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이여, 안녕..

어느덧 2011년 7월과 작별을 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덥긴 했지만 의외로 다른 지역 (특히 Texas, Oklahoma, midwest, & northeast)들이 이곳보다 ‘더’ 더워서 상대적으로, 심리적으로 조금 ‘덜 덥게’ 느껴진, 아니 그렇게 느끼려고 했던 그런 더위였고, 거기다가 다행히 늦은 늦은 오후에 한바탕 쏟아지는 시원한 소낙비가 가끔 우리들을 즐겁게도 했던 그런 올해의 7월 달이 간다. 7월의 초순에 ‘일단’ 끝냈던 water heater project 에서 하도 의외의 고생을 해서, 나의 몸과 마음이 완전히 knockout이 되어 그 이후로는 ‘일부러’ 그것들에 손을 대지도 않았다. 이 project는 아직 완전한 끝마무리를 못 지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끝이 나서 현재 우리 집의 더운 물을 쓰는 데는 지장이 없다. 7월이 가기 전에 100% 끝을 내려고 했지만, 사실 아직도 다시 손을 대고 싶지 않을 정도다. 그 푹~ 쉬는 동안에는 summer reading 에 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갑자기’ 읽어야 할 must-read-list가 늘어나고 있어서 더 시간이 걸리고 있는 것이다. 올 여름은 아직도 한달 이상이나 남아 있어서 당분간 이 ‘게으른 독서’는 계속이 될 것이다. 
 

1980년대 에스페란토 교본
1980년대 에스페란토 교본

이번에 전에 읽었던 책을 반납을 하러 도서관엘 가서 아주 우연히 에스페란토(Esperanto)에 관한 책을 보고 빌려오게 되었다. 나는 이 에스페란토란 말 자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꽤 친숙한 것이었다. 물론 중학교 때 세계사 시간에 잠깐 그 말을 본 것을 기억한다. 그러니까 세계사에서 잠깐 언급할 정도인 그렇게 중요한 ‘사건’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왜, 그것이 친숙하게 느껴지는가 하면, 생전 보지도 못한 나의 아버지(이정모, 평창이씨 익평공파 27세손)께서 육이오 동란 전까지 ‘조선 에스페란토 ‘의 회원이셨기 때문이다. 그 당시 아버지의 나이로 보아서 중요 멤버였을 것이다. 회원들이 모여서 찍은 단체사진을 본 것도 또렷이 기억을 한다. 그 이외에도 아버님께서 쓰시던 책들 속에서 에스페란토에 관한 것이 꽤 많이 있었다. 물론 어린 나이에 나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몰랐다. 나중에 세계사 시간에 잠깐 배우게 되어서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추억과 더불어, 150년 전에 폴란드의 자멘호프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 ‘세계평화를 위한 인공 언어’가 과연 어떻게 ‘생겼는지’ 갑자기 궁금해 진 것이다. 빌려온 책은 1980년대에 발행이 된 그런대로 오래된 책인데, 잠깐 훑어보니 나의 예상과 달리 꽤 잘 보존되고 살아 있었다. 문제는 이것이 아직도 희망한 만큼 널리 알려진 언어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아직도 ‘동호회’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다.

 

 

말세인가.. 외딴 섬에 가고 싶다

요새 며칠 계속 미국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동북부(northeast)에 완전히 더위 비상이 걸렸다. 뉴욕, 보스톤을 포함한 대도시들이 완전히 지독한 더위에 고생을 하는 모양이다. 신기한 것은 지금 이곳 아틀란타를 포함한 동남부 지역은 그렇게까지 덥지 않은 것이다. 그저 평년의 기온에다가 오후에는 시원하게 비까지 오곤 해서 살만하다. 문제는 그 ‘북쪽’ 지방에는 이곳에 비해서 더위에 대한 대비가 허술하다는 것인데, 대표적인 것이 아마도 에어컨 일 것이다. 이런 더위에 그것이 없으면 정말 밤에 잠자기가 힘이 들 것이다. 그쪽은 겨울에 지독한 추위와 폭설로 고생을 했는데 여름에는 더위로.. 이것이 바로 극단적인 기후의 표본이 아닐까? 지구온난화의 한 증상이 이런 극단적 기후라고 했는데, 아마도 그 말이 일리가 있어서 조금은 걱정이 된다.

더위와 더불어 뉴욕 시에서는 내가 보기에 ‘해괴’ 한 법이 통과 되어서 동성결혼이 붐을 이루고 있다. 종교를 떠나서, 이것은 한마디로 ‘변태’ 인 것인데, 어찌하여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일까? 한마디로 ‘정신병자’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인데, 이러고도 정상적인 사회가 오래 오래 문제없이 유지가 될까? 대부분 ‘인간’들은 아마도 찬성보다는 무관심에 가까운데, 그들 ‘변태그룹’ 인간들이 아마도 정치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것 같고, 그 동안 사회문제에서 아슬아슬한 입장을 취했던 오바마(Obama)가 다음 선거를 의식하고 눈을 완전히 감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그 변태들에게 그 동안은 그저 구제불능의 불쌍한 군상들이라고 무시를 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다음의 단계는 무엇인가? 아마 근친결혼도 그렇게 이상하지 않을지도..아주 아찔한 상상이지만, 모든 것을 ‘자기가 좋은 법대로’ 하겠다면 형제, 자매, 남매끼리 ‘결혼’ 하겠다면 무슨 근거로 막겠는가? 아예, 동물과 결혼하겠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것 없을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enough is enough의 전형적인 case일 것이다. 이제는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구별을 할 수가 없게 되는 세상이 되고 있다. 어느 외딴 섬에라도 가서 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신세..어찌 돌아가는 세상인가?

 

 자칭 크리스천 이란 미친 놈이 노르웨이(Norway) 에서 총기난동을 부려 무고한 젊은 아이들이 무수히 죽었고 정부청사까지 폭파 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이슬람교에 대한 ‘보복’ 같은 인상인데, 왜 죄 없는 아이들을 그렇게 ‘재미있게’ 죽여야 했을까? 우리가 보기에는 분명 ‘정신이상’에 속하겠지만 그로서는 아주 정신이 말짱하다고 얘기한다. ‘정치적’인 이유로 ‘혁명’을 해야 했다고? 여기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를 판 것으로 우선, 죽일 놈인데, 회교도가 싫었으면 그 총과 폭탄을 들고 극단주의 테로리스트(terrorist)를 찾아 나설 것이지.. 비겁하게 독 안에 든 쥐처럼 갇힌 조그만 섬에 가서 그 ‘지랄’을 벌렸을까? 내가 짐작하건대, 친구하나 없는 외톨이가, 혼자서 주변에 점점 늘어나고 있는 이슬람인 들을 보고 분명히 겁을 먹었을 것이다. 거기다.. 사형제도도 없고 최고형이 30년이라니.. 어느 것에도 ‘겁먹게 하는’ 억제 제도와 관용에 대한 교육’이 없어서 더 그런 비극을 재촉하지 않았을까? 참, 이런 것도 ‘어느 외딴 섬에 가서 살고 싶게 하는’ 그런 추악한 뉴스들이다.

 

휴~ 덥다, 더워..

올 여름 들어서 첫, ‘강더위’가 시작되었다. ‘강추위’와 비슷한 말 ‘강더위’란 말은 들어본 기억이 없지만 할 수 없이 쓰게 되었다. ‘무더위’ 보다 더 더운 말을 찾기 쉽지 않았다. 지난번 나의 blog에서 요새는 날씨에 대한 뉴스가 조금 주춤 해 졌다고 쓰더라니.. 그새를 못 참고 이렇게 되었다. 지난 4월 달의 날씨에 관한 메가 급 뉴스는 비록 아닐 지라도 이런 찜통더위는 조금 신경이 쓰인다. 바람이 전혀 없이 지독한 습도가 가세한 더위에서 사실 ‘도망’ 갈 곳이 없다. 그늘도 소용이 없으니까.. 유일한 방법은 ‘에너지’를 써서 더위를 ‘뽑아내어야’ 하는 수 밖에 없다. 나는 이렇게 에너지를 써서라도 편하게 살아야 하는 현대문명이 별로 맘에 들지 않지만.. 어찌하랴.. 인간은 이렇게 자꾸만 ‘약해’져 가는 것을..

오래 전 고국에서 살 때, 도망갈 수 없는 더위를 겪었던 기억이 별로 없었다. 그런대로 ‘즐길만한’ 더위였다. 딱 한번 예외는 있었다. 1972년 여름..서울 세운아파트..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잠을 못 잤다. 밤에 기온이 거의 떨어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나중에 ‘열대야’ 라고 부르게 된 것을 알았지만 그 당시는 처음 겪는 현상이라 적절한 ‘용어’도 없었던 것이다. 확실히 무언가 기후의 거대한 변화의 흐름이 있긴 한 것이다.

그 당시 서울에는 아주 고급 사무실과 건물이 아니면 ‘에어컨’ 이란 것이 없었다. 하물며 일반 주택에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전기선풍기만 있으면 대 만족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보다 훨씬 윤택하게 살았던 일본도 별 차이가 없었다. 그들도 역시 전기선풍기로 견딜 만 했다. 그러다가 이곳 미국에 와 보니 이건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실내 여름이 우리나라 겨울 실외보다 더 추운 듯 느껴졌으니까.. 일단 그것에 적응되고 나니까.. 이제는 전으로 돌아가기가 참 힘들어졌다. 그것이 인간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아닌 게 아니라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한다. 분명히 지구는 더워지는 것 같고, 인간은 자꾸 그것을 ‘강제’로 식힌 곳에서 ‘안주’하려고 하고.. 이것도 ‘진화’과정을 통해서 ‘인간 진화가 아닌 퇴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조금은 근거가 약한 걱정 같지만.. 하지만 우선 걱정을 놓자.. 길어야 2개월만 견디면 되니까..

Dan Brown's the Da Vinci Code 2003
Dan Brown’s the Da Vinci Code 2003

THE DA VINCI CODE, 올 여름 들어서 나도 그 ‘흔한’ summer reading을 생각하게 되었다. 왜 여름만 되면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 이것도 혹시 ‘책 장사’들이 꾸며낸 ‘음모’일까? 좌우지간 여름 전부터 요란하게 이번 여름에 읽어야 할 책들이 요란하게 등장한다. 하기야 영화도 마찬가지다. 이때 ‘수입’을 잡아야 타산이 맞게 되어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수시로 책을 읽고 있어서 여름의 독서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하지만 올해는 조금 이색적으로 이것 한 권만은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3년에 나온 책, Dan Brown의 “The Da Vinci Code. 거의 8년이 지나서 읽게 되었다. 이것은 그 후에 Tom Hanks주연의 영화까지 나온 것이다. 이 책은 내가 산 것이 아니고 큰 딸 새로니가 책이 처음 나올 당시에 hard-cover로 산 것이고 작은 딸 나라니까지 읽은 후에 나에게 넘어온 것을 아직껏 읽지를 못한 것이다. 사실은 첫 2페이지를 읽고, 그만 손을 놓았다. 너무나 사람들이 이야기를 많이 해서 사실 흥미가 조금 떨어진 탓도 있었고.. 역시 흥미 위주로 천주교회, 로마 바티칸을 무슨 ‘비밀과 음모의 집단’처럼 매도한 느낌도 받아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저자의 이러한 식의 사실처럼 느끼게 하려는 ‘소설’의 테크닉이 워낙 정교해서 재미가 없을 수가 없을 것이다. 특히 천주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좋은 ‘비방의 재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계속 읽기를 미루는 나를 아이들은 재미있는 듯이 놀려댔다. 한마디로 내가 게으르다는 식이었다. 나중에 아이들이 영화를 보더니 그런 이야기가 없어졌는데, 이유는 영화가 그 소설을 다 망쳐 놓았다는 말투였다. 이것은 이해가 간다. 소설의 그 깊은 뉴앙스(nuance) 가 영화에서 다시 고스란히 재현되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애들은 한결같이 Tom Hanks가 그 주인공인 Robert Langdon의 역할에 잘 맞지 않는다고 우겨댔다. 나는 책도, 영화도 안 보았으니.. 할말이 없었지만 그런대로 짐작은 하겠다. 어떻게 보면 Indiana Jones같은 역할인데.. 그것은 Harrison Ford가 더 적격이 아닐까? 문제는 Ford는 이제 너무 나이가 들었다는 ‘슬픈’ 사실.. 어찌하랴..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문제는 또다시 ‘재미없으면’ 아주 이 책에서 손을 놓을까 하는 것이었다. 다른 ‘더 재미있는’ 잡스러운 일도 많은데 이 책을 끝까지 읽으려면 무언가 ‘동기 제공’ 이 중요한 것이다. 재미 없을 때 손을 놓아버리면 이제는 다시 읽게 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해결책이 생각보다 쉽게 찾아졌다. RbT, Reading by Typing.. 내가 만든 조잡한 말이다. “맹송맹송”하게 눈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다. Computer에서 typing을 하면서 읽는 방식이다. 이런 idea는 사실 성당에서 자주 보는 성서필사에서 찾았다. 성서를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펜으로 종이에다 쓰면서 읽는 것이다. 눈으로만 읽는 것보다 훨씬 집중이 되고 기억에도 더 남는다고 한다.

그런데 요새 손으로 장문의 글을 종이에 쓰는 것은 거의 ‘고문’에 가깝지 않은가?세상이 그렇게 변하고 있다.

그리고 RbT 에는 다른 이점도 있다. 끝이 나면 .’나만의 책’이 하나 남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을 무슨 연구재료로 쓰거나 할 때 인용하기도 너무 쉽고, 나만의 ‘근사한’ 책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 나의 예감은 맞았다. 그냥 눈으로 읽을 때 비해서 속도는 떨어졌지만, 중단되는 ‘사고’는 없었고, 앞으로 없을 듯 하다. 한달 만에 거의 책의 반 정도를 읽게 되었다. 여기에 힘을 얻어 다른 ‘끝까지 읽기 고약한’ 책들도 함께 읽기 시작했다. 역시 속도는 늦어도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계속 읽게 되니까..

현재까지 읽은 이 책, The Da Vinci Code는 비록 가톨릭 신자의 입장에서 염려스럽긴 하지만 소설로써는 최상급이었다. 우선 ‘재미’가 있는 것이다. 읽으며 무궁무진한 상상의 나래를 펼 여지와, 절대로 책 읽기를 중단하지 못하게 하는 절묘한 수법을 쓴 저자를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그 ‘사실처럼 느끼게 한 거짓말들’를 어떻게 이 저자는 생각해 내었을까? 정말 할 말을 잊는다. 이 책을 읽을 때 성가신 것 중의 하나는 ‘불어’ 사용이었다. 배경이 프랑스에 많이 있기 때문이고 여자 주인공인 Sophie Neveu가 프랑스 사람이라서 더욱 그런데 문제는 나는 불어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쓰는 것도 힘들고, 발음에서는 완전히 걸린다. 이것은 거의 나의 complex가 되었다. 우선 제대로 발음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지독히 불편하고 창피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라도 한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재동학교 졸업 앨범, 내가 1954년4월부터 1960년 2월까지 다니던 정든 서울 재동국민학교의 졸업 앨범이 드디어 ‘해체,스캔’이 되어 computer에서 편하게 볼 수 있는 PDF format으로 바뀌어서 ISSUU server에 upload가 되었다. 일반적인 browser의 pdf-reader plugin으로 보는 것 보다 훨씬 느낌이 빠르고, 실제로 ‘책’을 읽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과연 몇 명이나 자기의 얼굴을 이곳에서 보게 될지는 미지수이지만 그래도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한다.

 

2011년 7월 초순을 간다..

2011년 7월 초순이 서서히 흐른다. 비에 젖어 조금은 덜 시끄럽게 느껴진 Fourth of July의 fireworks도 다시 잠잠해지고, 찌는듯한 여름더위가 조금은 주춤해졌다. 이제부터 약 2개월의 더위를 ‘즐기면’ 다시 찬란한 단풍을 보게 되는가.. 이것이 세월의 흐름이고 계절의 순리인 것이다. 올 봄의 ‘극악한’ 날씨들도 조금씩 ‘착해지는’ 듯 별로 날씨에 대한 빅뉴스가 없어지고 있고 hurricane도 long-term forecast 는 못 보았지만 평년보다 조용하다.

Rheem 40 gallon gas water heater
Rheem 40 gallon gas water heater

Rheem Gas Water Heater,  지난 휴일을 낀 주말은 완전히 water heater(온수기?) 에 매달려 시간을 보냈다. 거의 15년을 무사고로 우리 집의 더운물을 공급해 주던 온수기(이런 말이 있던가?)에서 거의 한 달 가량 조금씩 물이 새고 있어서 이것을 새것으로 갈 때가 온 것을 알았다. 지난 번, 그러니까 거의 15년 전에는 조금씩 샌 것이 아니고 거의 폭포수처럼 새어서 고치는 사람을 불러서 새것으로 갈았던 기억인데 이번은 품질이 좋았는지 아주 조금씩 새면서 ‘경고’를 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조금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한번 모험을 하기로 하고 내가 직접 갈아보기로 해서 이번에 작업을 한 것이다. Amazon.com으로 Rheem brand중에서 아주 high efficiency model로 order를 해서 지난 주 금요일, 집에 배달이 되었는데, 전에 쓰던 것 보다 ‘덩치’가 컸다. 거의 100파운드가 넘어서 평소에 운동을 안 한 사람은 아주 힘이 들었을 것이고, 이것을 교체하려면 이런 큰 덩치의 ‘고철’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데.. 이런 것 때문에 사람을 시키면 거의 $400이 드는 모양이다. 이것을 내가 절약하는 의미도 있고 해서 직접 시도를 한 것이다.
YouTube video를 보면 사실 아주 ‘쉽게’ 묘사가 되어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다. 수도관에 관련된 plumbing job이 ‘재수’가 나쁘면 정말 사람을 괴롭히는 그런 것이니까..결과부터 말하면 ‘예상 외로 운이 나빠서’, 지독히도 고생을 했다. 7월 4일은 아침부터 밤까지 Home Depot를 4번이나 왕복해야 했고, 결국 밤 늦게 더운물을 쓸 수 있었다. 속으로 $400 절약이 사실은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이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제일 골치가 ‘묘한 위치’에서 soldering(납땜질)을 하는 것인데 이것은 역시 pro가 아니면 실패할 수 있다는 ‘교훈’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납땜을 안 하는 new technology (Sharkbite)를 쓰게 되었는데.. 사실 조금은 자존심이 상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밤 늦게 ‘더운 물’이 나온 것은 정말 감격적인 경험이었다.

복자 때 그려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상본
1971년 당시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상본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지난 7월 5일은 고국의 가톨릭 성인중의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자 날이었다. 그날이 주중에 있어서 당겨서 7월 3일 주일에 대개 ‘이동 경축’ 미사를 드린다. 내가 ‘소속’된 이곳의 한국 본당의 이름이 ‘아틀란타 김대건 순교자 성당‘이다. 그러니까 더 의미를 느끼게 된다. 고국의 103위 성인은 익히 들어서 익숙하다. 하지만 나는 그 동안 그렇게 관심을 일부러 가진 적은 별로 없었다. 우선 과거에 순교자 성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조금은 끔찍한 생각들 때문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순교하는 장면을 ‘생생히’도 묘사를 했는지.. 인간적으로 얼마나 고통과 비참함을 안 느낄 수 있겠는가? 이런 것들은 특히 어린이들에게는 그다지 좋은 인상을 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그런 중에 우연히 고국의 천주교 잡지, ‘경향잡지‘ 의 1970년대 간행본들을 인터넷을 통해서 보게 되었다. 한국주교회의 website에는 1900년 초부터 현재의 것 까지 모두 이곳에서 볼 수가 있어서 정말 ‘보물 창고’와 같다. 나는 특히 내가 고국에 있었던 1970년대 초의 것들이 제일 흥미로운데.. 그 이유는 그 당시의 ‘사회 상’을 간접적으로나마 회상을 할 수 있을지 모를 기사들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1971년 크리스마스 때의 서울 대연각 호텔 화재 사건, 1972년 여름의 남북 7.4 공동성명, 그 해의 10월 유신 같은 것들이다.

과학적인 김대건 신부 유해 조사, 1971
과학적인 김대건 신부 유해 조사, 1971

이 곳에서 나는 ‘복자 김대건’ 성인 탄생 150주년 특집기사를 접하게 된 것이다. 성인이 1821년 생이어서 1971년이면 150주년이 되는데 1971년 8월호에는 나에게는 거의 보물과도 같은 특집기사가 있었다. 조금은 움츠려 드는 것은 성인의 두개골을 ‘분석’하는 사진이었다. 그러니까 그 당시 복자로 부터 성인이 되게 하는 여러 노력의 일환으로 ‘철저한’ 조사를 한 셈이고 그 중에 대형 동상 제작도 있었는데 그러려면 성인의 ‘진짜 모습’에 관심이 많았던 듯 하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요새 우리가 보는 성인의 ‘상본’이 나온 것이 아닐까?

그 당시 유해 측정의 결과가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서울) 가톨릭 대학 신학부 에서는 지난 3월 16일(1971년) 학장 신부님을 비롯하여 조각가, 안과의, 피부과의, 치과의 등 약 10여 명이 모여 125년 전의 김 신부님의 두개골을 3시간에 걸쳐서 정밀히 조사했다. 이날의 측정으로서 25세의 젊음으로 순교한 김 신부님은 신장이 약 177cm이며 미남형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제2 한강교 주변에 있는 복자 성당에 세워질 김 신부님의 석상은 높이 3m로 수단에 각모를 쓰고 오른팔에 십자가를 들고 왼손은 가슴 높이에서 성경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인데 이번 조사에 의해서 생전의 모습을 닮게 동양화가 정재석(비오)씨에 의해 3월 초부터 조각이 되고 있다.

말로만 듣던 성인을 이렇게 ‘가까이’ 접하게 되니 정말 기분이 달라짐을 느낀다. 실제로 살았던 우리들의 ‘할아버지’라는 역사의식이 강하게 들게 되고 너무나 가까이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6월의 절반을 보내며..

6월도 어느덧 절반이 훌쩍 지나가고 2011년 하지가 며칠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하지는 공식적인 여름의 시작이라고 하지만 이건 허울좋은 말로 변하고 있는 것이, 이미 5월 중순부터 에어컨을 써야 하는 무더위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세상의 기후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조금은 신경이 쓰인다. 극단적으로 변하고 있다. 강추위, 찜통더위.. 그 이외의 것은 점점 기간이 짧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거야 말로 good ole days라고 하더니.. 옛날이 그립다.

우리의 한국본당인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 새로 주임신부, 하태수, 미카엘 신부님이 부임을 하셨다. 올 때, 비자문제로 예정보다 훨씬 늦게 부임을 하게 되셨는데, 약력을 잠깐 보니 신학박사에다 서강대에서 강의를 한 사목경험 제로의 신부님이시다. 조금 우려를 금할 수 없다. 50대가 훌쩍 넘은 학자 타입 신부가 과연 이 교포사목의 전초지인 우리 본당에서 어떻게 효과적인 사목을 하실지 자못 궁금해진다. 노동자사목을 몸으로 하셨던 전 pastor, 안정호 신부님과 대조적인 약력이라서 이런 우려가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 오시자 마자, 주일미사에서 전통적으로 찍어서 본당 웹사이트에 공개를 하던, 강론 동영상 비디오를 없애고 음성만 녹음하라고 하셨다고 해서 조금 나의 우려가 사실화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이런 것은 조금 시간을 두고 신자들의 의견을 들어 본 후에 바꾸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나로써는 주임 신부로써 얼굴을 보이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일단 full benefit of doubt를 주어보자. 시간이 말을 해 줄 것이다.

거의 5년을 써왔던 digital camera가 드디어 말썽을 부린다. 5년을 썼으니까 설사 버리게 된다고 해도 크게 걱정은 안 하지만, 이제 손에 아주 익숙해 진 것이라 조금 섭섭한 것도 사실이다. 역시 고장 난 곳은 mechanical인 것인데, lens가 focusing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electronic과 mechanical의 수명의 차이가 선명히 들어난다. 문제는 이것을 내가 고치기가 아주 힘들다는 것인데.. googling 을 해 보면 어떤 사람은 재수 좋게 고쳤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것은 아주 극소수일 것이다. 갑자기 point-and-shoot camera가 없으니까 불편한 것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사진 찍어서 그대로 그 앞에서 보고 print를 하는 것에 완전히 우리들은 spoil이 된 것이다. 그 언젠가는 한번 찍으면 일주일 이상이나 지나야 볼 수 있지 않았던가?

2011 Eucharistic Congress
2011 Eucharistic Congress

아틀란타 대교구 연례 성체대회를 올해는 처음으로 연숙과, 레지오 단원 몇 분과 같이 가기로 하고 bus 편을 신청해 놓았다. 6월 25일 (육이오) 토요일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수만 명이 참가하는 아주 커다란 아틀란타 대교구의 연례 행사인 데 올해로 거의 15년이 넘어간다. 그 동안 몇 번 가볼까 생각도 했지만 차로 혼자서 가는 것이 불편하고 해서 계속 미루어 오다가, 올해는 다행히 우리 레지오 단원 중의 한 분이 매년 가셨다고 해서 용기를 얻고 같이 가기로 한 것이다. 이런 행사는 절대로 신앙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특히 ‘미국식 축제분위기‘의 이런 행사는 아주 색다른 느낌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5월에 시작된 여름에..

¶  이곳의 여름이 올해는 정확히 한달 빨리 도착했다. 과히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물론 암만 덥다고 해도 한여름의 그것과는 조금 느낌이 다르긴 하다. 늦봄 같은 여름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거의 2주일째 계속되는 ‘무더위’가 조금 신경질이 나려고 한다. 이러다가 계절이 주기가 바뀌는 것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가급적 생각 안하고 보내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기록’ 정도는 남겨두기로 했다.

성녀 Faustina 이야기
자비는 나의 사명

¶  요새는 전문서적이 아니면 ‘쓰면서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러니까 눈으로 읽으면서 손으로 typing을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쓰면서 공부를 한다. 그러니까 ‘필사’인 셈이다. 제일 힘든 케이스다. typewriter나 computer이후에는 이것이 keyboarding으로 바꾸고 있다. 아마도 쓰는 것보다 훨씬 쉬울 것이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쓰는 것이 제일 기억에 남게 된다고 한다. 그것이 너무 힘드니까 keyboarding을 하는데 이것도 그냥 눈으로만 읽는 것 보다 훨씬 기억에 남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 작업이 끝나면 아주 편리한 ‘복사본’ 이 남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렇게 하는 것이 효과적인 때는, 아주 어려운 책, 그러니까 딩굴딩굴 편하게 읽기에는 조금 힘든 책들을 읽어야 할 때이다. 이렇게 하면 읽는 것이 쉽게 중단하게 되지 않는다.

지난 해 말 레지오에 들어오면서 레지오교본을 이런 식으로 다 읽었다. 읽은 후에는 soft copy가 남게 되었고 이것이 나의 blog site에 올라가서 쉽게 Internet으로 볼 수도 있게 되었다. 요새 읽는 책은 성녀 파우스티나(St. Faustina)의 <자비는 나의 사명> 이란 책이다. reading by typing을 시작한 것이 4월 말 경인데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 참 어렵고 지루하다고 느꼈는데, 시간이 갈 수록 익숙해지고 내용에 깊이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끝이 나면 이것도 나의 blog page에 올라가게 될 것이다.

¶  난생 처음으로 ‘피정'(retreat)이란 것을 가게 되었다. 이번 주말 2박3일간 본당 레지오 주관의 연례 ‘봉쇄피정‘이란 것인데 레지오 단원은 원칙적으로 다 가게 되어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은 말할 것도 없고 1982년 천주교 영세를 받은 이후 한번도 피정이란 것에 가본 적이 없어서 정말 처음인 것이다. 어떤 것인가는 대강 짐작이 가지만 아무래도 처음이라 신경이 많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나에게는 지긋한 나이와 계속 배워가는 레지오 신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좋을 결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특히 우리 자비의 모후 단원 전원이 참가를 하게 되어서 정말 흐뭇한 느낌이고 인생,신앙선배님들이 뒤에 있다고 생각하니 힘이 나기도 한다.

우리 레지오, 아틀란타 본당 꾸리아의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에는 그 동안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장기유고로 자리를 비웠던 자매님이 반가운 소식으로 다시 돌아 오셨고, 새로 자매님이 들어오셔서 어제는 드디어 입단선서를 하셨다. 하지만 고참 단원 두 자매님이 자리를 비우셨는데, 한 분은 장기유고로 자리를 비우시고, 또 한 분은 완전히 퇴단을 하셨다.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우리들에게는 조금 충격적인 변화였다. 하지만 변화 없이 발전도 없다고 생각을 하며 위로를 한다. 순리적으로 새로운 ‘피’가 수혈이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면 참 자연스럽다.

인촌 김성수

¶  우연히, 아주 우연히 오래 전부터 읽었던 책, <인촌 김성수>에서 모르던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의 모교 중앙학교의 창시자 정도만을 알고 있던 민족진영 정치인이라는 것 정도에서 이번에는 이분의 종교에 관한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전통적 양반 유교집안에서 자랐지만 임종 시에 천주교 신자이고 주미대사를 역임한 장면 씨의 권유로 천주교로 입교를 한 것이다. 이것은 참 반갑고도 뜻밖의 발견이었다. 바오로의 이름으로 그는 영세를 받고 하느님께 귀의한 것이다.

1955년 2월, 인촌(仁村, 김성수의 아호)은 오후 2시경 장면과 함께 온 가회동 성당의 박병윤(朴炳閏) 신부 앞에서 조상봉사(祖上奉祀)를 해도 좋다는 말을 듣고 영세를 받았다. 영세명은 <바오로>라 했다. 성부, 성자, 성신의 이름으로 원죄와 본죄와 그 벌을 사하는 영세의식을 마친 인촌의 얼굴은 평화스럽게 보였다. “마음이 편하고 고통이 없다. 천주께서 나를 보살펴 주시는 것 같다”

 

6월을 시작하며..

5월부터 시작된 불볕더위가 거의 2주째로 접어들면서 슬그머니 6월로 접어들었다. 날씨, 기온, 기후에 조금은 둔감해지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아직도 멀었다. 심할 때는 조금 내가 너무 더위를 무서워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도 될 정도였다.  심지어 연숙에게, “더운 날씨에 대한 예보를 보면 나에게 말하지 말라” 고 간청을 할 정도였으니까. 그 한마디로 나는 기분이 쳐지는 것이 무서워서 그랬지만 이건 내가 생각해도 좀 심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제는 날씨에 둔감해 지도록 의도적으로 노력을 하는 것이다. 조금은 효과가 있나..

6월로 들어서면서 조금씩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제일 큰 이유는 이번 주말에 있는 3일간의 ‘레지오 봉쇄피정’ 때문일 것이다. ‘머리털 나고’ 처음 가보는 조금은 ‘겁이 나는’ 그런 곳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집을 거의 ‘못’ 떠나는 나의 생활에 이런 것도 심리적으로 아주 ‘큰 사건’이라 그런가… 별별 생각이 다 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좋던 싫던 나는 이런 것을 피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확고한 것이다. 아니 확고하여 지도록 노력을 하는 것이다. 결과가 어떨지는 조금 ‘흥미’ 롭기도 하지만 연숙의 ‘예상’에 의하면 그렇게까지 기대를 하지는 말라고 하니까.. 한번 ‘당해’ 보자.

드디어 그것이 찾아왔다. 얼마 전, 비가 많이 온 이후에 차고의 water heater밑에 물이 흐른 것을 보고.. 이거.. 비가 샌 것이 아닌가 의아해 했었다. 그것이 어제 다시 보고 생각을 해 보니 이것은 water heater가 새는 것이었다. 예전 처럼 폭포수처럼 새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제 그렇게 내가 예상한 대로 수명이 다 된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가 복잡하다. 최소한 $800이상은 ‘잡아 먹어야’ 하니.. tank 자체는 $500정도일 것이고 나머지는 labor charge일 것이다. 내가 한번 해 볼까? plumbing은 정말 간단해 보인다. 물론 실제로 해 보면 아닐 가능성이 더 많지만.. 아니면 tank-less model로 ‘내가’ 해 볼까.. 이것은 너무 비싸다. 그저 지금 쓰는 것이 제일 무난한 방법일 것이다. 문제는 내가 혼자 하기에는 너무나 무겁다는 간단한 사실이다. $300 의  labor가 과연 우리에게 적당한 것일까? 머리가 복잡해진다.  지금 차고에는 책과 상자로 가득 차 있는데.. 갑자기 이것이 터지면.. 물바다가 되면.. 정말 큰일인데.. 어찌해야 하나?

현재 나를 제일 ‘괴롭히는’ 것 중은 역시 내가 ‘스케줄’ 에 따라 일을 못한다는 자책감이고, 또 스케줄에 따라 ‘정말 해야 할’ 것들을 계속 ‘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아직도 일년 전에 바꾸어 놓은 나의 office room의 정리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 차고의 정리를 하나도 못했다는 사실, 따라서 지금 나의 ‘보물 같은’ 책들과 서류들의 위치가 다 같이 확실치 않다는 는 것.. 본격적으로 나만의 project을 본격적으로 못 하고 있다는 것 등등.. 그리고 집을 수리하거나 고치는 일.. 정말로 미루고 사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못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정말 없다. 할 수 있다.

 

Joplin, Mo.

surreal: after Joplin monster twister hits, May 22, 2011

surreal: after Joplin monster twister hits, May 22, 2011

오늘 뉴스를 잠깐 보니 Joplin, Mo. (미조리州, 자플린市) 란 글자가 보였다. 그것도 큰 글씨로.. Big news란 뜻이다. 또 다른monster twister가 그 지역을 강타, 100명 이상이 사망하고, 커다란 지역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런 끔찍한 광경은 얼마 전 알라바마 주에 monster twister가 휩쓸었을 때와 비슷하다. 그때는 300명 이상이 사망했었다. 내가 사는 이곳 Atlanta지역은 최고로 더운 5월을 보내고 있다. 한 여름처럼 에어컨이 며칠째 계속 돌고 있는 것이다. 나의 기억에 이렇게 더운 5월은 별로 없었다. 지난 겨울에 그렇게 심한 추위로 극성을 부리더니.. 올해는 정말 정말 이상, 극단적인 기후를 계속 보이고 있다. 마치 지구가 고통으로 신음을 하듯, 불평을 하듯..

이번에 피해를 입은 Joplin은 나에게 추억에도 남는 그런 곳이라 더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 1973년 성성모, 이승조씨와 Volkswagen Beetle을 타고 Oklahoma에서 New York으로 장거리 drive를 할 때 우리가 지난 곳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drive를 하던 Interstate-44가 이 Joplin의 남쪽을 지나가는 것이다. 그 때의 파란만장하던 여행의 이야기가 나의 일년 전 blog에 잘 묘사되어 있는데, 더 이 town의 이름이 기억에 나는 것이 Joplin이란 이름이다. 그 당시 유명하던 여자 rock star중에 Janice Joplin이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의 나이에는 rock star의 이름 정도는 즐겁게 기억을 할 때였으니까…

 

Extreme late April weather

완전히 파괴된 Alabama주의 한 피해지역

무섭다.. 정말 무섭다.. 이것은 정말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1990년대의 영화, Bill Paxton, Helen Hunt주연의 Twister를 보는 기분이었다. 문제는 이것은 영화가 아니고 ‘진짜’ 인 것이었다. 그것도 우리가 사는 Atlanta Metro area를 남과 북으로 비켜 지난, 정말 아슬아슬한 thrill & suspense였다. 이것이 ‘만약에, 만약에’ 이곳을 지나갔다면, 아마도 2005년의 mega disaster hurricane Katrina와 맞먹는 피해를 냈을 것이다. 그날 밤은 정말 ‘으시시한’ 열기가 하늘에 가득 차 있었다. 그 밤중에 기온이 80도를 훨씬 넘었으니까..

지난 수요일, 4월 27일 오후부터 Mississippi에서 시작된 이 mega tornadoes는 Alabama에서 절정에 달했고 사망자만 330명에 달했는데, 문제는 이것이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을 지나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힘’이 EF-5, 그러니까 최고의 파괴력을 가진 것이어서, 200mph(시속 200마일)를 넘는 거대한 회오리바람은 사실상 커다란 집들이 기초부터 깨끗이 ‘날라갈’ 정도였다.

미국에 오래 살면서 이정도 파괴력의 tornado는 본 적이 없었다. 이 정도면 집안의 안전한 곳에 ‘숨어’있어도 살아 남기가 힘들 정도가 아닌가? 이러면 조금 겁이 안 날 수가 없는 것이다. 아주 오래 전의 classic fantasy movie, the Wizard of Oz..의 Kansas에서 Dorothy의 집이 통째로 날라가는 것을 상상하면 될 정도다.

제일 피해가 심한 곳이 그 유명한 football powerhouse Crimson Tide의 주인공인 University of Alabama가 있는 campus town, Tuscaloosa였다. 다행히 대학자체는 피해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 같지만, football stadium이 완전히 makeshift recovery staging area로 변한 것을 보면 이것도 무슨 영화를 보는 기분이다.

이것을 보면서 ‘왜, 왜..’라는 질문이 안 나올 수 없다. 물론 통계적으로 보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 심한 것이 아닌가? 이것도 extreme weather pattern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모든 것들이 extreme으로 갈까? TV show를 보아도 모든 것들이extreme 인 것들이다. 사람들이 이제는 웬만한 것들에는 ‘자극’을 못 느끼나? Mother Nature가 조금씩 ‘불평’을 하는 것일까.. 생각이 착잡해지고, 이제부터 tornado 경보가 나오면 재산피해보다는 ‘생명의 안전’을 더 생각해야 할 듯하다.

 

4월 초의 잡상(雜想)들

나이에 따른 기후의 변화: 봄이 본격적으로 맛을 보여주던 3월 중순 한때의 따뜻함이 거짓말처럼 거의 빙점으로 떨어지는 꽃 시샘 날씨로 바뀌어서 며칠이 되었다. 이제는 이곳의 날씨에 웬만큼 익숙해져서 그런지 하나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이런 것들을 젊었을 때는 그저 무관심하게 보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예전보다 훨씬 더 빨리 가는 시계처럼 변하는 기후의 거대한 pattern을 그야말로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인생의 연륜이라는 것일까? 60대에 느끼는 기후는 분명히 20대가 느끼는 기후와 다를 것 같다. 똑 같은 기후를 사람마다, 나이마다, 지역마다, 전혀 다르게 느끼는 것은 분명 비과학적인 발상이지만.. 어찌하랴.. 하느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신 것이 아닐까. 요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날씨는 어떤 것일까?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나는 싸늘하게 비가 내리는 그런 날이 제일 좋다. 나와 TV에 나오는 weatherperson의 의견과는 ‘공식적으로 정 반대’가 된다. 이렇게 사람은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피조물인 것이다.

 

레지오와 나의 현재: 레지오 (마리애)[Legio Mariae, Legion of Mary] 선서를 한지 2달이 되었다. 3개월 대기단원을 포함하면 레지오 단원이 된 것이 벌써 5개월이 되어간다. 그 동안 내가 얼마나 변했을까? 얼마나 레지오 중심의 생활이 나를 바꾸고 있을까? 매주 화요일 정기회합에 참석하는 것은 군대와 같은 규율에 따른 의무라서 기본중의 기본에 속하지만 나에게는 아주 커다란 의무가 되었다. 별로 정기적인 운전을 하지를 않았던 지난 10년간의 ‘동면’을 깨어버린 것이다. 비록 대다수가 자매님들이지만 많은 ‘사람’을, 그것도 ‘한국인’들을 만나고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말 외국에 온 기분까지 느끼며 불편한 적도 많았지만 그 동안 많이 적응이 되어가고 있다.

성모님께 가까이 가는 지름길인 정기적인 묵주기도.. 어떻게 하면 성실하게, 경건하게, 많이 바칠 수 있는가.. 조금씩 방법을 터득해가고 있다. 밤 9시30분에 정기적으로 우리 부부가 하는 것 이외에, YMCA gym에서 운동을 하면서 하는 것, 아침에 Tobey(dog)와 subdivision(우리 동네)을 산책하면서 하는 것, 이제는 드디어 운전을 할 때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잘 하면 일주일에 100단의 ‘기록’을 깨기도 했다. 이런 반복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의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을 했지만.. 보라.. 모두들 다 틀렸다. 그대들은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바보’들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그 동안 나보다 뒤에 입단한 ‘후배 단원’이 들어 오기도 했다. 역시 ‘자매님’이다. 현재 우리 단원들은 내가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좋은 분들이라 이런 상태가 계속되기만 바라고 있다.

 

본당협조와 아틀란타 전산팀: 레지오 입단에 따라서 본당협조에도 신경을 더 쓰게 되었다. 비록 주일미사는 우리가 사는 곳 근처의 미국본당(Holy Family Catholic Church)에 나가지만 (거의 10년도 넘게), 역시 본당협조는 레지오가 속하는 아틀란타 순교자성당에서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지난 몇 달 동안 속한 곳이 본당 ‘전산관리팀’이었다. 줄여서 전산팀, 아니면 웹팀이라고 불린다. 성당주보에 새 팀 멤버를 찾는다는 글을 보고 자원을 한 것이 벌써 5개월이 되었다.

기대와 현실의 rollercoaster를 타고 갈등을 계속하고 있고, 이곳에서 나의 역할이 조금은 불투명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이 일은 레지오의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을 했고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전과는 조금, 아니 많이 다르다. 절대로 감정적인 결단은 최대한 피할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을 해서 벌써 몇 명이 도중하차를 했지만 나는 아직도 건재하다. 현재 나에게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나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일이다. 현재 core member들에게 큰 불만은 없다. 하지만 skill set, technical background, work experience등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고, 기존멤버들을 내가 설득하거나 할 자신이 없으면 결국은 내가 적응을 해야 하는 현실이다. 내가 보기에 현재 성당의 system이 재정상태에 걸 맞는 ‘최적’ 의 IT system과는 거리가 멀다. 나의 역할을 이것을 조금 더 professional level로 올리는 것인데.. 이것은 technical challenge라기 보다는 political challenge에 더 가깝다. 하지만, 나는 현재 그것을 쉽게 풀 자신이 없다. 그래도 레지오의 정신으로 하면 조금은 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올해 우리 집, 지구 온난화의 첫 희생양들..

지난 3월 26일 토요일 밤에 완전히 ‘열대성’ 폭풍우가 밤새 쏟아졌다. 이제는 이런 흔히 말하는 ‘이상(異常)기후’에 별로 놀라지는 않는다. 이런 ‘이상기후’가 이제는 거의 ‘정상기후’가 되어가고 있으니까.. 기상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global warming의 한 증상일 것이다. 근년에 들어서 3월 중에 거의 이런 것들이 온 것을 기억을 한다. 하지만 이번 것은 그 정도가 심해서.. 천둥과 벼락이 밤새 시끄러웠다. 다행히 바람은 상대적으로 덜 해서 겉보기에 피해는 별것들이 아니었다. 문제는 천둥과, 벼락과.. 우리 집에 있는 super network system lab이었다. 이제까지는 기껏해야 정전으로 인한 불편함 정도로 그쳤었는데 이번에는 power system에 아주 커다란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집 근처 Roswell Road 확장 공사로 electrical power system도 큰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집의 자랑인 super computer network lab의 모든 ethernet ports들이 직격탄을 맞은 셈이 되었다.

처음에는 모든 servers (physical, virtual)/PC들을 reboot하면 (예전과 같이) 해결이 될 줄로 낙관을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우선, ADSL modem(ActionTec)이 완전히 못쓰게 되었고, 그것에 연결이 된 Linksys DD-WRT router의 WAN port(ethernet)가 못쓰게 되었다. 그러니 Internet이 완전히 shutdown이 된 것이다.

3월 26일 벼락의 희생물들.. aDSL modem, dd-wrt Router, VoIP ATA..
3월 26일 벼락의 희생물들.. aDSL modem, dd-wrt Router, VoIP ATA..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줄줄이 그것과 직접 연결이 된 ethernet port가 있는 것들이 다 문제가 생겼다. 제일 가까이 있었던 network switch 들이 제대로 function을 못하고 심지어는 VOIP phone ATA(analog telephone adaptor)와 이번에 새로 산 KVM virtual server (Proxmox PVE) motherboard의 gigabit ethernet port까지 electrical spike을 맞아서 불능이 되어 버렸다. 이것들을 다시 test하고 repair하는 것이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보다는 시간이 문제였다. garage에 있는 server closet과 attic에 있는 mini distribution box를 수없이 들락거리는 것이 웬만한 운동보다 힘 들었던 것이다. 거의 일주일이 걸려서 이제는 조금 안정이 된 셈이다. 이번 사고의 교훈은 간단했다. ‘simple is beautiful‘.. 이제는 복잡한 것이 자랑이 아니고 ‘사고의 원인’이란 것.. network device를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히 하고, 다음은 더 막강한 방어 수단으로 better surge protector를 생각하기로 했다. 이곳의 기후는 이제 더 ‘지구 온난화‘의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드디어..아틀란타에도 봄이..
드디어..아틀란타에도 봄이..

다시 싸늘해진 아틀란타의 3월 말: 일 주일을 넘게 거의 초여름의 맛을 미리 보여주던 날씨가 역시 ‘평균치’를 유지하려는 듯 급강하하여 오늘 아침은 거의 빙점까지 떨어지는 추위가 되었다. 아래층은 결국 central heating이 요란하게 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맑은 날씨에 바람이 없어서 느낌은 역시 봄이다.

오래 전에 고국에서 느끼던 3월의 날씨도 사실 이와 비슷했다. 그래서 이곳 아틀란타는 많은 것이 서울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뚜렷한 4계절, 지형, 나무, 꽃들의 종류 등등이 그렇다. 다만 연 평균기온이 조금 높다는 것인데.. 사실 서울의 평균기온도 그 동안 (30년) 조금은 올랐을 것 같아서 결국은 비슷하지 않을까? 3월 초부터 Bradford pear, 개나리, 진달래, 수선화 등이 이미 다 피고 졌다. 지금은 벗 꽃이 조금씩 선을 보이기 시작한다. 옛날 서울에서 창경원의 벗 꽃놀이가 4월 초에 있었으니까.. 이것도 시기적으로 비슷하구나. 다만 조금 다른 것은 이 아틀란타지역에 너무나 많은 소나무들.. 이것 때문에 이곳의 봄은 꽃가루가 지독하다. 특히 바람이 잘 불지 않으면 완전한 비상사태가 된다. 나는 다행히 꽃가루 앨러지가 별로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거의 한달 동안 고생을 해야 한다. 그것이 5월 중순까지 계속 된다.

하지만 4월과 5월은 역시 찬란한 계절.. 비가 조금씩 오기만 하면 너무나 정서적인, 시적인 계절.. 전 이대음대 교수 김순애씨의 ‘4월의 노래’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추억이 계절이 된다. 언젠가 부터 나는 4월과 5월을 은근히 기다리게 되었다. 특히 최근에 레지오 마리애의 단원이 되어서 그런지.. 특히 성모성월, 어린이 날 (일본의 5월5일 어린이날을 그대로?) 어머니 날(후에 어버이날로 바뀐 것.. 참 마음에 들지 않음) 의 5월 달이 더욱 기다려진다. 그 중에서, 특히 5월 1일은 ‘friends forever’를 생각하게 하는, First of May.. 물론 이것은 The Bee Gees의 1960년대 pop song에 불과하지만 나와 나의 몇 친구들에게는 거의 암호와도 같은 추억의 노래가 되었다. 그래서 5월은 더욱 나에게는 빛나는 달이 되어간다.

 

First of May – Bee Gees, 1969 

이 Bee Gees의 classic을 처음 들었을 때는 가사보다는 감미롭고 신비스럽게까지 느껴진 melody에 매료가 되었었다. 그런 나이였다. 하지만 그 후 그 가사를 음미하면서 이제는 가사에 깊이 빠져든다. 가사와 곡이 어쩌면 그렇게도 멋지게 조화를 이룰까.. 이런 것이 진정한 classic이 아닐까.. 이 곡 뒤에 항상 보이는 흩어져 인생을 살아온 친구들을 생각한다. 그래서 5월1일은 Friends Forever의 날이 되어간다.

4월의 노래 – 박목월 시, 김순애 작곡 

서울 중앙고 1학년 때(1963년) 담임 김대붕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는 곡이라며 가르쳐 주신 또 다른 불후의 명곡.. 어찌 잊으랴. 4월이 되면 어찌나 이 곡을 배울 때가 그립던지.. 또한 타계하신 김대붕 선생님도 함께 그때의 행복하고, 순진 하던 시절의 찬란했던 4월의 봄 동산을 그린다.

 

 

지나간 3주는..

거의 3주 만에 이곳을 찾았다. 이 3주는 정말 의외로 조금 긴 듯한 느낌이다. 무언가 쫓기는 듯 하면서도 왜 이렇게 시간이 길까..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지난 1월 9일 밤부터 시작된 이곳의 세기적인 폭설과 강추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거의 1주일 동안 사실 이곳의 모든 것들이 정지된 상태였다. 덕분에 뜻밖의 snow, ice day holiday를 즐기긴 했지만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오랜 만에 찾아온 반갑지 않은 mild depression이 그것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번 것은 전처럼 그렇게 mild한 것이 아니었다. 조금은 ‘고통적’인 것이었다. 그 동안 위로를 받던 “묵주기도의 보호”도 크게 도움이 되지를 못했다. 하지만 역시 처방은 시간과 세월이 아니던가.. 지금은 그 깊게만 느껴지던 수렁 속에서 밝은 하늘이 보인다.

나의 생일과 결혼 기념일이 줄줄이 이어지며 1월 달을 보냈다. 생일의 의미를 나 나름대로 바꾸어서 보낸 것이 얼마 되었다. 나를 낳아준 부모님을 더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나에게 진정한 생일의 의미이다. 일체 선물도 그렇게 반갑지 않게 되었다. 조용히 보내고 싶은 것이다. 딸 둘이 예전과는 많이 덜 하지만,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다. 그것까지 거절하는 것은 조금은 무리다. 이번에는 지난 크리스마스에 받기로 했던 telescope가 out-of-stock이 되어서 나의 생일 즈음에서 받게 되어서 그것을 생일 선물로 받게 되었다. 결혼기념일도 마찬가지다. 25주년, 은혼식 때에는 ‘압력’에 굴복을 해서 그렇게 보냈지만 이것도 나의 스타일이 절대로 아니다. 다행히 30주년에는 무슨 ‘이름’이 없었다. 다음의 큰 것은 50주년이 아닐까? 올해는 31주년이 되었고, 정말 조용히 보냈다.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사실 제일 나에게 중요하게 느껴지던 날은 1월 25일이었다. 그날은 내가 레지오 마리애의 정식단원이 되는 “레지오 선서”를 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역시 사탄은 조용히 있지 않았다. 그날 나는 sick day가 되어서 참석을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레지오에 나가기 시작한지 3개월이 넘은 것이다. 참, 이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렇게 까지 ‘발전’을 하게 될 줄을 몇 개월 전만해도 절대로 예측을 못했으니까. 살면서 가끔 이런 작은 ‘기적’이 있어서 조금은 살맛도 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안다. 정식 단원이 되면 내가 어떻게 변해야 할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난 3주간 그 놈의 mild depression이 나를 괴롭혔지만 아주 무기력하게만 있지는 않았다. 14일에는 처음으로 기후에 의한 화요일이 아닌 다른 날에 모였던 레지오 회합에 참석을 하였다. 그것도 조금은 신선한 느낌이 아닐까? 이래서 군대와 같은 규율이 있는 레지오가 나는 너무나 좋다. 거의 모든 단원(자매님들)이 참석을 하셨다. 15일부터는 뜻하지 않은 home pc accident로 시작된 일련의 major computer work이 시작 되었다. 지금 생각을 하니 이 뜻밖의 일이 나를 mild depression에서 조금 더 빨리 빠져 나오게 하는 힘이 되었던 듯 싶다.

 

아틀란타 Snow day No. 3, 100th blog etc..

frozen Atlanta
frozen Atlanta

아무리 생각해도 snow day가 3일째 계속된 적은 이번 말고 기억에 없다. 1989년 이곳에 이사온 이후에는 없었다. 1993년 3월 달의 storm of the century때도 3일 이상 계속되지는 않았다. 이번은 내일까지 모든 학교들과 대부분 직장이 쉰다고 한다. 그러니 4일 연속의 snow day인 셈이다. 이번에는 눈이 온 이후로 강추위가 계속되어서 길들이 모두 스케이트장으로 변한 탓이다. 제설트럭이 10대밖에 없으니.. 얼음이 저절로 녹기를 기다리는 형편인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것을 가지고 정치화 하거나 불평을 하는 이곳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는 것 같다. 그것이 사실 더 재미있지 않은가? 나도 사실 큰 문제가 없고, 오히려 뜻밖에 완전한 relax를 하게 되어서 고마울 지경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쌀만 있으면 몇 주라도 끄떡없이 나가지 않고 살 수 있으니 더 그렇다. 이곳 사람들은 조금 다를 것이다. 빵과 우유, 야채가 꼭 있어야 하니..

오늘의 blog이 100번째를 넘었다. 2009년부터 조금씩 쓰던 것이 지난해 7월부터는 거의 정기적으로 쓰게 되고 이제 100번째가 넘은 것이다. 남들에게는 큰 숫자가 아닐지 몰라도 나로서는 milestone처럼 느껴진다. 처음에는 한글로 쓰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었다. 영어로 쓰는 것보다 쉽겠지..한 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결론적으로 영어로 쓰는 것 만큼 힘이 들었다. 나의 생각이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영어로 생각하는 습관이 많이 들어있었다. 그런데다 멋진 한글 수식어들을 참 많이도 잊어버렸다. 아마도 내가 한글로 된 책을 별로 안 보고, 2000년이 넘으면서 한글로 된 website도 거의 피한 결과일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아이들 수준의 단어 밖에 생각이 안 나는 것이었다. 영어도 잘 못하고 한글표현도 잘 못하고.. 이제는 영어보다는 한글에 더 신경을 쓰며 살고 있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 한인성당의 레지오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한국 문화’를 더 접하게 되어서 다행이다.

제발트 저, 이민자 들
제발트 저, 이민자 들

얼마 전 정말 오랜만에 Cobb Central Library엘 가게 되었다. 친지가 경영하는 Atlanta downtown에 있는 Kristie란 jewelry store에 computer문제가 생겨서 보아주고 오다가 잠깐 들린 것이다. 작년 여름부터, 집안의 마루를 새로 놓는 일을 시작하면서, 그 때까지 거의 정기적으로 가던 것이 중단되어서 이제까지 온 것이다. 그곳에는 한국에서 출판된 책들이 제법 있어서 새로 나온 책이 있나 보았는데.. 거의 없었다. 이곳도 $$$이 경제사정으로 모자란 모양인가? 그래도 몇 권을 빌려왔다.

한번 빌려 보았던 독일작가 제발트(W.G. Sebald) 저 “이민자 들(Die Ausgewanderten)”, 마쓰히사 아쓰시 저 “천국의 책방“, 그리고 이청준 소설집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등이다. 이 중에 “이민자 들”은 한번 본 것인데 다시 읽고 싶었다. 왜 그럴까? 독일인으로 영국으로 이민을 가서 다른 이민자들을 보면서 쓴 것인데.. 아주 비극적인 이야기들이다. 한마디로”실화보다 더 실화 같은 소설”인데 아주 그 format이 특이하다. 주제는 이민자들이 겪는 ‘고향상실의 고통’이다. 나는 그들이 겪는 고향상실이 어떤 것이지 잘 알고 있다. 어느 민족, 어느 문화권이던 이런 것은 사실 보편적인 것이 아닐까?

Atlanta snow to ice day..

이곳 아틀란타 수도권 지역의 폭설은 완전히 끝나고 지금은 그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2일째 모든 기관,학교가 문을 닫고, business도 거의 문을 닫은 듯 하다. 무슨 민방위 연습을 하는 듯 모든 곳이 정적에 잠겼다. 문제는 눈이 온 이후 영하의 기온이 계속되어서 완전히 두꺼운 얼음이 되어 빨리 녹지를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예년과 아주 다른 점이다. 이것도 혹시 global warming의 한 징조가 아닐까.. 생각을 한다. ‘극단의 기후(extreme weather)’가 온난화의 한 예라고 한 것을 어데선가 들은 듯하기 때문이다.지난 여름이 기록적인 오랜 더위여서 조금은 이러한 춥고 눈 많이 오는 겨울을 예측하긴 했다.

오늘은 우리로서는 한인성당에 레지오 정기 회합이 있던 날인데 성당 자체가 문을 닫아서 가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우선 우리 집 subdivision도 빠져나가기 힘들기 때문에.. 설사 레지오를 한다고 해도 우리는 절대 무리였다. 이럴 때 우리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다면..하고 상상도 해 본다. ‘얼마나 즐거울까’.. 하는 생각 뿐이다. 인생에는 가끔 이런 ‘깜짝 즐거움’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그들에게 이런 것들은 절대적으로 ‘뜻밖의 즐거움’이리라.

완전히 빙판으로 변한 I-285 near spaghetti junction

완전히 빙판으로 변한 I-285 near spaghetti junction

운전을 포기하고 걸어간 사람들이 남긴 차들 near Pleasantdale Rd@I-85N

운전을 포기하고 걸어간 사람들이 남긴 차들 near Pleasantdale Rd@I-85N

Night before Atlanta snow day 2011

Night before Atlanta snow day 2011

fairly rare sight & treat for this dog in Atlanta

fairly rare sight & treat for this dog in Atlanta

Atlanta snow day fun 2011

Atlanta snow day fun 2011

What's this white stuff under my belly?

What’s this white stuff under my belly?

Never knew you can walk a cat like this

Never knew you can walk a cat like this

 

A longest day, then snow day 2011..

어제는 모처럼 아주 바쁘게 느껴지는 일요일을 보냈다. 평소 때의 일요일은 조금 relax하는 기분으로 보내곤 하는데, 어제 일요일은 조금 달랐다. 최근에 내가 경험하고 있는 out-of-closet의 한 예라고나 할까.. 처음 가보는 집도 두 군데, 처음 만났던 사람들도 꽤 많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아주 유쾌하고 진땀 나는 경험이 되었다. 단 요새 예외 없이 대부분이 즐기는 karaoke를 제외하고.. 나는 이것에 익숙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Almost empty Atlanta's I-285 morning after snow
Almost empty Atlanta’s I-285 morning after snow

이런 것들과 아울러 이곳의 날씨가 어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치도 어김없이 일기예보가 들어 맞았다. 9시경부터 snow shower/storm(눈보라?)이 이곳 아틀란타 지역에 들이 닥친 것이다. 이 눈보라 때문에 밤에 집으로 돌아올 때 완전히 눈에 쌓인 고속도로 운전을 해야 하는 모험을 하게 되었다. 시카고, 오하이오, 위스컨신에서 살 때는 이 정도는 큰 문제가 못 되었지만 이곳에선 절대로 장난이 아니다. 제설 대비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데다가 지형적으로도 언덕이 많은 탓이다 (아틀란타 메트로는 piedmont, 그러니까 구릉지역에 속함).

어제 낮에는 레지오 덕분에 다시 만나게 된 설재규씨 댁으로 가서 그 집의 home network (주로 adsl modem/wifi router 같은 것들)을 손 보아 주었다. 나는 옛날 생각만 해서 설재규씨가 이런 것들 잘 했으려니 했지만 본인의 말로는 이런 것들을 하지 않은지 아주 오래 되었다고 한다. 이런 류의 일들은 언제나 깜짝 놀라게 하는 복병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번 것도 예외가 아니었다. Earthlink/Netopia combo.. 요새 아직도 이런 구닥다리 broadband supplier를 쓰는 사람도 있다. 그 중에서도 Netopia adsl modem/router가 특이하다. 아주 요상한 setup mode가 있는데.. 이것은 정말 쓰는 사람이 아무리 ‘바보’라도 문제가 없게 만들어 놓았다. 흡사 요새의 Apple computer와도 같다고 할까. 문제는 동시에 두 대 이상의 pc에서 Internet을 쓸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정말, 정말 20세기적 발상이다. 이것을 바꾸려면 dumb mode를 full “bridge mode”로 바꾸면 되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다음에 하기로 하였다.

그것이 끝나고 몇 주 전에 이미 예정된 아틀란타 한인성당 전산팀의 신년 회의/식사 참석차 Dacula, Georgia에 있는 홍보분과위원장 댁으로 연숙과 합류를 해서 설재규씨와 갔다. 그곳은 I-85 Exit 120 근처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최근 이곳은 한인들이 집단적으로 정착을 하는 곳이다. 밤 9시 이후로 예정된 대설 주의보를 염두에 두면서 전산팀 모임이 진행 되었다. 이날의 hostess인 서 안젤라 자매(본당 사목위원)의 power를 보여 주는 듯, 본당의 세 분 신부님께서 모두 오셨다. 그러니 분위기는 자연히 아주 활발하고 무게가 있었다.

이 댁의 지하에는 완전히 꾸며진 Video/Audio/Karaoke시설이 있었고, 한 쪽에는 아주 잘 꾸며진 ‘기도방’도 있었다.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이 회의와 식사가 끝나면서 Karaoke방으로 모두들 모이게 되었는데(사실은 우리 신부님들이 이런 것들을 좋아 하신다고 함).. 나와 설재규씨는 눈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미리 일찍 가자고 합의를 한 상태여서.. 9시 넘어서 조용히 빠져 나왔다. 이때부터 위에 언급한 snow adventure/nightmare 가 시작된 것이다.

20여 년이 넘게 나는 눈이 깊이 쌓인 고속도로를 운전한 경험이 없었다. 어제의 눈발은 흡사 거의 폭우와 같이 쏟아졌는데. 도로는 완전히 눈으로 덥히고, 앞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 중간쯤에 와서는 차기 조금씩 미끄러짐을 느끼게 되었다.다행히 일요일 밤이라서 그런지, 일기예보를 미리 들 보아서 그런지.. traffic은 그리 많지 않았고, 특히 집채만한 대형 트럭들이 거의 보이질 않았다. 시간이 가면서 더 눈보라가 심해지고, 드디어 나는 속으로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그만큼 다급해 진 것이다. 잘못 하다가는 차를 세울 지경이 된 것이다. 이미 도로변에는 세워진 차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ramp에서는 이미 충돌사고로 엉킨 차들을 피해가야 했다. 집 근처의 완만한 언덕들을 천신만고 끝에 기어서 거북이처럼 집으로 goal-in을 하였다. 이때는 정말 ‘만세’를 불렀다. 최악의 상태가 오면 차를 버리고 둘이서 집까지 걸어 올 각오를 했을 정도였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머지 사람들이 걱정이 되어서 연락을 해 보니 아직도 karaoke를 하며 놀고 있어서, 빨리들 출발 하라고 말해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집으로 돌아 갈 때 몇 명은 아주 고생을 하였다고.. 새벽 3시경에 도착한 형제님도 있었다. 신부님들도 역시 눈 때문에 거북이처럼 운전을 하셨다고 한다. 지금 생각을 해 보니.. 이번 모임은 사실 취소하거나 연기를 했어야 했다. 정말 무모한 모험을 한 결과가 된 것이다. 만약에 더 큰 사고라도 있었으면 어쩔 뻔 했을까? 하지만 다행히 이번의 모임은 추억에 오래 남을만한 것이 되었다.

오늘 아침에 밖을 보니 완전히 모든 곳이 깊은 눈으로 덮여있었다. 성탄절의 눈과 더불어 이번 겨울의 제2탄인 것이다. 조금 용기를 내어서 우리 집 “깡패” Tobey(개)를 데리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는데.. 다리가 짧은 Tobey가 가슴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느라 고생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오늘 월요일은 snow day, holiday가 되었다. 대부분 따뜻한 집안에서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뜻밖의 ‘휴가’를 즐길 것이다. 이것이 snow day의 즐거움일까. 겨울에만 있는 뜻밖의 즐거움일지도 모른다.

 

지난 밤에 쌓인 6"의 눈

지난 밤에 쌓인 6″의 눈

Walking Tobey on snow day 2011

Walking Tobey on snow day 2011

 

busy January..2011

2011년, 신묘년, 토끼해 새해도 벌써 5일이 지나간다. 1월은 우리 집에선 조금 바쁘게 느껴지는 달이다. 큰딸 새로니와 나의 생일이 있고, 우리 부부의 결혼 기념일도 있어서 그런가.. 오늘은 1월 5일, 우리 집 큰딸 새로니의 생일이다. 1983년 오늘 Columbus, Ohio의 Riverside Hospital에서 태어났다. 보통 Ohio의 1월은 사실상 거의 옛날 (내가 살던 때) 서울의 겨울을 연상케 할 정도로 추운 곳이다. 하지만 그때는 조금 달랐다. 아주 따뜻했고 눈이 아닌 비까지 내렸다. 머나먼 타향에서 첫 아이를 낳는다는 것도 을씨년스럽고, 쓸쓸하게 느껴지는데 날씨까지 추웠으면 우리들의 마음까지 더 쓸쓸하게 했을 것이다. 갓난 새로니가 병원에서 집으로 오던 날, 가깝게 지내던 연세대 후배 김원백씨, 그의 wife, 도성이 엄마가 우리 집 (Ohio State University, Buckeye Village)을 깨끗이 청소를 하고 기다려 주어서 얼마나 포근하게 느꼈는지 모른다. 그것이 인정이라고 하던가.

1월 21일은 나의 생일이다. 1.21 (일-이-일)하면 나의 생일보다 먼저 생각나는 것이 1968년 나의 20세 생일날 에 터진 김 신조 일당의 북괴 무장공비 청와대 기습사건이다. 어쩌다 나의 생일날에 쳐들어 왔을까.. 물론 이것은 조금 우스운 생각이지만 나의 생일과 연관되어서 바로 어제의 사건같이 느껴진다. 지금은 이렇게 여유 있게 회상을 하지만 사실 그 당시는 아주 심각했다. 이것은 요새의 연평도 포격 사건보다 심리적으로 더 충격적이었다. 특히 공비들 중 김 신조가 유일하게 생포 되었는데 사전의 각본도 없이 열린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목 따러 왔수다“라고 짙은 북한 사투리로 말을 하는 바람에 더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몇 년 뒤에 이후락(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평양에 갔을 때, 김일성이 “나도 모르게 극단분자들이 저지른 망동”이었다고 말 했다고 전해진다. 김일성이는 자기 이외는 모두 바보들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 말을 누가 믿는가? 나는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야, 김일성이 개새끼야, 북괴왕조에서 누가 너의 승인 없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라고..

곧 뒤이어, 1월 25일은 우리 부부의 결혼 기념일 된다. 그것은 1980년이다. 그러니까 올해는 31주년이 되나.. 허~~ 참 세월이여.. 우리는 그 당시 기독교 신자도 아니면서도 서울 명동에 있던 YWCA회관에서 결혼식을 하였다. 결혼식 사진을 보면 배경에 크게 예수님의 초상화가 있다. 그 당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을 하니 그것도 무슨 뜻이 있지 않았을까.. 그때는 정말 아주 매서운 전형적인 ‘서울의 겨울’ 날씨였다. 이곳에 오래 살면서 보니 결혼식은 ‘아름다운 계절’에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황량하고, 춥게 느껴지는 겨울의 결혼식은 크게 매력적이 아니니까. 물론 우리부부는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그것이 사실 결혼을 바로 앞둔 사람들의 심정이리라. 31년을 큰 탈없이 같이 살았다는 것을 요새는 조금 가슴 뿌듯하게 생각하고 그러한 앞 날도 기대를 해 본다.

나의 본관인 평창이씨 익평공파의 족보를 통해서 최근에 알게 된 나의 “친 삼촌”, 이준모 아저씨.. “듣도, 보도” 못했던 거의 전설적인 인물, 이준모 아저씨의 생일이 분명히 족보에 1월 10일로 나와있다. 그 당시의 관행으로 보아서 이것은 분명히 음력일 것이라서 언제 ‘연도’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올해의 1월은 예년과 비교해서 무엇이 다를까도 생각을 해 본다. 제일 큰 차이는 역시 새로 시작된 나의 레지오 활동에 있다. 큰 문제가 없는 한 1월이 가기 전에 나는 정식단원 선서를 할 것이다. 활동에 있어서 큰 차이는 없겠지만 그래도 마음가짐이 달라질 것을 기대해 본다. 본당의 IT support team (전산팀이라 부른다)에 가입이 되어서 이제부터는 실제적인 ‘성과’를 보여야 할 때가 온 듯하다. 아마도 이런 것들이 외부로 나타나는 제일 큰 차이가 아닐까? 올해는 사실상 잠정적으로 일년간의 계획을 세워놓고 있는데, 이것은 레지오 활동을 생각하면서 자극을 받은 결과이다. 시간을 정말 효율적이고, 보람차게, 조금은 높은 뜻에 맞게 쓰려는 노력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toward 100th, dismal frozen days, Persian friends

나의 serony.com published blog count가 이번으로 94번째가 된다. 그러니까 100번째가 아주 멀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에 올해가 가기 전에 100회라는 milestone을, 조금은 우습지만, 만들어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쓰고 싶고,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은 최소한 머릿속에는 무궁무진하게 느껴진다. 그것들을 어떻게 ‘한글’로 표현을 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로다.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지던 ‘한글 형용사‘들이 다 어디로 도망을 갔단 말인가? 참 슬프다. 한글도 잘 못하고, 영어도 잘 못하고.. 이것이 진정 30년 넘게 만들어진 나의 bilingual culture 라면 참 나도 나에게 실망을 금할 수가 없다.

약 1년 반전에 시작한 이 ‘초라한’ 나의 public diary는 사실 나의 앞으로 살 수 있는 날이 이미 살아온 날들보다 훨씬 짧을 것이라는 ‘놀라움’에서 시작이 되었다. 사실은 더 급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이러한 digital records의 수명은 원칙적으로 거의 무한에 가깝다. 일부러 없애지 않는 한 남아있을 것이다. 또한 누가 보건 간에 (희망에는, 나를 태고 적부터 이미 알았던 사람들) 나의 진실된 생각을 알리고, 남기고 싶었다. 그것이 시작의 모든 것이었고, 하느님의 도움으로 아직도 계속이 되어서 자그마한 100회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 다음은 200회가 될 것인가, 아니면 500, 혹은 1000.. 그저 겸손한 희망일 뿐이다.

올해의 연말 휴일은 한마디로 ‘죽을 쑨’ 격이 되고 말았다. 하나도 ‘성공’한 것이 없다. 하나도 앞뒤가 맞지를 않았다. 제일 중요한 천주교회 미사란 미사는 모조리 빠진 결과가 되었고, 반갑지 않은 ‘세속적’인 모임에서 쓸데없이 ‘세속적’인 마음의 상처만 입고,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랑하는 식구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고.. 이보다 더 망친 휴일이 이제까지 있었을까.. 암만 생각해도 이런 적은 없었을 것이다. 유일하게 나를 위로한 것이 있다면 강추위를 동반한 하얀 눈뿐일 것이다. 문제는 이미 다 엎질러진 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잘 못한 것은 인정을 하고 앞으로 반복을 하지 않는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이 나이에 이렇게 ‘잘못’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문제인 것이다.

 

아주 우연히도 “‘이란’에서 한국의 TV 사극드라마대장금‘이 인기”였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문제는 그때가 또 이미 몇 년 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나는 ‘옛날과 그 옛날’의 것을 본 것이다.

with Persian friends, West Virginia 1977
with Persian friends, West Virginia 1977

내가 요새 사는 것이 이런 식이다. 무언가 새로 알았다고 한 것은 대부분 최소한 몇 년 전의 것이었다. 이것도 archived googling 때문일까? 이제 이런 digital contents들은 여간 해서는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히 의도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여지가 다분히 있다. 한마디로 Internet에 무언가 ‘남기면’, 거의 영원히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조금은 생각해 봐야 할 현상이다.

왜 이란과 대장금을 연관하게 되었을까.. 오래 전 1970년대에 West Virginia에서 학교(West Virginia Tech)를 다닐 때 나는 유난히도 많은 Persian(Iranian student를 그때는 그렇게 불렀다)들을 알게 되었고 어울렸었다. 물론 그때는 Shah (of Iran)가 이란을 통치할 당시였다.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의 바로 전이었다. 그래서 그 Persian들은 연일 학교근처 도시(Charleston, West Virginia)로 몰려가서 데모를 하곤 했다. 그 당시 내가 알고 지내던 가까운 친구들은 공부벌레들이 많았다.

대장금과 관련된 기사에서 그들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대부분 나의 경험과 일치한다. 종족적으로 유럽과 아시아 중간이라 그런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다들 handsome, attractive한 모습이고, 아주 다정다감하였다. Shah의 친미정책으로 그 들도 미국,유럽문화에 상당히 빠진 상태였다. 아마도 그것이 호메이니의 이란혁명으로 완전히 제지를 당한 듯 하다. 짧은 시간 (1년 반정도) 였지만 그들과의 우정은 아직도 잊지를 못한다. 졸업 후 다 연락이 끊어지고 했는데 이번 기회에 다시 사진을 꺼내 보면서 그들을 생각한다. 비록 정치적으로 이란이 곤경을 겪고 있지만 국민성은 그것과 많은 차이가 있음을 나는 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의 사극 대장금을 보았다니 참 믿어지지 않는 즐거운 소식이 아닐까?

 

2nd day of Christmas, windy white..

12월 26일 아침, 크리스마스 두 번째 날이다. 이번의 성탄은 의외와 예외가 계속되는 그런 휴일이 되고 있다. 우선 성탄절 당일에 밖으로 나갔다는 사실이 우리 집의 전통을 완전히 무시한 결과가 되었고, 그것이 계속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우리 가족만의 푸근한 그런 날이었는데.. 하지만 이런 것으로 남을 탓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 내가, 우리가 결정하고 행한 일이 아닌가? 올해의 성탄과 같은 추억이 반복되지 않기만 바랄 정도로 나는 기분이 아주 쳐진 상태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일기예보대로 정확한 시간에 눈도 내려서 온 세상이 하얗게 되었는데도 그것이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못 만든다. 나의 마음을 적당히 자제를 못한 순간의 ‘실수’가 나의 가족을 아주 슬프게 만든 결과가 되었다. 나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왜 그것도 성탄 아침에 자제를 못 했을까? 큰딸 새로니에 대한 나의 미안함을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까? 그저 이유가 없었다. 아니 화를 낼 정도의 심각한 이유는 없었다. 정말 미안하다.. 왜 이 나이가 되도록 절제와 자제를 못했을까?

성탄절에 남의 집에 모여서 식사를 하고 노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침부터 눈이 예보된 상태에서 간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내가 바라던 대로 가지를 않았다. 두 가지 마음.. 고래등 같은 ‘사치스러운’ 집에서 white Christmas movie를 연상시키는 광경을 감상하는 것,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type은 절대로 아니었다. 암만 호화스러운 음식이 있어도 오가는 얘기가 그것을 못 따라 가거나, 심지어는 (아니, 거의 매번) 남의 심사를 완전히 뒤틀어 놓을 그런 utterly stupid comment를 들으면서, 내가 왜 이런 곳에 와 있을까 하는 극단적이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이가 먹을 수록 주로 겉멋에 집착하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난감하다. 새해에는 이런 자리를 가급적 피하며 살고 싶은 마음도 없는 것은 아니다.

 

Our cul-de-sac under snow

Our cul-de-sac under Christmas day snow

 

White Christmas, 2010

White Christmas, 2010

 

finally, white Christmas here.. Wisconsin 성모발현 공식인정

Snowing Atlanta on Christmas day
Snowing Atlanta on Christmas day

일기예보가 기가 막히게도 잘 맞았다. 오늘 크리스마스에 아틀란타지역에 눈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정오 무렵부터 비가 조금씩 내리던 것이 시간이 가면서 기온이 떨어지더니 진눈깨비로 변하고 급기야 함박눈으로 변한 것이다. 기온이 그렇게 낮지를 않아서 차도에 내린 눈은 물로 변하고 아직 얼지는 않았다. 오늘 낮부터 친지의 집에 모여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였는데 그곳에서 글자 그대로 white Christmas를 맞은 것이다. 나의 기억에 아마도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추측을 해 본다. 문제는 내일이다. 내일의 기온이 만만치 않게 낮을 예정이어서 이 눈이 녹지를 않을 것이고 그러면 이곳은 차들이 꼼짝 을 못할 것이다. 다행히 일요일이라 큰 문제는 없겠지만 성당에 갈 일이 문제다. 어제 오늘 모두 성탄미사를 빠지는 바람에 내일도 못 가게 되면 조금 문제다.

어제의 New York Times의 주요기사 중에 Wisconsin 성모발현이 교회의 공식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있었다. 머리 속으로 아마도 이것은 미국 ‘본토’에서는 처음 있는 경사가 아닌가 생각이 스쳐갔다.

성모님이 발현한 곳에 세워진 위스컨신주의 성당
성모님이 발현한 곳에 세워진 위스컨신주의 성당

그 동안 미국의 여러 군데에서 성모 발현 소식은 있어왔다. 심지어는 내가 사는 이곳의 근처에 있는 Conyers라는 곳에서도 지난 십 년 동안 성모님이 발현을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몰려간 것을 기억을 한다. 문제는 그런 곳들이 하나도 교황청은 물론이고 현지 교구에서조차 정식으로 조사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성모 발현이 인정을 받기는 그 정도로 ‘하늘의 별’따기 정도인 것이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한국의 나주, 오하이오의 어느 town, 그리고 이 근처 Conyers등등이 있었지만 하나같이 ‘인간들의 장난’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Wisconsin의 성모발현이 공식인정을 받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 동안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기사를 읽어보니 이 발현은 무려 160년이나 지난 오래된 발현이었다. 더 정확히, 1859년에 발현한 것을 지금 인정을 한 것이다. 그 해는 프랑스의 루르드(Lourdes, France)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신 다음해가 아닌가? 어떻게 그렇게 오랜 된 것이 이제 인정을 받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