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의 생애, viewing과 연도

김민호 프란치스코, 17세의 소년.. 어떻게 그런 100% 희망의 나이에 우리들의 곁을 떠날 수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우리의 머리 속을 완전히 지배하던 어제였다. 3일 전, 요사이 뜸하던 ‘위중한 환자기도’의 소식에 우리들은 ‘서서히’ 환자기도를 시작했지만 너무나 빠른 ‘병의 진행’으로 그제에는 신부님의 병자성사가 필요할 정도로 위독한 상태가 되었고 어제 아침에 그 17세의 소년은 고요히 눈을 감았다. 병명은 역시 ‘암’의 일종인 ‘투명세포육종’이라는 희귀한 것이었다.

레지오 입단 3년이 다가오는 나는 그 동안 많은 죽음을 보았고 연도, 장례미사를 하였지만, 이렇게 ‘누구나’ 100% ‘언젠가’ 거쳐야 하는 ‘과정’은 정말 100% 모두 다른 사연과 과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평균’ 수명을 다 채우시고 떠나는 분들은 비록 다행인 case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편으로는 그 수명 동안 겪은 수많은 사람들, 경험들과 이별을 하는 고통이 따르고, 반대로 이번의 17세 소년의 case는 평균적인 인연과 경험을 못 보고 떠나 보내야 하는 슬픔의 고통이 따른다. 역시 이것도 공평하다고 할까.

이럴 때는 어떤 말로 유족들을 위로해야 할까.. 그저 간단하게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는 너무나 형식적인 것일까? ‘더 좋은 곳으로 갔을 겁니다.’ 는 사실 맞는 말인지도 모르지만 조금 오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그래도 나는 그 애가 내 옆에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는 반응이 나온다면 분명히 그 말은 그 부모를 더 슬프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조용히 hug이나 눈의 맞춤으로 슬픔을 같이 나누는 것이 제일 ‘안전’하고 좋지 않을까. 또한 이럴 때 조금이라도 ‘희망’을 주는 것이 바로 우리 가톨릭 장례의식 중, ‘연도’임을 어제 또 절감하게 되었다. 우리들 전에 이미 떠난 그 수많은 성인의 이름을 열창하며 17세 소년을 받아 주시라는 기도는 듣거나 참가해본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그 의미나 느낌을 모를 것이다.

 

장례미사를 다녀와서..

모처럼 하늘의 습기가 가신 후, 청명한 날씨가 된 오늘 정오에 고인 김군의 부모가 속한 본당 ‘아틀란타 한국 순교자 성당’ 에서 장례미사가 입추의 여지없이 대성당을 꽉 채운 가운데 치러졌다. 부모님이 성당 공동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여서 어떤 조문객이 올지 나에게는 미지수였지만, 어제 viewing에 온 상당한 숫자의 ‘미국 친구’들을 보고 아마도 반 수 이상이 ‘영어권’ 일 것이라 짐작을 하긴 했다. 나의 짐작은 맞았지만 결과적으로 ‘영어권’ 조객이 압도적으로 많이 참석을 했다.

성당 parking lot에 아틀란타의 ABC-TV affiliate(계열방송사)인 Channel-2의 crew van이 있었고 camera까지 준비하는 것을 보고, 대강 이 김민호군의 됨됨이를 짐작하게 되었다. 이태리 계통인 우리 본당 주임신부님은 아직도 영어권 문화가 서먹하신지 전례해설자에게 모든 ‘영어 소통’을 의뢰하신 모양으로 대부분의 ‘영어권 친구 친지’들은 소수의 ‘한국어’ 권 신자들을 따라서 그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는 로마 가톨릭 식의 미사에 참여를 하게 되었다. 이런 조금 다른 식의 미사도 사실 큰 무리가 없음을 이번에 나는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가톨릭 전례는 한마디로 universal한 것으로 같이 동참하여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미사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고인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절차를 거치는 것이지만 우리들은 과연 김민호 프란치스코 군이 어떤 인물인가에 더 관심이 많았다. 성전을 꽉 메운 그들을 보면 그것을 짐작하기는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의 성품, 추억, 행적을 간접적으로 그들의 얼굴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사(eulogy)가 그것을 직접적으로 알게 해 주었다. 김민호, Nicklaus, Francis군, 그는 한마디로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던 17세였다. 한국적인 예절이 몸에 배인 것도 그렇고, 모든 일을 착실히 최선을 다하던 그였고, 그렇다고 해서 ‘지루한 공부벌레’도 아닌 유머감각이 있던 정말 크게 인생을 살 수 있을, 무언가 큰 업적이라도 낼 듯한 잠재력을 지녔던 고교생 이었던 것을 우리들은 그 조사를 통해서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안타까운 심정은, 주위의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그가 지금 ‘육체적, 물리적’으로 우리들을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그는 운명 직전 가족들에게 마지막으로 I love you all..이란 말을 남겼다는 것으로 그는 사랑이 충만한 한 고귀한 젊은 영혼이었음도 알게 해 주었다.

김군을 일찍 하늘나라로 데려가게 한 직접적인 원인, ‘투명세포육종(Clear Cell Sarcoma)’ 이라고 불리는 특이한 암, 이 비교적 희귀한 병은 그렇게 치유 율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왜 이병에 걸렸으며 왜 그렇게 1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게 했는지 누가 알겠는가? 이것이야 말로 하느님 영역에 속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만 절감하게 된다.

생각한다. 아니 이제는 믿는다. 김민호 군의 ‘불멸의 영혼’은 지금 괴로웠던 육신을 떠나 (미사 후 곧바로 화장이 되었다) ‘훨훨’ 하느님의 영역에 돌아갔거나 돌아가고 있고 아마도 장례미사를 하는 우리들을 미소 머금은 모습과 마음으로 보고 있으며, 괴로워 할 가족들을 보며 위로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이제는 믿는다.

Holy Family 40th Anniversary

 

 

Dear Father in Heaven,

As we celebrate the fortieth anniversary of the founding of our parish, we thank you for the gifts that you have given us. Most importantly, thank you for the gift of love that brings so many people from such different backgrounds together as one family.

Please help us to learn by your Son’s example to continue to love and care for one another so that we may grow and welcome others into our Holy Family.

We ask this in Your sweet name,

Amen

 

Holy Family statue
Holy Family statue

오늘 2013년 7월 10일은 우리가족의 제1 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 가 본당 창립 40주년을 맞는 날이다. 이를 기념하여 저녁에는 ‘성대한’ 기념 미사와 행사가 열린다. 우리 가족이 이 성당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이제 거의 15년이 넘어가고 있다. 우리 집에서 불과 5마일인 관계로 우리에게는 가장 가까운 parish가 된다.

원래 거의 30마일 떨어진 도라빌(Doraville) 한국 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이 우리의 본당이었지만 1990년대 초에 그곳에서 벌어지고 목격이 된 ‘기가 막히는’ 사건들에 식상을 하고 완전히 주저앉아 (냉담) 버렸다. 그 당시 대신 가까운 미국 본당에라도 나가야 했었지만 최소한 나에겐 그렇게 해야 할 절심함과 신앙심이 결여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참 무책임한 인간이었다. 우리가 ‘애써’ 얻은 신앙을 거의 무시하며 살 태세였고, 속수무책, 수수방관, 그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으로 일관하며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지금 생각을 하면, 나와 연숙은 그런 것에서 의견을 달리했고 최소한 영세를 받은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나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거나 돕지도 않았지만, 반대도 안 했다. 완전히 나는 ‘교회 business’에서 손을 땐 듯 행동을 했다. 그러다가 어떻게 연숙이 미국 본당 Holy Family 성당을 나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위기감을 느낀 연숙이 집 부근을 뒤지며 찾아 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같이 googling의 혜택도 그 때는 기대 못하던 때였으니까…

행동이 빠른 연숙은 곧바로 아이들의 신앙 절차를 ‘최소한’ 빠지지 않게 주말 미사엘 (나를 제외하고) 나가기 시작하고 작은 애 나라니의 첫영성체, 두 아이의 견진성사를 모두 완료하였다. 그 때 나는 ‘돈 버는 가장’의 핑계로 간신히 C&E (Christmas & Easter) 신자로 위태로운 신앙생활로 일관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 Holy Family 성당은 우리 가족에게 다가왔고, 2000년대 중반부터는 나의 ‘완전한 본당’이 되었다. 10년 이상의 냉담을 깨고 그곳에서 Pastor, Father Edward Thein께 고백성사를 보고 최소한 Sunday Catholic 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 전에는 사실 가족들과 미사를 가더라도 나만 영성체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것이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다지 괴롭지는 않았지만 가족들은 그 때가 참 괴로웠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렇게 해서 이곳은 명실공히 우리 가족의 ‘안정하고 안전한’ 신앙의 피난처가 되어갔다. 덕분에 영어미사와 미국인 미사 문화도 많이 익숙하게 되고 미국 천주교와 그 흐름을 간접적으로나마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이것이 발판이 되어서 나는 더욱 자신을 가지고 ‘진짜 본당’인 한국 순교자 성당으로 조금씩 더 관심을 두고 그곳으로 향한 먼 여정의 길을 2011년 가을 그곳 소속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함으로써 디디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 미국본당에서 여러 해 받은 경험들이 씨앗이 되었다.

미국 천주교가 지금 경험하고 겪고 있는 시련들, 이곳에서 고스란히 보고 느낀다. 유럽계 가톨릭 세력의 수축과 히스패닉 계열의 급 성장, 아시아 계의 ‘가톨릭 역수출’ 등등으로 사실 미국 천주교의 입장은 무슨 큰 결정을 해야 할 때가 빨리 오는 듯 하다. 특히 연방정부의 급속한 교회간섭 정책, 대법원의 동성결혼 ‘묵인’ 등은 1970년대 초의 낙태 합법판결의 파장을 훨씬 웃도는 그런 위기감을 주고 있어서 새로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앞으로의 사목정책의 중요성은 더욱 더 높아지고 있다.

나와 연숙은 작년 사순절을 계기로 이곳 미국본당의 ‘매일 미사’를 참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일년이 훨씬 넘게 실행하고 있다. 암만 생각해도 이 ‘쾌거’는 이해하기도 힘들고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것인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해 졌는가.. 암만 생각해도 나는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저, 안 보이는 ‘힘과 손’이 뒤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상투적’인 설명만 되 뇌일 수 있을 뿐이다.

Holy Family 성당과 사제관
Holy Family 성당(left)과 사제관

이곳 미국 본당도 미국 천주교를 반영하듯 Irish, Polish로 대표되는 ‘급속히 쇠퇴하는’ 유럽계 가톨릭은 급속도로 고령화되고 새로운 ‘피’는 역시 ‘다른 곳: 히스패닉, 브라질’로 대표되는 중남미계열과 열기가 느껴지는 아프리카 대륙, 뜻밖의 복병 아시아의 월남(베트남), 필리핀, 한국의 신자들이 그 고령화를 상쇄하듯 메우어주고 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white-power가 이곳에서도 역시 퇴조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미사를 가는 덕분에 이곳의 regulars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고정신자들, 열심한 신자들인 것이다. 역시 여자의 숫자가 압도적이다. 이것은 절대로 놀랄 일이 아니다. 교회로 다시 돌아오면서 이렇게 압도적으로 많은 여성신자의 숫자 (남자에 비해서)에 나는 처음엔 ‘그게 정상이다’라고 일축했지만 지금은 사실 곰곰이 생각하고 연구까지 하게 되었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한 대답은 사실 보기보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 ‘자랑스럽던 남성 동지’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들은 생명의 불멸성을 이미 알고 태어났단 말인가?

 우리가족은 비록 이렇게 두 본당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어정쩡한 모습이지만, 생각해 보면 이런 형태의 신앙생활 그 나름대로 장점과 특징도 없지 않다. 아마도 이곳에 사는 많은 가톨릭 한인신자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 많을 듯 하다. 20여 년 전에 유일한 한인공동체였던 순교자 성당이 ‘90% 이상 망가졌을 때’, 우리는 choice가 별로 없었다. 계속 나갈 것인가.. 아니면 냉담을 할 것인가..

나와 같이 간이 큰지 못한 인간들은 가장 쉬운 방법, 냉담을 택했을 것이고,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 방법을 택했다. ‘분열’의 참담한 파괴 성을 그때 절감을 했지만, 나의 평화가 더 중요했는지 모른다. 그때 backup shelter(다른 본당)가 있었으면 100% 냉담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지만, 이제는 다 역사가 되었다.

 Holy Family 성당은 현재 우리가 사는 East Cobb county에 많은 ‘비교적 안정된’ 한인들의 비공식 피난처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다. 30분 drive거리에 있는 한인 순교자 성당이 조금 멀다 싶으면 10분 거리의 이곳이 항상 우리를 맞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연륜이 쌓이면서 사람들도 익숙해지고, 정도 많이 들었다. 고정적(regular)인 한인 교우들, 물론 여기도 대부분 젊은 자매님들이지만 그들과도 많이 얼굴도 익숙해져서 진정한 ‘영혼의 고향’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혹시라도 안 보이는 얼굴이 있으면 궁금해지기도 한다.

나와 연숙에게 이 Holy Family CC는 신앙의 징검다리 역할을 많이 해주었고, 계속 해 주고 있지만 앞으로는 어떨까.. 우리가 도라빌 한인 순교자 성당에 더 많이 개입이 되면서 조금 생각을 하게 된다. 결론은.. ‘아무도 모른다’.. 이런 것은 정말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 같지 않음을 서서히 알아가고 있기에 더욱 ‘맡기고’ 살기로 했다.

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24

울란바토르와 연변 체험에서 얻어진 메시지는?

2013.07.10

거짓과 거짓말은 불완전한 인간이 지닌 악한 심성의 산물이므로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로 악함을 누르고 선한 쪽이 이기도록 갈고 닦으면 극복될 수 있는 것이기에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하늘의 계명이 주어져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2007년 몽골국제대학(MIU)에서 여름계절 학기에 경영학을 지원해 달란다는 요청을 받고, 필자와 집사람이 경영전략과 기업윤리를 커버하는 과목을 공동으로 맡고 미국CPA 소지자로 회계학 전공의 경영학 박사인 필자 후배가 국제경영을 맡아, 집중강의로 진행되는 특별학사(學事)프로그램을 위해 울란바토르에 3주간 체류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몽고음식이 입에 맞질 않아 우린 비교적 자주 한식식당엘 가곤 했는데 당시 한국관광객이 많았던 탓이었는지 그곳에 의외로 한국식당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으로 느껴졌다. 우리가 자주 가던 단골식당에서 식사하던 어느 날 15여명의 한국인 단체관광객이 밀어 닥쳤다. 그 식당에는 이런 단체손님 때문이었는지 평소 때에도 홀 서비스를 맡고 있는 몽고아가씨 종업원들이 10여명 넘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그날 한참 주문을 받느라 씨끌 뻑정했는데 주문이 끝나고 얼마 지나 음식이 나오자 또 한번 난리가 난 듯 큰소리도 나고 고함소리도 터지고, 식당주인 아주머니가 연방 미안하다며 주문한 손님들의 성질을 누구려 뜨리려 애쓰고 있었다.

필자는 어인 일인가 흥미롭기도 해서 가만히 그 소동을 지켜보았다. 소동은 손님 몇 사람이 당초 주문 내용을 바꾸는 바람에 주문 받은 몽고 아가씨가 얼떨떨해져서 주문한대로 음식이 안 나오고 딴 게 뒤죽박죽 나오다 보니 모처럼 여행 중에 특별히 먹고 싶었던 기대가 깨지는 바람에 손님들의 불평이 터졌던 것이었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고 손님들이 빠져나간 다음 필자가 그 여자주인에게 왜 그런 실수가 일어나느냐니까 이런 경우가 여기서는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단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2007년 당시 몽고사람들은 어른이건 애들이건 머리회전(回轉)훈련이 별로 되어 있질 않아서 국내에서는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도 하는 머리 회전이 여기서는 제대로 안 된단다. 그래서 자기도 처음엔 몽고 종업원들이 국내와 같겠거니 하고 생각했다가 여러 번 낭패를 보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 시킨 것은 시킨 대로 아주 잘 하는데, 한번만 변경하면 그때부턴 걷잡을 수 없이 헷갈려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몽고인들이 대체로 센스가 약하고 집중력이 덜하면서도 정직하지도 않다는 것이 15년 가까이 그곳에 살면서 느낀다는 여주인의 설명이었다.

 

정직(正直)이라는 말이 나오니, 필자 후배교수가 미국에서 박사학위 논문심사 중에 있었던 일이라며 들려주었던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구두(口頭)심사 때 한 심사위원이 던진 질문에 잘 모르면서도 땀을 뻘뻘 흘리며 이리저리 둘러대고 있는데 갑자기 ‘너, 거짓말쟁이(You are a liar)!’ 하며 고함치더란다. 그래서 그는 결국 박사학위는 이제 물 건너가는구나 생각하며, 지체 없이 잘못을 인정했더니만 ‘그래, 자네 이게 정직한 거야’ 하더란 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박사학위를 받고 상당 시간이 흘렀어도 그때의 그 경험은 그의 일상에서 늘 정직하자는 것이 생활신조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아..향수(鄕愁), nostalgia..

nostalgia, 노스탤지어1, 향수(鄕愁).. 사전2을 보면 이것의 뜻은 ‘고향을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 또는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 정도가 된다. 그렇게 힘든 뜻이 절대로 아닌 것이 누구나 이런 감정을 느꼈을 것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내가 ‘애독’하는 New York Times, the 신문에 ‘향수, nostalgia에도 과연 바람직한 것이 있는가?‘ 란 제목의 기사가 나의 눈을 끌었다. 이 제목을 보면 우선 향수란 것은 원래 ‘바람직하지 않은 것’ 으로 암시가 되어있고 그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향수, nostalgia란 용어는 의학적인 것도 있어서, 이것은 분명히 disorder (장애 障碍) 에 속하고 따라서 그에 따르는 ‘고통’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의 어원은 ‘망향심 望鄕心’의 그리스어 nostos와 고통이라는 뜻의 algos가 합성된 말로서 17세기 어떤 스위스 의사가 ‘전쟁 중에 떠나온 고향을 그리는 군인들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병’ 을 뜻하는 말로 시작이 되었다고 했고, 이후로 이 ‘병’은 부정적인 뜻으로 이해되고 쓰이고 있다.

향수(병) 연구 Constantine Sedikides
향수(병) 연구
Constantine Sedikides

이 기사의 ‘주인공’은 영국에 사는 그리스(희랍)계 (사회)심리학 교수 콘스탄틴 세디키데스 (Constantine Sedikides, University of Southampton, U.K., Ph.D Ohio State University, 1988) 인데, 그리스에서 대학을 졸업, 곧바로 미국 유학으로 사회심리학으로 연구를 계속, 현재는 영국의 University of Southampton에 재직하고 있는 사회심리학계의 권위자이다. 이런 배경이면 젊었던 시절을 포함해서 고향을 두 번씩이나 떠난 셈이고, 고향의 그리움을 분명히 느꼈을 것이고, 그것을 사회심리학적으로 파헤쳐보고 싶었을 것이다. 어느 날 고향 생각에 빠진 그를 보고 주위에서는 ‘우울증’으로 우려를 했지만, 그는 사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고 그가 느낀 것은 ‘고통적, 병적’인 것이 아닌 ‘포근함, 심지어 즐거움’에 가까운 것들이었고, 과연 고향과 지나온 과거가 앞으로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과 함께, 향수(병)이라 것은 꼭 부정적인 것인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과연 향수(병)이 과거에 짓눌려 살아야 하는 고통인가 아니면 현재와 미래를 사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주인공 자신의 느낌으로 출발된 이 문제는 본격적으로 ‘학문적, 통계적’으로 10년 이상 연구가 되어서 그 결실을 맺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 그가 이런 향수(병)에 걸렸을 때, 그가 느낀 것은 ‘이런 향수적 감정은 내 존재의 뿌리와 연속성을 느끼게 해 주고, 내 자신과 주변과의 관계도 긍정적으로 보게 해 주었으며 앞으로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된다’ 였는데.. 과연 나만 그런 것일까.. 하는 선에서 출발을 했다고 한다. 연구의 결과는 그가 느낀 그대로였다. 그 골자는:

향수적 감정은 고독과 지루함, 불안함과 맞서 싸우는 힘이 된다는 것이고 나아가서 자신을 더 관대하고, 포용적이고 더욱 참게하며 특히 부부들은 공통된 향수, 기억 감정을 나누며 더욱 가까움을 느끼게 한다. 특히 춥고 을씨년스러운 날, 이 감정은 글자 그대로 우리를 훈훈하게 해 준다. 물론 고통스럽던 기억도 동반하겠지만 전체적으로 봐서 이 향수감정은 우리의 인생을 더 의미 있게 보게 하고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죽음도 덜 무섭게 느끼게 한다.

 이 향수(병)이란 것은 지역적, 연령적 차이가 거의 없이 또한 생각보다 더욱 자주 겪게 된다는 사실도 밝혀지고 있다. 예전, 특히 19, 20세기에는 이 감정(‘병’)이 실향민, 이민자들이 특히 많이 겪는 ‘이상 증세’라고 분류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연구결과로는 이것은 ‘누구나’ 겪는 훨씬 보편성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친구, 가족, 명절 휴일들, 결혼, 노래, 석양, 호수.. 등등의 추억으로 더욱 나타나고 특히 그것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은 항상 ‘좋은 주인공’의 역할을 했다고 기억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 이상 이런 경험을 하고, 거의 반수 이상이 일주일에 3~4번 겪는다고 한다. 특히 고독을 겪는 사람이 더 자주 겪는데, ‘향수 감정’이 그런 고독과 우울의 고통을 덜어 주며 그런 데서 빨리 벗어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이 연구 결과로 향수가 그렇게 ‘좋은 면’도 있다면, 이것을 의도적으로,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는 없을까? 가장 빠른 방법 중에는 추억의 음악을 듣는 것이 있고 이것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고 하며 정말로 이 ‘추억의 음악’ 효과는 대단해서 실제로 몸 자체가 따뜻해 진다고 한다. 간혹 지나치게 과거에 집착하게 되면 ‘인생의 연속성’이 끊어지는 위험도 없지 않지만 거의 대부분 오히려 과거와 현재,미래를 더욱 더 연결시켜주는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연구 팀의 일원인 Dr. Routledge는 “향수 감정은 우리의 ‘실존 감’에 탁월한 도움을 준다. 내가 아끼는 귀중한 추억을 불러 일으키며 그것이 우리가 의미 있는 생을 보내는 값진 한 사람 임도 일깨워 준다. 또한 많은 향수 감정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감정도 잘 처리한다.” 고 보고를 했다.

 다른 흥미로운 것은 이 ‘향수 감정’의 빈도나 심도는 젊은이에게 크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떨어지다가 다시 올라간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젊은이들의 경우, 새로운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그 이전의 시절을 회상, 음미하며 건강한 변화를 추구하며, 가족과 보냈던 크리스마스, 애완 동물과 학교 친구들을 그리워한다. 이럴 때 바람직한 것은 좋은 추억거리가 많을 수록 좋고, 이것은 거꾸로 살아가며 좋은 추억거리를 많이 만들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런 향수 감정을 잘 ‘이용’하려면, 가급적 기억 속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를 하며, ‘그때가 좋았지.. ‘하는 ‘함정’을 피해야 한다고 한다. 그 대신, ‘존재적인 방법’으로 그 때의 일들이 나의 현재에 어떤 의미를 주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곳에서도 극단적인 것만 피하면 ‘추억 향수의 감정’을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무슨 병적인 노이로제나 극단적 성향만 없다면 이런 향수적 감정은 ‘적극적’으로 즐기는 것, 일주일에 2~3번 정도 빠지는 것도 좋고, 이것을 우리가 경험으로 번 값진 상품이라는 것도 기억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이다.

 이런 기사를 읽으며 나는 또 한번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된다. 몇 년 전에 이런 ‘we didn’t know then..‘ 류의 ‘연구 보고기사’ 중에 ‘내성적인 사람들의 시대’ 란 조금 걸맞지 않은 제목도 있었고 나는 ‘신나게, 열심히’ 읽었다. 내가 내성적인 사람 중의 ‘대표’이기에 그랬을까? 생각보다 더 많았던 ‘동료 내성적 인간’들을 알고 흐뭇해 하기도 했지만, 진정한 내성의 장점도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사회 심리학’적인 것들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지역간에도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그런 변화는 큰 것이 못 된다. 한마디로 인간은 대개 ‘공평’하다고 할까.. 그런 보편적 경험적 진리를 확인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러면 지금 이 기사를 읽으며 나는 무엇을 생각할까? 이것도 ‘안도감’이었다. 일방적인 사회적 압박에 못 이겨 ‘나는 향수 감정 같은 것 별로 없다’ 하며 살고 싶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과거에 매달리는 ‘현재가 불행한 한심한 인간’이란 딱지를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솔직이 말하면, 나는 위의 연구 결과에 있듯이 일 주일에 몇 번씩이고 그런 감정을 느끼고, 어떨 때는 즐기고 산다. 그렇다고 나의 현재가 과거에 비해서 덜 행복하거나 심지어 비참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연구 보고와 같이 나는 조금 우울해지면 ‘일부러, 자연적으로’ 향수 감정을 이용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나 자신 성격의 일부가 된 것 같다. 그런 ‘추억적 행복’도 없다면 아마도 위의 연구결과에도 있듯이 괴로운 감정을 더 느끼며 살았는지 누가 알랴?

 그러면서 나의 blog을 찬찬히 뒤돌아 보면, 역시 나는 ‘과거의 좋은 추억’들을 적극적으로 총동원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현재를 더 의미 있게 ‘견디는’ 영양제가 된 것일까? 주변의 어떤 ‘골프를 미치도록 좋아하는’ 친지에게 물어보면 대답은 ‘왜 과거에 집착을 하느냐?‘ 라는 간단한 반응이다. 과연 그는 그의 ‘아름다운 추억’을 즐기지 않는 것일까? 그런 맥락에서 보면 나는 조금 평균이상으로 ‘향수 감정’을 겪고 있고, 그것으로 나의 ‘아픔’을 잊으며, 그것이 현재를 더 건강하게 살고 미래를 준비하는 원천이 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1. 어차피 원어 발음이 힘들면 간단하게 그냥 노스탈자 하면 더 좋지 않을까?
  2. 네이버 사전

Gutters down..up

ladder & gutter time!

ladder & gutter time!

우리 집의 지붕에는 거의 대부분의 다른 가정집처럼 지붕에 떨어지는 빗물을 안전하게 땅으로 내려 보내는 rain gutter가 있다. 이것을 한글로 무엇이라고 했는지 금새 생각이 나지를 않지만 추측에 아마도 ‘물받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gutter하면 시궁창의 또랑 같은 기분의 조금은 ‘더러운 하수로’ 정도의 느낌이 있지만 지붕에 있는 gutter는 사실 그 중에서 제일 깨끗한 지붕에서 흘러 내려오는 빗물을 받아서 한 곳으로 모아 spout(대롱)을 통해서 땅으로 ‘안전하게’ 내려 보내는 역할을 한다.

이런 것들은, 집을 사면서 거의 생각조차 하지 않고 지내다가 이사 온 후 몇 년 후 어느 날 우연히 녹 쓸어가는 것과 구멍이 뚫려서 비가 새는 것을 목격을 하였다. 집을 살 당시 (1992년), 그런 것까지 자세히 못 본 것이 나의 실수였지만 때는 늦었다. 자세히 보니 gutter전체를 바꾸어야 할 정도로 녹이 쓸어가고 있었다.

그 때만 해도 비교적 ‘젊은’ 나이였고 무언가 ‘고치는 것’을 즐겨 했던 나는 ‘내가 한번 고쳐보자’ 하는 생각으로 일을 시작하였다. 그 당시 한창 붐을 일으키면 승승장구 확장하던 Home Depot엘 가서 gutter들을 살펴보니 알루미늄과 비닐(플라스틱)로 된 gutter들을 팔고 있었다. 이런 것들은 모두 DIYer (Do-It-Yourselfer), 그러니까 ‘시로도, 아마츄어’들을 겨냥한 제품이었고, 절대로 gutter Pro들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둘 다 비교적 ‘가벼운’ 것들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gutter pro들은 공사현장에서 직접 gutter maker(extractor)란 machine으로 규격에 맞게 ‘뽑아’내는 방식을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완전한 ‘custom-made(주문형)’인 것이고 그래서 ‘엄청’ 비싼 것이었다.

비닐과 알루미늄, 그 중에서 나에게 매력적인 것이 vinyl로 만든 gutter인데, 쉽게 말해서 ‘절대로’ 녹슬 염려가 없지 않은가? 나의 문제가 녹슨 gutter였으니 이것이야 말로 최고의 해결책이었다.

우리 집의 지붕은 보통 2층의 높이 지붕이어서 보통 DIYer들이 사용하는 사다리를 쓰면 큰 무리 없이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다. 왕년에 산을 오르고 바위를 타던 아득한 경험을 떠 올리면서 한창 녹이 슬어가는 ‘철제’ gutter들을 뜯어서 내리고 비닐로 된 gutter들을 책을 보아가며 나의 최선의 노력으로 완성을 하였다. 큰 돈을 절약했다는 생각도 즐겁지만 내가 했다는 ‘자부심과 만족감’은 이런 일을 안 해본 사람은 절대로 상상을 못할 것이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위신’도 올라갔음은 자명한 사실이 아닐까? 그리고 gutter에 대해서 완전히 잊고 십 수년을 살았다.

 

내려온 gutters.. 겨울내내 쌓인 낙엽, 솔잎..모두 썪어서 목불인견..

내려온 gutters.. 겨울내내 쌓인 낙엽, 솔잎..모두 썪어서 목불인견..

 

하지만 ‘싼 것이 비지떡‘이란 말을 어찌 무시할 수 있으랴.. 싼값의 모습이 몇 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온도에 의한 팽창, 수축’에 의한 joint (이은 부분)에서 비가 새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참을 만 했는데 점점 심해지면서 비가 떨어지는 바닥에 물이 고이고 그것이 집의 foundation으로 조금씩 스며들게 되었는데 이것은 워낙 미미한 것이어서 참을 만 했지만 정문 앞으로 떨어지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앞문 계단에 물이 고이며 그곳들이 조금씩 무너지는 것이었다. 앞문에도 물이 튀기면서 기초부분의 나무들이 썩기도 했다.

이런 저런 것으로 나의 ‘체면’은 말이 아니고.. 해결책을 찾았지만 역시 ‘새것’으로 바꿀 용기는 없었다. 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단코 내가 모조리 고쳐야 했고, 결국은 나는 다시 사다리를 기어오르며 ‘하루 종일’ 근육을 쓰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는 과연 얼마나 $$$를 save했을까?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을 것이지만 그것 보다는 나의 ‘자존심, 만족감’이 더 많은 위로를 받았을 것으로 나는 대만족이다.

Wet and Monsoonal Atlanta’s 4th

Monsoonal Atlanta우아~~ 정말 굉장하다. 스고이! 아틀란타 지역에 장마? 1989년 이곳으로 온지 아마도 이런 ‘해괴한’ 날씨는 처음인가. 간단히 말하면 그 옛날 20세기, 50~60 년대에 고국 대한민국에서 여름이면 ‘당연히’ 겪었던 바로 그런 ‘장마’ 인 것이다. 이것의 느낌을 나는 오랫동안 ‘완전히’ 잊고 살았다. 그것을 나는 요새 이곳 아틀란타 지역에서 고스란히 맛보고 있는 중이다.

기상 위성의 사진을 보니 바로 이것이 ‘몬순, 장마’ type의 모습인데, 극동지역에서는 태평양의 뜨거운 구름이 올라가는 것이고, 이곳은 멕시코 만의 뜨거운 바다 바람이 올라오는 것, 그것이 다른 것이고 나머지는 꼭 같다. 하지만, 한반도 지역의 장마는 사실 매년 겪는 ‘정상적’인 것이라면 이곳의 것은 아주 드문 예외에 속한다.

7월 2일부터 시작된 이 아틀란타 장마는 이곳의 최대 ‘역사적’ 휴일인 Independence Day 를 완전히 축축히 젖게 만들었는데, 그래도 매년 열리는 이제는 연륜이 깊어가는 Peachtree 10K(6+ miles) Road Race는 다행히 폭우가 멈추고 가랑비가 내리는 덕에 진행이 되긴 했다. 새로니와 나라니도 참가를 했다고 했는데, 6만 명이 ‘실제로 뛰는’ 대규모였지만 날씨 탓에 구경꾼의 숫자는 별로 없었다고. 그것 뿐만이 아니고 제일 큰 attraction인 firework도 대부분 cancel이 되었고, 각 동네에서 자체적으로 하던 ‘꼬마들의 행진’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wet July 4th Peachtree 10K

wet July 4th Peachtree 10K, 2013

왜 이것이 ‘장마’같이 느껴지냐 하면, 이곳에서 이렇게 1주일이 넘게 ‘계속’ 흐리고 비가 내리는 것은 아주 희귀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열흘 넘게 해 구경을 못할 것 같은 예보여서 벌써부터 집안의 곳곳에서 ‘냄새’가 풍기는 기분이 든다. 이것도 바로 그 옛날 서울에서 겪던 장마 때의 그 냄새일 것이다. 예상치 않은 이변적인 날씨에 손해를 보는 곳도 많을 듯 한데, 특히 roofer들이 제일 큰 타격이 아닐까? 이런 때 지붕을 새로 갈거나 고치는 것은 아주 어렵기 때문이다. 며칠 전 이 장마가 시작되던 날도 우리 동네에서 지붕을 고치는 것을 보았는데, 그 바로 후부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으니, 그들은 아마도 그날 완전히 ‘공을 쳤을’ 것이다.

올해는 이번의 이 장마 전에도 사실 비가 많이 내렸고, 기온도 90도 (섭씨 31도)를 넘은 날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예전에는 ‘정상’에 속했는데, 그 동안 (지난 20여 년) ‘지구 온난화’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갔는데, 올해의 기후는 과연 어떻게 된 것일까? 그 무서운 hurricane도 없고 twister, tornado도 생각보다 잠잠하고.. Mother Nature가 갑자기 왜 이렇게 온순해 졌을까? 의문은 많지만 나는 ‘무조건’ 감사, 감사를 하며 이런 날씨를 즐긴다. 왜 안 그렀겠는가?

 

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23

오스트리아 복지 스타일이 전하는 감동

 2013.07.02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경영학을 좀 아는 사람에게 경영학의 특징을 한마디로 얘기해 보라면 의례 능률의 학문(discipline of efficiency)이라고 한다. 이는 1900년대 초 미국에서 일어난 대량생산혁명으로 확립된 대량생산체제가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2차 오일쇼크(1979)전까지 약 80여 년간 지속해 오는 동안 얻어진 경영관리의 산물이리라. 요컨대 대량생산체제에서는 동일제품(identical products)이거나 표준제품(standardized products)을 다루므로 제품에 대해서는 따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보니 자연히 최대관심사는 일정의 제품산출량(output)을 생산・제공하기 위해 투입되는 투입량(input)을 최소화하거나 또는 일정의 투입량을 가지고 제품산출량을 최대화시키는데 집중하기만 하면 되게 된다. 다시 말해 투입-산출 비(input-output ratio)를 높이는, 곧 능률(산출/투입으로 표시되는 양적 개념)을 향상시키는 데만 신경을 쓰면 족하단 말이다. 그래서 대량생산시대에는 더 능률적인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 간에 차이가 생기게 되고 더 나아가 성공기업과 실패기업이 생기므로, 이 모든 것이 능률의 차이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는 건 당연하다.

이런 배경에서인지는 몰라도 오랫동안 경영학을 가르쳐 온 필자도 알게 모르게 능률이라는 개념에 익숙해 있었던 듯 쉽다. 필자가 해외여행 중 능률의 관점에서 쉽게 이해가 되질 않는 몇 번의 사례를 접한 적이 있었는데 이들을 잠시 되짚어 본다.

  1.  1997년 IMF 직전에 필리핀 마닐라와 보라카이 휴양지엘 갈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필리핀에서는 아주 조그마한 상점일지라도 사설경비원과 어카운턴트(accountant)를 꼭 고용하고 있었다. 사설경비원을 두는 연유는, 사설경비원에게 밤에는 일정한 수칙에 따라 발포권(發砲權)도 주어져 있다는 걸 봐서 그곳의 불안한 치안분위기 탓으로 이해되었지만, 조그마한 구멍가게 같은 곳에서도 어카운턴트가 전표(voucher)를 써주지 않으면 절대로 물건을 건네주질 않는 시스템은 아마도 미국 식민지시절부터 정착된 선진방식이려니 이해되었다. 특히 휴양지에서는 전표를 써주는 어카운턴트와 물건을 내주는 사람의 역할이 더 철저하게 분담되어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법적으로 그렇게 하도록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관행이었는지는 당시 필자가 확인한 바는 물론 없었다.
  2. 2000년 집사람과 같이 중국연변의 한 대학교 AMP과정에 특강 차 갔을 때의 일이다. 집사람과 필자의 강의가 다 끝나자 학교 측에서 마련한 저녁식사 자리엘 가게 되었는데 예약식당 문을 들어설 때 장면이 아직도 머릿속에 뱅뱅 돈다. 아주 고급식당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수준급이었다고 느끼며 식당 문을 들어서는데 문 양쪽에 각 5명씩, 10명이 허리 굽혀, ‘어서 오십시오’ 하며 손님을 맞는 것이었다. 능률이라는 것에 늘 익숙해 있던 필자에게 이렇게까지 손님 맞는 품이 쉽게 이해되질 않았다. 물론 손님을 대하는 영업전략 차원일 것이라고 이해는 했지만 과연 그것뿐일까, 하는 생각이 뒤를 이었던 탓이다.
  3. 2001년 태국 방콕과 해양휴양지 부켓(Puchet)엘 다녀 온 적이 있었다. 방콕의 호텔에 도착하니 태국 아가씨들이 정문 양 옆에 각 15명씩, 30명이 도열하여 허리 굽혀 인사하는 것이었는데 필자가 머문 이틀 동안 지켜보니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손님에게 그들은 하루 종일 그렇게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나 일본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며, 이 역시도 능률의 견지에서는 쉽사리 이해가 안 갔는데, 그들이 단순히 손님맞이 영업전략 차원에서 하는 것일 뿐일까 하는 생각을 그때에도 해보았었다.
  4. 2007년 북경에서 그리고 2011년에는 북경과 천진과 하얼빈에서 지인의 초청으로 고급식당의 별도 룸에서 식사할 경우가 몇 차례 있었는데 그 때마다 마다 유사한 경험을 했다. 매번 룸 안에 의례 젊은 청년 3명이 서있었는데 그들의 역할이 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주문 받는 사람과 주문한 음식을 가져 오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는데도 그들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방을 비우질 않고 우리 곁을 줄곧 지키고 서있었던 때문이었다. 후에 그곳 사람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냥 영업전략 차원과 일자리 제공차원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었다. 고급식당 별실에서 식사할 정도의 손님이라면 그 정도의 추가비용을 부담시켜도 크게 문제될 게 없고 또 그렇게 함으로서 일거리 없는 청년들에게 다소의 수입이 가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이 강제로 하는 건지, 협약에 의해서 하는 건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하는 건지는 당시 필자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능률만이 아닌 또 다른 뜻이 있음을 생각하게 한 조그마한 또 하나의 계기였다.
  5. 2005년 중유럽을 여행하던 일정 중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중심가에서 점심을 하려고 오후 3시 조금 전에 어떤 식당엘 들어갔는데 홀 안에 들어서자 뭔가 긴장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우리일행이 들어가자마자 부랴부랴 식당주인이 식당 문을 닫는데 뭔가에 쫓기는 듯한 형상이었다. 그래서 조금 지나 그 연유를 물었더니 제시간에 문을 닫지 않으면 벌칙(罰則)금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문을 닫아야 하며 또 문을 제때 닫지 않으면 범칙금을 내야 하는 이유가 여행객인 필자에게는 선뜻 이해되질 않았다.

     

끈적거리는 2013년 6월 말에..

¶  이런 끈적이는 여름이면  ‘철 없던, 무언가 세상을 잘 모르던’ 대학시절의 장마가 한창이던 때, 세월이 무한정 길다고 느끼던 시절, 시원한 장판에 대짜로 누워서 즐겨 듣던 Johnny RiversSummer Rain이 생각나고, Nancy Sinatra, Lee Hazlewood의 classic oldie ‘Summer Wine‘도 함께 그립다.

그 때는 1968~9년 경 여름, 월남전이 한창이었고, 경부고속 도로를 비롯해서 대한민국의 부동산 전체가 파헤쳐지기 시작되던, 박정희 ‘민간’ 정부의 경제부흥의 소음이 요란 한 시절, 삼선개헌 반대 대모를 핑계로 학기말 시험을 피하고 산 속으로 도피하던.. 그런 여름이 생각난다. 나는 역시 지금의 나이대로 new normal 보다는 old normal을 사랑한다. 그러니까 Good ‘Ole‘ Days.. 가 그리운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과연 진화, 진보를 하는 것일까, 아니면 퇴보를 하는 것일까..정말 모르겠다.

 

Johnny Rivers, Summer Rain 1968

 

Nancy Sinatra, Lee Hazlewood, Summer Wine, 1968

 

¶  어제 밤 잠깐 어떤 email을 잠깐 보니supreme court same-sex 란 단어가 눈에 들어왔고, 불현듯 역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news blackout을 속으로 선언해 버렸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실수’로 그것을 더 자세히 읽는 짓을 해 버렸다. 솔직히 나는 이런 류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심지어 배까지 불편하고 더 나아가면 토하고 싶은 심정까지 된다. 그러니까 나는 바로 homophobia인지도 모른다.

나의 물음은 참 간단하다. 어떻게 여자가 여자와 ‘결혼’을 하고, 남자와 남자가 ‘결혼’을 할 수 있을까? 너무나 간단한 질문이다. 어떻게? 어떻게? 그들은 정자와 정자로, 난자와 난자로 아이를 갖는 신출귀몰한 재주를 가진 동물들인가?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느끼는 심정은 조금 더 복잡하다. 숨어살았던 그들.. 이유가 있어서 숨어 살았지만, 그 이유는 이렇게 너무나 간단하다. 한마디로 ‘말로 표현을 할 수 없는 해괴한 변태적 동물집단’이라면 어떨까? 그들이 우리들의 피땀 어린 세금으로 혜택을 받겠다니, 나의 심정은 이제 동정심에서 증오심으로 변하고 있다. 그들은 어느 정도의 낯짝을 가졌기에 그렇게도 철면피 같을까?

이것을 종교로 연관을 시키는 사람들은 아주 중요한 point를 잊고 있다. 이것은 신앙, 종교, 교회와 근본적으로 관계가 없는 것이다. 법 중의 법, 헌법과도 같은 정상적인 인간이면 가지고 태어났을 기본중의 기본적인 도덕률이기에 사실 거론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런 ‘자명한 사실’을 무슨 이유로 헌법 조항에 넣을 필요가 있었을까?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법 조문에 없으면’ 어떤 수단으로라도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바꿀 수 있는 최근의 시대 조류.. new normal들이 속출을 하는 초현대 인간들.. 그래서 그래서 절대 불변, 법이 필요 없는 ‘진리 중의 진리’를 찾는 신앙과 종교가 필요한 것일까? 너무나 끈적거리는 6월 말, 아침부터 나의 어깨는 쳐지기만 한다. 이럴 때 시원한, 가슴이 열리고 피부가 뽀송뽀송해지는 마른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올까?

 

Jackie, a handsome dog
Jackie, a handsome dog

¶  Jackie,  어떤 handsome한 개, 내가 부르는 이름이다. 얼마 전 우리 동네를 배회하던 이 Jackie는 6월 동안 나의 머리 속에 있었다. 하도 답답해서 주변의 보는 사람에게 이야기도 하며 마음을 달랬지만, 이 개가 혹시 잘못 될까 봐 하는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동네를 걸을 때마다 보게 되어서 어떨 때는 걷는 것도 피하곤 했다. 비가 오면 비 맞는 모습을 그리며 걱정이 되었고 해가 쨍쨍하면 어떤 집 그늘에서 더위를 식힐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그저 어떤 좋은 주인을 만나는 것이 나의 제일 큰 희망이었다. 최후의 사태에는 내가 데려올 생각도 서서히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다시 Jackie를 보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그 동안 자주 보이던 집의 길 건너편 Johnson부부의 집 앞 잔디에 있었다. 반가워서 눈을 마주치니 Jackie도 그런 표정이었는데, 의외로 모습이 ‘건강’하게 보였다. 그런 모습을 간직하며 그 옆에 있는 playground에서 살펴보니 이번에는 Johnson씨가 나와서 잔디를 깎기 시작했는데, 그때 Jackie와 Johnson씨의 행동이.. 서로 아는 사이처럼 보였다. 이것은 사실 뜻밖의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Jackie가 Johnson씨의 개? 하지만 dog tag, collar같은 것이 없지 않았는가? 그래도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분명히 Johnson씨가 최소한 돌보아 주고 있음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제 드디어 ‘진실’을 알게 되었다. 어제 연숙과 집에 들어오다가 혹시나 해서 차로 동네를 돌아보게 되었다. 혹시 Jackie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Jackie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뜻밖에 같은 동네, 우리 집 뒤쪽에 우리보다 더 오래 사시는 한인교포 방선생님이 산책하는 것을 보고 차를 세우고 염치불구하고 Jackie에 대해서 묻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슨 얘기를 하나.. 하시더니 나중에 혹시 Johnson네 집에서 ‘돌보아 주는 ‘개 아니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추리는 맞았다. 역시 stray dog이었는데, 얼마 전부터 Johnson씨네 집에서 밥을 주고 돌보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adopt는 안 한 듯 했다. 이것은 정말 정말 반가운 소식이어서 연숙과 나는 너무나 안심을 하게 되었다. 최소한 Jackie는 현재 shelter가 있는 셈이 아닌가?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adopt할 가능성도 높을 것이라 짐작이 들었다. 그 후 Jackie가 배회하던 Johnson집 주변에서 더 이상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완전히 집 속으로 들어간 것일까.. 아니면 혹시 animal shelter로 보내진 것일까? 나의 걱정과 관심은 아직도 끊이질 않는다.

 

Jackie Update: Happy Note

Jackie에 대한 나의 ‘필요 이상의 걱정’은 전염성이 있었는지 주변에도 알려지고 특히 연숙이 제일 관심을 갖는 듯 했다. 내가 그런 ‘측은지심’이 결여된, 아니면 최소한 그런 마음을 나타내지 않는 부류의 인간이라고 생각을 해 왔기에 그런지도 모른다. 거의 ‘이상할 정도로’ 내가 걱정을 하니까 조금은 재미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급기야 며칠 전에는 big news가 있다고 소란을 떨면서 나에게 전해준 이야기는.. 얼마간 보이지 않았던 Jackie가 Mr. Johnson과 같이 동네를 걷고 있었다는 목격담이었다.

Mr. Johnson은 원래 자기의 개가 있어서 그 개는 leash에 끌고, Jackie는 그 옆을 나란히 걷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너무나 기뻐서 어쩔 할 바를 몰랐다. 결국은 Mr. Johnson이 adopt를 한 것일까.. 최소한 그 집에서 키운다고 결론을 내리고.. 긴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animal control로 보내는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역시 그 Johnson은 내가 결여되었던 ‘측은지심’이 있었나 보다.

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22

북경대 MBA가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가르치는 이유

 2013.06.27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근육운동을 기계로 대체시킨 산업혁명이 확산되는 가운데 19세기 경험율(rule of thumb)에 의존하던 영국의 공장관리경험을 거쳐 1900년대 초반 대량생산혁명이 미국에서 일어나면서 산업현장과 밀착한 토양 위에서 경영학이 태동하게 되었다. 미국의 산업화가 철강산업-자동차산업-전기통신 산업을 중추로 진행되어 온 탓에 경영학도 이들 각 산업현장에서의 문제해결을 돕는 산업밀착형 형태로 발전되어왔다.

 대량생산관점에서 미국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 산업이 철강산업이다. 미국 US Steel사가 영국 British Steel사가 채택한 베세머(Bessemer)공법을 그대로 채택한 대량철강생산 공정을 갖추면서 철강산업이 발흥하게 되었고 그래서 경영학도 물론 철강산업에서 제일먼저 태동되게 되었다.

 경영학에 관심을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Taylor하면 금방 그를 알지만 그가 1890년경 미국의 한 철강공장의 제강공정(steel-making shop)에서 압연공정(milling shop)으로 강괴(steel ingot)를 주먹구구식(rule of thumb)으로 옮기는 작업을 유심히 지켜본 후 ‘과학적 관리법(scientific management)’을 주창했고 그로부터 경영학이 싹트고 자라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실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이 나오기 전에는 주로 과거의 경험율에 비추어 일을 처리해 왔다. 이런 배경에서 테일러가 작업현장을 유심히 관찰해보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공장의 각 작업자가 오늘은 무슨 일을 어떻게 할까를 각자가 알아서 하는 식으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음에 그는 주목했다.

 그네들의 그런 방식으로 하루 평균 작업량은 1인당 8톤 정도였다. 만약에 각자가 할 과업(task)을 정해주고 과업실적에 따라 임금을 달리 주며 일을 계획하는 기능과 작업하는 기능으로 분리시켜 각 기능의 전문성을 발휘케 한다면 얼마나 생산성이 올라갈 것인가를 그 엔지니어가 계산해 보니 최소한 49톤은 될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는 작업연구와 시간연구를 통해서 과업을 책정하고, 직능별 조직을 마련하고, 오늘날의 성과급제와 비슷한 임금체계를 갖추어 작업을 시켰더니 작업량이 평균 49-51톤이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그의 확인과 확신으로부터 1911년에 과학적 관리의 원리(The Principles of Scientific Management)란 책을 펴냈다. 이것이 그 후 Taylorism으로 더 널리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서 미국 관리학으로 발전했고 이게 경영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6.25,사필귀정(事必歸正)

올해도 어김없이 6월 25일, 6.25가 찾아왔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었던 시절, 주로 재동국민학교 다닐 당시, 어렸을 적에는 신나는 전쟁놀이, 서울 하늘 가로지르며 북으로 날던 ‘쌕쌕이‘ 미군의 젯트 전투기들(F-80, F-86), 만화책을 장식하던 ‘용감한 국군’의 무용담으로 정신을 빼앗기던 날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2의 6.25가 그날에 또 일어날까 봐 어린 마음에 ‘전전긍긍’하던 날이었다.

그런 걱정이 심한 때에는 6월 25일이 오면 그날 저녁의 붉은 저녁노을조차 다시 미아리고개를 넘어오는 ‘괴뢰군의 탱크’의 포화로 착각하기도 했다. 꿈을 꾸면 남산위로 갑자기 나타난 김일성의 대포들을 보기도 했다. 한마디로 어릴 적, 우리는 ‘공산당, 괴뢰군, 김일성, 소련의 후르시초프, 중공의 모택동’의 공포 속에서 숨을 죽이며 살았다.

 

F-80-Korean-War

6.25 발발 직후부터 일본으로부터 나르기 시작한 미국의 F-80, Shooting Star Jet 전투기들.. 북괴의 Yak 전투기를 격추시키고 소련제 탱크를 공격하였다. 전쟁 직후에도 서울의 상공을 가로지르며 나르던 날개 끝에 달린 연료탱크가 독특하던 이 전투기..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을 한다

 

올해는 한 살을 더 먹어서 그런지 조금은 다른 각도로 6.25가 나의 인생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실 우리 가정은 6.25로 인해서 ‘처참하게’ 망가진 case다. 한 가정의 주인인 아버지가 갑자기 없어졌다면.. 그것도 생사를 모르게 완전히 없어졌다면 그 가정은 어찌되겠는가. 군인으로 나가서 수많은 사망자, 불구자가 나왔지만, 우리도 그에 못지않은 불구 가정이 되었다.

어렸을 때 그것이 사실 크게 생각할 것은 못된 것이, 어쩔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가 재혼을 했으면 또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았을 수 있기에 나와 우리누나는 항상 고마워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을 해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우리 어머니는 어린 남매를 위해서 ‘완전히’ 인생을 바친 것이다. 젊은 30대초에 남편을 잃은 어머님, 경제적으로 여유도 없었던 때, 원산에 대가족을 남겨두고 서울 색시가 된 어머님, 그야말로 혈혈단신으로 이제는 김일성이 덕분에 남편까지 잃었으니..

일방적 통일을 빙자해서 쌍방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전범 김일성이 처단도 못 받은 채 줄줄이 2대의 자식들을 다른 ‘잠재적 전범’으로 만들고 죽었으니, 이제는 사실 원수도 갚을 수 없는 지경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고사성어가 어찌 이렇게 잘도 맞는가? 한 정권을 거의 마피아 스타일 범죄조직처럼 공포의 정치로 움직이더니 결과가 과연 어떠한가? ‘인민’들을 굶겨 죽이고, 탈출하는 사람을 죽음의 수용소로 몰아놓고, 최후의 수단으로 동족을 ‘불바다’ 로 말살하겠다고 장난감 원자탄을 만들고.. 과연 이들은 어떤 인간들인가?

그리고 이들을 옹호하는 ‘똥포’ 집단은 어떤 인간들인가? 또 다른 거대한 범죄조직이었던 소련연방이 거의 순식간에 넘어간 것을 보고 나는 조금은 위안을 받는다. 숨막히는 지정학적 조건에서 굴복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고수하던 조국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 most vibrant democracy로 성장했다. 정의는 결국에 승리를 하고, 역시 사필귀정인 것이다. 역사의 뒤에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 그들은 절대로 모를 것이지만 나는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Jackie

Jack, Jackie.. 잘 생긴 어떤 개의 이름이다. 암컷, 수컷을 잘 모르기에 이름도 내가 “gender-neutral”, Jackie로 부르고 있다. 짐작에는 아마도 암컷일 것 같기도 하지만 확실치 않다. 거의 한달 간 나는 이 의문의 개를 우리가 사는 Hanover Woods Subdivision 에서 목격을 하고 있다. 처음 본 것이 거의 한달 전, 비 오는 날 낮 우리 집 앞으로 비를 맞으며 ‘방황’하는 모습을 목격한 때였다.

우리 집 목소리 큰 개 Tobey가 미친 듯이 짖어대서 보게 된 것인데, 그때의 모습은 ‘아마도’ 어느 집에서 실수로 ‘풀어놓은’ 듯한 인상이었었다. 그래도 비를 맞는 모습과 조금은 당황하던 자태가 나의 가슴을 저리게 했다. 비록 사람이 아닌 동물들이 본능적으로 비 맞는 것이 그렇게 괴로운 것이 아닐 거라고 머리로는 생각이 되지만 나의 가슴속 그렇게 위로가 되지를 않았다. 그저 불쌍하고 안쓰러운 그것이었다. 그리고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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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후, 매일 하던 산책 중에 우리는 다시 Jackie를 보게 되었다. 깜짝 놀랐다. 왜 아직도 또 ‘풀려’ 돌아다닐까? 내가 우려하던 것, 혹시 누구에게 버림을 받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나의 걱정이 현실화 됨을 느끼고 다시 나는 괴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비교적 순하게 생긴 잘 생긴 개, 나는 그 종자를 잘 모르지만 친근감까지 가는 그런 Jackie.. 비교적 먼 거리에서 보았지만 느낌은 ‘또 방황’하는 듯한 그런 것이었다.

그야말로 stray dog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나의 머리 속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런 걱정을 하는 내 자신이 조금은 이상하게 생각이 될 정도로 나 자신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저 나는 다시는 그렇게 밖을 돌아다니는 Jackie를 못 보게 되기만 빌고 있었다. 만약에 정말 주인에게 버림을 받았다면 다른 주인을 빨리 만나기만 나는 속으로 빌었다.

며칠 후에 나의 희망은 사라지고 다시 Jackie를 보았다. 이번에는 바로 나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만약을 사태를 대비해서 같이 걷던 Tobey를 품에 안고 Jackie에게 가까이 가 보았다. 전에 비해서 조금은 ‘덜 깨끗한’ 모습.. 턱 밑에 부스스하게 털이 뭉쳐있어서 ‘분명히’ 누구의 보호를 받지 않는 돌아다니는 개 임을 깨닫게 되고, 나는 더욱 우울해 졌다.

제발 어떤 마음씨 좋은 집에서 거두어 주기만 바랬는데.. 이렇게 긴 나날을 밖에서, 그것도 자주 쏟아지는 비를 맞았을 것을 생각하니 슬프기만 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 집으로 데려올 ‘용기’가 없음을 깨닫게 되니 더욱 괴로웠다. 그저 그저 내 눈앞에서 ‘사라져’ 주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혹시 Lost and Found같은 곳에 그 Jackie의 사진이 보이지 않을까 Internet을 뒤져 보아도 Jackie는 없었다. 그리고 dog tag이 없음을 보니 전 주인이 ‘완전히’ 포기한 것이 틀림이 없었다. 그런 버림 받았다는 사실이 나의 가슴을 찌르는 듯한 괴로움을 주었다. 정말 오래 전, 우리는 아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떤 강아지를 포기했던 일이 있었고, 그 사실이 나의 가슴에는 지독한 응어리로 남아있었다. 그런 사실 때문에 나는 더 괴로움을 받고 있다고 나는 확신했다.

일 주일 전에 산책 중에 또 Jackie와 상면을 했다. 항상 튀어나오는 집 근처에서 보는데 이번에는 조금 침착하게 가지고 다니던 mobile phone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것으로 최소한 breed (종자)를 확인하고 필요하면 print를 해서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생각보다 그렇게 살이 빠지거나, 배 고파하는 모습이 아니고 비교적 침착한 모습이었다. 이것이 어찌된 셈일까?

Jackie는 과연 stray dog일까.. 매일 어디서 밥을 먹는 것일까? 계속 우리 동네에서 보이는 것을 보니 아마도 이 근처를 배회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하도 괴로워서 연숙과 잠깐 집에 들린 ‘개를 좋아하는’ 나라니에게 실토를 하며 도움을 청했다. 모두의 의견이 나와 비슷했다. 분명히 집 주위를 배회하며 밥을 얻어 먹고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 아주 조금은 안도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나라니의 말이, 그렇게 사는 개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고, 나는 정말 오랜 만에 수 많은 개들의 ‘불안전’한 생애를 실감하게 되었다. 아하.. 그래서 그렇게 많은 humane society, shelter들이 있는 것이구나 하는 것.

제일 ‘무서운’ 것은 시 당국의 animal control에서 나와 잡아가는 것이라고 들었다. 그들은 거의 모두를 put to sleep(a.k.a. kill)한다고 했다. 그런 얘기를 들으니 아마도 이렇게 비를 맞고 배가 고프더라도 안정된 집들 사이를 배회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깨끗한 가정에서 집 주인 행세를 하며 호강하는 pet들과 비교를 하면 그것도 큰 위로가 되지를 않는다.

그러다가 바로 며칠 전에 차를 타고 집에 들어오다가 불현듯 동네를 한 바퀴 돌면 Jackie를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같이 타고 있던 연숙에게 동의를 구하고 돌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매일 보던 그 곳에서 다시 Jackie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우리 차가 가는 차도의 반대편 차도에 Jackie가 쓰러져있는 것이 아닌가? 차도 한 복판에! 우리는 너무나 놀라서 차를 차도에 그냥 세우고 뛰어 나갔다. 불현듯.. Jackie가 차에 치었거나 피로에 지쳐서 쓰러져 죽은 것이 아닐까 하는 끔찍한 생각이 스쳤다. 연숙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거의 순간적으로 Jackie는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더니 그 도로 옆 집의 앞 잔디로 뛰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짐작에 그 차도에 그냥 누워있었던 것인데.. 왜 그랬을까? 그곳은 curve인 도로여서 차가 갑자기 오면 차도에 누워있는 개를 보기가 힘든 곳이라.. 분명히 치었을 것인데.. 본능적으로 Jackie는 그것을 몰랐을까? 아니면 우리가 오는 것을 보고 우리에게 보이려고 일부러 누웠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연숙의 추측은 아마도 몸이 젖어서 비교적 물기가 마른 차도에 누웠던 것이 아닐까.. 하는 정도지만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일이 있은 후에 나는 아직도 산책을 꺼리고 있는 상태이다. 솔직히 또 보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이런 와중에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비’, ‘소낙비’ 같은 것이 계속 신경이 쓰인다. 비록 Jackie는 비를 피해 어떤 집의 deck같은 shelter에 들어가겠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인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비교적 pet들을 많이 기르고 있고 Jackie가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거나 알았으면 분명히 무슨 action을 취했을 것인데 아직도 이렇게 밖에서 배회함을 보면 .. 어떨까..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기 집에 ‘입양’하기에는 무리였던 것이고 그저 feeding이나 shelter만 제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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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Jackie가 내 눈앞에 나타난 후에 내가 겪고 있는 이 ‘괴로움’은 무엇일까? 연숙이나 나라니의 표정을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인상인데 왜 나만 이렇게 괴로움을 느끼는 것일까? 오래 전 내가 ‘범한 죄’ 탓일까? 이제 나는 인과응보를 믿고, 세상 이치가 그것이 맞을 것이라고 확신을 한다. Jackie는 나에게 그런 ‘진리’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21

“노키아 쇠락 이유 알았다” 연발하던 핀란드 교수

 2013.06.19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미국 샌디에고(San Diego)에 갈 기회가 필자에겐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2007년 센디에고 쉐라튼 호텔에서 있었던 제27차 세계전략경영학회 연례회의(SMS Annual Conference)참석 때였고, 두 번째는 2011년 센디에고 근교 리조트의 LOEWS 호텔에서 열렸던 SMS 특별회의(Special Conference)참석 때였다.

 2007 년 첫 번째 센디에고 갔을 때 그곳 인상은 2008 월가 붕괴 1년 전이어서 그러했는지는 몰라도 무언가 무력감이 느껴지던 분위기였다. 약 700여명을 헤아리는 학회 참가자들로 쉐라튼 호텔 로비는 붐비고 있었는데도 호텔도 예외는 아닌 듯 생동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특히 배정받은 룸의 세면대 발브가 제대로 작동이 안 돼 물이 줄줄 새고 있어 프론트에 알리자 수리공들이 왔다 갔다 하며 손을 봤지만 임시변통도 잘 안 되는 걸 보면서는 뭔가 큰 이상(異常)이 감지되었다.

 그러함에도 SMS 연례회의 행사는 그런대로 성대하게 잘 진행되고 있었다. 필자는 그간 교분관계를 맺어 온 영국 Warwick의 John McGee 교수, 스위스 IMD의 Bala 교수, 북경대 GSM의 Changqi WU 부원장을 비롯한 10여명의 회원들과 해후의 인사를 나누며 미리 준비해 간 Dynamic Management Theory(DMT)에 대한 PPT 자료를 첫날 일정이 끝나고 저녁을 마친 후 나눠주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 SMS전 회장이었던 McGee 교수가 스티븐 킴(당시 그는 필자를 그렇게 불렀음)하며 큰 소리로 필자를 부르며 필자를 일찍부터 기다렸다며 전날 준 PPT 자료에 뭔가가 잔뜩 쓰여 진 것을 들고는 질문이 있다는 것이었다. 얼른 필자에게 다가 온 생각은 McGee 교수가 DMT에 대해 대단한 관심과 흥미를 갖고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가 DMT와 관련하여 필자에게 제기한 질문의 요지와 주고받은 대화는 이러했다.

 

1) 공급과잉과 수요부족 간의 불균형(imbalance)이 1929년 세계대공황을 야기 시킨 것처럼 1997년 이후 10년 사이에 미국 GDP의 25배가 넘을 정도로 급증한 파생금융상품으로 인한 금융경제(money economy)의 초거대화와 1980년대 초반부터 쇠락해 온 제조업으로 인한 실물경제의 왜소화와의 불균형으로 미국경제는 결국 머지않아 큰 파국을 맞으리라 보는 필자의 시각이 너무 지나친 건 아닌가?

 이에 대해, 아직 실제로 벌어진 일이 아니므로 누구든 단정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지만 큰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선에서 일단은 봉합하였음.

 

2) 1980년부터 전략경영(strategic management)이 경영학의 한 영역을 형성하여 온지가 27년이나 되었는데 거의 같은 기간 동안(1980-2007) 미국경제가 계속 쇠락하여 온 사실을 들어 전략경영이 그간 제공해 온 이론/모델/분석도구들이 결국 실용성이 덜한 것들이라고 보는 필자의 사고 역시 논리의 비약 아닌가?

 이에 대해, 전략경영의 기본관점이 요소환원주의(reductionism: 각 요소의 총합이 전체라는 철학적 사고)에 기초하고 있어 인터넷혁명 후 상호의존성이 높아지고 상호작용이 심화되는 상황에서는 기업과 산업을 각각 하나의 전체로서(as a whole) 파악하는 개념적 틀이 요구되며 이런 면에서 전략경영은 한계를 나타낼 수밖에 없다, 는 인식에는 공감을 표했음.

 

3) 한국의 대기업인 재벌(Chaebol)들이 잘나가는 이유가 뭔가? 특히 삼성(Samsung)이 Fortune Global 500에서 2005년에 40위권으로 진입했고 2007년에도 30위권으로 상승무드인데 그 요인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더욱이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금과옥조처럼 가르쳐 온 우리들로서는 삼성의 경우가 참으로 당황스런 면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McGee 교수와 필자는 아침 식사를 하면서도 진지한 토론을 계속했고 발표세션이 시작되었는데도 발표장엔 들어가지도 않고 서로의 주장을 주고받았는데 이는 삼성성장의 면모를 몇 마디로 정리하는 게 어렵다는 선에서 얘기를 맺었다.

 

김시스터즈 특급, Kim Sisters Express

얼마 전에 1960년 내가 서울 중앙중학교 1학년 다닐 때와 그 해 일어난 4.19 학생혁명을 생각하며 그 즈음의 미국 주간화보잡지 LIFE를 뒤져 보다가 뜻밖의 반가운 사진 기사를 보게 되었다. 바로 그 당시 대한민국의 자랑, 김시스터즈에 관한 기사와 사진들을 보게 된 것이다. 그 훨씬 이전에 그 세 자매가 ‘목장의 노래‘를 송민도씨와 같이 부르는 video를 보며 그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고, 1950년대 피난도시 부산에서 촬영을 한 국산영화 ‘청춘 쌍곡선‘ 에서 역시 세 자매가 간호원으로 나온 것도 보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목장의 노래, 송민도, 김시스터즈

나는 그 당시 어린 국민학생이었기에 그 영화를 볼 수는 없었고, TV가 없었으니 (아마도 그 당시서울에 TV를 가진 집은 손으로 꼽을 정도..) 그 세 자매의 모습을 볼 수도 없었다. 그저 라디오로 목소리를 들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희망의 상징’이었던 미국으로 간다고 들었을 때, 섭섭하지만 얼마나 모두 자랑스럽게 느꼈는지 모른다. 일종의 ‘특상품 수출‘이었다고 할까..

그녀들은 그렇게 해서 완전히 미국에 정착을 했고, 가끔 귀국을 해서 선을 보이기도 했다. 이번에 LIFE 잡지에 나온 기사를 읽으면서 그 세 자매는 정말 재주가 넘치는 멋진 trio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사진을 보면 아마도 Chicago에서 잠시 공연을 할 당시 취재를 한 것 같고, 김시스터즈의 manager와 사이가 좋았는지, 시카고 근방 그 manager의 어머니 농장에서 머무르며 미국의 일반 가정과, 서민문화를 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동안 내가 잘못 알았던 사실은, 그녀들이 1950년대 중반에 미국으로 갔다고 생각했는데 이 기사를 보니 그 것은 1959년경이었다. 게다가 그녀들은 놀랍게도 거의 국민학생 때부터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8남매의 대가족이었는데 어떻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Googling을 해 보면 순간적으로 알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당분간은 모르고 지내기로 했다.

 

이 사진 기사에서 새로 알게 된 사실 중에는:

  • 10년 전, 그러니까 6.25 당시부터, 그러니까 아주 어린 시절부터 노래를 했고,
  • 그들의 talent를 본 어떤 전 GI, 가 미국에 가서 활동하도록 주선을 해서 일년 전부터 Las Vegas casino 에서 공연을 했고,
  • 최근에는 Chicago의 Polynesian Village에서 공연을 했고,
  • 이 세 자매는 철저히 한국식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상당한 금액의 일주간 공연료 $2500의 거의 전부를 서울의 ‘대가족: 어머니, 5명의 형제, 자매’ 에게 송금을 하며,
  • 남자관계를 철저히 관리해서, 공연이 끝나서 남자에게 초대를 받으면 반드시 세 자매가 ‘단체행동’을 해서 ‘scandal’을 방지했다.

 

여기의 기사 본문을 읽어보면 그 trio가 어떻게 미국의 문화, 노래들을 배우며 미국에서 적응했는지를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Three Korean Kims and Their Kayagum

When Min Ja, Ai Ja and Sook Ja Kim enter wearing their colorful hangobs and start strumming on their Kayagums, the song they go into is Tom Dooley. For the Korean girls now appearing in the Polynesian Village in Chicago, the old mountain tune is a mass of phonetics that means nothing to them but is a delight to their audiences. Americans find the Oriental touch on U.S. tunes a highly refreshing one, and just one year after leaving Seoul the Kim Sisters are an all-out nightclub hit over here.

The act began 10 years ago when the girls were taught Ole Buttermilk Sky and Candy and Cake by U.S. troops in Korea. Min Ja sang off key and Ai Ja chewed gum while she sang, but to the GIs they were the Oriental’s answer to the Andrews Sisters. Last year an ex-GI named Bob McMackin who had heard them in Seoul brought the Kims over. The girls learn their songs by note since they know little English. They managed to master the phrase “lots of luck” and could enunciate it perfectly as an exit line. But to audiences it lacked Oriental character and the Kims have changed back to “rots of ruck”.

After a year in the U.S. the Kim sisters still keep the custom of Korea. Most of the $2,500 a week they earn by singing here is dutifully sent back to their mother and five brothers and sisters in Seoul. They are faithful to a Korean tradition that a girl should not go out alone until she is 23. Sook Ja, who is the oldest Kim and the trio’s spokesman, solves the stage-door Johnny problem by telling the men who want to take her out after the nightclub show that her younger sisters have to come along. Ai Ja, 20, and Min Ja, 18, do what Sook Ja tells them to. A recent visit to an Illinois farm was a welcome break from their hectic life, which they find involves continual adjustment. In Chicago they miss the noise of Las Vegas where they had to sing a lot louder so they could be heard over the din of the slot machines.

 


LIFE 기사, "한국의 세 김씨와 와 가야금"

LIFE 기사, “한국의 세 김씨와 와 가야금”

가야금 반주로 Tom Dooley를 부르는 김시스터즈

가야금 반주로 Tom Dooley를 부르는 김시스터즈

SPLIT-SHEATHED SINGERS, Min Ja (with guitar), Sook Ja (with clarinet) and Ai Ja (with saxophone) leap off the stage after performing Five Foot Two. The trio plays 10 instruments, including a bass fiddle and banjo.

 Show Five Foot Two 를 마치고 무대에서 뛰어나오는 (왼쪽에서) 민자, 숙자, 애자
이 세 자매는 banjo, bass fiddle을 포함, 무려 10가지의 악기를 능란하게 다루었다.

LIFE-22260-KIMS-3 old-style jazz 에 맞추어 신나게 춤을 추는 김시스터즈

LIFE-22260-KIMS-4
IN PONY-TAILS girls watch Queen for a Day at manager’s mother’s farm in Marengo, Ill. Girls were surprised to learn show’s winner ruled nothing.
ON A SLEIGH, the three Kim sisters start off for a horse-drawn tour of the snow-covered farm. From the left are Sook Ja, Ai Ja and Min Ja.
ON A SLEIGH, the three Kim sisters start off for a horse-drawn tour of the snow-covered farm. From the left are Sook Ja, Ai Ja and Min Ja.

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20

난까이대서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로 번 최초 수입

 2013.06.12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필자는 2008년 정년을 맞은 후에도 세계전략경영학회의 연례회의나 특별회의에는 가능한 한 참여하고 있다. 그건 정년 전에 수차례 참여하면서 형성된 전략경영분야 세계 석학들과 교분관계를 지속시키고자 하는 맘에서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필자가 품어 온 하나의 의문인 ‘What is Competitive Advantage?’을 풀고픈 마음에서이기도 하다.

1980 년 전략경영이 등장한 이래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경쟁우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가 얼핏 이해되는 듯 하면서도 명쾌하게 와 닿지 않았는데 30여 년이 지난 2011년 SMS 회의의 어느 발표세션 스크린에도‘What is Competitive Advantage?’라는 것이 떠 있는걸 보면서는 이 의문이 필자에게 더 크게 다가왔다.

 1979년 2차 오일쇼크 이후 전개된 초경쟁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주 경쟁자보다 한 수 위의 우위(優位)를 점해야 한다는 인식이 절실하게 느껴지던 상황에서 1985년 마이클 포터 교수가 제시한 경쟁우위라는 개념이 너무 어필하게 다가왔기에 그 후 디지털화혁명-인터넷혁명-스마트혁명으로 이어지는 대변혁의 상황에서도 경쟁자와의 상대적 비교를 담고 있는 경쟁우위라는 개념은 여전히 중시되어 왔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경쟁우위를 고객에게 더 어필하는 제품/서비스를 보다 더 싸게 제공하는데 있어서 주경쟁자보다 특정기업이 지니는 우위라고 정의하고 있는 기존의 주장에 대하여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지만, 과연 주경쟁자보다 우위를 점하기만 하면 항상 우수한 기업성과가 얻어지는 걸까, 또 한발 더 나아가 아예 경쟁이 없는 상황이라면 항상 사업성공이 보장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풀리질 않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쟁우위를 점해서 잘나간다고 회자되던 기업들이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면서 어느 날 느닷없이 알 수도 없었던 무명의 경쟁자에게 나가떨어지는 사례가 빈발하는가 하면 완전히 독점이라고 자족하던 기업들이 문을 닫는 경우도 흔히 발생하고 있는 걸 보면서 경쟁우위로만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문제가 쉼 없이 제기된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경쟁우위를 점하고 있던 기업들이 느닷없이 쇠락하는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보다 더 일반적으로 산업주도권이 빈번히 이동하는 상황에서도 기업의 지속번영은 가능한 것일까? 만약 가능하다면 그 원리는 무엇일까?

 필자는 이 물음을 제기하고, 2011년 6월 10-12일 샌디에고에서 핵심역량이론을 주창했던 고 프라할라드의 1주년 추모를 겸해 ‘경영학은 재구축되어야 한다(Management should be reinvented)’는 주제로 열린 2011 세계전략경영학회 특별회의에서 다음의 논문발표를 통해 그에 답하고자 하였다. 즉,‘핵심역량: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촉발의 출발점(Core Competence: Starting Point to Trigger Dynamic Management based on Firm Power Theory)’이라는 논문발표를 통해 위의 물음에 답하고자 했는데 당시 발표했던 내용을 간추려 본다. (이 부분은 아무래도 경영전략 전문가회의에서의 토론내용이므로 일반 독자에게는 다소 생소하리라 생각됩니다만 널은 이해 바랍니다.)

나를 따라오는 ‘인터넷’ 광고

몇 개월 전부터 조금 이상한 ‘현상’을 인터넷 웹 싸이트(websites)나 Internet Radio들을 열 때마다 보고 듣고 느끼기 시작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처음에는 주로 news site에서 senior citizen을 겨냥한 광고들, 주로 ‘피부를 젊게 보이게 하는 각가지 상품들’ 아니면 investment에 관한 상품들, 여행 안내 같은 누가 보아도 이것들은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을 상대로 한 것들이었다. 이때 느낀 것이.. 아하.. 이(놈)들이 나의 IP address와 나의 나이를 알았구나..하는 씁쓸한 심정이었다.

인터넷의 ‘매력’은 그제나 이제나 anonymity (익명성?)이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물 건너 간 것이다. 최소한 우리 집에 연결된 DSL service IP(Internet Protocol) address와 나의 신상명세가 ‘알려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미 public domain에서 찾을 수는 있지만, 이전까지는 거기까지 신경을 쓰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 IP address와 나의 나이 pair만 가지고 각가지 ‘나이에 상관된 광고’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IP address 와 나의 ‘위치’를 연결시켜서 각가지 local business를 선전하는 광고다. 예전에는 이곳 local website(예를 들면 이곳의 지역 신문, 방송, 기업들) 에서만 하던 이곳 지역의 광고들이 이제는 위치에 상관없이 세계 곳곳의 website를 가더라도 나오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한국의 어떤 website를 가보아도 내가 사는 지역에 있는 어떤 식당의 광고가 나오는 case다. 이런 것을 보면 사실 기분이 찜찜하고 아주 나쁘다. 그곳에서 보는 지역 광고업체는 ‘절대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기조차 하는 것이다.

이것 중에 나를 제일 슬프게 하는 것은 Internet radio 중에 Radio Mozart의 ‘돌변한 광고’였다. 이 radio service는 ‘분명히’ 프랑스어로 나온 것이고 장소도 프랑스의 어는 곳인데 언젠가부터 ‘완전히’ 내가 사는 지역에 관련된 광고를 하는 것이다. 그날로 나는 그 radio를 완전히 잊었다. 나는 그 classical music들이 불어와 같이 나오는 것을 좋아했었기에 Mozart classic과 미국 동남부(GA)의 redneck이 연관된 것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단계는, 나의 ‘인터넷 습성’을 알아차리고 나를 ‘공격’해오는 정말 기분 나쁜 것들이다. 이것을 제일 처음으로 시도했던 것은 사실 오래 전부터 amazon.com이었다. 내가 어떤 물건을 ‘찾으면’, 즉시로 그것에 관련된 것들을 아예 email로 보내오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의 인터넷 습성을 계속 ‘감시, 기록’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적응이 되었고 어떤 것들은 나에게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광고기술도 고도화 되어서 어떤 것은 우습게도 느껴진다.

 

Catholic News Service website에 '출현'한 Oscilloscope광고

Catholic News Service website에 ‘출현’한 oscilloscope광고

 

급기야, 얼마 전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내가 자주 찾아보는 미국 가톨릭 뉴스 site에 나의 ‘전공’인 electrical/computer engineering의 광고를 본 것이다. 자.. 하느님을 찾아보러 간 곳에서 Tektronix oscilloscope의 광고를 보면 기분이 어떨까? 이런 것들이 과연 어디까지 가게 될지 정말 미지수다. 내가 24시간 ‘감시’당하고 있다는 기분이 안들 수가 없는 것이다. Enough is Enough!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윤동주

20대 윤동주 시인
20대 윤동주 시인

처음으로 고 윤동주(尹東柱) 시인의 첫 유고(遺稿)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전체를 읽게 되었다. 50대 초부터 재발견한 나의 시심(詩心)을 타고 ‘닥치는 대로’ 눈에 뜨이고 귀에 들리고, 향수에 어린 것들을 읽었지만 정작 윤동주 시인 것은 나를 요리조리 빠져 나가고 이렇게 60대 중반에 나에게 걸렸다. 특히 ‘옛날 것’을 접하려면 그렇게 어렵던 예전에 비해 keyword만 잘 구사하면 online으로 발견할 수 있기에, 이제는 keyword의 시대가 된 느낌이다.

이미 남들이 다 겪고 발견하고 느끼고 가슴에 간직한 것들을 나는 늦게나마 윤동주 시인의 짧았던 ‘서정적 일생’을 묵상하며 읽게 되었다. 어떤 기사에 대한민국의 20대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윤동주 시인이라고 했는데, 나는 40년이 지난 60대에 음미하게 되었으니 참 늦어도 단단히 늦은 기분이다. 하지만 시인의 나이가 우리 부모님 세대여서 나는 그 시대와 세대를 지금의 20대보다는 훨씬 더 피부로나마 공감할 수 있고 그래서 그의 시를 더 가슴으로 읽을 수 있으니 큰 불만은 없다.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소년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우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은 어린다.

 

눈 오는 지도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 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 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그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내려 덮어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일년 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돌아와 보는 밤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 두는 것은 너무나 괴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延長)이옵기에-

이제 창문窓을 열어 공기(空氣)를 바꾸어 들여야 할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 보아야 방(房)안과 같이 어두어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는 길이 그대로 비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로의 울분을 씻을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思想)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 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 곳에 찾아 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문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간판 없는 거리

정거장 플랫포옴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 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붙는 문자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헌 와사등에

불을 켜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태초의 아침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겨울,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빠알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프른데,

그 전날 밤에

그 전날 밤에

모든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독(毒)은 어린꽃과 함께.

 

또 태초의 아침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전신주(電信柱)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계시(啓示)일까.

빨리

봄이 오면

죄(罪)를 짓고

눈이

밝아

이브가 해산(解産)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無花果)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새벽이 올 때까지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실(寢室)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 올 게외다.

 

무서운 시간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십자가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 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꼬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우에 섰다.

강물이 자꼬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우에 섰다.

 

슬픈 족속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눈감고 간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부리에 돌이 체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또 다른 고향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 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의 호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담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 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1941.9.31)

4월과 5월, 돌아온 봄

4월과 5월.. 쓰고 보니 귀에 익은 말이.. 그렇구나, 정말 오래 전, 1970년대 초의 ‘통기타 그룹’ duet의 이름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 그들도 어김없이 60대의 ‘젊은 늙은이’가 되었으리라.. 하지만 여기의 4월과 5월은 글자 그대로의 올해 봄, 4월과 5월이다. 올 봄은 내가 기억하는 한도에서 가장 얌전하고 온순하고 촉촉한 계절이었다. 그야말로 ‘진짜 봄’이었던 것이다. 완전히 평균기온에 평균 강수량을 자랑하는 정상적으로 돌아온 봄.. 하지만 사실 이렇게 ‘정상적’인 것이 비정상이 된 느낌이 든다.

특히 즐거웠던 것은 비가 억수같이 많이 왔다는 사실.. 이곳 아틀란타 지역은 봄이면 꽃가루 ‘공해’가 기록적이어서 꽃가루 앨러지가 있는 사람들은 완전히 공포 속에 살곤 했는데 올해는 때맞추어 내리는 비로 전혀 그런 문제가 없었다. 두 달 사이에 “April showers bring May flowers“의 싱그러움과 어머니의 포근함이 넘치는 성모의 달 5월이 완전히 지나고, 2013년 여름의 시작인 하지로 향하는 이즈음, 나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던 것일까?

요사이 나의 일상생활은 사실 거의 시계와 같이 규칙적인 것인데, 아마도 이런 큰 변화 없는 삶은 내 나이에는 흔한 것일지도 모른다. 육체적인 건강은 이런 생활 방식에 도움을 받기도 하겠지만, 매일 반복되는 regular routine, 시계처럼 진행되는 것은 어떨 때는 정신적으로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시간감각을 잊게도 한다. 그래서, 세상만사는 사실 이렇게 공평하다고 할까..

육체적인 건강에 맞먹는 정신적인 지루함.. 이런 문제를 푸는데 제일 효과적인 것 중에는 ‘집을 떠나는 여행’ 같은 것이 있지만, 사실 우리 부부는 남들처럼 여행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편이다. 그 돈과 시간이면 더 나은 다른 방법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4월은 적지 않은 시간이 새로운 Insurance 찾는데 에 ‘허비’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화가 나기도 한다. 4월 중에 renew, expire가 되는 Home, Auto insurance의 premium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오른 것을 알고, 매년 하던 대로 자동적인 renewing을 할 수 없었다. 오랜 세월 동안 claim하나도 하지 않은 것이 ‘병신’ 취급을 받았거나 ‘죄’가 되었는지 완전히 ‘봉’으로 여기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무조건’ 다 갈아 치우기로 하고 다른 곳을 알아보니, business 중에서 insurance business model은 다른 것과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정말 실망감을 금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현재 이 분야는 seller’s market인 것이다. 소비자가 거의 ‘구걸’하다시피 하며 ‘물건을 사는’ 곳이다. 우리의 auto insurance는 원래 GEICO에서 Liberty Mutual로 좋은 조건으로 바꾼 지 거의 10년 만에 엄청 오른 것 알았다. 우리는 차 사고, speeding, claim이 완전히 zero인데 어떻게 그렇게 올랐을까? 이것은 완전한 mystery였다. 다시 GEICO로 바꾸었더니 premium이 완전히 1/3로 줄었다. 이런 해괴한 일이 세상에 어디에 있을까?

이래서 나는 insurance business를 거의 ‘사기 집단’으로 보게 되었다. 처음에 싸게 해주고 시간이 가면 ‘무조건’ 값을 올리는 방식이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손해를 보는 case다. 앞으로는 1년에 한번씩 다른 곳을 알아보며 주의를 하기로 했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다. Home Insurance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다른 곳을 찾아보니 현재의 것보다 훨씬 싼 것이 아닌가. 이래서 주변에서 말하는 대로 insurance는 일년 마다 다른 곳들을 알아보아야 한다는 말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19

그린위치행 유람선에서의 해프닝 이후

2013.05.28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국내 한 국책(國策)연구소에 재직하던 1980년 가을 혼자 해외출장 중 불란서에서 스웨덴, 이태리를 거쳐 영국 런던에서 일요일을 맞은 적이 있었다. 주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한 후 가능한 주일미사에 참석하려고 여기저기 물어가며 가톨릭성당을 찾다가 제대로 찾지를 못하고 헤매던 중 눈앞에 갑자기 테임즈(River Thames)강이 보이고 그곳 선착장에 각 행선지를 표시한 유람선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에서 특히 그리니치(Greenwich)행이 눈에 띄자 그냥 배에 올랐는데 아무래도 어릴 적 어느 공부시간에 배운 바 있는 그리니치 천문대가 문득 떠올랐던 때문이리라.

 배는 100명 이상을 태울 정도로 제법 컸지만 승선손님은 15명 정도로 별로 많지 않았는데도 시간이 되자 배는 제시간에 출발하였다. 얼마 후 손님 중 중년이 넘은 한 미국인 부인이 혼자 여행 중이냐며 말을 걸어와 우리는 자연스레 같이 유람하는 입장이 되었다. 테임즈 강폭 여기저기에 전시해 놓은 Pax Britanica시대의 영국 해군력의 위용을 느낄 수 있는 큼직한 여러 척의 전시 군함들에 눈길을 주며 이런저런 얘길 하는 사이에 유람선은 유유히 테임즈 강 하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배는 중간 중간에 몇 군데를 들러서 가는 배였다. 중간 선착장에 들릴 때마다 배를 정박시키려고 젊은 배꾼 하나가 배가 육지에 닿기 바로 직전에 뛰어 내려 배를 고정시키려고 선착장 기둥에 밧줄을 재빠르게 묶곤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의 눈이 졸려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막 잠에 뻥 떨어지려는 것 같은 깊은 졸음에 취한 상태로 보였다.

 그러던 중 한번은 졸음에 거의 감긴 눈으로 선착장을 향해 뛰어내리다가 삐끗 발을 헛디뎌 하마터면 강에 빠질 뻔했다. 나도 모르게‘조심해!’하고 소리를 질렀고, 그 친구는 놀라 깨면서 가까스로 몸을 가누어서 물에 빠지지는 않았다.

 ‘왜, 그렇게 졸면서 일하느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영국의 노동법 때문이라며 멋쩍게 웃는 것이었다. 무슨 말이냐는 나의 물음에 그의 대답은, 바로 1년 전 1979년에 수상이 된 대처(Thatcher)가 정부를 출범시키자마자 노조(勞組)의 스트라이크(Strike)를 막기 위한 노동법을 만들었는데, 그 법에서는 노동법이 적용되지 않는 72시간을 1년에 한번 인정해 주고 있다는 것이었었는데‘오늘이 바로 그 법 첫 시행의 이틀째’라는 것이었다.

이는 물론 당시 필자가 직접 확인한 바가 아니고 단지 그 친구의 설명이었기 때문에 그 법적 배경이라든가 논거는 알 수가 없고 또한 지금까지도 그와 같은 법조문이 여전히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그때 그 친구가 지난해 언젠가 선주(船主)에게 대들었던 것에 대한 보복으로 그 선주가 노동법에서의 그 취지를 십분 살려 자기로 하여금 업무를 계속하도록 명(命)했고 그래서 48시간 동안 거의 한 잠도 못자고 계속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 기간에 선주의 업무명령을 어겨서 해고를 당하면 아무런 법적보호를 못 받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당시 영국은 소위‘스트라이크(Strike)병’을 깊이 앓고 있었다. 그래서 대처정부가 들어서자마자 그 치유책의 일환으로 그런 법을 만들었던 것으로 유추되었다. 참으로 노사(勞使) 양측 모두에게 특히 노측에게 극단(極端)으로 치닫지 못하도록 하는 법적장치가 아니었나 싶다. 이러한 나의 추론은 ‘앞으로는 절대로 선주에게 막 대들지 말아야겠다.’는 그 친구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18

다만 자연의 섭리(攝理)를 따르도록 부여된 자유

 2013.05.28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필자의 연구세계와 학문세계에서 그간 견지해 온 우주관과 세계관의 골격은 한마디로‘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인과율(因果律)이다. 요컨대 사업경영, 기업경영, 산업경영, 국가경영의 그 어느 레벨에서든 인과율이라는 확정적 질서(deterministic order)가 존재하고 있다는 인식을 기초로 필자 나름의 연구세계와 학문세계를 펼쳐왔다고 감히 생각한다.

 그런데 필자로 하여금 이런 인식을 굳히기까지는 몇 번의 계기가 있었는데 그 첫 번째 계기는 자연계 안에 내재되어 있는 자연적 질서에 대한 귀납적 추론이었다. 우선,

 

1) 빨간 페인트와 파란 페인트를 섞으면 페인트 색깔은 무슨 색이 될까?

상 온(常溫)에서 보라색이 된다는 것은 물론 어린 시절부터 들어서 잘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이 보라색의 페인트에 열(熱)을 가하면 빨간색으로 변했다가 계속해서 열을 더 가하면 파란색이 된다는 사실과 이제 이 파란색의 페인트를 식히면 다시 빨간색이 되었다가 드디어 상온이 되면 또다시 보라색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소위 화학 시계(chemical clock)라고 불리는 범주의 것으로, 하나의 확정적 질서(deterministic order)가 무생물의 세계에도 존재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 만약 초식동물에 육식사료를 먹이면 어떻게 될까? 초식동물은 초식사료를 먹도록 조성된 자연적 존재이므로 만약 초식동물에 육식사료를 먹이면 결국 자연 질서를 어긴 탓에 그에 상응한 반대급부를 치루 게 되는 질서가 엄존할 것임도 추론 가능하므로, 소에게 육식사료를 장기간 먹이면 결국 그 소가 미칠 것이라는 주장에 이의를 달기가 어려워진다.

 3) 또한 식물에게나 동물에게 들려주는 음악을 달리 하면 어떤 차이가 생길까? 헤비메탈을 들려주는 경우와 바로크음악을 들려주는 경우를 비교해 보면 식물의 생장(生長)에 있어서 헤비메탈의 경우가 바로크 음악의 경우보다 생장속도가 느릴 뿐만 아니라 생장 방향이 음악이 들려오는 반대방향으로 향한다는 실험이 있고, 또한 개에게 영영가가 높은 먹이를 주면서 헤비메탈을 들려주었더니 결국 그 개가 미치더라는 실험결과도 보고되고 있는 걸 보면 식물도 동물도 주어진 질서대로만 존재하게끔 되어있는 존재라는 추론도 또한 가능하다.

 4) 그리고 수간(獸姦)과 동성애로 인해 AIDS가 창궐하는 현상도 작용=반작용의 엄존하는 하나의 확정적인 자연 질서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런 몇 가지 예를 위시하여 온 우주천체의 운행과 자연계의 변화 및 계절의 변화 , 해와 달의 뜨는 시각과 지는 시각 그리고 밀・썰물의 시각 등등을 우리가 사전에 알 수 있는 것도 자연계에 내재되어 있는 확정적 질서(deterministic order)가 존재한다는 인식을 가능케 함으로서,‘자연계내의 온 만물 안에는 어떤 의지(a will)의 자연 질서가 내재되어 있으며 만물은 오직 그 자연 질서대로만 반응한다.’는 추론이 귀납적으로 입증될 수 있다는 인식이 첫 번째 계기였다.

 

두 번째 계기는 자연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을 존재케 한 메이커(maker)가 반드시 있기 마련이고, 메이커는 존재물보다 한 차원 높은 존재이며, 각 존재물에는 그 메이커의 의지가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각 존재물은 오직 그 의지만을 따른다는 귀납적 추론도 가능하다는 인식이었다. 그리고 이를 확대해 보면 자연계 자체도 존재하는 하나의 존재물이므로 자연계를 존재케 한 메이커(Maker)가 존재할 것이며 이는 자연적 존재(natural being)보다 한 차원이 높은 초자연적 존재(super-natural being)로서 조물주 또는 창조주(Creator)라 불리어질 수 있는 존재일 것이다.

 그리고 자연계내의 온 만물 안에는 그 창조주의 절대의지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으므로 ‘자연계내의 온 만물 안에는 어떤 의지(a will)의 자연 질서가 내재되어 있으며 만물은 오직 그 자연 질서대로만 반응한다.’는 앞의 귀납 추론은‘자연계내의 온 만물 안에는 창조주의 절대의지(absolute will of God)가 내재되어 있으며 모든 만물은 오직 창조주의 절대의지대로만 반응 한다.’것으로 보강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두 번째 계기가 되었다.

 

세 번째 계기는 인간의 사고와 관련한 것이었다. 즉, 백만 원 빚진 사람과 천만 원 빚진 두 사람이 있는데 이들이 빚을 갚을 능력이 없음을 알고 돈을 빌려준 사람이 빚을 탕감시켜 주었다면, 두 사람 중 누가 더 감사해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응답과 관련하여,‘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더 감사할 것이다.’‘아니다, 적게 탕감 받은 사람이다.’‘아니다, 금액의 다과에 관계없이 다 같이 감사할 것이다.’‘상황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각 개인마다의 돈의 가치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심지어는 누가 탕감시켜달라고 그랬느냐 따라서 감사할 이유가 뭐 있느냐’는 등의 의견을 내보이는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고금소총과 벌레 먹은 장미

고금소총(古今笑叢).. 벌레 먹은 장미.. 정말로 정말로 오랜만에 생각하고 조심스레 써본 조금은 ‘숨기고 싶은’ 이름들이다. 고금소총은 아마도 태고 적부터(아마도 고려시대?) 있었을 ‘고전’ 책 이름일 것이고, ‘벌레 먹은 장미’ 는 1950년대에 나왔음직한 책의 제목이었다. 옛날 옛적을 추억하며 이 책 두 권을 언급하지 않으면 사실, 너무나 위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이 두 권의 책은 ‘절대로’ 도서관에서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 책들이 어디 한 두 권이겠는가? 한마디로 그 당시 도덕적, 사회적 기준에서 들어내 놓을 수 없는 책들인 것이다. 그런 것들은 사상에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여기의 이 책들은 사상과는 전혀 상관없는 ‘풍기문란’ 죄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내가 이 책들을 읽고 본 것이 중학교(서울 중앙중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1962년 경인가.. 여학생들은 모르겠지만 남학생들은 그 나이 정도에서 이런 ‘금기 도서’ 목록을 조금씩은 거쳐 나갔을 것인데, 조금 조숙한 아이들은 그 훨씬 이전에 읽었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나이에서야 읽게 되었다. 물론 친한 친구들의 ‘권유’로 알게 되고 읽게 되는데, 아직도 생생하게 그 읽던 때를 기억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이런 것들은 사실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음이 분명했다.

아주 옛날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고 해도 1960년 대 만 해도 고등학교까지는 철저한 ‘남녀유별’의 사회적 규율이 엄존했다. 남녀공학은 ‘거의’ 없었고, 만약 공개적인 연애를 하다 ‘걸리면’ 정학처분 같은 벌을 받곤 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자연스레 발동하는 남성 호르몬의 영향은 자연스레 ‘지하’로 들어가며, 음성적, 비공개적, 밀담 같은 것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조금만 노출된 여자들이 나오는 영화는 물론 ‘학생입장불가’ 라는 말이 붙어서 그저 영화광고 벽보 앞에서 침만 흘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 환경 하에서 비밀리에 돌려가며 읽는 책 중에 아마도 위의 두 책이 제일 유명했을 것 같다. 나의 또래 사람들에게 나중에 물어보니 예외 없이 모두 보았다고 했으니까.. 또한 같은 또래의 여성들에게 은근히 물어보면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예상하기 쉬운 반응을 보곤 했다. 이렇게 여자와 남자가 다른가.. 놀라기만 했다.

고금소총은 글자 그대로 ‘옛날과 오늘날의 웃음거리 이야기를 모은 책’ 인데, 100%가 ‘성(性)’ 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런 이야기들은 요새도 인터넷에 가면 특히 dirty old men들이 즐기는 소일거리이지만 그 옛날에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었다. 노골적인 묘사를 피하며 교묘하게 그것도 ‘한자’가 많이 섞인 글을 읽으면 아닌 게 아니라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어휘들, ‘양물, 옥문‘ 같은 말들.. 처음에 읽을 때는 잘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는 놀라다가 웃게 되었다. 또한 옛 사람들의 과장법도 상당해서 그 당시 남녀는 모조리 ‘성 중독자, 도착증 환자’로 묘사가 되어 있었다. 모든 이야기들을 읽으며 느끼는 것은 그렇게 성이 억압을 받던 시대에도 그렇게 모두 ‘숨어서’ 이런 책을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전통을 잇거나, 아마도 일제시대에 흘러 들어온 일본의 개방적인 성 문화의 영향까지 겹치고, 6.25 전쟁의 상처가 아물던 1950년대에 그런 ‘삶의 돌파구’가 없을 리가 없었다. 비록 책방에서 들어내 놓고 팔 수는 없었어도, 길거리의 카바이드 등불 아래 ‘포장마차’ 책방에서 이런 종류의 책들은 잘 팔렸을 것이고, 이제는 일본 이외에 미국문화가 전쟁 후에 쏟아져 들어오며 한창 잘 나가던 미국 판 잡지들 (대부분 PLAYBOY같은) 까지 경제적으로 쪼들리던 그 시절 굶주린 남성들을 유혹하곤 했고, 학생들도 거기서 자유스러울 수는 없었다.

그 중에 나에게 ‘흘러 들어온’ 책이 바로 그 유명한 ‘현대고전’, ‘벌레먹은 장미’였다. 중학교 3학년 내가 가회동에 살 때, 골목 친구가 시간제한을 두고 빌려주었던 책이었다. 불과 몇 시간 밖에 없어서 빠른 속도로 읽고 돌려준 책이었다. 그런 책의 내용이 반세기가 훨씬 지난 후에 거의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것을 알고 나도 놀란다. 그 정도로 ‘강하게’ 뇌리의 깊숙한 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고금소총과 달리 완전히 이야기의 배경이 현대, 그것도 6.25 이후의 사회적 풍경을 담아서 그야말로 100% 실감이 갔던 이야기들.. 당시로써는 나에게 충격적인 이야기요 묘사였다. 이 책의 저자는 분명히 그 유명한 ‘방인근‘ (일제 당시 소설가) 선생이었지만 소위 문학의 대가가 그런 책을 썼을 리는 만무하고 아마도 돈이 필요한 선생께서 이름을 빌려 주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 이후에도 이런 종류의 책들을 접할 기회가 적지 않게 있었고, 그런 것을 내가 피했다고 하면 그것은 나의 위선에 불과할 것이다. 이전에는 그런 것들을 ‘자라면서 꼭 거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자위하며 ‘괜찮다’ 로 일관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후회가 되는 것이다. 꼭 그렇게 ‘음성적’으로 성장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런 ‘지하, 음성적’인 습관이 깊어지면 아마도 소위 말하는 중독증으로 빠질 것이다.

특히 인터넷의 ‘도움’으로 요새는 국가적 차원에서 이런 것들을 ‘통제’하려는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1 한마디로 이제는 ‘장난’이 아닌 것이다. 동네 골목에서 숨어서 몇 시간 동안에 보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편하게 집에 ‘숨어서’ 24시간이고 보고, 듣고, 보내고, 받고.. 이것이 바로 우리 신부님2이 말하는 ‘어두운 밤’의 시작일 것이다.

  1. 최근 영국에서 이런 것을 대처하는 법안이 나옴.
  2.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하태수 미카엘 주임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