 자신의 참을성이었다. 한두 작품 번역된다는 걸로 그이 문학이 변방의 언어를 벗어나 세계화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영어 잘하는 사람 앞에서 그가 버릇처럼 느껴온 열등감 때문이었을까. 그 어느 쪽이라 해도 마음이 화끈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의 영어실력이 요즈음의 고등학생 수준에도 못 미치는 건, 국문과를 나온 것 말고도 허구한 날 데모와 휴교로 지새던 칠십년대에 대학을 다녔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 은근히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소설가가  되고 나서부터였다. 작가 대접을 받게 되고 소속된 문한단체까지 한두 개  생기게 되자 해외에서 하는 문학세미나에  참석할 기회도 자비라면 어렵지 않게 주어졌다. 처음에 그는 관광이  아닌 문화교류를 위해 출국한다는데 우쭐우쭐 작가가 된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번족할 뿐 아니라 우애가 유난스러운 처갓집에 무슨 행사가 있을 때마다 맏사위의 자격으로 초청을 받게 되어 세 번에 한 번  꼴로만 출국을 한다 해도 김포공항 출입에 이골이 난 편이었기 때문에 그런 여행과의 차별성이

그렇게 대견했는지도 모른다. 아내도 친정에서 비행기표를  보내주는 여행보다 빠듯한 살림에서 여비를 쪼개 내야 하는 그의  버젓한 해외나들이를 오히려 신나하며 부추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 해외모임에 한두 번 참석해보는 사이에  가족이나 학교 동료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처음부터 외국 작가들 앞에서 자기의 주장을 펴거나 주목받을 만한 발언을 할 수 있길 바란 건  아니었다. 그는 소심할 뿐 아니라 타고난 성품이 워낙 비사교적이었기 때문에 그 떠듬거리는 영어로 누구와 친교를 나눌 엄두도 못 냈다. 그는 그저  언어와 생김새가 다른 동업자들이 하는 짓을 구경하고 그 판이 어떻게 돌아가나 느끼고 싶었다.  그건 그가 자신의 문학에 대해 은밀히 품고 있는 촌스럽다는 자격지심과도 무관하기 않은, 열린  세상과의 그 나름의 소통의 방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문화적인 바람쐬기 정도의 바람마저도  따돌림을 당한 것처럼 느끼고 돌아와야 했다. 그건 그가 국제공통어를 익히지 못해서도 주제발표나 토론에 참가할 기회가 한번도 없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런 답답함하고는  종류가 다른 괴상한 느낌이었다. 아무리 떼거리로 몰려가 많은 자리를 차지해도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그 자리에 소속감이 느껴지지 않은 건 어쩌면  그만의 느낌인지도 몰랐다. 영어에  능통한 원로문인이 외국인에게 통역을 시키고 자신은 당당하게 우리말로 주제발표를 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는데 격앙된 어조로 우리도 적어도 십년  안에 노벨문학상을 거머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걸 들으면서 온몸에 닭살이 돋아 그  자리에서 안절부절 못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그만의 느낌이었을 뿐 딴  참석자들은, 외국인들까지도 그의 논지에  공감과 존경을 표하는 것 같았다. 그만의 느낌, 그게 문제였다.

  그가 예전에 본 영화 중에서 다만 한마디 대사 때문에  잊혀지지 않는 영화가 있다. 유럽사회에서 유럽인처럼 살고 있는 유대인이 진정으로 그 사회에 끼여든 건 아니라는 걸 이렇게 술회하고 있었다. ‘냇물까지 갈 수는 있지만 그 물을 마실 수는 없다’고. 그  한마디는 영어권뿐 아니라 백인들의 언어권에서 그가 느낀 생전 끼워줄 것 같지 않은 느낌과 어쩌면 그렇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지. 그래서 잊혀지지 않을 뿐 그  영화의 주제와는 아무런 상관 없는 소리였을 수도 있다. 그 영화 자체도 아마 보고 나서 당장 잊어버려도 그만인 허섭스레기였는지도 모른다. 줄거리는 물론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재미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밑도 끝도 없이 그 소리만 걸려든 것은 아마 그만이 가지고 있는 안테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듬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만의 느낌이란 그런 것이었다. 남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기꺼이 합류하는 일에 혼자서 망설이고 쭈뼛쭈뼛 수줍음을 타게  만드는 자기만의 느낌 때문에 처세가 변변치  못하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들이 그의 외양을 보고 그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아닌 이창구라는  걸 알아보듯이, 혼자서만 느낄 수 있는 자신 속에 그런 과민성은 그가 남과 다르다는 걸 스스로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정신의 증후였다.

  자신이 그렇게도 변변치 못한 위인이라는 걸 알면서도 김혜숙의 초청을 선뜻 수락하고 만 것은 김혜숙이 의지가 될 것 같아서도, 그쪽 모임을 자신의 이런 약점을 극복하고라도 참가하고 싶을 만큼 대단하게 여겨서도 아니었다. 오히려 대학원생들의 스터디그룹 정도의 모임이려지 싶어 성에 차지 않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건 나중에 차차 하게 된 추측이고 당장 그렇게 성마르게 군 것은 순전히  헬렌 강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아무리 줄거리를 제대로 옮겨 놨다 해도 거기 배어 있는 느낌을 그녀가 제대로  파악했을 리가 없었다. 그건 우리말의 행간 말고는 딴 어떤  언어에도 스며들 수 없는 정서적  호소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필 그런 작품을 번역하겠다고 나선 것은 헬렌 강의 안목 없음, 문학성의 결여라고 생각했다. 양쪽 언어에 능통하다는 거  하나만 믿고 스스로 감동하지 않은  작품을 번역하는 것은 원작에 대한 모독을 지나 죽임인 것만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비록 바늘구멍만한 통로를 통해서라도 그가 피나게 불어넣은 생명력을  표출하고 해명하고 싶었다. 자기  작품에 대한 이런 애정과 의무가 그의 창피하도록 옹졸한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가 김혜숙의 전화통화와는 따로 C대학으로부터  서신을 받은 건 4월 30일이었다.  도나 화이트라는 그 연구소 책임자 명의로 된 서신은 4월 18일부로 작성된 거였고, 다행스럽게도 공문이라는 게 원래 그렇겠지만, 고 1 정도의 그이 영어실력으로도 해독에 불편함이 없었다.

C대학 인문학회의 ‘식민지 체험과 근대성: 한국 일본 중국의 경우’ 연구모임을  대신해서 그를 초청하게 됐다는 인사말과 함께 일정과 조건 등이  명시돼 있었다. 왕복여비와 체재비와는 따로 500불의 사례금도 지급된다고  했다. 흥, 500불 벌러 미국까지  오란 말야, 뭐야?

그는 아내 앞에서 이렇게 코방귀를 뀌었지만 그건 500불 소리가 나왔으니까 비로소 부릴 수 있는 호기였다. 남들은 어떤 조건으로 초청을 받는지 알아본 바는 없지만 사례비는 그의 예상에 들어 있지도 않았다. 여비와 체재비 정도야 주겠거니 하면서도 그게 초청에 응할까 말까를 결정하는 전제조건이 되지는 않았다.  그는 가고 싶다기보다는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500불은 많지는 않지만 싫지 않은 덤이었다.  봉투 안에는 그런 편지와 함께 이쪽의 생년월일 등 간단한 인적사항을 기입해야 하는 서류가 동봉돼  있었다. 그는 J-1 비자로 미국에 입국해야 하고, 그 비자를 내기 위한 서류는 그를 초청한 대학측에서 이쪽으로 보내줘야 하는데 거기 기입할 거니까 빠른 시일 안에 팩스로  보내 달라고 했다. 그때 이쪽의 여행일정과 신용카드 번호도 함께 가르쳐  주면 호텔이나 교통편을 예약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했다.

  팩스 보내기 전에 해야 할 일은 뭐니 뭐니 해도 교장한테 사정을 말하고 허락을 얻는  일이었다. 학기중에 외국을 나가보긴 처음이었다.  다행히 담임을 안 맡았으니까 수업만  누가 대신해주면 아이들한테 큰 지장을 주지 않고도 갔다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초청장의 문맥으로 봐서 미팅날인 5월 26일을 전후해서  관광계획을 짜도 될 것 같았지만 동부면  모를까 여러번 가본 캘리포니아 쪽에서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아내의 눈치로 봐서 거기까지 갔다가 처가 쪽 식구를 한 명도 안 만나고 온다는 건 좀 너무한 것 같아  회의가 끝나고 장인 장모한테 들러 하룻밤 정도 자고 오려면 5박 6일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대강 이렇게 대체적인 일정을 잡고 있는데 김혜숙한테서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C대학뿐 아니라 L대학, I대학 등 딴 대학들의 동아시아  연구모임에서도 그와 미팅을 가지고 싶어하니 시간을 할애해달라는 거였다. 연이어 일면식도 없는 시인이 그쪽 문학단체의 총무라면서 김혜숙과는 따로 그에게 연락을 취해왔다.

  “C대학으로부터 초청을 받으셨다면서요? 아유, 반갑습니다.  저희 재미 서부지역 문인회에서도 국내의 저명한 문인들을 초청해서 대화도  나누고 교류도 하고 싶은데 워낙  재정적 기반이 영세하다 보니 단독으로 초청할 엄두를 못 내던 차에 그 소식 듣고 속된 말로  이게 웬 떡이냐 싶어 이렇게 전화 올립니다. 이쪽에도 선생님 독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희 문인회에 꼭 모시고 싶으니 거절하지 마시고 시간 좀  내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일정이 빡빡하신 거 감안해서 무리가 가지 않도록 간담회 형식으로 할 테니 부담 느끼시지 않아도 될  겁니다. 우리 회원 중 LA판 한국어신문 기자도 있거든요. 그 친구는 그 친구대로 따로 벼르고 있으니 기자회견도 거절하지 마시고요.”

  조금 지나치다 싶게 공손하면서도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려는, 충분히 강압적 어투였다. 그가 초대하고자 하는 사람이 정말 나일까? 어리벙벙하기도 하고 내가 어느새 그렇게 유명해졌나 하고 우쭐해질 것도 같았다. 내가 나인 거 맞아? 하면서 스스로에게 농이라도 걸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리 끌려다니고 저리 끌려다니느라 처가에서 하룻밤도 묵지 못하고 가까스로 식사나 한끼 하고 돌아올  생각을 해도 입가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처가로부터 무시당한 적도 없건만 처가 식구들이 다시 봐줄  게 틀림없다 싶은 게 그렇게 유쾌할 수가 없었다. 김혜숙도 하루는 모시고 꼭 관광을 하고 싶다기에 그 또한 거절하기 박절하여 일정에 넣다보니 7박 8일도 빠듯할 것 같았다. 중간에 일요일이 하루 끼는 걸 감안해도 꼬박 일주일을 결근하게 일정을 세우고 팩스를 넣기 전에 교장한테  허락을 맡으러 들어갔다. 교장은 신춘문예에 삼년 계속 떨어진 경험을 지금도 자랑하고 싶어하고 그리워하는 자칭 문화애호가였지만 그의 글을 읽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꾸준히 관심은 있는 척했다. 그가  교장실에 들어갔을 때도 대뜸, “이선생 왜 요새는 글 안 써요?  그 어려운 등단을 했으면 꾸준히 발표를 해야지 문학상도 차례가 올 거 아녜요?”교장은 크고 작은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될 때마다 버릇처럼 이창구의 이름이 빠져 있는 걸  서운해하더니 이번에도 그 소리였다.

그는 못 들은 척 넘어가려다 부탁을 부드럽게 하려고 공손하게 말했다.“상은 못 타도 열심히 쓰고는 있습니다. 지난달에도 중편을 한편 문예지에 발표한걸요.”“원 이선생은, 글쓰는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정이 없이 메말랐어요? 나 같으면 잡지에 자기 글이 실리면 돈 아끼지 않고 여러 권 사서 교장실에도 갖다 놓고  교무실에도 돌리겠어요. 아이들한테는 사보라고 선전도 하구요. 내가 공짜를 좋아해서  이러는 거 아녜요. 요새는 자기 피알  시대라잖아요. 나 듣기로는 문학상이 그렇게 많다는데 아직도 우리 이선생한테  한 개도 안 돌아온 것은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피알을 할 줄 몰라 그런 것 같아요. 아니면 비싸게 굴어서 밉보였던지, 학교에서처럼 말예요.”“비싸게 굴다니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자신이  없어서 누가 내 소설 보았댈까봐 겁을 내는 편인걸요.”“그럼 뭣하러 등단을 하며 발표를 합니까? 말도 안되지.”

  그는 문제를 더 길게 논해봤댔자 이로울 게 없을 것 같아서 덮어놓고 죄송하다는 사과부터 하고는 본론으로 들어가 C대학 인문학회로부터의 초청  건을 얘기하고 학기중이지만 수업에 지장이 없도록 기한을 최소한으로  짧게 잡았으니 선처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아니, 그게 정말이에요? 그럼 이선생 작품이 미국에까지 알려졌다 이 말 아녜요? 번역은 또 언제 그렇게 됐나? 아까 자기 피알  못한다고 구박한 거 취소예요.  이왕이면 노벨상을 노리겠다 이거죠?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야심이 장하고 부러워요. 잘했어요. 아주 잘했어요.”

  다혈질의 교장이 부리부리한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걷잡을 수 없이 흥분을 하자 그는 밖에서 누가 듣고 깔깔대는 것만 같아 어쩔 줄을 몰랐다.  먼저 김혜숙의 초청이라는 걸 밝힐 걸 잘못했다 싶었다. “선생님 고정하세요. 노벨상이라니 당치도 않아요. 그게 아니라요.  김혜숙 있잖습니까? 23회 전체수석  김혜숙 생각나시죠?”“생각나다마다요. 우리  학교 생긴 이래 최고 수재 김혜숙을 내가 잊어버릴 리가 있나요.”교장의  말투는 요새 유행하는 티브이 코미디 풍의 허풍을 고스란히 닮고 있어 그는 실소를 머금고 김혜숙이 지금 미국서 뭐하고 있으며 어찌하여 그를 초청하게 됐는지 되도록 간략하게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교장은 김혜숙과 그를 한데 묶어 그의 흥분을 더욱 상승시키고  싶어했다.“김혜숙 그 녀석 서울대학에 척하니 합격을 해서 모교를 빛내주더니 이제는 국제무대에서 한국문학을 빛내려고  제일 먼저 스승의 문학을 세계무대에 올려놓고 원작자를 초청까지 하다니, 아이구 신통한  것, 이럴 때 선생 노릇하는 보람과 글쓰는 보람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것 아니겠소. 이 선생은 참 복도 많구려.”

  또 한바탕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고도  부족해 교장은 일본의 누구누구도  좋은 번역자를 만나 비로소 노벨상을 받게 된 것처럼 김혜숙과 이창구도 그런 콤비가 되지 말란 법 있느냐고, 끝내 노벨상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다. 교장은 다음날 직원 조회시간에도 일동에게 널리 알릴 일이 있다면서 또 그 얘기를 꺼냈다. 다행히 모교를  빛낸 훌륭한 졸업생 김혜숙의 칭찬과 선전으로 시간이 다 가버려서, 이창구 문학의 세계화 작업은  운도 떼기 전에 수업 시작 벨이 울렸다. 수업시간 지키는 데는 칼 같은 게 교장의 좋은 점이었다. 그런 교장에게 만일 그런 즐거운 착각이 없었다면, 학기중에 일주일 이상 수업을 빼먹는 일을 허락받기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이 이렇게 순조로웠는데도 J-1 비자를 내기  위한 서류에 기입할 인적사항과 여행일정을 팩스로 보낸 것은 도나 화이트의 서신을 받고 나서 이틀이 지난 5월 2일이었다. 숙소 예약만 그 쪽에 부탁하고 비행기표는 그가 사고 영수증만 가져가기로 했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봐서 그런지 그해 그 무렵  신문지상에는 미대사관에 비자 신청이 쇄도하여  신청자들이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는 기사가 자주 눈에 띄었다. 대사관 앞에 끝도 없이 길게 늘어선 신청자 사진까지 나오면서, 이렇게  오래 기다린 인터뷰를 무난히  통과해도 비자가 발급되는 데는 한달 이상 걸린다는 기사도 눈에 띄었다. 지금이  바로 여름방학에 출국하려는 유학생이나 관광객들이 비자를 내기에 적기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꺼번에 몰리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대사관에서는 비자 발급 능력을 전혀 늘리려 들지 않는다는 불평의 소리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건 이쪽 사정이고 미국 대사관이 그런 소리에 어디  꿈쩍이나 할 데인가. 그가 처음 방문비자를 내려고 미대사관 앞에 줄섰을 때의 굴욕감이 생각나 아는 여행사에다 전화를 걸어 J-1 비자를 내는 데는 얼마나 걸리나 알아보았다. 전에는 이 삼일이면 됐는데 요새는 일주일 이상 걸린다고 했다.  그의 방문비자의 유효기간은 아직 이년이나 더 남아 있었다. 

  J-1 비자가 빨리 안 나오면 방문비자로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쪽에서 보낸 편지를 거의 이주일 후에나 받아본 생각이 나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김혜숙은 자주 전화도 걸어오고, 그날 발표할 논문을 한국어로 요약해 팩스로 보내오기도  해 그를 귀찮게 했지만 잘하려고 그럴 뿐 아니라 그에게 충분한 준비를 시키려고 그런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암만해도 J-1  비자를 내기 위한 서류가  도착하는 시기와 발급받는 데 소요되는 시일이 넉넉할 것 같지 않아 조바심이 나서 그녀의 논문에 대한 검토가 제대로 되지 않고 뒤숭숭하기만 했다. 그는 뭔가 엉키는 것 같은  기분이 싫어서 실무자인 도나 화이트 앞으로 다음과 같은 요지의 팩스를 보냈다.

  -당신은 내 팩스 받은 즉시 서류를 우송했으리라고 믿지만 아직은 배달이 안됐다. 지금부터 일주일 안에 그 서류를 받아볼 수 있다고 해도 이곳 대사관에서 요새 비자 발급에  소요되는 시간을 감안할 때 빠듯할 것 같다. 나는 아직 유효한 방문비자를 가지고 있는데 왜 그렇게 절차가 까다로운 J-1 비자로 가야 되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다음날 즉시 팩스로 회답이 왔다. J-1 비자라야 그 대학에서 500불의 사례금과 제반 비용을 부담할 수 있다고 했으며 그건 그들이 초청한 어떤 학자에게도 예외가 있을 수 없는  그 대학의 원칙이며, 필요한 서류는 벌써 우송했으니 곧 도착할 거라고 했다. 그는  여행사에다 서류만 도착하면 당장 접수시킬 수 있도록 비자 신청서를 작성해놓고 5월 25일자로 비행기표도 예약해놓으라고 일렀다. 그러나 5월 15일이 지나도록 서류는 안왔다. 여행사에서는  거의 매일같이 어떻게 된거냐고 성화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생각다  못해 다시 팩스로 아직도 서류가 도착안한 사실과 지금 익스프레스로 서류를 보내주지 않는 한 비자를 내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는 그의 생각을 밝혔다. 김혜숙한테도 그간의  사정을 얘기했더니 아무튼 한국의 우체국 종잡을 수 없는 건 알아줘야 한다고, 배달이 지연되는 탓을 한국한테로만 돌리면서, 걱정 말라고, 미대사관에서 한국의 저명한 지성인을 설마 보통 여행자와 똑같이  취급하겠느냐고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초청을 받았다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솔깃하게 들었다. 도나 화이트로부터도  익스프레스로 또 한 부의  서류를 우송했다는 연락이 왔다. 팩스로 이렇게 당장당장 의견교환이 되는데 왜 J-1  비자용 서류는 꼭 우편으로 받아야 하는지도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익스프레스도 그날로 배달되는 건  아니었다. 사흘 후 먼저 부친 보통우편과 동시에 배달이 됐다. 그때가 5월 19일 금요일이었다.  아무리 서둘러 접수를 시켜도 22일 월요일이나 접수가 가능했다.

  혹시 특별히 봐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들어맞지 않았다. 익스프레스로 서류를 부친 후부터 C대학 쪽에서도 비자 발급이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짐작을 한 것  같았다. 김혜숙은 전화로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는 게 보일 만큼 호들갑을 떨며 안타까워했고, 도나 화이트도 매일같이 팩스를 보내왔다. 그쪽에서 하도 난리를 치니까, 최종적으로 25일까지 비자가 발급되기는 틀렸다는 사실을 알리면서도, 방문비자로라도 와달라고 하길 바랐다. 그 학회에 그의 참석이 꼭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는 문제라는 게 그의 상식적인 생각이었다. 많지도 않은 여비나 사례금은 어떤 편법을 써서든지 나중에 지급하면 그만이고,  정 못 준다면 그런대로 참아줄 수도 있는데 싶었다. 그러나 그건 저쪽에서 간청하면 이 쪽에서 마지못해 들어줘야지 이쪽에서 먼저 제안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항공편도 예약해놓았겠다, 유효한 비자도 있겠다, 그 놈의 J-1 비자만 거치적대지 않는다면 제 날짜에 출국하는 건 문제도 없었다.

  그의 마음이 그렇게까지 다급하고 비루해진 것은 순전히 체면 때문이었다. 교장이 떠벌려놔서 동료선생들뿐 아니라 학생들까지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그의 문학을 가지고  학회를 여는 데 그가 초청됐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문우나 가까운 술친구는 일부러 알리려서가 아니라 만나자는 약속을 그 동안을 피해서 정하자니 자연히 알리게 된 거였지만, 그것도 소문이 날 만큼 나서  C대학 가서 누구 만나면 잘  해줄 거라느니, L대학 누구누구에게 안부 전해달라느니 하는 소리까지 들어온 터였다. 그러고 보니 초청을 받은 지가 두 달이나 되었다. 그동안에 일이 손에 안 잡히게 뒤숭숭하고 치사하고  촌스러운 느낌을 이런 허탕을 치려고 참아냈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너무도 보잘것없고  왜소해졌다. 그렇다고 영어로 하는 회의에 대한 소심증을 완전히 극복한 것도 아니어서  안 가고 말게 된 게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도 없지 않던 차에 대학 쪽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걸리면 J-1 비자가 나올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여행사한테 물어서 넉넉잡고 일주일은 더 걸릴  거라고 했더니 그럼 학회를 이주일 후로 미루어 6월 8일로 잡겠다고 했다. 결국은 가게 되는구나, 가게 되니까 안  가면 편할 것 같은 심정에 더 미련을 두면서 교장한테도 이만저만해 그렇게 되었다는 걸 알렸다. 교장은 진작 자기에게 의논했으면 그날로 비자를 낼 수도 있었다고 아쉬워했다.

  “선생 노릇 좋다는 게 뭔 줄 알아요?  우리나라 방방곡곡, 높고 낮은 데, 안 통하는  데가 없다는 거예요. 고 나이 또래라는 게 우리 보기엔 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배경은 천차만별이거든요. 대통령한테도 빽줄을 댈 수 있는 아이가 없나, 쓰리맞은 다이아 반지도 당장 대령할 수 있는 암흑가 딸내미가 없나. 교사를 흔히 돈도 없고 빽도 없는 별볼일 없는 직업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천만에요, 교사처럼  각계각층 광범위하게 빽줄을 가진 직업도  없어요, 이선생이 몰라서 그렇지. 이학년의 윤애라 있죠. 영어 잘하는  아이. 그 애 아버지가 미대사관하고는 직통이에요. 지금은 국회의원이지만 미국 대사도 지낸 적이 있는  외교관이거든요. 그분 빽으로 우리집 아들놈 비자는 리젝트 당한 걸 당장  다시 낼 수가 있었는걸요. 정말이에요. 그분 참 빽 셉디다.”

  마음이 화끈거리는 걸 억지로 참고 들은 그  학부형한테 연줄을 놓게 될 줄은 그는 그때 미처 몰랐다 이번엔 시간이 넉넉했으니까. 정상적으로 비자가 발급되기로  한 날 여행사 직원은 그러나 또 허탕친 것을 알려왔다. 이유는 C대학에서 보내온 서류에는  학회날짜가 5월 26일로 돼 있는데 그날이 지난 시점에서 비자 신청을 한 걸 이해할 수 없다는 거였다.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사관의 판단에 하자가 없어서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바람에 제 날짜에 비자를 받을 수 없게 되자 학회날짜가 연기됐다는 걸 직원한테 말해봤댔자 그 자리에서 그걸 번복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지쳐서 화도 나지 않았지만, 그 예기치 않은 돌발사에 대해 김혜숙한테는 전화로, 도나 화이트한테는 팩스로 알렸다. 그들이 최선을 다해준 건 알지만  미국이란 데가 정이 떨어져 못 가게 된 게 섭섭하지도 않았다.

  오기가 나서인지 금방 마음이 정리돼가고 있는데 도나 화이트한테서 연락이 왔다. 서류를 정정해서 보내는 건 익스프레스로 보낸 다 해도 이미 때를  놓친 일이고, 대학 쪽에서 대사관으로 전화나 팩스로 학회가 5월 26일에서 6월 8일로 연기됐다는 사실을 알리고 선처를 부탁하겠다는 거였다. 깨끗이 끝내버리려고 한 일에 그는 또다시 말려들 수밖에 없었다.  워낙 시간도 얼마 안 남았거니와 도대체 대사관이란  켯속에서 돌아가는 일에 너무도 깜깜인  게 답답하기도 해서 교장한테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물론 리젝트 당한 비자까지  당장 내주게 했다는 빽줄에다 구원을 청해달라는 뜻이었다.  교장은 그가 기대한 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리고 신속하게 윤애라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고, 염려 말라는 확답을 받았다고 했다.  여행사는 여행사대로 미국에서 대사한테 직접 전화라도 해주면 일이 수월하게 되지  않겠느냐고 귀띔을 했다. 이주일이 연기된 가운데 일주일 이상을  허비했으니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그건 학회날짜까지이고 출국해야 하는 최종일은 닷새밖에 안 남았다. 그도 몸이 달아 교장한테도 거듭 부탁을 하고, 대학측에도 정말 팩스를 보냈나 확인전화를 여러번 걸었다.  여행사에서 알아본 바에 의하면 대사관에서는 아직 그런 팩스 받은 일이 없다고 해서 다시 김혜숙한테 전화를 해서 어떻게 된 거냐냐고 화를 냈다. 화도  내고 하소연도 하고 싶을 때는 김혜숙이 만만했다. 도나 화이트로부터 대사관에 재차 팩스를 보냈다는 팩스가 왔다.

  다시 J-1 비자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는 고약한 시간이 계속됐다. 밤에 꿈자리에서도 길에다 여권을 떨어뜨렸는데, 길바닥이 순식간에  그의 눈앞에서 능글능글한 컨베이어 벨트로 변해서 여권을 싣고 그가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어디론지 떠내려가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도 저 여권을 잃으면 마치 죽기라도 할 것처럼  두려움에 떨었던 생각이 나 깨어나서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기쁜 소식은 역시 빽줄로부터 왔다. 6월 5일 출근도 하기 전에 교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비자가 나왔대요. 이선생이 직접  대사관으로 찾으러 오래요, 오전중으로요. 가서 로버트를 찾으면 된대요. 나도 전에 그사람 도움을 받아서 잘 아는데 친절하고 잘생기고 우리말도 곧잘 하니까  걱정 말아요. 보통사람들이 비자 받으려고 줄서는 뒷길말고 세종로 큰길로 난 대사관 앞문으로  가야 해요. 알았죠? 그리고 미스터 로버트.”

  교장이 강조하지 않아도 로보트처럼 들려서 잊어버릴 것 같지  않았다. 대사관 옆 한국통신 건물에서는 무슨 일인지 데모가 한창이어서 그 주위의 경계가 삼엄했다. 그까짓 게 무슨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동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게  문득 가책이 돼, 그는 옥상에서 뿌린 삐라가 땅에 닿기를 일부러 기다렸다가 한장 주워서, 그러나 읽어보지는 않고 주머니 속에 꾸겨넣었다. 로버트를 만나기로 시간  약속이 돼 있다고 했더니 신분증만 보관하고 통과시켜주었다. 그러나 그가 대사관 현관까지 도달하는 동안 스스로 밀어야 하는 문이나 회전문은 어찌나 무겁고 두꺼운지 토치카를  연상시켰다. 그런 문은 생전 처음이다 싶은 느낌이 그를 압도하고 왜소하게 만들었다. 현관에서 용건을 말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로버트가 내려왔다. 로버트는 그의 여권을 여봐란듯이 들고 있었다. 여권이  그의 손을 떠난 지 얼마 만인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는 어서 여권을 받고 싶어 고맙다는 인사부터 했다. 그러나 로버트가  찾아온 건 대사관이라는 음흉하고도  복잡한 컨베이어 벨트 위를 떠도는 여권일 뿐 비자는 아니었다.  로버트는 난데없이 비자 신청서를 내주면서, 지금 여기서 작성해 주고 가면 빠른 시일 안에 내주도록 노력하겠노라고 했다.

  신청서를 받아들었지만 분노와 모욕감으로 손끝이 떨려  아무것도 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아래 빈칸은 영문타자나 인쇄체로 써서 답변하십시오’라는 맨 위의 굵은 글씨 외에는 눈이 가물가물해서 하나도 읽을 수 없었다. “이런 서류는 벌써 제출했을 텐데요. 왜 이제 와서 이걸 쓰라고 하나요? 내일은 현충일이니 대사관도 쉴 테고 나는 아무리 늦어도 6월 7일 모레는 출국해야 합니다. 모레 아침에 비자가 나올 것을 믿고 여행준비를 할 것 같지 않구요. 아침에 여기를 거쳐서 공항으로 간다는 것도 시간상 가능한 일 같지 않구요.” 그가 말을 하는 동안 여권을 팔랑팔랑 뒤적이고  있던 로버트가 푸르고 천진한 눈으로  민망하도록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게 급한데 왜 하필 J-1 비자로 가려고 합니까.  여기 이렇게 유효한 B-1, B-2 비자를 가지고 있으면서요. 나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 로버트가 그의 여권을 펼쳐든 채 간당간당 흔들면서 말했기 때문일까, 그는 뭔가 심한 야유와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여권이라도 얼른 낚아채고 싶었다. 그래서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럼 여권이나 돌려주십시오. 내가 뭘로 가든지 상관 마시고요.” 로버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선선히 여권을 내주며 즐거운 여행하라며 악수를 청했다. 홀가분한 눈치였다.

  학교로 돌아가 그 사실을 알리자 교장은  그럴 리가 없다며 윤애라 아버지에게  알아봐서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난리를 쳤지만 그는 극구 말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선생이 대사관에 가서 변변치 못하게 군 게 틀림없어요. 변변치 못하다는 게 딴게 아녜요. 언제  고자세로 굴고, 언제 저자세로 굴어야 하는지 판단을 못하고 뻣뻣하고 어정쩡하게 구는 거라구요.”

교장은 이렇게 일이 잘 안 풀린 탓을 그에게 돌리고  나서야 그 문제를 일단락지었다. 그래도 그동안 교장이 그에게 가장 고맙게 굴었다. 그는 비자문제가 자꾸 꼬일 때, 교수나  문화계 일에 종사 하면서 외국을 자주  드나드는 친구들한테 더러는 속상한 얘기를  피력하기도 했었다. 물론 무슨 도움을 얻자고가 아니라 미대사관에서 하는  일을 같이 욕이라도 해주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상대방은 그걸 자기 자랑의 기회로 삼으려고 했다.  인터뷰 때 아무개도 이런저런 모욕을  당했는데, 자기는 깍듯한 대접을 받고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느니, 길어야 일년밖에 비자를 안내줄 때 자기는 뭘  보고 그랬는지 오년을 내주더라느니, 그런 유의 예를 수도 없이 들어가며, 너는 참 안됐다고, 자기만 쉽게쉽게 비자를 받은 데 대해 자부심과 특권의식을 드러냈다. 그는  그 생각만 하면, 누가누가 더 더리고  비천한가, 지지리 못난 사람들끼리 키재기를 한 것처럼, 자신은 그중 가장 못나 그 비천의  밑바닥을 핥은 것 처럼 느껴져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래도 그는 징징 울다시피 하는 김혜숙을 위로하고 나서 밤을 새워 그가 발표하고자 했던 요지와, 질문을 예상하고 미리 머릿속으로만 굴리고 있던  것들을 글로 만들어 그녀에게 팩스로 보내면서 그가 참석을 못하더라도 기죽지 말고 이번 모임을 성공적으로 이끌기를 당부했다. 그러나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그가 겪은 고약한 경험을 단지 개인의 재수 탓으로만 돌리고 넘어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며칠 지나 마음을 가라앉힌 후, 그는 그를  초청한 동아시아 연구모임 앞으로 다음과 같은 요지의 팩스를 보냈다. 

-귀 연구모임의 성격상 앞으로도 연사를 초청할 일이 있을 것 같아, 이번 초청으로 내가 겪었던 얼당토않은 일에 대하여 그 모임에서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 편지를 드립니다.

  그리고 나서 그간에 겪은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열거 하고 나서,

-내가 정말로 분개한 것은 그 다음 일입니다. 아무 대답도 없다가  9일이나 지나고 나서 대사관은 내 비자 신청을 반려했습니다. 이유인즉 처음 초청장에  나와 있는 모임일자가 지났으니 연기되었다는 서류가 필요하다는 거였습니다. 떠나야 할 날짜는  모레인 데 이제 증명서를 내면 다음날로 비자를 주겠다는 건지, 아니면 또 열흘  후에 다른 엉뚱한 것을 요구할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미대사관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하는 업무에 정상적인 처리기간이란 존재한 적이 없으니까요. 하루가 걸릴지 일주일이 걸릴지 한 달이 걸릴지, 전혀 알 수가 없으니 미국 가는 일에 있어서 정상적인 계획을  세우기란 불가능하다는 뜻이지요. 바쁜 사람이 여행계획을 세웠다가 이런 이유로 취소하고, 다시  연기하여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그로고 나서도 출발 전날이 되도록 비행기표를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알 수 없는 상황을 당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당신네들이 짐작이나 할 수 있을는지요. 그리고 이러한 불합리한 일이 단지 미대사관의 비자  발급 업무 때문에 생겼다는 것을.  이러한 일을 겪고도 우리는 항의할 상대가 없습니다. 미대사관은 한국인의 민원을 받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그간의 경과를 설명하는 편지를 드리는 겁니다. 미국에 초청한 한국인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이 과연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일인지, 나를  초청한 당사자로서 미대사관에 정식으로 항의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한가지 덧붙여 말씀드릴  것은 초청자에게 J-1비자를 요구하는 귀 대학의 규정에 대해 다시 검토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이 규정만 없었다면 아무 문제없이 처음에 정한 날짜에 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연구모임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학회는 그가 참석하지 못한 것을 모두 아쉬워하면서도 그의 문학을 가지고 연구하고 토론하는 과정이 매우 유익했고 그가 보낸 글을 읽은 게 얼마나 감동적이고 주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는 의례적인 감사의 말과 함께 이러한 구절도 있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우리의 초청계획이 무산된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며 당신이 그 일로 미국정부로부터 당한 일에  분개하고 있습니다. 이번 경험은  한국에서 식민주의가 종식된 게 아니라 아직도 현실적으로 존속하고 있다는 우리의 이해를 재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나중 말은 그를 마음뿐 아니라 오랜만에 얼굴까지 화끈거리게 했다. 그 편지에는 그가 요청한 대로 그들이 주한 미국 대사관에 보낸 항의문의 사본이  동봉돼 있었다. 이 엄중한 항의문에 서명한 이들은 C대학 인문학연구소가 후원하는, 동아시아의 식민지 체험과 근대성에 관한 세미나를 이끄는 동아시아 연구 학자들의 이름이 타대학 학자까지 총망라돼 있었다.

  항의서한은 그 연구모임이 그와 최초로 접촉한 날부터 미팅날짜를 정하고 조정하고  끝내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까지의 과정을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상세하게 날짜별로 나열하고 설명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었다.

-우리는 미국정부의 한국 문화인사에 대한 무례와 부주의에 대해  분노하는 바입니다. 전혀 설명할 수 없는 절차상의 지연에 덧붙여서 이창구씨는 J-1비자를 신청하는 무슨 다른 동기가 있지 않나 의심하는 듯한 질문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 태도를 취한 직원은, 그  비자는 취업이 허용된 비자이기 때문에 미국에서 직업을 구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내린 듯합니다. 일반 한국 국민을 대하는 고압적인 태도 그대로 이창구씨를 대하는 고압적인 태도 그대로 이창구씨를 대했으며, 한국의 문화인사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남아프리카의 나딘 고디머 여사가 이런  곤란을 당하리라고는 우리는 상상도 할  수가 없습니다. 캘리포니아 대학군의 동아시아 연구 학자로서 우리는 아시아 국가와 수시로 학문적이고 문화적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구와 강의의  자질은 이런 교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런 식의 망발은 학문적인 열정과 일반적인 국제관계를 말살하는 것입니다. 이번 사태는 한국의 탁월한 작가를 얕잡아본 것이고 C대학과 세미나 참석자들을 당황하게 했습니다.우리는 또한 미국 내에서의 동아시아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고 증가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광범위하게 영향을 주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런 태도로 이창구씨에게 무례하게 대한 것은 미국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대중의 토론거리가 될 것이고 한국 지성인들을 분노하게 하는 소재가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이 다시 발생되는 것을 막는 첫걸음으로서 우리는 이창구씨에게 해명을 해주실 것을 바라며 그가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공식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두 번의  비자 신청에 따른 비용과 비행기표 취소요금도 변상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아래 서명한 멤버로서 이 사태의 답신을 기다리겠습니다.

  아내하고 같이 그 편지를 읽고 난 이창구는 그 창피하고 참담한 심정을 얼버무리느라 불쑥 한다는 소리가, “ 이 사람들 우리를 남아프리카보다도 못하게 여기는 것  같잖아.”아내가 그를 기분 나쁘도록 투명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 “왜 남아프리카가 어때서요?” 그는 더욱 무안해져서, 미국 대사가 정식으로 사과하기  전에 내 다시 미국땅을 밟나 봐라, 하고 호기를 부렸던 것이다.

(창작과비평 1998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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