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가리 통뼈’의 추억

대괴수 용가리, 1967
영화 <대괴수 용가리>, 1967

얼마 전에   ‘옛 한국고전영화’ (redundant , 옛 과 고전은 거의 같으니까)를 접하게 되면서, 그런 것들이 어느새 ‘옛, 고전’이 되었을까 하는 세월의 횡포를 생각하게 되었다. 분명히 현재 살아서 숨쉬는 우리들의 것들이 ‘화석, 고생대, 공룡‘등과 연관이 되어가고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내가 말하는 ‘세월의 횡포’ 란 것이다.

그 중에서도 ‘대괴수 용가리‘란 ‘우리의 영화’를 보면서 더욱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 용가리란 단어를 보면서 희미한 느낌에 ‘분명히 이것은 나의 대학시절’의 것이라는 생각이 났다. 하지만 100% 자신은 없었다. 그 영화를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함께 떠오른 ‘강한 단어’가 있었다. 바로 ‘통뼈’ 였다. 그러니까 ‘용가리 통뼈‘ 인 것이다. 그것이 언제였던가?

와~ 맞다 용가리 통뼈.. 그것이 처음 유행하던 당시, 참 많이 그 말을 썼다. 내가 그 말을 좋아하며 쓴 기억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나의 친구 중에 한 명이 유난히도 그 말을 좋아하며, 잘도 썼다. 그 친구는 바로 나의 죽마고우, 중앙중,고교, 연세 대학, 전기과 동창, 요델 산악회 산악인 박창희 였다.

사실 나는 ‘영화 용가리’보다는 박창희가 ‘가르쳐’ 준, ‘용가리 통뼈’를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셈이다. 그 뜻은 물론 그 어감이 나타내듯이, 바보스럽게 겁이 없는 그런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당시에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꽤 많던 시절이었으니, 그 말은 참 잘도 쓰였고,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나나 우리들은 그런 류의 ‘통뼈 류 인간’들과는 거리가 먼 쪽에 속했다.

기억이 그 정도에서 멈추고, 확실히 그 영화가 나온 것이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이럴 때, Googling은 역시 powerful한 것이지만, 이 정도로 ‘오래된’ 것은 역시 무리인가.. 예상을 비껴가서, 딱 한가지 자료만 찾았고, 그것도 그 당시를 ‘전혀 모르는 듯’한 사람의 ‘해괴한 변증’ 속에 파묻혀 있었다. 부산영화제 site에 실렸던 한가지 글, 그것이 바로 박성찬이란 ‘시민평론가’가 쓴 ‘<대괴수 용가리>: 한국괴수 영화의 고생대지층‘ 이란 요란한 제목의 글이다.

주증녀, 젊었던 시절의 이순재
주증녀, 젊었던 시절의 이순재

시민평론가치고는 꽤 이론적임을 보이려는 노력이 뚜렷한 이 글에서, 내가 필요한 것을 찾았다. 우선 이 영화는 1967년에 방영이 된 것이고, 감독 ‘김기덕‘, 주연 진에는 당시 간판 여배우 남정임, TV 쪽에 더 알려진 이순재, 조연 쪽으로는 약방의 감초, 원로격 김동원, 주증녀, 정민.. 그런데 이순재의 신혼부인으로 등장하는 여자배우.. 그녀는 누구일까, 낯이 그렇게 설지 않지만 그렇다고 ‘유명한’ 정도는 아니었다.

1967년이면, 사실 우리 영화는 신영균, 신성일, 엄앵란, 문희 등의 고정된 ‘간판급’ 얼굴의 시대였고, 거의 모두 ‘순정 멜러 드라마’ 였던 시대였는데, 이런 ‘과학공상, SF’ 영화는 아마도 처음이 아니었을까? 내가 그 당시 국민학교, 중학교 정도의 나이였으면 물론 100% 열광을 하면서 보았을 것이지만 이마 그 당신에 나는 조금은 ‘탈 공상’ 적인 대학생이었다.

현해탄을 건너오는 소식에서 일본에서는 이런 류의 영화가 열광적으로 성공하고 있다고 듣긴 들었다. <고지라> 같은 영화가 그런 것인데, 이런 류의 ‘일본 공룡’ 영화는 유치하면서도 재미가 있어서 미국에서도 이것에 완전히 빠진 사람들이 꽤 많고, 이제는 이것으로 돈을 버는 business도 있다고 들었다.

간신히 찾은 이 영화를 보니 모두 말이 영어로 되어있다. 그러니까 English dubbing이 된 것이다. 사연인즉, 역시 ‘원판’이 없어지고 ‘수출용’이 살아 남은 요새 흔히 듣는 case 중에 하나다. 1967년이 이제는 정말 ‘고생대’ 층이 된 씁쓸한 느낌을 받는다. 배우들의 연기는 사실, 지금 보아도 그렇게 어색하지 않다. 그 만큼 연기를 잘 했다는 뜻일지도.. 문제는 역시 그 당시 ‘기술적인 수준’인데, 이것은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암만 ‘장난감 set’를 해도 그 당시의 수준은 어쩔 수 없었지 않을까? 일본 영화 고지라를 지금 보면 그 들도 역시 그 한계에서 맴돌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제 그 ‘시민 평론가’ 의 말을 조금 들어보면, 알게 모르게 이 평론가는 ‘영화 이론 평론가답게‘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어떤 것들은 too much stretching, overreaching 한 것들도 있다. 영화의 original이 없어진 것이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의 식민지와 미국 문화의 침투 속에 우리 것을 다 잃어버린 우리의 자화상과 너무나 닮아..‘ 와 같은 논리로 비약을 한다. 하지만, ‘우주, 과학, 과학도’ 적인 자세가 당시에 우리나라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암시적인 영화의 효과는 그 당시를 겪어본 나에게는 충분히 공감이 가는 분석이다.

하지만, 3대의 ‘정상적인 부부‘의 등장을 분석하며, 이런 것들은 ‘기득층: 가부장적 부르주아의 과잉억압에서 억눌린 부류: 여성, 동성애, 신체기형자 등등이 종종 괴물로 등장하고, ‘정상 부류’가 ‘비정상 부류’를 물리친다‘는 ‘영화학자 로빈 우드’의 말을 인용한 것은 조금 ‘웃기는 비약‘인 듯하다. 이런 표현은 어떨까.. “여보세요, 지금 용가리 통뼈가 한강 다리를 들어내고 있는데.. 기득층, 피해층이 어디에 있단 말이요?” 이런 것은 정말 ‘이론을 위한 이론의 전개’의 대표적인 case일 듯하다.

더욱 웃기는 것은, 용가리와 어린이 ‘영이 (남자 아이)’ 가 아리랑 트위스트를 추는 장면에서 ‘남북의 이상한 평화’가 찾아오고, 더 나아가서 이런 ‘전통’은 나중에 <남부군>에서 적군과 같이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르는 것, <공동 경비 구역: JSA>에서 남북한 두 병사들이 얼싸안고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과장중의 과장은 정말 ‘압권 중의 압권‘ 일 듯. 이런 ‘이론’을 다 잊고 나는 나의 황금기 전야였던 1967년으로 돌아가서 박창희의 ‘용가리 통뼈’ 론.. 확전(escalation)으로 치닫던 월남전, 뿌연 공해먼지 속에도 힘찬 대도시로 탈바꿈하던 ‘강북’ 서울의 모습들, 미니 스커트의 여대생으로 가득 찼던 우리들의 보금 자리 다방 구석에서 꽁초까지 빨아대며 들여 마셨던 신탄지 담배 연기를 생각하고 싶다.

 

Our Mid-Winter Classic

지나간 일요일, 1월 27일은 ‘피로하게만 보이는’ 우리 집에 때아닌 대청소 하던 소리가 들렸다. 얼마만인가.. 머리 속의 ego만 커진 아이들이 떠난 우리 집은 고요하기만 하고, 별로 어질러 놀 만한 것도 없지만 보이지 않는 먼지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의 대 청소는 아래층에만 있었다. 위층까지 할 힘도 없고, 절실한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청소를 했던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Guest들이 오기 때문이었다. 얼마 만에 오는 손님들인가..

이번의 모임은 내가 붙인 이름이 ‘mid-winter classic‘ 이다. Mid-Winter는 1월 말에서 2월 초 정도에 있다는 뜻이고, classic은 이 모임이 그만큼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는 뜻이다. 얼마나 오래 되었을까.. 아마 15년은 되었을 듯 싶다. 이 정도면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닐 것이다.

4집 부부(가족)가 ‘가끔’ 모여서 저녁식사를 같이하는 이 그룹은 시작이 15년 전쯤, 서울고,서강대 출신 최동환 (Phillip Choi), aka, ‘최형’ 과 연관’이 되면서 시작이 되었다. 그 훨씬 전에 우리 부부가 아틀란타 한국학교 에서 가르칠 때, 나의 반에 최형의 외동 딸, 진희(Alicia)가 있었고, 최형은 ‘아빠’로서는 드물게 학교에 얼굴을 보이곤 했었다. 그때 그의 인상이 참 자상한 아빠로 남았고, 항상 웃는 모습도 좋은 인상으로 남았던 기억이다.

우리가 한국학교를 떠나면서 헤어지게 되었지만, 또 다른 인연이었을까.. 우리 작은 딸 나라니와 한국학교에서 같은 반에 있었던 인연으로 나라니의 생일에 진희를 부르게 되었고,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런 때에는 대부분 엄마들이 아이를 데리고 오곤 하는데, 그 당시 진희는 꼭 아빠가 데리고 왔기에 나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사실 이것이 인연이었다. 엄마가 데리고 왔더라면.. 아마도 이런 것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항상 웃고, 얘기를 좋아하는 최형 성격 덕분에 우리는 금새 통성명을 다시 하고 보니 그는 서울 최고 명문인 덕수국민학교, 서울고등학교, 서강대 화학과 출신으로 현재는 ‘사업’을 한다고 했다. 그 후에 우리 집 근처의 어떤 한국식당에서 정말 우연히 최형 가족과 우리 가족이 같이 식사를 하게 되는 다른 ‘우연’을 맞게 되고, 드디어 진희 엄마도 보게 되었다. 둘 다 나이가 우리부부보다 한두 살 정도 아래였던 이곳에서 ‘고르기’ 힘든 부부 ‘친구’를 얻은 기분이었고, 그 이후 우리는 서로의 집을 왕래하며 식사를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친구’를 별로 사귀기 꺼리며 살던 나도 이런 모임은 거부감이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친구 수준의 한국말’을 다시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비슷한 것은 참으로 좋은 것인가..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일까.. 추억의 역사를 공유한다는 것은 이렇게도 좋은 것일까.. 만나기만 하면 어렸을 적 서울거리를 회상하며 열변을 토하곤 했으니까..

최형은 역시 성격 ‘탓’인지 사람들을 좋아하며, 잘 사귀었고, 특히 가깝게 지내던 ‘친구’ 가족들이 몇이 있었다. 곧바로 자연스레 우리는 그들과 같이 모이게 되었다. 그 중에는 Ohio State동문인 나이가 한참 밑(10살 이상)인 ‘전 사장’도 있었고, 최형의 서강대 동문인 윤형, 지금은 2005년에 타계해서 없는, 이대부고,경희대 출신 박창우씨가 있었다. 그렇게 모인 사연이 참 다양하고 재미있어서 아주 인상적이었고, 역시 최형의 ‘사람을 끄는 힘’이라는 공통분모가 이모임에 있었다고 느낀다.

직업도 다양해서, 최형네는 jewelry wholesale, 윤형댁은 liquor retail, 전사장네는 Italian Furniture, 박창우씨 댁은 fashion clothing retail.. 그러니까 이들은 모두 전형적인 businessmen들이었다. 나만 예외적으로 비교적 시간의 여유는 있지만 항상 cash가 모자라는 월급쟁이여서, 항상 나는 ‘공통관심사 화제’에서 애를 먹으며 그저 이 ‘이상한 나라의 얘기’를 듣기만 하곤 했다.

이중에서 2005년 여름이 정말 아깝게 타계한 박창우씨, 생김새에 비해서 호탕하고, 잘 놀며, 활달한 사람, 서울 명동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의 중심지에 대한 해박한 경험과 기억력은 우리를 항상 놀라게 했다. 특히 어느 곳에 무슨 술집, 다방이 있다는 것은 정말 ‘사진과도’ 같은 기억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 ‘양반’의 얘기가 제일 재미있었고 실감나고, 흡사 time machine을 타고 1960-70년대를 간 것과 같은 기분에 빠지곤 했다. 특히 ‘동네 친구’인 트윈 폴리오 folk duo 중에 윤형주에 대한 이야기, 당시의 명소였던 명동 OB’s Cabin 에서 술김에 노래를 부르던 조영남을 ‘팼던’ 이야기 등등.. 나에게는 주옥과도 같은 이야기들.. 언제까지나 들으려 했지만 하느님도 무심하시게 너무도 일찍 데려 가셨다.

이날 모임에서 나를 놀라게 했던 소식은, 최형의 외동 딸, 진희 (우리 딸 나라니 친구)가 놀랍게도 우리가 활동하고 있는 레지오 마리애의 ‘활동단원’이 되었다는 사실.. 나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진희는 아주 자유분망 (easy going)해서 어떻게 이렇게 ‘조직적인 신심단체’에 가입을 했을 까 상상이 되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세대적인 격차를 초월해서 꾸리아 모임에서 그 ‘애’를 보게 될 생각을 하니..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하는 생각에 사실 당황을 할 정도였다. 이것은 정말 ‘좋은 소식’일 것이다.

12/12/79, 눈발 날리는 백양로, 1968

2012년 12월 12일도 어제로 지나갔다. 12/12/12로 ‘난리’를 치는 사람들.. 참 부럽다. 단순한 부류의 사람들일까, 아니면 참 한가한 사람들일까 생각도 나지만, 12가 세 번씩이나 겹치는 것보다는 각자의 일생에서 드물게, 아니면 다시는 못 볼 숫자이기에 그럴 것 같다. 우선 13/13/13은 아예 불가능 할 것이고, month의 숫자와 맞는 햇수라면.. 2101년이 되어야 01/01/01 라는 숫자 놀음이 가능한 것이다.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2012년에서 2101년까지의 공백이 생기고.. 앞으로 89년을 더 살아야 그것을 보는 것이다. 현재의 ‘피상적인 의학’의 발달을 감안 한다면 아마도 지금의 20대나 30대 정도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로써는 정말 오랜만에 ‘백일몽’같은 생각과 망상을 해 보았지만, 역시 이것도 인간이 겪는 유한성, 잠깐 왔다가 가는 어찌 보면 슬프기도 한 ‘피조물’의 신세를 실감케 한다. 하지만, 요새 내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느끼는 것은, 모든 것이 생각하기에 달렸고, 인간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선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발전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 아닐까?

매년 12월 12일이 되면 연숙과 빠짐없이 한가지 얘기를 나누며 웃는다. 1979년 서울의 12월 12일을 서로 회상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그날 밤에 박대통령 시해사건을 빌미로 전두환이 무혈 쿠데타를 하던 날이었다. 그들이 한강 다리를 건너오기 바로 전에 우리 둘은 김포공항에서 연숙의 지도교수 김숙희 교수를 만나 인사를 하고 밖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른 채, 유유히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다음날 그 쿠데타 소식을 알게 된 것이다.

기억을 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날 저녁 김포공항으로 둘이 걸어 들어가는데, 처음으로 연숙의 손을 잡은, 그것을 회상하고 싶은 것이다. 비록 결혼 약속은 얼마 전에 했지만 손을 잡는 것은 ‘큰 사건’이었다. 더욱 재미있었던 사실은 그날 날씨가 매섭게 추웠고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이라서 손목을 잡힌 연숙은 너무나 ‘고생’을 했다고 한 사실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해맑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그날 12/12가 남았다.

 

요사이 나의 workstation  pc desktop의 모습

요사이 나의 workstation pc desktop screen, New York Central Park

오늘 아침에 나의 workstation kvm virtual pc의 desktop background art를 보니, 이것은 거의 흑백으로 눈에 덮인 뉴욕 city, Central Park 의 모습이었다. 이것으로 바뀐 것이 한 달도 채 안되지만, 이것을 보면서 계속 머리에 떠오르는 ‘영상’이 있었다. 물론 아름답게 기억되는 광경이고, 그것도 역시 흑백의 영상이었다. 그곳은 바로 연세대의 상징인 백양로.. 그곳이 완전히 눈 속에 쌓이고 있던 그 광경이었다. 나의 기억력을 시험하려 나는 그때가 구체적으로 언제인가 계속 생각해 본다.

1967년 겨울 아니면 1968년 겨울이었다. 그때는 겨울 방학 때였고, 성탄이 훨씬 지난 때였다. 그러니까 1월 쯤이었을 것이다. 한낮에 함박눈이 그야말로 ‘펄~펄’ 내리던 날, 시커먼 공해로 그다지 깨끗하지 않았던 그 당시의 서울거리가 순식간에 깨끗해지는 그런 날, 어찌 나와 같이 한가한 사람들이 집의 안방에 앉아있겠는가? 지독히도 한가했던 대학시절의 겨울방학의 ‘누에고치’ 속에서 나는 눈 덮인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때 상도동 버스 종점에 살던 나는 ‘portable’ FM radio를 들고 나갔고 시내 버스 <상도동-모래내 >를 타고 연세대로 갔다. 왜 그곳에 갔는지.. 하기야 그 당시 잠깐 갈 곳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연대 앞 굴다리 앞에서 내려서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으며 백양로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손에는 작지도 않았던 ‘소형’ 금성 FM radio를 들고, 신나게 pop song을 들으면서.. 눈 속에서 기가 막히게 조용하고 아름답게 보이던 연세대 백양로.. 이제 시간적인 단서가 잡힌다. 그것은 1968년 한겨울 방학 중, 1월 쯤이었을 것이다.

나의 서재에 보이는 금성 FM radio, 신탄진 담배와 SPAM can 재털이
나의 서재, 금성 FM radio, 신탄진 담배, SPAM can 재털이 1968

그 당시의 timeline을 확실히 잡아주는 유일한 것이 바로 사진인데, 바로 여기에 보이는 사진, 나의 책상에 놓여있는 새로 산 금성 FM radio, 이것을 찍었던 때가 1968년 3월 경. 1967년 성탄 때에 어머니께서 선물로 사주신 그 당시에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나왔던 FM radio였다.

그 당시에 들을 수 있었던 FM 방송은 딱 한군데였지만 물론 미8군의 FM 방송은 그 훨씬 전부터 있었다. 잡음이 많았던 AM 방송에 비해서 FM방송은 정말 음이 깨끗해서 대부분 classical 쪽의 음악을 방송하곤 했다. 이후에 이 radio는 장기간 등산을 갈 때마다 가지고 가서 사진에도 몇 군데 남아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1969년 여름에 요델 산악회 친구 박창희와 갔던 소백산, 그때의 사진에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당시의 대한민국의 수준은 그렇게 간단하게 보였던 FM radio를 ‘간신히’ 만들고, 커다란 업적을 이룬 ‘금자탑’으로 소개하던 때였다. 일제를 배척하던 것이 애국이었던 당시에 그나마 ‘국산’으로 그렇게 깨끗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때, 그것을 들고 함박눈을 맞으며 연세대 백양로를 따라 걸으며 ‘백일몽’을 꾸던 그 죄 없던 시절이 왜 이다지도 그리울까.. 육신적으로 다시는 못 겪을 일이지만, 기억이라는 선물이 있는 한 그런대로 괜찮지 않을까?

 

금성 FM radio를 듣고 있는 박창희, 1969년 소백산

금성 FM radio를 듣고 있는 박창희, 1969년 소백산

내가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본 백양로, 1973년 6월

내가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본 백양로, 1973년 6월
이종원, 이경우, 이경증, 윤인송, 이진섭, 김호룡, 신창근

 

Postscript: 나의 머릿속의 기억을 뛰어 넘어서 그 당시의 서울 일간지를 인터넷으로 찾으면 아마도 그 함박눈이 내렸던 날짜까지 확실히 알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도 한가함을 달래주는 좋은 project가 아닐까.

 

 
그 당시에 듣던 golden oldie, Ruby Tuesday by the Rolling Stones, 1967

 

인생은 Given Way (?)

서서히 물러가는 2012년, 올해에 기억에 남는 큰 일은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1965년 초에 나를 가르쳤던 ‘아르바이트’ 대학생 김인호 형의 소식을 알게 된 것이 그중에 하나가 아닐까?

다시 연락이 된 경위는 의외로 간단했다. 내가 먼저 1960년 중반 때의 서울 일간지를 훑어 보다가 (물론 인터넷으로) 영화 광고를 보게 되었는데 그 영화의 제목이 <젊음이 밤을 지날 때>, 거기서 ‘박계형’ 이란 이름을 보게 되었다. 불현듯 스치는 것이.. 나를 가르쳤던 아르바이트 대학생의 ‘애인’이 바로 그 당시 베스트셀러 소설의 ‘대학생 저자’ 박계형 이었던 것이 기억이 난 것이었다. 그 때까지 나는 그 ‘박계형’이란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의 blog에 내가 기억하던 아르바이트 “서울고, 서울상대” 대학생 김인호 형을 회상하게 된 것인데 그것을 정말 정말 ‘우연히’ 인호형이 보게 된 것이다. 정말 모든 것들이 우연의 연속이었다. 이것까지 필연 이라고 우기고 싶지는 않지만, 누가 알랴. 이 세상 삼라만상의 모든 것들은 어딘가 서로 연관이 되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서로 email을 교환 하면서 형이 보내 준 이미 공개된 ‘글’이 하나 있었다. 아마도 서울 상대 동창회지에 실렸던 글 같았다. 서울 상대에 입학하게 된 동기나 경위도 있었지만 그 이후로 인생의 여정이 정말로 ‘웅장하게’ 압축 된 글이었다.

이미 공개된 글이라서 다시 공개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겠지만, 혹시 해서 나의 blog에 전재를 해도 좋겠냐고 물어 보았는데.. 답을 얻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글이 너무 솔직한 인생의 고백록 같아서 나는 ‘무엄 하게도’ 이렇게 공개하기로 했다.

 

 

+ Deo Gratias

 

인생은 Given Way (?)

 

 

김 인 호 (서울상대 상학과 19회)
한양대 명예교수 (경영학)

입학 50주년이라니 문득 서울상대를 지원하게 된 연유가 새삼 닥아 온다. 고3 내내 이과(理科)반을 듣고서 느닷없이 문과인 상대로 왔기에 말이다. 원래 성품이 온순했던 탓(?)에 여름방학 하던 날 (당시엔 실제로 이날부터 고3생의 대입특강이 본격화되는 첫날이었음) 무기정학을 당해 50일을 열외가 되다보니 대입지원서 작성 시 가장 중시되는 고3 2학기성적이 엉망일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의예과 아니면 서울공대 화공과나 기계과를 써달라는 나의 막무가내와 이 점수로는 서울대 어떤 과에도 못 간다는 담임선생님과의 승강이 끝에 ‘자네 상대가면 어때?’ 하는 급작스런 제의에 선택과목이 완전히 다른데 어떻게 문과인 상대를 갈 수 있느냐고 항변하자 나의선택과목인 화학과 생물을 가지고도 서울상대에 응시가 가능하다며 지원서를 써주셨던 선생님. 전형조건이 그 전해의 것과 같을 것으로 알고 있던 나는 상대지원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으므로 상대는 애초부터 전혀 고려조차 않고 있었던 터였다. 기실 그 전해뿐만 아니라 그 다음해부터도 또다시 안 되게끔 다시 바뀐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해엔 어쩐 일로 가능했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분명 어떤 손길이 아니었나, 쉽다.

아무튼 일순간에 이과에서 문과로 나의 행로가 180도 바뀌었고, 이후 상대생활은 우리 모두가 그러했듯이 당시의 혼란한 사회분위기 덕에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인 4년을 얼렁뚱땅 마치게 되었다. 나는 곧장 국방의무를 보다 충실하게(?) 다하고자 공군장교 코스를 택했다. 소위로 임관된 지 4개월여쯤 되던 어느 날 국군의 날 행사일환으로 당시 서울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삼군사관학교 종합체육대회응원단으로 차출되어 응원을 마치고 공군장교버스를 타고 오산으로 귀대하던 중 수원 세류동 건널목에서 내가 타고 있던 공군장교버스가 서울발 하행열차에 박치기 당해 즉석에서 3명의 장교가 죽고 약 5-60여명의 중상자가 발생한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사고 직후 난 얼굴과 몸이 묵사발이었는데도 피가 안 나는 바람에 경상자축에도 끼이지 않을 만큼 운이 좋았던 몇몇 장교 중 하나였다. 몇 십 미터 열차에 끌려가며 구겨지는 버스 안에서 순간 ‘야, 여기서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어릴 적서부터 그때까지 내가 살아 온 긴대목이 일순간에 쫙 주마등처럼 지나가던 묘한 체험을 잊을 수가 없으며 이는 나로 하여금 그 후 지금까지도 우리 삶과 또 우리의 기억이란 게 과연 무엇인가를 되새기게끔 해 준다.

아무튼 그때 그 사고는 당시 무신론자를 자처하던 나에게 삶과 죽음과 인생의 목적에 대하여 많은 사유의 계기를 던져주었다. 그때 그 충돌사고는 과연 필연이었을까, 우연이었을까? 물론 사고가 난 다음에 생각이 미친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탄 장교버스와 그 기차는 노량진역을 지날 때에도 나란히 같이 가고 있었고 또 안양으로 진입하는 구름다리 위에서도 같이 마주쳤던 것이 아무래도 우연 같아 보이질 않았었다. 우리 눈에 우연처럼 보일지라도 만사가 필연 아닐까,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이며 또 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등등. 어느 문학도의 여유로운 넋두리가 아니라 당시 나에겐 대단히 심각한 현안이었다. 요컨대 당시의 그 사고는 나에게 삶과 죽음과 인생의 목적에 대해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게 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사고 후 몇 달이 지나 사고후유증이 거의 가시어 갈 무렵 6.25 피난시절 대전에서 같이 초등학교 다녔던 한 여학생과의 상봉에서 그녀가 제일 먼저 던진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느냐?’는 물음은 이런 나의 사유를 더 깊이 뿌리내리게 했다.삶과 죽음의 견지에서 볼 때 내생명이 내의지로 또는 내 부모의 뜻에 따라서 생성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때 또 내 맘대로 죽을 수도 있는 존재가 아닌 한 적어도 생명을 주관하는 존재가 계시다는 사실을 내가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는 추론을 당시 난 쉽게 받아들이고 있던 터이었으므로.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합의가 이루어진 두 젊은 남녀는 그래서 자연스레 아무 장애 없이 그이후의 만남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난 공군제대를 2, 3개월을 앞둔 어느 날 내 근무지였던 공군본부로 찾아온 어느 선배의 스카웃 아닌 스카웃으로 KIST에서 첫 작장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과를 듣고도 상대를 다녔던 내가 첫 직장을 이과의 본산인 KIST에서 시작하게 된 것도 과연 우연이었을까, 난 지금도 가끔 생각해 보곤 한다.

KIST에 입소한 그해 늦가을 난 아무것도 모르면서 단지 결혼하기 위해 가톨릭집안인 처갓집의 요구대로 성당에서 관면혼배라는 것을 했고 또 일반예식장에서도 결혼식을 올리는 등 두 번의 행사를 거쳐 드디어 원하던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뒤이어 제왕절개로 힘들게 얻은 첫아들은 나에게 또 한번 생명의 신비와 생명의 주관자에 대한 인식을 더욱 새롭게 해 주었다. 양수과다증이라는 특이한 상황에서 태어난 첫아들은 식도가 위가 아닌 기관지와 연결되어 있는 태중에서부터 기형이었던 것이다. 기형이란 사실을 처음 알려주는 의사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까무라쳤고 잠시 후 깨어났는데 깨어나는 바로 그 순간 느닷없이 ‘내 죄 때문에 저애가 내벌을 받고 저렇게 태어났구나, 라는 죄의식이 내 인생 안에서 최초로 강력하게 밀려왔다, 사실 난 그 전까지만 해도 단 한 번도 죄라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는 천방지축의 생활을 해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수술시키겠다며 울부짖는 나를 진정시킨 병원 측의 말은 수술성공률은 제로이며 애를 수술시킨다는 것은 자기네에게 애를 실험용 재료로 내주는 일일뿐 아니라 수술비용도 퍽 많이 들므로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충고였다. 우리는 가족회의를 열고 의논한 끝에 결국 병원의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며칠 후 졸지에 배를 가르고 첫아들을 낳았다는 기쁨에 차있던 산모의 충격을 달래며 빠른 퇴원수속을 밟던 중 이미 세상을 떴을 것으로 생각했던 아이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접한 그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네가 뭔데 감히 한 생명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느냐? 는 음성에 난 성공가능성이 제로일지라도 수술시키기로 결정했다.

수술을 서두르는 나에게 그날이 토요일이었는데 아무리 서둘러도 월요일이라야 수술이 가능하다며 집도의사가 던진 또 한마디 말, ’수술은 내가 하지만 애가 살고 안 살고는 나의 영역이 아닙니다,‘ 란 당시엔 퍽 이해하기 어려웠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수술은 잘되었다고 했다. 그간 동일한 수술에서 제일 오래 산 아이의 기록이 2주일이었는데 2주일이 지나자 국내기록을 깼다는 것이다. 약 40여일이 지나자 이 수술은 국내 최초의 성공이라며 퇴원시켜도 좋다는 집도의사의 말에 따라 집으로 데려 온 아이는 아주 강건하진 않았지만 보통아이처럼 잘 먹고 잘 자는 아이로 정상아와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mental 면에서 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내 맘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불안감을 달랠 겸 또 생명의 주관자(사실 난 그때 소위 때의 교통사고와 첫애의 탄생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을 존재케 하는 주관자가 존재한다는 명제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도 인정할 겸 해서 난 집근처의 성당신부를 찾아갔다. 왜 왔느냐는 신부님의 물음에 ’생명을 주관하는 존재‘를 인정하고 싶어왔다는 나의 답변에 앉기를 권한 후 양주 한잔을 건네며 느닷없이 엄숙한 어조로 ’예수님은 역사적 인물입니까?‘ 라고 묻는 것이었다. 느닷없는 질문에 머뭇거리는 나에게 재차 묻자 ’약 2천 년 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태어났던 한 청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자 ‘그러면 그분이 우리와 다른 게 뭐라고 생각하시오?’ 하며 연이은 질문에 ‘그분은 우리와 똑같이 인성(humanity)을 지닌 인간인 동시에 또한 신으로서 신성(divinity)도 지닌 분으로 듣고 있습니다.’ 란 나의 답에 ‘내일 모레 오시오 내가 영세를 주겠소. 올 때 본명(세례명)이라는 걸 하나 지어갖고 오시오.’ 하며 가도 좋다고 했다.

물론 당시엔 몰랐지만 그 분은 벨기에에서 신학을 공부한 좀 트인(?) 분이었던 것을 후에 알게 되었다. 내가 그 옛날 서울고를 다닐 때 광화문 코너에서 언젠가 보았던 국제극장의 영화간판에서 ‘스테파노의 세레나데, 란 뮤지컬 영화제목이 퍼뜩 떠 오르길레 본명을 스테파노로 정하고 영세를 받게 되었다. 이는 최소 6개월 이상 교리공부를 거치지 않으면 영세를 주지 않던 당시의 관례로 본다면 난 분명히 엉터리로 영세를 받은 것이고 또 그 신부님은 엉터리로 영세를 주신 것임에 틀림없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공군소위 시절 당한 교통사고와 제대 후 결혼과 첫애의 태어남과 포기 그리고 그 다음 수술성공으로 인한 재탄생의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무신론자임을 자처하던 젊은 날의 나와는 달리 생명의 원천이 어디이며 생명을 주관하시는 존재가 누구이신가의 관점에서 만물을 만드신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의 뜻을 우리가 자유의지로 어기는 것이 죄며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죄 지은 만큼 벌을 받는 정의의 질서가 온 우주 안에 꽉 차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정의의 견지에서 우리가 지은 죄가 사(赦)하여지려면 반드시 죄 없는 존재가 내 죄를 대신하여 벌을 받아야만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죄가 없으신 하느님께서 바로 육화(incarnation)되어 오시어 우리 죄의 대속(代贖)제물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이시며 그래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세상의 어떤 죄도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명쾌한 논리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이 모든 지혜, 지식의 원천임을 알게 된 나에게 그분은 커다란 은총으로 내가 단 한 번도 생각조차 해 본적이 없었던 교직을 천직으로 주셨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 당시 보이는 세계의 중심이었던 미국이 수정헌법을 통해 도덕 다원주의를 그리고 영적세계의 중심인 로마가톨릭교회가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자 더욱 기승을 부리며 판을 치는 대 혼란의 격랑 속에서 미국사회와 로마가톨릭교회야말로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의 최대 피해자임을 교직기간동안 확인할 수 있는 눈도 주셨다. 그래서 난 내 전공영역인 경영전략과 기업윤리에서 ‘뿌린 대로 거두는 정의의 질서가 온 우주 안에 엄존’함을 근거로 상대적 가치판단기준이 아닌 절대적 기준에 입각한 ‘Dynamic Management‘라는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을 정립할 수 있었고 이를 amazon.com과 해외학회에서의 발표, 세미나, 특강 등을 통해 국내?외 학계와 산업계에 보급 확산시킬 수 있는 토양도 갖추게끔 해주셨다.

상대입학 후 어느새 훌쩍 지나버린 50년 세월은, 인간은 자기의지로 뜻을 세우지만 그 뜻이 이루어지고 않고는 온전히 하느님 의지에 따라 정해진다는 사실을 터득케 한 귀중한 시간이었다. 특히 첫애가 잘못 태어났을 때 내 죄 탓임을 인정하고 통회하던 마음을 보시고 아들을 살려주셨음같이 낮 추인 마음을 그분은 아니 낮추어보신다는 성경의 경구도 참임을 굳게 받아들이게끔 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난 오늘도 누구든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낮출 때라야 하느님께서 천상은총을 듬뿍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며, 매 순간순간 죄를 성찰하며 만물을 만드시고 보전하시며 다스리고 계시는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송민도, 송민영, 김시스터즈, 목장의 노래

YouTube video를 download하는 software (요새는 이런 것들은 모조리 Apps라고 부른다.. 이것도 Steve Jobs때문인가. 이것은 물론 applications software를 줄인 말이다.), ‘Free YouTube Download‘를 test 하다가 우연히 까마득히 먼 옛날 1950년대의 유행가 ‘목장의 노래’를 찾고 보게 되었다. 이 clip은 사실 나에게는 거의 충격적인 것이었다. 2분 30초의 짧은 이 video에는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그대로 담겨 있었기 때문이고, 그 추억도 사실 거의 60년도 넘은 것이기 때문이다.

노래 자체는 아직도 가사를 외울 정도로 생생한 것이지만, 여기의 주인공들은 사실 책, 잡지 같은 것으로만 보았을 뿐이다. 이들은 거의 radio를 통해서 알려진 유명인 들이다. 그러니까 TV가 널리 보급되기 전에 이들은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이 video clip은 정말 보물과도 같은 것이다.

여기서 주인공은 물론 가운데 서있는 송민도 씨, 들러리를 서있는 아가씨들은 그 유명한 김 시스터즈, 악단 지휘자이며 멋진 baritone을 구사한 미남은 송민도 씨의 남 동생인 송민영 씨.. 와~~ 이들은 모두 그 당시 유일한 AM Radio HLKA를 통해서 육이오 전쟁 후 피로에 지친 국민들에게 그나마 위로와 기쁨을 주던 최정상의 연예인들이었다.

이 video가 어떤 show를 보여 주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1955년에서 1957년 사이가 아닐까..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 2학년에서 4학년 사이가 될까. 왜냐하면 김 시스터즈는 그 즈음에 미국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아마 송민도 씨도 그 즈음에서 연예계를 떠났을 것이다. 녹음 상태가 그 당시의 녹음 기술 과 오랜 세월 탓으로 별로지만 송민도 씨의 육성은 정말 그 당시에 듣기에 우렁차고 낭랑했었다. 김 시스터즈는 완전히 미국으로 갔고, 송민도 씨와 송민영씨는 그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듣기에 송민도 씨도 미국으로 왔다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른다. 송민도 씨의 이 ‘목장의 노래’를 들어보면, 아침을 ‘아츰’.. 하루를 ‘하로’라고 발음을 하는데 이것은 어떤 사투리인지 모르겠다.

 


목장의 노래, 송민도, 1950년 대

 

미워도 다시 한번

미원도 다시 한번, 1968
미원도 다시 한번, 1968

42년 만에 다시 생각해 보는 유치하기도 하고, 진부하기도 한 이 구절은 물론 1968년에 대한민국에서 나온 영화의 제목이요, 주제곡의 이름이기도 하다. 우연히 Internet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참 감회가 깊었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42년이면 강산이 최소한 4번 변할 정도라고 하지만 요새의 강산은 아마도 그보다 더 변했으리라..

나는 이 영화를 아마도 개봉관이었던 을지로 4가쯤이 있었던 국도극장에서 당시 같이 모이곤 했던 혼성그룹의 여대생들과 같이 보았을 것이다. 당시는 사실 외국, 특히 미국문화가 판을 치던 당시라서 국내의 영화는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따라서 대학생이 되면 사실 국산영화는 피하는 것이 ‘멋’이었다. 국내 영화를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 영화만은 예외였다. 그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온 ‘수준 작’이라고 평가를 했었던 것이다.

최고의 배우였던 신영균, 문희, 전계현, 박암.. 우선 cast가 화려했고, 비록 ‘신파조’의 진부한 story였지만, 사람들의 깊은 공감을 자아낸 영화였었던 것 같았다. 우리의 나이에서 그 영화를 보면, 그저.. 와 저 남자 참 복도 많구나.. 하는 정도였지만 남녀관계, 특히 결혼과 가정과의 역학관계를 어렴풋이 짐작하게도 되었다.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느끼는 것 중에는 신영균, 생각보다 세련되었고, 연기도 무리가 없어 보이지만 상대적으로 문희의 연기는 기억보다 실망적이었다. 그 당시 영화기술의 수준으로 자기의 목소리를 넣을 수 없었으므로(동시 녹음) 성우가 대신 대사를 했는데.. 그것이 문희에게는 너무나 어울리지를 않았다. 당시에 나는 문희가 ‘최고의 미인’으로 기억에 남았는데, 지금 다시 보니 사실은 ‘별로’ 였는데.. 이것은 아마도 내가 보는 ‘미인’의 눈이 바뀌어서 그런 것 같다.

영화의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나는 영화에서 보이는 그 당시의 배경 물들 (길거리, 버스, 택시, 집안 풍경)이 더 흥미로웠다. 내가 기억하는 것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음을 보고 나의 기억은 퇴색되거나 왜곡되지는 않았다는 안도감도 있었다. 이 영화의 주제곡도 영화와 같이 크게 인기가 있었는데, 당시의 역시 최고로 잘 나가던 ‘이미자’, ‘남진’이 같이 불렀고, 나는 영화보다 주제곡이 더 좋았던 기억이다.

멜러드라마의 특징은 모조리 갖춘, ‘눈물을 찔찔 짜게’ 만들기는 했지만 역시 그 목적은 달성한 영화였고, 4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봐도 느낌이 비슷하니 이것이야 말로 한국의 movie classic이 아닐까?

이 movie classic미워도 다시 한번‘은 이곳에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재동학교 백승호

어린 시절 친구들을 회상할 때면 그 느낌들이 갖가지임을 느끼곤 한다. 물론 생각만 나도 피하고 싶은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너무나 희미한 기억들이라서 그런지 실제라 기 보다는 파란 담배 연기 속에서 춤추는 듯한 거의 꿈처럼 느껴지곤 한다. 한마디로 더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싶은 친구들인 것이다. 이런 것들을 지금 급속히 저하되는 듯한 기억력과 싸우면서도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나의 blog은 사실 그것을 위해서 시작했고 계속 그런 노력을 돕는 역할을 해 왔다고 생각이 된다. 영어와 ‘한국어’ 사이를 오가며 나의 감정을 알맞게 나타내는 것도 이제는 쉽지는 않다. 사실 머리 속에서 맴도는 어린 친구들은 그 당시의 사진이나 앨범들을 보면 쉽게 알아 낼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다. 분명히 친하게 뛰어 논 기억은 나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이다. 그래도 그 중에는 더 자세히, 생생히 기억이 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백승호의 기억이 유난히 머리에서 맴돈다.

백승호, 재동국민학교졸업앨범에서, 1960
백승호, 재동국민학교
졸업앨범에서, 1960

나의 뇌리에 ‘강하게’ 새겨져 있는 이 백승호는 1958년 서울 재동국민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의 친구였다. 한때 아주 가깝게 지냈고 분명히 서로 좋아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어느새 인가, 우리는 헤어지고 말았다. 웃기는 것은 그렇게 친구였었던 기간이 1년도 채 안되게 짧았지만 아직도 어제 본듯한 기분인 것이다. 원래가 잘 웃는 얼굴의 이 친구, 백승호 6학년 때 헤어지고 말았지만 멀찍이 볼 양이면 저 애는 나의 친구였다는 생각은 하곤 했었다.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백승호는 완전히 나의 시야, radar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대부분의 국민학교 동창들이 바로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다시 연락이 되었던 다른 친구 신문영처럼 이 친구도 거의 꿈같이 연세대 campus에서 보게 되었다. 신문영은 몇 초 정도 잠깐 보고, 혹시 저 친구가 신문영.. 하며 어 떨떨 했었지만 이 백승호는 아예 자주 얼굴이 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ROTC(학훈단, 일명 바보티씨) 생도의 모습으로 자주도 보였다.  

문제는.. 그렇게 나의 눈에 보일 때마다 왜 나는 반가운 마음을 접고 ‘모른 척’을 했었을까? 성격 적으로 그 당시 나의 먼저 나서서 백승호를 아는 척 못했을 것이다. 그저 멋 적은 것이다. 느낌에 어떤 때는 백승호도 나를 보았다고 느꼈지만 확실하지 않다. 만약 그가 나를 알아보았다면 그도 멋 적어서 나를 모르는 체 했을까.. 그것이 아직도 궁금한 것이다.

이런 사연으로 백승호의 image는 이곳 저곳에 남았다. 재동국민학교 5학년 시절의 사진 2장, 재동국민학교 졸업앨범, 하지만, 연세대 앨범.. 을 기대했지만 그는 1966년 입학으로 나보다 일 년 앞서 졸업을 한 듯, 그곳(1971년 앨범)에 그의 모습은 없었다. 사실, 학훈단 베레모를 쓴 모습도 기억을 하는데, 아마도 공학부 토목학과를 다녔던 듯 하다. 더 늦기 전에 그의 살아온 역사를 알고 싶지만, 그것은 너무나 무리한 바램일 것 같다. 하지만 build it, they’ll come의 교훈을 기대하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닐 듯..

 

재동국민학교 5학년 사진, 동그란 표시가 백승호, 1958년

재동국민학교 5학년 사진, 동그란 표시가 백승호, 1958년

 

찾았다! 재동학교 6학년 1반 신문영

나는 몇 개월 전 이곳,   나의 blog에서 연세대 시절을 회상하면서 재동국민학교 동창 신문영을 그의 졸업앨범 사진과 함께 같이 다루었다. 그 많은 재동국민학교 동창생 중에서 신문영은 나의 희석되어가는 뇌리에 뚜렷이 남아있기에 얼마 전에 그로부터 소식을 들었을 때,나는 사실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가 나의 blog을 ‘우연히’ 보았기에 연락이 되었을 것이라 serony dot com blog의 제일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제일 궁금했던 사실들 대부분을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내가 제일 궁금했던 것은 1960년 중학입시에서 어떤 중학교에 갔느냐는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경복중학이었다. 다른 재동 동창 심동섭이 경복으로 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또 다른 동창 조성태, 정세종, 장세헌 등도 같이 경복중학교에 갔다는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 조성태, 정세종은 같은 분단에 있어서 아는 동창들이고, 장세헌은 1학년 때 같은 반인 것만 기억을 한다.

이번에 email로 느끼는 신문영은 솔직하고 직선적인 듯 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중학교 당시 공부를 지지리도 못해서 삼선 고교로 갔다’ 고 하는 것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와 비슷하게 부선망 단대독자(아버지가 없는 외아들)로 군대를 안 갔었다고 했고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고.. 느낌에 아주 ‘정석적’인 인생을 산 듯했고, 명함을 보니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을 한 것 같아서 흐뭇했다.

이 친구를 통해서 재동학교 동창회가 있다는 것도 새로 알게 되었는데, 회장은 김영환, 일년에 한번 정도 모인다고 했고, 거기서 이만재, 육동구 등도 보았다고.. 듣기만 해도 흐뭇하고.. 부럽고.. 꿈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나는 꿈에서만 볼 수 있었던 광경들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모이면 사진이라도 볼 수 있게 되기만 바라지만, 세월의 횡포로 얼굴이나 제대로 알아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신문영을 기억하면 꼭 같이 떠오르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6학년 (1959년) 때 같은 분단 (공부를 제일 잘하던 1분단)에 있을 때 어느 날 이른 아침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에 담임 박양신 선생님이 나와 신문영을 부르더니, 심부름 좀 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듣고 보니, 선생님이 댁에서 가져와야 하는 물건 (서류?)이 있으니 둘이서 곧바로 선생님 댁에 갔다 오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 당시에 우리에게는 큰 일에 속했다. 왜 나와 신문영에게 그런 심부름을 시켰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둘을 믿고 그런 일을 주신 것이 내심 기뻤던 것은 사실이다. 그 시간에 학교를 빠져 나와서 인사동 입구의 선생님 댁으로 가는 것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모험 같고 신기롭게만 느껴져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는 모양이다.

아들 딸 모두 결혼, 손주들까지 있는 신문영, 부럽기도 하고, 보고 싶어 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쉽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반세기가 훨씬 지난 뒤에도 가상적인 해후가 이루어지는 세상이니 이만큼이라도 오래 살았다고 위로를 하며 만족하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을 듯..

다시 찾은 인호 형

인호 형, 김인호 형을 다시 인터넷을 통해서 다시 찾게 되었다. 실마리는 나의 blog 을 정말 ‘하느님의 뜻’으로 인호 형이 보게 된데 있었다. 시간적으로도 사실 아주 빨랐다. 요새는 가끔 이렇게 surreal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긴 하지만 이것도 점점 빨라지고 거대해지는 global information network를 감안하면 이런 추세는 가속화 될 듯 싶다. 비록 전화를 통한 음성은 못 들어도, 가깝게 느껴지는 문자 소식으로 50년이 가까워오는 거대한 세월의 징검다리를 넘는 듯 느꼈고, 가벼운 흥분 감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더욱이 인호 형이 나를 ‘분명히’ 기억하는 사실에 더욱 반가웠다.

유명인이었던 박계형 여류 작가의 조그만 신문광고가 이렇게 나를 50년 전 나를 잠깐 가르쳤던 ‘가정교사 김인호’ 형을 찾게 되어서 형의 부인이신 박계형 여사에게도 특별한 감사의 심정을 전하고 싶지만.. 조금 시기상조가 아닐지 모르겠다. 그 옛날, 나는 여사의 ‘청춘 물’ 책을 ‘하나도’ 읽었던 적이 없지만 근래에 들어서 쓰신 책들은 무척 많은 관심이 간다. 특히 이번에 알게 된 여사의 심혈작인 ‘환희’는 더욱 더 관심을 갖게 된다.

대학생과 고교생으로 만났던 때를 50년 훌쩍 뛰어넘어서면 ‘호칭’부터 문제가 될 것이다. 나는 비교적 쉽게 그때와 같이 ‘인호 형’으로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웠지만, 인호 형은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난데 없이 나타난 환갑을 훌쩍 넘긴 ‘동생, 제자’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는 곤혹스러웠을까.. 이해가 간다. 활달한 성격이었던 것을 기억하면 그저 나보고 ‘경우 야..’ 하고 불러주면 너무나 반가울 터인데..

친절하게도 두 번째 편지에서 형의 ‘과거와 종교관’ 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글을 보내주셨는데, 아마도 형의 출신고교인 서울고교 동창회지에 투고된 글인 듯 싶었다. “인생은 Given Way“라는 제목의 일종의 ‘고백록’은 형의 고통과 영광스러움이 조화된 아주 멋진 신앙여정을 그리고 있었다. 이것으로 대강 나의 ‘형이 긴 인생여정에 대한 호기심’ 은 충족이 되었다. 대강 추측을 해 보면 우선 박계형 여사는 천주교 집안 출신이었고, 형은 관면혼배로 결혼을 했던 것 같아서, 그때까지만 해도 교인은 아니었던 듯.. 이 글로 나의 궁금증이 풀린 것은 다음과 같다.

  1.  나를 가르칠 때 상대생(인문계)으로 왜 그렇게 과학이론을 여담으로 가르쳐주었나 하는 것은, 형이 원래는 서울고교 재학 당시 이과에 속했고, 이공대를 지망했었다는 글에서 그 의문이 풀렸다. 하지만 ‘갑자기’ 공대 지망에서 상대로 바꾸어서 진학을 한 것이다. (이것도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도..)
  2.  박계형 여사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게 된 것은, 원래 형이 6.25 피난시절 대전에서 국민학교 다닐 때 박여사를 알고 지냈던 사이라고 했고, 대학졸업 후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와 같이 공부를 하던 1965년 형이 서울상대에 다닌 그때에는 사실 박계형 여사와 다시 만나기 이전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히 ‘나중에’ 형의 친구였던 건우형을 통해서 우리 집에 전해졌을 것이다.
  3.  인호 형이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알게 된 것은 역시 공군 장교 근무 중에 당한 ‘대형사고’ 의 후유증과, 이미 하느님을 알고 있던 문학소녀 박계형 씨와의 ‘운명적인 만남’ 때문이 아니었을까?
  4.  그러한 ‘부부결합’ 된 신앙가족이 꾸준히 신앙을 지키게 되었던 것은 다음에 일어난 첫 아기(아들)의 ‘생명을 건 수술’ 이 도움이 되었을까.. 그리고 거의 ‘공짜’로 받게 된 형의 영세도 ‘생각하며 서서히 진행된’ 긴 신앙여정에 커다란 활력소가 되었을 듯하다.
  5.  제일 궁금한 것은 역시 형이 ‘만들어 놓은’ 새로운 경영학 이론, dynamic management theory인데.. 단순히 요새의 networked economy를 의식하고 가볍게 만든 것이 아니고, 형의 인생관, 종교관, 세계관 나아가 우주관이 총 집결된 그런 조금은 ‘높은 곳’의 이론이 아닐까.. 특히 엉망진창인 세계경제, 특히 미국의 문제들을 생각하면 이제는 새로운 ‘절대적 기준’의 이론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렇게 해서 다신 ‘만난’ 형은 나에게 부인인 박여사의 심혈작 ‘환희 1.2부‘를 보내 주시겠다고 했고, 나는 정말 그 책을 읽어보고 싶다. 이것도 형의 인생 반려자였던 여사의 인생,종교관을 보여 줄 것으로 기대가 되기 때문이다. 인호 형을 처음 우리 집에 소개시켜 주었던 건우 형, 내가 ‘이건우‘ 가 아닌 ‘박건우’로 성을 잘못 알고 있어서 정말 당황하기도 했다. 그저 ‘건우 형’으로만 알고 있어서 성까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정말 ‘창피’한 노릇이었다. 나의 어머님이 아직도 살아계셔서 이 사실(인호 형을 찾은)을 알았으면 얼마나 반가워 하셨을까..

book, dynamic-management

 인터넷 경제에 부응하는 새로운 경영학 이론, 김인호 교수와  북경대 교수들 공저

 

 

대구의 불볕 더위

heat wave, 2012
6월 마지막 날의 대구같은 더위

“대구 같은 더위”가 최근 이 지역에 들이닥쳤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3자리 숫자의 더위, 그러니까 화씨 100도, 섭씨로 36도 쯤 되나.. 심리적으로 이 세자리 숫자는 꽤 으스스한 효과가 있다. 시원하게 올해 초여름을 즐겼지만, 이제는 그것도 끝이 난 듯하다. 다행히도 이번의 불볕은 습기가 별로 없는 듯해서 견딜 만한데, 이것은 아마도 미국 Southwest, 그러니까 미 남서부 ‘아리조나’ 주 지역 같은 더위일 것이다.

오래 전부터 이 3자리 숫자의 더위는 까마득히 오래 전 대한민국 대구를 생각하게 한다. 좀더 자세히 기억하면 1972년 쯤이었나.. 그 해 여름은 한반도가 전체적으로 무척 더웠다. 에어컨이 나오기 시작할 무렵이었고, 서울의 기온도 34~5도까지 올라갔는데, 그 해 처음으로 ‘습기’를 동반한 ‘찜통’ 더위가 며칠 계속되었고, ‘난생 처음’으로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기억이다.

당시에는 사실 조금 ‘겁’을 먹기도 했는데, 그것은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어디 도망을 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추우면 무언가 덮고, 입고 하면 될 터인데, 이렇게 견딜 수 없는 더위에는 어찌할 것인가? 해답은 물론 ‘신비의 이기’, 에어컨에 있었지만, 실제적으로 그것은 당시의 경제수준에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 1972년 이후로 나는 사실 지독한 더위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추운 것이 더운 것 보다 낫다는 결론이 머리 속에 새겨진 것이다.

그 당시 대구의 더위는 어떠했을까? 당연히 그곳의 기온은 한반도에서 제일 높았다. 지형적으로 어쩔 수가 없다고 했다. 그 때, 대구에 잠깐 가게 되어서 처음으로 ‘대구 더위’를 맛볼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세자리 숫자의 더위였다. 섭씨로 36도 훨씬 이상이었을 것이지만 습도는 그리 높은 것이 아니었다.

그때 대구에서 느꼈던 ‘화덕’ 같은 공기를 오늘 처음으로 이곳에서 맛을 보게 되었다. 거의 똑같은 기분이었다. 절대로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습도가 없는 이 불 같은 공기는 사실은 생각보다 기분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요새 대구의 더위는 어떠할까? 서울보다 아직도 더 높을까? 1972년의 한반도 불볕 더위와 그 당시 대구에 살았던 ‘그 아가씨’도 오랜만에 기억한다.

15소년 표류기, 十五少年漂流記

Jules Verne의 15소년 표류기
1880년대 Jules Verne의 ’15소년..’의 책 표지

“15소년 표류기”..  까마득히 옛날 옛적, 중학교 1학년 (서울 중앙중학교) 때 읽었던 세계명작중의 하나, 정말 재미있던 모험, 소설책의 제목이다. 5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머리에 거의 사진처럼 생생하게 기억에 남을 정도면 이것은 참 대단한 것이 아닐까? 이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가는 인터넷에서 이것을 찾아보면 대강 짐작을 할 수 있다. 이 책은 아직도 널리 사랑을 받으며 읽혀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보았을 때, 만화책과 골목 밖에는 별로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재미있는 것과 곳이 없었던 그런 찌들었던 시대가 아닌, 인터넷과 컴퓨터 게임으로 밤을 새는 요새 아이들에도 꾸준히 읽히고 있는 것은 조금 놀라운 일이다. 내가 읽었던 때 이후, 50년 뒤에도 아직도 그 나이또래들의 ‘고전적인’ 탐험 심과 호기심은 전혀 변함이 없는 것일까?

이 책은 나의 중학입시 준비를 도와주었던 (재동학교 6학년, 1959년) 가정교사였던 경기고 (김)용기형이 나에게 중학교 입학 선물로 주었던 것인데, 하도 재미있어서 하루 이틀 새에 다 읽었던 기억이 나고, 용기형 자신도 이전에 재미있게 읽었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중학교에 들어가면 거의 무슨 의식처럼 읽는 ‘명작’ 전집이 있었는데,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이 학원사에서 발행된 거의 100권이 넘는 것이었고, 그것도 한국 명작과 세계명작으로 따로 있었다. 중학교를 마치기 전까지 그것을 다 읽는 것이 좋다고 했는데, 나는 별로 그런 것들에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이유는 ‘만화’가 훨씬 더 재미있고 배울 것도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기의 15소년 표류기는 그 ‘표준’ 명작전집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한창, 모험심, 공상적 상상이 극에 달하던 그 시절에 이 책은 사실 그렇게 ‘과학적, 공상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책은 1세기 전 사람들이 겪었던 거대한 바다, 미개척 된 대륙, 특히 섬들에 대한 호기심을 일깨워 주었다. 이 책을 읽은 후, 바다를 뗏목으로 항해하는 꿈을 많이 꾸기도 했다.

특히, 실제로 구체적으로 서해안, 인천에서 출발해서 제주도 쪽으로 가는 뗏목 여행을 계획하기도 했다. 물론 중학생에게 그것은 어림도 없는 자살행위였겠지만, 그런 구체적인 계획을 생각하는 것 만도 너무나 행복하였다.

이번에 이 책을 어렴풋이 회상하면서 과연 그것이 어떤 책이었는지 궁금해져서 조사를 해보니,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들이 너무나 많았다. 책을 읽을 당시에는 책의 내용에만 관심이 있어서 누가 언제 쓴 책인지도 몰랐다. 이러한 사실을 찾는데 책의 제목부터 문제였다.

도대체 ’15소년 표류기’라는 영어 제목은 어디에도 없었다. Fifteen Boys로 아무리 찾아도 없었고, 표류기 같은 castaway, adrift 로 찾아도 헛수고였는데, 혹시..하고 한글로 ’15소년’을 찾았더니 bingo! 재수가 좋았던 것이 이 책이 ‘요새에도’ 읽히고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옛날에 읽었던 나 같은 나이의 ‘꼰대’들이 그런 정보를 인터넷에 올려놓았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인데, 요새는 아마도 ‘극성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생각해서 ‘권장하는 아동도서’로서 이런 ‘독후감’ 같은 것을 쓰는 모양이었다.

Jules Verne classic, Two Years Holiday
2003년 영어판, 15소년 표류기

이런 모험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 중에서 제일 ‘웃기는’ 것이, 책의 제목이었다. 원래의 제목은 Deux ans de vacances 그러니까 프랑스에서 나온 책이었던 것이고, 영어로는 Two Years’ Vacation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저자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바로 그 유명한 Jules Verne!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 Jules Verne 하면, 우선 ‘해저 2만리(Two Thousand Leagues under the Sea)’, ‘지저탐험(Journey to the center of the Earth)’, ’80일간의 세계일주’ 같은 ‘기가 막힌’ 책들의 저자가 아닌가? 나는 그 당시에 전혀 모르고 읽었던 것이다.

원제가 ‘2년간의 휴가‘인데 어떻게 이것이 우리나라에서는 15소년.. 어쩌구 로 나왔는지 궁금했지만, 이것은 쉽게 짐작을 할 수가 있었다. 이 책은 일찍이 개화를 한 일본 아해들이 이미 열광적으로 일본어로 출판을 했었고 그 책의 제목이 바로 十五少年漂流記, 가난했던 우리 출판사 아저씨들은 ‘그대로’ 찍어낸 것이다.

일본 쪽으로 자료를 찾으면 1951년에 나온 것이 있는데 내가 읽었던 것은 분명히 이 것을 ‘100% 그대로’ 한글로 직역을 했을 것이다. 그 당시 한국 출판계는 분명히 그랬다. 거의, 아니 100% 일본 것들을 ‘베낀’ 것들 뿐이었다. 문제는 일본 판의 번역이 충실했으면 그런대로 괜찮을 법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읽었던 ‘세계명작’ 들은 완전히 ‘오역’으로 즐겼던 셈이다.

이 책의 대강 줄거리는 생생히 기억을 하지만, 자세한 지명이나 사람이름들은 거의 잊어버렸다. 분명히 생각나는 이름 중에는, 거의 주인공이나 다름이 없는 프랑스 소년 ‘브리안, Briant‘ , 나중에 등장한 ‘Friday 아줌마’ 등이 있다. 대부분이 영국소년들이고, 이들과 ‘정치적’인 갈등까지 겪지만 어른들과 다르게 그들은 빛나는 화해와 협력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하는 참 듣기 좋은 Utopia적인 얘기다.

이런 것들은 요새 생각을 해본 것이고,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은 제치고, 무인도의 동굴 속에서 2년간 살면서 겪는 각가지 탐험, 위험, 모험 등에 ‘열광’을 했었다. 특히 실감나게 잘도 그린 무인도의 지도는 흡사 ‘보물섬’ 을 연상시키는 것이라서 그 당시 나이에서는 완전히 우리를 압도하곤 했다. 1880년대에 나온 책이라 당시의 바다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 찬 이 책을 기억하면 참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기분이다. 요새의 모든 관심사는 그저 ‘우주’가 아닌가.. 바다에 대한 경외심은 이제 많이 찾아보기가 힘들지 않을까.

Annie Laurie, 애니 로리

 

Maxwelton’s braes are bonnie,

Where early fa’s the dew,

And ’twas there that Annie Laurie..

Gi’ed me her promise true,

Gi’ed me her promise true,

Which ne’er forgot will be,

And for bonnie Annie laurie,

I’d lay me doon and dee.

 

Maxwellton’s Braes 로 시작되는  이 감정 짙은 스코틀랜드 시와 노래를 언제 처음 듣고, 따라 부르고 했는지 확실한 때가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분명한 것은, 대학 시절 전前은 아니라는 사실 뿐이다. 이런 ‘외국의 명곡’들은 대부분 중학교에 들어 가면서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배웠지만, 이 곡을 우리는 그때 배우지 않았다. 그것만은 분명하다.

대학시절, 언제 듣고 배웠을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분명히’ 기타를 배운답시고 이곳 저곳에서 ‘쉬운 기타 코드’로 부를 수 있는 곡들을 찾고, 배울 당시에 이것이 있었다. 우선 멜로디의 정서가 비록 장조이지만 슬픔이 깔린 은은함으로 그 당시의 감수성 많던 나이에 좋았고, 또한 기타의 코드가 우스울 정도로 초보 단계의 것이었다. 유일한 문제는 영어 가사였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무슨 사연이 있음직한 역사적인 시 라는 사실조차 몰랐고, ‘괴상한 스코틀랜드 식 영어‘에만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많은 유명한 외국 곡을 한글로 번역하여 sing-along style로 노래를 지도하던 전석환 선생도 이 노래는 몰랐는지, 그런 것도 없었다. 당시에, 그렇게 해서 나는 이 향수에 어린 노래를 알게 되었고, 그것이 홀연히 요새 다시 나의 눈앞에 다가왔다.

이번에는 옛날같이 그냥 기타를 치며 노래만 부를 것이 아니고 이 노래의 배경을 알고 싶어서, 알아보니 (주로 Wiki에서) 생각보다 많은 사연을 가진 노래였고, 그래서 더 좋아하게 되었다. 얼마 전 다시 보게 된 오래된 1940년 명화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를 연상케 하는 18세기 즈음 영국의 시대적 배경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 옛날에는 남자들이 여자를 그리며 쓴 시와 민요들이 꽤 있는데, 이것도 그런 ‘애가’ 중의 하나일 것이다.

Wiki로 이 노래를 찾아보면 영어판과 한국어 판이 거의 다르다. 그만큼 두 언어권의 문화와 관심사가 다르다는 뜻일 것이다. 이 노래의 역사는 양쪽이 비슷하지만 각 문화권에 소개되고 평가되는 것은 다르다. 역사적인 것은 Wiki를 보면 자세히 나와있지만, 나의 관심사는 내가 어떤 경로로 이것을 접했는가 하는 것인데, 한국어 Wiki에 그것에 대한 hint가 보인다.

이 명곡이 한국어로 번안이 되었고 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렸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최소한 1970년대 이후일 것이다. 내가 전혀 기억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이것을 접하게 된 과정은 다른 기록에서 밝혀진다. 아마도, 이 노래를 ‘유행곡’으로 만든 스코틀랜드의 folk (song) group이었던 The Corries에 의해서 한국에도 그들이 record가 들어왔을 것이고, 우리들은 그것을 들었을 듯 하다. 그것이 1970년이었으니까, 거의 확실한 것 같다.

내가 이 노래를 듣고, 배울 당시를 회상하면서 music video를 만들어 보았다. 너무나 높은 음정 때문에 vocal은 엉망이지만 그런대로 나의 사랑하는, 30년 역사를 자랑하는 YAMAHA guitar가 잘 cover를 해 주었다. Audacity software로 ‘음향효과’를 낸 것을 들어보니 조금은 pro맛이 나긴 했지만 아무래도 듣는 이에게는 솔직하지 못한 것 같아서 naked vocal version을 사용했다.

 

 

Annie Laurie, my own rendition

Annie Laurie, GVerb’ed by Audacity 

서울 1964, 해괴한 변증

서울 세종로 네거리, 1964

1964년 4월 서울 세종로 네거리의 모습

 

¶  1964년 4월 경에 발간된 고국의 한 신문에서 한 사진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서울, 1964.. 이런 소설의 제목도 있었지만 여기서는 실제로 1964년 경의 서울 심장부의 실제 모습을 말한다. 1964년의 대한민국 서울의 심장부는 역시 세종로 네거리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외국에서 말하는 Boulevard의 전형이 이곳에서 ‘중앙청’까지 펼쳐지고, 외국의 원수들이 방문하면 이곳을 ‘꼭’ 거치면서 사진기록을 남긴다.

보신각(사진, 왼쪽 아래) 같은 역사유물과, 일제에 맞서 조선인의 입과 귀를 살리려 애쓴 민족신문 동아일보사, (사진, 왼쪽 중간)가 이 네거리에 당시에 흔치 않던 5층, 고층빌딩으로 버티며, 6.25, 4.19, 5.16같은 굵직한 역사적 격동의 모습을 이곳에서 보며 기록을 하기도 했다. 새로 ‘도입된’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리고자 몸부림치던 현장, 4.19당시 고대생들이 진을 치고 자유당의원들을 ‘감독, 질책’하던 그곳, 삼성 밀수사건 때는 깡패출신 야당의원 김두한이 파고다 공원 ‘변소’에서 퍼온 민중의 분뇨를 정일권 국무총리 얼굴에 뿌렸던 곳, ‘원래’의 국회의사당 tower가 바른쪽 먼 곳에 보인다.

 

일제 에노 전차¶  1964년 당시의 traffic jam의 모습.. 당시에 느끼기에 그곳에 이렇게 움직이는 것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거북이 전차 (일제 유물, 귀엽게 생긴 ‘에노 전차‘ 들과 San Francisco style 미국 대형 전차들)가 당시에 ‘활개를 치며’ 이 세종로 네거리에서 공중가설선에서 불꽃을 튕기며 좌,우회전을 하는 모습도 있다. 그 ‘장관’은 어린 시절 하도 ‘멋져서’ 하루 종일 네거리에 서서 입을 벌리고 서서 구경을 하기도 했다. 이런 거북이 전차는 2년 뒤까지 모두 철거가 되고 완전히 자동차 전용도로로 변했다.

네거리의 바른쪽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 간판 격 극장, 국제극장이고, 그것의 조금 왼쪽으로 ‘신성일, 엄앵란’ 단골인 ‘아카데미 극장’, 그 바로 옆, 붙어서 Cinema Korea(시네마 코리아)라는 외화 전용 재 개봉관이 있었다. 이 사진이 찍힐 시절, 나는 용산구 남영동에서 효자동행 전차를 타고 중앙청 앞에서 내려서 중앙고등학교까지 걷거나, 시간이 급하면 시내버스를 타고 아예, 안국동, 재동 까지 가기도 해서 이곳 네거리는 ‘꼭’ 지나가곤 했다. 그 당시 그렇게 넓게 보이고, 멀게 보이던 것들이 지금 자세히 보니 어쩌면 그렇게도 좁고, 가까울까.. 그곳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세월과 함께 변해서 그럴 것이다.

 

¶  정말 오랜만에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천주교회 공식 월간지, 경향잡지를 보게 되었다. 전에는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고, 날짜가 많이 지난 실제의 책을 보기도 했지만, 요새는 인터넷으로 그런대로 편하게 접할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진짜 책’으로 느끼는 그 편안하고 게으른 느낌은 ‘절대로’ 이 곳을 통해서 얻을 수는 없다. 진짜 책이 주는 느낌을 ‘전자 책’ 의 형태로 옮기려면 생각보다 더 긴 세월과 더 큰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최근에 발행된 2012년 6월호를 훑어 보다가 정말 우연히 ‘성염‘이라는 저자의 글의 시작 부분을 읽게 되었다. 기사의 제목은 “아우구스티노를 만나다, 하느님 나라의 초석: 사회적 사랑, 「신국론(De civitate Dei)」” 이라는 아주 거창한 것이다. 나는 이 ‘성염’이라는 사람은 전혀 모른다. 하지만 제목이 주는 느낌이 ‘역사적인 종교론’ 이고 특히 로마제국이 등장을 해서 나의 눈길을 잡았다. 요새 급속히 세속화 되어가는 선진국 문화에 대한 경고를 4세기 때의 ‘사건’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아닐까 희망을 하며 읽다가 다음의 ‘해괴한 변증‘에서 손을 놓고 말았다.

제3천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미국이 이른바 ‘9·11 테러’를 당한 후유증으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리비아를 상대로 벌이는 무차별한 군사행동, UN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국제정치와 세계윤리를 완전히 붕괴시켜 버린 그 포학성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인류 지성계의 심각한 번뇌를 염두에 두면, 「신국론」은 현대에도 읽힐 만한 명분이 되고 남는다.

세계문학전집에 이 책이 빠지는 일이 거의 없다. ‘하느님의 도성(civitas Dei)’을 다룬 「신국론」은 다섯 단원, 22권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1-10권)는 로마 몰락이 그리스도교 탓이라던 로마 지성인들에게 건네는 호교론으로, 그들의 종교와 역사가 정치사회에도, 도덕적 문화에도 불완전했음을 밝혀 보인다.

 

 기묘하게 반달족의 쇠퇴하는 로마제국 약탈사건을 미국의 9.11 테러와 대비시키는 저자는 과연 ‘어떤 머리’를 가진 ‘로마 교황 대사’인가? 그런 해괴하고, 일방적인 논리로 어떻게 그는 학생들을, 그것도 ‘사랑의 하느님’에 관해 가르친단 말인가? 나는 “인류 지성계의 심각한 번뇌를 염두에 두는” 이 성염이라는 인간이 절대로 대한민국의 main-stream 의 일부가 아니라는 희망만 할 뿐이다.

내가 본 글이 주는 느낌이 out-of-context에서 나왔을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인류지성계의 심각한 번뇌‘와 이 저자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context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out-of-context’ 가 주는 느낌은 느낌 정도가 아니라 ‘성염’이라는 사람 자체를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현재 대한민국, 그것도 천주교계가 아직도 ‘사상’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한 물 지나간 ‘사상’을 종교와 기묘하게, 그것도 ‘지식인’의 이름으로 cocktail하는 것이 어떻게 ‘경향잡지의 desk를 통과했는지 앞으로는 더 주의를 해서 읽기로 했다.

50년 전: 오늘은.. 한미행정협정

요새 새로 생긴 ‘소일거리, time-killer’ 중에는 옛날 내가 소싯적일 때의 신문을 보는 것이다. 세상이 좋아져서 과거에는 ‘너무나 비싸서, 거의’ 불가능 했던 것들이 마음만 먹으면 거의 무료, 아니면 값싸게 다가온다. 이것도 조금 오래 산 보람중의 하나다. 소싯적이란 때도 그리 짧은 것이 아니어서, 요새는 특별히 반세기라는 이정표에 그 시기를 맞추어서, 그 당시를 회상해 본다.

반세기, 역사시간에 그것은 아득하게 긴 시간으로 들렸지만, 이제 보니, 아직도 기억이 또렷한 것들도 많아서 그 정도로 긴 것 같지 않다. 50년 전이라면, 1962년 6월이 되고 그 당시 나는 서울 중앙중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다. 그 나이에 당시의 ‘한자 투성이’ 신문을 쉽게 볼 수가 없었을 것이고, 읽는다 하더라도 거의 모두 ‘관심 밖’의 일들 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다시 보며 그 ‘사건’들의 의미를 새겨보는 것은 뜻 깊고, 보람된 일이라고 느껴진다.

50년 전의 이맘때의 ‘시사’를 그런대로 기억한다. 5.16 혁명이 비교적 안정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신선한 기분으로 ‘재건‘이란 말을 염두에 두며 뛰었다. 정치적인 안정은 그런대로 경제 문제로 에너지가 집중이 되면서 ‘우리도 잘 살아보자‘ 라는 구호로 이어진다. 그래서 기억에 그 해 4월 쯤에 경복궁 안에서 ‘산업박람회‘라는 것이 열렸고 나도 그곳에 가 보았다. 그때 나에게 인상적인 ‘상품’은 일본회사의 ‘칼피스’ 같은 자동 주스기 였는데, 물론 값이 아주 비쌌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행복한 뉴스’에 속했다. 진짜 문제는 새로 부각된 ‘한미행정협정’이란 골치 아픈 것이었다.

그 당시에 나는 이것에 대해서 나의 가정교사였던 김용기 형으로부터 이것에 대해 ‘쉽게 설명되어’ 듣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의 범죄를 어느 정도 우리 정부가 처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골치 아픈 것인가는 어렸던 나도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번번히 미군들이 우리동포들의 인권을 ‘무참히’ 유린하는 신문기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나의 기억에 아직도 손이 부르르 떨게 되는 사건은, 미군들이 집단으로 위안부(직업여성들)의 머리를 삭발시키고 도로포장용 tar (까만 ‘타마구’)를 머리에 붓고,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었던 끔찍한 일이었다. 그것이 신문에 사진으로 까지 나왔으니.. 국민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쉽게 짐작이 간다.

이런 사건이 왜 그렇게 처리하기 어려운가는 간단히 말해서,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군들은 치외법권적인 절대적 특혜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군의 형사문제가 생기면 전적으로 미국의 법에 의해서 처리가 되었고, 그것은 우리들의 ‘울분’을 조금도 씻어주질 못했다. 여기에 역시, 또, 우리의 자랑스런 혈기 왕성한 ‘고대생’ 형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것을 보면서 나는 ‘고려대학 전체의 영웅성‘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분명히 그들은 ‘민족적 민주주의 교육의 요람‘ 이었다. 물론 그런 항의데모는 곧 바로 다른 대학으로 확산되기는 했지만, 거의 언제나 그들이 중심에 있었다. 이러한 사건은 정말 한미당국의 ‘고도의 정치 기술’을 요하는 민감한 사건들이었다. 그 당시 미국의 위치는 거의 대한민국의 보호자 격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이 짐을 싸서 가버리면 바로 그 다음날 김일성의 탱크가 의정부 가도로 행진을 할 것은 거의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국가자체의 생존문제가 걸린 것이다.

그날 일어난 고대생 평화적 시위는 이 골치 아픈 문제의 해결을 향한 길고도 긴 여정의 첫 발을 띄게 하는 역사적인 것이었다. “반미는 곧 용공” 이라는 슬픈 등식이 횡행하던 때, 그런 반미시위는 고도의 용기와 기술이 필요한 것이었고, 국민 감정 또한 만만치 않았다. 정부 측인 군사정부도 사실을 마찬가지였다. 그 혈기왕성한 군인들이라고 우리 동포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에 대해서 남들과 다르게 느낄 리가 있을까? 그날 곧바로 박정희(최고회의 의장)의 성명이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전적으로 학생들과 동감‘이라는 요지는 사실 파격적인 발언이었고, 이 시위가 그런대로 control된 상태로 가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런 사건들은 특히 김일성이 ‘절대로 좋아하는’ 사건들이었고, 그 당시 그들의 방송을 들어보면, 완전히 축제분위기였는데, 간단히 말해서 빨리 “미제도당”의 군대를 철수시킬 때가 되었다는 요지였다.

하지만 그 당시 고대생들의 성명을 보면 그들은 ‘절대로 반미, 반정부 적이 아니라’ 고 누누이 강조를 했다. 그것은 또한 사실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 동포가 미군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인권이 침해 당하지 않게 하라는 요구 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시위는 평화적이었다. 고대생들의 결의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위하여 공동의 적과 싸워 피로써 맺어진 한국과 미국의 상호관계가 미국으로 보아서 명예롭지 못한 일이며 한국으로서는 심히 유감스럽기 짝이 없는 접종하는 불상사로 인하여 조금이라도 손상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일부 몰지각한 미군인들 에 의한 한국인에 대한 모욕적인 만행에 대하여 우리는 분노의 격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한,미 양국이 주권국가로서 서로 존중하여 양국의 권리와 의무를 명백히 하여 인간의 기본권을 옹호하는 합법적인 방법으로서 한미행정협정이 조속히 체결되기를 한국인의 정당한 요구로서 성명한다.
6.25 이후 미국군대 주변에서 빈번히 일어난 한국인 ‘린치’ 사건과 이를 둘러싸고 자주 논의된 행정협정체결 문제가 아직까지도 뚜렷한 이유 없이 지연되어 왔음은 심히 유감 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한 미국인의 인도주의에 호소하여 인권의 침해와 인간존엄을 유린하는 사태가 또다시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가장 합리적이며 근본적인 해결책으로서 타국에서와 같이 한미행정협정이 조속히 체결되기를 요청한다.

 

고대생들의 대 정부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미국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선봉이며 ‘심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일어났던 ‘린치’ 사건은 미 국민 으로서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한미행정협정을 체결하지 못하고 있음은 정부의 무능한 소치다. 정부는 성의를 다하여 주권국민임을 해외에 선언하라.

 

고대생 한미행정협정촉구 시위, 1962년 6월 6일

1962년 6월 6일, 군사정부 계엄령하에서 일어난 고대생들의
한미행정협정 촉구 데모, 평화적인 시위였다

 지금 이 사건을 되돌아 보면서 느낀다. 그 당시의 객관적인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통계를 감안하지 않고서 이 사건을 이해할 수 없다. 바로 우리를 앞서 갔던 일본의 경우를 보면 간단하다. 국가 안보 다음에 ‘통하는 것’이 경제력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그 당시 대한민국은 소위 말하는 ‘후진국’이었다. 일단 전쟁은 끝냈지만,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실정이었던 것이고 국가 안보와 직결이 되었던 미국의 원조와 미군의 존재는 거의 ‘성역‘에 속했다. 박정희 군사정부가 어찌 그것을 몰랐으랴.. 대학생의 절규를 그들도 못지않게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직접적인 불행의 ‘원죄’를 만든 민족반역자, 1급 전범 김일성 개XX 를 견제하며, 경제개발을 해야 했던 군사정부, 박정희 정권이었다. 단 한가지.. 경제적인 안정과 성장 그것만이 고대생들이 절규했던 동등한 지위에서의 한미행정협정을 가능케 하리라는 것이 당시 정권의 믿음이었다. 비록 군사정권 하에서 ‘시위금지’ 라는 법을 어겼지만, 고대생들은 결과적으로 군사정권이 더욱 경제개발에 총력을 하게하는 자극제가 되었던 것이다.

 

 

Many Men Came here..

The Longest Day, 1945

 

6월 6일, 달력이 빨갛다. 바보 같은 본당(that is,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달력이 ‘고국에서 주문을 받아와서’, 친애하는 고국의 국경일이 모두 빨갛게 표시되어 있다. 그러니까 올해 (최소한) 한해는 고국의 국경일을 ‘느끼며’ 살게 되었다. 고국에 달력을 주문해서 얼마나 돈을 절약했는지는 몰라도, 참 해도 너무했다. 그곳의 국경일들을 빨갛게 ‘강조’ 했으면, ‘고객이 거의 일년 열두 달 사는’ 현지의 국경일, 기념일도 그랬으면 누가 때리냐? 6월 6일 현충일에 동작동 국군묘지라도 참배해야 한단 말인가?

6월 6일을 왜 이승만 대통령께서 현충일로 정했는지 유래는 확실치 않아도, 이곳에서 6월 6일은 1944년 6월 6일을 기념하는 날이고, 그날은 2차 대전시 3백만의 연합군이 프랑스의Normandy 해안으로 육,해,공의 ‘사상 최대의 작전‘이 시작된 날이다. 바로 D-Day인 것이다. 그 날이 없었으면 간접적으로라도 우리의 광복절도 연기가 될 수도 있었던 그렇게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날인 것이다. 그것도 본당 달력에 ‘정확히’ 빠져있었다.

2004년에 이미 반세기, 50주년이 지났고 이제는 사실 60주년에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 특별히 이날을 생각하는 것은 역시 개인적인 추억과 그것과 관련된 영화, The Longest Day에 대한 향수 때문이다. 1948년 생인 내가 그날을 어찌 기억하랴마는, 사실처럼 그려낸 영화의 역할이 내가 직접 그때를 겪은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데 한 몫을 했다는 데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영화, The Longest Day는 컴퓨터로 특수효과를 ‘조작’ 한 만화 같은 요새 영화들이 아니고, ‘정직하고, 우직하게’ 만든 1962년 미국 ‘흑백’ 영화 ‘The Longest Day‘ 인 것이다. 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영화를 나는 1963년도 중앙고 1학년 때, 남산 밑, 퇴계로에 있던 ‘개봉관’ 대한극장에서, 학교에서 단체로 가서 보았다. 정확하게 언제였는지 궁금해서, 그 당시의 일간지를 찾아보았지만, 그 영화의 광고를 찾을 수가 없었다. 1962년의 영화이기 때문에 일본을 거쳐서 들어오려면 빨라도 1년 이상이 걸리기 때문이고, 고1때 본 기억이 분명해서, 1963년일 것인데.. 왜 그 영화의 광고는 신문에 없었는지, 아직도 궁금하다.

 

 

The Longest Day, the theme song – Paul Anka – 1962

 

그 당시에 이 영화의 ‘역사적 의미’를 다 알지는 못했지만, 그저 ‘우리의 멋진 친구인 미국이 주도한’ 연합군이 ‘나쁜 놈들, 나치 독일’을 패배시키는 기분 좋은 스토리라는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당시에 우리들은’그 영화를 참 재미없게 보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영화는 재미있게 만들어진 얘기 같은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정직하게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록영화처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흔히 있는 climax같은 것도 그 영화에는 없었고,특히 끝나는 장면은 덜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보완이라도 해 주듯이, 엄청나게 많은 당대의 최고 배우들이 동원되었고, Paul Anka의 영화 주제곡은 영화의 심각성을 잘 나타낼 수 있어서, 조금은 덜 지루할 수 있었다. 이 주제곡은 다른 영화 ‘콰이강의 다리’ 와 같은 정도로 우리들이 두고두고 휘파람으로 따라 부르기에 좋았다. 특히 기억에, 우리 반에 ‘조광순‘이라는 친구, 원래 노래를 잘 부르는데, 이 영화를 보고 학교로 돌아와서부터 복도건 교실이건 가리지 않고 따라 부르곤 했다.

다른 기억으로는, 우리 학교에서 단체로 대한극장에 들어갔을 때, 이미 전회의 상영이 끝나고 있었는데 보니까 앉았던 사람들이 모두 우리또래의 여학생들이었다. 과연 그 ‘여학생’들이 이 영화를 ‘졸지 않고’ 보았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또한, 다른 생각에 이 영화는 최소한 대한민국에서는 크기 돈을 못 벌었을 것이라는 사실.. 그것이 아마도 신문광고를 찾기가 힘들었던 이유가 아닐까..

 

이 영화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면, 그 동안 모르고 있었던 흥미로운 사실들이 많이 있다. 그것 중에는:

  1. The Longest Day는 1959년 저자 Cornelius Ryan이 저술한 1944년 6월 6일 ‘하루 동안’ 일어난 연합군의 Normandy 상륙작전에 관한 역사책의 제목이다. 그러니까 non-fiction, fiction도 아닌 historybook인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적 사실과 아주 가까운 실화들인데, 이것이 영화화 되면서 판권이 당시의 금액 $175,000 (십칠만 오천 불)에 달했다.
  2. 영화에 사용된 언어들은 모두 각국의 언어를 쓰고 있고, 모두 영어로 자막을 넣었다. 하지만 배우들이 모두 영어를 쓰는 다른 것도 동시에 찍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영화의 두 가지 version이 존재하는 셈이다.
  3. 당시의 인기인 중에 주제곡을 부른 Paul Anka는 예상 외로 그는 멋지게 army ranger역할을 해 냈다.

     

    Paul Anka & Robert Wager in the Longest Day

    Paul Anka

  4. 실제 인물인 Benjamin Vanderboort (중령, 82nd Airborne, 공정단)로 연기를 한 당대의 인기배우 John Wayne, 원래 이 역할은 Charlton Heston이 원하던 역이었지만 John Wayne에게 넘겨진 것이다. 대부분의 주역 배우들이 25,000불의 연기료를 받았지만 John Wayne만은 그것의 열 배인 250,000불을 요구하고 받았다고 한다.

    John Wayne as Lt. Col. Vanderboort

    밴더브루트 중령 역의 존 웨인, 공수부대장

  5.  82nd 낙하산 공정대가 투하되었던 프랑스의 마을 (Sainte-Mere-Eglise)의 교회당 꼭대기로 ‘잘 못’ 투하되었던 사병(Red Button의 역할)을 기념하는 실제 인형이 아직도 그곳에 걸려있다고 한다.
  6.  연합군 최고사령관 (Allied Supreme Commander) 였던 General Eisenhower의 역할은 처음에 실제 인물인 미국 전 대통령의 역임했던 President Eisenhower를 고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그는 D-Day로부터 거의 20년이나 지나서 비교적 젊었던 그 당시의 역을 맡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연기 경력이 전혀 없었지만 그와 비슷하게 생겼던 decorator Henry Grace를 기용했다. 그의 연기를 영화에서 보면 꽤 성공했다는 생각이 든다.

    연기경력 제로의 아이젠하워 역의 Henry Grace

    연기경력 제로의 아이젠하워 역의 Henry Grace

  7. 공포영화, 드라큘라(Count Dracula)로 잘 알려진 경력 영국배우였던 Christopher Lee는 영국군으로 등장을 하려 연기심사를 받았지만, ‘군인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낙방을 했다고 한다. 사실 그는 2차대전시 영국 공군 정보장교로 복무를 했다고 한다.
  8.  영국 사병 Private Flanagan으로 등장을 하는 Sean Connery(숀 코네리), 특별한 연기는 아니었지만, 이 영화가 그에게는 007 James Bond로 가는 마지막 출연이 되었고, 그 이후 그는 100% James Bond가 되어 버렸다.

    영국측 군인 Sean Connery 숀 코네리

    영국측 군인 Sean Connery 숀 코네리

  9. Normandy의 상륙 해변 중의 하나인 Omaha Beach 상륙을 촬영할 때, 미군들 역할을 하던 extra(엑스트라)들이 시퍼런 물에 질려서 물 속으로 뛰어들지를 않았고, 이에 질려버린 Robert Mitchum (로버트 밋첨, Army General Norman Cota역)이 먼저 뛰어들고, 엑스트라들이 서서히 뛰어들었다고 한다.
  10. 총 제작비, $10,000,000(천만 불)은 1993년 이전(Steven SpielbergShindler’s List가 나올 때까지)의 흑백 영화로써는 제일 비싼 제작비였다. 그 동안의 inflation을 감안한다면 천만 불은 그 당시로써는 큰 돈이었다.
  11. 낙하산 특공대, paratrooper들이 낙하하던 때 숲과 습지에서 요란히 들리던 개구리 소리는 사실 프랑스에는 없는 개구리의 소리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미 녹음이 된 ‘미국 개구리’ 소리였던 것이다. 이런 것들은 사실 쪼잔한 것 들이지만 나중에 이렇게 이야기 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12. 미국 해군당국이 이 영화를 만드는데 전함과 상륙정 등으로 지원을 해 주었지만, 그 당시 ‘빌려준’ 함정들은 이미 1960년 이후의 것으로 1944년 당시의 함정들에 비하면 훨씬 현대적인 함정들이고, 자세히 관찰을 하면 쉽게 식별할 수 있다고 한다.

혼배성사, 삼위일체, 6.3 사태

¶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계절의 시계는 예측할 수도 없이 별로 쓸모가 없어지고 하루 하루의 날씨가 그날에 맞는 기후라고 생각하는 것이 편하게 되었다. 3월 중순에 섭씨 30도의 날씨가 일주일 계속되고, 4월 말에 거의 빙점의 날씨, 찌는 듯이 덥던 5월이 이제는 가을처럼 시원한 6월로 접어 들었으니.. 기상전문가들은 할 말이 있을까? 하지만 특별한 energy를 쓰지 않는 날씨는 언제든지 환영이다. 요새 며칠 같이..

 

¶  어제는 아주 오랜만에 결혼식에 둘이서 갔었다. 한인 순교자 성당 마리에타 1구역의 문요한 형제님, 지난번 레지오 마리애 꾸리아 단장을 역임하셨고, line dance mania group을 이끌고 있는 나이에 비해 정열적인 분.. 그분의 ‘장성한’ 아들이 성당에서 ‘혼배성사‘를 한 것이다.

우리 집 두 딸이 ‘요새의 이상한 문화’에 젖어서 결혼하는 것이 cool하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사실 결혼에 대한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마당에 이런 결혼식은 우리에게 참 신선하고, 참석하는 것이 즐겁게 느껴진다. 그곳에서 30여 년 전 우리의 결혼과 그때 만남의 의미를 생각할 기회가 되기도 했다. 특히 가족, 가정, ‘정상적인 결혼’ 등의 정의와 의미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는 요새, 그런 ‘정상적인 결혼’을 보는 것도 큰 ‘은총’이 아닐까? 

결혼식에 간 ‘부수입’으로 정말 오랜만에(1992년 이후 처음으로) 역사 깊은 본당 성가대의 솜씨를 느끼게 되었다. 나는 사실 새 성전이 지어진 후 처음으로 성전 앞쪽에 있는 성가대를 보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성전 뒤쪽에 있었다) 그 동안 우리세대는 완전히 뒤로 물러나고 더 젊은 세대가 들어왔지만, 그래도 약간은 아직도 우리들 세대인 듯 보였고, 특히 우리 자비의 모후 레지오 형제, 자매인 우요셉, 마리아 부부의 반가운 모습도보였다.

우리가 있을 때의 성가대와 다른 것은 중에는, 거의 ‘프로’에 가까운 audio system에 둘러 쌓여 있다는 것도 있었다. 우리가 주일 미사를 한국본당으로 ‘옮기게’되면 성가대에 ‘돌아와도 좋다’는 묵약은 있고, 이런 활동은 언제나 좋은 것이라 솔깃하긴 한데, 역시 오래 습관이 된 주일미사 의 고향을 바꾸는 것은 생각보다 정말 힘들다.

 

¶  오늘은 6월 3일, 일요일이다. 천주교 전례력으로는 삼위일체 대 축일로서 신학적으로도 신비로 여겨지는 Holy Trinity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날이기도 하다. 오래 전에 삼위일체 하면 고등학교 다닐 때, 영어 참고서로 ‘삼위일체 영어(문법, 해석, 작문)’ 라는 것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신학에서는, 성부,성자, 성령(예전에는 성신이라고 했다).. 사실 아직도 깊은 의미는 오리무중이다. 절대, 전능, 영원, 무한..의 절대자가 3위를 가졌다는 것은 성경에 ‘분명히’ 나온다. 성경을 믿으면 사실 그것도 믿어야 하니까 큰 문제는 없다.

사실 요새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은 ‘성령’이다. 하느님인 성부, 예수님인 성자..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성령, 그래서 Holy Spirit인가.. 신부님들의 강론을 잘 들어보면 성령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온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성령께 기도를 하란 말인가? 우리 순교자 본당 주임 하태수 신부님은, 기도할 때 성령의 도움을 받으라고 누누이 강조를 하신다. 그것도 알듯 모를 듯한 얘기지만, 전 보다는 훨씬 받아들임에 크게 문제가 없는 나를 발견한다. 성령만을 크게 강조하는 성령 세미나 같은 것도 있으니까, 그것의 중요함은 강조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  6월 3일.. 육 삼.. 하며 생각난 것6.3 사태란 것이 있었다. 4.19 같이 날짜에서 나온 무슨 큰 사건이 일어난 날을 말한다. 나는 오랫동안 이 6.3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확실히 어떤 해였는지 확실치 않았다. 1964년 아니면 1965년으로 기억은 했었다. 그날은 1960년 4.19 학생혁명 이후 가장 심각한 학생데모가 난 날이었다. 그것도 5.16 군사혁명 이후, 박정희의 ‘민간’ 정부가 출범한 이후, 처음으로 겪는 ‘비상사태’였다.

그 데모가 난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고 모든 학교가 휴교를 하게 되었는데, 나는 그 해를 1965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965년 내가 중앙고 3학년 여름방학 전에 학생데모로 인한 비상사태로 휴교를 했던 기억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억으로 오랜 세월을 살다가, 이번에는 확실히 ‘정답’을 찾으려고 그 당시의 일간지로 확인을 하게 되었다. 정답은 1965년이 아닌 1964년 6월 3일이었다. 1965년에 휴교를 한 것은 1964년 때와 다른 한일조약(국교 정상화) 반대 데모의 여파였던 것이다.

6.3 데모 주동자 김중태약간은 희미해진 1964년의 기억을 거스르며, 그 당시 신문을 보면서 (대) 학생데모로 이어지는 과정들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번도 역시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것이고, 그것도 4.19와는 다르게 서울 문리대 학생들이 중심에 있었다. 군사정권에서 박정희 민간정권으로 이어지면서, 서서히 쌓여가는 국민의 불만들을 대학생들이 다시 행동으로 보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 나는 고교 2학년이어서 사실 그 심각성이나, 의미를 잘 실감을 못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 그것도 일본 자본에 크게 의지하려는 것, 그것에 따른 한일회담 등이 굴욕적으로 보인 것, 일을 빨리 진행하려 중앙정보부를 섣불리 학원으로 투입하는 등, 사실 정책적인 실수가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박정권의 의도는 의외로 간단했을 것이다. ‘경제 자립’ 이었던 것이다. 그 괴로운 과도기를 혈기왕성했던 ‘서울 문리대’ 생들이 고분고분 참을 수 있었을까? 그들이 부르짖던 것은 ‘민족적 민주주의‘ 였고, 그것이 죽었다고 성토를 했다. 고려대학이 주축이 되어서 시작 되었던 4.19때와 달리 1964년에는 서울 문리대가 완전히 중심에 있었다 . 그래서 서울 문리대의 ‘용공성’ 물의까지 생겼을 것이다.

문리대 데모 주동자중의 하나인 ‘김중태‘ 는 사실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당시에 김중태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가열된 서울 문리대 주동의 데모가 6.3일에 서울 지역 대부분 대학으로 퍼지면 절정에 달하고, 그날 오후에 급기야, ‘비상계엄령’ 선포로 이르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일반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던 대학생들의 데모는 계엄령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비상계엄으로 치닫게 한 또 하나의 이유 중에는 대학생들의 구호가 심상치 않게 격해지고, ‘박정권 하야’ 까지 간 사실도 있었다. 민간정부 6개월 만에 당한 ‘정권위기’를 맞아, 박정희 정권은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정권은 이런 격한 대학생들의 반대에도 개의치 않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일본의 도움을’ 받아가며, 굴욕 외교의 모욕을 참아가며 밀어 부쳤다. 그리고 이후 그것은 하나의 중요한 역사가 되었다.

 

6.3 사태로 치닫는 대학생 데모

 당시의 신문보도, 6.3 사태로 치닫는 대학생 데모, 1964년

 

4.19이후 최대의 대학생 데모, 1964년 5월 말

서울 문리대 생들의 치열한 데모, 6.3 사태 1964년

 

6.3 사태 서울지역 비상계엄 선포

박정권은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5.16 이후 처음 맞는 비상계엄령, 1964년 6월 3일

 

 

가정교사 ‘교수 김인호’, 작가 박계형

규수작가 박계형의 저서, 1966년
1966년 규수작가 박계형씨의 책 광고

얼마 전에 1960년대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던 확실한 시기를 찾으려고 옛 신문을 인터넷으로 살피다가 (그의 방문은 1966년 11월 1일경이었다) 또, 정말 우연히 조그만 책 광고를 그곳에서 보게 되었다. 희미한 기억에 남았던 ‘규수 신인 작가, 박계형‘ 이었다. 그녀의 책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 의 광고였다.

그녀의 책들은 여성, 그것도 사춘기 소녀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그 당시에는 거의 뉴스거리였다. 다른 책, ‘젊음이 밤을 지날 때‘ 는 영화화 되었는데, ‘학생입장 절대불가‘ 라서 무엇인지도 모르고 고교생이던 우리들은 그저 침만 흘리던 그런 영화였다. 하지만, 그녀의 젊음, 문학성 등을 떠나서 나는 박계형이란 이름을 다시 보고 너무나 반가운 마음이 든 이유가 따로 있었다.

1965년 경, 내가 중앙고 3학년이 될 무렵에 나를 가르친 가정교사 대학생이 하나 있었다. 그 당시는 그저 형이라고 불릴 정도의 서울 상대생이었는데, 어머님의 동창 아줌마의 아들 이건우 형의 고교, 대학 동창이라고 했다.

그 형들은 서울 명문인 서울고교 동기동창이었고, 서울 상대도 같이 다니고 있었다. 그 형의 이름이 바로 김인호 였는데, 나중에 듣기에 유명한 여자 소설가와 연애하던 사이라고 했다. 사실은 그래서 박계형이란 이름을 기억을 한 것이다. 남자 고교생들이 그런 류의 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박계형 원작 영화, 젊음이.. 1964년 3월
1964년 3월 국도극장 개봉, 19세 박계형 원작영화

그 인호 형과 공부를 한 시간은 불과 몇 개월도 되지 않았지만, 참 기억에 남을 정도로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공부도 공부지만, 여담이 더 흥미롭고 유익한 것이 많았던 것이다. 상대생인데도 ‘과학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는지, 비록 ‘진짜인지, 허구인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첨단적’인 과학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 중에 3가지의 과학 이론은 나를 완전히 압도해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고 나의 친구들에게도 내가 발견이라도 한 듯 자랑스럽게 이야기 해 주기도 했다. 키도 훤칠하게 크고, 아주 호남형인 그 인호 형에게 ‘날리는 소설가 애인’ 이 있다고 들었을 때,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런 멋진 대학생에게 멋진 애인이 없다는 것이 상상이 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가정교사를 못 하겠다고 하고, 대신 다른 ‘서울고, 서울공대’ 동창을 소개시켜주고는 떠났다. 그 형이 바로 나의 다른 blog에서 회상을 했던 서울공대 섬유공학과 송부호 형이었다. 이것은 모두 어머님의 동창 아줌마의 아들인 건우 형이 도와준 덕이었는데, 그 형과도 어머님이 타계하신 이후 소식도 모르게 되었다. 아마도 인호 형, 그러니까 김인호 형과 연락이 닿게 된다면 혹시라도 이건우 형 댁의 소식도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있다.

그래서 박계형이란 이름으로 googling을 했더니, 역시 나의 짐작이 다 맞았다. 1969년에 결혼을 했다고 하고, 계속 ‘인기 작가’로 남았고, 김인호 형은 한양대학 교수로 2008년에 정년퇴임을 했고, 현재 70세에 가깝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의 출신고 서울고 13회 동창회에 가보면 정년퇴임식 사진들이 나오고, 47년 만에 다시 인호 형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비록 나이는 들었어도 그 뚜렷한 이목구비를 어찌 잊으랴.. 이 정도가 되면 김인호 ‘형’은 노력만 하면 다시 연락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고, 더 나아가서 그의 동창 친구 건우 형의 소식도 알게 되지 않을까? 사실은 그 서울고 동창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 건우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알아볼 길이 없다.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안 한다. 기대치를 최소로 유지하는 것이 ‘항상 현명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본 ‘공인’인 김인호 교수는 생각보다 더 유명한 경영학의 권위자였다. 그의 Dynamic Management가 무엇인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아마도 그만이 개발한 새로운 경영학 분야가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이것도 사실 크게 이상하지 않은 것이 나와 공부를 할 당시 ‘공상과학적 논리‘를 많이 폈던 그 형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또한 새로운 사실은 ‘아마도’ 두 분이 모두 천주교 교인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그들의 ‘이름에서 본’ 느낌이다. 인호 형의 이름에는 Stephen이 앞에 있고 (스테파노), 박계형씨의 이름에는 ‘아나스타시아‘ 란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반가운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생각을 한다.

비록 짧았던 인호 형과의 만남이었지만, ‘유명세’ 덕분에 다시 찾게 된 것은 아주 우연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한번의 기억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서서히 사라질 뿐이다. 이것은 물론 6.25 이후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미의회 고별연설에 나온 말이지만, 그 말을 이제야 실감을 한다. 한번의 인연과 추억은 ‘하루 아침에 죽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PostScript

Googling 결과, 다음과 같은 ‘인호 형’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빙산의 일각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나에게는 분에 넘치도록 만족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간략하게 요약, 정리를 하면 다음과 같다.

  1. 가장 최근의 것으로 2011년6월에 미국LA를 방문했던 김인호, 박계형 부부에 관한 기사가 있었다. 학회 참가 차(무슨 학회?) LA에 왔을 때, 박계형씨의 인터뷰에서, 씨는 2001년부터 그 전 20년간의 문필공백기를 깨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 그 중에서 ‘환희‘라는 작품은 번역이 되어서 서서히 bestseller로 오르고 있다고 전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아마도 젊은 시절, 인기절정 시절에서 결혼 후 ‘평범한 내조 주부’ 로 변신했고, 자식들이 다 성장한 이후 다시 문단 계로 복귀를 한 듯 싶었다. 그러니까, 그 주부 시절은 아마도 ‘대학교수 김인호’의 부인으로 살았을 것이다.
  2.  나의 큰 관심을 끌었던 소식은 5년 전, 2007년 6월 평화신문(가톨릭 매체)의 기사였다. 이기사는 위에 언급된 ‘번역’된 작품, ‘환희(A Life)’ 에 관한 비교적 상세한 배경을 밝힌다.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영문판으로 출판이 되고, bestseller 1위에 올랐다는 사실도 놀랍다. 하지만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씨의 신앙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평화신문이 가톨릭 신문이라 짐작은 갔지만, 이런 대작이 그녀의 신앙과 결부가 되어있다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녀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일 것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서, 일생의 동반자로 살아온 인호 형도 같은 level의 신앙을 지녀오지 않았을까? 그 옛날, 대학생 시절의 형이 가톨릭인지 아닌지 전혀 기억이 없다. 그 옛날 19세 ‘소녀’로 세간을 놀라게 한 ‘젊음이 밤을 지날 때’ 같은 ‘학생입장 불가’ 급의 책의 저자가 기나긴 여정 끝에 고향을 찾은 것일까?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다 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예수’라는 이름입니다.” 라는 씨의 말이 모든 것을 대변해 준다고 나는 믿는다.
  3.  제일 오래 된 씨의 기사는 10년 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58세였던 씨가 20년의 ‘잠적’에서 나온 때였던 모양이었다. 많은 우리또래의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라도 하듯이, 씨의 문단 등장시의 심경을 들려준다. 한마디로 “제 작품이 부끄러워서 숨고 싶었어요.” 라는 것이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19세의 ‘소녀적 꿈’으로 세상을 그렸던 것이 58세 뒤에 어떻게 보였겠는가? 나는 부끄럽기보다는, 내가 많이 성숙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인터뷰에서 나에게 더 유익한 것을 알게 되 것 중에는, 1969년에 인호 형과 결혼을 했다는 사실, 본명이 ‘박숙자‘ 라는 너무나 평범한 이름이라는 등..

오월이여, 안녕!

¶  오월이여 안녕!   한 달이 온통 ‘가정, 가족, 졸업식, 어린이, 어머니, 성모님‘ 같은 정말 듣기만 해도 포근한 것으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의 어머님께서 9년 전에 선종하셨던 달이기도 해서 가족과 삶 그리고 인생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던 그런 한 달이기도 했다.

비록 거의 기정사실화 된 기후변동(a.k.a global warming)으로 예전의 6월 같은 날씨들이었지만, 그것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특히 요새는 ‘날씨’에 둔감해 지려고 거의 ‘일부러’ 날씨에 관한 작은 뉴스는 피하고 있고, 그것이 ‘확실히’ 심리적으로 나를 편안하게 함을 느낀다. 더우면 어떻게 추우면 어떠랴.. 참거나, 잊고 살면 되는 것을.. 또한 작년에 비하면 날씨에 관한 big news는 ‘거의’ 없을 정도로 조용하긴 했다. 작년의 그 ‘monster‘ tornado등을 아직도 기억하기에 더욱 그렇다.

 

¶   Robin Gibb  5월 20일에, 오래 전 60/70시절 우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Bee Gees [BGs: Brothers of Gibbs] 형제의 중간인, Robin Gibb이 암 투병 중 합병증으로 결국은 62세란 요새 기준으로 보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을 한 것이다. 그 그룹의 세 형제 말고도 아주 오래 전에 네 번째, ‘막내 동생’ Andy는 이미 (여자문제로)사망을 했고, 2000년대 초에는 세 번째 Maurice도 병으로 사망.. 이제 맏형 Barry만 남은 것이다.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심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들과 같은 ‘예술인’들은 영원히 뒤에 남기고 떠나는 것들이 있어서 부럽기도 하다. 나에게 그들이 남긴 것 중에는 60년대의 것이 ‘진짜’의 걸작이라고 생각하고, 70년대의 ‘disco 외도’는 잊고 싶은 것들 뿐이다. 최근 몇 주간 지저분한 소식들 투성이였던 모든 news (Internet, TV etc)를 피하며 지내는 바람이 그가 운명한 소식을 이제야 알게 되어서,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또한 우리 세대의 인물들이 이렇게 하나 둘씩 가고 있음을 어찌 모르랴.

 

 
Run To MeBee Gees – 1972

 

1984 model Kenmore washer¶  공돌이의 오기惡氣  얼마 전에 우리 집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던 세탁기(electric washer)가 말썽을 부렸다. 빨래를 할 때마다 ‘지독히도’ 요동을 치면서 그동안 아주 조금씩 새던 물이 이제는 ‘콸콸’ 샌 것이다. 공구들을 손에서 놓고 산 것이 꽤 오래 되어서 (거의 1년) 사실 이런 ‘사고’는 너무나 귀찮게 느껴졌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세 가지 뿐이다. (1) 나보다 ‘더 바보 같은’ handyman을 불러서 고치게 하던가, (2)고칠 수 없으면 새것을 사던가, 아니면 (3) 내가 팔을 걷어 붙이던가. 1번 선택은 나에게는 거의 절대로 no no인 것이다. 대부분이 ‘엉터리, 사기꾼’ 같은 놈들 뿐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언가 잘 모르는 바보들 뿐이기 때문이다. 2번의 선택도 가급적 끝까지 피하고 싶은 것이다. 돈을 쓰는 것 이외에, 멀쩡할 수도 있는 세탁기를 분명히 내다 버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에게 choice는 역시 내가 팔을 걷고 muscle과 brain을 써야 하는 수 밖에 없다.

Washer power-train still in good orders우리의 washer는 1984년에 Columbus, Ohio에서 학생시절에 Sears에서 산 Kenmore classic model인데, 한마디로 완전한 ‘탱크’와 같이 우직하게도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절대로 고장이 날 것처럼 보이지 않는’ 그런 모양이고, 사실 거의 30년 가깝게 딱 한번 timer/controller 만 교체를 한 것으로 나머지 기계적으로는 거의 완벽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이제 정까지 들게 된 우리 집의 ‘값싼 가보’가 된 존재인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나는 비장한 각오로 이것을 살려 보기로 하고 ‘공돌이의 오기’로 분해를 해서 살펴 보았다. 결과적으로 나의 추측이 맞았다. 크게 ‘망가진 것’이 하나도 없고, 모든 나사 같은 것이 모조리 풀어져서 물이 샌 것이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Washing cycle중에서 가끔 balance가 맞지 않으면 격하게 요동을 하기 때문이고 그렇게 아주 오랜 세월을 보냈으니, 그 fastener들이 모조리 풀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을까?

이렇게 해서 30년에 가까운 이 세탁기는 안락사 직전에 다시 한번 생명을 연장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딱 한가지다. 이것이 심하게 vibration을 못하게 ‘꼭 잡아주는’ 장치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만 되면 앞으로 최소한 몇 년은 쓸 수 있지 않을까? 참, Sears Kenmore people들, 어쩌면 그 당시 이렇게 잘 만들었을까? 이것이야말로 Made in U.S.A의 표본이다.

 

¶   Vice Presidency  미국의 부통령 직, 어떤 자리일까? 이것의 정의와 의미를 따지자면 책 몇 권 가지고도 부족할 것이다. 그만큼 독특한 위치이기 때문일까? 역사적으로도 그것이 증명이 된다.

Robert Caro
Robert Caro

얼마 전에 Time 잡지에 Robert Caro라는 LBJ(Lyndon B Johnson) biographer(전기작가)의 말이 등장했다. 그는 일생을 1960년대 미국 정계를 주름잡았던 부통령, 대통령 Lyndon B. Johnson의 연구로 보낸 인물이다.  ‘사고’1로 부통령에서 대통령이 되고, 다시 한번 선거로 한번 대통령을 하고 스스로 물러나 난 전설적인 Johnson 대통령, 비록 월남전에서 고전했지만, 국내 정치는 빛나는 업적이 수도 없이 많은 인물이다.

1965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그를 기억한다. 수많은 ‘오해’를 받았지만 묵묵하게 하나하나 성과에 성과를 쌓고 조용히 물러난 것, 참 멋지다. 그 인간상을 연구했던 Robert Caro의 한마디가 참 인상적이다. 지난번 선거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John McCain이 그의 running mate로 완전한 ‘들러리 간판’격이었던 Sarah Palin이란 ‘바보 같은 여자’를 선택한 것에 대한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 역사상 가장 무책임한 선택‘이었다고 했다. 나도 절대로 동감이다. 그런데 더욱 웃기는 것은 McCain자신은 ‘아직도’ 그 선택이 자기 일생에서 가장 ‘멋지고, 신중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나의 radar에서 McCain이란 인물은 완전히 사라졌다.

  1. 1962년 달라스에서의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

Banner in the Sky, 알프스의 ‘푸른’ 깃발

Banner in the Sky
50년만에 다시 보는 책

어렸을 적에 읽었던 책들 중에 학교나 입시공부와 관련이 거의 없이, 그저 교양, 호기심에 의지해서 접했던 것들.. 사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그런 ‘보물’들이 더 기억이 나고, 꿈에서라도 그 ‘실물’을 다시 만져보고 싶을 때도 있다. 지금 생각하니 그런 것들도 ‘골동품’ 류의 가치에 포함될 듯 싶고, 왜 그렇게 ‘오래 된’ 것들이 비쌀 수 있었을까 하던 의문들이 조금씩 풀린다. 내가 말하는 개인 적인 골동품은 사실 불과 50년도 채 안 되는 것들인데도 나에게는 수백 년도 넘게 느껴지기도 하니 분명히 그런 것들은 개인적인 골동품, 고서, 유물에 속한다.

그런 ‘유물’들 중에, 1964년 경, 그러니까 나의 중앙고교 2학년 시절.. 50년 가까이 되던 오랜 옛날에 읽었던 책을 다시 접하게 되었다. 내가 서울 용산구 남영동 금성극장 앞쪽, 미8군 ‘연병장’옆 있던, 남산이 가까이 바로 앞에 보이던 2층집에서 살 때였다. 가회동 시절 삼청동 뒷산, 말바위, 북악산, 중앙중학교 뒤의 계산 등에서 놀았던 것과, 친구들과 남산을 오른 것 등이 그때까지 나의 등산경력의 전부였던 때, 이 ‘멋지고, 영웅 적인 산’ 에 관한 책, Banner in the Sky를 읽게 된 것이다. 당시 번역본 제목은 ‘알프스의 붉은 깃발‘ 이었을 것인데, 나는 그 오랜 동안 ‘알프스의 푸른 깃발’로 ‘잘 못’ 기억하고 살았다.

Mt. Matterhorn, Switzerland
스위스 시타델, 매터호른 산

이 책의 저자는 James Ramsey Ullman(1907~1971)이라는 미국, 뉴욕의 언론인 출신, 등산애호가였던 사람이다. 주로 산에 관한 소설 책을 많이 썼는데, 그 중에 이 책은 1955년에 출판 된 것이다. 1963년에 그는 미국의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등정대의 official historian (공식적인 기록자)으로 참가했지만 건강상 이유로 산에 오르지는 못했다. 이 책의 배경과 등장인물들은 물론 ‘가공’이지만 실제적 역사적인 사실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시대적으로 19세기 중반, 스위스 알프스 중의 삼각형 모양의 Matterhorn 산이 이 책의 Citadel (시타델) 산이고, 그 것을 처음 등반한 인물인 영국사람도 이 책에 등장하는 Captain Winter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거의 50년이 지난 뒤에 과연 어떤 기억이 살아 남았을까? 10대의 소년이 아버지의 ‘원한을 풀려고’ 유럽에서 가장 어려운 산 시타델(Citadel)을 정복하는데 ‘일조’를 한다는 이야기.. 그가 살던 마을에서 제일 유능했던 mountain guide였던 그의 아버지는 ‘손님’ 인 등반자와 그 처녀 봉을 시도했으나 사고로 조난을 당하고 자기가 입었던 빨간 셔츠를 벗어서 손님 등반자를 보호하며 죽었고, 그것은 거의 전설처럼 남았고 그때 태어난 주인공 루디가 커서 아버지의 못 다한 소원을 채워준다는, 조금은 ‘고전적’인 이야기였다.  물론 자세히 읽어보면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plot들이 많이 있다.

그 당시 한글 번역판으로 나온 것을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고, 산의 신비로움에 대한 나의 생각이 조금씩 자리잡게도 되었다. 당시 나의 공부를 돌봐주며 우리 집에서 잠시 같이 살았던 아르바이트 대학생 용기 형도 그 책을 재미있게 읽게 되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용기 형과 나의 친구 안명성이 같이서 그 해 추운 겨울날, 난생 처음으로 북한산, 백운대로 등산을 가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등산 역사의 시작이 될 줄은 몇 년 후까지도 실감을 못했다. 생각해 보니 그때부터 시작되어 미국에 오기 전까지 거의 10년 간 나의 ‘뜨거운 등산 경험들’은 사실 그 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Disney movie, Third man on the Mountain
디즈니 영화, ‘산의 제 3의 사나이’

그리고 그 책을 완전히 잊고 살다가, 1980~1990년대에(아마도 1980년대 말) 아주 ‘우연히’ TV에서 Disney movie를 보게 되었는데, 등산에 관한 영화였다. 사실 미국에 살면서 거의 ‘등산’이란 것을 잊으며 살았고, 또한 등산에 관한 영화도 드문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무언가 어디에선가 본 듯한 story였고, 곧 바로 이 책을 기억해 내었다. 바로 그 책의 내용과 비슷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 책의 영어제목을 모른 다는 사실이라 더 이상 그 책을 ‘구입’할 수가 없었다. 그때는 물론 B.I. (Before Internet) 시절이라 Googling같은 것은 상상도 못할 때여서 곧바로 포기를 했던 것이다. 그 Disney movie도 두 편으로 나누어 방영을 했는데 후편은 볼 수가 없어서 아쉽기만 했다. 그리고 또 잊었다.

몇 개월 전에, 또.. 우연히 그 책이 나에게 다가왔다. 운명인가.. 큰 딸 새로니가 이번 여름에 ‘아르바이트’로 ‘책 읽기’ 강사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책이 교재로 선택되어서 집에 가지고 왔는데, 그 때 처음으로 영어 ‘원서’를 실제로 보게 된 것이다. Paperback의 작은 책이었고, 생각보다 조금은 ‘볼품이’ 없었다. 이제 원래의 책이 있고 제목도 있으니, 다음은 Googling이 모든 궁금증을 풀어주게 되었다. 우선 그 책의 story로 만든 Disney영화를 찾았다. 제목은 Third man on the Mountain이었다. 다행히 DVD로 나온 것이 있어서 곧 바로 구입을 해서 오랜 전에 TV에서 ‘전 편’ 만 보았던 것의 전체를 보게 되었다. Paperback으로 된 책은 비교적 분량이 적은 것이라 며칠 만에 읽어보게 되었다. 모든 story들이 살아났는데, 내가  어렴풋이 기억한 것들이 거의 모두 맞았다. 나의 기억력은 크게 나빠진 것이 아니었다. 특히 bad guy character로 나오는 mountain guide의 이름, 쌕소(Saxo)를 나는 기억을 해 냈다. 이렇게 해서 또 하나의 nostalgic mystery가 풀리게 되었다. 참.. 오래 살고 볼 것이다.

오월은 푸르고나~

¶  어린이날 유감   달려라, 냇물아~ 오월은 푸르고나~ 반세기전 어린이날이면 목청이 터져라 신나게 부르던 어린이날 노래, 참으로 (19)50년대의 어린이날은 신바람 나던 하루였다. 실제로 그날 집안에서도 학교에서도 ‘물질적인 대우’를 받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날을 만든 방정환 선생님께 마음 속으로 감사하고 감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어린이날이란 것도 역시 ‘표절’ 이었다. 일본 아해들 것을 그대로 날짜도 똑같이… . 서슬이 푸르게 벤또, 구루마, 도라무 깡 같은 일본 말을 금시 시키고, 화강암 중앙청(일제 강점 때의 조선총독부 건물)을 헐어버리면서, 어떻게 날짜도 똑같은 일본의 어린이날은 그대로 두었을까? 혹시 아니면 방정환 선생의 5월 5일 어린이날을 우리가 먼저 만들고, 일본 아해들이 나중에 표절을 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동양에서 제일먼저 개화를 한 그들이 먼저 만들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일년에 하루를 ‘어린이 전용’의 날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지 않을지.

 

¶  푸르고, 따뜻한 어머님 같은 5월 인가, 온통 포근한 어머님의 손끝과 숨결을 느끼고 싶은 그런 달이 바로 5월이다. 날씨 또한 가족과 가정이란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기에 어울리는 화창하고, 포근하고, 때로는 비에 젖는 잔잔함과 외로움까지 멋지게 조화를 이루어준다.

가톨릭의 삶을 다시 살게 되면서 5월은 또한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님(마리아)의 달, 그러니까 ‘성모성월’ 임을 느낀다. 또한 나의 그립고 사랑하는 어머님의 기일도 5월이어서 불효자로서 감정적으로 거의 주체하기 힘들 때도 있다. 나는 ‘가장’ 아버지의 기억이 전혀 없고 (6.25때 납북) 따라서 어머니란 존재는 나의 생명, 가족의 생명이나 다름이 없었다. 전쟁 후의 험난한 세상에서 만약에 어머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친척이 거의 없었던 우리 집 남매는 하루아침에 길거리의 고아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육이오 전쟁 후에 가장, 아버지를 잃은 집이 부지기수로 많았고, 그래서 아버지가 있던 집은 우선 행복한 가정이었다지만 그에 못지않게 절대다수 홀 어머니들의 가족에 대한 희생과 헌신은 지금 생각하면 상상을 초월한, 전설적이고 초인적인 것이었다. 최소한 우리 세대는 ‘절대로’ 그 고귀한 사랑, 헌신, 희생의 역사를 잊지 못하고 또한 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조금 접으면 갑자기 싸늘한 현세의 현실로 돌아온다. 요새의 부모님들, 특히 ‘엄마’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또한 그들의 자식들은 어떤 인간들인가.. 부모들은 자식들을 예전처럼 별로 보살피는 것 같지도 않고, 자식들 역시 부모 세대를 우습게 보는 것이 거의 전염병같이 cool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도대체 요새의 이상적인 부모와 자식의 모습은 무엇인가? 돈 많은 부모, 돈 잘 버는 자식인가?

 

 
1950년대 ‘국민학교’시절의 동요, 어머님 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