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Humanity, Art of Ignoring, VHS drama, James Martin

어젯밤에 일기예보를 못 본 탓에 침실 ceiling fan 을 켜고 잔 탓에 밤새 추위에 떨었던 불편한 기억이었다. 왜 이렇게 춥지… 하며 몸을 온통 오그리고 잔 것이다. 급기야 긴 팔, 긴 바지, 양말까지 신고 내려오는 나의 꼴이…. 죄값을 받은 셈인가? 어제 저녁 잠깐 office에서 눈을 붙인 것이 기도도 팽개치고 그대로 밤잠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것은 정말 오랜만에 저지른 나의 ‘작은 쾌감’ 같은 것, 아주 후회는 안 한다. 하고 싶었기에…  덕분에 싸늘한 6월 말 아침의 ‘습격’을 받은 셈이다. 연숙에게 조금 미안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다. 어제는 저녁기도를 했어야 했는데….

 

AFTER HUMANITY: A Guide to C.S. Lewis’s  The Abolition of Man,  $30 well spent? I hope so!

아침에 온 WOF (Word on Fire, a catholic ministry) email, Bishop Barron의 promotional video를 보고 ‘그대로’ order를 해 버렸다. 이 책은 사실 Lewis의 ‘어렵게 보이는’ 책, The Abolition of Man의 깊고 자세한 주해서 격에 해당하는 듯 보인다. 보너스로 원저 The Abolition of Man도 포함되었다니… 너무나 매력적인 deal이 아닌가? 나의 Lewis에 대한 늦은 관심과 사랑을 떠나서 이 책의 외형적인 조건들이 이 책을 사게 만들었다. 현재의 Post-Truth 현실과, 미학적 관점을 가미한 Barron의 영향을 느끼고 싶기도 했다. 이 책을 내가 깊이 이해하게 되리라는 막연하지만 멋진 희망도 빼놓을 수 없다. 희망을 걸어보자!

 

Art of Ignoring: 내가 필요한 ‘사회적 기술’이 바로 이것임을 왜 이렇게 인생의 후반부에 깨달아야만 했을까? 하지만 지금이라도 안 것을 다행으로 여기자. 큰 것, 작은 것, 개인적인 것, 세계, 사회, 정치 상황 모두에 해당하는 ‘기술, 예술’이다. 무시하는 지혜,…  집에서부터 무한한 우주영역에까지… 해당이 안 되는 곳이 없다. 연숙의 ‘앙앙거리는’ 의미 없는 듯 들리는 잔소리부터 시작해서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우주의 기하학적 구조까지… 어떤 것들은 거의 무시하는 것이 안전하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하지만 어떻게 촉감을 초월해서 무시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것인가? 불교의 냄새를 풍겨야 할 것인가? 요새를 사는 나의 화두 중에 하나가 되었다.

 

80년대 VHS era, KBS [청소년 문학관] 시리즈: 비록 10편도 안 되는 것이지만 더운 초여름에 나를 너무나 아련~하고, 편하게 하는 영상과 이야기들이다.  어떤 것들은 아련한 사랑의 감정을 추억하게 해 주는 것이어서 정말 오랜만에 10대 당시 나의 모습을 그린다.  겁 많고 지나치게 수줍어 했지만 나만의 낭만적인 상상도 적지 않았던 시절들.  이 드라마들 중에는 ‘입시지옥’에 연관된 이야기들이 꽤 있는데, 우리 때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심각한 것들이라서 현실감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충분히 이해는 하고도 남는다.  지금은 ‘산사에서’ 라는 것을 보는데… 아늑한 산사, 절의 풍경과 입시지옥을 겪는 고교생, 재수생들의 이야기…  대학입시의 중요성이 극한으로 치솟은 고국의 10대들이 불쌍하기도 하다. 이것이 거의 반세기 후에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을 보고 나는 정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요새 80년대의 여러 가지 종류의 고국의 TV 프로, 주로 드라마, 이것들을 보며 간혹 나는 고민에 빠진다. 좋아하는 것보다 거슬리는 것, 특히 연기자들과 그의 역할, 성품 등에 연관된 것이다.  역할이 악역이거나 내가 싫어하는 전형적인 역할은 물론 연기에 따라서 싫고 혐오하기까지 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지만, 문제는 그 연기자 자신에 관한 것이다. ‘악역’을 너무나 실감나게 연기해서 그런 것이지만 그 사람자체에서 흘러나오는 그 연기자의 ‘화학적’ 성품이다. 최근의 예로, 미안하지만 남자 연기자 둘 ‘주X’과 ‘백일X’ case다. 이들의 사생활을 알기 전부터도 별로 호감이 안 가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싫은 것이다. 연기 속의 그들이 아닌 실생활에서도 보일 듯한 그들의 모습이다. 특히 주X이라는 사람, 정말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정도로 그 ‘느글, 느물거리는 자태’는 물론이고, 그가 실제로 그런 인물일까 하는 의심까지 든다. 백일X, 그도 역시 ‘기름기가 밴 폭력성’이 나를 도망가게 만든다. 그의 사생활도 나중에 연숙을 통해서 들었기에 나의 유감은 맞은 셈이다. 이 두 사람의 ‘냄새’ 를 나는 정말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어쩔 것인가? 우문[현답]인가?

고국의 VHS급의 영상물을 보다가 서서히 90년대 혹은 2000년대로 옮아오며 나는 주저하고 주저한다. 우선 배경 scene들이 너무나 나에게 생소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거북한데… 사실 웃기는 것 아닌가? 나는 그 당시에 가끔 그런 것들에 이미 익숙해졌던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왜… 그렇구나, 내가 우리 고향의 변화, 변천하던 모습을 거의 고의적으로 잊으며 살았던 것에 대한 죗값이라고 할까? 내가 너무나 이런 것에 민감한 것일까? 왜 남들처럼 무덤덤하게 못 받아들이는 것일까?  그래도 나는 노력할 것이다. 서서히 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로 올라오며 공부하고 익숙해질 것이다.

 

Reese’s,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가? 나를 유혹하는 것이 점점 줄어드는 나이에 이것은 예외가 아닐지? 어제 이것을 무려 6개나 입에 넣고 나서 계속해서 죄책감을 느낀다. 나이의 신호인 ‘당뇨병’이란 말이 귀에서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당뇨의 원인이 Reese’s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영양적인 것은 아닐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시간당 적당한 개수는 몇 개일까? 웃기는 생각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요즈음은 솔직히 말해서 사치적인 순간들이다. 즐기고 감사하면 된다. 아~ Reese’s야, 지금도 거의 손이 그곳으로 가며 2개를 먹을 준비가 되어있다.

 

‘나의 멘토 나의 성인’ 중 루르드의 베르나데트 라고 쓰인 벨라뎃다 편을 신들리듯 읽고 쓴다. 내용은 거의 이미 아는 것들이지만 이 신부님의 묘사, 글은 정말 engaging한 것이어서 실감이 100 % 난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그가 했던 성지순례일기였다. 아~ 이제 우리도 이곳을 가볼 수 있을 것인가? 솔직히 실감은 아직 가지를 않지만 그래도 꿈과 희망은 나를 정말 행복하게 한다. 건강할 때, 걸을 수 있을 때, 여행을 갈 수 있을 때…

신명 들린 듯, 마술에 빠진 듯 읽으며 필사를 ‘즐긴다’. James Martin신부의 문장, 글의 스타일 때문일까, 아니면 내용에 무엇이 있는가? 지금 루르드의 벨라뎃따, 순례기를 읽고 있는데, 생각한다. 이곳을 가게 되면서 혹시 우리들… 앞으로 꼭 봐야 할 유명한 곳 보다는 세계에 널려 있는 성지를 가급적 많이 가보고 싶다는 어린애 같은 소망이 떠오른다. 나답지 않은 것이, 예전에 나는 그렇게 성지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Martin신부의 글을 읽으며 서서히 그런 생각이,  ‘꼭 가보고 싶다’ 라는 희망적인 염원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러려면 어떻게 앞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목표가 서서히 안개 속에서 나타나는 듯 느껴지는 날이 되었다.

기록적인 속도로 베르나데트 성녀 편을 끝냈다. 그러니까 하루 만에 거의 30 페이지를 질주한 것이다. 역시 내용이 큰 관건이다. 너무나 몰입하며 즐겁게 읽게 되니까 이렇게 빠르게 독파한 것이다. 다음 편은 여러 선택의 여지가 있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를 택했다. 이것은 Word on Fire Bishop Barron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신학대전 Summa…’, 신학의 정수를 정리한 분이니… 이것으로 나는  apologetic의 한 곳을 또 건드린다.

 

이슬비도 안 되는 물기가 가득 찬 하늘을 보며 로난을 데리고 걸었다. 햇살은 없지만 대신 습기가 땀을 배게 한다. 아직도 나는 로난과 가는 것이 힘들지 않다. 숨도 고르고 다리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언제까지? 연숙은 요새 걷는 것조차 부담이 되는 듯 보인다. 나와 보조를 맞추며 살아가야 할 텐데…  Toddler, 아이를 보는 것 baby-sitting, 힘든 것인가 아니면 할만한 것인가? 지금은 새로 찾은 Dave&Ava [3D animation, 최근의 video technology의 위력을 보여주는 예] 라는 아이들 video를 Youtube에서 보게 하는 것이 무척 많이 도와주고 있지만 그것 이외는 diaper 갈아주는 것, 많을 때는 3번씩이나 하고 나면 정말 나도 늘어진다. 책이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 정도가 되면 조금 더 쉬워지지 않을까… 힘은 들어도 이러면서 서로 skinship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은 좋은 것 경험이 아닐까. 아직도 손주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이런 일들’, 그래 기왕 하게 된 것 편하고 즐겁게 하도록 노력하자… 그것이 노년에 최선을 다해 사는  한 방법이다.

 

하지가 지났다는 것이 조금 실감이 안 간다. 날씨 때문에 해의 동향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관심이 덜 했던 것인가? 설상가상으로 나의 방에 있는 wifi light controller에 문제가 생겨서 ‘일년 중 제일 늦게 저녁불이 들어오는’ 것을 목격을 못 했기 때문이다. 좌우지간, 이제부터는… 저녁때의 불이 조금씩 빨리 들어올 것만 알면 되고… 아~ 진짜 여름의 시작이고… 4개월만 지나면 ‘황금색’의 세상이 올 것을 기대하며…

6월의 하순, 24일의 요한세례자 ‘영명축일’과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이 머리에 떠오른다. 6월 25일은 나의 아버님이 빨갱이들에 의해서 끌려가신 모습이 떠오르고… 이렇게 하면 6월도 저문다. 그리고… 그리고… 기다리는 것, 계속 기다리는 것…

요사이 너무나 시원한 초여름의 날씨, 특히 뒤뜰의 초록색의 향연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감사합니다~  소리가 나온다. 연숙이 참으로 애를 쓰며 만들고 있는 이것, 아마도 우리 집의 보물이 될 지도 모른다. 그래, 열심히 사는 날까지 가꾸고 보살피고 사랑하자.

 

 President Biden의 사랑하는 pet dog Champ가 집에서 편하게 영원한 잠을 자게 되었다는 소식. 날짜가 6월 19일, 우리Tobey가 3년 전에 저 세상으로 간  같은 날? 아~ 우연인가? 게다가 나이가 13살? 이것도 거의 비슷한가?  그렇구나… 비슷하다. 그래 우리 Tobey도 집에서 나의 손에 안겨서 떠났으니까… 거의 비슷한 상황이다. 이 뉴스가 national news에 날 정도니까, 얼마나 미국인들의 pet dog, cat 에 대한 사랑이 깊은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그런지.. 바이든이 더 좋아진다 [모르긴 몰라도 Donald 개XX 는 pet dog이 있어다면 수시로 발로 걷어차며 열을 내고, 화를 풀었을 듯하다].

 

오랜 세월 동안 손에 들어온 고국의 시사 월간지들, 특히 신동아, 월간 조선, 중앙 등… 이제는 추억의 잡지로 곰팡이가 쓸고 있지만, 나에게는 기나긴 고향을 잊고 살았던 기간을 회복할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유물이 될 수도 있다. 1970년대 2권, 1980년대 21권, 1990년대 7권, 2000년대 1권… 이것으로 얼마나 나는 과거의 대한민국을 공부할 수 있을까? 노력을 한번 해 보자!

 

올해 Father’s Day, 받는 것만큼  나도 협조를 한 셈인가?  조그만 가족들이 모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으로 이날의 의미는 살렸으니까… 하지만 조금은 피곤하기도 하다. 나는 사실 이런 날, 기념일, 방학, 휴가, 명절, 휴일 등등,  혼자 있고 싶은 때도 있지만 나만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고, 나의 속마음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이세상에 아마도 나의 볼래야 볼 수도 없는 어머님밖에는 없을 듯하다.  하지만 나의 생각만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사회적 인간이 아닌가? 머리로는 알지만 그래도 나는 속으로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좋아하는 존재가 한 명이라도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Father’s Day 모임 자체는 솔직히 말하면 모이는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피곤한 행사이기도 했다. 나는 별로 즐겁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문제가 거의 전부일 수도 있지만 별 수가 없었다. 별로 즐겁지 않았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 그런 때도 있는 거지…

Father’s Day grill out by Father

 

이영석 신부와의 카톡 대화로 8월 경에 이임, 귀국을 하신다는 것은 짐작했다. 6월 말까지 떠난다는 소문으로 아마도 새로 오시는 주임신부님이 그날까지 못 오시는 듯하고 아마도 8월 경쯤 visa가 된 것은 아닐까? 좌우지간, 8월 전까지는 새로운 신부가? 와~ 아찔해진다. 물론 좋은 사제가 올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윗동네’ 주임신부 같은 ‘피하고 싶은’ 사제가 오는 날이면? 와~ 이것도 조금은 도전이고 시련일 수도 있다. 이임 소식을 아직도 생각하고 정리를 하고 있다. 물론 나에게,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것이고 그것은 우리 성당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내년까지는 이런 생각을 안 하고 살려고 했는데 어떻게 이런 부담을 주는 것인지? 어떤 목자가 출현하느냐 그것이 우리의 눈 앞에 있는 생의 마지막 순례길을 크게 결정, 좌우할 듯하기 때문이다. 나의 너무 지나친 생각일까, 두고 보면 알게 될 것이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혹시 신부님,  ‘몸이 아프신가..’ 하는 추측 성 말들을 하게 되었다. 아니면 가족 사정, 특히 그들의 건강상태.. 등으로 관심이 넘어가면서,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닐 듯 보인다. 그러면 나쁜 것 아닌가?  문제는 timing이다. 왜 지금인가? 시간이 지나면 알려질 터이지만 궁금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더 좋은 신부님이 오신다는 hint를 주셨지만 그것이 전부다.

First of May, Ah… Marian Month…

원서동 죽마고우들, 또 일 년이 흘렀구나..

 

오늘이 5월 1일 임을 안다. 뚜루루 뚜루루 뚜루루루루루~~  Bee Gees 의 추억 어린 화음이 용현이와 창희, 그리고 지리산 흑백영상과 겹친다. 1977년의 반세기 전의 모습과 풍물, 시대와 함께… 나는 또 ‘이제 우리의 세월은 다 흘러갔다’ 라고 또 중얼거린다. 언제까지 나는 이렇게 숨을 쉬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오늘 아침 평화방송 매일미사에서 “아차! 어떻게 이런 일이!” 의 moment를 맞는다. 5월1일 May Day의 이름이 떠오르면 곧바로 ‘창희와 용현이’  Friends Forever~ 의 생각만 했지 정작 ‘성모성월’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Marian Month of May! 성모님, 저를 용서해주세요… 어머니 날만 생각했지 우리 성모님 생각은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 찬란한 5월은 성모님의 달, 하기야 이것은 이제 완전한 나의 삶의 일부가 되었기에 5월이라고 특별한 것이 아니라서 그랬을 것이라고 조금은 자위를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5월, 5월, 성모성월, 성모의 밤… 참 포근한 추억들이었지… 성모님, 감사합니다, 저의 [제2의] 어머니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Pandemic 이전 거의 매일 하던 ‘아침외출 drive’를 하게 되었다.  무너지고 있는 에어컨 condenser pad를 고치려고 [pouring new concrete]  Quickcrete 를 사러 Home Depot에 같이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런 기회에 아침을 밖에서 아마도 McDonald’s 에서 먹는 것은 어떨까? 그러면 더욱 2020년 이전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아침 동네성당에서 매일미사가 끝나면 fast foods를 가끔 즐기던 우리의 모습들이 그립다. 하지만 그 때는 나름대로 고통, 입안의 고통이 나를 괴롭히기도 했었지, 지금은 최소한 그 독특한 아픔은 사라졌다. 음식의 독특한 맛을 조금 잃어버렸지만…

 

Two Husbands? 갑자기 잠에서 깬 느낌이 들었다. NBC weekend morning Show에 말쑥한 남자, Transportation Secretary Pete B.[Last Name조차 느낌이 이상한] 가 열차 안에서 인터뷰를 하는 모습, 그는 Biden의 ‘Ultra’ infrastructure spending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 mega plan은 나도 전적으로 동감이 가는 것이다. 하지만 interview의 마지막 부분, 그의 ‘husband’ 의 모습이 왜 그곳에 나오는 것일까? 그 남자의 남편이라… Gay couple인 것인데 그렇다면 그는 wife라도 되었다는 말인가?  나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아~~아~~~신음소리’가 나옴을 느낀다. 어떻게 이런 Sodomy 세상이 ‘개화의 이름’으로 초현대에 왔을까?  하지만 잊지 말자, 그것이 세상사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만… [나는 bible에 의한 것이 아니고, 나의 깊숙한 신념에 의한 것만 기록하면 된다]

 

‘필사, 필사, 필사 [mechanical] typewriter 소리, typing keyboarding..’ 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지나간 수 년간은 나는 ‘심심하면’ 이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 옛날 처음 mainframe computer가 나왔을 때 scientists, engineers들이 ‘심심하면’ 이것을 가지고 [typing이 아니고] toying하며 시간을 보낸 사실을 기억한다. 그것도 좋지만 typing그 자체는 나를 신선하게 하고 젊은 느낌을 준다. 나만의 독특한 생각일까? 타이핑하는 목적,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행위자체를 나는 너무나 사랑한다. 요새는 갑자기 그것을 할 상대가 하나하나씩 사라져간다. 무엇을 필사할까? 이럴 때마다 나는 대한민국의, 출판사 이름도 거창한 ‘바오로의 딸’들의 수녀들이 미워지고 싫어진다… 생각의 안목이 너무나 좁고, 짧은 ‘신앙적 출판인들’의 바보스러움을 한탄한다. 이 바보 수녀들아, 조금 더 높고 넓은 숲, 산, 하늘, 은하계를 보며 사세요!

 

거창하게 James Martin 의 ‘두꺼운’ 책과 reader [James Martin Essential Writings]를 구입했지만 희망대로 진전이 안 되고 있다. 아마도 이것도 Merton effect인가? 나는 지금 이 Merton의 이름으로 걱정에 빠진다. Merton의 first name이 가물거리는 것이다… 이것도 요새는 흔한 경험이다. 하지만 치매초기는 아닐 것이다. 사람들 이름들이… Merton의 이름… 흔한 것인데..john, James, Steve, TOM TOM TOM TOM!!! 아~ 이것은 왜 이 모양인가? Thomas Merton!!  너무나 기대가 컸던가? 내가 그의 진면목을 잘 못 알았던가? 실망을 하는 자체가 금기여서 그랬나? 하지만 실체를 알게 되는 것은 다행이다. James Martin도 같은 류가 아닐까? 조금 기대치를 낮추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하지만 독서의 진전이 너무나 느리다. 조금 더 빨리 읽고, 좋은 글은 ‘부분 필사’를 하는 것도 좋은 idea일지도 모른다.

 

Normalcy in the air! 화창한 성모성월 5월, 그것도 첫날은 일년 만에 무엇인가 세상, 최소한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제대로 돌아가는 듯한 분위기가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는 듯했다. 속으로는 ‘개XX’란 말이 다시 나오기도 하지만 이제는 앞을 보며 살면 얼마나 좋을까, 나의 염원이다. 십자가 경배 때의 놀라운 결심을 이곳에도 적용이 되기를 바라기도 한다. Home DepotTrader Joe, 그리고 Wendy’s를 찾았던 오늘 아침은 정말 ‘정상적 토요일’의 느낌이었다.

좋은 날씨와 일찍 먹은 Wendy’s Dave’s Single Combo 덕분에 용기를 내어서 front lawn 잔디를 깎았다 올해의 잔디는 확실히 예년에 비해서 잡초가 적어서 그런지 잔디의 모습이 보기가 좋아서 그런지 힘든지 모르고 끝냈더니.. 거의 3시간이 걸렸다. 이 정도면 나의 체력에 큰 이상은 없는 모양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집, 앞에서 보아도 평균 이상은 된 것 아닐까? 특히 ‘가짜 faux’ window  shutter들이 모두 없어진 것은 다른 집과 다르게 보여서 더 돋보인다고 나는 은근히 기쁘기도 하다.

April 19th, Seamless Gutters Up…

아차! 미안, 자괴自愧, 실망… 오늘이 사일구 4.19  61주년 기념일이었구나! 미안합니다, 선배님들, 형님, 누님들! 어떻게 이런 일이? 사일구를 어제 잠깐 생각은 했지만 바로 오늘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것 뿐이었다. 죄스러움, 나이와 세월의 횡포, 등등만 핑계거리만 생각하고 있으니… 1960년의 이날을 어찌 이렇게 잊었단 말인가?  요새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것인가? 그 당시에 잘 모르고 경험했던 어린아이의 추억이 지금은 조금 역사적 조망을 할 나이가 되었으니… 한마디로 ‘순수함의 결정체’ 였던 민중, 아니 학생들의 염원이었다. 다른 생각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빨갱이가 싫긴 했지만 그렇다고 빨갱이로 모함을 받는 것도 마다한 정말 깨끗한 분노의 발로였다. 부정, 부정 그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형님, 누님들, 그들의 순수한 희생, 그날은 바로 바로 그런 날이었다.

 

지난 밤 3시가 지나서 깼지만 다시 자려고 노력을 하며 6시 반까지 굳세게 자리를 지켰다. 자다, 깨다, 자다, 깨다.. 그 중에서도 성모님의 추억을 떠올렸다. 특히 2014년 경의 성모님, 나를 진흙탕 도랑에서 손을 잡고 이끌어 올려주시던 모습, 북망산을 닮은 먼~ 곳의 서너 개의 봉우리를 바라보며 나를 계속 잡고 이끌어 주셨다. 마지막 봉우리는 아마도 내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런 것이라고 짐작한다. 성모님, 저는 당신이 절대적으로 이제는 더 필요합니다. 절대로, 절대로…

2010년대 초 성모님의 추억을 떠올리며 다시 생각한다. ‘용서’를 선언했던 올해 성금요일, 나는 무엇을 했던가? 아직도 앙금이 깊이 남아 있는 자신을 보며 다시 생각하니 나는 ‘용서를 하기로 결정을 했다’ 였다. ‘용서를 했다’ 가 아닌 것이다. 그 전까지는 ‘용서를 절대로 안 하겠다’였고 지금은 ‘용서를 하도록 노력하겠다’ 인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작은 기적’인 것이다. 그래, 서서히 잊으며 다시 예전에 없었던 때로 돌아가는 노력을 하면 되는 것이다. 너무 너무 쪼잔한 신경에 목을 매지 말자.

 

Ozzie와 지내는 첫 아침이다. 계획에는 이 녀석을 데리고 이른 아침에 산택을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잘 하면 하루에 두 번 산책을 할 수 있는 기회다.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일주일 편하게 사고 없이 서로 사랑하며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 새로니 부부는 어제 Pensacola [Florida] beach hotel에서 Gulf [of Mexico] 의 저녁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내왔다. 갑자기, 숙연해 진다. 어~~ 우리가 이런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도대체 언제였던가? 거의 참을 수 없는 향수, 그것을 느낀다. 가보고 싶기도 하고… 오랜 만에 둘이서 편하게 푹 쉬다 오면 좋겠다.

7시 반에 Ozzie와 기다리던 이른 아침 산책을 하였다. 이 녀석 요사이 새로니가 늦게 일어나기에 아마도 처음 이런 산책을 할 듯하다. 너무나 기운이 넘치고 유유작작 온 동네를 섭렵하는 모습 나도 맑은 공기를 실컷 들어 마시며 즐긴 셈이다. 푸푸를 무려 세 번씩이나 하는 것, 이제는 나도 기대를 하기에 큰 문제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토요일까지 걷는 것이 나의 목표다. 나의 허리운동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날씨까지 협조적이니 얼마나 좋은가?

 

HISTORIC FIRST FLIGHT ON MARS!  화성의 표면에서 처음으로 뜬 헬리콥터 drone Ingenuity… 정말 재미있는 소식이 아닌가? 대기권이 거의 공허한 그곳에서 어떻게 ‘뜬’단 말인가? 무엇을 밀어 제칠 것이 있단 말인가? 무언가 있으니까 떴겠지만. 공기가 너무 희박한 것을 해결하려면 결국 이 drone의 무게를 가급적 가볍게 해야 하는데, 이것들을 가지고 ‘노는’ engineer들이 정말 부러워 진다. 분명히 여자, minority들이 섞어 있거나 그들이 주역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세상은 변하고 있고 변했다.

 

오늘로 일단 우리 집의 ‘대 공사’는 끝나게 되었다. 마지막이 gutter인데 오늘 예정된 시간에 Duckworth Gutters guys 들이seamless gutter extractor 차를 몰고 와서 2시간도 안 걸려서 말끔히 6″ seamless aluminum gutter를 설치해 좋고 갔다. 2 black guys까지 포함된 날렵한 teamwork도 그랬고 black/white가 어울린 team이 오늘의 George Floyd 공판의 뉴스와 함께 생각을 많이 하게 했다. 생각보다 큼직하고 탄탄하게 보이는 gutter는 우리 집 전체를 돋보이게도 했지만 이제부터는 소낙비가 오더라도 안심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행복하게 했다. 이로써 total  $30,000 의 결산으로 tree, roofing, siding, gutter가 모두 끝나게 되었다. 분명히 집값도 영향을 받게 되리라….

Peaceful Frosty Easter Sunday…

 

아~ 드디어 부활절 아침이 밝았다. 비록 서리경보가 내린 싸늘한 새벽이지만 부활의 느낌을 주는 듯한 동녘 하늘이 서서히 밝아온다. 2021년의 사순절이 모두 지나고, 결국은 부활시기로… 자비주일로.. 이렇게 어김없이 세월은 흐르고 나의 모습도 흐른다. 주님의 부활로 우리도 다시 태어나는 시기를 맞이 했으면, 다른 더 나은 삶을 향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비록 안식일, 부활절 주일 시작이지만 이것도 ‘쉬는 것’이라고 결정을 하고 자진해서 2시간 새로 넓어진 뒷마당에서 육체노동을 하였지만 머리 속은 완전히 쉬는 것이다. 시원한 기분으로 연숙이와 둘이서 차茶까지 마시는 것, 모습조차 귀중하고 소중한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부활 예수님,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행복을 주셔서…

마음이 편안하다 보니 자연히 2014년 9월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2010년대에는 정말 중요한, 역사적인 날들이 줄줄이 있지만 어찌 그 해 9월의 그 대 장정 long march의 시작을 잊을 수가 있는가?  이제는 그  이전 세월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는데.. 그것은 사실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어두움의 세월로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어찌 안 그런가?  그 2년 후에는 DONALD라는 ‘개XX’가 출현을 했으니… 그 해 9월의 대결단을 계속 연기를 했었다면? 생각, 상상하기도 싫고 심지어 소름이 끼친다. 하지만, 정말 아찔한 세월’들을 살아가고 있었음에도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 아마도그렇기에 성모님의 도우심을 받은 것이지만… 어찌 그런 세월을, 우리의 암담한 처지를 잊고 살 수 있었을까?  2000년 대의 두 어머님들의 타계는 나에게 처음으로 삶의 유한함의 실체를 보여주었고, 2007년에는 우연한 묵주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서 2010년에는 과감하게 나는 나의 갈릴래아로 용감하게 뛰어들었던 것…  나의 갈릴래아, 맞는 말이다. 이번 성삼일 미사 강론에서 이영석 신부님은 ‘십자가에서 갈릴래아’로… 라는 주제를 일깨워주셨다. 맞는 말이다.

모처럼 마음이 평안한 진정한 휴일기분을 느끼고 싶다. 실제로 평안하기도 하다. 어제 집 공사가 거의 끝이 난 것을 보고서 더욱 그렇게 되었다. 나의 기우와 불필요한 우려 등을 씻는 계기로 나는 나의 단점과 허점을 재 확인하는 기회도 되었다. 나는 지독히 불완전한 인간이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의 가호가 필요한 인간인 것이다. 그것도 부활하실 수 있는 그 무한한 능력을 깨달으면서..

 

다음의 남은 일 rain gutter job,  전번에 estimate 가 $2,500 정도라는 것만 알고 다시 모험이 시작된다. 이번엔 어떤 ‘작자’를 만나게 될 것인가? 이 contractor, handyman service 등 각종 house service business, 나는 근본적으로 믿지 않는 자세로 출발을 하기에 더욱 괴롭기만 하다. 한마디로… 이것 운이 따르는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지금 Sam group은 그런대로 운이 따르는 만남이라고 정리하고 싶다. 하지만 gutter는 또 다른 문제다. 각종 review조차도 나는 신빙성이 별로인 것이니까… 기도밖에 없다. 기도…

 

Ah, Quarter Pounder Lunch…

비록 5시경에 눈은 떠졌지만 편한 마음으로 furnace소리가 들리는 6시 30분 이후에 일어났다. 왜 편한 마음? 어제 밤에 attic antenna job의 결과도 한 몫을 했지만, 로난을 돌보아준 하루의 보람도 있었고, 오늘 연숙이 혼자 errand 하러 나갔다 올 때 McDonald 그리운 햄버거를 사오겠다는 사실 때문이었나?  또 있다. 오후에는 싸늘~한 비가 내린다는 사실… 혹시 sleet, even snow flurry?  이것도 포근한 모습이 아닌가? 이렇게 나는 simple human이 되고 있구나.

드디어 2 big home ‘repair’ projects 의 첫걸음을 띤다. 역시 ‘밀려서’ 시작한 셈이지만 시작한 한 셈이다. 과연 결과가 어떨지는 전혀 짐작할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 해 볼 것이다. 이제 $$$의 문제는 예전에 비해서 나아졌기에 조금은 가능성이 생긴다.

어떻게 이 문제에 접근할 것인가? 또 복잡하게 생각하는 나 자신이 싫어진다. 간단히 생각하자.  우선은 contractor research를 해야 한다. 이제는 website가 잘 되어있으니까 구전 口傳 words of mouth는 전처럼 중요하지는 않으나 그래도 그것도 염두에 두면서 찾아 보련다. 우선은 website를 통해서 2~3 군데를 찾아보고, 주변에 아는 사람들에게도 물어보는 것으로 시작…

약속대로 연숙이의 협조로, 오랜만에 McDonald’s Quarter Pounder Hamburger를 맛있게 ‘집에서 편하게’ 점심으로 먹었다. 긴 세월 동안 변치 않는 맛, 거의 기적에 가깝다. 맛 보다 왜 이곳 Roswell Road McDonald’s 라고 하면 추억 잠기게 되는 것일까?  1992년 이후 이사를 온 이후 각종 추억이 많이 얽힌 곳이었는데 big remodeling을 하면서 조금 섭섭하기도 했다. 옛날의 모습이 사라진 것.  Holy Family 성당 매일 미사가 끝나고 그곳엘 참 많이 갔었지, YMCA 끝나고 들리기도 하고… 모두 모두 Pandemic 전, 그때가 꿈같은 시절로 영롱하게 남게 되었다. Mask를 안 쓰고 다니던 시절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으니…

KBS 80년대 드라마게임, ‘형제회의’라는 episode를 본다. 꿈같은 가족들의 이야기… 형제들이 많은 집, 돌아가며 어머님 모시기… 나에겐 역시 불가능한 꿈같은 스토리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나는 침을 질질 흘리며 부럽게 보고 또 본다. 다양한 형제들, 어머니 모시는 것의 방법도 가지가지… 진심도 있고 열성도 있지만 아예 효성이 없어 보이는 형제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렇게 해서 합쳐진 효성, 효도의 결과는 이즈음 세상에서는 박물관의 전시물처럼 느껴지니…

Pandemic Groundhog Day, COVID 1st Shot

Punxsutawney Phil saw his shadow this morning! Six more weeks of Winter! No crowd, just streamed live!

요즈음 잊고 있었다. 오늘은 2/2, 2월 2일! 바로 Groundhog Day! 이제는 추억이 조금씩 엮어진 날이 되었다. 거의 10년이 되었을까? 그 영화, The Groundhog Day를 보고 느낌을 나의 blog에 남긴 것이?  추운 겨울을 나려면 이 추억을 나는 꼭 집고 넘어가고 싶다. 주인공 Bill Murray의 얼굴도 그립고, 체감온도가 제일 낮은 2월 초의 정취를 나는 마음껏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 겨울은 얼마나 더 갈 것인가?  Pandemic 으로 운집한 군중이 거의 없이, 오늘 아침 이 ‘유명한’ 펑스토니 필’ 두더지는 자기의 그림자를 보았다고 한다. 역쉬~~ 6주 이상을 더 기다려야 봄이 오는가…

 

아침 먹은 것이 다시 거북해져서  Alka-Seltzer를 마시고 조금 가벼워졌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다. 왜 자꾸 소화기에 문제가? 별것은 아니겠지… 그런 상태로 오늘 외출은 조금 아찔한 기분… 너무나 오랜만에 freeway에 올라선 기분. 하지만 모든 일들이 예정대로 끝났다. 부수입으로 성당에서 이영석 주임 신부님의 건강한 얼굴을 맞대고 인사를 드렸다. 안식년으로 방문오신 어떤[이름을 잊었다] 신부님,  3주간 머무신다고, 인사까지 드리고 왔다. 1차 코로나 백신은 거의 정확한 시간에 맞긴 맞았지만 2차 접종은 한 달 뒤에 전화로 예약을 확인해야 한다고… 2차 접종 후에는 조금 몸이 아플지도 모른다고 신부님이나 간호사가 모두 말해준다. 우리가 맞은 것은 Moderna vaccine이었다. 이제는 한달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면 큰 문제는 없을 듯… 감사합니다.

요새 거의 매일 ABC, NBC, CBS channel을 자유자재로 오고 가며 보고 있는데, Super Bowl이란 단어도 정겹게 느껴지고, 각종 약 광고들도 반갑다. Get a Life! 의 구호에 조금은 한걸음 다가가고 있는가? 이것이 true reality인가? 그래, 조금씩 조금씩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며 살자… 상식적인  태도로…

Ugly Monster’s Out, Historic Hopes’ In…

Young Senator Biden, 1972

Congratulation & Celebration!!! 아마도 오늘의 Joe Biden  47th President 취임식은 내가 처음 보는 취임식일 듯하다. 오랜 세월 동안 ‘대통령 취임식’에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올해의 그것은 예외 중의 예외… 정말 예외다. 이것을 안 보면 나는 세상을 등진 자, 역사적인 무관심론자, 심지어 나쁜 놈일 수밖에 없다. 봐야 하고, 축하하고, 희망을 가져야 한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다. 이 진리를 무시하면 나는 이 세상에서 살 자격이 없다 !!!

아침 7시부터 NBC-TV로 시작해서 12시의 취임식을 나는 지켜볼 것이다. 이것은 신성한 사회적, 국민적 의무요 권리이다. 또한 천하 역적 DONALD ‘개XX’가 쫓겨나는 것을 나는 기다릴 것이다. 그의 더러운 입에서 나오는 ‘거짓말 개소리’가 서서히 소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나는 기다릴 것이다. 그것이 정말 나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진실과 증거를 무시하는 ‘개XX’들과는 대화가 안 됨을 깨달아야 한다. 한계가 있다.

DONALD 개XX가 드디어 ‘하얀 집’에서 쫓겨나는 순간을 기다린다. 이 XX가 완전히 DC를 떠나는 순간이 중요한 것이다. 그 전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을 정도로 이 XX는 미쳤었기 때문이다. TV에서는 마지막으로 이 XX가 speech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괴롭다. 나는 안 볼 것이다. 떠난 후의 모습들이 나올 때까지 TV를 안 보려고 한다. 그 정도로 나는 이 XX를 증오, 경멸한다. 히틀러와 지옥에서 말싸움이나 하며 ‘살아라’, 이 개XX야! Worst of worst, go to hell!

이제 나도 tone을 조금씩 낮출 때가 다가오고 있다. 오전 11시 59분이면 모든 고통들이 일단 끝난다. 12시에 Biden 의 Presidential oath가 시작되면 새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12시, 12시!  지금 아침부터 거의 계속 취임식을 보고 있다. Poor guy, Mike Pence의 모습이 보인 것, 조금 감동을 받았다. 역시 정의는 승리한다.  당신은 그런대로 제정신을 가진 인간이었다. 고맙다, Mike Pence!

이제 모든 식이 끝났다. 이제 우선 두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게 되었다. 그 정도로 불안했던 내가 조금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것은 나의 탓이 아니라 그 미친 XX의 불안정한 행동 때문이었다. 이제 다시는 그런 모습을 보기는 힘들 것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그 인간의 얼굴을 안 볼 수 있게 되기만 기도한다.

Almost like a Church service… 흠~ commentator의 지적, 나도 그것을 느꼈다. ‘하느님’이란 말이 수없이 들리던 오늘의 취임식… 이런 시작, 아주 좋은 것이다. 바이든, 역시 경험이 풍부한 정치인이다. 그가 조금 중도적인 입장, 교회의 힘을 의식하는 정책을 취한다면 분명히 그는 성공한다. 나는 믿는다.

 

내가 생각하고 진단하고 해석한 많은 사실들은 요새 나오는 석학들의 논평과 거의 일치함을 보고 나도 놀란다. 다만 나에게는 그것을 정리해서 글로 옮기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 그것뿐이다. 나도 이번 기회에 나의 세계관을 조금 고칠 것은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single-issue view (a.k.a obsession) 의 위험함을 나는 알아야겠다. 이것은 나를 조금 우울하게 한다. 나도 실수를 한 듯 한 것이다…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생각을 해 보자.

USA DAY! 오늘은 하루 종일 바이든 바이든 미국 민주주의 상식적인 정치.. 등등을 생각하며 보냈다. 그야말로 하루 종일 TV앞에 앉아 있었던 나에게는 드문 날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절대로 나에게 중요한  시간이 되었다. 잊지 못할 감동적이고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나도 이제는 나이를 먹었나 보다..

Tom Hanks 가 MC를 하는 virtual party, 나답지 않게 거의 모두 보고 있다. 나도 참 많이 변했다. 모두가 그 개XX 덕분이다. 상식과 이성이 통하는 나라, 절대로 거저 준 것이 아님을 절감하기에 더욱 나는 자축하는 기분으로 보고 듣고 배우고 생각하고 반성하는 기회를 감사한다.

PROMISE ME, DAD by Joe Biden: 거의 발로 차 버렸던 이 책을 다시 꺼냈다. 한마디로 ‘미안합니다’ 라는 말 밖에 안 나온다. 나라니가 2017년 성탄 선물로 준 책이었다. 한가지 ‘문제’로 나는 다른 모든 것을 막아버렸던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다. ‘동성결혼’의 한가지 issue로 나는 다른 모든 문제를 덮어버렸던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나는 서서히 ‘탈출’을 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다른 각도로 보아야 한다는 진리를 찾기 시작한 것인가? 이것도 DONALD ‘개XX’ 덕분이라고나 할까? 바이든 대통령,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오랜만에 연호친구들과 모두 연결이 되었다. 취임식과 생일의 이야기를 나눈 셈이다. 특히 인송이는 너무나 반가웠다. 아직도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이 정말 부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것이 얼마나 건강하기에… 그래 좋은 거야! 부럽고 그립다, 인송아!

Free Money ($600), 이번에는 나도 조금 과감하게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사고 싶었다. 그래, 경우야… 그 동안 참 많이 절약하며 살았지? 장하다. 이번에는 조금 사고 싶은 것을 사 보자… $100를 쓰는 것이 이렇게 힘들어서야…

  1. 4 more smart-plugs (현재 시작한 wifi-light-controller를 확장)
  2. Roku deluxe (나의 방에는 전에 쓰던 것을…)
  3. TV-antenna, with rotor (direction control 하는 것)

 

창포 菖蒲 필 무렵, 꿈같은 추억이여~

 

얼마 전에 우연히 보았던 1980년대의 TV 프로그램 KBS TV 문학관 중의 ‘창포 필 무렵’이란 드라마, 1987년 경에 방영된 것이다. 이 장수프로그램  “TV 문학관”으로 나는 1980년대 대한민국의 느낌을 간접적으로나마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이 ‘창포…’ 를 보면서 아득하고 아련한 어렸을 적을 추억과 맞물려 이렇게 두 번씩이나 보게 되는가.

시골이 배경이지만 우리 때보다 훨씬 기름진 부유함이 보여서 실감은 좀 떨어지지만 주인공 소년아이는 100% 내가 빨려 들어갈 듯한 동질감을 느낀다. 내가 그 녀석이 된 것이 그렇게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나의 눈을 끈 한 scene, 주인공 녀석이 ‘상사병’이 나서 앓아 누워있는 방의 모습이다. 아마도 내가 살았던 서울 가회동의 방도 그와 비슷했지 않았을까? 엄마, 누나, 밥하는 누나 이렇게 셋이서 나를 둘러싸고 앉아서 따뜻한 간호를 했던 기억들.  아플 때면 그렇게 사랑을 흠뻑 받아서  나는 몸이 아픈 것이 그렇게 괴롭지 않았고 심지어 그리워할 때도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여동생 가진 것이 인기였지만 그 전에는 이렇게 돌보아주는 누나가 더 인기가 있었다.

 

 

‘예쁜 누나’로 나오는 처녀, 어쩌면 나도 그 나이에서 꿈 속에서도 볼 수 있을지도 모를 동경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그 녀석이 느끼는 아련한 연정이랄까…  이성 異姓적인 각도가 제외되었다는 것을 빼면 지금도 마찬가지 심정일 듯하다. 사춘기 전에도 그런 ‘동경하는 마음’이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여자아이나 누나뻘, 심지어는 젊은 아줌마나 되는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것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성에 완전히 눈이 뜨게 되면서 그런 순수한 것들은 퇴색되었지만, 완전히 모든 것들을 알게 된 이후에도 예전의 100% 순수한 사랑 같은 아련한 느낌은 지금도 건재하니… 이런 것이 정상적인 것일까?

여기에 나오는 묘령의 누나 아가씨의 이름은 ‘예명숙’으로 나온다. 이 TV 탤런트는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조금은 궁금하기도 하다. 지금 쯤은 아줌마 세대로 접어들지 않았을까? 아~ 멋지고 달콤했던 당시의 세월이여~

 

‘일본식’ 기마전을 하는 ‘국민학교’ 아이들

이 프로그램은 손소희 원작을 드라마화 한 것이지만 원작의 줄거리를 떠난 다른 영상들, 비교적 부유한 시골의 모습과 그곳의 ‘국민학교’ 교정, 거기서 ‘기마전’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들은 거의 100% 나의 머리 속에 남아있는 서울 재동 국민학교의 그것들이었기에 나는 너무나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드라마를 만들어 준 제작자들이 너무나 고맙기도 했다.

가회동 嘉會洞 198번지

꿈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모습이 생생한 사진으로 나에게… 우리들의 소굴, 골목이 여전히..

거의 6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난 후,  20세기 1960년대 중반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서울 종로구 가회동 집 골목, 그곳의 현재 모습을 사진으로 가까이서 보는 기적을 체험한다. 솔직히 이것은 거의 꿈, 기적 같은 느낌이다. 그야말로 time machine을 탄 기분인 것이, 머리 속에 각인된 기억의 사진과 지금 보는 사진이 거의 비슷한 것이다. 집의 위치들은 변함이 없지만 개량되고 말쑥해졌다. 우리들이 모여서 자치기, 다마[구슬]치기, 딱지치기, 골목야구, 다방구, 찐뽕, ‘왔다리 갔다리’, 말타기, 칼싸움, 술레잡기 등으로 시간을 소일하던 그 찻길과 골목길에는 흙이 전혀 안 보이지 않게 포장이 되어있다. 어쩌면 이런 기적이… 상전벽해 桑田碧海라고 그 자리들이 모조리 ‘도시계획’에 의해서 없어질 수도 있는 강산이 6번 변할 수도 있는 세월이 지났는데 거의 전의 모습이 그대로 있는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나의 추측에, 아마도 가회동 근처지역이 법적으로 보호를 받는 특수구역이 된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거의 60년 이상 같은 모습을…  또한 다른 기적을 바란다면, 죽기 전에 한번 다시 그 골목을 거닐며 나의 눈으로  보고, 나의 늙어가는 손으로 땅을 만져보고 싶은 것 뿐이다.

6.25 동란 발발 직후 아버지는 3살도 채 안된 나, 누나, 엄마 셋을 남겨놓고 납북, 영영 소식이 없었다. 원산이 고향이셨던 어머니는 거의 혈혈단신 서울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당시 우리는 원서동 ‘병세네 집’ 의 단칸방에 숨어서 휴전을 맞아야 했다. 그렇게 원서동의 추억으로 시작된 우리는 재동국민학교의 인연으로 국민학교 4학년 때 학교 뒷문 쪽에 위치한 가회동 집으로 이사해서 중앙고등학교 1학년 초 때까지 살았다. 그러니까 제일 재미있는, 즐거운, 개구쟁이 시절을 이 집에서 보낸 셈이다.  따라서 그때의 추억은 생생하게 나를 오랜 세월 나를 포근하고 행복하게 했다.

 

땅과 흙에서 놀았던 골목이 완전히 돌덩어리로 포장이… 이곳의 애들은 어떻게…

가회동의 추억, 오래 전, 그러니까 거의 10년 전 내가 이곳에 남긴 블로그의 제목이었다. 그 당시 나의 기억력은 그런대로 평균이상으로 꽤 많은 어릴 적의 추억을 거의 사진처럼 그릴 수 있었고, 외롭거나 슬픈 감정이 들면 그 머릿속의 ‘추억의 사진’들을 꺼내 보며 편안함과 행복함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이제 나의 기억력도 나이에 비례해서 급속히 쇠퇴되고 있음을 느낀다.  그 가회동의 추억이라는 나의 기억은 지금 읽어봐도 아주 상세한 이야기들이었지만, 결국은 이것은 남이 보는 것이라기 보다는 내가 죽을 때 가지고 갈 것이었다.

가끔 ‘가회동’이라는 keyword로 이 블로그를 찾아오는 사람 중에는 나의 추억을 거의 같이 공유한 분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우리가 살던 집 ‘주인집 누나’의 현재 소재지까지 알고 있던 분도 있었다.  가회동과 재동학교를 나보다 더 자세히 기억하기도 했는데 특히 재동학교 지하실에서 달걀귀신이 나온다는 도시전설을 알려주던 어떤 형제님… 정말 꿈을 꾸는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가회동 같은 골목 자락에 살았던, 재동학교, 중앙중고등학교 10년 후배, 이민우 후배가 연락을 주었다.  이번 case는 그야말로 grand slam격이어서 며칠 동안 나는 행복한 추억을 다시 즐기게 되었다. 내가 알고 지냈던 동네 꼬마들의 소식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특히 야구꼬마 오자룡, 막다른 골목의 윤표네 집 등 이들과는 같은 시절에 놀았던 듯하다. 그러니까 내가 살던 시절보다 10년 정도 뒤에 그곳에서 추억을 만든 경우다. 오자룡은 자기 형과 친했다고 하고… 게다가 골목 막다른 집에 살던 ‘홍윤표’ 란 아이가 나를 따르던 애였는지, 아니면 그 동생인지.. 그 애가 머리가 좋아서 경기, 서울의대, 성형외과의사, 뜻하지 않게 타계를 했다는 소식들.. 정말 이건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느낌들이다.

나와 개인적인 연락이 되어, 지난 밤에 이 가회동 골목 후배의 답신을 받고 잠자리에서 한참을 뒤척거리며 그 동화 같은 시절을 그려보기도 했다. 이것도 향수 鄕愁의 마력 중의 하나다.  홍윤표, 준표 이름을 듣고 당시 그 애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그들은 특히 엄마들은 그 골목에서 꽤 오래 남아 살았고 모두들 친하게 지낸 모양이다. 우리나 우리 어머니는 사실 그런 처지가 못되었음을 나는 당시에 실감을 못하며 산 거, 다행인가 아쉬움인가? 그러니까, 내가 알던 추억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을 것이다. 가정주부들, 말 그대로 일을 안 하는 엄마들, 그 당시에는 거의 모두 집에 있었으니까, 그들만의 그룹을 가지고 있었겠지. 우리는 그런 것 전혀 모르고 살았는데, 어찌 보면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일을 하러 하루 종일 밖에 계셨던 엄마를 다시 그려보면…  참, 우리도 너무 철이 없었고, 나이가 먹어서도 하나 나아진 것이 없었으니 울고 싶다…

 

골목 왼쪽 2층집, 198번지.. 이층 위로 거대한 전망대가 올라 섰구나…

이 활달한 느낌의 이민우 후배가 이번에는 사진과 짧은 video file을 보내 주었다. 사진은 high resolution 가회동 골목의 모습을 담았고, 비디오는 ‘북촌계동’ 으로 중앙중고가 있던 계동골목의 모습을 보여준다.  ‘북촌계동’ 비디오, 계동입구부터 중앙중고 교문근처까지 천천히 걸으며 찍은 것이다. 교문부근은 그런대로 알아 보았지만 계동입구는 100% 내가 기억한 모습이 아니었다. 100% 변한 것이다.

핵심은 역시 골목사진,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과 하나도 차이가 없었다. 너무나 고화질의 사진이라서 거의 망원경이나 현미경으로 자세하기 관찰할 수 있을 정도다.

이민후 후배가 살았던 집, 195번지는 아마도 이희천 3형제가 살았던 그 집인 듯하다. 그 다음 집이 심술 맞은 수학선생 집 이원영이 살던 집을 것이다. 우리가 살던 집 198번지는 거대하게 2층 양옥으로 고급화 된 듯하고, 바로 앞의 한옥, 오자룡의 집은 전과 거의 같은 모습, 막다른 집의 홍윤표가 살던 집도 예전과 거의 비슷하고….. 와! 이런 기적이…

지난 밤에도 머리만 깨어있으면 가회동 골목의 사진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time machine을 탄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 골목이 그대로 건재해 있을까? 그곳에서 보내던 그 세월들이 그대로 살아나는 환상에 빠지고 깨어나고 를 반복하고 있었다.

사진의 size [high resolution]가 워낙 크기에 자세히 들여다 보니 골목 끝자락의 모습이 새롭게 보인다. 아~ 역시 세월의 흐름은… 그곳은 다른 곳으로 변해 있었다. 상가의 간판들이 보이고, 우리의 보금자리였던 2층집은 거대한 구조물로 치솟아 있었다. 유일한 추억의 위안은 앞 쪽으로 남아있는 ‘전통한옥’들 뿐이었다.  궁금한 것 중에는 이곳에는 현재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혹시 옛날부터 계속 살았던 사람들은 없었을까…  이런 추억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나도 참 못 말리는 인간이 아닐까?

가회동 성당, Birdie Apartment

 

대한민국의 평화방송 online 매일미사에 낯익은 단어가 보인다. ‘가회동’이란 단어다. 이날 평일미사를 가회동 성당에서 하는 것이다. 물론 놀랍고 반갑고 흥분이 안 될 수가 없다. 이 성당의 근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거의 즉각적으로 추억의 물결이 밀려온다.  어린 시절의 가회동 성당의 입구에서 본 ‘서양인 성인상’들의 모습이 너무 무서워서 도망쳤던 꿈도 있었던, 어린 시절의 고전적인 가회동 성당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값비싼 느낌’이 요란한 조화를 자랑하는 건물이 보인다. 그야말로 추억이 완전히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왼쪽의 한옥은 무엇이고 오른 쪽의 갤러리, 화랑 같은 구조는 무엇인가? 내가 가서 직접 보기 전에 이런 원색적인 평가를 하는 것, 물론 의미가 없다. 그저, 그저 나는 1950년대의 베이지색 고딕성당을 찾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을 뿐이다.

머릿속을 청소하러 work desk를 의식적으로 피하며 몸을 움직이는 일을 이곳 저곳에서 찾는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머리 속에 한가지가 머물지 않도록 정말 조심하고 싶다. 필요 이상으로 너무 골머리를 썩히지 말자. 덕분에 Birdie nest 9개가 완성되어서 기둥 위 하늘로 높여지고 이제는 오래 전 우리 집을 떠난 Eastern Bluebird의 파아란 생명의 모습을 기다려 본다.

 

Eastern Bluebird Apartment

Under construction

오래 전에 카펫을 제거한 후 노출된 흉한 모습의 중앙계단 main stairway를 결국 현재 편리하게 계속 쓰고 있는 whiskey barrel 이라는 재미있는 색깔로 (이미 porch 와 birdie nest에서도 썼던)  paint하기로 했다. Stain을 하려고 생각도 했지만 너무나 일이 많고 비용도 그렇기에 오래 전에 준범이 엄마가 권한대로 ‘paint하면 되요’라는 말에 힘을 입어 페인트 칠을 하기로 했다. 하기 전에 squeaky nail 문제를 screw로 단단히 고정을 시켰더니 훨씬 나아졌다. 자…이제는.. 페인트를 칠하자… 부디 의외의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렇게 나를 괴롭히던 수많은 cable/wire 잡동사니들…  결국 오늘 wire/cable rack을 설치, 나의 참을성을 시험하던 그 수많은 비비 꼬인 wire/cable 들을 걸어 놓았다.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야 무언가 되는가 봅니다.

 

조시몬 형제와 카톡을 주고 받다가 갑자기 레지오 협조단원 권면 생각이 들어서 거의 ‘장난 삼아’ 제안을 했더니 의외로 수락을 하니… 참, 세상이 이렇게 멋진 사람도 있구나 하는 감탄사가 나온다. 레지오 (봉사) 권면 얘기만 나오면 두드러기가 돋는 사람들이 거의 태반인데… 참, 예전에 나도 그랬지만…  이곳에 임시로 거주하고 있는 이 형제님, 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연락이 끊어지지 않게 되는 것도 매력적인 idea가 아닌가? 이 신심 좋고 성실한 형제가 레지오를 위해 기도를 바치는 것,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성모님, 고맙습니다!

나의 가슴속 깊은 곳의 평화의 샘에 혼란이 올 때, 머리를 식히거나 다른 쪽으로 생각을 바꾸려고 할 때, 역쉬~~~ ‘classic’ TV drama 를 보는 것은 아주 효과적임을 경험한다. 3년 전 ‘레지오 미친년’ 사건 때, 일본드라마 ‘하늘을 나르는 타이어’가 나를 살려주었다. 현재 나는 계속 이 평화교란의 도전을 받고 있다. 이때에 나는 ‘하나무라 다이스케 花村 大介’ 라는 변호사 TV 드라마로 많은 도움을 받는다. 우선 가볍고, 유머러스하고, 끝 맛이 아주 희망적이다. 그래 이런 것도 삶의 지혜가 아닐까?

 

Yesteryear, July

 

Yesteryear…  요새는 가끔 지나간 해의 달력일지를 훔쳐본다. 지난해 이즈음에는 과연 나에게 무슨 일들이 있었는가… 이런 것도 요새처럼 시간이 넘칠 때는 time killer로 으뜸가는 것 중에 하나다.

이것들을 보며 예상보다 훨씬 격심한 변화가 있었음을 절감하며 한숨을 쉰다. 올해의 대부분이 너무나도 개인적이나 사회적, 국가적으로 변해버린 것, 물론 어두운 쪽으로 변해버린 것. 비록 현재의 시간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지만 조금 더 위에서 바라보니 조금은 겁이 나기도 한다.

 

작년 이맘때의 일상을 보니, 비록 거의 고정적인 일상 routine이었지만 엄청 바쁜 세월들을 보냈음을 알게 된다. 일주일을 너무나 짧게, 바쁘게, 보람 있게 살았던 것, 그때가 그리워진다.

주일인 일요일에는 우리의 한국본당 순교자성당에서 ‘진짜 미사’를 보고, 우리들의  성당 친목 모임 ‘등대회’에서 동년배 형제, 자매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가끔 [레지오]특강도 있었고 모든 주일일정이 끝나면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성당근처의 단골 집들, ‘동네방네 [한식점]’ 나 운동장처럼 널찍하고 시원한 Mozart Bakery에서 향기로운  coffee로  평화로운 일요일을 마감하기도 했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거의 완벽하게 고정된 스케줄이 있었다. 매일 아침 9시 동네성당 Holy Family CC의 아침미사, 일주일에 최소한 두 번은 Sonata CafeYMCA gym workout이 있었고, 화요일은 절대로 예외 없이 도라빌 순교자 성당으로 30분 드라이브, 레지오 주회합이 있었고 그날 정오에는 그곳에서 정오미사. 그 후에는 자주 채 형제님, 신 자매님댁, 손 형제님댁으로 봉성체 봉사를 했었다.  또한 시간이 나는 대로 Rosewell Nursing Center 방문을 해서 Parkinson 병으로 고생하시는 두 자매님들을 만나기도 했고.  하지만 이런 것들이 이제는 거의 꿈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시계처럼 돌아가는, 거의 정해진 ‘과제’들을 끝내고 집에 들어오는 것, 그 순간이 바로 내가 원하는 바로 그 ‘은총의 시간’이다. 보람 있다고 생각되는 ‘봉사, 선교, 친교’의 시간들은 현재 우리 주임, 이영석 신부님이 주장하는 ‘가장 행복한 순간들’ 인 것이다. 이것도 ‘중독성’이 있는데, 물론 세속적 의미의 중독과는 정 반대쪽의, 사실은 은총이다.

그것들이 지금 거의 5개월간 완전히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이다. 처음 3개월 정도는 ‘우리도 이 참에 좀 쉬자’ 라는 자세로, 심지어 즐기는 기분으로 지났지만 그 이후부터는 조금씩 신경질이 나기 시작하고, 현재는 약간 우울감까지 느낄 정도가 되었다. 제일 관심사는, 내가 게을러졌다.. 라는 자책감이 과연 정확한 진단인가 하는 것이다. 제일 괴로운 것은, ‘언제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는가’ 하는 불확실성이다.  기도와 묵상, 의도적으로 규칙적인 일상생활, 그것 이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참, 어쩌다가…

 

초복과 중복의 사이에서…

초복이 지난 습기찬 한여름… 뒷뜰의 모습은 너무나 평화스럽고 한가한가…

 

정교성 파스칼!  드디어 교성이와  5년 만에 통화가 되었다. 그 동안 왜 연락이 두절되었는지 추궁을 하려던 나는 그 녀석의 얘기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너무나 놀라서 할 말을 잊었던 것이다. 얼마 전 사진으로 본 바에 의하면 비교적 건강한 모습이었는데 사실을 알고 보니 몇 번의 수술로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긴 것, 게다가 현재도 근육무력증으로 거의 못 걷는다고… 20가지의 약을 매일 먹는다고…  설상가상으로  그 동안  이혼을 해서, 현재는 작은  딸 집에서 산다고… 이거, 드라마 연속극도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이런 무시무시한 소식을 거리낌 없이 말하는 교성이의 음성을 나는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지 망망하기만 했다. 동정을 하나, 놀라기만 하나, 위로를 해야 하나… 지난 5년 동안 그런 엄청난 일들을 겪었을 줄이야… 문제는 지금의 상황인 듯, 몸은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듯하고, 더 나아질 가능성은 불투명하니…

지난 5년간 너무 힘들어서 주위 사람들과 연락을 안 하고 살았다고 했지만 그래도 같은 캐나다에 살고 있는 중앙고 동창 이희진과는 연락을 끊지 않았다고… 과연 이 녀석의 건강상태는 어떤 것인지 확실치 않다. 생활이 불편한 정도인지, 심각한 병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얘기에 의하면 후자인 듯한데.. 목소리와 사진모습은 그 정도까지는 아닌 듯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계속 연락하는 것과 기도 밖에는 현재 없다.  이런 때, 오늘 성경통독은 시편 23편이었다. 이럴 때 이 구절은 조금 위안을 준다.  교성아, 힘내!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

 

초복 初伏이 지나고:  요즈음 나는 ‘의도적 게으름’을 즐긴다. 움직여서 땀이 나는 것을 나는 가급적 피하려고만 한다. 그래서 yardwork도 포기한 셈이다. 하지만 오늘 날씨는 양반 축에 속한다. 오후 2시 반에 90도가 안 된 것이 이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확실히 물기가 덜한 공기를 느낀다. 초복이 언제였나, ‘국산 달력’이 없으니… 아하, 레지오 수첩을 보면.. 그곳에도 없다. 어차피 순교자 성당 달력에나… 아니다 연세대 달력에 있다. 지난 16일이 초복이었고, 26일이 중복, 그리고 8월 7일 입추, 8월 15일이 말복이다. 이제 서서히 가을이 먼 곳에서 나를 기다린다.

 

초복과 중복 사이의 특유한 즐거움, 마가리타!

Overhead Lighting:  2017년 가을부터 나의 진지 陣地가 된 곳이 아래층의 family room, 지금은 나의 서재, study가 된 곳이다. 이곳을 나는 정말 사랑한다. 게다가 이제는 기억에 남을만한 추억들이 쌓여간다. 특히 pet dog Tobey를 하늘로 보내던 것을 포함해서… 단, 이곳에 문제가 있다면 desk lighting이다. 지금 것은 원래의 ceiling light인데 desk을 잘 비추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필요한 것은 나의 머리 바로 위에서 비추는 것 hanging light다.  그러면 현재의 desk stand light를 치우고 그 자리를 내가 더 쓰면 좋은 것이다. 이런 idea를 몇 년이나 끌었던가… 드디어 지금 거의 그 일을 끝낼 준비가 되었다. 

 

KBS 문학관, Big Download: 지루하지만 기대감이 넘치는 작업, Big YouTube download! 그 중에서 지금은 얼마 전에 발견한 ‘거대한 시리즈, KBS 문학관’이란 프로그램을 탐색하고 있다. 이것은 문학이란 제목과 맞게 문학작품 그러니까 소설을 드라마화 한 것이다. 놀라움은 거의 10년 동안 매주마다 방영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나 그 이전의 한국문학작품이 소재이며, 80년대의 대표적인 TV 탤런트, 배우들이 총망라된 것이라 나에게는 다른 의미를 준다. 우선 80년대 당시, 이전의 한국문학의 얼굴을 보며 배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당시의 연예계, 배우들을 다시 보거나 새로 보게 되는 등, 나에게는 체험하지 못했던 하나의 대한민국 80년대 문화사를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희망이다. 거의 200여 편의 drama video file을 download하는 것, 과연 보람이 있을까?

 

 

A Day in Covid Summer

다시 습기가 돌아온 나날이 시작된다. 아침의 기온을 보면 알 수 있다. 70도 이상이면 습한 것이다. 따가운 햇볕대신 끈끈한 촉감과 계속되는 a/c 소음… 그것이 한 여름의 모습이다. 괜찮다… 이제는 몸이 잘 적응을 하였으니까…  한 여름의 즐거움, 아~ 이 빗소리.. 아무리 90도라고 해도 상관이 없다. 머리 속에서 맴도는 평화의 천사가 있고 시원한 빗소리가 들리는 이런 순간 순간들이 나의 70대 인생을 이끌고 있다. 나의 인생은 나에 대한 것이 아님을 알면 의외로 마음이 가벼워진다. 맡기자, 맡기자 모든 것을 ‘절대’에게 맡기자.

After-Dentist-Visit Effect,  한 달 예정으로 매주 가는 치과, 그 이후 날라가는 새로운 느낌과 심지어 행복함을 맛 볼 수 있는 며칠이 또 계속된다. 이럴 때 밀린 일들을 해 치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데 나는 대신 1940s 시대의 Charlie Chan movie 나 보며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도대체 무엇부터 해 치워야 하는 것인가? 하도 할 것들이 많은 듯 우려 속에서 헤매는 느낌 뿐이다. 하나라도 확실하게 끝을 내고 다음 것으로 가면 되는데…

요사이 본당 성경통독, 구약성경에서 느끼는 실망감과 당황함을 조금 풀어줄 길이 기적처럼 나타났다. 요사이 읽고 있는 Bishop Robert Barron의 책, 바로 그것이다. 그곳에 나의 궁금증들이 비교적 자세히 가려운 곳을 긁어준 셈이다. 어쩌면 timing이 이렇게도… 하기야, 이제는 이것도 우연만은 아닌 듯 싶다.

이래서, Barron’s ‘white’ book, ‘To Light a Fire on the Earth‘,  (actually mostly by John Allen) 에 점점 빠져들어간다. 나의 독서 전통과 기호를 따라 결론 쪽으로부터 읽기 시작해서 조금씩 앞으로 앞으로 나오고 있다. 8장부터 시작해서 7장이 오늘 끝났고, 오늘 6장을 시작한다. 8장, 7장을 읽으며 놀랍게도 많은 것을 깨닫고 배웠다. 나를 괴롭히던 질문들이 거의 자연히 풀려나가게 되었다. 이것은 거의 우연이지만 놀라움이다. 언제 어디선가 이렇게 해답이 나오니까 말이다.  오늘부터는 prayer & supernatural에 관한 것, Barron의 이 주제에 대한 논평, 의견은 이제까지 조금 짐작은 했지만 이번에 확실히 배우게 되었다.

이 책에서 Bishop Barron의 Bible 론 을 읽으며 조금 구약에 대한 시각에 변화를 주는 듯 하다. 이 머리 좋은 ‘젊은’1 주교의 말은 내가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드릴 수 있다. 거의 언제나, 언제나… 그래서 내가 영성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려면 이 주교님과 항상 가까이 하는 것이 제일 확실한 방법이다.

 

 

Water tank rain barrel, a/c condensate water recovery 등등이 갑자기 나에게 활기를, 기분은 좋게 한다. 이것도 역시 electronics, microcontroller 가 관련이 되어 나의 발은 잡는다. 어젯밤 a/c에서 흘러나온 ‘공기 중의 물’이 무려 full bucket이 된 것을 보고 은근히 놀랐다. 요새의 날씨가 기온보다는 습도가 유별나게 높은 것을 느꼈는데 이 사실을 완전히 실제로 나의 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

어제 한 ‘바깥일’은 ‘공기중의 물’을 ‘다시 쓰는’  재활용, 그것이 목표였다. 전에 쓰다가 남겨둔 water heater tank에다가 a/c 의 condensate water를 저장하는 일이다.  Water pressure가 걱정이 되었지만 water tank 의 높이까지는 안전한 듯하였고, test를 해서 거의 확인을 하였다. 그 hose를 그대로 water tank에 넣어 두었다. 이제는 기다리면 되고, water hose를 꽂아서 꽃밭에다 주면… 와~~ 이것 멋진 것이다! 더 나은 idea는 그 옆의 rain gutter의 빗물까지 그곳으로… 저장, 근사한 idea가 아닌가?

 

레지오 월례통보가 왔는데 8월  9일 단장만 참석하는 월례회의를 하고 부단장 선출을 한다고… 와~ 이런 이야기 듣든 것 ‘몇 년’ 만인가? 부단장이라… 그 벌써 3년이 되었단 말인가? 현재로서는 머리가 안 돈다. 레지오 월례회의는 물론이고 주회합 조차… 그 정도로 머리 속에서 멀어졌단 말인가?

 

 

7월 6일에 세상을 떠난 이태리 Spaghetti Western music composer였던 Ennio Morricone 의 이름을 본 후 곧바로 추억이 나를 사로 잡았다. 1968년 가을, 겨울을 가며 담배연기 자욱한 해양다방에 앉아서 듣던 The Good , the Bad, and the Ugly의 주제곡… 그것도 ‘이선화’씨와 같이 들었던 멋진 추억으로 남았던 것…

 

 

 

  1. 사실은 60세가 넘은

Father & Esperanto Friends

50년만에 다시 보는 아버지, 평창이씨 이정모. 제일 아랫줄 오른 쪽 끝에서 세 번째의 ‘작은 체구’

 

아버님, 아버지, 아빠 그리고 대한민국 에스페란토 친구들,   Esperanto Esperanto Esperanto friends..  감사합니다!

아마도 50년도 넘었을까, 마지막으로  내가 이 사진, 우리 아버님의 모습을 이 사진에서 보았을  때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보던 ‘조선 에스페란토 학회 단체사진’  한 장이 digital format으로 오늘 나의 Email InBox에 들어와 있었다. 그 한 장의 사진에 분명히,  나의 뇌리 속에서 ‘우리 아버지’라고 알고 살았던,  ‘앞 줄에 앉는 사람 중 제일 작은 남자’ 가 있었다.

이 사진은 연락이 두절된 우리 누님 집에는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세월이 이렇게 깊어지면서 아마도 나는 생전에 다시는 아버지 사진을 못 볼 듯이 살아왔다.  하지만 에스페란토가 인연이 되어서 이렇게 다시 ‘죽기 전에’ 볼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대한민국 에스페란토 친구들…

올해 2020년은 대한민국 에스페란토 창립 100주년이 되어서 대대적으로 기념행사를 준비한다고 작년부터 관계자 분들이 연락을 주셨었다. 6.25 전까지 에스페란토 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아버지, 내가 알고, 기억하고 있는 나의 아버지 ‘이정모’ 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사연이었다.

나와 개인적으로 연락이 된 것은 나의 2011년 8월,  ‘회상’ 블로그 ‘아버지와 에스페란토’가 계기가 되었다. 그 블로그는 생전 한 번도 못 보았던 아버님의 그림자를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나의 사그라져가는 기억력과 싸우며 개인, 가족, 특히 아버지의 역사를 남기고 싶었지만 6.25 발발 후에 홀연히 납북이 되신 아버님은 어디까지나 나에게는 가상적인 존재였다.

그러다가 어렸을 적부터 많이 들어오던,  ‘에스페란토’라는 이름이 떠오르고, 그 당시 집에서 보았던 각종 자료 (주로 학회지)등과 어머님의 말씀 등을 시작으로 인터넷을 뒤지고 해서 아주 기본적인 사실들을 찾을 수 있었다. 최소한 아버지의 이름이 이기 저기서 보인 것이다. 그곳에서 6.25때 납북 되신 분들의 이름들이 보였지만 아버지의 이름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을 나는 에스페란토 역사에 남기고 싶었지만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 지가 막막했는데, 하늘이 도와서 나의 블로그 가 인연이 되어서 연락이 되어 이렇게 아버님의 사진을 다시 ‘찾게’ 되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사진에 앉아 계신 아버지, 그 당시는 서울 경기고등학교 영어 교사였을 것이다. 이 사진은 에스페란토 정사에도  있듯이 ‘8월에 KEI 제5회 강습회가 개최되었는데 약 30명이 참가하고 서병택, 석주명, 이정모가 지도하였다‘ 라는 구절의 바로 그 역사적 사진이었다. 1949년 8월이니까 일년 뒤에는 민족반역자 김일성 무리들에게 납북되실 운명을 짐작이나 했을 수가 있을까? 한 개인과 가족의 역사는 이렇게 산산이 조각이 났는데, 아직도 그 반역자 세습무리 들이 북녘에서 설쳐대고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부조리의 극치’ 가 아닌가?

100주년 기념을 준비했던 관계자 분들, 역시 다른 ‘부조리’인 코로나바이러스로 실제적 기념대회는 무산이 되고 10월에 Online Conference로 대치하는 모양이다.  세계 전체가 불안하게 보이는 이 때에, 세계 평화를 갈망하던 에스페란토 창시자의 꿈의 실현은 아직도 요원한가…

칠월로 향하는 길목에 서서..

오늘 우연히 나의 손이 간 곳에 Bishop Robert BarronTo Light a Fire on the Earth  책이 있었다. 한때는 하룻밤에 다 읽을 것 같았던 것이 몇 년이나 되었다. 내용이 Barron의 해박한 지식답지 않게 읽기에도 가볍고 쉬운데 그것은,  John Allen이란 유명한 Vatican 주재, 가톨릭 journalist가 Barron과 인터뷰를 하며 거의 쓴 것이어서 그런 모양이다. 이 책을 읽으면 곧 바로 나는 Barron 주교의 ‘지성적, 영성적’ 깊이에 감탄을 연발한다. 어떻게 이런 ‘나보다 어린’ 사람이 이런 때, 세속화가 가속되는 때에 세상에 나왔을까?

나의 주관심사는 물론 그의 독특, 해박한 ‘깊은 지성에 바탕을 둔’  apologetics, 호교론 이다. 또한 어떻게 그렇게 어렵고 깊은 신학적 idea를 ‘호전적’인 무신론적 대중에게 전달하는 가 하는 것, 역시 주관심사다.  그가 Social Media를 종횡무진 오가며 일반대중과 ‘건설적인 대화’를 풀어나가는 것을 보면, 이 주교님은 한 세기에 한번이나 나올까 하는 ‘가톨릭계의 거성’ 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번에 이 ‘가볍게 보이는 책’을 다 읽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입 속 ‘느낌의 천지개벽’, 하루도 못 가서 나의 혀는 그것을 익숙하다고 말을 하는 듯하다. 그러니까… 모양새만 문제가 없다면 이렇게 살아도 ‘죽지는’ 않을 것 같다. 먹는 것, 이 없으면 잇몸이라는 말이 어쩌면 그렇게 실감이 가는 것일까? 우선 죽을 먹으니까 배고픈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니고, 맛있는 것? 그런 것 나는 참을 수 있다. 우선 ‘통증’이 사라진 것에 나는 감사하고 감사한다.

어제, ‘치과 월요일’의 여파가 조금씩 지나가려 하고 있다. 머릿속에 이 이날에 일어날 일을 잠재적으로 알기에 조금은 stress로 느껴졌지만 예전에 비하면 ‘양반’이다. 물론 이빨을 뺀다는 사실이 나를 움츠리게 하지만 이것도 나의 생애에서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추스른다 . 이번에는 드디어 3개의 ‘흔들리고, 쑤시던’ 이를 뽑았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 진 듯 (빼는 과정)..  치과를 나올 때의 날라가는 즐거움, 누구에게 ‘발설’도 못하고 속으로 가벼운 심정을 토로한다. 집에 와서 Tylenol PM을 먹고 2시간 빠져들 듯 잤더니 또 다른 개운함과 편안함이 나를 반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또 다시 새롭게 변한 ‘입안의 지도’로 나의 새로운 경험이 시작된다.  윗니가 없는 감각은 사실 생각보다 그렇게 심한 변화는 아닌 듯 싶다. 물론 씹을 때는 다르겠지만 현재까지 100% 유동식을 넘기는 것은 예전과 큰 차이가 없다. ‘치통’이 거의 사라진 희열감을 또 다시 만끽하고 싶다. 며칠 내에 그것도 정상적으로 돌아오겠지만.  이렇게 해서 나의 새로운 경험의 세월은 또 흐른다. 다음에 올 경험의 변화는 과연 무엇일까? 제발 즐겁고 편한 것이 되기를…

 

이를 거의 모두 뽑은 첫날의 음식은 죽 밖에 없었다

 

본격적으로 박기원 여사의 ‘이진섭 전기’인 ‘하늘이 우리를 갈라놓을 지라도: 이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 이진섭’을  필사하기 시작하고  이제는 속도가 붙었다. 옛날 20년 전쯤에 하도 많이 읽어서 그런지 어제 읽은 듯 반갑고 익숙하게 느껴진다. 이진섭씨의 생각과 말을 내가 꽤 많이 ‘도용’했고 빌렸던 것도 재미있다. 65세 만세론 같은 것… 지금 내가 70세가 훌쩍 넘으니 이 ‘준재’ 님 아깝게도 나이 60에 일찍 가셨다는 생각이고, 이제부터 나는 누구를 ‘따르고, 모방’하며 살아야 할지 난감하다.

 

일주일 만에 순교자 성당 미사에 ‘참여’를 하였다. 오늘은 지난 주에 비해서 교우들 숫자가 확실히 많은 것으로 보인다. 아마 100명 한계에 도달했을까? 오늘 신부님의 강론은 예상을 벗어나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 지난 주에 조금 실망을 해서 아예 녹음을 하지 않더라니… 하지만 나중에 다시 녹화된 것을 보면서 녹음을 하였다. 중요한 복음중심의 메시지를 비교적 간단한 주제로 깊이, 하지만 쉽게 전달하는 스타일이 바로 이 신부님의 독특한 것이다. 신학적 깊이를 드러나지 않게 일상적 예를 들어 쉽게 드러내는 것이다.

 

 

오늘 미사 끝에 구역장 임기를 마친 것에 대한 상패 수여가 있었다. 나는 만감이 교차하는 조금은 착잡하고 씁쓸한 기분이 되었다 벌써 2년이 흘렀구나… 나는 도중하차 했지만 하늘을 걸고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을 한다. 하나도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신부님이 7월 초부터 9월 중순까지 한국엘 간다고 (예수회 일로), 임시로 사목할 신부님이 이미 오셨다고 했다. 이래저래 우리의 성사,  레지오, 교회생활은 어떻게 될 것인지 정말 불투명하게 되었다. 오늘 말씀이, 7월 중에도 성당 단체들의 활동이 제한적일 것이라고… 단체들은 ZOOM video 를 통해서 모임을 하라고 한다… 우리 레지오는 이런 가상적 모임은 상상할 수가 없어서,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정말 난감하다…

 

은비령, 드디어 ‘탈고’를 하고 ‘출판’을 했다. 아주 빨리 끝낸 듯 느끼고 있었지만 사실은 거의 2주 만에 끝난 것이었다. 하기야 그 동안 이것에 매일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느니 2주면 빠른 것이다.

이 소설의 느낌에서 내가 공감, 동감, 빠져드는 것들이 꽤 있었다. 산, 눈, 우주, 여자… 등등… 하지만 끝 부분에 나는 큰 사고를 겪었다. 이 작자의 1992년 소설 ‘압구정동..’ 어쩌구 가 있어서 잠시 훑어보다가 그만 shock를 받고 다시 서가로 쫓아 보냈다. 어쩌면 그렇게 ‘음란성 묘사’를 잘 해 놓았는지… 한마디로 은비령의 인상이 거의 지옥으로 떨어지는 느낌으로, 잊기로 했다. 이 작자가 그런 묘사를 했다는 것은 분명히 porno 음란성 매체에 가까이 했거나 심취 했다는 사실이 아닐까? 이것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가? 잊자, 그저 잊고, 은비령의 ‘정수 精髓’ 만 나의 것으로 남기자.

 

요사이 무척 많은 ‘續, new’ 역사스페셜 video를 download하였다. 유인촌의 classic series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그 후의 것은 적응하려면 시간이 조금은 걸릴 것이다. 하지만 현재 까지 HD series ‘고두심’  진행은 별로인 느낌이다. 사회자, 진행자로서의 표정이나 목소리가 ‘역사’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실망이었고,  전원일기의 고두심이란 원래의 인상이 흐려지는 느낌으로 남게 되었다. 그 다음 것은 더 보아야 하겠지만, 역시 유인촌 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듯하다.

KBS 역사 스페셜  ‘삼국사기의 역사논쟁‘  video를 보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삼국사기 책을 모두 해체하는  장면을 보고, 나도 나의 ‘古書’ 만화책: 내가 1962년에 그린 만화, ‘민족의 비극을 그렇게 해 보는 것… 그러니까 ‘해체’ 해서 scan하고 복원하는 것…. 이것도 시간이 났을 때 하는 것, 재미있지 않을까?

 

 

Binge Watching 田園日記

 

1980년대 대한민국의 대표적 장수 長壽 농촌드라마, 전원일기 田園日記, 그 중에서도  ‘응삼이’ 이야기…  코로나 Pandemic이후 특히 요새 너무 자주 보게 되어서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binge watching인가? 몸이 아프거나, 갑자기 옛날이 그립거나, 어머니가 생각날  때, 나를 그런대로 따뜻하고 포근하게 하는 것이 의외로 전원일기의 응삼이 series 였다. 이런 것이라도 있으니 나는 한시름을 잊을 수가 있었다. 내가 서울토박이여서 그런지 농촌의 주는 그 독특한 향수 鄕愁는 다른 곳에서 찾을 수가 없다.

고향을 떠난 이후에 나온 드라마라서 한번도 실제로 이것을 그 당시에 본적이 없었다. 1980년 대라서 아마도 VHS video tape으로 보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제목은 들은 적도 있었고, 최불암, 김혜자 같은 heavy급이 나온다는 사실도, 새로운 얼굴로 유인촌이란 사람이 인기라는 등은 귀동냥으로 듣고는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심심한 사람이 이것을 아마도 cable TV로 녹화를 했는지 비록 저질의 영상이지만 많이 Youtube에서 볼 수가 있게 되었고, 나는 그것을 download해서 이렇게 보게 된 것이 사연이다.

1980년대의 대한민국 농촌의 실상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사회역사 공부를 하는 셈이고, 당시에 유행하던 유행가, 유행어, 옷 fashion등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1980년대 거의 10년 간 방영이 되었다고 하니, 이것은 아마도 고국에서는 거의 모두 보았을 듯하다.

 

첫 처가집 나들이, 장인 장모가 따뜻한 안방을 내어주고 냉골에서 잔다

 

내가 본 것 중에서 제일 많이, 자주 보게 된 것이 바로 박응삼 청년의 결혼 전후의 이야기이고 특히 ‘처가말뚝’이라는 episode에 나오는 장면들이다.  나의 결론은 이 박응삼 역의 탈렌트가 이 드라마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우수한 연기를 했다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면 응삼이가  가까스로 골인을 한 결혼 이후 첫 처가집 나들이를 갔다가 그 집의 구들장에 문제가 있는 것을 고쳐주는 따듯함과, 장인장모에게 ‘저는 너무나 행복합니다, 꿈이라면 깨지 않게..’라는 말을 계속하는 그의 천진스러운 모습 등등… 그 당시에 이렇게 ‘정겹게, 구수하게, 자연스럽게, 매끈하게’ 연기한 탈렌트, 배우가 없었을 듯 하다.  이 박응삼 역의 탈렌트의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이후에 크게 성공을 했는지, 현재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다른 역’ 일용이네’ 복길이 엄마로 나온 탈렌트가 얼마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을 흘깃 보기도 했는데, 나이가 73세라고… 그러면 나와 비슷했던 동년배? 새로운 놀라움이다. 이제는 이 전원일기, 사실 나와 직접 연관된 이야기는 하나도 없지만,  하도 계속 보게 되니 지금은 거의 나의 것이 되었다.  혹시 이 드라마 전체가 녹화되어 있는 DVD는 없는지…  1080p 고화질 영상으로 이것을 다시 불 수 있으면… 하지만 이것은 나의 꿈일지도 모른다.

 

망가진 처가집 온돌방을 그날로 다시 돌아와서 고쳐준 후, 정겨운 식사를 하는 응삼이

사위 응삼이의 이 환한 웃음… 정말 명연기였다

 

回想: 청옥산 靑玉山 追憶

제1차 산행 때의 유일한 사진… 청옥산 정상 부근

지금부터 거의 50년 전 어떤 산행의 기억을 더듬게 되었다. 물론 다시 보게 된 퇴색되어가는 사진 몇 장 때문이다. 머리에서 거의 사라진 그 당시 대한민국의 산악의 느낌도 느낌이지만 그것에 연관된 두 명의 아가씨들,  끝을 못 맺은 로맨스, 숨가쁘게 악화되어 가던, 유신체제로 치닫는 정치국면을 피하려 도피하고 싶던 때, 이 땅을 떠날 것이냐 말 것이냐 등등의 산적한 문제들.. 그것에 대한 해답이 청옥산으로 가는 것이었다.

 

몇 개월 깊게 사귀던 이문아 씨, 그리고 생각나는 다른 한 명의 아가씨, 그녀의 여고 동창, 엄순옥씨, 너무도 또렷이 생각나는 그녀들의 얼굴과 얽힌 추억들. 나의 20대 초의 개인역사에서 이 두 아가씨들은  빼놓을 수는 없다.  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은 미스 엄과 둘이서 갔던,  두 번에 걸친 강원도 영월, 평창, 정선 사이에 위치한 청옥산 靑玉山 (그 때는 청악산으로 이름을 잘못 알고 있었다) 등산여행, 바로 그것이다. 이 산은 사실 엄청 높았던 산도 아니고 유별난 산도 아니었다. 나중에 백두대간의 산들 중에 이 산의 이름이 있어서 혹시… 했지만 이름만 같았을 뿐이었다. 백두대간의 것은 그야말로 1,400 미터가 넘는 고산이었다. 3개의 산 이름이 모두 청옥산이었는데 나머지 것은 경상도에 있던 것이었다.

1971년 대학 졸업 무렵 전후로  깊이 사귀었던 문아씨 와 ‘어렵게’ 헤어진 후  그녀의 동창 친구와 그렇게 둘이서 등산 여행을 했다는 사실은 보통사람들이 보면 이해가 안 갈 것이다. 내가 지금 생각해도 그러니까.  하지만 그 당시에 나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다. 주위의 생각을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나의 의식 수준이 그 정도로 성숙하지 않았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 당시 나는 그런 것들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듯 싶다. 단순하다고나 할까 바보같이 순진하다고나 할까.

그녀와 일방적, 운명적으로 헤어진 후 나는 그 허탈감과 허전함을 그녀의 동창생인 미스 엄과 등산을 하면서 풀려고 한 것이지만 그 이외의 남녀간의 불순한 의도는 전혀 없었다. 둘이 다 산이 좋았고 어디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들이 어울렸던 것이다. 사실 나보다도 그녀에게 더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20대초의 남자와 둘이서 집을 떠나서 며칠 동안 등산여행을 한다는 사실은 그 당시의 사회적 여건으로 봐서 그렇게 단순치 않았으니까.

 

첫 번 청옥산 등산여행은 1971년 겨울이었고 두 번째는 1972년 봄, 아마도 4월쯤이었다.  청옥산은 강원도 영월, 평창을 지나서 정선 쪽 부근에 있었다. 그곳은 사실 그녀의 집안과 인연이 있고,  (어머니) 다니던 절이 있었던 곳이기도 했다.  전에 가족들과 이곳을 다녀갔기에 그녀는 안심하고 나와 같이 갔는지도 모른다. 1971년 겨울, 아마도 12월.. 제1차 등산여행, 모든 것을 그녀의 안내에 맡기고 떠났다. 집에는 물론 혼자서 등산을 간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이것이 쉽게 통했던 이유는 그 훨씬 전부터 혼자 등산을 갔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 가을 치악산을 혼자서 등산을 며칠 한 적이 있었다. 그때 혼자서 가는 등산의 맛과 멋을 깨닫기도 했다.

당시 강원도 쪽으로는 고속도로가 없었고, 유일하게 경부 고속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었던 때, 중앙선 완행열차를 타고 단양에서 내려, 거기서 시외버스를 타고 영월을 지나고 평창을 지나고 정선 쪽까지.. 그 당시만 해도  강원도 시골을 ‘모든 것이 낙후된’ 시골이었다. 등산 때마다 시골을 많이 다녀서 대강 그곳의 경제수준을 알고 있었다.  감자바위로 불리던 강원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산세가 험하던 태백산 줄기.. 나의 선조 평창이씨 平昌李氏 본관 本貫 이 있던 평창을 지나면서 감회가 깊었다. 정선은 아리랑 밖에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시외버스에서 오후 늦게 내린 첫날은 산자락으로 들어가기 전에 해가 저물어서 어떤 농가 집에서 민박을 하게 되었다. 암만 누추해도 나는 시골의 구수한 집 분위기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불편한 게 거꾸로 더 편하게 느껴지는 듯한 묘한 그런 것이다.

그 초가집, 농가, 우리가 민박한 집의 아주머니는 시골 애기엄마치고 아주 수려하게 생긴 젊은 아줌마였는데,  친절하고도 수줍게 우리 민박을 시켜주었다. 12월 초겨울의 저녁 어둠이 서서히 깔리던 때 갑자기 나타난 남녀 등산객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방을 내어준 준 그 젊은 애기 엄마,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다. 

그런데 조금 불가사의 한 것이.. 미스 엄과 같은 방에서 잤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등산복 차림으로 sleeping bag 속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새우잠을 잔 것이지만, 나중에 이 사실을 친구들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알고 우리가 조금 외계에서 온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서로 아무런 생각도 없는 듯이. 그야 말로 아무 생각도 없이 편하게 같은 방에서 남녀를 의식하지 않고, 친구처럼 잔 것이다. 나를 기본적으로 믿어준 그런 미스 엄이 편하고 좋았는지도 모르고 거꾸로 그녀도 그런 내가 편했는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진,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이여..

 

그 다음날 가파른 경사의 힘들고 지루한 등반 끝에 청옥산 거의 정상 밑 벼랑 끝에 위치한 사찰에서 배낭을 풀었다. 아쉽게도 그 절의 이름이 전혀 생각이 안 난다. 미스 엄의 집안이 이 절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아주 그 절에 익숙한 듯 보였다. 그 당시 이 절에 대한 기억은 별로 특별한 것이 없었지만,  청옥산의 정상 부근 다른 쪽에 위치한 화전민이 사는 집의 기억은 특별하고 생생하다. 추운 겨울에 대개 화전민들은 아랫마을로 내려가는데 그 집은 예외였고, 그 곳 역시 미스 엄이 개인적[집안끼리] 으로 아는 집이었다. 어떤 관계인지 묻지 않았지만, 지금도 나는 꿈이나 영화에 나올 듯 그런 전설적인 기분으로 그곳을 기억한다.

그 집에는 화전민 중년 부부와 다 큰 아가씨가 살고 있었다. 그 때는 이미 눈이 허리춤까지 쌓여있던 때여서 아마도 한 겨울을 그곳에서 세 식구가 나는 모양이었다. 그런 곳을 미스 엄과 둘이서 눈을 헤쳐가며 그곳엘 가서 하룻밤을 거기서 묵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 화전민 딸 아가씨가 쓰던 조그만 방에서 셋이 같이 잔 것이다.  이것도 지금 생각하면… 참, 재미있지 않은가? 같은 방에서 처녀 둘과 스스럼없이 친구처럼 잤다는 사실이 눈물겹도록 깨끗하고 순수한 것이…

눈 雪이 허리춤까지 강산처럼 내린 청옥산의 정상자락의 화전민 집.. 귀를 에이는 듯한 차가운 바람소리, 요란한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그 조그만 방에서 서로의 젊은 관심사를 이야기 하며…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너무나 잊지 않고 싶은 추억들이다. 아가씨가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라디오를 유일한 오락기구로 삼으며 남진의 노래도 그렇게 좋아했지만 예외적으로 수준 높은 노래들도 좋아하던 활달하고 귀여운 그 아가씨..  강원도 감자바위 시골의 인심, 그 푸짐한  밥상을 대하는 것이 참 고역이었다. 밥을 그 큰 밥공기의 거의 2배로 담아서 주는데, 흰 쌀밥도 아니고, 반찬은 거의 없고.. 하지만 절대로 남기면 실례이고..  하지만 참 당시 시골의 좋은 인심이 아니었을까? 단 한 장의 흑백사진이 남았던 제1차 청옥산 등반여행은 그렇게 기억에 남는다.

 

1972년 이른 봄, 제 2차 청옥산 등반여행은 다행히 흑백 사진이 몇 장 남아있다.  몇 개월 후에 어떻게 다시 미스 엄과 연락이 되었는지 자세한 사연을 잊었지만 사실 헤어진 여자친구의 친구를 이렇게 만난다는 사실이 조금은 이해가 잘 안 되지만, 그 당시에는 큰 문제로 여기지를 않았다. 사진을 보니 나만 보인다. 왜 그랬을까? 분명히 그녀도 사진에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데 아마도 사진 정리 때 없어졌거나, 어머니가 다 버렸을지도…  그때는 화창한 초봄 무렵의 등반이어서 산의 분위기가 전번과 달랐다. 그리고 이번에는 산자락 밑 사찰로 올라가는 길에 있던 어르신들이 모여 계시던 어떤 민가도 방문을 하게 되었다. 미스 엄의 집안과 그곳은 무슨 관계가 있었던 듯 싶다. 그 민가에는 어르신네들이 많이 계셔서 나는 사실 참 불편하였다. 나의 자란 환경과 배경 때문인지 나는 남자 어르신들과 어울리는 게 그렇게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 예의를 갖추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비록 불편하더라도. 

1972년 이름 봄, 제 2차 청옥산 산행에서는 날씨도 비교적 따뜻하고 한번 와 보았던 곳이라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 생각이 잘 안 나는 것 중에는, 지난번에 와서 보았던 화전민가족을 또 보았나 하는 것이다. 분명히 그때 그  화전민 집을 우리는 찾아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미스 엄.. 당신은 기억하십니까? 추억에 대한 기억력이 비상한 나도 지금의 나이에서는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느껴진다.

2차 등반 때는 전과 달리 정상 부근에 있었던 사찰 생각이 많이 난다. 며칠 간을 거기서 먹고 자고 했으니까. 무슨 시골 여인숙 같은 분위기의 절..  풍경소리도 나고.. 그때 나는 첫 번째 왔을 때처럼 여러 명이 기거하던 사랑방이 아니고, 독방에서 혼자 잔 기억이다. 진흙 벽이 보이고 벌레가 기어 다니는 방바닥이었지만, 정말 그렇게 포근하고 아늑한 기분일 수가 없었다. 이 절에서 잤던 느낌은 현재까지도 나를 너무나 포근하게 만들고 죽기 전에 이런 분위기의 절에서 한번만 자 보았으면 하는 평생의 소원이 생겼다. 옆 방에서 계속 들리는 독경, “아바사바 아바..” 로 계속되는 불경, 그때 처음으로 나는 불경 책을 볼 수가 있었다. 그게 아마도 불교 경전일 것이다.

민가들이 있던 산 밑자락에서 조금 올라 온 곳에 거의 움막 같은 집 [거의 움막의 수준]이 있었는데, 듣고 보니 거기서 어떤 ‘서울 여자’가 혼자 사법고시 공부를 했다는데 나중에 붙었다고 들었다. 그것이 거기서는 큰 경사였던 모양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계속.. 운명적으로 헤어진 문아 씨와 그녀의 친구 미스 엄을 다시 생각한다. 살아 있을까?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그들도 반세기 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까?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다. 그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을 그대로 죽을 때까지 기억하고 싶으니까…

 

제2차 청옥산 산행, 1972년 초봄


Footnote:  50년 후에 회상하는 청옥산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것, 처음에는 그야말로 piece of cake! 50년 축적된 digital power Google Map을 믿었지만 결론적으로 역부족이었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것’ 만으로는 부족한 듯하다. 땅 위를 걸었던 인간들의 스토리가 필요한 듯하다. 마지막으로 찾은 것,  평창과 정선 사이에 있는 ‘미탄면 소재 청옥산’이런 말이었지만 그것이 끝이다. 그때 우리가 묵었던 민가와 사찰의 위치와 이름은 과연 무엇일까?

 

끈끈한 유월 초순에..

지난 밤 자다가 갑자기 끈끈함을 느끼며 서서히 정신이 너무나 말똥거리고 그 ‘덕분’에 주위의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불면증의 괴로운 밤을 보냈다. Ceiling fan의 도움으로 조금 끈끈함은 물리칠 수 있어서 새벽녘에 조금 잠을 잤는데. 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결과적, 공식적으로 나는 밤잠을 자긴 잔 것이다. 갑자기 습도가 뛰어오른 것인데, 아마도 shower를 안 하고 잔 것 때문에 더 끈끈하게 느꼈던 것 같다. 솔직히 내가 제일 싫어하는 그런 type의 날씨가 예년에 비해서 일찍 온 것인가… 옛날 고국에서 7월 초부터 느꼈던 ‘장마성’ 기후와 비슷한 것이다.

3월 중순부터 시작된 코로나-19 Pandemic 이후, 매일 그날이 그날 같은, 나의 머리 속을 조금 현재와 다른 것으로 청소하고 싶은데, 그 방법이 문제다. 며칠 집을 떠나는 것이 제일 효과적임은 알지만 지금 여행하는 것은 한마디로 stupid한 것이다.  설사 여행이 자유스럽다고 해도 우리는 둘 다 집을 떠나는 것은 고생으로 느끼기 때문에 역시 Home Sweet Home 안에서 여행을 해야 하는데,  어떤 식으로 우리의 머리를 청소할 수 있을 것인가?

 

어제는 순교자 성당의 공개된 주일 미사가 있었지만 우리는 65세 권고를 받아들여 집에서 온라인 미사를 보았다. 작은 놀라움은, 예상을 뒤엎고 교우들의 숫자가 공개미사 첫날보다 적었다는 사실이었다. 신부님도 꽤 실망을 한 듯한 표정. 또한 참석한 대부분이 ‘고정멤버’들인 듯 보였는데 그들의 나이도 만만치 않아서, 도대체 비교적 젊은 층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인가? 각자의 사정이 다 있겠지만 아주 젊은 세대가 주로 오는 토요일 특전미사는 아예 당분간 중지한다는 발표까지 있었다.  아마도 모두들 아직까지 조심들 하는 것이겠지만 참 어려운 문제다. 불현듯 모든 권고사항을 무시하고 우리도 평상시처럼 가볼까 하는 충동까지 들었다. 이것도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현명한 결과가 안 나올지도…

 

삼위일체 대축일 주일미사 강론 – 이영석 세계자 요한 주임 신부님

 

이날 오후에는 김계환 안토니오 형제님의 가족장례미사가 있었을 것이다. 호스피스로 옮긴지 불과 하루 만에 선종하신 것인데, 이분에 대한 기억도 그렇고 그렇게 열심히 ‘소리없이, 조용히’ 봉사하신 분도 드물어서 애석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연도, 장례미사에 가 본지 도대체 얼마나 되었는지, 정말 그런 연령 행사가 고인과 유족들은 물론이고 함께 한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희망과 위안을 주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나의 blog post 가 드디어 1,000을 넘었다. 십 년 전부터 post 했던 ‘원래’ blog에 덧붙여 그 이전 것을 조금 더했기 때문에 1,000의 의미는 조금 퇴색했지만 그래도 이것은 조그만 이정표 역할을 한다. 1,000… 에다가 10년이 넘었다는 사실은 나도 놀란다.  나는 이렇게 오래 끈기 있게 했던 것이 별로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모두 이런 ‘좋은’ 습성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언제까지 이렇게 갈 지는 솔직히 나도 모른다. 우리가 어떻게 변할 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posting하는 작업 자체는 나를 하루하루 ‘제 정신을 가지고’ 살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됨은 분명하다.

 

아~ 청옥산…  얼마 전부터 자꾸만 ‘청옥산 靑玉山’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백두대간 중에 청옥산이 있음을 알고부터였다. 나의 추억으로 알았던 ‘청악산’이 사실은 청옥산이었음은 오래 전에 알았다. 왜 이때의 생각이? 아마도 나의 잠재적인 ‘현실도피’의 표현이 아닐까? 눈이 쌓였던 산봉우리, 화전민 집의 아가씨, 풍경소리 은은하던 사찰의 진흙 벽 방… 모든 것이 꿈처럼 아름답고 그립기도 하다. 이것에 대한 ‘회상기’를 한번 블로그로 써보는 것도 기분 전환을 하는데 도움이 될 지도…

청옥산을 googling하면서 새로운 사실은 대한민국에 청옥산이란 이름은 3곳이나 있다는 사실이고, 이중에 두 곳의 청옥산은 모두 강원도에 있고 다른 곳은 경상북도 봉화군에 있음도 밝혀졌다. 게다가 백두대간 중의 하나인 1,400m의  청옥산은 내가 갔던 곳이 아님을 알고 조금은 실망을 하게 되었다. 내가 간 곳은 삼척시 부근이 아닌 평창군 (미탄면) 부근의 산이었음도 확인을 하였다. 문제는 그 산이 Google map에 아직까지 안 보인다는 사실이다.

 

Deep Cleaning, 어제 무려 15년 만에 main bathroom tile grout에 깊숙이 스며든 곰팡이 자국들을  모조리 긁어내었다. 15년 만에! 어떻게 이렇게 우리는 게으르게 살았는가? 누구를 탓하지 말자… 유혹은 강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조금 더 깨끗한 환경에서 살고 싶은 것 뿐이다. 골치를 썩히던 shower door frame 문지방을 최신의 design으로 바꾸는 것, 이것은 그야말로 metal work이었다. $23 을 아끼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내가 하고 싶었다. 결국은 해 내었다. 이것이 이번 일의 보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 갈고 닦아 모든 것이 반짝거리지만… 언제까지 그 맑음을 간직하겠는가…

이렇게 해서 일은 모든 끝났지만, 생각을 한다. 이런 일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니 10년이 아니라 1년에 한번씩 대청소를 하면 이렇게까지 힘과 시간이 들지는 않을 듯해서 앞으로는 일년에 두 번 정도 간단히 하기로 생각을 맞추었다.

 

거의 완전히 복원 된 main bath tub shower closet

 

새로니의 Vegetable Container, 지난 토요일 첫 손자 Ronan의 백일축하 모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Sandy Spring에 있는 새로니 집엘 잠시 들려서 백일음식을 전해주었다. 새로니는 완전히 방학이 되어서 stress가 많았던 online class  가르치는 것이 피곤한지 요새는 거의 완전히 gardener, 그것도 vegetable gardening에 심취를 하고 있었다. 엄마의 영향을 받기도 했겠지만 요새 아이들 모든 것을 science & technology의 시각으로 각종 야채들을 그 좁은 deck에서 잘도 기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Tobey를 보는 듯한 Ozzie를 다시 보니 눈물이 날 정도였다. 그 녀석도 우리를 보고 깡충깡충 뛰며 오줌까지 흘릴 정도였다. 다시 나는 2년 전 6월 19일 날 세상을 떠난 나의 Tobey 모습과 이 녀석의 모습이 함께 어울림을 느낀다.

 

 

Memorial Day, No Barbecue…

 

¶  Memorial Day, No Barbecue… ‘비공식적인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5월 마지막 월요일 Memorial Day를 조용히 맞는다. 아직도 코로나 사태의 무게를 느끼며 맞는 여름시작의 휴일.  가족 이외의 그룹이 모이는 것도 조심스러운 상태. 기억으로 이날은 가족끼리 아니면 우리 둘이라도 deck에서 barbecue grill을 하고 beer를 마시던 추억들이 남지만, 올해는 아무런 계획 없이 let it be 하는 심정으로 이날을 맞는다.

연숙이 조금 피곤한 듯, 오늘은 나 혼자서 걸었다. 코로나사태 이후로 이 산책 길에서 새로운 얼굴들, 특히 비교적 젊은 가족들을 많이 새로 보게 된다. 우리 동네가 훨씬 젊은 느낌을 주는 듯해서 반갑지만, 다른 쪽으로 생각하면 이렇게 해서 우리 같은 ’60/70/80 세대’는 서서히 사라져가는 느낌, 그야말로 never die, just fade away..의 심정인 것이다.

 

¶  顯忠 斷想  성조기 Stars & Stripes 가 유난히 많이 눈에 띄는 subdivision 산책길을 가면서, ‘현충 顯忠’이란 의미를 생각한다.  현충, ‘두드러진 충렬 忠烈, 충렬을 높이 드러냄’. 구체적인 의미로 이것은  국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숨진 사람들의 충렬을 기리는’것이다. 미국의 현충일이 바로 오늘 Memorial Day인데, 날짜가 5월 말에 있어서 더운 여름의 기후와 맞물린 휴일이고 보니, 바람직한 엄숙함보다는 휴일의 한가함이 더욱 드러나는 그런 날이기도 하다.

나라를 위해 싸운다면 전쟁을 겪은 군인들이 제일 먼저 손꼽힌다.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태어났지만 애석하게도 군대나 군인의 근처에도 못 가 보았다. 호적상의 이유로 그렇게 되긴 했고, 그 젊었던 시절에는 하나의 ‘공짜, 혜택’으로 받아 들였다. 당시의 사회적 여건으로 보아서 군대 안 가거나 못 가는 것, 그렇게 흠이 될 것이 아니어서 두 번 다시 생각을 안하며 살았지만, 사실은 주변에 흔히 보는 재향군인들을 보면 부끄러워진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들은 나라에 제일 중요한 충성을 한 것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이와 연관되어서, 두 나라에 충성을 하는 것, 언제나 머릿속 깊은 곳에서 나의 의식을 건드린다. 이곳의 또래들이 대한민국을 걱정하는 데 너무 열을 올리다 보면 반드시 이 문제가 걸린다. 미국과 한국의 이해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도 아니고, 장래에는 더욱 그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이럴 때 어떻게 ‘충성의 선택’을 할 것인가? 간단치 않다.

 

¶  주일미사 미사강론과 공지:  어제는 그리스도교회가 탄생된 ‘성령강림 대축일 Pentecost Sunday‘ 일주 전으로 ‘주님승천 대축일 The Ascension of the Lord‘이었다. 부활주간이 서서히 물러가며 4번의 대 축일이 이어진다. 교회 전례력에서 일년 중 가장 중요한 축일들이 시작된 것이다. 올해는 예외 중의 예외로 모든 것들이 비공식적 전례로 바뀐 것이다. 어떻게 그 놈의 ‘우한바이러스’는 이런 때에 이곳에 들어온 것인가? 우연일 듯도 하고 아닐 듯도 한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글자 그대로 보면,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갔다’ 고 나온다. 이것을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석을 할 것인가? 어떤 영화를 보면 글자 그대로 구름 속으로 둥둥 떠오르는 것을 묘사한 것도 있었다. 소위 깨었다는, 이성적, 과학적이라는 인간들은 그런 것들을 ‘고대적 신화’라고 재미있게 조롱하곤 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과연 그럴까? 과연…  정말 확실히 그 묘사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그 ‘과학적 방법’으로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가? 의심의 여지는 없는가? 이것이 믿음의 관건이다.

이날 공지사항에서는 대교구의 ‘대교구 미사 제한적 재개’ 방침이 알려졌고 순교자 성당도 5월 30일 토요일 특전미사부터 공식 재개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제한조건이 꽤 심각한 것으로, 관건은 이 조치를 보조할 ‘(자원)봉사자’들이 확보되는 것이었다. 매 미사 때마다 봉사자가 점검이 되고 안 되면 미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이 골자였다. 미사 참례인원 100명 이내로, 모든 미사 외의 모든 활동 중지… 미사 중 신자들은 소리를 낼 수가 없다… 등등.. 이것이 소위 말하는 제1단계 미사재개의 모습이다.

이제 우리는 선택을 할 때가 온 듯하다. 우선은 6월 달 동안은 온라인 미사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고, 예외적으로 가끔 성당엘 가는 것은 OK, 정도로 의견을 모았다.

 

¶  HP P1102W: Saved by the bell:   얼마 전에 갑자기 ‘죽어버린’ 우리 집의 main laser printer HP P1102W, 근래에 들어서 hard copy print를 할 일이 거의 없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불편할 수 있는 노릇이 아닌가? Backup printer로 Color Inkjet printer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Ink값이 장난이 아니라서 또한 불편하다.  이런 기회에 종이의 양면을 자동적으로 print 할 수 있는 Automatic Duplexer가 있는 것을 장만하면 어떨까 하고 Brother Printer를 Amazon에서 사게 되었다. 값이 상당히 저렴해서 자세히 보니 역시 reconditioned 인 것, 그러니까 return된 것을 다시 test해서 파는 것이었다. 물론 나에게 그런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printer를 받아보니… 이럴 수가? Toner cartridge를  printer에 넣으려니 들어가지를 않는 것이었다. 혹시나 맞지 않는 toner를 보냈나 하고 자세히 보았지만 그것은 맞는 toner였다. 그렇다면? Printer를 자세히 살펴보니… 와~ 해체를 했다가 다시 조립한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 한마디로, ‘찌그러진’ 상태로 조립을 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이제는 대 大 Amazon의 quality control도 못 믿게 되었다. 이런 적은 아마도 나의 기억에 한 번도 없었다. Toner가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엉망으로 재조립을 했다는 사실에 놀라고 놀랍기만 하다. 당장 return process를 시작하고 UPS에 갖다 주면 끝나지만 Amazon에 대한 신뢰감이 떨어진 것은 분명하다.

 

버려지기 일보 직전에 구출된 정든 printer

 

다시 printer를 order하려는 와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Not So Fast… 갑자기 죽어버린 printer가 왜 ‘갑자기, 조용히’ 죽었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거의 쓰레기통에 들어가기 전에 분해를 하려고 애를 썼는데… 이것, 유난히도 어려워서 포기하였고, 마지막으로 한번 다시 전원을 켰는데…..  이 사실도 믿을 수가 없다. 그 printer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완전한 상태로… 내가 죽었다고 판정을 내린 것이 시기상조가 아니었을까? 한마디로 그것은 ‘가사상태, 죽은 듯이 보인 것’ 뿐이었다. Power system도 요새는 많이 digital circuitry화 되어서 어느 정도 ‘기억’을 하기에 만의 일의 사태에 이렇게 완전히 power system이 lockup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의 불찰은, 그것을 좀 더 오래 두고 보아야 했다.

결과적으로 괜히 돈을 쓸 필요는 없어졌지만 그래도 내가 원하던 Automatic Duplex printer는 물 건너가게 되었다. 또한 한때 죽은 것처럼 보였던 정든 printer가 생명체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니까 죽지도 않은 사람을 관속에 묻기 일보 직전에 살아있음을 알고 구해내는 것, 이것이 바로 Saved by the bell의 그림이 아닌가?

오래 전만 해도 의학기술의 미비로 사람이 죽었다고 판정을 내리는 것,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때, 가사 假死 comatose 상태의 사람을 생매장 했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나중에 관을 열어보았을 때 어떤 관 속에는 나오려는 흔적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는 관 안에서 밖으로 연결된 종을 달아놓고 의식이 돌아오면 그것으로 ‘살려줘!’ 하고 알렸다는 얘기, 그것이 바로 Saved by the bell… 이번에 나의 정든 오래된 printer가 바로 그런 case였다. 미안하다, 나의 정든 printer야!  너의 수명이 진정으로 다 할 때까지 사랑으로 돌보아 주고 마지막 예우를 다해 줄게… 

다른 한편으로,  이말 Saved by the bell 은 1969년 Bee Gees에서 solo가 되어 부른  Robin Gibbs의 single hit song이기도 했다.  잠시 그 당시 이 노래에 심취했던 ‘황금의 청춘’ 시절을 회상할 기회가 되었다.

 

 

Saved by the bell, Robin Gibbs, 1969

 

 

First of May, again..

원서동 죽마고우들, 또 일 년이 흘렀구나..

 

용현아, 창희야~ 또 일년이 흘러갔다. 나이에 정비례해서 흐르는 세월 흐름의 느낌으로 현재 우리들은 시속 70+ 마일로 질주하는 인생열차를 타고 ‘그곳’을 향해서 꾸준히 가고 있는 중일 거다.  관심사는 각자가 탄 열차가 언제까지 갈까 하는 것.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운명과 우리들의 삶에 대한 생각과, 의지에 달려 있지 않을까? 아마도 창희는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더 잘 알 거야. 

어렸을 적에 생각했던 중년, 노년의 삶이란 것, 그저 세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모든 것들이 점점 조용해지는 듯한 수도자 같은 삶을 연상하기도 했지.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지.  자연의 아름다움도 그대로, 옛날에 이성을 볼 때의 감정 지금도 전혀 다름이 없고, 선과 악은 존재도 전혀 변함이 없고… 하지만 의아했던 것은 우리보다 젊고 멋지게 보이는 사람들이 세월이 갈수록 많아지는 사실만은 어쩔 수가 없었지.

우리들, 우리 세대들은 분명히 부모님 세대보다는  조금 더 잘 먹고 자라서 그들보다 건강하고 오래 살 것은 분명하지만, 나머지는 그때나 별로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6.25 나 4.19같은 민족의 격동기를 다른 의미로 고스란히 겪었고, 우리를 낳아준 조국, 대한민국의 변치 않는 정체성도 같은 시각으로 보았지. 하지만 우리가 보는 앞에서 우리들 자식세대들이 서서히 우리와 생각을 달리함을 보는 것이 이제는 그다지 이상하지 않게 되었구나.  국가관, 정치적인 idea를 떠나서 과연 진정한 민주주의란 것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할 때가 아닐까?  나무만 보지 말고 숲, 산, 우주를 보는 조금 더 넓은 ‘나이 듦의 아량’을 자식세대에게 보여주면 얼마나 좋을까.

친구들, 올해 나는 드디어 할아버지가 되었다. 너희들의 소식은 전혀 알 길이 없지만 분명히 벌써 잘하면 증손주까지 보았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 또래에서는 그렇게 이상하지 않으니까. 코로나 바이러스로 우리 또래들이 초비상이지만 모두들 조심하며 충분히 오래 살다 가면 좋겠다. 원서동 죽마고우들, 내년 May Day에 또 만나자…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