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악 중의 추악한 인간들..

아주 가끔 세상에서 제일 ugly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을 한다. 생각하기 조차 싫은 것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하필 왜 그런 것을 생각조차 한단 말인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생각이 날 때가 있다. 그런 ‘부류’는 적지 않을 것 같다. 어렸을 적에는 ‘깡패‘들이 나의 #1 ugliest였던 기억이고, 미국에 와서 본 것 중에는 trash TV show에 나오는 얼굴들, 그 중에서도 으뜸은 The Jerry Springer Show에 나와서 머리채를 붙들고 싸우는 ‘돼지 같은’ 군상들.. 나는 세상에 아니 꿈에서도 그렇게 추악한 모습들을 상상조차 못했다.

그러다가 나에게 진짜 #1이 등장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북한 괴뢰 3대 김씨 왕조의 세 인간들.. 전범 일가: 김일성, 김정일, 김정운의 세 개XX들이다. 이 개XX들은 아마도 두 명은 이미 지옥으로 떨어졌을 것이고 나머지는 아마도 그의 ‘애비와 할애비’가 지옥에서 기다리고 있을 듯하다. No Further Question..

Lemon Grass day

Thai Restaurant, Lemon Grass
Thai Restaurant, Lemon Grass

완전히 한 겨울 날씨가 된 3월 1일, 쉽게 말해서 지나간 1월은 거의 늦은 가을이나 이른 봄 날씨였고, 2월 한달 동안은 완전한 겨울인 듯 을씨년스러운 날씨의 연속이다. 올해 Groundhog의 예측대로 봄이 일찍 온다는 것은 완전히 엉터리였음이 들어난 것이다.

2월의 마지막 날인 어제는 오랜만에 집 근처에 있는 타이 식당 Lemon Grass에서 연숙과 식사를 하였다. 집에서 밥을 해 먹기 귀찮아서가 아니고 무언가 ‘기념’을 하려고 일부러 간 것이었다. 오늘 3월 1일은 우리가 ‘매일 미사’를 시작한지 만 1년이 되는 날인 것이다. 그러니까, daily Mass 1 year Anniversary정도라고나 할까.. 하도 축하할 것이 없는 요새지만 이런 것도 자축을 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우리 둘에게는 무엇 보다 귀중한 의미를 가지기에 매년 3.1절과 함께 기념하기로 한 것이다.

2010년 가을 내가 레지오 마리애 행동단원 생활을 시작한 것도 큰 의미가 있었지만, 2012년 3월 1일에 시작한 매일미사 참례 결정은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우선 일주일에 한번 참석하는 레지오 마리애와, 매일 아침 9시까지 비록 집 근처지만 성당에 가서 아침 1시간을 지낸다는 것은 생각하면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비록 눈은 별로 없는 이곳이지만 흔한 말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성당엘 다닌 것이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솔직히 얼마나 갈까 둘 다 자신이 없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마디로 기우였다. 우리가 의지로 나가는 것 이외에 무언가 우리를 도와주는 느낌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작년 3월 매일 미사를 하면서 가끔, 지금은 작고하시고 없지만, 레지오 동료단원 요안나 자매가 같이 와서 미사를 보곤 우리 집에도 들려서 식사도 하기도 했다. 그 자매님의 말씀으로, 미사와 영성체가 얼마나 신심생활에 도움이 되는 가를 배우기도 했다. 신심생활에 주는 의미를 떠나서, 이렇게 둘이서 매일 집밖으로 ‘나간다는 사실’, 사람들을 만난다는 ‘사회적’ 의미도 생각해 보니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과거 오랜 시간 집에 틀어 박혀서 백일몽을 꾸던 때를 생각하면 그것은 참 위험한 생활 방식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타이 식당인 Lemon Grass, 연숙은 항상 ‘팟타이‘, 나는 100% ‘Broccoli Tofu‘를 먹는데, 정말 주방장의 조화인지 언제나 ‘똑같이’ 맛이 있다. 이것은 chef가 변함없이 그곳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라서 그런지 신문에 아주 좋은 review까지 났다. 꽤 많은, 이름있는 식당들의 수명이 그렇게 길지 못한 때에 이곳은 1994년에 open한 이래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앞으로도 계속 그 자리에 있어서, 다른 일로 ‘자축’을 할 일이 있을 때 우리에게 service를 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Great Ubuntu Hope

Humanity towards others...
Humanity towards others…

내가 Ubuntu[표준 한글 표기는, 우분투 쯤 될까?]를 알게 된 것이 언제였던가? 생각보다 그리 오래 전은 아닐 듯하다. 아마도 2008년 경이었을까? 하지만 공식적으로 이것이 일반에게 공개, 배포된 것은 2005년 경이었다고 한다. 이 Ubuntu란 것은 물론 Open & Free computer operating system인 Linux의 한 ‘종류’이다.

Linux의 ‘핵심(kernel)’은 ‘한가지’이지만 그것 이외 부수적인 것들은 무수히 많다. 그것이 Free & Open system의 특징일 것이다. ‘기술’만 있으면 ‘누구나’ 조금씩 바꾸어서 ‘배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Free & Open‘ 철학은 정말 처음 나올 당시에는 ‘혁명’적인 idea였다. 특허로 꽁꽁 묶어 놓거나, copy-protection으로 방어하며 ‘고가’로 팔아야만 했던 computer software (OS 포함, Windows, Apple OS, etc)를 ‘공짜로’ 주겠다는 것은 사실 얼듯 듣기에 ‘미친’ 생각으로 들렸던 때.. 참.. 지금은 많이 많이 변했다. 그 말에 ‘일리’가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Microsoft Windows 급인 Linux(리눅스)인데, 물론 이것은 ‘처음부터’ 그런 Free & Open 철학으로 시작된 것이고, 그 ‘철학’만은 굳세게 유지되고 있다. 그들의 철학은 computer software는 모든 사람이 ‘무료’로 쓸 권리가 있고, 더욱 그것을 ‘발전’시킬 권리와 의무도 있다는 것인데, 역시 이런 idea는 Microsoft나 Apple 같은 business model과는 180도 다른, 정반대의 model임이 틀림이 없다.

하지만 미국인들의 ‘이익추구’ 성질을 어찌하랴.. 기어코 이런 free & open model에다가 profit을 가미한 model도 만들어 내서 의외로 잘 운영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Red Hat 이나 IBM 같은 큰 회사들 인데, 이들은 ‘공짜’ linux를 만들어 대기업에 service를 팔아서 돈을 번다. 그러니까 ‘물건’은 공짜지만 그것을 유지, 수리하는 것으로 돈을 버는 것이다. 의외로 이것이 그렇게 큰 business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이런 새로운 business model은 이제 아주 튼튼한 자리를 잡았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위의 예들은 ‘일반대중’과는 거리가 있는 대기업의 server system들인 반면 일반 대중들이 쓰는 PC desktop system은 Microsoft 의 Windows나 ‘머리는 조금 아둔하지만 돈은 많은’ 사람들이 쓰는 overpriced Apple computer 가 든든하게 독점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중에서도 비싼 Apple Mac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은 Windows가 거의 ‘거저’ 돈을 벌고 있었는데, 그것이 최근 2~3년 안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그 원인 중에는 mobile system(smart phone, tablet)의 폭발적 보급과 오늘의 화제인 Ubuntu system같은 open & free software 의 일취월장하는 성능의 향상.. 등이 있을 것이다. Mobile system에서는 역시 stupid but rich 를 봉처럼 생각하는Apple의 iPhone 같은 iXXX가 거의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했었지만, 현재는 Google의 Android 가 시장의 거의 3/4를 차지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역시 open system인 Android가 그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배경으로 지금은 computing system history로서 아주 ‘중요한’ 시점에 있는 듯하다. 소위 말해서 post-PC era를 모두 예견하고 있는데 그 때의 ‘패자’는 과연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봐도 ‘지독히도 이기적’인 Apple model은 그들이 ‘아무리 쌓아둔 돈’이 많다고 해도 장기간 sustain하기에는 큰 문제가 있다. 그들의 철학은 그 옛날 ‘고철‘ mode IBM을 연상시킨다. 모든 것을 ‘우리가 발명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mindset은 이제 한 물이 갔기 때문이다. 현재 Apple이 바로 같은 mindset, 아니 더 심하게 고립적이고 독선적으로 ‘돈을 긁어 모으고’ 있다. 또한 조금은 다른 방법으로 오랜 기간 (1990년 이후, 현재까지) 거의 monopoly로 monster가 되어버린 Microsoft는 이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지경이 되어가고 있다.

개인 적으로 나는 다른 많은 사람들 처럼 Microsoft customer로 오래 있었는데, 그것은 corporation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고 지금과 같은 credible한 competition도 없었기에 한마디로 choice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corporation을 떠나게 되면서 나는 그런 무상 혜택의 제한이 없어지고, 내가 고를 수 있으면 아무 것이나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Linux가 서서히 자리를 잡게 되었고 나의 ‘구세주’로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자유’로운 Linux는 사람들의 구미에 따라 많은 flavor로 분열이 되어서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혼란’의 상태가 뒤 따라서, 각종 flavor마다 독특한 맛이 다르고, 새로 배워야 하는 짜증도 따른다. 강력한 ‘통제체제’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바로 free & open system의 특징이라서 이것을 해결할 뾰족한 수가 없는데, 결국은 최근 들어서 서서히 Ubuntu system이 ‘de facto‘ winner로 군림을 하게 되고, 많은 노력 끝에, 그것을 더욱 더 일반 대중이 쉽게 쓸 수 있게 ‘매끈하게’ 보이는 데 ‘거의’ 성공을 하는 것 같다.

특히 최근 version인 12.x는 어떤 feature들은 Windows를 능가하는 것들도 등장하고 있다. 나도 그 동안 virtual system으로 ‘가끔’쓰곤 하다가 현재는 거의 정기적으로 쓰고 있다. Windows를 쓰다가 이것을 쓰면 당장 문제가 소위 말해서 business-standard인 Microsoft Office가 없다는 어찌 보면 ‘치명적인 듯’ 한 결점이 있는데, 쓰고 나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그것과 거의 맞먹는 Libre Office 란 것이 있고 Microsoft Office과 ‘호환성’이 아주 좋기 때문이다. 누가 ‘꼭’ MS Office file을 원하지 않는 한 이것 또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Ubuntu all the way! Mark Shuttleworth

 

그러다가 결국은 Ubuntu의 ‘장기적’인 development model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결국은 앞으로는 Microsoft의 Windows desktop system를 적수로 삼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독자적인 ‘미래형’ system으로 가겠다는 정말 ‘대담한’ idea의 출현인 것이다. 이곳에 있는 Youtube video를 보면 알 수 있듯이, Ubuntu 하나로 smart-phone, tablet, desktop 전역을 ‘매끈’하게 해결하겠다는 아주 야심적인 계획.. 이것을 정열적으로 거의 맨손으로 이끌고 있는 사람이 바로 Ubuntu 창시자 Mark Shuttleworth (a South African), 그는 억만장자에다가 idea가 많은 사람이고 그야말로 ‘좋은 쪽의’ visionary에 속하는 사람이다. Ubuntu란 뜻, ‘humanity toward others‘처럼, 그는 Steve Jobs같은 egomania, megalomania가 아니며, 그의 passion처럼 모든 일이 풀려나간다면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명의 혜택’을 골고루 받게 될 것이다

The Homecoming, 귀향

Homecoming, 다른 말로귀향‘ 정도가 될까? 하지만 영어와 한글의 어감은 분명히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할 것이다. 언어는 그 원산지의 문화를 나타내는 것이고, 영어의 homecoming은 아무래도 서구문화적인 것, 한글의 귀향은 한반도의 배경을 흠뻑 가지고 있는 그런 것이다. 귀향은 늙어가시는 어머님을 만나러 오는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어도 어머니, 그리고 고향이 그리워 시골길을 걷는 나그네가 연상이 되고, homecoming.. 하면 어떨까.. 폭풍설이 쏟아지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속에 있는 자기가 자랐던 통나무 집, 그곳에는 사랑하는 어머님이 계신 그런 집으로 기를 쓰고 찾아가는 다른 나그네, 그런 것이다.

사실 오늘 나와 연숙은 서양적인 homecoming에서 한국적인, 김치냄새기 풍기는 듯한 우리의 고향 집으로 ‘귀향한 온 기분이었다. 1994년 이후 ‘처음’으로 일요일 주일 미사를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 와서 본 것이다. 거의 20년 만인가.. 물론 2010년 가을부터 이곳에 레지오 단원으로 화요일 마다 들락거리고, 일요일에도 ‘과외 행사’에 참여를 하긴 했지만 “진짜” 미사를 이곳에서 본 것은 아주 우리에게는 커다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한마디로 ‘고향’에 온 것이다. 1994년 즈음 이곳을 ‘완전히’ 떠날 때, 언제 다시 올지는 전혀 idea가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우리, ‘최소한 나’는 완전히 하느님을 떠나게 된 것이다.

우리 집 근처에 있는 미국성당에 꾸준히 다니면서 익숙해지고 친근해지고 해서, 더 ‘귀향’할 구실도 없었지만, 하느님은 오묘하신가.. 아주 작은 발걸음으로 우리를 ‘고향’으로 이끌었다. 2010년 가을 레지오에 입단하기 전과 비슷한 느낌.. 무엇인가 변하게 되리라는 불안하기도 한 심정 속에서 무언가 ‘결단’이 필요함을 느끼며 몇 개월이 지났는데, 우연만은 아니게 오랜 옛 ‘후배, 지인’ 설재규씨와 재회를 하게 되고, 그것의 열매가 오늘, 우리의 ‘귀향’으로 goal-in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이런 모든 것들이 ‘우연’만은 아님을 느낀다.

20년이 지난 주일미사의 풍경은, 흡사 내가 Rip Van Winkle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주는 그런 것이었다. 어제 본 듯한 연대동문 이원선씨를 그곳에서 보았지만, 역시 그와 알았던 것도 20년 훨씬 전이었다. 어쩌면 10년 20년.. 이렇게도 오래된 세월이 지났단 말인가? 모두가 생소한 얼굴들.. 내가 알았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현재의 목표가 한 달에 한번 이곳에 오려는 것이지만, 그것도 어떤 방향으로 나를 이끌고 가게 될지, 나도 자신이 없다.

 

 

Hagood HardyThe Homecoming

 

귀향과 homecoming이란 단어를 떠 올리면서 연관되어 생각나는 것, 바로 The Homecoming 이란 제목의 연주 곡(instrumental).. 역시 아련히 떠오르는 이 단어와 그 감미로운 연주 곡.. 이 감미로운 곡은 1970년대 말에 총각으로 Ohio State University에 다닐 때, office (graduate student)에서 자주 듣던 것이고, 그 때마다 세상에서 저렇게 감미로운 것이 있을 까 감탄을 하곤 하던 그런 곡이었다. 한번은 나의 옆자리에 있던 전기과 후배 이재현씨에게, 나는 저 곡을 들을 때마다 ‘쉬 마려울 정도로’ 찌릿하다고 ‘고백’을 해서 모두 한바탕 웃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 당시에는 그 곡의 title을 몰랐고 아주 후에 그것이 The Homecoming임을 알았다. 이 곡은 캐나다 출신작곡가 (Hugh) Hagood Hardy 의 곡으로, 1975년에 발표된 것으로 ‘일설’에 의하면 TV movie였던 (Canada) drama: Anne of Avonlea/Green Gable에 삽입된 곡이었다고 한다.

고향.. 하면 어렸을 적에 일제시대 때를 연상하곤 했다. 그 어렵던 시절 고향을 ‘강제로’ 떠나 만주 등지로 갔던 동포들.. 그들은 찌들게 가난했던 고향이었지만, 죽을 때까지 그곳을 그리워했다. 세월이 지나고, 6.25 동란 때는 ‘지옥’같던 북한 땅을 떠났던 동포들.. 그래도 죽을 때가지 갈 수 없었던 고향을 그리며 살았다. 그 이후에는 어떠한가? 멀리 갈 필요가 없이 나도 지독하게도 넓은 바다를 건너와 또 ‘죽을 때까지’ 고향을 그리며 산다. 아니 이제는 가 보아도 ‘없어진’ 고향을 꿈 속에서 그리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한글 단어 ‘고향, 귀향’ 이 주는 영원한 느낌이고 의미일 듯 하다.

 

2월 중순, 와~ 춥다..

¶  2013년 2월도 반을 넘기고 이제 겨울과는 아주 멀어진 듯한 날씨에 익숙해지더니, 역시.. 자연의 ‘엄마’, mother nature는 못 말리나? 예고도 거의 없이 하루아침에 영하..로 그것도 낮 기온이 영상을 간신히 유지하는 싸늘함, 역시 아직도 춘분이 공식적인 봄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듯하다.

모처럼 한가한 날 들을 맞이하고 있지만, 이런 날이 계속되어도 문제다. 사람은 역시 몸이고 마음이고 계속 움직여야 사는 것이니까. 2013년 사순절이 지난 수요일에 Ash Wednesday(재의 수요일)로 시작이 되었지만, 사실 우리의 매일 routine이 크게 바뀐 것이 거의 없다. 지난 일년을 거의 사순절처럼 살려고 해서 그런가.. 이건 너무 자화자찬일 것이지만. 커피도 계속 마셔대고, 즐기던 것을 끊은 것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올해의 사순절에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성취’할까.. 이것이 계획으로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성 루도비코 마리아의 33일 봉헌 과정에 다시 한번 도전해 볼 마음은 아직도 있다. 2월 20일부터 시작이 되니 만큼 아직도 생각해볼 여유는 있다. 지난 해 바쁘고 힘들었던 한 여름에 열심히 33일 과정을 거쳤고, 그 후에 내가 느꼈던 것이 생각보다 훨씬 좋았지만, 알았던 것 보다 의문과 생각할 것들이 더욱 많아졌음을 알았고, 역시 다시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기에 또 역시, it’s now or never의 정신으로 도전해 볼까..

 

¶  요즈음 내가 즐기며 시간을 죽이는 것이 있다면 역시 computer system hacking정도 밖에 없을 것인데, 그 중에서도 요새 나의 관심은 mobile OS, 그 중에서도 Google의 Android (on Nexus tablets, mobile phones) ecosystem이 제일 관심이 간다. 지난 가을에 연숙 생일 때의 선물이 Google의 Nexus 7 tablet이었고, 올해 들어서 우리 가족이 family plan으로 T-mobile Samsung Galaxy phone으로 바꾼 뒤에 그 쪽으로 관심이 간 것이다. 두 system 모두 Android system이어서 이것 하나만 익히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을 듯하다.

이런 것들이 요새 들어서 워낙 바쁘게 변하고 있어서 하나를 배우면 2~3년 만에 ‘고물’이 되어 버린다. 이런 것들 모두 한마디로 embedded computing device들이고, 이것을 지난 25년 넘게 ‘직업적으로 만들어’ 온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감회가 깊다.

 

¶  정말 오랜만에 김인호 형으로부터 email이 왔다. 지난 연말 연시 때 연락이 되지를 않아서, 혹시 아프신가.. 아니면 세계일주 여행을 가셨나 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그 동안에도 계속 ‘연구’만 하신 듯, ‘김인호의 경영, 경제 산책‘이라는 장문의 column을 쓰셨고 그것의 web links(1, 2, 3, 4)도 같이 보내 주셨다. 잠깐 읽어보니 경영, 경제 쪽의 전문용어들이 많이 나와서 그런지 나에게는 모두 생소한 것이 많았다.

나의 ‘경제, 금융’ 등에 대한 일반적인 인상이 대부분 부정적이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전문 용어를 제외하면 이런 평론의 논지는 짐작이 간다. 우리 세대 (인호 형은 나보다 조금 위지만) 입장의 경제, 경영론이겠지만, 그런 매체에 실린다는 사실은 세대에 구별되지 않는 보편성이 있다고 생각이 된다. 형만 동의를 한다면 그 평론들을 나의 blog에 전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  2월 중순에 느끼는 으스스한 추위와 ‘라디오엔 대설주의보, 남쪽엔 꽃 소식, 영동 산간 지방의 때아닌 폭설.. 하나도 아까울 것 없는 세월’을 얘기하는 김재진 시의 구절이 멋지게 어울리는 그런 날이었다.

 

세월

김재진

 

그런 잠 있었네. 낮고 흥건한

간다던 이 가고 없는

빈방에 불 켜놓고

후회없이 자리라 저녁 거르고 누운

라디오엔 대설주의보

남쪽엔 꽃소식 분분한데

영동 산간 지방엔 때아닌 폭설

환한 이마 찌푸린 채

가고는 오지 않을

아니면 오고는 가지 않을

그러나 사실은 가든지 말든지

아까울 것 없는 세월

하나도 아까울 것 없는 세월

때로는

잘 나가던 시절의

해 놓고 지키지 않던 맹세 따라

가리라 가리라 노래하다 못간

그런 날 있었네.

품팔던 사람들 돌아오는 길목마다

소리없이 타버린 심지처럼

버려야지 버려야지 마음먹다 울던

그렇고 그런

그래서 그런

낮고 흥건한 세월 있었네.

 

 

¶  40년 전 이 맘 때는 무엇이었을까? 그러니까 1973년.. 그 해 6월에 나는 나를 25년 동안 품에 안아주었던 고향산천을 등지고 미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는 나의 긴 이어지는 역사가 되었다. 돌이켜보는 나의 마음은 어쩐지 슬프기도 하지만, 그 때는 희망과 낭만의 쌍곡선의 연속이었고, 그 당시의 추억은 역시 우리의 등대 pop song에 고스란히 얽혀있다.

그 당시에 어떤 것들이, 그 중에서 Lobo의 노래들은 쓰레기 같은 많은 것들에 눌려서 오랜 동안 숨어있었다. 다시 들어도 그것은 역시 ‘명곡, classic’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다. Don’t expect me to be your friend, Me and You and a Dog named Boo.. 정말 정말 오랜만이다!

 

 
Don’t Expect Me To Be Your FriendLobo 1973

 

 
Me and You and a Dog Named BooLobo 1973

Ash Wednesday 2013, Lenten wishes

 

For you are dust, and to dust you shall return. – Genesis 3:19

 

어느덧 사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이 내일, 코앞으로 다가왔다. 2013년 Lenten season이 시작되는 것이다. 오늘은 ‘금욕과 극기’의 40일을 조금이라도 늦추려는 듯 안간힘을 쓰는 ‘살찐 화요일 , Fat Tuesday: Mardi Gras‘, 아마도 New Orleans는 이것으로 오늘 하루 종일 떠들썩 하지 않았을까?

재의 수요일, 2013
재의 수요일, 2013

나의 매년 매년 재의 수요일과, 그에 따르는 사순절은 느낌도 달라지고, 의미도 다르게 느끼며, 무언가 조금씩 ‘발전’하는 듯 느낀다. 이것은 정말 나에게 만족스러운 현상이다. 이 나이에 나에게도 이렇게 ‘발전’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내 자신도 믿어지질 않는다.

작년의 사순절 때와 나는 한 살 더 먹은 것 이외에 무엇이 달라졌을까.. 생각한다. 작년에 비해 올해 나는 더 많은 영혼들과 작별을 했고, 그런 와중에 나는 ‘역사적’인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 (St. Louis Marie de MontFort)의 ’33일 봉헌’과 그 뒤에 따르는 우주관의 격한 변동을 경험하였다. 이것이 작년에 맞은 사순절과 올해의 차이일 것이다. 이것을 발판으로 올해 40일에 나는 무엇을 ‘바치고 바랄’ 것인가?

예년에 하던 통상적인 아침 커피 피하는 것 같은 것은 이제 조금 그 매력이 떨어졌다. 우리 Holy Family 성당 주임신부님도 ‘하지 않는 것’ 보다 ‘더 하는 것’에 신경을 쓰라고 하신다.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간다. 더 적극적인 삶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라는 뜻일 것이다. 무엇인가 절약을 했거나 삼가 했으면 그것을 누구에게 준다거나, 레지오의 정신으로 이웃에게 본격적으로 선교를 한다던가 하는 것들이 ‘적극적’인 것 들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나는 어떤 ‘적극적’인 것들을 하여야 할 것인가..

Rediscovering Catholicism작년 7월 중에 했던 위에 말한 ’33일 봉헌’.. 그것을 할 당시에 나는 더위와 싸우며, 계속되는 장례, 연도, 슬픔, 이별 등을 경험할 때였다. 그래서 그 ‘봉헌’이 의미는 더 있었을 것이겠지만 정성을 들여 집중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번 사순절에 다시 그것에 ‘도전’을 할까 생각 중인데, 아마도 하게 되지 않을까? 그것 이후에 내가 ‘받았던’ 것들을 생각하면, 정말로 이것은 우선 순위 중에 으뜸일 것이다.

그 동안 ‘천천히’ 읽어오던 책, Matthew Kelly의 걸작, 책 Rediscover Catholicism을 정독, 완독을 하면 어떨까? 교황 베네딕트 16세의 은퇴 선언으로 다시 교회는 앞으로 갈 길을 찾는 기로에 서있어서 이 책은 정말로 의미가 있을 듯 하다. 이런 것들.. 다 좋지만 역시 레지오 단원으로써 제일 값진 것은 ‘헤매는 영혼을 구하는 것’, 그러니까 새로운 ‘전사, 단원’을 찾아내는 것인데 이것은 현재 나에게는 거의 Mt. Everest처럼 높게만 보인다. 앞으로 가야 할 시간은 많지 않고, 이렇게 할 것은 많은데 어떻게 이런 것들 현명하게 풀어나갈 것인가.. 역시 어머님의 도우심이 필요함을 절감한다.

What? Why..why not, Benedict XVI

오랜만에 일찍 아침잠에서 깨고 보니 아직도 깜깜하고, 시계를 어렴풋이 보니 6시도 되지를 않았다. 아침잠을 이렇게 설치면 기분이 과히 좋지 않음을 알기에 ‘무조건’ 6시까지 뒤척이며 기다렸다. Flash flood watch까지 예보된 축축한 늦겨울.. 귀를 기울여도 빗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지붕의 gutter에서 새는 빗소리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는 이런 새벽이면 유난히 잘 들리고, 심지어 문학적으로 느껴지기도 해서 기대했지만 그래도 조용하다.

모처럼 깜깜한 가운데 침실에서 나가니, 역시 우리 집 귀염둥이 고양이 Izzie가 배고프다고 문밖에서 기다리고, 나는 거의 로봇처럼 내려가 밥을 주고, 오랜만에 ‘진한’ 커피를 갈아 내리고 아직도 켜지지 않은(programmed-timer에 의해서 아침 6시 45분에 켜지는) living room light를 ‘강제로’ 키고, 이번 달의 ‘주제곡’ Telemann symphony CD를 들으며 aroma가 ‘죽여주는’ Christmas blend Starbucks coffee로 이른 아침의 목을 축인다. 시간은 비록 일찍이었지만 이것은 내가 매일 아침마다 거치는 routine이다.

교황 베네딕트 16세
교황 베네딕트 16세

그런대로 해 없는 ‘여명’의 시간이 되면서 desktop PC로 streaming TV channel을 켜 보니.. 갑자기 머리가 띵~ 해지는 news가 흘러나온다. 그것을 듣고 보면서.. 내가 아직도 잠에서 덜 깨었나 할 정도로 믿을 수 없는 news를 보고 있었다. Pope is resigning at end of the month.. 교황, 2월 28일에 사임..무슨 comedy인가.. 며칠 전까지 Angelus (삼종기도)에서 비록 느리지만 ‘건강한’ 얼굴을 본 것 같았는데..

‘거의’ 역사상 유례가 없다고 해서 더 놀란다. 마지막으로 ‘자진해서 사임’한 case는 15세기.. 우아.. 정말 너무하다. 전 교황, ‘복자’ 요한 바오로 2세(Blessed Pope John Paul II)는 혼신과 혼미의 몸과 정신으로도 끝까지 버티셨는데, 거의 ‘멀쩡하게’ 보이시는 베네딕트 16세(Pope Benedict XVI)는 왜 그런 ‘폭풍’과 같은 결정을 하셨을까? 공식적인 이유가 ‘건강상’의 문제고, 분명히 그것이 이유일 것이라도 나는 믿는다.

요새 85세면 그 옛날의 85세는 아닐 것 같고, 교황의 오랜 경험과 명석한 두뇌는 젊은이 못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그런 결정을 하셨을까? 주위의 사람들도 거의 몰랐고, 그래서 더 놀랐다고 보도가 되고.. 논평하는 ‘바티칸 전문가’ 들도 한결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전 교황이 그렇게 오래 병마와 싸우면서도 교황 직은 고수하셨기에, 그런 과정을 또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교황이 그런 괴로운 결정을 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전 교황이 겪었던 ‘괴로운’ 과정이 지금 천주교회의 여러 가지 사정과 입장에 맞지 않고,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교회의 문제들을 보고, 오랜 동안 견딜 수 있는 젊은 교황의 출현을 기대했는지도.. 그분의 예외적인 신학적인 지식과 영성을 알기에 그런 어려운 결정을 믿는 것이 올바르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도 왜 지금인가.. 내일 모래가 사순절(Lent)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인데.. 우리에게 왜 이런 ‘분심’을 주게 한 것인가? Timing으로 보면 아마도 부활절 전까지 새 교황이 선출 될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또 적응을 해야 한다. 무언가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것은 교회, 이 세상, 아니 나와 우리가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새 교황, 그것도 ‘젊은’ 교황이 선출되면 그는 교회를 어떤 쪽으로 이끌고 갈 것인가..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어두운 아침’을 맞는다.

 

Postscript

몇 시간 후에 교황 베네딕트 16세께서 직접 은퇴, 사임 발표하는 video가 Vatican TV에 실렸다. 역시 ‘건강’하신 모습이다. 이제 조금씩 교황님의 뜻을 알 것 같다. 야심적인 개인 의견을 접고 점점 복잡하고 어려워지고 있는 교회를 생각하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 아마도 그것이 아닐까?

 

영화 자유부인과 김동원

영화 자유부인, 1956

영화 자유부인, 1956

얼마 전에, 어렸을 적에 귀따갑게 들었던 1950년대 화제의 영화, 자유부인을 기적적으로 보게 되었다. 기적적이란 표현이 과장이 아닌 것이 이 영화는 1956년에 나온 것으로 그 바로 전에 일간지에 연재되었던 같은 이름의 정비석 원작의 신문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고, 그 당시에 불과 국민학교 2~3학년 정도였던 나까지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반세기가 지난 뒤에 실제로 그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surreal한 기분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화제의 단계를 넘어서 그 소설, 영화는 ‘문제작’의 수준까지도 올랐던 것을 기억한다. 모든 것이 ‘자유’라는 단어가 붙었던 그 당시였다. 당시의 이승만 여당도 자유당이고, 대한민국은 자유란 말만 붙으면 모든 것이 ‘멋지게 보이던’ 시절이었다. 거기다 급기야 ‘자유부인’이란 말까지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까지만 해도 “자유와 부인“은 그렇게 잘 어울리지 않던 비교적 엄격한 ‘남녀 유별’의 전통이 있었다고나 할까.. 지금 보면 간단히 말해서 ‘남녀차별, 남존여비’의 전통이다. 나와 같은 세대는 그런 ‘구식 전통’을 보며, 느끼며 자란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 개XX’의 도움으로 6.25 사변을 거치며 거대한 미국의 ‘신식 문화’가 파도처럼 쏟아져 들어오면서, 이런 것들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일까.. 그것을 timing좋게 당시 유명했던 대중 소설가 정비석 씨가 인기소설로 이끌어내고, ‘폭발적’인 화제가 되자 곧바로 영화가 된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서로 바람 피는 대학교수 부부의 주변을 그린 것이지만, 특히 교수부인, 춤바람 난 아내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결과는 비교적 예상하기 어렵지 않게 끝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바람 피는 여자’에 대한 질타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여자의 권리’ 같은 것도 나란히 잘 그려낸 듯 하다.

한태석 역의 김동원
영화 자유부인, 한태석 역의 김동원, 1956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긴장을 하곤 했는데, 이 영화에 보이는 location(로케, 촬영 장소)들이 너무도 눈에 익었던 곳이어서 나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우선 시청과 국회 의사당 주변에서 당시의 차들이 오가는 거리 풍경은 정말 내가 보고 기억한 것과 100% 일치하였다. 특히 행인들의 옷차림: 중절모의 남자, 한복의 여자들을 보면서 ‘맞다, 그때는 그랬다’ 하는 탄성이 나오곤 했다.

시발 택시도 나오기 전 차량들은 거의 ‘미제 시보레’ 급의 세단들과, 일본이 남기고 갔거나, 수입했던 ‘동글 동글한’ 시내 버스들.. 물론 그립던 ‘귀여운 에노 전차’들이 명동, 미도파 앞에서 굴러가는 모습들은 사진처럼 나의 뇌리에 남아있는 것들이었다. 동화 백화점, 남대문 시장입구, 미도파.. 심지어는 화신백화점 옆에 있었던 ‘신신백화점’이 깨끗이도 보인다. 이 영화의 보존 상태는 정말 어제 찍었던 흑백 사진과도 같이 좋았다.

1967년 용가리의 김동원
1967년 대괴수 용가리의 김동원

이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민 이란 남자배우를 보게 되었다. 귀에 많이 남았던 배우였는데, 자세히 보니 참 잘생겼다. 왜 그 이후에 큰 스타가 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모든 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간판배우 박암,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한 그의 연기는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특징이 없다. 여자 주연인 ‘김정림‘.. 정말 모르겠다.. 기억이 ‘전혀’ 없으니까.. 어떻게 그녀가 주연이 되었는지,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도 깜깜 이다. 구닥다리 안경과 새카만 콧수염의 ‘주선태‘.. 좋은 역으로 나오긴 힘든 배우고 배역이지만, 그래도 반가운 얼굴 중에 하나다.

문제는 이곳에 나오는 ‘연극배우’ 김동원.. 나는 그가 이런 ‘대중영화’에 그것도 초창기에 출연했는지 몰랐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설마 저 사람이 내가 기억하는 ‘연극배우’ 김동원은 아니겠지 할 정도로 조금 닮았다고는 생각했지만.. 문제는 머리칼 머리 숱.. 내가 아는 김동원씨의 머리는 절대로 ‘대머리, 반대머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깜짝(cameo) 출연, '아베크 토요일'을 부르는 가수 백설희씨
깜짝(cameo) 출연, ‘아베크 토요일‘을 부르는 가수 백설희씨 당시의 가수였고, 배우 황해씨의 부인이고 전영록의 어머니

나의 머리가 빠지다 보니, 더욱 호기심이 나서 자세히 보게 되었는데.. 분명히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은 ‘연극배우’ 김동원이 분명했다. 그의 머리 스타일은 반 대머리.. 훨씬 이후에 보이는 김동원씨의 모습은 절대로 대머리가 아니고 숱이 많은 모습들이다. 그러면 둘 중에 하나인 것이다. 원래 대머리였고, 그 이후에는 ‘가발’이었을 가능성과, 영화 자유부인에서 ‘역할에 의한 삭발’의 가능성..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있을까? 물론 100% 확신을 할 수 없지만 나는 전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자유부인 이후의 김동원씨, 가발 수준은 정말 수준 급이라고 해야 할 듯하고, 많은 fan들에게는 그렇게 상대적으로 ‘젊은’ 모습을 남기려 했던 그 노력은 참 상당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렇게까지 한 것에 100% 공감을 하지는 않지만, 직업상 어쩔 수 없었을지 않을까.. 그저 benefit of doubt을 주고 싶어진다.

 

춤추는 유부남과 유부녀

춤추는 유부남과 유부녀

명동입구의 양품점 사장으로 연기하는 김동원

명동입구의 양품점 사장으로 연기하는 김동원

동화백화점 경양식집에서 김동원과 김정림, 1956

동화백화점 경양식집에서 김동원과 김정림, 자유부인 1956

 

김동원씨 가족, 1972 동아일보의 약품광고에서 '건강과 행복'을 전하는 듯

김동원씨 가족, 1972
동아일보의 약품광고에서 ‘건강과 행복’을 전하는 듯.. 바른쪽 끝에 가수 김세환씨가 보인다

 

True Love – Bing Crosby & Grace Kelly, 1956
그 당시 유행하던 영화 High Society의 주제곡

‘용가리 통뼈’의 추억

대괴수 용가리, 1967
영화 <대괴수 용가리>, 1967

얼마 전에   ‘옛 한국고전영화’ (redundant , 옛 과 고전은 거의 같으니까)를 접하게 되면서, 그런 것들이 어느새 ‘옛, 고전’이 되었을까 하는 세월의 횡포를 생각하게 되었다. 분명히 현재 살아서 숨쉬는 우리들의 것들이 ‘화석, 고생대, 공룡‘등과 연관이 되어가고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내가 말하는 ‘세월의 횡포’ 란 것이다.

그 중에서도 ‘대괴수 용가리‘란 ‘우리의 영화’를 보면서 더욱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 용가리란 단어를 보면서 희미한 느낌에 ‘분명히 이것은 나의 대학시절’의 것이라는 생각이 났다. 하지만 100% 자신은 없었다. 그 영화를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함께 떠오른 ‘강한 단어’가 있었다. 바로 ‘통뼈’ 였다. 그러니까 ‘용가리 통뼈‘ 인 것이다. 그것이 언제였던가?

와~ 맞다 용가리 통뼈.. 그것이 처음 유행하던 당시, 참 많이 그 말을 썼다. 내가 그 말을 좋아하며 쓴 기억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나의 친구 중에 한 명이 유난히도 그 말을 좋아하며, 잘도 썼다. 그 친구는 바로 나의 죽마고우, 중앙중,고교, 연세 대학, 전기과 동창, 요델 산악회 산악인 박창희 였다.

사실 나는 ‘영화 용가리’보다는 박창희가 ‘가르쳐’ 준, ‘용가리 통뼈’를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셈이다. 그 뜻은 물론 그 어감이 나타내듯이, 바보스럽게 겁이 없는 그런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당시에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꽤 많던 시절이었으니, 그 말은 참 잘도 쓰였고,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나나 우리들은 그런 류의 ‘통뼈 류 인간’들과는 거리가 먼 쪽에 속했다.

기억이 그 정도에서 멈추고, 확실히 그 영화가 나온 것이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이럴 때, Googling은 역시 powerful한 것이지만, 이 정도로 ‘오래된’ 것은 역시 무리인가.. 예상을 비껴가서, 딱 한가지 자료만 찾았고, 그것도 그 당시를 ‘전혀 모르는 듯’한 사람의 ‘해괴한 변증’ 속에 파묻혀 있었다. 부산영화제 site에 실렸던 한가지 글, 그것이 바로 박성찬이란 ‘시민평론가’가 쓴 ‘<대괴수 용가리>: 한국괴수 영화의 고생대지층‘ 이란 요란한 제목의 글이다.

주증녀, 젊었던 시절의 이순재
주증녀, 젊었던 시절의 이순재

시민평론가치고는 꽤 이론적임을 보이려는 노력이 뚜렷한 이 글에서, 내가 필요한 것을 찾았다. 우선 이 영화는 1967년에 방영이 된 것이고, 감독 ‘김기덕‘, 주연 진에는 당시 간판 여배우 남정임, TV 쪽에 더 알려진 이순재, 조연 쪽으로는 약방의 감초, 원로격 김동원, 주증녀, 정민.. 그런데 이순재의 신혼부인으로 등장하는 여자배우.. 그녀는 누구일까, 낯이 그렇게 설지 않지만 그렇다고 ‘유명한’ 정도는 아니었다.

1967년이면, 사실 우리 영화는 신영균, 신성일, 엄앵란, 문희 등의 고정된 ‘간판급’ 얼굴의 시대였고, 거의 모두 ‘순정 멜러 드라마’ 였던 시대였는데, 이런 ‘과학공상, SF’ 영화는 아마도 처음이 아니었을까? 내가 그 당시 국민학교, 중학교 정도의 나이였으면 물론 100% 열광을 하면서 보았을 것이지만 이마 그 당신에 나는 조금은 ‘탈 공상’ 적인 대학생이었다.

현해탄을 건너오는 소식에서 일본에서는 이런 류의 영화가 열광적으로 성공하고 있다고 듣긴 들었다. <고지라> 같은 영화가 그런 것인데, 이런 류의 ‘일본 공룡’ 영화는 유치하면서도 재미가 있어서 미국에서도 이것에 완전히 빠진 사람들이 꽤 많고, 이제는 이것으로 돈을 버는 business도 있다고 들었다.

간신히 찾은 이 영화를 보니 모두 말이 영어로 되어있다. 그러니까 English dubbing이 된 것이다. 사연인즉, 역시 ‘원판’이 없어지고 ‘수출용’이 살아 남은 요새 흔히 듣는 case 중에 하나다. 1967년이 이제는 정말 ‘고생대’ 층이 된 씁쓸한 느낌을 받는다. 배우들의 연기는 사실, 지금 보아도 그렇게 어색하지 않다. 그 만큼 연기를 잘 했다는 뜻일지도.. 문제는 역시 그 당시 ‘기술적인 수준’인데, 이것은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암만 ‘장난감 set’를 해도 그 당시의 수준은 어쩔 수 없었지 않을까? 일본 영화 고지라를 지금 보면 그 들도 역시 그 한계에서 맴돌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제 그 ‘시민 평론가’ 의 말을 조금 들어보면, 알게 모르게 이 평론가는 ‘영화 이론 평론가답게‘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어떤 것들은 too much stretching, overreaching 한 것들도 있다. 영화의 original이 없어진 것이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의 식민지와 미국 문화의 침투 속에 우리 것을 다 잃어버린 우리의 자화상과 너무나 닮아..‘ 와 같은 논리로 비약을 한다. 하지만, ‘우주, 과학, 과학도’ 적인 자세가 당시에 우리나라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암시적인 영화의 효과는 그 당시를 겪어본 나에게는 충분히 공감이 가는 분석이다.

하지만, 3대의 ‘정상적인 부부‘의 등장을 분석하며, 이런 것들은 ‘기득층: 가부장적 부르주아의 과잉억압에서 억눌린 부류: 여성, 동성애, 신체기형자 등등이 종종 괴물로 등장하고, ‘정상 부류’가 ‘비정상 부류’를 물리친다‘는 ‘영화학자 로빈 우드’의 말을 인용한 것은 조금 ‘웃기는 비약‘인 듯하다. 이런 표현은 어떨까.. “여보세요, 지금 용가리 통뼈가 한강 다리를 들어내고 있는데.. 기득층, 피해층이 어디에 있단 말이요?” 이런 것은 정말 ‘이론을 위한 이론의 전개’의 대표적인 case일 듯하다.

더욱 웃기는 것은, 용가리와 어린이 ‘영이 (남자 아이)’ 가 아리랑 트위스트를 추는 장면에서 ‘남북의 이상한 평화’가 찾아오고, 더 나아가서 이런 ‘전통’은 나중에 <남부군>에서 적군과 같이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르는 것, <공동 경비 구역: JSA>에서 남북한 두 병사들이 얼싸안고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과장중의 과장은 정말 ‘압권 중의 압권‘ 일 듯. 이런 ‘이론’을 다 잊고 나는 나의 황금기 전야였던 1967년으로 돌아가서 박창희의 ‘용가리 통뼈’ 론.. 확전(escalation)으로 치닫던 월남전, 뿌연 공해먼지 속에도 힘찬 대도시로 탈바꿈하던 ‘강북’ 서울의 모습들, 미니 스커트의 여대생으로 가득 찼던 우리들의 보금 자리 다방 구석에서 꽁초까지 빨아대며 들여 마셨던 신탄지 담배 연기를 생각하고 싶다.

 

Groundhog Day, 2013

Movie, Groundhog Day, 1993
Movie, Groundhog Day, 1993

무려 12시간의 잠에서 깨어난 후 달력을 가만히 보니.. 오늘은 2013년 2월 2일 토요일, 가톨릭 전례력으로 ‘주님 봉헌 대축일(The Presentation of the Lord)’.. 그 밑에 조그만 글씨로.. Groundhog Day가 보인다. 아하! 또 일년이 흘렀구나 하는 신음이 섞인 소리가 나의 귀를 울린다. 일년이 지났다 함은 작년 이날을 그날에 관한 나의 blog이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난 밤에 12시간을 잤던 이유가 희미하게 떠오른다.

마치 1993년 미국영화 Groundhog Day를 다시 보는듯한 기분이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고, 일년전이 오늘 같고 오늘이 일년 전 같은 comedy같은 느낌, 그런 생활과 느낌으로 나는 근래를 사는지도 모를 일이다. 12시간을 잤던 것은 몸과 마음이 ‘완전히’ 피곤해서 그랬는데, 결과적으로 ‘현재에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강하게 느꼈기에 그런 생각에서도 도망하고 싶었다. 그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잠을 자는’ 것 밖에 없었다.

작년의 Groundhog Day를 생각하면서, 같은 이름의 영화 Bill Murray주연의 그 영화를 또 보고 싶었다. 작년에 ‘분명히’ Crackle.com에서 그것을 free로 하루 종일 보았던 기억에 그것을 찾았지만.. 불행히도 그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어졌다. 아마도 다른 site (hulu, netflix) 에 가면 paid-movie로 볼 수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보고 싶지는 않았다. 작년 그때에 하루 종일 보았기에 나의 뇌리에 그 story와 scene들은 사진처럼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인생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삼라만상의 ‘주기적, 반복적’인 것들과, 그 나머지 것들: 즉, 시간의 일방성 (절대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 생명의 생겨남과 사라짐 같은 철학적, 신앙적 차원의 것들도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각자의 최선’을 추구하며 하루 하루 사는 것이 제일 ‘멋있다’ 는 것도 이 영화를 통해서 느낄 수 있다.

Punxsutawney Phil, 2013
Punxsutawney Phil, 2013

올 겨울은 비교적 따뜻한 편이라고 할까.. 겨울답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home-heating에 많이 $$을 쓰지 않아 좋기는 하다. 그리고 조용한 편인데, 큰 눈과 강풍 같은 것이 ‘아직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올해 Groundhog Day에서 남은 겨울의 날씨, 아니 봄까지 얼마나 남았나 하는 것이 어떻게 ‘예보’가 되었을까?

Groundhog이 봄 예보를 하는 것은 너무나 간단하다. 이날 이 ‘두더지’가 ‘밖’으로 나갔을 때, 자기의 그림자를 보게 되면 6주일을 기다려야 봄이 온다는 것, 겨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봄 예보를 할 수 있는 groundhog은 ‘전통적’으로 (이제는 공식적으로) Punxsutawney Phil 로 이름이 된 두더지가 Punxsutawney, PA (펜실베이니아 주, 펑스토니 마을)에서 거의 festival같은 분위기와 수 많은 ‘관광객’들이 모인 자리에서 하게 되는데, 위에 말한 영화 덕분에 방문객의 숫자가 거의 곱절로 늘었다고 한다.

이 ‘두더지’전통은 옛날 옛날 옛적부터 독일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들이 나중에 많이 정착했던 곳이 펜실베이니아 지방이었기에 그곳에서 100년도 전에 시작을 했던 것이고, 그런 행사로 $$$까지 벌게 되었으니, 참 재미있지 않은가? 12시간을 자야만 했던 올해의 Groundhog Day, 내년에는 제발 그렇게 자야만 했던 이유들이 ‘재탕’ 되지 않았으면.. 그곳에 사는 ‘두더지’에게 빌어 볼까나?

Our Mid-Winter Classic

지나간 일요일, 1월 27일은 ‘피로하게만 보이는’ 우리 집에 때아닌 대청소 하던 소리가 들렸다. 얼마만인가.. 머리 속의 ego만 커진 아이들이 떠난 우리 집은 고요하기만 하고, 별로 어질러 놀 만한 것도 없지만 보이지 않는 먼지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의 대 청소는 아래층에만 있었다. 위층까지 할 힘도 없고, 절실한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청소를 했던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Guest들이 오기 때문이었다. 얼마 만에 오는 손님들인가..

이번의 모임은 내가 붙인 이름이 ‘mid-winter classic‘ 이다. Mid-Winter는 1월 말에서 2월 초 정도에 있다는 뜻이고, classic은 이 모임이 그만큼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는 뜻이다. 얼마나 오래 되었을까.. 아마 15년은 되었을 듯 싶다. 이 정도면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닐 것이다.

4집 부부(가족)가 ‘가끔’ 모여서 저녁식사를 같이하는 이 그룹은 시작이 15년 전쯤, 서울고,서강대 출신 최동환 (Phillip Choi), aka, ‘최형’ 과 연관’이 되면서 시작이 되었다. 그 훨씬 전에 우리 부부가 아틀란타 한국학교 에서 가르칠 때, 나의 반에 최형의 외동 딸, 진희(Alicia)가 있었고, 최형은 ‘아빠’로서는 드물게 학교에 얼굴을 보이곤 했었다. 그때 그의 인상이 참 자상한 아빠로 남았고, 항상 웃는 모습도 좋은 인상으로 남았던 기억이다.

우리가 한국학교를 떠나면서 헤어지게 되었지만, 또 다른 인연이었을까.. 우리 작은 딸 나라니와 한국학교에서 같은 반에 있었던 인연으로 나라니의 생일에 진희를 부르게 되었고,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런 때에는 대부분 엄마들이 아이를 데리고 오곤 하는데, 그 당시 진희는 꼭 아빠가 데리고 왔기에 나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사실 이것이 인연이었다. 엄마가 데리고 왔더라면.. 아마도 이런 것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항상 웃고, 얘기를 좋아하는 최형 성격 덕분에 우리는 금새 통성명을 다시 하고 보니 그는 서울 최고 명문인 덕수국민학교, 서울고등학교, 서강대 화학과 출신으로 현재는 ‘사업’을 한다고 했다. 그 후에 우리 집 근처의 어떤 한국식당에서 정말 우연히 최형 가족과 우리 가족이 같이 식사를 하게 되는 다른 ‘우연’을 맞게 되고, 드디어 진희 엄마도 보게 되었다. 둘 다 나이가 우리부부보다 한두 살 정도 아래였던 이곳에서 ‘고르기’ 힘든 부부 ‘친구’를 얻은 기분이었고, 그 이후 우리는 서로의 집을 왕래하며 식사를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친구’를 별로 사귀기 꺼리며 살던 나도 이런 모임은 거부감이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친구 수준의 한국말’을 다시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비슷한 것은 참으로 좋은 것인가..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일까.. 추억의 역사를 공유한다는 것은 이렇게도 좋은 것일까.. 만나기만 하면 어렸을 적 서울거리를 회상하며 열변을 토하곤 했으니까..

최형은 역시 성격 ‘탓’인지 사람들을 좋아하며, 잘 사귀었고, 특히 가깝게 지내던 ‘친구’ 가족들이 몇이 있었다. 곧바로 자연스레 우리는 그들과 같이 모이게 되었다. 그 중에는 Ohio State동문인 나이가 한참 밑(10살 이상)인 ‘전 사장’도 있었고, 최형의 서강대 동문인 윤형, 지금은 2005년에 타계해서 없는, 이대부고,경희대 출신 박창우씨가 있었다. 그렇게 모인 사연이 참 다양하고 재미있어서 아주 인상적이었고, 역시 최형의 ‘사람을 끄는 힘’이라는 공통분모가 이모임에 있었다고 느낀다.

직업도 다양해서, 최형네는 jewelry wholesale, 윤형댁은 liquor retail, 전사장네는 Italian Furniture, 박창우씨 댁은 fashion clothing retail.. 그러니까 이들은 모두 전형적인 businessmen들이었다. 나만 예외적으로 비교적 시간의 여유는 있지만 항상 cash가 모자라는 월급쟁이여서, 항상 나는 ‘공통관심사 화제’에서 애를 먹으며 그저 이 ‘이상한 나라의 얘기’를 듣기만 하곤 했다.

이중에서 2005년 여름이 정말 아깝게 타계한 박창우씨, 생김새에 비해서 호탕하고, 잘 놀며, 활달한 사람, 서울 명동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의 중심지에 대한 해박한 경험과 기억력은 우리를 항상 놀라게 했다. 특히 어느 곳에 무슨 술집, 다방이 있다는 것은 정말 ‘사진과도’ 같은 기억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 ‘양반’의 얘기가 제일 재미있었고 실감나고, 흡사 time machine을 타고 1960-70년대를 간 것과 같은 기분에 빠지곤 했다. 특히 ‘동네 친구’인 트윈 폴리오 folk duo 중에 윤형주에 대한 이야기, 당시의 명소였던 명동 OB’s Cabin 에서 술김에 노래를 부르던 조영남을 ‘팼던’ 이야기 등등.. 나에게는 주옥과도 같은 이야기들.. 언제까지나 들으려 했지만 하느님도 무심하시게 너무도 일찍 데려 가셨다.

이날 모임에서 나를 놀라게 했던 소식은, 최형의 외동 딸, 진희 (우리 딸 나라니 친구)가 놀랍게도 우리가 활동하고 있는 레지오 마리애의 ‘활동단원’이 되었다는 사실.. 나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진희는 아주 자유분망 (easy going)해서 어떻게 이렇게 ‘조직적인 신심단체’에 가입을 했을 까 상상이 되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세대적인 격차를 초월해서 꾸리아 모임에서 그 ‘애’를 보게 될 생각을 하니..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하는 생각에 사실 당황을 할 정도였다. 이것은 정말 ‘좋은 소식’일 것이다.

65세 만세론과 결혼 33년

1월에는 우리 집 큰 딸 새로니의 생일, 나의 생일, 그리고 우리부부의 결혼 기념일이 모조리 몰려있다. 그래서 사실 성탄과 새해를 지내자 마자 마음이 조금은 바빠짐을 느낀다. 사실, 나는 이런 ‘명절’들을 조용하게, 소리소문 없이 보내고 싶은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우선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절대로 불가능했고, 근래에도, 이런 날들을 조용히 보내는 것이 거의 ‘죄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압력을 느끼기도 했다.

전통적 ‘가장’의 위상이 거의 무너져 내려앉은 요새, 어찌 안 그렇겠는가? 세월을 탓 해야 하나. 특히 ‘자기 생일’도 자기 마음대로 보낼 수가 없음이 제일 우습기만 한 것이다. 내가 원치 않더라도, 그것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의 위치와 가치가 뒤바뀌고 있는 이 세상, 어디까지 가나.

올해 나는 ‘결국’ 65세의 산을 넘고 말았다. 왜 65란 숫자가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일까? 아마도 70세를 향한 내리막 길이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오랜 전 애독하던 이진섭씨에 대한 책, ‘하늘이 우리를 갈라 놓을 지라도‘ (박기원 여사 지음), 에서 보았던 65세 만세론 구절이 더 생각난 것이다. 그것은 이진섭씨의 지론 중에 하나로써, ‘사람은 65세를 살면 충분히 살았다‘는 것으로 그 이상 사는 것은 어떻게 보면 ‘덤’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 나아가서, 사람은 나이답게 사는 것이 보기 좋다고 했는데, 너무나 무리하는 것이 꼴불견이라고도 했다.

예를 들면 늙은이가 무리하게 운동을 하거나 무엇을 지나치게 즐기는 그런 것들이다. 조용히, 잠잠하게, 생각하며, 낙조를 바라보는 듯한 심정으로 지내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이 거의 50년 전의 이야기라서 아마도 그 당시 65세는 요새 기준으로 보면 턱없이 적은 나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까? 그 당시의 65년은 사실 요새도 65년일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을 한다. 65년을 살고 보니 ‘참 많이 살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이다.

이제는 사실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 쉰다는 것은 사실 이세상을 떠난 다는 것인데, 전 같았으면 아마도 그런 생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펄쩍 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제 나는 죽음이 다음 세상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나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얼마를 살았는가 가 아니고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이다.

1980년 1월 25일에 결혼을 한 우리 부부는 올해로 33년째를 맞게 되었다. 잔잔한 감회를 느끼며 맞이한 올해는 정말로 조용히 보내게 되었다. 아이들의 ‘극성과 압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33년간의 결혼관계는 사실 과소평가할 것은 아니다. 어떻게 생면부지의 이성과 같이 33년을 같이 산다는 것이 작은 과업’일까? 결혼을 안하고 아이를 안 낳고, 편하게 혼자 사는 것이 cool하게 보이는 이 세상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런대로 not bad임도 안다. 이날 우리는 정말로 ‘조용하게’ 집 근처에 있는 Thai restaurant, Lemon Grass에 가서 평소 즐겨 먹던 것으로 점심을 하였다.

눈이라도 당장 쏟아질 것 같은 그런 회색 하늘아래서 우리는 33년 전을 회상하며, 도대체 그때에 우리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가장 멋지게 보았고, 무슨 희망을 가졌는지 생각을 해 보았지만, 한마디로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지던 때였다는 것과, 그 때는 정말 ‘기쁜 우리 젊은 날’ 이었다는 것에 동감을 하였다. 또한 앞으로 얼마나 ‘이렇게’ 같이 살게 될 것인가 하는 ‘말없는’ 의문도 나누었다. 그것이 인생일까. 인생은 사실 그렇게 특별 난 것이 아닌 듯 싶다.

 

 

 1980s.. 기쁜 우리 젊은 날들..

가톨릭 바리스타, 이냐시오 영성까페

coffee이것이 무슨 말인가? 가톨릭 바리스타.. Catholic barista? Catholic+barista Hmmm.. 천주교 바리스타, 바리스타로 일을 하는 천주교 신자, 아니면 어떤 커피 숍의 이름, 나에게는 조금 생소한 것 들인데 이런 것들이 지난 몇 주일 동안 실제로 나의 눈앞에 나타났다. 처음에는 성당 주보에 그런 말들이 나타났고, 그 후에는 숫제 그 실체가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성당 주보에는 ‘바리스타 교육’ 이란 것으로 나타났고, 그 후에는 실제로 2주 동안 그 교육이 개인당 $250의 비용으로 성당 내에서 실시가 되었고, 신부님 강론 중에는 평상 미사시간 보다 더 길게 소개 되기도 했다.

가톨릭 바리스타 ‘운동’의 주역은 LA지역 성 아그네스 한인성당의 pastor 이신 최대제 신부님, 얼마 전 본당 주보에서 조그만 기사를 본 기억이 났고, 1월 초에 우리의 주임 하태수 신부와 서로 자리를 바꾸어 2주간 사목을 했다. 그때에 50+ 명을 대상으로 ‘바리스타 교육’과 뒤따라서 시험까지 다 끝냈다. 나는 최신부님이 미사 중, 미사 후에 짧지 않은 시간을 “coffee를 통한 선교”에 대해 역설을 하는 것을 듣고 처음에는 사실 의아한 심정이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선교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 신부님은 ‘세계 처음’을 강조하며, ‘이냐시오 영성까페‘를 소개했는데, 이 말은 아마도 예수회와의 연관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들렸다. LA 성 아그네스 성당에 실제로 그 영성까페가 있다고 했고, 그곳에서 일할 수 있는 ‘바리스타’들을 훈련, 배출시키고 있다고 했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로써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 상상만 해도 즐거운 기분이 됨을 느낀다. 편안하고 멋진 환경에서 그윽이 퍼져 나온 커피 향기는 생각만 해도 좋은 것이니까.

하지만 어떻게 ‘까페’라는 것이 성당이란 환경 속에 있을 수가 있을까? 듣기에 좋은 것이지만 실제로 자세히 들어가면 의문과 문제 투성이인 concept이라는 생각도 든다. 각가지 기발 난 idea로 ‘시장’을 개척해 나가는 개신교 mega church들이 이런 concept을 그 동안 몰랐을까? 선교를 목적으로 한다면 왜 하필 coffee 일까? 일단 이것이 이미 ‘운영’이 되고 있다고 하니까, 이런 나의 의문에 대한 ‘해답’이 이미 나왔을 것 같기도 하지만, 어떨까?

 

Rip Van Winkle 같이..

잠에서 깨어난 Rip Van Winkle
잠에서 깨어난 Rip Van Winkle

얼마 전부터 까마득한 옛날에 읽은 듯한 미국 단편소설 (단편보다 더 짧은 장편掌篇 일지도..) Rip Van Winkle (맆 밴 윙클)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Nostalgic한, 그러니까 좀 포근한 기분을 느끼는 듯한 기분으로 기억력을 되살리며 그 소설책을 어떻게 읽었던가를 기억하려고 애를 쓴 결과, 이것은 영어책 읽기를 배우려는(당시에는 ‘영독’이라고 했다) 의도로 영어로 된 ‘원서’를 읽은 것이었고, 아마도 나의 ‘전설적인’ 아르바이트 가정교사 경기고 김용기형이 ‘반 강제로’ 권해서 읽었을 것이고, 그 정도를 읽으려면 고등학교 2학년(1964년) 정도였을 것이다.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 그 책 저자의 이름은 비록 잊었지만(찾아보니 미국의 Washington Irving) 스토리의 대강은 기억한다. 주인공인 맆 밴 윙클이 하루 종일 바가지 긁는 마누라를 피할 겸해서 산으로 갔다가 ‘귀신’들을 만나서 술을 마시고 신나게 놀다가 잠이 들었는데 깨고 보니 20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비교적 ‘간단한’ 내용이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통해 비슷하게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전설에도 비슷한 것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문제는, 내가 이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으로 사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책의 주인공은 20년의 잠을 잤지만, 나는 대강 10년 정도의 잠을 잤다는 것, 그는 괴로운 현실을 떠나서 즐겁고 편안한 잠을 잤지만 나는 사실 그 반대인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까? 가끔 현실이 꿈같이 느껴지고, 꿈이 현실처럼 느껴진다는 표현을 생각하는데, 어떨 때는 그 표현이 그렇게 실감날 수가 없었다. 현실감이 희박해 진다는 것은 엄밀히 생각하면 조금 위험한 상태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가끔 혹시 내가 무슨 ‘정신이상’, 아니면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도 많이 해 보았지만,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연숙에게 핀잔만 듣곤 하고 금새 현실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지금 현재 Rip Van Winkle처럼 느낀다는 사실이다.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는 기분인 것이다. 그러면 나의 그 긴 잠이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을까.. 생각해보니, 아마도 1998년 경부터가 아닐까. 50세가 되던 그 해부터 2008년경 까지의 10년간.. 기나긴 그 때에 연숙의 어머님, 나의 장모님께서 갑자기 타계를 하시고, 그 다음해에는 나의 ‘태양, 그리고 별’, 어머님이 뒤 따라 가셨다.

그때의 심한 충격에서 아마도 나는 나의 고통을 ‘기나긴 잠’으로 잊고자 한 모양인가? 내가 살고 있어도 살아있는 기분이 아니었다. 그때야 나는 비록 오랜 세월 떨어져 살았지만 나의 어머님의 존재와 위치의 ‘위대함’을 알 수 있었다. 나에게는 너무나 커다란 방파제요, 희망이요, 피난처였던 나의 어머니.. 어린아이같이 나는 어머니가 무한정 내가 죽을 때까지 사시리라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며 나를 기만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 꿈이 현실적으로 사라지자 나는 고통을 피하려 본능적으로 잠 속으로 숨었을 것이다.

긴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며 나는 10년이 지난 나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고, 10년 더 먹은 나의 모습은 거울조차 보기 싫은, 과히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처음에 느낀 것은 또 다른 종류의 실망, 충격, 당황함 등등.. 하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서서히 나는 나의 현재 몰골과 처지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때 내 앞에 슬며시 다가온 것이 ‘성모님의 묵주기도‘ 였는데, 처음에는 그저 ‘살려고’ 아무 것이나 잡겠다는 심정으로 시작했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나는 가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믿음의 르네상스 시작이 되었다. 이제는 절대로 뒤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Christmas 2012, Lincoln

sweaters, Starbucks, DVDs
sweaters, Starbucks, DVDs

2012년 우리들의 크리스마스는 조금 색이 다른 것으로 기억이 남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 시간문제가 아닐까? 가족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겪게 되는 조그만 growing pain일 지도 모른다. 이런 큰 holiday때면 생각나곤 하던 ‘즐거운’ 추억들은 역시, relax된 기분으로 새벽같이 living room에 모여서 선물을 풀어보던 것, 구수하고 따뜻한 음식을 만들며 holiday classic video나 TV movie를 보던 기억들, 조용하기만 한 길거리의 풍경들.. 그런 것들이 전형적인 모습과 소리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Charles Dickens원작의 classic중의 classic, A Christmas Carol (1951’s movie version)과, 이제는 완전히 Christmas classic이 되어버린 1978년 미국영화, A Christmas Story (Ralphie란 안경 낀 꼬마의 성탄 추억)란 것을 ‘하루 종일’ 보던 때가 이제는 그립기도 하다. 아이들이 집을 떠나고, 머리가 큰 ‘아이’들이 산타클로스의 비밀을 알아 버린 후에는 모든 것이 ‘천천히’ 바뀌었다. 더 이상, 비밀이 없는 것이다.

그런대로 신앙적인 기분을 가지고 있던 그런 날들도 그 애들에게는 이제 완전한 세속적인 ‘즐기는’ 날로 바뀌고.. 그런 배경에서 이제 나는 우리의 전통적인 ‘포근한’ 성탄기분을 ‘절대로’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살아 생전에 언젠가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머리가 커져버린 ‘아이’들.. 정말 재미없고, 실망스럽기만 하다.

골칫거리일 수도 있는 ‘선물’ 사기.. 거의 ‘강제성’을 지니고 있는 미국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이것.. 어떻게 생각하고 처리해야 할 것인가? 오죽하면 크리스마스의 장본인 예수님의 가르침을 2000년간 고수하고 있는 교황청과 교황님.. 제발 크리스마스는 선물을 주는 날이 아니라고 강조하게 되었는가.. 숫제 성탄 1주일 전 이후부터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라고 충고하게 되었을까? 하지만 가만히 보면 이런 축제 분위기에 사로잡힌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마도 대부분 세속적인 인간들일 것이라고 짐작을 한다.

Pancake Handbook
Pancake Handbook

올해 성탄에는 나에게 줄 선물 고르는 것의 수고를 덜어 주려고 Costco에 갔을 때 두 가지를 골라 주었다. 하나는2-disc DVD set 였는데, 내가 좋아하는 ‘옛날’ 전쟁영화들 8개나 실려있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귀엽게 생긴 battery-powered screw driver였다. 이중에 전쟁영화 DVD는 나에게는 정말로 횡재였다. 8개의 보물 같은 영화 중에서 제일 다시 보고 싶었던 것 중에는, Von Ryan’s Express, Twelve O’clock High The Young Lions가 제일 보고 싶었던 것이고 나머지 것들도 모두 수준급 추억의 영화들이었다.

그것 이외에 새로니는 내가 그 동안 ‘싼’ 커피를 마시는 것을 보았는지 여러 뭉치의 Starbuck coffee를 주었고, 나라니는 Pancake 책을 선물했다. 내가 그 동안 아침마다 pancake을 직접 만드는 것을 보고 hint를 얻었을 것인데, 내가 instant pancake mix로 만들었기에, 이 책을 보고 ‘진짜’ 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과연 내가 이 ‘진짜’ pancake recipe를 보고 만들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지만, 나를 생각해 준 나라니의 마음을 볼 수 있어서 고맙기만 했다.

Spielberg's Lincoln
Spielberg’s Lincoln

올해부터 시작된 조금 이상한 holiday tradition에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이 포함 되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가족이 집에 모이는 날에 밖으로 나가는 것은 사실 이상적인 idea는 아니었지만, 이것도 ‘머리가 커버린 아이들’의 생각이었고, 우리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억지로’ 나가는 꼴이 되었다. 텅텅 비었을 것으로 상상이 되던 극장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미국도 그 동안 변했나.. 할 정도로 생각이 착잡했다.

전통적인 가정, 고향이라는 향수적인 생각은 이제 정말 골동품이 되어가는 것인가.. 함박눈이 아닌 ‘함박 억수비’가 쏟아지던 성탄절날 우리는 어울리지 않게 ‘밖으로’ 나가서 Lincoln 영화를 보았다. 이것도 전통적인 Lincoln (Abraham)영화가 아니었다. 역시 또 다른 Political Correctness의 냄새가 심하게 풍기던 ‘명화’가 될 가능성이 많은 그런 작품이었다. 그 당시의 역사로 현재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Washington DC의 공기를 바꾸려는 가상한 노력도 짐작이 된다. 아마도 다가올 Oscar상도 그다지 어렵지 않을지도..

2012년 12월 24일

Silent Night.. Holy Night, 2012

Silent Night.. Holy Night, 2012

¶  새벽 잠결에 무언가 세차게 똑똑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어렴풋이 밝아오는 새벽, 밖을 보며 그 소리가 무엇인가를 알아차렸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주제넘게’ 비가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새빨갛게 떠오르는 태양이 가득한 성탄 전날 보다는 아마도 이렇게 잿빛하늘이 사실은 더 포근한 감을 주어서 좋다.

올해의 성탄은 예년과 조금 다르게 기다린 셈이다. 제일 눈에 뜨이는 것은 이제까지면 12월 초부터 ‘노상’ 즐겨 듣던 주옥 같은 크리스마스 캐럴을 올해는 ‘거의’ 듣지를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이것은 아마도 처음이 아닐까.. 그것과 비슷하게 holiday decoration도 며칠 전까지 피하고 살았다. 물론 나이 탓도 있었겠지만, 사실 올해는 정말로 성탄의 뜻에 더 생각하고 싶었다. 그것이 전부다.

 

¶  12월 24일..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다. 내일 성탄을 하루 남긴 오늘, 우리의 한국본당 주임신부, 하태수 미카엘 신부님의 영육간의 건강을 위한 전 레지오 단원들의 묵주고리기도가 그 대장정의 막을 내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난 3월 26일 사순 제5주일 시작되던 월요일, 주님탄생예고 대축일 날부터 시작이 되었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소속 전 레지오 단원이 하루에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단수의 묵주기도를 하는 것인데, 밤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대에 골고루 나누어져서 끊임 없이 돌아가며 바치는 기도.. 그래서 고리기도였다. 주임 신부님을 위한 것이지만 결국은 우리 레지오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하루에 한번 ‘빠지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5단내지 10단을 바치는 것.. 정말 신경이 많이 쓰이는 것이었다. 잊지 않으려고 숫제 cellphone에 alarm을 해 놓아서 사실 잊을 수는 없겠지만, 그 시간에 하던 것을 접어두고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은 실제적으로 거의 불가능할 때도 많았다. 그렇게 해서 몇 번은 한두 시간 지연되기도 했지만, 기적적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늘 마지막을 장식했다.

조금 더 의미 있는 기억도 있었는데, 7월 26일 우리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 단원 은요안나 자매가 기나긴 암투병 끝에 선종을 하셨고, 나는 곧 이어서 그분이 시작했던 고리기도를 이어 받아서 오늘 끝낸 것이다. 내가 원래 하던 것은 연숙이 덤으로 맡아서 했는데, 이것을 물려받아 할 때마다 저 세상에 가신 요안나 자매를 생각하며 묵주기도를 바치곤 했다. 올해는 참, 이런 뜻 깊은 기억들이 제법 있었다.

 

¶  매년 성탄절이 다가오면 조심스럽게 각오를 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지난 일년 동안 ‘못 보았던’ 친지들에게 성탄 카드를 ‘우체국의 우편’으로 보내는 것이다. 전통적인 종이로 만든 카드와 인터넷으로 보내는 ‘가짜 카드’는 정말 의미와 느낌이 다르다. 편하다는 한가지 이유로 모두들 그것을 보내지만, 받아보는 입장은 그렇게 마음이 편하지 않다.

문제는 그 진짜 카드를 진짜로 써서 진짜로 우체국 편지로 보내는 것이 왜 그렇게 힘이 든단 말인가? 올해는 결국, 보기 좋게 실패를 해서 딱 2통의 진짜 카드를 신부님께 보낸 것이 전부가 되었다. 성탄 전야에 이제는 조금 마음이 편한 것이 이제는 모든 것이 늦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석연치 않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비록 가짜 카드지만, 조금 더 정성을 들이면 안 될까? 그렇다.. 진짜 카드를 인터넷으로 ‘보여주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부지런히 진짜 카드를 scan을 하고 사연을 이렇게 써 본다.

 

죽마고우 원서동 크리스마스의 환상

죽마고우 원서동 크리스마스의 환상

내가 알았던 모든 친구들.. 그 중에서도 원서동 죽마고우들: 최승철, 김동만, 안명성, 박창희, 손용현, 유지호.. 비록 서로의 늙어가는 모습은 못 보고 살지만 마음 속에 간직된 어린 우정은 하나도 변함이 없다. 성탄과 새해에 어디에 살건, 어떻게 살건 간에 건강하기 바란다!

Goodbye, Panera Bread

Panera bagels
Panera bagels

오늘 우리는 주일 미사 후Panera bakery에서 ‘마지막’ 아침 식사를 하였다. 아침 식사 라기에는 부끄러운 Asiago-Cheese, Cinnamon-crunch bagel과 Hazelnut coffee정도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마지막’란 것이 문제였다. 이틀 뒤에 우리에게 너무나 정이 들었던 이곳이 ‘이사’를 가게 되어서 문을 닫는 것이다.

한마디로 일요일 아침 미사 후에 우리가 갈 곳이 없어진 것이다. 일요일 아침에 거의 예외 없이 꼭 들려서 ‘똑같은’ bagel을 먹곤 해서 그곳 남자처럼 생긴 여자 manager와는 아주 친숙한 사이가 되었고, 우리가 가면 아예 menu를 묻지도 않고 갖다 주곤 했다.

정말 비교적 싼 값에 분위기 있고, 냄새 그윽한 coffee를 즐기며 연숙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런 곳을 다시 찾기는 어려울 듯 해서 더욱 아쉽기만 하다. 이사를 가는 이유가 더욱 안타까웠다. 매상도 비교적 오락가락 하는데, 건물주가 rent를 너무나 올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customer traffic도 많고 rent도 싼 곳, 어떤 shopping mall (Towne Center)근처로 간다고 했다. 우리 보고 그곳에 오면 꼭 들르라고 했지만 과연 언제 그곳에 찾아 가게 될지는 미지수이다.

그곳에 단골손님이 된 것은 아마도 5년 정도가 아닐까.. 그 전에는 Atlanta Bread Company라는 같은 류의 Bistro style bakery로 가곤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닫고 말았고, 다시 찾은 곳이 지금의 Panera 였던 것이다. 그 두 곳의 분위기는 아주 달랐다. Atlanta Bread Company(ABC)는 널찍한 마루 바닥에 아주 밝고 넓은 분위기였고, Panera는 분위기 있게 어둡고 아늑한 곳이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coffee를 마시는 분위기는 Panera가 훨씬 더 좋았다는 것이다.

집에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 거북하게 느껴지던 나와 연숙은 이곳에서는 분위기 덕분인지 아주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게 되어서, ‘분위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을 하기도 했다. 5년 이상 그런 분위기가 우리 부부에게 미친 ‘좋은 영향’은 상당할 것 같다. 지금은 다시 생각한다. 그곳을 찾고, 그곳에서 보낸 5년, 정말 100% 우연한 일이었을까.. 아니면?

Servicing ‘Curia-PC’

Curia-PC? Curia, PC.. Curia pc.. 꾸리아 PC.. 3년 전만 해도 이것이 무엇인지 짐작 조차 못했을 것이다. 이제는 99% 무슨 뜻인지 안다. 여기서 curia는 로마군단 내의 조직이 아니고 레지오 마리애 조직 중의 하나일 것이다. 군대로 말하면 여러 소대를 관할하는 중대 급에 속한다고 나 할까. 그러니까 꾸리아 조직에서 쓰는 컴퓨터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속한 레지오(마리애)를 관할하는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소속 ‘천상은총의 모후’ 꾸리아를 말한다.

얼마 전, 자세히 말하면 12월 초, 그 당시에 있었던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를 치르면서 알게 된 것이 꾸리아 간부들이 쓰는 (정확히 말하면 서기가 주로 씀) Windows laptop pc가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그 Windows 7 laptop pc를 직접 내가 보게 되면서 자연스레 내가 관여하게 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레지오 용어로 ‘본당협조 활동’에 속하는 일을 내가 맡게 된 것이다.

나에게, 이런 종류의 일은 사실 ‘일’이라는 생각보다는 ‘시간 보내기 딱 맞는’ 그런 ‘즐거움’에 속한다. 문제가 있다면, 여기에 깊이 빠져들면, ‘실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빠져들어서 ‘해야 할 것을’ 미루거나 할 정도로 될 때도 있다는 사실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것도 잘 절충을 하는 지혜도 생겨서 예전과 같은 큰 문제는 없다. 나는 이것을 쉽게 말해서 ‘공돌이’ 기질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호기심으로 인한 ‘새로운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기회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교적 복잡하게 발전한 근래의 Windows PC는 깊이 알려고 하면 그 속에 무궁무진한 ‘기술’들이 축적이 되어 있어서 이것과 더불어 보내는 시간이 절대로 낭비가 아닌 것이다.

OLYMPUS DIGITAL CAMERA1~2 년 전에 구입했다는 이 pc는 model이 HP G73-B66US, 2010년 경에 나온 것으로 Microsoft Windows 7 (64bit), 4GB, 2400 MHz Intel Core i3, 500GB HDD.. 등등으로 상당히 빠른 system이었다. 꾸리아 사무실에서 처음 보았을 때 보게 된 문제 중에는, 우선 BSOD(blue screen of death, system crash) 같은 심각한 것을 비롯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system전체가 느리게 ‘돌고’ 있었고, battery 가 너무나 빠르게 discharge되는 등.. 한마디로 무언가 큰 문제가 있어 보였다. 크리스마스 씨즌으로 접어 들면서 꾸리아의 일도 바쁘지 않아서, 아예 pc를 집으로 가지고 와서 더 자세히 보게 되었다.

Booting을 하면, 5분도 되지 않아 blue screen으로 crash를 한다. Safe mode로 booting을 해 보았다. 5분이 지나도 별 문제가 없었다. 분명히 Windows core system file이 corrupt된 것이다. 최소한 safe mode에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에, safe mode에서 systems diagnostic을 해 보니, 분명히 두 가지 문제가 발견 되었다. Hard-disk의 SMART built-in testing에서 disk가 error threshold를 넘어 섰는데, 한마디로 disk가 ‘죽어가고’ 있는 과정이었다. 또 다른 problem은 역시 internal battery가 이미 ‘수명’을 넘긴 상태였다.

이제는 뒤를 돌아 볼 시간이 없다. 현재의 disk data를 빨리 ‘살려서’ 옮겨야 하는 것이다. Safe mode에서 file copy는 비교적 간단하고, 더욱이 usb flash drive(thumb drive) 를 쓰면 더욱 간단하다. 또한 현재 이 pc에는 그다지 중요한 data file가 많지 않았고, 대부분이 MS Office file이어서 file의 크기가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Data를 살려 낸 뒤에는 500GB 2.5″ hard-disk와 battery를 교체하게 되었는데, 이것으로 비용만 $100 이 쓰였다. 그 다음 과정은 사실 시간은 걸려도 비교적 straightforward한 routine으로 생각이 되었지만, 사실은 우여곡절, surprise가 참 많았다. 제일 놀란 것이, Windows 7 system recovery disk가 요새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아예 stock hard-disk의 partition 자체에 그것이 있어서 이론상으로는 다시 recovery가 가능하지만 이것은 정말 귀찮고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거기다가, 만약에 최악의 경우, 그 recovery partition이 corrupt가 되면 그때는 속수무책, HP에 연락을 해서 ‘진짜’ Windows 7 disc를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그런 최악의 사태로 가지는 않았다. 내가 손수 그 recovery disc를 ‘구워’ 냈기 때문이다. 그것만 있으면 앞으로 같은 문제가 생겨도 당황하지 않고 즉시 고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과정이 참으로 시간이 ‘엄청’ 걸렸는데, 어려운 것은 아니더라도 시간으로 치면 참 ‘비싼’ 작업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새로 태어난Windows 7 system은 정말 새로 샀을 때와 같이 ‘날라가는’ 기분을 느끼게 할 정도로 모든 program들이 run을 했고, 그 동안 ‘이상하게 돌아가는 컴퓨터’로 고생을 하던 꾸리아 서기님도 마음을 푹 놓고 쓰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며, ‘본당협조’의 일을 끝냈다.

전화 유감 電話有感

몇 달 전부터 이것에 대한 것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시각적으로 눈으로 봐야 하는 나의 글이 아니고 눈을 편히 감고, 잘 안 보이는 희미한 글자나 그림 대신에 나의 살아있는 ‘육성’을 나의 그리운 가족과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 그런 꿈같은 상상을 하다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현재 내가 가장 부끄럽고 창피하고 부족하게 느끼는 것이 바로 육성을 쓰는 ‘진짜 전화’ 대화임을 나는 잘 안다. 가장 싫은 것 중에 하나가 전화로 하는 대화들, 언제부터 그렇게 피하고 싫어했을까?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수도 없이 걸려오는 telemarketing, anonymous call들, 그런 것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불편하고 피하고 싶은 ‘인간’들과 말을 나누는 자체를 상상하기 싫었다. 그러다 보니 caller-id 를 보며 귀찮은 사람의 전화는 숫제 받지를 않게 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email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는데, 상상외로 이런 삶의 방식이 부드러운 것은 아니었다. ‘반 사회적 anti-social’ 으로 가는 느낌까지 들 때도 많았다.

나의 전화사용이 거의 내가 필요할 때만 (내가 먼저 거는 것만) 하게 되기 시작하면서, 횟수도 점점 떨어지고, 나에게 걸려오는 전화도 따라서 줄어갔다. 잘 받지 않는 전화.. 누가 하겠는가? 내가 생각해도 이것 너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혹시 전화로 이야기를 하게 되어도 그 대화는 내가 바라는 것처럼 편한 것들은 아니었다. 내가 언제 마지막으로 ‘신나는 전화대화’를 ‘즐겼던 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

이런 문제들이 2년 전에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을 하고 단원활동을 시작하면서 내가 풀어야 할 과제로 간주가 되었고, 약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레지오의 거의 모든 business가 ‘아직도’ 전화가 제일 효과적이기 (빠르고, 확실하고) 때문인데, 그것은 아직도 email을 안 쓰거나 못쓰는 사람들이 상당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활발하게 전화 하는 것.. 그것이 생각만큼 쉽지를 않았다. 너무나 ‘조용한’ 나만의 comfort zone 에 나는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10여 년 동안 email을 쓰는 ‘일반’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서 전화로 ‘실시간 real-time’ 대화가 없는 생활이 우려하는 만큼 치명적으로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말을 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살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그래서 내가 제일 ‘존경’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전화 잘 걸고 잘 받고, 잘 하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다. 나의 인생 반려자인 연숙이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한다. 어쩌면 그렇게 전화를 ‘용감하게’ 잘 사용할까.. 그 중에서도 제일 놀라운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전화 벨이 울리면 ‘99.99% 무조건’ 받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불가능한 상태를 제외하고는 식사를 하건, 화장실에 있건 상관이 없다. 전화를 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정말 ‘고마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나에게 전화가 오면 99.9% 통화가 안 되고 연숙은 정 반대로 99.9% 받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아마도 ‘고철’같은 레지오도 초현대 디지탈의 편리함에 서서히 변할 것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email이나 instant messaging 같은 것.. 전화의 간단 편리함은 ‘절대로’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내가 레지오 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하려면 이 전화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고, 더욱 높은 차원의 협조를 구해야 할 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세상이다

요새도 ‘빌어먹을’ 이란 말을 쓰나.. 우리 때는 참 이런 표현을 많이 하며 살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저 가벼운 욕에 속했지만 이 말을 쓰면 속이 한결 시원해지곤 했다. 그 옛날, 또 다른 유행어로 ‘아더메치’ 란 것도 있었다.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다 에서 따온 말이었다. 지금의 시간을 살아가면서 그때 그때 유행하는 ‘씨원한 욕’ 들이 있었다. 

어제 다시 그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지금이 바로 빌어먹을 세상이 아닐까?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말도 흘러나왔다. 6~7세 아이들 20명을 쏘아 죽이는 미친 세상이 바로 빌어먹을 세상이 아닐까?

하지만 다른 생각에, 이제 이런 미친 짓들이 너무나 익숙해 진 것이 더 놀랍다고나 할까? 아마도 다음에는 30명, 50명, 100명.. 아니면 3000+.. 너무나 ‘독해진’ 최신 무기들이 미국 헌법에 의해 가질 권리를 보장 받은 이 나라는 역시 하느님의 ‘공정’하심을 다시 느끼게 한다. 모든 것이 다 좋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것으로 하느님은 미국의 ‘인간적 완전 자유’에 제동을 거신 것일까?

A Memorial site near Sandy Hook Elementary
A Memorial site near Sandy Hook Elementary

이번 Sandy Hook Elementary School (Newtown, Connecticut) 참사는 다른 쪽으로 그 잔인함에 놀라게 된다. 그 코흘리개 어린 아이들을 골라서 죽인 잔인함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것으로 극단화 된 정치인들을 자기 자리를 고수하려고 안간힘을 쓸 것이다.

우선 제일 쉬운 것이 무기, 그것도 ‘총’의 규제일 것이지만 이것은 ‘재앙적’인 미국 헌법에 엄연히 보장된 권리이고 보니.. lawyer 로 이루어진 이곳에서 그것이 쉬울까? 무법천지의 미국 서부시대에서 제일 존경을 받던 것이 바로 이 ‘총’이 아니던가? 역시 ‘정당 방위’용으로만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 미국과 미국인들의 고뇌를 알 수 있다. 개인적 자유냐.. 공공 안전이냐.. 역시 절묘하고 고도의 정치력을 요구하는 정책적 균형, 그것을 과연 어떤 사람이 십자가를 지고 이끌 것인가? Obama 는 틀렸다. 그는 그만한 의지와 정치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가 이끄는 liberal 들은 그저 쉽게 보이는 direct gun control만 주장할 것이고, 반대 편에서 결사적으로 ‘나는 총을 가질 권리가 있다’.. 문제는 총을 잘못 쓰는 ‘썩어가는 가정’ 에 있다고 부르짖을 것이다.

이 병신들아.. 그대들은 모르는가? 해결책은 바로 양쪽에 다 있다는 사실을.. 자유와 방종의 극단으로 치닫는 미국의 family value system, 이것을 무시할 수 있을까? 이런 잔인한 ‘아이’들을 만드는 곳은 바로 그런 가정인 것이다. 그런 반면에 그런 가정에 어찌해서 그런 ‘무시무시한’ 무기들을 가질 권리가 있단 말인가?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을 모르는가? 모르는가.. ‘타협과 절충과 이해’만이 이 미국의 비극을 해결하는 열쇠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