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화제였던 세월들..

지금은 조금 낳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머리 속에는 온통 추운 겨울, 아~ 고뇌..의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1월 28일인가..의 최악, 고통스러웠던 19시간 차 속에 갇혀서 떨던 일과 바로 지나가고 있는 주의 얼음대란 들.. 지나가는 주의 3일간 집에 있어야 했던 시간들은 비교적 덜 불쾌한 것일까.. 우선 밖에 나가지를 않았기 때문일까. 최악의 경우 전기가 나가는 것인데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2주 전의 snow jam은 정말 최악이었다.

까마득한 옛날, 시카고 시절 고대생 윤근흠이 갑자기 쏟아진 시카고 폭설로 12시간인가 걸려서 집에 왔다고 하는 추억이 생각은 나지만 내가 연숙과 같이 차 속에서 19시간 만에 집에 왔다는 사실은 지금도 믿어지지 않고 빨리 잊어버리고 싶은 악몽이다. 그때 나는 정말 ‘심신’ 모두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오랜 세월을 살면서 그렇게 ‘육체적, 물리적’인 위협을 느낀 적이 없었다. 혼자도 아니고 우리 부부가 같이.. 상상으로 가끔 그런 위협을 공포로 느끼곤 하지만 이것은 100% 실화인 것이다. 

최악의 경우는 무엇일까? 아마도 죽는 것 아닐까? 나는 죽는 것을 지금은 어떻게 받아드리고 있는 것일까? 믿음을 무기로 자신을 가지고 대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과연 그럴까? 언제 죽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만 진리로 알고 살자.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죽을 준비는 항상 하고 살자. 그것이 전부다.

날씨 이외에는 어떤 것들이 나의 머리 속에 있을까? 아하! 1월 중에 용감하게 실행한 나의 ‘약속’.. 도레미 가라오께에 가족들이 갔던 일.. 이것은 정말 나에게는, 아니 가족들에게는 놀라운 일일 것 같다. 어찌 아니 그렇겠는가? 우리 가족, 정말 같이 이렇게 ‘나가서’ 논 적이 있었던가? 아니 집에서도 그런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저 조용히 우리는 살았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나는 몸 둘 바를 잊는다. 어떻게 그렇게 살았을까? 나는 내가 가정적이라고 항상 자부했지만 그와 못지않게 나는 재미 지독히도 없이 가족들을 대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아마 우리가족들은 그것에 적응이 되었을 것이고 운명이라고 받아 들였을 것이고 체념을 하며 살았을 것이다. 나도 변명의 여지는 없지 않지만 이렇게 가족이 ‘나가서 노래를’ 부르고 보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정말 없다.

이런 나의 ‘심경의 변화’는 아마도 최근 3년간 나의 out-of-closet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 전에는 꿈도 못 꾸었다. 새 세상을 보는 듯하고.. 어떨까.. 언제까지 그런 새 세상을 알고 즐기며 살 수 있을까? 나는 분명히 새로운 세상을 새로운 정신과 믿음으로 살고 있다.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아마도 묵주기도와 레지오, 최근에는 순교자 성당에 조금씩 관여하는 것.. 이런 것들 때문일 것이다.

항상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그대로 있고 나를 괴롭히지만 그래도 잘 꾸려나가는 내가 어떻게 보면 대견하기도 하다.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 이것이 나의 99% 노력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나는 젖 먹던 힘을 내고 있다. 혼자만의 노력은 비록 아니지만 분명히 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것을 하느님은 아실 것이다. 그러면 됐다. 그러면 됐다.

두 번째 ice, snow day 2014

2 주 전의 ‘악몽’이 아직도 생생한데 또다시 ‘으시시’한 날씨 경보들이 만발을 하더니 결국은 그들의 예보가 정확함을 또 깨닫게 되었다. Never again의 심리적 도움으로 이번에는 꼼짝도 않고 집에 ‘웅크리고 hunker down‘ 있게 되었고 아마도 그런 식으로 이번의 날씨문제도 해결이 되리라..

두꺼운 얼음위에 밤새 내린 눈, 길이 전혀 안 보인다

아침에 예전처럼 늦은 새벽에 일어나려고 하니 방이 조금은 밝음을 느꼈고 아하~ 밖에 눈으로 ‘하~얀’ 모양이구나 짐작을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windows blind를 열자마자 찬란한 하얀 빛들이 눈을 찌른다.

어젯밤 잘 때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고 하늘을 보니 아직도 조금씩 하얀 눈이 뿌리는 중이었다. deck rail에는 명암이 뚜렷이 눈의 ‘높이’가 보이는데 족히 2 inch는 될 듯 싶었다. 하지만 2 inch 의 높이는 어제 이미 얼어 붙었던 ice sheet가 더해진 것이어서 아마도 눈은 2 inch보다는 적을 듯 했다. 2011년의 ‘대설’ 이후 3년 만에 보는 ‘설경’이었다. 게다가 이곳에서 흔치 않은 ‘고드름’을 원 없이 많이 충분히 즐기게도 되었다.

고드름 고드름 수정 고드름.. 고드름 따다가..

 

비록 영상 above freezing 으로 올라간다고 하지만 밑에 깔리 얼음 때문에 차도가 다 녹으려면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했더니 결국은 오늘도 우리에게 관련된 business는 cancel되는 것 같다. 우리가 관련된 오늘 business는 사실 순교자 성당의 매주 목요일 저녁에 있는 예비자 교리반 봉사가 전부지만 저녁 미사와 더불어 교리반도 취소가 된 것이다. 또 하루 ‘공을 치는, 아니 쉬는’ 그런 날이 된다. 화요일부터 3일째 계속 집에 갇히게 된 것이지만 사실 별다른 choice가 없는 듯 하다.

2주 전의 snow jam(교통 대란)의 기억이 생생한 듯, 이곳 거의 모든 ‘인간’들 ‘꼼짝도’ 안 하고 집에 있을 것이다. 다행히 걱정하던 것처럼 electric power에 큰 문제가 ‘아직까지’ 없어서 심심하거나 한 것은 ‘하나도’ 없다. 사실 또한 예전처럼 ‘어린애’ 같이 신나거나 한 것도 거의 없다. 학교를 다니거나 출근을 꼭 해야 한다면 조금은 뜻밖의 ‘선물’을 받은 양 들뜬 기분도 들겠지만 우리는 그런 시절이 ‘다~~’ 지나간 것 같아서 조금은 서글픈 심정도 든다.

차도가 전혀 안 보이게 내린 이월 중순의 눈.. 올 겨울의 마지막일까..


 

꽁꽁 얼어붙은 아틀란타, 2주 전의 교훈으로 재빨리 제설작업에 나섰다.

 

2주 전 worst snow jam과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freeway

안중근, 쪽발이 그리고 짱 깨

오늘 2월 8일자 The New York Times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바로 오래 전 우리들의 영웅 ‘안중근 의사’ 의 커다란 사진이었다.

 

중국 하르빈, 안중근 의사 전시관

 

어떻게 우리에게 그렇게 친숙한 얼굴에 이곳에 실렸을까? 안중근 의사의 기일이라도 되었나.. 하고 보니 그것이 아니고 기사의 실제 주제는 중국과 일본의 불편한, 아니면 추한, 험악한 관계발전에 관한 것이었다. 이 안 의사의 흉상과 사진 등은 전시장의 모습이었고 물론 중국의 일본에 대한 감정, 정치적인 각도를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 기사는 해석을 하고 있었다.

이 전시장은 1909년 당시 안 의사가 일본의 원로(아니면 원흉)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를 총격하던 바로 그곳 철도 플랫 홈 에 있던 철도역사(驛舍)여서 전시의 의미가 더욱 증폭이 됨을 느낀다. 100여 년 전의 그곳의 지정학적인 역사로부터 지금의 사정은 어떻게 변했나.. 참 100여 년은 길게도 느껴진다. 그렇게 역사적인 강산이 변했나..

이 기사에 의하면 작년 6월,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당시 짱 깨 정부에 안중근 의사를 기려주기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번 전시회는 대한민국 정부의 바램에 의한 것이고, 그것을 ‘쾌히’ 받아들인 것은 중국의 일본에 대한 감정의 표시일 것이다. 여기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는 다른 민족의 원흉 ‘북괴’ 김씨 왕조의 언급은 없다. 그들의 느낌은 이제 별로 무게가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 중국, 일본, 빨갱이 북괴… 이 골치 아픈 족속들을 의식하며, 특히 짱 깨 와 쪽발이의 사이에서 박정희의 큰 딸 박근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과거 1960~70년대에 일본 경제 발전을 모델로 하고 그들의 도움을 철저히 이용해서 한국형 경제발전을 이루어내었던 그녀의 아버지를 잘 아는 그녀는 어떻게 과거를 그녀의 것으로 만들 것인가?

과거 전혀 모르고, 아니 피하고 살았던 일본을 최근에 나는 조금씩 ‘문화’를 통해서 접하고 역시 그들도 우리가 배우고 들었던 대로의 monster는 아닌 그저 평범한 인간들이었음을 알게는 되었지만 전체적인 집단으로써의 그들은 역시 과거의 monster를 떠올리게 되니.. 참 어려운 문제가 아닌가? 고치기 어렵고 숨기기 어려운 일단 벌어진 ‘역사’의 문제라서 더욱 골치가 아플 수 밖에 없다.

여기에서 나는 짱 깨에 대한 고민이 생긴다. 나는 체질적으로 그들이 싫었고 (주로 모택동의 빨갱이 집단에 대한 것)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들의 양심 없는 거짓과 기만, 경험적으로 느껴지는 중국여자들의 해괴한 행동들 등등 모든 것들이 나로 하여금 그들을 피하고 싫어하게 만든다. 물론 이런 것들은 나의 일방적인 편견이지도 모르고 아마도 그럴 것이다. 어떻게 이런 편견을 없앨 것인가.. 역시 ‘인간적’으로 그들을 접근해야 할 듯 하다. 일본의 경우에서 나는 그것을 배웠기에 여기에도 희망이 있다고 느낀다.

빨간 마후라 red scarf

1964년 4월 8일자 동아일보 영화 광고
1964년 4월 8일자 동아일보 영화 광고

얼마 전 역시 우연히.. stumbled upon.. ‘재수 좋게’ 이 영화를 정확히 거의 50년 만에 다시 보게 되었다. 이 영화는 1964년 봄에 개봉된 신상옥 감독, 신필름 제작의 전쟁영화로 당시에 장안의 화제를 상당히 끌었고, 흥행도 대 성공이었던 것도 기억을 한다. cast도 당시 최고의 인기 배우들이 등장을 했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전투기, 거의 모두 F-86 Sabre jetfighter 가 대거 등장을 했고 지금 다시 보아도 ‘우습지 않게 보이는’ 정도로 당시로서는 상당한 촬영 기술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혹시 이것도 ‘한국 영상원’ 어쩌구 하는 곳에서 ‘올려 놓은’ 것인가 했지만 정말 다행히도 ‘표준 youtube video protocol’ video여서 부지런히 ‘download’ 를 해 두었다. 이제는 ‘안심하고’ 언제든지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good news였는데 bad news는..  막상 보게 되니.. video quality가 ‘엉망’이었다. 그러니까 VHS video tape보다도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영화 첫 부분에 그 이유에 대한 ‘양해’ 메시지가 나온다. 이것도 역시 빨갱이 탓이었던가.. 신상옥씨가 강제 납북되면서 자신 소장의 original들이 모두 없어졌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 의문은.. 신씨가 납북되면서 왜 그가 만든 영화들을 가지고 갔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발적으로 북을 간 것인가? 좌우지간 여기에 보이는 영화의 video는 영화를 상영하면서 video camera로 찍은 것이 분명했다.

이런 사연을 알고 보니 더욱 이 video가 값지게 느껴졌다. 아차..하면 이것도 못 보고 죽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가끔 이 영화가 생각나곤 하고.. 그 당시 보았던 영화의 장면, 줄거리 등을 머리를 짜내며 생각하기도 했다. 몇 장면과 대사는 아직도 기억을 한다. 또한 당시 인기 4중창단 불루벨즈 가 불렀던 주제곡은 이 영화의 전체적 분위기와 참 잘 어울렸고 또 영화와 별도로 인기곡으로 남게 되었는데.. 사실 그것이 전부였다.

이 영화는 1964년 봄에 개봉이 되었고 상당한 인기였지만 당시 중앙 고교 2학년 생이었던 나는 그렇게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 나이에는 ‘외국영화, 미국영화’가 아니면 모두 ‘촌스럽게’ 느껴지고, 사실이 그랬다. 그 정도로 국산영화의 질은 한마디로 저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빨간 마후라‘ (당시 마후라 란 말은 가벼운 느낌의 목도리란 뜻으로 거의 표준어처럼 쓰였는데 알고 보니 muffler의 순 일본식 발음이었다) 는 조금 달랐다. 우선 당시 우리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박택규 화학 선생님이 이것을 보고 와서 아주 인상적으로 ‘선전’을 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를 보게 된 이유가 됐다.

그 박택규 선생님은 화학을 ‘대학 교수’ 스타일로 ‘강의’하시던 독특한 선생님으로 역시 수년 후에 대학교로 ‘영전’이 되시어 가시기도 했다. 그 선생님은 우리들을 마치 친구처럼 생각할 정도로 화학 과목 이외의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시고 자신이 본 영화 같은 것도 감상을 나누곤 했다. 당시 입시위주의 분위기에서 그런 선생님은 참 드문 case였다. 그 선생님이 알려 준 이 영화 장면들 중에서 ‘최무룡’ 이 수송기에 의해서 ‘기적적으로’ 구출 되는 것.. 그것은 아직도 나의 머리 속에 남아있다.

나중에 직접 이 영화를 보고 느낀 것 중에는 한마디로 모조리 멋진 사나이들.. jetfighter pilot들의 ‘여성 편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이었는데.. 이런 사실은 아마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마찬 가지인 모양으로 1980년대 미국 영화 Top Gun을 보아도 거의 비슷한 것이다. 여자들이 그 조종사들을 그렇게 멋지게 본다는 사실이 미국 영화보다 우리가 훨씬 앞서 이 빨간 마후라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신영균, 최은희, 최무룡.. 이 세 최고 배우가 주름잡는 이 영화는 6.25 전쟁 당시 강릉 공군기지를 무대로 펼쳐지는데 나도 당시의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강릉 공군기지는 나에게도 친숙한 이름이었고 그곳에서 ‘뜨는’ 공군 조종사들을 내가 9살 쯤인가 원서동 살 당시에 가까이 보기도 했다. 물론 그 조종사도 ‘여자’와의 관계로 더욱 우리에게 알려진 case라서 내가 갖는 이들의 playboy인상은 이 영화에서 재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100% 확실한 기억 속의 장면 중에는 최은희가 고급 술집에서 hostess로 아주 취한 상태로 ‘쉬~ 하러 간다’는 말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당시 고2의 나이에 이것은 아직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erotic하게 들렸다. 또한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나고 그룹의 조종사들과 여자들이 모조리 good night ladies’ kiss를 같이 하다가 비행단 최고 상관인 ‘박암’이 자동차 headlight를 키며 노려 보자, 신영균이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이노무 새끼..’ 하며 다가가는 장면.. 50년이 되었지만 생생한 기억들이다.

당시 F-86 조종사들은 아마도 군인들 중에서 최고 ‘엘리트’ 급에 속했을 듯 하다. 왜냐하면 영어에 능통을 해야 미군들에 의해서 훈련을 받는데다가 비행기를 이해할 정도면 rocket scientist는 아니더라도 대학졸업 정도는 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군인들 중에서는 최고의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물론 신영균, 최무룡 급의 미남들을 아니었어도 그것이 큰 문제가 되겠는가.. 하늘을 나르며 조국의 지킨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멋진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을 것 같다. 최소한 그 당시 이 영화를 본 나의 나이 또래는 그렇게 느꼈을 것 같다.

이 영화를 다시 본 느낌은.. 다 좋은데.. 끝 부분이 전체적인 ‘멋진 인상’을 구겨놓았다는 아쉬움이랄까.. 멋진 외국영화를 보다가 불현듯 ‘촌스러운’ 국산영화의 느낌으로 끝을 낸 것이다. 그 장면은 ‘한국적 정서’를 나타내려고 한 듯이 ‘죽은 신영균의 어머니, 한은진’ 이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불현듯 나타난 것인데.. 글쎄, 각본 때문에겠지만 이 장면으로 완전히 ‘멋진 꿈에서’ 깨어난 듯 느껴진다.

 

 영화 빨간 마후라, 1964

 

 

Snow Jam, 아틀란타 교통대란 2014

매주 화요일은 예외 없이 우리부부가 레지오 주 회합에 참석하러 30분 freeway 드라이브로 도라빌에 있는 한국 순교자 성당에 나가는 날이다. 주 회합이 끝나고 곧 이어 정오 미사에 참례한 후 부근 Korea Town에서 가끔 shopping 을 하거나 점심을 먹기도 하고 귀가를 하면 보통 6시 정도가 된다. 돌아올 때쯤이면 보통 rush hour에 ‘걸려서’ 30분 드라이브가 1시간 이상 걸릴 때도 있다. mass transit system이 거의 없는 아틀란타 Metro인 만큼 우리 집이 있는 곳이 지역적으로 Korea Town과 꽤 멀리 떨어진 탓에 별도리가 없이 치러야 하는 ‘세금’ 같은 것으로 여기고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 화요일은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1시간이 아닌, 무려 19시간 걸렸던 인생 최악의 드라이브 경험을 한 날이 되었다.

 

운명의 날, 2014년 1월 28일 화요일 오전 11시 부터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눈은 일기예보를 통해서 들었던 시간보다 훨씬 이른 것이었다. 그러니까 모두들 ‘안심하고’ 출근해서 그저 집에 조금 일찍 돌아가면 될 것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모두들 학교나 직장에 있는 상태에서 시간보다 빨리 내린 눈을 만난 것이다. 이러한 ‘절묘한’ 시간문제 이외에 설상가상으로 당국(주정부, 시정부들)에서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집에 빨리 가라고 모조리 ‘풀어놓은’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였다. 아무리 도로망이 잘 되어있어도 차들이 모조리 길로 나온다면.. 불 보듯 결과는 뻔~한 것이 아닌가? 이 당국자들은 하루 종일 ‘일기예보’가 틀렸다고 발뺌을 하기에 바빴다가 나중에는 그들이 예보를 잘 못 들었다고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하기도 했다.

 그 비상 퇴근 시간이 점심시간이 바로 지난 때였고, 모든 도로망은 귀가하는 차들로 완전히 묶이게 되었는데.. 여기에 급강하하는 기온 (섭씨 영하 10도까지) 에 쏟아지는 젖은 눈..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교통대란이 시작된 것이다. 얼어붙은 도로에서 차를 그런대로 끌고 가려면 어느 정도 최소한 속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거의 서있는 상태에서는 도저히 타이어가 traction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더욱 불쌍한 것이 18 wheeler semi들.. 그러니까 tractor-trailer들, 그 공룡 같은 덩치의 고철들이 그런 상태에서는 조금도 전진할 수 없는 것이다.

I-285 west@Buford Hwy에서 시작된 19시간 드라이브의 시작

이때만 해도 모든 차들이 거북이처럼 움직이긴 했다

 

결과적으로 worst of worst.. 아틀란타 전체 도로망에는 각종 귀가 차량들이 끈끈이 주걱처럼 모조리 jam에 빠진 상태로 서있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최악 중의 최악이 아틀란타의 ‘순환도로’인 I-285 system이었는데.. 바로 그곳에 우리 차 Sonata도 갇혀 있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후 3시에 출발한 우리 차는 다음날 아침 10시에 집에 도착을 해서 19시간의 귀가 드라이브.. 최악의 경험을 한 것이 되었다.

 그날 따라 성당에서는 연도와 그에 따른 점심회식이 있었던 탓에 더욱 늦게 출발을 해서 I-285를 타고 보니 그곳은 거의 parking lot으로 변해 있었지만 그런대로 거북이처럼 조금씩은 움직였다. 비처럼 뿌려대던 진눈깨비가 떨어지는 기온으로 길은 조금씩 빙판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차는 비례해서 더 거북이처럼 기어서 밤 9시경에는 Powers Ferry Road exit 까지 갔지만 그곳에서 모든 차량이 완전히 서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집에 혼자 있을 Tobey(dog)와 Izzie(cat)이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서서히 그 ‘놈’들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신변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차의 gas는 거의 바닥이 나고 길은 완전히 주차장으로 변한 상태에서 수많은 차들이 버려지기 시작하고 깜깜한 밤은 무섭게 얼기 시작하고.. 나 혼자가 아니고 연숙도 같이 있는 우리의 차 속은 조금씩 공포감이 휩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100% 완전히 정지 된 I-285 traffic

 

이제는 별 도리 없이 정지된 차 속에서 떨며 밤을 새우게 되었다. 1/4 정도의 gas로 출발한 우리 차는 이제 E(empty) 에서 떨고 있어서 gas를 아끼기 위해서 engine을 끄니 추위가 엄습을 해서 잠도 오지 않았다. 주위를 보니 모든 차량들이 우리와 마찬가지였다. 시동을 끄고 쥐 죽은 듯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차를 ‘버리지’ 않고 그저 ‘구원군’만 기다리는 상태였다. 처음에는 우리도 차를 버리고 ‘걷자’는 생각을 했는데.. 도저히 엄두가 안 난 것이 주위가 평지가 아니라는 사실과 깜깜한 밤이어서 정말 신변에 위험을 느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가까운 곳에 보이는 건물들.. 호텔.. 주유소 같은 곳으로 간 모양이었지만 우리는 그것도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아틀란타에서 가장 복잡한 freeway가 차들로 100% 주차장으로 변한 얼어붙는 한밤중의 광경은 그곳에 있어본 사람이 아니면 상상이 가지 않을 듯 하다. 배 고픈 것도 잊었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제일 급한 것이 bathroom문제였던 것이다. 남자는 그런대로 문제가 없지만 여자들은 정말 골치 아픈 문제였다. 그 많은 차들의 여자들..어떻게 해결을 했을까… 나의 옆에 타고 있던 연숙도 정말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지만 한마디로 별 choice가 없이 해결은 해야 했다. 이런 것들로 며칠 동안 수많은 벼라 별 일화들이 website에 등장하기도 했다.

 시동이 꺼진 차에서 무섭게 추웠던 밤을 지새는 기분은 기가 막혔지만 별 도리가 있겠는가? 제설차 준비가 거의 없는 이 지역에서 재빨리 소금을 뿌려대는 구원군이 그렇게 빨리 올 리가 없었다. 동이 트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고요하기만 했다. 모두들 그저 그저 기다리는 모양.. 그러다가 최소한 밝은 밖을 보니 ‘걸어가자’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 주위에 보이곤 해서 희망을 갖고 생각을 해 보았다. 우리가 발이 묶여 있던 곳에서 우리 집까지는 최소한 10 mile 이상은 되어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빙판으로 변한 언덕을 걸어가는 것은 장난이 아니었다. 우리와 같은 쪽에 사는 레지오 단원 자매님은 우리보다 먼저 출발을 했지만 역시 어떤 hotel 근처에서 차가 묶여서 그 hotel에서 밤을 지냈다고 했다. 최소한 편한 잠을 잤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에 걸어가면 그 hotel로 갈 것으로 정했다.

 

하지만 차를 버리는 것도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차를 가지러 와야 하고 안전문제도 있지 않은가? 가급적 차에서 버티고 있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었다.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아침 9시경이 되었다. 그런데 앞 쪽에서 무슨 큰 트럭 소리들이 나기 시작하고 우리 앞 쪽의 차들이 거북이처럼 움직였다. 드디어 소금을 뿌리는 트럭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면서 거북이 속도로 전진을 해서 나아가니.. freeway는 정말 가관이었다. 움직이는 차들이 거의 없이 길가는 완전히 버려진 차들로 즐비한 것이다. 거의 텅 빈 고속도로를 우리는 가고 있었다. 아무리 빙판이 되긴 했지만 그런 상태에서는 운전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집 앞의 주유소엘 오니 드리어 차의 gas가 바닥이 났다.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집 앞에는 엄청난 비탈들이 있었지만 역시 차들이 없으니 큰 문제가 없었다. 최소한의 momentum만 유지하면 암만 미끄러워도 control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집에 들어오니 아침 10시가 되었다. 모든 곳에 잠잠한 고요한 아침이었다. 다행히 두 마리 pet들은 잘 견디고 있었고.. 우리는 ‘궁전’처럼 느껴지는 home sweet home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되었다. 이때처럼 침대의 편안함을 실감한 적은 반생을 살면서 거의 없었다고 할까.. 비록 천재라고는 하지만.. 사람이 만든 실수도 무시할 수 없는 기억에 남는 하루가 되었다. 나중에 뉴스를 들어보니 우리가 경험한 것처럼 수 많은 각종 ‘해괴’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이 난무했다. 무능한 해당 당국과 특히 담당한 사람을 막연히 믿는다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는 생각이라는 경험도 했다.

 이번의 ‘교통대란’의 주 원인은 물론 ‘절묘한 시간’에 도착한 얼어붙는 진눈깨비였지만 나머지는 모두 사람들이 만든 것이었다. 첫째는 공식적인 정확한 예보를 무시하고 서로 맞지 않는 지역예보에 의지한 것, 둘째는 주 정부를 위시해서 군소 지역 정부들(이것이 장난이 아닐 정도로 많다)이 ‘전체적인 상황’을 ‘무시’하거나 모른 상태에서 속수무책이었고, 모든 것이 거대한 자동차 도로망에 의존하는 아틀란타 수도권의 갖는 특성이 이런 2″도 안 되는 눈에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는 뼈아픈 사실이다. 이런 상황이 다시 온다면.. 나는 freeway system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고 ‘동네 길’을 택할 것이라는 조금은 소극적인 생각과, 자동차 gas가 1/2 이하로 절대로 내려가지 않게 채우고 다닐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고 더 한가지.. bathroom kit를 차에 가지고 다닐 것도.. 굶는 것은 참아도.. ‘화장실’ 가는 것은 못 참지 않는가?

 

freeway를 벗어난 Cobb Parkway.. 길이 아닌 주차장으로 변했다

차를 버리고 걸어간 사람들로 길은 완전히..

추위, 상도동 종점의 고뇌

cold-jan-2014올해 겨울은 정말 춥다.  아~~ 고뇌.. 이 지독히도 오래된, 아득히 먼 옛날에 내가 자주 되뇌던 표현이 문득 되살아난다. 이유는 간단히 말해서.. 아주 쓸쓸하고 황량한 시베리아 같은 그 때와 같은 느낌의, 뼈 속 깊숙이 스며드는 추위를 느꼈기 때문이다.
정말 이런 느낌은 그 ‘때’ 이후 처음으로 느낀 것이다. 그것이 반갑기도 하고 춥고 쓸쓸하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그때’는 거의 45년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고 그 ‘시베리아’는 연세대 재학 시 살았던 상도동 종점 부근이었다.

지금 내가 아틀란타 지역에서 느끼는 ‘연일 계속되는 지독한’ 추위는1 뉴스가 될 정도로 의외적인 기후현상이고 거의 25년간 이곳의 ‘전형적’인 ‘더운 겨울’에 적응이 된 탓에 지금의 지독히 추운 겨울은 바로 ‘그때’ 느꼈던 ‘고뇌’와 비슷한 느낌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 해에 발표되었던 북미주 장기 일기 예보가 정말 ‘까무라칠’ 정도로 적중한 것에 나는 놀라기만 한다. 일기예보과학이 참으로 발전을 한 모양이다. 그 예보에 의하면 서부를 제외한 전체 북미주 전체가 ‘더 춥고, 더 습한’ 그런 것이었는데 현재까지 거의 모두 맞고 있다. 이것으로 global warming 같은 ‘정치적’인 것과 연관을 시키는 것은 무리겠지만.. 과연 어떨까?

옛날 ‘그때’는 20세 전후의 팔팔한 젊음을 자랑하던 때였지만 우리세대들.. 6.25이후 잘 못 먹고 자랐는지 신체적으로 별로 건강한 편은 아니었고, 박정희 정부의 요란한 경제발전 소음은 요란했지만 그것에 비해서 ‘따뜻하고 편한’ 환경은 절대로 아니어서 지독한 서울의 매서운 바람은 정말 ‘고뇌’로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요새 그 흔한 storm parka같은 것도 없었고 overcoat도 너무나 비싸던 시절..시베리아 성 서울의 1월 맹 추위는 정말 겨울중의 겨울이었다.

특히 데이트 같은 것이 늦어져서 시내버스 막차로 상도동 종점 (숭실대학 입구) 에 내려서 집까지 가는 골목의 맞바람 추위는 정말 대단해서.. ‘그때’ 내가 ‘즐겨 되뇌던’ 말이 바로 ‘아~ 고뇌’였다. 이 말을 ‘계속’ 해서 내 뱉으며 어둠 속의 골목길을 걸으며 집으로 향했던 ‘그때’였다. 그 집이란 것도 당시에는 중류층 수준이었겠지만.. 글쎄.. 연탄이 거의 전부였던 시절, 온돌방과 연탄난로의 난방은 사람을 거의 꼼짝 못하게 만들고, 따라서 이불을 깔고 백일몽을 즐기며 아름다움 추억의 씨를 뿌린 기억들 뿐이다. 하지만 그 느낌들은 지금 ‘절대로’ 재현할 수 없는 정말 아름다운 그런 것들이었다.

같은 추위에도 같은 느낌이 꼭 들까? 아닌 것 같다. 이곳 아틀란타 지역으로 이사오기 전까지 나는 거의 Midwest 지방2에서 살았기에 그곳의 진짜 무서운 눈과 추위를 고스란히 경험하였지만 그곳 추위의 느낌은 ‘절대로’ 서울 1월의 느낌과 달랐고, 지금 느끼는 아틀란타 지역의 느낌과도 다르다.

그 ‘북쪽’의 추위는 심리적으로 너무나 추운 겨울을 예상해서 그런지 느낌이 ‘고뇌’성 같이 괴롭지 않았다. 그런 추위에서 거의 ‘걷는’ 일이 거의 없고 지독히 절연된 난방 된 집과 차에 의지하며 겨울을 나면 별로 추운 느낌을 기억하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현재 이곳의 ‘겨울 환경’이 아마도 1960년대 말 서울과 거의 비슷한 것은 아닐까..하는 재미있는 추리를 해 본다.

 

Bridge over Troubled Water – Simon & Garfunkel, 1970
classic oldie가 나의 당시 고뇌를 말해 주기도 했다.

 

  1. 최저 섭씨 영하 12도.. 최고는 빙점에서 오락가락..
  2. Illinois, Ohio, Wisconsin같은 모두 Big 10 지역

Davos, joy and surprise: 박근혜

 

 

나의 매년 1월은 크리스마스 ‘후유증’, 새해를 맞이하는 ‘고민’, 식구들의 생일과 결혼기념일, 가까운 친지들과 저녁을 함께하는 mid-Winter classic 등으로 다른 달에 비해서 조금 머리가 산란해 지기도 하지만 그 와중에 ‘항상’ 나를 즐겁게 하는 시간이 있으니 바로 연례 다보스 경제 포럼, Davos World Economic Forum(WEF)이다. 이 행사를 stream media로 보고 있으면 조금 과장된 표현으로 내가 흡사 ‘세계적인 인물’이 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 유명인사들을 바로 옆에서 보며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 행사가 그래서 그렇게 매력적인가.. 아닐 것이다. 이곳을 통해서 일년에 한번 씩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특히 경제적으로 변하는 세상을 피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눈으로 덮인 아름다운 배경으로 ‘멋지고, 힘있는’ 인물들의 열띤 토론과 행적을 보는 것.. 기분이 좋은 것이다.

올해의 forum은 나의 방심으로 며칠을 늦게 따라가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뜻밖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바로 대한민국 첫 여성 대통령,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녀.. 박근혜.. 감개가 무량할 수 밖에 없을까.. 나는 모국의 정치 풍토나 뉴스에 거의 무관심하게 살고 있지만 어찌 박근혜의 얼굴을 보고 감정이 일지 않겠는가? 우리 시절과 그렇게 가까웠던 (좋던, 싫던) 박정희의 장녀, 부모를 모두 정치적 비극으로 잃은 비극의 가족을 초인적으로 극복하고 아버지의 염원을 계승한 여성.. 참 자랑스럽다. 그 박근혜가 드디어 Davos에 한 나라의 원수 자격으로 등장하고 forum chairman과 일대일로 대담, 영어 연설을 하는 모습을 보니 코가 찡~해지기도 한다.

그녀의 영어 연설도 아주 ‘정석형’으로 잘 전달하였다. 약간의 Korean accent는 애교로 참 잘 어울렸다. 연설의 내용도 아주 직설적이고 호소력이 있었다. 그녀가 신봉하는 듯한 대한민국의 ‘발전 전략’, 거의 digital entrepreneurism에 관한 것인데.. 아마도 현 정권의 경제 청사진인 듯 들렸다. 100% 경제적인 주제의 연설이었지만 연설 후 사회자, forum 의장 (Dr. Klaus Schwab) 과의 대담에서 그는 빼놓지 않고 ‘북한 문제’를 꺼내었고, 박 대통령은 조금은 ‘판에 박힌 듯’한 (너무나 정치적이라서?), 예상적인 대답을 하였다.

1968년 1월 21일, 김일성의 김신조 무장공비 31명이 ‘박정희의 목을 따러’ 청와대로 침입한 것을 박근혜 씨는 기억을 하고 있을까? 1974년에는 김일성이 사주한 재일교포 빨갱이가 자기 어머니를 죽인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까? 빨갱이들이 (심지어 천주교 계까지) 득실거리는, 완전히 갈라진 현 대한민국..그녀는 어떻게 이런 문제들을 헤치고 나아가 그녀의 아버지의 이름을 제자리에 갖다 놓을 것인가.. 참 나의 머리도 복잡해진다.

나의 첫성탄 12일..

My first ever, 12 days of Christmas.. 제목은 거창하지만 글자 그대로 나는 인생 처음 12일간의 2013년도 성탄 시즌을 보낸 경험을 하였다. 여기서 12일은 성탄절부터 시작되어 1월 5일 경까지 계속되는 기간으로 세속적이건 종교적이건 전통적인 의미를 가지는 기간이기도 하다. 더욱이 12일 째인1월 5일은 우리 큰 딸 새로니의 생일이 있어서 더욱 이 성탄 12일에 의미가 실린다.

‘상업적 소비자 문화’ 가 뿌리를 잡기 훨씬 전에는 이런 성탄 이후 12일 간의 기간이 더 의미가 있던 기간이었다. 그것이 ‘성탄 기분을 이용한 상업주의’ 가 성탄 훨씬 전부터 ‘북을 치기’ 시작해서 성탄절 그날 모든 것이 끝을 내는 괴상한 유행이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런 것들이 올해는 견디기 힘들게 괴로웠다.   이번 성탄시즌은 글자 그대로 ‘탈 세속적’으로 보내려고 노력을 했던 기간이었다. 이렇게 보낸 것은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의도적인 측면이 많았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다는 ‘차분한, 의미 있는’ 크리스마스를 나는 그 동안 갈망했는지도 모른다.

성탄시즌이 오면 나는 사실 기분이 쳐지는 것을 많이 경험하였고, 이것이 바로 ‘세속병’일 것이라는 의심도 많이 해왔다. 그저 가족적 선물교환이나 휘황찬란한 shopping mall, 일년의 나라 경제를 좌우하게 된 미친듯한 상업성.. 한마디로 지겨웠다. 그 중에서도 나를 제일 괴롭힌 것은: 점점 이른 ‘성탄 경기’의 시작과 12월 25일이 지나자 마자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일 순간에 모든 ‘성탄 열기’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런 것들 때문에 나는 12월 달이 점점 싫어지기도 했다. 나이를 먹음을 느끼게 되는 연말연시의 냄새까지 곁들여서 더욱 싫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무언가 너무나 잘 못 되었음을 절감하게 되고, 그것을 올해 성탄시즌은 ‘계획적’으로 바꾸려고 노력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까지 holiday season을 심각하게 보내려는 것은 조금 지나친 것 같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심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올해 나의 목표는 ’12일간의 성탄절’.. 성탄절 거의 2달 전부터 떠들어대는 모든 잡음을 ‘절대로 무시’하고, 성탄은 성탄의 의미로 12월 24일 밤 미사로 부터 시작해서 12일 정도 더 축하하며 지내기로 했다. 이것은 거의 ‘반 세속적’인 것으로 힘들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100% 성공을 거두었고 이제는 no turning back의 각오로 앞으로도 계속할 것을 다짐하게 되었다.

성탄절 불과 며칠 전에야 Christmas tree가..
성탄절 불과 며칠 전에야 Christmas tree가..

이런 나의 의도를 처음에는 가족들이 의아해 했지만 나중에는 체념을 하고 이해를 하는 듯 했다. 제일 큰 문제가 Christmas tree를 언제 장식하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평소에는 12월도 되기 전에 했지만 올해는 아슬아슬하게, 의도적으로 성탄 3일 전에야 세워 놓았다. 그것도 아주 조그만 것으로.. 이런 장식물들은 또한 의도적으로 거의 1월 중순까지 유지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새해가 되기도 전에 쓰레기 버리듯 치워버렸지만 나는 그것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성탄절 이전의 축제분위기를 거의 없앤 대신에 교회력 ‘대림절’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를 썼는데.. 주변의 분위기가 변한 만큼 효과가 적지 않았다. 감상적인 carol을 가급적 피하였고, 대신 성탄 주제의 가족적인 movie들을 보기도 했다. 인간은 역시 오감에 너무나 좌우됨을 이번에 실감하게 되었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의외로 간단했다. ‘사랑’이었다. 그것을 왜 그 동안 그렇게 모르고 살았을까? 의외로 의미 있는 성탄 영화들이 꽤 있었고, 거의 모두 Youtube에서 찾았다. 그 중에 3편은 이번 성탄시즌에서 최소한 10번 이상을 공부하듯이 보았다.

모두 대주제는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천상적인 사랑.. agape‘임을 보여 주는 것으로 아마도 내년에도 같은 식으로 10번 이상 다시 보게 되지 않을까? 세파에 휩쓸리고, 깊은 생각 없이 남들을 쫓아가고, 주위의 인정을 받으려고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아온 지난 날들을 생각한다. 왜 그렇게 살았는지도 사실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것이 올해 나는 무슨 ‘신들린 듯’ 진리를 찾게 된 것이다. 이런 나의 노력이나 변화가 그저 우연일까.. 아마도 아닐 것 같다. 두드리면 열리는, 찾으면 찾아지는 그런 진리일지도 모른다.

 

성탄 12일에 즐기며, 공부하며 보았던 Christmas 영화들

 

The Christmas Box

Richard Thomas, Maureen O’hara 주연의 이 family movie는 1980년대의 비교적 오래된 영화이지만 주제는 불변의 진리인 ‘성탄은 사랑’이라는 것을 주인공인 Thomas가 빌려 사는 으리으리한 저택의 여주인인 O’hara로부터 배우게 되는 과정이다. ‘성탄이란 과연 무엇이냐?’ 라는 간단하고 바보스러운 질문에 곤혹을 치르지만 결과적으로 딸을 가진 가장으로서 이 성탄의 진리를 찾아내는 감동적인 storyline.. 6번 정도 볼 때에 나도 그 수수께끼를 찾게 되었다.

The Christmas Wish

역시 1980년대 holiday family movie로 뉴욕에 거주하는 어떤 일류대학 출신 앞날이 밝기만 한 청년이 성탄 즈음에 조그만 고장 고향을 찾았을 때 자기의 할머니 성탄절 소망에 대한 얘기를 받아들여 서서히 자기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되며 성탄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가히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역시 ‘성탄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The Christmas Hope

비교적 최근 영화, 10여 년이 조금 넘은 것이지만 역시 ‘성탄은 사랑’이라는 주제다. 비극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알게 되는 눈물을 자아내는 사랑을 향한 이야기들.. waitress로 일을 하며 singer가 되려고 애를 쓰는 어떤 single mom, 성탄 며칠 전에 교통사고로 죽고 홀로 남은 ‘밝기만 한’ 어린 딸.. 아동보호 시설 담당자 여자가 임시로 맡게 되지만 그녀 역시 얼마 전 교통사고로 10대 아들을 잃은 고통으로 시달리는 입장이다. 그런 고통으로 거의 이혼 직전까지 갔던 그 부부는 기적적으로 그 엄마를 잃은 어린 딸을 자기집으로 입양하기로 비장한 결정을 하며 성탄전야를 맞는다. 사랑을 잃었지만 결국은 더 큰 사랑을 찾는 것.. 이것도 ‘성탄은 사랑’이라는 진리를 보여준다.

A Christmas Without Snow

이 영화는 1980년대 초에 나온 것으로 나는 아주 오래 전에 이미 TV에서 본 적이 있었고, 그 이후 다시 보고 싶었지만 잊고 살았다. 이번에 우연히 Youtube에 나온 것을 보게 되었고 이제야 ‘확실한 줄거리’를 알게 되었다. 그 옛날에 잠깐 보았을 때의 기억은, 교회 성가대를 지휘하는 ‘고약한 성질’의 할아버지와 성가대 대원간의 갈등 정도였다. 제목부터가 요상해서 ‘눈이 없는 성탄’.. 이것은 무슨 의미를 주는 것일까? 간단히 말해서 주인공인 이혼녀가 눈이 강산처럼 싸이는 Nebraska주에서 눈이 전혀 없는 San Francisco로 이사를 와서 맞게 되는 성탄절 풍경을 그린 것이다. 사실 눈 보여야 성탄절 영화..라는 공식을 완전히 깨어버린 영화가 되었고, 특이하게 교회(신앙)를 배경으로 ‘성가대’가 주제가 된 것도 특이했다. 성가대 지휘자인 John Houseman은 당시 The Paper Chase란 영화로 인기가 있던 원로급 배우로서 나도 참 좋아했다. 또한 여기 성가대원으로 나오는 ‘동양 여자’는 각본에 한국인으로 나오는데.. 배우 이름도 Kim이었다. 문제는 first name인 Daisietta였다. 한국출신 여배우라면 이런 이름은 너무나 생소하다. 과연 이 배우는 한국출신일까.. 이 영화에서 그것이 나의 주 관심사가 되었다.

 

훌~쩍 지나간 2013년..

그렇다.. 훌~쩍 2013년이 사라졌다. 아까운 느낌도 들지만 예전처럼 그렇게 연연히 더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아마 희망적으로 새로운 이경우의 모습이 되기를 바란다. 지난 것, 지나가는 것을 조금 더 건강하게 생각하고 간직하고 ‘즐기자’. 예년 매년, 이맘때면 겪는 야릇한 고통의 느낌, 아련히 느끼는 외로움..등등 이런 기분이 항상 기분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주위의 사람, 연숙에게는 괴로운 나의 우거지 상 일지도 모른다.

올해, 아니 지나간 성탄 시즌.. 그렇다.. 나는 작은 ‘금자탑’을 세우며 건강한 ‘축제시즌’을 만들고 보냈다. 나는 자부한다. 올해는 나의 근대사에서 한 획을 긋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사실.. 거창한 듯 들리지만 사실은 웃기게 왜소한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성탄을 느끼고 지낸 2013년 성탄절이었다.

왜 이번에는 그렇게 유별난 생각을 했을까? 이것도.. 이것도..it’s now or never의 맥락이다. 나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전에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저 ‘실행’을 못했을지도 모른다. 진정한 의미의 성탄이란 무엇이었을까? 11월 중순부터 요란한 carol과 그것에 대한 추억, 감상에 젖으며 대림절을 지내고 막상 성탄이 가까워 오면 나는 거의 겁을 먹은 상태로 stress를 받는다. 성탄절 바로 그날로 모든 것이 완전히 깜깜하게 꺼지는 듯한 이 세속적인, 상업적인 축제분위기와 문화들에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제일 무서운 것이 바로 12월 25일 저녁이면 ‘완전히’ 사라지는 성탄의 분위기.. 어떻게 세상이 그렇게 변했을까? 나는 완전히 100% 세속적인 성탄을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올해는 이것도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진정한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생각하며 ‘건강하게’ 준비를 한 기분이다. 우선 축제의 분위기를 진정한 의미의 종교적인 일정에 맞추려고 노력을 해서 나라니의 냉소를 참아가며 크리스마스 며칠 전에 tree를 장식하였고 carol같은 것도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즐기기 시작하였다.

더 큰 각오는.. 성탄절을 교회의 전례에 따라서 최소한 Epiphany까지.. 그러니까 12 days of Christmas를 따르기로 했고, 더 나아가서 진짜 가톨릭 관례대로 예수세례축일 전까지 지키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피상적’인 것들 모두 성공을 하였다. 나는 크리스마스 날 부터 모든 ‘성탄절’의 것들을 즐기기 ‘시작’한 것이다. Youtube에서 가정적인 영화들을 download해서 즐겼고 오늘까지도 즐기고 있다 너무나 너무나 생각할 것을 많이 주는 영화들..

그러니까 이것이다.. 성탄이란 ‘사랑’인 것이다. 의미는 100%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었다. 65 평생에 처음으로 이것을 가슴속으로 느끼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대림절과 성탄절이 아닐까? 이제.. 이제.. 내년부터는 자신이 있다 절대로 holiday stress에 시달리지 않으리라!

Guest Blog: 김인호의 조갑제 컬럼 3

제2차 경제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2014.01.10

우리나라를 먹여 살릴 첨단과학기술교육기관이 되라고 국민세금으로 지원해 주고 있는 KAIST 금융전문대학원에서조차도 그 머리 좋은 잠재인재들을 모아다가 이 파생금융상품을 전공하는데 대부분 매달리게 하는 꼴을 보면 참으로 기가 차고 아연실색해지기도 한다.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긴급경보: 2차 금융핵폭발(核爆發) 임박!

 필자는 2008년 이명박(MB)정부출범 바로 이틀 후인 2008년 2월 27일에 한국경제신문에 ‘파생상품에 대하여 주목하는 이유’라는 칼럼을 그리고 2013년 5월 14일 인터넷경제지 데일리안에 재차 ‘파생금융상품 망국론’이라는 칼럼을 통해 파생금융상품의 사기성을 지적하고 그 위험성을 경고한바 있다.

물론 2008년 필자의 경고성칼럼에 대해 관심을 두는 이는 별로 없었으나 경고 후 7개월 뒤 9월에 월가붕괴(Wall Street meltdown)라는 금융 핵폭탄(核爆彈)이 터졌고 그 낙진(落塵)피해는 5여 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서 여전히 심각할 정도이며 더 심각한 것은 2008년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초강력 파생금융시한폭탄이 찰각찰각 폭발을 향해 재빠르게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를 알리기 위해 2013년 5월 필자가 두 번째 경고성 칼럼을 썼던 것인데, 6개월쯤 지난 11월에 조선일보와 하나은행 사보에서 금융파생상품에 대한 특집을 통해 한국의 파생상품시장이 너무나 왜소하여 이대로 가다간 한국금융이 도태될 것이라는 우려와 경고에 가까운 입장을 피력하면서 이제부터라도 금융규제를 확 풀어서 파생금융시장을 키워야 한다는 기괴한 논리를 펴는 것이었다.

이는 아마도 금융파생상품을 염두에 둔 듯한 그간의 주장들, 특히 이제부터는 수출중심의 제조업대신에 규제를 확 풀어 관광, 교육, 의료, 소프트웨어와 금융을 함께 묶어서 내수중심의 서비스산업을 키워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 먹고 살자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이명박 정부의 출범 때와 마찬가지로 박근혜 정부 출범초반에 또다시 펴는구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박근혜 정부 출범초반에 맥킨지(McKinsey)는 성장공식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한국이 이제는 규제를 확 풀어서 금융선진화를 이루고, 금융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바 있는데 이제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조선일보와 하나은행에서 특집을 꾸민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불쑥 들었던 탓이다.

더욱이 2008 월가붕괴 직전에 한국산업은행으로 하여금 리번 브라더스를 인수케 하려는 획책을 꾀했던 세력이 있었던 사실이 떠오르며 결국 외국금융사와 컨설팅사들이 한국에서 파생상품시장을 키워 한탕 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는 게 필자의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추론은 맥킨지의 비(非)전문성을 제대로 간파 못하고 오랫동안 그들의 컨설팅을 받아 오다가 낭패를 맛본 LG가 ‘맥킨지,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린다.’는 자극적 반응에서도 확인될 수 있었다. 그런데 LG의 이런 반응은 우리나라로 봐서는 시기상 절묘하게도 다행한 일이라 여겨졌다. 왜냐하면 박근혜정부가 출범한 절묘한 시기에 맥킨지를 앞세운 경제정책결정 근처에 있는 관료와 언론인과 정치학자(polyfessor)들이 여기저기서 서비스산업을 키워서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밑도 끝도 논거도 빈약한 말을 입에 올리는 꼴이 눈에 뜨일 뿐만 아니라 서비스라는 말에 담긴 금융서비스에는 필히 파생상품이 숨겨있음이 보이기에 말이다.

필자는 이런 배경에서 파생상품기사를 다룬 조선일보 기자에게 연락을 했더니만 자본시장연구원의 모 박사가 쓴 것이라며 뺑뺑이 돌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 기사의 내용에 대해 일체의 정보를 제공했다는 그 모 박사에게 연락하여 미안하지만 금융파생상품에 대해서 뭘 좀 아느냐고 했더니만 자기네 연구원엔 파생상품전문가 여럿이 한 팀을 이루어 파생상품을 연구하고 있지만 솔직히 잘 모른다는 답변이었다. 필자는 이분들의 무지를 지적하고자 함이 아니지만 어떻게 모르면서 그런 기사를 다루는지에 대해 새삼 놀랐다.

허긴 우리나라를 먹여 살릴 첨단과학기술교육기관이 되라고 국민세금으로 지원해 주고 있는 KAIST 금융전문대학원에서조차도 그 머리 좋은 잠재인재들을 모아다가 이 파생금융상품을 전공하는데 대부분 매달리게 하는 꼴을 보면 참으로 기가 차고 아연실색해지기도 한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한마디로 금융전문가라는 분들조차도 금융파생상품에 대해 별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파생상품에 대해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냥 아는 척 하는 사이비가 되다 보니 미국 금융계에서 행해지고 있는 대로 우리도 따라가면 되는 줄로 알 수밖에.

주식투자나 채권투자는 기본적으로 실물(實物)에다 투자하는 것인데 반하여 파생금융상품은 미래가치나 약속이라는 허상(虛像)에 투자할 수 있게 1980년대 초반 레이건 정부에서 허용한 법적투기(legal bet)다. 이는 마치 어떤 이가 여행을 하면서 주말에 어느 축구팀이 승자가 될 것인가에 대해 투기하는 것이나 앞으로 이자율이 어떻게 변동할 것인가에 대해서 투기하는 것이나 이후 어느 금융기관이 채무불이행할 것인가에 투기하는 것이나 심지어는 앞으로 물가지수나 주가지수나 날씨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투기하는 것과 똑같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성격의 완벽한 투기다.

사이비 금융전문가 중엔 파생금융상품에도 순기능이 존재한다고도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무지에 기초한 억지다. 그들은 파생금융상품은 위험을 사고 팔 수 있게 해줌으로 경제에 유익을 주는 순기능(virtuous circle)도 있다고 주장하지만 최초(最初)의 선물(先物) 이후의 파생금융상품은 ‘나의 위험을 더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 더 큰 수익을 기대하는 상대방’에게 전가하는 투기도구로서 본질상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역기능의 투기수단일 뿐이다. 

 

(1) 파생금융상품은 본질적으로 제로섬의 비생산적 활동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그 유지비용만큼은 항상 국가경제에 부담을 주는 negative-sum의 비생산적 활동이다.

(2) 위험관리의 이론적 기초인 재무 포트폴리오 이론(portfolio theory)에 의하면 분산투자를 통해서 관리가 가능한 위험은 체계적 위험(systemic risk)과 비체계적 위험(un-systemic risk) 중에서 비체계적 위험뿐인데 파생금융상품의 경우 전 세계적으로 몇 개의 상위 글로벌 금융기관에 집중되어 있어 거기에서 오는 체계적 위험(systemic risk)은 이론적으로도 실무적으로도 도저히 관리할 방법이 전무(全無)한 금융상품에 불과하므로 위험을 헤지(hedge)해 주는 금융상품일 수가 없다.    

(3) 위험을 쪼개서 파는 파생상품의 특성상 팔고 사는 과정에 미결재 부채(outstanding debts)가 계속 연결되기 때문에 시장에서 약간 사기를 치거나 시장을 조작하거나 가격을 소폭 교란시킬 경우일지라도 연결고리를 타고 투자자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대량살상 재무무기(financial weapon of mass destruction)로 작용하여 엄청난 파국을 초래할 수 있는 투기상품이다.

(4) 돈이 일단 파생상품시장으로 흘러 들어가면 절대로 빠져 나오지 않는 불랙홀(black hole)로 작용하여 실물경제는 점점 줄어 들게 되고 그래서 결국은 경기침체나 공황을 초래할 수 있다.

 

파생금융상품은 한마디로 zero-sum인 도박이며 그 시장을 유지하는데 소요되는 비용만큼은 사회에 부담을 주는 negative-sum의 도박수단이라는 점과 도박은 도박인데 다른 도박들과는 달리 크게 문제될 수 있는 건 그 엄청난 파생상품시장규모와 파생상품거래의 불안정성이 엄청나다는 점이다. 파생금융상품은 1980년대부터 조금씩 선을 보이다가 1997년부터 급작스레 급증하면서 월가는 그간 누구든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면 그 어떤 것에든 투기하는 거대한 카지노(Casino)장으로 바뀌어 버렸고 그러다가 드디어 2008년 월가붕괴를 맞았던 것이다.

2008년 월가 붕괴 당시 미국의 GDP는 11조 억불임에 반하여 파생상품의 미결재 부채규모는 263조 억불로 GDP의 25배가 넘는 규모에서 2008 미국 발 월가붕괴가 터졌고  그 충격은 곧 지구촌 전역으로 그 폭발 피해를 증폭시켜갔던 것이다.

2008 월가붕괴 후 파생금융상품문제는 일단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하나의 희생양으로 외형적으로는 일단락된 듯 했지만 세계최대 보험회사인 AIG도 바로 이 금융파생상품투기에 걸려들어 파산지경과 다를 바 없는 상태가 되었고 MF Global 실패와 60억불을 날린 JPMorgan Chase의 경우도 다 파생상품으로 생긴 사건 사고였다. 최근 국내에서 터진 금융권 사고들, 예컨대 무슨, 무슨 저축은행, D그룹 H그룹의 금융파탄사건, 모 증권사의 파산, 유수그룹 회장단들의 비자금사고 등등은 모두가 파생상품과 직간접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아는 이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2014년 현재 초강력 시한폭탄으로서 파생금융상품의 본질적 문제는 2008년 이후에도 계속 지속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더 심각한 것은 2008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그 규모가 천문학적이라는 사실이다. 즉, 2013년 12월 현재 US의 GDP는 15조억불인데 파생상품시장규모는 660조 억불로서 GDP에 대한 배수가 44배로 2008년의 25배보다도 엄청 커졌다는 사실이다. 한편 전 세계적으로도 파생상품시장이 1,500조 억불로서 GDP 70조 억불의 20배가 넘다 보니 한번 삐끗하면 글로벌 전체를 날려버릴 핵폭탄임을 절감케 하며 그 폭발장소는 역시 미국이 될 것임을 쉽게 알게 해준다.

파생금융상품의 폭발가능성에 관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점은 바로 실물이 아닌 허상에 대한 엄청난 규모의 93%가 미국 상위 4개 금융기관에 의해 자행되고 있으며 미국산업의 81%가 파생금융상품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잠시 미국 상위 4개 은행의 실상을 들여다보자.

이 들은 아마도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를 신봉하며 무모한 투기를 계속 가속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법이 만들어져 규제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들은 미국경제 전체는 물론 글로벌 경제전체를 집어 삼킬 정도로 무모한 투기를 아무 제약 없이 지속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으며 2008년의 경우보다 훨씬 더 악화 일로에 있어 이제는 마치 암이 몸 전신에 퍼져 암을 죽이려면 몸 전체를 죽여야 하는 수준에까지 다다른 양상이 되었다. 

The Comptroller of the Currency에 의하면

  1. JPMorgan Chase는 1.8조 억불 자산에 파생상품 69조 억불로 허상인 빈 껍데기가 자산의 38배이며
  2. Citibank는 1.3조 억불 자산에 파생상품 52조 억불로 자산의 40배이고
  3. Bank Of America는 1.4조 억불 자산에 파생상품 44조 억불로 자산의 31배이며
  4. Goldman Sachs는 0.11조 억불 자산에 파생상품 41조 억불로서 자산의 372배다.

이들 숫자를 보면 직감적으로 턱이 빠질 지경의 한계에 가까워졌다고 느껴진다. 특히 골드만색스는 밑이 까마득하게 보이는 고공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형상인데 머지않아 곧 일을 낼 것 같은 직감이 든다.

결국 파생금융상품이 일을 낼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다만 그 시기가 얼마나 빠를 것이냐에 대한 논란만이 있을 수 있을 뿐 글로벌 패닉을 초래할 초강력 금융핵폭탄임에는 틀림없고 머지않아 폭발이 임박했음도 부정할 길이 없다.

필자는 국부(國富)창출과 이익(利益)추구와 관련하여 다이나믹 매니지먼트(Dynamic Management)라는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을 주창해 오면서 어떤 경우든 혁신의 효과를 추구하지 않고 돈을 번다는 것은 결코 오래 갈 수가 없으며 혁신은 실물경제 특히 제조업(조립산업, 부품산업, 소재산업)과 건설업 중심의 산업구조 위에서 서비스산업이 고부가치화 될 때 일국의 경제체질이 강화된다는 점을 강조하여 왔다.

같은 맥락에서 혁신의 효과가 없는 금융서비스는 실물경제를 지원해주는 바탕 위에서만 금융업 본연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부여 받는다는 사실과 실물경제와 맞물려 돌아가는 금융경제가 아닌 금융활동은 결국은 거품만 키운다는 점을 강조하여 왔다.

그리고 더 나아가 경제운용과 관련하여 시장과 정부의 관계에서도 정부관여가 불가피하다는 케인즈(Keynes)의 주장과 시장에 전적으로 일임해야 한다는 하이에크(Hayek)의 주장은 보편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혁신효과의 유무와 그 강약의 견지에서 혁신효과가 큰 경우엔 시장에 맡기고 혁신의 효과가 미미한 경우엔 정부가 규제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보강되어야 한다는 점을 또한 강조하여 왔다. 

이런 정책판단기준을 따른다면 외국 특히 미국에서 어떻게 하든 우리는 실물경제에서 니즈맞춤혁신(needs-focused innovation)으로 창조경제를 실현시키는데 전력해야 하며 금융선진화 금융전략산업화 금융허브육성이라든가 하는 실체가 없는 데에 힘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negative-sum인 파생금융거래는 즉시 전면 금지시키며 금융기관들을 엄격히 규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단 미국 발 2차 금융핵폭발이 터지면 아무도 그 엄청난 피해를 아예 피해 갈 길은 없겠지만 얼마나 핵폭발 반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느냐에 따라서 그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피해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가 준거해야 할 중력법칙(gravity law)의 자연 질서로서 혜안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미리 예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따 라서 이제부터 국내금융기관들의 경영 제1목표는 이익확대가 아니라 생존을 도모하는 일이며 생존을 추구하는 바탕 위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경영지표가 추구되어야 한다. 적어도 머지않아 터질 파생금융상품의 폭발과 그 패닉이 지나갈 때까지는.

이것이 지혜로운 금융기관의 경영방식임을 금융인들은 미리 깨달아야 한다. 특히 주인이 없는 대형금융기관일수록 더 더욱 그러해야 한다. 지금은 글로벌 금융핵폭발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긴급경보가 발해진 상태와 전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미물인 개미도 태풍이 오면 미리 알고는 부랴부랴 대비하는 지혜를 발휘하거늘, 하물며 우리 인간들이 금융핵폭발을 미리 대비하거나 덜 피해 입는 지혜를 왜 발휘할 수 없겠는가? 우리 모두 선견력(先見力)이 요구되는 이 시대의 주역임을 잊지 말자!

메주고리예, Medjugorje 2014

메주고리예.. 비공식 성모님 발현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계속, 아직도 정기적으로 발현이 되는 곳이다. 1981년 6월 26일 첫 발현 후 현재까지 계속 이곳에 성모님이 발현을 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믿기 힘들 정도며 놀랍기만 하다.

내가 처음으로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을 안 것은 1989년 6월 인디애나 주 노틀담 대학(Notre Dame University, South bend, Indiana) 에서 열린 성령대회에 가족이 참가했을 당시 그곳 전시장에서 정말 우연히 보고, 구입하게 된 책, 메주고리예 발현 화보였다.

 

메주고리예 발현 화보, 1989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천주교 영세를 받은 지 7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모르는 것 투성이였던 시절.. 하지만 자세히 생각을 하니 1981년 경 뉴스를 통해서 들은 기억은 정말 희미하게 나는 듯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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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발현 당시 6 visionaries 들 모습

메주고리예의 위치가 공산권이었던 유고슬라비아 였기에 소련 연방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그곳의 소식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련이 무너지면서 순례자들이 그곳을 방문하면서 점점 자세한 소식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나는 사실 그런 놀라운 발현 소식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성모발현’이란 것을 심각하게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3~4년 전부터 나의 신심적 르네상스를 거치며 비로소 나는 이 ‘믿기 힘든’ 성모발현을 믿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 과정은 조금 복잡했지만 간단히 말해서 지금은 이 성모님 발현이 나의 신심을 굳건히 지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나에게 사도 토마 같은 ‘의심’이 조금이라도 들면 나는 메주고리예 성모님을 생각하며 나를 달래곤 한다.

역사상 성모님 발현은 ‘수 없이’ 많지만 ‘공식화’ 된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과달루페, 루르드, 파티마 같은 classic한 것은 교회에서 정식으로 인정된 곳이지만 그 외에도 ‘수 없이’ 많이 있고, 대부분 신빙성이 아주 높은 case들이다. University of Dayton에서 설치된 세계 마리아 학회의 website (Mary Page)를 보면 아주 매일 일기예보를 하듯이 전세계에서 보고되는 발현 소식을 ‘모조리’ 기록해 두고 있다.

medju-3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은 한마디로 놀랍기만 하다. 1981년부터 현재 까지 33년 동안 ‘계속’ 발현을 하기 때문이다. 성모님이 전하는 얘기는 한결같이 간단하고 성서적이다. 발현 목격자 중에 Mirjana 에게는 한번도 빠지지 않고 매달 2일에 발현을 하는데 이 발현은 비록 사적인 것이지만 미리 예고가 되었기에 많은 순례자들이 성모님을 못 보지만 같이 참석하고 있다. 이런 광경이 이제는 인터넷의 힘으로 편안히 집에서 같이 볼 수가 있지만.. 과연 어떨까.. 믿고 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일 것이다.

천주교 교리에 의하면 성모님은 비록 인간이지만 인간 중에서 아주 독특한 위치와 지위를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하면 성인 중에서 으뜸가는 성인이라고 할까.. 성모님의 그런 위치는 ‘전구자(우리의 기도를 예수님께 전하는)’의 역할을 하는데, 왜 그렇게 33년 동안 특별한 목격자들에게 계속 나타나는 것일까? 정식으로 인정이 보류된 상태에서 교회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사실 그 이유(발현하는)를 나는 조금씩 깨닫게 되어가고 있다. 근래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그것이 아주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에 보이는 비디오는 2014년, 주로  Mirjana에게 발현하는 성모님에 관한 것이다. 이런 비디오는 대부분 메주고리예와 가까운 이태리 순례자들이 주관해서 만드는 듯하고 여기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태리에서 온 듯하다. 발현이 끝나면 곧 이어서 성모님의 message를 각국어로 번역을 해서 발표를 하곤 한다.

 


2014년 12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2014년 10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Dear children, with motherly love I implore you, love one another. May there be in your hearts, as my Son desired from the very beginning, love for the Heavenly Father and for your neighbour in the first place — above everything of this world. My dear children, do you not recognise the signs of the times? Do you not recognise that all of this that is around you, all that is happening, is because there is no love? Comprehend that salvation is in true values. Accept the might of the Heavenly Father, love him and honour him. Walk in the footsteps of my Son. You, my children, my dear apostles, you are always gathering around me anew, because you are thirsty. You thirst for peace, love and happiness. Drink out of my hands. My hands are offering to you my Son who is the spring of clear water. He will bring your faith back to life and purify your hearts, because my Son loves pure hearts and pure hearts love my Son. Only pure hearts are humble and have firm faith. I ask for such hearts of you, my children. My Son told me that I am the mother of the entire world. I ask of those of you who accept me as such to help me, with your life, prayer and sacrifice, for all of my children to accept me as a mother—so that I may lead them to the spring of the clear water. Thank you. My dear children, as your shepherds offer you the Body of my Son with their blessed hands, always in your hearts give thanks to my Son for the Sacrifice and for the shepherds that he always gives you anew. ”

 

2014년 9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2014년 8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2014년 7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2014년 6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message

 

2014년 5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2014년 4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2014년 3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2014년 2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근래에 보기 드물게 ‘실내’에서 발현 하신 것이 특이하다

 

 

2014년 1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