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斷想, Roswell Nursing..

 

Roswell Nursing Center, 비록 review는 별로지만 나름대로,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의 service를 주는 곳

 

Roswell Nursing (& Rehabilitation Center), 우리는 줄여서 Roswell nursing home, 아니면 그저 Roswell 양로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제 레지오 주회합 후,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곳에 들렸다. 이것은 이번 주에 우리 ‘조’ 에게 배당된 최소한 2 시간의 레지오 활동이기도 했다. 몇 년째 되는 이곳에서의  우리의 레지오 ‘봉사’ 활동은, 보통 몇 분의 ‘장기 체류, 중증 치매 환자’인  형제 자매님들을 뵙고, 의사 소통이 가능한 분과는 얘기를 나누고, 그렇지 않은 분들과는 그저 무언의 대화를 하다가 돌아오는 정도다.

처음 이곳을 방문하기 시작했을 때 ‘아래층’ 에 있는 ‘치매환자 병동’을 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느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적은 숫자의 치매증 환자를 이제까지 못 본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많은 환자들을 한꺼번에 목격한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환경적으로 이곳은 큰 병원 같은 ‘시설’의 느낌으로 긴 복도에 무질서하게 방황하거나 심지어 엎드려서 기어 다니는 광경은 비록 ‘봉사’하는 마음을 갖고 갔지만 충격적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들의 비교적 어두운 ‘아래 층, 거의 지하’에 집단적으로 모여있는 것은 분명히 ‘안전’을 위한 것이지만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방문회수가 늘어나면서 물론 이런 광경들은 차츰 익숙해지긴 했고, 어떤 때의 광경은 비교적 안정되고 깨끗하게 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을 떠나서 일단 치매환자들을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면 각종 혼란한 생각이 나의 머리를 스친다. 가벼운 망각증부터 심한 중증 치매환자들, 그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어떤  ‘봉사’한단 말인가?

 

 

완전히 자기를 잊고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내가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 보아도 ‘실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것들을 보고,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인가? 조금이라도 실감이 되면 무슨 가능한 시늉과 통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치매의 ‘진행 정도’에 따라서 어떤 분은 우선 대화가 가능하고, 심한 분들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

내가 이런 분들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면 어떤 것들이 보일까, 각종 추측을 해 보지만 사실 아무도 모른다. 오직 그 고통중의 환자만 아는 것이다. 가족들도 전혀 모른다고 하니 그 가족들의 심정은 어떨까?  가끔 가족들이 온다고 하지만 그들도 우리와 별 차이 없을 것 같다. 저 분들이 나의 어머니, 삼촌 같은 분들이었다면… 솔직히 이런 ‘시설’에 놓아두고 싶지 않을 것 같은 ‘사치스런’ 생각까지 든다. 그들도 오죽하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런 곳에 맡기셨을까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이런 치매 환자들과 다른 분들 즉, 거동이 불편한 분들은 그래도 대화가 되기에 좀 낫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거동의 불편함도 정도가 있어서 ‘말기성 치료 terminal care’ 환자처럼,  나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분들은 정말 이곳이 지옥같이 느껴질 듯하다.  정신은 말짱한데  불편한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거나, 다시 퇴원할 가능성이 없음을 알고 이곳에 머무는 것, 그것은 다른 종류의 고통이요 형벌이 아닌가? 게다가 말도 거의 통하지 않는 환경에서 어떻게 오랜 세월을 보낼 수 있을까? 가족들도 그런 사정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방문하는 한 ‘개신교 자매님’도 그런 분이다. 처음 이곳에서 알게 된지 1년도 훨씬 넘는 이 자매님, Parkinson’s 병 환자라 거동이 아주 불편하다. 문제는 이 병이 ‘퇴행성 degenerative’이라 점점 나빠지는 것이고 치료방법이 현재로는 없다고 한다. 그 동안은 그런대로 움직이며 단체활동 (bingo나 auction game같은) 도 언어소통에 상관없이 열심히 하셨는데 이날 보니 아주 상태가 좋지 않았다. 병세 (근육마비)가 점점 중요 장기들에 영향을 미치는 듯 싶었다.  불길한 느낌에 오래 가실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시설을 나왔다.

이곳에 왔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는 반드시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가 더 나이가 들거나 건강이 나빠지면 어떤 모습으로 살 것인가.. 하는 ‘당연하지만 방정맞은’ 그런 생각, 안 할 수가 없다. 우리의 나이를 의식하고, 세월의 빠름을 감안하면 거의 실감이 안 날 수가 없다. 하지만, 재빨리 ‘내일 일은 내일이 알아서 한다’라는 말씀을 상기하며 부지런히 차를 Roswell 에서 Marietta쪽으로, 집으로 집으로..

가는 2월, 오는 3월은…

¶  물 건너 간 것, ‘첫눈’: 2019년 2월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28일 밖에 되지 않아서 더 빨리 지나가는 듯 하다. 목을 빼고 애처럼 기다리던 올 겨울  ‘첫, 하얀 시루떡, 눈 雪’,  은 결국 물 건너가는 듯 느껴진다.  왜 올해 내가 그렇게 ‘첫 눈’을 기다렸는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른다. 지나간 몇 년간 매년 보고 즐기기도 했던 것이라 습관이 되었는가, 아니면 그저 나이답지 않게 ‘감상적 感傷的’ 인 기분에 빠졌는가.  비록 눈 구경은 못 했지만 대신 비 구경은 실컷 즐기며 살았던 주일을 보냈으니 그렇게까지 실망할 것은 아니다. 대신 YouTube의 video를 통해서 눈보라 치는 모습과 곁들인 멋진 영상음악은 Google ChromeCast의 도움으로 big screen TV를 통해서 실컷 보고 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역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뒤뜰로 흩날리는 몇 송이의 눈발과 어떻게 비교를 할 수가 있겠는가?

 

¶  규칙적인 대장 운동:  지난 주에는 뜻하지 않게 regularity 문제로 며칠간 고생을 했다.  평소에 큰 신경을 안 쓰고 살았는데 가끔은 이것이 찾아온다. ‘변비, constipation’이라고 하면 당장 ‘냄새’가 나는 듯해서 조금 부드러운 표현이 ‘규칙적인 대장 大腸 운동, regularity’ 지만 이것 역시 기분은 마찬가지다.  왜 이런 ‘불규칙 증상’이 찾아왔나 생각해 보니 주범은 역시 ‘달콤하고 편리한 stick instant coffee 중독’인 듯하다. 그것 말고는 혐의를 둘 것이 별로 없으니 말이다.  예방은 물론 이런 ‘편리,달콤함’에서 벗어나면 되는데 ‘처방, 치료’가 문제다.

Toilet에 오래 앉아 있어야 하는 불편함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모를 것이다. 나도 잘 몰랐으니까..  이 regularity문제 자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로 인해서 ‘Prep-H, hemorrhoid’ moment 까지 나가면 정말 골치를 썩게 된다.  나도 경미하게 Prep-H 증상을 몇 번 겪었지만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것만은 피하고 싶지만 항상 운이 좋은 것은 아니다.

이번에도 이틀 정도 이것으로 고생을 했지만, 증상자체도 신경을 심하게 건들이지만 그것보다 이것으로 기분이 축 쳐지고 우울감까지 느끼게 되는 것도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이런 며칠 간 고생의 경험으로 이제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들’을 조심하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Kroger drug counter에서 찾은 ‘stool softener’ 란 pill을 정기적으로 복용하기 시작했고, 최악의 경우에도 대비를 하기로 했다. 이것도 ‘앞서가는 나이’와 상관이 있는 불편함인가…

 

¶  2월 마지막 주일:  거의 매일 비가 온 듯한 느낌을 주는 2월, 마지막 주일 미사는 도라빌 순교자 성당으로 가게 되었다. ‘절대적인 이유’가 아니면 앞으로 주일미사는 동네 미국본당으로 가기로 달 전에 결심을 했지만 예외는 항상 예상 해야 한다.  이날이 바로 그런 날이 되었다. 이유는 도라빌 성당 60~70대 친교모임인 등대회 회식 때문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찬란하게 떠오른 태양으로,  미사 시작을 ‘쨍~하고 해 뜰 날’ 이란 말로 시작한 주임신부님도 주일에 보게 된 것도 반가웠고, 한달 만에 다시 만난 등대회원들도 새롭고 즐겁게 느껴진 것을 느끼고, 이곳도 조금은 정이 들었나..하는 포근함까지 느끼는 등, 이날, ‘주일’은 그야말로 ‘주님이 주신 안식일’이 되었다.

오늘 ‘레지오 화요일’,  오늘도 우리 집 뒤뜰에서 계속 초봄의 소식을 전해주는 수선화를 꺾어가지고 가서 레지오 성모상 옆에 꽂았다.  성모님 (상)을 보면서, 현재 조금씩 안정되어가고 있는 우리의 ‘자비의 모후’를 쉽게 포기하지 않으시는 듯한 모습을 그린다. 몇 주 전부터 ‘방문자’로 참관을 하는 ‘예비신자’ 자매를 보며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어쩌면 이 자매도 ‘성모님 job’이었나 할 정도다. 또한 얼마 전 퇴단한 실망스런 자매들과 이 예비신자 자매와 비교를 하며, 어떻게 세상에 이렇게 사람들이 다를 수가 있는가..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대체적으로 올해 2월은 우리로 하여금 지나간 6개월 여 ‘구역모임’으로 인한 ‘고통의 기억’들로부터 더욱 멀게 해 주는 그런 시기가 되었다. 이제는 우리는 다시 제 정신을 차린 듯한 산뜻한 기분을 느끼며 ‘우리들의 3.1절’을 기다리게 되었다.  ‘우리들의 3.1절’, 1919년의 기미년이 아니고, 우리 둘에게 3월 1일을 즈음해서 일어났던 각종 ‘좋은 추억’들, 예를 들면: ‘1992년 현재의 집으로 이사 왔던 날’, 부터 시작해서 2012년의 ‘매일 미사’ 전통의 시작까지 3.1절은 우리에게 소중한 날이 되었고 올해도 예외 없이 이날이 되면 추억과 더불어 ‘때려 먹는’ 즐거움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예수회, 이냐시오의 고민

예수회 창시자 성 이냐시오

예수회, S.J.  성 로욜라의 이냐시오,  S.J…. Society of Jesus. 우리에게 비교적 친근한 느낌을 주는 이 ‘가톨릭’ 단체는 과연 무엇을 지향하는가? 이것이야 말로 우문현답 愚問賢答 을 연상하게 하는 질문이지만 실제로 어떤 때는 나도 확실하지 않다. ‘예수회’니까 물론 절대적, 궁극적인 목표는 ‘역사적, 현존’ 예수님일 것이지만 과연 그것을 지향하는 신학적인 철학, 방법은 무엇인가? Wikipedia같은 곳을 보면 ‘공식적인 사실’들이 수 없이 많이 열거되어 있고, 모두 사실적, 객관적, 역사적인 것들이라 왈가왈부를 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내가, 우리가’ 머리로, 가슴으로, 피부로’ 받는 그 느낌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내가 직접 가까이에서 보고 듣는 ‘객체’들에 의해서 좌우 될 것이다. 그 객체는 어떤 것이며 누구인가? 가장 확실한 것은 바로 ‘예수회 사제, 신부, 수도자, 학교’ 같은 것이 아닌가?  내가 학교 같은 단체는 접할 기회는 없지만 사제들은 바로 앞에서 경험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나에게는 예수회의 전부인 것이다.

나의 두 본당 중 영어권 본당의 사제는 오래 전에 결혼을 한 ‘동방교회’ 출신으로 로마교회로 온 신부로 그야말로 ‘교구신부’다. 예수회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하지만 모국어 ‘도라빌’ 본당의 사제는 언제부터인가 교구사제에서 예수회 사제로 바뀌어서 이제는 예수회란 말이 빠지는 것이 이상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정말 가까운 곳에서 ‘예수회’를 느끼며 사는 것이다.

우리들, 평신도들에게 이런 것이 무슨 큰 차이가 있을까?  멀리서 보면 큰 차이는 없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분명히 차이를 느낀다. 예수회 사제, 특히 본당신부는 전통적으로 ‘교구 사목’이 그들의 특기는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큰 차이가 없이 느껴지니까 별 문제는 없다. 오히려 영성적인 측면으로 보면 더 이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이냐시오의 영성을 사목에 주안점으로 삼으면 평신도들은 독특한 혜택을 받지 않을까.  그래서 교구 사목상에도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문제가 있다면 다른 곳에 있는 듯하다. 나는 절대적으로 신학전문가가 아니기에 섣불리 단언은 못하지만 내가 접하는 ‘미디어’ (fake가 아닌 전통적 미디어)를 통한 예수회, 그것도 특히 미국(북미주) 예수회는 더욱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야당과 여당’을 이루는 정치구도와 흡사한가. 한마디로 예수회는 미국의 liberal, democratic, progressive한 것이라면 거의 틀림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것은 미국만의 현상은 아닐 듯하다. 모국도 아마 마찬가지가 아닐까?

미국의 가톨릭 매체들을 살펴보면 이 ‘양극화’가 뚜렷하다. 특히 ‘또라이’ 트럼프가 들어오며 이 현상은 숨길 수가 없는 듯하다.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예수회 프란치스코교황’의 ‘자비’ 선포로 인한 ‘전통 교리의 후퇴’를 우려하는 ‘극단적인 비난’인데, 양쪽의 주장을 들어보면 모두가 일리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아무리 교리, 교의 해도 세상과 세속의 ‘진화’는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 아마도 예수회의 주장일 듯하다.

쉽게 말해서 ‘자비와 정의, 원칙’의 대결인 셈인데, 이들 신앙인들에게는 ‘중도’라는 ‘타협’은 없는 것인가?  제일 심각한 것이 Homosexual 들을 ‘자비’로 받아들이자는 문제다.  또한 Abortion(낙태)에 대한 자세도 그 중에 하나다. 이것도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인가?

그 중에서도 가장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다름이 아닌 대한민국만이 가질 수 있는 ‘사상논쟁’을 빼놓을 수 없다. 예수회 신부들은 여론적으로 보아도 ‘진보적’임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빨갱이’라는 평을 쉽게 받는다. ‘정구사’라는 독특한 약어의 느낌도 다를 것 없이 ‘빨갱이’라고 매도된다. 이것도 타협점이 없는 것일까? 한마디로 주위를 살펴보면 ‘또라이 트럼프’처럼 서로 잇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리기만 했지 절대로 대화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나의 생각은 어떤가? 아무래도 나이 탓, 나의 가족적 역사로 보아서 예수회 같이 무조건 자비는 말하고 싶지 않다. 이유 있고, 정의가 밑받침이 되는 자비와 사랑.. 물론 이것은 쉽지 않은 것이지만 이것 말고는 방법은 없는 것 아닐까?

Daffodils come forever

올들어 처음 피어나는 수선화 꽃망울

 

¶  돌아온 수선화여, 주일 전부터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모습, 올해 처음으로 피기 시작한 수선화,  일주일 동안 거의 매일 아침미사 15분 drive하는 동안 우리는 오늘은 어떤 모습의 봄 소식을 찾을 수 있나 차창밖에 온통 신경을 쓴다. 이것은 우리 같은 ‘젊은 노인’ 부부에게는 논쟁의 여지를 줄 수 없는 거의 완벽한 대화 소재가 아닌가 생각한다.

꽃 망울이 겨우 눈을 뜨기 시작한 수선화가 작년에 하늘로 간 Tobey1의 무덤 주위에서 그 녀석의 영혼을 감싸듯이 정렬을 하고 있음을 매일 본다.  추위를 견디는 수선화의 안쓰러운 모습과 나의 손에 머리를 안겨 마지막 숨을 쉬던 그 녀석의 얼굴이 겹치며 나를 순간적으로 우울하게 한다. 역시 봄과는 거리가 있는 싸늘함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올해의 겨울과 봄의 사이는 유난스럽게 이상한 것이, 겨울이 정말 춥지를 않았다. 영하로 내려갔던 날이 며칠이나 될까? 덕분에 에너지는 많이 절약했겠지만 이런 상태로는 올 겨울 ‘눈 구경’은 물 건너 가고 있다.  대신 장마철을 연상하게 하는 ‘싸늘한 비’의 연속을 겪고 있다. 아마도 봄을 준비하는 초목들은 땅 속에서 잔치를 벌리고 있을 듯 하다.

 

기다리던 눈 대신 싸늘하게 내리는 줄기찬 비

 

거의 ‘악몽’ 처럼 느껴졌던 작년 후반기 6개월의, ‘구역’에 대한 기억, 이제는 그런 것들을 뒤로하고  2019년의 봄은 우리에게 조금 더 다른 의미를 주는 기회를 주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 청순한 수선화여, 피어있는 동안 우리에게 모든 괴로웠던 기억들을 말끔히 씻어 가게 해주길..

 

¶  수선화의 성모님:  모처럼, 나와 우리의 ‘등대’, ‘자비의 모후’  주회합 성모님 제대의 주위가 ‘꽉 찬듯한 느낌’을 주었다. 지난 몇 개월간 생존의 위기를 거듭했던 ‘자비의 모후’,  몇 주 전에는 결국  ‘파산선고’ 까지 우려했지만 역시 성모님의 도움이신가.. 최소한의 간부구성이 갑자기 이루어졌다.

 

수선화의 성모님, ‘자비의 모후’를 도와주소서,,

 

게다가 신단원 모집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비신자 자매님이 부활 세례직후에 입단이 거의 확실하게 되는 듯하니, 어찌 수선화의 축복을 받는 성모님이 더욱 더 아름답게 보이지 않겠는가? 지나치게 큰 기대는 안 하지만, ‘독물 毒物 이 전부 빠져나간 듯한 ‘ 우리 ‘자비의 모후’가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새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것, 올 봄에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1. 작년 6월에 14살 천수를 다하고 떠난 나의 ‘영혼의 벗’ 개 Dachshund 의 이름

종로구 계동 1번지

2년 전 아래층으로 ‘이사’를 내려온 나의 office에 있는 bookshelf 에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책들을 섞는 중에 눈에 띈 책이 있었다. 오래 전에 읽다 말다 하다가 놓은 책, 동아일보사 간행, <인촌 김성수’> 란 책이었다.  김성수, 동아일보사 모두 나와는 자연스레 친근한 이름들이다.

1960년대 나의 모교였던 서울 중앙학교(중-고등)를 ‘인수, 경영’했던 ‘만석군 부호의 아들’이었던 인촌 김성수, 귀공자 답지 않게  Bill Gates같이 ‘돈을 현명하게 쓸 줄’  알았고, 당시로서는 선지자적인 삶을 살았다. 특히 말년에 정치계에서는 ‘이승만의 독재’를 정말 싫어했고, 아마도 그로 인해 화병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읽은 부분에서 희미한 기억을 되살리는 것, 계동 1번지에 중앙학교가 위치한 사연을 읽게 되었다.  1960년 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코흘리개 우리들에게 학교는 ‘민족학교의 역사’를 정식으로 가르쳤었다. 무언가 민족적 사립학교의 전통을 남기려는 것을 우리들도 숙연하게 받아들였던 기억이 남는다.

 

 

책,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중에서

 

중앙학교 교장 재직 당시의 인촌 김성수

 

새 요람, 계동 1번지 중앙학교

 

 

조선의 새 인맥(人脈)

새로운 교사가 들어설 땅을 백방으로 물색하던 인촌 仁村 은 1917년 6월, 계동 1번지인 지금의 중앙중고등학교 자리를 터로 정하고 4천 3백 평을 사들였다. 당시 이곳은 북악산 줄기를 뒤로 한 계곡으로 울창한 송림만 들어찬 산골짜기였다.  민가도 없었고, 다만 학교 터 뒤편 숲 속에 당시 육군연성학교(陸軍硏成學校; 훈련소) 교장이었던 노백린(盧伯麟; 후에 上海 臨政 軍務總長 역임)  참령(參領)의 집이 있을 뿐이었다. 인촌이 이 땅을 사들이려 하자  고하 古下 (송진우) 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숯막 짓고 참숯 구워 팔려나? 이런 깊은 산골짜기에 학교를 지어 어떡하겠다는 거여?”

“어째 그렇게 자넨 발등만 보고 사는가?. 자, 보라고! 앞으로는 서울 장안이 한 눈에 굽어 보이고 뒤에는 북악의 줄기가 아닌가! 그 정기를 받아 청년의 이상을 꽃피우기 위한 배움의 터로서는 이만한 명당이 없네. 얼마나 시원한가, 젊은이들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울 만 허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먼? 이 보게, 큰 길에서 너무나 들어온 골짜기야, 학생들 통학도 생각해야지?”

“지금은 좀 불편하겠지만 앞으로 십 년만 지나보게. 서울은 지금 새 시대를 맞이하여 커지고 있어. 모르기는 해도 십 년 뒤면 학교 주변이 주택들로 차게 될걸?”

멀리 앞을 내다보는 인촌의 안목은 정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과연 십 년이 채 안되어 개발이 되고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훗날 고하는 인촌의 선견지명에 혀를 찼다고 한다. 땅을 사들이자 즉시 새 교사를 짓기 위해 터를 닦기 시작했다. 인촌은 공사장에 나가 감독 뿐만 아니라 일꾼들과 함께 흙을 고르며 땀을 흘렸다. 교장이 솔선수범하니 고하를 비롯한 교사들까지 수업이 끝나면 함께 땀을 흘렸다. 스승들이 일을 하자 학생들도 부지런히 삽질을 하고 돌을 나르며 일을 도왔다.

그 보람이 있어 나무만 울창하던 산골짜기에 건평 2백여 평의 붉은 2층 건물이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서울 장안(長安)의 이목이 쏠리고 김성수라는 이름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붉은 벽돌 2층의 이런 신식 건물은 그때까지만 해도 장안에서는 볼 수 없는 멋진 신식 교사인 데다가 그것을 짓고 있는 인물이 같은 동포인 김성수라는데 화제가 됐던 것이다.

뒷날 동아일보 사옥을 신축할 때나 보성전문 교사를 신축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인촌은 틈만 나면 공사장에 나가 일꾼과 함께 살았다. 자재에서부터 설계, 혹은 대목(大木) 등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게 없었다.   건축을 공부해서가 아니고 공사장에 가서 몇 번만 보면 다 터득하여 현장 감리(監理)들이나 목수들의 탄복했다고 한다.

어쨌든 장안의 화제였던 계동의 중앙학교 신교사는 5개월만에 그 웅자를 드러내게 되었다. 그 해 11월에 준공을 끝내고 12월 1일에  화동(花洞) 구교사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계동 1번지에 세워진 중앙학교 새 교사 낙성식, 1917년

 

폐교 직전의 중앙학교를 인촌이 인수하자 비상한 관심을 가진 것은 당시의 조선인 사회 뿐이 아니었다. 총독부 관리들이 주시하고 있었다. 돈 있으면 금광이나 하라며 백산학교(白山學校) 설립계획을 까뭉개고 돌려보낸 학무국장 <세끼야> (關屋)는 조선인의 실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던 터라 무명청년 김성수가 말썽 많고 경영난으로 쓰러져 가던 중앙학교를 인수했지만 결과는 뻔한 것으로 추측했다.  시골 부자 아들이라니 돈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지만 깨진 독에 물 붓기로 얼마 안 가서 재산 다 날리고 주저 앉으리라고 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전연 예상 밖이었다. 붉은 2층 벽돌의 신식 교사가 모습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80여명 정도였던 학생이 이제는 3백여 명으로 불어나고 교사들 역시 대학을 나온 조선인들이 거의 전부 일 만큼 탄탄하게 성장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11월 하순, 어느 날 <세끼야>는 비서가 전해준 초청장을 받아 들고 얼굴이 이지러졌다.

“뭐라구? 중앙학교 신교사 낙성식? 그 낙성식에 오라구? 으음”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게 무시했던 무명청년은 새 교사를 당당하게 지어 놓고 그 잔치마당에 자신을 초청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인촌을 김군(金君)이라고 불렀고, 심지어 학교설립을 신청했을 때는 부모의 승낙을 얻었느냐며 어린애 취급을 하고 얕보던 <세끼야>도 낙성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원파공과 지산공을 상석에 모시고 낙성식은 성대하게 열렸다. 조선인의 힘으로 만들어진 학교였기 때문에 장안의 시민들도 구름처럼 모였다. 학무국장 <세끼야>는 금줄이 번쩍이는 제복에 긴 칼을 늘어뜨리고 식장에 나타나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꿔 <긴센세이> (김선생)라 존대하며 몇 번이나 장한 일을 했다고 치켜 세우고, 조선인의 힘으로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게 된 것은 일시동인(一視同仁)하시는 천황폐하의 홍은(鴻恩) 때문이라며 판에 박은 공치사를 하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총독부 관리들이 인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조선의 젊은 민족지도자로 지목하고 경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촌은 어진 성품과 큰 도량을 지녔기 때문이었는지 젊어서부터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인재들이 모여 떠날 줄을 몰랐다.

인덕(인덕)을 타고남도 하늘의 도움이다. 인촌은 늘 인덕이 있었다. 당시 그의 주위에도 제제다사(濟濟多士), 많은 인재들이 그를 돕고 있었다.  중앙학교와 인연이 깊었던 최규동, 이중화, 이광종, 이규영, 권덕규 등 대가 이외에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송진우, 최두선, 현상윤, 이강현 등과 국내에서 명성이 높던 변영태, 유경상, 유태노, 조철호, 고희동, 나원정, 박해돈 등 신진기예들이 차례로 교편을 잡게 된 것이다. 총독부로 볼 때 인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학교의 인맥과 존재는 조선 사회에서 무시 못할 민족 지도자 그룹으로 비치게 되었다.

 

 

무명 교복과 교지(敎旨)

‘웅원(雄遠), 용견(勇堅), 성신(誠信)’ 의 3대 교훈은 인촌 스스로 정한 것이며 인촌 스스로 정성스럽게 써서 남긴 진적(眞迹)이다.

 

아직도 기억하는 세 가지 중앙의 정신: 웅원, 용견, 성신

 

이 중앙학교의 교지는 인촌의 교육이념을 집약하는 동시에 그의 가치관을 나타낸 것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70여 년 동안 1자의 수정도 없이 지켜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인촌의 교육관은 백년대계의 큰 안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앙학교를 인수한 후 인촌은 특히 학생들의 옷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 하찮은 걸 뭘 그렇게 골똘하게 생각하시오? 다른 학교와 학숙의 학생들처럼 그냥 입히면 되는 거지?”

보다 못한 안재홍이 그렇게 말하자 인촌은 고개를 흔드는 것이었다.

“결코 하찮은 문제가 아니오, 학교 모자와 학교 옷은 바로 그 학교의 얼굴이며 상징입니다. 관립 일반학교마냥 일제(日製) 광목으로 된 옷을 입히고 그들의 씌운 모자를 그대로 씌울 수는 없는 일이요. 조선학생은 조선학생 티가 나야지요.”

고심하던 인촌은 검은 천을 댄 교모(校帽)에 무명으로 지은 교복을 입히기로 했다.  일부에서는 질 좋고 맵시 나는 일제 광목을 두고 왜 하필이면 손으로 짠 그 투박한 무명베로 교복을 하느냐며 못 마땅해 했다. 광목(廣木)은 개화 이후 일본 상인들이 들고 들어와 가장 재미를 본 생필품이었고 널리 판을 치고 있었다.

“값 싸고 질긴 우리 전래의 무명베가 있는데 왜 비싼 일제 광목을 쓴단 말이오? 우리가 우리 것을 쓰지 않으면 누가 쓴단 말이오?”

인촌은 국산품을 애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찍부터 ‘산업장려’나 ‘국산품 애용’을 구국운동의 하나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찮은 교복에까지 신경을 쓴 것은 바로 자기학교 학생들 한테 만이라도 그러한 민족의 얼을 심어주겠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참성단(塹星壇) 수학여행

 

당시 인촌 밑에서 중앙학교를 거쳐 나온 인사들의 회고만 보더라도 인촌이 평소 얼마만큼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민족사상을 불어 넣었는지를 알 수 있다.

 

 

유홍 柳鸿  회고

나는 1916년 그러니까 인촌 선생께서 학교를 인수하신 그 다음 해에 중앙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한 후 첫 소풍을 강화도로 갔었는데 그때의 일은 오래도록 나에게 어떤 충격처럼 남아 있었다. 전교생이 함께 갔었던 것 같다.

유근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선생님들 중에는 물론 인촌 선생님도 포함되어 있었다.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에 올라갔다. 교장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이 단군 성터에서 단군설화를 얘기하면서 목이 메었으며, 인촌 선생님께서도 소리 없이 눈물을 짓고 있었다. 학생들도 그제서야 나룻배까지 빌어 타고 강화도에 소풍을 온 까닭을 깨닫고는 모두 함께 울었다. 그때 교장 선생님 바로 옆에서 단정한 자세로 눈물 지그시 감은 채 눈물을 흘리시던 인촌 선생님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신도성 愼道晟 회고

중학교 입학 당시(1930년) 나는 제일고보(第一高普)와 중앙학교 두 군데 시험을 쳤는데 두 군데 다 합격을 하게 되었다. 그때의 상식은 당연히 제일고보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학교를 가느냐의 선택에 있어 어리고 철이 없으므로 선친께 의논을 드렸더니 중앙학교를 택하라 하셨다. 경남 거창에서는 우리 집이 대지주에 속했으므로 인촌의 경방, 동아일보 설립할 때 주식투자 권유를 받아 우리 선친과 인촌은 교분이 있었다. 투자는 안 하신 것 같지만 마음 속으로 인촌을 퍽 존경하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중앙학교를 들어 가게 되었다. 그런데 학교를 들어가 보니까 역시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특한 민족주의적인 분위기가 살아 있었고, 김성수 선생께서 교장을 하시며 수업에 들어 오시기도 했다. 그것도 좋았지만 조철호, 박용희 선생 등으로부터 훈련을 단단히 받았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권덕규(역사), 문일평(한국사; 동양사), 이윤제(한글) 선생 등 좋은 선생님들이 많았다. 일제하에서 배우기 힘든 보통의 교양교육을 다 배웠다. 학교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인촌 선생은 수신시간에 교재를 뒤로 제쳐놓고 자신의 얘기를 많이 해 주셨는데 은근히 민족정신을 불어 넣어주곤 했다. 예를 들면 영국에 가서 하숙을 하는데 한국에서 하던 버릇대로 화장실을 갔다 오면서 불을 안 끄고 나왔더니 주인이 잔소리를 하더라. 전력을 낭비하지 않고 물자를 절약하며 잘 살면서도 검약하더라. 우리는 전등불도 안 끄고 잠을 자고 그러는데 그래서는 안 되다고 충고를 하시기도 했다. 한번은 외국을 가시는데 여권에 적어야 하는 국적이 남의 나라 이름으로 되어 나라 없는 백성의 서러움을 실감했었다. 배 안에서 식사를 할 때 식탁에 승객들의 국기를 꽂는데 그 국기 가운데 태극기가 없었다는 울분을 얘기하셨다.

 

3.1운동의 실제적 모의 장소: 중앙학교 숙직실

 

그리고 3.1운동 때의 말씀도 하셨는데 중앙학교에서 모의하던 얘기를 하셨다. “3.1운동이 파고다 공원에서 일어난 줄만 알고 있지? 사실은 중앙학교에서 시작된 거야. 계획도 세우고 유인물도 만들고 그랬는데 바로 그거 한 집이 바로 저 집이야!” 하고 우리학교 숙직실을 가리켜 주셨다. 중앙학교가 민족주의 본거지임을 일깨워 주셨고 우리는 자부심을 상당히 가지고 있었다. 그때 받은 느낌이 그 후에도 남아서 일제 말기에 학생의 몸으로 항일투쟁은 못 했지만 은근히 ‘일제에 협력해서는 안 된다’ , ‘지원병이니 학병이니 그런데 끌려가서는 절대 안 된다’ 는 것은 확고했다. 해방될 때가지 일제가 강요하던 국민복은 한번도 입지 않았고 ‘전투모’와 ‘각반’도 한 번도 매보지 않았는데, 그것은 인촌 선생의 교육 영향이었다.

 

 

김승태 金昇泰 회고

그때 중앙학교는 마치 기사(기사)를 양성하는 도장(도장)과 같은 분위기였다. 또한 그 학교는 3.1운동의 발상지가 되었고, 6.10만세 사건의 중추적 역할도 담당했다. 이것이 모두가 선생께서 웅원(雄遠)한 포부와 용견(勇堅)한 의지, 성실(誠實)한 행동을 가르치신 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마치 학교는 도장과 같았고, 배우는 우리는 기사와 같은 흥분 속에서 지냈다. 예를 들면 동지섣달 눈이 쌓였어도 팬츠 하나만 입고 운동장을 달리게 했다. 그것은 독립정신을 갖게 하기 위한 단면이었으며, 정신과 육체의 극기(극기) 훈련이기도 했다.

 

 

채문식 蔡汶植 회고

나의 인생은 중앙학교 5년 동안 교육을 받을 때 인촌의 정신, 인촌의 손길에 의해서 키워졌고 해방 후 지금까지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시대 문경(聞慶)의 산골에서 태어나 중앙고보에서 공부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1930년대 말 일제는 국어상용 이라 하여 학교에서는 일본 말만 쓰게 했다. 중앙학교에서 가까운 어떤 학교가 있었는데 그 학교에서 한국인 교사가 학생 하나를 정학 시켰다. 그래서 부모가 찾아 왔는데 그 아버지는 일본 말을 모르는 시골 노인이었다. 한국인 담임선생은 우리말을 쓰지 않기 위해 통역을 하게 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처벌을 받게 된 것은 점심으로 빵을 하나씩 나눠 주었는데 ‘아, 빵이다!’ 하고 외쳤는데 그 말이 한국말이라 해서 정학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오직 한 곳, 중앙고보만은 일본어를 쓰지 않았다. 그 시절에 일본어를 쓰지 않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대게 중앙학교 선생은 1년은 학교에 계시고 1년은 감옥에 가 계시는 게 보통이었다. 중앙학교에 입학하면서 매를 많이 맞았다. 입학 첫 날부터 영어시간에는 회초리 하나씩을 집에서 준비해 가지고 오라는데 집에 갈 때는 그게 다 꺾여질 지경이었다. 출석을 부르는데 선생님은 우리 말로 ‘채문식!’ 하고 부른다. 그때 국민학교에서는 일본어만 배웠으므로 부지불식간에 ‘하이!’ 하고 대답한다. 그러면 무조건 앞으로 나오라 해서는 회초리로 때렸는데 왜 맞는지 몰랐다. 선생님이 매를 들고 또 ‘채문식!’ 하면 ‘하이!’ 하게 되고 ‘하이!’ 하면 도 맞는 것이었다.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자기가 가져간 회초리가 다 부러질 때 쯤 되면 뭔가 가슴에 뿌듯한 게 있어서 ‘예’ 하고 우리말로 대답하게 되는 것이었다. 인촌 선생이 아니면 못할 것이었다. 인촌을 보고 더러 총을 들고 독립운동도 안 했고, 외국에 가서 항일운동도 안 하지 않았느냐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시대의 한국 땅에서 인촌이 아니고 누가 그같이 민족의식이 맥박 치는 그런 학교를 경영했던가를 생각한다면 그런 말은 못할 것이다. 선생은 완전한 한국 사람이었고 그 같은 한국 사람을 기르려고 무척도 애를 썼다. 그 회초리를 맞아 가면서 1학년에서 5학년이 될 때는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 뭔가 쯤은 깨닫게 되었으니 참으로 위대한 애국자라 아니할 수 없다.

 

 

퇴교생(退校生)이 모이는 곳

 

 인촌은 제자들에게 민족혼을 심는데 심혈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일인교사(일인교사)의 배척운동이나 저항운동을 하기 위해 스트라익을 벌이다가 퇴학을 당한 학생들에게 항상 중앙학교는 문을 열고 너그럽게 받아 들였던 것이다. 당시 인촌이 중앙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보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 일인교사 배척운동이 일어난 일이 있었다. 인촌은 이때 처벌 받은 학생들을 모두 받아 들였다.

 

서항석 徐恒錫 회고

나는 1918년에 중앙학교를 졸업했는데 따지고 보면 1년도 못 다니고 졸업한 셈이다. 나는 보성학교를 다니다가 퇴학을 당하여 중앙학교로 편입학하게 됐던 것이다. 인촌 선생의 항일적이며 애국적인 용단을 잊을 수가 없다. 보성학교 2학년에서 문제가 생겼다. 초조시간이 되어 모두 웃옷을 벗고 나가게 되었다. 물론 교실에는 당번이 지키게 돼 있었다. 그런데 벗어 두었던 옷 속에서 시계가 없어졌던 것이다. 담임선생이 여러 방법으로 시계를 찾았지만 나오지 않았다. 마침 보성학교에는 <고마쯔자끼>라고 하는 일본인 교사가 있었는데 그 일본선생이 종로 경찰서에 연락을 했다. 그래서 형사가 와가지고는 학생들을 죄인 다루듯 했다. 우리는 4학년으로 최고 학년이었는데 이 같은 사태에 크게 분개했다. 학교에서 도난사고가 생겼다면 선생들이 자기네 잘못을 느끼고 쉬쉬하며 잡을 일이지 그것을 경찰을 불러 몸수색을 했으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분개하여 일어섰던 것이다. 2, 3, 4학년의 전 학생이 들고 일어났다. 교장은 최린 선생이었는데 전교가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소란해 졌다. 더 이상 사태가 키질 것 같아 2, 3 학년들을 누르고 우리 4학년 학생 8명이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하고 교장선생께 자퇴서를 냈다. 교장선생은 제발 이러지 말라달라고 하셨지만 우리의 기세는 당당했다. 학교측에서는 퇴학을 명함 이라 내붙이게 되었다. 최린 선생은 안 되겠던지 인촌 선생에게 전화를 거셨다.

“요새 우리학교 사건 생긴거 하시지요? 정말 진퇴유곡입니다. 총독부에서 퇴학을 시키라 하니 그럴 수 밖에 없어 퇴학을 시켰소만 정말 우수한 애들인데 버리자니 가슴이 아프오.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젊은 애들의 장래를 막아 놓을 수는 없지 않소?”

“좋습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싹을 자를 수는 없습니다. 퇴교생 전원을 저희 학교로 보내 주십시오. 소생이 맡아 가르치겠습니다.”

그래서 중앙학교로 가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후에 생각하니 인촌 선생의 애국자로서의 일면을 보여 준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총독부의 학무국장 세끼야 는 화가 나서 인촌을 소환했다.

“김선생, 이번 일은 좀 경솔했던 거 아니오? 여러 말 하고 싶지 않소. 불온 학생 여덟 명은 받아 들이지 말구 당장 내쫓으시오!”

“무슨 말씀인지 알겠소만 가령 일본인 학교에서 그런 일이 생겼다고 하면 경찰이 학교 구내에 들어가사 학생들을 죄인 다루듯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스승을 배척했다면 당연히 교칙에 따라 퇴학을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학생은 그것으로 벌은 충분히 받은 거 아닙니까? 배우는 학생에게 퇴학 이상의 중벌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벌을 받은 학생이 다른 학교에 가는 것까지 총독부가 나서서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교육적 견지에서 하는 처벌이 아니라 어떤 민족적 견지에서 하는 보복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인촌의 말을 들은 세끼야 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자기 앞에 와서 그렇게 당당하게 자기 할 소리를 하는 조선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비록 총독부 관리라 하지만 그 역시 이런 사리를 모른다 할 수는 없었다.

“김선생의 체면을 봐서 이번 일은 불문에 붙이지만 앞으로 그런 일이 있을 때는 우리 학무국 과 상의해서 처리하시오.”

그것은 은근한 협박이기도 했다. 총독 정치하에 있어서 그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 사학(私學)의 문을 닫게 하는 것쯤은 간단했다. 인촌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민족교육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뻔해 보이지만 트집을 잡으려 해도 구실을 주지 않는 인촌이야 말로 다루기 어려운 상대였다. 친일인사(親日人士)로 만들려고 유혹도 해 보고 구실을 붙여 위협도 해 보았지만 언제나 그는 정정당당했다. 그러한 편입학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게 아니고 또 있었다.

 

 

정문기 鄭文基 회고

고향인 전남 순천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인성학교에 들어갔다. 그 학교를 나와 서울로 올라왔다. 경신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공부를 하게 되었다. 경신학교는 미국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가 세운 기독교계 학교였다. 4학년에 진급하자 학교에서 스트라익이 일어났다. 나는 주동 학생으로 몰려 퇴학을 당했고 중앙학교로 가게 되었다. 그 전부터 사실은 인촌선생 밑에서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경신학교에서 처벌을 받고 쫓겨난 학생은 1, 2, 3, 4 학년 합쳐서 수십 명에 이르렀다. 중앙학교에서는 그들을 모두 받아 주었던 것이다. 이젠 끝장이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인촌 선생이 용단을 내려 받아 주시니 우리들의 사기는 충천할 뿐이었다. 당시 경신학교 교장은 미국인 선교사였는데 화가 났던지 전화로 인촌 선생께 따졌다고 한다.

“이거 보시오, 김성수 선생! 선생께서 그렇게 분별 없으신 교장이신 줄 몰랐습니다.”

“무슨 말씀이오?”

“같은 교육자끼리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 학교에서 처벌한 학생들입니다. 잘못해서 처벌한 학생들이라 그겁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을 중앙학교에서 그냥 받아주면 우린 뭐가 되지요? 학생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처벌된 학생 전원을 저희 학교로 오라고 한 일 없습니다. 학생들 스스로 찾아와서 저희 학교에서 공부하게 해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물론 잘못 해서 벌을 받은 것이니 반성을 하고 다시 돌아가 공부하라고 엄하게 꾸짖었소만 돌아가지를 않습니다.  그 중에서 1, 2, 3학년 학생들은 나의 설득대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학생들이 있었으나 4학년들은 누구도 못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4학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다른 방법으로 가르쳐 사람을 만들어 볼 테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인촌 선생은 결국 4학년 학생만 중앙학교에 남게 하고 그 이하 하급생들은 모두 돌아가게 하셨다. 나는 공부는 좀 소홀히 한 편이지만 야구나 축구 등 스포츠를 좋아했다. 동급생 중 일석(일석: 이희승)은 모범적인 노력가였고 보성학교에서 퇴학을 당해 중앙학교로 온 서항석은 머리가 우수하고 작문을 잘 했다. 둘이서 늘 1, 2등을 다투었다. 인촌 선생은 은근히 경쟁심을 고취했는데 학생들을 친자식처럼 대하셨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든다시며 늘 체력단련을 권하셨다. 일본인과 겨루려면 머리도 우수해야지만 몸도 건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스포츠를 좋아했기 때문에 선생님은 건강을 겸했다고 늘 사랑해 주셨다. 한번은 계동 신교사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는 걸 들었다.

“공부를 한다는 것도 경쟁이니 두각을 내려는 것은 인지본능이며 두각을 쉽게 내는 방법을 알켜 줄까? 남들이 모두 몰리는 유행학과를 전공허지 말아야 돼. 진리탐구를 하는 학문은 어떤 학문이든 똑 같은 벱이여. 지금의 유행 학과가 후엔 무실해지고 지금 유행하지 않는 학과가 인기를 얻을 지 모르는 일이거든? 학문에는 우열이 없느니께 남이 않는 것을 해보라 이말이여”

나는 그 말씀을 명심하고 일본 유학을 가서 <송산고>(松山高)를 졸업하고는 곧바로 동경제대 수산과에 시험을 치뤄 합격을 했다. 그때 수산과를 택한 것은 인촌 선생의 영향이었다. 그때는 문과를 해야 대학생인 줄 알았지 수산학을 한다는 것은 좀 엉뚱한 것이었다.

 

 

韓紙 한지에 싸 준 인절미

중앙학교 교장 당시의 인촌이 우리 민족정신과 기상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증명해 준다. 일제는 한반도 강점 후 구정(舊正)인 <설>을 쇠지 못하게 하고 저희들의 명절인 신정(新正)설을 쇠게 했다. 이른바 <양력설> <일본설>을 쇠게 한 것이다.

해마다 정월 초하루가 되면 총독부에서는 신년 하례식을 하고 천황의 하사품이라 하여 일본 왕실의 문장(紋章)인 국화꽃 무늬가 든 이른바 ‘모찌’ (흰 찹쌀떡)를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다. 아직 소년들이라 그 떡 받아 먹는 것을 모두 좋아했다.

그러나 중앙학교만은 그와 같은 ‘모찌’를 주지 않고 해마다 신년 초하루가 되면 콩가루 고물 묻힌 인절미를 주는 것이었다. 그것도 인촌 댁에서 직접 떡을 하여 그것을 한지(한지)에 싸서 나눠주는 것이었다. 조선학생이 정월 초하룻날부터 나라 잃은 것만도 서러운 데 일본 떡을, 더구나 일본 왕실의 문장이 찍힌 ‘모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철 없는 학생들은 집에서 먹어보지 않은 그 일본 떡이 먹고 싶어 불평하는 측이 있었지만 인촌은 씁쓸하게 웃기만 하는 것이었다.

“명절이면 집에서 먹는 그 흔한 인절미, 잔치 때면 흔하게 먹는 인절미라고 그러는 지는 모르겄다만 너희들도 학교를 나가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왜 우리 한지에 인절미를 싸서 주는지 그 뜻을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Ordinary Sunday

연중 시기에서 사순 시기로 가는 길목에서

 

Ordinary Time, 올해 연중시기도 벌써 6주째를 맞는 오늘로서  Extraordinary season, Lent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도 반달 정도 남았다. 싸늘한 비가 간간히 뿌리는 평화로운 일요일 오전..  이런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을 맞아 본 것이 얼마만인가 생각한다.  오늘이 더욱 새로운 것은 우리 마음의 고향처럼 느껴지는 ‘동네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에서 둘이 미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렇게 오래 된 것도 아닌데 느낌에는 몇 년이라도 흐른 것 같다. 그 정도로 나는 이런 때를 무의식 중에 기다리고 살았던 모양이다.

나는 미사 후에 곧바로 집으로 가서 편하게 late morning coffee의 향기를 즐길 수 있지만 연숙은 다시 곧바로 ‘도라빌 본당’으로 가서 새로 시작되는 견진 교리반 director 일로 땀을 흘려야 한다. 미국본당에 가는 날의 일요일 일정은 이렇게 조금 복잡한 편이다.

두 본당을 가진 우리의 신앙생활은 조금 지혜로운 생각이 필요하다. 언제 도라빌 한국본당을 가며, 언제 동네 미국본당을 가느냐.. 이것을 결정하는 것, 몇 가지 이유는 분명하지만 아주 분명하지 않을 때는 더욱 심사숙고를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사실 어디를 가나 ‘성체성사’를 하는 것이기에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우리의 신잉생활에 도움을 ‘더’ 줄 수 있는 쪽을 택하는 것이다.

영어권과 모국어 권, 언어 차이를 떠나서 문화권의 다름은 이제 오랜 이곳의 생활에서 익숙하게 아는 것이지만, 그래도 항상 새롭기만 하다. 아마도 이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그때까지 이 ‘피할 수 없는 문화의 차이’는 계속 새삼스럽게 느낄 것이다. 문제는 이 두 색다른  교회공동체를 통한 신앙생활이 우리의 개인적, 가족적 영성생활에 어떻게 도움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한때 깊숙이 관여했던 도라빌 ‘모국어 본당’에서 서서히 우리 둘은 물러나고 있다. 의도적인 면도 없지 않고,  피하고 싶은 ‘사람들’과 계속 어울리는 것, 장기적으로 ‘영육간의 건강’에 전혀 도움이 될 수가 없다는 ‘경험적 진리’에 우리는 의견을 모았다.  특히 지난 주일에 ‘견진교리반’ 시간에 일어났던 또 다른 ‘trumpian, kafkaesque incident’ 1  해괴한 사건은 연숙으로 하여금 ‘완전히, 깨끗하게’ 교리반 director 임무를 떠나게 하는 마지막 ‘관 coffin 의 못 nail’ 역할을 했다.

연숙도 나와 발을 맞추어 하나, 둘 짐들을 거의 계획적으로 놓기 시작했는데, 제일 큰 것은 ’15년 간의 주보 편집’이 그것이고 지난 몇 년간의 ‘예비신자 교리반 director’가 그것으로,  그녀에게는 거의 ‘은퇴’와 같은 중대한 결정이 되었다.  이제부터는 남는 시간, 여유를 어떻게 더 ‘지혜롭게, 생산적으로’ 쓸 까 하는 것인데 그것을 나는 절대 걱정 안 한다. 벌써 앞으로 ‘신나게’ 할 것들의 ‘줄을 서’ 있기 때문이다.

 

  1.   견진교리반에 들어온 한 ‘젊은’ 여자의 상식을 벗어나는 무례함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던 사건, 도대체 요새 젊은 아이들은 어떻게 가정교육을 받았고, 그런 ‘애’가 ‘견진’을 받는다는 사실의 모순은.. 

사순절을 향한 ‘아주 특별한 순간’

지난 달 말에  ‘프카’ 자매님1 과 카톡 대화를 하던 중에 아틀란타 ‘도라빌’ 순교자 성당 내  ‘영적독서클럽’에 대한 소식을 물었는데 반응이 아주 ‘부정적’인 것이었다. 최근에 느낌도 그랬지만 역시 이 자매님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으로 아예 ‘탈회 脫會’를 하였고 성당을 떠난 별도의 클럽을 만들어서 ‘영적독서’를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개인적인 사정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 동안 성당내의 영적독서클럽은 아무래도 무언가 ‘구심점’  결여로  ‘흥미’를 유발하는 클럽의 운영상황이 아닌 듯 싶었다.  흔히 말하는 leadership의 부재 不在, 바로 그것은 아니었을까?

근래에 읽었던 책을 소개하면서 나보고도 읽어보지 않겠냐고 해서 ‘물론 ok’라고 해서 그 다음 주에 그 ‘프카’ 자매님2  손수 책을 갖다 주셨다. 이 동갑내기 자매님, 참 볼수록 정이 많은 분임을 알게 되기도 했다. 그 책의 제목이 바로 ‘아주 특별한 순간‘ 이었는데, 영성적 번역서로 많은 친근감을 주는 ‘류해욱 요셉’ 신부님이 엮은 책이었다.

 

책의 내용은 류신부님의 글이 아니고 ‘안토니오 사지’ 라는 ‘유명한’ 인도출신 신부님이 한국에서 지도한 ‘치유피정’의 강의부분을 아주 매끈하고 유려한 한글로 정리한 것이다.  또한 인상적인 것은 2013년에 첫 출판 후 2017년까지 18 쇄의 중판을 거듭한 것을 보면 아마도 ‘베스트셀러’ 급의 ‘좋은 책’이 아닐까 추측도 해 본다.

모두 25회의 강의로 이루어진 이 책을 접하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25번의 피정 강의를 한꺼번에 읽는 대신 하루에 하나의 강의를 편안하게 소화를 하면 어떨까? 더 나아가서 2019년 사순절이 시작되는 3월 6일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까지 모두 (쓰고) 읽으며 올해의 사순절을 더 특별하게 준비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월 5일까지 25회의 강의를 ‘들으려면’ 2월 9일부터 시작을 하면 될 것이고, 그것을 이곳 개인blog에 시한적으로 남겨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류해욱 요셉 신부님은 물론 오래 전 (거의 20년 전?) 이곳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주임신부로 계셨던 분이라서 익숙하지만 사실 나 개인적으로는 당시에 성당엘 안 나갔기에 개인적인 느낌은 거의 없다. 애기로만 듣던 분이었지만 몇 년 전에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에 직접 강론을 들었다. 그 후 이분이 저서나 번역서를 읽기도 했는데 그 읽은 경험들이 아주 인상적이고 기억에 남는다. 한때 stroke로 쓰러지셨다고 해서 모두 걱정을 하고 기도를 했는데 그때 직접 보았을 때는 거의 완치가 된 듯 보였다.

이 책의 원저자격인 안토니오 사지 라는 분은 전혀 생소한 이름이지만 강의 내용을 읽고, 약력을 자세히 보니 류신부님의 말씀대로 ‘성령이 충만한’ 분인 듯싶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그런 피정을 지도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피정강의를 ‘강의록’ 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성경만 가지고 한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책에 소개된 website를 가보니 그곳에 궁금했던 ‘모습’들이 나와 있었고 책보다 더 자세한 안토니오 신부님의 배경도 실려 있어서 이곳에 발췌 전재를 해 본다.

 

강단에 선 안토니오 사지 신부님

안토니오 신부와, 옮긴이 류해욱 요셉 신부님

 

 

Fr. Anthony Vadakkemury, V.C.

안토니오 신부는 1977년 5월1일 2남2녀 중 맏이로 인도에서 출생했다. 양친은 현재 인도의 케랄라에 살며, 그가 기억하는 가장 어렸을 때부터 그의 꿈은 사제가 되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신학교 과정을 인도와 동 아프리카의 케냐에서 수료했으며, 2006년 12월 29일 인도 케랄라에서 빈첸시오회 수도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2007년 1월 6일 첫 미사를 거행하였다.

인도의 방갈로에서 신학교 철학 과정을 마친 뒤, 1년간의 사목 수련을 위해 그는 2002년 케냐의 나이로비로 보내졌다. 이후에 그는 신학 과정을 마치기 위해 아프리카의 가장 유명한 대학 중 하나인 ”탄가자 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77개의 서로 다른 국적의 학생들과 지내며, 서로다른 여러 나라의 문화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2006년 5월 14일 그는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부제품을 받았고, 이후 케냐의 사목 수련시기 동안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에서 동료 사제들과 함께 중등부 학생들을 위한 3일간의 피정을 (예수선교피정) 지도하였다. 그리고 매주 일요일마다 나이로비의 서로 다른 본당들에서 본당신부를 도와 강론을 하였으며,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많은 본당들에서 청소년 그룹을 지도하였다. 특히 그는 청소년들이 영적인 측면에서 충분한 보살핌을 받고 있는지에 유의하였다. 또한 부제 생활 중에 수감자들을 위한 피정, 선교 등을 비롯한 많은 피정 프로그램을 지도하였다. 나이로비의 5년간 체류하면서 안토니오 신부는 동 아프리카의 빈첸시오 피정센터 중 하나인 빈첸시오 기도의 집에서도 봉사하였다.

안토니오 신부가 사제 서품 받은 직후, 그의 관구장으로부터 타자니아의 유빈자로 발령받아, 그곳에서 그는 두 달 간의 성공적인 사목 임기를 마치고 우간다의 엔테베로 가서 두 가지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엔테베의 빈첸시오 피정의 집에서 1일 피정을 지도하며 재정을 관리하였는데, 故 요셉 빌 신부가 그가 속한 분원의 장상이었다. 또 하나의 임무는 우간다의 마사카에서 새로운 피정센터를 건립하는 것있었다. 그리하여 엔테베에서 180km 떨어진 마사카를 매일같이 오가며 사제들을 위한 피정센터 건립을 추진하였다. 이 건물은 2008년 2월 23일 故 요셉 빌 신부의 80세 생일에 완공식을 거행하였다.

안토니오 신부는 故 요셉 빌 신부의 마지막 몇 주간을 함께하며 임종을 지키신 분으로, 그의 관구장은 故 요셉 빌 신부의 침묵 치유 피정 사업을 이어받을 후임자로 안토니오 신부를 임명하였다.

  1. ‘프란체스카’ 란 세례명을 우리들이 줄여 부르는 말
  2. 오랜 세월 동안 알고 지내던 친지의 누님이 되시며,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매주 레지오 화요일에 보기도 하는 동갑내기 전 음악대학 교수님.  2년 전에는 기타동호회에서 몇 개월 동안 보기도 했던.

‘Making All Things New’ – introduction

 

 

Introduction

 

This is a book about catholicity. I hope you will not put it down too quickly if you are not Catholic, because it is not exactly about the Catholic Church but about catholicity or awareness of how sun, moon, stars, Kepler, Saturn, maple trees, muddy rivers, amoeba, bacteria, and all peoples of the earth form a whole. Catholicity is from a Greek word, katholikos, which means “of the whole” or “a sense of wholeness.” It is the orientation of all life toward making wholes and thus toward universality or turning together as one. So, by way of introduction, this book is about wholeness and wholemaking that emerges from the nexus of catholicity, cosmology, and consciousness. The early Greeks coined the word catholic to describe attunement to the physical order, so that catholicity meant living in harmony with the stars. To live in catholicity was to have a sense of the cosmos or the whole order of things, including physical and spiritual things.

The word whole today is alluring – whole foods, holistic health, whole body workouts. It is a word that has become embedded in our cultural consciousness, despite our radically divided world. The longing for wholeness today speaks to something deep within the human person and nature itself. Are we whole by nature? Does wholeness emerge with the development of life, or is life an unfolding of an already existing wholeness? Today, physics speaks of a quantum whole and systems biology tells us that living organisms emerge as complex wholes. Modern science, therefore, suggests that we do not invent a whole; rather, the whole exists prior to anything else. We are to awaken to the whole we already are and deepen it by becoming more whole and unified through creativity, convergence, and consciousness.

Interestingly, the priestly author of Genesis had an implicit sense of catholicity even before the word was coined.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heaven and earth,” he writes, “and the earth was a formless void” (Gn 1:1). This same sense would eventually be taken up by Christians for whom God and humanity, Alpha and Omega, are united in the person of Jesus Christ. The early Christians adopted the word catholic to describe the Church as disciples gathered in the name of Jesus Christ. To have a sense of the whole was to have a consciousness of Christ and to gather into community as one in Christ. Over time, the significance of catholicity shifted from wholeness to orthodoxy, especially as the Church grew into a major intellectual and cultural force in the Western world. Christians came to believe that catholicity meant expansion of the institutional Church throughout the world. Jean Maalouf wirtes:

 

Indeed, for a long period of time, Christians were through to believe that Catholicity meant the extension of the institutional Church to entire Christianity, and perhaps beyond. The hierarchy of the Church was not only a model but also a solid foundation for political power in the world. Universalism meant the extension of political, cultural and religious particularism. This was believed to be the more or less perfect image of the Kingdom of God on earth, whose center was out of this world.

 

Although catholicity began as a consciousness of the whole order of things (cosmos), over time it became detached from cosmology and conflated with the pope, Rome, and the institutional Church. Catholic universalism became equivalent to power, authority, and moral order. But as Maalouf writes: “The truth is that Catholicity is not an abstract concept, and it does not mean the universalization of one culture, but the universalization of the human being.” Catholicity does not mean that everyone is to become Catholic; rather, to be catholic is to be aware of belonging to a whole and to act according to the whole, including the galaxies and stars, earth, animals, plants, and human life. To paraphrase Saint Augustine: “You have made us for wholeness, O Lord, and our hearts are restless until they find their wholeness in You.”

While there are a number of outstanding theologians of the modern period who have written on catholicity, only a few have reconciled the dynamic of catholicity with the physical world, as science describes it today. In this respect Pierre Teilhard de Chardin, S.J., stands out as a voice of catholicity in the wilderness. In The Divine Milieu, Teilhard disclosed a new catholicity, a new awareness, which was both shocking and exuberant with life. By bringing together Christianity and evolution, he renewed catholicity in its deep cosmic roots. Sister Catherine R. O’Connor, CSJ, writes:

 

The sense of the sacredness of the earth and of man’s rootedness in it could be, in conjunction with ritual and sacrament, a rich source of nourishment for the human spirit. Teilhard’s particular thrust in the area of the importance of human action and passion in making ‘contact’ with God through the earth would add a new dimension to an approach to Christianity that still tends to be merely legal and moral.

 

Catholicity, as a consciousness of the sacred earth, of the universal spirit, and our longing for completion, is at the core of evolution. Teilhard had a sense of “deep catholicity,” an intrinsic wholeness at the heart of life yearning to become more whole in and through the human person. He described this wholeness as “Omega,” a oneness already within and yet ahead of us, drawing us onward toward greater unity in love. For Teilhard, modern science awakens us to a new sense of catholicity and empowers us to participate in evolution as co-creators of the emerging whole. Can we connect catholicity and cosmology in a way that revitalizes Christianity in an evolutionary universe? The answer to this question is essentially the basis of this book, which spearheads a new book series called Catholicity in an Evolving Universe by Orbis Books. This series will explore the dimensions of catholicity in an evolving universe with particular emphasis on theology, spirituality, science, the arts, the economy, and the environment. Catholicity reflects divine incarnational energy at the heart of cosmic evolution. The series seeks to illuminate the meaning and purpose of an unfinished universe, the role of human life in evolution, and the significance of Christogenesis (literally, “Christ birthing”) or the emerging, personalizing union of God, human, and cosmos.

My explorations in this book begin with certain premises: First, Catholicity is first and foremost linked with cosmology. It arises with the introduction of space into the physical order creating a “cosmos,” an orderly connectedness of reality. Catholicity, therefore, is based on the Greek understanding of cosmos as a three-dimensional sphere rather than an two-dimensional flat earth. Second, Catholicity is a function of consciousness. The rise of catholicity and cosmology takes place in the axial period in which the human person emerges as individual subject. Catholicity is awareness of the one amid the many through the human person whose consciousness “catholicizes” or unifies the many parts. Third, Catholicity is consciousness of the whole, an orientation toward universality or turning together as one. In this  respect catholicity and universality are not equivalent although they are deeply connected. Although the Church identifies catholicity with universality, a more fruitful relationship between catholicity and universality begins with reorienting these within a wider cosmological and evolutionary framework.

I became aware of revisiting catholicity in light of an evolving universe through my friendship and collaboration with John Haughey, SJ, whose book, Where Is Knowing Going, awakened me to catholicity in a wider narrative. However, the work of French philosopher Remi Brague enabled me to understand catholicity in its relation to cosmology, as the Greeks first conceived this idea. To this end I examine catholicity on four different levels: (1) catholicity in nature, including Big Bang cosmology and quantum consciousness; (2) catholicity and the human person; (3) catholicity and Jesus; and (4) the institutionalization of catholicity or the Catholic Church.

 

Chapter 1 examines Brague’s principla thesis, namely, that we have lost the wisdom of the world because we have forgotten how to read the stars. I look at the emergence of the word cosmos in the work of Plato and the significance of cosmology for anthropology, as ancient cultures conceived it. Since the word catholic was adopted by the early Christians to define their understanding of church, I briefly explore its early usage by Ignatius of Antioch and Irenaeus of Lyons. I then look at the mutation of catholicity, as Christianity became a politicized religion under Constantine the Great, and catholicity was defined as orthodoxy, especially in light of the Arian crisis. Chapter 2 looks at catholicity in the medieval synthesis of microcosm and macrocosm and the loss of this synthesis with the rise of modern science. The powerful influence of Newtonian science on culture shifted the emphasis of catholicity from a cosmological whole to mechanistic lawfulness. I discuss the shift in catholicity from wholemaking to lawfulness, especially with the development of manual theology and the effects of mechanistic Catholicism on the alienation of the Church from the world.

The discoveries of twentieth-century science ushered in a new vision of the cosmos and the relationship of the human person to the cosmos. Insights from modern science, therefore, provide new ground to explore catholicity for twenty-first-century life. Chapter 3 develops catholicity as an intrinsic aspect of nature itself. Beginning with Big Bang cosmology, the primacy of energy, and quantum consciousness, catholicity in nature is viewed as the impulse in evolution toward greater wholeness. The term emergence best describes the unfolding of life from simple to complex life marked by a rise of consciousness. Hence, I speak of “Big Bang catholicity” insofar as the physical cosmos bears witness to an unyielding wholeness within it.

Chapter 4 focuses, more specifically, on quantum consciousness with a view toward understanding consciousness based on quantum physics. In the midst of the twentieth century Jesuit scientist Pierre Teilhard de Chardin described evolution as the rise of consciousness, indicating that mind is in matter from the beginning of the universe. Today, scientists and philosophers are supporting this insight, realizing that mind is more than the human brain and consciousness is more than the human mind. These ideas are explored in such a way that we begin to understand the connection between nature’s inner propensity for wholeness and the rise of consciousness. In other words, there is an intrinsic relationship between catholicity and consciousness. The rise of consciousness and complex wholeness simultaneously in nature undergirds the profound role consciousness plays in realizing wholeness on the human level. If nature bears within it what we might call an intrinsic catholicity, why is wholeness so difficult on the human level? I explore this question in terms of the complex human brain with its divided right and left hemispheres, conscious self-reflection, and language, which distinguishes the human species. The mark of the human person is verbal language and communication, and thus the freedom to express oneself. The human person is one of desire and decision. How we think, what we think, what enters or leaves our minds, where we focus our minds – all shape our actions and, in turn, our world. On the human level where there is free will and intellect, the whole is not a given; it is a choice in relation to God, neighbor, and earth community. For the Christian the choice for wholeness is embedded in the gospel life, following the words of Jesus: “I have come so that you may have life and have it to the full”(Jn 10:10). We are to focus our minds on the whole and choose  the whole for the sake of abundant life.

Understanding catholicity in its organic and cosmological context sheds new light on the person of Jesus Christ and the significance of his life for the emergence of the Catholic Church. Chapter 5 examines the spirit of creative wholeness that marks the life of Jesus in his public ministry. To better understand this creative wholeness, I use Teilhard de Chardin’s paradigm of Christogenesis, or the evolutionary emergence of Christ. Teilhard identified Omega with Christ and posited a third or organic nature of Christ, meaning that God is incarnate from the beginning of the universe. If Christ Omega is the goal of evolution (following the Pauline notion of “all things in Christ”) then the goal is already present in the unfolding process of life. Christ the evolver (or Christ in evolution) and Christ Omega (Christ as goal of evolution) are one and same and come to explicit consciousness in the person of Jesus of Nazareth. I look at the ministry of Jesus in terms of catholicity and discuss the sacraments of baptism and Eucharist as new forms of relatedness with Christ in an expanding field of compassionate love.

The diminishment of catholicity by institutionalization and alienation from worldly affairs relates to the development of Catholicism’s teaching on the four last things: heaven, hell, death, and final judgment. Chapter 6 revisits these four quadrants of Catholic belief in the wider framework of evolution and Christogenesis. In particular, Teilhard’s emphasis on Christianity as an evolutionary, world-affirming religion is highlighted, and his “mysticism of action” is discussed. I look at the constraints of institutional catholicity against the backdrop of a wider cultural catholicity, exploring jazz fests, social media and baseball as cultural ritual events where catholicity is vibrant. My particular interest in computer technology and its impact on the shape of humankind is then examined in light of the four last things. The rapid development of computer technology today is seeking to fill a religious void, extending the religious self into the cyber world so that the last four things no longer seem to constrain human destiny.

The advantage of exploring catholicity within a wider cosmological and cultural framework is that it provides new language and new paradigms to explore the catholicity of the institutional church. Chapter 7 examines the Church as an open system, since the Church is an organizational system, and the dynamics of its organization affects its function and outreach to the world. The term open system comes from the biological sciences and refers to openness of the system to the environment and, as such, its capacity to self-organize. Using Teilhard’s notion of the Church as a new phylum of christified persons in evolution, I creatively imagine what an open-systems Church might look like from the point of administrative organization to the development of theology as open-systems theology. I explore briefly the significance of open-systems theology for the discovery of truth in an evolutionary world.

Since my aim is to kindle a new consciousness of catholicity for an evolutionary age, I seek to discover a deeper meaning of this consciousness for the Church and the world today. Chapter 8 takes up Saint Paul’s injunction to “put on the mind of Christ” and considers what this means in terms of quantum  consciousness and spirituality. Here I focus more specifically on training the mind for unified consciousness. Insights from the Buddhist nun Tenzin Palmo are helpful, as well as the writings of Etty Hillesum, who died at a young age in a Nazi concentration camp. Etty’s bridge between inner world and outer world through a unified consciousness in God illuminates the inner capacity of the human person to think widely and deeply even in the midst of suffering and violence. She also shows us how expansion of the mind-soul can influence the world around us. Centuries before Etty, Francis of Assisi came to similar insights through a deep, christic mindfulness, and I briefly explore his path to a “uni-verse” through the centrality of love and the poverty of letting go into a wider embrace of life.

Finally, after searching the lines of catholicity from the Big Bang to quantum consciousness and evolution, to the life of Jesus and the emergence of church from the patristic era to the postmodern age, Chapter 9 revisits the meaning of catholicity in light of scientific insights and cosmology and asks, What are we called to today, as citizens of the universe, as followers of Jesus Christ and as members of the institutional Church? The final chapter seeks to clarify the meaning of catholicity in its various levels (nature, person, Jesus, and Church) and to examine briefly models of catholicity in our current age. Of the four models discussed in this chapter (Pope Francis, Barbara Marx Hubbard, the Dalai Lama, and the Leadership Conference of Women Religious), I want to highlight the spirit of Pope Francis. Elected to the papacy following the resignation of Pope Benedict XVI, Pope Francis (Jose Maria Bergoglio), in his late seventies, brings a new spirit to the Church that reflects a consciousness of catholicity that we explore here. His is an inner spirit of freedom grounded in the love of God, guided by the gospel message of the new kingdom at hand, and open to a world of change. He desires a Church on the margins, where the poor and the forgotten can be brought into a new unity; a Church that advocates life at all costs and promotes peaceful life in a war-torn and violent world; a Church that models justice in an age of greed, consumerism, and power; a Church centered on the risen Christ, empowering a consciousness of the whole. This is a church leader who desperately wants to breathe a new spirit of catholicity into a world dying for wholeness and unity.

But the numbers speak otherwise. Mark Gray of the Center for Research in the Apostolate (CARA-Georgetown) states that at the end of 2014, “about 28.9 million people in the U.S. who were baptized and raised Catholic… no longer self-identify as Catholic.” This is equivalent to more than 900,000 people each year and is slightly larger than the number the Church added in baptisms and receptions into full communion in 2012. Gray’s statistics on all levels of Catholic life show downward trends and no signs of improvement. So while Pope Francis is seeking to expand the Church’s presence in the world, catholicity seems to be diminishing due, in part, to a growing irrelevance of institutional religion.

There is an urgency today to reconnect cosmology and catholicity, no as abstract concepts, but as the reconciliation of modern science and religion. The Catholic Church, with its core incarnational foundation can play a major role in this renewal. “Science develops best,” Saint John Paul II wrote, “when its concepts and conclusions can be integrated into the wider human culture and its concerns for ultimate meaning and value.” Religion, too, develops best when its doctrines are not abstract and fixed in an ancient past but integrated into the wider stream of life. Albert Einstein once said that “science without religion is lame and religion without science is blind.” So too, John Paul II wrote: “Science can purify religion from error and superstition; religion can purify science from idolatry and false absolutes. Each can draw the other into a wider world, a world in which both can flourish.” Teilhard de Chardin saw that dialogue alone between the disciplines is insufficient; what we need is a new synthesis of science and religion, drawing insights from each discipline into a new unity. In a remarkable letter to the direction of the Vatican Observatory, John Paul II wrote:

 

The church does not propose that science should become religion or religion science. On the contrary, unity always presupposes the diversity and integrity of its elements. Each of these members should become not less itself but more itself in a dynamic interchange, for a unity in which one of the elements is reduced to the other is destructive, false in its promises of harmony, and ruinous of the integrity of its components. We are asked to become one. We are not asked to become each other…. Unity involves the drive of the human mind towards understanding and the desire of the human spirit for love. When human beings seek to understand the multiplicities that surround them, when they seek to make sense of experience, they do so by bringing many factors into a common vision. Understanding is achieved when many data are unified by a common structure. The one illuminates the many: it makes sense of the whole… We move towards unity as we move towards meaning in our lives. Unity is also the consequence of love. If love is genuine, it moves not towards the assimilation of the other but towards union with the other. Human community begins in desire when that union has not been achieved, and it is completed in joy when those who have been apart are now united.

 

The words of the late pope highlight the core of catholicity: consciousness of belonging to a whole and unity as a consequence of love. Yet, our world is divided, and the divisions are not abstract; they are real and deepening. They are the heart-wrenching divisions of religious wars, economic gaps, racial hatred, fears of terrorism – division upon division – to the extent that our only hope is another world, whether it is the otherworldliness of heaven or the cyber world of virtual reality. Nature reminds us, however, that in our cosmic roots we are already one. Can we learn from nature how to create a unified world? Can religion inspire an evolution toward unity? Can we reimagine Christian life in an evolving universe? The world is not a given but a gift to create. Catholicity invites us to wake up, open our eyes, and reach for the stars to create a new world together by becoming a new community of life.

 


Disclaimer: 여기에 실린 글은 copyright가 된 책, 기사를 ‘발췌, 전재’를 한 것입니다. 모두 한 개인이 manual typing을 한 것이고, 의도는 절대로 저작권 침해가 아닌, fair use의 정신을 100% 살린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적인 제한,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었고, 목적은 단 한 가지 입니다. 즉 목적을 가진 소수 group (church study group, bible group, book club) 에게 share가 되었습니다. password protected가 되었는데, 만일 이것이 실패를 하면 가능한 시간 내에 시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2019년 2월 하루 전에..

1월 31일이 되었다. 자그마치 (자그만치가 아니고 자그마치?) 지난 5년간의 Holy Family Church journal calendar를 쌓아두고 ‘심심하면’ 뒤돌아 본다. 어쩌다 이것으로 하루하루 짧은 기록을 남겨 둔 것이 이렇게 쌓였을까? 왜 나는 지나간 수십 년간의 세월을 이런 것 알지 못하고 살았을까? 나의 모든 ‘보람찬 세월’은 사실 지나간 십 년도 못 되는 기간에 보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Late bloomer까지는 못 되더라도 인생이 익는 보람을 갖게 된 것, 누구에게 감사를 드리랴… 성모님, 어머님, 그리고 천국에서 나를 지켜주시는 엄마.. 감사합니다.

조금 있으면 목요회 멤버 둘이 어둠을 헤치며 우리 집에 도착할 것이다. 연숙이 ‘신나게’ 간단한 식사를 준비해 주어서 나도 기분이 좋다. 지난 12월에 와야 할 것이었지만 ‘핏대 아저씨’ 이형,  마지막 순간에 약속을 틀어버렸다. 사실 기분이 좋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 모임을 해산하게 할까 하는 생각도 없지는 않지만 설 형제가 그 동안 크게 상태가 좋아지고 있어서 그대로 ‘굴러가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하다.

1월을 보내며 조금은 감회에 젖고 싶어서 이렇게 쓰고 있다. 1월을 뒤돌아보니 참 많은 일을 한 듯하다. 우선 제일 크고 중대한 일은 ‘지긋지긋’한 느낌을 주는 ‘마리에타 구역’에서 깨끗이 나온 일이다. 거의 한달 동안 고민을 하던 일이 그런대로 모두 큰 무리 없이 지나간 것, 사실 나는 꿈을 꾸는 듯한 ‘날라갈 듯한 느낌’이다. 사실은 작년 후반부를 잊고 싶을 정도로 괴로움 속에 살았다. 물론 보람도 있고, 재미 있는 것도 없지는 않았지만 ‘한 번’이면 족하다고 결론을 맺고 싶다.

2월이 되면 조금은 냉정하고 차분한 심정으로 한번 ‘계획’을 세우며 보람 있는 일들을 찾아서 연숙과 같이 풀어나가고 싶다. 비록 함박눈을 못 본 것이 아쉽지만 그래도 2월을 기대해 보고 싶다. 함박눈 내리는 동네 길을 따라 하늘에 있는 Tobey를 생각하며 연숙이와 함께 Starbucks 커피를 마시며 걷고 싶다.

snowday déjà vu

2014 Atlanta Snowjam on I-285 North

드디어 올 겨울 첫 white stuffs, snow 가 오늘 낮에 ‘잠깐’ 올 것이라고 어제 ‘경고성’ 예보가 계속 흘러 나오고 있었다. 이번 겨울 내내 은근히 어린아이처럼 이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실은 나 자신도 조금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머리가 나이에 비해서 그렇게 삭막하게  무감하게 굳은 것이 아님을 알기도 했다. 사실 이런 나의 심정을 연숙에게 비치기도 했는데. ‘첫눈 올 때 집 근처에 위치한 Starbucks Coffee 에 가서 coffee를 같이 마시자’ 고 몇 번 말하기도 했었다. 물론 이곳은 눈이  조금만 내려도 차를 타고 가는 것이 힘들기에 그럴 경우에는 걸어서 가자고 즐거운 상상의 나래도 한껏 피기도 했다. 그것이 드디어 실현이 되는 가, 가능성이 제로가 아님이 더 확실해지면 올 겨울 들어 첫 snowday dreaming을 하게 되었다. 사실 이 시기, 날자는 ‘괴로운 추억’이 얽힌 날이기도 하다. 2014년 1월 28일이 그 유명한 아틀란타 교통대란, snow jam이 있었던 날이어서 먼저 ‘악몽’이 떠오른다. Doraville 도라빌의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레지오 주회합 등을 마치고 집에 오려고 차가  I-285 로 들어서면서부터 퍼붓기 시작한 freezing rain 그리고 함박눈에 모두 일찍 귀가하려던 차들이 꼼짝 못하고 차 속에서 밤을 지새웠던, 그런 악몽이었다.  그때부터 우리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눈에 대한 피해망상증으로, 이맘때가 되면 신경을 곤두세우며 일기예보를 주시한다.  결국 오늘도 레지오 주회합이 있는 날이었지만 성당이 문을 닫게 되어서 ‘공짜’로 하루 푹 쉬게 되었다.

기다리던 올 겨울 첫 눈의 꿈은 사라지고..

하지만 이번의 ‘눈 예보’는 불발탄으로 끝나고 말았다.  아침에 잠깐 내린 비 뒤에 약간의 눈발이 흩날렸지만 곧바로 하늘은 개었다. 대신 무섭게 기온은 떨어지고 바람이 분다. 이 추위는 북극으로부터 내려 온 것으로 polar vortex라는 이름으로 북미주 전역이 강추위와 바람으로 꽁꽁 얼어붙는다. 이곳도 오늘 밤 10도(섭씨 영하 10도 정도) 대로 떨어진다고.. 집에 사는 사람들이야 난방으로 큰 문제는 없지만 homeless들과 밖에 사는 고양이들이 걱정이 된다.  그 동안 비교적 따뜻한 날씨로 한참 올라오던 뒷마당의 수선화들 위에 비닐 봉지를 덮어 두었는데 1~2월의 추위에 익숙한 이 지역의 수선화들, 이 겨울을 살아 남으리라 믿는다.

 

성모님, 미안합니다

성모 마리아, 나의 어머님이시여..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죄를 짓고 있습니다. 나도 이제는 이런 작은 거짓말을 쉽게 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쉬고 싶습니다. 나도 연약한 인간중의 인간이 아닙니까? 조금만 더 쉬고 싶고, 심지어는 ‘작은 거짓말의 행복’도 느끼고 싶습니다…

오늘 예정된 성당 추모연도와 양로원 방문을 나는 ‘무자비하게, 일방적으로’ 취소해 버리고 말았다. 우선 레지오 활동을 접은 것이 죄송스럽고 그렇게 반가워하는 양로원의  ‘천’ 자매님의 얼굴이 걸린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이런 slump오래 가지 않게 노력하겠습니다.

이런 ‘즐거운 게으름’은 아마도 지나간 6개월 동안에 나에게는 지나친 사치에 속했던 것이다. 꿈도 못 꾸어본 것들을 나는 즐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한마디로 나에게 이런 ‘못된 사치’는 당연한 것이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하지만, 그래도 이것은 틀린 것이라는 외침이 울리고 있다. 어쩔 수가 없다. 나에게 게으름이 주는 평화가 지금 필요한 것이다.

구역이란 말이 주는 괴로움은 이제 나로부터 완전히 떠났다는 사실.. 그것은 다른 말로 평화다. 이제는 후회를 안 하려 애를 쓴다. 지나간 6개월의 우리의 역사는 이제 확실하게 정립이 되었다. 더 잘할 수도 있었겠지만 최선을 다 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특히 나에게는 보람 있는 경험을 준 것, 그것이 결론이다. 이제는 잊고 싶다.

앞으로는 ‘사람과의 관계’를 더욱 조심하며 진정한 우리 남은 인생의 목적을 향해서 기도와 봉사로 일관되는 건강한 여생을 보내는데 노력을 하자!

다시 생각하는 레지오

레지오 마리애, 성모님의 군대, 군단.. 그냥 레지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이 ‘이상한’ 라틴어 레지오.. 는 과연 무엇인가? 아니 나에게 무엇인가? 너무나 가까이 있어서 그 동안 별로 깊게 생각을 안 했던 탓인가, 갑자기 혼란스러운 감정도 인다. 너무나 당연한, 아니 나의 몸과 같게 생각해서 그런가, 왜 이것을 다시 생각해 보는가? 아니 조금 떨어져서 이것을 제3자의 입장에서 보고 싶은 것이다. 조금 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는 것이 필요한 ‘때’가 된 것은 아닌가?

지나가고 있는 일주일은 거의 ‘탈출기’의 느낌으로 살았다. 조금씩 여명의 기운을 받으며 심지어 한동안 잊고 살았던 ‘깊은 평화’가 나에게 돌아옴도 느끼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갈대밭 속으로 나의 손을 잡고 이끄시는 우리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려고 했다. 결국은 잠깐의 고통의 시간을 이렇게 보내주시는구나 하는 안도의 숨을 쉬며 며칠을 즐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이제는 다른 도전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어제 ‘레지오 단장회의’란 곳에 가서 ‘절감’을 하게 되었다. 끝난 것이 아니구나… 진짜 ‘괴물’이 창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나 할까? 아~ 이것이 올해 내가 해결해야 할 진짜 도전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렇게 잘 나가던 나의 보금자리 ‘자비의 모후’ 가 완전히 ‘문제의 그룹’이 된 것은 이때 깨닫게 되었다. 그 동안 한마디로 너무나 방만한 태도로 살았던 것인가?  生老病死의 진화를 하고 있는 그룹이라고 생각하면 그래도 이해는 가지만 왜 내가 단장이 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곳이 이렇게 되었는지 나는 솔직히 아직도 당황하고 실망을 하고 있다.

J 자매, 제2의 괴물로 변하고 있고 그렇게 ‘공을 들였던’ 인물 L 자매, 이제는 불쌍한 인간의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이런 것들도 안정호 신부님 말씀대로 ‘정상’이란 말인가? 기대를 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나? 관심을 안 두면 되지만 그래도 나는 실망, 실망의 감정을 숨길 수가 없다. 어떻게 그렇게들 생각 없이 살아간단 말인가? 어쩌면 그렇게 ‘기본적 사랑’이 결여된 것일까?

한때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던 때는 이제 서서히 물러가고 있고 다시 털고 일어나서 힘을 내야 할 것을 새삼 느끼고 싶지만 아직도 나는 나는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기도와 기도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나는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저 ‘혼란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런 시간에서 나는 아직도 허우적대고 있다. 성모님이시여, 저를 어떻게 쓰시고 싶으십니까? 대답해주세요.

며칠 전 ‘도둑처럼’ 사온 cigar와 Canadian Mist가 이런 나의 고민을 조금은 위로해주고 있다. 너무 싼 cigar인지 전처럼 맛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득~ 해지는 느낌은 즐길 수 있다. 2개의 cigar라서 얼마 갈 수는 없겠지만 나는 현재 ‘탈출기’의 느낌으로 살기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며 다시 다음의 기회를 기다리면 된다.

보슬비 오는 거리, One Million hits

 

 

오늘 YouTube에서 뜻밖의 email message 받았다.  7년 전쯤에 내가 만들어 ‘올려놓은, upload’ music video 성재희씨가 1965년에 취입한 노래 ‘보슬비 오는 거리‘ 가 1 million hits (백만 번 보았다는 뜻)를 했다는 사실과 함께 ‘축하’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의아했는데, 꽤 오래 전의 일이라 그런 것이다. 한창 youtube 에서 지나간 추억의 노래들을 듣던 것이 유행이었던 시절에 나도 한번 무언가 남겨보자는 생각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요새는 웬만한 video들,  viral 하다고 불리는 것들 며칠 사이에 백만 번 hit는 아무것도 아닌 세상이 되었기에 7년 만에 백만 번이라고 하면 우습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솔직히 놀랍기만 한데 왜 그럴까? 백만이란 숫자에 무슨 magic 이라도 있나 아니면 그저 꽤 많은 중년, 노년의 대한민국 출신의 사람들이 당시를 추억하며 보았다는 사실이 의아한 것인지.. 솔직히 덤덤한 심정이다. 하지만 ‘추억의 마술’을 어쩔 수 없다는 사실 그것은 분명한 것이다.

이 ‘보슬비 오는 거리’를 내가 개인적으로 왜 그렇게 소중하게 느낄 정도로 좋아하는 지 생각을 해 보면 크게 특기할만한 것이 없다. 그저 그 당시, 1965년 말 서울 남영동에서 살던 때의 순진했던 기억들과 함께 중앙고 3학년으로 막바지 대학 입시공부에 열중하면 들었던 그 추억이 전부다. 그것이 왜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지며, 은은한 저음과 매력적인 자태로 보슬비의 추억을 달랬던 성재희씨의 모습이 반세기가 넘는 지금까지 생생하게 느껴지는지… 나도 모른다.

조심스런 여명의 느낌은

조심스러운 말, 방정맞은 말 미리하고 싶지 않지만 안 할 수가 없다. 희미한 아주 가느다란 ‘여명’의 느낌이 온다. 무슨 열병을 심하게 앓고 난 기분, 아니면 무언가 ‘무죄 판결’을 받은 기분.. 모든 것이 어제부터 나에게 서서히 밀려옴을 느낀다. 그 덕분에 매일 똑같은 ‘천근만근’의 몸이지만 6시 30분에 일어날 수도 있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항상 생각했는데.. 그런 모습을 오늘 새벽에 재현하게 된 것이다.

2018년의 ‘쾌거, 혁명’ 처럼 느껴지는 나의 out of box 경험들, 이제는 조금 안심하고 뒤 돌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성모님의 손에 이끌려 나의 키 두 배를 넘는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 갈대숲길을 헤치며 나아가는 나의 모습.. 5년 전 시궁창 또랑길을 따라 더러워진 어머니의 긴 치마를 보며 손에 잡혀 그곳을 빠져 나오고, 결국은 물기가 없는 뚝방길을 따라 먼 곳의 3개 산봉우리를 향해 걷던 그런 모습들.. 지금 그리워진다. 지금은 뚝방길이 앞이 안 보이는 갈대 숲이었다. 그것의 끝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 느낌, 어찌 감회에 젖지 않을 수가 있으랴?

2018년의 후반기를 무섭게 차지하고 나의 혼신의 힘을 요구했던 ‘힘겨운 사업’들… 그 중에 하나인 구역사업은 어제로 끝맺음을 한 것으로 나는 간주하고 한숨을 놓았으며 ‘감사하는 글’을 A 자매로부터 받고 털썩 주저앉아 울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아직도 나를 좋아한다는’ H 자매의 글도 나를 울리게 했다. 그래.. 사랑의 힘을 아는 사람들은 그래도 있구나 하는 안도감도 있었다.

우리 가정, 특히 부부의 건강 그것도 정신적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기에 큰 후회가 없다. 구역은 내가 아니더라도 굴러 가기 마련이 아닌가? 이제는 명예롭게, 부드럽게, 좋은 얼굴로 조금씩 조금씩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충격적’인 방법으로 다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래도 후회를 갖지 않기로 하자. 성모님은 그래도 나를 뒤에서 보아 주신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하자.

떼이야르 – ‘人間 이란 現像’

Pierre Teihard de Chardin

 

人間이란 現像 (1955), The Phenomenon of Man

떼이야르 드 샤르댕 (Pierre Teihard de Chardin, 1881~1955) 著

 

역사를 움직인 100권의 철학책‘ (신동아 1984년 1월 별책) 중에서

김태관 金泰寬  (예수회 신부, 서강대 문과대교수, 서양철학, 1919~1990) , 小論考

 

 

1.

북경원인의 발견자의 한 사람이며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의 주창자인 ‘떼이야르’ 신부의 생애는 고생물, 지질학자로서 문자 그대로 지구의 표면을 종횡무진 왕래하며 지층을 파헤치면서 우주와 신의 통합적 비전을 찾기에 바쳐졌다.

‘삐에르 떼이야르’는 1881년 5월 1일 프랑스 중부 오베르뉴 지방 끌레르몽페랑 근교 사르스나 에서 한 귀족가문의 11형제 중 네 번째로 태어났다. 농장경영의 여가에 박물학과 고문서 연구를 하는 부친으로부터 어린 시절 자연관찰과 곤충 식물 암석 등 채집의 기쁨을 배웠다. ‘물질, 더 정확히 물질의 핵심에 반짝이는 어떤 것에 마음이 끌린 것이 6, 7세 적이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16세에 리용 근처 몽그레 예수회계 고등중학교를 졸업, 18세에 예수회에 입회, 그 후 사제가 되는 모든 교육코스를 밟으며, 지질학과 고생물학에도 전문적 연구를 했다. 특히 카이로 예수회 고등학교에서 자연과학 교사로서 체류할 때 수억 년의 지층이 노출된 이집트의 광막한 대지에서 그의 미래는 더욱 뚜렷하게 되었다.

1911년 빠리박물관에서 고생물학자인 ‘마르슬렝 불’ (Marcellin Boule, 네안데르탈 인 연구로 유명)의 지도 아래 인류 고생물학의 전문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장기간에 걸친 공동연구, 그리고 깊은 우정으로 발전한 이 만남은 ‘떼이야르’의 일생을 결정하였다.

1914년 세계대전의 발발로 위생병으로 격전지에서 참전했다. 포성과 죽음과의 부단한 대결 틈틈에 비참한 참호 속에서의 그의 명상은 인간세계를 새로운 운명에 이끄는 우주적 규모의 독창적 세계관을 싹트게 하고 윤곽을 잡아 주었다.

1922년 소르본느 에서 자연학의 박사학위를 받고 그 논문으로 프랑스의 제1급 고생물학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1923년 황하유역 조사단원으로 중국으로 파견된다. 이래 20수년 동안 중국은 그의 제2의 고향이 된다. 쉴새 없는 지질조사와 연구와 보고서 작성 학회 탐험여행 틈틈이 ‘신 神 의 영역'(Le Milieu divin)이란 저서를 집필, 그리스도인의 태도와 과학자의 태도를 양립시킬 수 있는 종합적 세계관과 특히 진화론과 인간과 자연 사이에 새로운 연결을 시도했다.

1927~1928년 프랑스 체류 후 이디오피아 소말리랜드 지질조사, 주구점의 북경원인 발굴에서 지질학과 고생물학 부문을 지휘, 연구보고 발표 등의 일로 빠리와 천진 사시를 정기적으로 왕복, 1930년 뉴욕박물관의 중앙아시아 탐험, 31~32년 시트로엥 아시아대륙 자동차 횡단탐험에 참가, 1935년 예일-케임브리지 中北 인도탐험,  1937~38년 하버드 – 카네기 버마탐험참가, 39년까지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인류기원에 관한 심포지움에서 북경원인연구발표, 미국과 프랑스에 체류, 중국으로 귀환, 중일전쟁으로 북경에 6년 동안 유폐됨, 1940년 북경지질생물학연구소를 만들었다.

여기서 그는 그의 필생의 테마인 지구상의 진화와 인간미래에 관한 사색과 탐구의 총결산인 주저 ‘인간이란 現像’을 집필하며 추고 推稿추고 에 전념한다. 1946년 프랑스에 귀국, 국립과학연구소 연구주임 꼴레쥬 드 프랑스 교수로 초빙받았으나 여생을 뉴욕 웬너그렌 재단 인류학 종신연구원으로 보낸다.

1951년과 1953년 2차에 걸쳐 동 재단후원으로 남아프리카 조사연구여행, 선사시대의 고고학과 고생물학의 연구를 자극하고 공동연구계획을 조정했다. 1955년 4월 10일 뉴욕서 부활축일에 심장마비로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끝난다.

그 당시 소수의 전문가 서클과 친구들 외에서 그 이름도 사상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진화와 인류미래에 관한 그의 과학적 사상으로 해서 교회당국과 그의 소속인 예수회의 반대로 그는 교단과 조국에서 멀리 되었고, 순수전공 외의 저술은 출판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유고는 사후 즉시 각계의 세계적 저명인사들로 구성된 간행위원회가 조직되어 그 해 10월 제1권 ‘인간이란 현상’ 이 출간되자, 자연과학 철학 신학 등 광범한 분야에 격렬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2.

‘인간이란 현상’에는 우주의 생성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진화의 주요한 과정이 일관된 명쾌한 전망 속에 묘사되어 있다. ‘떼이야르’는 과학적 성과에서 출발하여 그리스도교인든 아니든 공정한 관찰자이면 누구든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관과 인간관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는 과거의 진화의 발걸음으로 인류의 미래를 예측하고 그 발전을 투시하며 이러한 시야 속에서 자리잡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위치를 확인한다.

이 책은 ‘현상으로서’ 만의 인간을 취급하며 세계의 탐구해명이 아니고 그것을 위한 서론으로서 보아주기를 요구한다. 또 동시에 현상의 모든 것에까지 펼쳐진다.

“동물의 완성, 사고력을 가진 존재의 우위는 그 시선의 통찰력과 종합력으로 측정된다”. ‘본다’는 것은 생의 본질이다. 이것이 이 저서의 개요이고 결론이며 또 그의 사상의 핵심이다. ‘떼이야르’는 철두철미 과학자의 자격으로 과학의 성과로써 그 사상을 전개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우주관의 특징은 지구의 과거의 걸음걸이를 배경으로 하고 그 진화의 속도를 미래에고 연장 추정함으로써 인류의 미래상을 추론하는 데에 있다. 우주는 크나큰 극히 완만한 소용돌이와 같이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정향적 운동 중에 있다. 우주 와동 渦動 은 구심적 흐름이며 이 움직임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므로 우리는 포착하기가 힘든다. 그래서 ‘본다’는 것이 요구된다.

‘떼이야르’는 우주의 소재인 물질의 진화 속에 이미 정신적 에너지를 본다. 본질에서부터 정신에 이르기까지의 우주진화의 유일한 완전한 기준은 인간이다. 이 진화는 단순한 것에서 복잡화 – 의식의 무한대에의 증가로 일정방향으로 전진한다.

‘떼이야르’ 신부는 인간의 우주적 배경으로서 소위 무한대의 세계(상대성이론이 적용되는 현상세계)와 무한소의 세계(하이젠베르그의 부적확성 이론이 지배하는 현상세계)에 다시 복잡화 – 의식이란 제3의 무한을 추가한다. 복잡성- 의식화는 우주의 근본운동이다.

저자는 이 세계를 입자로 보고 우주에는 이 입자를 복잡화에로 좇는 보편적 힘이 일종의 ‘부하 負荷’로서 에너지원을 이룬다고 한다. 부하된 입자가 한 단계에 복잡성에 도달하면 종래의 차원과는 다른 출력을 가진 복잡성에 진화한다. 물질에서 생명의 발생 생명 속의 사고의 발생이 이에 해당한다.

생명의 출현에서 미생물과 분자, 세포 등이 서로 독립해서 출현하지만 사고력의 발생에로 진화의 흐름은 향하고 있다. 정신권의 전개에서 인류는 선사인류의 여러 서로 무관한 화석인류들의 분지 分枝  가 어떤 축을 중심으로 꽃봉오리모양 사회화를 이루며 진화한다. 원시사회에서는 방산 放散 팽창하던 것이 현대에 이르러 그것은 수축, 압축되어가는 단계에 있다. 미래의 세계종말에서는 인격사회의 인류의 일체화가 오메가 점, 수렴(convergence)의 극점인 그리스도 안에 만물이 일치하는 데에 이루어진다.

진화에 있는 우주는 마치 그물같이 위로 갈수록 그물의 눈은 압축되고 밀접 되어 주름이 더 잡히며, 끝으로 일 점에 집중되어 세계는 수렴되고 인류는 혼합이 아닌 합치를 이룩한다. 이 일치는 현대정보수단의 진보로 말미암아 인류전체가 하나의 의식으로 서서히 형성되어 가는 데서 예견된다.

‘떼이야르’는 이미 현대 컴퓨터 정보시대를 예견하고 사이버네틱스를 인간의 집단적 사고능력으로서 신 뇌수의 형성으로 보았다. 사회화의 상한적 종합작용으로 일대 다수의 인간의 합류점에 중복 일치 한다는 대 완결을 상정한다.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우주의 생성 -> 생명권의 전개 -> 유인류의 불리 -> 인간의 출현, 즉 사고력의 제일보 -> 정신권의 성립, 즉 팽창의 단계에서 문명과 개체화 -> 정신권의 서욱, 즉 압축의 단계에서 인격화 적 일체화. 세계종말에서 인류는 인격공동체의 건설을 신인 神人 인 그리스도의 포괄적 신비체 안에서 성취를 보게 된다.

이것이 ‘떼이야르’ 신부가 자연과학과 사회학 심리학 등의 전 영역과 인간학의 전 범위를 종합함으로써 과학과 신앙, 우주와 신의 화해를 계기로 웅대한 우주관을 소묘한 것이다. 그의 관심은 그리스도교의 축원이기도 한 “때가 이르면 신은 그 계획을 시행하며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재결합(reunion)하리라” (바오로 에페소서 1,10)는 것을 인간을 현상으로서 과학적으로 다루면서 지시하려고 했다.

 

3.

 ‘떼이야르’의 명성과 평가는 사후 30년 가까이 되어가는 데도 더욱 고조되어 간다. 그 저작은 각국어로 번역되고 그 연구는 개신교나 공산권 내에서도 활발하다. ‘다윈’이나 ‘아이슈타인’이 일으킨 돌풍보다 더 큰 충격과 격론을 불러일으켰다. 아직도 그 연구와 촉매작용은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1981년은 그의 탄생 1백 주년이어서 세계 각지의 떼이야르 협회는 기념행사를 가졌다. 특히 유네스코는 빠리에서 그 해 9월 16~18일 3일 동안 기념 심포지엄을 성대하게 치렀다. 1983년 뉴욕에서는 UN 38차 전체회의 벽두에 학술적 의견교환의 테마로 ‘떼이야르 드 샤르댕 의 저작과 인물’이 채택되었으며, 이 심포지엄은 평화촉진을 위한 ‘교육적 과정’을 진작하는 것이 의도였다.

찬반의 평가가 어떻든 ‘떼이야르’ 신부가 그 자신 안에서 인류의 기원을 캐내고 진화의 비밀에 육박하는 탐험, 우주 속에서 인류의 운명을 묻고 세계진화에서 신의 존재를 찾고 하나의 통합적 비전을 전달하려는 성자다운 기백과 준엄한 학자의 탐구의 생애는 그를 세기적 예언자적 사상가로 부각시키는데 별 이론이 없을 것이다.

 

 

주요저서

La place de l’homme dans la nature ‘자연 속의 인간의 위치’, 1965.

Science et Christ ‘과학과 그리스도’, 1965.

Comment je crois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1969.

Les directions de l’avenir ‘미래의 지향’, 1973.

 

시작된 2019년은..

 

¶  송년, 새해를 지내며:   성탄, 송년, 새해.. 등등을 이렇게 힘들게 맞이 한 적이 있던가 할 정도로 이상한 나날들을 보냈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도 가족들이 모인 기회가 딴 해에 비해서 많아서 약간의 위로는 있다.  그 중에서도 새로니가 Ozzie와 함께 자기가 자란 집에서 이틀 밤을 잤던 것은 우리에게는 추억을 자극하는 시간이 되었다.

New Year’s Eve, 이번에도 우리 3명이 굳세게 뉴욕의 Time Square TV를 지켜보며 정각에 맞추어 champagne 을 터뜨리며 Happy New Year!를 외쳤다. 예년에 비해서 그렇게 흥분되지는 않았어도 ‘할 것을 했다’라는 자위를 하기도 했다.  차가운 비가 내리는 뉴욕의 그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무엇이 그렇게들 즐거울까. 하는 의아함을 떨칠 수가 없다. 한 해가 가고, 새해가 된 것이 그렇게 좋을까? 그렇게 해서 2019년을 맞았지만.. 글쎄.. 나는 아직도 어두운 2018년 말 속에서 헤매는 느낌뿐이었다.

 

¶  2019 라는 숫자로 본 올해는 별로 큰 매력이 없어 보인다. 2019라는 숫자부터 그렇다. 어쩌면 이렇게 마구잡이 같은 숫자일까? 거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는 볼품없는 숫자로 일년을 보내라고.. 하지만 그 다음을 보며 견뎌보자… 2020! 와! 얼마나 멋진 숫자인가? Twenty Twenty 20/20 느낌부터 앞이 선명하게 보이는지 않는가?

그래서 그런가, 2018에서 2019로 넘어오는 성탄, 송년휴일이 걸친 몇 주간은 너무도 깜깜한 느낌뿐이었다. 지난 12월 초 ‘대림절’의 시작 무렵에 나는 이런 ‘영혼의 어두운 밤’을 예상해본 적이 전혀 없었는데, 밀쳐낼 겨를도 없이 어이없이 악마의 교란에 쓰러진 듯하여, 이것이야 말로 sudden death (of peace) 라는 가슴이 철렁한 단어를 연상시키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사람의 한 달 정도의 짧은 앞날도 사실 그렇게 확실한 것이 없다는 쓰라린 교훈을 실감하는 계기도 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어떻게 그렇게 어이없이 나는 ‘악의 유혹’에 굴복을 한 것 것인가? 무언가 한꺼번에,  오랜 세월 동안 쌓아 놓았던 ‘승리의 금자탑’이 몇 초 사이에 ‘와르르’ 무너져 내린 것을 본 느낌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몸과 마음이 내려갈 대로 내려감을 경험한 것이다.

이제는 거의 어둠의 터널에서 빠져 나온 듯하고 다시 세상의 땅에 발을 디뎌도 된 듯하다. 문제의 핵심이 무엇이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무엇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희미한 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이것만도 큰 발전이라고 생각하자.

 

¶ 목요회 S형제: 연숙으로부터 너무도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듣고 한 동안 말을 잊었다. 작년 대부분 너무도 우울한 세월로 고생을 하던 목요회 S형제가 얼마 전부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 한때는 위기의식까지 느끼게 했고 비상책을 강구할 정도였다. 기도도 많이 필요했지만 주위에서 걱정해주는 가족 친지들의 고민과 고통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이런 ‘기적’과 같은 일이 현재 시작되고 있는 것일까? 2017년 가을부터 꾸준히 만나며 도움을 주려고 노력은 했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사실 거의 희망을 놓기 시작하고 있었다. 앞으로 또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갈 가능성이 제로가 아니더라도 상관이 없다. 이렇게 다른 가능성이 이번에 보이고 있는 것으로 희망을 갖게 되었으니까..

 

¶ 나와 레지오: 나의 blog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한 Page를 장식하는 것, 너무나 당연하고 중요한 제목인데 최근에 들어서 이것 역시 나의 중대한 결정을 요구하는 것이 되었다.  본당 구역문제와 레지오 문제가 겹치면 아무리 힘이 센 장사라도 견디기 힘든 위험한 ‘폭약’과 같은 것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결국은 모두가 ‘사람문제’로 귀착이 되는데 나에게는 그것을 뛰어넘어 나 자신의 ‘실존문제’로 비약을 하는 듯 하다. 모두 나를 지켜주는 ‘천상의 발판’인데 그것이 깊은 바닥으로부터 흔들리는 느낌인 것이다.  ‘성의 없고 능력 없고, 볼품 없는 인간들’에 대해서 이렇게 실망을 한 적이 있을까?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현재 무섭게 ‘본당’의 손길에서 도망치고 싶은 유혹을 떨치지 못하며 나날을 보내고 있다. 유일한 탈출구는 역시 ‘어머님’ 의 손길 밖에 없다.

 

¶ 마지막 소식, 사직서:   이틀 전부터 갑자기 진행된 나의 중대한 새해 행로에 대한 결정의 결과가 이제 조금씩 선을 보이게 되었다. 지난해 7월부터 시작한 구역장 직, 완전 사임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런 결정을 해야만 했던 각종 고민들이 그 동안 나를 괴롭혔던 것 중에 하나지만, 그래도 고민과 고통을 이 정도는 견뎌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구역에 보내는 ‘마지막 소식’과 본당에 보내는 ‘사직서’가 작성되어서 제출할 날을 기다리고 있고,  짧지 않은 기간을 ‘기도하며 심사숙고’한 결과이기에 큰 후회는 안 할 것이라 희망하고 있다. 이제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상태인 것이다.

 

한 달여의 고뇌..

이제 조금씩 밝음이 느껴지는 가.. 한 달도 더 지나갔는가.. 예기치 않게 뼛속까지 스며드는 고뇌의 늪에 빠진 듯한 성탄휴일을 맞이하였던 것. 일생을 통해서 이렇게 ‘깊고 깊게’ 생각을 하며 살았던 시절이 별로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이제 이 나이에 이런 고통의 경험을 한 것, 나는 이제 크게 후회하지 않고, 나아가서 잘 되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고뇌 중의 고뇌는 사실 간단한 것이었다. 인생의 반려자 연숙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이번의 고통을 통해서 연숙과 나와의 깊은 심리적인 관계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결론은 간단하다. 죽을 때까지 이 관계가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으로부터 모든 해결책을 찾기로 한 것이다. 다음의 주안점은 ‘내가 변해야 관계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지고 그녀를 이기게 하는’ 것, 내가 바뀌거나 바꾸어야 그녀도 바뀐다는 것, 그것이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유혹은 강하다. 연숙이 이번에 구역문제에서 조금만 나를 도와 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을 넘어서 ‘한’까지 남게 하는 것, 그것이 악마의 유혹임을 나의 머리에 각인을 하거나 수긍할 때 모든 문제는 해결되고 성모님의 선물은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너무나 쪼잔한 것에 얽매인 것이 문제다. 조금 더 대범하게 먼 곳에서 이 ‘사태’를 보기만 했었어도 이렇게까지 나 자신을 괴롭게 하지 않았을 듯하다. 우리 부부의 관계가, 우리 가정이 모든 것의 우선임을 어찌 성모님이 모르실까? 우리는 ‘멋진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배울 것은 배우면 된다. 

이제부터는 ‘멋진 퇴진’의 방법을 찾으면 된다. 이것은 거의 정치적인 영역이다. 그 동안 조금 배웠던 사회적, 정치적 방법의 각도로 풀어나가기로 했다. 목적이 무엇인가? 구역을 ‘완전히’ 심리적으로 우리는 떠나면 좋을 것이다. 생각보다 심한 상처를 받은 연숙의 심정을 생각해 주어야 한다. 우선 구역’인간’들을 떠나기로 했다. 그 다음은 무엇인가? 순교자성당으로부터 조금 더 멀어지기로 했다. 구역장을 사임하면 그것이 조금씩 가능해질 것이다. 구역장 전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나는 그 정도로 구역의 경험이 복잡한 것이다. 물론 제일 중요한 것은 레지오에 대한 나의 최종 결론이지만 이것은 우선 구역에서 물러나면 조금 더 시간을 버니까 …

발등의 과제는 이것이다. (1) 신부님, 총구역장에게 제출하는 ‘사직서’, (2) 구역에 보내는 ‘사임의사’ 마지막 구역소식 email (3) 마지막으로 봉사하는 일요일 점심봉사. (4) 마지막으로 봉사하는 전례봉사… 이것이 한달 동안에 내가 해야 할 일들이다.

이런 일들이 다 끝나면 우리 부부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목표를 찾아야 한다. 이대로 살기는 싫기 때문이다. 연숙도 주보와 교리반의 무거운 사슬에서 벗어나면 무언가 찾기를 바라고 있다. 내가 도와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것의 한계를 내가 어찌 모르랴.. 그저 마음 건강, 몸 건강하게 살면 되지 않을까? 성모님이 항상 우리를 이끄신다고 믿고 살면 된다.

성모님이시여..

어머니, 성모 마리아여, 저를 놓치지 말아주세요.. 부탁합니다. 

가볍지만 무서운 위기의식을 느끼며 연말 연시를 맞이하고 있다. 이런 경험은 아마도 근래에 들어서 처음 하는 것이라 신기롭기까지 한 것이다. 방심하면 나는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변할 수 도 있겠다는 걱정까지 들 정도다.

내가 ‘은총의 세월’을 지내고 있는 세월을 무의식 중에도 ‘셈하고, 즐긴다. 2010년 가을부터라고 생각하고 8년이 완전히 지나고 있는 장구한 세월이다. 한마디로 은총의 세월이 아닐 수가 없다. 암만 생각해도 내가 그렇게 안팎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신선하고 기적과도 같아서 어떻게 의미를 부여할 지를 모른다. 이런 은총의 시기가 무한정 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은근히 내가 죽을 때까지 가기를 바라고 살았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커다란 나의 바램이었는가? 아니면 ‘악마’의 교란작전인가..

거대한 변화, 그것도 바람직한 쪽이 아닌 그런 쪽으로 가려는 듯한 기분으로 나는 전전긍긍하며 요새를 보내고 있다. 정해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 그것이 그것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구역문제, 레지오 문제, 나아가서 나의 성당 공동체 문제… 이것들은 너무도 나에게는 이제까지 ‘두 번 생각 안 하는’ 그런 것들인데 이제는 잘못하면 모두 없어질지도 모르는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내일 레지오 주회가 있어서 모처럼 묵주기도 20단을 바쳤다. 지난 온통 한 주일 동안 이것도 잊고 살았다. 그것도 나를 두렵게 한다. 어떻게 이것까지 잊고 살았는가?

Tobey가 없는 새해는..

새해를 맞이하여 가뜩이나 기분이 쳐진 나를 더 우울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것, 그것은 바로 작년 6월에 하늘로 떠난 14살짜리 ‘나의 벗’ Tobey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최근 몇 년간 연말 연시 즈음이면 가족들, 그 중에서도 새로니가 데려오는 6살짜리 개 Ozzie와 같이 동네를 걷고 각종 ‘사고치고 재롱부리는 것’을 즐기곤 했는데 올해는 오직 Ozzie만이 우리와 같이 걷고, 놀곤 했다.

 

작년 정월에는 이렇게 둘이 잘 놀았다, 오른쪽이 Tobey

그 녀석 Tobey가 내 손에서 마지막 숨을 쉬며 떠난 지 반년이 지나가고 있어서 이제는 그 섬뜩한 공허감에 조금은 익숙해졌지만 나의 깊은 속 마음은 그것이 아니다. 특히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올 때가 너무나 조용한 침묵의 소리를 느낄 때가 제일 괴로운 순간이고 아직도 변함없이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세월이 약이라지만 그 세월이 얼마나 지나야 하는가?

긴 세월 동안 ‘깡패 두목’ 역할을 했던 Tobey에게 눌려 살았던 거의 같은 나이의 암 고양이 Izzie가 제 세상을 만난 듯 집안 주인 행세를 하게 되었고 그렇게 쌀쌀맞던 그 녀석이 요새는 우리에게 서서히 다가오더니 급기야는 내가 낮잠을 잘 때면 배위로 뛰어 올라와 같이 자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녀석이 예전의 Tobey처럼 우리에게 정을 붙이고 있으니.. 이 녀석도 수명이 아주 길게 남지 않았는데 또 보내야 한다면…  현재로서는 생각하기도 싫다.

 

Tobey 자리를 대신 해서 나를 즐겁게 하는 암 고양이 Izzie

 

의외로 질긴 동물에 대한 정, 우리도 놀라고 있다. 이별의 괴로움은 사실 안 겪어 본 사람은 잘 모를 것이다. 사람을 떠나 보낸 것과 또 다른 독특한 종류의 고통, 이런 느낌을 나누면서 우리 둘은 ‘앞으로 가능한 한’  pet animal에 정을 주는 기회를 피하자.. 그러니까 adopt 하지 말자..라는 묵계까지 하게 되었다…. Tobey야.. 보고 싶구나!

나에게 2018년은..

서기 2018 이천십팔 년이 서서히 저물고 있다. 나의 나이 70세의 거의 전부도 저물어 간다. 얼마 안 있으면 71세가 된다. 그렇게 70이란 숫자의 나이를 들먹이던 것도 이제는 큰 의미가 없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런 2018의 숫자로 가끔 생각했던 것은 10년 전, 20년 전.. 등등으로 나의 옛 시절의 추억들이다.

제일 멋진 숫자가 50이다. 그러니까 50년, 50년 전, 더 멋지게 ‘반세기 전’..  이제는 완전히 나는 반세기인을 20년이나 덤으로 산 것..  그때가 50년 전, 1968년이었다. 이 해는 나의 뇌리에서 가장 많은 추억을 만들었던 때, 나의 blog 에서도 가장 융숭한 대접을 받았던 해로 남는다. 나이 20 이었으니 얼마나 즐거웠던 때였을까?

40년 전, 1978년은 어떠한가?  나이 30,  바로 지나간 20대에 필요이상으로 왕성하던 남성 호르몬도 조용해지고, 본격적으로 인생을 살 채비를 갖추던 시절.. 하지만 당시에 나에게 ‘북극성’은 없었다. 코 앞에 보이는 골목 길만 따라  남들이 하는 대로 걷기만 했다.

이렇게 나이 40, 50, 60을 따라가다가 70에 도달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세월이 나이에 따라 더 빨리 흐르는 듯 느껴지는 것을 제외하고는 주위의 변화는 없는 듯했다.  물론 60, 70의 전통적 상징성은 무시 못하겠지만 그것조차 빠르게 변하고 있다.

 

2018년을 뒤돌아 보니 다음과 같은 일(나의 10대 뉴스)들이 생각난다.

  1. garage door spring accident
  2. 칠순 생일 맞이
  3. Hyundai Elantra gone
  4. Roswell Nursing Home
  5. Tobey to heaven
  6. furnace, a/c replaced
  7. 구역장 피선, 본격적 본당 활동 시작, 연수회, 본당의 날
  8. 목요회 모임 1년 이후
  9. 레지오 단장 임기시작
  10. Total burnout begins..  totally ruined holidays

 

이런 저런 나의 시대 관을 배경으로, 2018년은 나에게 무엇이며 어떤 때였는가.. 사소한 것부터 지각변동적인 큰 사건들도 있었고, 신변에 아주 위험한 때도 있었다.

  1. 작년 1월 6일, garage door의 ‘위험한’ spring을 교체하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지면서 그 육중한 문에 깔렸던 사고.  그 당시에 집에 아무도 없어서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상황이어서 최악의 경우 나는 그 문에 깔려 질식사할 수도 있었으나 큰 상처 없이 빠져 나왔다. 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상체근육의 도움에 의한 것이었다.
  2. 나이 칠십세! 우아… 이거 말이 되나.. 내가 70살이라니..
  3. 나의 ‘통근전용 승용차’ 로 정이 많이 들었던 이 고물차가 드디어 donation형식으로 나를 떠났다.
  4. 집과 비교적 가까운 이 ‘양로원’에서 치매 등으로 고생하는 ‘동포’ 형제 자매들을 돌보게 되었다.
  5. 나의 ‘분신’ Tobey가 비교적 큰 고통 없이 세상을 떠났다. Tobey야, 나중에 다시 보는 거다!
  6. 여름만 되면 조마조마 하던 이 ‘고물’이 드디어 수명을 다하고 최신형 model로 교체되어서 이제부터는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게 되었다.
  7. 나이 70에 ‘마지막 임무’라 생각하며, 그 동안 진 빚을 갚은 자세로 겸허하게 수락한 이 ‘장’자리, 나에게는 생소한 job이지만 열심히 저돌적으로 혼신의 힘을 다 했지만 나의 tactic 은 순진한 것이었다. Marathoner의 자세를 취해야 했지만 바보같이 sprinter 흉내를 낸 탓에 결국은 total burnout의 고배를 마시게 되었다. 그래도 빚을 조금은 갚은 시원한 기분이다.
  8. 매달 마지막 목요일 밤에 모이는 이 ‘이상한’ 그룹, 나름대로 사명감을 가지고 노력을 했지만 성과는 의문 부호일 뿐이다. 하지만 최근에 조금 좋은 결과를 목격하며 ‘어머님’의 신비한 손길을 느끼게 되었다.
  9. 비록 레지오 ‘분대장’일 지라도 ‘장’은 ‘장’이다. 문제는 분대의 규모가 너무나 약하다는 것, 심지어는 분대의 운명이 불분명하다는 것, 나는 이런 것을 극복할 경험과 능력이 아직은 부족하다. 게다가 이 직책을 맡으며 꼭 하고 싶었던 과제 (우리를 괴롭혔던 두 명의 미친 년들의 처벌문제)는 현재 허공에 떠있는 상태다. 아마도 이 문제는 priority가 더 낮아질 듯하다.
  10. 대림절이 시작되면서 나는 결국 모든 문제들이 일시로 뭉치면서 이런 total burnout의 상태로 치닫게 되었고 결과는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어두운 성탄, 연말’을 보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