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주주의인민..어쩌구? 위키 빠가!

생전의 구상 시인
생전의 구상 시인

얼마 전에 시작된 아틀란타 순교자성당 2014년 부활영세자 교리반, 수녀님을 돕는 봉사자 역할을 시작하면서 주 교재인 ‘여기에 물이 있다1를 영세 예비자들과 같이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천주교 ‘교리’ 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게 참 ‘부드럽고, 친절하게‘ 잘 꾸며진 책이었다. 어제 교리반에서 공부 한 제2과의 서두에 오랜만에 보는 ‘구상’ 이란 이름이 보였다. 구상(具常) 님은 시인이자 천주교인으로 내가 젊었을 때 그에 관한 기사(글과 사진)들을 여러 잡지에서 많이 보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물론 내가 천주교의 ‘천’ 자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잡지에서 보았던 시인의 얼굴모습도 떠 오르고, 천주교 신앙을 깊은 묵상으로 고백하는 듯한 시와 글도 기억난다. 그것이 전부였는데, 이번에 다시 그 시인의 이름을 본 것이다.

불현듯 그 시인의 근황과 그의 시의 세계2 등이 궁금해 졌다. Quick googling으로 시인이 우리 어머님과 같이 1919년 생이시고, 어린 시절을 역시 우리 어머님 고향인 함경남도 원산 임을 알게 되어 너무나 반갑고, 어렸을 때 아마도 어머님 집안과도 장날에 만났을 수 있다고 상상하기도 했다.3 시인은 우리 어머님 보다 일년을 더 사셔서 2004년에 선종을 하신 것도 이제야 알게 되었다.

한글 Wikipedia로 가보니 아주 실망스럽게 한 페이지도 안 되는 성의 없이 쓰여진 듯 보이는 글이 뎅그라니 보였다. 누가 이 기사의 저자인지 나는 알 길이 없지만 그의 배경이나 학식, 진솔함 등에 관한 추측은 가능했다. 한마디로 빠가.. 그것도 악질 빠기급에 속한다. 빠가. 빠가.. ‘해방 후 194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산4..’ 어쩌구 하는 글 하나로 이 빠가, 젖먹이 같이 유치한 듯 느껴지는 이 편집자가 현재 ‘한글 Wikipedia’의 대표적인 수준이라면 아뿔사.. 이곳도 역시 ‘주사파, 빨갱이’들이 득실 거리는 구나.. 하는 한숨만 나온다. 아마도 이 기사의 저자는 구상 시인이 ‘악질, 반동 천주교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생각한다.. 시인의 형님 신부님과 어머님이 빨갱이들에게 ‘처형’이 된 것을 이 빠가는 아는가? 어떻게 이런 ‘역사 수정주의 빠가’들을 한글 Wikipedia에서 몰아 낼 것인가? 으이구~~ X가 갈린다.

 

  1. 글 차동엽, 그림 김정자, 미래사목연구소 간, 예비신자 교리 & 소공동체 나눔용
  2. 이제는 나에게 시의 세계는 옛날처럼 먼 곳이 아니다.
  3. 그 당시 원산에 살던 사람들은 그런대로 서로 얼굴이 낯 설지 않을 정도로 지냈다고 들었다.
  4. 야 이 빠가야, 어째서 1946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어쩌구란 걸래 같은 말이 관계가 되냐? 구상 시인에 대한 글에, 조선민주주의인민이란 쓰레기 같은 말이 걸 맞냐?

엔지니어가 아니었으면..

What would you do for a living if you were not an engineer? 당신의 career job 이 engineer(electrical, electronics, computer)가 아니었었다면? EDN network (Electronic Design News online) 의 community blog, Voice of the Engineer에서 이런 식으로 참 어려운 질문을 던졌고, 그에 대한 대답이 참 재미있고, 다양함을 보고 ‘인생은 engineer’가 전부가 아니었구나 하는 ‘신선함’까지 느끼게 되었다. 이 질문의 대답은 사실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engineer들은 ‘우물 안의 개구리’같은 심리를 가지고 있어서 다른 것에 대한 생각을 별로 못하며 살기 때문이다. 그래도 굳이 대답을 해야 했다면..예를 들면 이런 대답들이 그곳에 있었다.

  • repair person
  • swim suit model
  • teacher
  • shoe repair
  • astronomer
  • fighter pilot
  • media art
  • teaching grammar, spelling to engineer
  • ski patrol or avalanche forecasting
  • driving boat for fishing tourist in Caribbean
  • programmer
  • herb grower
  • burglar
  • psychiatric doctor
  • organic farmer
  • addictions counselor
  • general contractor
  • outdoor job
  • landscaping
  • poet
  • train driver
  • blacksmith and farmer
  • making movie where I sing and act
  • professional musician
  • beach bum
  • architect, chef, artist , anything creative
  • commercial diver
  • teaching technical history
  • recording/mixing engineer
  • surgeon
  • military sniper
  • medical area
  • running a convenient store in a rural area
  • a problem solver
  • drinking cold beer under some enlightenment tree
  • lawyer
  • touring the world in a Rockn’roll band
  • growing medical marijuana
  • teaching engineering
  • chef
  • corpse
  • psychiatrist for engineers
  •  

제일 웃기는 것은 물론 corpse와 burglar.. 물론 농담이었을 것이지만, engineer말고 다른 것을 전혀 할 줄 모른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것이고, 먹고 살기 위해서는 ‘도둑질’ 밖에 없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대부분 외골수 인생을 사는 것일까?

 engineer와 그런대로 비슷한 방향에 있는 것으로는, general contractor, blacksmith, surgeon, medical, problem solver, teaching engineering, architect, repair person, fighter pilot, astronomer 정도가 아닐까? 나머지 것 들은 engineer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기에 아마도 해 보았자 타고난 재질과 정열이 없으면 실패할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하랴 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평생직업이 되는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하지만 돈만 많이 주면 그런 것 상관없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돈과 명예와 상관없이 그런 행운이 진정한 행복이라면 나는 사실 행운아라고 나를 위로하며 살았다. 그런 의미에서, 결론적으로, career electronics, computer engineer 는, 내 생각에, 불행하게도 다른 직업으로 ‘전업’하기가 참 힘들 것 같다.

 

에이커 빌크, 해변가의 나그네

Acker Bilk 에이커 빌크Acker Bilk, 에이커 빌크.. Stranger on the Shore, 그때 이 연주곡을 ‘해변가의 나그네‘ 라고 불렀는지, 원어인 영어이름으로 불렀는지, 확실한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 ‘쓸쓸한 느낌’의 연주곡을 들으면 생각, 기억, 연상, 회상되는 것은 (서울 중앙)고등학교 2학년 때쯤 일까.. 이런 류의 ‘외국 곡’에 심취하던 그 나이의 우리들은 거의 오밤중에 시작되는 ‘한밤의 음악편지’ 같은 라디오 생방송 프로그램을 생명수처럼 기다리고 즐겼다. 진행자 DJ는 음악편지라는 ‘엽서’사연을 줄기차게 접수하고 읽으며 그 사연이 ‘요구’하는 해외 pop song를 방송했다.

대학시절에 한때 나는 ‘본격적’으로 미국 rock/folk/pop 류를 ‘공부’하며 빠졌었지만,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저 ‘아마추어’수준에서 듣고 좋으면 즐기는 그런 식이었다. 그 때 상당히 좋아했던 것 중에 바로 이 ‘잔잔하고, 쓸쓸하고, 감상적’인 연주 곡 stranger on the shore가 있었다. 가끔 죽음을 곁들인 철학적 감상에 빠지던 본격적인 입시공부 직전의 소년의 황금기 고2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일기를 본격적으로 즐기며 쓰기시작을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참 유치한 글들을 쓰던 때였다. 문학이나 시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문외한이었지만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남기려 애를 쓰긴 했다. 바로 그 당시에 듣던 곡 중에 나는 이 ‘쓸쓸한’ 느낌의 연주 곡을 너무나 좋아했었다. 이 곳의 배경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야 이 연주곡 Stranger on the Shore와 연주가 장본인 영국인 Acker Bilk란 사람의 ‘정체’를 자세히 알게 되었지만, 나의 주 관심사는 이 곡이 나오게 된 배경이었다.

이 곡의 원 제목은 사실 Jenney, 그의 갓난 딸의 이름이었고 1962년 그의 딸이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작곡한 곡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영국의 TV program에서 쓰려고 제목을 Stranger on the shore로 바꾼 것이 대 히트를 한 것이다. 얼마 후에 이 곡은 미국에서도 top chart에 올라 백만 장 이상이 팔렸다. 내가 자주 듣던 것이 1964년 이었으니 참 오랜 동안 인기가 있었던 곡이었음이 틀림이 없었다. Acker Bilk독특한 저음의 클라리넷은 정말 이 곡이 주는 느낌을 확실히 전달해 주고 있다. 이제 80이 훨씬 넘은 그는 아직도 ‘왕성한’ 연주 활동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이 곡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따라다니고 있다.

 

 
Stranger on the Shore, Acker Bilk 1962

 

主後(주후) 2013년, 8월 22일

¶  BC, AD, BCD, CE… OH MY!  내가 감사하며 애용하는 Wikipedia 류의 web service는 물론 가끔 donation을 할 정도로 우리들에게 유익한 것이다. 그 옛날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 항상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필수의 서비스인 것이다. 비록 최고의 전문가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대신 충분히 많은 일반인에게 ‘검증’을 받고 있는 지식들이라 생각하는 것 보다 질이 좋음을 알 수 있다. 그 수많은 기사들의 폭과 깊이, 신속한 update등등.. 책으로 된 백과사전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 여기만의 문제가 아니고 모든 soft information에 해당되는 것인데, 지나친 PC (Political Correctness) effect가 여기에도 적용이 되는 듯 하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 ‘좋은 정보’로 취급되는 성향을 이곳에서 이곳 저곳에서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지나친 세속적 편향도 덩달아 춤을 추며 이곳으로 잠입하는 느낌도 든다.

예를 들면 CE 와 BCE의 연대 표기 방식이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AD (Anno Domini)와 BC (Before Christ) 대신 CE(Common Era) 와 BCE(Before Comment Era)로 표기하는 것이다. 해당 기사를 쓴 ‘봉사자’들에 의한 것이 아니고 아예 Wikipedia 자체에서 ‘권장, 심지어 강요’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이것이 쉽게 말하면 PC, politically correct한 것이다. 왜 전통적인 것보다 이런 방향으로 나간 것일까? 이렇게 하면 fund raising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것일 지도 모른다. ‘비신자, 비기독교인, 무신론자’의 숫자가 엄청 많고, 늘어난다고 생각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참 옹졸하기 짝이 없는 ‘새 대가리’ 적 발상이다. 기원 후, 기원 전을 쓰면서 ‘예수님 후’, ‘예수님 전’이라고 생각하며 서기 1968년..을 쓰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는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한번 어깨를 펴고 당당히 써 보자.. “오늘은.. 주후, AD: ANNO DOMINI, 기원 후 2013년 8월 22일!” 참.. 이래서 political correctness가 필요이상으로 욕을 먹나 보다. 

 

¶  GET A LIFE! FACEBOOKERS..: 아주 오랜만에 들려본 the economist 웹사이트 에서 흥미롭고, ‘나의 느낌이 역시 맞았구나..’ ‘I told you so’ 하는 나의 내면의 소리를 확인하는 기사를 보았다. 한마디로 “Facebook에 목매는 인간들아, (진짜) 삶을 살아라!” 인 것이다. 인터넷을 이용해서 ‘대화’를 하는 것과 ‘그 속에서 삶을 사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내가 보기에, 느끼기에도 나는 처음부터 이런 류의 ‘거대한 가짜 삶의 광장’을 제공하는 Facebook에 관심이 별로 없었지만 “기본을 무시한, 잔머리만 굴리는 요새 ‘아이들”의 장난이 거대한 돈과 증권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쓰레기’에 관한 뉴스는 피할 도리가 없었다. 난데없이 전혀 모르는 인간들이 ‘친구 합시다’ 하고 오는 추태에는 진저리가 칠 정도였다. 우리 두 딸들도 peer pressure에 약한지 한 때 빠지더니 요새는 많이 벗어난 듯 하다.

심각한 문제는 아예 그 속에서 완전한 ‘다른 삶’을 사는 인간들인 것이다.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의 실체를 제대로 구별을 못하며 사는 거대한 ‘광고의 밥’ 인 이런 부류의 사람들.. 그야말로 Get a Life! 라고 충고하고 싶은 것이다. 워낙 덩치가 커진 이 Facebook은 드디어 실험용 연구대상까지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결국은 실상이 들어나게 되고, 결과는 그들(ZukerXX & kids)에게 별로 좋지 않은 듯하다.

이 economist의 기사를 읽어보면 아주 조직적인 실험,연구를 한 것인데 결과는 그 곳에서 사는 삶은 한마디로 miserable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곳에 있는 거짓으로 도배가 된 허구의 삶들과 자기 것을 비교하는 자체가 불행인 것이다. 실상과 거리가 먼 자기의 공상을 쫓으며 살려니 결과는 뻔 한 것이다. 설상 가상으로 이제는 NSA의 철저한 감시대상의 제1위에 있는 그들의 privacy는 거의 제로에 가까워지고 있어서 솔직히 말하면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다. 

 

¶  바울라 표 커피: 얼마 전 우리부부의 레지오 마리애 본가인 자비의 모후 단원님 이 바울라 자매님이 조그만 상자를 건네 주셨다. 차량봉사 관계로 자매님을 레지오 주 회합 뒤에 모셔다 드리면 가끔 뒤뜰에서 정성껏 키운 야채나 꽃나무를 즐겁게 나누어 주셨는데, 이번에는 색다른 느낌의 조그만 상자였다. 혹시나 해서 미리 무엇이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커피’라고 하셨다.

이것은 정말로 뜻밖의 느낌이었는데, 물론 내가 워낙 커피를 즐기다 보니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지만, 조금은 미안하기도 하였다. 자매님 식구가 드셔도 됨 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자매님 식구는 별로 커피를 ‘잠’ 때문에 드시지 않는다고 하셨다. 집에 와서 상자를 열어보니 그것은 우리와 친숙했던 Caribou ground coffee pack이었다.

물론 우리가 사서 먹어도 되지만 이런 ‘공짜’ 는 참 즐거운데.. 공짜라서 라기 보다는 그렇게 주신 자매님의 마음이 고마워서 그런 것이다. 매일 아침 나는 칠흑이 간신히 걷힌 이른 아침에 이 커피의 맛을 ‘혼자서’ 음미하며 잠을 깨고 ‘신나게 돌아가는 머리’의 힘을 빌려 나의 생각과 일을 시작한다. 우리는 고마운 자매님의 마음을 생각하기에 그 Caribou Coffee를 ‘바울라 표 커피‘라고 이름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바울라 자매님! 

 

¶  CRAZY NEW NORMAL: BRADLEY MANNING 이 알고 보니.. CHELSEA MANNING? 하도 ‘미친’ 뉴스들이 요새는 ‘대부분 정상’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 희한(稀罕)한 기사에 나는 완전히 오금을 펼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정도로 희한한 CRAZY NEW NORMAL인 것이다. 별로 거대한 정치적인 안목이나 생각 없이 그저 ‘자신의 불만’만 생각하며 1급 국가기밀 수천 페이지를 양심의 가책 없이 여파나 파장에 상관없이 폭로하며 자신의 자격지심을 위로했던 ‘병신중의 병신’처럼 보이던 그 ‘남자’가 갑자기 ‘여자’로 성전환을 한다?

한마디로 정말 이것이야말로 희한 중의 희한.. 희한 올림픽의 다이아몬드 메달 감이다. 하지만 이것이 소위 말하는 ‘이세상의 누가나 평등하다, 절대로 남을 판단할 권리가 없다’ 는 ‘기분 좋은 슬로건’에 목을 맨 신 현세의 일 면이 되어가고 있다. 비겁 자 중의 비겁 자 처럼 보이는 그가 감방에서 여자 대우를 받고 싶은 것일까.. 참 모골이 송연 해 지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다. 

 

¶  RETRO-BLOG, TAKE ME TO 1968!:  근래 들어서 blogging하는 것이 그런대로 자연스레 습관이 되면서 나만의 retro-blogging이란 말이 생겼다. 그러니까 어떤 날, 문득 생각난 것을 쓰다가 다 못쓰고 내버려 둔 것을 ‘후일’에 이어서 쓰게 된 case 가 바로 이것이다. 쓰기 시작했을 때의 생각이 시간이 지나서 조금은 바뀌거나 했어도 생각의 출발점은 간직하고 나중에 읽었을 때 ‘역사적’ 가치가 더 있는 것이다.

특히 바쁠 때, 그런 ‘지나간 블로그’를 더 많이 처리해야 할 때가 많다. 미완성 된 블로그를 나중에 ‘완성’을 시키는 것이다. 현재도 나는 자그마치 5개 이상의 retro-blog과 씨름을 하고 있다. 제일 오래 된 것은 거의 6개월 전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대작’도 있다. 그러니까 나의 ‘역사적 기록’인 memoir인 것이고 그 중에서 연세대 2학년 시절에 관한 회고록이 있다. 대학시절은 누구에게나 그에게 ‘황금기’애 속하기에 이야기도 많고 생각도 많았던 시절이다.

나의 그 때는 20세였던 1968년.. 기억력과 최후의 사투를 벌리며 회고해 내고 있는 이야기들.. 나에게만 의미가 있던 사담들이지만.. 누가 아리오, 그 이외의 관련된 사람들이 보게 될지도. 몇 년 전 일본의 인기 ‘테레비’ 드라마였던 ‘무리한 연애‘ 라는 미니 시리즈를 보면 왕년의 십대의 우상이었던 지금은 환갑이 된 주인공이 택시를 탈 때, 택시 기사가 ‘어디로 모실 깝쇼?’ 하고 물으니 주인공 왈, 무심결에 ‘1968년으로 갑시다!‘ 했는데.. 내가 바로 그 주인공과 100% 같은 심정이다. 비록 북괴 김신조 무장공비 일당이 청와대 근처에서 설쳐댔어도, 정말 걱정, 근심.. 있어도 그 때는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半島の春, 반도의 봄

1941년 영화 '반도의 봄'
1941년 영화 ‘반도의 봄’

얼마 전에 근래 자주 찾아가는 인터넷 ‘한국영상자료원‘에 새로 ‘올라’ 온 옛 영화1가 나의 눈길을 끌었다. 이것이야말로 옛 것 중의 옛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김진규, 문정숙, 최은희, 신영균, 신성일, 엄앵란 등이 주름을 잡았던 신상옥 전성시절 60년대 중반의 차원을 완전히 뛰어넘는 것, 바로 1941년 영화,반도의 봄, 半島の春2 이였고, 여기의 반도는 지리적 반도, peninsula가 아니고 일본이 조선을 칭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완전히’ 일제시대 (요새는 일제 강점기라고 하던가..)에 나온 것.. 그러니까 공식적으로는 일본영화가 아니던가. 물론 ‘조선인’들이 만든 영화니까 일본영화는 절대로 아니다. 영화의 기법, 영상, 배우 등을 보면 사실 내가 보았던 50년대 초의 영화3와 별 차이가 없지만 나에게는 특별히 커다란 감정의 물결로 다가왔다.

나는 일제시대를 겪지 못했지만 나의 부모님 세대는 그 속에서 태어나고 교육을 받고, 결혼을 했었기에 그 시대의 영향을 우리도 간접적으로 ‘고스란히’ 받았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고, 그 ‘숨기고 싶은’ 영향의 원류가 과연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 당시 사회상은 교과서에조차 묘사가 된 것이 없고4, 영화는 커녕 가족 몇 명을 제외한 흑백사진 조차 본 적이 없었기에5

사실 나에게 그 당시는 완전히 ‘미지’의 세계였다. 일제시대에 조선에서 어떠한 ‘말’을 쓰며 살았는지, 그러니까 우리 말과 일본어 등이 어떻게 섞여서 쓰였는지 나는 궁금했는데 이 영화를 보고 조금 이해가 갔다. 일본어를 쓰는 대목에서는 한글 자막이 없었고, 우리말이 나오면 일본어 자막이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역시 그 당시의 공식언어가 일본어 였었다는 것을 이것으로 실감을 하게 된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그런 것을 물어보면 별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는데, 그런 혼합 언어 정책이 그런대로 큰 무리가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영화를 자세히 보면 어떤 부분에서 일본어를 쓰고 어떤 부분에서 우리말을 썼는지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영화의 캐스트나 스탭 진들의 이름을 보면 대부분이 우리 이름이고 간혹 일본 이름이 보이는데, 그것은 1941년 때만 해도 창씨개명6 이 널리 퍼지지 않아서 그랬는지 궁금하다.

3.1운동, 유관순 같은 애국지사에게 행한, 잔학했었다는 일제시대에 대한 ‘일방적인’ 교육을 받고 자랐기에 어렸을 적에는 빨갱이 이상으로 ‘죽음을 불사한 학대’를 ‘매일’ 받았던 것으로 생각을 했다. 나이가 들면서 그것 역시 이승만의 일방적인 반일교육의 결과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 것을 고스란히 경험을 한 어머님께 물어보면, 아주 다른 반응을 보곤 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는 표정이었던 것이다.

그런 각도로 이 영화를 보면 우리의 반일교육이 완전히 일방적이었음을 알게 되는데, 춘향전 영화 같은 ‘민족적’인 영화를 찍는 조선인들의 사랑 이야기가 이 영화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1941년이면 일본제국이 한창 진주만을 습격, 미국에 도전을 하던 살기등등하던 시절인데, 춘향전과 연애를 하는 ‘조센징’ 영화를 찍게 허가를 하였을까..

이 영화에서 일제시대의 다방과 서울의 풍경들이 나오는데,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 부모님들이 어떻게 데이트를 하고, 결혼을 하고 했을 까 조금은 궁금증도 풀리는 듯 했다. 그러니까 백문이 불여일견, 이렇게 보니까 이해가 가는 것이다. 게다가 이 영화를 보면 ‘목포의 눈물‘ 이 아코디언 연주로 구성지게 흘러 나온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한 서린’ 노래도 자유롭게 부르고 듣고 했던 시절이 아니던가?

1930~40년대의 미국영화와 이 영화를 비교해도 사실 기법이나 연기 등이 큰 차이가 없이 보였다. 아마도 그 당시 일본의 영화 수준이 이 정도였을 것이라 추측도 한다. 비록 해방 후, 6.25 동란으로 우리 영화가 타격을 받았을 지라고 그때의 수준이 있었기에 곧 바로 60년대의 영화 전성기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 마지막 장면이 ‘성공을 위해서’ 동경유학을 떠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해방 후 영화에서는 ‘성공을 위해서’ 미국유학을 떠나는 것을 바뀐 것.. 참 시대와 역사의 요술이 아닐까?

 

 spring-peninsular-2서울역, 서울은 케이죠, 경성으로 불리지만 그래도 한글로 쓰였다

 

spring-peninsular-6이 귀여운 여자가 50년대 영화에 많이 출연한 친근한 ‘할머니 배우’ 복혜숙씨였다.

 

spring-peninsular-11이것을 보면 일제시대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 그때도 이런 멋쟁이가 있었구나..

 

spring-peninsular-4너무나 익숙한 50~60년대의 가정집 마당을 연상케 한다

 

spring-peninsular-5학생이 살던 방, 이것도 너무나 친숙한 광경이다

 

spring-peninsular-8영화 속의 영화, 춘향전.. 태극이 선명하고 춘향이도 예쁘다.

 

spring-peninsular-7경양식점, 이런 류의 ‘양식’은 아마도 일본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spring-peninsular-10아저씨와 어르신, 대청마루에 앉은 모습도 전혀 낯설지 않다.

 

spring-peninsular-3당시 소설에 많이 나오는 동경유학생들은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1. 새로 올라온 것 중에 ‘미몽’ 이라는 1930년대의 영화도 있지만 그것은 거의 무성영화 수준이었다.
  2. 이것은 공식적인 영화제목이고 개봉된 이름은 ‘아름다운 청춘’ 이었다고 한다.
  3. 예를 들면 1954년 영화 ‘운명의 손‘이나 ‘과부의 눈물‘과 같은…
  4. 이것은 공산주의와 비슷하게, 완전히 정책적이고 의도적이었다.
  5. 우리 가족은 6.25를 겪으며 거의 모든 역사적 유물들이 분실되었다.
  6. 일본이 정책적으로 조선이름을 일본 식 이름으로 바꾸게 하던 것.

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27

아마존닷컴에서 시작된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확산

2013.08.16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2010년 6월 영어버전 졸저, Why Industrial Hegemony Shifts: Needs Evolution and Dynamic Management가 독일 Lambert Academic Publishing(LAP) 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어 Amazon.com에서 팔리기 시작했다. 필자는 2008년에 이미 ‘Dynamic Management Theory (Hanyang Univ. Press)’라는 졸저를 Amazon.com을 통해 선을 보이긴 했지만, 국내대학 출판이라 외국인에겐 생소할 것으로 생각되어 서둘러 2년 후 ‘Why Industrial Hegemony Shifts’를 다시 선보이게 된 것이었다.

 니즈진화라는 동태적 관점에서 니즈맞춤혁신을 통해 지속번영을 도모하는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라 는 신(新)기업전략이론을 가장 극명하게 내 보일 수 있는 실증사례가 아무래도 산업주도권 이동일 것으로 판단하고 세계 유수산업들을 대상으로 산업주도권 이동원리를 정성적(qualitative)으로 구명(究明)하고자 한 것을 재차 선 보인 것이다.

그런데 LAP 졸저의 출간에 앞서서, 기업전략과 관련하여 그간 정태적 관점의 이론에 익숙한 학자들 특히 미국과 유럽의 석학들에게 동태적 관점의 졸저가 어떻게 비쳐질까를 고려하며 세계 석학 십여 분에게 출간용 원고를 미리 보내 그들의 반응을 타진해 보고자 하였다.

 약식형태의 서평을 보내 온 분은 미국 하버드 경영대 학의 Gary Pisano교수, Dartmouth 대학의 Margaret Peteraf교수, 영국 Warwick 경영대학의 John McGee교수, 스위스 IMD의 Bala Chakravarthy교수, 동경대 Junjiro Shintaku교수, 북경대 경영대학(GSM) 부원장 Changgi WU교수, 서울대 조동성교수를 비롯하여 몇 분이 더 있었다.

의례 서평에는 호평이 주류를 이루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던 필자의 예상대로 평해준 분들 모두가 호의적인 평을 보내주었는데 그 중에서 필자의 의중을 가장 꿰뚫어 본 이는 Bala교수였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인도태생 미국인으로 한동안 최연소 하버드 박사라는 별칭이 붙었던 분으로 전략 프로세스(Strategic Process) 분야의 석학으로 일찍이 젊은 나이에 세계전략경영학회(Strategic Management Society) 석좌회원이 된 스위스 IMD교수다.

 Bala 교수가 보내 온 약식서평은 이러했다.

8월의 가을바람, Putin

¶  Old Normal  무언가 올해의 여름은 정말, 참말, 진짜로 이상하다. 옛날의 정상적 여름 날씨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요새 유행하는 new normal이 아닌 old normal은 피부로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 한마디로 올해 Acme Cool Air같은 무슨 무슨 에어컨 서비스 업체들 대다수가 도산을 할 지경일지도 모른다. 지난 몇 년간 new normal이 된 화씨 95도 이상의 여름 더위에 그 냉방 업자들 받기 힘든 은행융자로 큰 투자를 해서 지난 몇 년간 지독한 호황으로 $$$을 억수로 벌었고, 올해는 아마도 더 투자를 하고 100도가 넘는 습기에 찌들은 여름을 기다렸을 것인데, 이것이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우리 미국본당 신부님, 만나기만 하면, pray for rain.. 을 거듭하시더니, 소낙비, 가랑비, 써늘한 비, 주룩주룩 장마 성 폭우.. 각가지 선을 보이고 그것도 모자라 기온은 아침 저녁이 꼭 가을처럼 느껴지고, 어제와 오늘은 100% ‘가을이라 가을 바람~~’ 의 노래가 연상되는 첫 가을 맛을 보여주고 있다. 덕분에 억수같이 나가던 전기료가 ‘푹’ 절감이 되었고, 밤에 잠도 잘 잘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기후가 잠깐 ‘어리둥절’ 했었을 것이라 생각은 되지만, 참 세상은 never say never라고.. 오래 살고 볼 것이다.

 

Vladimir Putin, credit: WikiMedia¶  Putin   요새 가끔 news를 보면 가관인 것이 있다. 나의 눈과 귀를 의심하게 할 정도인 것은 이것이다. 종교와 신앙이라면 아편이라고 이 잡듯이 탄압을 하던 맑스 Marx, 레닌 Lenin의 공산주의자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연방, 지금은 러시아가 이제는 종교의 이름으로 homosexual의 정치적, 사회적 파급을 법으로 조직적으로 저지하고 나선 것이다.

여기에 두 명의 소위 최고 지도자가 등장한다. 하나는 자유민주의 세계 종주국이라는 미국의 대통령, ‘바락 후세인 오바마(Barak Hussein Obama)’ 라는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 그 하나고, 또 하나는 공산당 체제의 소련연방 하에서 정치적 반대파를 잡아내던 옛 소련연방 정보부 출신의 현 러시아의 푸틴(Putin) 대통령이 또 하나다. 원래 공식대로라면 오바마는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100+% 보장을 해야 하고 푸틴은 가차없이 ‘아편’인 신앙의 자유를 억압해야 한다.

yet another stupid presy그런데 최근의 사태는 완전히 거꾸로 흐르고 있다. 문제의 불씨는 바로 homosexual들의 ‘권력 확장’이다. 바락 후세인 오바마는 각가지 알 수 없는 논리로 그들(homo-sexual)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의 ‘결혼’을 지지하며, 급기야는 군대나, 보이 스카웃 (걸 스카웃도 마찬가지일 듯)도 그들을 ‘쌍수로 환영을’ 하게하며, 급기야는 각종 종교, 신앙계열의 기관, 학교, 병원들에 ‘법으로 압력’을 넣고 있다.

이래서 나온 것이 ‘종교의 자유’를 지키자는 slogan인데,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것인데 어찌해서 이렇게 된 것일까? 반대로 푸틴 대통령은 ‘기독교가 러시아에 준 바람직한 영향‘을 언급하면서, ‘법으로’ 그들의 ‘확장’을 제한하려고 한고 있다. 참.. 이러니 오래 살고 볼 것인가? 완전히 두 명의 ‘대통령’의 입장이 바뀐 것이다. 솔직히 현재 나는 푸틴 대통령에게 과분한 점수를 주고 싶은 솔직한 심정이다. 소신 있는 용단이라고까지 치부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그의 과거 행적을 보아서 ‘깊은 정치적 포석’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은 간다. 하지만, 그것이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런 용기 있는 지도자가 현재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26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과연 유용하며 실용적인가?

2013.08.12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몇 해 전 어느 제조업 중심의 대기업 인사교육담당 책임자라는 사람이 자사 중견간부사원을 대상으로 한 산업교육 프로그램에 동참해 달라며 강의주제를 혁신경영으로 요청해 온 적이 있었다. 그는 그 회사에서 16년간이나 인사교육에 관해 정평이 나 있는 분이라고 교육생 누군가가 필자에게 귀 뜸해 주었다.

 필자는 강의에 앞서서 그 회사의 기본정보를 알고 강의에 임하고자 그 인사교육담당 책임자에게 다음의 질문을 던져보았다.

 

1) 귀사의 주종사업이 무엇이며 어떤 제품/서비스를 어느 시장의 어느 고객의 무슨 니즈를 충족시키려고 생산・제공하고 있는가?

2) 제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무엇이며 어떤 면이 고객에게 어필하고 있다고 보는가, 그리고 타사 것보다 더 우수하거나 부족한 면은 무엇인가?

3) 제품생산에 들어가는 핵심부품이 몇 개 정도이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게 어떤 것이며 그것을 어디의 누구로부터 조달 받는가?

 

그런데 그의 답은 놀랍게도 이들 질문에 대해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거의 막히는 것이었다.

Me, catechist? not exactly..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2014년 부활절 영세 목표’ 예비 천주교 신자들의 교리교육이 2013년 8월 8일에 시작이 되었다. 최소한 미국 내의 본당들은 거의 이즈음부터 예비자 교리과정이 시작되어 내년 부활절 즈음까지 계속된다. 천주교의 전통일까, 개신교에서는 어떻게 예비자의 교육을 시키는지 그 옛날에 본 기억이 있지만 하도 오래 전이라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한 것은 개신교의 전통은 ‘쉽게 쉽게’ 하는 것이라는 것과, 교육과정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총각 시절 잠깐 나간 적이 있었던 어떤 교회에서는 나보고 ‘거저’ 세례를 주겠다고 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나와 연숙은 1981년 가을부터 아주 특수한 상황하에서 예비자 교리공부를 시작해서 다음 해 1982년 부활절 때 영세를 받았다. 당시의 우리 본당이었던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의 한인천주교회에는 규모가 하도 작아서 정식 교리반 코스가 없었지만 그 무렵 신시내티 로 옮겨가셨던 전 주임신부 왕영수 신부님으로부터 직접 교리교육을 받은 것이다. 남들이 들으면 정말 우리보고 ‘행운’이라고 했다. 10명도 안 되는 소 그룹이 신부님과 마주하고 공부를 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조금은 ‘행운’이었다. 왕영수 신부님의 절대적인 헌신적 노력이었다. 신시내티로 부터 콜럼버스까지 2시간 거리를 마다하고 일주일 마다 오셔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30 something의 그 나이에 신앙적 교육을 받는 것은 조금 힘든 상태였다. 머리는 굳을 대로 굳어지고 특히 나 자신은 더욱 천주교 교리가 쉽게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지지를 않았다. 최대한의 노력을 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예비자들에 비해 그렇게 뒤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머리 속에서 돌며 가슴으로 깊이 들어오지 못했다. 그런 때의 비결이 ‘무조건 믿어라’ 였는데, 그 말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연숙은 나와는 전혀 달랐다. 무언가 각오를 하고 노력하는 것이 느껴졌고, 결과는 나와 전혀 달랐다. 신부님 말씀대로 ‘정확히, 깊이’ 잘 받아 들였다고 했다. 우리의 신앙여정은 그때부터 사실 정도와 방향이 갈라지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이 교리공부는 내 가슴에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30여 년 전, 그 때 ‘들었던’ 왕영수 신부님의 교리 가르침을 가지고 30여 년을 버틴 셈이다. 머리로 공부한 것, 거의 다 잊어버려도 하나도 신경을 쓰지 않고, 거의 냉담 상태로 오랜 세월 ‘허송’하다고 최근에 조금씩 고향으로 돌아오는 기분으로 교리란 것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모든 신앙적 여건과 조건이 ‘급속히’ 호전되면서 이제는 교리과정이 ‘소로소로’ 나의 가슴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제야 이해가 가는 것들이 참 많았다. 그것도 ‘완전히’ 이해가 가는 기분이었다.

 3년 전 레지오 마리애 에 입단을 하면서, 다시 교리교육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이유인즉 레지오 단원의 활동사항 중에 ‘교리반 지도’란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가두 선교는 나에게 맞지 않을 것이고 요사이는 그것이 그렇게 효과적이 아닐 수 있기에 더욱 교리반 활동은 나에게 appeal을 하였다. 연숙에게 물어보니..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라는 대답이었다. 교리교사는 아무나 하나.. 하는 식의 반응이었다. 그렇게 오랜 신앙생활을 한 연숙도 그것은 할 수가 없었는지..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완전히 잊고 대신 나는 정식 교리과정은 아니지만 ‘좌우지간 천주교에 대해서 알아보자’ 하는 식으로 공부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과정이 절대로 어렵지 않았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나의 ‘가슴이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길지 않은 ‘귀향’ 과정 끝에 결국 때가 슬그머니 찾아왔다.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께서 나의 사정을 보셨는지, 신부님 1 께서 조용히 부르셔서 우리부부에게 새로 시작하는 교리과정의 봉사자로 수녀님께 추천을 했다고 하셨다. 올해 들어서 새로 오신 수녀님께 완전히 교리반을 일임하신 듯 하고, 예전의 ‘체제’를 완전히 바꾸신다고 했다.

예전의 교리반 director라는 자매님만 남고 종전의 교리교사 제도를 완전히 없앤 것이다. 대신에 수녀님을 돕는 형식으로 ‘봉사자 제도’를 만든 것이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바꾸어야만 했는지 자세한 이유는 잘 모른다. 좌우지간 내가 레지오를 시작하면서 바라던 것이 이루어진 셈이고, 나는 정말로 성모님의 ‘전구’를 더욱 믿고,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에 우리부부는 아틀란타 한국학교에서 ‘아이들을’ 오랫동안 가르쳐본 경험이 있어서 ‘가르치는 것’ 자체는 좋아하고 일반적인 technique도 생소하지 않지만 이곳은 다양한 연령층으로 이루어진 ‘성인 교육’이라서 지난 경험에 의존하는 것은 무리일 듯 싶다.

올해 등록된 예비자 숫자는 기대보다 훨씬 떨어져서 시작 단계에서 10명 내외였는데, 사실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다행이었다. 조그맣게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 ‘봉사자’의 역할은 수녀님의 ‘강의’ 뒤에 있는 나눔의 시간을 이끌어가는 것인데,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아직도 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혀 idea가 없지만 그저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리고 있다. 만약 우리들의 경험담이 필요하거나 교리에 관한 질문이 있으면 그것에 성의 있게 도움을 주려는 각오를 하고 있을 따름이다.

첫날 모인 예비자들은 대부분 30대에서 60대까지 남자들이었고, 부부를 포함한 가족도 있어서 이채로웠다. 대부분이 가족이 신자였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나왔다고 해서, 그들의 가족에 대한 정성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나의 신앙여정을 생각하고, 레지오 단원임을 생각하며 우리는 이들과 같이 기필코 안전하게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도록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고 싶다.

  1. 하태수 미카엘 본당 주임 신부님

Jim Jones, ‘신천지’, reasoning

Faith and reason are like two wings on which the human spirit rises to the contemplation of truth;Blessed John Paul II, 1998.

 

Jim Jones CREDIT: wikipedia
Jim Jones, CREDIT: wikipedia

‘이성(理性, reason)이 결여된 신앙’ 의 결과는 정말 끔찍할 수 있다. Jim Jones, Tom Jones처럼 흔한 이름이지만 이 J.J. 는 사실 이렇게 끔찍한 이름이다. 나의 뇌리에 ‘아직도’ 생생한 그 지옥과도 같던 사진과 TV의 광경들, 1978년 11월 늦가을이었을까? People’s Temple이라고 하는 교회의 교주가 바로 Jim Jones인데, 이 교회는 흔히 말하는 ‘예수’를 믿는 교회는 절대로 아니고 그저 ‘사회에서 소외 당하는 돈과 힘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사는 집단이었다. 그러니까 ‘사교’, 어떤 신을 믿는 집단이 아니었는데, 우리들은 그저 ‘예수님’은 믿지만 교주도 믿는다는 그 옛날 ‘박태선 장로’ 교회와 비슷한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다.

Jim Jones의 ‘집단’은 기실은 ‘공산, 사회주의’를 믿는 실로 해괴한 집단이었지만 그 자신은 이 해괴한 집단의 ‘하느님’역할을 했다. 그 자신은 거의 ‘정신병자’의 영역에 속하는 사람이었지만, 불쌍하고 배고픈 ‘대부분이 흑인’들은 그를 신처럼 따랐다. 하도 해괴한 집단이고, ‘공산주의’에 관련이 되다 보니 미국정부에서 가만있을 리가 없고 국회 차원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들은 ‘박해’를 받는다며 남미의 Guyana라는 곳에 집단으로 이주를 했고 그곳에서 그들의 ‘해괴한’ 집단 생활을 계속했다.

1978년 11월, 미 연방국회 조사단 일행이 그 집단을 방문하고, 그 집단을 떠나고 싶은 ‘신도’를 풀어주라고 요구하자 그들은 그 조사단 일행을 모조리 사살을 하고 그날 저녁 Jim Jones를 위시해서 그 집단 900여명, 300명의 아이들을 포함해서 집단 자살을 해 버렸다. 2001년의 9/11 사태 이전에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민간인 피해자를 낸 ‘역사적 사고’였다.

공중에서 찍은 그날의 비극적인 장면을 보면, 정말 입이 벌어져 다물 수가 없게 된다. ‘멀쩡하게 생긴 가족들’이 무슨 유태인 수용소 처럼 모두 모여서 ‘독약’을 먹고 자살한 것이다. 비록 종교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하지만 이 집단의 행동을 보면 종교적 사교집단과 구별을 할 수가 없다. 거의 같은 수법인 것이다. 이들 집단의 특징에는 ‘이성’을 철저히 배제한 무언가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란 것이 있다. 믿음과 이성은 같이 간다고 하는 비교적 쉬운 진리를 잊은 것일까?

이 밥맛 떨어지는 옛 기억을 오늘 다시 찾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어제 연숙과 같이 우리는 드디어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신 영세자 교리반의 봉사자 팀의 모임에 참가를 했고, 교리교사 수녀님1 의 지시와 설명을 들었다. 작년까지는 교리반 system에 봉사자란 것이 없고 그저 교리교사 몇 명이 예비자들을 가르쳤는데, 새로 수녀님이 오셔서 ‘완전히’ system을 바꾸어 수녀님 자신이 ‘유일한’ 교사가 되고 나머지는 평신도 ‘봉사자’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왜 그렇게 바꾸셨는지 우리는 이유를 잘 모르지만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어 주려는 의도로 해석을 했다.

또한 왜 우리부부가 그 봉사자 팀에 ‘불려 갔는지’ 그 이유도 사실 모른다. 그저 우리는 ‘순명’을 한 셈이다. 나이에 비해서 너무나 건강하고 팔팔하신 수녀님, 조금 성급한 성미가 신경이 쓰였지만 나는 그런 모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야말로 ‘새로운 공기’를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주임신부님이 수녀님께 교리교육 책임을 100% 주신 것을 보면 조금은 신부님의 수녀님께 대한 신뢰도를 짐작할 수도 있었다. 우리 봉사자들이 할 일은 주로 group discussion을 돕는 것인데, 그에 따른 ‘공부’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 중에는 ‘이단 신천지 알기’ 에 대한 공부도 있었는데, 물론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idea가 없었다. 그래서 소개 받은 ‘신현욱 전도사의 신천지 폭로 youtube video’를 보며 이것에 대해 알게 되었고 나는 곧바로 1978년의 끔찍한 ‘살인사건’ Jim JonesPeople’s Temple을 기억해 내고, 결국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 ‘집단’은 거의 모두 같은 ‘거짓의 원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점에서 거의 같다고 보았다.

왜 수녀님께서 그 ‘신현욱의 신천지 폭로 video‘를 보라고 했는지 확실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예비자 중에 그런 것에 대한 질문을 했을 때 우리들의 ‘사교에 대한 무식’을 피하게 하려고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정도로 추측을 했다. 그런 생각의 전개는 사실 다음과 같은 엄연한 ‘현실’을 지나칠 수가 없었다. ‘개신교 형제’들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도망 나간 형제’들이고 사실 최근의 교황들도 그렇게 가르친다. 언젠가 ‘돌아올 수 있는’ 형제들인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진실을 알기’ 까지 겪어야 할 위와 같은 끔찍한 비극들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들은 ‘교계’로부터 자유를 찾아 나갔지만 그 자유의 값은 잠정적으로 너무나 비극적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개신교라고 자처하는 형제 교회들의 분파가 도대체 몇인가, 그대들은 현실을 아는가? 이런 현실에 그들을 과연 하느님의 직접 개입을 기대할 수 있을까? ‘현재까지 알려진 성경의 말씀들’에 ‘100% 모든 것을 의존하는’ 개신교는 ‘언제, 어디서나’ 어떻게 그 말씀을 해석하는가 하는 어려울 수 있는 문제를 숙명적으로 안고 산다. 그 중에 ‘분명한 사교’ 집단이 도대체 얼마인지 누가 아는가?

Mainstream개신교 형제들, 대부분 reasonable 한 형제 자매들도 많지만 정말 ‘무식한 목회자’들도 수두룩 닥상.. 어떻게 그런 ‘목회자’가 나왔는지 나는 모르지만 진실로 불쌍한 것은 그 밑에서 그를 따르는 양들임을 알 때 정말 우울해지지 않을 수 없다. 믿음과 이성은 신앙의 두 날개임을 그들은 쉽게 잊는다.

  1. 별 생각없이 이름을 썼다가 본인의 요청으로 삭제를 하며 생각을 했다. 아마도 소속 수녀원의 privacy policy에 저촉이 되는지는 모르지만.. 참 수녀원도 luddite가 되어 가는지는 모르지만, 현 교황님도 twitter애용자임을 알면.. my right is as important as yours is

아틀란타 부부 장례미사

2010년 가을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레지오에 입단하면서부터 죽음에 관련된 의식, 특히 연도, 장례미사를 꽤 많이 다녔다. 나에게 알려진 장례의식은 수동적이건 활동적이건 함께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 다음부터는 두 번 생각하지 않았고, 열심히 함께하였다. 하지만 남편과 아내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던 곳은 없었다.

정확히 일주일 전 토요일 밤에 가까운 친지 윤형의 처남부부가 함께 집에서 어떤 ‘똥포’ monster들에게 살해되는 끔찍한 일이 있었다. 이 monster 2명은 피해자의 사업체에서 해고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앙심을 품은 의도적인 살인인 듯 싶었다. 일본의 야쿠자를 연상시키는 ‘칼에 의한 살해’, 미국에서는 조금 드문 case여서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어제 우리는 둘루스(Duluth)에 있는 성 김대건 성당으로 부부 장례미사에 다녀왔다. 너무나 급작스런 한 부부의 사망은 누구에게나 충격적이고 할 말을 잊는다.

 고인은 나보다 나이가 2살 밑이었고 서울고, 고려대 출신이어서 아마도 거의 같은 시기에 우리는 서울에서 학교생활을 했을 듯 했다. 한국에서 날라온 친구의 정겨운 추억담이 담긴 조사는 우리시대의 정서를 잘도 반영해서 나의 친구 얘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고인 부부의 외아들 조사, 비록 영어로 표현된 부모를 그리는 마음이었지만, 어찌 그 심정을 모르겠는가. 우리 또래의 부모들의 가치관을 그 아들은 잘 표현해 주었다. 그의 결론은, 비록 부모의 생각을 이해 못했던 것도 있었지만 끊임없는 ‘교육열’과 ‘무조건적 사랑’은 고맙게 받았다고 해서, 우리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이 장례미사에서 두 부부의 ‘덜 준비된‘ 영정사진을 보며, 내가 그들의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어떨까, 과연 몇 사람이 나를 기억해 줄까, 고국의 친구들 몇 명이 관심을 가져줄까, 나의 딸들은 나를 어떤 아빠로 기억을 할까.. 하는 두서 없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왜냐하면 그런 날이 생각보다 빨리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멕시코의 성체기적?

지난 주에 멕시코에서 ‘성체기적(Eucharistic Miracle)’이 일어났다고 보도가 되었다. 성모발현 같은 것은 귀에 익지만 성체기적은 상당히 생소하게 들린다. 물론 ‘옛날’에 그런 ‘현상, 기적’이 일어났다고 알려졌고, 기록도 자세히 남아있지만 근래에 그런 것이 있었을까?

성체기적은 간단히 말해서 가톨릭 전례 중의 ‘성찬의 전례’ 때 성체(얇은 조각 빵)가 실제로 물리적으로 살과 피로 변하는 것을 말한다. 상징적으로만 대부분 생각을 하며 성체와 성혈을 먹고 마시지만, 가톨릭 교리는 분명히 그 ‘빵과 포도주’가 ‘살과 피’로 변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니 가톨릭 신자들은 최소한 그런 현상을 ‘상상’이라도 하며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이다.

이번에 멕시코의 ‘사건’은 발생한지 불과 며칠이 되지 않아서 진실 여부는 고사하고 자세한 것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 ‘사건’의 대강 줄거리는 다음과 같이 보도 되었다.

 

지난 7월 24일, 멕시코의 과달라하라(Guadalajara) 대교구 소속 성모마리아 성당의 호세 구디노(Fr. Jose Dolores Castellanos Gudino) 주임신부가 성체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할 때, 번쩍이는 빛과 함께 말소리를 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모이게 종을 쳐라”, “모인 사람들에게 하루 종일 강복을 하겠다. 성체를 모신 작은 감실을 본당 제대 위에 놓아 모든 사람들이 성체조배를 하도록 하라. 커다란 성광(monstrance)을 그 조그만 감실 옆에 놓아라. 감실을 3시까지는 열지 않도록 하라.” “성찬의 전례 때 내가 기적을 보여주겠다.” “이번에 일어날 기적은 ‘동정 마리아가 나타나는 성체의 기적’ 이라고 불릴 것이다. 지금 보여줄 광경을 복사해서 사람들에게 보여라.”

 그 목소리는 계속해서,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게 하는데 이 기적의 소식을 알려주도록 모든 사제들과 이 소식을 나누어라.”

이 소리를 듣고 난 구디노 신부는 “주여, 나는 종입니다.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오후 3시에 사람들이 모였을 때, 그 신부가 감실을 열어 보았을 때 그 성체는 피로 덮여 있었다. 신부님에 따르면, 그 목소리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성체 조배 chapel을 만들고, 과학적 조사를 허용하라고 했다. 이 ‘기적’이 알려지고 나서 곧 대교구 차원에서 조사가 시작되었다.

 

이 기사를 읽고 나서, 나의 생각은 어떤 것일까? 예전에는 믿지 않았거나, 중립적이거나,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충분히’ 사실적이고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그것이 현재 나의 ‘신앙의 정도’라고 하며 조금 이상한가?

한 여름의 봄비, 두 죽음..

¶  한여름 봄비  7월의 마지막 날, 중복더위가 끝나가는 한창 여름에 주룩주룩 봄비가 내린다. 2013년 이 지역(Atlanta Metro) 여름은 ‘아마도’ 내가 경험한 ‘최고의 여름‘으로 오래 오래 기억에 남을 듯 하다. 오늘 아침도, 이제는 눈과 귀에 익은 비, 그것도 봄비 같은 냄새의 비가 주룩주룩 나를 반긴다.

내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곳의 여름은 바로 내가 어렸을 적에 서울에서 ‘흔히’ 느끼던 바로 그런 것이다. 장마 같은 냄새, 섭씨 30도를 ‘별로 크게’ 넘지 않던 온화한 더위, 소낙비, 가랑비, 보슬비, 풀벌레 소리.. 와~~ 1950, 60년대에 내가 냄새 맡고 느꼈던 서울 원서동, 가회동의 여름 냄새가 아닌가? 이런 자연이 주는 포근한 ‘공짜’ 선물은 확실히 올해 내가 여름을 지내는데 매일 매일 잔잔한 기쁨을 주었다. ‘Mother Nature, 자연의 엄마’께 계속 고개를 숙이고 숙인다.

 

Carmel Retreat Center near metro Atlanta
Carmel Retreat Center near metro Atlanta

¶  레지오 피정:   지난 주에 시작되었던 ‘줄줄이 사탕’ 같이 바쁘고 숨가쁘게도 느껴졌던 ‘큰 일’들이 다 막을 내렸다. 그 중에 지난 주말에 있었던 2박 3일의 레지오 피정은 생각과 기대보다 훨씬 풍성하고 기분 좋은 경험을 남겨주었다. 연숙이, 피정을 ‘맨손으로’ 주도하는 꾸리아의 간부라서, 나는 어차피 수동적인 참가자 이외의 역할을 피할 수가 없었지만 나는 노력을 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기에 큰 부담은 없었다.

하지만 피정 중에 보니까, 수시로 나오는 식사준비와 뒷일들 같은 모든 잡일들을 이 4명의 꾸리아 간부 ‘아줌마’들이 도맡아서 하고 있어서 사실 고맙긴 했지만 조금 걱정도 되었다. 그들은 거의 99% ‘희생’만 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어서 조금은 더 일들을 분담하는 것이 더 ‘좋은 그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1988년 폴란드 ‘걸작영화’ ‘사랑에 대한 짧은 film‘ 이란 한 시간 반 짜리 영화감상과 감상소감 나눔으로 시작된 하태수 주임신부님 지도의 이 피정은 한마디로 질적으로 A급이었고, 나도 난생 ‘처음으로’ 진짜 피정의 모습과 맛을 느꼈던 두고두고 생각해야 할 숙제를 남긴 계기가 되었다.

 

¶  부부 살인: 오랜만에 집을 떠났다 돌아오니, 의외의 뉴스가 우리를 놀라게 했다. 또, 이곳 아틀란타 한인사회에 끔찍한 살인사건이 그것이다. 어떤 한인교포 중년 부부가 집에서 칼에 찔려 사망한 것이다. 금전적인 의도가 ‘절대로’ 아닌 것으로 보아 ‘분명히’ 원한에 관련된 듯 했다. 게다가 두 부부는 영세명을 가진 가톨릭 신자부부였다. 그래서 ‘연도’와 ‘장례미사’의 이야기도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 부부는 우리 순교자 성당이 아닌, 새로 분가해서 나간 김대건 성당 소속이라서 우리가 그곳에 가게 될지는 미지수였던 상태였다.

그러다가 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돌아가신 부부는 우리와 절친한, 오랜 교분의 역사를 가진 Men’s Night friend 윤형,그 집 부인, Mrs 윤의 오라버니 부부였다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실.. 정말 믿어지지 않았던 뉴스였다. 사실 지금까지도 믿어지지 않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이 엄연한 사실인 모양.. 고인의 어머님, 그러니까 윤형의 장모님은 어떻게 이런 충격을 견디고 있으실까 생각하니 사실 상상도 못할 지경이다. 어떻게 이런 일들, 그것도 우리와 가까웠던 친지의 가족이.. 현재까지는 사업상 원한을 가진 한인 2명의 소행임이 밝혀졌고 그 중에 한 명은 벌써 체포가 되었다고 한다. 사업상 원한이라면 과연 어떻게 그런 불상사를 피하며 사업을 할 것인가.. 참 사업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Tweeting & talking about dying mother, Scott Simon
Tweeting & talking about dying mother, Scott Simon

¶  Simon’s Mother의 죽음:  잠시 CBS-TV를 보니, 내가 잘 아는 NPR(National Public Radio) 단골 journalist인 Scott Simon의 얼굴이 보였다. 그것도 ‘거의 우는 모습’으로.. 조금 더 자세히 보니, 그의 어머님이 돌아가신 것에 대한 것.. 조금은 의아한 것이, 어떻게 그의 어머님 사망이 뉴스거리가 되었을까? 하기야 ‘유명인’이니까 유명세를 치르는 것일까 했지만, 이것은 그것과 반대의 case였다.

자기 어머님의 임종을 거의 ‘일부러’ 대중에게 알리는 것..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약 일년 전에 나는 twitter로 그를 ‘따라간’ 적이 있었는데, 그는 완전히 이것에 ‘미쳐’있는 듯 했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24시간 이곳에 공개를 하는 듯 했는데 그는 그 자신과 가족의 privacy에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 했을 뿐만 아니라 거꾸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었다.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내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어린 딸의 신상을 쉬 임 없이 ‘방송’을 하고 있었던 사실.. 이것은 아무리 보아도 지나친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런 모습의 극치를 보이듯이, 자기 어머님의 ‘죽어가는 과정’을 24시간 twitter로 방송을 한 모양.. 참.. 이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나는 죽는 과정, 죽음, 장례식 같은 것은 가급적 개인적이고 가족적인 ‘사적인 엄숙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는 정반대인 case인 셈이다. 더욱 웃기는 것은 tweeting도 모자라서 아예 CBS-TV에 그 자체로 인터뷰를 한 것인데,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이 사람은 자기 어머님까지 ‘파는’ 완전히 publicity에 미친 사람인가?

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25

니즈맞춤혁신, 대박성공의 진원지

2013.07.31

기업이 지나치게 영리만을 꾀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요구를 반영해 가치창조(또는 부(富)창조)등의 우호적인 표현을 빌려서 기업존재에 대한 사회적 당위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있지만 어떻게 표현하든 기업의 본질은 여전히 이익추구에 있다.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기업 CEO가 지녀야할 자질과 역량을 기업의 존재목적과 관련시켜보기로 하자. 기업의 궁극적 목적은 이익추구다. 기업이 지나치게 영리만을 꾀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요구를 반영해 가치창조(또는 부(富)창조)등의 우호적인 표현을 빌려서 기업존재에 대한 사회적 당위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있지만 어떻게 표현하든 기업의 본질은 여전히 이익추구에 있다.

 이는 어떤 상황에서건 리더로서 기업 CEO의 소임과 책무는 기업본연의 목적인 이익추구에 충실해야함을 강조해 준다. (여기서 이익추구에 충실해야 함에는 물론 옳은 방법으로 추구해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기업이나 이익추구란 말만 나오면 대뜸 그러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만 많이 내면 되느냐며 대드는 단세포 인간들과 또 기업은 돈 버는 조직이 아닌 사회봉사기관 정도로 착각하고 있는 얼빠진 친구들이 현재 우리 사회에 너무 많기에 본 독자들 중에는 그런 류의 인간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익추구에 충실한 기업 CEO의 대표적 인물들은 어떤 분들일까? 물론 성공한 기업 CEO들임이 틀림없지만 가장 두드러진 분들은 아마도 자수성가(自手成家) 억만장자들일 것이다.

 

여기에 물이 있다.

천주교 예비자 교리교과서 여기에 물이 있다
천주교 예비자 교리교과서
여기에 물이 있다

‘여기에 물이 있다’.. 표지가 노~란 촉감이 아주 부드러운 책의 제목인데, 이 책은 천주교 영세를 원하는 ‘예비자’들을 위한 교리 반 학생용 ‘교과서’이고 내가 가진 것은 ‘교사용’이란 말이 더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학생용 책에다가 교사에게 도움이 되는 것(cheat sheet,해답) 덧붙인 책이다. 잠깐 훑어보면 교과서치고는 정말 부드럽고 읽기 쉽고, 읽고 싶어지는 그런 느낌을 준다.

이것을 어제 연숙과 같이 성당에서 받아가지고 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교리교사의 역할을 ‘조금’ 맡게 된 것이다. 정식으로 는 예비자 교리반의 ‘교리반 봉사자’ 가 되는 것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교리반은 교리교사 여럿이서 책임지고 가르쳤지만 올해부터는 ‘완전히’ 체제가 바뀌어서 새로 부임하신 수녀님이 교리반의 ‘유일한 책임 교사’가 되고 나머지는 모두 ‘봉사자’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우리 부부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교리반 봉사자가 되었는지 아직도 우리는 모른다. 아니 확실치 않다. 어느 날 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신부님(하태수 미카엘)께서 연숙에게 ‘제안’을 했다고만 들었고, 기왕이면 부부가 같이 ‘봉사’를 하라고 하셨다고 들었다. 처음에는 사실 ‘청천벽력’ 같이 느끼기도 했지만, 우리가 속한 레지오(마리애)의 으뜸 사명인 봉사(service), 순명(obedience)을 염두에 두고 생각을 곰곰이 해보니 거절할 명분도 느낌도 없음을 알고 비교적 쉽게 OK를 하였다. 드디어 예비자 교리반이 8월 초에 시작하게 되어서 어제 수녀님을 중심으로 봉사자 모임에 참석하여, 이 책을 받아오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어제 수녀님께 분명히 ‘우리는 왕초보’라고 말씀을 드렸다. 하지만 왕초보라는 말에는 별로 신경을 크게 쓰지는 않으심을 알았고 ‘교리 실력’ 이 전부가 아니라는 느낌도 받았다. 보살핌과 가르치는 방법, 그리고 ‘간단한 정통교리’가 더 중요한 것을 알았고, 자칫하면 쉽게 범할 수 있는 ‘은밀한 개인적 밀착’의 위험성을 수없이 강조함을 듣기도 했다. 모두 이해가 가고, 수긍이 가는 말씀들이었다.

비록 봉사, 순명의 정신으로 (봉사자 역할을) OK를 했고, 이 ‘교리반 봉사’의 과제와 책임이 우리 둘의 신앙생활, 여정에 어떤 의미와 결과를 남길지는 미지수 이지만, 신부님께서 친히 부탁(지시)을 하신 것을 보면 조금은 자신감을 가지고 노력을 해야 하고,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7월 넷째 주, 줄줄이 사탕..

World Youth Day 2013이 표현을 쓰며, 혹시 spelling checker가 불평을 하지 않을까 잠깐 생각하기도 했지만 의외로 깨끗한 ‘하얀’ 반응 (빨간 줄이 없는)을 보였다. 최소한 내가 매일 쓰는 Microsoft Notes가 쓰고 있는 spell-checker engine은 이 표현이 괜찮은 모양인가.. 나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한글사전은 아직도 한반도를 떠난 1973년에 고정이 되어있기에 한글은 항상 나의 관심사일 수 밖에 없다. 줄줄이 사탕은 나와 연숙이 쓰는 우리들의 ‘속어’로써, 무언가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말한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새겨서 들어 짐작을 하곤 할 것 같다.

 2013년 7월 21일로 시작되는 주일.. 무언가 줄줄이 사탕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서, 조금은 미리 숨이 찬 느낌일까, 반은 기대, 반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그런 심정이다. 23일 화요일은 평상적으로 우리의 자비의 모후 레지오 주회가 있는 날이지만 덤으로 그날에는 우리단원 실비아 자매님의 부군 Billie Neal 베드로 형제의 1주기 연도가 있다. 그러니까 미사 후에 연도를 하고, 의례적으로 상주가 준비한 점심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작년 7월처럼 올해의 7월도 세상을 떠나는 영혼들을 보내는 시간을 적지 않게 보내고 있다. 관혼상제 중에서 이 ‘상喪’ 은 우리 레지오 단원들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라 나는 가급적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런 곳을 찾고, 슬픔을 나누는 것은 물론 떠난 영혼과 가족들을 위한 것이지만 다른 쪽으로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되기도 했다.

이틀 후 7월 25일, 목요일은 ‘우리들이 1년 동안 기다리던’ 우리 레지오 단원이었던 고故 은요안나 자매님의 연도가 저녁에 예정이 되어있다. 암으로 오랜 투병을 했던 이 자매님은 운명 직전까지도 레지오 행동단원이었다. 작년 7월 26일 아침에 긴 투병생활을 마감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갔고, 몇 년간의 투병생활에서 보여준 ‘믿음과 활동’의 생활은 우리들과 특히 나에게는 귀중한 교훈이 되었다.

그래서 그 자매님의 영혼을 기리는 연도가 더 빠른 시기에 있기를 기다렸지만 결국은 1년 주기가 되어서 열리게 되었다. 각각 다른 사연과 교훈을 주는 연도들이 많이 있었지만 나에게 가장 ‘가까운’ 연도는 아마도 이 은요안나 자매의 연도일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다음날 7월 26일 금요일은 우리가 속한 천상은총의 모후 꾸리아 주관 2013년 레지오 피정이 시작되는 날이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2박3일 예정의, 집을 떠나는 진정한 피정(retreat)이고, 우리 부부도 올해 처음으로 육체적으로 집을 떠나는 다른 의미의 휴가, vacation가 된다. 집을 밥 먹듯이 떠나며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이런 2박3일의 피정이 별 것이 아니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조금 사정이 다르다.

연숙은 꾸리아 간부이므로 준비와 진행과정을 꿈속에서 볼 정도로 일이 많아서 stress까지 느끼고, 나는 비록 수동적으로 참가하는 단원이지만 ‘간부의 spouse’ 이기에 나에게도 무언가 일의 불똥이 튀는 것은 피할 도리가 없다. 하태수 주임신부님이 같이 retreat center에 기거하며 우리를 지도해 주시게 되어있는데, 이 하태수 신부님의 주일 강론을 가끔 들어보면 우리와 무언가 잘 맞는 느낌이 많이 들고 ‘학구적’인 각도가 많아서, 최소한 지루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부터 1주일간은 사실 몇 년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따르는’ World Youth Day 2013 행사가 브라질 항구도시 Rio de Janeiro의 유명한 코파카바나 Copacabana 해변에서 남미 아르헨티나 출신(브라질의 바로 옆 나라) 출신 새 교황님 프란치스코 교황이 참가한 가운데 펼쳐진다. 조금 있으면 성인이 되실 내가 진정으로 존경하는 요한 바오로 2세, John Paul II, 가 젊은이들에게 ‘다른 희망’을 주고자 1985년경에 시작한 이 ‘멋진 행사’는 이제 관록이 대단하고, 이곳에 참가한 많은 청년들이 나중에는 성소를 받고(하느님의 부르심), 다름 세대의 universal church를 이끌기 시작하고 있다.

역시 요한 바오로 2세의 선견지명이 그 동안 뿌린 씨앗들의 수확을 거두고 있고, 이런 ‘세계적 행사’를 통해서 계속 씨를 뿌리고 있다. 이제는 인터넷 같은 신세대 매체의 도움으로 이들은 아주 효과적인 선교를 하고 있는데, ‘한 물이 간’ 우리 세대에 까지 이렇게 ‘도움’을 주고 있음에 그저 ‘성인이 되실’ 요한 바오로 2세에게 감사를 드린다. 2년 전 스페인 마드리드의 대회도 관심을 가지고 나는 이 의미 있는 행사를 ‘따르며’ 보았는데, 올해는 과연 얼마나 가까이 따르게 될는지는 미지수이다.

무언가 많은 이번 주 일주일이 지나면 7월도 거의 끝나게 된다. 이 아틀란타 지역의 올해 기후가 완전 ‘이상, 이상, 이상’ 해서 한 여름 같은 느낌을 잊을 정도지만 절대로 불평은 없다. 8월이 시작되면 역시 기울어지는 여름이 될 것이고 찬 바람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8월부터는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2014년 부활절 목표로 신 영세자 교리반이 시작되는데 올해부터는 format이 완전히 바뀌어서 새로 부임해 오신 ‘진짜 국산 수녀님’의 주도로 진행이 되고, ‘어쩌다’ 우리 부부도 ‘봉사자’로 ‘곁다리’를 들게 되어있어서 우리부부의 ‘교리실력’에도 많은 보탬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누가 알 것인가.. 어떻게 될는지.. 하지만 우리들의 ‘중재자’, 어머님께 모든 것들이 잘 되도록 부탁해 본다.

Two Poets

50대 초에 처음으로 시의 세계에 눈이 뜨이면서, ‘오래 살고 볼 것이다..’ 라는 생각도 할 정도로 나는 나의 ‘변신’에 놀라기만 했다. 소설이나 역사라면 조금 그렇다 할 지라도, ‘시’라면 나에게는 정말 hell no 였다. 이것과 비슷한 종류 중에는 opera가 또 있는데, 이것은 ‘아직도’ hell no 의 영역에 속한다. 이제 살만큼 살았으니 ‘오래 살고..’ 어쩌구.. 는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기만 한다. 시의 세계는.. 한마디로 ‘상상의 여지’를 너무나 많이 주고 있어서 나에게 appeal하는 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우연히’ 서로 전혀 상관도 없고 반대편의 세계에 있는 두 시인의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하나는 서울을 중심으로 만주 용정과 일본 등, ‘3개국’ 을 오가며 불운의 시기 일제강점기(나는 ‘일제시대’가 더 익숙하다)에 반항적이지만 서정적으로 포근한 시의 세계를 펼치고 20대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연세대 동문 큰 선배님, 연희전문 출신 시인 윤동주 님, 다른 하나는 20세기 후반, 아직도 활동하고 있는, 대한민국 반대 쪽의 캐나다 출신, poet, novelist로 시작한, 하지만 folk singer song-writer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읊조리는 노래의 주인공 Leonard Cohen (한글 표기는 어떨까.. 아마 ‘레너드 코언‘, ‘레너드 코헨’ 정도가 아닐까? 나는 직감적으로 ‘레너드 코언’으로 육성 발음을 들었다.)가 바로 그들이다.

20대 윤동주 시인
20대 윤동주 시인

윤동주 시인은 사실 어렴풋이 익숙했던 이름이지만 (왜 그런지 잘 모름), 알고 보면 연희전문 출신이라는 것, 20대에 요절한 서정시인이라는 것, 그 이상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시인의 유일한 출판물 첫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도 시인이 타계하고 3년이 훨씬 지난 1948년(내가 태어나던 해)에 ‘유작’으로 나왔고 1970년대 이후가 돼서야 다른 유작이 발행되었기에, 우리의 중,고교시절의 국어 교과서에서 못 보았던 이름이었을 것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어떻게 이분이 숨어있는 보물인 모양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case는 몇 년 전, ‘불후의 가곡’ 보리밭의 작곡가 윤용하 님의 슬픈 일생을 나의 blog에서 회상했을 때도 있었다. 역시 늦게 ‘숨은 보물’을 찾는 그런 기분이 똑 같았다.

 이 두 시인들이 나에게 요새 다시 다가온 것은 조그만 이유가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경우는, 윤 시인의 초기 대표 작 ‘별 헤는 밤‘을 통해서 왔다. 나는 정말 심심할라 치면 typing 연습, 그것도 한글typing연습을 ‘즐긴다’. 내 나이 또래의 평균치를 훨씬 웃도는 빠른 속도를 자랑하지만 그만큼 ‘오타’도 피할 수가 없는데, 그 ‘오타’좀 줄여보려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시간 죽이는데 이것처럼 효과적인 것도 없기 때문이다. 아래아 한글 typing practice program으로 연습을 하는데, 그곳에 바로 예문으로 나오는 것 중에 ‘별 헤는 밤’이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윤동주 시인 시의 세계가 나에게 왔는데, 웃기는 것은 얼마 전까지 나는 이 ‘글’이 보통의 시가 아니고 아주 짧은 ‘산문’인 줄로 착각을 하였다. 그만큼 나는 윤동주 시인을 잘 몰랐던 것일까? 이 글을 typing할 때마다 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적막, 고요, 쓸쓸함, 천국의 어머님, 소백산 연화봉 하늘의 쏟아지던 별빛.. 등이 온통 나에게 지독한 감정의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옴을 느끼곤 하고 전율마저 느끼곤 하였다. 그것이 바로 윤동주 시의 세계였다.

 

singing poet, Leonard Cohen
singing poet, Leonard Cohen

레너드 코언.. 윤시인과는 은하계의 반대편에 있음직한 느낌을 주는 시인, 읊조리는 시인 가수.. 캐나다 사람, 1934년 생.. 그러니까 윤동주 시인보다 17세가 ‘젊고’ 80세가 가까운 아직도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 시인출신 가수는 아마도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람인데 반해서 좋아하는 사람들은 거의 cult적인 존재로 사랑을 받는다.

그의 가창 style은 미국의 Bob Dylan 정도로 보면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지만 시인출신인 만큼 아무래도 ‘가사’에 더 큰 의미와 중요성이 있을 것이다. 내가 처음 이 시인을 ‘알게’ 된 것은 아마도 1980년대 초일까, Ohio State University에서 만났던 연세대 후배 금속공학과 심상희씨가 그의 열렬한 fan이었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그 당시에 나는 사실 레너드 코언 을 잘 몰랐지만 그가 나에게 아느냐고 물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고 대답한 기억이 난다. 그때의 그의 표정이 코믹할 정도로 ‘냉소적’이었던 것 같았다. 그러니까.. ‘당신 거짓말이지..’ 하는 그런 표정이었던 것이다.

심상희씨가 이 시인출신 가수에 심취했던 것은 나중에 조금 이해를 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불교가 이유가 아니었을까. 심상희씨는 비록 그 당시 우리와 같이 성당에서 영세를 받긴 했지만 대학시절에는 불교에 심취했었다고 했다. 그리고 레너드 코언 도 알고 보면 불교에 심취했었고 1996년에는 ‘공인 승려’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노래에 더 심취했었을지는..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이 시인가수지만 그 후에 세파에 휩쓸려 또다시 그의 세계를 잊고 살았다.

Leonard Cohen in 60's
Leonard Cohen in 60’s

며칠 전, New York Times 기사 중 에서 정말로 우연히 Leonard Cohen의 이름을 보게 되었다. 도서관에 사서 librarian 로 근무하는 어떤 중년여성이 1975년경에 경험한 이야기로서 ‘레너드 코언과 지낸 어떤 밤’ 이란 제목의 회고수필이었다.

그 당시에 그 여성은 University of Chicago의 여대생이었는데 자기 친구와 같이 그의 concert에 갔었고, 공연 후에 근처 diner에서 식사를 하다가 Cohen의 band 일행과 우연히 마주쳤고, 호텔로 따라오라고 해서 갔다가 그와 한 침대에서 밤을 지낸 이야기였다. 이런 류의 여성들을 흔히 groupie라고 불렀는데, 이 두 여성은 사실 그런 류는 아니었고, Cohen역시 그런 류의 여성들과 ‘밤을 보내는’ 그런 type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아주 ‘깨끗한 밤’을 셋이서 보낸 이야기였다.

이기사를 쓰면서 이 여성은 Cohen의 manager에게 편지를 보낸 모양이고 회답에 ‘흥미로운 추억’이라고 썼다고 한다. 거의 40년 전 몇 시간의 일이었으니 사실 아름답게도 느껴지는 추억일지도 모른다. 당시 불교에 심취했던 Cohen이 여대생들을 밤에 어떻게 대했을까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렇게 해서 레너드 코언이 나에게 다가왔고 잠깐이나마, 오래 전에 알았던 Ohio State의 심상희씨와 그의 가족도 회상한 계기도 되었다.

 

캐나다 출신의 가수 중Gordon Lightfoot라는 folk singer가 있었다. 1970년대에 나는 꽤 그의 곡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특히 비 오는 우중충한 그런 날에 우중충한 ‘자취방’에 누워 ‘백일몽’을 꾸며 그의 곡을 듣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의 백미였다. 그는 레너드 코언보다 훨씬 더 대중적이라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그들 모두 곡 자체보다는 ‘가사’에 의미를 두는 사람들이다.

어딘지 모르게 캐나다의 ‘춥지만 포근한’ 기분을 듬뿍 맡게 해 주는 진정한 folk singer들이었다. 모두들 이제는 classic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지만, 도대체 요새 ‘아해’의 ‘음악’은 그것이 과연 10년의 생존율이라도 있는 것인지.. 한마디로 이 분야는 솔직히 말해서 시대적으로 ‘퇴보’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Leonard CohenSuzanne

 

Neil DiamondSuzanne
나는 이 Neil Diamond version을 Leonard Cohen의 original보다 더 좋아한다

 

 
Judy Collins‘ rendition of Suzanne

 

 
Gordon LightfootEarly Morning Rain

 

 

A Day in the Life

Florida Keys
Florida Keys

¶  7월도 tipping point를 지나간다. 이제는 서서히 8월을 향해서 ‘쓰러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요새의 한 달의 느낌은 예전의 일 주일 정도라고나 할까.. 어찌 그렇게 세월의 느낌은 나이의 느낌과 비슷할까.. Mother Nature의 축복을 흠뻑 받으며 올해의 여름은 기가 막히게도 시원하고 시원하다. 몇 년간의 갈증을 완전히 복수라도 하듯이 엄청 많은 ‘물’을 쏟아 주셨고,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다.

나머지 여름, 기껏해야 한달 반.. 암만 더워도 달게 받으리라. 그러다 생각하니 그렇게 많이들 가는 여름휴가.. 이제는 ‘휴가’라는 말 조차 잊은 것일까. 연숙도 다 잊은 모양으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우리 집 자체가 summer house같이 느끼는 것일까? 집에 있는 자체가 summer vacation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편하게 느끼면 되지 않을까?

올해는 잠시 잠시, 미국의 ‘최남단’ Florida Key West와, Hemingway의 소설이야기를 향해서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그대로 차를 몰고 집을 떠날까 하는 충동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의 대표작, 중학교 때 영화로 보았던 ‘무기여 잘 있거라 (A Farewell To Arms)’ 그리고 킬리만자로의 눈 (The Snows of Kilimanjaro)등을 최근에 다시 보게 되면서 더 그곳을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리 속에서만 머문 것이 되나 보다.. 그렇게 올해의 여름도 끝날 것인가?

 

 ¶  이동수 목사.. 이동수 선생, 어떨 때는 형제와 같이도 느껴지는 사람.. 하지만 꿈속에서나 보는 느낌으로 오랜 세월을 못 보고 지낸 그런 사람, 어제는 우리 부부가 정말 오랜만에 꿈에서 깨듯이 그 집을 방문해서 부인, 이미섭 선생이 정성스레 마련한 ‘일식’ 점심을 같이 하며 해후를 풀었다. 한마디로 ‘은혜로운’ 몇 시간을 우리들은 만끽하였다.

골방에서 거미줄을 치우며 조금씩 빛을 향해 개미행진을 시작한 지 2년여가 되어가지만 아직도 나는 그 개미행군을 계속하는 느낌이다. 1990년 초, 우리가 아틀란타에 이사온 후 시작한 아틀란타 한국학교에서 우리부부와 그 집 부부는 같은 선생님으로 만났고 그것이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서 우리들은 ‘인연’이 생기게 되었는데 교장문제 같은 하찮은 ‘정치싸움’에 우리는 본의 아니게 휘말리고 결과적으로 다 그곳을 떠났는데, 그 이후로 사실 우리 들은 헤어지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그야말로 생사 여부나 간신히 알 정도로 지내게 되었는데 얼마 전 연숙이 정말 우연히 이동수 목사를 보게 되었고 어제는 집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의 ‘지인’에 속하는 이동수 목사.. 이렇게 다시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은 이제는 절대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세상에는 100% 우연이란 없다는 것을..

 

¶  몇 년 전 우리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얻어온 선교용 CD를 조심스레 rip해서 youtube에 올려 놓았다. youtube 를 배우려 한 목적도 있었지만 내가 들어 본 그 CD는 한국 천주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만든 것이라 아주 professional한 것이라 나도 다시 들은 것도 많은 수준 급이어서 혹시 천주교를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큰 무리가 없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것이 ‘인기’가 있을 것은 절대로 기대하지 않았고, 사실 그랬다. 불과 200 views도 채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찌 문제가 되는가.. 단 한 명이라도 ‘무언가’ 느끼면 되지 않겠는가?

문제는 toxic comments에 있음을 오늘까지 몰랐다.. stupid, toxic, absurd, destructive comments..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의 ‘시간을 죽이는 한가한 인간들’의 넋두리를 그대로 방치한 것이다. comment review & approval을 해야 하는데..하는 후회가 있었지만 늦었다. 어떤 ‘불쌍한 자매님’이 불쌍한 comment를 달아놓았다.

‘교황은 지옥에 있다’라고 시작된 이 Kafka-ish한 느낌은 정말 어찌 처리하는가.. 속으로는 ‘지옥은 당신들… 당신이나 잘하시오..’ 하는 감정도 잠시 치솟지만 그래도 나는 레지오(마리애)의 정신에 조금은 익숙해졌는지 곧바로 평정을 가다듬고 이 불쌍한 영혼을 위한 기도가 생각나면서 ‘아하.. 이래서 우리 레지오가 세상에 필요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아.. 세상에는 참으로 불쌍하고 무식한 영혼들이 많이 있구나.. 하지만 무식해도 바르고 깨끗한 영혼들도 많이 있는데..

 

¶  Coursera: 약 6주전에 성당교우 설재규씨가 이곳, online university course website, coursera.org를 소개해 주었다. 이곳은 전 세계(주로 미국)의 여러 대학 online course들을 online student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비교적 새로운 academic course provider이다. 인터넷을 이용해서 computer로 강의를 듣게 하는 idea는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이렇게 다양하고 세계 굴지의 교육기관 (주로 미국의 대학들)의 course들을 ‘한 곳’에서 제공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다.

각 대학들은 이미 자체 방식대로 그 동안 credit course들을 ‘유료’로 제공을 해 왔지만 이 coursera.org는 ‘기본적으로’ ‘무료’인 것이다. course를 제공하는 학교들과 이것을 한 곳에서 제공하는 coursera 는 어떻게 무료를 가능케 한 것일까? 특별한 ‘광고’들이 보이지 않기에 광고수입은 관계가 되지 않는데,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이 course들의 학생 숫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고, 이것 자체가 각 대학들을 ‘선전’하는 금전적 효과를 노린 것이 아닐까? Open & Free가 새로운 문화로 정착하는 이즈음, 이것도 그런 맥락에서 절대로 이해가 가는 시대를 앞서가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주간 나는 University of Rochester에서 제공하는 Fundamentals of Audio & Music Engineering : Part 1 Musical Sound & Electronics란 ‘거창한’ 제목의 course를 ‘경청’하려고 노력을 해 보았다. 학교 강의실이 아니고 편한 집의 cushy한 환경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사실 oxymoronic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나에게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이 course로 나의 성적표 기록이 남는 것도 아니고 남에게 잘 보이려는 것도, 이제 취직을 하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재미와 보람’만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특별히 이 sound & music course를 택한 것은 내가 이곳을 처음 찾던 날 ‘개강’을 한 것이 제일 큰 이유였지만, course description에 final project로 guitar amplifier를 설계, 조립을 한다는 것이 귀가 솔깃해진 것도 결정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요사이 나는 야마하 ‘통(acoustic)기타’를 guitar pickup과 Beringer amplifier, buzz pedal을 연결해서 쓰는 중이어서 이런 분야에 관심을 둔 것도 또한 이유가 되었다.

이것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 중에는, calculus를 포함한 대학 level 수학을 정말로 많이 잊어 버렸다는 것.. 학교를 떠난 후 이 ‘이론적 수학’을 써볼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는 변명만 찾기에 나는 급급하고 있을 정도로 사실 당황을 하였다. 세월이 그만큼 흐른 것 때문일 것이다. 전기공학과 2학년 수준의 AC circuit analysis도 많이 잊어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생애 전공’이 거의 digital, microcontroller, embedded software였으니, 그 쪽은 정말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편으로는 너무나 ‘향수’를 느끼게 하는 그리움 같은 것도 느껴서 그렇게까지 괴롭지는 않았다.

My current & upcoming courses from Coursera

My current & upcoming courses from Coursera

 

3일 뒤에는 다음 course, Introduction to Guitar가 시작이 되는데, 사실 이것을 ‘청강’해 보려는 것은 과연 진짜 pro들은 어떻게 guitar를 치는가 하는 것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course의 설명을 읽어보면 ‘아마도’ 기타를 처음으로 시도해보는 사람들을 위한 것 같아서 시간 낭비가 되지 않을까 우려도 되지만 무슨 상관.. Free & Open이 아닌가? 3주 뒤에는 올해 나의 진짜 관심사, 이스라엘의 대학에서 제공하는 A Brief History of Humankind인데, 소개 video를 보면 정말 어떤 각도로 ‘인간역사’를 조명하는가가 궁금해진다. 나의 다른 희망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지만 어떨지 모른다.

 

 
A Day in the Life, Beatles, 1967

 

 

 

Guest Blog: 김인호의 조갑제 컬럼 2

시대사조(時代思潮) 탁류에서 우리의 선택은..

2013.07.15

시대사조(時代思潮) 탁류에서 우리의 선택은 양자역학(量子力學)에서는 원자레벨 이하에서는 확정적 질서가 아닌 다만 하나의 패턴을 갖기 때문에 거기에서의 관계는 단지 확률로서만 얘기될 수 있다고 전한다.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선의의 거짓말(a good lie)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쓰이곤 한다.

사람에 따라서 거짓말은 절대적으로 나쁜 것이기에 선의의 거짓말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다수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유익을 가져오거나 적어도 불이익을 가져오지 않는 한 거짓말이라도 선한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아예 거짓과 거짓말을 전략・전술수단으로 활용하여 인간이 지닌 이해력과 판단력은 물론 양심을 마비시켜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옳음과 그름에 대한 인식을 헷갈리게 하여 공산주의 이념을 구현시키려고까지 한다.

 물론 이런 주장을 놓고,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옳은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는 상대주의(relativism)와 각자마다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다원주의(pluralism)가 현대를 풍미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에서의 주장과는 달리 거짓과 거짓말을 전술적・예술적으로 구사해 온 공산권은 이미 망하는 길로 접어든 북한만 남겨두고 모두 망했거나 사라진 사실을 역사는 생생하게 전해준다.

 거짓과 거짓말 이외에도 동성애, 사형제도폐지, 안락사, 낙태, 피임, 수간 등등에 대해서도 서로 상충되는 무수히 많은 주의주장들이 세상에 난무하고 있다.

 상대주의 하에서는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절대적으로 그른 것도 없다며 모든 게 다 수용되게 되다 보니 서로 상충․모순 된 것들도 동시에 공존하게 된다. 그리하여 상대주의가 지향하는 상호이해(相互理解)에 의한 공존(共存)은 일시적인 것으로 그치게 되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오히려 이견(異見)과 반목(反目)과 투쟁(鬪爭)과 전쟁(戰爭)을 불가피하게 만들 수 있다.

 

Guest Blog: 김인호의 조갑제 컬럼 1

하늘이여! 이 땅에 인재들을 보내소서!

2013.07.11

국익(國益)과 애국심(愛國心)이란 말을 우리들이 아닌 오히려 탈북동포로부터 듣는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의 미래가 걱정스럽다.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십 수년 전 영국 쉐필드(Sheffield)에 있는 한 단조(鍛造)공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노후해 보이는 공장시설과 주로 수동(手動)으로 이루어지는 원시적인 작업방법을 보면서, 국내의 현대화된 공장과 자동화 시스템을 갖춘 생산시설 등을 주로 보아온 필자에게 은근히 자긍심이 솟았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곳에서의 주 생산품이 우주항공물체의 머리 부분에 들어가는 특수재질의 특수부품이며 그 납품처가 NASA라며 세계에서 자기네만이 만들 수 있다는 득의에 찬 설명을 접하는 순간 약간의 외경심이 솟으며 산업기술력(産業技術力)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새삼 되새겨본 기억이 난다.  

  25여 년 전에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기차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배스또로스(Vstors)라는 곳의 한 핵연료가공(nuclear fabrication)공장을 어렵게 방문한 적이 있었다. 경계가 엄한 핵단지(核團地)인 그곳에서의 인상은 대단히 평화스러워 보였지만 장미열매를 익혀서 먹는다며 자기고장의 특징을 유창한 영어로 설명해 주던 건장한 체구의 공장장은 대단히 거만하고 교만해 보였다. 핵연료 가공시설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던 당시 비(非) 엔지니어인 필자가 던지는 우문(愚問)탓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받는 자가 아닌 주는 자의 입장에서 내보이던 여유로운 태도에서 오는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사실 스웨덴은 900만 명 정도의 조그마한 나라이면서도 노벨상(Nobel Prize)을 주는 나라다. 주는 자리와 받는 처지가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은 그네들의 산업에서도 당시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자동차, 전기통신, 원자력발전, 항공사, 기관차 부문에서 Volvo, Saab, Ericsson, ASEA, SAS 등 유수의 세계적 기업들이 세계시장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당시와는 사정이 많이 달라져있지만. 

 

  십여 년 전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철강 엔지니어링회사 Voestalpine 를 방문해서 그네들이 자랑하는 연구진의 연구결과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때 연구진들은 나이가 꽤 듬직한 기술자들이려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이도 어리고 화장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젊은 여성 엔지니어들이 상당수였던 사실에 오스트리아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일면 깨달았던 기억이 새롭다.

  시드니(Sydney)의 해수욕장이나 몰디브(Maldives)의 고도(孤島), 태국 파타야(Pataya)해변, 필리핀 보라카이(Boracay)해변 등의 요지에 의례 있기 마련인 스위스인 소유의 별장이나 빌라를 보면서 문득 커피 한 톨 생산되지 않는 나라가 향(香)으로 세계를 제패하는 역량을 지닌 스위스의 저력이 연상되었던 적도 있었다. 사실 스위스의 저력은 국토면적이 우리의 반(半)도 안 되며 인구는 1/6이 안되면서도 2012년 현재 Fortune 글로벌 500대기업에 우리보다 2개사가 더 많은 15개가 속해 있는 데서도 확연히 들어난다.

  전 세계 많은 당뇨환자들이 맞고 있는 인슐린(insulin) 주사약은 양돈(養豚)국인 덴마크에서 생산되어 미국의 제약회사를 통해 공급함으로써 고(高)부가를 이룬다는 사실은 2011년 덴마크의 1인당 국민소득 4만 불선이 어떻게 해서 얻어지는가를 잘 보여준다.

  특수강(特殊鋼)하면 당연히 독일 회사이려니 생각했던 필자에게 한 독일인 기술자가 특수강은 누가 뭐래도 이태리 밀란(Milan)의 다니엘리(Danielli)라며, 섬유 패션을 비롯한 전문성의 원천이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로마인의 후손(後孫)이라는 그네들의 자부심과 무관하지 않음도 상기시켜 주었던 적이 있다.

  유럽의 대학교 하면 제일 먼저 Oxford, Cambridge 등을 떠 올리지만 영국의 Cranfield, 네델란드의 Erasmus, 스위스의 St. Gallen, 이태리의 Bocconi 등이 굉장한 경쟁력을 지닌 학교임을 아는 이는 흔치 않다.

  호주의 소젖을 덴마크의 기술로 가공 처리하여 동남아 시장에서 판매하는 우유 사업주는 대만인 화교다.

  한국은 대(大)국도, 소(小)국도 아닌 중간 정도 국가로 작년(2012)에 50-20 (인구 5천만 일인당 소득 2만 불) 클럽에 진입한 세계 7번째 국가로 선진국(developed country)으로 불리는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G2를 자처하는 중국은 힘을 바탕으로 역사왜곡(歷史歪曲)을 통해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진행하고 있으며 또 떼거리로 서해를 유린하면서 이어도(離於島)도 들먹이고 있고 한편 일본은 독도(獨島)의 영토관할권에 대한 도전을 통해서 그들의 패권을 신장시키려 하고 있다. 지구촌 어디에도 없는 체제세습의 북한은 핵(核)놀이를 통해 까놓고 우리의 생존을 본격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자, 이들 틈바구니에서 우리를 지키기 위한 강한 힘을 우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찾을 것인가?

  지금 우리는 글로벌 대(大)격변의 어려움 속에서도 대한민국의 지속번영을 추구하려는 국가수호(國家守護)애국세력과 오직 지역(地域)과 이념(理念)과 과거(過去)를 붙들고 늘어지는 국가부정(國家否定)무리들, 반(反)국가세력들로 대단히 혼란스럽다.

  군복무 10년간 휴가 한번도 못나오는 군대를 오직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가려 해도 키 147cm, 체중 35kg이 못돼서 군대에도 못가는 북한의 그 수많은 피골이 상접한 젊은이들을 보면서도, 심지어는 몇 십, 몇 백만의 인민들이 굶어 죽어가는 데도 그런 곳을 그렇게도 향모 하는 반(反)국가무리들의 광란은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가는 심각한 수준에 다 달은 느낌이다.

  국익(國益)과 애국심(愛國心)이란 말을 우리들이 아닌 오히려 탈북동포로부터 듣는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의 미래가 걱정스럽다.

  이런 절박함 속에서 지역・세대・계층 간 대립(對立)대신에 화합(和合)과 공동선(共同善)을 추구하며 우리의 강함을 과거(過去)가 아닌 미래(未來)에서 찾고 반(反)국가세력에 대한 정화(淨化)・순화(醇化)를 도모하면서 국력을 응집시켜 대한민국을 선(善)하고 강(强)한 나라로 키워갈 국가경영 지도자와 그를 보필할 참으로 깨끗한 인재들이 과연 이 땅에는 없는 것일까?

  하늘이여! 당신 뜻을 경외(敬畏)하며 따르는 의(義)롭고 깨끗한 지혜로운 인재들을 이 땅에 보내소서!

 

글 / 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