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79, 눈발 날리는 백양로, 1968

2012년 12월 12일도 어제로 지나갔다. 12/12/12로 ‘난리’를 치는 사람들.. 참 부럽다. 단순한 부류의 사람들일까, 아니면 참 한가한 사람들일까 생각도 나지만, 12가 세 번씩이나 겹치는 것보다는 각자의 일생에서 드물게, 아니면 다시는 못 볼 숫자이기에 그럴 것 같다. 우선 13/13/13은 아예 불가능 할 것이고, month의 숫자와 맞는 햇수라면.. 2101년이 되어야 01/01/01 라는 숫자 놀음이 가능한 것이다.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2012년에서 2101년까지의 공백이 생기고.. 앞으로 89년을 더 살아야 그것을 보는 것이다. 현재의 ‘피상적인 의학’의 발달을 감안 한다면 아마도 지금의 20대나 30대 정도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로써는 정말 오랜만에 ‘백일몽’같은 생각과 망상을 해 보았지만, 역시 이것도 인간이 겪는 유한성, 잠깐 왔다가 가는 어찌 보면 슬프기도 한 ‘피조물’의 신세를 실감케 한다. 하지만, 요새 내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느끼는 것은, 모든 것이 생각하기에 달렸고, 인간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선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발전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 아닐까?

매년 12월 12일이 되면 연숙과 빠짐없이 한가지 얘기를 나누며 웃는다. 1979년 서울의 12월 12일을 서로 회상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그날 밤에 박대통령 시해사건을 빌미로 전두환이 무혈 쿠데타를 하던 날이었다. 그들이 한강 다리를 건너오기 바로 전에 우리 둘은 김포공항에서 연숙의 지도교수 김숙희 교수를 만나 인사를 하고 밖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른 채, 유유히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다음날 그 쿠데타 소식을 알게 된 것이다.

기억을 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날 저녁 김포공항으로 둘이 걸어 들어가는데, 처음으로 연숙의 손을 잡은, 그것을 회상하고 싶은 것이다. 비록 결혼 약속은 얼마 전에 했지만 손을 잡는 것은 ‘큰 사건’이었다. 더욱 재미있었던 사실은 그날 날씨가 매섭게 추웠고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이라서 손목을 잡힌 연숙은 너무나 ‘고생’을 했다고 한 사실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해맑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그날 12/12가 남았다.

 

요사이 나의 workstation  pc desktop의 모습

요사이 나의 workstation pc desktop screen, New York Central Park

오늘 아침에 나의 workstation kvm virtual pc의 desktop background art를 보니, 이것은 거의 흑백으로 눈에 덮인 뉴욕 city, Central Park 의 모습이었다. 이것으로 바뀐 것이 한 달도 채 안되지만, 이것을 보면서 계속 머리에 떠오르는 ‘영상’이 있었다. 물론 아름답게 기억되는 광경이고, 그것도 역시 흑백의 영상이었다. 그곳은 바로 연세대의 상징인 백양로.. 그곳이 완전히 눈 속에 쌓이고 있던 그 광경이었다. 나의 기억력을 시험하려 나는 그때가 구체적으로 언제인가 계속 생각해 본다.

1967년 겨울 아니면 1968년 겨울이었다. 그때는 겨울 방학 때였고, 성탄이 훨씬 지난 때였다. 그러니까 1월 쯤이었을 것이다. 한낮에 함박눈이 그야말로 ‘펄~펄’ 내리던 날, 시커먼 공해로 그다지 깨끗하지 않았던 그 당시의 서울거리가 순식간에 깨끗해지는 그런 날, 어찌 나와 같이 한가한 사람들이 집의 안방에 앉아있겠는가? 지독히도 한가했던 대학시절의 겨울방학의 ‘누에고치’ 속에서 나는 눈 덮인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때 상도동 버스 종점에 살던 나는 ‘portable’ FM radio를 들고 나갔고 시내 버스 <상도동-모래내 >를 타고 연세대로 갔다. 왜 그곳에 갔는지.. 하기야 그 당시 잠깐 갈 곳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연대 앞 굴다리 앞에서 내려서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으며 백양로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손에는 작지도 않았던 ‘소형’ 금성 FM radio를 들고, 신나게 pop song을 들으면서.. 눈 속에서 기가 막히게 조용하고 아름답게 보이던 연세대 백양로.. 이제 시간적인 단서가 잡힌다. 그것은 1968년 한겨울 방학 중, 1월 쯤이었을 것이다.

나의 서재에 보이는 금성 FM radio, 신탄진 담배와 SPAM can 재털이
나의 서재, 금성 FM radio, 신탄진 담배, SPAM can 재털이 1968

그 당시의 timeline을 확실히 잡아주는 유일한 것이 바로 사진인데, 바로 여기에 보이는 사진, 나의 책상에 놓여있는 새로 산 금성 FM radio, 이것을 찍었던 때가 1968년 3월 경. 1967년 성탄 때에 어머니께서 선물로 사주신 그 당시에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나왔던 FM radio였다.

그 당시에 들을 수 있었던 FM 방송은 딱 한군데였지만 물론 미8군의 FM 방송은 그 훨씬 전부터 있었다. 잡음이 많았던 AM 방송에 비해서 FM방송은 정말 음이 깨끗해서 대부분 classical 쪽의 음악을 방송하곤 했다. 이후에 이 radio는 장기간 등산을 갈 때마다 가지고 가서 사진에도 몇 군데 남아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1969년 여름에 요델 산악회 친구 박창희와 갔던 소백산, 그때의 사진에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당시의 대한민국의 수준은 그렇게 간단하게 보였던 FM radio를 ‘간신히’ 만들고, 커다란 업적을 이룬 ‘금자탑’으로 소개하던 때였다. 일제를 배척하던 것이 애국이었던 당시에 그나마 ‘국산’으로 그렇게 깨끗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때, 그것을 들고 함박눈을 맞으며 연세대 백양로를 따라 걸으며 ‘백일몽’을 꾸던 그 죄 없던 시절이 왜 이다지도 그리울까.. 육신적으로 다시는 못 겪을 일이지만, 기억이라는 선물이 있는 한 그런대로 괜찮지 않을까?

 

금성 FM radio를 듣고 있는 박창희, 1969년 소백산

금성 FM radio를 듣고 있는 박창희, 1969년 소백산

내가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본 백양로, 1973년 6월

내가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본 백양로, 1973년 6월
이종원, 이경우, 이경증, 윤인송, 이진섭, 김호룡, 신창근

 

Postscript: 나의 머릿속의 기억을 뛰어 넘어서 그 당시의 서울 일간지를 인터넷으로 찾으면 아마도 그 함박눈이 내렸던 날짜까지 확실히 알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도 한가함을 달래주는 좋은 project가 아닐까.

 

 
그 당시에 듣던 golden oldie, Ruby Tuesday by the Rolling Stones, 1967

 

인생은 Given Way (?)

서서히 물러가는 2012년, 올해에 기억에 남는 큰 일은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1965년 초에 나를 가르쳤던 ‘아르바이트’ 대학생 김인호 형의 소식을 알게 된 것이 그중에 하나가 아닐까?

다시 연락이 된 경위는 의외로 간단했다. 내가 먼저 1960년 중반 때의 서울 일간지를 훑어 보다가 (물론 인터넷으로) 영화 광고를 보게 되었는데 그 영화의 제목이 <젊음이 밤을 지날 때>, 거기서 ‘박계형’ 이란 이름을 보게 되었다. 불현듯 스치는 것이.. 나를 가르쳤던 아르바이트 대학생의 ‘애인’이 바로 그 당시 베스트셀러 소설의 ‘대학생 저자’ 박계형 이었던 것이 기억이 난 것이었다. 그 때까지 나는 그 ‘박계형’이란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의 blog에 내가 기억하던 아르바이트 “서울고, 서울상대” 대학생 김인호 형을 회상하게 된 것인데 그것을 정말 정말 ‘우연히’ 인호형이 보게 된 것이다. 정말 모든 것들이 우연의 연속이었다. 이것까지 필연 이라고 우기고 싶지는 않지만, 누가 알랴. 이 세상 삼라만상의 모든 것들은 어딘가 서로 연관이 되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서로 email을 교환 하면서 형이 보내 준 이미 공개된 ‘글’이 하나 있었다. 아마도 서울 상대 동창회지에 실렸던 글 같았다. 서울 상대에 입학하게 된 동기나 경위도 있었지만 그 이후로 인생의 여정이 정말로 ‘웅장하게’ 압축 된 글이었다.

이미 공개된 글이라서 다시 공개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겠지만, 혹시 해서 나의 blog에 전재를 해도 좋겠냐고 물어 보았는데.. 답을 얻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글이 너무 솔직한 인생의 고백록 같아서 나는 ‘무엄 하게도’ 이렇게 공개하기로 했다.

 

 

+ Deo Gratias

 

인생은 Given Way (?)

 

 

김 인 호 (서울상대 상학과 19회)
한양대 명예교수 (경영학)

입학 50주년이라니 문득 서울상대를 지원하게 된 연유가 새삼 닥아 온다. 고3 내내 이과(理科)반을 듣고서 느닷없이 문과인 상대로 왔기에 말이다. 원래 성품이 온순했던 탓(?)에 여름방학 하던 날 (당시엔 실제로 이날부터 고3생의 대입특강이 본격화되는 첫날이었음) 무기정학을 당해 50일을 열외가 되다보니 대입지원서 작성 시 가장 중시되는 고3 2학기성적이 엉망일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의예과 아니면 서울공대 화공과나 기계과를 써달라는 나의 막무가내와 이 점수로는 서울대 어떤 과에도 못 간다는 담임선생님과의 승강이 끝에 ‘자네 상대가면 어때?’ 하는 급작스런 제의에 선택과목이 완전히 다른데 어떻게 문과인 상대를 갈 수 있느냐고 항변하자 나의선택과목인 화학과 생물을 가지고도 서울상대에 응시가 가능하다며 지원서를 써주셨던 선생님. 전형조건이 그 전해의 것과 같을 것으로 알고 있던 나는 상대지원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으므로 상대는 애초부터 전혀 고려조차 않고 있었던 터였다. 기실 그 전해뿐만 아니라 그 다음해부터도 또다시 안 되게끔 다시 바뀐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해엔 어쩐 일로 가능했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분명 어떤 손길이 아니었나, 쉽다.

아무튼 일순간에 이과에서 문과로 나의 행로가 180도 바뀌었고, 이후 상대생활은 우리 모두가 그러했듯이 당시의 혼란한 사회분위기 덕에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인 4년을 얼렁뚱땅 마치게 되었다. 나는 곧장 국방의무를 보다 충실하게(?) 다하고자 공군장교 코스를 택했다. 소위로 임관된 지 4개월여쯤 되던 어느 날 국군의 날 행사일환으로 당시 서울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삼군사관학교 종합체육대회응원단으로 차출되어 응원을 마치고 공군장교버스를 타고 오산으로 귀대하던 중 수원 세류동 건널목에서 내가 타고 있던 공군장교버스가 서울발 하행열차에 박치기 당해 즉석에서 3명의 장교가 죽고 약 5-60여명의 중상자가 발생한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사고 직후 난 얼굴과 몸이 묵사발이었는데도 피가 안 나는 바람에 경상자축에도 끼이지 않을 만큼 운이 좋았던 몇몇 장교 중 하나였다. 몇 십 미터 열차에 끌려가며 구겨지는 버스 안에서 순간 ‘야, 여기서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어릴 적서부터 그때까지 내가 살아 온 긴대목이 일순간에 쫙 주마등처럼 지나가던 묘한 체험을 잊을 수가 없으며 이는 나로 하여금 그 후 지금까지도 우리 삶과 또 우리의 기억이란 게 과연 무엇인가를 되새기게끔 해 준다.

아무튼 그때 그 사고는 당시 무신론자를 자처하던 나에게 삶과 죽음과 인생의 목적에 대하여 많은 사유의 계기를 던져주었다. 그때 그 충돌사고는 과연 필연이었을까, 우연이었을까? 물론 사고가 난 다음에 생각이 미친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탄 장교버스와 그 기차는 노량진역을 지날 때에도 나란히 같이 가고 있었고 또 안양으로 진입하는 구름다리 위에서도 같이 마주쳤던 것이 아무래도 우연 같아 보이질 않았었다. 우리 눈에 우연처럼 보일지라도 만사가 필연 아닐까,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이며 또 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등등. 어느 문학도의 여유로운 넋두리가 아니라 당시 나에겐 대단히 심각한 현안이었다. 요컨대 당시의 그 사고는 나에게 삶과 죽음과 인생의 목적에 대해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게 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사고 후 몇 달이 지나 사고후유증이 거의 가시어 갈 무렵 6.25 피난시절 대전에서 같이 초등학교 다녔던 한 여학생과의 상봉에서 그녀가 제일 먼저 던진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느냐?’는 물음은 이런 나의 사유를 더 깊이 뿌리내리게 했다.삶과 죽음의 견지에서 볼 때 내생명이 내의지로 또는 내 부모의 뜻에 따라서 생성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때 또 내 맘대로 죽을 수도 있는 존재가 아닌 한 적어도 생명을 주관하는 존재가 계시다는 사실을 내가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는 추론을 당시 난 쉽게 받아들이고 있던 터이었으므로.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합의가 이루어진 두 젊은 남녀는 그래서 자연스레 아무 장애 없이 그이후의 만남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난 공군제대를 2, 3개월을 앞둔 어느 날 내 근무지였던 공군본부로 찾아온 어느 선배의 스카웃 아닌 스카웃으로 KIST에서 첫 작장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과를 듣고도 상대를 다녔던 내가 첫 직장을 이과의 본산인 KIST에서 시작하게 된 것도 과연 우연이었을까, 난 지금도 가끔 생각해 보곤 한다.

KIST에 입소한 그해 늦가을 난 아무것도 모르면서 단지 결혼하기 위해 가톨릭집안인 처갓집의 요구대로 성당에서 관면혼배라는 것을 했고 또 일반예식장에서도 결혼식을 올리는 등 두 번의 행사를 거쳐 드디어 원하던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뒤이어 제왕절개로 힘들게 얻은 첫아들은 나에게 또 한번 생명의 신비와 생명의 주관자에 대한 인식을 더욱 새롭게 해 주었다. 양수과다증이라는 특이한 상황에서 태어난 첫아들은 식도가 위가 아닌 기관지와 연결되어 있는 태중에서부터 기형이었던 것이다. 기형이란 사실을 처음 알려주는 의사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까무라쳤고 잠시 후 깨어났는데 깨어나는 바로 그 순간 느닷없이 ‘내 죄 때문에 저애가 내벌을 받고 저렇게 태어났구나, 라는 죄의식이 내 인생 안에서 최초로 강력하게 밀려왔다, 사실 난 그 전까지만 해도 단 한 번도 죄라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는 천방지축의 생활을 해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수술시키겠다며 울부짖는 나를 진정시킨 병원 측의 말은 수술성공률은 제로이며 애를 수술시킨다는 것은 자기네에게 애를 실험용 재료로 내주는 일일뿐 아니라 수술비용도 퍽 많이 들므로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충고였다. 우리는 가족회의를 열고 의논한 끝에 결국 병원의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며칠 후 졸지에 배를 가르고 첫아들을 낳았다는 기쁨에 차있던 산모의 충격을 달래며 빠른 퇴원수속을 밟던 중 이미 세상을 떴을 것으로 생각했던 아이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접한 그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네가 뭔데 감히 한 생명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느냐? 는 음성에 난 성공가능성이 제로일지라도 수술시키기로 결정했다.

수술을 서두르는 나에게 그날이 토요일이었는데 아무리 서둘러도 월요일이라야 수술이 가능하다며 집도의사가 던진 또 한마디 말, ’수술은 내가 하지만 애가 살고 안 살고는 나의 영역이 아닙니다,‘ 란 당시엔 퍽 이해하기 어려웠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수술은 잘되었다고 했다. 그간 동일한 수술에서 제일 오래 산 아이의 기록이 2주일이었는데 2주일이 지나자 국내기록을 깼다는 것이다. 약 40여일이 지나자 이 수술은 국내 최초의 성공이라며 퇴원시켜도 좋다는 집도의사의 말에 따라 집으로 데려 온 아이는 아주 강건하진 않았지만 보통아이처럼 잘 먹고 잘 자는 아이로 정상아와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mental 면에서 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내 맘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불안감을 달랠 겸 또 생명의 주관자(사실 난 그때 소위 때의 교통사고와 첫애의 탄생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을 존재케 하는 주관자가 존재한다는 명제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도 인정할 겸 해서 난 집근처의 성당신부를 찾아갔다. 왜 왔느냐는 신부님의 물음에 ’생명을 주관하는 존재‘를 인정하고 싶어왔다는 나의 답변에 앉기를 권한 후 양주 한잔을 건네며 느닷없이 엄숙한 어조로 ’예수님은 역사적 인물입니까?‘ 라고 묻는 것이었다. 느닷없는 질문에 머뭇거리는 나에게 재차 묻자 ’약 2천 년 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태어났던 한 청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자 ‘그러면 그분이 우리와 다른 게 뭐라고 생각하시오?’ 하며 연이은 질문에 ‘그분은 우리와 똑같이 인성(humanity)을 지닌 인간인 동시에 또한 신으로서 신성(divinity)도 지닌 분으로 듣고 있습니다.’ 란 나의 답에 ‘내일 모레 오시오 내가 영세를 주겠소. 올 때 본명(세례명)이라는 걸 하나 지어갖고 오시오.’ 하며 가도 좋다고 했다.

물론 당시엔 몰랐지만 그 분은 벨기에에서 신학을 공부한 좀 트인(?) 분이었던 것을 후에 알게 되었다. 내가 그 옛날 서울고를 다닐 때 광화문 코너에서 언젠가 보았던 국제극장의 영화간판에서 ‘스테파노의 세레나데, 란 뮤지컬 영화제목이 퍼뜩 떠 오르길레 본명을 스테파노로 정하고 영세를 받게 되었다. 이는 최소 6개월 이상 교리공부를 거치지 않으면 영세를 주지 않던 당시의 관례로 본다면 난 분명히 엉터리로 영세를 받은 것이고 또 그 신부님은 엉터리로 영세를 주신 것임에 틀림없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공군소위 시절 당한 교통사고와 제대 후 결혼과 첫애의 태어남과 포기 그리고 그 다음 수술성공으로 인한 재탄생의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무신론자임을 자처하던 젊은 날의 나와는 달리 생명의 원천이 어디이며 생명을 주관하시는 존재가 누구이신가의 관점에서 만물을 만드신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의 뜻을 우리가 자유의지로 어기는 것이 죄며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죄 지은 만큼 벌을 받는 정의의 질서가 온 우주 안에 꽉 차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정의의 견지에서 우리가 지은 죄가 사(赦)하여지려면 반드시 죄 없는 존재가 내 죄를 대신하여 벌을 받아야만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죄가 없으신 하느님께서 바로 육화(incarnation)되어 오시어 우리 죄의 대속(代贖)제물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이시며 그래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세상의 어떤 죄도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명쾌한 논리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이 모든 지혜, 지식의 원천임을 알게 된 나에게 그분은 커다란 은총으로 내가 단 한 번도 생각조차 해 본적이 없었던 교직을 천직으로 주셨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 당시 보이는 세계의 중심이었던 미국이 수정헌법을 통해 도덕 다원주의를 그리고 영적세계의 중심인 로마가톨릭교회가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자 더욱 기승을 부리며 판을 치는 대 혼란의 격랑 속에서 미국사회와 로마가톨릭교회야말로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의 최대 피해자임을 교직기간동안 확인할 수 있는 눈도 주셨다. 그래서 난 내 전공영역인 경영전략과 기업윤리에서 ‘뿌린 대로 거두는 정의의 질서가 온 우주 안에 엄존’함을 근거로 상대적 가치판단기준이 아닌 절대적 기준에 입각한 ‘Dynamic Management‘라는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을 정립할 수 있었고 이를 amazon.com과 해외학회에서의 발표, 세미나, 특강 등을 통해 국내?외 학계와 산업계에 보급 확산시킬 수 있는 토양도 갖추게끔 해주셨다.

상대입학 후 어느새 훌쩍 지나버린 50년 세월은, 인간은 자기의지로 뜻을 세우지만 그 뜻이 이루어지고 않고는 온전히 하느님 의지에 따라 정해진다는 사실을 터득케 한 귀중한 시간이었다. 특히 첫애가 잘못 태어났을 때 내 죄 탓임을 인정하고 통회하던 마음을 보시고 아들을 살려주셨음같이 낮 추인 마음을 그분은 아니 낮추어보신다는 성경의 경구도 참임을 굳게 받아들이게끔 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난 오늘도 누구든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낮출 때라야 하느님께서 천상은총을 듬뿍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며, 매 순간순간 죄를 성찰하며 만물을 만드시고 보전하시며 다스리고 계시는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Wikipedia, If I had $100 more..

wikipedia-logo
Hope from free knowledge

오늘 우연히 Wikipedia website엘 들렸다가.. 왜 그곳에 갔던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곳 website의 top area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보였다. 이곳은 ‘절대로’ 광고 같은 것이 없는 곳인데 하며 자세히 보니 financial donation (giving)을 요청하는 글이었다. 최근에는 Massachusetts 주의 senator (상원의원) 선거에서 Elizabeth Warren이라는 용감하고 시원스럽고 귀엽게(?) 생긴 아줌마 가 출마를 하면서 역시 donation을 그녀의 공식 website에서 하는 것을 보았다.

헌금 액수를 보니 그야말로 ‘아무라도’ 할 수 있는 정도로 $5~$10 가 대부분이었다. 그 정도로 모금을 해 보니 큰 결과를 기대 못하는 듯 해도 그것이 아닌 것이 참가하는 사람의 숫자가 엄청난 것으로, 역시 online의 위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되었다. 나는 물론 Massachusetts 의 유권자가 아니라 해당은 안 되었지만, 이렇게 ‘코 흘리개’ 정도의 돈으로 그녀는 당당히 당선이 되었다. 상당한 조직(공화당, who else?)의 돈으로 버티던 상대방도 이런 ‘개미 군단’의 위력에 놀랐을 것이다.

다시 Wikipedia 로 돌아와서, 나는 최근에 이 ‘free’ 백과사전을 정말로 애용하는 한 사람이 되었다. 그 옛날, 책으로 된 백과사전을 한번도 살 수 없었던 때를 생각하며, 나는 이곳을 자주도 찾는다. 그야 말로 ‘조그만 아무 것’이라도 궁금증이 생기면 이곳에서 해결과 해갈을 한다. 궁금증이 많은 사람들, 특히 제3세계의 ‘가난한 학생’들을 생각하면 이것은 거의 꿈과도 같은 service인 것이다. 이용자들의 조그만 헌금으로 운영이 되는 것에 비해서 이곳은 그렇게 자주 fund-raising을 하지 않는다.

그곳에 비해서 public radio/TV같은 곳은 너무도 자주해서 짜증이 날 정도다. 그들의 ‘무료’ service는 감사하지만 지나치게 liberal한 그들의 논조도 짜증이 나는데 말이다. 모든 것들이 ‘극단’으로 치닫는 풍토, 지독한 예로 Apple Co.와 같이 ‘나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철면피 철학의 집단이 있는가 하면 Open Source, Wikipedia 같이 모두 잘 나누며 살자는 ‘예수님’ 철학의 집단이 공존하는 이때..결과적으로 이곳의 헌금부탁은 절대로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더 Wikipedia 와 가까워 지게 되었다. 나의 재력이 100불 정도 더 많았다면.. 하는 꿈이 너무나 간절해지던 순간이었다.

Blackest, Darkest Northern..얼어붙은 북녘하늘

Satellite night view around Korean peninsula

NASA 기상관측 위성 Suomi가 본 한반도 주변의 밤 모습

 

그들의 ‘영용’한 김씨 왕조(김일성 3대, 어둠의 자식들) 60여 년이 ‘인민들의 고혈로’ 성취한 얼어붙은 북녘 하늘을 보라.. 얼마 전 공개된 NASA의 Suomi NPP polar orbit satellite가 지구의 곳곳을 돌며 찍은 ‘밤 사진’ 중에 CJK (중국, 일본, 한국)의 모습이 close-up 되었다. 한반도의 밤 사진이 그렇게 관심을 끄는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휴전선 이북이 ‘완전한’ 암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족 반역자들이 몰려 사는 평양만은 5W 정도의 전등을 켜 놓아서 그런지 희미하게나마 알아 볼 수는 있다.

일본 도쿄 이상으로 밝은 서울 Metro의 lighting energy는 휴전선을 넘을 정도로 찬란하다. 이 사진을 보고 침을 질질 흘리는 군상들이 있다면 그들은 아마도 철없는 amateur astronomer들일 것 같다. 1000여 년 전 칠흑 같은 통일 신라의 수도 서라벌, 첨성대에서 찬란한 하늘을 보며 미래를 예측하던 신라인들 같이 빛의 공해가 없는 ‘칠흑 같은 곳, 북녘 땅’에서 그들은 별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까? 금강산으로 주린 배를 채우던 것 비슷하게 아마도 이제는 철없는 아마추어 천문학도들 밤 관광을 시키는 것도 그렇게 나쁜 idea가 아닐 듯하다.

레지오 친목회, 2012

한 해가 서서히 저물어가기 시작하는 올해의 마지막 달 12월, 첫째 일요일 12월 2일 오후 2시에 우리 레지오 단원들의 친교를 위한 레지오 연차 총 친목회가 열리면서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은 성탄절과 송년의 분위기로 서서히 접어들었다.

나에게 이 레지오 연말 총 친목회는 올해로 벌써 3번째가 되었다. 첫해의 친목회는 입단 2개월도 못 미치는 예비단원(선서하기 전까지 단원등급)이었을 때여서 사실 레지오의 ‘문화’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저 ‘신 나게’ 노는 정도로만 알았다. 하지만 비록 ‘노는’ 시간은 있었어도 비교적 차분하고, 경건하게 진행이 되었던 느낌이었다. 레지오 교본에 의하면 이 친목회의 의도가 분명히 적혀있다. 모르는 단원들과 친교를 이루는, 바로 그것이었다.

 의도적으로 군대의 체계를 갖춘 레지오에서 단원들끼리 친교를 갖는 것은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건전한 친교를 이루는 것도 레지오의 목적을 달성할 때 도움이 되는 정도에서 까지 중요한 것이었다. 절대로 ‘사교적’인 단체와는 달랐다.

그러다 보니 단원들 간의 교류가 비교적 적어서 그런지 만나면 서먹서먹 할 때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도와주려는 것이 일 년에 딱 한번 있는 이 연차 총 친목회였던 것이다.

작년까지는 쁘레시디움 별로 ‘장기자랑’ 같은 것으로 했지만 올해는 완전히 바꾸어서 장기(talent) 별로 모든 단원들이 자유로이 섞여서 발표를 하게 되었다. 이런 방식의 의도는 바로 ‘모르는 단원 간의 친교’를 노린 것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단점은 거의 전혀 모르는 단원들이 서로 모여서 ‘연습’을 하는 것이 전 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이었다.

합창, line dance, clogging(tap dance와 비슷한), 사물놀이, 청년 팀들의 ‘강남 스타일‘ 등이 있었는데, 내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은 그 흔한 합창(chorus)밖에 없었다. ‘춤 종류’는 절대 질색이기 때문이었다. 나이를 먹으면 ‘무조건’ dance를 하는 사람들에게 좀 미안하지만 조금 바보같이, 우습게 보이기 때문이었고 사실 나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것은 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장기’는 그저 조용히 노래를 하는 합창인데, 올해는 그것마저 조금 싫증을 느꼈는데, 이곳 역시 99.9%가 female, 여성동무들.. 그들의 목소리에 남자가 맞추는 것.. 생각보다 힘들다. 여자들 속에 ‘파 묻히는 것’, 소싯적에는 대환영이었지만, 지금은 그것도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내가 모르고 지내던 ‘소수민족’ 남자(들)과 중창을 하는 ‘기발한’ idea 였다. 연숙에게 의논을 하니, 의외로 대환영이었다. 모르는 ‘남자’를 알게 된다는 것도 괜찮고, 거의 여성위주인 행사에서 남자들이 모여서 노래를 한다는 것도 신선하지 않은가?

행사 한 달 전에 생각을 굳히고, 남성동무 들을 찾았는데.. 이것이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요새 세상에 완전히 여자세상 이라고 는 하지만 정말 정말 남자를 찾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특히 신앙단체에서는 그 현상이 더 심한 것이다. 그야말로 남자란 ‘것’은 희귀한 존재였던 것이다. 거의 포기를 하려 던 참에 구세주같이 한 사람을 찾았는데, 연숙이 부단장으로 있는 꾸리아의 서기였던 자매님의 남편 형제님, 그도 레지오 단원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노래를 무척이나 즐기고 잘하는 형제님 이었고 나보다 나이가 2살 정도 아래여서 노래의 세대가 거의 비슷했다.

한 가지 문제점은 진한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있고, 목소리가 나에 비해서 ‘엄청’ 우렁 찬 것… 하지만 이것들은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우리가 친목회에서 부를 곡은 모두 3 곡으로 정해졌는데, 시작할 때 다같이 부를 곡과, 정식 program에서 우리 둘이 부를 곡이 2 곡이었던 것이다. 

선곡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지난 7월 초 레지오 교육 피정 당시 불렀던 복음성가 중, 2곡이 아주 가사를 포함해서 좋았다. ‘주님이 좋아요’ 와 ‘실로암’ 이 그것이었다. 나머지 한 곡은 1979년 발표되었던 그룹 ‘해바라기’의 ‘사랑으로’.. 이 곡은 특히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께서 좋아했던 것이라, 더욱 마음에 들었다.

곡이 정해지고 나서 제일 큰 문제는 60대의 머리로 3절까지 되는 가사와 기타의 코드.. 이것은 정말 큰 challenge에 속했다. 결과적으로는 그런대로 무난하게 끝을 낼 수 있었지만, 이것들을 ‘외우는’ 비결은 의외로 간단했다. ‘바보처럼 반복‘하는 연습.. 그것이었다. 아마도 프로들이 쓰는 방식이 그것일 것이다. 머리를 쓰는 것이 아니고, 기계적인 반복 연습인 것이다. 처음에는 악보 stand를 사용해서 악보를 보려고도 했지만, 그것은 너무나 소극적인 모습이었다. ‘안경’을 끼고 악보를 응시하는 ‘노인네’의 모습이 얼마나 웃기겠는가?

실제로 ‘공연’을 할 때, 역시 나의 우려가 현실로 되었다. 같이 나온 형제님의 목소리가 엄청 큰 것.. 거기다 그 형제님은 마이크를 손에 들고, 입에 대고 불렀으니.. 나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마이크 stand를 통한 관계로 뒤에서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나는 기타 반주자로 등장한 꼴이 된 듯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큰 문제가 되겠는가? 그런대로 신선하게 60/70/80 style(통기타)로 불렀고, ‘남자들’ 만의 모습도 보였고, 잘 모르던 형제님도 사귀게 되었으니.. 목적은 달성한 것이었으니까.

 

위에 있는 audio track은 이번 남성 이중창을 위한 연습 session중의 하나를 record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바쁜 시간에 1시간 정도 짬을 내어서 4번을 연습 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이것을 다시 들으면 또 하나의 추억이 될 듯하다.

Advent 2012, 대림절

거짓말 조금 보태서 바로 엊그제Advent 2011을 지낸 느낌이 들 정도인데.. 이 나이에 너무나 진부한 표현일 것 같다. 60대에서 60마일로 세월이 흐르고 70대에는 70마일로.. 아주 공감이 가는 말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것은 작년 대림절을 비교적 실감 있게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슬그머니 12월 1일, 2012년의 마지막 달로 접어들었다. 무언가 또 거의 뚜렷한 이유 없이 머릿속이 바빠지는 느낌.. 이것이 바로 holiday blues의 시작일 것이다. 이것이 나는 ‘지독히’도 싫은데 빠짐없이 찾아 든다. 특히 12월에..

사실 2012년 holiday는 이미 지난 11월 셋째 목요일 Thanksgiving Day로 시작이 된 상태이다. 올해의 ‘추수감사절 (이 번역된 말이 조금 무리인 듯 느껴짐은?)’ 내가 기억하는 한 우리 가족은 이날에는 꼭 ‘핵가족’이 다 모여서 turkey meal을 즐겼는데, 드디어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예외가 생기고 말았다. 큰 딸 새로니가 Miami, Florida로 친구와 같이 vacation을 가 버렸기 때문이다. 조금 배반당한 느낌이 들 정도로 기분도 그랬지만, 이제 아~~ 우리 가족, 가정도 변화를 겪고 있구나 하는 실감도 들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가족이 만드는 turkey early dinner를 생략하고 대신 크리스마스에 turkey 를 하기로 했다. 조금은 안 되었는지 작은 딸 나라니가 그 다음날 자기 집에서 맛있는 요리를 해 주겠다고 해서 ‘염치불구하고’ 그곳에 갔고, 식사 후에는 Life of Pi 라는 새로 나온 fantasy 영화를 같이 보았다. 거의 일년 만에 가보는 ‘진짜 극장’이었다.

올해의 대림절은 어떨까.. 크게 다를 것은 없을 것이지만 조금 더 ‘성숙된 믿음’으로 대림절을 지내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지난 사순절부터 시작된 ‘평일 마사’ 참례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서 대림절 동안도 마찬 가지일 것이다. 내가 속하고 활동하고 있는 레지오는 내일 연차 총 친목회를 마지막으로 올해를 마감한다.

올해, 내가 생각해도 참 열심히 레지오를 살았다. 비록 나타난 성과는 많지 않아도 내가 느끼는 나의 변화, 그것은 큰 성과인 것이다. 내년에는 가능하면 눈에 보이는 외적인 성과가 나오기를 기도하고 있다.

15W Behringer Acoustic Amp
15W Behringer ‘personal’ Acoustic Amplifier

내일은 대림절 주일 시작이고 오후에는 우리의 ‘또 하나의 본당’인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가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열린다. 연숙이 꾸리아 부단장인 ‘여파’로 나는 여러 가지 눈에 잘 안 보이는 ‘봉사’를 해야 한다. 주로 여성 단원들이 대부분이라 남자의 역할은 대부분 ‘근육적’인 것 뿐이다.

하지만 올해는 조금 ‘소수 족’인 남자단원의 사기도 살릴 겸 해서 나와 새로 알게 된 다른 ‘남성’ 박 대건 안드레아 형제와 총 친목회에서 노래를 부르기로 했고, 지난 몇 주 몇 번 만나서 노래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남자 중창단’을 예상하고 사람들을 모으려고 했지만 나로써는 무리였다. 워낙 남자단원의 수가 적고, 있어도 너무나 바쁜 것 같았다. 포기하려 했지만 다행히 이 안드레아 형제와 ‘의기투합’이 되어서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Seymour Duncan acoustic pickup
Seymour Duncan acoustic pickup

덕분에 그 동안 가끔, 조금씩 ‘즐기던’ 나의 야마하 기타.. 얼마 전에 Seymour Duncan ‘Woody SC’ acoustic guitar pickup과 앙증맞게 조그맣고 예쁘게 생긴 Behringer AT-108 15-Watt acoustic mixing amplifier를 구입해서 이번에 쓰게 되었다.

지난 7월 달 허윤석(요한) 신부님이 지도하셨던 레지오 교육피정 때 ‘신나게’ 부르던 ‘개신교 스타일’ 복음 성가 ‘주님이 좋아요’, ‘실로암’과 김수환 추기경의 애창곡이었던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골라서 연습을 하고 부르게 된 것이다. 내일singing duet performance의 결과에 상관없이 나는 그 동안의 연습과정을 통해서 얻은 ‘즐거움’ 하나 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여자가 아닌 남성을 알게 되었다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닐까?

Personally amplified YAMAHA guitar
‘Personally amplified’ old YAMAHA guitar

올해의 대림절은 어떻게 보내게 될까? 우리는 그렇게 흔한 holiday travel은 100% 없을 것이고, 아.. 그렇다! 올해는 지난 십 수년 동안 못했던 손으로 쓰는 정성 드린 성탄 카드, 연하장을 ‘우체국을 통해서’ 보내는 것을 해 보련다.

내 인생에서 알고 지냈지만 잊혀진 수많은 사람들, 찾을 수 있는 대로 찾아서 ‘내가 살아있다’ 는 것을 알리련다. 그것만 해도 나는 진정한 ‘구세주를 기다리는’ 대림절의 의미를 조금 알 수 있을지 모른다.

 

레지오 입단 2주년

우리(나와 연숙)의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소속, 성모님 군단의 최전방 소대,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 지난 몇 개월 동안 많이 변했고, 현재도 변하고 있다. 많이 변했다고 했지만.. 이것이야 말로 sea-change라고 부를 수 있고, 그것은 바로 perfect storm을 뚫고 나온 느낌이었다. 그중에 제일 큰 변화, 그것도 충격적인 것은 역시 우리의 사랑하는 단원, 친구, 영적 선배.. 은효순 요안나 자매님.. 영웅적인 암 투병을 하시던 용감하고 멋진 여성, 결과적으로 성모님은 그녀를 더 심한 고통에서 구해 주셨을까, 한창 더울 때였던, 7월 26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다.

솔직히 우리들은 ‘흔치 않은’ 기적을 바라고 있어서 그랬을까.. 끝까지 더 오랜 동안 우리와 함께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서 조금은 충격적인 떠남이었다. 그 자매님은 우리, 특히 우리에게 잠시 살다가는 이 세상을 어떻게 작별을 하는 가 하는 특별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도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나야지’ 하는 말을 하였다. 그 짧은 말이 이 자매님이 마지막 순간들을 살아간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아닐까?

나로써는, 2년 전 레지오에 입단을 안하고 살았으면 이런 ‘귀중한 체험’들은 사실 상상도 못했을 것이라서, 생각하면 할 수록 나를 이, ‘진리와 행동’의 집인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으로 이끌어 주신 모든 사람들에게(특히 연숙) 머리가 숙여지는 감사가 이어진다.

요안나 자매님의 선종과 거의 같은 시기에 다른 단원 자매님의 (미국인) 남편께서 선종을 하셨다. 비록 지난 몇 달간 예상을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timing이 참 놀라웠다. 그렇게 갑자기 가실 줄 몰랐던 것이다. 미국인 남편이어서 장례미사, 연도의 절차가 우리들과 달라서 조금 더 신경이 쓰였겠지만, 모든 것들이 비교적 잘 마무리를 지었고, 특히 그 무더운 날씨에도 우리 레지오 단원들은 정성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완전한 폭풍’ 같은 일들이 끝나자 마자 우리 단원들은 다시 단장, 부단장이 떠나야 하는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것도 사실은 몇 개월 전부터 알고, 예상하던 일이었지만, 그 과정이 사실 생각만큼 부드럽지 못했다. 간부진들이 조금 더 신경을 써서 조금 더 매끄럽게 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간부들, 그것도 제일 핵심인 단장 부단장이 떠난다면 그 뒤에 제일 큰 문제가 무엇인가? 당연히 새 간부진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그것, 그런 변화의 준비가 비록 위에 말한 폭풍과도 같은 시련들이 있었다고 해도 별로 되고 있지 않았다. 만사가 바쁘기만 한 단장님의 사정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정들었던 곳에 조금 더 세세한 신경을 썼으면.. 하는 아쉬움은 지금까지도 남는다.

그런 과정에서 연숙이 단장, 내가 서기로 ‘어쩔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승진’ 했던 것은 충분히 예견이 되었고 큰 무리는 없다고 하지만 나머지 부단장, 회계 직을 채우는 과정이 참.. 기가 막히게 어렵고, 심지어 놀라움과 실망의 연속이었다. 우리 부부는 최소한 ‘순명과 사명’의 의식은 잃지 않았다.

하지만 제일 놀라웠던 사실은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던 단원이었던 분들의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예상도 못했던 언행과 반응이었는데 나는 이것을 한마디로 small Kafka moment로 이름을 지었다. 그만큼 우리 부부는 놀랐던 것이다. 레지오 선서, 순명의 정신 같은 것들을 벌써 잊어버렸나 할 정도의 언행에 놀라기도 했지만, 다음은 ‘차가운 현실’을 느끼게 하는 실망으로 이어지고, 곧바로 damage control 로 이어졌다.

12명까지 불어나 ‘승승장구’하던 우리 레지오가 거의 몇 주일 만에 6명 이하로 떨어지는 쓸쓸한 공기로 휩싸이고, 심지어 적막감까지 느낄 정도였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의 bible, 레지오 교본들에 언급된 ‘경고’ 들을 실감하게 되었다. 조그만 시련기인 것이다. 군대와 같은 조직인 레지오에서 leadership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가 절감하게 되는 첫 시련기라고 할 수 있을까?

다른 조직과 다르게 우리는 ‘사령관’인 성모님이 계시고 보호한다고 늘 생각은 하지만 우선 매주간 동안 살아 남아야 하는, survive하는 급박한 문제는 우리들이 풀어야 하는 것들이 아닌가? 군대에서 군인의 숫자에 문제가 생기면 그것은 거의 치명적인 것이다.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새로운, 그것도 에너지가 충만한 젊은(상대적으로) 여성 단원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고, 그 단원이 씨앗이 되어서 다른 예비단원들의 입단도 어렵지 않게 꿈꾸게도 되었다.

그런 와중에 나는 레지오 입단, 역사적인 2주년을 맞게 되었고, 지난 2년간 나의 ‘변화’를 조금씩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암만 생각해도 나는 참 많이 변했고, 변해가고 있다. 세속적인 자질구레한 습관들의 변화는 어렵지 않게 식구들에 의해서 발견되고 심지어 놀라워한다. 특히 연숙은 크게 나타내지는 않지만 (거의 의도적으로) 간접적으로 나의 변화를 ‘즐기고’ 있는 듯하다.

쉽게 말해서 out of closet같은 느낌.. 이제와 다른 세상을 보고 느끼는 2년 간이었다. 그전에는 내가 어떻게 살았을까 할 정도였다. 급기야 그런 나의 변화를 연숙은 공개적으로 평신도 주일 강론에서 밝히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물론 2년은 어떻게 보면 아주 짧은 기간일 수도 있지만, 나의 레지오와 연관된 세월들은 참으로 귀중하고 길었던 경험의 연속이었다. 단적인 예로 새로 알게 된 성모님과 성모신심(Marian Devotion)은 나에게 새롭고 귀중한 보물이었다. 궁극적인 진리인 성삼위로 향하는 지름길, 안전한 길을 제공하는 우리의 어머님, 보호자를 찾게 된 것이다.

그곳으로 향하는 비교적 안전한 것, 묵주기도.. 그것의 진실과 참 뜻도 깨닫게 되었다. 비록 레지오 2년 생의 초보자이지만 남은 여생의 한계를 생각하면 남보다 10배의 노력이 필요함을 절감하며 ‘월반’을 꿈꾸지만, 그것이 그렇게 쉬울까?

지난 8월 15일에 끝이 난 “33일 봉헌” 과정 이후에 나의 우주,세계관은 아주 폭풍과도 같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제야 무엇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지도 짐작하게 되었고, 아.. 이것이 바로 진리, 진실이었구나 하는 생각, 왜 이런 사실들을 1982년 영세 후 30년이 지난 지금에게 알게 되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았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을 감사하는 것이 더 옳을 듯하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이제는 최소한 뒤로 물러설 것 같지는 않다” 는 사실이다.

Ready to trash Google Chrome

For the last few months, I have been wondering what’s wrong with this Google Chrome browser. It began with the flash video (embedded), stuttering audio and video, sometimes got locked up. A few googling revealed a few tricks like “chrome://plugins” which seemed helped for a while. Now, switching between tabs is getting harder and harder, mostly the whole tab page locked up, the tab renders a ‘white’ page. So, what’s going on here? The mighty Google engineers, what the hell are you doing? The browser was a such a joy to use for long time, after Firefox. In desperation, I switched back to Firefox.. .well… it is flawless! I know I have to forgo the very convenient Chrome’s syncing tool, but I don’t care anymore.. Bye Chrome.

평신도 전연숙 베로니카

 

 

결국은 끝이 났다. 지난 일요일은 ‘아마도’ 대한민국 전례력에 의하면 평신도 주일이었던 모양이다. 분명히 이곳 나의 교민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은 아틀란타 대교구 소속이라서 머나먼 대한민국의 전례력에 좌지우지 되지 않아도 될 것이지만, 그런 것들은 흑백을 가리듯 분명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한마디로 grey area인 것이다. 따라서 이곳 순교자 성당도 그때 그때 ‘편리한 전례’의 관습을 따르는 모양이다.

그래서 지난 일요일은 대한민국 식으로 ‘완전한’ 평신도 주일의 전례를 따랐고, 신부님의 강론도 평신도가 대신 맡아서 하게 된 것이다. 나의 추측이지만 이것은 아마도 작년부터 실시가 된 듯한데, 작년 6월에 부임하신 서강대 예수회 소속 하태수 미카엘 신부님께서 지시하신 것이 아닐까.. 그리고 작년의 평신도 주일에도 평신도였던 서재욱 사목회장이 강론을 했던 것을 video를 보고 알았다.

1960년대에 있었던 바티칸 2차 공의회 (Vatican II) 이후 평신도의 역할은 그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이상으로 눈부시고 확장되어가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쉽게 말하면 지독하게 보수적인 천주교회가 민주화가 되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르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 정도일 것이다. 이것은 고도의 ‘정치적’ 기술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갈릴레오를 처단했던 커다란 오류도 문제지만, 진짜 문제는 ‘완전한 방종적 자유’를 갈구하는 불완전한 인간들의 요구에 쉽게 부응하는 그것일 것이다. ‘완전한 평등’의 환상아래 너무도 많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들을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자행하고 있는 사실은 어떤가?

하지만 바티칸 2차 공의회의 덕분에 교회 내에서 여성들의 지위는 눈부시게 향상한 것은 사실이고 이제는 여성들이 없으면 몇 시간도 교회가 움직일 수 없게 된 듯하게 되었다. 그런 시대의 흐름 때문일까.. 올해 평신도 주일의 신부님 대신하는 강론이 연숙에게 돌아온 것이다. 이런 것들은 ‘나서기 좋아하는 남자’들 몫일 텐데 겨우 레지오 꾸리아의 부단장 정도의 명함으로 선택이 된 것을 보니 역시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사람들 앞에 서본 경험이 ‘소싯적’에 그렇게 많았던 연숙도 이번에 이런 ‘요청’을 받고는 완전히 긴장을 했던 것 같았다. 강론 대에 서서 신부님 강론 대신 한다는 것은 조금 stressful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을 했지만 하태수 신부님도 만만치 않았던지, 굴복하고 말았고 그것을 지난 일요일에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옆에서 보는 입장이었지만 수수방관할 입장만은 아니었던 것이, 그 강론의 주제가 바로 나였던 까닭이었다. 그저 ‘돌아온 탕자’ 에 비유하면 딱 맞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나’ 였다. 나의 ‘과거’가 적나라 하게 들어나게 되는 것에 거부감을 처음에 느끼긴 했지만, 그런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 줄 수도 있는 잠재력을 생각하고 가만히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 평신도 강론은 반응도 좋았고, 본인도 앓던 이를 뺀 것 같은 들뜬 기분으로 다음날을 보내게 되었으니, 이것으로 하태수 신부님이 밀어부친 평신도 주일의 성과를 느끼게도 된 것이다.

 

A Day in the Life, November 2012

2012년 11월이 한창이었던 11월 14일경, 오랜만에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나의 Olympus digital camera  를 손에 들었다. 그 동안 이것을 잊고 살았던가.. 어떤 ‘모습’이라도 이곳에 담아야겠다는 초조함을 느낀다. 밖을 보니 찬란하게 절정을 향한 아틀란타의 가을하늘.. 반세기전, 어린 시절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삼청 공원을 향한 북악 줄기의 짓 푸른 가을 하늘을 반 상상,반 회상을 한다. 반 세기전의 그때는 서울의 도심(강남, 한강 아래가 완전히 논과 밭이었을 때)에도 그렇게 공해가 심하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 아직도 숲에 쌓여있는 이곳 아틀란타의 푸른 하늘이 그때 당시의 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비교적 큰 사건 같은 것이 없었던 밋밋한 시간들 속에서 나의 생각을 사로 잡았던 것들은 어떤 시시한 것들이었을까? 아마도 5년+ 역사를 자랑하는 ‘걷기’, 아니 ‘개와 같이 걷기’를 빼어 놀 수 없을 것이다. 2006년 사랑하는 처 조카 수경이네(대현이 엄마)가 고국에서 놀러 왔을 때 그것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간신히 걷기 시작한 대현이를 우리 subdivision의 가파른 언덕에서 불호령을 하며 걷게 하던 그 이후부터 나는 ‘혼자서’ 매일 걷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르렀다. 15년 전 우리 집을 다녀갔던 원서동, 재동학교 죽마고우였던 안명성이 나보고 걸으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갔지만, 그때서야 걷게 된 것이고, 지금은 완전한 습관이 되어서 우리 집 깡패 강아지 Tobey를 걷게 하면서 같이 나도 걷는다.

4계절이 뚜렷한 이곳, 걸으며 4계절을 보고 느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중에서 제일 차분하게 아름다운 때는 역시 늦가을이 아닐까? 영롱한 빛깔들과, 장엄하게도 느껴지는 낙엽들.. 인생의 가을을 느끼게도 하는 그 낙엽들을 보며 또한 변하는 것과 변치 않는 것을 생각한다. 집 주위를 걷다 보면 꼭 playground를 지나게 되고 그곳에는 간단한 그네, 미끄럼틀 같은 것이 있고, 근래에는 물기만 없으면 그곳에 올라가 Tobey 와 함께 누워버린다. 짓 푸른 하늘이 우람한 단풍나무들 속으로 보이고 나는 이곳에서 꼭 묵주기도를 계속한다. 이것이 요새 나의 일과요 즐거움 중의 하나가 되었다. 묵주기도가 즐거움이라면 좀 비약적인 것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 되었다. 그래서 인생은 재미있다고 할까?

요새 나의 머리 속은 어떤 것들이 생각되고 있을까? 일주일도 더 지나간 미국의 대통령선거.. (이것을 대선이라고 하던가) 막상막하, 손에 땀을 쥐게 하리라는 예상을 뒤엎고 바락 오바마(참 그 이름 한번 요상하다) 쉽게 재선이 되었다. 압승은 아닐지라도 그 정도면 뒤에 군말들이 없을 정도로 깨끗이 이긴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이번 선거야 말로 제3의 인물이 갈망되던 때였을까.. 생각한다. 또 다르게 이름이 요상했던 ‘밋 롬니’ (아니면 밑 롬니인가?).. 무언가 참 답답한 인물이었다.

지지 않으려면 견해와 입장을 1초도 되지 않아서 바꾸는 사람, 도대체 그의 속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 하는 것 보다 더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와 반대쪽에서 지나치게 약자의 쪽에 서서 ‘정 많고, 따뜻하게’ 보이려 안간힘을 쓰다 못해서 나중에는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살림 차리고 아이를 낳는 것 ‘완전히 OK’ 라고 선언을 했던 불쌍한 현직 대통령.. 그렇게 까지 해서 연임을 하고 싶었을까?

차별 당하는 그들 (동성애)..을 법적으로 보호하는 것과 그것도 ‘문제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임을 어찌 그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하지만 권력의 유혹은 사실 뿌리칠 수 없을 정도였나 보다. 이제는 성숙해진 나의 신앙 체계에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개소리’ 였다. 이것은 종교계를 ‘보호’ 한다는 공화당 극우론자들이 다 망쳐놓은 결과다. 정치와 종교가 섞이게 되면 이런 비극이 나오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새로니가 집을 사려고 realtor와 집 구경을 시작했다. 그 애의 월급으로 단독주택은 어림도 없지만 condo는 ‘사정거리’에 있고, 부동산 경기가 완전히 죽었던 여파로 여건이 좋았나 보다. 우리와 같이 임시나마 살고 있는 것이 어찌 불편하지 않을까? 그것은 완전히 상호적인 것이다. 우리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 큰 자식과 사는 것.. 이제야 힘든 것을 절감한다. 세대 차이는 그렇게도 골이 깊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놀러 갈 수 있는 정도의 거리를 두고 따로 사는 것이라고 누누이 들어왔는데 이제는 200% 동감을 한다.

11월은 가톨릭에서는 전통적으로 ‘위령의 달’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돌아가신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생각을 하는 한 달인 것이다. 그래서 지난 11월 3일에 우리가 사는 마리에타에 있는 한인 공원묘지에서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하태수 미카엘 주임신부님의 집전으로 위령미사가 있었다. 올해에는 우리부부도 11월 한 달 동안 매일 우리의 돌아가신 부모님들의 영혼을 위한 ‘연도’를 하기로 하고 이미 시작해서 위령미사는 비록 처음이었지만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10여 년 전에 만들어진 한인 공원묘지.. 그 동안 참 많은 한인들이 이곳에 묻혔음을 보게 되었고, 2002년에 교통사고로 갑자기 떠나신 평창이씨 이주황 선생님(이만수 군의 아버님)의 묘소도 그 이후 처음으로 보게 되었고, 7월 말에 선종하셨던 레지오 친구, 은요안나 자매님의 묘소도 다시 보게 되었다. 이렇게 매일 연도를 하게 되었는데, 그렇게도 ‘지루하고 이상하였던’ 연도.. 돌아가신 부모님께도 좋았겠지만 이것을 하는 당사자인 우리가 더 위로를 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이런 통상 기도를 진심으로 믿게 되었고, 반드시 이런 것들이 의도하고 있는 대로 영혼들에게 전해 질 것이라는 것도 믿는다. 이것이 올해 11월 위령의 달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일 것이고, 우리들의 부모님들.. 이정모, 양점순, 전현찬, 김유순.. 아버지, 어머니, 장인, 장모님.. 연옥의 고통이 그치고 영원한 평화의 나라에 들게 됨을 계속 기도하며 깊어가는 가을을 맞는다.

 

Rosary under deep Marietta Autumn sky

묵주기도, 빛의 신비를 누워서 하기에 알맞는 깊은 가을 집 근처의 playground에 있는 그네에서

Autumn leaves near swimming pool

왁자지껄 시끄럽던 수영장, 테니스 코트는 적막 속에 잠기고 사람들 대신 가을의 선물, 황금 색의 낙엽들만 딩구르는 깊은 가을..

 

송민도, 송민영, 김시스터즈, 목장의 노래

YouTube video를 download하는 software (요새는 이런 것들은 모조리 Apps라고 부른다.. 이것도 Steve Jobs때문인가. 이것은 물론 applications software를 줄인 말이다.), ‘Free YouTube Download‘를 test 하다가 우연히 까마득히 먼 옛날 1950년대의 유행가 ‘목장의 노래’를 찾고 보게 되었다. 이 clip은 사실 나에게는 거의 충격적인 것이었다. 2분 30초의 짧은 이 video에는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그대로 담겨 있었기 때문이고, 그 추억도 사실 거의 60년도 넘은 것이기 때문이다.

노래 자체는 아직도 가사를 외울 정도로 생생한 것이지만, 여기의 주인공들은 사실 책, 잡지 같은 것으로만 보았을 뿐이다. 이들은 거의 radio를 통해서 알려진 유명인 들이다. 그러니까 TV가 널리 보급되기 전에 이들은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이 video clip은 정말 보물과도 같은 것이다.

여기서 주인공은 물론 가운데 서있는 송민도 씨, 들러리를 서있는 아가씨들은 그 유명한 김 시스터즈, 악단 지휘자이며 멋진 baritone을 구사한 미남은 송민도 씨의 남 동생인 송민영 씨.. 와~~ 이들은 모두 그 당시 유일한 AM Radio HLKA를 통해서 육이오 전쟁 후 피로에 지친 국민들에게 그나마 위로와 기쁨을 주던 최정상의 연예인들이었다.

이 video가 어떤 show를 보여 주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1955년에서 1957년 사이가 아닐까..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 2학년에서 4학년 사이가 될까. 왜냐하면 김 시스터즈는 그 즈음에 미국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아마 송민도 씨도 그 즈음에서 연예계를 떠났을 것이다. 녹음 상태가 그 당시의 녹음 기술 과 오랜 세월 탓으로 별로지만 송민도 씨의 육성은 정말 그 당시에 듣기에 우렁차고 낭랑했었다. 김 시스터즈는 완전히 미국으로 갔고, 송민도 씨와 송민영씨는 그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듣기에 송민도 씨도 미국으로 왔다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른다. 송민도 씨의 이 ‘목장의 노래’를 들어보면, 아침을 ‘아츰’.. 하루를 ‘하로’라고 발음을 하는데 이것은 어떤 사투리인지 모르겠다.

 


목장의 노래, 송민도, 1950년 대

 

귀신들, 성인들, 그리고 영혼들..

10월 31일은 이곳 미국에서 Halloween (할로윈), 이어서 다음날, 11월 1일은 가톨릭 전례력으로 All Saints Day (모든 성인의 날?), 11월 2일은 역시 가톨릭의 달력으로 ‘위령의 날‘ 이다. 그 다음날, 11월 3일은 아직도 귀에 익은 광주학생 사건을 기념하는 ‘학생의 날’.. 줄줄이 이어진다. 종교성이 거의 없는 할로윈은 나쁘게 말하면 ‘귀신’에 대한 날이고, 모든 성인의 날은 정 반대로 귀신을 쫓는 ‘성인’들의 날이다. 이런 이유로 할로윈 다음 날을 모든 성인의 날로 정한 것이 아닐까?

얼마 전에 연숙과 얘기를 하다가, 올해부터는 11월 달이 ‘위령의 달’ 임을 생각하며 돌아가신 우리 두 부모님들에게 ‘매일’ 위령기도를 바치자고 합의로 하였다. 연숙은 오래 전부터 이것을 하고 싶었던 것 같지만 역시 내가 요지부동으로 가슴을 닫고 있어서 못하다가 올해는 무언가 아무 문제없이 이렇게 ‘멋있게’ 합의를 본 것이다. 나의 마음이 그 정도로 열려있음은 알고 나 자신도 사실 놀랐다.

이제는 우리의 자랑, 오랜 전통의 천주교의 일년 흐름을 아주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고 그런 오랜 전통적 달력을 음미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5월의 ‘성모성월’과 11월의 ‘위령의 달’은 더 나에게 가까이 느껴짐은 왜 그럴까? 성모성월은 어머니가 주제요, 위령의 달은 돌아가신 부모, 조상, 친척들에 관한 것이라서 그럴 것이다. 가슴 깊이 고여있는 어머님, 보지도 못한 아버지에 대한 사무친 서러움, 그리움, 불효막심 등등이 한꺼번에 솟아 오르는 듯한 감정.. 그것이 무서워 항상 나는 도망만 하며 살았음을 인정하기에 더욱 더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특히 어머님께 따로 특별히 연도는커녕 기도 한번 변변히 못한 나는 사실 이런 날이나 달들을 생각하기도 무서웠다. 그러다가 레지오에 입단하게 되면서 ‘남 들’에 대한 연도와 기도를 자연적으로 시작했고, 이제는 조금씩 마음도 열리고, 더 이상 도망하고 싶지 않았다. 고향에 돌아온 듯이 살고 싶었다. 내 자신이 나의 부모님께 연도와 기도를 바치게 될 진정한 용기가 생김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영혼의 존재’를 나는 믿게 되었고, 영혼에 대한 기도나 연도가 정말 의미 있다는 것도 믿는다. 그 중에서도 나의 부모의 영혼께 기도를 하고, 혹시라도 아직도 고통을 받는 곳에 머물지 않게 기도를 할 수도 있게 되었다. 비록 하느님을 모르고 떠났다 하더라도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11월 3일, 고국의 학생의 날.. 에 이곳에서는 11월 위령성월을 맞아 아틀란타 지역 두 천주교회(순교자, 성 김대건) ‘합동’으로 마리에타 한인 공원묘지에서 위령미사가 거행 되었다. 매년 얘기만 듣던 것.. 올해는 ‘무조건’ 참례를 하였다. 집에서 비교적 가까이 있는 이곳에는 한인들만의 공원묘지가 따로 조성되어있고, 지난 7월에 떠나신 우리 레지오 단원 요안나 자매도 이것에 안치되어 있고, 2002년 4월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신 ‘평창이씨’ 종친 이주황 선생님도 이곳에 계셔서 우리와 익숙해진 곳이다. 가톨릭의 예식을 따랐지만 그 의식은 많이 우리나라의 전례 예절이 가미된 것이라 더욱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 오기도 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나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는가.. 아니면 많이 이런 것들에 익숙해 졌는가.. 만감이 교차됨을 느꼈는데, 특히 1980년대 초 천주교 영세 후에 ‘멋도 모르고’ 장례미사에 갔다가 ‘시체’를 처음 보고 놀라서 그 다음부터 절대로 그런 곳에 안 가겠다고 ‘결심’을 했었던 나의 유치한 믿음을 회상하며 웃어보기도 했다. 아.. 영혼들이여.. 편히 편히 잠 드소서..

길고도 짧았던 3개월

3개월 만에 이곳, 고향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blog count가 288에서 멈추었던 것을 기억한다. 곧 300을 돌파하리라 생각을 하곤 했지만 그곳에서 하나도 나아가질 못했다. 3개월, 나는 이 3개월 동안 과연 무엇을 생각하며 살았을까.. 깜깜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결론적 말하면 그렇게 즐거운 시간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7월 중순에 나는 이곳에서 떠났고, 10월 중순이 지나서 다시 ‘서서히’ 돌아오고 있다. 절대로 짧았던 기간이 아니다. 그 동안 ‘쓴 것’이 거의 없었다. 어떻게 그 동안의 역사를 찾아내어 남길 것인가.. 한숨만 나오며, 아마도 그런 ‘고역’ 을 생각하며 더욱 이곳에 오기 꺼렸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잘못된 성격 중에 하나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나는 나의 역사를 ‘절대로’ 잊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하나 찾아내어 남길 것이다. 그것이 이 blog의 제일 중요한 목적이기도 하니까.

미워도 다시 한번

미원도 다시 한번, 1968
미원도 다시 한번, 1968

42년 만에 다시 생각해 보는 유치하기도 하고, 진부하기도 한 이 구절은 물론 1968년에 대한민국에서 나온 영화의 제목이요, 주제곡의 이름이기도 하다. 우연히 Internet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참 감회가 깊었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42년이면 강산이 최소한 4번 변할 정도라고 하지만 요새의 강산은 아마도 그보다 더 변했으리라..

나는 이 영화를 아마도 개봉관이었던 을지로 4가쯤이 있었던 국도극장에서 당시 같이 모이곤 했던 혼성그룹의 여대생들과 같이 보았을 것이다. 당시는 사실 외국, 특히 미국문화가 판을 치던 당시라서 국내의 영화는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따라서 대학생이 되면 사실 국산영화는 피하는 것이 ‘멋’이었다. 국내 영화를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 영화만은 예외였다. 그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온 ‘수준 작’이라고 평가를 했었던 것이다.

최고의 배우였던 신영균, 문희, 전계현, 박암.. 우선 cast가 화려했고, 비록 ‘신파조’의 진부한 story였지만, 사람들의 깊은 공감을 자아낸 영화였었던 것 같았다. 우리의 나이에서 그 영화를 보면, 그저.. 와 저 남자 참 복도 많구나.. 하는 정도였지만 남녀관계, 특히 결혼과 가정과의 역학관계를 어렴풋이 짐작하게도 되었다.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느끼는 것 중에는 신영균, 생각보다 세련되었고, 연기도 무리가 없어 보이지만 상대적으로 문희의 연기는 기억보다 실망적이었다. 그 당시 영화기술의 수준으로 자기의 목소리를 넣을 수 없었으므로(동시 녹음) 성우가 대신 대사를 했는데.. 그것이 문희에게는 너무나 어울리지를 않았다. 당시에 나는 문희가 ‘최고의 미인’으로 기억에 남았는데, 지금 다시 보니 사실은 ‘별로’ 였는데.. 이것은 아마도 내가 보는 ‘미인’의 눈이 바뀌어서 그런 것 같다.

영화의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나는 영화에서 보이는 그 당시의 배경 물들 (길거리, 버스, 택시, 집안 풍경)이 더 흥미로웠다. 내가 기억하는 것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음을 보고 나의 기억은 퇴색되거나 왜곡되지는 않았다는 안도감도 있었다. 이 영화의 주제곡도 영화와 같이 크게 인기가 있었는데, 당시의 역시 최고로 잘 나가던 ‘이미자’, ‘남진’이 같이 불렀고, 나는 영화보다 주제곡이 더 좋았던 기억이다.

멜러드라마의 특징은 모조리 갖춘, ‘눈물을 찔찔 짜게’ 만들기는 했지만 역시 그 목적은 달성한 영화였고, 4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봐도 느낌이 비슷하니 이것이야 말로 한국의 movie classic이 아닐까?

이 movie classic미워도 다시 한번‘은 이곳에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재동학교 백승호

어린 시절 친구들을 회상할 때면 그 느낌들이 갖가지임을 느끼곤 한다. 물론 생각만 나도 피하고 싶은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너무나 희미한 기억들이라서 그런지 실제라 기 보다는 파란 담배 연기 속에서 춤추는 듯한 거의 꿈처럼 느껴지곤 한다. 한마디로 더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싶은 친구들인 것이다. 이런 것들을 지금 급속히 저하되는 듯한 기억력과 싸우면서도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나의 blog은 사실 그것을 위해서 시작했고 계속 그런 노력을 돕는 역할을 해 왔다고 생각이 된다. 영어와 ‘한국어’ 사이를 오가며 나의 감정을 알맞게 나타내는 것도 이제는 쉽지는 않다. 사실 머리 속에서 맴도는 어린 친구들은 그 당시의 사진이나 앨범들을 보면 쉽게 알아 낼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다. 분명히 친하게 뛰어 논 기억은 나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이다. 그래도 그 중에는 더 자세히, 생생히 기억이 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백승호의 기억이 유난히 머리에서 맴돈다.

백승호, 재동국민학교졸업앨범에서, 1960
백승호, 재동국민학교
졸업앨범에서, 1960

나의 뇌리에 ‘강하게’ 새겨져 있는 이 백승호는 1958년 서울 재동국민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의 친구였다. 한때 아주 가깝게 지냈고 분명히 서로 좋아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어느새 인가, 우리는 헤어지고 말았다. 웃기는 것은 그렇게 친구였었던 기간이 1년도 채 안되게 짧았지만 아직도 어제 본듯한 기분인 것이다. 원래가 잘 웃는 얼굴의 이 친구, 백승호 6학년 때 헤어지고 말았지만 멀찍이 볼 양이면 저 애는 나의 친구였다는 생각은 하곤 했었다.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백승호는 완전히 나의 시야, radar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대부분의 국민학교 동창들이 바로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다시 연락이 되었던 다른 친구 신문영처럼 이 친구도 거의 꿈같이 연세대 campus에서 보게 되었다. 신문영은 몇 초 정도 잠깐 보고, 혹시 저 친구가 신문영.. 하며 어 떨떨 했었지만 이 백승호는 아예 자주 얼굴이 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ROTC(학훈단, 일명 바보티씨) 생도의 모습으로 자주도 보였다.  

문제는.. 그렇게 나의 눈에 보일 때마다 왜 나는 반가운 마음을 접고 ‘모른 척’을 했었을까? 성격 적으로 그 당시 나의 먼저 나서서 백승호를 아는 척 못했을 것이다. 그저 멋 적은 것이다. 느낌에 어떤 때는 백승호도 나를 보았다고 느꼈지만 확실하지 않다. 만약 그가 나를 알아보았다면 그도 멋 적어서 나를 모르는 체 했을까.. 그것이 아직도 궁금한 것이다.

이런 사연으로 백승호의 image는 이곳 저곳에 남았다. 재동국민학교 5학년 시절의 사진 2장, 재동국민학교 졸업앨범, 하지만, 연세대 앨범.. 을 기대했지만 그는 1966년 입학으로 나보다 일 년 앞서 졸업을 한 듯, 그곳(1971년 앨범)에 그의 모습은 없었다. 사실, 학훈단 베레모를 쓴 모습도 기억을 하는데, 아마도 공학부 토목학과를 다녔던 듯 하다. 더 늦기 전에 그의 살아온 역사를 알고 싶지만, 그것은 너무나 무리한 바램일 것 같다. 하지만 build it, they’ll come의 교훈을 기대하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닐 듯..

 

재동국민학교 5학년 사진, 동그란 표시가 백승호, 1958년

재동국민학교 5학년 사진, 동그란 표시가 백승호, 1958년

 

찾았다! 재동학교 6학년 1반 신문영

나는 몇 개월 전 이곳,   나의 blog에서 연세대 시절을 회상하면서 재동국민학교 동창 신문영을 그의 졸업앨범 사진과 함께 같이 다루었다. 그 많은 재동국민학교 동창생 중에서 신문영은 나의 희석되어가는 뇌리에 뚜렷이 남아있기에 얼마 전에 그로부터 소식을 들었을 때,나는 사실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가 나의 blog을 ‘우연히’ 보았기에 연락이 되었을 것이라 serony dot com blog의 제일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제일 궁금했던 사실들 대부분을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내가 제일 궁금했던 것은 1960년 중학입시에서 어떤 중학교에 갔느냐는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경복중학이었다. 다른 재동 동창 심동섭이 경복으로 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또 다른 동창 조성태, 정세종, 장세헌 등도 같이 경복중학교에 갔다는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 조성태, 정세종은 같은 분단에 있어서 아는 동창들이고, 장세헌은 1학년 때 같은 반인 것만 기억을 한다.

이번에 email로 느끼는 신문영은 솔직하고 직선적인 듯 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중학교 당시 공부를 지지리도 못해서 삼선 고교로 갔다’ 고 하는 것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와 비슷하게 부선망 단대독자(아버지가 없는 외아들)로 군대를 안 갔었다고 했고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고.. 느낌에 아주 ‘정석적’인 인생을 산 듯했고, 명함을 보니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을 한 것 같아서 흐뭇했다.

이 친구를 통해서 재동학교 동창회가 있다는 것도 새로 알게 되었는데, 회장은 김영환, 일년에 한번 정도 모인다고 했고, 거기서 이만재, 육동구 등도 보았다고.. 듣기만 해도 흐뭇하고.. 부럽고.. 꿈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나는 꿈에서만 볼 수 있었던 광경들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모이면 사진이라도 볼 수 있게 되기만 바라지만, 세월의 횡포로 얼굴이나 제대로 알아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신문영을 기억하면 꼭 같이 떠오르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6학년 (1959년) 때 같은 분단 (공부를 제일 잘하던 1분단)에 있을 때 어느 날 이른 아침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에 담임 박양신 선생님이 나와 신문영을 부르더니, 심부름 좀 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듣고 보니, 선생님이 댁에서 가져와야 하는 물건 (서류?)이 있으니 둘이서 곧바로 선생님 댁에 갔다 오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 당시에 우리에게는 큰 일에 속했다. 왜 나와 신문영에게 그런 심부름을 시켰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둘을 믿고 그런 일을 주신 것이 내심 기뻤던 것은 사실이다. 그 시간에 학교를 빠져 나와서 인사동 입구의 선생님 댁으로 가는 것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모험 같고 신기롭게만 느껴져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는 모양이다.

아들 딸 모두 결혼, 손주들까지 있는 신문영, 부럽기도 하고, 보고 싶어 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쉽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반세기가 훨씬 지난 뒤에도 가상적인 해후가 이루어지는 세상이니 이만큼이라도 오래 살았다고 위로를 하며 만족하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을 듯..

Men’s Night

 9월 22일 토요일 저녁에는 정말 오랜만에 men’s night의 모임이 있었다. 이것은 진희네 그룹 부부모임에서 ‘wife’ 들만 빠진, 그러니까 남편들만의 모임이고 이름도 men’s night이 된 것이다. 이런 모임은 주로 이번 모임의 host인 최형의 wife가 집을 비웠을 때 이루어지고, 따라서 모이는 장소도 최형의 Sugarloaf Country Club 안에 있는 ‘으리으리’한 ‘진짜’ mansion(?) 에서 모이곤 한다. 이번에도 최형의 wife가 여행을 떠나서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이럴 때의 저녁 음식준비가 사실은 문제인데(wife가 없으므로), 역시 으리으리한 mansion에 걸맞게 catering service로 그것은 해결이 되었다.

근래에 들어서 이 그룹 모임은 예전대로 꼭 하게 되는 술(주로 wine) 대신에 음악, 특히 악기연주를 즐기는 쪽으로 그 분위기가 바뀌고 있어서 wife들이 조금 호감을 갖게도 되었는데, 이날도 모두들 한가지 악기를 들고 와서 맛있는 음식과, 얘기, 그리고 노래와 연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이가 들면서 거의 유행적으로 악기를 배우는 여유를 갖는 모양인데, 나는 아직도 그런 것을 못 해보았다. 최형은 ‘소원대로’ $2000짜리 guitar를 사서 그룹지도를 받고 있어서 모두들 호기심 어린 관심을 보이고 있고, 윤형도 $500짜리 ‘연습용’ saxophone을 사서 개인 지도를 거의 일년 째 받고 있다고 했다.

 

 

이날 처음 들었는데, 사실 놀랄 정도라 ‘멋지게’ 그 결과를 보여주었다. 나야 옛날부터 유일하게 하던 것이 guitar여서 별로 특기사항은 없고, 이태리 가구의 전사장은 guitar를 옛날에 잘 치던 것 같은데, 요새는 많이 잊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목소리가 좋아서 악기대신에 vocal로 한 몫을 잘 치른다.

나는 근래에 들어서 이 그룹의 영향을 받아서 조금씩 guitar를 찾으며, 기억이 나는 곡들을 찾아서 다시 배우고, 연습을 하곤 한다. 나이 들면서 이런 것은 역시 건전하게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되고, 악기, 가사 외우기, guitar chord외우기 등등도 ‘기억력’ 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8월 말, 정말 길었던 여름

믿을 수가 없다. 이렇게 빨리 세월이 갔다는 사실, 바보처럼 흘러가는 시간을 지켜보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던 이 허무한 느낌, 8월 말 그것도 연숙의 생일이 코 앞에 다가 옴을 알며 더 허탈한 느낌을 받는다. 7월 하순에 시작 된 ‘예고 된’  끔찍한 일들.. 흡사 내가 우리 엄마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허무맹랑한 자기 세뇌로 세월을 까먹으며 살았던 오랜 세월이 불과 며칠 간으로 압축된 강렬한 충격, 하지만 비교적 ‘절제되고 조절이 된’ 반응으로 보냈던 7월 말.. 그것에 의한 강한 후유증으로 보냈던 8월 대부분의 시간들.. 나에게는 정말로 역사적인 의미를 갖게 하던 시간들이었다.

33일 봉헌을 위한 준비

성 루도비코 마리아의 "33일 봉헌"
성 루도비코 마리아의 33일 봉헌 지침서

33일 봉헌… 오래 전, 아마도 10년 전쯤일까, 이런 말도 들었고, 책도 본 희미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물론 모두 연숙을 통해서였다. 한쪽 귀로 듣고 1초도 채 안되어 다른 쪽 귀로 내보냈을 것이다. ‘전혀’ 관심도 없고, 흥미도 없고, 귀찮기만 한 이야기들로 들렸으니까.

그로부터 10년 뒤로 fast forward한 지금 나는 어떤가? 그것을 지금 ‘체험’적인 적극성을 가지고 대하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 나로서도 놀라운 자신의 변화라고 할 수 있고, 여기에는 더 높은 곳의 뜻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나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예전 같으면 상상이나 꿈도 못 꾸었을 그런 ‘추상적, 형이상학적, 신비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33일 봉헌, 더 구체적인 말로는 ‘봉헌을 위한 33일간의 준비’ 가 더 맞을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은 간단하게 그저 ’33일 봉헌’이라고 부른다. 간단히 말하면 33일 연속으로 ‘관상,묵상,기도’를 하고 그의 결과로 ‘공적인 인정’을 받게 되는 그런 것이다. 비록 매일 혼자서(사적으로) 하는 신심행위이지만, 이 행위자체는 완전히 공개적으로 알리고, 공개적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대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없는 듯 하다.

그런 것이 올해 나에게 ‘분위기’가 무르익었는지, 자연스레 다가왔다. 예전 같은 콧방귀나 거부감, 무관심이 많이 사라진 상태였고, 나는 나 자신을 시험대에 올려보고 싶은 장난기도 발동했다. 종교를 완전히 떠난 ‘세속적인’ 것으로 말하면 Tony Robbins같은 세계적 inspirational coach가 지도하는 $$이 엄청 소요되는 seminar에 ‘개인적’으로 참석한 그런 상황을 생각하기도 했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 기본적인 것은 ‘개인적인 변화’ 그러니까 change인 것이다. 변하지 않고서는 진전이 없다는 대명제가 아닐까? 나도 변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아주 세속적인 ‘낮은 곳’이 아니고 천상의, 높은 곳에서 나를 변화시킨다는 사실은 아주 매력적인 것이 아닐까?

 

St. Louis of Montfort best Marian classic
성 루도비코의 성모신심 best classic

이 33일의 ‘기나긴 묵상,기도’는 100% 17세기 프랑스 신부님인 몽포르의 성 루도비꼬 마리아 (St. Louis Marie Grignion de Montfort) 성인의 ‘작품’이다. 이 분의 성모신심(Marian Devotion)은 정말 역사적인 것으로, 20세기에 들어와서 레지오 마리애 운동으로 현실화 되었고, 근세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 일반적인 승인을 받게 되었다.

이 성인의 대표적 저서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 은 저술 후 100년이 지난 후에 ‘기적적’으로 발견이 되어서 지금은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신심, 방법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 레지오 마리애 신심의 기초가 된 이 신심은, 내가 레지오에 가입하면서 이렇게 자연스레 다가온 것이다. 이것을 접하게 되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마리아 신심을 비방하는 무식한 사람’들을 내가 전적으로 무시하게 되었다. 비방을 하려면 ‘좀 알고’ 하라는 소리밖에 나오질 않는 것이다.

 33일이 끝나고 봉헌하는 날이 일년에 6번으로 ‘고정’이 되어있어서 이것을 시작하는 날도 그만큼 고정이 되어있다. 내가 시도하는 때는 7월 13일에 시작이 되어서 8월 15일, 봉헌에 맞추어져 있다. 하루 최소, 약 1시간내지 1시간 반이 걸리는 이 신심 행위는 매일 미사를 강력히 권하는 조건도 있어서 아마도 ‘꽤 가치가 있는’ 무더운 여름을 예상케 한다.

나의 하루 일과를 어떻게 이것에 맞추어야 할지는 ‘무조건 해보고’ 조정해 나가기로 했고, 사실 그것이 제일 효과적인 길일 것이다. 이런 것은 ‘자세한 계획’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 자신의 ‘천상적’ 변화를 기대하며.. “Totus Tuus

 

총 33일

첫째 시기 12일

세속 정신을 끊음

1일

제 1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당신 제자로 부르심

2일

제 2일

양 진영

3일

제 3일

결단

4일

제 4일

권력과 명예

5일

제 5일

우상화된 육욕

6일

제 6일

지성주의

7일

제 7일

집단적 인간성

8일

제 8일

쾌락

9일

제 9일

거짓과 위선

10일

제 10일

자유에 대한 무절제한 갈망

11일

제 11일

삶에 대한 불안과 근심

12일

제 12일

생의 마지막 것들

 

둘째 시기 제 1주

자기 자신을 알기

13일

제 1일

자신에 대한 인식

14일

제 2일

자신의 죄에 대한 인식

15일

제 3일

내적 죽음

16일

제 4일

이기심

17일

제 5일

교만

18일

제 6일

나태

19일

제 7일

애덕이 없음

 

둘째 시기 제 2주

성모님을 알고 사랑하기

20일

제 1일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와 마리아

21일

제 2일

성령의 정배이신 마리아

22일

 제 3일

그리스도의 어머니시며 그 신비체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23일

제 4일

은총의 중개자이신 마리아

24일

제 5일

사도의 모후이신 마리아

25일

제 6일

묵시록의 여인

26일

제 7일

마리아 공경의 필요성

 

둘째 시기 제 3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하기

27일

제 1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

28일

제 2일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29일

제 3일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

30일

제 4일

모든 신심의 궁극 목적이신 그리스도

31일

제 5일

세례성사의 갱신인 그리스도께 의 봉헌

32일

제 6일

그리스도 안에서의 변화

33일

제 7일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로

 

다시 찾은 인호 형

인호 형, 김인호 형을 다시 인터넷을 통해서 다시 찾게 되었다. 실마리는 나의 blog 을 정말 ‘하느님의 뜻’으로 인호 형이 보게 된데 있었다. 시간적으로도 사실 아주 빨랐다. 요새는 가끔 이렇게 surreal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긴 하지만 이것도 점점 빨라지고 거대해지는 global information network를 감안하면 이런 추세는 가속화 될 듯 싶다. 비록 전화를 통한 음성은 못 들어도, 가깝게 느껴지는 문자 소식으로 50년이 가까워오는 거대한 세월의 징검다리를 넘는 듯 느꼈고, 가벼운 흥분 감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더욱이 인호 형이 나를 ‘분명히’ 기억하는 사실에 더욱 반가웠다.

유명인이었던 박계형 여류 작가의 조그만 신문광고가 이렇게 나를 50년 전 나를 잠깐 가르쳤던 ‘가정교사 김인호’ 형을 찾게 되어서 형의 부인이신 박계형 여사에게도 특별한 감사의 심정을 전하고 싶지만.. 조금 시기상조가 아닐지 모르겠다. 그 옛날, 나는 여사의 ‘청춘 물’ 책을 ‘하나도’ 읽었던 적이 없지만 근래에 들어서 쓰신 책들은 무척 많은 관심이 간다. 특히 이번에 알게 된 여사의 심혈작인 ‘환희’는 더욱 더 관심을 갖게 된다.

대학생과 고교생으로 만났던 때를 50년 훌쩍 뛰어넘어서면 ‘호칭’부터 문제가 될 것이다. 나는 비교적 쉽게 그때와 같이 ‘인호 형’으로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웠지만, 인호 형은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난데 없이 나타난 환갑을 훌쩍 넘긴 ‘동생, 제자’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는 곤혹스러웠을까.. 이해가 간다. 활달한 성격이었던 것을 기억하면 그저 나보고 ‘경우 야..’ 하고 불러주면 너무나 반가울 터인데..

친절하게도 두 번째 편지에서 형의 ‘과거와 종교관’ 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글을 보내주셨는데, 아마도 형의 출신고교인 서울고교 동창회지에 투고된 글인 듯 싶었다. “인생은 Given Way“라는 제목의 일종의 ‘고백록’은 형의 고통과 영광스러움이 조화된 아주 멋진 신앙여정을 그리고 있었다. 이것으로 대강 나의 ‘형이 긴 인생여정에 대한 호기심’ 은 충족이 되었다. 대강 추측을 해 보면 우선 박계형 여사는 천주교 집안 출신이었고, 형은 관면혼배로 결혼을 했던 것 같아서, 그때까지만 해도 교인은 아니었던 듯.. 이 글로 나의 궁금증이 풀린 것은 다음과 같다.

  1.  나를 가르칠 때 상대생(인문계)으로 왜 그렇게 과학이론을 여담으로 가르쳐주었나 하는 것은, 형이 원래는 서울고교 재학 당시 이과에 속했고, 이공대를 지망했었다는 글에서 그 의문이 풀렸다. 하지만 ‘갑자기’ 공대 지망에서 상대로 바꾸어서 진학을 한 것이다. (이것도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도..)
  2.  박계형 여사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게 된 것은, 원래 형이 6.25 피난시절 대전에서 국민학교 다닐 때 박여사를 알고 지냈던 사이라고 했고, 대학졸업 후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와 같이 공부를 하던 1965년 형이 서울상대에 다닌 그때에는 사실 박계형 여사와 다시 만나기 이전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히 ‘나중에’ 형의 친구였던 건우형을 통해서 우리 집에 전해졌을 것이다.
  3.  인호 형이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알게 된 것은 역시 공군 장교 근무 중에 당한 ‘대형사고’ 의 후유증과, 이미 하느님을 알고 있던 문학소녀 박계형 씨와의 ‘운명적인 만남’ 때문이 아니었을까?
  4.  그러한 ‘부부결합’ 된 신앙가족이 꾸준히 신앙을 지키게 되었던 것은 다음에 일어난 첫 아기(아들)의 ‘생명을 건 수술’ 이 도움이 되었을까.. 그리고 거의 ‘공짜’로 받게 된 형의 영세도 ‘생각하며 서서히 진행된’ 긴 신앙여정에 커다란 활력소가 되었을 듯하다.
  5.  제일 궁금한 것은 역시 형이 ‘만들어 놓은’ 새로운 경영학 이론, dynamic management theory인데.. 단순히 요새의 networked economy를 의식하고 가볍게 만든 것이 아니고, 형의 인생관, 종교관, 세계관 나아가 우주관이 총 집결된 그런 조금은 ‘높은 곳’의 이론이 아닐까.. 특히 엉망진창인 세계경제, 특히 미국의 문제들을 생각하면 이제는 새로운 ‘절대적 기준’의 이론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렇게 해서 다신 ‘만난’ 형은 나에게 부인인 박여사의 심혈작 ‘환희 1.2부‘를 보내 주시겠다고 했고, 나는 정말 그 책을 읽어보고 싶다. 이것도 형의 인생 반려자였던 여사의 인생,종교관을 보여 줄 것으로 기대가 되기 때문이다. 인호 형을 처음 우리 집에 소개시켜 주었던 건우 형, 내가 ‘이건우‘ 가 아닌 ‘박건우’로 성을 잘못 알고 있어서 정말 당황하기도 했다. 그저 ‘건우 형’으로만 알고 있어서 성까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정말 ‘창피’한 노릇이었다. 나의 어머님이 아직도 살아계셔서 이 사실(인호 형을 찾은)을 알았으면 얼마나 반가워 하셨을까..

book, dynamic-management

 인터넷 경제에 부응하는 새로운 경영학 이론, 김인호 교수와  북경대 교수들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