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마지막 달, 첫 날에는..

벗 하나 있었으면

 

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쓸쓸한 세상

 

이 세상이 쓸쓸하여 들판에 꽃이 핍니다

하늘도 허전하여 허공에 새들을 날립니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유리창에 썼다간 지우고

허전하고 허전하여 뜰에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

산다는 게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어서

파도는 그치지 않고 제 몸을 몰아다가 바위에 던지고

천 권의 책을 읽어도 쓸쓸한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글 한 줄을 씁니다

사람들도 쓸쓸하고 쓸쓸하여 사랑을 하고

이 세상 가득 그대를 향해 눈이 내립니다

 

¶  달력을 넘긴다. 한 장이 남아있었다. 세월은 참 정직하구나. 올해도 정확히 31일이 남았다. 12월의 기분에 알맞게 매섭게 차가운 공기가 아침의 고요를 깨고 밀려오며 나를 움츠리게 한다. 자주 찾아오게 되는 도종환 시집, 이 양반은 무섭고도 정확하게 나의 ‘쓸쓸한’ 감정을 보여주는 시를 많이도 썼다. 나를 둘러싼 사소하고도, 자연적인 것들의 감정을 참 섬세하게도 보여주어서 큰 부담 없이 읽는다. 오래 전에도 ‘벗 하나 있었으면’ 을 읽었다. 소름 끼치게 공명하는 마음에 놀라기만 했다. 특히 밖이 떠들썩하게 느낄 때 더 이런 감정에 빠지곤 한다. 그럴 때 더 나의 속 깊은 곳은 외로움과 고독함을 느끼게 되어서 그럴 것이다.

 

¶  요새는 전보다 더 자주 TV morning shows (주로 NBC Today show) 들을 본다. 몇 년 동안 전혀 그런 것 피하며 산 때에 비하면 참 많이 세상을 보게 되었다. 우리 집은 그 흔한 big screen ‘flat’ TV도 없고, cable TV, satellite TV는 물론 없다. 유일한 것은 ‘free’ over-the-air(공중파?) channel 뿐이다.

모든 것이 digital broadcast로 바뀐 후에는 그 ‘공짜, 공중파’ channel들이 아주 많아졌다. Cable service에 익숙한 사람들은 상상을 못할 듯 하지만 우리는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대부분 시간을 각자의 cushy chair/desk에서 있어서 그럴 것이다. 그곳에 ‘big screen’ desktop pc가 있어서 대부분의 TV programming은 그곳에서 본다.

20년 전부터 예고를 했던 TV convergence가 많이 진행이 되어서 웬만한 것들은 거의 Internet (or from home server)으로 desktop PC에서 볼 수 있게 되었고, ‘아이’들이 다 커서 떠난 집에 쓸쓸한 family room의 family TV는 거의 의미가 사라진 것이다. 어떨 때 조금은 가족들이 TV앞에 모여서 즐기던 시간이 그립기도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모든 것은 변하고 있으니까.

주변 친지들의 집에 가보면 모두들 예외 없이 monster-size flat-screen TV들이 있고 심지어는 한국에서 오는 channel들도 보고 있어서, 사실은 우리 집이 예외가 아닌가 생각도 든다. 일반적인 TV channel들이 결국은 Internet으로 다 통일이 되는 것은 예상보다 서서히 진행이 되고는 있지만 Internet speed가 점점 빨라지고 있어서 시간 문제일 듯하다.

 

Neil Diamond, singer-songwriter
Neil Diamond, singer-songwriter

¶  며칠 전에 TV morning Today show에 반가운 얼굴이 나왔다. Neil Diamond.. 나이에 비해서 아주 젊은 모습이고, 풍기는 활력도 마찬가지고, 목소리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아주 약간 템포가 느려졌음을 느끼는 것은 나의 선입견일까.. 196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그의 soft-rock/pop singer로써의 길고 긴 인생여정, 큰 무리 없이 꽃을 피워가는 중일까?

기억에 60년대의 pop group The Monkees의 많은 hits, 그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의 진정한 talent는 그 자신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분명히 나타났고, 일시적인 인기가 아니고 길고 긴 진정한 프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는 시기에 발표된 그의 classic oldies가 좋았지만, 80년대 이후의 그의 활동도 예외적으로 기억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Cliff Richard와 비슷하게 거의 전설적인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그는 내년 6월 6일에 이곳에서 Philips Arena에서 live concert를 한다고 TV에서 보았고, 혹시 갈 수 있을까..했지만 $100이나 하는 ticket때문에, 그저 군침만 삼키고 있다.

 

Play meNeil Diamond – 1972

 

Advent 2011, 대림절

2011년 대림절
Advent 대림절 2011

¶  오늘은 가톨릭 달력으로 새해의 시작이 된다. 비록 세속적 새해는 아니지만 천주교 전례력은 오늘이 4개의 촛불로 상징되는 대림절의 시작, 그러니까 예수님의 탄생일이고 이곳 최대의 명절인 성탄까지 4주를 기다리는 대림절 첫 주일이 되고 성탄 이후부터는 다시 예수 부활을 기다리는 시기가 시작이 되고.. 이런 식으로 사실 성경의 말씀대로 ‘계속 기다리는’ 기간의 연속이 된다.

이런 것들이 이곳 미국에서는 거의 200여 년 동안 생활화가 되어있어서 크리스천이면 이런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명절, 휴일들에 별로 큰 무리가 없지만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조금 눈에 거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이 역사적 현실이고 문화의 일부가 되어 버렸으니.. 그래서 대림절이 시작되는 첫 주일은 의미가 큰 것인데 불행히도 우리는 미사를 거르게 되었다. 핑계는 꼭 있지만, 게으름이라는 핑계가 더 맞을 듯해서 사실 기분이 찜찜하다.

아침에 새로니가 Thanksgiving holiday를 집에서 보내고 오늘 아침에 Nashville로 떠나는 날이라서 시간이 조금 그랬지만, 역시 핑계일 것이다. 올해의 Thanksgiving은 큰 ‘문제’ 없이 지났고, 아주 적당하게 구워진 turkey가 인상적이었지만, 내가 조금 배탈이 나서 그것이 흠이 되었다. 다름 사람들은 멀쩡한데 왜 나만 그랬을까.. 암만 생각해도 그렇지만 혹시 stress성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문제는 왜 내가 stress를 느꼈을까 하는 것인데..

 

Thanksgiving feast 2011

Thanksgiving feast 2011

Rock group Iron Butterfly
Iron Butterfly circa 1970

¶  오늘 우연히 npr.org (National Public Radio)에서 (via Tweet) 1960년대 말의 LA출신 rock group Iron Butterfly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다. 그들의 big hit In-A-Gadda-Da-Vida를 제외하고는 사실 이 그룹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저 heavy-metal rock group 정도라는 것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이 big hit oldie 이외에는 다른 것을 더 들을 수 없었다는 사실도 있었다.

이 글에서 나의 짐작이 맞았는데, 역시 이 유명한 한 곡을 빼면 그들의 이름은 유명무실할 정도였다. 그룹 멤버들의 관계가 안 좋았던지, 다른 문제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 유명한 classic 이후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더 legendary하다고 할까..

이 곡의 특징은 무슨 classic의 symphony정도로 연주시간이 엄청 길었다는 것, 그러니까 17분 정도 되었나.. guitar로 내는 background noise같은 것, dramatic 하게 들리는 drum solo, guitar solo등등이 아주 다채롭고.. 듣고 있으면 무슨 환각에 빠지는 기분, 등등이 있어서 1970년 초에 들을 당시를 회상하곤 한다.

이 것을 친구 손용현과 같이 동네(상도동)에서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걷는데, 앞서 가던 (못생긴) 아줌마가 갑자기 돌아서더니 화를 내며 ‘히야까시‘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알고 보니 우리 둘이서 그 아줌마를 쫓아가며 ‘성 희롱’하는 것으로 오해를 했었던 것이어서 두고두고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이제 다시 이 곡을 17분 동안 들어도 그때의 ‘젊은 감정’이 거의 변함없이 솟는 것을 느끼며 헤어진 휘문고 출신 친구 손용현을 생각한다.

 

IRON BUTTERFLY – IN A GADDA DA VIDA – 1968 (ORIGINAL FULL VERSION)

 

박시희 선생님

박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박시희 선생님..

박시희 선생님.. 나의 중앙고등학교 3학년 때의 영어선생님, 별명은 “대추 방망이“.. 정열적으로 영어(문법)를 강의 하시던 모습이 45년이 넘도록 눈에 선한데, 나의 중앙고 3학년 때 추억의 글을 보고 박 선생님의 자제분(박용규 교수님)께서 글을 남겨 주셨다. 반가움은 물론이었지만, 곧바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선생님의 안부였다.

나는 그 당시 선생님들께서 건강하게 살아들 계실까 궁금한 것들이 많지만 시원하게 그 대답을 들을 길이 없었다. 선생님들의 연세를 계산을 하는 것도 그리 쉽지 않은데.. 평균적으로 나보다 15~20년 정도 나이가 위라면, 지금은 대부분 80세를 넘으셨으리라.. 그러면 요새의 평균수명 정도일 것이고, 돌아가신 선생님들도 있으리라. 하지만 오늘 박시희 선생님 자제분으로부터는 선생님께서 1993년에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면 박 선생님께서는 60대에 돌아가셨다는 말인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돌아가셨을까? 혹시 무슨 사고나, 아니면 병? 아마도 고국에 있는 동창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애석하게도 이렇게 나는 모르고 살게 되었고, 이런 것들이 타향살이의 서글픔 중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 담임 “짱구” 정운택 선생님도 혹시 타계하신 것이 아닐까? 정직하기만 한 세월이 참 무섭게 느껴진다. 박시희 선생님, 죄송합니다. 부디 저 세상에서 편히 쉬십시오..

 

지나가는 일년을 감사하며..

Thanksgiving, 2011 Huffington Post version

Thanksgiving, 2011 Huffington Post version

 

¶  감사하며 “지나가는” 일년,  숨차게 지나가는 일년을 생각하며 모든 것들, 지극히 한정된 나와 나의 주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는 무한한 존재 하느님께 감사한다. 흔히 년 말에 이런 생각을 더 하겠지만, 오늘이 마침 ‘[추수]감사절’이니까 조금 더 일찍 생각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을 듯하다.

우리의 작기만 한 가족들 건강한 것과 생전 처음 경험하는 불경기에서도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항상 무언가 불안한 여건하에서 무언가 최선을 다하려는 우리들.. 이것 이외는 사실 큰 상관이 없고, 문제도 없다. 무엇이 올바른 길인가 항상 찾고, 바르게 고치며, 그것에서 큰 무리 없이 최선을 다한 지난 일년이었을까?

겸손, 순명, 사랑, 절제.. 다 어렵기만 한 먼 곳에 있는 이상 같지만, 의외로 가까이서 우리를 이끌었던 지나가는 일년이었다. 그것만으로 사실 우리는 ‘가난한 부자‘라고 생각한다.

 

¶  어제 저녁에는 갑작스러운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연도에 연숙과 같이 다녀왔다. 불과 며칠 전까지 성당의 청소 봉사를 하시던 교우형제님께서 조그만 사고로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나와 개인적인 친분이 없으신 어르신이었지만 알고 보니 우리 구역에 있는 안금환 형제와 거의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안 형제 남동생의 장인이셨던 것이다.

이런 일을 당하면 요새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는데, 급서로 인한 놀라움은 크지만, 오랜 고통 속에서 타계하는 사람에 비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나에게 선택을 하라면 짧은 과정을 택할 것 같다. 이곳의 biggest holiday를 앞둔 날이었지만 연도와 viewing (시신을 보는 것)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와서, 열기 찬 연도가 되어서 고인도 조금은 더 따뜻한 마음으로 하느님 품에 가게 되지 않았을까?

장례 미사가 오늘 바로 추수감사절에 있어서, 오늘 그곳에 가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다는 판단인데, 어떨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올 수 있을까.. 고인에 연관된 가족은 평균보다 훨씬 많으니까, 큰 걱정은 안 한다. 어제도 “내가 오늘 죽으면 몇 명이나 나를 보러 올까” 하는 생각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  지난 몇 주일 동안 오래된 VHS video cassette 들을 ‘무섭게’ computer로 옮기는 작업을 해 왔는데, 이제 조금 끝이 보이는 듯하다. 이것을 ‘자동’으로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하므로 꼬박 과정을 지키고 앉아서 해야 하는 ‘고역’을 치러야 한다. 지루하긴 하지만 덕분에 오랜 만에 20년까지 된 오래된 ‘가족이 보던 영화‘들을 다시 보게 되어서 생각만큼 고역은 아니었다.

지금 보니 그것들의 크기가 만만치 않았다. 거의 100+여 개가 되는 비디오 테이프들.. 90년대에 그렇게 안방 사랑을 받던 그 당시의 최첨단 기술, VHS video.. 그것이 지금은 DVD/BlueRay의 얇기만 한 optical disc들.. 참 세월의 흐름을 실감한다.

대부분 내가 어렸을 때 고국의 극장에서 보았던 추억의 할리우드 명화들이라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 보여주기에 안성맞춤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 ‘옛 것’들이라서 아이들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큰 후에, 옛날 영화가 더 좋았다고 말할 때도 있어서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  지난 며칠 동안 오랜만에 바람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며 예년에 비해서 별로 볼품이 없이 힘겹게 달려있던 불쌍한 단풍잎들이 거의 모조리 떨어져서 완전한 겨울의 풍경을 나타냈다. 이런 상태로 내년 3월까지 버티게 되고 가끔 완전히 하얀 눈까지 덮일 아주 높은 가능성도 있어서 귀추가 주목이 되지만 제발 큰 피해 없이 멋진 풍경만 보여주기를 바라고 있다.

 

full Autumn leaves 2011

full Autumn leaves 2011

our backyard under fallen leaves

집 뒤뜰이 완전히 낙엽으로 덥혔다

 

Sunday before Thanksgiving

¶  와~~ 벌써 11월 20일 일요일.. 2011년 추수감사절이 4일 밖에 남지 않고, 가톨릭 달력으로는 2011년의 마지막 일요일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다음 주 일요일부터 새 전례력이 시작 되고, 성탄까지는 대림절 (Advent)의 4주가 또한 시작되는 등, 세속적인 제일 큰 두 명절(추수감사절, 성탄절)로 겹쳐서 조금은 휴일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쓸데없는 스트레스를 감당하는 지혜도 함께 쌓여서 조금은 나은 편이다. 각종 휴일의 유래와 전통, 목적, 뜻을 음미하면 훨씬 도움이 된다. 비 직계가족 식구가 아무도 없는 우리 집은 이럴 때 잘못하면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래도 모이면 네 명은 되지 않는가? 혼자서 휴일의 외로움을 달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면서 위로를 한다.  

 

Archbishop Emeritus John Francis Donoghue
아틀란타 전 대주교님 John Francis Donoghue

¶  지난 11월 11일 (이곳은 Veteran’s Day, 유럽에서는 Armistice Day?), 전 아틀란타 대교구의 John Francis Donoghue 대주교님께서 향년 83세로 선종하셨다. 그 동안 별로 주교님의 건강에 대한 뉴스가 없어서, 이런 갑작스러운 뉴스에 놀라게 되었다. 특히 나는 이 뉴스를 4일이나 지난 11월 15일 레지오 회합에서 듣게 되어서 아주 부끄럽기까지 했다.

한 지역소속 종교지도자의 선종은 사실 큰 뉴스는 아닐지라도 내가 어떻게 4일씩이나 늦게 알게 되었을까? Local TV뉴스를 자주 보면 아마도 알았을 것이지만 제일 큰 이유는 11월 13일의 주일 미사를 못 간 것이 치명적인 원인이 되었다. 신자들 대부분은 그 때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 도노휴(도나휴, Donahue와 스펠링이 조금 다른 common Irish name) 대 주교님은 1993년에 아틀란타 대주교가 되시어 2004년 12월에 은퇴하실 때까지 참 많은 일을 하셨다. 그 전 오랫동안 침체 속에 있던 이 아틀란타 대교구를 눈부시게 활성화 시키신 것이다.

미국에서 제일 큰 <아틀란타 성체대회, Eucharistic Congress>를 크고, 단단히 성장시키고, 대교구에 <성체조배, Eucharistic Adoration> 신심행사를 강력히 권고하셔서 우리 ‘미국성당’ 에도 계속되고 있다. 전형적인 ‘사제 같은 인자한 품성’을 보이시고, 대교구내 수많은 크고 작은 본당의 견진성사를 주관하셔서 우리 아이들도 가까이서 뵙고, 사진도 찍기도 해서 대주교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친근한 할아버지 같은 추억을 갖게 되었다. 은퇴 후에는 ‘명예’ 대주교라는 직함으로 사실 전과 같은 정열로 그 모습을 보이셔서, 이번의 ‘뜻밖의’ 선종은 너무나 아쉽고, 슬프기만 하다. RIP, Rest In Peace.. Archbishop John Francis Donoghue..

 

¶  YouTube에 조금씩 나의 조잡한 video를 올리면서, 조금씩 이곳을 더 자세히 보게 되고, 가끔은 그 동안 못 찾던 것을 찾게 되기도 하는데.. 이번이 바로 그런 때가 되었다. 작년에 나의 중앙고교 3학년을 추억하는 블로그를 쓸 때, 이 추억의 노래를 찾고 찾았지만 소용이 없었는데, 이번에 찾은 것이다. 아마도 그 동안 어떤 분이 만들어 올려놓았던 것 같다. 그것을 찾을 당시, 노래의 제목을 잊은 상태여서 더 찾지 못했을까?

 

행복의 샘터 , 박재란 이양일 1965년

 

알고 보니.. 그것은 <박재란, 이양일> 두 분의 <행복의 샘터> 였다. 이제 생각을 하니 제목이 어렴풋이 기억이 되는 것 같았다. 이것은 1965년 초에 나온 거의 ‘가곡 풍’의 유행가였다. 한참 유행하던 시절이 바로 내가 중앙고 3학년 초였던 것이고, 그 때부터 고3 하면 두 분이 연관이 되어 기억이 된 것이다. 그러다가 정말로 46년 만에 다시 듣게 되었다. 그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 박재란씨와 이양일씨는 그 동안 어떻게 살아 오셨는지..

 

Draganflyer X8
카메라가 달린 Draganflyer X8

  DraganFly?  <dragonfly, 잠자리> 의 misspelling일까? 내가 만일 내일 아침을 못 보는 신세가 된다면, 이것도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인터넷 파급효과의 하나를 건진 것이다. 거의 10년이 넘는 역사의 이 흥미로운 UAV (Unmanned Aerial Vehicle) technology를 그 동안 나는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한 마디로 이름에서 연상이 되고, 어렸을 때 꿈도 많이 꾸었던, ‘잠자리 비행기’와 비슷한 이것의 특징은 회전날개가 1개나 2개인 기존의 헬리콥터와 달리 최소한 4개의 회전날개를 가지고 remote control로 조종이 되는 ‘취미용 비행기’인 것이다. 장난감 헬리콥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취미의 수준과 ‘상업용’ 수준의 구분이 잘 안 될 정도로 ‘심각한 기술’이라는 점이다.

Canada에 본사를 둔 이 DraganFly Innovation이라는 회사는 Zenon & Christine Dragan이라는 발명가에 의해서 무선조종 풍선, 비행접시 등의 취미로 시작을 해서 근래에는 완전히 심각한 상업용 UAV technology회사로 성장을 해서 지금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의 demo video를 보면 따로 이것의 잠재성에 대해서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차원에서 쓰는 UAV는 크고, 비싼 것들이지만 이것들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저렴한 것들이다. 현재는 주로 공중 비디오 촬영으로 쓰이고 있지만 이것의 쓰임은 상상력에 달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빛의 신비

레지오 단원 제일의 무기, 묵주
나를 ‘살려 준’ 이 묵주는 연숙이 San Antonio (Texas)에 갔을 때 사 준 선물이었다

빛의 신비, Luminous Mysteries, Mysteries of Light..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학적인 빛의 성분이나 빛의 속도에 따른 상대성 이론, 빛의 구성에 대한 양자역학.. 등등에 대한 것이 아니고, 신학적인 빛의 신비인 것이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천주교의 ‘복되신 성모 마리아'(Blessed Virgin Mary: BVM) 묵주기도(Rosary)의 2번째 신비를 말한다.

묵주기도에는 4가지 신비가 있고 이것을 반복하며 읽고, 묵상을 하는데, 첫 번째 신비: 환희의 신비(Joyful Mysteries), 두 번째 신비: 빛의 신비(Luminous Mysteries), 세 번째 신비: 고통의 신비 (Sorrowful Mysteries), 네 번째 신비: 영광의 신비 (Glorious Mysteries) 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이상하게도 내가 유별나게 더 많이,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고, 심지어는 좋아하게 된 신비가 바로 ‘빛의 신비’ 인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확실하게 글로 표현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조금 간단하게 말 하자면 나머지 3가지 신비는 사실 너무나 ‘유명’하다고나 할까.. 환희의 신비는 예수님 탄생, 고통의 신비는 예수님의 수난, 영광의 신비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잘 알려진 기독교의 핵심부분에 해당한다. 하지만 빛의 신비는 조금은 ‘평범할 수도 있는 예수님의 공(公)생활’에 해당하는 것이다.

Fatima(파티마) 목동들에게 나타나신 성모님
Fatima(Portugal) 목동들에게 나타나신 성모님은 이미 묵주를 가지고 계셨다

어느덧 내가 묵주기도를 시작한지 4년이 훨씬 지나고, 내년 3월이면 만 5년 ‘기념일’이 다가온다. 세월이 빠른 것은 물론 잘 알지만, 내가 사고 없이 이것을 5년 계속해 왔다는 사실로는 5년이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닌 듯 싶다. 그만큼 나의 묵주기도 5년은 나에게 풍부한 개인적 경험을 체험케 했고, 나아가서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나를 계속 끌고 갔기에 이제는 전부터 들어왔던 묵주기도의 신비를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묵주기도를 ‘시작해 본’ 자체도 나에게는 신비에 가까웠지만, 그것을 지금까지 4년이 훨씬 넘도록 계속해온 자체는 그 이전의 나 자신을 생각해 보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사실이었다. 처음 이것을 시작할 당시는 기도문을 외우지 못해서 불편했지만, 그것은 시간이 자연히 해결해 주었다. 완전히 외우고 나면서, 조금씩 생각, 묵상 등을 할 여유가 생기고,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자유기도에 대한 지독한 거부감 (대부분 개신교 신자들의 통성기도 스타일 때문에)으로 나는 기도란 것을 못 했는데 이 묵주기도가 아주 자연스레 나를 구해 주었다.

빛의 신비에 대해서 조금 조사를 해 보니, 의외로 이 신비는 아주 역사가 짧았던 것이었는데, 2002년에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Pope John Paul II) 께서 기존의 3단에 덧붙인 것이었다. 묵주기도의 오랜 역사를 감안한다면 2002년에 더해진 빛의 신비는 사실 바로 불과 몇 분 전에 더해진 것 처럼 느껴지는 ‘새 것’ 인 것이다. 흔히 ‘레지오 박사’로 알려진 최경용 베드로 신부님의 저서 <레지오 마리애 영성> 을 보면 묵주기도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데: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묵주기도는 ‘로사리오의 첫 교황’ 이라고 불렸던 비오 5세가 1569년에 만들었는데, 그 2년 후인 1571년 10월 7일의 레판토(Lepanto) 해전에서 유럽이 회교국의 손아귀에 들어갈 위기에 봉착하자 신자들이 전승을 위한 지향으로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친 결과 마침내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비오 5세의 후임자인 그레고리오 13세는 1573년에 매년 10월 첫 주일을 ‘로사리오의 성모 축일’로 정하였다. 그 후 레오 13세 교황(재위: 1878~1903)이 10월을 ‘로사리오 성월’로 정하고 성모 호칭 기도에 ‘지극히 거룩한 로사리오의 모후’라는 칭호를 추가함으로써 묵주기도를 통한 성모신심을 장려하였다.

Five Luminous Mysteries, 빛의 신비 5단
빛의 신비 5단, St. Joseph Sunday Missal 에서

전 교황 복자이신 요한 바오로 2세의 성모신심은 너무나 잘 알려진 최근 역사의 일 부분이다. 개인적으로나 교회 역사적이거나 나는 이 복자를 존경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이것도 나의 ‘자유의지’와는 크게 상관이 없이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특히 2005년 선종을 하실 때부터가 아니었을까?

근대사 인물 중에 내가 확실하게 존경하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이 복자, 요한 바오로 2세가 아닐까.. 왜 이 신비가 ‘빛’의 신비로 이름이 되었을까? 그것은 요한복음 9장 5절의: “While I am in the world, I am the light of the world”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 공동번역에서) 에서 나온 것이다. 그 분이 첨가한 묵주기도 두 번째 신비 ‘빛의 신비’는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고, 나를 움직였을 것이다. 결국, 요새는 참 신앙이라는 것이 오묘하다는 생각 뿐이다

 

 

 

복자 요한 바오로 2세의 빛의 신비:

  1.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The Baptism of Jesus in the Jordan)
  2. 예수님께서 가나에서 첫 기적을 행하심을 묵상합시다. (Christ’s Self-Manifestation at the Wedding in Cana)
  3.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심을 묵상합시다. (Christ’s Proclamation of the Kingdom of God)
  4.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심을 묵상합시다. (The Transfiguration of Our Lord)
  5.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심을 묵상합시다. (Christ’s Institution of the Eucharist)

 

연세대학의 추억(2): 길었던 1학년 시절

연세대학교 독수리상

연세대학교 상징 독수리상, 1970년 5월 무악축제때 제막식이 있었다

 

내가 연세대를 지망하게 된 것은 복잡한 이유가 필요치 않았다. 철학적인 이유보다,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다. 한마디로 서울공대 전기, 전자공학과는 나에게 조금 ‘위험한’ 선택이었고, 그 다음은 무엇인가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이외에도, 무언가 부드럽고 ‘낭만적인 인상’을 주던 신촌 독수리의 요람, 반짝이는 구두, 바로 옆에 ‘기다리고’ 있던 이화여대생들.. 등등이 자연히 나를 그곳으로 끌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의 관심은 100% 전기,전자 ‘과학’ 쪽이어서 전공을 선택할 때에 한번도 다른 생각도 한 적이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대학의 학과를 지망할 때, 본인의 취향이나, 포부보다는 성적 순위로 정하는 것이 통례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사고방식 이었다. 성적순위로 경쟁 학과를 지망하는 것이었다. 단적인 예로, 그 당시 서울공대 화공과나 전기,전자과의 커트라인이 제일 높았고, 그런 분야를 자기가 좋아하건 안 하건 상관없이 학교 성적만 좋으면 지망을 하곤 했던 것이다. 그저 그런 과를 졸업하면 보장된 취직의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분야에 얼마나 관심이나 있었을까?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불행한 친구들, 많이 있었을 것이고, 그 분야에 진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기회가 줄어들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로 내가 연세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한 것은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고 결과였다.

 

Petri camera로 찍은 자화상, 1966
Petri camera로 찍은 자화상, 1966

연세대학 전기공학과의 경쟁률은 상당히 높아서 시험을 치르고 나서 상당히 스트레스를 느끼긴 했지만, 사실은 끝났다는 안도감과 편안함도 잔잔하게 느끼며 발표를 기다렸는데, 그만큼 입학시험이란 것이 괴로운 것이었다. 그 당시, 입학시험 발표는 대부분 라디오에서 제일 먼저 발표를 했고, 나도 그것을 통해서 합격 발표 결과를 들었다. 입시 전에 합격하면 ‘진짜’ 카메라를 사주시겠다는 어머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나는 정말 합격발표를 기뻐했는데, 진짜로 며칠 후에 나는 일제 페트리(Petri) 란 카메라를 선물로 받게 되었다. 나중에 가까웠던 친구들의 대학입시 결과가 속속 알려졌는데, 김호룡은 연대 기계공학과에 합격을 했는데, 나머지 이종원, 우진규 등은 모두 떨어졌다. 이들에게는 2차 대학을 응시하거나 재수를 하는 두 가지 길이 있었고, 종원이는 2차였던 외국어대에 갔는데, 우진규는 재수를 하게 되었다.

 

남영동에서 본 남산 야경, 1966년 3월
남영동에서 본 남산 야경, 1966년 3월

비록 추운 겨울 날씨였어도 입학식 전까지의 시간은 정말 ‘천국’에 있는 기분이었다. ‘악몽’ 같던 시절이 끝나고, ‘완전 자유’의 대학시절이 눈 앞에 보이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새로 산 카메라를 들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으며 자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드디어 ‘학생입장불가’ 라는 영화도 당당히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에 나는 용산구 남영동, 금성극장 바로 앞에 살았고, 그곳에서 연세대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사실 고등학교에 다니던 것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약간 달라진 것은 까만 교복대신에 곤색 대학제복을 입었던 것, walker(군화) 대신에 진짜 신사화 (단화)를 신었고, 머리는 조금 자라서 스포츠형 정도가 된 것, 그것이 전부였다. 어떤 애들은 완전히 기름까지 바르며 머리를 기르고, 신사복까지 입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했다.

 

그 때 연세대 캠퍼스에서 제일 인상적인 것이 여기저기 보이던 “멋진” 여대생들이었다. 나는 그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비록 내가 속한 과에는 여학생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것은 상관이 없었다. 여기저기 강의실 이곳 저곳에 여대생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학 오리엔테이션도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그곳에서 소개된 도서관, 학생보건소, 채플시간 등등은 나중에 연세대만의 특징을 보여 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입학을 한 후 얼마 안 있어 우리 집은 용산구 남영동에서 영등포구 상도동 (숭실대학 앞 버스 종점)의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갔는데, 비록 멀어지긴 했지만, 다행히 버스노선이 있어서 사실은 더 편했다. 종점에서 종점까지 매일 왔다 갔다 한 것이다. 이곳에서 대학졸업 때까지 살았기 때문에 나의 대학시절의 추억은 이곳과 항상 연관이 되어있었다.

 

연세대 입학 직전, 죽마고우 안명성과, 1966년
연세대 입학 직전, 죽마고우 안명성과, 1966년 봄

연대 전기과, 우리는 그저 그렇게 불렀다. 내가 1966년 입학할 당시 연세대학교는 공과대학이 아닌 이공대학이 공학부를 포함하고 있었고, 전기공학과와 비슷한 전자공학과란 것이 생기기 전이었다. 아마도 몇 년 후에 전자공학과가 분리되었을 것이다. 내가 다닐 당시에는 3학년이 되면서 강전, 약전 이란 이름으로 갈라졌다. 그러니까 강전(强電)이란 것은 전통적인 전기공학이었고, 약전(弱電)이란 것은 새로 유행하기 시작한 전자공학인 셈이었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강전은 (electric) power system, 그러니까 전력의 발전,송전 같은 ‘강한, 높은 전압’의 것을 다루고 약전은 그 이외의 것, 특히 electro-magnetic, radio, amplifier, control systems 같은 것을 다루었던 것이고, 이 약전이 바로 전자공학(電子工學)인 것이다. 나는 약전, 전자공학에 관심을 두고 입학을 했기 때문에 3학년 때 약전 반으로 가서 공부하게 되었다. 물론 각자의 지망대로 배치를 하지만 워낙 약전, 전자공학에 지망생이 많아서 교수님들도 조금 골치를 썩힌 듯 했다. 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이런 환경에서 재학생, 복학생으로 갈라지는 판에 3학년부터는 약전,강전으로 거의 반반으로 갈라게 되어서, 심하면 서로 모르는 학생도 생길 정도였다. 지금 졸업 앨범을 보니 그것을 느끼게 된다. 얼굴만 조금 익혔을 뿐 이름 이외에는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것이다. 이것이 대학 이전의 동창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설상 가상으로 나는 1학년 가을학기부터 1년 휴학을 했기 때문에 입학동기들은 거의 놓치게 되었다. 이런 조금은 복잡한 이유로 나의 연세대 4년은 조금 비정상 적인 것이 되었다.

1학년 1학기 때, 그러니까 1966년 봄 학기, 그야말로 freshman의 기분으로 인생에서 조금은 새로운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지금의 고등학생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대학생이 되어야 비로소 ‘성인’, 그러니까 사람 취급을 받았다. 머리도 기르고, 신사복도 입고, ‘단화’ 구두도 신을 수 있고, 극장도 마음 놓고 들어가고, 다방, 술집.. 이런 것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또한 마음 놓고 남들이 보이게 ‘연애’도 할 수 있었다. 이런 사회적인 환경 때문에 대학에 들어와서, 아차..하고 한눈을 팔면 완전히 자제력을 잃기가 아주 쉬웠다. 내가 바로 그런 대표적인 케이스라고나 할까.. 조금 부끄럽지만..

나는 이런 갑작스런 개인적 자유를 슬기롭게 감당할 준비가 덜 되었던가.. 자유의 전당에서 나는 첫 학기를 혼돈과 방황으로 보냈다. 대학 강의란 것도 실망스러운 것이, 사실 고3때의 스파르타 식, 우스꽝스럽게 어려웠지만, 멋지던 수학, 화학 같은 것이 대학에선 수준이 ‘낮아진 듯’이 느껴졌다. 1학년의 교양학부 과정 전체가 고등학교와 수준이 비슷한 듯했다. 한가지 다른 것은 강의를 ‘땡땡이’를 쳐도 당장 아무런 ‘처벌이나 문제’가 없는 듯이 보였던 것이었는데, 그런 ‘안심’에는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나중에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다.

 그런 새로운 환경에서 전기공학과 1학년에는 중앙고 동기동창 2명, 그것도 3학년 8반 때의 ‘반창’이었던 신창근조남재가 있었다. 중앙고의 같은 반에 있었어도 개인적으로 별로 가깝지 않았지만, 이제는 조금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그것 뿐이 아니었다. 중앙고 1년 선배인 구장서, 더 위의 선배인 (2~3년?) 차재열 형.. 등등, 그러니까 중앙고 출신이 전기과 1학년에 나까지 5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은근한 ‘힘’을 가진 집단이어서, 무슨 투표,선거 같은 것이 있으면 절대로 무시 볼 수 없는 숫자였고, 과 대표를 뽑는데도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였다.

 


 

보슬비 오는 거리 – 성재희

1965년 말에 발표된 성재희씨의 데뷔 힛트, 입학시험 즈음에 거의 매일 듣었던 곡으로, 그 당시를 추억하게 하는 대표적인 가요가 되었다. 레코드가 크게 힛트한 후에 시민회관에서 공연을 했는데 많은 관중의 사랑을 받았던 기억도 난다.

 

 

I Could Easily Fall in Love with YouCliff Richard

 연세대 입학 후에 참 많이 듣고 좋아했던 곡, 전 해에 Cliff Richard는 이미 The Young Ones라는 영화로 일본과 한국에 많은 fan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해 연세대에 입학한 중앙고 동창 중에는 기계과에 나의 절친했던 친구, 김호룡을 비롯해서 김연응이 있었고, 다른 과에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 이런 사실은 나중에 총학생회장을 뽑을 때에 은근한 세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 당시는 별로 그런 것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그것은 작은 규모의 정치적 발상이고 행동들이었다. 그런 것들은 나의 체질에 별로 맞지 않았지만 기성 정치인을 흉내 낼 정도로 선거운동에 열을 올리는 사람이 꽤 있었다. 투표에서 표 하나가 사실은 땀과, 그리고 돈이 필요하다는 조금은 실망스러운 사실도 그때 보게 되었다.

 그 당시 전기과 3학년에 어머님의 절친한 원산 루씨여고 동창 친구분의 아드님이 있었는데, 이름은 위재성 형, 보성고교 출신으로, 학훈단(ROTC) 생도였고, 성적도 뛰어나고, 지도력까지 있는 그야말로 모범적인 형이었다. 그 형의 여동생인 위희숙씨는 1967년에 연세대 영문과에 입학을 해서 나와 같이 1971년에 졸업을 한 졸업동기생이 되었다. 어느 날 그 형이 나를 보자고 불러서 갔더니, 그곳은 전기과 학생회 선거본부였다. 알고 보니 그 형이 학생회장(이공대 회장)으로 출마를 해서 겸사겸사 나를 보자고 한 것 같았다. 반가운 마음도 들었지만, 사실 곤란한 것도 없지 않았다. 이미 나는 다른 과에서 중앙고 출신의 선배가 출마를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대학 학생회 선거는 일반 선거의 풍토와 별반 다름이 없고, 완전히 ‘출신지’에 좌우되는 판이었다. 출마 후보의 경력, 자질, 포부 같은 것은 사실 뒷전에 있었다. 그때 나는 대한민국 선거풍토를 그대로 보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출신고의 압력에 굴복한 셈이 되었는데, 이것은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 1학년 1학기의 시작 무렵에 나는 ‘사진 찍기‘에 완전히 빠졌고 그것이 조금 수그러질 무렵에는, 나의 다른 blog에서 다루었던 ‘모형 비행기‘ 로 시간을 다 보냈다. 온통 정신이 그곳에 가 있어서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고교시절의 학과목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역시 공부를 제대로 안 하니 시험도, 출석도 문제가 없을 수가 없었다. 특히 체육 같은 것은 출석미달로 시험도 치르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와 반대로 ‘성공’을 하겠다고 정신무장을 하고 들어온 학생들도 있었는데, 그가 군대(공군)를 마치고 입학한 사람, 이름이 강성모 였다. 나이나 성품, 성숙함 등으로 전기과 1학년 과대표로도 뽑히고, ‘공부도, 활동’ 도 잘해서, 결국 강성모씨는 나중에 대학 졸업하기도 전에 학과장의 추천으로 미국유학(Fairleigh Dickenson College, NJ)을 갔고, 그 이후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대학교수가 되었다. 이 강성모씨는 내가 한창 ‘놀던’ 그 학기에 거의 매일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서, 절대로 재수가 좋아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1967년 가을학기, 이윤기와 함께
이윤기와 찍은 사진, 중앙동창 김복희가 찍음, 1967년 가을학기

학기가 끝나면서 나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휴학계를 제출했는데, 그 당시에는 그것이 나에게 최적의 선택이었다. 1966년 입학 동기들은 사실 이때부터 1년 휴학을 하면서 완전히 ‘놓치게’ 되었고, 1967년 가을 2학기에 복교를 하고 보니, 전기과의 학생들은 사실상 1년 뒤에 입학했지만 나와 나이는 거의 비슷했다. 거의 모두 생소한 얼굴로 가득 찬, 완전히 다른 환경이 되었지만, 그래도 하늘이 도와서 나의 중앙고 반창인 이윤기와 나의 죽마고우 박창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기는 3학년 때 그런대로 친하게 지낸 친구였는데, 재수를 해서 들어왔고, 박창희는 나의 중앙고 1년 후배여서 제대로 입학을 한 것이었다. 같은 고등학교엘 다니면 1학년의 차이에도 존댓말을 써야 했지만, 나와 창희가 죽마고우의 친구여서 그럴 수는 없었고, 이것 때문에 창희와 윤기도 서로 말을 놓게 되었다. 그 외에도 중앙 1년 후배인 김태일, 이상일 등도 있어서 더욱 마음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외에도 전기과에는 조금 낯이 익은 얼굴 두 명이 보였는데, 그 들은 이헌제, 김현식.. 이름보다는 얼굴이 낯이 익어서 생각해보니 작년, 나의 입학동기생이었다. 그들을 어떻게 일년 뒤에 다시 보게 되었을까? 나와 같이 휴학을 하지 않았으면, 유급일 것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이헌제는 유급이 분명했는데, 김현식은 그 당시 이유를 분명치 않았다. 그래도 이헌제는 나를 알아보아서 나도 아주 반가웠는데.. 그 해(1967년) 겨울이 지나면서 자살을 하고 말았다. 겨울방학 중이었는데 갑자기 같은 과의 한창만으로부터 연락을 받아서 한강 파출소로 가보니, 이헌제 가 한강 철교다리 위에서 투신자살을 했다고.. 충격적이고 어이가 없었다. 이헌제.. 얼굴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참 외향적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어떻게 그가 자살을.. 나중에 들어보니 열렬히 연애하던 여대생(이대 음대생)과 결별을 하면서 비관 자살인 것 같다고 했다.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이며 담배 피던 모습이 흡사 외국 영화배우 같았고, 삶을 마음껏 즐기는 것처럼 보이던 그가 얼마나 충격과 절망이었으면, 그 나이에 자살을 했을까.. 아직도 그의 얼굴을 생각하며 채 피지 못한 그 영혼의 명복을 빈다.

 이윤기, 박창희 같은 뜻밖의 ‘친구’들 때문에 나의 대학 1학년 2학기의 시작이 아주 순조롭게 시작 될 수 있었고, 1년 전의 ‘악몽’을 되씹으며, 단단히 결전의 자세로 학교생활에 임하게 되었다. 이래서 사람은 가끔 실수도 해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학교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학교의 강의,과목을 충실히 공부하고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이 되었다. 사실 이것이 정상적인 대학생활이었고, 나는 처음 그런 대학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새로 만나게 된 과 친구들과도 큰 무리 없이 어울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이윤기와 박창희가 있어서 가능했다고 아직도 믿고 있다. 이미 이윤기와 친하게 지내던 그룹이 있었는데, 흔히 그들을 ‘식당파‘라고 불렀다. 그들이 모이는 장소가 그 당시의 학생식당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모두 쾌활하고, 다양한 남자들.. 그 중에는 과 대표였던 고종태, 기타를 귀신처럼 잘 치던 보성고 출신 심재흥, 항상 옷을 멋있게 입던 문욱연, 그리고 몇 명이 더 있었는데, 그들은 나중에 일찍 군에 입대하고 나의 졸업앨범에 남지를 않아서 이름을 기억할 수가 없다. 그 중의 한 명, 이름은 비록 잊었지만 그 당시 가요 히트곡 최희준의  “이별의 플랫트 홈” 을 좋아했던 친구, 그 노래는 나도 좋아하던 것이라 더 그를 기억한다.

 

최희준의 이별의 플랫트홈 

 

이윤기, 박창희와 더불어 그 당시 어울리게 된 사람들 중에는 화공과의 중앙고 동창 양건주, 전기과의 강원도 출신 김철수, 중앙고 후배 김태일, 그리고 지방(전라도) 출신의 김진환 등이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그룹이 형성이 된 것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연세대 굴다리 바로 앞에 있던 다과점(빵집)에 둘러 앉아 얘기를 하고 했는데, 그 때의 추억이 참 아름답게 느껴지곤 한다. 어떻게 그런 ‘순진’한 순간들이 있었을까 할 정도로 우리들은 어린이처럼 모이곤 했는데, 재미로 가위, 바위, 보를 해서 그날 돈을 낼 사람을 뽑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하게 모인 우리 그룹은 다음해에는 완전한 남녀 혼성 클럽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1967년 1학년 2학기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좋은 친구들도 사귀게 되고 해서 사실 나에게는 보기 드문 완벽한 학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 꼭 좋은 일에는 악재가 낀다고, 작은 사고 하나로 나는 조금은 우울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강의실에서 어린애들처럼 분필 던지는 놀이를 하다가 내가 앞 이빨을 부러뜨리는 조그만 사고가 났던 것이다. 이것 때문에 치과를 계속 다니게 되었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줄어들게 되면서 더욱 학교공부에 전력을 다하게 되었다. 1학년 1학기에 겪었던 학교공부의 어려움을 1년 뒤의 2학기에 완전히 만회를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는 다시금 대학생활에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하게 되었고, 학기가 끝나면서 대망의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다. (계속)

 

깊어가는 가을에..

30년이 넘는 빛나는 역사를 자랑하며 우리를 즐겁게 해 주었고, 집안 가족들에게 진정한 안방극장의 역할을 다 했던 비디오 테이프(‘테입’ 이 더 맞을 듯 한데, 아마도 표준용어는 역시 ‘테이프’ 인 모양), VHS video tape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몇 주 전에 우연히 VHS cassette에 있는 오래 전의 영화를 보려고 하다가 VCR(video cassette recorder, 일본에선 VTR: video tape recorder라고 함) 이 ‘고장’ 난 것을 발견하고, ‘망연자실’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이렇게 많이 쌓여있는 ‘옛날’ 비디오 영화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5년 전쯤에 우리가 찍었던 가족 비디오들은 일단 모조리 computer로 복사를 해 두었지만 돈을 주고 산 영화 비디오들은 너무 많아서 엄두를 못 내고 그대로 두었고, 최악의 경우에 그런 것들은 나중에 DVD로 다시 나올 것이니까, 가족 비디오처럼 중요한 것이 아니라서 잊고 살았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VCR이 ‘건재’ 하다는 전제하에서의 이야기였는데, 이제는 손쉽게 테이프에 있는 영화 비디오 조차 못 보게 된 것이다. 결론은 분명히: 이번에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VCR+DVD player combo
VCR+DVD player combo

최우선의 과제는, 오랜 동안 모았던 주옥 같은 영화 비디오를 가족이 모일 때, TV로 쉽게 볼 수 있어야 하므로, VCR을 사야 하는 일이고, 다음은 언젠가는 ‘없어지거나, 상태가 나빠져 못 볼’ 이 많은 영화 비디오를 ‘가족 비디오처럼’ computer로 옮겨야 하는 일이었다. 컴퓨터로 일단 digitize가 되면, 수명은 거의 반 영구적이 될 것이고, 여기저기서 computer로 볼 수가 있게 되니까, 조금 지루한 일이지만 효과는 몇 배로 나올 것이다. 그래서 곧바로 VCR 을 사려고 보니까, 요새는 VCRDVD player가 함께 붙어서 나오고, 값도 $70 정도여서, 참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했다. 그 옛날 VCR이 처음 나올 당시.. 처음에는 천불이 넘었었던 것을 기억하니까.. 이렇게 해서 VHS tape을 computer(digital) movie file (WMV, Vidx/Xvid/AVI format)로 하나 둘씩 옮기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장난이 아니게 많아서, 언제 끝나게 될지 한심하다.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다시 보는 영화들을 다시 볼 수 있어서 조금은 덜 지루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벌써 Carroll BakerRoger Moore의 명화 The Miracle(기적), Tom HanksApollo 13, Jennifer JonesThe Song of Bernadette (루르드 성모님 이야기) 등등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것들의 대부분은 1990년대에 우리 집 식구들이 즐겨 본 것들이라 그 당시의 추억도 함께 떠오른다. 근래에 HD(high definition) TV에 익숙해지고 있는 마당에 VHS의 ‘조잡한’ SD (standard, low) definition을 보니까 어떻게 옛날에 저런 것을 보며 살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은 그런 ‘조잡’한 맛이 은근한 맛도 있고, 감정적으로도 부드럽고, 따뜻하게 느껴지니, 나도 참 오래 살았나 보다.

 

10 years with YMCA.. 허.. 언제 이렇게 되었나? YMCA의 gym에서 운동을 한 것이 10년이 넘었다. 우리 가족은 1990년대에 다같이 이곳에서 ‘거의’ 정기적으로 운동, 수영을 했지만, 나는 2011년 9월 이전까지는 아주 가끔 갔었다. family plan으로 멤버가 되면 조금 싼 이유도 있었지만, 정기적 육체적인 운동의 필요성을 누가 모를까,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연숙이 거의 강제로 가게 만들어 놓은 것이 이제 10년이 훨씬 넘게 된 것이다. 요새는 우리 부부만 일주일에 3일 정도를 목표로 하고 다니는데, 이제는 습관이 되어서 안 가게 되면 더 신경이 쓰일 정도가 되었다. 생각한다. 지난 10년 동안, 이것마저 없었다면 어땠을까? 생애를 통해 지난 10년은 사실 내가 감당하기 힘들었던 십 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아마도 이 YMCA는 내가 ‘살아’ 남는데 큰 한 몫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East Cobb YMCA
East Cobb YMCA

처음에는 주로 아침에 갔고, 그때면 주변에 사는 한인들과도 어울리며 커피나 얘기도 나누기도 했는데, 그때 알던 부부가 거의 연달아서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도 해서 참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그때 느낀 것 중에 하나가, 운동을 하고, 겉으로 건장하게 보여도 그것과 ‘수명적인 건강’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오랜 옛날 미국에 오기 전에 서울 종로에 있던 종로서적센터 뒤에 있던 그 당시에는 최신식인 health center에 몇 개월 다니면서 ‘빈약한’ 근육을 바꾸려고 노력을 한 적이 있었고, 친구 이경증과 같이 서울 운동장에 있었던 체육관에도 가본 적이 있어서, 이곳에 있는 weight training 은 그다지 생소한 것이 아니었고, bench press에서 나의 체중(145파운드) 무게로 10 reps까지 하게 되었지만, 요새는 근육의 모양새보다는 근육의 목적에 더 신경을 쓴다. 예를 들면 무거운 것을 옮긴다던가 할 때 큰 문제없이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다음은 역시 근육의 빠른 노화를 완화시키는 것인데 사실인 이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요새는 근육운동보다 걷는 것, bike등으로 하체에 더 신경을 쓰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더 나이가 들어서 ‘넘어지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YMCA gym에 갈 때마다 그 옛날 나에게 ‘역기운동’의 기초를 가르쳐주던 친구 이경증을 생각하곤 한다.

 

며칠 후의 일기예보는 드디어 올해 처음 아틀란타 메트로 지역에 빙점(화씨 32도, 섭씨 0도)의 가능성을 예고해서, 본격적인 가을의 중반을 향하는 느낌이다. 2주 뒤에는 크리스마스에 다음의 미국 최대 명절인 Thanksgiving Day (추수감사절)이고, 사실상 그때부터 크리스마스 season이 시작이 된다. 올해는 조금 ‘극단적인’ 기후였는지는 몰라도 단풍을 보니 역시 피곤한 빛이 역력하였다. 빛깔이 그렇게 곱지를 않은 것이다. 동네를 걷다 보면 이 근처에서 제일 빛이 찬란한 나무가 하나 있는데, 나는 그것으로 올해의 단풍의 질을 판단하게 되었다. 역시 작년에 비해서 조금은 초라한데, 색깔자체는 크게 차이가 없지만 잎사귀들이 건강하게 변하지를 않았고 심지어는 한쪽이 대머리처럼 듬성듬성 빠져 보여서 조금은 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자연도 기후의 스트레스를 왜 받지 않았겠는가? 우리 집 앞쪽에 있는 나무들도 역시 색깔들이 바랜 것하고 떨어지는 모양새가 예년에 비해서 아주 비정상적으로 불규칙한 모습들이다. 확실히 ‘심한’ 기후에 의한 피곤한 자연의 표현이다. 이러다가 바람이 부는 을씨년스런 날이라도 오게 되면 아마도 하루 아침에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되지나 않을까? 작년의 폭설을 기억하면서 올해는 과연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다.

 

Fall Colors, 2011

기후 탓으로 예년만 못한 Fall colors, 2011

 

Roo-dolph & Christmas girl

얼마 전에 작은 딸, 나라니가 email로 사진을 보내왔다. 제목은 Roo-dolph the Black-nosed Kitten 이었다. 사연은 간단히:

 

We’re ready for Christmas!!!!!

Sometimes I wonder why she loves me. hahahaha

 

이 정도면 나라니가 얼마나 ‘싱거운’ 가를 알 수 있었고, 한참을 웃었다. 이것이 바로 싱거운 것이 아니던가? 원래는 나라니의 언니인 새로니가 싱거운 말과 짓을 잘해서 어릴 때부터 ‘싱순이‘ 라고 놀렸는데, 요새는 작은 애가 이렇게 더 웃긴다.

 

나라니는 어릴 때부터 Christmas girl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크리스마스 씨즌을 일년 내내 기다리고 좋아했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은 수그러진 줄 알았는데, 이 사진을 보니 아닌가 보다. 벌써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려고 하니까. 여기의 고양이의 원래 이름이 Roo(루)라서 루돌프 사슴을 생각해서 Roo-dolph라고 한 것이다. 어찌나 그 고양이를 좋아하는지 모른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이 이런 pet들인데, 사람보다 더 믿고 의지하는 것 같아서 어떨 때는 조금 우려도 될 정도다. 우리도 현재 개와 고양이 둘 다 데리고 사는데 일단 정이 들면 사람과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어떨 때는 못되고 믿을 수 없는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도 들 때가 있어서 나 자신도 놀라곤 한다. 이것이 고독할 수도 있는 이 시대에 같이 사는 애완용 동물의 역할인지도 모른다.

 

Vonnie's Roo-dolph 2, 2011
Vonnie's Roo-dolph 2, 2011
Vonnie's Roo-dolph, 2011
Vonnie's Roo-dolph, 2011

 

 

200번째 블로그를 맞으며..

200번째 블로그, 지금 쓰고 있는 blog이 200번째 post가 되었다. 작년 말쯤에 100번째를 지났는데 일년이 되기 전에 다시 다음의 이백이란 숫자를 지나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 이것을 시작할 무렵에는 일주일은커녕 한 달에 한번 쓰기도 힘들었다. 거의 수십 년 동안 쉬어온 ‘한글쓰기’가 그렇게 쉬울 리가 없다. 특히 인터넷 출현 전에는 한글로 쓴 글을 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가끔 보는 신문이 전부랄까..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인터넷의 출현이 나에게는 그렇게 늦은 것은 아니다. 다시 한글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쓰게도 되었으니까. 사실 이 blog으로 나는 다시금 한글을 배우고 있는 셈이다. 정말 많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수식어들을 잊어 버렸다. 어쩔 수가 없다. 그런 것은 문화적이기 때문에 한글의 중심지에서 살지 않으면 아무리 잘 쓰려고 해도 어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00% 영어권 직장생활을 오래 한 여파로 솔직히 영어를 쓰는 것이 편하고 쉬울 때가 참 많았다. 그런 배경에서 다시 한글과 한국말을 쓰려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아서 나도 적지 않게 놀랐다. 세월의 횡포여..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쓰는 한국말은 아무래도 너무나 직선적이고 직설적이다. 그러니 그것을 한글로 쓰게 되면 정말 다시 읽기도 싫을 정도로 메마른 느낌인 것이다. 나의 blog은 그런 배경에서 쓰여진 것이지만, 나로써는 정말 기를 쓰고 최선을 다한 것이다. 다음의 단계인 300번째 쯤 되면 조금은 더 ‘세련’된 문장이 되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해본다.

 

Hillary Clinton on TIME
Hillary Clinton on TIME cover

힐러리 클린턴, 이번 주 타임 매거진의 표지 기사가 힐러리 클린턴에 관한 것이다. 아마도 이번에 리비아의 내전이 카다피의 피살로 끝나게 되면서 미국이 취한 신중한 개입의 성공이 힐러리 클린턴의 ‘빛나는’ 외교에 의한 것으로 보는 듯하다. 이번 리비아의 쾌거는 사실 유럽연합(EU), NATO와 미국의 신중하지만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개입의 성과인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지상군이 전혀 개입을 하지 않고 ‘기술적’인 지원으로 일관을 한 것이고 그것이 완전히 성공을 했다. 어떻게 힐러리는 어려울 수도 있는 이런 공동전선을 구축했을까? 첨단기술을 완전히 이해를 하는 대표적인 신여성인 그녀는 그런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첨단기술이란 대부분 social networking tools들, 대표적인 것이 twitter, facebook같은 것 들이다.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듯 하지만, ‘고리 타분할’ 수도 있는 덩치 큰 국무성의 최고 관리가 그런 것을 자유자재로 쓴다는 것은 별것이 아닌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 해외의 모든 미국대사관들에게 그런 social networking tools을 적극적으로 쓰게 했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성과일 것이다. 예를 들어 국무성에는 현재 192 Twitter feeds, 288 Facebookaccounts가 쉴새 없이 쓰이고 있다는 것인데, 옛날 생각에 ‘늙게만’ 보이던 ‘할아버지’ 국무장관들이 그런 것들을 쓴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나와 나이가 거의 비슷해서 항상 관심 있게 주시하고 있는 그녀, 참 매력적일 수도 있다. 이렇게 ‘머리 좋은 여자’ 힐러리, 과연 그녀는 장차 대통령이 되려는 생각을 어떻게 머리 속으로 조정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Dennis Ritchie, 1999
Dennis Ritchie, 1999

지난 10월에 C Programming Language의 ‘창시자’ 인 Dennis Ritchie가 타계를 하였다. 그리고 그는 computer operating system의 할아버지 격인 Unix를 Ken Thompson과 같이 ‘발명’을 한 장본인 이기도 하다. 그것들이 만들어질 당시는 personal computer란 것은 아예 이름조차 없었고 대부분 IBM mainframe아니면 PDP minicomputer가 전부였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었다. 나도 그 시대를 모두 거치며 컴퓨터를 배워서 그들을 생생히 기억한다. FortranCobol, Assembler 등이 programmer들의 전부였던 그 시절에 ‘대담하게도’ 거의 혼자서 C language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후에 완전히 컴퓨터의 ‘표준 언어’가 될 줄은 그들은 상상을 못했을 것이다. 나는 software engineer로 일 하던 내내 이것 한 가지로 ‘밥을’ 먹은 셈이 되었다. 거의 만능적인 ‘간결함’과 ‘적응성’을 가진 언어여서 business application서 부터 embedded system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안 쓰인 곳이 거의 없었다. 그뿐이랴.. Unix는 어떠한가? 이것은 C language보다 더 큰 파급효과를 남겼다. 지금의 Linux완전히 이것을 ‘베낀’ 것이고, Apple/Mac/OS도 이것을 조금 바꾼 것이다. 심지어 Microsoft쪽의 MS-DOS, Windows 같은 것도 기본적인 idea는 모두 이곳에서 나왔다. 이렇게 보면 이것을 ‘만든’ Dennis Ritchie의 업적을 조금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올해의 Japan Award를 받아서 뒤 늦게 그들을 인정했지만, 아깝게도 ‘겨우’ 70세에 타계를 한 것이다. 내가 존경할 만한 한 computer pioneer가 사라진 것이다.

 

지난 주말에 보스턴에서 열렸던 이화여대 북미주 총동창회, 연숙이 그곳에 다녀와서 날씨와 연관된 일화를 듣게 되었다. 거의 기록적인 10월의 폭설로 인해서 동창회가 열렸던 호텔이 정전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도 동창회의 주 행사가 시작될 무렵에 정전이 되어서 끝날 무렵에 다시 복구가 되었다니.. 조금 타이밍이 기묘하지 않았을까? 완전히 비상등만 켜진 상태에서 그 커다란 행사를 한다고 상상을 해 보라.. 특히 식사준비도 완전히 혼란에 빠져서 많은 참가자는 main dish를 못 먹었다고 한다. 하기야 어찌하랴.. 이것은 완전히 Mother Nature의 자연적인 act of God인데..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너무나 추억에 남는 행사가 되었다고.. 한 사람도 빠짐이 없이 ‘즐기고’, 사회를 보는 동창은 너무나 감정과 감격에 겨워서 ‘울었다’ 고.. 내가 들어도 가슴이 뭉클하였다. 특히 연숙은 너무나 오랜만에 총장 친구, 김선욱씨와 해후를 해서 사적인 시간을 즐겼다고 해서 나도 기분이 흐뭇했다.

 

Halloween, 2011

작은 딸, Vonnie(나라니)의 pumpkin art, 2011
작은 딸, Vonnie(나라니)의 pumpkin art, 2011

날자는 흘러 흘러 어느덧 그날이 되었다. 벌써 10월의 마지막 날.. 할로윈, 사실 이날이 이곳에선 ‘진짜 가을’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본격적으로 모든 ‘식물’들이 진한 색깔로 ‘갑자기’ 변하기 때문이다. 할로윈의 상징은 pumpkin(황금색 동그란 호박) 색갈이고 가을을 대표하는 색이고, 이맘 때면 이곳, 저곳 할 것 없이 모두 이 색으로 뒤 덥힌다. 그 옛날 미국에 처음 왔을 때는 사실 이날은 완전히 ‘아이들’의 날이었다. 옛날 대한민국의 어린이날 같다고나 할까.. 그것이 천천히 상업화 되어가더니 지금은 어른들이 더 즐기는 듯 하다. 그래서 이날에 쓰는 돈의 액수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우리 집은 아이들이 아이들이었을 때는 신경을 써서 준비를 해서 조금이라도 재미있는 추억을 남기려고 애를 썼는데, 아이들이 집을 떠나고 나니 이제는 남들이 즐기는 것을 보는 것이 거의 전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trick-or-treating하러 오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어서 candy종류를 올해도 준비해 놓고 기다린다. 이 동네는 그런대로 꾸준히 아이들 있는 ‘정상적인 가정’이 아직도 꽤 많이 살고 있어서 어찌 보면 이렇게 찾아주는 아이들이 고맙게도 느껴진다. 옆집의 David (Rhodes)은 40대의 비교적 젊은 아빠여서 완전히 아이들과 어울려서 집 문 앞에 진을 치고 앉아서 아이들을 기다리는데, 올해는 어쩔까 모르겠다. 이제는 고국의 추석보다 이것에 더 정이 들었음을 느끼고, 참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실감한다.

시월 말의 잡상(雜想)들

2011년 제2차 아틀란타 묵향회 회원전
2011년 제2차 아틀란타 묵향회 회원전

제2회 아틀란타 묵향회 회원전(회원 전시회) 1차 전시가 2011년 10월 22일, 토요일에 아틀란타 순교자 천주교회에서 있었다. 2차 전시는 일주일 뒤인 10월 29일부터 다른 아틀란타 성당인 김대건 천주교회에서 있었다. 아틀란타 묵향회 주최로 열린 이번 전시회는 이곳의 한국 성당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던 묵향회 회원들이 그 동안 쌓은 노력의 결과를 일반 대중에게 보이는 기회가 되었다. 나는 사실 묵향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 수준으로 대강은 짐작을 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연숙이 이것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곁다리, 등 넘어’로 보고 느끼게 되었다. 일반적인 동양화의 산수화를 연상했지만 그것보다 더 다양한 듯 했다.

회원들의 대부분이 여자들이었지만 예외적으로 ‘젊은’ 남자회원도 있어서, 사실은 그 분의 작품의 양과 질이 아주 뛰어난 것이었다. 흔히 생각하듯, 시간이 남아서 한다는 상투적인 인상이 전혀 없이 정말 좋아서 하는 듯 했다. 그날은 오랜만에 우리 식구가 다 모일 기회가 되어서 우리에게는 정말 드문 가족행사까지 되었다. 전시회는 작품자체를 떠나서, 조금 더 ‘멋지게’ 했었을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 작품들이 단상(성당의 제단)위에 함께 몰려있는 듯한 배치는 조금 자세히 보려는 사람에게는 아주 불편한 것이었다. 일반 전시화랑같이는 할 수 없다지만, 성당에서 정성껏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다.

2011년 아틀란타 묵향회 회원전 개막
2011년 아틀란타 묵향회 회원전 개막

연숙의 작품은 아무리 겸손해도, 아주 잘 그렸다는 생각이다. 어떻게 ‘난생 처음’ 하는 것을 그렇게 잘 했을까? 뭐든지 열심히 하는 것은 알지만, 이런 것은 ‘열심’ 만 가지고는 힘들기 때문에, 무언가 오래 숨어 있었던 ‘소질’이 조금은 있는 것이 아닐까? 내도 한번.. 하는 생각도 한 적이 있지만, 사실 어림도 없다. 어렸을 때 그렇게 즐기고 잘 그리던 나의 만화 솜씨를 기억하고 나보고 만화를 그려보라고 식구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하지만, 힘들 것 같다. 글씨를 쓰는 것이 이렇게 힘든데.. 무언가 그린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기초’가 제로다. 만화는 내 나름대로 ‘기가 막히게’ 잘 그렸는지는 몰라도 미술의 기초인 ‘뎃상’ 같은 것은 거의 낙제인 수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단언을 하랴.. 어떻게 나에게도 ‘숨어있던’ 실력이 있을지..

 

2011년 연례 이화여대 총동창회
2011년 연례 이화여대 총동창회

이화여대 총동창회 북미주지회연합회.. 휴~~ 이름이 길기도 해라.. 주최의 annual conventionBoston (Harvard, MIT..)에서 지난 며칠간 열려서, 연숙도 그곳에 가 있는데, 날씨가 갑자기 돌변을 해서 Nor’easter라는 악명 높은 눈보라 치는 날씨가 예상이 되었었는데, 다행히 Boston은 큰 문제가 없었던 듯하다. 어떻게 가을이 한창이 지금 그런 한겨울 것이 왔을까.. 역시 이것도 그것 때문인가? 꽤 오래 전에는 동창회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일도 하더니 언젠가 한번 고약한 동창에게 혼이 나서 완전히 관심을 잃었었는데, 이번에는 오래 전 친구였던 총장 김선욱씨가 온다고 해서 가게 되었다. 우리 결혼식에서 잠깐 본 후에 처음으로 보게 되는 것이라, 감회가 참 깊으리라 생각을 한다. 김총장은 독일에서 공부를 해서 미국에는 별로 연고가 없었던 듯해서 더욱 못보고 살게 되었나 보다. 요새 가끔 받아보는 이화여대의 소식지를 보면, 참..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하는 생각뿐이다. 연세대 다닐 때 버스에서 꼭 보게 되던 이대 생들.. 그런 소박하고 순진한 대학이 아니고 ‘완전히’ 국제화된 무슨 레바논의 국제형 대학같은 느낌까지 들었을 정도니까.. 세계 유일의 여자공과대학.. 허.. 분명히 세계 유일일 것이다. 그런 것은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늙은’ 생각에는 그렇게 확장만 할 것이 아니고 몇 개의 정말 ‘여성에게 중요한’ 분야를 개발, 정착해서 그 분야의 세계최고를 지향했으면 어떨까 하지만, 역시 늙은 생각일 뿐이다.

 

Waste King hot water dispenser
Waste King hot water dispenser

hot water dispenser.. 거의 펄펄 끓는 마시는 물을 ‘항상’ 제공하는 이것이 얼마 전에 조금씩 새기 시작해서, 결국은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7월초에는 집 전체의 더운물을 공급하는 온수기가 새서 갈았는데, 이번에는 이것이 또 문제였다. 이것은 3년 반전에 내가 직접 설치한 것이고, 조금 실망이었던 것은 아주 유명한 회사의 제품(ISE: InSinkErator, Inc.)이라는 사실에 비해 수명이 짧았다는 사실이다. 그 이전의 같은 것은 거의 10년 이상을 썼기 때문이다. 어떻게 유명한 InSinkErator, Made In USA의 품질이 이렇게 떨어졌을까? 미제의 신뢰도도 요새의 경제하락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쩔 수 없이 이번에 새로 산 것은 일부러 ‘잘 모르는’ 것으로 샀다. 모험인줄 알지만 그만큼 전번 상표의 신뢰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어제 새로 설치를 했는데, 예상이 되는 ‘설치할 때의 문제’가 하나도 없었다 (주로 plumbing에 관련된). 이런 것은 전기나 수도와 마찬가지로 문제가 없을 때는 별로 고마움을 못 느끼지만, 고장 나거나 해서 없을 때 그 귀중함을 느끼는 그런 것이다. 며칠, instant coffee를 마실 때, 불편을 겪어서 다시 한번 필요성을 절감한다.

 

연세대학의 추억(1): 졸업 앨범

 

연고전 Classic

연고전 Classic

 

관악산 바라보며 무악에 둘려 유유히 굽이치는
한강을 안고 푸르고 맑은 정기 하늘까지 뻗치는
연세 숲에 우뚝 솟은 학문의 전당. 아~ 우리들 불멸의
우리들 영원한 진리의 궁전이다 자유의 봉화대다.
다함 없는 진리의 샘 여기서 솟고 불멸의 자유의 불
여기서 탄다.

우리들은 자랑에 찬 연세 아들딸. 슬기 덕성
억센 몸과 의지로 열성 진실 몸과 맘을 기울여
연세에 맡기어진 하늘의 사명 승리와 영광으로
길이 다한다. 찬란한 우리 이상 밝은 누~릴 이룬다.

 

연세대 졸업 앨범, 1971년 2월 졸업
연세대 졸업 앨범, 1971년 2월 졸업

너무 너무 오랜 만에 연세대학교 졸업 앨범을 보며 교가 연세의 노래를 듣는다. 얼마나 오랜 만인지는 정확히 그 햇수를 모른다. 다만 1971년 2월 졸업 후에 처음으로 보는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다. 물론 그 오랜 세월 동안 조금은 보았을 것이지만 느낌 상 그렇다는 것이다. 그나마 지난 10여 년 동안 가끔이라도 즐겨 본 졸업 앨범은 거의 국민학교, 중고등학교의 것이었고 이상하게도 대학 졸업 앨범에는 손이 가지를 않았다.

어떻게 나는 이렇게 대학시절의 추억과 그 이전의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 이렇게도 다를까? 그 이유에 대해서 먼저 생각나는 것은, 역시 그 나이의 추억은 그 이전의 추억과 근본적으로 깊이가 다를 것이라는 사실이다. 심하게 말하면 조금은 유치하지만 순진한 추억과 더 성숙하지만 조금은 덜 순진했던 시절의 추억, 그런 차이가 아닐까? 그래서 조금은 더 복잡해진 대학시절의 추억을 글로 간단히 표현하기도 그 이전에 비해서 더 힘들었고, 조금이나마 정신적인 준비도 필요하다고 느껴서 이렇게 계속 미루고 있었다.

이전의 졸업앨범에 비해서 대학의 것이 아주 생소하게 느껴지는 제일 큰 이유는 대부분 ‘생소한’ 모습들이라 그렇지 않을까? 앨범의 주인공들은 같은 학과가 아니면 사실상 전혀 모르는 ‘동문’ 인 것이다. 같은 학과라도 재학생과 복학생(민바리 vs. 군바리 라고 불렀다) 으로 갈라지고 거기다 나이차이까지 있다. 물론 여학생들은 조금 사정이 다르겠지만.. 그래서 대학 앨범을 자주 안보게 되는지 모르겠다. 특히 학교 내에서 활동을 안 하거나 하면 다른 과의 동문들은 이름도 모르고 졸업하게 된다. 입학 동기들의 얼굴은 교양학부의 과정에서 조금 익히고 나머지들은 채플 시간(연세대는 개신교 재단의 학교), 그리고 과외활동을 통해서 보게 된다.

후회스럽지만 나는 연세대학 시절, 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활동을 하나도 한 적이 없었다. 예를 들면, 학생회나 과외 서클(그때는 동아리라는 말조차 없었다) 같은 것들이다. 한때 전통 있는 교내 사진(동호회) 서클인 연영회 의 가입 모임에 가기도 했지만, 그 이후 전혀 나가지 못했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일초도 주저 없이’ 그런 것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하고 싶은 심정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대부분 대학시절의 ‘멋과 보람’을 학교 밖에서 찾으려 했고, 또한 결과적으로 ‘대부분’ 그렇게 되었다. 결혼 후에 ‘아내’ 연숙이 학교 내에서 많은 활동을 했음을 알게 되었고, 그런 교내 활동의 멋과 보람 같은 것도 충분히 실감 하게 되기도 했지만, 재학 당시 나는 그런 교내 활동은 그저 고리타분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이번에 졸업앨범을 다시 보면서 그 오랜 세월 잊었거나 몰랐던 사실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비록 늦은 감도 없지 않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신문영 연세대 졸업사진, 1971년
신문영 연세대 졸업사진, 1971년

신문영, 정말 우연히 이 재동국민학교 동창을 이번 앨범에서 보게 되었다. 일부러 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어쩌다 보게 된 것이다. 신문영은 나의 지나간 재동국민학교의 추억 blog에서 이미 언급이 되었던 바 있었고, 그 후에 또 우연히 googling으로 다시 이 친구이름이 연세춘추(연세대 교내신문)와 연관됨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재학 당시 연세춘추 교내 신문에 관련된 과외 활동을 했던 모양이다. 이런 일들은 대부분 문과대학생들이 하는데 어떻게 상과대학 생인 그가 그곳에 관련에 되었을까? 연대 입학 후에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이 사실 이 교내 신문인 연세춘추였다. 내용도 그렇지만, 외모가 완전히 ‘현대식’이었다. 가로쓰기와 한글전용을 고수한 것이다. 아마도 최현배 님의 영향을 받아서 그랬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남과 조금 다르고, 앞서가는 연세대의 일반적인 모습이 좋았다. 연세대 다닐 당시 (아마도 도서관이 아니면, 학생회관에서) 잠깐 신문영의 얼굴과 완전히 닮은 사람을 보았었는데, 이제야 100% 그의 존재가 이 졸업앨범을 통해서 확인이 된 것이다. 상경대학의 상학과를 다녔고, 연세춘추에 관련된 사진에도 그의 얼굴이 보였다. 1971년 졸업이었으니까 이 친구도 일년 재수를 했거나 휴학 같은 것을 했던 모양이다. 이제 유일한 의문은, 어떤 중,고등학교를 다녔나 하는 것인데, 그것을 알기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연세춘추 1970년 12월 7일자 headline

연세춘추 1970년 12월 7일자 headline

 

박종섭 연세대 졸업 사진, 1971년
박종섭 연세대 졸업 사진, 1971년

꽤 많은 중앙고 동창도 이곳에서 처음이나, 다시 보게 되었다. 대부분 재수 입학을 해서 보통보다 1년이 늦게 졸업을 하게 되는 듯 싶었다. 나처럼 1년을 휴학을 한 경우도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재수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그 중에 경영학과의 이수열과 박종섭이 있다. 이수열은 나의 중앙고 3학년에 대한 blog에 이미 회고한 바가 있다. 졸업식 날 이수열과 같이 사진도 찍어서 사진도 남아있다. 이수열은 중앙고 3학년 때, 이과(理科)로 분반이 되어서 대입준비를 했는데, 어떻게 상경대로 가게 되었는지 모른다. 박종섭은 중앙고 3학년 때 우리 반이었다. 그러니까 역시 이과였는데, 어떻게 이 친구도 상경계열로 가게 되었는지? 특히 박종섭은 국민학교 때부터 나와 같은 학교를 다녔다. 재동국민학교, 중앙 중학교, 중앙 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그것도 졸업동기.. 이 정도면 참 우연치고는 대단하지 않을까? 그것에 비해서 우리는 한번도 친구가 된 적이 없었다. 그것도 참 대단한 인연이다. 박종섭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크게 성공한 동창, 동문이 되었다. 나중에 현대 반도체(Hynix) 의 사장이 되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났는지.. 확실치 않다. 그 이외에도 상학과 권세용, 정외과 구만환, 지질학과 윤병훈 등이 졸업앨범에서 반갑게 보이는데, 이들 역시 얼굴과 이름만 아는 정도다. 기계과의 김영철.. 중앙고 3학년 ‘반창’인데, 사실 연세대 재학 시 그를 본 기억이 거의 나지를 않는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 친구도 세속적으로 표현해서 ‘대성공’을 한 친구로, 동국제강의 사장으로 일을 하고 있다. 중앙고 1년 후배들, 내가 1년을 휴학을 한 바람에 ‘동급생’이 된 친구들이다. 전기과 박창희, 김태일, 기계과 양규식 등… 박창희는 나의 죽마고우로써 후배라는 생각보다는 ‘불알친구’ 라는 생각뿐이다. 김태일, 재학 시 같은 클럽도 하며 친하게 지냈다. 양규식, 재동국민학교도 1년 후배인 활발한 친구, 역시 재학 시 학생회에서 맹활약을 했다. 학훈단(ROTC, 일명 바보티씨)을 거친 모범적인 청년이었다. 무슨 인연인지 오래 전 시카고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아마도 1976년 쯤이 아니었을까? 나중에 들으니 LA로 이사를 갔고, 지금도 거기서 ‘매일’ 동창들과 골프를 즐긴다고..

김상우(옛 김시영), 앨범 사진, 1971년
김상우(옛 김시영), 앨범 사진, 1971년

상경대 상학과 김상우.. 전혀 모르는 이름이다. 그런데 사진을 보고 금새 알아 보았다. 이름이 바뀐 것이다. 그는 중앙중학교를 나와 같이 다닌 김시영 이었다. 어떻게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몰라도 얼굴이 안 바뀌었다. 중앙중학교 3학년 때 나의 다른 친구 이경증과 단짝이던 친구였다. 고등학교를 다른 곳으로 가서 바람과 함께 사라진 친구였다. 그런데 이렇게 졸업앨범에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연세대 시절 사실 그를 캠퍼스에서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김시영이 김상우로 이름이 바뀌었던 친구다. 왜 이름이 바뀌었을까?

건축과의 장학근씨.. 64학번이라고 하니까 나의 2년 정도 연배인 셈이다. 어느 고등학교를 다녔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곳 아틀란타에 왔을 때, 이곳 연세대 동문회의 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의 부인 장(피)영자 동문도 66학번 연세대 기정대 출신으로 나와 사실 입학 동기인 셈이었다. 학번이 거의 비슷한 연대 선배가 이곳에 같이 있다는 것이 반가워서 조금 가까이 지내려고 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이 선배의 얼굴을 이번에 졸업앨범 건축과에서 보게 된 것이다. 이 장 선배는 이곳의 ‘유지’ 격에 속해서 신문에도 자주 나오고, 한인사회의 이곳 저곳에 많이 관여가 된 듯 싶었다. 그러니까, 결혼식, 장례식 같은 데서 꼭 이 장 선배를 만날 확률이 높은 것이다. 오래 전, 이곳의 다른 ‘유지’ 격이었던 김예순씨 (치과의사)의 장례식에서는 ‘울면서’ 조사를 하는 것도 보았고, 다른 연세대 동문 (박만용씨)의 장례식에서도 그를 볼 수 있었다. 전공(건축과)도 충실히 살려서 이곳 주택에 관련된 연방정부의 기관에서 일하고 있다고 들었다.

기계과 민옥기.. 이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나의 졸업앨범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 Ohio State 다닐 때 그를 잠깐 보았다. 역시 같은 기계과에 있었다. 학교 기숙사 버스에서 가끔 보기도 하고 같은 공대라서 얼굴이 익었고, 연세대 피크닉에서도 보았다. 그것이 전부다. 동문이라서 웬만하면 조금 친해질 수도 있으련만.. 전혀 mutual chemistry가 없었을까.. 느낌이 그랬다. 나쁘게 말하면 ‘거만한 표정’ 일 수도 있고, 좋게 말하면, 그저 사람을 피하는 듯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 당시 나와 연세대 졸업동기라는 사실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같은 기계과 출신 나의 친구 김호룡에게 물으니 ‘검정고시 파‘ 라고 기억을 하고 있었고, 그것이 전부였다. 아마도 연세대 재학 당시에도 그렇게 ‘행동’을 했었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김호룡이 간암으로 세상을 떴을 때, 뒤 늦게 그 소식을 확인하려고 이 사람에게 연락을 한번 해 본적이 있었다. 둘 다 연세대 기계과 교수단에 있어서 그리 한 것인데, 나를 전혀 기억조차 못하고 있었다. 나의 그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들어맞았다는 씁쓸한 기분이었다. 어떤 사람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계속)

 

 

연세대학교 전기공학과 졸업앨범, 1971년

 

Mary Hopkin – Those Were The Days – 1968

그 당시 크게 유행하던 British Oldie, Beatles 의 Paul McCartney가 제작한 이곡은 역시 비틀즈의 Apple Record label 판매로  Mary Hopkin 의 debut곡이 되었고, 영국에서 1위 미국에서 2위까지 올랐다. 그 당시를 생각케하는 추억의 노래가 되었다.

Mary Hopkin – Goodbye – 1969

다음 해, 역시 비틀즈의 Paul McCartney 곡으로 Mary Hopkin의 두 번째 hit song이 되었다. 그 후에 다른 hit song 도 있었으나 우리들에게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1950년 생인 그녀는 그 당시를 풍미하던 세계적 fashion model이었던 영국의 TwiggyBeatles에게 소개 했다고 한다.

 

 

Triple Lows: 축~ 쳐지는 그런 날

오늘은 가을 날씨로는 조금 싸늘한 편이었지만 밝은 햇살 덕분에 ‘느낌’은 그리 춥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기분은 완전히 tail spinning 하는 듯 새카만 심연 속으로 빠지는 듯한 하루였다. 이것이 오래 전 유행하던 biorhythmtriple lows에 해당하는 그런 때가 아닐까? 며칠 전 돌아가신 분들의 연도와 장례식 등으로 인한 심적인 stress로 사실 몸과 마음이 축 쳐지기 시작했고, 오늘은 또 다른 종류의 스트레스가 나를 완전히 knockout을 시킨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일찌감치 항복을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만 지나가기를 기다린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이유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영어로 말하면 unreasonable한 사람들이다. 특히 이런 ‘막무가내’한 사람이 만약 ‘중요한 일’을 하는데 연관이 되어 있다고 하면 어쩔 것인가? 예를 들어 직장 같은 곳에서 이런 사람을 상대해야 한다면 정말 곤란할 것이다. 문제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노력을 해도 안 되면 결국은 그 관계는 완전히 실패를 하고 일도 실패를 한다. 제일 좋은 방법은 그런 사람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한다. 그것이 항상 가능하지는 않지만..

 나도 직장생활을 오래 하면서 이런 상황을 많이 당해 보았다. 대부분 피할 수 없는 case여서 정면으로 맞상대로 ‘싸우거나’, 그대로 ‘당하면서’ 고민하고 속을 끓는 수 밖에 없었는데, 나중에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그래도 그런 사람을 피하도록 노력을 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 같았다. 그런 사람과의 관계는 전혀 가망이 없어서 노력자체가 시간 낭비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사람을 만약 직장이 아닌 예를 들어 종교단체 같은 곳에서 만나서 같이 ‘봉사적인’ 일을 한다고 하면 어떨까? 내가 당한 case가 바로 이런 것이다. 아내 연숙은 오랫동안 이런 것으로 속을 끓고, 고민하곤 하는 것을 보아왔는데, 이번에 내가 처음으로 ‘당하게’ 된 것이다.

 

 

Gunatanamera – Sandpipers

내가 조금 관계된 아틀란타 한국성당의 전산 팀에 그런 unreasonable한 사람이 도사리고 있는데, 모처럼 마음먹고 ‘봉사’하려는 사람들을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쫓아내고 있는 셈이 된 것이다. 정면으로 대결을 해서 문제를 풀 것인가, 피할 것인가? 하지만 대결을 하려면 평균적 reasoning 하는 능력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 마디로 이야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이다. 이 사람을 대하는 자체가 시간 낭비인 것이라서, 결국은 ‘피하는’ 방법 밖에 없는데.. 이것이 과연 그리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결국 이 방법을 택하기로 오늘 마음 먹으면서, 나의 기분이 훨씬 나아지게 되었다. 이것도 오래 살면서 터득한 인생의 지혜 중의 하나다. 참, 세상 살기 힘들다. 이럴 때 특효약 중의 하나는 역시 추억의 oldies가 아닐까? 그 아득한 시절 즐겨 듣던 SandpipersGuantanamera…는 메마르고 갈라진 가슴에 촉촉이 쿠바의 야자유 향기를 뿌려 줄 듯하다.

 

 

망자(亡者)의 날

포근한 가을에서 주룩 거리는 비와 함께 싸늘한 가을날씨가 되돌아온다. 밤새 뒤척거리며 불편한 잠으로부터 싸늘하고 꾸준한 빗소리와 함께 새벽 4시에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 비는 싸늘하게, 꾸준하게, 가끔 세차게, 열어놓고 잔 창문 속으로 소리를 밀어 넣는다. 정말 오랜만에 새벽 4시에 깨서 일어나 보았다. 아무리 내가 ‘아침 사람’ 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런 이른 새벽에 일어난 적은 거의 없었다. 아마도 고등학교 3학년 대학 입시준비 때가 아니었으면..

어제는 생각해 보니 완전히 하루가 망자의 날이었다. 망자, 망인.. 이럴 때, 한자의 도움과 고마움을 느낀다. ‘죽은 이’ 보다 훨씬 느낌이 고상하고 존경스럽게 느껴지니까.. 두 사람의 고인(故人), ‘아들’ 들, 그 중 한 사람은 남편, 아버지.. 나이 61세와 48세의 남자들.. 어찌 느낌이 없겠는가? 두분 모두 나보다 늦게 태어나고 일찍 돌아가시는 형제님들이다. 한 분은 지난 주에 장례식이 있었고 어제는 연도만 드렸지만 다른 분은 연도와 장례미사가 어제 함께 치러졌다.

 두 사람 모두, ‘말기 암’ 선고 받은 지 한 달도 못 돼서 돌아가셨다. 요새는 ‘암’ 이란 것이 너무나 친숙해 진 느낌이고 감정에도 조금은 무디어지고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레 암의 공격에 항복을 하는 것은 그리 흔치 않을까? 그래서 가족과 주위의 사람들을 조금은 더 놀라게 하고 슬프게 하는 것이다. 이 분들은 나의 가족도 아니고 친지도 아니지만, 느낌은 마찬가지일 수 밖에 없다. 이럴 때마다 우리 모두는 사실 하루하루가 시한부 인생을 산 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을 하는 것이다.

 

특히 48세에 운명을 하신 윤(尹) 형제님의 생각이 하루 종일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한창 일을 할 나이.. 여느 48세였으면, 한 가족의 가장이요, 대학에 다닐만한 듬직한 아들 딸이 있었을지도 모를 나이, 은퇴하셔서 아들과 같이 살지도 모를 부모님.. 등등이 상상이 되는 그런 나이가 아닐까.. 하지만 그런 것은 ‘통계’에서 나온 흔한 상상에 불과하다. 모든 인생은 다 다른 것이다. 이분의 경우가 그렇다. 우선 미혼이다. 결혼을 한 적도 없고, 자식도 없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을지도.. 또한 경제적으로 왕성하게 일을 해서 얻은 ‘부의 결과’도 거의 없다. 사실은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보였다. 유일한 보람은 서로 뭉쳐서 사는 단출한 가족이 전부였을 것이다. 짧은 시간에 듣고, 본 것이라 이런 ‘느낌’들이 다 맞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이럴 때의 느낌은 대부분 맞는 것을 안다.

 61세에 운명하신 안(安) 형제님은 내가 속해있는 레지오와 조금은 관계가 있지만, 갑자기 운명하신 것과 집안 식구와의 종교적인 차이로 장례절차에 조금 잡음이 있었다. 내가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은, 고인에게 종교의 차이가 그렇게 중요할까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웃기는’ 발상이다. 그것을 고인이 보고 있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그래도 이분은 주위에 대가족의 ‘정신적 후원’이 있으니 어떻게 보면 참 행복한 이별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주위의 연고가 별로, 아니 거의 없던 윤 형제님을 보내는 것은 우리 ‘레지오가 해야 할 역할을 한마디로 보여준 케이스가 되었다. 그들은 우리 레지오의 정신적 후원과 지지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연도와 장례미사, 장지(葬地)동행까지 거의 ‘완벽하게’ 레지오는 사명을 완수했다. 나도 ‘남자’라는 이유로 생애 처음 운구(運軀)의 역할도 했기에 더욱 고인을 생각하게 되었고, 쓸쓸히 보낼 뻔했던 고인도 조금은 편안하셨으리라 굳게 믿는다.

생각한다. 우리 집은 어떤가.. 가족적으로 외롭기는 아마도 위의 윤 형제님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내가 오늘 이 세상과 영원한 작별을 한다면 과연 몇 명의 지인(知人)이나 올까? 범인凡人)으로써는 지나치게 화려한 장례의식도 보았고, 다른 쪽으로는, 고인에게 미안할 정도로 지나치게 쓸쓸한 의식 얘기도 들어서 안다. 그러니까, 이것도 ‘정도껏’ 이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나치게 많지도, 그렇다고 너무나 쓸쓸치도.. 않은.. 그런 것은 없을까? 이래저래, 어제는 삶을 통한 죽음, 죽음을 통한 삶에 대해 하루 종일 생각하는 날이 되었다.

 

 

인생은 미완성 – 김진관

 

해협海峽을 건너온 멋진 두 곡

한 동안 일본의 테레비 드라마를 download해서 보다가 얼마 전에 거의 우연히 음악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한국이 열심히 copy해서 방송하던 ‘가요 청백전‘ 같은 것, 홍백 가합전(歌合戰)‘ 이란 것을 보았다. 일본의 홍백(紅白)이 한국에선 청백(靑白)이 되었으니 참 바꾸어도 조금 밖에 바꾸지를 않았다. 약간 일본어들이 귀에 이해가 된 지금 노래를 듣는 것도 아주 좋은 공부가 되었다. 왜냐하면 모든 노래들은 ‘가라오께’ 스크린 화면처럼 노래 가사가 subtitle(자막)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도 원어인 일본 어로 나오니까 이건 정말 즉석으로 글과 말을 함께 보고 듣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아직까지 몇 편 안 보았지만, 확실한 것은 역시 우리나라의 트로트(도롯도) 전통 가요라는 것은 100% 일본의 트로트였다. 한마디로 그들이 ‘발명’한 것을 완전히 우리나라에서 ‘전통’ 적인 것으로 만든 것이다. 한마디로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정서가 딱 맞는다고 그렇게 나이가 들면 부르게 되는 우리나라의 트로트 ‘뽕짝’ 가요가 일본 “아해” 들 것이라니 말이다. 짐작은 했지만 그렇게나 똑 같을 수가 없다. 그것들을 들으면 역시 그들도 그들의 ‘전통 정서’에 맞는 모양으로 외국, 특히 서구에서 들어온 노래들과 완전히 대항을 하듯이 암암리에 보호를 받으며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궁금한 것은 과연 어떻게 명치유신 이후,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이런 류의 노래가 들어오고 일본에 정착을 했을까 하는 것이고, 일제시대에 어떻게 우리 노래로 정착을 하고 사랑까지 받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제가 100년 가까이 우리 정서에 살아있는데, 조선총독부, 중앙청을 부수어 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런 것들은 그대로 남겨두고 ‘일제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후세에 역사를 가르치는데 훨씬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그 나머지 노래들(클래식, 록, 팝, 힙합, 인디, 등등)도 한국과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결론적으로 일본이나 한국이나 거의 ‘똑같은’ 노래들을 부르고 있다. 유일하게 다른 것이 ‘고전적’인 전래 음악들.. 한국의 국악과 일본에 그것과 비슷한 것들.. 그것은 역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을 빼면 두 나라가 독특한 것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전통악기는 어떻게 다른지는 그것의 전문지식이 전혀 없어서 모르겠지만, 상당히 다를 것 같다.

 그런 배경으로 그들의 텔레비전 버라이어티 쇼를 보면 거의 완전히 수십 년 전의 한국의 쇼 프로그램을 보는 착각에 빠질 정도다. ‘한국과 일본은 다른 것보다 비슷한 것이 더 많다‘ 라는 나의 생각에 더 무게가 실림을 느낀다. 대부분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면 내 나이에 듣기에 정말 괴로운 것들 투성이인데, 아주 극소수의 것들은 정말 기가 막히게 가슴을 찌르는 듯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두 곡을 뽑아서 여기에 실어본다. 내가 말하는 ‘가슴을 찌르는 듯한 감동‘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아직 일본의 기성 가수들을 잘 모르지만 아마도 여기에 실린 美空 ひばり(미소라 히바리, Misora Hibari) 라는 여자가수는 우리나라의 패티 김이나 이미자 정도의 ‘최고 국민가수’가 아닐까 추측을 한다. 또 하나 곡(千の風, Thousand Wind)의 다른 남자가수는 사실은 클래식 쪽의 성악가가 아닐까 생각이 되고, 아주 젊은 것을 보니 현재 한참 뜨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愛燦燦-美空 ひばり-Misora Hibari

 

千の風-Thousand Wind

 

윤태석, 박종원 그리고 비행기

윤태석,  중앙고 57회 앨범에서 1966
윤태석, 중앙고 57회 앨범에서 1966

윤태석, 박종원, 그리고 비행기.. 이들은 오래 전 한때 나의 친구들이었다. 처음 만난 친구가 윤태석.. 중앙중학교 3학년 때, 그러니까 1962년이었다. 교실에서 윤태석은 나의 바로 뒤에 그의 짝꿍 정만준과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때 윤태석은 이미 우주과학과 비행기 광이었다. 그 나이에 그런 것들에 흥미가 없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그것들을 알고, 좋아하는 정도가 완전히 프로 급이었다.

 윤태석과 박종원은 그 당시 이미 서로 친한 친구로써 모형 비행기를 같이 날리고 있었지만 내가 윤태석을 통해서 박종원과 만나게 된 것은 대학 1학년에 된 후였다. 윤태석은 중학교 3학년 때, 이미 비행기와 더불어 우주과학에도 심취해 있었는데, 어디서 구해 왔는지 부지런히 총천연색으로 인쇄된 미국 우주개발에 대한 화보들을 교실의 뒤에다 붙여놓곤 했다. 그 당시 반 친구들, 좋건 싫건 간에 그런 사진들을 보면서 소련과 미국의 우주경쟁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요새 같으면 물론 칼라 텔레비전 현장 중계로 보겠지만 그 당시는 사실 흑백 텔레비전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1961년 4월 12일, 소련(Soviet Union)은 1957년 10월 사상 최초의 인공위성 스프트닉(Sputnik)에 이어서 역시 사상 최초로 cosmonaut 유리 가가린 (Yuri Gagarin)의 지구궤도 완전 우주비행을 성공시켰다. 미국이 또 한발 늦은 것이다. 한 달 후에 미국도 알란 쉐퍼드, astronaut Alan Shepard의 우주비행에 성공을 했지만 그것은 완전 지구궤도비행이 아니고 비교적 짧았던 15분 정도의 우주비행이었다. 그러다가 1962년 2월 드디어 미국도 존 글렌, astronaut John Glenn Jr.를 space capsule 우정7호Friendship 7에 태우고 거의 5시간 동안 지구를 3번 선회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때가 바로 미국의 첫 번째 NASA space program인 머큐리 프로젝트Mercury Project가 진행되던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던 때였다.

John Glenn Jr. on Friendship-7, 1962
John Glenn Jr. on Friendship-7, 1962

이 당시에 윤태석을 알게 되어서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을 생생한 화보로 목격을 할 수 있었고, 또한 모형비행기에 대해서도 그에게 많은 것을 듣고 배우게 되었다. 그 당시 모형비행기라면 조잡한 수준으로 대나무와 습자지 같은 종이, 고무줄로 프로펠러를 돌리거나, 글라이더로 날리던 그런 시절이었다. 가끔 만들어 보고 날리기도 했지만 무언가 잘 되질 않았다. 재료가 형편이 없던 시절이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가끔 학생을 중심으로 모형비행기대회가 열리곤 했지만 나는 꿈도 못 꾸었는데 윤태석은 박종원이란 자기 친구와 같이 참가하곤 했다고 들었다.

 그때 윤태석이 학교로 가지고 와서 보여준 잡지는 미국의 Model Airplane News 였고, 그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이제까지 우리들이 만들던 모형비행기와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대나무와 습자지, 창호지로 만들던 것은 전혀 없었고, ‘진짜’ 비행기와 똑같은 것들, 게다가 고무줄 동력이 아니고 조그마한 엔진을 가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진짜 비행기를 그대로 축소한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흥분한 것은 잠깐이고, 현실로 돌아와서, 우리들이 그런 것들을 만들거나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물론이고 볼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미국에서는 그런 것들이 가능하다는 ‘미국 환상’만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윤태석과 헤어지게 되었다. 중앙고교 3년 동안 한번도 같은 반을 하지 않았다. 비행기에 대해서도 거의 잊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비행기 대신에 망원경과 전파과학에 심취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대학교에 가면서 윤태석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는 연세대 전기과엘 갔고, 태석이는 고대 물리학과에 갔는데, 어떻게 연락이 되어서 만나게 되었는지 그 기억이 가물거린다. 그런 어느 날 태석이가 박종원과 함께 우리 집엘 놀러 와서, 말로만 들었던 박종원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도 나와 함께 중앙 중 고교 6년을 다녔지만, 한번도 같은 반을 해 본적이 없어서 사실상 얼굴을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별로 큰 상관이 없이 우리들은 같은 취미를 가진 동창생으로 다시 만나서 비행기 이야기로 얘기꽃을 피웠다.

gas engine powered model airplane, Angst, 1966
나의 ” engine, Enya 019″ line-controlled 모형비행기, Angst, 1966

 알고 보니 태석이보다 박종원이 이쪽 계통은 더 프로였다. 청파동에 있던 그의 집에 가보니 진짜 미국 잡지에서 보던 엔진이 달린 비행기들이 있었다. 엔진도 꽤 많이 가지고, 숫제 조그만 machine shop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의 집은 2층 양옥으로 상당한 고급주택이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어떤 사립학교 재단의 이사장이라고 했다. 그날부터 나는 그 집을 수시로 드나들며 ‘진짜’ 모형비행기 만드는 데 시간을 쏟았는데, 결과적으로 이렇게 쓰인 시간 때문에 대학의 강의를 듣는데 상당히 stress를 주어서 성적을 유지하느라 상당히 고생을 하기도 했다.

그것이 1966년 봄이었다. 그 봄을 나는 온통 엔진 비행기 만드는 것, 날리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런 것들에 필요한 재료들은 거의 전부가 미8군을 통해서 나오는 것들이라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그런 것을 취급하는 유일한 곳은 ‘스카라 극장’앞, 퇴계로 근처에 있었던 ‘합동과학교재사‘ 라는 곳이었는데, 그곳에도 사실 종류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비행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그것을 날린 장소가 더 중요했다. 어느 곳이고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서울에서는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대로 학교 운동장은 예외였지만 대부분 출입이 제한 되어있어서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가는 곳이 교외선을 타고 가는 화전비행장이었다. 말이 비행장이지 제일 작은 신문사에서 쓰는 경비행기들이 활주하는 커다란 풀밭이었다. 그러니까 아주 한가한 곳이고 넓은 평지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교통편이 불편했는데, 그 복잡한 교외선 열차에 비행기를 들고 타야 하기 때문이었다.

대방동 공군사관학교에서 열린 모형비행기 대회, 1966
대방동 공군사관학교에서 열린 모형비행기 대회, line-control 비행기가 나르고 있다.1966

한번은, 졸업 후에 처음으로 중앙고교 뒷산까지 비행기를 들고 가서 날렸는데, 나의 실수로 비행기가 완전히 박살이 나기도 했다. 그때 비행기 조종은 거의 U-reely 이라는 것을 비행기 날개에 연결해서 빙빙 돌게 만들고 그것으로 뒷날개의 elevator로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별로 비용이 들지 않았기 때문인데 사실 진짜 프로들은 radio control로 조종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radio control의 값이 너무나 비싸서 머리만 굴리다가 못하고 말았다. 무선 조종 비행기의 시범을 한번 보았는데, 나는 완전히 넋이 나갈 정도로 감명을 받았다. 그것은 공군사관학교 교정에서 열린 ‘한국 모형비행기 대회’ 란 것이 박종원과 참가를 했다가 본 것이다. 학생도 많았지만, 직장인, 미군들이 대거 참가를 한 아마도 제일 큰 대회였을 것이다. 기어코 무선조종을 해 보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기재를 구하는 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능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고, 조금씩 ‘꿈’에서 깨어나게 되면서 서서히 열기가 식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만났던 윤태석과 박종원과도 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1972년 경에 마지막으로 윤태석을 그의 짝꿍이었던 정만준과 같이 한번 만났고, 그것이 그들과의 마지막이었다. 세월의 수레바퀴가 구른 한참 뒤에 윤태석과 중앙고 동창회의 인터넷을 통해서 연락이 되었는데, 그는 경인에너지에서 오래 근무를 했고, 학교 선생님인 부인과 결혼을 했다고.. 현재는 비행기 대신에 망원경에 더 관심을 쏟는 모양이었다. 한때 개인 천문대를 만들 계획을 다 세웠다고 들었다.

미국에서는 모형비행기는 상당히 프로 급의 취미에 속하고 역사도 amateur radio(HAM)과 더불어 상당히 오래 되었다. 고국도 경제여건에 따라 이런 취미는 미국이나 일본 수준까지 온 듯하다. 나의 조카(임준형)도 한때(대학시절) 이것에 심취를 한 모양이고, 그것이 거의 15년 전인데 그때 벌써 무선조종을 손쉽게 하는 것을 보고 그 수준을 알게 되었다. 비록 이 ‘고급취미’ 때문에 학교공부를 소홀히 해서 두고두고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절대로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멋진 추억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까.. 윤태석, 박종원..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시월의 반

시월의 반이 되어간다. 어릴 적 국민학생일 적, 10월은 십 월이 아니고 시월이라고 귀따갑게 배운 기억의 시월.. 이제는 추운 가을의 맛도 이미 느꼈고, 조금은 월동준비도 생각하게 해 주었다. 최근 아주 정상기온을 유지하며 며칠 동안은 땅속으로 포근히 스며드는 비까지 뿌려준 올 가을, 자연의 하느님께 감사를 안 할 수가 없다. 시월에 있는 눈에 띄는 날은 역시 시월 마지막 날, 할로윈 (Halloween)일 것이다. 일년의 수확을 상징하는 호박의 황금색이 온통 동네를 장식하는 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초자연적 존재인 ‘귀신’을 즐기는 날.. 비록 종교적으로는 ‘악마,귀신 숭배’를 우려해, 권장하는 날은 아니지만, 분명히 종교적 의미의 ‘초자연적인 귀신’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이런 날을 재미없어 하는 축은 아마도 ‘무신론자’들 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귀신 조차’ 믿지 않을 테니까..

에스페란토 회보
미국 에스페란토 회보

에스페란토, 2개월마다 간행되는 회지, American Esperantist가 어제 배달되었다. 지난 번 아버지가 관련된 에스페란토 역사를 추적하며, 미국 에스페란토 협회에 문의를 한 적이 있어서 이렇게 ‘무료’로 보내주었나 보다. 이 회보를 받아보고 느낀 것은, 생각보다 ‘초라’하다는 것이었다. 각종 회원들의 연회비 (정회원은 $40/year!)로 운영이 되는데 어떻게 이렇게나 빈약한 느낌일까? 물론 인터넷의 영향으로 인쇄 간행물이 대폭적으로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다 해도 조금은 더 ‘화려하게’ 만들 수 없었을까? 역사 깊은 대한민국 천주교 잡지 경향잡지, 1950년대의 느낌을 줄 정도로 보는 느낌이 ‘차분’하다. 그에 비해서 내용은 훨씬 다양하고 깊이가 있는 ‘것’ 같은데.. 에스페란토를 읽을 수 없기 때문에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이 느끼며, 과연 에스페란토가 얼마나 더 ‘지탱’을 할까 하는 모양인데, 나는 오래 오래 ‘살게’ 되기를 바라는 입장이다. 내가 이것을 배워서 쓰고 안 쓰고 하는 문제보다는 이런 ‘인류 평등,평화‘의 정신이 계속 발전하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아틀란타 천상의 모후 꾸리아 간부교육피정, 드디어 내일로 다가왔다. 이것에 조금 의미가 있다면, 연숙이 꾸리아 부단장에 피선된 후 처음의 행사가 되었고, 나는 곁다리로 단원의 자격으로 봉사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부단장이 식구에 있으니 나에게도 이렇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사실은 별로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거절할 명분이 뚜렷하지도 않았다. 레지오의 철칙인 ‘순명’을 어기는 것도 되니 할말도 별로 없었다. 단장이란 사람은 나머지 임원을 완전히 믿는지 한달 동안이나 자리를 비우고 행사 하루 전에 나타나셨다. 결국은 자리를 지키는 ‘일벌’들이 실질적인 일은 다한 셈이고.. 이 동네의 거의 모든 일들이 이렇게 카프카 식으로 진행된다. 내가 맡은 일은 일일 사진기자의 역할인데, 어떻게 보면 아주 단순한 일이다. 하지만 꼬박 전체 행사를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라 조금 신경이 안 쓰일 수 없고, 나의 camera가 아주 ‘시로도’ 급이라, 과연 사진이 잘 나올지도 걱정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것도 레지오의 중요한 봉사이기 때문에 기꺼이 하면 될 것이고, 나머지는 다 ‘위에서’ 보살펴 주실 것이다.

 

고석태 나혜성씨 부부의 추억

1980년 가을, Columbus, Ohio.. Ohio State University campus.. 그러니까 31년 전 이맘 때쯤인가, 그들을 처음 만났다. 이 오랜 세월에 비하면 거의 찰나에 가까울지 모를, 기껏해야 3~4개월 정도나 알고 지냈을까? 그 당시 신혼이었던 우리 부부보다 나이가 한두 살 정도 적었던, 젊었던 부부, 남편 고석태씨, 부인 나혜성씨, 가끔 추억하고, 생각한다. 남편 고석태씨, 콧수염의 미술전공 유학생 (홍대 출신이었던가?)으로 그 해 가을학기에 OSU로 왔고, 아내인 나혜성씨는 남편을 따라서 온 것이었다.

바른 쪽에고석태, 나혜성씨 부부와 연숙 OSU Buckeye Village, 1980년
바른 쪽에고석태, 나혜성씨 부부와 연숙 OSU Buckeye Village, graduate student Apt. 1980년

1980년, 여러 가지로 의미 있던 해였다. 그 해 1월 25일에 나는 서울에서 연숙과 결혼을 했고, 그 해 6월에 연숙이 이곳에 와서, 본격적인 우리의 신혼’유학’ 생활이 시작 되었다. 그 해는 또 대한민국에서 ‘해외 유학자유화’가 시작이 되어서, 가을 학기에 맞추어 ‘대거’ 유학생들이 OSU 에 도착했다. 유학자유화란 것이 자세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지만 우선 의례 치르던 문교부 유학시험이 면제된 듯 했다. 그러니까 지망학교의 admission만 받으면 여권을 받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큰 학교(50,000+)인 OSU에도 그 전까지는 한 학기에 몇 명 정도 유학생들이 오곤 했는데, 이번은 완전히 공식이 바뀌어서 수십 명이 넘게 ‘몰려’ 온 것이다. 전공 학과도 다양해 져서 전에는 못 들어보던 학과에도 유학생들이 왔는데, 그 중에 고석태씨 부부가 끼어있었다. 그의 미술전공은 그 전에는 사실 보기 힘들었다. 대부분 이공계 아니면 경제학 등이 주류였었으니까.. 이때를 계기로 유학생 문화가 일시에 바뀌게 되었다. 이제까지는 사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얼굴과 이름 정도는 알고 지냈는데, 일 순간에 그것이 불가능해 진 것이다. 그와 때를 맞춰 ‘중공’ 에서도 ‘짱꼴라’ 유학생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중국유학생이면 100% 대만 출신이었는데,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머리 좋은’ 중공 학생들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중에 새로 이곳에 유학생으로 도착한 고석태, 나혜성씨를 만나게 되었다. 만나게 된 인연이란 다름이 아니고, 아내 연숙과 나혜성씨가 이미 알고 있던 사이였던 것이다. 연숙은 이대 학생회의 임원이고, 나혜성씨는 이대 학보사(학교신문)의 학생 기자였다고 했다. 그 당시 과외 활동으로 ‘중간 집단 교육‘이란 것을 같이 받을 때 만났다는데, 나는 아직도 이 중간집단교육 이란 ‘해괴한’ 이름이 무엇을 뜻 하는지 모르지만, 좌우지간 ‘친목도모’를 위한 것이 아닌 조금 더 ‘고상한’ 이념을 위한 교육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교육의 지도교수가 아틀란타의 Emory University 출신인 한완상 교수였다고 했다. 나의 대학시절 활동이 모두 ‘남녀 친목도모’인 것에 비해서 연숙은 거의 이렇게 조금은 ‘심각한 정치적’인 색깔이 있었다. 나혜성씨는 이런 활동에서 만난 ‘동무’라서, 그 들은 보통의미의 친구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처음으로 자기만이 알던 사람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어서 연숙은 미국에 온 후 3개월 동안 느끼던 약간의 ‘미국적’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우리는 이들 부부와 자연스레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남편 고석태씨는 콧수염을 기르는, 역시 미술학도의 개성을 들어내고, 아주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미술전공 남자 유학생을 나는 본 적이 없어서 사실 공부하는 얘기는 미리부터 기대를 할 수가 없었다. 주로, 젊은 부부가 사는 얘기를 하곤 했지만, 가끔 여자 둘이 모두 ‘사회 문제 의식’에 경험들이 있어서 그랬는지 그런 쪽 이야기도 하곤 했다. 그 해 1980년 겨울에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우리들은 어린 아이들처럼 밖으로 나가 마구 뛰어 놀았다. 나를 제외한 이 세 명은 모두 미국에서 처음 맞는 눈이어서 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는데, 나는 이미 오래 전 경험을 한 바가 있어서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고석태씨보다 나혜성씨의 기억이 더 나는 것은, 나와 조그만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해 1979년에 내가 서울에 갔을 때, 결혼을 염두에 두고 신부 감 소개를 조금 받았던 사람 중에 나혜성씨의 친구가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좁다고나 할까.. 조금 놀랐던 것도 사실이다. 그 때 만났던 그 여자는 한마디로 좋은 집안을 가졌고, 그들도 역시 비슷한 조건의 사람을 찾던 참이었으니.. 나는 사실 ‘면접시험’에서 낙방을 한 셈이 되었다. 그때 그 집의 아버지 되는 사람은 정말 ‘무례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고, 그때 사실 ‘아버지 없는 설움’ 을 처음 느꼈다. 여자 본인은 그 아버지 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었지만 역시 ‘본인의 사람됨 이전에 집안‘ 이라는 생각은 마찬가지였다. 나혜성씨의 얘기가, 나중에 그들이 바라던 대로 ‘근사한 결혼’을 했다고 했다. 이렇게 알게 된 것도 조그만 우연이었다.

 이렇게 알고 지내던 고석태씨 부부가 겨울이 지나고 ‘갑자기’ 없어졌다. 사실, 아직도 어떻게 없어졌는지 그 자세한 과정은 우리부부 모두 기억을 할 수가 없지만, 그들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 것이다. 생각에 OSU에서 별로 좋은 전망을 기대 못해서 그랬을 것이다. 대부분 학교를 옮기는 case는 이렇게 더 좋은 조건을 찾아 떠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서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진 것이고, 또한 확실히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중에 듣기에 Oregon State로 갔다는 소문도 듣긴 했지만 확실치 않다. 그것이 전부다. 그래서 더 궁금한 마음이 이렇게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이다. 나혜성씨가 이대출신이라 연고를 통하면 알 수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역시 거대한 세월의 바퀴에 치어서 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지금 살고 있을까?

 

Longer – Dan Fogelberg, 1980
그 당시 추억의 oldie, 사랑이 전부였던 시절..

 

내 생애의 가을

 

인간은 역사가 없다면 인간일 수 없을 것이다칼 야스퍼스

 

오랜 전, 50세가 넘어서 부터 사람의 일생을 일년의 사계절에 비교하는 것도 그럴 듯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추운 봄으로 시작을 해서 추운 겨울로 끝이 나는 그런 일년이다. 초봄에 태어나고, 따뜻한 여름에 무럭무럭 자라며 가을에 인생의 수확을 하고 겨울이면 눈 속에서 잠자듯 조용해지는 그런 사계절의 인생.. 멋진 비유가 아닐까?

 가을이면 수확이 한창일 것이고 그것이 끝나면서 낙엽도 다 떨어지고, 모든 것이 조용해 진다. 60이 넘은 내 나이면 이 때쯤에 왔을까? 아마도 수확은 다 끝났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맘 때면 여름 동안의 일은 다 끝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식들이 다 출가를 해야 수확이 끝나는 것이라면, 나는 아직도 수확을 기다리는 것이 된다. 아니, 이 수확은 겨울에나 올지도, 아니면 숫제 안 올지도 모른다. 을씨년스러운 계절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아직도 초조함으로 남아서 잔잔한 stress를 준다.

 가을의 맛은 오래 전 팔방미인 이진섭씨의 말씀대로, 잔잔하게 저물어 가는 석양을 바라보듯이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지난 날을 생각하며 내가 세상에 왔다 가는 의미를 조금씩 생각해 볼 계절이 아닐까? 아무리 인생은 60부터 라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전에 비해서 육체적인 건강이 많이 나아졌다는 얘기일 것이고, 그것이 정신적으로 젊게나 유치하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나이에 따라 점점 빨리 지나가는 시간과의 싸움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인생의 가을인 이 시점에서 사람들은 세상이 알건 모르건 간에, 어떻게 ‘자기의 역사’가 남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나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실수한, 잘못된’ 자기의 역사를 고치려고 할까? 후회가 되는 것들, 못 다한 꿈들.. 이런 것들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 어떤 사람은 전혀 후회도 없고, 꿈도 다 이루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자만한 평가를 절대로 믿지 않는다. 그것은 한마디로 인간으로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역사 자체를 고칠 수는 없지만 다른 역사를 만듦으로써 멋진 조화, 균형을 이루면 안 될까? 나는 그것은 ‘절대로’ 가능하다고 믿고, 그것을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지 찾고, 행하는 것이 나의 현재, 인생의 가을을 살면서 해야 할 것들이다. 아~~ 가을이여 천천히 흐르거라~~

 

 

Autumn of My Life – Bobby Goldsboro 1968

Bobby Goldsboro의 classic oldie, 인생의 봄에 들었던 추억의 노래지만, 그 당시에도 인생의 계절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사랑을 인생의 흐름에 맞추어 노래했지만 지금 들어도 역시 계절과 인생의 흐름이 멋지게 조화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