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ANGELII GAUDIUM

복음의 기쁨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에 관한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에 관하여

주교와 신부, 부제,

봉헌 생활자와 평신도에게 보내는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교황 권고

 

 

1.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기쁨이 끊임없이 새로 생겨납니다. 이 권고를 통하여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기쁨으로 두드러진 새로운 복음화 단계로 들어서도록 격려하면서, 앞으로 여러 해 동안 교회가 걸어갈 새 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I.    늘 새로운 기쁨, 함께 나누는 기쁨

 

2.     오늘날 세상의 가장 큰 위험은 온갖 극심한 소비주의와 더불어 개인주의적 불행입니다. 이는 안이하고 탐욕스러운 마음과 피상적인 쾌락에 대한 집착과 고립된 정신에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내적 생활이 자기 자신의 이해와 관심에만 갇혀 있을 때,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어 가난한 이들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고 그분 사랑의 고요한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선행을 하고자 하는 열정도 식어 버립니다. 이는 신앙인들에게도 매우 현실적인 위험입니다. 많은 이가 이러한 위험에 빠져 삶을 잃어버리고 불만과 분노에 가득 찬 사람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이는 품위 있고 충만한 사람을 위한 선택이 아니고,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도 아니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성령 안에서 사는 삶도 아닙니다.

 

3.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있든 바로 지금 이 순간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그분과 만나려는 마음, 날마다 끊임없이 그분을 찾으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도록 권고합니다. 그 누구도 이러한 초대가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는 기쁨에서 배제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예수님께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우리는 그분께서 언제나 그곳에,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이 바로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때입니다. “주님, 제가 잘못 생각해 왔습니다. 저는 수없이 주님의 사랑에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서 주님과 계약을 새롭게 맺고자 합니다.  저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 저를 다시 구원하여 주소서. 구원하시는 주님의 품 안에 다시 한 번 저를 받아 주소서.” 우리가 길을 잃을 때마다 주님께 돌아갈 수 있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거듭 이렇게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데에 결코 지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데에 지쳐 버립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이들을 “일흔일곱 번” (마태 18,22) 용서하라고 말씀하시고 몸소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일흔일곱 번 용서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매번 우리를 당신 어깨에 짊어지십니다. 이 무한하고 확고한 사랑으로 우리가 받은 존엄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언제나 우리의 기쁨을 되찾아 주시는 온유함으로, 우리가 고개를 들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도망가지 맙시다. 무든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맙시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우리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끕니다!

 

4.     구약 성경은 구원의 기쁨이 메시아 시대에 넘쳐 날 것이라고 예견하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고대하던 메시아께 기쁨에 가득 차 인사 드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이사 9,2). 그리고 시온 주민들에게 노래를 부르며 그분을 맞이하라고 이렇게 격려합니다. “소리 높여 환호하여라”(이사 12,6). 이미 멀리서 그분을 알아본 이들에게 예언자는 다른 이들에게도 그 소식을 전하라고 말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이사 40,9). 모든 피조물이 이 구원의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이사 49,13).

주님의 날을 고대하던 즈카르야는 백성에게, “겸손하시어 나귀를 타고” 오시는 임금님을 환호하며 맞으라고 초대합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즈카 9,0). 그런데 가장 강렬한 초대는 스바니야 예언자의 초대일 것 같습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구원의 기쁨이 넘치는 잔치 한가운데에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신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다시 읽으니 제 마음이 벅차 오릅니다.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스바 3,17).

이는 우리가 소소한 일상 안에서 날마다 느끼는 기쁨이며, 우리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가득한 다음과 같은 초대에 응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얘야, 네가 가진 모든 것으로 자신을 잘 보살피고, 주님께 합당한 제물을 드려라….. 그날의 행복을 마다하지 마라”(집회 14, 11. 14). 이 말씀 속에서 얼마나 온유한 아버지의 사랑이 배어 있습니까!

 

5.     그리스도의 십자가 영광으로 빛나는 복음은 끊임없이 우리를 기쁨으로 초대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드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기뻐하여라.” (루카 1,28)하고 천사는 마리아에게 인사했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자 요한은 어머니의 태중에서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루카 1,41참조).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뜁니다”(루카 1,47).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자, 요한은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셨습니다”(루카 10,21).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기쁨의 원천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넘쳐흐르는 예수 성심의 샘에서 솟아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그리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뵈었을 때, 그들은 “기뻐하였습니다”(요한 20,20). 사도행전은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었다.”고 전합니다(사도 2,46 참조).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큰 기쁨이 넘쳤고”(사도 8,8),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들은 “기쁨으로 가득 차'(사도 13,52) 있었습니다. 내시는 세례를 받자마자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으며”(사도 8, 39), 간수도 “온 집안과 더불어 기뻐하였습니다”(사도 16,32). 그렇다면 우리도 이 기쁨의 큰 강물 속으로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까?

 

6.     부활 시기 없이 사순 시기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물론 기쁨이란 사람의 모든 순간에, 특히 가장 힘든 때에도 똑같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기쁨은 상황에 따라 변하지만, 한줄기 빛으로라도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이는 끝없이 사랑 받고 있다는 개인적인 확신에서 생겨납니다. 저는 큰 고통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의 슬픔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기쁨이 더디지만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확고한 신념으로서, 극심한 비탄 속에서도 서서히 되살아 나도록 해야 합니다. “당신께서 이 몸을 평화 밖으로 내치시어, 저는 행복을 잊었습니다. …. 하지만 이것은 내 마음에 새겨, 나는 희망하네. 주님의 자애는 다함이 없고, 그분의 자비는 끝이 없어, 아침마다 새롭다네. 당신의 신의는 크기도 합니다. … 주님의 구원을 잠자코 기다림이 좋다네” (애가 3,17.21-23.26).

 

7.     때때로, 많은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행복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는 핑계와 불평거리를 찾으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기술 사회가 쾌락의 기회를 증대시켜” 왔지만 “기쁨을 낳기는 매우 어렵기”1 때문입니다. 제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겪은 가장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기쁨은 가진 것 없는 매우 가난한 이들의 기쁨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또한 직업적으로 중요한 임무를 다하면서도 너그럽고 단순하며 믿는 마음을 지닌 이들의 진정한 기쁨을 떠올립니다. 이 모든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샘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흘러나옵니다. 저는 우리를 복음의 핵심으로 인도하시는 베네딕토 16세의 말씀을 결코 지침 없이 거듭 말씀 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2

 

8.     풍요로운 우정으로 꽃피우는 하느님 사랑과 만남으로써, 또는 그 사랑과 새롭게 만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고립감과 자아도취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더욱 인간다워질 때, 곧 우리 자신을 벗어나 우리 존재의 가장 완전한 진리에 이르도록 이끄시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길 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한 인간이 됩니다. 바로 여기에 복음화 활동의 원천이 있습니다. 따라서, 삶의 의미를 되찾아 주는 사랑을 받았는데, 어떻게 이 사랑을 다른 이들과 나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II.  즐거움과 위안을 주는 복음화의 기쁨

 

9.     선은 널리 퍼져 나가기 마련입니다. 진리와 선에 대한 모든 참다운 경험은 그 자체로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성향이 있고, 진정한 해방을 맛본 사람은 누구나 다른 이들의 요구에 더욱 민감해집니다. 선은 퍼져 나가면서 뿌리내리고 자랍니다. 따라서 우리가 품위 있고 충만한 삶을 바란다면,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선익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바오로 성인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도 놀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

 

10.     복음은 우리에게 한층 높은 차원에서 더욱 강렬한 삶을 살아갈 기회를 줍니다. “생명은 내어 줌으로써 더 자라나고, 고립되고 안주하면 약해집니다. 참으로 삶을 즐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안위는 제쳐 두고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전해 주려는 열정에 불타오릅니다”3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화 과업을 맡으라고 촉구할 때, 이는 단순히 진정한 자아실현의 원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실재의 또 다른 심오한 법칙을 발견합니다. 곧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내어 주는 그만큼 생명을 얻고 또 자라납니다. 선교도 분명 그러합니다.”4 그러므로 복음 선포자는 장례식에서 막 돌아온 사람처럼 보여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의 열정을 되찾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 할 때에도 즐거움과 위안을 주는 복음화의 기쁨을” 되찾고, 이를 더욱 키우도록 합시다. “때로는 불안 속에서, 때로는 희망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현대 세계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이, 낙심하고 낙담하며 성급하고 불안해하는 선포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기쁨을 먼저 받아들여 열성으로 빛나는 삶을 살려는 복음의 봉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5

 

 

영원한 새로움

 

11.     새로운 선포는 신자들에게, 냉담 교우들과 신앙을 실천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신앙 안에서 새로운 기쁨을 맛보며 복음화 과업에서 풍요로운 결실을 거둘 수 있게 해 줍니다. 사실 선포의 핵심과 본질은 언제나 같습니다. 바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을, 나이에 상관없이, 늘 새롭게 하십니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갑니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릅니다.”(이사 40,31).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복음”(묵시 14,6)이시며,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히브 13,8)이시지만 그분의 풍요와 아름다움은 다함이 없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젊으시고, 새로움의 끝없는 원천이십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의 깊이”(로마 11,33)에 끊임없이 경탄합니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지혜와 지식의 폭은 너무 깊고 넓어, 아무리 영혼이 그것을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언제나 더욱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6 또 이레네오 성인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오심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새로움도 가져다 주셨습니다.”7 이러한 새로움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삶과 우리 공동체를 늘 새롭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비록 교회가 어둡고 나약한 시기를 겪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결코 옛 것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당신을 가두어 두려는 우리의 진부한 도식을 깨뜨리실 수 있고, 하느님이신 당신의 끊임없는 창조력으로 우리에게 놀라움을 주십니다. 우리가 원천으로 돌아가 복음 본연의 참신함을 되찾고자 노력할 때마다 새로운 길들이 드러나고 창조적 방식들이 보이며, 또 다른 형태의 표현들과 더욱 설득력 있는 기호들과 오늘날의 세계에 새로운 의미를 갖는 어휘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모든 참다운 복음화  활동은 언제나 ‘새로운’ 것입니다.

 

12.     사실 이 복음화 사명이 우리에게 큰 헌신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것을 영웅적인 개인의 일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는 그 무엇보다 먼저 주님의 일이며, 우리가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뛰어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초의 가장 위대한 복음 선포자”8 이십니다. 모든 복음화 활동의 수위권은 언제나 하느님께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어 당신께 협력하게 하시고 성령의 힘으로 우리를 이끌고자 하십니다. 진정한 새로움은 하느님께서 몸소 신비로운 방식으로 만드시고 영감을 주시고 일으키시며 인도하시고 또 수많은 방식으로 통해하시는 새로움입니다. 교회 생활은 하느님께서 주도하신다는 것을, 곧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1요한 4,19)는 것을, 그리고 그분 홀로 “자라게 하신다.”(1코린 3,7)는 것을 언제나 분명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이러한 확신으로, 우리는 우리의 온 생애가 걸린 매우 어렵고 힘든 사명 앞에서 기쁨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시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13.     우리는 이 사명의 새로움을, 우리를 에워싸고 또 우리를 앞으로 이끄는 살아 있는 역사의 단절이나 망각으로 이해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기억은 우리 신앙의 한 차원이며, 이스라엘의 기억과 마찬가지로, 둘째 규범 deuteronomic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찬례를 남겨 주시어 교회가 날마다 당신의 파스카를 기억하고 깊이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루카 22,19 참조). 복음화의 기쁨은 언제나 감사하는 기억에서 생겨납니다. 이는 우리가 끊임없이 간청해야 하는 은총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신 순간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 1,39). 기억은 예수님과 함께 참다운 “많은 증인들”(히브 12,1)을 보여 줍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 신앙의 기쁨이 싹트는 데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히브 13,7). 또 어떤 이들은 우리와 가까운 평범한 사람들로, 우리를 신앙생활로 인도하였습니다.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먼저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에게 깃들어 있던 그 믿음이, 이제는 그대에게도 깃들어 있다고 확신합니다.”(2티모 1,5) 신앙인은 근본적으로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III. 신앙 전수를 위한 새로운 복음화

 

14.     우리가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3차 정기 총회가 “그리스도 신앙의 전수를 위한 새로운 복음화”를 주제로 2012년 10월 7일부터 28일까지 열렸습니다. 이 정기 총회에서는 모든 신자가 새로운 복음화를 하여야 하고 새로운 복음화는 주로 세 분야에서 이루어진다고 천명하였습니다. 9

먼저, 일반 사목 분야를 언급하기로 합니다. 일반 사목은 “성령의 불로 활력을 얻어 신자들의 마음이 불타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주 정기적으로 공동체 예배에 참여하고, 주님의 날에 모여 주님의 말씀과 빵으로 힘을 얻습니다.”10 입니다. 이들의 마음은 교회를 떠나 있고 더 이상 신앙의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자상한 어머니의 마음으로 그들의 신앙의 기쁨을 되찾는 회개, 복음대로 살려는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회개를 경험하도록 도와주려고 합니다.

끝으로, 복음화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 또는 여전히 그분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가, 심지어 오랜 그리스도교 전통을 지닌 나라에서도, 하느님의 얼굴을 뵙고자 갈망하며 속을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 복음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이에게 선포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의무를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쁨을 나누는 사람, 아름다운 전망을 보여 주는 사람, 그리고 풍요로운 잔치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개종 강요가 아니라 “매력”11

 

15.     요한 바오로 2세 께서는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진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노력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우리에게 인식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이러한 노력이야말로 교회의 첫째가는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12 사실 “오늘날에도 선교 활동은 교회의 가장 큰 도전”13이고 “선교 임무는 우선되어야 합니다.”14 우리가 현실적으로 이러한 말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바로 선교 활동이 모든 교회 활동의 패러다임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라틴 아메리카 주교들은 “수동적으로 가만히 우리 교회 건물 안에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다.”15고 단언하였습니다. 우리는 “단순한 현상 유지를 넘어서 참으로 선교하는 사목으로”16 옮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 과제는 계속해서 교회를 위한 무한한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입니다.”(루카 15,7).

 

 

이 권고의 제안과 한계

 

16.     저는 세계주교대의원회의 교부들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여 이 권고를 쓰며,{19. 건의안, 1항 참조.]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작업의 풍요로운 결실을 거두고 있습니다. 저는 또한 수많은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였고, 교회의 복음화 활동에서 이 특별한 단계에 관한 제 관심사를 박히고자 하였습니다. 오늘날 복음화와 관련하여 여기에서 논의할 문제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더 깊은 성찰과 연구가 필요한 이 많은 문제를 자세히 다루지는 않기로 하겠습니다. 저는 또한 교회와 세상에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하여 교황의 교도권에 결정적이거나 완전한 답변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황이 지역 주교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지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식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는 건실한 ‘분권화’를 증진시킬 필요가 있다고 여깁니다.

 

17.     여기서 저는 열정과 생명으로 가득 찬 새로운 복음화의 단계에서 온 교회를 격려하고 이끌 수 있는 몇 가지 지침을 제안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고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저는 여러 주제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문제를 깊이 있게 논의하고자 하였습니다.

 

  1. 교회 개혁과 선교 활동
  2. 사목 일꾼들이 직면한 유혹들
  3. 교회, 모두 복음을 전하는 하느님 백성
  4. 강론과 그 준비
  5. 가난한 이들의 사회 통합
  6. 평화와 사회적 대화
  7. 선교 영성의 활성화

 

18.     저는 이러한 주제들을 더러는 지나칠 만큼 자세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떤 논물을 쓰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오늘날 교회의 사명에서 그 주제들이 갖는 실질적인 중요성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모든 것은 복음화의 분명한 틀을 이루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는 모든 활동에서 이를 받아들이도록 당부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날마다 일하며 다음과 같은 성경의 권고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

 

 

 

제1장

교회의 선교적 변모

 

 

19.     복음화는 예수님의 선교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이 구절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복음을 선포하도록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순간을 봅니다. 그리하여 당신에 대한 믿음이 온 세상 곳곳에 두루 퍼지게 하셨습니다.

 

 

I. ‘출발하는 교회

 

20.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출발’하도록 어떻게 촉구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아브라함은 새로운 땅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아들입니다(창세 12,1-3 참조). 모세는 “내가 너를 보낸다.”(탈출 3,10)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백성을 이끌고 약속된 땅으로 출발합니다(탈출 3,17 참조).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한다.” (예레 1,7)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가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은 변화하는 상황들과 교회의 복음화 사명에 언제나 새로운 도전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선교를 향한 이 새로운 ‘출발’로 부름 받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공동체는 주님께서 가리켜 주시는 그 길을 잘 식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안위를 떠나 용기를 갖고 복음의 빛이 필요한 모든 ‘변방’으로 가라는 부르심을 따르도록 요청 받고 있는 것입니다.

 

21.     제자 공동체의 생활을 가득 채우는 복음의 기쁨은 선교의 기쁨입니다. 일흔두 제자들은 선교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이 기쁨을 경험하였습니다(루카 10,17 참조).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 하시면 아버지께 찬미를 드리셨을 때 이 기쁨을 느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가난한 이들과 작은 이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0,21 참조). 오순절에 사도들의 설교를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사도 2,6) 듣자 놀아워하며 개종한 첫 사람들도 이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 기쁨은 복음이 선포되고 열매를 맺고 있다는 표징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에는 언제나, 출발하여 복음을 전하고 자기 자신을 떠나 좋은 씨앗을 뿌리며 끊임없이 나아가는 힘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씨앗이 어느 곳에 뿌려지면 예수님께서는 무언가를 더 설명하시거나 표징들을 일으키시려고 그곳에 더 머물러 계시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분께서 다른 고을로 떠나시도록 이끄십니다.

 

22.     하느님의 말씀에는 헤아릴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습니다. 복음서는 씨앗이 뿌려지면 농부가 잠을 잘 때에도 저절로 자라난다고 말합니다.(마르 4,26-29 참조). 교회는 가늠할 수 없는 말씀의 자유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속셈과 생각을 뛰어넘어 그 뜻을 이룹니다.

 

23.     교회가 예수님과 이루는 친교는 그분과 함께 가는 여정입니다. “친교와 선교는 서로 깊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17 스승을 충실하게 본받으려는 교회는 오늘날 세상에 나아가 모든 이에게, 모든 장소에서, 온갖 기회에,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말고 두려움 없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복음의 기쁨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도리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천사는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루카 2,10). 요한 묵시록은 “땅에서 사는 사람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언어권과 백성에게 선포할 영원한 복음”(묵시 14,6)에 관하여 말합니다.

 

 

첫걸음을 내딛고, 뛰어들고, 함께 가며, 열매 맺고, 기뻐하기

 

24.    ‘출발’하는 교회는 선교하는 제자들의 공동체로, 첫걸음을 내딛고, 뛰어들고, 함께 가며, 열매 맺고, 기뻐합니다. ‘첫걸음 내딛기 primerear’라는 신조어를 양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 공동체는 주님께서 먼지 이 일을 시작하셨고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음을 압니다. (1요한 4,19 참조). 그러기에 두려움 없이 첫걸음을 내딛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고 멀어진 이들을 찾으며 큰길에 나아가 버림받은 이들을 초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공동체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그 무한한 힘을 경험하였기에 자비를 베풀려는 끝없는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첫걸음을 내딛고 ‘뛰어들도록’ 조금 더 노력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며 당신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도록 이끄십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7).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는 말과 행동으로 다른 이들의 일상생활에 뛰어들어 그들과 거리를 좁히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자신을 낮추며, 인간의 삶을 끌어안고 다른 이들 안에서 고통 받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어루만집니다. 따라서 복음 선포자들은 ‘양들의 냄새’를 풍기고, 양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는 아무리 힘들고 기나긴 길이라도 한 걸음 한 걸음을 사람들과 ‘함께 갑니다.’ 또한 사도처럼 오래 참고 기다리는 데에 익숙합니다. 복음화는 무한한 인내로 이루어지며 온갖 제약을 헤아립니다. 주님의 은총에 충실한 복음화는 또한 ‘열매를 맺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는 언제나 열매를 맺고자 마음을 씁니다. 주님께서 교회가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는 밀을 돌보고, 가라지를 보아도 내버려 둡니다. 씨를 뿌린 사람은 밀 가운데 가라지가 자라는 것을 보더라도 불평하거나 지나친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말씀이 구체적인 상황에서 실현되고 새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는 방법을 모색합니다. 그러한 열매가 덜 영글고 설익어 보여도 그렇습니다.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순교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온 생애를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꿈은 적들을 만드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지고 해방과 쇄신을 가져다 주는 그 말씀의 힘이 드러나는 데에 있습니다.  끝으로,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는 기쁨으로 가득하고, 언제나 기뻐할 줄 압니다. 또 작은 승리를 거둘 때마다, 곧 복음화의 활동에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기뻐하며 경축합니다. 기쁨에 찬 복음화는 우리 일상의 요구 안에서 선을 지키며 전례 안에서 아름다움이 됩니다. 전례의 아름다움을 통하여, 교회는 복음화하고 복음화됩니다. 전례는 또한 복음화 활동을 경축하는 것이며 자신을 내어 주는 새로운 힘의 원천입니다.

 

 

II. 사목 활동의 쇄신

 

25.    오늘날에는 과거만큼 교회 문헌들에 관심을 갖지 않고 빨리 잊어버린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기서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프로그램 차원의 의미를 지니며 중요한 귀결로 이어지리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저는 모든 공동체가 사목적 선교적 쇄신의 길로 나아가도록 필요한 노력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현재의 상황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이는 “단순한 관리”18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온 세상에서 “지속적인 선교 자세”19를 유지하도록 합시다.

 

26.    바오로 6세께서는 쇄신을 향한 호소를 더욱 확대하여 쇄신이 개인만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 관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다그치는, 길이[기리] 새겨야 할 말씀으로 돌아갑시다.  “교회가 통찰력을 가지고 자신을 들여다보고, 교회 자체의 신비를 묵상해야 합니다. …. 이러한 교회의 분명하고 활발한 자기 인식은 거룩하고 흠 없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이상적인 교회상과 (에페 5,27 참조) 현대 세계에 제시되는 실질적인 교회상을 비교해 보도록 이끌기 마련입니다. … 그러므로 교회는 쇄신을 위하여, 곧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 성찰을 통하여 교회의 지체들로 말미암은 결함들을 지적하고 단죄함으로써 그것들을 바로잡고자 과감하고 열정적으로 싸워 나가야 합니다.”20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개혁을 예수 그리스도께 충실한 끊임없는 자기 쇄신에 열린 것으로 제시합니다. “교회의 모든 쇄신은 본질적으로 교회 소명에 대한 충실성의 증대에 있다. … 나그네길에 있는 교회는 그 차제로서 또 인간적인 지상 제도로서 언제나 필요한 이 개혁을 끊임없이 계속하도록 그리스도께 부름 받고 있다.”]2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 Unitatis RedintegratioI), 6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글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3 (제3판 6쇄).]

복음화 노력을 저해할 수 있는 교회 구조들이 있습니다. 훌륭한 구조라 하더라도 그 구조에 생기를 주고 지탱하고 평가하는 생명이 있을 때에만 도움이 됩니다. 새로운 생명과 진정한 복음 정신이 없다면, ‘교회 본연의 소명에 대한 충실성’이 없다면, 그 어떠한 새로운 구조도 이내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더는 미룰 수 없는 교회 쇄신

27.     저는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선교 선택’을 꿈꿉니다. 교회의 관습과 행동 양식, 시간과 일정, 언어와 모든 교회 구조가 자기 보전보다는 오늘날 세계의 복음화를 위한 적절한 경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목 쇄신을 요구하는 구조 개혁은 이러한 의미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고도 모든 구조를 더욱 선교 지향적으로 만들고, 모든 차원의 일반 사목 활동을 한층 포괄적이고 개방적인 것으로 만들며, 사목 일꾼들에게 ‘출발’하려는 끊임없는 열망을 불러일으켜, 예수님께서 우정을 맺도록 부르신 모든 이에게서 긍정의 대답을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께서 오세아니아 주교들에게 하신 말씀처럼,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쇄신이 교회 안에서만 끝나지 않으려면 선교를 그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21

 

28.    본당 사목구는 시대에 뒤떨어진 조직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유연하기 때문에 사목자와 공동체의 개방성과 선교적 창의력에 따른 매우 다양한 형태를 지닐 수 있습니다. 물론 본당 사목구가 복음을 전하는 유일한 기구는 아니지만, 끊임없는 자기 쇄신과 적응력을 보여 준다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자기 아들딸들의 집안에서 살아가는 교회”22가 될 것입니다. 이는 본당이 가정들과 사람들의 생활과 실제로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또한 본당이 사람들과 동떨어진 쓸모 없는 구조도 아니고 선택 받았다고 자처하는 자기도취적 집단도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본당은 그 지역에서 사는 교회의 현존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인 생활이 성장하는 장소이며, 대화와 선표, 아낌없는 사랑 실천, 그리고 예배와 기념이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23 이 모든 활동을 통하여 본당 사목구는 그 구성원들이 복음 선포자가 되도록 격려하고 교육합니다. 24  본당 사목구는 공동체들의 공동체이고, 길을 가다가 목마른 이들이 물을 마시러 오는 지성소이며, 지속적인 선교 활동의 중심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당 사목구의 개편과 쇄신에 대한 호소가 아직은 충분한 열매를 맺지 못하였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본당 사목구는 사람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살아 있는 친교와 참여의 장소가 되고 온전히 선교를 지향하여야 합니다.

 

29.    다른 교회 기관들과 기초 공동체와 소공동체들, 여러 운동들과 단체들은 모든 영역과 분야를 복음화하고자 성령께서 불러일으키신 교회의 풍요입니다. 이들은 자주 교회의 쇄신에 이바지하는 새로운 복음화의 열정과 세상과 대화하는 역량을 키워 줍니다. 이들은 지역의 본당 사목구라는 풍요로운 실재와 계속 접촉하며 개별 교회의 전반적인 사목 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25 이러한 통합은 그들이 복음과 교회의 일부에만 집중하거나 뿌리 없는 유랑민이 되는 것을 막아 줄 것입니다.

 

30.    또한 각 개별 교회는 자기 주교의 지도 아래 가톨릭 교회의 한 부분으로서 선교적 쇄신으로 부름 받고 있습니다. 개별 교회는 복음화의 첫째 주역입니다. 26 하나인 교회를 세상의 특정한 장소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그 안에서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참으로 내재하며 활동하기”27 때문입니다. 개별 교회는 특정한 장소에 구현되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의 모든 수단을 갖추고 있지만, 그 지역의 얼굴을 지닌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개별 교회의 기쁨은 그분을 더욱 필요로 하는 곳에 그분을 선포하려는 열정으로 드러나고, 그 지역의 변두리나 새로운 사회 문화적 환경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는 출발로 표현됩니다.28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과 생명을 가장 필요로 하는 바로 그곳에, 교회는 언제나 현존하고자 합니다. 29 이러한 선교 열정이 더욱더 강렬하고 광범위하고 충만해지도록 저는 각 개별 교회에 단호한 식별과 정화와 개혁의 과정으로 들어서기를 권고합니다.

 

31.    주교는 신자들이 한마음 한 뜻을 이룬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사도 4,32 참조) 이상을 따라 언제나 자기 교구의 교회 안에서 선교적 친교를 증진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주교는 때로는 자기 백성 앞에 나서서 방향을 제시하고 그들의 희망을 북돋아 줄 것입니다. 때로는 나서지 않고 그들 가운데에 오로지 인자로운 모습으로 머물 것입니다. 또 어떤 상황에서는 백성 뒤에 걸어가며 뒤처진 이들을 도와주고 무엇보다도 양 떼가 스스로 새로운 길을 찾게 합니다. 주교는 역동적이고 개방적이며 선교적인 친교를 증진하는 그의 사명에서,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해 주는 일부의 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말을 귀담아들으려는 열망으로, 교회법에 제시된 참여 기구들과30 다른 여러 형태의 사목 대화들을 장려하고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참여 과정의 주된 목적은 교회의 조직화가 아니라 모든 이에게 다가가려는 선교 열망입니다.

 

32.    제가 다른 이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저도 실천하여야 하므로, 저 또한 교황직의 쇄신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로마 주교로서 저의 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복음화의 현실적 요구에 더욱 충실하도록 저의 직무 수행을 도와줄 수 있는 여러 제안들에 늘 열려 있는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수위권의 사명에 대한 본질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상황에 개방적인 수위권 행사 방식”31을 찾는 데에 도움을 요청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별로 진전하지 못하였습니다. 교황직과 보편 교회의 중앙 조직들 또한 사목 개혁의 요청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옛 총대주교좌 교회들처럼, 주교회의들은 “합의체적 정신을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는 여러 가지 풍요로운 활동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32 그러나 이러한 바람은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진정한 교리적 권위를 포함하여 구체적인 권한을 지닌 주체로 여겨지는 주교회의의 법률적 지위가 아직까지는 충분히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33 지나친 중앙 집권은 교회의 생활고 그 선교 활동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이를 어렵게 만듭니다.

 

33.    선교를 핵심으로 하는 사목은 “우리는 늘 이렇게 해 왔습니다.” 라고 말하는 안이한 태도를 버리라고 욕구합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 자기 공동체가 지닌 복음화의 목표와 조직, 또 그 양식과 방법을 과감하게 창의적으로 지고하도록 권유합니다. 목표만 제시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들을 함께 찾지 않는다면 순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이 문서의 방향 제시를 두려움 없이 받아들여 기꺼이 또 용기 있게 적용하도록 권고합니다. 중요한 것은 혼자 걷지 않고 언제나 형제자매들에게 의지하는 것이며, 특별히 지혜롭고 현실적인 사목적 식별에서 주교들의 지도력에 기대는 것입니다.

 

 

III. 복음의 핵심으로부터

 

34.    모든 것을 선교적 의미에서 보면, 이는 우리가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에서 즉각적인 의사소통으로 또 흔히는 대중 매체의 편향된 보도로 우리가 선포하는 메시지가 왜곡되거나 그 부수적인 일부 측면으로 축소될 위험이 그 어느 때보다 큽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의 도덕적 가르침에 속하는 문제들이 본래의 맥락에서 벗어나 그 의미가 왜곡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메시지가 그 부수적인 측면들과 동일시될 때 가장 큰 문제가 됩니다. 이 측면들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그리스도 메시지의 핵심을 전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적으로 우리 대화 상대자들이 우리가 말하는 것의 배경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들이 우리가 말하는 것과 거기에 의미와 아름다움과 매력을 부여하는 복음의 핵심을 연결 지을 수 있다고 짐작해서는 안 됩니다.

 

35.    선교를 핵심으로 하는 사목은, 수많은 교리를 두서없이 전달하고 이를 끈질기게 강요하려고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예외나 배제도 없이 실제로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는 사목 목표와 선교 방식을 선택할 때, 그 선포는 본질적인 것에, 곧 가장 아름답고 가장 크고 가장 매력적이면서 가장 필요한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그 깊이와 진리는 손상되지 않으며, 더욱 설득력 있고 힘찬 것이 됩니다.

 

36.    계시된 모든 진리는 같은 신적 원천에서 나오며 같은 신앙으로 믿게 되지만, 그 가운데 몇 가지가 복음의 핵심을 더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기에 더욱 중요합니다. 이 근본 핵심 안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이 찬란히 빛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 교리의 여러 진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와 이루는 관계는 서로 다르므로, 교리를 비교할 때에는 진리의 서열 또는 ‘위계’가 있다.”34고 천명하였습니다. 이는 신앙 교리는 물론이고, 도덕적 가르침을 포함한 교회의 가르침 전체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37.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교회의 도덕적 가르침 또한 덕과 거기서 나온 행동 안에서 그 고유의 ‘위계’를 지닌다고 가르쳤습니다.35 여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입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의 활동은 성령의 내적 은총을 가장 완벽하게 밖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새로운 법의 기초는 성령의 은총이며, 이는 사랑을 통하여 행동하는 믿음 안에서 드러난다.”36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외적인 행동만을 보자면 자비가 모든 덕 가운데 가장 크다고 설명합니다. “자비는 그 자체로 가장 큰 덕입니다. 자비에서 다른 덕이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자비는 다른 덕의 부족함을 채워 줍니다. 이는 가장 높으신 분의 덕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를 베푸는 것은 하느님의 고유한 속성이며 여기서 하느님의 전능이 잘 드러난다고 하는 것입니다.”37

 

38.    교회의 오랜 확신이 반영된 공의회의 가르침에서 사목적 결실을 이끌어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복음을 선포할 때 적절한 균형 감각을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강론 때에 어떤 주제를 다루는 그 빈도와 강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례주년 동안 본당 사제가 절제에 관하여 열 번을 말하고 사랑이나 정의에 관해서는 두세 번에 그쳤다면 균형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론과 교리에서 주로 제시하여야 하는 그 덕들을 소홀히 한 것입니다. 우리가 은총보다는 법을, 그리스도보다는 교회를, 그리고 하느님 말씀보다는 교황에 대하여 더 많은 말을 할 때에도 그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39.     이렇게 덕들 사이에 존재하는 유기적 일치로 그 어떠한 덕도 그리스도인의 이상에서 배제될 수 없는 것처럼, 그 어떠한 진리도 부인되지 않습니다.   

 

 

** 지금도 ‘필사 筆寫’ 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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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리스도인의 기쁨>, 8항.
  2. 베네딕토 16세,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 2005. 12.25., 1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3(제1판 16쇄), AAS 98(2006), 217면.
  3. 제5차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 주교회의, <아파레시다 문헌>(Aparecida Document), 2007. 6.29., 360항.
  4. <아파레시다 문헌>, 360항.
  5. 바오로 6세, 교환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 1975.12.18., 80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2(제3판 6쇄), 개정판, AAS 68(1976), 74-75면 참조.
  6. 십자가의 성 요한, <영적 찬가>(Spiritual Canticle), 36,10.
  7. 성 이레네오, <이단 반박>(Adversus Haereses), IV, c.34, 1항, <그리스 교부 총서>(Patrologia Graeca: PG), 7, 1083.
  8. <현대의 복음 선교>, 7항.
  9.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3차 정기 총회, 건의안(Propositio), 7항 참조.
  10. 베네딕토 16세,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3차 정기 총회 폐막 미사 강론, 2012.10.28., AAS 104(2012), 890면). 여기에는 예배에 자주 참여하지 않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신앙을 표현하며 깊고 진실한 신앙을 간직한 신자들도 포함시켜야 하겠습니다. 일반 사목은 신앙인들의 영적 성장을 지향하여 그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더욱더 온전하게 응답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둘째 분야는 “세례를 받았지만 세례의 요구대로 살지 않는 이들”[12. 베네딕토 16세,. 세게주교대의원회의  제13차 정기 총회 폐막 미사 강론, 2012.10.28

  11. 베네딕토 16세,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 주교회의 제5차 정기 총회 개막 미사 강론, 2007.5.15., 브라질 아파레시다, AAS 99(2007), 437면.
  12.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교회의 선교사명 Redemptoris Missio), 1990.
  13. <교회의 선교 사명>, 40항
  14. <교회의 선교 사명>, 86항
  15. <라파레시다 문헌>, 548항
  16. <아파레시다 문헌>, 370항
  17. 요한 바오로 2세,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Christifideles Laici, 1988.12.30., 32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1(제4판 5쇄), AAS  81(1989), 451면.
  18. <아파레시다 문헌>, 201항
  19. <아파레시다 문헌>, 551항
  20. 바오로 6세, 회칙 <주님의 교회 Ecclesiam Suam>, 1964.8.6., 9.10.11항,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40호(2009),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91-92면, AAS 56(1964), 611-612면 참조.
  21. 요한 바오로 2세. 오세아니아 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권고 <오세아니아 교회 Ecclesia in Oceania>, 2001.11.22., 19항,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22호(2002), 49면, AAS 94(2002), 390면.
  22. <평신도 그리스도인>, 26항.
  23. 건의안, 26항 참조.
  24. 건의안, 44항 참조.
  25. 건의안, 26항 참조.
  26. 건의안, 41항 참조.
  27.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주교들의 사목 임무에 관한 교령 <주님이신 그리스도 Christus Dominus>, 11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28. 베네딕토 16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만민에게> 반포 40주년 기념 국제회의의 참석자들에게 한 연설, 2006.3.11., AAS 98(2006), 337면 참조.
  29. 건의안, 42항 참조.
  30. 교회법 제460-468조; 제511-514조; 제536-537조 참조.
  31.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 Ut Unum Sint>, 1995.5.25., 95항.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2호(1996), 80면, AAS 87(1995), 977-978면.
  3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 Lumen Gentium>, 23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33. 요한 바오로 2세, 주교회의의 신학적 법률적 성격에 관한 자의 교서 Apostolos Suos, 1998.5.21.,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13호(2000), 49-72면, AAS 90(1998), 641-658면 참조.
  34. 일치 교령 11항.
  35. 성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대전 Summa Theologiae>, I-II, q.66, a.4-6참조.
  36. <신학 대전>, I-II, q.108, 1.1.
  37. <신학 대전>, II-II, q.30, a.4.: “외적인 희생 제사와 예물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느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이웃을 위해서다. 하느님께는 우리의 제사가 필요하지 않으시나 그분께서는 우리의 신앙과 이웃의 선익이 되도록 이 제사들을 바치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자비는, 무엇보다 이웃의 선익이 되고 하느님께서 더 잘 받아들이시는 희생 제사이다”(ad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