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gliest websites ever..

I have been a long-time viewer of news websites: msnbc.com and npr.org until now. But late total redesign of their sites were truly double whammy for me, too severe to tolerate. It’s so sad for me have to not look at those ugliest sites. Overblown pictures, ugly typography, without scrolling can’t see the 2nd articles, etc etc.. Right after the Obamacare website’s fiasco, what’s going on with these ‘too-progressive‘ web designers? Looking at these two ‘weird-looking’ sites, I can’t help but concluding the two sites were designed by the ‘progressive’ designer. Now, I have to love the New York Times web-look more than ever.

 

msnbc-1Surprise! Goodbye msnbc.com..

 

npr-1Had to look different so bad?

 

 

첫 추위, 살아난 ‘고물’, 묵향전

2013-10-25 16.21.28-1¶  올해 들어서 첫 ‘계절 추위‘가 선을 보였다. 이 지역 장기 예보는 분명히 올해 평균 이하의 겨울을 맞을 것이라고 했다. 그것을 그렇게 쉽게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과학’이라는 통계와 확률에 바탕을 둔 것이라 무시할 수도 없지 않은가? 북미주 동쪽의 거의 전부가 늦가을 같은 첫 추위를 느꼈고 이곳 아틀란타 지역도 만만치 않게 빙점에 가까운 온도와 바람까지 동반된 것으로 ‘명절, 휴일’ 기분까지 나게 하는 약간은 반가운 느낌도 들었다.

작년에 애용했던 radiant space heater를 꺼내어 따뜻한 빛과 열을 처음으로 보고 느낀다. 아직도 새파란 숲들이 아주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10월 31일(10월 마지막 날)이 오랜 전통의 Halloween day.. 관련된 색깔은 pumpkin(호박)의 진 주황색이라 역시 본격적으로 ‘떨어질’ 낙엽을 그린다, 이 날이 다가오면 우리 애 들이 어린 시절 동네를 돌며 trick-or-treat 시키던 기억과 이런 것들이 자연스레 몸에 밴 것을 느끼며.. 아, 우리가 이곳에서 오래 살았구나 하는 야릇한 감상에 젖는다.

칠흑같이 깜깜해진 아침 6시 45분경 2층의 난방이 가동을 하면 나는 조심스레 어둠 속을 헤치고 나의 서재로 간다. 우리 집 잠꾸러기 10살짜리 개 Tobey(토우비)는 포근한 자기 침대에서 완전히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자동 프로그램이 된 아래 층 전깃불들로 아래층은 이미 밝지만, 때 맞추어 고장이 난 난방시설(gas furnace) 덕분에 냉장고처럼 냉랭하다. 아래 층의 주인인 7살짜리 고양이 Izzie(이지)는 벌써 활동개시.. 활발히 돌아다닌다.

거의 zombie처럼 어둠 속에서 나는 아침의 즐거움인 hand-drip coffee를 커다란 mug에 담아 서재로 올라온다. 그때부터 8시까지 나만의 소중한 1시간이 시작된다. 이런 routine이 이제는 일년도 넘게 ‘완전히 고정’ 되어서 거의 robot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조금 있으면(11월 3일, 11월 첫 일요일 새벽) Daylight Saving Time(DST, summer time)이 끝이 나며 아침이 조금은 더 밝아지고(대신 저녁은 더 일찍 깜깜해짐), 그것이 시작되는 날 한 시간 더 잠을 즐길 수 있다. 이렇게 어김없이 정직하게 또 계절은 바뀌고 있다.

 

¶  지난 주 첫 추위가 왔을 때, 아래층 gas furnace가 문제가 생겨서 ‘가동’을 못 했고 부랴부랴 아래층은 각종 electric space heater들을 동원해서 난방을 하는 귀찮음을 겪었다. 30년 넘은 ‘고물’이 드디어 숨이 넘어감을 느끼며, 수 천불이 들지도 모르는 이것 한번 더 내가 손을 보았는데 다행히 그것의 심장 격인 heat exchanger는 문제가 없었고 fan control system인 전기 쪽에 문제를 발견하고 부랴부랴 그 부품을 order를 해서 오늘 그것이 도착하였다. 요새는 거의 모든 것들이 electronic 그것도 microcontroller를 사용해서 온도를 조정하지만 30년 전에는 ‘완전히 기계식’이었다. digital, analog 이전의 100% mechanical control인 것이다.

이것의 장점은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보는 것이 전부였던 그 옛날이 다시금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온도를 감지하는 bimetal boom의 길이가 원래의 것 보다 조금 짧았지만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furnace 속의 온도가 4″ 정도의 거리에서는 거의 같기 때문이다. 한 시간 걸려 망가진 것과 바꾸어서 power switch를 켜는 그 순간.. 언제나 가슴이 두근두근 하는 순간이다. 세상에 100% 확실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오랜 만에 난방 system의 blower fan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것으로 아마도 최소한 $350은 절약했을 것이다. 이것이 ‘공돌이’ 들이 느끼는 자부심이다.

 

2013-10-28 14.04.49-1‘shiny brand new’ furnace blower fan controller

 

¶  지난 이틀간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제4회 아틀란타 묵향회 회원전이 열렸다. 몇 년 전에 연숙이 이곳에 가입을 해서 토요일 마다 땀을 흘리며 배워왔고 매년 이맘때 쯤 회원전을 열곤 했다. 나도 따라 다니며 보곤 해서 이제는 아주 보는 것이 익숙해졌다. 나보고 해보라고 하지만 나는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하지만 보는 것은 조금씩 눈이 열리는지 많이 나아졌다. 내가 그렸던 것은 50년 전에 그렸던 만화가 전부여서 나는 사실 미술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이런 동양화 쪽은 더 그렇다. 하지만 그리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지 않을까?

조그맣게 시작한 이곳 묵향회, 이제는 회원들도 늘어났고 그것에 비례해서 출품 작도 많이 늘었다. 거의 50 점이 넘게 전시가 되었고, 많은 회원들이 ‘호’를 받고 그것을 새긴 ‘인’ 도 찍고 해서 아주 ‘프로’의 맛을 보여준다. 성당에서 전시를 하기에 신부님도 나와서 참관을 했는데, 3년 전의 것을 기억을 하시는지.. 처음보다 너무나 나아졌다고 논평을 했고, 솔직히 처음에는 모두 ‘습작’ 수준이었다고 해서 모두들 웃었다. 이곳 교민 인구가 제법 불어나서 이제는 이런 취미 모임들도 큰 무리 없이 유지가 됨을 보고 참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실감하기도 한다. 개막이 되던 날은 새로니, 나라니도 이곳을 찾아 주어서 더욱 뜻 깊은 자리가 되었다.

 2013-10-26 17.06.47-1 제4회 아틀란타 묵향회회원 작품전 개막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 2013

한글로 된 레지오 공인 교본을 보면 ‘연차 총 친목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꾸리아는 가능한 한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 축일‘(12월 8일)에 가까운 날에 모든 단원들이 자리를 함께 하는 연차 총 친목회를 열어야 한다. 이 행사는 필요에 따라 성당 안에서의 의식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이 행사에는 친교의 시간이 마련되어야 한다. 만일 성당 내 의식 때에 레지오의 기도문을 바치지 않았을 경우에는 뗏세라의 기도문을 보통 회합 때처럼 세 부분으로 나누어 바쳐야 한다.

연차 총 친목회의 참가 범위는 레지오 단원으로 한정시키는 것이 좋다. 여흥 순서에 곁들여 레지오와 관련된 이야기나 글을 발표하는 순서가 있어야 한다.

이 자리에서 단원들이 너무 격식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많은 단원들이 참석하고 있을 때 더욱 그러하다. 이 행사의 취지는 참석한 단원들이 모두 서로 낯을 읽히고 친숙해지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원들이 돌아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순서를 짜야 한다. 진행을 맡은 사람들은 단원들이 끼리끼리 무리를 이루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단원들이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 있게 되면 레지오 가족의 단결과 우애의 정신을 북돋우려는 이 행사의 취지를 살릴 수 없게 된다.

 

‘연차 총 친목회’라는 레지오 용어의 ‘원어’는 사실 The Annual General Reunion 이다. Reunion을 ‘친목회’로 번역한 것은 의역(의미를 옮긴 것)이고 그런대로 의미가 잘 전달 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reunion이라는 단어의 맛은 역시 ‘오랜 동안 떨어져 있던 친구,동창을 일년에 한번 다시 만나는 행사’ 라는 것이 아닐까? 레지오 활동의 중심점에 있는 꾸리아 산하에는 사실 지역적으로 떨어진 쁘레시디움들도 있을 것이니까 서로 얼굴도 모르기에 일년에 한번 이렇게 ‘모두’ 모여서 ‘친교’를 이루자는 뜻의 행사일 것이다.

우리가 속한 꾸리아1의 사정은 비교적 대다수의 쁘레시디움이 같은 본당 소속이어서 그런대로 얼굴 정도는 조금 아는 정도이지만 그것이 전부다. 오히려 다른 지역에서 온 단원들은 더 눈에 잘 띄어서 더 익숙하기도 하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이 행사의 거의 모든 프로그램은 각 쁘레시디움 단위로 이루어져서 이것을 통한 통 넓은 친교를 이루기는 무리였다. 그러니까 일년 내내 같은 방에서 보는 사람들과 ‘더 친하게 되는’ 기회만 제공한 셈이었던 것이다. 그런 단점을 알고 작년부터는 쁘레시디움 단위의 프로그램을 완전히 없애고 몇 가지 프로그램을 정하고 그곳에 가급적 모든 쁘레시디움이 참여하도록 하였다. 예를 들면, 합창, 춤 같은 프로그램에 모두가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서로 모르던 다른 쁘레시디움의 단원들도 조금은 알게 되는 기회를 얻는 것이고, 사실 효과적이어서 나 자신도 ‘잘 모르고 지내던’ 단원 몇몇을 사귀는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작년 12월 초 총 친목회의 추억이 마치 한달 전 같이 느껴지는 가운데 ‘벌써’ 2013년 ‘연말’ 총 친목회를 준비하는 모임이 시작되었다. 현재까지 합창, 춤 그리고 난타의 세가지가 계획되고 희망하는 단원들이 연습을 시작하게 되었다. 작년에 나는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다른 남자 단원과 함께 듀엣으로 3곡의 노래를 불렀고 올해도 ‘요청’만 들어오면 다시 한번 할까 하는 기대도 했지만, 아직까지 그런 것이 없는 것을 보니.. 아마도 작년에 우리가 한 것이 별로였는지..하는 실망감도 없지 않다. 올해 나는 연숙과 같이 난타 라는 ‘두드리는’ 프로그램에 들어가서 현재까지 4번 연습을 하였다. 알고 보니, 이 ‘난타’라는 것은 부엌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도마’를 두드리는 모양이다. 다른 것으로는 ‘통, bucket’ 을 뒤 엎어놓고 치는 것과, 국악에서 쓰는 ‘북’이 있는데 대부분 여성들은 도마와 ‘통’을 치고 나는 북을 치는 그룹에서 북을 치게 되었다. 배경 음악은 ‘베토벤 바이러스‘라는 경쾌한 것과 우리 민요를 바꾼 ‘윤도현의 아리랑‘인데 박자감각만 있으면 우선은 견딜 수 있는 것이고, 연습하고 나면 기분도 좋았다.게다가 잘 모르는 다른 쁘레시디움들의 단원들과 함께 웃고 즐기는 시간도 되어서 레지오 교본에 나오는 행사의 의미도 되새기게 되었다.

 

UPDATE, UPDATE!
12월 1일에 열린 총 친목회에 대한 자세한 것은 이곳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12/9/2013

 

베토벤 바이러스

 

윤도현의 아리랑

 난타 연습용 북과 북채집에는 큰 북이 없어서 이렇게 ‘장난감’ 북과 북채로 연습을 한다

 

  1.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천상은총의 모후 꾸리아

‘Clunker’ furnace fires up, then..

30+ year old clunker furnace
30+ year old clunker furnace

10월 20일, 2013.. 드디어 그날이 왔다. 매년 가을 처음으로 central heating system이 ‘점화’되는 그날이.. 올해는 평년에 비해 며칠이 늦었을까.. 확실치 않지만 그럴 것이다. 일주일 전쯤 아침 기온이 떨어짐을 느끼고 thermostat를 winter mode1로 바꾸어 놓았고, 아래층 furnace(gas heater)의 pilot light도 ON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래층의 pilot light는 올해부터 여름이 시작될 즈음에 아예 꺼놓았다. 여름 동안 ‘공연히’ thermocouple, pilot light를 ‘달구어’놓을 필요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래층 furnace의 ‘점화’ system이 바로 classic system으로 pilot (gas) light를 ‘항상’ 켜 놓아야 heater가 가동되는데 이제는 조금 귀찮게 느껴진다. 2층의 system은 electronic system이라 ‘전기’만 있으면 언제고 점화가 된다. 근래의 거의 모든 natural gas system이 electronic firing인데 이렇게 ‘고물, clunker‘들이 문제인 것이다.

pilot light는 글자 그대로 ‘항상’ 아주 작은 ‘불’을 켜 놓고 점화를 기다리는 것으로 많지는 않지만 natural gas 를 소모하고 있는 셈이다. 제일 귀찮은 것은 이 pilot light가 꺼질 때이다.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thermocouple이 오래 되면 이것이 저절로 꺼진다. 안전을 위한 장치인데.. 이럴 때마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어둡고 축축한 crawl space를 ‘기어들어’ 가야 하는 고역을 겪는데.. 이런 것들을 여자 특히 ‘노인’ 혼자 살게 되면 어떻게 감당을 할까? 아마도 분명히 handyman에게 전화를 거는 수 밖에 없지 않을까?2 아직도 그래서 여자건 노약자건 혼자 사는 것은 ‘비싼’ 선택이거나 운명인 듯 하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인 듯.. 아래층 pilot light를 ‘분명히’ 지난 주에 점화를 해 놓았는데, 오늘 아침에 아래층이 ‘썰렁하고’, heater가 켜지지 않고, 조용했으니.. 분명히, 아마도.. 그것이 무슨 이유에선가 ‘꺼졌을’ 것이다. 또 ‘기어들어’ 가는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나의 여유 있는 추측은 빗나갔다. 예상했던 thermocouple의 문제가 아닌 다른 이유로 gas가 안 나옴을 알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gas valve를 control하는 24V AC power가 안 나온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transformer 문제일까? 하지만 a/c (에어컨)를 켜보니 그것은 잘 나온다. 그렇다면 transformer는 OK인데.. 그렇다면 무엇일까? ‘아깝기만 한’ service call을 할 시간이 다가오나? 하지만 아직 빙점까지는 아니고, 문제가 난 곳이 아래층이니까, 그렇게 급할 것 없다. 조금 시간을 두고 ‘연구’를 하기로 결정하고 그 어두운 ‘지하’에서 기어 나왔다.

 

30+ year old clunker furnace 본격적인 service mode, controller와 blower가 노출이 되었다

 

머리 속이 다시 ‘detective‘ research mode로 완전히 전환이 되며 열심히 googling을 하며 해답을 찾았는데.. 나의 ‘진단’은 결과적으로 완전히 빗나간 것으로 밝혀졌다. 우선 이번에 ‘공부’한 것으로 확실히 알게 된 것 중에 우리 집 아래층 furnace가 놀랍게도 30년이 조금 넘어가는 그야말로 ‘고물 중의 고물, clunker 중의 clunker’ 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우선 와~~ 이것이 정말 오래 전에 우리들이 느꼈던 Made In USA의 perfect case가 아닐까.. 하는 것이고, 다른 쪽으로는: 큰일 났다, 드디어 꽤 많은 돈3을 써야 할 때가 왔구나.. 하는 비관적인 생각이 교차하는 심정. 그러니까 우리 집이 처음 건축될 당시4에 설치했던 heating system이 이제까지 거의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24VAC transformer & fan relay한때 의심을 받았던 24VAC transformer와 blower relay

 

지금 나에게 Internet이 없었고, googling 이 없었다면 여기서 나의 story는 끝 났고, ‘아마도’ HVAC5 guy의 truck을 기다리며, 얼마나 수리비가 들어갈까 고민했을 것이지만, 이제는 ‘정보의 홍수’ 도움으로 조금은 걱정이 줄어들었다. 최소한 무엇이 문제인가는 내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1981년에 설치된 우리 집의 이 clunker가 어떤 종류인지 알았고, 어떤 ‘부품’이 쓰였는지도 조금씩 들어난다.

Brand name은 Premier Furnace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어떤 커다란 ‘공장’6에서 사다가 자기의 상표를 붙인 case였다. 1981년의 기술적인 수준은 electronic control은 전혀 쓰이지 않았던 그런대로 ‘간단한 기계식’이어서 부품만 찾으면 내가 손수 고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어떤 부품이 현재 망가지고, 그 부품을 구할 수 있을까, 그것의 값은 얼마인가.. 나의 물음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Honeywell Fan limit switchwhole system을 정지 시켰던 장본인, Honeywell Fan limit switch

 

이번 ‘사건’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heater를 켰을 때, thermostat의 relay click 소리가 난 후에, 암만 기다려도 잠잠 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fan(blower)소리도 안 나고, 더운 공기도 안 나온다는 간단한 사실이다. 바람이 안 나온다는 것은 100% blower(fan)이 안 도는 것이고..blower가 망가졌거나, 그곳의 power가 안 들어가는 것이지만.. Fan은 manual control로 test하면 잘 들어온다. 그러니까 blower가 아니고 그것을 control하는 24VAC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세히’ 공부를 해 보니 heating mode에서만 쓰이는 또 하나의 blower control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fan limit switch란 것이었다. Honeywell에서 만든 것으로: 이것이 바로 furnace의 온도에 따라서 fan을 껐다 켰다 하는 것이다. 결론은 이것이다. Thermostat에서 heat demand 신호가 갔을 때, gas valve가 열려서 점화가 된다. 시간이 조금 지나며 furnace내부의 온도가 오르며 fan switch가 켜 지고 난방이 시작되는데.. 지금은 이 switch에 문제가 생겨서 그대로 온도는 계속 올라가다가 결국에는 ‘너무 뜨거워져서’ system이 자체로 shutdown이 된다.

결국, 수 천불을 들여서 이 ‘고물’을 교체하는가 했지만, Honeywell fan limit switch를 $70 정도로 order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아마도 며칠 뒤에 이것이 도착하면 아래층 겨울은 그런대로 ‘무사히’ 지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끝 난 것이 아니다. 올해가 지나면 우리 집 아래층 system은 한 살을 더 먹는 셈이고.. 우아.. 32살이 되나.. 나의 관심은 이 clunker가 과연 언제까지 돌아갈까 하는 것이다. 나도 늙어가고 이것도 늙어 가고.. 이 ‘고물’은 ‘새 것’으로 바꿀 수 있다고 하지만, 나 자신은 어떠한가?

 

  1. 최고 68F, 최저 62F
  2. 아마도 이런 것도 최소한 $100를 받지 않을까?
  3. furnace자체 값만 최소 $1000, installation 을 더하면 최소한 수천 불?
  4. 우리 집은 1982년에 건축되었다.
  5. Heating, Ventilation, Air Conditioning, 아마도 우리말로 ‘냉열’ 쯤 되지 않을까?
  6. Consolidated Industries, 당시에 무지 큰 회사였다.

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29

노벨경제학상 수상할 경영이론 과연 나올까?

2013.10.16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누군가가 앞으로 경영학분야에서 노벨경제학상 을 탈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 타야 할 것인가를 필자에게 묻는다면 아무래도 2008 미국 발(發) 글로벌 경제위기 극복과 관련하여 그 해법을 제공하는 사람이거나 부(富)창조 동인인 혁신과 관련하여 설득력 있는 독자이론 주창자라야 할 것이라 답할 것 같다. 물론 이들을 동시에 설명해 주는 기업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the firm)이라도 나온다면 그게 당연히 노벨경제학상 감이라고 답하리라고 본다.

다이나마이트(dynamite) 개발로 세계 부(富)를 긁어 모은 스웨덴의 노벨(Alfred Nobel), 그의 유훈에 따라 제정된 노벨상은 1901년부터 2012년까지 물리, 화학, 의학, 문학, 평화 5개 분야에 대해 주어져왔는데 1969년부터는 경제학상이 추가되어 그간 555회에 걸쳐 863의 개인과 기관이 수상하였고, 이중에서 경제학수상은 43회에 걸쳐 50여명 웃도는 사람들이 수상하였는데, 이번 2013 노벨경제학상을 끝으로 2013 모든 노벨상 수상자는 정해졌다. 경제학과 경영학 경계를 규정짓는 기준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제껏 경영학분야에서는 단 3명만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첫 번째 분은 경제학에서 빌려 온 최적화 (optimization) 방식을 경영학 배태기 때부터 오랫동안 기업의사결정에 준용해 오던 때인 1950-60년대에 이와 다른 새로운 관점의 만족화(satisficing) 방식을 개척한 공로로 1978년에 수상한 사이몬(Herbert A. Simon)이다.

 두 번째 수상자는 1991년 로날드 코스(Ronald H. Coase)인데 그는 경제제도의 구조와 기능에 있어서 거래비용(transaction cost)과 재산권(property right)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명확히 한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하였다.

 세 번째 수상자는 2009년 기업의 경계(boundaries of the firm)를 분석하여 경제 지배구조(economic governance)를 다룬 공로로 수상한 올리버 윌리암슨(Oliver E. Williamson)이다.

그런데 경제학과 경영학은 경제, 산업, 기업 간의 관계를 어떻게 연관 지어 보느냐에 따라서 그 구분이 물론 달라질 수 있는데 이익(이윤) 추구의 생산경제주체인 기업 본연의 성격을 강조한다면 두 번째 및 세 번째 수상자는 경영학자라기 보다는 미시경제학자라고 볼 수 도 있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렇게 본다면 사이먼 만이 경영학자로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실 사이먼도 경영학자라기보다는 경영학분야에서 심리학을 가르친 심리학 분야의 석학이다.

경제학에서의 의사결정은 언제나 최적화를 지향하는데 최적화란 주어진 조건을 충족시키면서 목적하는 바를 극대화 또는 극소화시키는 의사결정구조를 다루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최적화(optimization)는 인간을 합리적・경제인(rational economic man)으로 전제하고 또 모든 정보를 다 갖고 있는 전지의(omniscient) 상황에서 특정 문제에 대한 모든 해결대안을 탐색하고 평가하여 최선을 선택하는 의사결정방식으로 완전한 합리성(perfect rationality)을 전제한다. 수리적으로는 목적함수(objective function)와 목적함수에 포함된 결정변수(decision variables)의 값을 제약하는 제약조건(constraints)들을 충족시키면서 목적함수의 값을 극대화 또는 극소화시켜 주는 결정변수의 집합(이를 최적해: optimal solution 라고 함)을 선택하는 방법이다.

 최적화에서는 우선 문제(problem)에 대한 모든 해결대안(all alternatives)을 열거하고 각 대안에 대한 예상결과를 평가한 후 최선의 것을 규범으로 선택하게 하는 가장 이상적인 의사결정방법임에 틀림없지만 문제와 문제해결대안 및 각 대안의 예상결과에 대하여 모든 정보를 다 갖고 있는 전지(全知)한 경우에만 실행 가능한 방식으로, 실제로 많은 경우,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방법이다.

이런 배경에서 사이먼은 최적화(最適化)와 다른 각도에서 만족화(滿足化)를 주창했다. 사이먼은 1950년대에 의사결정구조(decision-making structure)면에서 합리적 경제인・완전한 합리성을 전제로 최적화를 추구하는 경우와 달리, 사회인(social man) ․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을 전제로 만족화(satisficing)라는 의사결정과정(decision-making process)을 다루면서 행동과학(behavioral sciences)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확립하였다.

 만족화는 미래의 가능성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지 못할 때 모든 대안을 탐색하는 대신에 가능한 대안들만을 탐색하고 이들을 욕망수준(level of aspiration)에 기초하여 평가를 행하다가 욕망수준을 충족시키는 첫 번째 대안을 선택하는 방법이다. 즉, 만족화에서는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느끼는 욕망수준을 설정하고 대안을 탐색하고 평가해 나가다가 욕망수준을 능가하는 대안이 발견되면 그것을 선택하게 된다. 따라서 만족화에서는 제한된 합리성만이 추구될 뿐이다.

만족화의 철학은 실제세계에서 최적해를 얻기에는 너무나 많은 불확실성과 상충요인들이 혼재해 있기 때문에 이제까지의 것보다 좋으면서 그 정도면 족(足)하다는 욕망수준을 주관적으로 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해결대안을 채택하게 되는데 이때 그 채택대안은 최적해(最適解)는 아니지만 현실적인 만족해(滿足解)라고 인식한다.

 만족화는 보다 현실에 가까운 의사결정을 유도하는 방법이라는 면에서는 최적화보다 실제적이라고 평가를 받지만 의사결정에 있어서 욕망수준이라는 주관적, 심리적 요소가 도입됨으로써 단순히 의사결정과정을 기술(記述)할 뿐, 의사결정에 있어서 규범성을 제시 못하는 한계를 물론 지니게 된다.

 아무튼 사이먼은 오랫동안 경제학 영역의 최적화방식을 원용해 오던 기업세계에 독자적인 의사결정방식으로 만족화(satisficing)모델을 제시하고 행동과학이라는 학문세계를 열어 온 공로를 인정받아 1978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후 혁신주체인 기업을 축으로 한 경영학 이론과 관련하여 노벨경제학상을 받을 다음주자는 과연 누구일까? 아마도 기업과 산업과 경제에 있어서 경제성장발 전의 동인/동력에 관해 명쾌한 틀과 논거에 기초하여 연구한 학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만약 필자에게 그 선발권을 준다면 필자는 혁신이나 기술변화가 경제성장・발전의 원동력임을 설파한 슘페터(Schumpeter, 1934)와 넬슨 ・윈터(Nelson and Winter, 1982)을 우선 추천하고프다. 그런데 슘페터는 이미 타계했음으로 고려 밖이고, 넬슨・윈터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 다만 한 가지 미심 쩍인 것은 그들이 주류경제학자가 아니다 보니 실제로 수상여부를 갈음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러함에도 1980년대에 행한 그들의 연구가 기술경쟁이 심화되는 21세기에 더 돋보이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잠시 이들의 연구업적을 살펴보자. (이 대목에서는 아무래도 개념적 이야기가 많이 등장함으로 다소 난해할 수도 있음을 양해바랍니다.)

진화경제이론(evolutionary economic theory)은 변화과정의 관점에서 생태생물학에서의 변이・유전・도태의 개념을 빌어 사회․경제현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이론으로 구조(structure)보다는 과정(process)을 중시한다. 이 이론의 기초는 슘페터의 혁신이론(1934)과 기업의 성장과정을 이론화한 펜로즈(Penrose, 1959)의 이론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이 이론의 효시는 아무래도 1980년대 들어 생태생물학에서의 경쟁이론을 경제・경영에서의 경쟁현상에 적용을 시도한 넬슨과 윈터의 An Evolutionary Theory of Economic Change(1982)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은 기술변화(혁신)를 돌연변이로, 지식보유체로서의 기업을 변이유전으로 보고 시장을 도태의 장으로 구체화한 진화의 틀을 개념화하였다.

넬슨과 윈터는 기업을 이익추구자이며 기업역량과 의사결정룰(decision rules)을 가지고 행동하는 주체로 인식한다. 즉, 기업은 단순히 외생적으로 주어지는 대안만을 통해 이익극대화(profit maximization)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기업은 실제로 서로 다른 경로(path)를 지니며, 다른 기업역량과 의사결정 룰(decision rules)을 가진 이질적(heterogeneous) 존재로서 기업의 탐색활동(search)을 통해 기술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을 강조하며 기술환경과 시장환경의 공진화(共進化, coevolution)를 전제한다. 이런 배경에서 진화경제학의 철학적 배경은 요소환원주의(reductionism)가 아닌 전일주의(holism)에 기초한다.

 그리고 기업역량과 의사결정 룰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문제해결노력과 예기치 않았던 사건에 의해 수정・보완되는 경로의존적(path-dependent) 지식기반이 루틴들(routines)을 형성하는 것으로 본다. (여기서 루틴들이란 예측 가능한 기업의 행동패턴으로 정의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주어진 시점에서 기업의 외부요소(시장 상태)와 내부요소에 대한 의사결정기능의 집합을 말한다.)

한편 기업성과는 기업외부의 기술변화(technological change)에 대해서 기업이 루틴으로 어떻게 적응하느냐의 선택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즉, 루틴을 통해 기술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수익성 있는 기업은 선택되고 수익성이 없는 기업은 도태되는 자연선택원리가 작동하는 장소를 시장으로 인식하며 시장에서 보다 수익성이 좋은 기업들이 선택되게 됨에 따라 경제전반의 성장이 도모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업의 routines 변화요소가 성장 동인으로 중시되다 보니 기술변화, 투자, 진입강도, 노동시장, 시간에 따른 산업의 투입-산출, 기업의 경로 등 기업레벨이 자연히 중시되게 된다.

 그런데도 진화경제학은 실제로 신(新)다윈주의(Neo-Darwinism)에 기초하여 적자생존(survival of he fittest)이 아닌 적합관계자 생존(survival of the fitting)의 관점에서 기업레벨보다는 산업레벨에서의 산업진화에 더 관심을 둔다. 따라서 넬슨과 윈터 이후 그간 변이의 유전(보전)과 관련한 적응・학습・탐색・경로의존성 등 기업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개념들을 포함하는 진화적 사고를 적용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어왔음에도 여전히 기업레벨에 대한 구도가 미흡한 것이 진화경제학의 현 수준이며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함에도 진화경제이론은 주로 내용(content)지향의 정태적 측면을 주로 다루는 기존의 이론들과는 달리 과정(process)지향적이라는 동태적 측면을 다루며, 또 기술변화와 시장진화를 경제발전의 원동력과 산업간 차이의 동인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시장을 선택(選擇)과 도태(淘汰)의 장으로 인식하는 점에서는 대단히 호소력 있는 이론임에 틀림없다.

한편 시대상황의 관점에서 보면, 슘페터 혁신이론이 등장한 1930년대 초반부터 1970년대 후반 진화경제학이 등장하기 바로 직전까지 약 50여 년간은 대량생산체제가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지속되어 왔는데 1970년대 후반에 2차 오일쇼크(1979)로 초(超)경쟁상황이 전개되고 거의 같은 시기에 디지털화 혁명(digitalization revolution)을 비롯한 기술변화가 분출되는 상황에서 진화경제학이 배태되다 보니 진화경제학에서는 자연히 공급자간의 경쟁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따라서 시장/고객니즈 측면을 소홀히 다루는 한계를 안게 되었다.

 다시 말해 진화경제학에서는 기업이 시장고객을 주도하고 고객은 동일한 니즈를 갖고 있거나 동일제품/서비스를 원한다는 묵시적 전제를 깔고, 산업레벨의 기술변화에 기업레벨에서 어떤 루틴으로 적응할 것이냐에 주로 관심을 두어왔고, 혁신과 관련해서는 기업이 시장고객을 주도한다는 전제에서 시장환경과 기술환경의 공진화(coevolution)를 다루고 있어 기업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경우에 한해서만 유효하다는 한계를 보인다.

자, 그렇다면 고객이 기업보다 더 힘을 쥐고 있으며 고객의 니즈진화가 빈발하는 상황에서는 어떤 이론이 유효할까?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구축된 것이 바로 다이나믹 매니지먼트이다.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한마디로 니즈진화에 적응하는 혁신경영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니즈맞춤혁신・니즈진화・적응우수성을 key words로 한다. 여기서 적응이란 니즈진화를 선도하거나 니즈진화에 편승하는 행위 모두를 포괄한다.

 요컨대 니즈맞춤혁신을 통해 니즈진화에 적응하며 지속번영을 도모하는 경영이 다이나믹 매니지먼트인데, 이는 특히 2000년대 인터넷/스마트혁명 이후 고객의 니즈가 까다로워지고 니즈진화가 빈발하는 비선형(非線型)세계에 부합하는 경영패러다임이라 할 것이다.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는 크게 세 가지 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업레벨에서 시장의 고객니즈와 니즈진화를 설명해주는 현시니즈이론(explicit needs theory)과 기업레벨에서 이익추구 동력을 나타내는 기업파워이론(firm power theory) 그리고 산업레벨에서의 니즈진화와 기업레벨에서의 전략행동을 연결시켜주는 니즈맞춤혁신전략(needs-focused innovation strategy)이 그것이다.

현시니즈이론에서는 구매력을 지닌 고객집단인 수요가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수요 중에서도 지불의향(willingness to pay: WTP)을 지닌 현시니즈/현시수요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기업파워이론에서는 시장의 현시니즈/현시수요로부터 이익을 캐내는 기업의 힘 곧 기업파워(firm power)는 성장벡터(growth vector)에 부합하는 혁신(innovation)에 좌우되고 성장벡터는 또한 고객의 니즈진화에 부합해야 한다는 점에서 결국 니즈맞춤혁신이야말로 기업성과의 원동력임을 강조한다.

기업파워이론은 기술변화(혁신) 요소를 강조하는 진화경제학과 맥을 같이 하면서도, 첫째 정태적으로는 니즈맞춤혁신으로 기술(공급)요소와 시장(수요)니즈가 연결된다는 점, 둘째 동태적으로는 니즈맞춤혁신전략으로 니즈진화와 기업의 혁신활동이 연결되며 니즈맞춤혁신전략의 유효성 정도에 따라 제품적합성(예상수익지표)과 공정적합성(예상비용지표)이 좌우되면서 예상이익이 얻어지는 혁신과 이익실현과의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다.

2013년 10월 14일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2013년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주식 채권 및 주택 시장 등의 추세 연구 방법을 개발한 공이 있는 미국의 유진 파마(Eugene F. Fama), 라스 피터 한센(Lars Peter Hansen) 및 로버트 쉴러(Robert J. Shiller) 교수가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효율적 시장가설과 비효율적 시장가설이라는 서로 상반된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 세 수상자들이 자산 가격에 관한 현재의 최고 이론에 기초를 놓았으며 이에 따라 사람들의 투자 방식을 변하게 한 점을 높이 사서 수상하게 되었다고 전하는데 수상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주식이나 채권 가격의 단기적 등락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만 3년 이상의 장기 변동 추세를 예견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한다.

 이들의 노벨경제학상 수상 근거에 대해 전문영역이 다른 필자가 왈가왈부할 성질의 것도 아니고 또 그럴 만한 전문성을 필자가 물론 갖고 있지도 못하다. 다만 이들의 수상과 관련한 주제가 자산 가격의 예측 특히 주식과 채권가격의 등락을 다룬 것이란 점에서 그리고 그들의 연구가 1960년대부터 2008 글로벌 금융위기 때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란 점에서 아무래도 금융파생상품과도 밀접할 것이며 그래서 2008 Wall Street Meltdown과도 직결될 것이란 느낌이 들면서 동시에 두 가지의 사념(思念)이 필자 머릿속에서 강하게 떠올랐다.

첫 번째 사념은 2011년 San Diego에서 열린 세계전략학회(Strategic Management Society) 특별회의에서의 일이다. 필자가 논문 발표 후 개별적으로 필자와 더 토론을 원하는 어느 핀란드 교수와의 대담을 끝내고 나서 시간이 어중중하지만 흥미로워 보이는 한 발표세션에 들어갔는데 발표논문이 4개였는데도 발표자들을 제외한 청중은 오직 필자뿐이었다.

그 세션의 발표논문은 금융재무와 관련한 실증연구들이었는데 연구기간(research span)이 모두 2008 월가 발 금융위기를 포함하고 있었다. 한참 자기네들끼리 묻고 대답하더니만 필자에게도 질문의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각 논문마다의 이론모델과 가설 및 그 검증방법에 대해서는 필자의 관심을 벗어난 것임을 밝히고 다만 연구기간과 그에 따른 데이터의 성격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 생각해 보았느냐는 질문을 특별히 와튼 스쿨(Wharton School)에서 온 교수라는 분에게 던졌다.

 그 분의 발표논문요지는 금융파생상품을 다루는 월가 금융사들을 다양한 금융상품을 다루는 다각화 추구의 금융사와 덜 다각화를 추구한 금융사로 대별하여 경영성과를 비교했더니만 더 다각화를 추구한 금융사의 경영실적이 더 우수했다는 내용을 다룬 것이었다. 그래서 교수님이 연구에 사용한 1980-2009년까지의 데이터를 보면 실물경제에 있어서는 세계최대 채권국이었던 미국이 1985년을 기점으로 세계최대채무국으로 전환된 시기가 포함되어 있으며 또 이어지는 실물경제의 쇠락과는 반대로 금융파생상품이 증가해 오다가 미국의 무역적자가 마치 산사태를 맞은 듯 급증하기 시작한 1997년부터는 금융파생상품이 초거대화 되며 미국경제의 활황을 주도하다가 결국 2008 금융위기를 초래한 패닉(panic)도 연구기간에 포함된 것임을 지적하면서 이런 비정상적 특성을 지닌 데이터를 가지고 행한 금융사의 전략행보 차이에 대한 연구결과가 과연 유의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가 라며 다소 예의에 벗어난 듯한 질문을 던졌다.

 사실 그 당시 그 특별회의에는 전략경영 여러 분야에서 소위 세계석학이란 70여명이 초청되었는데 그때 그 세션 발표자들의 연구문제 의식과 연구 감각이 너무나도 미시적이고 시대흐름을 읽는 안목이 결여된 탓에 다소 거칠게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그러면서 왜 2008 월가붕괴가 터졌는가를 구명(究明)하는 게 오히려 더 시급한 연구주제가 아닐까라는 의견을 피력한 바가 있었는데 웬일인지 그 때의 그 일이 2013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발표를 접하는 순간 문득 필자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사념은 2013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의 핵심내용인 주식・채권 가격등락에 대한 예측과 관련한 것이었다. 이번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은 주식이나 채권 가격의 단기등락에 대한 예측은 곤란하지만 3년 이상의 장기 변동 추세를 예견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데 이는 카오스 이론과 복잡성과학에서의 메시지와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자를 감쌌다.

국내시장이건 글로벌 시장이건 주식・채권을 다루는 금융자본시장은 대단히 가변적이고 취약한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있는 하나의 복잡시스템(complex system)으로 이해되는데 카오스 이론과 복잡성과학은 복잡시스템의 행동은 단기적으로는 어느 정도 그 예측이 가능하지만 중장기적으로 는 그 예측이 아예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고 단지 하나의 패턴으로만 이해 될 수 있을 뿐이라고 전한다.

그렇다면 카오스 이론과 복잡성과학이 전하는 메시지와 이렇듯 상반된 2013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의 연구결과는 과연 금융자본시장에는 자연 질서와 반대로 움직이는 어떤 고유한 특성이 존재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노벨 수상자들이 이 점을 몰라서 자연 질서와 반하는 연구결과를 주장하는 것인지 또 아니면 복잡시스템을 연구하는 방법론이 아직 덜 확립된 탓에서 비롯된 것인지 여부는 필자로서는 전혀 모를 일이며 다만 만년에 필자에게 연구주제 하나가 더 추가되고 있다는 느낌일 뿐이다.

글 / 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학회장 

Fast Secure Contact Form, crazy..

This is just crazy. This even looks like ‘fake update’ just for getting more ‘download count’, I hope not. Here I’m talking about a small CAPTCHA ‘contact form’ plug-in for WORDPRESS which I’m using for some time. While I really appreciate for the authors’ effort giving us fair quality ‘free’ plug-in, it’s very annoying having to update every other day for months. This not only points to their sloppy and crazy software design practice, but also makes me suspect their intention, higher and higher download count. Why not just wait a month doing more careful design instead of 2-3 day debugging cycle? Maybe, it’s time to look around other alternatives out there.

 


Just take a look at their latest ‘release’ cycle to see my point.

Changelog

4.0.15

  • (12 Oct 2013) – allow HTML in “Your message has been sent, thank you.” custom label.
  • Bug fix: the attrubutes setting was not working on name, email, subject, fields.
  • Bug fix: schedule a meeting button could show when not activated.

4.0.14

  • (11 Oct 2013) – Bug fix: view /print button did not work with some plugins.
  • Bug fix: schedule a meeting button user preference default problem.
  • updated German (de_DE) translation.

4.0.13

  • (08 Oct 2013) – Bux fix: some forms would fail to import when label had some Non-US-ASCII or Chinese characters.
  • Bug fix: Form save error when tag had some Non-US-ASCII or Chinese characters.
  • Bug fix: button on the Tools tab “Import forms from 3.xx version” did not always work correctly.

4.0.11 & 4.0.12

  • (06 Oct 2013) – Improved placeholder text to work on older browsers.
  • Added new style setting for “Placeholder text” so you can change placeholder text color if you want.
  • Note: if you are using the External CSS setting you should import the new placeholder css, click “View custom CSS” on the Styles tab to see it.
  • added new setting to Advanced tab “Enable to have the email labels on same line as values”.
  • updated German (de_DE) translation.
  • Bug fix: copy styles was not copying all of the style settings.
  • Bug fix: button on the Tools tab “Import forms from 3.xx version” did not work correctly.

4.0.10

  • (03 Oct 2013) – Bug fix: Activation generates “unexpected output” notice to admin.
  • Bug fix: Could not select “Block spam messages” for Akismet.
  • Bug fix: Field Regex was always validating as if required.
  • Bug fix: Atachment file types, and file size labels were not working properly.
  • Bug fix: Field default text was not showing in form.

4.0.9

  • (02 Oct 2013) – Bug fix: PHP method of calling form display was not working.
  • Bug fix: time validation did not work on 24 hour format.

4.0.7 & 4.0.8

  • (01 Oct 2013) – Added a button on the Tools tab “Import forms from 3.xx version” for those who might be troubled by an import failure.

  • Bug Fix: fixed a couple problems with importing settings from 3.xx version.

  • Bug fix: none of the language translations were working.

  • Bug fix: there were some ui image 404 errors from includes/images

  • Bug fix: vCita setting error.

  • other minor bug fixes.

 

Tool Time

드디어 ‘hardware, 쇳덩이’ 들을 조금씩 만지기 시작했다. computer가 세상에 오기 전의 진짜 hardware들, 대부분이 tool, 기계 공구, 연장들.. 요새 나는 이것들과 참 멀리 지냈다. 거의 몇 년이 되어가나? 마지막 본격적으로 이런 것들을 만지며 지내던 때가 2010년 경 flooring work을 할 때였다. 아래층 laminate flooring을 할 때, 앞쪽 문 아래 마루 아래 framing을 termite 와 water damage로 인해 상당한 시간을 들여 고친 것과 ‘시로도’의 기술로 IKEA Tundra 와 싸우며 몇 개월을 보냈던 그 때, 그리고 ‘심심해’ 보이는 조그만 deck에 귀여운 pergola(arbor), picnic bench를 만들어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번에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그러니까 거의 3년의 동면에서 깨어나는 셈이 된다. 움직이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거의 4개월 전에 Costco에서 sale로 산 kitchen faucet 의 설치를 계속 미루고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염치’가 없음을 알게 된 것이었다. 이것을 하려니 이런 저런 plumbing tool들이 필요한데.. 이것들이 도대체 어디에 숨어있는지 알 길이 없었고, 그것들을 찾을 ‘용기’조차 나지를 않다가 이제 ‘대대적’으로 tool ‘cleanup’ time을 선언한 것이다.

나의 tool collection은 남들과 조금 다르다. ‘대부분’ 인터넷으로 고른 싼 것 중에서 조금은 믿을만한 것들이다. 나의 공구 구입의 첫 번째 우선 순위는 ‘값이 저렴‘해야 한다는 철칙이다. 이것으로 나는 연숙과 항상 말다툼을 하곤 하지만, 서로의 ‘구매 철학’이 다를 뿐이다. 연숙은 조금 더 비싼 것을 사서 ‘안심하고 오래’ 쓰자는 것이고 나는 ‘더 싼 것으로 더 많이’ 사고, 일찍 망가지면 ‘할 수 없다‘는 주의다. 결과적으로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펑 펑’ 쓸 돈도 없지만 만약 있다고 해도 나의 구매 철학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대신.. 살 때 ‘오랜 시간을 들여 공부’를 하는 것이 나에게 준비되어 있다. 철저한 ‘계산’을 하는 것이다. 공구나 기계의 구조나, 내구성 등을 연구하고 사는 것이다. 공구 분야, 특히 ‘미제 공구’는 대부분 프로들을 대상으로 만들었기에 그렇게 비싸고 오래 견디는 것이지만 ‘가끔’ 사용하는 나에게 그것은 사치요 낭비이기도 하다.

빨갱이 짱깨, a.k.a 중공, 지금은 중국’ 이 1980년 이후에 값싼 공구를 만들기 전까지는 울며 겨자 먹기로 ‘탱크 같은 미제’를 써야 했지만 이제는 나의 수준에 맞는 것들을 골라서 값싸게 사게 되었기에 예전에는 꿈도 못 꾸었던 공구들의 맛을 보게도 되었다. 이런 나의 습관은 비록 나의 철학을 만족은 시켰지만, 대신 연숙의 ‘코웃음‘ 을 많이 사기도 했다. 일찍이 망가진 공구들이 꽤 많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찍 죽는 공구’의 대부분은 사실, 제품의 ‘질’ 때문이라기 보다는 나의 ‘최악’의 after-care 습관 때문임을 나는 잘 안다. 공구들을 쓰고 나서 나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방치해 두곤 했고, 그것들이 일찍 죽게 한 원인이 된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한 주요 원인도 나는 잘 안다. 고된 일이 끝나면 사실 그것들을 다시 ‘정리, 보관’하는 힘이 거의 없기에 그런 것이다. 그것이 프로와 나의 차이였다. 그들은 시간 관리를 잘 하고 훈련이 되어 있어서 문제가 없지만 나는 ‘하고 싶으면 쉬지 않고 하는’ 그런 지독히도 ‘시로도‘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그들과 비슷하게 고된 일이 끝나도 모든 기기, 공구들을 잘 보관 정리했었다면 대부분의 Chinese-made공구들.. 훨씬 오래 썼을 것이다.

내가 고된 일이 끝나고 ‘비틀거리며’ 집안으로 기어들어올 때 더 힘든 이유가 나의 습관에도 있지만, 다른 이유는 그 공구, 기재들을 임시로 넣어 둘 open (rain) shelter가 없었기 때문이다. 피곤한 상태에서 그 공구들과 ‘잡동사니’들을 급하게 비를 대비해서 치우는 작업이 나를 더 피곤하게 만든 것이다. 비록 몇 년 전에 만든 shed가 하나 있지만 그것 조차 ‘잡동사니’로 그득 차 있어서 거의 쓸모가 없게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다시 tool time을 reboot하는 첩경은 임시로 비를 피할 open shelter가 필요한 것이다. 특히 비가 자주 왔던 올해에는 더 그랬다.

그래서 드디어 손을 털고, ‘공구를 거의 쓰지 않는’ 방식1 으로 이틀 만에 ‘번개처럼’ open shed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지금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급하게 비를 피할 수도 있고, 그곳에서 작업을 하다가 다른 곳으로 치울 필요도 없는 그런 곳이다. 이것이 ‘발판’이 되어서 조금씩 필요한 작업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우선 할 일은 ‘쓰레기’로 가득 찬 ‘진짜’ shed 내에 있는 필요한 ‘값싼’ 공구들을 찾아서 정리하는 일이다. 이것이 다른 project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open shed framing 1open shed: all 2×4 no-cut, screw-only  framing stage #1: 3 posts up

 

open shed framing 2open shed: all 2×4 no-cut, screw-only framing stage #2: 6 posts up

 

open shed framing 3open shed: rafters and roofing trials

 

open shed framing 4Yeah! annoying rain pain no more..

  1. standard lumber, 대부분 2×4 stud, 를 하나도 자르지 않고 screw driver만 사용했다.

Guest Blog: 박계형 ‘netizen’ 컬럼

 오랜만에 인호 형에게서 email이 도착, 아하.. 따끈따끈하게 새로 ‘구워낸’ 김인호 칼럼이 나왔구나..하고 보니 이번은 인호 형의 인생 동반자 박계형 작가님의 ‘조갑제 netizen column’ 에 관한 것이었다. 작년에 여사님께서 손수 보내주신 친필로 쓰여진 멋진 글과 다수의 논고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 처음 보게 된 것이라 아주 반가웠다. 논제는 지극히 평범할 수도 있고 진부할 수도 있지만 왕년의 실력으로 아주 설득력 있게 다가온 글이었다. 암만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들 중의 으뜸이 아닐까, 이 진실과 정직이라는 것이. 거짓이 새로운 진실로 태어나는 것이 new normal이 되어가는 이 세상에 진실의 등불은 더욱 그 빛이 밝게 느껴진다. 그 ‘진실의 원천’은 무엇일까? 나는 100%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고 동의한다. 다만, 다만, 지나친 흑백논리에 빠지는 함정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피해야 하는 다른 ‘진실’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진실(眞實)의 가치(價値)

정치가가 가야 할 길도 첫째가 정직이고, 기업가가 가야 할 길도 우선 정직이다.

박 계 형(朴啓馨) 소설가

 

PARK-GYEHYUNG몇 해 전인가, 해외나들이를 위해 공항에 나가 서류를 적을 일이 있었는데, 미리 가이드가 나에게 여행목적 란에, – 관광이라고 적지 말고 다른 이유를 쓰라고 가르쳐 준다. 관광이라고 쓰면 무슨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런 법이 아직 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수입을 만들어 국내관광지를 개발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던 방안인 모양이다.

  가이드의 충고는 고마웠지만 거짓말을 써야 한다는 게 찜찜해서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관광을 나가는 길이니까 그냥 사실대로 쓰겠다, 고 말했다. 그랬더니 가이드는 마치 외계인이라도 보는 듯 아주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무엇 때문에 손해를 보면서까지 곧이곧대로 쓰겠다, 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알고 보니 그 세금이라는 게 겨우 만원이었다.

  하마터면 나는 돈 만원에 진실을 팔아버릴 뻔 한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 만은 진실이란 것이 1만 원짜리 한 장과 바꿀 수 있는 그런 정도의 값싼 것은 아니다. 사실 진실의 가치를 따지자면 무한대다. 돈 만원이 줄 수 있는 그 정도의 일시적인 쾌락이나 즐거움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많은 것들의 가치와 중요성을 논하고 있으면서도 진실의 가치에 대해선 자주 말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도 엄청난 교육비를 투자하며 이것저것 여러 가지 것들을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정작 가르쳐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인 정직을 심어주는 일엔 등한히 하고 있다. 혹시나 우리는 비겁하게도 우리의 아이들에게 정직을 가르치기를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워낙 세상이 거짓된 것들로 가득 차 있으니 우리아이들만 정직했다간 세상에서 손해만 보고 쫓겨나는 게 아닌가, 당연히 겁이 날 수 있는 일이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우리들에게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정직만이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인간이 제아무리 잘났다고 날뛰고 실제로 대단한 짓들을 하고 있지만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막지 못하고 결국은 그 밑에서 살고 있듯이 빛은 반드시 어둠을 이기고 만다는 섭리의 육중한 힘을 우리는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초식동물인 소에게 고기를 먹이니 소가 미치지 않는가.

  지금은 미국도 타락하여 쇠퇴의 길을 걷고 있지만 한 때 전 세계인이 선망하는 나라가 되어 부와 힘과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도 그들 안의 정직의 정신 때문이었다, 고 나는 생각한다. 미국인들을 가장 노하게 하는 두 가지 말이 있는데, liar(거짓말쟁이)와 coward(비겁자)라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거짓말쟁이라고 하면 더욱 화를 내고 심하게 표현해 결투를 신청할 정도로 참지 못한다. 불과 몇 백 년 전만해도 수풀더미에 묻혀있던 미국을 전 세계위로 솟아오르게 만든 것은 그들의 기독신앙 안에서 피어났던 정직의 정신이었다.

  정직한 나라, 정직한 정치가, 정직한 기업인만이 결국은 이 땅 위에서도 흥하고 살아남을 수 있다, 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건강식품을 파시는 어떤 분에게서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자기가 양심을 속여 물건을 조금 적게 가지고 가면 거의 어김없이 사는 편에서 저울로 달아보고 적발해 내는 바람에 결국 속인 것이 들통 나 고객이 떨어져 버리고 만다는 것이었다. 

비록 콩나물장사를 하더라도 한군데에서 손님을 속이지 않고 오래 하다 보면 그 사람은 거기서 사람들의 신임과 지지를 얻어, 결국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번성하게 되어 있는 법이다.

  내 친척동생뻘 되는 여자 하나가 시집을 갔는데, 신랑이 간신히 지방대학은 나왔지만, 체격이 너무나도 왜소하고 인물도 변변치 못해, 직장이라고 얻은 것이 작업환경도 열악한데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기계 만지는 일이어서, 나를 찾아왔을 땐 이미 손가락 하나가 조금 잘린 상태였다. 그 모습이 너무 딱해 지인을 찾아가 사정사정해서 겨우 입사시험을 치르게 하였는데 성적이 하도 형편없어 우리가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였다. 중견 증권사였는데 간신히 취직을 시키긴 했지만 그곳에서 과연 얼마나 견디어 낼 수 있을지, 안심이 되질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 회사의 높은 분을 만났더니 그분이 하시는 얘기가 그 사람이 지금 고객들에게 대단한 인기와 호평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용을 알아본 즉, -고객들이 와서 증권을 사자고 하면 지금 사면 안 되고, 이것을 사면 손해를 보고, 등등의 구실을 붙여 고객을 돌려보내기가 일쑤인데 계약 고를 많이 올려 회사에 득을 주어야 할 직원으로서 손님을 쫓고 있는 형상이니 말도 안 되는 짓인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감에 따라 약삭빠르지 못하고, 일면 어리석어 보이는 그의 진실성이 오히려 고객들의 신뢰와 호감을 당하여, 모두 그에게로 몰려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직접 목격한 사례이다.

  그의 장모인 나의 아줌마가 죽어서 그 장례식에 갔었는데 마당에 가득한 자가용 행렬을 보고 나는 하도 오랜 만에 좋은 것을 보곤 마음이 너무나 감격해 눈물까지 흘렸었다.

안튼 슈낙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여러 가지 것들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었지만 나는 우리를 기쁘게 하여 주는 것들 가운데 하나로 이 이야기를 늘 떠올리곤 한다.

그렇게나 보 잘 것 없는 사람에게도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길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실의 힘인 것이다.

우리가 이 사람보다 더욱 정직하게 산다면, 이 사람이 얻은 것보다 더욱 큰 영광을 누릴 수도 있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많은 처세술과 대인관계법 등이 연구되고 있지만 정직보다 더 앞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실 정직처럼 쉬운 처세법도 없다. 따로 머리를 굴리고 계략을 짜내려고 골치 아프게 궁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정치가가 가야 할 길도 첫째가 정직이고, 기업가가 가야 할 길도 우선 정직이다.

  정직의 성과는 당장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반드시 나타나고 만다. 세상에서 보라. 씨가 떨어져 열매를 맺기까지는 반드시 시간의 경과가 필요하지 않은가. 우리가 뿌린 정직의 씨도 그렇게 언젠가는 반드시 풍성한 좋은 열매를 맺어 우리들에게 되돌려 줄 것이다. 설령 우리가 정직을 택함으로써 많은 손해를 본다 해도, 슬퍼하거나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갚아주실 분이 계시다!

  진실을 행하는 자는 혼자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진실 안엔 반드시 동행하시는 분이 계시다.

  진실이 이기고야 마는 이유도 간단하다. 전능하신 분께서 진실 안에 반드시 함께 계시기 때문인 것이다.   

 

박 계 형(朴啓馨) 작가 소개

1943년 서울에서 출생
1961년 수도여고 졸업
1965년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1963년 동양방송(현 KBS 2의 전신)개국(開局) 현상문예소설 50만원 당선작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
197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입선작 [어떤 신부(神父)]
1999년 조선일보 선정 [한국을 이끈 50인]의 한 사람으로 뽑힘
2002년 [자랑스러운 고려대인(高麗大人)상] 수상
현재   연변과학기술대학교 겸임(兼任)교수, 성 어거스틴 회(St. Augustine Society) 대표

주요저서:
A Life(임종의 영문판), Troubador 출판사 출간, 영국, 2007>
<留すりたかった瞬間の數數(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 일어판, 新宿書房 출간, 2005>
<정(情)이 가는 발자국 소리>, <해가지지 않는 땅>, <사랑의 샘>
<자유를 향하여 날으는 새>,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
<어느 투명한 날의 풍경화>, <회귀(回歸)>, <환희, 구(舊)임종(臨終) 1,2>
<朴啓馨 全集> 외 약 60여권  

Rosary, 묵주(기도)의 성모님

성모발현, 태양의 기적 뒤에 촬영 된 신문사진, 세명의 visionaries. 1917년 10월 13일
성모발현, 태양의 기적 뒤에 촬영 된 신문사진, 세명의 visionaries(from left): Lucia, Francisco, Jacinta 1917년 10월 13일, Fatima, Portugal

Our Lady of the Rosary, 묵주(기도)의 성모님.. 오늘 레지오1 단원수첩을 보니 10월 7일,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 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었고 미국 교회달력은 ‘Our Lady of the Rosary‘ 라고 되어있다. 대강 짐작은 했지만, 달력을 보고 알아 차렸으니 이것을 또 잊고 살았다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오늘 아침의 미국 본당 평일 미사에서도 잊지 않고 아프리카 출신 보좌신부님2 기도 중에 묵주기도를 주도하셔서 10월은 묵주기도의 달 임이 상기가 되었다.

사실 10월을 맞으며 ’10월은 묵주기도와 성모님과 관련된 달’임을 알았고, 공식적으로도 10월은 ‘묵주기도 성월’이라고 불린다. 나의 기억과 알량한 지식이 맞는다면 이것들은 1917년 10월 13일에 당시 사회주의3 독재정부의 교회탄압 속에서 고생하던 포르투갈의 파티마에 나타나신 성모님 발현에서 유래된 것이다. 같은 해 5월 13일 처음 세 명의 ‘목동,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발현하고, 매달 13일째에 계속 발현하다가 10월 13일에 ‘마지막’으로 발현 했을 때 성모님은 자신이 ‘묵주기도의 동정마리아’라고 분명히 밝혔고, ‘작은 자연의 기적4‘ 을 보이기도 했다.

자신이 ‘묵주기도의 성모 마리아’라고 분명히 밝혔으니.. 이것으로 우리는 실제로 성모님이 자신의 자녀, 즉 인간들이 묵주기도를 성모님께 바친다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고, 나아가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는 의미가 포함 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성모님의 발현은 이렇게 ‘실제적’인 사실을 확인하게 해 주는데 최상의 효과가 있는 것 같다. 특히 나에게는 그렇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고, 잘못 되었는지 ‘어머니같이’ 가르쳐 주는 것이다.

나의 묵주기도의 작은 역사가 이제 6년이 지나가고 있는데, 사실 거의 제로에 가까운 기대감을 가지고 시작한 이 작은 ‘사고’는 상상을 초월한 큰 변화를 나에게 주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이 나의 경험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나누어 줄까 하는 방법인데, 사실 이것도 인간적인 고민이다.. 이것 역시 묵주의 성모님의 “힘과 전구(intercede)”를 믿으면 되는 것이니까.

 


 

  1. 레지오 마리애, Legion of Mary ‘성모님의 군단’이라는 아일랜드에서 유래된 오랜 전통을 가진 가톨릭 평신도 단체, 나와 연숙이 현재 속하고 활동을 하고 있는 유일한 신심단체.
  2. 이 신부님의 성모 마리아 신심은 그의 레지오 마리애 경력에 의해서 짐작이 되었었다.
  3. 그들은 교회, 특히 천주교회를 증오하였다.
  4. 태양의 유희, 지상으로 떨어지는, 춤추는 것 같은 것으로 수많은 군중이 동시에 경험을 하였고, 정부기관지에까지 대서특필 되었다.

진로 소주와 강남스타일

jinro-soju보드카 야.. 물러가라, ‘강남스타일’ 진로소주가 들어간다.. 이런 식으로 진로소주의 본격적인 미국 주류시장 공략에 대한 이야기가, 미국 주요 뉴스 매체[major news outlet]가 보기에 ‘하찮은’ 것들 즐겨 찾는 NPR[National Public Radio]에 보도가 되었는데 그냥 지나치려다가 ‘파아란’ 쏘주 병 사진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보고야 말았다. 그 ‘파아란, 두꺼비 표’ 진로 쏘주 병 색깔을 보니 어쩔 수 없는 향수 심이 돋아나는 것이었다.

이 보도를 보면 내가 그 동안 몰랐던 것들이 있었다. 그 중에, 진로 소주는 술 종류 SPIRITS (증류주?) 중에서는 판매량이 ‘세계에서 1위’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쟁 주’는 Smirnoff, Jack Daniel’s, Bacardi등이 있는데 그들의 판매량 보다 거의 갑절이라는 것은 사실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미국 시장에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판매량이 적은데 전체의 5% 정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시장이 거의 압도적으로 제일 크고, 다음이 일본, 중국 정도 인데.. 이것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나는 한국사람들의 술 문화를 비록 오래 전이었지만 ‘알맞게’ 겪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술고래’ 전통이 계속 그렇게 유지되지는 않을 듯.. 그래서 이제는 제일 큰 미국시장을 겨냥하는 것일지도… 술을 파는 것은 사실 술 맛도 중요하지만 ‘멋진 광고’도 중요할 것이고, 그래서 제일 효과적일 수 있다는 강남스타일을 광고로 골랐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은 그 ‘강남 어쩌구’ 하는 것, 한마디로 ‘병신 지x’로만 보이지만 그것에 넘어가는 작은 머리들이 생각보다 많을 지도 모른다. 그것이 광고인 것이다. 그저 ‘넘어가면’ 그 역할을 끝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한국 팝 문화’를 이용하고, 곁들이는 방식인데, 글쎄요.. 그것이 그렇게 보는 것처럼 쉬울까?

한 전문가는 지금까지의 넘버 원이었던 러시아 보드카를 예로 들었는데, 그것이 처음 들어왔을 때가 1950년대였고, 현재에 이르러서 그것이 top이 되었으니..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렸는가? 반세기가 흐른 것이다. 그것이 ‘술 문화’가 변하는 ‘속도’인 것이다. 그런데, 난생 처음 들어보는 아시아의 요상한 맛을 가진 소주를 ‘강남 스타일’ 등으로 팔겠다는 것도 생각보다 긴 ‘세월’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소주에는 보드카에 없는 장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소주의 알코홀 ‘도수’가 20%라는 것인데, 이것은 정식 주류 면허에 못 미치는 맥주, 와인 정도의 면허만으로 팔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낮은 알코홀 도수이기에 보드카로 만드는 칵테일 대신에 색깔이 같은 소주를 대신 쓸 수가 있고,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소주를 bar에서 많이 쓴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한국문화의 관계성과는 전혀 상관없이 ‘장사 속’으로 생각해서 훨씬 경제적이라는 뜻이다. 미국 시장에서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아마도 진로소주는 내년에도 ‘전세계 판매량 제1위’를 계속 유지할 확률이 크다고 한다.

이러한 보도를 읽으며 생각을 해 본다. 나 자신의 ‘술 문화’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 옛날 대학시절 무렵, 팔팔할 적에는 술에 너무나 약해서 제대로 ‘술 맛과 멋’을 몰랐다. 쉽게 퍼 마셔도 별로 탈이 없었을 나이에 제대로 못 마신 것이다. 취하면 기분이 날라갈 듯했지만 대신 ‘술 탈’로 고역을 겪어야 했다. 유혹에 약해서 술을 제대로 거절할 수 도 없었다. 그런 문화에서 계속 살았으면 나는 나의 절친한 친구 김호룡1 처럼 50세도 못 채우고 황천으로 갔을 확률이 90% 이상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술 문화가 ‘전혀 다른’ 미국에서 오래 살아서 나는 그런 함정은 피할 수 있었고, 대신 ‘서서히, 알맞은’ 속도로 주량을 늘려 나가서 이제는 맥주 5병을 마셔도 괜찮고, 기분도 좋게 되었다. 한마디로 나의 ‘체질’이 변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주막집 문화’를 느끼며 마시는 ‘재미’는 물론 거의 없고, 대신 집에서 하는 모임 같은 곳에서나 그런 재미를 ‘상상’하긴 한다. 그 옛날 서울 포장마차에서 마셨던 ‘진짜 진로 소주‘는 없어지고, 이곳에 들어온 것들은 모두 ‘와인’ 정도로 ‘약 하게’ 변해서 도저히 그 옛날의 ‘목 젖이 아파오는‘ 그런 짜릿한 맛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20% 소주가 그런 것들이다. 술에 얽힌 이야기들은 적지 않지만 대부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많아서 잊은 것도 많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것들도 ‘치매 예방’ 차원에서 하나 둘 씩 기억을 해내어 개인 역사에 남겨 놓는 것도 나쁜 생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1. 중앙 중학, 고교, 연세대 동창, 연세대 기계공학과 교수역임

초가을 비, Pope 2.0

¶  8월보다 더운 느낌의 9월 초의 가뭄을 끝내는 시원한 초가을비가 ‘잔잔히’ 내린다. 9월도 하순으로 접어들고 내일은 9월 22일, 가을의 시작이고 밤과 낮의 시간이 같은 추분 Autumn Equinox 이다. 2013년 올해의 이곳 아틀란타 지역 기후는 아마도 ‘통계적인 평균치’ 에 가까운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온건한’ 느낌을 주었다. 특히 축축하지만 시원했던 여름에는 ‘감사기도’를 드리기에 바빴다. 온갖 지구의 열병에 대한 ‘유언비어’ 속에서 거의 기후 공포증에 시달리던 때, 이런 ‘여유’를 주신 Mother Nature 에 감사를 드린 것이다.

‘통계적 평균치’를 언급하면서, 올해의 8월과 9월이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생각했다. 한마디로 8월의 평균기온과 9월의 평균기온이 비록 평년에 비해서 낮았어도 그 자리가 바뀐 것이다. 통계치를 언급할 필요가 없이, 8월에 a/c(air conditioner)를 사용한 날 보다 9월 사용한 날이 더 많았으면 그것은 완전히 8월과 9월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8월 9월의 합친 기온 평균치는 ‘아마도’ 평년과 같았을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힘일까.. 예년에 비해서 아직도 새파란 주변의 모습이지만 그 만큼 더 빠른 속도로 가을 색, 황금의 빛깔로 변하지 않을까.. 그것에 오늘처럼 내리는 잔잔한 가을비까지 곁들이면 이것이 바로 ‘가을비 우산 속‘ 같은 감정이 되지 않을까..

 

2013-09-21 14.40.52-1

초 가을비가 뒷뜰에 촉촉히.. 멋진 빗소리와..

 

¶  Pope Francis, 교황 프란치스코.. 요한 바오로 2세를 능가하는 역사에 남을 교황이 되시려는가? 교황이 된 뒤 반년이 지나가는 이즈음 그에 대한 시각, 평가와 언론에 비치는 그의 모습들.. ‘놀라움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 싶다. 처음 교황이 되었을 때, 대부분은 조금 실망을 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건강상 이유로 도중하차하신 전 교황, 베네딕트 16세를 계승하는 지도자가 ‘또’ 76세이 교황이라면 얼마 되지 않아 또 ‘건강상’ 문제가 나올 터인데.. 왜 그랬을까? 그렇게 많은 추기경들이 그런 염려를 하지 않고 새 교황을 선출했을까?

 “the church as a hospital in a battlefield, 야전병원으로서의 교회  – Pope Francis

하지만 나이에 맞는 보수성은 취임 초부터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조금씩 ‘프란치스코의 놀라움’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2명의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트 16세 모두 ‘머리가 지독히 좋은, 학자 출신’ 이었고, 그에 못지 않게 ‘보수적’이었는데 현 교황은 그 모든 것도 아니었다. 거의 ‘진보적’이고, ‘머리보다는 가슴’인 그런 교황임이 들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은 올 것이 왔다. 그것도 지독히 큰 것이.. 8월 중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로마, 바티칸에서 예수회의 기자와 장시간의 기자회견을 가지고, 그것이 세계 예수회에서 발행하는 회지에 실리고 미국에서는 America [magazine] 라는 곳에 실렸다. 곧바로 그것은 ‘세속 언론’에 알려지고 ‘폭탄 선언’으로 그것이 묘사되었다. 세속적인 눈은 교황이 ‘세속적 압력에 굴복’하는 식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교적 ‘공정’한 입장의 New York Times는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며 21세기 가톨릭 교회의 ‘고민’을 이해하려 애를 쓰기도 하며, 이번 교황은 잠재적으로 전 2 교황의 보수성향을 견제하며 교회를 ‘모든 사람들의 교회’로 만들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사실 나도 혼동이 오는 느낌도 들지만 사실 나는 희망적이다. 무언가 변하긴 해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Vatican 2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불만을 품고 떠나거나 예전의 가톨릭을 고집하던 사람들은 아마도 지금 돌아가는 ‘사태’에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들 중에는 극단적인 신자들도 많아서 그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는 교회 때문에 현재의 모든 세속적인 문제가 야기되었다고 하기까지 한다. 과연 그럴까? 세속화가 가속되는 것은 사실 현재 교황이 시사하는 대로 ‘고독한 현세인 들을 사랑으로 품지’ 못한 결과는 아닐는지?

교리주일, 인천 상륙 1950

¶  Catechist, catechesis, catechistic, catechistical, catechistically, catechize, catechumen, catechetic, catechetical hew..

 가톨릭 교회의 매력 중에는 아주 풍부한 alphabet soup 같은 각종 용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이 alphabet soup은 라틴어에 근거를 두고 있어서 라틴어를 조금 이해하거나 좋아하면 이것도 매력 중에 하나다. 다만 조금 다른 종교보다 더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문제일 수는 있다. 이 라틴어는 영어권에서 보면 동양권에서 한자를 쓰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 용어나 단어들은 조금 괴상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모두 긴 역사를 자랑하는 그득한 내용이 담긴 단어들이라 그 옛날 한국에서 영어공부를 할 때, WORD POWER를 공부하던 때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영어의 어원인 라틴어와 그리스어들이 그 책에 그득했고 그것으로 단어를 배운 것이 ‘영원히’ 나의 머리에 남았고, 모르는 영어 단어를 보면 곧 바로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천주교 ‘영어’를 만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모조리 라틴어였다. 그것들이 이곳의 성당에서 영어처럼 쓰이는 것이다.

오늘은 Catechetical Sunday였다. 이 단어도 처음에 정말 괴상하게 느껴졌다. 발음도 그렇지만, 그것과 비슷한, 파생어는 수 없이 많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단 한가지 의미 ‘영세예비자 교리공부’ 에 대한 단어들이란 것만 알면 끝난다. 교리공부라고 했지만 이것은 ‘교실에서 말로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 매년 이 ‘교리반 주일’이 있었지만 별로 관심이 없이 지났는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우리가 한국본당에서 교리반 봉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본당은 거의 ‘봉사자’들이 교리반을 나누어 가르치는데 한국본당은 올해부터는 수녀님이 가르치신다. 그러니까 올해의 영세예비자들은 ‘행운아’들인 것이다. 열명 안팎의 알맞은 인원이라서 토론하기도 좋고, 모두들 진지한 태도와 열의를 보인다. 이들이 내년 부활절에는 ‘모두’ 영세식을 통해 하느님의 새 자녀들이 되기만 손꼽아 기다려 본다.

 

¶  아.. 인천..1950

오늘은 9월 15일 일요일, 하지만 1950년 9월 15일 금요일은 그 유명한 육이오 동란 (일명 한국전쟁)의 커다란 전환점이었던 유엔군 총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Gen. Douglas MacArthur] 장군의 걸작품인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그때는 63년 전.. 내가 2살 8개월 되던 때였다.

그 당시 우리식구는 아버지가 납북이 되시고 어머니가 누나와 나, 남매를 데리고 비원 옆 원서동에서 숨을 죽이고 사셨다. 물론 나는 전혀 기억할 수 없는 나이였지만 2년 정도 뒤부터는 그 원서동의 분위기를 또렷이 기억한다. 인천.. 쌍고동이 울어대는 이별의 인천항구.. 박경원씨의 구수하고도 경쾌한 노래를 들으면 인천의 냄새가 그대로 나는 듯하다. 서울 재동학교 5학년 때, 그러니까 1958년에는 5학년 전체가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가기도 했다. 인천 부두와 월미도가 내려다 보이는 만국공원, 그곳에 인천상륙작전 맥아더 장군의 동상 아래서 단체 사진도 찍었다. 1950년대의 인천은 참으로 멀었다. ‘증기, 화통’ 기차를 타고 ‘반나절’을 갔을까..

그래서 그랬을까? 인천을 번개와 같이 점령한 유엔군(사실은 미군과 국군)은 예상을 뒤엎고 서울을 탈환하는데 무려 2주가 결렸다. 그렇게 멀었을까? 빨갱이들이 6.25 발발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 지나치게 서울에서 꾸물대다가 ‘부산 해방’을 놓쳤다는 해석이 있는데, 이것과 맞먹는 유엔군의 실수는 그렇게 느린 서울 탈환이 아니었을까? 서울탈환, 그러니까 구이팔, 9.28 수복이 되던 때까지 낙동강 전선에서 독 안의 쥐가 된 빨갱이들은 여유 있게 ‘양민학살과 38선 이북으로 도주’를 했을 것이다.

순전히 결과론이지만 맥아더 장군의 ‘오만과 아집’이 조금 덜 했더라면, 남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었더라면, 중공군의 개입을 미리 알아차리고 대비했을 것이고 흥남철수1.4 후퇴 같은 것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 후에도 미국이 조금 더 ‘모험’을 했더라면 어떠했을까? 만주를 폭격하거나 원자탄으로 위협을 하는 맥아더의 구상이 그렇게 무모했을까?

그때 통일이 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만고 한민족 만고의 1급 역적, 원흉 김일성 일당을 처단 못한 그것이 이후 한반도, 한민족 비극의 씨앗임을 어찌 부정할 수 있는가? 악의 씨는 그대로 남아 민족반역자 3대, 그 중에 마지막 인간은 새끼돼지 같은 젖먹이, 현대 역사 박물관 전시물 제1호가 될 만한 ‘북조선 김씨 왕조‘를 유지하며 장난감 핵무기로 장난을 하고 있으니..

 

 inchon-1
인천으로 상륙하는 미국 해병대, 1950년 9월 15일

Voyager 1, Pale Blue Dot, 1977

NASA/JPL Voyager 1
NASA/JPL Voyager 1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그리고 갈 것이 갔다. 영원히.. 1977년 9월 5일 발사 된 미국의 무인 우주 탐색선 Voyager 1.. 작년부터 이 ‘자동차 크기의 물체’에 대한 뉴스가 가끔 나오곤 했지만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오늘 뉴스는 조금 다르다. 그 전까지의 뉴스는 ‘서서히’ 태양계를 떠나는 과정과 예측이었지만 오늘 것은 ‘공식적’으로 완전히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36년이 걸렸다. 36년 만에 ‘우리 태양의 영향권, 태양이 숨을 쉬는 heliosphere라고 불리는 태양권’을 떠나, 사고만 없다면 무한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 ‘역사적 사건’을 보며, 그 모든 ‘과학적, 기술적 잔소리, 자세함’을 떠나서 나에게 다가오는 느낌 중의 압권壓卷은 두 개로 볼 수 있다. 36년 전, 그러니까 조지아 출신 Jimmy Carter와 박정희가 대통령1이었던 천-구백-칠십-칠년, 1977년의 추억이 그 하나고 조금은 비약적이지만 허공과도 같은 망망대해 무한한 우주 자체인 하느님이 그것 이다. 분명히 인간이 만든 물체가 태양계를 ‘거의’2 완전히 떠나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Life-Off, Voyager 1, 9/1977
Life-Off, Voyager 1, 9/1977

이 ‘인간이 만든 물체’는 과연 어떤 것인가? 무게가 1600 파운드, 아마도 작은 차 정도의 무게가 아닐까? 크기는 7.5 ft x 12 ft x 66 ft 정도이다. 그 속에는 1977년 당시 최첨단의 기술로 만든 기재들(거의가 sensors들)로 가득 찼고 비록 요새 기준으로 보면 ‘거북이’속도3지만 지구와 통신을 유지한다.

이 물체의 속도는 시속 3만 8천 마일, 현재의 지구로부터의 거리는 120억 마일 정도다. 이런 시속 수만 마일이나 거리 백억 마일 같은 것은 사실 우리에게 실감을 주기에 부족하지만, 우주의 ‘미친 듯이 거대함‘을 조금이라도 시사하기에는 족하다. 현재의 이 물체의 지구로부터의 거리는 빛이나 전파가 도달하는 데에도 거의 16시간이 걸리고, 현재의 속도로 계속 ‘허공’을 뚫고 나르면 4만 년 뒤에나 1.6광년 거리의 ‘첫 별4 ‘을 만난다고 한다.

1977년 9월 출발 후 몇 년 후인 1979년에는 첫 번째 목표 목성(Jupiter)를 근접 탐색을 했고, 1980년 11월에는 다음 목표 토성(Saturn)을 근접 탐색을 해서 아주 커다란 수확을 얻었다. 이때 얻었던 근접 촬영 사진들은 정말 감동적인 것이었다. 10년 뒤인 1990년에는 ‘태양계 가족사진’을 찍어서 보냈는데, 여기에는 그 유명한 ‘희미한 푸른 깨알 점, Pale Blue Dot‘ 그러니까 우리의 파란 지구가 그곳에 있었는데, 이 푸른 깨알 같은 작은 점은 천문학자 칼 세이건, Carl Sagan이 ‘정치적’인 각도에서 ‘인류의 영구한 평화’를 호소하는 매체가 되기도 했다. 사실 이 작은 푸른 점을 보면, 누구나 마음이 겸허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작은 점 ‘표면’ 에서 수십억의 인류가 때로는 ‘아귀다툼’을 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 쉽게 그려지지 않는 것이다.

 

 
Carl SaganThe Pale Blue Dot

 

그 동안은 주로 태양권 내의 solar wind에 관련된 자료를 탐색해 왔고, 출발 후 몇 년 후 1979년에는 첫 번째 목표 목성(Jupiter)를 근접 탐색을 했고, 1980년 11월에는 다음 목표 토성(Saturn)을 근접 탐색을 해서 아주 커다란 수확을 얻었다. 이때 얻었던 근접 촬영 사진들은 정말 감동적인 것이었다. 10년 뒤인 1990년에는 ‘태양계 가족사진‘을 찍어서 보냈는데, 여기에는 그 유명한 ‘희미한 푸른 깨알 점, Pale Blue Dot‘ 그러니까 우리의 파란 지구가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부터는 태양의 영향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어서 무엇을 감지할지는 미지수이다. 또한 36년의 세월 뒤에 기기들이 하나 둘씩 기능을 정지하고 있어서 언제까지 탐색 자료가 송신될 지도 의문이고 2015년 경에는 data recorder기능이 정지가 되고, 궁극적으로 2025년 이후에는 전력이 소진되어서 탐색기능과 조종기능이 없어지고 완전히 ‘죽은 채 나르는’ 상태가 될 것이다.

 Voyager 1 태양계의 끝을 통과하는 Voyager 1

 

Voyager 1이 발사된 때는 정확하게 1977년 9월 5일이었다. 36년 전이다. 그때 나는 West Virginia에서 학교를 마치고 다음 학교인 Ohio State (University)에서 1978년 1월에 시작되는 graduate program 을 앞두고 ‘여름방학의 고향’인 시카고 서(충일)형의 아파트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70년대의 추억이 아롱진 시카고, 그것도 서충일 형의 Broadway에 있던 그 아파트.. 그곳은 즐거움도 있었지만 1977년 9월의 시카고 가을은 나에게 ‘어두운 밤‘이었던 시간이 많았다. 어두운 밤이라면, 실로 외롭고, 괴로운 시간들, 희망이 안 보이는 그런 시간이고, 나는 실로 그 모든 것을 그곳에서 경험하였다.

하지만 그 때는 30살도 채 되지 않았던 ‘자유로운’ 총각시절.. 상상할 여유도 있었던 시절이기도 했다. Voyager 1이 어두운 밤의 허공을 나르는 동안 나의 반생이 지나갔다. 사랑하던 어머님도 가고, 대신 반려자를 만나고, 자식들도 세상에 나왔고, Voyager 1이 태양계와 작별을 할 즈음, 나는 인생과 삶의 목적이나 의미도 조금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이 ‘물체’는 어두운 허공으로 사라지고, 나는 ‘저 세상의 허공’을 향하여 진군을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갈 허공은 ‘깜깜한 밤’의 허공이 아니고 ‘사랑의 숨결이 전 공간에 꽉 찬 하느님의 공간5‘이 될 것이다.

 

My 3 favorite oldies of ’77

 

1977 oldies, Torn Between Two LoversMary MacGregor

 

 

I’d Really Love to See You TonightEngland Dan & John Ford Coley 

 

Year of the CatAl Stewart

 

  1. 이 두 대통령은 악연이 있었는지 상당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지아 ‘무지랭이’,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진했던 카터가 서울을 방문 했을 때 ‘노전역장’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정치학 101 기초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2. 태양계 크기의 정의에 따라서 아직도 떠나지 않았다고 하는 학설도 유력하다.
  3. 그 옛날에 즐겨 썼던 PC 용 Hayes modem의 1200 baud rate, 기억을 하는지..
  4. Gliese 445, Camelopardalis성단의 별
  5. Dr. Eben AlexanderProof of Heaven, 저자가 몸소 체험한 near death experience에서의 물리적, 신앙적 체험에서..

Nine Eleven의 ‘썩은’ 유산들

오늘아침에 일어나서 모처럼 network TV morning show를 잠깐 보다가 오늘이 9월11일, nine-eleven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2001년, 나인 일레븐 에서 12년이 흐른 바로 ‘그’ 나인 일레븐.. 기분이 아주 이상했다. 어떻게 올해 나는 ‘철저히’ 이것을 잊고 있었을까? 내가 나 자신에 놀란 것이다. 저녁 TV 뉴스를 보니 이곳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인가..별로 ‘감동적이거나 감정적’인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Syria 문제로 또 다른 전쟁행위의 가능성을 알기에 그런가? 솔직히 12년 전부터 시작된 ‘빠가, 조지 부시의 미친 보복 전쟁들’ 이 지겹게 느껴지는 마당에 또 ‘쳐들어’ 가겠다니.. 이번에는 ‘병신, 바락 후세인 오바마’의 차례인가? 왜 세상이 이렇게도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는 것일까? 청명한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Twin Tower의 까만 연기를 보며 ‘인간이 아님을 자랑으로 아는’ 광신교 이슬람의 극단성과 ‘너무나 명백한 악의 존재’를 느꼈다. 그 ‘미친 놈’들이 아마도 antichrist정도의 purest evil이 아닐까.. 극단주의와 상대주의가 맞물리고 꼬이던 21세기의 벽두에..

빠가 부시는 측근의 ‘늙은 전쟁광과 그의 부관’들에1 의해 놀아났지만, 솔직히 말해서 빠가 부시 자신은 머리 속이 비교적 ‘간단한’ 인물이어서 예측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현재의 병신 바락 후세인 오바마란 인물은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고, 그의 ‘뒤에 숨은 안건’은 예측하기가 힘든 정말 겁나는 인물이다.

혼돈과 파괴의 2000년대의 과정에서 이 인물의 급부상을 보며 나인 일레븐 같은 대 참사가 주는 극단적인 여파를 생각한다. 한편의 극단에서 빠가 부시에게 던덜머리가 난 ‘거의 모든’ 사람들은 ‘빠가 부시만 아니면 OK‘라는 지친 심정으로2 ‘병신 바락 후세인 오바마’란 미지의 인물을 택했지만, 이것은 커다란 ‘도박’이었음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빠가 조지 부시와 그를 사주하던 ‘전범’들이 나갔고 그 자리에는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인간’들이 들어와 4년 이상 그들의 정체를 조금씩 들어내고 있지만, 그들이 역사적으로 미국이란 나라에 남기고 갈 ‘무서운 유산’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다. 쉽게 예측이 가능한 것 중에는 ‘극단적 도덕상대주의 독재체제‘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는 사실이다. 바락 후세인 오바마가 그것을 의도적으로 밀어 부쳤는지, 아니면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는지는 시간이 흐른 후에 역사가들이 밝히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시도하고 행했던 여러 정책들 중3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도 있다는 것과 선거를 위한 ‘술책’으로 그는 자신이 ‘독실한 크리스천’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100% 새빨간 거짓말임을 누구나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바락 후세인 오바마 정체 중에 들어난 몇 가지일 뿐이다. 3년 뒤에 그는 없어질 것이지만, 그가 남기고 갈 ‘썩은 유산’은 두고 두고 씻어내어도 없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1. 미국 역사상 최악의 정치인 Dick CheneyDonald Rumsfeld, Paul Wolfowitz 같은 neo-conservatives
  2. 이것은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로, 구 정치인들에게 지친 국민들이 노무현같은 ‘알 수 없는’ 인물을 ‘감정적’으로 대통령으로 뽑은 기가 막힌 사실을 상기하면 된다.
  3. 지나친 다원주의, 자연법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정책들, 모든 것은 공평하다라는 허구 신봉’ 등

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28

니즈맞춤혁신논리 : Seek Norm & Get-to-Norm

2013.09.11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혁신에 대한 성공률은 아이디어 발상에서부터 연구개발(R&D)과 실용화(implementation)단계를 거쳐 상용화(commercialization)된 후 성공하는 경우는 겨우 4%선이라고 Booz Allen & Hamilton은 전한다. 그리고 상용화된 혁신의 평균성공률은 17%라는 혁신성공 조사보고서도 있다. 그리고 경영컨설팅업계에는 혁신과 관련하여 벼라 별 다양한 주의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는 게 현실인데 이는 아직 혁신에 관한 이론다운 이론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다이나믹 매니지먼트(dynamic management)는 어떤 경우든 고객이 원하는 제품/서비스를 기업이 제공하여 고객으로 하여금 돈을 내게끔 하지 않으면 결코 돈을 벌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에서부터 시작한다. 기업이 제공하는 제품/서비스에 대해 고객이 언제 왜 구매의향 또는 지불의향(willingness to purchase or willingness to pay: WTP)을 갖는가에 대한 구명(究明)부터 시작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고객은 어떨 때 지불의향을 갖게 될까? 고객이 최소한 이것만은 우선적으로 꼭 충족되길 바라는 기본니즈속성(basic needs attributes: BNA)이 100% 충족되지 않으면 결코 돈을 지불할 의향을 갖질 않기 때문에 BNA가 우선 100%로 충족된 상태에서 그것이 충족되면 될수록 만족이 점점 더 커지는 어필니즈속성(appealing needs attributes: ANA)이 충족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지불의향을 갖게 된다. 그리고 기본속성(BNA)도 100% 어필속성(ANA)도 100%로 충족되면 고객은 감동을 느끼며 최대지불의향수준을 내보이게 되는데 이 최대지불의향수준을 내보이는 제품/서비스를 최소비용으로 제공하면 최대로 돈을 벌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최대지불의향수준을 내보이는 제품/서비스를 최소비용으로 제공하는 사업패러다임(business paradigm: 현시니즈와 확장가치사슬과의 연결 메커니즘을 말하는데 그냥 사업모델정 도로 이해해도 무방함)은 이상적인 모범답안(Norm as Ideal)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고객이 최대지불의향수준을 내보일 어필속성과 기본속성의 집합을 찾고(Seek Norm), 이를 충족시켜 줄 제품/서비스를 니즈맞춤혁신을 통해 충족시켜주기만(Get-to-Norm) 하면, 바로 이상적인 모범답안이 얻어지면서 기업은 최대로 돈을 벌게 된다.

그런데 어필속성의 특성에 따라서 지불의향의 탄력성은 다르다. 예컨대 어필속성의 미소한 차이에도 지불의향수준이 대단히 탄력적으로 반응하는 경우(명품이나 고기술 니즈)가 있는가 하면 대단히 둔감하게 반응하는 경우(생필품 니즈)도 있다. 어필속성의 미소한 차이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주로 핵심기술이나 긴요한 기술과 관련한 경우인데 이런 분야의 글로벌 틈새(niche)시장에서 니즈맞춤혁신을 통해 Seek Norm & Get-to-Norm으로 이상적인 모범답안을 선취(先取)하여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기업이 바로 히든 챔피언(hidden champion)이다.

 히든 챔피언이 주목 받게 된 배경은 이렇다. 2008 8월 월가붕괴(Wall Street meltdown) 후 5년이 지난 2013년의 글로벌 촌은 참으로 많은 구조변화를 겪어온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많은 변화 중에서 특히 국별 수출규모의 서열변화를 갈음해 보자.

Luddites, 러다이트의 교훈

섬유공장 기계를 부수는 Luddites
섬유공장 기계를 부수는 Luddites, photo credit: wikimedia

Luddites..  textile workers in early 19th century England. 그들은 누구였나? 한글로는 또 어떻게 쓰는가 Naver 사전은 이것을 러다이트 로 표기하고 있다. 이들은 산업혁명의 역사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Luddite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이들은 산업혁명이 최고조에 달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산업화, 기계화 되기 전 방직공장(섬유공장)의 artisan(장인)들이었는데, 과장된 표현으로 ‘하루아침’에 기계에 밀려서 직업과 직장을 잃게 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산업혁명의 ‘예기치 않았던’ 첫 희생자들이라고나 할까? 장인들.. 지극히 인간적인 손끝의 힘으로 그들은 섬유제품을 ‘뽑아내고’ 있었던 자랑스러운 집단이었지만, 효율성이 50배에서 무려 1000배까지 늘어나고 제품의 질에도 큰 손색이 없었기에 ‘공장장, 자본주’들은 그들을 가차없이 몰아냈고 결과로 그들을 길바닥으로 몰아낸 것이다. 그것이 정확히 200년 전에 시작 되었던 일이다.

 그때 길바닥으로 나 앉게 된 그들 중에 택한 방법은 극단적인 것으로, ‘무력행사’로 일관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밤 몰래 주로 섬유공장을 쳐들어가서 기계를 부수곤 나아가 공장을 부수기도 했다. 나중에는 섬유공장만이 아니고 기계화된 농기계 공장이 표적이 되었고, 이것은 하나의 ‘노동자 운동권’을 형성해서 정치성까지 보이기도 했지만 영국은 정부차원에서 그들을 법으로 가차없이 처단하였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에게 그들은 ‘전설 속의 로빈 후드’를 연상하게 하는 ‘영웅’으로 남았다. 하지만 다른 쪽으로 그들은 역사에서 ‘혁신을 거부한 보수, 패배자’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고, 이때 이후 luddite ‘족’은 ‘기술적인 진보, 변화 등을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부류를 뜻하게 되었다.

 이런 통상적이고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사실 더 자세히 알고 보면 그렇게 정확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위에 나온 이야기는 ‘설화’에 가깝다는 뜻으로 사람들이 믿고 싶은 그런 식의 이야기로 변한 것이다. 그 당시의 자세한 역사는 Smithsonian 지에 자세히 실렸는데Luddite들이 기계를 부수고 공장을 부순 것은 기계에 대한 원망이 아니고 그 당시 그 노동자들의 ‘비참한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는 프랑스에서 출발한 나폴레옹 전쟁으로 영국의 경제상태는 나빴고 특히 노동자 계급은 배가 고플 정도로 가난했는데, 그들은 참다 못해서 노동임금의 인상과 더 많은 일자리를 요구하는 항의 데모를 했는데 정부는 그것을 과도하게 진압을 했고, 분격한 그들은 자기들의 일자리였던, 부의 상징이었던 공장과 기계를 부순 것이다. 이런 군중심리는 전염성이 강해서 다른 곳으로 퍼지게 되고 정부는 ‘기계를 파괴하면 사형’이란 극단 법안을 만들게까지 되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항의한 것은 기계나 기술혁명이 아니고 그것으로 말미암은 ‘노동자 멸시, 차별’이었을 것이고, 기술자체를 그들이 혐오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Luddite에 대한 역사나 ‘전설’의 여부를 떠나서, 이들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나 교훈이 있을까? 노동자의 처우문제를 떠나서, 숨차게 변하는 문명, 그 중에서도 특히 digital information technology 분야를 무시하거나 등한시하며 살 수 있을까? 특히 인간을 ‘근육 노동’에서 해방시켰던 것이 19세기 초 산업혁명이었다면, 우리를 ‘두뇌 노동’에서 해방시키려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거의 매일 무의식 중에’ 쓰고 있는 PC, Internet, mobile device같은 digital information technology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무서운 속도로 변하는 듯 느껴지는’ technology는 과연 우리 인간들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것인가? 기계혁명이었던 산업혁명의 역사와 현재의 ‘디지털 혁명’과 유사한 것일까?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사회는 어떤 영향을 주고 주게 될 것인가? 이런 것들은 예측하기 쉽지 않지만 그래도 ‘부정적’인 ‘생각지도 못했던 결과’ 를 미리 알아서 예방을 하면 좋지 않을까?

최신, 최근 luddite 중에는 ‘컴맹’ 다음으로 ‘인터넷의 레이다’에 보이지 않는 부류가 있다. 처음 인터넷이 보편화1 되기 시작 시작 되면서 사람들은 desktop pc 컴퓨터를 써야만 인터넷을 쓸 수가 있었다. 그러니 pc같은 컴퓨터를 못 쓰던 사람들이 이런 인터넷 ‘혜택’에서 소외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pc 컴퓨터의 ‘전체 기능’은 다 필요하지는 않지만 인터넷만 쓰려는 부류들이 생겼다. 그것이 지금은 mobile device, 특히 mobile phone을 쓰게 되면서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연결’이 되고 있어서 이제는 전통적인 ‘컴퓨터’의 의미는 희미해 지고 있다.

이것의 의미는 간단하다. 한마디로 인터넷-privacy가 점점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거의 24시간 손에 잡히는 ‘핸드폰’이 무의식 중에 ‘세계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음은 아차 하면 자기의 모든 것이 들어나는 가능성이 항상 있는 것이다. 게다가 국가, 사회 안보를 의식한 듯 정부차원으로 거의 모든 ‘인터넷 활동’이 감시2되게 되어서 이제는 인터넷에서 숨어살기가 거의 불가능해 졌다. 이것이 21세기 초의 ‘불편한’ 새로운 현실, new normal이 되었다.

이런 ‘다른 얼굴의 디지털혁명’을 러다이트luddite의 역사적 교훈에 비추어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까? 우선 분명한 것은 이것을 예전의 luddite들 처럼 무조건 피하거나, 혐오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어떤 알고 지내는 수녀님을 나의 blog에서 ‘찰나’의 정도로 언급을 했는데, 놀랍게도 그것을 아시고 ‘간곡하게’ 이름을 지워달라고 하셔서 한동안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google-bot에 의해서 빠르게도 그 수녀님의 이름이 indexing이 되었던 모양이고 그것을 본 다른 ‘수녀님’이 귀 띰을 했던지.. 이 ‘사건’은 서로에게 불편한 화제였고 기분도 좋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개인의 privacy’와 나의 ‘표현의 자유’가 정면으로 부딪치는 케이스인 것이다. 물론 나는 수녀님의 부탁을 존중하고 ‘이름’을 지웠지만, 두고두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privacy가 그렇게 중요하면 당장 전화나 email에 더 신경을 쓰셔야 할 것이 아닐까? 모든 전화 통화기록과 email, 특히 gmail이 ‘공공연하게’ monitoring이 된다는 사실을 아실까?

이런 것을 보면서, 생각을 한다.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언제나 ‘중간 정도’에 있다는 진리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 같아라..는 말처럼.. 이것이 명쾌한 “명절 같은 해답”인 것이다. 그렇게 ‘무조건’ 피하지도 말고, 멋지게 보이겠다고 ‘잘 알지도 못하며’ 앞서가며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follow the crowd” 란 교훈을 잊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1. 주로 WWW:world wide web, email로 시작 된
  2. 이제는 거의 모든 통신수단이 인터넷으로 연결이 되어서 전화(landline, cellular), email, websites등이 대상이 되었다.

구상具常 신앙의 시詩 8

具 常(1919~2004) 시인
具 常(1919~2004) 시인

최근에 발견한 가톨릭 시인 구상 님의 주옥 같은 시들이 있다. 내가 본 것은 구상 문학관의 웹사이트였는데, 이것들이 copyright restriction이 있는지 확실치 않지만, 염치불구하고 신앙과 믿음의 시 8편을 옮겼다. 서정적인 윤동주 님의 세계로 부터 영원을 노래하는 신앙의 세계로 와서 느끼는 구상 님의 시 여덟 편은 아름답기만 하다.

 시만이 갖는 특징 중에 시 속의 같은 낱말과 구절이 함께 어울려 각자에게 다른 느낌과 상상의 여지를 준다는 사실을 나는 좋아한다. 이런 시의 특성을 무시하고 학교에서 국어시간에 배웠던 시들은 시험을 위한 정답 찾기에 급급했었던 기억인데, 시를 가지고 시험을 본다는 자체가 위험한 발상이 아니었을까…

 

 

은총에 눈을 뜨니

 

이제사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이 뜬다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그렇듯 안타까움과 슬픔이던

나고 죽고 그 덧없음이

모두가 영원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제야 하늘이 새와 꽃만을

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으로 기르고 살리심을

눈물로써 감사하노라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뜨고

저녁이면 해가 서쪽으로 지고

때를 넘기면 배가 고프기는

매한가지지만

 

출구가 없던 나의 의식 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리며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소중스럽고

모든 것이 아름답다

 

천주교 교리반 봉사를 시작하며 나를 구상 신앙의 시에 눈을 뜨게 한 ‘고백’이 바로 이 시였다. 이렇게 아름답고 솔직한 시가 있었던가? 이런 ‘눈을 뜨는’ 경험이나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오랜 세월 살면서 거의 나는 못 느꼈다. 들으면 공감은 갔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세상이나 인생은 자기가 생각하기 나름이라지만 나는 거의 지루하고 힘들고 심지어 지옥으로 만들고 살았던 때도 기억을 한다. 하지만 나도 이제는 ‘두이레 강아지만큼’ 눈을 떠가기 시작 함을 느낀다. 이것이 인생인가.. 이렇게 살고, 가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가는 곳이 그곳이었던가..

 

 

오늘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 부터가 아니라

오늘로서 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Here and Now.. Today while the blossoms cling to.. 이런 귀와 눈에 익은 멋진 구절들을 생각하게 하는 시.. 시공간에 억매인 유한한 곳에서 우리는 영원의 한 점을 살고 가는 존재, 거기서 큰 의미를 찾는 자체가 행복이고 은총이 아닐까..

나는 영원의 미립자도 못한 짧은 시간을 이곳 ‘이승’ 에서 ‘하루 하루’ 보냈지만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의 시간, 무한대의 공간임을 몇 초라도 느끼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보람이 있을까?

 

 

인류의 맹점에서

 

시방 세계는 짙은 어둠에 덮여 있다

그 칠흙 속 지구의 이곳 저곳에서는

구급을 호소하는 비상경보가 들려 온다

 

온 세상이 문명의 이기(利器)로 차 있고

자유에 취한 사상들이 서로 다투어

매미와 개구리들처럼 요란을 떨지만

세계는 마치 나침반이 고장 난 배처럼

중심도 방향도 잃고 흔들리고 있다

 

한편 이 속에서도 태평을 누린 달까?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무리들이

사기와 도박과 승부와 향락에 취해서

이 전율할 밤을 한껏 탐닉하고 있다.

 

내가 이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저들에게 새 십계명(十誡命)은 무엇일까?

아니, 새 것이 있을 리가 없고

바로 그 십계판(十誡版)을 누가 어떻게

던져야 하는가?

 

여기에 이르면 판단 정지!

오직 전능과 무한량한 자비에 맡기고 빌 뿐이다

 

 

‘시방’은 ‘지금’의 고어인가.. 전에 많이 썼던 구수한 말… 인간의 맹점, 약점, 허점, 죄악, 그것도 점점 심각해지는 듯한 느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시인은 고뇌를 한다. 2000년 전이나 1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것은 ‘똑 같은’ 문제였을 것이다.

시대마다 나름대로 황금 송아지가 있었고, 그것을 경고하는 ‘성인’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성인들이 보이지 않는 듯한 비극이 있다. 누가 십계판을 던질 것인가? ‘판단정지!’.. 어두운 밤을 의식하며 그저 ‘맡기고 싶은’ 시인의 고뇌를 본다.

 

 

기도

 

저들은 저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들도 이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눈먼 싸움에서

우리를 건져 주소서.

 

두 이레 강아지 눈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

 

St. AugustineJUST WAR 논리.. 현대판 empire, only superpower가 되어버린 ‘기독교의 나라 미국’, 어찌도 그렇게 cruise missile을 좋아하게 되었는가?

인간의 존엄성을 먼저 생각하면 just war는 그렇게 쉽게 거론되지 않을 듯 한데.. 기본적 이성적인 믿음이 없는 정치와 정치인들을 어떻게 vote out을 할 것인가?

 

 

그 분이 홀로서 가듯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저 2천년 전 로마의 지배 아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수모를 받으며

그분이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의 무력에 지치고

번번이 패배의 쓴잔을 마시더라도

백성들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정의는 마침내 이기고 영원한 것이요,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요,

우리의 바람과 사랑이 헛되지 않음을 믿고서

 

아무런 영웅적 기색도 없이

아니, 볼꼴 없고 병신스런 모습을 하고

그분이 부활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고독과 적막과 어두운 밤, 우리는 혼자다. 그 ‘주님’도 갈 때는 철저히 버림받고, 배반되고, 조롱 받으며 혼자서, 혼자서 갔음을 시인은 아마도 자신의 ‘홀로 있음’에 비교하며 위로를 받았을까?

궁극적인 심판과 결과는 정의의 이김이요, 모든 것이 고통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음을 다시금 되새기는 시인.. 현재는 병신 바보같이 느껴져도 묵묵히 어둠의 길을 걸어간다.

 

 

오늘서부터 영원을

 

오늘도 친구의 부음을 받았다.

모두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차피 가는구나.

 

나도 머지않지 싶다.

 

그런데 죽음이 이리 불안한 것은

그 죽기까지의 고통이 무서워설까?

하다면 안락사(安樂死)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도 두려운 것은

죽은 뒤가 문제로다.

저 세상 길흉이 문제로다.

 

이렇듯 내세를 떠올리면

오늘의 나의 삶은

너무나 잘못되어 있다.

 

내세를 진정 걱정한다면

오늘서부터 내세를

아니 영원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암만 내세와 신앙으로 무장을 해도 결국 우리는 한번 거쳐갈 그 끝의 단계를 피하려는 본능은 피할 수 없다. 어떻게 가는지, 고통을 의식하지 않을 수도 없다.

모든 것이 미지의 세계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것이 삶의 연장이라고 생각한다면, 오늘부터 저승의 삶을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시인도 고민하고, 나도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고요

 

평일 한낮

명동 성당 안에는

고요만이 있었다.

 

온 세상이

일체 멈춤과 같은

침묵과 정적속에서

제단 위에 드리운 성체등이

이 역시 고요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수라장(修羅場)을 방불케 하는

문 밖 거리의 인파와 소음은

마치 딴 세상 정경인 듯

오직 죽음과 같은 고요 속에

고요가 깃들어 있었다.

 

그 고요 속에 나 또한

고요히 잠겼노라니

그 고요가 고요히 속삭였다.

 

이제 너의 참 마음을 열어보라고!

 

그러나 나는 말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천주교회 성당, 특히 안은 개신교회의 분위기와 어쩌면 그렇게도 다를까? 고요와 엄숙함, 그것이 바로 성스러움이라는 것이다. 성당 특유의 제단과 성체등 빛, 그 위에서 실제로 성체의 변화까지 느끼기라도 하면 제아무리 성당의 바깥이 시끄러울지라도 상관이 없을 듯.. 이런 고요함을 성당 외에 어느 곳에서 느낄 수 있을까? 구상 시인은 고요를 ‘이용’해서 마음을 열어보려 노력하지만 눈물만 흘리고 있다.

 

 

노경(老境)

 

여기는 결코 버려진 땅이 아니다.

 

영원의 동산에다 꽃 피울

신령한 새싹을 가꾸는 새 밭이다.

 

젊어서는 보다 육신을 부려왔지만

이제는 보다 정신의 힘을 써야 하고

아울러 잠자던 영혼을 일깨워

형이상(形而上)의 것에 눈을 떠야 한다.

 

무엇보다도 고독의 망령(亡靈)에 사로잡히거나

근심과 걱정을 능사(能事)로 알지 말자.

 

고독과 불안은 새로운 차원의

탄생을 재촉하는 은혜이어니

육신의 노쇠와 기력의 부족을

도리어 정신의 기폭제(起爆劑)로 삼아

삶의 진정한 쇄신에 나아가자.

 

관능적(官能的) 즐거움이 줄어들수록

인생과 자신의 모습은 또렷해지느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더욱 불태워

저 영원의 소리에 귀기울이자.

 

이제 초목(草木)의 잎새나 꽃처럼

계절마다 피고 스러지던

무상(無常)한 꿈에서 깨어나

 

죽음을 넘어 피안(彼岸)에다 피울

찬란하고도 불멸하는 꿈을 껴안고

백금(白金)같이 빛나는 노년(老年)을 살자.

 

인생의 황혼기를 맞는 심경 그 자체가 신앙이나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젊은 시절에 비해서 나아지는 것은 아마도 자연적으로 느끼게 되는 신앙심일 것이다. 죽음에 가까이 옴을 느끼며 그런 심정이 되지 않는 것이 그렇게 쉬울까?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안 보이지만 더 큰 의미가 있는 것들.. 시인은 영혼과 형이상의 것들에 눈을 떠야 한다고 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을 생각하면 확실히 이것은 ‘초능력’이다. 그래서 세속문화와는 반대로 여기서는 인생의 황혼기가 더 멋져 보인다.

 

 

나자렛 예수

 

나자렛 예수! 당신은 과연 어떤 분인가?

마구간 구유에서 태어나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기구망측한 운명의 소유자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상놈들과 창녀들과 부역자들과 원수로 여기는 딴 고장치 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시기를 즐긴 당신,

가난한 사람들에게 굶주린 사람들에게 우는 사람들에게 의로운 일을 하다 미움을 사고 욕을 먹고, 쫓기고 누명을 쓰는 사람들에게 ‘행복한 사람은 바로 당신들’ 이라고 ‘하느님 나라는 바로 당신들 차지’라고 엄청남 소리를 하신 당신,

소경을 보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문둥이를 말짱히 낫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도

스스로의 말대로 온 세상의 미움을 사고 욕을 먹고, 쫓기다가 마침내 반역자란 누명을 쓰고 볼 꼴 없이 죽어 간 철저한 실패자,

내가 탯줄에서 떨어지자 맺어져 나의 삶의 바탕이 되고, 길이 되고, 때로는 멀리 하고 싶고 귀찮게 여겨지고, 때로는 좌절과 절망까지를 안겨주고, 때로는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생판 낯설어 보이는 당신, 당신의 참모습은 과연 어떤 것인가?

당신은 사상가가 아니었다. 당신은 도덕가가 아니었다. 당신은 현세의 경륜가가 아니었다. 아니, 당신은 종교의 창시자도 아니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떤 지식을 가르치지 않았다. 당신은 어떤 규범을 가르치지 않았다. 당신은 어떤 사회혁신운동을 일으키지 않았다. 또한 당신은 어떤 해탈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한편 당신은 어느 누구의 과거 공적이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았고 당신은 어느 누구의 과거 죄악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았고 당신은 실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생각이나 말을 뒤엎고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고 고통 받는 인류의 해방을 선포하고

다만,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 시요, 그지없는 사랑 그 자체이시니 우리는 어린애처럼 그 품에 들어서 우리도 아버지가 하시듯 서로를 용서하며 우리도 아버지가 하시듯 다함 없이 사랑할 때

우리의 삶에 영원한 행복이 깃들이고 그것이 곧 ‘하느님의 나라’라고 가르치고 그 사랑의 진실을 목숨 바쳐 실천하고 그 사랑의 불멸을 부활로써 증거 하였다.

 

구상시인의 처절하고 치열한 ‘예수님 찾기’의 절정인 듯한 서사시.. 이 서사시를 보며 어찌 감동, 전율, 공감, 감사를 안 할 수 있을까? 위에 실었던 8편의 시에 덧붙이게 된 이 걸작은 ‘여기에 불이 있다’ 라는 천주교 예비신자 교리교과서에 실린 것으로 훨씬 이후에 읽게 되었고, 추가하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나에게는 숨겨진 보물이었다. 예비신자들이 이 시를 접하고 어떤 정도의 느낌을 받았을까 생각해 본다.

 

Apologetics, 하느님은 있는가?

들어가며

Apologetics.. 아폴로제틱스..흠.. 이 단어를 보면 연관되어 생각나는 것은 apology 아폴로지.. 가 아닐까? apology 하면 우선 사과, 사죄, 변명, 변론 정도의 뜻이다. 여기의 apologetics는 마지막 것인 변론에 가까운 것으로 거의 99% 이것은 ‘자기 믿음, 신앙의 방어, 변론’을 뜻 한다. 이 blog에서는 내가 현재 믿고 있는 가톨릭, 천주교 신앙에 대한 변론을 말한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개신교에서는 이 말조차 ‘구교, 천주교’ 냄새가 난다고 오래 전에 팽개쳤을 지도1 모른다. 이 ‘변론’을 통해서 나는 내가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된 당대의 다른 apologist 변론가 들을 언급하고 나 나름대로 형성을 하게 된 것 (이것도 사실 지금도, 매일 변화, 발전을 해나가고 있다) 을 남기고자 한다.2

 

가까이 온 죽음과 신앙

처음 이 ‘신앙 변론 분야’에 관심을 가졌을 때는 내가 오랫동안 잃어버리고 살았던 가톨릭 신앙을 되찾고자 시도를 할 때였다. 나의 유일한 등대, 나의 분신이셨던 어머님의 타계와 더불어 나는 죽음이란 것을 인생 처음으로 피부로 느끼며 나의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50이 훨씬 넘은 후에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시작했던 나는 한마디로 철부지였다. ‘죽음’의 ‘죽’자만 보면 나는 외면하고 그런 것은 나의 사전에 없다고 피하고 살았고, 죽음에 관련된 어떤 것, 장례식 같은 것도 나에게는 없었다. 죽음은 한마디로 ‘수백 년 뒤에 있을’, 나에게는 그저 ‘추상 명사‘였다.

 인간의 수명을 생각해보니 기껏해야 70~80세 정도였고 그것은 나에게 불과 20~30년 정도의 여유를 주었지만, 20~30년 정도의 세월은 전에 생각하던 것 보다 ‘훨씬’ 짧다는 것도 50년 이상 살아본 경험에 의해서 쉽게 짐작이 갔다. 나의 20~30년 정도 전의 ‘개인 적 역사’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바로 엊그제 같이 느껴지니, 사실 나의 수명은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음은 암만 죽음의 죽 자를 피하려 해도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진리였다.

한마디로 죽음의 그림자는 나를 덮치기 시작하는 것이고, 아니 이제부터는 내일의 태양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몇 안 되는 가족들도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그렇게 과장된 표현이 아닌 듯 싶었다. 이런 것이 지나친 우려처럼 들렸으면 하고 바라고 살았지만, 이제는 그것, 죽음이 진리이고 사실임을 부정할 도리가 없었다.

 

철학적 실존과 죽음

이제는 죽음을 의도적으로 가까이 보려고 노력을 하고, 그 동안 꽤 보아왔기에3 조금은 그 보이는 모습과 배경도 생각하게 되었다. 천차만별의 모습을 한 죽음의 과정, 여정도 알게 되었고, 남아있던 사람들의 모습과 반응도 보게 되고, 그것을 보는 나 자신도 보게 되었다. 이런 노력을 통해서 나는 조금은 냉정하게 죽음을 대하게 되었고, 무조건 피할 때보다 훨씬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죽음의 제일 큰 명제는 이것이다. 죽음은 과연 그 죽음의 주체에게 모든 것의 끝일까? 그 당시까지 신앙심이 거의 사라진 나에게 대답은 ‘죽음은 모든 것의 끝, 깜깜한 암흑‘이란 것이 대답이었다. 모든 것의 끝.. 모든 것의 끝.. 이 거대한 우주 안에 유일한 존재였던 나, 이경우란 생물, 인간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 그러니까 실존이 허무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이 나를 괴롭고 슬프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고통은 사실 젊었을 적, 대부분 10대에 잠깐 찾아오긴 하지만, 사회란 거대한 보호 막 속에서 자연스레 잊게 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나란 사람의 의미는 무엇이고 내가 왜 실존이 되었다가 허무로 사라지는 것인가? 철학적인 문제일 수도 있지만 과연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이 대답을 주었을까? 모두 ‘말의 장난‘에 지나지 않았었을까?

절대로 철학이 이것에 대답을 주지 못함, 그것이 바로 ‘유한한 인간’의 슬픔일 것이다. 이런 ‘안 보일 수 있는 것에 대한 생각들’을 잊고 살 수도 있겠지만, 중년이 훌쩍 넘었던 나에게 그것은 사치였다. 죽음이 striking distance에 왔음을 알기 때문이다. 결정의 순간은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파스칼의 내기, Pascal’s Wager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신앙적 변론들이 있다. 그 중에서 제일 쉽고 그런대로 수긍이 가는 것으로 Pascal(파스칼)의 Wager 란 것이 있다. 여기서 wager라면 ‘도박이나 내기’ 정도의 뜻이 아닐까? Pascal 하면 누구에게나 친근한 이름일 것이다. 그는 신이 있다 와 없다 중에서 어떤 것이 맞는지 ‘내기’를 한다. 내기에 참가를 안 하면 ‘신은 없다’로 간주가 된다. 만약 내가 ‘신이 있다’를 고르고 그런 믿음으로 살다가, 그것이 틀렸더라도, 그러니까 하느님이 없었더라도.. 아무런 ‘손해’보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는 사실 ‘거룩한’ 삶을 살았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실제로 신이 있었다면? 나는 이긴 것이고 내가 가고 싶었던 천국이 나의 것이다. 내가 신이 없다는 것을 선택했고, 없는 것처럼 일생을 살았고 실제로 하느님이 없었다고 해도 내가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만약, 틀렸다면, 그러니까 하느님이 계셨다면.. 나는 하느님을 안 믿는 ‘죄’를 지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간단히 말해서.. 하느님을 믿는 것이 ‘현명’ 한 것이고, 믿어서 손해를 볼 것이 ‘하나도’ 없다는 논리다. 나도 이런 식의 ‘논리’를 혼자서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렇게 ‘현자와 성인’들이 하느님이 있다는데, 그것 믿어 보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것.. 만약 믿었다가 사실이 아니더라도 사실 손해 보는 것은 극소적이 아닐까 하는 지독히 타산적인 생각을 해 본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 논리는 너무나 ‘타산적’인 것으로, 가슴으로 하느님이 믿어지지 않을 때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 외의 훨씬 더 이성적이고 수긍이 가는 변론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주적 이성으로, Cosmological Reasoning

파스칼의 조금은 타산적인 이유보다도 훨씬 이성적이고 심지어 과학적인 논증이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다. 바로 깜깜한 밤에 찬란히 떠오른 달과 별들로 가득 찬 하늘, 막막한 우주인 것이다. 이 ‘우주적 논증’이 내가 얼마 전까지 ‘사랑’하던 것이었다. 종교적 믿음에 회의가 들면 나는 ‘무조건’ 하늘과 우주를 생각했다. 그러면 십 중 팔구 회의감을 무마할 수 있었다. 우주적 논증은 우주 과학 같은 것과 상관이 없는 사람도 쉽게 이해는 할 수 있다.

이 논증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명백한 ‘공리’로부터 출발한다. ‘원인과 결과’, 모든 현상이나 결과는 분명히 원인 제공이 필요하다는 너무도 명백한 이론인 것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를 생각해 보면 인간이 알 수 있는 크기는 무한대에 가깝다.. 무한대가 아니고 가까운 것은 사실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그 한계를 알 수가 없고, 실증적으로 관념적으로도 알 수가 없다. 언제 시작이 되었는지, 어디까지가 우주의 끝인지 ‘모른다.’

그것이 현대인이 종교처럼 신봉하는 기술적 과학의 끝이다. 그러니까 그 끝을 이어 받아 해답을 주는 것이 종교적 신앙인 것이다. 최첨단 기술과학이 밝힌 것은 우주에 시작이 있었다는 것, Big Bang 이론이 있다. 태초에 ‘꽝!’ 하고 gas가 터지고 그곳에서 현재의 모든 우주의 물질들이 생겨났고 그것들이 움직이는 것이 ‘천문학’이 되었고, 생물이 나오며 생물학이 되었다. 그러면 당연한 의문이 생긴다. 그 ‘태초의 꽝!’ 전에는 무엇이 있었나? 그것은 과학이 아니란다. 과학의 영역 밖이란다.

그리고 우주의 크기까지 계산을 해낸 천문과학자들, 크기가 있으면 그 변두리도 있을 것인데.. 그 변두리 밖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도 과학 영역의 밖이란다. 이런 근본적인 과학의 한계를 알면, 사실 누구나 ‘겸허’해 지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머리는 아직도 멀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모르는 것 투성이’에 대한 ‘명쾌한 대답’이 바로 ‘하느님의 만드신 우주와 피조물인 인간’ 설, 바로 종교인 것이다. 그러니까 현재 실험으로 알려진 기술적 과학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과학적 사실보다 엄청 커다란 진리의 일부가 과학인 것이다. 그 진리가 바로 ‘하느님의 세계’를 말하는 종교 신학이 아닐까? 여기까지 모든 것인 ‘과학적 실험’에서 벗어나지만 완벽한 이론과 이성에 부합되는 것 들이다.

 

역사적인 접근, Historical Signs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는 하느님, 그것도 유대교-기독교적인 생각에서 보는 하느님은 어떻게 설명이 될 수 있을까? 하느님을 말하는 ‘믿음 체계, 종교’는 지구상에 얼마든지 많이 있지 않은가? 그 중에서 왜 나는 그리스도교 적인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가? 왜 그것이 나에게 유일한 하느님에 대한 해답이라고 생각하는가? 왜 불교는 아니고, 왜 일본 신도나 이슬람은 아닌가?

이것은 비교적 길지 않은 인간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는 다름아닌 유대-기독교에서 모두 사용하는 ‘구약성경’을 말한다. 이 구약성경은 신앙적인 bible이지만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서’이기에 그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 시작되는 이것은 현대적 세속적 과학적인 ‘보이는 것’을 찾는 관점으로 보면 ‘설화’에 가깝지만 그 속에서 ‘안 보이는 것’을 찾는 것 또한 의미가 크다.

제일 큰 의미는 바로 하느님의 존재와 ‘우주 창조’에 있는데, 모든 것의 시작인 절대 유일 존재, singularity, 시 공간 이전의 창조의 모든 근원이 하느님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계시 받은 것이라면, 그 절대존재, 야훼라고 불리는 그것이 하느님이 아닐까? 물론 이런 접근 방식은 어느 정도 ‘믿음의 문’을 열고 있어야 이해가 가능함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 ‘마음의 문’이 열릴 수 있는 것도 ‘은총’이라고 했는지 모른다.

 

나가며

기독교에는 ‘믿음은 은총‘ 이라는 말이 있다. 은총이란 하느님이 주시는 ‘공짜의 선물’이란 뜻이다. 이 말은 누구나 받는 선물이란 뜻이지만, 인간 고유의 특성인 ‘자유의지’에 따라서 이 선물을 받고, 안 받고 한다. 애써서 거부만 안 하면 받는 선물이 바로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믿는’ 능력인 것이다.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고 또한 하느님이 주신 ‘이성’이라는 인간의 능력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이성이란 것은 신앙적 차원에 못 미치는 불완전한 것일 수 있다.

위에 나열한 여러 가지의 ‘변론, 이유’들은 개개인 마다 다른 의미로 비쳐지기도 하고 이런 이유가 전부가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믿음이란 것이 ‘이성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서 믿음의 부정이 오히려 비이성적임도 보여주기에, 파스칼의 말 대로 ‘믿어서 손해 보는 것이 없다’는 것만 인정해도 어떤 무신론자에게는 거의 천지개벽 같은 변화를 주지 않을까..

 

  1. 추측에 그들은 주로 신앙간증이란 형식으로 이것을 대신하고 있는지도..
  2. 나의 유일한 희망은 이것이 어떤 한 사람에게라도 ‘이 험한 세상이 알고 보면 생각보다 희망적’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 주고 싶은 것, 그것뿐이다.
  3. 주로 장례행사: 장례미사, 연도 등을 통해서.

9백만 불 저택, KAL 007 30년 전, Shaklee

2013-09-01 13.39.14¶  지난 주 수요일부터 시작된 우리부부의 ‘어정쩡한 휴가’를 9월 1일 일요일 연숙의 생일로 마감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의 휴가는 육체적, 물리적이라기 보다는 정신적, 심신적인 느낌이 더 많았던 ‘머리를 비우는’, 집에서 보낸 며칠이었다. 평소 때의 daily routine들이 완전히 멈춘 것으로 정말로 시계조차도 쉬는 느낌을 만끽하였다.

올해 연숙의 생일은 조금 색다르게 외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 집이나 새로니나, 나라니의 집도 아닌 제3의 장소에서 ‘아이들이 준비한’ 점심식사를 하였는데, 독특한 것은 어느 ‘부자의 9백만 불짜리 거대한 저택‘에서 두 딸들이 함께 준비한 지중해식 steak류의 요리와 적당히 단(sweet) 생일 cake을 즐긴 것이다.

그 ‘저택’은 나라니가 언젠가 직장 동료에게 소개를 받아서 house-sitting이나 pet-sitting을 해 주던 집으로 나라니가 그날도 pet-sitting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우리를 ‘주인 없는 집으로’ 초대한 것이었다. 백 만불 짜리 집들은 그런대로 가 보았지만 9백만 불짜리 집은 사실 처음 구경하는 셈인데 집의 크기도 크기지만 위치가 완전히 별장지나 다름이 없었다. 문제는 나는 그런 큰 집에 머무는 것이 그렇게 불편하고 심지어 불안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인데.. 무슨 ‘부자 콤플렉스’ 비슷한 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게 ‘과시하며 사는 모습’에 대한 반감 때문일지도..

 

¶  올해 9월 1일은 물론 연숙의 생일이기도 하지만 조금 다른 ‘기념일’ 도 있었다. 그것은 1983년 9월 1일이었다. 그날 뉴욕 발 KAL 007기가 서울로 나르던 중에 소련 영공 부근에서 그들의 전투기의 공격을 받고 격추가 되어서 탑승객, 승무원 전원이 사망을 하였던 것이다. 30년 전의 일이다.

그 해 1월에 첫딸 새로니가 태어났고, 그날 9월 1일에 우리는 진짜 중화요리 ‘짬뽕, 자장면’ 등 생각이 간절해서 시카고로 드라이브 하고 있었다. 9개월 짜리 애기 새로니를 ‘중고차’ 뒷좌석에 싣고 시카고를 가면서 끔찍한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그 얼마 전에 나는 학교를 완전히 떠날 결심을 하고 직장을 구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내 인생 ‘첫 직장’이 된 DTS[Dynamic Telecom Systems]에 job[software engineer]이 되어서 그것도 자축할 겸 집을 떠난 것인데 그런 뉴스를 접하게 되어서 시카고에 가서도 뉴스를 듣느라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다.

그 당시에는 비록 1962년 cuba의 핵 미사일 위기 때와는 비교는 안 되지만 그 나름대로 상당한 위기에 속한 사건이었다. 당시의 미국 대통령이었던 레이건은 외교적인 관례를 깨고 소련을 ‘악의 제국, evil empire’로 선언을 한 것이다. 그 선언은 잡음이 많았지만 결국 몇 년 후에 소련의 붕괴로 이어지는 시금석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83년 당시 소련은 사실 이미 체제의 한계를 들어내었고 민간 항공기를 ‘위장된 간첩’으로 오인하고 격추까지 할 정도의 경직성과 낙후성을 들어내고 있었기에 ‘붕괴’는 시간 문제이기도 했다.

 

¶   Shaklee, 한글로 샤클리..라고 쓰는 이 이름이 우리에게 갑자기 찾아왔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들어보는 이름이고, 연숙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반년 전에 미국에서 완전히 퇴각을 한 일본의 화장품 POLA, 연숙의 미국생활의 거의 전부를 차지했던 이 일본회사가 정말 멋없이 미국시장에서 사라지면서 허탈감을 감추진 못했던 이즈음에 등장한 것이 ‘미제’ Shaklee란 것이다.

돈은 둘째치고 경제활동은 어느 나이에서나 정신건강상 필요한 것임을 알기에 조금은 더 관심을 가지고 이것을 보고 있고, 연숙은 그 회사의 초청으로 San Francisco를 다녀왔기에 이제는 결정의 단계에 이른 듯하다. 내가 궁금한 것은 ‘나의 역할’인데..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한다지만 그래도 이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경제활동’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서 이번은 조금 각오가 다른데.. 맡기자, 맡기자.

factor: 마누라, 장모님 지수

한참을 생각했다. mother-in-law factor를 한글로 써야 한다면 무엇일까? mother-in-law는 아마도 아직도 남편이 부를 때, ‘장모, 장모님’일 것이다. 아내가 보면 시어머니겠지만 여기서는 대부분 남자가 주체이기에 장모님이다. factor는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수학적으로는 ‘인수’ 이지만 여기서는 이유나 요인, 요소, 원인, 지수 등이 더 맞을 듯 하다. 그러니까 남자가 보면 ‘장모님 지수’요, 여자가 보면 ‘시어머니 지수’라고 할 수 있다.

The mother-in-law factor…

Experienced managers are seldom keen to leave large companies. Wives, mothers and mothers-in-law exert a strong influence on men not to join risky start-ups, says Yoshiaki Ishii, head of new-business policy at the industry ministry.

Japan's Abenomics, CREDIT: The Economist
Japan’s Abenomics, CREDIT: The Economist

 위에 나온 문장은 현재 일본의 경제 동향을 분석한 The Economist (주간 경제지)의 기사에 나온 것이다. 현 총리 아베.. 대기업에 치중된 일본의 불황 경제의 해결책은 ‘발 빠른 소기업의 창업’을 정책적으로 돕기로 한 모양이다. 현 일본의 덩치 큰 기업들이 문제라는 것이고, 그것을 메우어 줄 소기업들이 쉽게 창업이 되는 여건이 어려운 이유 중에는 대기업의 유능한 경영자들의 ‘마누라, 엄마, 장모님’들이 ‘위험성이 많은’ 새로 창업된 업체로 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말리고 있다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평소에 가졌던 전형적인 일본 남자들의 인상이 맞지 않는다. 그들은 집에서는 ‘제왕’의 위치에 있었지 않았는가.. 그렇게 기억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이곳도 ‘여자의 힘’이 돌이킬 수 없는 ‘위험 수위’에 이른 모양이다. ‘마누라, 엄마, 장모님’ 이면 한 남편을 ‘완전히 포위’한1 여자의 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제 지구상에는 이슬람 권이 유일한 ‘남자의 세계’인 모양이다.

영어 유행어에도 factor가 들어가는 말이 적지 않고 그 중에서 가족관계와 연관이 있는 것도 많다. 생각나는 것 중에 WAF란 것이 있다. 이것은 wife acceptance factor의 약자인데, 간단히 말하면 ‘마누라의 승인,인정 지수‘를 말한다. 예를 들면, 이 말은 technology 특히 computer 분야에서, 남편이 어떤 gadget을 집에 사가지고 와서 사용을 할 때 ‘마누라’가 그 것을 얼마나 어려움 없이 잘 사용을 할 것인가 하는 정도를 나타낼 때 쓰인다. 이 ‘마누라 지수’가 높으면 그 ‘기기’는 더 잘 팔릴 확률이 높은데, 이유는 간단하다. 애플의 제품같이 ‘바보’들도 쉽게 쓰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의 ‘마누라’란 말은 사실 ‘부정적’인 의미로 쉽게 말하면 ‘바보’란 뜻에 가깝다. 우리 ‘바보’ 마누라도 쉽게 쓸 수 있는 ‘기계’라면.. 얼마나 사용법이 간단할까, 하는 뜻이다. 이런 논리는 사실 말하면 ‘정치적으로 틀린, politically incorrect‘ 위험한 발상이다. 이런 류의 말을 농담이라고 발뺌을 해도 잘못하다가는 ‘사람 취급’도 못 받는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참 세상은 많이도 변했고 무섭게도 변해간다.

  1. 거기에 딸 몇 명이라도 합세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perfect storm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