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평창이씨 이만수씨

얼마 전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레지오 회합이 끝난 후에 연도가 있었는데, 그곳 가족의 대표 중에 평창이씨, 이만수씨가 있었다. 2002년 5월 이맘때쯤 마지막으로 보고 처음인 것이다. 그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만수씨 아버님, 이주황 선생님께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셔서 장례미사를 했을 때였다. 공교롭게도 이번도 비슷한 연도, 하지만 이번은 만수씨의 장인어른의 연도였다.

이만수씨 가족은 우리가 1989년 아틀란타로 이사를 오면서 만난 첫 ‘가정’중의 하나다. 이것도 인연일까. 지난번에 위스컨신주의 매디슨에 살 당시를 회고하는 글을 썼을 때, 그곳에서 나는 강정열 박사님 댁에 대해서 언급을 하였는데, 이만수씨네 가족은 강정열 박사님의 사모님의 남동생 되시는 이주황 선생님의 가족인 것이다.

이만수씨는 이주황 선생님의 장남이었고 그 집은 나와 같은 평창이씨 가족이었다. 매디슨과 평창이씨의 인연으로 사실 우리는 만수씨네를 우리 가족같이 느끼게 되었다. 2남 1녀의 단란한 평창이씨 가정.. 그런데다 우리와 같은 천주교 집안이었다. 비록 가장이신 이주황 선생님은 성당에 가끔 나오셨지만 가족들이 가는 것은 마다 않으셨다. 한양대학교에서 근무를 하시다 이민을 오셨다고 했는데 과거의 이력을 다 잊으시고 세탁소를 열심히 운영하시면서 가정을 이끄셨는데, 2002년 5월에 비교적 젊으신 연세에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장남, 이만수씨, 그 당시는 나와 상당한 나이차이 때문에 반말을 썼지만 이번에 다시 만날 때는 그럴 수는 없었다. 그도 이제는 어엿한 가장이었기 때문이다. 덩치가 상당히 크고 아이스하키를 거의 pro처럼 하던 그가 1994년 그가 갑자기 결혼을 하게 되면서부터 서로 오가는 것이 끊어져 버렸다. 우리도, 그도 서로가 자연스럽게 잊고 살게 된 셈이다.

결혼 전에는 computer분야에 상당히 관심을 보여서 DeVry Tech에서 computer technology로 학위를 받기도 했는데 사실은 생각처럼 적성에 맞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예상에, technology 쪽으로 직장을 잡을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의외로 완전히 retail business쪽을 투신을 한 것이다. 비록 거기서도 computer를 쓰긴 했겠지만 조금은 기대 밖이었다. 나중에 만수씨 어머님을 성당에서 가끔 뵈었는데, 소식에 business가 상당히 큰 규모라 정신이 없다고 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실제로 만나게 된 것이다. 연도 후에 참석한 사람들이 다 모여서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와 오랜 회포를 풀었다. 서로 무슨 time machine을 탔던 기분까지 들었다. 만수씨는 별로 안 변했지만 나는 그가 보기에 무척 변했으리라.. 나를 알아본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20대에서 40대로, 나는 40대에서 60대로 변했으니.. 그 변화는 짐작이 되지 않는가? 그래도 만수씨는 옛날 나를 형님처럼 따르던 그때의 모습을 간직하며 다정하게 나를 대해 주었다.

이제는 서로의 소식을 알았으니 가끔은 연락을 하며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고, 궁금한 것 중의 하나.. 만수씨 가족이 평창이씨 무슨 파인지.. 그것이다. 혹시 나와 같은 익평공파가 아닐까.. 희망이지만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그 때 들었던 사실 중에 우리 본당의 성가대장이 또 평창이씨 라는 소식도 있었다. 그 후에 조금 알아보니 40대의 남자라고 들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더 알아보고 싶고, 이런 식으로 종친들이 많이 보이면 모임도 가지면 어떨까 하는 상상의 나래도 펴 본다.

 

매디슨의 추억 (1), 1988~89

매디슨의 첫 아파트에서, 1988년 가을
매디슨의 첫 아파트에서, 1988년 가을

Madison, Wisconsin.. 매디슨 위스컨신. 위스컨신주의 수도, 위스컨신대학교 매디슨 캠퍼스가 있는 곳. 거의 찰나의 시간처럼 느껴지고 심지어는 전설적으로도 느껴지는 위스컨신 주의 수도에 우리식구는 1988년과 1989년 사이에 1년이 채 안 되게 살았다. 전에 살았던 오하이오 주의 콜럼버스에 비해서 워낙 짧은 기간 살았던 이유인지 그곳이 지금 무섭게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 이런 추세로 나가면 거의 다 잊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나는 조금씩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우리가 매디슨으로 이사를 간 직접적인 이유는 나의 새 직장 때문이었다. 그 당시 콜럼버스의 나의 회사, Toledo Scales Co. (주로 weighing scale을 만들던 곳)에서 나는 layoff가 되어서 열심히 새 직장을 찾고 있었고 이곳 저곳으로 job interview를 하며 . 나는 그때 새로운 직장으로 두 곳을 두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하나는 Oklahoma City에 있는 hard disk maker SEAGATE였고, 다른 곳이 Madison에 있던 Nicolet Instruments였다. 그러니까 두 군데서 job offer를 받은 것이다.

Oklahoma City는 예전에 가본 적이 있는 조금 익숙한 곳이고 기후도 훨씬 따뜻한 곳이고 Madison은 정 반대로 아주 추운 곳이었고, 오래 전 Chicago에 있을 때 한번 가본 적이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면 99%는 모두 다 Madison으로 갈 것을 권했다. 왜 그러냐고 하면 확실한 이유가 없었다. 그저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 뿐이었다. SEAGATE는 99% computer hardware company라서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 수가 있었지만 MadisonNicolet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내가 갈 곳은 생긴지 얼마 되지 않는 audio diagnostic division이었다. 쉽게 말하면 최첨단 보청기를 만드는 곳이었다.

매디슨 위스컨신 주립대 중앙고 동창 후배들과, 1988년 가을
매디슨 위스컨신 주립대 중앙고 동창 후배들과, 1988년 가을, 뒷줄 왼쪽의 전기석 후배는 곧 그곳을 떠났다

결국은 Madison으로 가기로 정했는데 제일 중요한 이유는 새로운 것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Nicolet Instrument는 원래는 digital storage oscilloscope를 만드는 회사인데 이 audio diagnostic쪽은 biomedical분야라서 그 회사로써도 조금 모험을 하는 셈이었다. 이 회사는 위치가 바로 위스컨신대학 매디슨 캠퍼스의 바로 옆에 있어서 그쪽 연구단체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이 새로운audio diagnostic venture도 이곳 의과대학 교수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이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직업의 안정보다는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조금 더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에 더 마음이 끌린 것이다.

결혼 후 그것도 조그만 아이 둘을 데리고 가족이 이사를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의 나이가 40정도였으니 사실 힘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기분에 처음으로 미국에서 ‘혼자가’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미지의 서부를 개척하는 조금은 불안한 심정이었다. 그때 조금이나마 나를 위로하는 것이 있었다면 조금은 불이 붙었던 나의 가톨릭 신앙심과, 모교의 동창들이었다. 한마디로 처음 가는 매디슨이지만 그곳에 한인천주교 공동체가 있으리라는 희망과, 혹시 큰 학교가 있으니까 중앙이나 연세대 동문들도 있을 것 같았다.

나의 추측은 맞았다. 둘 다 있었다. 지금 같았으면 Internet으로 googling을 10분만 하면 다 찾을 수 있을 정보들.. 그 당시는 물론 다 수소문을 해서 찾아야 했다. 그래서 둘 다 연락처를 찾았다. 먼저 중앙고 동창회를 찾으니 65회 전기석 후배의 이름이 나왔다. 물론 유학생이었다. 역시 동창은 좋은 것인가.. 그를 통해서 그곳의 여러 가지의 정보를 다 얻을 수 있었다. 중앙고 후배들이 몇 명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한인 천주교회 공동체도 역시 유학생이었던 유왕식 씨를 통해서 연락이 되었다. 그곳 공동체는 대부분 학생이 주축이 되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특이한 사실은 매디슨에 있던 세계신용조합(Credit Union)의 총본부에서 일을 하시던 강정열 박사님께서 그곳 한인 천주교 공동체의 정신적인 지주로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곳은 밀워키(Milwaukee, WI) 본당의 공소였는데 본당의 김정웅 주임신부께서 정기적으로 오셔서 학생신자를 중심으로 목회를 하고 계셨다.

이렇게 해서 사실 그곳으로 이사를 가서도 우리가족은 큰 어려움 없이 정착을 할 수 있었다. 이런 한국인들의 끈끈한 학교와 신앙의 ‘인연’들은 지금 생각해도 자랑할만한 것이었다. 그런 것들이 없었으면 참 힘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선 나는 마음 놓고 먼저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는 것에 온 신경을 쓸 수가 있었다.

매디슨은 크고 작은 호수가 많았다. 아파트 근처의 호수를 보는 새로니와 나라니
매디슨은 크고 작은 호수가 많았다. 아파트 근처의 호수를 보는 새로니와 나라니, 새로니는 아직도 그 곳을 기억한다.

매디슨은 여러모로 내가 살던 콜럼버스와 비슷했지만 도시의 규모는 콜럼버스보다는 작았다. 둘 다 주의 수도였고, Big Ten 계열의 큼직한 주립대학이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 비교적 깨끗하고 교육도시였던 점, 아주 유명한 기업이 없었다는 것도 비슷했다. 심지어는 Mid West의 냄새까지, 날씨까지 비슷했다. 차이는 매디슨은 콜럼버스보다 훨씬 혹독하게 추운 곳이라는 것과 매디슨이 훨씬 더 정치적, 사회적으로 liberal, progressive한 색갈이 있었다. 쉽게 말하면 매디슨은 콜럼버스 보다 훨씬 ‘좌익’적인 곳이다. 농담으로 옛날 소련수상 후르시쵸프가 그곳에 왔다가 “소련보다 더한 빨갱이” 라서 울고 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매디슨 시내에서는 불법마약이 허용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겠지만 그 정도로 진보적인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곳으로 이사를 가는 것은 시간이 좀 걸렸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혼자서 먼저 ‘기러기 아빠’노릇을 몇 주간 한 셈이다. 나 혼자 먼저 와서 아파트에서 혼자 살면서 출근을 하였다. 지리적으로 매디슨은 콜럼버스보다 아주 작았다. 중심부에는 웬만한 작은 마을 크기의 호수가 몇 개나 있었다. 큰 도로로는 동서로 달리는 간선도로 (Beltline Highway) 하나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Interstate Highway가 이 도시에는 없는 것이다. 지형은 조금 낮은 언덕이 조금 있을 뿐 그런대로 평지에 가까웠지만 도로는 그렇지 않았다. 바둑판형의 규칙적인 도로에 익숙한 나에게 이곳은 서울의 구불거리는 도로가 연상이 되었다. 주소만 가지고 위치를 찾는 것이 더 힘든 것이다. 특히 밤에 주소만 가지고 집을 찾는 것은 조금 모험에 가까울 정도였다.

아파트 근처의 호수가에서 새로니, 나라니와 함께..
아파트 근처의 호수가에서 새로니, 나라니와 함께..

약 보름간 혼자 살다가 다시 콜럼버스로 돌아와 대형 트럭으로 짐을 다 부쳤다. 그리고 완전히 온 가족이 다 매디슨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가 1988년 8월 하순 경이었다. 나는 혼자 살던 보름 동안에 이미 중앙동창 후배들과 만나서 저녁을 했었다. 특히 65회 후배 전기석의 도움을 받았고, 후배 강태중은 University of Wisconsin의 campus를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기도 했다. 곧바로 우리는 매디슨의 한인천주교 공동체에서 미사를 드릴 수도 있었다. 교민이 거의 없고 거의 다 유학생인 관계로 따로 교회가 없었고 위스컨신대학 내에 있는 Newman Center에서 미사를 드리는 형편이었다. 신부님은 근처에 있는 밀워키 한인천주교회의 예수회 김정웅 신부님이셨는데 그 분은 밀워키에 있는 위스컨신대학에서 Computer Science를 공부하시는 분이었다. 신부님이 어떻게 그런 공부를 하시는지는 아직도 이유를 모른다. 신학과 과학을 같이 한다는 것이 그때는 조금 이해가 잘 되지를 않았다.

그 해 가을에는 서울올림픽이 열려서 그것을 보며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 열심히 TV 녹화도 하곤 했다. 가을은 짧았고 곧 겨울이 왔다. 완전히 모든 것이 얼어붙는 시베리아를 연상시키는 그런 겨울이었다. 모든 것들이 실내로 활동이 옮겨지는데 이곳은 아주 모든 것들이 철저히 월동 준비가 되어 있었다. 특이한 것이 위스컨신대학 캠퍼스에 있는 실내 테니스 코트였다. 얼마나 그 시설이 거대한 지 모른다. 겨울이 워낙 춥고 길다 보니까 이 정도의 시설 투자는 이해가 갔다. 그곳에서 중앙 후배들과 주말이면 그 추운 겨울에 테니스를 치곤 했다.

그 당시 우리부부는 아주 신앙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을 하던 때였다. 그래서 그곳에 가자마자 교회공동체에 적극 참여를 했고, 그 결과 정기적인 성경공부에도 나가게 되었다. 이곳도 역시 유학생중심의 모임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유일한 비유학생은 나와 강정열 박사님 댁 식구가 전부였으니까. (계속)

 

매디슨의 중앙고 후배들

Home Office를 바꾸는 것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미처 몰랐다. 더위가 닥치기 시작하긴 바로 전 6월초에 이동이 시작이 되었지만 그것은 사실 일의 시작에 불과했다. 거의 10년 이상인 방치 되었던 것들을 이번에도 외면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부분 버리는 것이 일이었다. 문제는 어떤 것을 버리는가 하는 것이다. 제일 쉬운 것이 책 종류였다. 골동품이나 고서의 가치가 없는 것은 무조건 쓰레기 통으로 보냈다. 다음이 서류 종류인데 이것도 옛 직장에서 쓰던 것들은 이번엔 용감히 버리기로 하였다. 남겨야 하는 것이 조금은 있지만 그건 아주 예외에 속한다.

나의 필적, 사인 같은 것이 있는 것들은 그렇게 많지 않아서 보관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사진인데.. 어떤 사람들은 가차없이 버린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신발상자에 모조리 보관을 하기로 했다. 이것은 개인의 역사가 아닌가? 누가 보건 안 보건 그것이 문제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paper print된 사진이라 수명이 있을 것이고, 앨범에 넣지 않은 것들은 보기도 어렵다. 그렇게 되어서 숨어있던 사진들을 이번에 정말 오랜만에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거의 잊어버리고 살았던 매디슨의 중앙고 후배들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1989년, 아주 오래 전이고, 같이했던 기간도 짧았지만 그 동안 사진조차 못보고 살아서 기억이 더욱 많이 희미해졌다. 얼마 전에 중앙고 후배 강태중의 생각이 났는데 이번에 그 사진을 찾은 것이다. 그 젊었던 모습들을 다시 보니 이 많은 후배들 이제 다 생각이 난다.

우리가 아파트를 조금 큰 곳으로 옮기고 나서 집들이를 한 모양이다. 바로 전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 전기석 후배만 제외하고 모두 모였다.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을 정태춘보다 더 잘 불렀던 이주호 후배, (wife는 미스 코리아처럼 예뻤다) 쌍둥이 딸을 두었던 수재 형의 윤정로 후배, (wife도 같이 공부를 했었다) 나와 같이 천주교회에 다니면서 가까이 지냈던 강태중 후배, 씩씩하고 활달하던 강상봉 후배, 통계학과의 이제준 후배.. 문제는 그 나머지 후배들의 이름이 가물거린다는 슬픈 사실이다.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하지만 노력을 하면 생각이 날지도.. 이 머리 좋던 중앙고 후배들, 다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매디슨의 중앙고 후배들

매디슨의 중앙고 후배들, 1989년 Madison, WI

 

r.i.p. 길정일 후배, fried thermostat

매디슨을 떠나던 날, 바른쪽이 길정일 후배, 1989년 여름
매디슨을 떠나던 날, 바른쪽이 길정일 후배, 1989년 여름

오늘 아침에 연숙으로  부터 슬픈 소식을 하나 듣게 되었다. 오래 전에 잠깐 알고 지내던 길정일씨가 작년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꽤 오래 전에 알았던 관계로 거의 잊고 살았던 것이다.  길정일씨는 연대후배로써 Madison (Wisconsin)에서 알고 지낸 사이였다. 1988년~1989년에 우리는 1년 정도 그곳에서 살았는데 그곳은 University of Wisconsin system중에 제일 크던 Madison campus가 있었고 그곳에는 상당히 큰 규모의 한국유학생들이 있었다. 게다가 규모에 비해서 활발하던 한인천주교  공동체가 이 campus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언젠가 이곳의 추억을 글에 담아 보리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조금 언급을 하게 될 줄이야. 유능한 정치학도, 탁월한 지도력, 등으로 기억이 되는 그.. 학위를 받고 어떻게 인생을 살았을까. 갑자기 궁금해 진다. 부디 우리가 믿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편히 쉬기를..

 

new a/c transformer
new a/c transformer

지난 주일 고장 났던 위층의 a/c (air conditioner) 24V transformer의 Made in China (where else?) replacement transformer가 어제 배달이 되었다. 생김새는 그런대로 ‘진짜’ 에 가까우니까 중국제건 아니건 크게 문제가 없을 듯하다(너무 희망적인가). 하기야 이런 것들이 중국제가 아닌 것을 찾는 것은 아마도 거의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급하게 내가 만들어서 썼던 2 series-connected transformers의 자리에 새것을 넣어서 다시 a/c를 test해 보았다. 문제가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내가 만들어 쓰던 것은 사실 완벽했던 것은 아니었다. Voltage가 24V가 아니고 26V 정도여서 조금 신경은 쓰였다. 하지만 그 정도의 tolerance는 대부분 문제가 되지를 않는다. 하지만 예외도 있었다. 바로 programmable thermostat였다. 보기에도 “애처로울” 정도도 “가볍게”만 들어진 (under engineered) 것인데 역시 2V over voltage stress를 견디지를 못했다. printed circuit board design이 over current 로 인한 heat를 견디지 못하고 녹아버린 것이다.

fried thermostat
fried thermostat

결과적으로 멀쩡하던 thermostat 하나를 잡아먹은 셈은 되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런 bad & sloppy design을 한 engineer들을 탓 할 수 밖에 없다. 다행히 오래 전에 쓰던 programmable thermostat가 하나 있어서 그것을 쓰게 되었다. 이래저래 올해 여름의 무더위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남기며 물러가는 듯 싶다. 여름이여..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