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결국은?

결국은, 결국은 크리스마스 ‘이브의 이브…  이 말이 웃긴다. 시간이야 다 결국은..이 아닌가!  그래 결국은 크리스마스 ‘이브의 이브’가 되었다. 이 말도 웃긴다. 이브의 이브라.. 처음 써 보는 말인데 그럴 듯 하구나. 분명히 나는 이제 61번째의 ‘이브’를 맞이하는 셈이다. 구정과 추석 다음으로 나는 이날이 좋았다. 예수와 나는 개인적인 관계가 없어도 그건 상관이 없었지 않은가? 

춥기만 했던 그 한겨울 누나, 누나친구들과 그리던 크리스마스카드.. 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지경이다. 미제 카드, 그것도 새것이 아닌 쓴 것을 그림만 잘라 가지고 다시 만든 카드를 보며 그 아름답고, 이국적인 눈 덮인 세계를 우리는 다시 옮겨서 그렸다.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크디큰 선물자루, 뉴욕의 야경에 찬란히 빛나는 크리스마스트리, 장식들…… 모두가 가난했던 우리들에겐 동경과 환상의 대상이었다. 그림을 좋아했던 (그다지 잘 그린 것은 아니라도), 나는 그 시간들이 너무나 좋았다. 비록 추웠어도 온돌은 따끈해서 화로 불을 옆에 놓고 우리들은 그곳에 누워서 만화도 즐기고 카드도 그리곤 했다. 특히 누나친구들과 같이 놀던 생각도 많이 난다. 누나야, 참 그때는 즐거웠지?

하지만 그때 우리나라는 분명히 성탄절의 나라는 아니었다. 비록 이승만대통령의 ‘희망’대로 휴일이었고 이브의 밤에는 ‘통행금지’가 없었다. 소위 통금이 없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완전히 풀어 버려서 1964년 (내가 고2때)에는 서울시내, 특히 명동의 거리는 완전히 밤새 동안 ‘광란’의 거리로 변해 버렸다. 그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정도였다. 최근에 일본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도 거의 같은 현상을 겪고 있었다. 그러니까 1964년의 겪은 것을 같은 때 일본이 앞서 가고 있었던 것이라서,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흥미롭기도 하다. 그러니까 1964년 성탄절은 기억이 또렷한 게, 나도 그 ‘소란’함에 조금 기여를 했던 것인데.. 그때 명성이와 동만이를 우리 집으로 불러서 밤을 새운 것이다.  아마도 그때의 분위기가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고2 였던 우리들까지 합세를 하지 않았던가?  그 당시는 나이가 나이인지라 한창 외국 (거의가 미국이겠지)의 pop song들에 심취해 있었는데, Christmas carol도 예외가 아니었다. Living Stereo라고 label이 붙은 LP jacket에 그때의 유명했던 Pat Boone이 있었다.  그가 불렀던 Jingle Bells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TV가 그다지 많이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에 라디오가 왕 이었는데, 그곳에서도 완전히 Christmas special일색이었다. 그 당시에 왜 그렇게 까지 ‘과열’이 된 상태가 되었을까? 아직도 그게 나는 궁금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리 분위기가 그랬어도 그것은 역시 12월 24일 하루뿐이었다. 그 전이나 그 이후에는 전혀 그런 분위기가 없었다. 그게 지금 내가 여기 살면서 얼마나 이곳이 그런 분위기를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지 실감을 하게 된다. 요새는 거의 Thanksgiving이 끝나자마자 시작되는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요새는 한마디로 ‘지겹다’는 느낌도 든다. ‘소박’한 기분이 거의 들지를 않는다. 너무나 상업화 되어서 그런가? Holiday blues란 말이 실감이 간다. 분명 나는 오랜 전부터 내가 즐기는 게 아니고 아이들이 즐기는 것을 보며 위안을 삼을 그 정도가 되었다. 내가 확실히 ‘우울’한 인생의 후반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주 싸늘한 12/12…

오늘은 12월 12일이다. 이 날짜를 우리말로 읽은 음감이 항상 기억을 더듬게 한다. 그러니까 십이 십이가 아닌가? 이날 전두환이 박정희와 비슷한 무혈혁명을 한 날이 아닌가? 1979년 12월 12일이다. 그렇다. 정확하게 30년 전이다. 아…아…하는 신음소리가 안 날 수 없다.  30년이면 어떤가? 긴 건가, 별로인가. 이제는 세월 감각이 많이 ‘역사적’ 인 단위로 적응이 되어서 별로 긴 듯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60년의 반.. 이 아닌가.

1979년 12월 12일에 우리, 그러니까 나와 연숙은 김포공항에 갔었다. 꽤 늦은 저녁시간이었는데 아마도 그날 밤에 전두환이가 일을 저질렀던 모양이다. 우리는 그날 전혀 그런 것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거의 결혼이 결정된 인생 최고의 기분으로 살던 때였으니까. 그날도 매섭게 바람이 불고 추웠던 기억인데 그게.. 아직도 생생하다. 연숙의 지도교수인 김숙희 교수가 미국으로 가게 되어서 공항으로 배웅을 가게 된 것인데, 아마도 그 교수에게 나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와 같이 나간 듯 하다.  버스를 너무 일찍 내리는 바람에 공항 터미널까지 걸어가야 했는데 그때 내가 연숙의 손을 처음으로 잡고 갔던 기억이다. 나중에 연숙의 말이 손이 추워서 혼이 났다고 했다. 그저 춥다는 말을 하면 내가 미안 할까 봐 말을 못했다고.  지금 생각하면 그저 아름다운 추억이다. 30년 뒤에 이렇게 회상을 하니까 물론 아름답게 보인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때는 구름 위를 걷는 듯 참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런 아름다운 시절이 우리에겐 있었다. 그걸 많이 잊고 산다. 너무나 서로에게 익숙해져서 모든 걸 미리 가정해가며 건조하게 우린 살고 있다. 그렇게 살 필요가 없는데. 참 그게 현재 우리의 불행인지도 모른다. 그럴 능력이 모자람 없이 가득한 우리 두 ‘인간’인데.  신앙도 신앙적인 노력도 이것을 극복 하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아주 싸늘하다. 아니 숫제 춥다. 이곳은 Cobb Central Library 이다. 조용한 토요일 아침, 비록 추워서 손에 입김을 불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interruption없이 ‘마음대로’ 책을 읽고, 집에서는 도저히 자주 중단이 되어서 하기가 힘들 것 같은 일들을 여기서는 할 수 있으니 어찌 좋지 않으랴. 요새는 돋보기 없이는 책을 읽기가 힘든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거의 1년 전 까지만 해도 크게 불편이 없었는데 이제는 조금 이것을 쓰는 게 익숙해졌다. 이래서 다 살게 되어있는 모양이다. 돋보기로 보이는 나의 손등이.. 이제는 영락없이 늙었다. 그러니까 많이 쭈글쭈글해졌다. 슬프다. 하지만 이게 정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저 받아 들여야 하지 않을까?

 

아.. 재동학교..

재동국민학교, 1959년 경

재동”초등”학교가 아니고 나에겐 분명히 재동”국민”학교다. 이름에도 정치, 역사가 있지만 나에겐 100% “초등”학교가 아니었고 분명히 “국민”학교였다. 서기 1954년부터 1960년 초까지 나는 이곳에서 대한민국 어린이의 꿈을 키웠다. 서기 1954년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그때는 “단기” 4287년이었다. 그러니까 단기 4287년부터 4293년 초까지다.  참 오래전. 일이다.

온통 나의 어린 시절은 이곳을 중심으로 이야기들이 만들어 졌다. 서울의 심장부에 속하던 종로구에서 가회동과 계동의 옆과 위에 접한 꿈의 운동장. 이곳에서 얼마나 많이 순진한 꿈을 꾸며 뛰어 놀았던가? 여기서는 누구나 감상적이 되지 않을 수 가 없을 것이다.

 

취운정 활터에서 힘을 기르고

엣궁의 거문고로 마음을 닦던

빛나는 화랑정신 이어 나가자

우리는 재동학교 나라의 새싹

 

재동학교 교가  아마도 1~2학년 때 부터 이 ‘새’교가를 불렀지 않았을까? 누가 이 사실을 기억을 할까? 그 당시 이 ‘취운정’이란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불렀다. 최근에서야 인터넷의 힘으로 옛날 옛적에, 언제인지는 잘 모르지만, 재동학교 근처에 있었던 고적지란 것을 알게 되었다.  재동학교 졸업 앨범을 보면 ‘윤성종’작사라고 보인다. 작곡은 ‘김성태’로 되어있다.  김성태라고 하면 물론 귀에 아주 익은 이름인데 윤성종은 전혀 무언가 떠오르지를 않는구나. 이 교가는 물론 아직도 100% 가사를 안 보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이 그 나이 또래의 기억력이다. 무서울 정도이지 않을까?

입학하기 전부터 생각이 나는 게, 그러니까 아마도 6.25동란이 끝나기 전인 듯싶다. 그때 나는 돈화문 (비원정문)근처의 원서동에서 아버지가 납북되시고 어머니, 누나와 같이 살았는데 재동학교에서 화재가 나서 전체 건물의 반이 불에 타 버린 것을 생생히 기억을 한다. 그 나이에는 불이 나면 우선 ‘경사’라도 난 듯이 그곳으로 뛰어 가지 않았던가? 그때 재동학교는 아마도 군인병원으로 임시로 씌어졌던 모양인데, 왜 불이 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혹시나 폭격이라도 당하지 않았을까?  그때 타버린 건물은 몇 년 뒤에 미군들의 도움으로 새 건물로 태어났고 동시에 나머지 건물들도 한층 씩 더 올려지게 되었다.  5학년 때 갑자기 모두 운동장에 나가서 ‘즐겁게 뛰어놀라’ 는 지시에 전 학년 생과 선생님들 모두 나와 그야 말로 뛰어놀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미군들이 와서 사진(그리고 아마도 영화도)을 찍고 있었다. 그때는 미군을 보는 게 참 즐거운 일 이었는데 (우리를 공산당으로 부터 구해준 십자군?) 그들이 사진을 찍으니 우리들은 더 신들린 듯이 뛰어 놀았다.

은사님들을 생각해 본다. 교장 선생님. 심원구 선생님이 거의 5년 동안 나의 교장선생님이셨다. 6학년 때에 지금 졸업앨범에 찍히신 윤형모교장 선생님께서 오셨다. 아마도 5학년 중에 부임을 하셨던 게 아닌가. 누군가 이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5학년 때 인천으로 당일치기 수학여행을 갔을 때 사진에 심원구 선생님이 보이시니까 분명히 5학년 까지는 계셨던 것이다.  선생님들. 지금 모두 어떻게 지내실까. 혹시나 연로하셔서 타계나 인하셨을까? 이걸 어떻게 알아 볼 수 없을까?

1학년 때의 담임선생님 윤원범 (여자)선생님. 졸업앨범에 없다. 졸업 전에 떠나신 것이다. 그 옛날. 1학년 때.. 그때 나는 학교 가는 게 아주 싫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들 엄마의 손을 잡고 학교엘 오곤 했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때 어머니는 이미 생활전선에 뛰어든 뒤였다. 옆집 친구 할머니의 손을 잡고 가곤 했다. 그 친구는 ‘안윤희’였다. 그런 중에 드디어 대형 사고를 쳤는데. 그만 학교를 안 간 것이다. 원서동에서 재동학교를 가려면 계동을 지나는데 거기에 대동상고가 있었다. 거기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다 집에 가곤 했다. 내가 “깡”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만큼 학교가 싫었던 게 아니었을까. 얼마나 그랬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우리 집의 주인아저씨가 (그때 우리는 세를 들어서 살았다) 나를 보았다고 했다. 들통이 나고 어머니는 장장문의 편지를 써서 나를 학교로 데리고 갔다. 그때 윤원범 선생님이 담임이었다.

아마도 윤 선생님이 나를 조금 더 자상하게 대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조금은 무뚝뚝한 여선생님. 한번은 연필을 가지고 가지 않았다고 나를 그냥 (다른 아이와 같이) 돌려보낸 적도 있었다. 그때는 담담히 받아 들였다. 나중에 생각하면 조금 내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머니가 그만큼 바쁜 탓도 있지만 우선은 나의 잘못이었다.  몇 년 후에 우리 집에서 일하던 아줌마(그때는 모두 식모라고 불렀다)가 알고 보니 그 윤원범 선생님의 집에서 머물며 밥을 해 주었다고 들었다. 참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 선생님은 그때 결혼 전이셨는데 그 후에 결혼을 하셨는지 알 길이 없다. 마지막을 뵌 건 2학년이 되자마자 교과서를 받으러 선생님을 교무실로 찾아간 때였다. 그때는 밝게 웃으시며 공부 잘하라고 격려를 해 주신 기억이다.

2학년으로 올라가며 선생님도 바뀌고 물론 친구들도 모두 바뀌었는데 나는 그때 너무도 놀라고 슬퍼서 집으로 걸어오는 길 내내 울었던 기억이다. 그 이후로 나는 학년이 바뀔 때쯤이면 필요이상의 stress를 느끼곤 했다. 나의 성격이 아마도 수줍고, 조용해서 남들보다 더 예민하게 받아 들였는지 모른다.  2학년 때 선생님의 이름을 기억을 못하는데 이것이 내가 유일하게 기억 못하는 선생님이 되었다. 얼굴은 생각이 난다. 유별나게 신경질 적인 여자 선생님.. 대나무로 만든 자로 손바닥을 아프게 맞았던 것도 쓰라린 기억이어서 아주 나쁜 기억이 되었다. 1,2학년 때는 사진도 없었다. 그때는 사진기도 흔치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씩 남는 법인데 그때는 아주 암흑의 학년이 된 것이다.

 

재동국민학교 3학년 학급사진, 1956년

3학년 때는 학급단체 사진이 아주 잘 남아 있다. 3학년의 담임 배은식 선생님. 앨범에도 남아있다. 참 다정스런 아줌마 타입의 선생님.. 학년이 올라 갈수록 사진은 많아 졌다. 하지만 불행히도 4학년 때는 없다. 왜 그랬을까?  4학년 담임 김경구 선생님. 미술이 전공인 담임. 항상 수염자국이 뚜렷한 남자 처음 남자 선생님. 물론 4학년부터 남자, 여자 반이 갈리었다. 모든 게. 우락부락하게만 느껴져서 나도 그곳에 적응을 할 수 밖에. 그때 처음 죽마고우중의 하나 안명성을 만났다. 같은 원서동에 살아서 죽마고우가 된 친구다.

4학년의 기억은 조금 고통스럽다고나 할까. 이 김경구 선생님은 좀 독특한 스타일로 가르치셨는데. 그중에 하나가 ‘공부한 시간표’라는 유별난 system을 고집하면서 1년 동안 우리를 괴롭혔다. 한 마디로 하루에 최소한 4시간 이상 집에서 공부 했다는 것을 증거로 부모님의 도장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그 나이에 하루에 집에서 4시간을 꼬박 공부를 할 수 있을까?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가지만 모두들 ‘거짓도장’을 잘도 받아서 제출을 하였다. 항상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어머니 도장을 몰래 찍는다는 것은 그 나이에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도 어떤 아이들은 3시간 30분이라고 적어 오기도 했는데. 그게 정말로 3시간 30분을 공부 했는지. 아니면 양심의 가책으로 30분을 일부러 뺏는지. 아직도 불가사의다.  결과적으로 김경구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사회에 나가서 survive하는 예비 훈련을 시키신 셈이다.

 

5학년때, 인천 만국공원, 1일 수학여행, 1958년

5학년의 추억은 참 밝기만 하다. 담임은 이원의 선생님..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선생님은 ‘반 입시형’인 ‘미국식’ 선생님이라고나 할까? 교과서를 줄줄 외우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고 실습과 생활. 탈교과서적인 그런 쪽을 강조하신 선생님.. 그 당시는 아마도 학부형들에게 별로 호응을 못 얻으셨을 지도 모른다.  자연공부도 실습으로 하시고, 음악은 전공 선생님을 불러 오셨다. 여름방학 일기는 ‘일일 일선 (하루에 한 가지 좋은 일 하기)’ 을 주제로 삼으셨다. 그래서인지 외우는 것 같은 것은 거의 배운 기억이 없지만. 아직도 그 선생님의 스타일이 멋지기 느껴지는 것은 왜 그럴까? 그렇다. 그렇게 계속 가르치시면 절대로 우리들을 ‘좋은 학교’로 진학시키기 어렵다. 그래서 모든 게 균형이 맞아야 하는 것일까?

 

5학년말 교생실습후 단체사진

6학년은 5학년 때와 정 반대의 담임선생님이 오셨다. 학부모들은 아마도 ‘구세주’가 오셨다고 했을 듯하다.  새 6학년 담임은 박양신 선생님인데 바로 서울 안산국민학교에서 전근을 오셨다. 무언가 다르다고 모두들 짐작은 했는데 정말 공부시간이 되어보니 정말 완전히 이건 입시준비학원 style로 분위기가 변한 것이다.  학부형들은 완전히 무언가를 느꼈는지 치맛바람의 극치를 이루며 교실을 들락거렸다. 아주 학교에서 살다시피 하는 엄마들도 있었고, 공부시간에도 쉬는 시간만 되면 재빨리 들어와 선생님의 책상을 청소하거나 무언가 놓고 가거나 할 정도였다.

5학년 담임선생님 이원의 선생님도 6학년 다른 반의 담임이 되셨는데, 나의 짐작대로 절대로 입시준비를 하는 그런 style이 아니셨고 결과적으로 예상대로 아주 결과는 참담한 듯 했다. 결과란 것은 물론 일류 중학교 합격률을 뜻하는 것이다. 친구 안명성이 그 선생님의 반에 있었는데 항상 부정적으로 선생님을 평하였다. 과장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시간 ‘양호실’에 누워 계셨다고 했다. 그게 게으르다는 뜻인지 정말로 몸이 편찮으셨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6학년의 추억은 아주 또렷하고 생생하다. 처음 겪는 ‘입시’공부였고 이 박양신 선생님은 요샛말로 ‘수험의 신‘ 이셨다. 좋게 말하면 많은 입시용 지식을 그 어린 머릿속에 아주 효과적으로 주입 시키셨다. 나쁘게 말하면 어린이의 꿈의 시간, 공간을 많이 빼앗아 갔다고나 할까. 사실을 말하면 그 중간 정도일 것이다. 한 가지 아주 인상적인 것은 가끔 수업을 ‘정규’시간에서 벗어나 저녁때 까지 연장을 해서 한 것이다. 그야말로 어두워서 책이 안보일 때 까지 하는 것이다. 전등을 킬 수가 없으니까 그런 것인데.. 사실 힘은 들었지만 무슨 캠핑을 간 듯한 기분도 들어서 한편으론 재미있기까지 하였다. 이런 모든 것들은 분명히 학부모들을 아주 만족시켰으리라 짐작을 해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또한 다른 6학년 담임들의 선망과 질시를 받았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듯.

그때 우연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우리 반에 정말 공부를 잘하는 녀석들이 많이도 모여 있었다. 하기야 반을 가를 때 완전히 random하게 할 터인데 우연이라고 봐야 할 듯 하지만, 우연치고는 참 선생님의 운도 좋았다.  지금도 생각나는 애들.. 이만재, 김두철, 정세종, 조성태, 이정택, 장정석, 전경훈, 이규재, 한윤석, 심동섭, 김정훈, 임한길, 신문영, 유성희, 김승종.. 사실 앨범을 보면서 이름을 떠올리지만.. 이들이 소위 말해서 1분단의 member들인데.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제일 공부를 잘하는 애들 그룹이다. 나도 나중에는 그 그룹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리긴 했다.

이들은 입시에서 거의 경기, 서울, 경복, 용산으로 이루어지는 1류 공립중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자세히 누가 어디에 갔는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다. 분명한 것은. 이만재, 김두철, 김정훈은 경기였고, 심동섭은 경복이라는 사실뿐이다. 아직도 궁금한 것은 신문영[나중에 경복중에 간 것을 알았다]과 이규재.. 인데. 알 길이 없다. 이규재는 나의 짝이었고.. 신문영은 내가 혼자 그냥 좋아하던 애였다. 이만재는 나중에 Internet을 통해서 숙명여대 교수인 것과 전자/컴퓨터전공이란 것을 알았다. 신문영은 내가 연세대학에 다닐 때 잠깐 본 듯한데 말을 걸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김두철은 서울공대 입학시험을 볼 때 멀리서 보았는데 아마도 그의 경기고 후배 응원 차 나온듯한 모습이었다.

우리 6학년 1반, 박양신 “사단”의 system중에 독특한 것은 가차 없는 경쟁유도체제 이었다. 그것은 거의 매일 치르는 모의고사의 성적에 의해서 앉는 자리, 그러니까 분단의 위치가 바뀌는 것이다.  그 당시는 그게 적응이 되어서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면 참으로 잔인한 것이었다. 아마도 다른 어느 반에도 그런 것은 없었을 듯하다.  ‘공부 잘하는’ 1 분단으로 올라가려면 죽어라 시험을 잘 보아야 했다. 1분단에 올라갔으면 떨어지지 않으려고 또 죽어라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러데 이상한 것은 그다지 생각만큼 자리가 쉽게 바뀌지를 않았다. 그만큼 성적의 순위가 바뀌기가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까 공부 잘하는 애들은 거의 항상 잘했고 못하는 애들은 거의 항상 못한 셈이다.

나는 6학년에 들어오면서 어머니가 신경을 많이 쓰셨다. 이제까지는 그다지 성적에 집착을 안 하셨는데 학기가 조금 지나면서 선생님을 만나고 오시더니 한숨 투성 이었다. 물론 나의 성적이 아주 안 좋다는 얘기였다. 1분단은 꿈에도 못 꾸는 처지였다. 그러더니 어느 날 한 고등학생을 데리고 들어오셨는데. 알고 보니 가정교사인 셈이었다. 그 당시는 대학생보다 고등학생들이 과외선생을 많이 했다. 특히 경기고 같으면 더 많이 했을 것이다. 김용기라는 경기고 2년생이었다.

그러니까 그 때 부터 나는 학교에서도 공부, 집에 와서도 공부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공부도 점점 재미가 있어졌고 따라서 학교성적도 오르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곧 대망의 1분단으로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stress가 나를 괴롭혔다.  그래도 졸업 할 때까지 다행히 1분단을 고수를 할 수는 있었다.

또 한 가지 잊혀 지지 않는 것. 이것도 다른 반에선 없던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1분단의 반대편에 있는 제일 쳐지는 분단 애들이 있다. 성적순으로 제일 밑인 셈이다. 그들의 심정이야 이해를 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제일 기억에. 그것도 좋은, 즐거운 기억으로 남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애들은 비록 공부는 힘들었어도 유머와 여유가 있었다. 쉬는 시간만 되면 그들은 group으로 앞에 나가서 코미디를 하거나 유행가를 합창으로 부르곤 했다. 거의  pro의 수준이었다. 그게 그당시 그렇게 즐겁고 재미있었다. 그 애들은 입시공부도 거의 포기한 듯한 모습들이었는데도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지금 다 무엇을 하는고..

보고싶다, 친구야.. 정문신
보고싶다, 친구야.. 정문신

졸업하면서 거의 영원히 소식들이 끊어진 친구들.. 여기서 몇몇을 회상하고 싶다. 정문신. 정문신. 아 잊을 수 없다. 내가 1분단으로 이사하기 전에 짝을 하던 친구다. 짝이라 친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상하게 그 애가 그렇게 나는 좋았다. 아주 이상할 정도로 좋았다. 그 애가 나를 좋아하는 정도보다 훨씬 내가 더 좋아했다. 여름방학이 되면서 나는 그 애가 그렇게 보고 싶었다. 이건 내가 생각해도 이상할 노릇이었다. 오죽하면 여름방학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을까? 그 나이에 동성애였나? 우습기만 하다. 졸업을 하고서 다른 친구 김천일이 그 애 사는 곳을 안다고 해서 솔깃했는데. 그대로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정문신. 어디선가 살아 있다면 그때 내가 그렇게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란다.

그 당시에 이승만 정권에 식상한 국민의 여론이 서서히 야당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리고 정치바람이 학교까지 들이 닥쳤다. 그 당시에 우리들은 별로 잘 이해를 못했지만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긴 했다. 하긴 우리나이 또래면 북한(그때는 북괴라고 했다)에 못지않게 이승만대통령을 거의 영웅처럼 생각했다. 그렇게 교육을 시켰다. 반공, 반일로 일관된 교육 속에서 우리들은 자랐다.

그런데 아마도 정부에서 우리또래 학생들에게도 선거운동을 시킨 모양이었다. 우리들은 선거권은 비록 없지만 아마도 부모를 설득하도록 한 것이나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선생님들을 시켜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지금도 나는 실망을 금치 못한다. 우리 입시의 아니 수험의 신이신 박양신 선생님은 자발적으로 우리를 설득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여당은 좋은 사람들이고 야당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비록 선생님은 경기, 서울, 경복에 많이 입학은 시키셨어도 진짜 교육은 못하셨다고 이제껏 확신을 한다.

이렇게 졸업은 해서 재동학교는 떠났지만 그 후 3년 동안 몸은 떠나지 않았다. 집이 바로 재동학교 후문 옆에 있었기 때문에 중학교 3년 다닐 때 까지 옆에서 보며, 야구를 할 때면 운동장을 빌려 놀곤 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온통 재동학교가 꽉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인 것은 그 많은 역사 깊은 국민학교들이 문을 닫거나 이사를 가거나 했다지만 우리 재동학교는 아직도 같은 위치에 건재하다고 들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야말로 모교. 나의 어머니격이다. 그게 아직도 건재하다니.. 부디 오래 오래 더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희망도 해 본다.

 

재동국민학교 졸업앨범 1960

 

양병환 형을 생각하며

반세기만에 써보는 양병환 이란 이름. 그 50년 동안에 비록 머릿속에서 아주 가끔 생각은 했을지 몰라도 이렇게 “써”보기는 처음 인 것 같다. 아마도 손을 쓰는 일기장에도 쓴 기억이 없다. 그만큼 오래전의 일이다. 하지만 일단 생각이 날라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즐거운’ 추억이 샘솟는다.

나이는 아마도 (100% 확실치 않으니까) 나보다 최소한 3살이 위였지 않았을까. 나의 누나보다 한 학년이 위였으니까. 처음 알게 된 것은 내가 중앙중학교 2학년 때, 가회동 재동국민학교 뒤에 살 때였다. 그 형은 우리가 살던 집에 그 형의 누님과 같이 방 하나를 빌려 자취를 하였다. 그 누님은 그때 벌써 숙명여대생 이었다. 남매가 단둘이 자취를 한 이유는 물론 집이 서울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전라도에서 서울로 유학을 왔기 때문이다.

양병환 형은 그 당시 한국의 최고명문(그때는 그저 일류라고 불렀다) 경기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 두 남매는 인물도 훤칠하고 행실도 좋아서 모두가 호감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도 없고 누나 하나 밖에 없어서 ‘형’이나 ‘선배’란 존재는 대부분 든든하게 느껴지는 ‘좋은’ 존재였다. 아마도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 나를 가르쳤던 가정교사  ‘김용기’ 형 (그 형도 경기고등학교 생) 이후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형’이었던 셈이다.

그 당시는 지역편견과 감정이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되던 그런 시기였고, 특히 서울에서 전라도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그중에 제일 심하였다. 군사혁명의 주체가 아마도 경상도출신이 많아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어린 나이에도 거의 피부로 느낄 정도였다. 그런데 나로서는 ‘드디어’ 전라도 사람을 바로 옆에서 대하게 된 것이었다. 특히 그때의 말들이 “전라도 사람들은 처음 사귈 때는 좋아도 끝날 때는 아주 나쁘다” 그런 식이었다. 물론 그 당시 나의 나이는 그런 편견에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그 나이에 어찌 그런 ‘나쁜’ 생각이 수긍이 되겠는가. 하지만 주위의 어른들은 아마도 지금 표현을 빌리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는 않았을까.

처음 양병환 형과의 만남은 내가 친구 안명성(100% 확실치는 않지만)과 집 마당에서 장기를 두고 있었는데 그 형이 슬그머니 다가와서 훈수‘를 두기 시작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 당시는 우리 같은 애들 에게는 주거 여건상 날씨만 허락하면 방보다는 바깥에서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다. 집 마당이나 골목 같은 곳은 그런 ‘사귐’이 이루어지던 최고의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천성적으로 수줍어하는 성격이라서 먼저 다가가서 사람을 사귀는 것은 힘이 들었는데 이때에는 그 형이 먼저 닥아 온 것이었다.  장기 두는데 여러 가지 비결을 가르쳐 주면서 나의 장기 실력도 덕분에 늘어갔다.

방과 후에 그 형이 자취방에 있으면 곧잘 그 형 방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때 내가 흥미롭게 느끼곤 하던 것은 그 형의 ‘공부습관’ 이었다. 물론 그 형이 경기고등학교에 다닌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주의 깊게 보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책꽂이에 있는 ‘참고서’를 비롯해서 내가 옆에 있는데도 먼저 공부를 해야 한다며 열심히 공부하던 그 버릇이 나는 그렇게 부러웠다.  물론 ‘무례’하게 나를 장시간 기다리게 하지는 않았다.  반드시 무언가 한 가지를 끝내곤 나와 같이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그때 나는 그 형에게서 참 무언가 많은 것을 듣고 배웠다. 물론 다 생각은 안 나지만 아직도 뚜렷이 남는 것 중의 하나가 “아이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이었다.

물론 그 나이에 그 어려운 이론을 이해 한다는 것은 힘들지만 그런대로 그 형은 그것을 이해한 듯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뫼비우스 띠를 종이로 접어서 나에게 보여주던 그 진지했던 모습. 이런 것들은 그 당시 학교에서 배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형의 진지함과 거의 매료 된 듯 한 인상. 나에게는 참 신선하고도 충격적이었다. 그 이후 상대성원리만 접하게 되면 그때 소년기에 마음 설레며 감동을 받았던 추억을 떠 올리게 되었다.

그 때 그 형이 방과 후에 꼭 공부하던 책이 있었는데 그 당시부터 인기 있던 책 “삼위일체 영어” 이었다. 꼭 사전처럼 작고 두껍고 단단하게 생겼던 그 책은 그 이후로 수험생들에게는 거의 classic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삼위일체란 게 단순히 문법, 해석, 작문의 세 가지를 뜻하는 줄로만 알았다. 나중에 그게 기독교의 교리 (성부, 성자, 성령)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 웃기도 했다. 아마도 첫 과가 이렇게 시작 되었지. A Newton cannot be a Shakespeare (Newton과 같은 과학자는 Shakespeare와 같은 작가가 될수 없다) 나중에 내가 중 3이 되었을 때 나는 감히 ‘무례’하게도 그 책을 공부하려고 하였다. 물론 결과는 거의 zero에 가까웠지만 내가 얼마나 그 형의 흉내를 내려고 했나 하는 한 예였다.

또 한 가지 즐거운 추억은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철야(밤을 꼬박 새우는 것)를 했던 것이다. 물론 그 형과 같이 ‘거행‘을 한 것이다. 왜 둘이서 그 형 자취방에서 밤을 새우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희미하다. 아마도 그 형의 누님이 집에 없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는지도. 그 형은 예의 바르게도 나의 어머님에게 미리 허락까지 받았다. 그런 행동도 나에게는 그렇게나 어른스럽게 보였다.

그러니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의 몸이 ‘비정상’적인 routine으로 들어가게 된 것인데.. 신체적인 충격보다는 심리적인 충격이 더 컷다. 그러니 아직도 이 나이가 되도록 그때를 생생하게 기억하지 않는가. 졸림을 참는 것은 비교적 어렵지 않았다. 장기도 두고 책도 읽고 옛날 얘기도 하고 재미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통금시간이 지나면서 (그때는 물론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가 있었다) 그런대로 훤한 새벽을 가로지르면서 신나게 삼청공원을 지나 말바위까지 hiking을 하였다. 그 형은 커다란 나무칼(검도와 비슷한)을 가지고 갔는데 아마도 나를 보호하려고 했던 것 같다. 새벽의 그 시간에 삼청동 산과 말바위를 간다는 것은 참 그렇게 신선하고, 무슨 아주 큰일을 한 듯한 자신감을 나에게 주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그 형네는 근처의 옆 동네로 이사를 갔다.  아마도 자취방을 비워야 했던 것 같다. 새로 이사 간 곳은 다행히 중앙중학교로 통하는 계동골목이었다. 이발소가 붙어있는 곳이라고 들어서 나는 어딘지 알았다. 이사 가기 전에 그 위치를 그 형에게 가르쳐 주었는데 그만 그게 틀린 이발소였다. 나중에 들으니 그 형이 그 틀린 이발소 있는 집에 가서 자취방을 찾았는데 물론 없었겠지. 나중에 알고 보니 조금 더 중앙중학교 쪽에 있는 다른 이발소였다. 

그 형네가 이사를 간 후에는 한번 놀러 갔었다. 내가 조금 더 숫기만 있었다면 더 자주 놀러가면서 더 친해질 수도 있었겠지만 나의 성격이 그렇지 못하였다. 그 후로 소식이 끊어지고 그게 거의 50년이 되어간다. 그 당시 그 형은 서울의대를 지망한다고 들었고 후에 합격을 하였다고 들었다. 아마도 훌륭한 의학인 이 되었는지 모른다. 경기고교 동창회를 통하면 아마도 소식정도는 알 수 있지 않을까. 오래 산 보람중의 하나가 Internet이 아닌가. 값이 싼 search engine의 덕을 보면 그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백일몽일까..

 

만화에 얽힌 추억들…

아! 만화. 내가 기억 하고 싶은 것들은  manga, cartoons, comics가 절대로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 들은 구체적으로 한국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반에 관한 것 들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 당시 거의 광적인 한국만화의 “소비자” 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만화에 얽힌 추억들은 지금 생각해도 100% 다 즐겁고 유쾌한 그런 것들이다. 이런 추억들은 거의 10년 전만 해도 정확하게 기억을 했는데 최근에 많은 부분들이 희미하게 느껴짐에 더 늦기 전에 기억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만화 기억은 아마도 6.25 휴전 전인, 그러니까 1952~3년경 서울 원서동에 살 때 미군들이 보던 미국 만화들 이다. 그게 Walt Disney의 초창기 작품 일듯 한데, 아마도 Donald Duck인 것 같다. 문제는 어린 나이에 나는 그것을 보고 너무나 무서워해서 꿈에도 나타나고 그런 것 들이었다. 별로 기분 좋은 추억은 아니다.  진짜 좋아 하게 된 만화의 추억은 역시 국민학교에 들어가면서 나오기 시작한 만화잡지 류, 그중에서도 만화세계와 만화학생이라는 월간지였다. 그 나이에 맞는 수준으로 연재만화와 연재소설 등이 재미있게 실렸는데 매월 목이 빠지게 기다린 기억이다.

그 월간지에서 기억이 난다면 “엄마 찾아 삼만 리” 라는 김종래 화백의 작품이 있었다. 어린이에 맞는 대하소설인 셈이다. 아직 이 나이에도 그 줄거리가 생생할 정도로 재미도 있었고 인상적 이었다. 또 다른 classic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김근배 만화가 작품인 “멍청이“였다. 아마도 멍청이란 말이 유행어에서 표준어로 굳은 게 이 만화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아마도 6.25가 끝나고 처음은 이렇게 만화잡지로 만화계가 출발을 한 듯싶다. 그 전에 그러니까 6.25전에는 어땠는지 전혀 idea가 없다.  그 만화세계, 만화학생지에서 또 다른 만화가는 “박기당“, “박현석” 선생님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김종래, 박기당, 김근배 박현석 제 화백들 모두 전혀 다른 story line에다가 아주 다른 만화 style을 가지고 있었다.

만화출판계는 서서히 만화 Series로 전환을 하여 지금의 연속극처럼 만화가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위의 만화가 선생님들도 각각 단행본 series를 그리기 시작을 하였다. 이 시기가 나에게 “만화천국”의 시작이었다. 왜냐하면 만화만 볼 수 있는 만화 전용가게(만화방)가 학교 문 근처에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곳에서 많은 여가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가 앉아서 보는데 나올 때 보면 신발이 없어지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때는 TV가 없었던 시절이어서 우리 나이 또래들은 운동 (특히 야구)다음으로 즐거움 이었다.  그 때 이후로 만화계는 서서히 순정물에서 과학물 (Science Fiction: SF)  그리고 역사물로 분야가 넓어져 갔다.

나는 지금 생각해 보면 만화가 어떨 때는 교과서보다 더 좋은 교과서 역할을 한 듯하다. 그 만큼 많이 배웠다. 특히 역사 중에 국사는 만화의 역할이 눈부셨다. 그 딱딱하고 재미없게 씌어진 국사책 보다 만화가 훨씬 도움을 주었다. Timing이 아주 좋아서 국민학교 6학년 때 그러니까 1959년경 중학교입시 공부하는데 아주 많은 만화가 삼국시대를 다룬 게 많이 나왔는데 아주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만화가 선생님들의 이름은 희미하나 너무나도 고마운 분들이었다.  그때 나는 거의 완벽하게 한국사의 흐름을 만화로 정확히 ‘감’을 잡은 셈이다.

세계사에 관하여, 특히 일본침략과 관련된 2차대전에 관한 만화책들도 있었는데 생각나는 것 중에서 왕현 화백의 만화가 단연 으뜸이었다. 그분의 만화에서 처음으로 가미가제특공대 이야기. “야마도”라는 세계제일의 전함, 히로시마원폭. 등등 모든 걸 그림으로 즐길 수 있었다. 그때 일본말도 많이 보게 되었는데 주로 군인들의 용어였으리라. “도쯔께끼”, “우데, 우데”, “칙쇼”, “곤노야로”. 등등 기억이 난다.  그 “왕현”이라는 만화가는 지금도 사실 거의 전설적인 존재로 느껴진다. 몇 편 안 되는 작품인데 정말로 명작 이었다. 그분의 과학공상물로 “저별을 쏘라” 라는 게 있었는데. 이게 정말 얼마나 걸작 이었는지. 그림도 그림이고 그 story 또한 정말 최고였다.

위에 기억한 만화들 모두 아직도 인상적 이었지만 그래도 산호 화백의 “라이파이“는 그 중에서도 제일 기억에 남는 걸작 중 걸작이었다. 국민학교 6학년에 첫 권이 나오기 시작해서 내가 거의 중학교 2학년 때 까지 나왔으니 이거야 말로 대하 중 대하 만화였다.  이분의 만화 스타일은 사실 그때까지의 모든 것들과 조금은 ‘차원’이 달랐다. 거의 몇 단계를 뛰어 넘었다고나 할까.  그 당시 과학, 기술을 꿈꾸던 소년들은 아마도 이곳에서 최고의 기쁨을 맛보았을 것이다. 나도 그 중에 하나였다.  미래지향적인 기술과 함께 과거의 무기들 (칼, 창 같은)이 함께 등장하는 그야 말로 시공을 초월하는 그런 이야기들. 꿈에서도 꿈을 꾸는 그런 정도로 황홀한 이야기들로 그 시절을 보냈다.

몇 년 전에 친구 양건주가 이 라이파이의 저자 “산호”화백을 만나서 다시 발행된 라이파이 복제본에 사인을 직접 받아서 보내 주었다. 그때의 감격은 아직도 못 잊는다. 그 때 신문과 Internet에서 우리 또래들이 다시 라이파이 동호회를 만들어서 모였다는 얘기도 듣게 되었다. 사실 어릴 적 라이파이를 볼 때는 얼마나 많은 독자가 있었는지는 잘 몰랐는데 알고 보니 전국적 이었던 것 같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공계에 심취된 상태였지만 어떤 라이파이 독자는 이 만화로 이공계에 관심을 갖게 되고 나중에 그길로 가서 크게 성공을 했다고 한다. 이게 만화의 위력이었다.

나는 사실 이 라이파이에 심취가 되어서 한때 산호 선생과 같은 만화가가 되려고 했다. 물론 그 어린 나이의 생각이었지만 그 당시는 사실 심각했고 실제로 모방을 해서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산호선생에게 편지를 계속 보내서 편지로나마 지도를 받기도 했다. 많이 그렸는데 모두 없어지고 현재 한권이 살아남아있다. 그것은 현재 우리 집의 보물로 취급이 된다. 제목은 ‘민족의 비극’이란 것인데 역시 2차대전에 관한 군인들의 이야기이다. 지금 보아도 거의 산호선생의 만화스타일을 그대로 모방한 것들이었다.

나중에 커서 어떤 분들이 만화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나는 그때는 꼭 반박을 하곤 했다. 내가 산 증인이라고.. 적절히 골라서 보게 되면 교과서 보다 훨씬 낫다고. 나와 같은 경험을 하며 자란 우리 세대들.. 나화 같은 경험을 한 분들이 나 말고 또 있을까. 참으로 궁금하다.

 

이 몸이 새라면…

이 몸이 새라면 이 몸이 새라면 날아가리. 저 멀리 보이는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섬 까지….

 

아마도 독일의 민요를 일본에서 번역해서 부르고 일제시절 우리에게 남겨지고 나의 어린 시절 그걸 또 배우고 불러서 아직도 가사와 노래가 생각난다. 어린 시절에 부를 적에는 사실 이 가사에서 비행기를 연상하곤 했다. 어린 시절 남자아이들 에게는 비행기처럼 영웅적인 존재는 없었다.  답답한 서울의 좁디좁은 골목에서 비행기를 보는 것은 무척이나 감동적이고 행복했으니까.

그걸 내가 조종을 해서 하늘을 나르고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을 이 노래에서 생각하곤 했다. 새의 존재는 거의 잊어버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새란 것이 현재 인간의 최첨단 비행기보다 훨씬 smart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현대 비행기를 computer로 control을 한다지만 새의 그 작디작은 머리가 아마도 훨씬 더 robust할지도 모른다.

그 주인공인 새를 생각한 것도 나중에는 이 노래에서 느끼게 된 상징적인 의미를 알고 바뀌게 되었다. 아하. 이 새가 날아간다는 것은 바로 거의 완전한 ‘자유’를 뜻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나는 대학시절 기타를 배울 때 즐겨 부르곤 하던 미국 folk song, ‘도나도나’의 가사가 비슷한 의미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듣던 것은 당시 미국 folk song, 특히 Vietnam war protest song을 불렀던 Joan Baez의 곡이었는데 당시는 사실 가사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곡자체가 좋았고, guitar를 배우기에 아주 쉬운 곡이었기 때문에 더 유행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중 나중에 가사를 잘 읽으면 제비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송아지가 주인공임을 알게 되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제비의 거의 무한정 자유와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 이유조차 모르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송아지. 이 얼마나 비극적인 대조인가?

영화화 된 Anne Frank’s Diary (안네프랑크의 일기)를 보면서 또 다른 새의 상장을 다른 면으로 보게 되었다. 어디까지를 구체적으로 영화화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Annex Attic에 갇힌 유대인 가족의 그룹들, 비록 숨은 쉬며 살고 있었지만 거의 모든 자유를 박탈당한 몇 년의 생활,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살아갔을까. 어른들은 그렇다 치고 막 사춘기에 들어간 어린 소년소녀들의 심정을 어땠을까? 아무도 그들을 구할 수 가 없고 오직 radio에서 나오는 연합군의 Normandy 상륙으로 가상적인 자유를 만끽한다.  그 젊은 아니 어린 Anne Frank뚫어진 지붕으로 보이는 아주 파~~란 하늘을 본다. 그리고 가끔 연합군의 고공으로 나르는 폭격기편대의 하~아~얀 꼬리 연기를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제일 동경하며 보던 것은 역시 자유스럽게, 유유하고 천천히 하늘을 나는 새들이었다. 나 에게는 그 장면이 이영화의 climax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이 몸이 새라면 어떻게 할까. 내가 가기 힘든, 아니면 쉽게 갈수 없는 곳, 하지만 꼭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곳으로 나도 날아가고 싶을 것이다. 죽음이 결코 먼 훗날의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 했을 때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기억이 시작된 곳부터 가보련다. 원서동의 아랫자락, 비원입구 돈화문의 근처, 원서동 골목은 나의 모든 기억의 출발이다. 그곳은 어떻게 변했을까. 아니 길 조차 없어 졌을지도. 옛날 휘문학교 뒷문근처, 영국군 부대가 주둔 했던 곳. 조금 더 올라가면 동섭이네 집골목.  어린 시절 나는 이 골목을 오르락내리락 뛰며 달렸다. 이 집은 물론 우리 집에 아니었다. 아버님 친구 분이 피난가편서 빈집을 우리가 잠시 산 것 뿐이었다. 나의 아버님은 납북이후 소식이 끊긴 후였다.  우리 집은 엄마, 누나, 나 이렇게 3식구만 달랑 주인을 잃은 채 아버지 없는 가정의 시작을 맞이하게 되었다.

원서동 비원 담을 따라 끝까지 올라가면 결국 막히게 되는데 그곳에서 우리는 또 살았다. 승철이네 집에서 우리는 세를 들어 살았다. 국민학교 생활도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승철이네 집은 지금 어찌 되었을까? 조금 내려와서 유일하게 우리 집으로 살았던 곳 그곳은 나의 어린 시절에 도시계획에 의해서 철거되었다. 그 이후 기억에만 남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재동국민학교, 가보면 크게 변하지 않았을 듯하다. 나의 국민학교 앨범도 있고, 사진에도 있고 해서 아주 친근한 풍경들, 없어지지는 않았겠지. 10년 전쯤 인터넷에서 어떤 사람이 그곳을 지나 출퇴근 하면서 그곳을 매일 본다고 들은 기억이 있어서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궁금한 곳은 그 재동 국민학교 뒷문 쪽에 있던 우리가 살던 2층 집이다. 이 집에서 나의 유년기를 거의 다 보냈다. 사랑채를 빌려서 살아서 우리 집 같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이집을 떠난 후 나는 이집을 꿈처럼 그렸다. 참 순진했던 소년기의 맑고 좋은 추억들이 아롱아롱 매달린 집. 나는 또 그 집의 옛 모습을 보고 싶구나. 집 앞의 골목도 나의 전쟁터였다. 아마도 이곳도 상전벽해로 변했으리라.

이 몸이 새라면 이 몸이 새라면……. 나는 대학시절의 다방들도 다시 가보고 싶구나. 우리 연호회클럽의 추억이 찐하게 배었던 국제극장 옆 골목의 해양다방, 단성사 옆의 백궁다방, 명동에 있는 여대생이 들끓었던 SNOW다방, 미국적 멋이란 멋은 다 부리던 Rock다방, 대학 입학 후 처음으로 간 다방 연대입구 복지다방, Mamas & Papas의 ‘Monday Monday’에 황홀하던 신촌로타리 왕자다방, 거짓말 편지로 어떤 여대생을 불러낸 세종로 교육회관 지하다방,  아~ 누가 그런 아름다운 기억을 잊을 수 있으랴……. 이 몸이 새라면 다시 한 번 그곳으로 날아가 보련만……

 

서울, 1962

그 수많은 지난해들 중에서 1962년을 가끔 더 생각한다.  왜 그럴까? 비교적 유쾌한 추억들이 더 많이 기억이 되어서 그럴까?   확실치는 않다. 조금 더 기억이 날 뿐 일지도. 그 당시 알던 사람들 기억에서도 특히 왜 그렇게 이름 황성군이 또렷이 이 나이 까지도 남는 것 일까?  아주 색깔이 바랜 중앙중학교 앨범을 볼 때에도 그 친구의 모습이 더 생각이 나곤 했다. 그것도 근래에 들어서 더욱 그랬다. 사실 나와 그 녀석은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친한 친구들이 따로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기억은 그 친구에 더 많이 머무르곤 한다. 조금은 감정이 찐하게 느껴지는 그런 독특한 추억 때문인 것일까?  황성군. 성은 황 씨이고 이름은 성군. 모든 외모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균형이 잡힌 모습이고, 거기에 걸맞게 ‘멋’을 부린 교복도 기억하기에 더 도움을 주었겠지. 지금 사진을 보면 나는 거의 젖먹이 어린애같이 덜 성숙했고 그 녀석은 나이보다 더 성숙한 의젓한 모습이다.  그런 나를 그 녀석은 잘 대해 주었다. 사실 그는 나의 짝(꿍)이었다.

그해, 1962년은 5.16군사혁명(1961년) 다음해, 모든 것이 긴장, 검소, 절제. 그리고 ‘재건’이라는 구호의 물결인 그런 시기였다.  4.19학생 혁명(1960년)으로 거의 아주 자유를 기치로 건 ‘방종’적인 무질서를 짧게 만끽하다가 이제는 국가재건이라는 기치아래 모두가 숨은 조금 죽이며 살았으나, 신선한 의욕이 넘치던 그런 시기였다.  그때는 거의 모두가 지금 기준으로 보면 빈곤층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런 걸 별로 못 느끼며 살았다. 아마도 최소한 나의 나이에는 그렇게 느꼈다. 말로만 ‘멀리, 시골에서’는 밥을 굶는다는 얘기는 듣곤 했지만 피부로 느끼지는 못했다.

우리는 서울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도심 북쪽 북악산 남쪽에 있는 가회동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이곳은 사실 서울의 알짜부자들의 집이 많이 있었던 곳이었다. 그 바로 남쪽이 재동이고 동쪽에는 계동, 또 그 동쪽에 원서동이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사실 거의 이곳에서 보내졌다.  이곳의 기준으로 보면 소위 ‘중산층’집단이 살던 곳이라고나 할까.

1962년은 나의 중앙중학교 3학년인 해였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별로 가까운 친구가 없었는데 3학년이 되면서 마음에 맞는 친구들을 같은 반에서 보게 되었다. 2학년 때의 몇 명 안 되는 친구들 중에 ‘문민규’,  “이경증”등이 같은 반이 되어서 너무 좋았고, 새로 알게 된 ‘김호룡’, ‘우진규’, ‘채현관’, ‘윤태석’, ‘정만준’ 등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황성군, 1962년
황성군, 1962년

황성군은 사실 3학년이 되면서 나의 짝으로 알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억지로’ 사귀게 된 친구인 셈이다.  위에 열거한 친구들 대부분이 3학년이라는 처지를 생각해서 공부들을 열심히 하였다. 요새 발로 study group같은 것이 형성이 되어서 공부를 했는데 한마디로 공부를 이렇게 하는 것은 정말로 효과적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재미에 공부까지 더 잘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의 짝이었던 황성군은 이 group에 없었다. 그는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학교만 끝나면 사라지고 공부시간도 별로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까 항상 무언가 다른 것만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마음씨도 착하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의젓하고, 멋쟁이 교복을 입고 (교복이 지금 생각해 보면 거의 맞춤복에 가까웠음) 하던 황성군.

그런데 어느 날 부터 그가 점심을 가져오지 않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점심을 굶는 것이었다. 점심시간만 되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곤 하고 나가지 않으면 자리에 그냥 앉아서 우리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물끄러미 처다 보곤 하였다. 어리고 철없던 우리들이었지만 모두들 언짢은 기분으로 점심을 먹곤 했다. 특히 짝이었던 나는 입장이 아주 거북하였다. 내가 먹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충고’를 하곤 했다. 충고라기보다는 그냥 ‘평’이었다.  나는 그 당시 (지금도 남아 있지만) 밥을 먹을 때 습관중 하나가 반찬보다 밥을 먼저 먹는 것인데 이것은 절대로 반찬이 모자라지 않기 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나의 노력이었다. 황성군은 그런 나의 식습관이 이상하게만 보였던 모양이었다. 꼭 한마디를 하곤 하였다. 

채현관, 1962년
채현관, 1962년

하지만 나는 그것 보다는 그가 점심을 굶는 게 더 신경이 쓰였고 주변의 나의 친구들도 거의 무언중에 동감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시골에서 보릿고개라고 해서 봄이 되면 실제로 굶는 농민들이 많다고 듣곤 했는데 서울의 노른자위에 있는 학교에서 점심을 굶는다는 게 사실 의아스럽기도 했다.   그러던 중 우리그룹 중에 우진규란 친구가 황성군의 점심을 돌아가면서 가져오자고 제안을 하였다. 사실 나는 그런 생각을 못 하였다. 그만큼 성숙치 못했다고나 할까. 우진규는 그런 면에서 확실히 성숙했던 친구였다. 무언중에 조금씩 괴로워하던 친구들이 다 동의를 하고 사정이 되는 대로 교대로 점심을 싸오기 시작하였다.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황성군은 고맙게 점심을 다시 먹게 되었던 것 같다.

나중에 소문으로 들게는 되었지만 (그는 절대로 자기의 사정을 직접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집안의 사정이 무엇인가 때문에 경제적으로 너무나 어려워 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 나이에서는 실감은 잘 가지를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언가 갑자기 커다란 빚을 지게 되지는 않았을까. 얼마나 급했으면 그 당시 담임선생님한테 까지 가서 돈을 꾸게 되었을까?  참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때의 어찌 보면 사심이 없고 꾸밈도 없고, 순진하기만 했던 그 서울 1962년. 나는 그곳으로 부터 얼마나 멀리 흘러 왔을까…

 

오누나 오시누나 빗님이 오시누나

나의 time machine은 빠르게 거의 반세기 전으로, 정확하게 1961년으로 되돌아 간다. 그해는 4.19 학생혁명의 다음해, 5.16군사혁명으로 이어지던 암담한 시절, 내가 서울중앙중학교 2년이던 그때로 되돌아 간다. 제목인 ‘오누나 오시누나 빗님이 오시누나’라는 시라기 보다는 시조에 가까운 음율을 가진 이 구절이 반세기 뒤에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그 시의 저자는 그때 친하게 지내던 벗 ‘변웅지’였다. 변웅지.. 이름은 거창하지만 사실은 나와 재동국민학교를 같이 졸업한 동창생으로 중학교 2학년때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국민학교 때는 한번도 같은 반을 한 적은 없었지만 6년을 같이 다녔으니 얼굴정도는 알고 있었다.

변웅지, 1962년 중앙중학 졸업앨범에서
변웅지, 1962년 중앙중학 졸업앨범에서

나의 중학교 2학년은 사실 내가 조금 고생을 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학교 공부도 그렇고 깡패 비슷한 녀석들이 나를 괴롭히기도 했던 그런 시절이었는데 그래도 이 변웅지같은 친한 친구가 있어서 아직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는다. 그때 변웅지와 같이 나를 친구로 하던 게 이경증이라는 친구였다. 그러니까 나와 변웅지, 이경증이 거의 3총사 비슷하게 2학년을 보낸 셈이다.

그 당시 국어 선생님은 백정기 선생님이셨다. 백 선생님은 나중에 우리들과 같이 중앙고등학교로 올라가셔서 졸업 때 까지 가르치셨다.  이 국어시간에 국어작문 과제가 있었는데 그때에 나는 작문으로, 변웅지는 ‘시’로 제출을 하였는데 그때의 그 시가 거의 시조의 음률로 “오누나 오시누나 빗님이 오시누나” 였다.  그 후로 비가 올라치면 그녀석의 그 시조 같은 시 생각이 나곤 했다. 이것을 왜 알게 되었나 하면 제출된 작문 중에 뽑혀서 공부시간 중에 선생님이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 변웅지의 시도 뽑혀서 읽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의 글도 뽑혀서 읽혔는데 정말로 나는 당황하였다. 나는 재동국민학교 시절의 추억을 썼는데.. 그런대로 쓰긴 썼다. 하지만 중요한 서론, 본론, 그리고 결론의 구조를 지키지 못하고 그만 결론 비슷한 것이 거의 없이 끝을 내고 말았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고.. 어떻게 끝을 내는지 그것이 확실치 않아서 그만 그랬는데.. 선생님께서는 읽으신 후에 글이 잘 씌어졌는데 아마도 시간이 없었나 보다고 평을 하셨다. 나에게는 정말로 다행이었다.

백정기 선생님
백정기 선생님

변웅지와 같이 중랑천으로 낚시도 같이 갔었다. 나에게는 난생 처음으로 해 보는 그런 것이었다. 그당시 도서관이 당시 고등학교 본관건물의 다락방에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같이 그곳에 가서 학원사 발행의 ‘전집’ (위인전집, 세계 명장전집)을 빌려 읽고 거의 저녁때가 되어서 집에 돌아오기도 했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변웅지와는 중학교 2학년이 끝나면서 반이 갈렸는데 고등학교 졸업 때 까지 한번 도 같은 반이 있던 적이 없었다. 가끔 얼굴이야 서로 보며 지나치곤 했지만 그렇게 서먹서먹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나이에도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하는데.. 그 녀석이 너무 갑자기 변해서 (성숙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하지만 정말 아쉽기만 하였다. 다른 친구 이경증은 여러 가지 인연으로 대학 졸업 후까지 관계가 계속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보면 키가 아주 커 있었다. 그러니 사실 어울리는 그룹이 우리와는 아주 달랐으리라 짐작을 해본다. 어느 대학엘 갔는지도 모른다. 아니 대학엘 갔는지 안 갔는지 조차 모른다. 40대, 50대에 모인 동기 중앙고 57회 단체사진을 아무리 돋보기로 보아도 안보였다. 다만 동창회 주소록에는 주소가 비교적 자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한번은 그 주소로 편지도 보냈는데 무소식이었다. 어떻게 잘 살고 있는지.. 나를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사실 잊을 수 도 있을 것이고 조금은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 오래전의 순진했던 기억이 나에게 있는 한 나는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함께, 부디 건강하게 잘 살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