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12월도 ‘벌써’ 나흘 째로 슬그머니 넘어온 즈음, 중앙고, 연세대 친구, ‘도사’ 양건주가 1999년 8월에 보내주었던 [외로움의 도사] 김재진의 시집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를 다시 꺼내었다.  이 시집의 표지의 글,  건주의 속삭임을 듣는 듯하다.

그 당시 이미 상당한 세월을 훌쩍 넘기고 ‘가상공간’에서 다시 만나는 행운과 함께 힘든 시절, 고민과 고독을 호소하던 나를 위로하며 이 소책자를 보내 주었던 그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 이후 이 시집은 나의 영적 상담자가 되었다.

너무나 힘들었던 40대 말을 바로 뒤로했던 시절로 깊이 각인된 그때, 이 소책자는 나에게 시의 안 보이는 위로의 손길을 느끼게 해주기도 했는데.  올해 한달 전  서울 근교 일산시의 그의 보금자리에서의 기적적, 극적인 해후 이후 더욱 이 시집에 진하고 진한 남자의 우정을 되찾게 되었다.

그때 그와의 ‘역사적 만남’은 나에게 ‘세월’이라는 간단한 말을 두고 두고 묵상하는 계기를 주었고, 밤 잠을 설칠 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우는 악동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세월, 세월… 세월…

그런데 역시 이 김재진의 시집 속에도 이 ‘세월’은 유감없이 그의 생각을 타고 있었다. 100%는 아니더라도 나의 깊은 속을 유감없이 속삭이고 있었으니..  사 반세기만에 나를 찾아온 선물이라고 할까. 건주야, 고맙고 그립다. 잠을 설치는 밤에 다시 보고 싶구나. 조금 더 나은 건강을 빌며.. 우리의 긴 세월은…

 

세월

김재진

 

살아가다 한번씩 생각나는 사람으로나 살자.

먼길을 걸어 가 닿을 곳 아예 없어도

기다리는 사람 있는 듯 그렇게

마음의 젖은 자리 외면하며 살자.

다가오는 시간은 언제나 지나갔던 세월.

먼바다의 끝이 선 자리로 이어지듯

아쉬운 이별 끝에 지겨운 만남이 있듯

모르는 척 그저 뭉개어진 마음으로 살자.

 

Last of May, Billy Graham 1973

오늘, 아니 요새 나에게 제일 중요한, 필요한 ‘성인의 오늘 말씀’, 바로  Padre Pio 성인의 말씀이 아닐지…

“Pray, hope, and don’t worry. Worry is useless. God is merciful and will hear your prayers.”  – St. Padre Pio

내가 제일 갈망하는 것은 이 중에서도 바로 hope일 것이다. 이것의 결여, 사라진 듯한 우려, 그것이 나를 제일 괴롭히는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 내일, 모레 이후에 대한 희망… 왜 그것이 나에게서 부족, 아니 사라지고 있다고 나는 ‘우려’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2010년 대를 살 무렵 나는 바로 이 희망에 의지하며 의미 있게, 힘차게, 기쁘게 살지 않았던가? 왜 바로 그것이 사라진 것, 사라지고 있다고 나는 절망을 하는 것일까?

아~ 어찌 이렇게 자주 잊는단 말인가? 1973년 6월 1일, 아니면 6월초..  정든 대한민국의 땅과 하늘을 난생 처음으로 떠나던 날… 1973년 6월 초, 어떻게 이 날짜를 잊고 살았을까? 괴로운 추억이 되지는 않았을까? 나에게는 ‘Landing 반세기’라는 이름으로 몇 년 전부터 나를 기억과 추억의 세계로 이끌 던 날, 그날이 ‘중앙학교 개교기념일’과 맞물려서 나의 기억을 자극하곤 했는데.. 결국 이날을 맞게 되었으니~~ 나에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을 마무리 하는 첫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또 너무나 감상적, 관념적, 생각 속으로 빠져드는 지나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닐지.. 정말 이제는 모든 것에 자신이 없다.  어떻게 이 시기, 즈음을 기억하고 넘어갈 것인가? 1973년, 1973년 6월 김포공항… 분에 넘치게 많이 환송을 해 주었던 가족, 친지들 어떻게 그들을 기리며 감사하며 추억을 해야 마땅할 것인지 정말 감이 잡히질 않는구나~ 어머니, 어머니, 엄마, 누나, 누나~~ 만 외칠 것인지…

1973년 6월 1일 금요일 전후의 고국 신문을 훑어본다. 나의 기억과 차이가 나는 것으로 시작한 머나먼 추억여행인가… 우선 Billy Graham 여의도 집회에 대한 것, 그것은 5월 31일 목요일에 시작이 된 것이었다. 나는 내가 떠난 후였던 것으로 잘못 기억을 한 것이니.. 얼마나 많은 기억의 착오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지만 요일에 의한 추적에 희망을 걸었지만 역시 난감하기만 하구나… 출국하던 날 아침에 연세대를 찾았는데 혹시 그날이 6월 2일 토요일일 가능성은 없을까? 토요일에 학교 문을 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거의 확실히 가능성도…

출국하던 날 연세대 campus에서 찍은 사진 등을 살펴보며 내린 결론은 6월 2일 토요일 오후에 출국을 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100% 확신은 없지만 가능성은 아주 높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1973년 빌리그레함 전도대회가 한창이던 때에 고국을 떠난 셈인데… 왜 그렇게 그 대집회의 기억이 선명하지 않은 것인가 생각을 해보니 역시 나는 그 당시에 무신론을 넘어서 아주 종교에 부정적인 편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참 50년, 반세기의 세월이 나의 종교세계관을 이렇게 바꾸어 놓을 줄이야~~

오늘 하루 종일 머릿속은 역시 1973년 6월 초 전후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의 신문들을 유심히 읽기도 했다. 5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당시의 삶과 주변 모습들을 그려보고 상상도 하며 time machine을 탄 시간을 보냈다. 당시의 사진들도 보며, 모두들 어떻게 살았을까~ 거의 한숨을 쉬는 나 자신이 불쌍하기도 하고… 과연 이것이 인생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인가~ 결론은: 모른다, 모른다, 정말 모르겠다~~~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 나의 고향? 이곳의 제2의 고향은 무엇인가? 나는 과연 어디에 속한 삶인가?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은 지금이 아닌 옛날의 것들이고, 지금의 집과 삶은 아무리 해도 뿌리를 내릴 자신이 없는 곳이면, 도대체 나는 어디에 속한 삶을 살고 있느냐 말이다~~ 성모님, 모두들 어디에 갔습니까? 나를 빼놓고 모두들 어디로 갔느냐 말입니다~~~

어제 중앙고 졸업앨범을 보다가 우연히 이상한 사실을 보았다. ‘윤석원’의 사진이 다른 반에 실려있는 것 아닌가? 분명히 우리 반 3학년 8반인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살펴보니 역시 윤석원은 8반의 그룹사진에 모습이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라서 곰곰이 생각하니 아~ 이 친구, 나와 같은 재동국민학교 6학년 1반에 있지 않은가?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동창과 나는 개인적으로 얽힌 추억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얼굴만 익숙한 정도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금 궁금한 동창의 모습을 되돌아 보았는데, 역시 궁금하다, 이 친구는 어떤 삶과 인생을 살아왔을지~~

오늘이 5월의 마지막 날, 한 일도 많았지만 아쉽고 미안하고 후회스러운 것이 왜 없으랴? 아~ 성모님의 달, 5월 성모성월~~ 이것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나는 거의 소홀하게, 아니 거의 실패작으로 끝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올해는 조금 더 신경을 써서 ‘어머님들’을 생각하며 지내려 했는데… 결과는 엉뚱하게 흘러간 것이다. 특히 성모의 밤에 못 간 것, 아니 안 간 것이 제일 마음에 걸린다. 내년을 기약할 수 밖에…

어쩌면 날씨가 이렇게도 나의 마음에 꼭 드는 것일까? 한마디로 나를 행복하게, 기쁘게까지 하는 그런 자연환경조건의 나날이 오늘까지도 끊임없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과학적 여름’은 아직도 3주 이상 남았지만 여름의 맛을 이미 보았기에 다시 봄이나 가을이 된 착각에 빠지는 지난 나날들,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방을 옮기는 작업을 쉽게 만들어준 것이다.

지난 밤 꿈 속에서 또 그것을 보았다. 그것, 우리 집이 손을 잘 못보고 방치하며 살아서 이곳 저곳이 무너지고 떨어져 나가고 빗물이 들어오고… 이런 종류의 꿈의 역사는 꽤 깊고도 긴 것이다. 어젯밤의 광경들은 더욱 구체적인 것으로 아예 그 ‘공포’에 잠에서 깨어나고, 결과적으로 나는 ‘만세!’를 부르는 혜택을 만끽하기도 했으니.. 왜 집이 처참하게 주저앉는 광경, 그 공포가 나에게 왔을까? 우리 집에 그런 일들이 생긴 일도, 경험도 없는데… 영화에서나 본 광경들이 왜 나에게…  집을 제대로 관리, 청소, 유지, 재투자를 잊고 못하고 사는 우리들의 모습과 이런 꿈과 무슨 연관은 없는 것일까?

비록 나의 office/study는 완전하게 ‘이사’를 했지만 그 이사 짐들, 특히 책과 서류의 진정한 처리는 아직도 나의 등 뒤에서 나의 손을 기다리고 있다. 왜 이럴까? 하기야 제일 골치 아픈 일일 수밖에 없긴 하지만… 그래도 많은 책들이 분류가 되었고 garage로 물러나거나 쫓겨나가는 일을 단행하기는 했다. 하지만 ‘진짜 분류’는 아직도 나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얼마만한 책과 서류를 나의 옆에 항상 두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나의 남은 인생에서 그것들이 얼마나 중요한 것들일까? 완전한 digitizing, clouding은 실용적이 아닌 것일까? 조금 더 아니 많이 많이 간소화하게 사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추억이 얽힌 많은 stuff들, 얼마큼이나 나의 주변에 놓아두고 사는 것이 현명한 일일까? 80대, 90대를 사시는 ‘선배님들’의 경험론적 고견은 없는 것일까?

방을 바꾸는 작업이 다 끝난 것은 아니지만 이런 기회에 다시 tool time을 되찾아야겠다는 은근한 압박감을 피할 수가 없다. 우선 dining room의 dish cabinet의 배치를 원상태로 돌려 놓았다. 의외로 그것들은 laminate floor에서 거의 힘을 들이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또한 거의 반년 이상 중지된 작업, kitchen under sink repair 작업인데 이것이 은근히 ‘목공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보니 자신이 별로 없어서 방치된 상태였다. 일단 시작을 하면 결과가 나오지 않을지…

The Epiphany of the Lord, 2023

주님 공현公現 대축일 The Epiphany of the Lord.. 동방박사~ 아~ 이제는 성탄의 기분, 느낌도 다른 해보다 더 빨리 사라진 듯 한데… 아직도 동방박사라고… 오늘을 기해서 성탄장식을 내려 놓자고 했지만 사실 나의 머리 속에 이것들은 이미 멀리 사라진 듯하니.. 어떻게 이런 ‘해괴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왜 이렇게까지 ‘타락’을 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나의 기우, 지나친 걱정이기를 바라고 바라지만… 싫은 느낌 뿐인 주일을 맞는 심정이다…

오늘 보는 성당 제대 밑의 성탄구유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고 찬란하다. 특히 옆에 앉아서 경배하는 ‘동방박사’들의 모습도 보이는 것이 오늘의 ‘주님공현 대축일’ 미사와 잘 어울린다. 아마도 이런 성탄의 모습들도 오늘까지 볼 수 있을 것이고 다시 11월 말 대림절 시작이 되어야 다시 볼 수 있을 것… 이렇게 가톨릭 전례 절기를 따라가다 보면 일년이 흐르고, 인생도 나이도 같이 흐르고…

오늘 구 미카엘 주임 신부님의 강론, 동방박사가 ‘동쪽’에서 온 사실에 주목하며 묵상한 것, 성경에 등장하는 각종 ‘동쪽’, ‘동방’을 연결한 것이 이채롭다. 

오늘부터 도라빌 순교자 본당에서는 거의 3년 간 사라졌던 ‘구역 점심 봉사’가 시작되었다. 우선은 격주로 시작을 한다고 하는데 오늘 처음으로 정든 친교실 table에 편하게 앉아서 ‘콩나물 국밥, 이른 점심’을 하게 되었는데… 우연히 구 미카엘 주임 신부님과 마주 앉게 되었다. 반갑기도 하고, 서먹하기도 하니.. 역시 신부님이라서 그런가, 세대 차이가 크게 있어도 역시 신부는 역시 신부인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Doraville] H-mart에 잠깐 드렸다. 예의 grocery shopping을 한 후 오늘은 특별히 그곳에 있는 ‘빵집’ [이름이 무엇이더라… French인데… 아하! Tous Les Jours! 이것이 무슨 뜻인가?] 에 들러서 크림빵을 사왔다. 그 동안 ‘bakery 하얀풍차’에 갈 기회가 없어져서 [유럽, 한국식] 빵이 조금 그리운 것을 숨길 수가 없었는지…

이른 시간이라 한산한 food court, 예전 특히 Pandemic이전에는 이곳에서 자주 음식을 사먹기도 했었는데.. 특히 교우 자매가 운영하는 대장금, 그리고 중식점, 그 옆의 ‘한국식 hotdog, 명랑핫도그’ 등이 일요일 손님을 대할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 기나긴 Pandemic 3년간의 공백을 무색할 정도로 활발한 느낌을 준다.

오늘 이곳에서 ‘가끔 또순이’ 연숙이 stick coffee를 부지런히 찾는다. 알고 보니 물론 ‘세일’ 품목, 그것도 원래 가격이 거의 $25이나 되는 것을 $10 sale로 사게 된 Maxim White Gold란 것, 집에 와서 같이 산 크림빵과 함께 마셔보니 비싼 만큼 맛이 좋았다. 하지만 이 stick coffee는 맛보다는 편리함에 그 point가 있는 것이 아닐지… 이 편리함에 ‘중독’이 될 수가 있는 것, 항상 조심해야 한다.

예정대로 오늘 오후에 집에 있던 각종 성탄 장식들을 retire했다. 올해의 성탄은 예외적으로,  ‘성스럽지 못하게’ 보낸 듯해서 아기 예수님과 성모님께 미안하기만 하다. 올해의 성탄은 조금 다르게 맞이하면 좋을 듯. 그러니까 성탄장식을 예전처럼 아주 가능하면 늦게 하고 검소하고 조용하게 보내는 전통을 다시 살리는 것이다. 이번 성탄은 솔직히 원래 의도와는 거의 반대로 아주 ‘방탕하고, 세속적으로’ 보낸 것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뜻밖에 나라니 식구의 이름으로 ‘연하장’이 배달되었다. 전에 언급을 했던가.. Pro service로 가족 card를 만든다는 것. 바로 그것이 온 것이다. 행복해 보이기는 하지만 현재 둘째 아기를 임신을 하고 직장의 각종 산더미 같은 일들로 피곤해 보이는 나라니와 사랑하는 가족, Luke, Ronan 그리고 멋진 개 犬公 Senator 의 모습을 보니, 사진처럼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데…

 

오늘 우연히 마주친 흑백 사진들, 당시 추억의 노래와 함께 동영상화 하고 나니..  아~ 그립다, 그립다, 그때가 그립다… 연세대 시절 1969년의 얼굴들… 아마도 1969년 이른 봄이 아니었을까? 이 ‘괴상한 그룹’이 어떻게 비원 안쪽으로 놀러 갔을까, 아물거리기만 하다. 하지만 이곳의 얼굴들은 어제 만난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선명하다. 중앙고 선배 형들: 안낙영, 오성준, 최종인 형들로부터, 중앙고 동창과 친구들: 양건주, 박창희, 김진환(일찍이 고인)… 살아 생전에 볼 수 있거나 소식을 알 수 있을는지…

 

Friends & Neighbors, Warnock Crushed Idiots!

오늘 mailbox를 열어보니 뜻밖의 것이 놓여있었다. 온 가족이 함께 만들었을 듯한 앙증스러운 cookies 봉다리였다. 사연이 적힌 종이를 보니.. 뜻밖에도 앞집의 Josh 가족의 이름이었다. 그저 감사한다고~~ 감사는 우리가 해야 하는데… 우리 집의 잔디, 낙엽을 자기의 blower를 쓸 때, 우리 집도 함께 해 주었는데… 우리가 도운 것이 있다면 가끔 사다리를 빌려준 정도였는데…  옆집 Dave는 가끔 소음 요란한 lawn mower로 우리 집 것도 깎아 주기도 하니..  우리의 양쪽 이웃들, Dave & Josh  이런 식으로 가끔 이웃 정을 보여주니, 이것도 자그마한 운이나 복이 아닐지…

어제 연호친구들의 카톡 대화로 건주의 건강상태를 조금은 더 알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생각했던 것 보다 stroke 후유증이 심했던 모양이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훨씬 나았다고 말하는 것도 이제는 이해가 간다. 처음에는 거의 말도, 움직이지도 못했던 것을 상상해보니 조금 무서워지기도 한다. 어떻게 평소에 그렇게 건강하던 건주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문제는 앞으로의 물리치료 과정인데, 이것을 누가 장담을 할 수 있으랴마는… 나의 주장대로 최선의 의학과 진정한 참된 기도, 그것이 전부가 아닐까? 건주야~ 미안하다, 하지만 우리들 너를 믿고, 응원한다는 사실만 굳게 기억해주기 바란다…

어제 있었던 Georgia runoff, 결국은 Warnock의 승리로,  휴~ 끝났다, 우리가 할 일은 다했다.  시원,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서 2022 midterm election 마지막 DONALD SOB MF ‘개XX’ 의 ‘쫄개’가 떨어지고 사라지고 kicked-out되는 이 시점을 만끽하고 싶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미친 ‘개XX’는 자기 방의 사방 벽을 마구 발길로 차대고,  동물의 괴성을 지르며 각종 ‘쌍’ 욕이란 욕은 다 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직접 고르고, 길들이고 ‘어둠의 자식들 훈련’ 을 시켰던  ‘백인 흉내 내는 흑인’, 그의 개인적인 사정을 잘 모르지만 줄을 잘못 선 것을 후회하기를 빌어본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하는 지혜를 먼저 배워라!  결국 이번 midterm election에서 ‘개XX’가 endorse했던 놈들 ‘전부’가 낙선을 하게 되었으니~ 참, 정의는 승리한다 는 것이 명언인 모양이다.

 

Autumn in 1970, Midterm Georgia Governor

 

1970년, 대학 4학년 시절, 한마디로 희비가 엇갈리던 시간들이기도 했다. 학교 공부보다는 등산과 미팅에 더 관심이 많았던 때, 하지만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서울 중심가를 헤매기도 했던 낭만적, 황금기로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그 젊음의 대가를 후에 톡톡히 치르기도 했다. 2학기가 되면서 졸업 이수학점 부족이 때늦게 발견이 되어서 과 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떨어져서 부족 학점을 채워야 했던 괴로운 때도 있긴 했지만 역시 젊음의 힘이었던가, 별로 실망, 우울하지 않았다.  그 해 가을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게 하는 것 중에 바로 Simon & Garfunkel의 hit album 중의 한 곡인 The Only Living Boy in New York  때문이었다.  당시 수많은 pop song들에 열광을 하던 때였지만 몇 곡은 아직도 가사를 외울 정도로 뇌리에 남아있고, 이 곡도 그 중에 하나다. 1970년 가을에 심취했던 이것, 왜 그렇게 좋아했을까? 가사 내용보다는 후반부의 chorus,  폭발적인 drum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곡이 실려있는  당시의 LP album [Bridge Over Troubled Water]을 이곳에서 다시 샀던 것과 또 다른 album을 꺼내서 보니, 완전히 1970년으로 돌아간 착각에 빠진다. ‘유행가’가 가진 시대성은 생각보다 큰 위력이 있는 듯하다. 이 노래에 심취할 당시의 추억들 중에는 이성들과 얽힌 것들도 있어서 가끔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막연한 생각에 빠지기도 하니…  

Georgia Governor, 누구에게 표를 던질 것인가? US Senator 후보를 선택하는 것은 두 번 생각할 필요조차 없이 간단한 것인데, governor는 조금 달랐다. 두 후보의 장단점의 점수가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후보의 정당 정책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역시 Donald 개XX에 ‘굴복하지 않은’ 현 주지사’가 유임하게 하는 것이 나에게 더 큰 만족도를 주기에 그에게 2 표 (우리 둘)를 던지기로 했다. 현 주지사 Brian Kemp의 ‘폭군에 맞선 용기’도 가상하지만 Pandemic동안 아주 상식적인 판단으로 일관했던 것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첫 여성 흑인 주지사가 될 수도 있었던 상대 Stacey Abrams 에게는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나의 point는 역시 ‘Donald 개XX’에 있기에 할 수가 없다. 그녀에게는 앞으로도 기회가 분명히 올 것이다.

요즈음 supermarket에 가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는데 예외는 coffee 그것도 KEURIG coffee maker 에 맞고, 가을 색깔이 있는 것을 고르는 일이다. 금주선언 이전에는 주로 wine쪽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이제는 coffee쪽으로 바뀐 것이다. 오늘은 STARBUCKS 쪽에서 FALL BLEND, CARAMEL MOCHA를 골랐는데 기대가 크다.

오늘 점심은 특별한 것, 시간이 되었다. 청국장, 난생 처음 맛을 보게 된 것이다. 원래 식성이 약한 탓에 조금 냄새가 나거나 보기에 안 좋으면 식욕을 조절할 수가 없이 피해버리고, 청국장도 그 중에 하나였다. 냄새 때문이었는데, 얼마 전 성당에서 C 베로니카 자매가 냄새가 거의 없는 청국장을 찾았다고 조금 갖다 주어서 오늘 드디어 시식을 하게 되었는데, 결과는 pass였다. 이 정도면 겁을 낼 필요가 없고 오히려 밥맛도 나는 듯했다.

 

Stroke Scare, Omicron, Biocentrism

Stroke, 뇌출혈, 중풍… 허~~우려한 것이 현실로 밝혀졌다. Wikipedia에는 stroke 설명을 이렇게 시작한다.

“A stroke is a medical condition in which poor blood flow to the brain causes cell death.” 

건주가 뇌출혈로 현재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고 교성이 알려준 것이다. 건주가 김원규와 가까운 사이인 것을 알고 교성이에게 도움을 청한 것인데, 솔직히 이렇게 빨리 소식을 알게 될 줄은 몰랐다. 교성이의 현재 건강상태를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 준 것은 고마운데, 건주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무척 답답하고 놀라울 뿐이다. 그저 건주는 산속의 도사, 건강생활의 모범적인 case로만 생각을 한 나로서는 황당한 것이다. 녀석이 분명히 건강에 유의하며 살았을 것인 것을 보면 이 stroke는 아무에게나 불현듯 오는 그런 무시무시한 것인가? 하기야 그렇게 건강하게 보였던 우리 성당의 서 토마스 형제도 갑자기 그것으로 고생하고 있지 않던가? 무엇이 stroke를 그렇게 무섭게 만드는 것일까? 궁금한 것이 후유증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 그것을 알고 싶은데…

건주는 지난  8월 중순경에 뇌출혈로 입원했고, 현재 집에서 재활치료, 휠체어를 타고 있고, 언어기능에 지장이 있다는 것이 우리가 알게 된 소식의 전부였다. 대강 그림은 그려진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후유증인지 더 자세히 알고 싶은데… 뇌출혈, stroke,이것은 너무도 귀에 익은 말이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가까이 왔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심장마비와는 또 다른 것 아닌가? 혈관, 특히 뇌혈관, 그것인데… 그것은 어떻게 방지를 할 수 있는 것인가? 혈관, 혈관, 고혈압… 건주는 누가 보아도 건강한 삶을 살았을 듯 한데, 그런 것도 도움이 안 된다면… 허~ 중풍이란 것이었다. 반신불수, 실어증.. 각종 모습이 조금씩 머리에 그려진다. 건주가 언어장애, 휠체어의 상태라면 재활치료의 효과는 어는 정도일까?  말은 못해도 keyboard나 phone정도는 쓸 수 있을 터인데… 알 수가 없구나…

OMICRON variant? 코로나 변종 Delta Variant 같은 것인가. 어제부터 모든 media outlet에서 요란하게 보도를 한다. 이것의 심각성 때문인가? 이제는 크게 놀라지 않는다. 이렇게 세상이 이미 변했다는 한숨과 함께 누가 말했듯이 감기, 독감, 매년에 겪는 것 정도로 생각하자고… 건강보다는 경제, 나아가서 정치적인 영향이 솔직히 더 걱정이 된다.

목감기 초기증상이 거의 끝나가는 연숙, 오늘까지 쉬기로 해서 나 혼자서 산책 course No. 1을 빨리 걸었다. 하지만 주 관심은 역시 Sope Creek쪽이었다. 무슨 탐험을 하는 사람 같은 호기심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서울에 살 때, 남쪽으로 보이는 관악산 봉우리를 바라보며 그 뒤의 아득한 산들 뒤에는 무엇이 살고 있을까… 하던 그런 막연한 호기심이 아직도 나에게 있는가. 새로 발견된 이 개울, 이제는 내가 제일 가고 싶은 산책로로 변하고 있다.

내일이 가톨릭교회의 새해, 대림절 시작임을 얼마 전부터 달력에서 보고 있었다. 또한 성탄시기를 기다리는 첫 날이기에 조금 기분이 들뜨는 것도 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때를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던 것도 기억을 한다. 올해는 어떻게 보낼까… 차분한 것보다는 들뜨게 기쁜 시간들이 되면 좋지 않을까? 경건하고 엄숙한 것도 좋지만 James Martin 신부님 말대로 기쁘고 즐겁고 유쾌한 것도 병행을 하는 방법은 없을까? 

 

Robert Lanza의 Biocentrism series 제2권 BEYOND BIOCENTRISM을 ‘두 번째’로 읽고 있다. 벌써 5일째가 되었고 Chapter 6를 읽는다. Biocentrism의 주제와 본론이 무엇인지는 Vol 1으로 이미 어렴풋이 짐작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꼭 내가 동의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설마, 설마’ 정도인 것이다. 보는 시각을 바꾸는 것으로 이해는 하지만, 이것은 조금 설득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consciousness가 reality에 영향을 주는, 아니 더 나아가서 reality를 만들어내는 physical experiment, mechanism은 여전히 나를 ‘열광’케 한다. 열광… 이것이 바로 science 와 religion를 연결해 주는 신비의 열쇠인 것을 나는 오래 전부터 바라고, 믿고 있다. 이것이 나의 원대한 꿈이고 희망이기도 하다.

오늘 BEYOND BIOCENTRISM을 읽으며 한가지 특별한 일을 시작하였다. 남들이 알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오늘 정말 정말 오랜 전통을 깨고 책 속에다 나의 흔적을 남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 흔한 underline으로 시작해서 모르는 단어 뜻을 사전에서 찾아 남기는 것. 앞으로는 아예 comment도 자유롭게 남길 것이다. 왜 이것을 가지고 유난을 떠는 것인가? 내가 기억하는 한 내가 산 책에 흔적을 안 남기고 살았는데 이유가 모호하다. 기억이 난다면.. 혹시 이 책을 다시 Amazon에 팔기 위해서? 아마 아닐 것이다. 그저 깨끗한 책으로 남기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가끔 나의 comment 를 남기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나는 경직된 사람이었는지도… 이제는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새처럼 마음껏 마음껏 글자와 흔적을 남길 것이다. 누가 보던 말던…

 

사온 지 3일만에 나의 winter classic Canadian Mist가 1/4  이상이나 consume 되었다. 예년에 비해서 빠른 속도로 없어지는데.. 그때와 다른 것이 ‘홀짝홀짝’ 조금씩 마시는 것이 아니라 western cowboy movie에서 보듯이 조그만 컵을 한숨에 마셔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빨리 없어질 수밖에… 이것으로  온 겨울을 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되었다. 그래 비싼 것이 아니니까..  필요하면 또 사면 되지 않겠는가? 최근에 들어서 왜 그렇게 ‘취하고 싶은’ 지… 문제는 ‘심각하게’ 적당히 취하는 것이다. 적당히, 알맞게, 온건하게, 즐기며, 추억하며, 상상하며, 백일몽을 꾸며… 그것이 남은 인생에서의 즐거움 중에 하나다.

 

 

돌아온 공동배당 묵주기도

어제는 조금 변칙적인 날인가…  평소에 아침잠을 즐기는 연숙이, ‘새벽’  7시경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 부리나케 차를 몰고 아침 8시에 문을 연다던 도라빌 Doraville H-Mart로 간 것이다. 무엇을 sale을 하는지 모르지만 집에 있는 내가 미안할 정도였다. 하지만 가보니 9시로 시간이 바뀌었다고 울상, 결국은 기다리다가 장을 보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모든 하루 일과가 조금씩 늦게 진행되는 하루가 되었다. Grocery shopping이 거의 모험이 된 듯한 요즈음, 다시 깨닫는다. 아… 먹는 것이 이렇게도 중요한 의무요 책임이었구나…

 

‘연세대 선배, 인기작가’ 고 故 최인호 님의 ‘필사’ 중인, ‘작은 마음의 눈으로 사랑하라‘ 를 읽으며 지금은 ‘아버지 상像’에 대한 글을 읽고 있다. 어찌 나의 아버지 상에 대한 의견이 없겠는가… 자상한 아버지의 함정, 단점, 허구성이랄까… 그도 아마 자상한 아빠였을 듯 보이지만 자책적으로 너무 감정적이라고 했다. 그런가, 바로 그것이다. 자상한 것은 감정적이라고…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라고..  오히려 엄격한 것이 낫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니 공감이 간다. 우리 아이들도 그 집의 애들과 비슷하게 느꼈을 것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최인호 님와 비슷하게 나에게도 본받을 만한 아버지상을 배울 여건이 아니었지 않은가? 곧바로 나의 입에서는 자동적으로 ‘김일성 [왕조] 개새끼.. ‘소리가 다시 나온다.

 

어제 저녁부터 ‘레지오 공동배당’ 묵주기도를  5단으로 시작을 하였다. 감개가 무량할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아련하고 그리운 추억과 생각에 잠긴다. 이 공동배당…을 얼마나 오랜 세월 나는 ‘신 들린 듯’ 하였던가…  이것을 거의 한 달 이상 못하며 살았다. 아니 거의 잊었다. 일주일에 거의 90단 이상 씩 하던 것인데… 이것은 안 된다. 안돼…. 무조건 시작하자. 어제는 5단이고 오늘도 5단, 아니면 10단… 이것의 ‘위력’을 나는 잊었단 말인가? 무조건 무조건 하고 보자.

 

 

흘끗 본 일기예보대로 정확하게 오늘 이른 새벽에 꾸릉거리면 잔잔하게 비가 내렸다. 어제 gutter를 청소한 후라서 조금은 기분이 가볍다. 그래 이것은 은혜로운 비라고 할 수 있다. 꽃가루 특히 송학가루 앨러지 의 귀찮음을 덜해주는 것이리라.

 보니, 토요일이다. 하지만 토요일이 무슨 큰 상관이 있단 말인가? 요새는 정확하게 모든 요일이 똑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예외는 일요일 주일 온라인 미사와 쓰레기를 버리는 일, 그것 뿐이 아닐까? 예전의 규칙적인 요일 별 외출, 활동이 제로가 된 상태가 이런 것이구나. 재미있기도 하다.

날짜를 보니… 18일… 그것도 4월 18일. 그렇다 내일은 4.19가 아닌가? 요새 대한민국에서 4.19는 어떻게 기억이 되고 있을까? 물론 googling을 하면 조금은 알 수 있겠지만 그런 overinformation 은 피하고 싶다.  99.9% 불필요한 그야말로 trash급일 것이다.  나는 나만의 4.19를 기억하고 생각하고 싶다. 역사는 계속 흐르고 보는 관점도 변할 수 있겠지만, 나에게 남은 4.19의 기억은 절대로 안 변할 것이다.

 

몇 달 만에 내가 우리의 점심을 준비하였다. 아침은 통상적으로 내가 준비하지만 점심은 아직도 우리의 ‘주부’인 연숙이 긴 시간을 들여 정성껏 만든다. 하루 아침과 늦은 점심 두 끼를 먹기에 이 점심은 사실 다른 집에 비해서 훨씬 양과 질이 높다.

지나간 십여 년을 넘게 내가 만드는 음식 중에, 아침에는 pancake 그리고 점심에는 vegetable/ground beef stir fry, 우리는 그저 간단히 ‘소고기 볶음’이라고 하는,  이 두 가지는 이제 완전히 감이 잡혀서 눈을 감고도 만들 정도가 되었고, 맛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도가 되었다. 물론 이 평은 모두 연숙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과장된 표현일 것이다.

이렇게 같이 준비하고 같이, 편하게 먹는 두 끼의 식사는 정말 이런 코로나 사태 같은 비상시국에는 더욱 더 빛을 낸다. 동시에 이렇게 평화스럽고 맛있는 시간에도 걸리는 것은, 역시 현재 고생하고 있는 많은 형제 자매님들이고, 그저 모든 것이 순리대로 하느님의 섭리대로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연세대, 달력, 최인호 선배

 

지난 연말에도 연세대 동창회를 못 갔다. 물론 매년 못 가긴 했지만 더 ‘늦기 전에’ 한번 나갈까 몇 년 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꼭 가야 하나’ 하는 게으름 반, 두려움 반으로 버티고 있다. ‘게으름 반’은 언제라도 극복할 수 있을 듯하지만, ‘두려움 반’은 솔직이 자신이 없다.

20년도  전에 유일하게 한 번 가본  것이 전부였는데 지금 다시 나가면 도대체 어떤 분위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어색할 것 같은 것… 그런 것을 나는 제일 싫어한다.

성당 교우 중에 선배님이 계셔서 가끔 동창회엘 다녀오셔서 ‘연세대 달력’을 챙겨주시곤 했는데 올해도 고맙게 도 하나를 나누어 주셨다. 이 선배님은 비교적 대 선배에 속하지만 친구처럼 자상하신 분이라 아마도 우리가 다시 동창회에 나가면 조금은 덜 어색할 것 같다.

연세대 달력을 걸고 보니 첫 장, 1월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잔잔하게 가볍고 아담하게 쌓인 눈을 배경으로 연세대의 ‘다른’ 얼굴, 이공대학 건물이 반갑게 나를 반긴다.  주로 언더우드 동상을 앞세우고 문과대학이 간판 건물로 나오는데, 올해는 어떻게 이런 행운이 있을까? 다른 이공대학과 함께 우리 전기공학과도 이 건물에 있었다. 날씨 좋은 날 이 건물 바로 앞의 bench에 앉아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던.. 아 ~~  연세대의 추억이여…

추억, 추억하지만 이제는 추억을 넘어서서 연세대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그곳에서 몇 년을 보낸 것이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생각을 하게 되었다. 추억 만으로는 너무나 짧았던 시절이 아닌가…

입학 직후 갑자기 쏟아져 들어온 ‘완전 자유’ 분위기, 이것이 나에게는 조금 문제였고 결국 상처도 입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대학 교육의 의미를 느끼게 되었다. 비록 절대자, 하느님을 모르고 살았지만 이곳에서 조용하게 느껴지는 신앙적인 분위기, 이것도 학교를 떠난 오랜 후에야 감사하게 되었다. 또한 항상 ‘세계를 향한 눈’을 강조하시던 총장님의 말씀도 좁은 곳을 떠나 미국 유학을 꿈꾸게 하는데 큰 도움을 주지 않았던가…

우연히 옛 시사잡지 ‘신동아’를 보다가 소설가 최인호 씨의 ‘연세대 추억’ 글을 읽게 되었다. 이분이 연대 영문과출신이고 나이도 3년 위여서 최 동문, 최 선배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1978년의 글이니까 소설계의 혜성으로 등장한 직후였을 것이다. 최인호 동문선배의 글을 읽고 보니 역시 ‘문과대’ 출신답게 보는 눈, 묘사하는 기술도 색달랐다.  당시의 풍조를 반영하듯 ‘연고대, 서울대’를 중심으로 비교, 분석한 것이 아주 이채롭지만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도 많았다. 예를 들면,  (돈이 생기면) 연대생=구두닦기, 고대생=막걸리, 서울대생=책…  등이 그것이다.

1학년시절 지나친 영화관람으로 인한 낙제, 빠른 결혼, 결국  8년 걸린 졸업.. 등등 조금은 고생하며 보낸 학창시절이었다. 군대에서 보낸 3년 반의 공백과 학생결혼생활 등등은 나로서는 너무 감당하기 힘든 것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밑거름이 되어서 졸업 후에 그렇게 소설계의 혜성으로 등장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도 언급했지만, 내가 보기에도 최인호 선배가 바로 ‘대표적인 연세인’의 모습이 아닐지…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알기 힘들어서, 어떻게 그렇게 한창 일할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는지, 아쉽기만 하다.

 

작가 최인호, 2000년 경

 

延世8年에 배운 眞理

崔仁浩 (作家, 延大 文科大英文學科卒)

 

 

가슴에 새긴 푸른 문장 紋章

 

내가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것은 [19]64년 3월이었고 졸업한 것은 [19]72년 9월이었으니 따지고 보면 꼬박 8년간의 아까운(?) 청춘을 대학생활에 바친 셈이다.

그렇게 오래 연세대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대학교 1학년 때 철모르고 영화구경 다니다가 학점이 모자라 낙제하여 1학년을 재수하였기 때문이요, 김신조 金信朝 아저씨 덕분에 3년 복무하기로 약속되었던 군생활을 3년 반 꼬박 군대에서 청춘을 바쳤기 때문이요, 거기에다 어영부영 연애랍시고 하다가 에라 이처럼 만나고 헤어질 바에는 아예 둘이서 살림 차려도 괜찮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가진 것은 쥐뿔도 없이 결혼식을 올리고 학생남편 노릇 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막상 졸업식이라고 학사모를 뒤집어쓰고 누가 입었던 가운인지 하루만 빌려 입고 “제군들 앞길은 창창하오” 라는 식의 축사를 들으며 졸업식을 할 때 내 가슴은 우라질 학교를 드디어 졸업하게 되었다는 감개와 비애로 찢어지고 있었으며 여편네는 애를 배어 오늘 내일 하는 오똑이 같은 배를 하고서 남편 졸업식을 축하하러 나와 주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 지겹기만 했던 연세대학교에 있어서의 학창시절은 내 의식의 녹을 벗기고 날로 푸르게 이끼가 자라고 있으며 연세의 푸른 紋章은 내 가슴에 뚜렷이 인 印 박혀갔다.

나는 연세대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던가. 가끔 나는 돌이켜 생각해 보곤 한다. 배운 것은 술과 담배와 적당한 퇴폐와 적당한 학문과 상식, 절망과 슬픔, 은행의 박한 이자와 같은 욕망과 교활한 이기주의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비관적인 생각이 처음 몇 년간은 내 가슴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돌이켜본다면 연세의 그 깊은 손길은 천천히 다가와 나를 이루고 조각하여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빛깔과 향기를 주어 나를 달성시켜주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4.19 [학생혁명] 직후 한 소설가가 각 대학의 성격을 카리카츄어 하면서 돈 백 원 있으면 서울대학 학생들은 책을 사고 고려대학 학생들은 막걸리를 마시고 연세대학교 학생들은 구두를 닦는다는 식의 내용을 발표한 뒤 지독한 곤욕을 치렀다는 것을 나는 들은 적이 있었다.

어쨌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뒤 나는 무지무지 실망해서 그 소설가의 지적이 맞는 표현인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었다. 고등학교 무렵에 느끼던 대학생활의 기대는 얼마나 높은 것이었던가.

‘백양’ 담배도 마음대로 피울 수 있으며 술도 합법적으로 마실 수 있고 낡은 가방에 염색한 군복바지를 입고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책을 읽으며 예쁜 애인과 연애도 마음대로 걸 수 있다는 대학생활에의 선망은 마악 입학하자마자 곧바로 깨어지고 말았다.

대학생활은 전국 각도에서 모여든 국적 없는 노무자들의 집합소 생활과 다름없었다. 나는 이내 실망을 하고 학교에 나가느니보다는 씨네마코리아라는 싸구려 동시상영 영화관에서 눈알이 돌도록 영화를 보는 것으로 대학 일년을 보냈으며 번번히 낙제를 하는 비운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연세대학교에는 솔직히 서울 문리대생들의 그 악바리같은 엘리트 의식, 겉으로는 만민평등의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선민이라는 계급적 모순을 안고 있는 엘리트의식, 혹은 땅 팔아 논 팔아 공부 공부 공부하여 고등고시 합격하려는 끈질긴 완행열차 상경파들의 결심 같은 것도 연세대학교에는 없었으며 그렇다고 고려대학생들의 촌놈의식도 없었다. 민족자본이 만든 학교라는 자부심아래 농악에 막걸리에 여드름 툭툭 불거진 얼굴로 애써 백의민족의 후예라는 전근대적 고집을 내세우려는 촌놈의식 같은 집요한 딴 학교들의 칼라는 연세대학교에서는 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얼마나 연세대학교에 실망을 하였던가. 마치 선교사들의 뜨락만 같던 교정. 찬송가소리. 일주일에 한 번씩 예수그리스도의 고행을 칭송하던 목사님의 열띤 주기도문. 어딘지 매끄러운 집 출신 아이들이 모인 것 같은 친구들. 부모 잘 만나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라난 것 같던 아이들의 반짝이는 구두. 차비도 꿔주지 않던 극도의 이기주의.

나는 허락된다면 학교를 때려치고 싶은 적도 있었다. 이건 대학교도 아니다. 이건 대학교가 아니라 부모 잘 만난 학생들이 모였다가 떠나가는 유치원이다.

그러나 나는 감사한다. 나는 이제 나를 키워준 연세대학교에 감사한다. 아주 먼 훗날에서야 나는 바로 그것이 연세대학교의 강점이라는 것을 배웠다.

연고전 때면 으레 고대에서는 농악을, 연대에서는 서양 나이트기사가 출연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얼마나 부끄러웠던가.

그러나 바로 그것이 연세대학교가 가질 수 있는 유일의 성격이며 특색인 것이다. 나는 연세대학교에서 모난 편견을 버렸다.

 

 

세계 世界를 호흡하는 연세인 延世人

 

나는 ‘용비어천가’ 만이 우리가 배워야만 하는 문학이라는 감정적 차원에서 ‘셰익스피어’와 ‘T S 엘리오트’의 무서운 세계인들의 공통분모를 터득하였다.

연세대학교는 만인이 알다시피 외국선교사가 세운 학교로 어딘지 그런 성격이 구석구석 배어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연세대학의 심장부 문과대학 앞에는 ‘언더우드’ 의 눈 파란 외국인 동상이 우뚝 서 있는데 그리하여 어딘지 영국식 정원 같은 교정을 지나 담쟁이 넝쿨 우거진 서양 목사관 같은 문과대학강의실에 들어서면 나는 왠지 성균관의 문을 드나드는 유생이라는 느낌보다는 갓 유학 떠난 식민지시대 때의 문부대신 이웃 집 서생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바로 그것이 연세대학교가 내게 눈뜨게 해준 의식의 세계였다.

내가 선 땅 대한민국은 아시아의 극동 그 지역에서 벗어나 세계의 한 부분이라는 민족적 자각과 더불어 지구인 地球人 이라는 범세계적 의식이 싹트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연세대학생들이 백 원 있다면 꼬옥 책을 사거나 막걸리를 마시지 아니하고 구두를 닦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비난 받아야 할 성격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강점임을 나는 배웠다.

한마디로 연세대학 학생들에겐 이상하게도 스마트한 특색이 있다. 좋은 의미의 개인주의자들이며 구태여 남에서 참견하느니보다는 남의 도움도 외면하고 그렇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려 하지 않는다.  혼자의 일은 자기 스스로 처리해야 한다는 서구적 개인주의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 역시 강점이다.

언젠가 대학시절 연극반이었던 나는 다른 대학 연극반 학생들과 합동 미팅을 한 적이 있는데 다른 대학학생들은 술이 취하자 모두들 ‘두만강’이라든가 ‘타향살이’를 불렀는데 유독 연대생들은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캔서스 시티’를 부르는 것을 보았었다.

노래 부르는 것으로 꼭 학교 나름의 특색을 구별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애써 대학생인 만큼 평소 부르지 않던 ‘두만강’을 부름으로써 과잉 대학생 자부심을 만족하려는 위선보다는 나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캔서스 시티’를 부르는 학생들이 더 솔직하지 않은가 생각하고 홀로 미소를 김치 못했던 기억이 있다.

 

 

연대 延大의 강점 强點, 연대생 延大生의 특징 特徵

 

지금 내 아내는 연세대학교에서 만난 클라스 메이트인데 간혹 이런 얘기를 하곤 한다.

“남자들은요, 연세대학교 출신들이 제일 좋아요. 이건 제 생각이 아니라 우리 친구들은 누구나 그런 말을 한다구요. 연대출신 남자들은요, 다정하구, 모나지 않구, 가정적이며 아내들을 아껴주는 성격이라구요. 우리 친구들은 이런 말을 해요. 가령 봄이라서 대문에 페인트 칠을 하는 경우가 있으면 서울대 출신 남편들은요, 말로는 가정을 가정을 위한다 라고 하면서도 ‘페인트칠 좀 해주셔요’ 하면 사람을 사서 페인트칠을 하구요. 고려대출신 남편들은요, 페인트칠 좀 해달라고 하면 ‘남자가 어찌 가정 일을 할 수 있으리오. 당신이 해’ 하고 모른 체 하지만 연대출신 남자들은요, 천천히 일어나 자신이 페인트칠을 한대요. 나는요, 이담에 우리 딸애가 시집갈 때두 연대생 출신 남자에게 시집 보낼 거예요.”

나는 이 말을 참 재미있게 생각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연대가 맹목적으로 왜소하고 나약하다고 비난 받는 점이기도 하지만, 이 점이 바로 연세대학교 성격의 강점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때문에 감히 단정하건대 연세대학교 출신들은 졸업 후에 별로 크나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지난 겨울 우연한 기회로 고려대학교 총장이신 김상협 박사님을 만나 뵈온 적이 있었다. 잔설이 쌓인 고려대학교에 김총장님을 만나 뵈러 들어가면서 나는 이 촌놈의 학교를 바라본 순간 가슴이 찡해와서 감격의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다.

저 식민지시대 암울한 민족의 의식 속에 통렬한 폭죽을 터뜨린 우리 민족의 학교 고려대학교의 위풍을 보며 아, 그렇구나, 바로 이것이 대학이로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었다.

오늘날 무엇이든 천편일률로 똑같아지는 이 획일주의적 문화, 철학, 예술 속에 대학만은 그 나름대로의 칼라를 고집해야만 한다고 나는 느꼈었다.

고려대학교는 고대의 특색으로 서울대학은 서울대의 특색으로 연세대학교는 연대의 특색으로 뻗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제발 대학교에게 한가지 빛깔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대학을 자유롭게 하라.

고려대학교에서 김총장을 만나 뵈온 뒤 나는 그 느낌을 신문에 이렇게 썼었다.

 

“대학교문을 들어선 순간 모자를 벗어라. 교문을 들어선 순간 일체의 권위와 일체의 체면을 버려라. 아무도 이곳을 무단침입 할 수는 없으며 이곳에 들어선 순간 경례하라.

이곳은 우리의 미래를 짊어지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진리를 닦고 연마하는 곳. 목소리를 낮춰라. 저 책 속에 파묻힌 젊은이들의 머리를 혼란케 하지 마라. 그리고 용서하라. 그들이 설혹 그릇된 시행착오를 하더라도.

대학교. 이곳은 당신들이 불어나는 이자를 꿈꾸며 사고파는 증권회사가 아니며,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자가용 족이 아니다. 당신의 어깨 위에 빛나는 계급장을 떼어라. 이곳은 신의 은총을 갈구하는 교회가 아니다. 이곳은 당신의 위장을 채우는 음식점도 아니다. 이곳은 돈만 더 주면 탈 수 잇는 일등칸 급행열차도 아니며 또한 어울렸다 떠나가는 대합실도 아니다.

대학은 당신에게 배부르게 하지 아니하며 당신을 편하게 하지 아니하며 당신의 영혼을 채워주지도 않는다.

대학 大學, 이곳은 단지 수많은 눈감은 사람들의 손끝을 위한 점자 點字, 그 진리를 샘솟게 용기 있는 자라면 저 돌계단이 여늬 돌 [石] 이 아니라 수많은 방황하던 그 시대의 젊은이들이 때로는 고뇌하고 때로는 두려워하고 때로는 슬퍼하던 청춘의 푸른 문장 紋章 임을 인정하고 풀포기 하나 강의실 벽의 낙서 하나 꺾거나 지워서는 안 될 것이다.”

 

그날 김총장은 오늘날 대학교육에 대해 걱정을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오늘날 대학생들에게 영국식 교육처럼 사회지도자로서의 우월성을 강조할 것이냐, 아니면 미국식 교육처럼 건전한 시민으로 키울 것이냐 하는 문제는 우리 일선 책임자로서 가장 큰 난점중의 하나라고 믿습니다. 대학교육이 사회 지도자를 키우고 그 본래의 목적에 치우친다면 그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팽배한 오늘날의 대학교육은 암초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延世가 가르친 眞理

 

나는 여기에서 우리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왜 졸업한 뒤 막상 사회생활에 부딪친 후에도 잘 적응하여 그 본래의 빛깔을 잃지 않는가를 말하고자 한다.

바로 이것이 연세대학교에서 내가 배운 그 진리였기 때문이다.

연세대학교에서 배운 진리는 분명히 말해서 극단의 이상주의적 이론이 아니었다.

때문에 졸업과 동시에 사회에 나가서도 학교에서 배운 교과서적 이론과 사회와의 거리감은 별로 느끼지 않았으며 충격을 덜 받게 되었던 것이다.

타 대학생들이 학창생활에서는 그들이 비난하는 대상을 뚜렷이 하다가도 졸업 후에는 한시 빨리 그들이 비난하던 대상이 되고 싶어 안달을 하거나 막상 그 대상의 일원이 되지 못하면 그저 뒷전에 물러서서 갉아 내리는 열등감 투성이의 지 知적 소모품으로 전락되는 괴리감의 노예가 되는데 비해 연대생들은 대부분 각자 그들이 원하는 분야에 별로 드러남 없이 박혀 있다.

이것이 바로 연세대학교가 입학 때부터 배워주는 그 진리인 것이다.

연세대학교는 바로 학생들에게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책임의식을 처음부터 가르치고 있으며 때문에 4년의 과정 동안 터득한 진리는 바로 타인 위에 있다는 우월의식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그 타인의 구성원이라는 명제를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新東亞 1978年 6月號]

마지막 7월과 반세기…

 

올해,  2010년대 마지막 해의 칠월 달을 맞는다. 이즈음이면 충분히 무더위에 대한 적응이 잘 되었기에 날씨를 다시 언급하고 싶지 않다. 올해의 7월을 맞으며 유난히 머리에 떠오른 것들이 있는가… 역사적으로는 50년 전, 서울 상도동 집의 ‘조잡한 금성  19인치 흑백 TV’ 앞에서 새벽녘에 눈을 비비며 맞았던 Apollo 11Neil Armstrong의 역사적인 moon landing… 바로 그것이 떠오른다.  반세기 전의 역사라 지금 이곳도 서서히 Apollo 11 Special 비슷한 것들이 이곳 저곳 자주 눈에 띈다. 50년 전… 그것이 50년 전이라니.. 얼떨떨한 것, 50이란 숫자가. 거의 무감각한 50으로만 느껴지는 것이 정상인지..

그런 배경으로 올해의 7월은 날씨 보다는, 50년 전인 1969년이 주는 느낌이 더욱 나를 생각하게 만든다. ‘철모르고 잘나가던’ 대학 3학년 시절이었지.. 2학년까지의 회상은 분명히 적어 놓았는데 그 이후의 것, 특히 1969년 직후는 별로 쓰여진 것이 없다. 별일이 없으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는 추억을 정리해 놓을까 하던 것이 몇 년째인지..

정확히 50년 전 즈음, 다른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연세대 캠퍼스는 박정희 3선 개헌 반대 데모로 온통 수라장이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순조롭게 끝날 무렵에 도저히 이런 꼴로 나라를 놔두고 물러날 수 없다는 심정으로 개헌을 강행한 것.  6월이 되면서 거의 매일 데모를 한 기억인데,  데모 자체는 물론 ‘주동 그룹(대부분 정법대생들)’이 주도를 하기  마련이고, 우리 같은 ‘(이)공돌이’들은 그들의 뒤를 따르는 식이었다.

그런 어느 날의 데모 광경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노천극장에서 한참 ‘선동 연설’을 들으며 기운을 모은 후에 우리들은 연세대 굴다리를 지나서 신촌 로터리 쪽으로 신나게 나가고 있었다.  로터리 쪽으로는 중무장한 전투경찰들이 도열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뒤를 따라가던 우리들은 앞장선 ‘용감한 정법대생’들만 믿고 나간 상태였는데 어느새 앞으로 보니 그들이 모조리 없어진 듯 느껴졌다. 그러니까 순식간에 우리들이 선두에 선 것이다.  순진하기만 했던 우리 ‘공돌이’들, 모두들 겁에 질려서 뒤로 물러나며 캠퍼스 쪽을 달리고 있었다.

당시의 데모는 그 후의 유신반대 데모와 비교하면 아주 ‘얌전한’ 것이었다. 서로 싸운 기억도 없고 다친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의 기억으로 ‘데모하는 것’에 대한 회의가 많이 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유일한 ‘반대하는 수단’인가..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인가.. (물론 당시에는 없었다)

이런 어수선한 6월이 지나면서 결국은 ‘강제 조기 방학’이 되어서 모든 학교는 3개월간의 잠을 자게 되었다. 우리들의 관심은 어이없게 3선 개헌 같은 정치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고, 곧 있을 Apollo 11 의 달 착륙 같은 것들이 우리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나는 (박)창희와 소백산 등산을 계획 중이었고, 결국은 소개받은 2명의 아가씨들과 같이 4명이 소백산 등반을 하게 되었다.  그때 연화봉 바로 아래의 고원지대에서 본 밤하늘의 놀라움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래서 나중에 그곳에 천문대가 생겼다고 들었을 때 크게 놀라지 않았다.

 

 

50년 전 소백산 고원의 초원지대에서 같이 ‘무섭게 많은’ 별들을 보았던 그 두 명의 아가씨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가끔 상상을 해 보기도 한다.

1960년대 마지막 7월과 2010년대 마지막 7월의 모습들이 교차되며, 아~~ 오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First of May, 2019

창희야, 용현아 또 일 년이 흘렀구나..

 

‘말대가리’ 용현아, ‘박하사탕’ 창희야.. 또 일년이 흘렀구나. 먼지가 뽀얗게 거리를 덮었던 그 시절 무언가 건설의 굉음 속에서 하루가 모르게 변하던 우리의 거리, 서울거리를 누비던 시절.. 그것도 5월의 서울 퇴계로 거리와 칠흑같이 어둡던 지하다방에서 듣던 불후의 명곡들, classic pop 그 중에서도 어떻게 Bee Geesfirst of may를 잊을 수 가 있으랴… 이제는 절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런 곳이 되었지만, 그래도 뇌 세포가 아직도 그 당시로 꿈속에서나마 보고 느끼게 해 준다.

지난 일년은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하구나. 창희야 LA에서 잘 살고 있으리라 상상은 간다만 용현아, 너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구나. 재동학교, 휘문중고교, 건국대 를 통해서 찾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제는 늦어가고 있다는 생각뿐이다. 그래 늦었어… 상상과 추억 속의 너희들 모습이 나는 사실 더 매력적이니까..

나의 지난 일년이 이곳에 ‘적나라’하게 남아 있지만 그래도 나는 ‘진화’하고 있다는 자부감으로 산다. 나의 북극성은 분명히 같은 곳에 있고 나는 그것을 한번도 놓치지 않고, 잊지 않고 방향을 잃지 않으며 산다. 그것이 나의 나머지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그래.. 그것이 바로 ‘희망’이란 것.. 그것만 놓치지 않으면 내가 태어난 생의 의미는 확실히 구현된다고 믿는다.

그래.. 우리의 50년 전의 아름다운 추억이 머리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한.. 희망은 항상 있는 거야.. 나는 믿는다. 모두들 건강하게 살기를…

Rainy day and Monday..

Tobey가 잠자고 있는 낙엽에 덥힌 뒷마당에 늦가을비가 세차게..

 

¶  비 쏟아지는 월요일:  하루 종일 어두운 하늘에서 싸늘한 비가 줄기차게 내린다. 비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물론 반가운 선물같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flood warning이 나올 정도가 되면 선물의 정도를 넘은 것이다. 게다가 가끔 물이 새는 2층 지붕도 신경이 쓰인다. 그래도 조금 불편한 것이 있어도 이것은 역시 ‘가을비’가 아닌가? 각가지 감상적 생각들이 머리를 꽉 채운다. 물론 대부분 추억에 얽힌 생각들이다. 게다가 이런 을씨년스러운 가을비에 나의 영원한 친구 Tobey가 내 옆에 없다는 새로운 사실이 가슴에 걸린다. 이런 때면 나의 무릎에서 편하게, 평화스럽게 코를 골며 자던 그 녀석.. 비록 육신은 뒤뜰 땅속에 묻혔어도 녀석의 느낌은 아마도 내가 죽을 때까지 나를 따라다닐 듯하다.

 

Saybrook Court에 아직도 남은 가을 낙엽들, 과연 언제까지 버틸까..

 

월요일에 내리는 비, 70년대 초 (1971년) The Carpenters의 classic oldie, Rainy Days and Mondays가 문득 떠오른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다시 없는  목소리’ Karen Carpenter의 잔잔하지만 깊은 목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그렇다.. 1970년 초.. 미지의 세계를 향한 꿈을 꾸던 멋진 시절에 들었던 ‘비 오는 월요일’은 큰 의미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노래의 가사처럼 ‘모조리 우울한 것’들이었다. 그런 감정이 반세기 뒤에 완전히 뒤바뀌어 이제는 반대로 즐기는 ‘선물’이 된 것이다. 세월의 조화가 아닐까?

 

이렇게 세차게, 힘차게 쏟아지는 비는 나의 혼탁한 머리 속을 씻어주는데..

이런 때면 문지방에 편하게 엎드려 하염 없이 비를 바라보던 Tobey는 이제..

 

요새 갑자기 ‘기분과 몸’이 훨씬 나아진 연숙 덕분에 다시 규칙적인 정상적 생활을 찾기 시작해서 오늘 아침도 예의 daily morning mass, adoration chapel, Sonata cafe, 그리고 YMCA workout의 routine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역시 예외는 예외다. 갑자기 연숙에게 ‘감기 기운’이 덮친 모양, 열이 나고 목이 잠기고 기운이 빠지고.. 나 같으면 그런 것 참거나 숨기거나 하겠지만 사람은 다 다르니까.. 이럴 때 제일 중요한 것이 Bishop Robert Barron이 즐겨 강조하는 prudence 란 것이다. 나도 그의 말에 동감이다. 때와 장소에 따른 각가지 ‘덕목’들이 항상 같지 않고, 지혜롭게 ‘조절’을 해야 한다는 wisdom. 그저 참고 해야 할 것을 다 끝내느냐, 아니면 내일을 생각해서 할 것을 포기하느냐.. 결국은 내일을 생각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은 일주일에 제일 중요한 레지오 주회합이 있는 화요일 ‘Legio’ Tuesday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날인 것이다.

 

 

Rainy Days and Mondays – The Carpenter – 1971

 

¶  ‘기타귀재’ 심재흥, 50년 전:  어제 중앙고, 연세대, 연호회 친구, 이윤기와 뜻밖으로 KakaoTalk 에 연결이 되어서 감회 깊은 이야기(texting)를 나누었다. 본지가 50년도 넘은 사람과 어제 헤어진 듯한 느낌으로 대화하는 것, 솔직히 이것이 바로 surreal 한 느낌이 아닌지.. surreal, surreal..  한마디로 실감이 안 나는 것이다.

얼마 전 같은 그룹친구 양건주의 주도로 우리들 4명 (나, 양건주, 이윤기, 윤인송)이 기적적으로 단체 카톡방에서 몇 마디나마 서로의 숨결을 느끼게 되었다. 언제고 이 친구들의 최소한의 안부 정도는 알 수 있겠다는 안도감마저 들었다.  모두 친한 친구들이었고 특히 윤기는 헤어진 이후 거의 연락을 못하고 살아서 궁금한 것들이 더 많았지만 ‘거리와 세월의 횡포’ 의 희생자로 일생을 보낸 셈이다.

이 친구가 video하나를 올렸는데.. 1960년대 일본에서 활약했던 그 유명한 The Ventures를 ‘흉내’낸 electric guitar group의 공연이었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심재흥‘이란 이름을 떠 올렸다. 50년 전의 그 이름이 이윤기란 친구의 기억과 겹치며 떠오른 것이다. 연세대 전기과 동문들.. 그 중에 ‘기타귀재’라고 불리던 친구, 그가 심재흥이었다. 1969년의 회고담을 쓰려고 하던 참이라서 참 timing이 절묘하다고 할까..

 

그 당시 일제 electric guitar, 심재흥의 도움으로 샀고 역시 그의 도움으로 팔았던 기억..

 

그 당시 나는 이 ‘귀재’로부터 기타(특히 electric guitar)의 매력을 배웠다. 자세한 테크닉을 배운 것은 아니었어도 그가 연주하는 것을 보며 넋을 잃고 바라보기도 한 것, 나중에, 아니 지금까지 (통)기타를 손에서 떨어지지 않게 했던, 엄청난 영향을 준 것,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가는 말로 ‘심재흥’이란 이름을 언급하니 놀랍게도 이번에 보낸 ‘벤쳐스’ 동영상’이 바로 그 친구가 보낸 것이라는 것이 아닌가? 얼마 후에 연세대 전기과 동문들이 모이는데 그 친구도 만난다는 얘기에 나는 솔직히 꿈을 꾸는 듯한 느낌조차 들었다. ‘세월과 거리의 횡포’.. 도 이렇게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구나…

 

 

The VenturesWipeout live in Japan 1966

 

¶  사랑의 기다림:  지난 토요일 모처럼 우리는 ‘자매 성당’인 둘루스 Duluth, GA  에 있는 김대건 성당엘 갔다. 이날 그곳에서 ‘추계 일일 침묵피정’이 거의 하루 종일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집에서 거의 30마일이나 떨어진 곳을 아침 8시에 집을 떠나야 하는 것 물론 귀찮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나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가라, 가라, 무조건 참석해라’ 라는 무언가를 거역할 수 없었다. 가만히 보니 근래 나는 이 ‘가슴 속 깊은 곳의 무엇’을 조금씩 느끼며 사는 듯하다. 그것이 거창하게 ‘성령’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유행하는 과학적 표현으로 아마도 quantum message 정도는 아닐까?

4년 전에 이곳으로 같은 피정에 온 기억이 남아있지만 매번 지도신부가 다르니까 피정의 결과는 매번 다를 것이다. 아침 점심 식사를 포함해서 각각 두 번의 신부님 강의와 침묵 묵상이 번갈아 가며 오후까지 계속되고 마지막에 미사로 끝을 맺는다. 이번의 지도 신부님은 우리의 도라빌 본당 보좌신부인 ‘김형철 시메온’ 신부님으로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비교적 젊은 신부다.  ‘사랑의 기다림’이란 포근한 주제로 ‘전혀 지루하지 않고, 졸리지 않는’ presentation을 했다.

요사이 신부님들의 강론을 들으면서 느끼는 것은 이분들 ‘과학적인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요새 신학교가 지나간 반세기 동안 급변하고 있는 과학문명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갈릴레오 사건’으로 체면이 완전히 구겨진 가톨릭 전통을 상기하면 격세지감이 든다. 이날 김 시메온 신부님의 강론 서두가 이것을 말해준다. ‘거시적 우주론, Cosmology’ 으로 주제를 이끌었던 것이다. 아마도 더 기다리면 아마도 상대성이론, Quantum MechanicsString Theory 까지도 거론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런 추세를 절대적으로 환영하는 입장이지만 ‘철학적, 신화적’ 접근을 좋아하는 일반 신자, 대부분 여성들에게 이것이 크게 appeal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C’ wire, monastery, 2 books

¶  Running ‘C’ wire Smart Home, Smartphone (now one word), Smart TV, 그리고 Smart ‘Stat (thermostat) ..

덧없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나를 스쳐 지나는 이런 단어들,   이것들 중에서 나와 역사적으로 제일 오래된 것이 smart home일 것이고,  다음이 Smartphone, 그리고 지금 나의 코앞에 다가온 것이 바로 Smart Thermostat 이다. 얼마 전에 두 ‘아이’들이 우리에게 준 2대의  ‘dumb’ 40+” TV는 Roku, ChromeCast gadget 덕분에 곧바로 Internet streaming를 하는 smart tv의 기능을 갖추게 되어서 그런대로 우리 집도 ‘현대화’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우연히 큰딸 boyfriend Richard가 최신형으로 upgrade 한다고 2개의 smart thermostat를  우리에게 주었다.  그것이 EcoBee 라는 ‘웃기지 않게’ 비싼 사치품 thermostat였다. 집안의 heating & cooling system(HVAC) 을 control 하는 것이 thermostat인데 이것의 내부 구조는 간단한 electrical switch에 불과해서 예전까지 이것은 비쌀 수가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것이 복잡한, 그러니까 smart하게 보이는 기능을 잔뜩 넣어서 멋진 fashion을 만들어 고가로 파는 것, 나에게는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 추세다. 수백 년 전통의 coffee를 Starbucks로 비싸게 파는 것이나 맹물을 bottle에 넣어서 파는 것과 다를 것 하나도 없다. 하지만 비싼 것은 비싼 이유가 있을 것이다.

2 ‘given’ Ecobee smart thermostats

 

현재 우리 집에 있는 것은 기본적인 programmable thermostat로서 하루에 네 번 정도 시간에 따라 온도를 조절하는 model로서 사실 그렇게 불편한 것은 없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집에서는 더 복잡한 timing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retire한 상태에서는 복잡한 것이 더 골치가 아프다.  하지만 이것을 program 하는 것이 그렇게 편하지 않다. 대부분 어두운 복도에 설치된 이것을 서있는 상태에서 그 작은 글씨를 보며 program하는 것 거의 torture에 가깝다. 그래서 한번 program해 놓으면 거의 바꾸지도 않고 그러기도 싫은 것이다.  그런 것이 지금은  Smartphone이나 PC의 보기 좋은 screen을 편한 곳에 누워서 program을 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 나는 족하다.

이것을 나에게 주면서 Richard는 현재 우리 집 thermostat에  ‘C’ wire가 연결되어 있냐고 물어서..  속으로 이것이 무슨 말인가 궁금했지만 우선 ‘있다’고 대답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없는 extra wire, 24V transformer의 ‘common’ (power return) 임을 알게 되었다.

왜 이 ‘놈’이 필요한가 보니, smart ‘stat(thermostat)는 Smartphone과 같이 하나의 독립된 small computer라서 power, 본격적인 전원이 필요해서 그런 것이었다.  작은 computer라고 했지만 기능적으로 보면 웬만한 예전의 desktop PC의 그것이고, 특히 WiFi 가 필요한 것이라 생각보다 energy를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것과 다르게, 오래 전에 쓰던 mechanical ‘stat는 전혀 power가 필요 없었고 요새 많이 쓰고 있는 programmable ‘stat는 거의 모두 battery를 쓰기에 따로 power supply wire가 필요 없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4 wires가 필요한데 (1) 24V hot side, (2) fan on, (3) heat request, (4) cool request 가 그것들이다. 예를 들면 heat가 필요하면 (1)과 (3)을 연결하면 된다.  그러니까 24V hot side가 return되는 ‘common’ 이 사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새로 나오는 smart ‘stat들을 ‘팔아 먹으려면’ 이 extra wire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해결책은 이 wire를 furnace control board로부터  thermostat가 있는 곳까지 끌어내야 한다. 이 작업을 과연 몇 명이나 ‘감히’ 할 수 있을까.. 물론 handy한 공돌이를 제외하고. 

다행히도 우리 집의 in-wall wiring은 home pc networking 시절부터 10base2, 그 후의 CAT5 cabling 까지 모두 내가 설치했기에 사실 이번의 ‘C’ wiring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 정도로 쉬운 job이다. 다행히 남아도는 CAT5 cable이 많아서 그것으로 위층은 해결이 되었다. 아래층 것이 끝나면 드디어 EcoBee 를 연결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요새 아이들 자랑스럽게 말하는 ‘Smartphone으로 언제 어디서나 집의 온도를 맞출 수 있다’ 라는 것, 나도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  토요일을 수도원에서:  싸늘하지만 기가 막히게 화창한 ‘영광스러운’ 가을 하늘아래 일년 만에 다시 한 시간 정도의 drive로 Conyers, GA 의 수도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곳은 사실 부끄럽지만 ‘자발적’으로 간 적은 없고 무슨 계기가 있으면 가는 그런 곳이다. 위치나 분위기를 보아서 이곳에 갔다 오면 다음에는 반드시 ‘자발적’으로 가보자, 문득 ‘평화로운 곳’ 생각이 들면 그곳을 차를 몰자.. 등등의 상상을 해 보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계기’가 생기만 거의 두 번 생각을 안 하고 OK를 하곤 했다. 올해도 그런 식으로 연숙을 포함한 교사들이 인솔하는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의 예비신자 교리반 일행을 따라서 가게 되었다.

 

a spectacular view of the pond at the monastery..

 

5~6년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그렇게 생소하던 곳이 이제는 연륜이 쌓여가는지 아주 편안하고 익숙한 느낌이 든다. 제일 기억에 남던 때가 레지오 피정을 이곳에서 했을 때가 아닐까? 밤늦게 어두운 대성전에 홀로 앉아서 묵상하던 경험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아주 강렬한 것이었다. 사람은 역시 ‘주위 환경’에 철저히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오감의 피조물이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무엇을 이런 곳에서 느끼고 받을 수 있음을 경험한 곳이기도 하다.

교리반 학생들은 이런 곳에서 무엇을 느끼고 배울까.. 이날도 방문후의 소감들을 나누는 시간에서 간간히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 너무나 생소한 것을 보았다는 나눔, 이해가 간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하지만 생소함과 더불어 ‘신비적 경건함’도 느꼈다는 나눔은 아주 고무적인 것이 아닌가?  이들의 앞으로의 신앙여정은 어떨까..  과연 얼마나 궁극적으로 ‘절대존재’를 알게 될까… 큰 유혹 없이 세례의 은총을 받게 되기를 속으로 기도했다.

이날 오랜 만에 gift shop에서 책을 한 권 샀다. 몇 년 전에 왔을 때 C. S. LewisThe Joyful Christian이란 책을 산 적이 있었고 그때 이곳은 Amazon.com 같은 discount가 없음을 알았다. 그러니까 list price대로 파는 것이다. 이것으로 수도원을 유지해야 함을 누가 모를까? 이날도 그것을 알고 샀는데, 메주고리예 발현에 관한 Janice T. ConnellThe Vision of the Children 이란 책으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주 뜻밖의 보물을 발견한 느낌이 들었다.  비교적 읽기 쉬운 책으로 오자마자 거의 1/3을 읽었는데 ‘뜻밖의 보물’이란 느낌이 계속 사라지지 않았다.

 

¶  2권의 ‘반갑고 고마운’ 책들:  문밖에서 bell 소리가 들린다. 누가 온 것, 귀찮은 sales, 아니면 delivery? 조용히 밖을 보니 벌써 누가 무엇을 문 앞에 놔두고 가는 모습이 보인다. 아하~ FedEx van이 보이니 무엇이 배달된 것이었다. 익숙한 package이지만 나는 요새 아무것도 산 것이 없는데… 하고 shipping label을 읽으니.. 아니~ 대한민국에서 온 것, 누가?  아하~ ‘도사’ 양건주가 책을 보낸 것이었다.

 

FedEx package from Korea

 

얼마 전 오랜만에 다시 연락이 되어서 너무나 반가웠는데, 이상하게 ‘주소’를 물어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책을 보내려고 그랬던 것이다. 다시 눈가가 찡~ 해 짐을 느꼈다. 친구야, 친구야… 고맙다, 친구야.. 어쩌면 너는 그렇게 자상하고 배려심이 깊은가? 나는 아무래도 못 따라가는데.. 이 친구에게 받았던 ‘책 선물’이 꽤 되는데.. 책 값도 그렇지만 이렇게 실제로 행동으로 귀찮을 수 있는 일을 하는 ‘고물 우정’에 어떻게 응답을 한 것인가?  이해인 수녀님의 ‘기다리는 행복’ 이란 수필집과, 얼마 전에 출판된 ‘따끈따끈한’ 책 ‘글배우’라는 독특한 이름의 저자가 쓴 ‘오늘처럼 내가 싫었던 날은 없다’ 라는 제목을 가진 책, 모두 2권이었다. 책 값만큼 우송료가 대단했는데.. 그것도 FedEx로 속달이 된 것이다.

이해인 수녀님은 사실 종파를 떠나서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한 분이지만 연숙이 특히 좋아하는 수녀님이다. 그 책은 연숙이 먼저 보기로 하고 나는 현재 ‘글배우’라는 저자가 쓴 ‘오늘처럼…’ 이란 책을 읽고 있는데, 잠깐 훑어 보니 대부분이 ‘상식적 수준의 조언’들이지만 어떤 것들은 나의 생각이 맞는다는 재확인을 하게 하는 것들도 보였다. 책의 부제가 ‘무너진 자존감을 일으켜줄 글배우의 마음 수업’으로 되어있으니 아마도 대부분 ‘무너진 자존감’에 대한 조언들일 것이다. 나의 자존감은 분명히 예전 보다는 많이 오른 상태지만 그래도 이렇게 나를 생각해 주는 ‘벗’이 지구상 어디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나를 ‘하늘로 뜨게’ 만든다. 건주야.. 고맙다, 고마워. 행복하게 살아다오.

 

Autumn too far..

¶  가을은 도대체 언제, 어디에? 올해의 9월 초순은 유별나게 더운 느낌이고 사실 실제로도 그렇다. 하지만 나의 불평은 햇살 따가운 그런 것이 아니라 장마 뒤의 끈끈한 그런 날씨의 연속이라는 사실이다. 거의 매년 날씨의 느낌을 개인 일기로 남긴 탓에 나는 계속 작년 이맘때와 일일이 비교를 하는 ‘함정’에 빠진다. 작년의 9월은 Nine-Eleven (2001년 9월 11일)의 그때와 거의 비슷하게 바짝 마른 시퍼런 하늘의 연속이었다. 나는 그런 9월 초순을 기대하였는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정 반대가 되었다.

이런 때, 즉 여름 같은 느낌의 9월을 느끼게 되면, 빠지지 않고 잊지 않고 떠오르는 9월의 날씨는 1968년의 9월 서울에 살 때의 기억이다.  연세대 2학년 2학기가 시작 되었던 때, 그렇게 재미있던 학교공부가 갑자기 시시하게 느껴지고 연세대 입구에 즐비한 다방에 앉아서 pop song에 심취되고, 그 당시에 시작된 어떤 학생 클럽(남과 여)에 거의 모든 시간을 ‘낭비’하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철없는 듯 하지만 절대로 후회를 할 수 없다. 그 때는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없는 가장 ‘즐거운, 추억을 남길 수 있는 때’ 였으니까.. 신촌 로터리에서 이대 쪽으로 가는 언덕길에서 ‘클럽 뉴스’를 등사 service 하는 집에 부탁하고 시내버스를 기다리던 때, 9월 중순 무렵, 엄청 더웠다. 바로 지금 내가 겪는 그런 날씨였다. 그 이후 나는 ‘더운 9월’을 맞이하면 그때 그 길에 있었던 ‘등사 service’1하던 집을 회상하곤 한다. 아마도 지금 같았으면 집에서 Microsoft Word로 편집을 해서 집에서 print하거나 email로 회원들에게 보냈을 것이지만.. 50년 전에는 이렇게 모든 것이 ‘느리지만 너무나 인간적’인 그런 시절이었다.

오랜 만에 들어보는 단어 hurricane, 이것도 꽤 기억에서 희미해 진 것이다. Global warming 과 함께 익숙했던 이것, 이것이 올해는 생각보다 가까이 왔다. 바로 옆에 위치한 Carolina (주로 North)로 들이 닥친 것이다. Hurricane Florence.. 여자의 이름, 줄여서 Flo라고 했던가. Carolina 사람들은 무섭고 귀찮겠지만 안전한 거리에 있는 이곳 (Metro Atlanta) 에서는 그저 ‘시원한 북쪽의 공기’를 이곳으로 보내주고 시원하고 잔잔한 비나 좀 많이 뿌려주기를 바랄 정도다.

 

¶  2018년 9월 8일, 끈끈한 구름 속으로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가 대단한 9월 초, 올해의 9월은 작년의 그것과 이렇게 다른가… 작년의 daily (personal)  journal을 보면 습기가 완전히 빠져나간 파란 초가을의 풍경이 생각이 나는데.. 비까지 그친 날씨 아래 흙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는 올해의 backyard는 그렇게 예쁜 모습이 아니다.

오늘은 사실 교회력으로 ‘성모님의 탄생축일’인데도 불구하고 아침미사를 거르게 되었다. 큰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귀중한 아침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고 싶다는 유혹을 이기지 못했던 것 뿐이다. 사실 이런 아주 작은 유혹들에게 넘어가면 결과는 예측불허다. 경험을 통해서 어찌 모르랴… 관건은 이 작은 유혹에서 더 이상 후퇴를 안 하는 것이다.

달력을 앞뒤로 보니 내주 화요일이 9월 11일… 2001년 9월 11일… 나인원원… 갑자기 몸이 움츠려 든다. 기분이 갑자기 나빠지고 쳐진다. 어느 누군가 안 그럴까? ‘그 당시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라는 질문이 나에게 떨어질 듯한 기분을 느낀다. ‘악의 실재’를 처음으로 체험한 날을 어찌 누가 잊겠는가? 기분이 또 쳐진다.

  1. 당시에 print물을 copy하려면 거의 등사란 것을 해야 했다. 복사기(copier) 가 없거나 너무나 비쌌기 때문이다.

Filet-O-Fish Friday, Nori Nori..

¶  Filet-O-Fish:  언제부터였을까… 금요일을 no-meat-day 로 삼고 ‘가급적’ 그날 하루 고기 meat 먹는 것을 피하기 시작했던 것이.. 물론 확실한 때는 기억이 안 나지만 대강 내가 본격적으로 ‘회심1‘을 하기 시작했던 그 무렵이었음은 분명하다.  추측에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이 금요일이라 조금은 절제 abstinence 하라는 의미에서 그런 전통이 생겼을 것이지만 나는 그 무렵 ‘추호의 의심, 반론’ 없이 교회의 가르침을 수용할 ‘열린 가슴’이 있었기에 큰 어려움 없이 고기를 피하고 대신 생선으로 단백질을 보충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생긴 것이 금요일에 McDonaldFilet-O-Fish sandwich를 즐기는 전통이었다.

이것은 McDonald 아침 menu에 없기에 우리는 아침에 YMCA gym에서 workout 이 끝난 후에 가서 먹곤 하고, 저녁식사를 거의 하지 않기에 이것이 사실 그날 마지막 음식이 된다. 요새 이곳에 들어가는 fish fillet 는 Alaskan Pollack(명태)를 쓰기에 우리에게는 익숙한 생선 맛이다.  비교적 작은 size의 sandwich라서 비록 단식은 아니지만 비슷한 abstinence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오늘, 금요일도 그런 fish Friday였다.

이 역사 깊은 sandwich는 거의 45년 전, 1973년 미국에 처음 왔을 당시 너무나 맛있게 먹었던 기억2 이 남는다. 값도 Big Mac보다 쌌고 크기도 아주 적당하게 작았다. 이것의 역사를 찾아보면 (물론 Wikipedia) 아주 재미있다. 역시 나의 짐작대로 가톨릭 전통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천주교인들이 금요일에 고기 중심의 hamburger를 피하는 것을 보고 idea를 얻은 것이다. Cincinnati (Ohio)의 한 McDonald franchise 주인이 처음 착안, 만들어서 팔았는데 이것을 본사에서 받아들여서 전국적으로 퍼진 것이다. 그것이 1960대 중반이었다고 한다. 이 sandwich의 년 매상 1/4이 팔리는 시기도 역시 천주교 전례력의 사순 四旬 시기(Lent)라고 하니, 역사적 배경을 알고 먹으니 더욱 ‘숨은’ 의미를 느끼게 된다.

 

upscale Japanese buffet Nori Nori

 

¶  노리 노리 Nori Nori: 어제는 뜻밖의 점심 외식 초대를 받아서 우리는 Nori Nori 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고급 일식 upscale Japanese buffet 엘 갔었다. 우리 집에서 drive로 30분 가량 걸리는 곳, Sandy Springs (Roswell Rd @Abernathy)에 있는 이 all-you-can-eat sushi buffet  우리는 처음 가본 곳이다. 그저 이런 식의 buffet 라면 대강 Chinese 위주의 ‘서민 풍’의 그런 곳으로 상상이 되지만 이곳은 달랐다. 그야말로 upscale, 한 마디로 ‘비싼 곳’으로 모든 것들이 느낌이 달랐다. 요사이 가깝게 지내기 시작한 스테파노 형제 댁의 초대였는데 아마도 지난 년 말 우리의 초대로 외식을 한 것에 대한 응답이었던 추측도 들었다. 한 마디로 즐겁고 편한 대화와 깨끗하고, 감칠 맛 나는, 고급 스러운 음식들로 나중에 우리 식구들도 한번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급스러운 것은 한마디로 lunch menu들 치고 상당히 pricey, 거의 $20 에 가까워서, 우리의 수준으로는 자주 찾기는 불편한 느낌도 들었다. 보통 점심 때 Buffet에 흔히 보이는 ‘노가다’ 류 (정말 끊임없이 먹어대는) 가 이곳에는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역시 pricey 한 upscale buffet 였다.

 

  1. 성당에 규칙적으로 나가기 시작했을..
  2. 여행 중, Pittsburgh, PA 에 살던 연세대 선배 위재성 형에게 들렸을 때

호랭아, 호랭아..

호룡이와 함께, 서울 명동성당 옆 뜰에서, 1973년 초 봄에..

 

호랭아, 호랭아!  간밤에 호룡이(친구들이 호랭이라고 불렀던, 김호룡 金鎬龍 )를 꿈에서 보았다. 정말 너무나도 오랜만에 보는 그 녀석의 자태, 얼굴은 자세히 못 보았지만 아마도 우리의 ‘젊었을 때’의 그 모습이 아니었을까? 일찍 세상을 떠난 그 녀석의 ‘늙은’ 얼굴을 내가 기억할 리가 없으니까.. 왜 나타났을까? 50대 초에 떠난 그 녀석, 어찌도 나를 두고 그렇게 빨리도 갔단 말인가? 불현듯, 갑자기, 너무나도 그 녀석을 만나고 싶고, 보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은 초조함이 나를 엄습한다. 믿음이 있었던 녀석이니까.. 언젠가는 어느 곳에서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싶지만, 나의 믿음으로 그것이 가능할까?

꿈에서 깨어나며 아하.. 녀석은 이 세상에 없지.. 하는 자괴감보다는 안도감이 더 들었다. 꿈 속에서 이미 녀석이 인간적으로 나를 떠났기 때문에 엄청 슬퍼하고 있었다가 잠을 깨었기 때문이다. 꿈 속에서 그 녀석은 친구로써 나를 떠났던 것 같던데, 그 자세한 배경 상황이 깨끗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왜 꿈 속에서 나를 슬프게 했을까?

녀석을 마지막으로 바로 옆에서 보았던 때가 1992년 여름이었다. 미국에 교환교수로 왔고 Florida로 가족들과 함께 차로 여행을 하다가 이곳 Atlanta를 들렀던 그때였다. 40대 중반의 우리들, 식구를 거느린 한 가장으로 다시 만났던 그때, 인생의 성숙함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던 그때, 우리는 어렸을 때의 꿈과 이상, 환상을 어느 정도로 ‘가감 加減’을 하며 살아왔었을까? 너는 끈질기고 치열한 노력으로 원했던 모교에서  ‘연세대 교수직’을 성취했지 않니? 꿈의 사나이, 목표의 사나이, 그런 네가 나는 항상 부러웠고 질투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너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친구였다.

우리들의 황금시절, 중앙고, 연세대 시절.. 전자기술에 대한 호기심으로 ‘진짜 송신기’를 만들었다는 너를 나는 참 부러워했고, 또 너는 혼자서 ‘진짜 비행기’를 만들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었지? 그래서 기계공학과에 간 것은 알지만 참 그 꿈은 진짜 꿈이었음을 알고 실망했던 것 나는 잘 안다. 중앙고 시절, 당시의 희망의 상징이고 목표였던 ‘미국과 세계’를 향하여 ‘멋진 영어 구사’를 목표로 영어회화 클럽을 만들고 주도했던 네가 아니었던가? 항상 숨어 지내던 나를 밖으로 끌어낸 것, 너의 영향이 아주 컸었음을 숨길 수가 없구나.

생각이 나이에 비해서 무언가 성숙, 조숙했던 너, 당시에 아마도 신앙적인 경험이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세월이 지난 후에 그것이 사실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주위의 친구들은 전혀 알 수가 없었지. 가족들의 영향, 아니면 우리가 모르게 영향을 주었던 사람, 아니면 네가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된 그 ‘자매님’ 때문이었나.. 당시에 나는 그런 기분과 배경을 알 수도 없었고 그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경험이었음 만 어렴풋이 짐작할 정도였지.

돌이켜 보던데, 너는 나에 비하면 ‘어른’들의 수준에 가까운 사고방식과 생활의 절제 훈련을 갖고 있었던 듯 하다. ‘좋은 목표’를 향한 치열한 접근, 노력, 투쟁… 아마도 ‘좋은 것’에 대한 너의 인생관은 이미 ‘초자연적’인 것이었음도 이제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구나. 나는 그것이 수 십 년이 지난 후에야 이렇게 짐작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꿈의 영향인가..) 너의 생각이 나는 것, 전혀 우연이 아니라고 믿는다.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리적으로 다시는 너를 볼 수가 없다는 사실 이제는 모든 것을 ‘초자연적, 신비적’을 기대하는 나, 다시 어디선가 너를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절대로 버리고 싶지 않다.

 

unending morning coffee 외..

¶  ‘Unending Coffee’ Morning: Instant ‘stick’ coffee  에 이어서 supersize Don Pablo gourmet ground coffee.. 나의 머리 속은 벌써 바삐 흘러가는 ‘혈관 속의 움직임’는 느낀다. 이것의 바로 joy of morning caffeine 일 것이다. ‘오래~ 전’ 직장생활 할 시절, 출근해서 그곳의 아침모습을 그리며 회상을 하기도 한다. 참.. 무언가.. ‘세상은 움직임이다..’ 라는 생각으로 가득 찼던 시절들이었다.

Early Morning Coffee의 마력과 매력인 이런 추억과 의미와 깊은 연관이 있고 그것이 ‘중, 노년’ 에만 가능한 즐거움이다. 이것은 그 이전 시절에서는 ‘절대로 100%’ 느낄 수 없는 세월 흐름의 마력 魔力 이다. 오늘 이른 아침은 absolutely, positively perfect coffee experience를 주기에 ‘알맞은 추위’까지 선물로 주어졌다. 무언가 3박자가 맞는다고 나 할까?

이렇게 조금은 느긋한 마음을 갖게 한 다른 이유는.. 예상치 않게 여유를 갖게 한 시간적 bonus, 아침 ‘평일, 매일미사’를 거르게 되었기 때문[she doesn’t feel well] 이다. 5년이 훨씬 넘어가는, 이제는 완전히 습관이 된 이 9시  매일미사는 이제 우리 둘 psyche의 일부가 되었지만 이렇게 가끔 경험하는 exception의 즐거움이 이렇게 오래 ‘매일미사’를 지탱시켜주는 비밀 임도 우리는 잘 안다. 물론 exception은 가끔 있는 rule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exception 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  ‘Senior’ Fall  day trip: How could it be on..?: why, how come, 도대체, 도~시데.. 란 말을 되풀이한다. Mother Nature란 것, 대부분 겸허한 심정으로 받아드리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고 할까? 아마도 나에게 100% 직접 상관이 되는 것이라 그랬을 것이고 사람은 이렇게 ‘약한 이기적 동물’이다. 몇 주전부터 계획되었던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사회복지분과’ 주최의 ‘가을 경로 야유회’가 바로 그것이다. 가을이라는 말은 분명히 ‘단풍 관광’과 연관이 되었을 것이고 ‘경로’는 말 그대로 ‘어르신들을 모신다’는 뜻인데.. 야유회라 하지만 이것은 bus를 rent해서 Atlanta Metro를 완전히 떠나서 State Park로 가는 당일코스 여행이었다. 그것이 ‘갑자기’ cancel이 되었다. 범인은 역시 Mother Nature였다. 그렇게 날씨가 좋다가 왜 하필이면 그날 하룻동안만 ‘차가운 비가 옴’으로 예보가 나온 것일까? Timing이 너무나 절묘해서.. 이것도 혹시 무슨 숨은 뜻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할 정도다.

‘경로 敬老’ 란 말이 우리에게 연관이 되는 것을 조금 피하고 싶지만 실제로 우리도 ‘경로’를 받으러 참가신청을 했는데… ‘지난 2개월 동안 우리를 괴롭혀 온 악마’의 그림자를 깨끗이 잊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분과장 자매님’의 말씀에 동의해서 모처럼 하루를 ‘어르신들’과 어울리는 것을 상상했는데 이렇게 된 것이다. 그래, 이렇게 된 것도 무슨 높은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위로를 하며, 100여명 어르신들을 ‘babysitting’ 하려 불철주야 준비를 했을 그 ‘억척 volunteer’ 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  목요회 월례모임:  어제 밤에는 제2차 목요회 모임이 ‘한일관’에서 있었다. 지난 달 마지막 목요일에 모인 것을 ‘기념’해서 내가 목요회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생각하니 그런대로 멋진 이름이 아닌가? 1990년 5월에 연세대 동문 이WS 형제가 ‘처음 집’으로 이사 갈 때 모였었던 3명의 남자가 거의 30년 뒤에 다시 이렇게 모였고 계속 모인다는 사실은 정말 재미있기만 하다.

목요일날 밤에 모이는 것이 조금 색다르지만 그런대로 이점이 있다. 모두들 목요일날 밤은 그런대로 바쁘지 않다는 사실, 가족이나 가정에 큰 부담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low-key 로 만나는 것, 나는 이 그룹이 아주 오래 가리라는 생각도 해 본다. 2시간 정도 먹고 얘기하는 것, 이번에는 1990년대를 중심으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모두들 열심히들 살았겠지만 얼마나 그 세월들이 행복했는지는 서로가 추측할 할 수 밖에 없었다. 만나는 횟수가 거듭되면서 더 많은 삶에 대한 고백을 나누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다음 달 마지막 목요일을 나는 Thanksgiving Day인 줄 알고 부득이 옮겨야 하는가 우려했지만 다행히도 그날은 그 휴일의 다음 주였다. 이것도 우리 모임 장래의 청신호 같은 느낌을 주어서 흐뭇하기만 했다.

 

등대회, 깜깜한 새벽..

¶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등대회:   지난 주일 (그러니까.. 일요일), 나는 평소에 잘 안 하던 ‘짓’을 하였다. 60대를 주축으로 모이는 성당 친목단체인 등대회에 우리 둘이 정식으로 가입을 한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우발적인 짓은 아니었고 최근에 나의 머리에서 맴돌던 생각을 실행으로 옮긴 것이다. 최근이래 우리부부와 가까이 지내오던 스테파노 형제님 부부에게서 hint를 얻은 것이 큰 도움이 되긴 했지만 그것보다 더 심각한 이유도 있긴 했다. 갑자기 ‘(성당)여자’들에게 진절머리가 난 것이다.

지난 거의 5년 간 거의 여성이 주축을 이루는 레지오에서 활동을 하다 보니 이 group과 가까워진 것인데.. 요새 내가 겪는 ‘인재 人災’는 100%가 모두 그들 group에 의한 것이고 그들 중 특정 소수 group이 보이는 행태는 정말 가관인 것으로, ‘이런 해괴한 짓들은 남자들 group에는 절대로 볼 수 없을 것’ 으로 결론을 지었다. 한마디로 나의 ‘동족’ 남성들이 그리워진 것이다. 남녀가 골고루 섞인 곳, 동류group처럼 보이는 곳, 그곳이 등대회였다. 비록 친교가 주류 활동인 곳이지만 현재 나에게는 거의 oasis같은 느낌을 주는 곳, 이곳에서 우리는 남은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현재로는 희망적이다.

 

¶  깜깜해진 새벽:  Autumn Equinox (추분)를 지난 지 벌써 5일째 아침으로 접어드는 날, 새벽 5시 반 경은 그야말로 깜깜.. 컴컴.. 그 자체였다. 비록 아직도 서서히 습한 공기가 밀려드는 초가을 속의 여름 같은 느낌이지만 깜깜한 새벽이 주는 느낌은 별 도리 없이 가을이다. 요새도 늦은 오후부터는 electric fan, a/c compressor noise가 들리긴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발악’을 해 보아야 시간문제다. 진정 영롱한 amber, pumpkin 의 계절, 가을의 색깔이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찬란한 빛으로 쏟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  Joy of feeding: 나의 이른 새벽의 routine은 backyard  outdoor cat ‘다롱이’ feeding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다롱이는 올해 우리 집 backyard에서 무려 8마리의 kitten을 낳은 ‘젊은 엄마’ 고양이인데 언뜻 보면 조금 큰 kitten정도로 보인다.  지난 6월 초, 나의 heroic한 노력으로 TNR(trap-neuter-return)의 과정을 거쳐 이제는 더 이상 ‘임신, 출산’하는 고통에서 벗어난  바로 그 ‘엄마 고양이’이다. trap-neuter하는 과정에서 분명히 trauma가 있었을 것이고 return 후에 아마도 우리 집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결과는 정 반대였다. 우리 집 fence 를 넘나 들긴 하지만 backyard deck를 자기의 집으로 생각한 듯 하고 새벽이면 ‘meow, meow.. 요란스럽게 야옹 야옹’거리며 아침 밥을 어둠 속에서 기다리는 그 녀석, 이제는 한마디로 house cat, 우리 집의 기쁨이 되었고 만약 사라진다면.. 엄청 슬플 듯하다. 하지만 그는 indoor cat이 아니고 (soft) wild cat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lucky mother cat, 다롱이

 

¶  HP6200 WIN7 BOX: Absolutely, positively Best Buy!: HP6200/SFF Win7 box: 오랜 만에 my favorite, tech online vendor Newegg.com의 newsletter에 나의 눈에 익숙한 HP ‘business-class’ Windows 7 box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2010 model 로 거의 7년이 지난 것, refurbished 된 것이 틀림이 없지만 그것도 상관없다. $60 price-tag도 도움이 되었지만 제일 큰 매력은 64-bit Windows 7 Pro 가 pre-install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OEM version이지만 이것만 따로 사려고 해도 $70이 훨씬 넘는데, 거기다가 탱크처럼 단단한 HP-made hardware까지 있으니 이것보다 더 나은 deal이 어디 있는가? 나의 계획은 현재 쓰고 있는 Windows Vista,  virtual machine을 서서히 phase-out하고 궁극적으로 Windows 7, 10 physical machine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3일만에 도착한 이 Win7 box, 비록 최근의 gaming CPU는 아니라도 10GB ram으로 upgrade를 하고 나니 VirtualBox 로 3 virtual machine이 아주 smooth하게 running을 했다. 이 Win7 box는 당분간 나에게 virtual machine server로 쓰기에 알맞은 horsepower가 있었기에 $70 투자로 앞으로 2~3년간 나의 computing need는 거의 다 해결이 된 셈이다.

best buy, hp win7 box

 

¶  이빈첸시오, 이도밍고, 설아오스딩  Reunion: 3명의 중년이 지나가는 남자가 27년 만에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일주일 전에 약속이 된 모임이지만 속으로 과연 이 모임이 성사가 될까 의구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다시 한자리에 앉게 되었고 나는 속으로 성모님께 감사를 드리고 드렸다.

도라빌 소재 한국식당 ‘동네방네’에서 3명이 이렇게 모인 것은 정말로 27년 만이다. 1990년 5월 초에 도밍고 형제 댁이 Alpharetta로 대망의 ‘첫 집’으로 이사를 하던 날 우리는 같이 모여서 이삿짐을 날랐다. 도밍고 형제는 Clarkston, GA 에 있던 한인성당에서 연대동문으로 처음 만난 인연으로 가까이 지낸 편이었고 아오스딩 형제는 같은 성당 교우일 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직장, Pleasantdale Road에 있는 AmeriCom에서 같이 engineer로 근무를 했던 인연으로 이렇게 셋이 모인 것이다.

하지만 그 얼마 후 우리는 실제적으로 떨어져 다른 인생을 살았다. 따로 따로 가끔 ‘살아있다는’ 소식만 접하는 정도였다. 무언가 서로에게 공통점이 없었던가, 아니면 ‘인생관’이 달랐던가. 1990년대 말에 도밍고 형제와는 연세대 동문회에 같이 나간 적도 있지만 그것도 1회 성 만남에 불과했고 나도 그도 성당을 떠난 인생을 살다가 어떤 다른 인연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모이게 된 것이다.

나는 ‘기적적’으로 다시 ‘귀향’,  성당으로 돌아왔지만 나머지 둘은 아직도 반 냉담의 삶을 살고 있는데, 나에게 희망은 이들과 같이 매주 주일미사가 끝나고 같이 점심을 먹게 되는 그런 날이 오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에게 불가능은 없다’.

 

Typewriter.. 그리고 추억..

1960년 대 Hermes typewriter

1960년 대 Hermes typewriter

 

Georgia 10, 굴림 10:  얼마나 멋진 type shape인가? 하지만 그것보다 더 멋진 것은.. 아~~ 그립다, 태곳적 太古的 둔탁하지만 경쾌한 typewriter의 잔잔한 소음들.. 지금은 원시적인 얼굴의 mono type Pica, 그들은 이제 모두 어디로 갔는가? 아~~ 그 예전에 ‘학문적, 지적 정보’의 총아 寵兒 였던 mechanical typewriter 의 멋진 추억들이여!

나와 typewriter의 첫 만남은 1960년대 초쯤이었다. 서울 중앙중학교 1, 2학년 쯤이었나.. 나의 경기고교생 가정교사였던 김용기 형, 나이에 비해서 조숙했던 그 형이 나의 typewriter에 대한 꿈을 며칠 동안 이루어 주었다. 나의 꿈은 그 것을 직접 만져보고 쳐보는 것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괴물처럼 무겁게 보였던 Underwood typewriter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내가 하도 그것에 대한 호기심을 보였기에 그 형이 어디선가  며칠간 ‘빌려온’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것, Underwood typewriter는  ‘고철’이었다. 크고, 무거운 쇠 덩어리로 보였던 것이다. 어린 애는 들기도 힘들 정도였다. 당시 중학교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해서 영어에 대한 관심이 많을 때였고 학생전용 영어 신문도 학교에서 가끔 볼 수도 있었는데 typewriter는 집에서 활자체로 인쇄물을 찍어 낼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완전히 그것의 위력에 매료되기도 했다. 영자신문 비슷한 것을 찍어보기도 하며 즐거워한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의 typewriter는 물론 거의 모두 ‘중고’, 아마도 미8군 부대를 통해서 흘러나왔을 것이고 그 값은 만만치 않은 것이고.. 보통 사람들은 그것은 가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며 그것을 집에 가진 사람은 거의 못 보았다. 당시에 이미 한글타자기(공병우 3벌식)도 나와 있었지만 아마도 대부분 기업체에서나 쓸 정도고 학생들은 그것을 쓸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언제 그랬나 할 정도로 당시는 거의 모든 학교 공부, 강의 시간에 손으로 받아 쓰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Typewriter가 나에게 가까이 온 것은 대학교 4학년 당시의 겨울방학 때였다. ‘무위도식의 극치’를 실행하던 당시 나는 한강 남쪽 ‘변두리’에 속했던 숭실대학이 있었던 상도동 종점 부근에 살았는데 무슨 구실로든가 시내 그러니까 종로, 명동 등지로 나와야 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타자학원이었다. 왜 타자학원을 골랐는지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다. 좌우지간, 졸업 후에 공부를 더 하거나 유학 같은 것을 가려면 타자기를 칠 수 있는 것이 유리하다는 단순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루에 한번 씩 종로거리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주목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 배우려고 한 것이라 열심히 배우긴 했다.

타자학원에 가서 놀란 것은 이것이다. 학생들이 ‘모조리’ 여자, 그것도 아주 젊은 여자들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들은 그 ‘기술’로 취직을 하려 했기에 나와는 목적이 전혀 달랐다. 그들은 심각한 자세였고 청일점인 나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다. 학원 강사는 남자였는데, 나의 출현에 꽤 놀란 눈치였고 아주 반가운 모습이었다. 강의가 끝나면 그는 나와 사무실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우리들이 그곳에서 유일한 남자들이었다.

집에 타자기가 없었던 관계로 학원에서 배우는 것은 비교적 값싼 방법이었고, 종로2가에 학원이 있어서 나는 매일 종로거리로 나올 수 있었기에 그것은 지루한 겨울방학을 보내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나의 타자 실력이 얼마였는지 생각이 안 나지만 그것은 나에게 큰 관심사는 아니었다. 최소한 touch typing만 알면 나의 목적은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까..

그 이후 미국유학을 준비할 때 나는 ‘중고’ 아주 portable 한 typewriter, swiss 제 Hermes란 것을 살 수 있었다. 싼 것은 아니었어도 미국에 가면 필요할 것 같아 미리 투자를 한 것이다. 유학을 떠날 때까지 나는 이것으로 심심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왜 그렇게 그 타자 소리가 나에게는 멋지게 들렸는지 아직도 이유를 모른다. 당시 그것을 치는 사람들은 주로 여성들, 그것도 회사의 비서급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간혹 남편이 논문 같은 것을 쓰게 되면 그의 아내들이 그것을 돕느라 타자를 치곤 했다. 남자가 손수 타자를 치는 것은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결국 남자들은 나중에 쓰지 못할지도 모를 기술 touch typing을 미리 배운 셈이 된 것이다.

미국에 와서 사실 내가 직접 typewriter를 쳐야 할 기회는 별로 찾아오지 않았는데, 당시만 해도 학교에서 꼭 typewriter로 쳐서 내는 숙제는 별로 없었다. 쓰려면 도서관에 가면 되기에 꼭 나의 것을 사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나의 눈을 끈 것이 있었다. 바로 electric typewriter, 바로 그것이었다. electric! 보통 typewriter는 완전히 수동, manual, 온 손끝의 힘으로 치는 것이지만 electric은 조금만 touch를 하면 electric striker가 이어받은 치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결국은 나는 그것을 사고 말았다. 비록 큰 돈이었어도 당시만 해도 100% 자유스러운 ‘총각’시절.. 마음만 먹으면 아무 것이나 가능하던 그 자유스러운 시절..

비록 멋으로 샀지만 실제로는 방 구석에서 놀고 있었는데, 결국은 시간은 찾아왔다. 70년대 중반 쯤 나는 West Virginia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course들 중에 typewriter를 써야 하는 것들이 꽤 있었다. 남들은 잘 모르지만 나는 이제 그 옛날 ‘타자학원’에서 배웠던 기술, 철저히 쓸 기회가 온 것이다. 그 때 보니까 나의 typing 속도는 꽤 빨랐고 제출해야 할 것들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그 소문을 듣고 나에게 typing을 부탁하는 classmate들도 등장했다. 여자들 같으면 돈을 받고 쳐 주곤 했지만 나는 ‘취미’로 생각했기에 모두 무료로 service해 주곤 했다.

Electric typewriter의 위력은 나중에 Ohio State University에서 논문을 쓸 때 절정을 이루었다. 남들은 모두 professional typist를 찾는 고역을 치렀지만 나는 조금 더 시간을 내서 내가 모두 치곤 했다. 그 때 나는 상당한 분량의 논문을 typing했는데, 나중에 ‘책’으로 나온 그 논문집을 도서관에서 찾아보니.. 역시.. professional이 typing한 것과 비교하니.. 완전히 아마츄어 냄새가 났다.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가 손수 만든 것이라고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

그 이후 typing의 필요는 사라지는 듯 했다. 가끔 영어로 쓰는 서류, 편지들 이외에는 그것이 공부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가 예상을 했으랴.. digital computer의 출현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처음에는 ‘집채만한’ mainframe ‘monster’ (e.g., IBM S/360), 다음에는 minicomputer (e.g., PDP11) 이것들은 거의 모두 keypunch input으로 결국은 typing기술이 필요한 것, 나중에 나온 personal (micro)computer들 (e.g., Apple II, IBM PC) 모조리 앞 모양은 거의 typewriter의 모습을 갖춘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touch typing 의 위력이 돋보이는 세월이 도래한 것이다. Touch typing에 전혀 문제가 없었던 나는 그때 비로소 느꼈다.. 무언가 배워서 절대로 손해를 볼 수가 없다는 사실..

typesetsEngineer들의 필수 portable ‘analog calculator’ 였던 slide rule (계산척)은 1970년대 초에 ‘갑자기’ 등장한 ‘digital’ calculator로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향수에 젖은 ‘mechanical’ typewriter는 personal computer/printer의 등장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하지만 그리운 향수를 느끼게 하는 그것들,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갑자기 무언가 쓰고 간단히 ‘하~얀’ 종이 한 장에 까~만 typeset의 짧은 문장을 쓰고 싶을 때… 그것이 그립다. computer로 쓰면 고치는 것 떡 먹기지만 한 장 정도 print 할 때 얼마나 overhead가 많은가.. 귀찮고.. 그립다.. 그립다.

그 지겹게 공해로 찌들었던 서울의 겨울 하늘아래서 꽤죄죄한 타자학원을 다녔던, 비록 동기는 뚜렷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꽤 쓸만한 겨울방학을 보냈던 것이다. 그 touch typing 기술은 현재까지도 두고 두고 나를 도왔다. 특히 빠른 typing이 필요했던 때, 나는 1960년대 말 서울 종로에 있었던 ‘xx 타자학원’을 떠올리곤 하며 빙그레 웃곤 한다.

 

연세대학의 추억(3): 2학년, 1968

¶  들어가며

연세대학 시절의 추억과 회상에 관한 나의 memoir blog을 쓴지 일년이 훨씬 넘어가고 있다. 첫 두 편의 연세대 회상기(1966~1967)를 쓸 당시 너무나 진을 뺐는지 한동안 그것에 대한 것을 잊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쓰고 싶었던, 누가 보거나 말거나 써서 남겨야만 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 임에도 많이 희미해진 기억과 싸우는 것도 힘들었다.

또한 그 당시를 회상을 할 때마다 가슴이 벅찰 정도로 느껴지는 흥분과 격정은 어떨 때는 며칠이고 나를 못살게 굴 때도 있었다. 이제 세월의 약이 작용해서 다시 나의 약해져 가는 기억력과 싸울 용기가 충전이 되었다. 연세대학의 추억 제 3편은 2편의(1학년 가을학기) 이후, 그러니까 대부분 대학 2학년 시절, 그러니까 1968년 경과 그 전후의 이야기가 된다.

 

¶  1.21사태, 김신조, 프에블로, 월남 확전

대학교 1학년 시절이 2년에 걸쳐서 두 동강이로 갈라지고1 조금 패배의식도 느꼈지만 마지막 한 학기에 나는 모든 것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회복 하고 제 정신을 차리면서 1968년을 맞았다. 1968년 1월에는 나의 생일이 있는데 바로 나의 20세 생일이 되는 달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 해 나의 생일이 기억에 더 남는 것이, 바로 생일 전날 밤에 ‘북괴’의 김신조를 위시한 31명의 무장 공비2 게릴라 특공대가 청와대 근처까지 잠입해서 그 유명한 1.21사태를 유발했기 때문이었다. 유혈 사태의 대부분은 1월 21일에 보도가 된 것이어서 일.이일 사태라고 이름이 붙었다.

박정희 목따러..김신조
박정희 목따러..김신조

박정희 목 따러.. 나의 생일을 전후로 대강 서울의 날씨는 정말 무섭게 춥다3. 그때도 예외가 아니어서 모든 것이 무섭게 얼었던 기억인데, 죽음을 각오한 김일성의 로보트(robot)4 공비들에게는 그런 추위가 아랑곳 없었다. ‘박정희 목을 따러’ 기계처럼 행진하며 쳐들어 온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김일성 개XX의 전쟁도발이었다. 그때 만약 그 무장공비들이 작전에 성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나의 인생도5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대부분의 공비들은 사살되거나 휴전선을 넘어 도주를 했고6 유일한 생존자는 김신조 뿐이었다. 기자회견에 황급히 끌려 나온 그의 얼굴은 얻어맞은듯한 멍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첫 마디가 ‘박정희 목 따러 왔수다..’ 그런 정도의 것으로 기억을 한다. TV에서 그 투박한 이북사투리를 듣고 모든 사람들이 잠에서 깬 듯이, ‘정부의 선전대로 북의 위협은 사실이구나..’ 하는 조금은 자책적인 심정으로 정말 김일성의 위협이 국가적 생존위협임을 모두 실감을 하게 되었다. 비록 이 김일성의 무모한 작전은 실패했지만 이 사건의 여파는 나의 남은 대학시절과 그 이후에도 두고두고 우리에게 미쳤다7.

프에블로 나포.. 이 사건 이후 얼마 안 있어, 이번에는 미국의 조그만 첩보선 프에블로(Pueblo) 호가 원산 앞바다 공해에서 북괴에 나포가 되고 그 과정에서 선원들은 죽거나 포로가 되는, 또 하나의 한반도 전쟁 위기를 맞는다. 곧바로 미국의 원자력 항공모함 Enterprise가 원산 앞바다에 나타나고 무력행사를 불사하는 미국의 성명이 발표되는 등 정말 심각한 전쟁의 구름이 몰려왔다. 하지만 월남전에 완전히 발이 빠진 미국은 더 이상의 작전을 중지하고 외교적으로 포로 석방 협상의 노력을 시작하게 되어서 더 이상 악화는 피하게 되었다.

1968 사이곤 Tet offensive
1968 사이곤 Tet offensive

악화일로 월남전.. 사실 그 당시의 국제정세는 미국의 월남전 100% 개입으로 말이 아니었다. 국제적인 비난이 거세지고, 미국내의 여론도 학생을 중심8으로 악화일로, 데모는 끊임이 없는 그야말로 미국판 ‘운동권’의 시대이기도 했다. 박정희의 대한민국은 조금 다른 입장이었는데, 박정희 정부는 ‘명분이 밥 먹여주냐.. 실리가 최고다‘ 의 정책을 거세게 밀어 부친 것이다.

거의 6만 명의 전투부대를 월남에 보내며, 미국과의 협상으로, 수출, 월남전 수입 등으로 경제 제1주의를 고수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의 국내정치의 분위기로 사실 박정희는 반대를 무리 없이 무마하는 권력과 정치 기술을 잘 이용해 나갔다. 경제적인 효과가 국민의 피부에 느껴지기 시작하면 모든 반대와 파병에 따른 후유증을 처리하리라 보았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사실상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실제로 대한민국으로 $$$ 가 흘러 들어오고, 경제 규모가 조금씩 커지고, 기간산업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며 우리들 눈과 피부로 ‘무언가 잘 되고 있다’ 라는 희망이 느껴지던 그런 시절이었다.

박정희의 고민.. 당시 공산주의 정치세력의 두목 격이었던 소련과 중공은 무언가 미국의 군사력을 월남전에서 분산시키려 했을 것인데, 김일성은 분명히 그 총 두목들에게, Yes Sir..하며 머리를 굴렸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1.21 사태프에블로 선박 나포 사건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사실 이 연속적인 김일성의 불장난의 결과로 곧바로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야당에서 추가 월남파병 보류안 이 나오게 되었지만, 박정희가 그것이 쉽게 통과되도록 놔둘 리는 없었다. 미국 자신은 월남전에서의 고전을 모를 리가 없었지만, 파리 평화협상 회담과 더불어, ‘명예로운’ 철수작전을 구상하면서 B-52 전폭기로 월맹(하노이 정부) 폭격을 계속하는.. 참 미국이 고전하던 시절이었다. 그 반면에, 김일성과의 ‘의미 있는’ 평화협상이 100% 불가능했던 우리들은 미국의 ‘꼬붕’ 이라는 국제적 비난과 고립9에도 불구하고, 그저 ‘반공, 경제’ 의 두 가지로 똘똘 뭉치며 살 수 밖에 없었다.

 

¶  나를 1968년으로 보내주세요

이런 으시시 한 국제, 국내 정치적 배경에서도 나는 ‘희망’의(why not, 그때는 팔팔한 20세였느니..) 대학 2학년 시절을 맞게 되었으며, 나의 오래된 추억 중에서도 이 1968년의 대학2년 시절은 나에게 제일 ‘신나며 기억하고 싶은’ 시절로 꼽힌다. 사실, time machine을 타고 과거의 한 해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면 나는 주저 없이 내 나이 20세였던, 1968년으로 가고 싶을 것이다.

 

정법대 앞에서 박창희, 이윤기, 이경우 2학년이 시작될 무렵 1968년 이른 봄

정법대 앞에서 박창희, 이윤기, 이경우 2학년이 시작될 무렵 1968년 이른 봄

 

¶  연세대 보건학강의

학부 2학년이 되면서 1학년의 ‘교양학부’는 끝이 나고 대망의 전기공학 전공과정이 ‘조금씩’ 시작되었다. 교양학부 1학년의 과정은 마치 고교 3년 과정의 연장선 같은 느낌을 주었지만 그래도 상아탑 대학의 맛을 보여주는, 전공과는 상관이 없는 과목들도 많아서 그런대로 느낌이 좋았다. 특히 연세대만이 자랑하는 의대교수들이 가르치는 과목들, 특히 ‘보건’이라는 것도 기억에 상당히 남았다. 전매청 담배 소비의 극치를 이루던 그 나이에 그 과목은 우리들에게 ‘소름 끼치는’ 담배의 해독에 대해서 무자비하게 경고하기도 했다.

그런 교육은 정말로 선견지명적인, 몇 십 년 후에 미국에서 담배가 제한 받기 시작한 것을 보면, 연세대 의대 교수들의 사명적인 결단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교육을 받은 우리들 조차도 ‘성인들의 특전’이었던 담배를 오히려 더 피고 즐기는 대학생 시절을 보내게 된다.

 

¶  매력적인 담배와 술

이 무렵에 나는 ‘진정한 성인 남자’의 상징이었던 ‘대망’의 담배10를 배우게 되었다. 1966년 대학 입학 후 거의 2년간 나는 별로 담배를 피울 마음이 없었는데 1968년 들어서야 주위의 친구들 보다 거의 2년 늦게 이 담배에 대한 무관심이 풀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술의 맛은 그보다 6개월 전 어머님이 미제시장에서 사다 주신 ‘깡통 맥주, Black Label‘로 이미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드디어 담배에 도전한 것이다. 1학기가 시작되기 전, 어느 날 같은 상도동에 살던 나의 원서동 죽마고우 유지호가 놀러 와서 그가 피우던 담배11를 나에게 권한 것이다. 그 때, ‘한번 피워보자’ 라는 생각이 들었고 실행에 옮기었다. 결과는 뻔했다. 피우고 나서 나는 거의 ‘기절’ 상태로 빠져서 한 동안 혼미상태를 경험하였다. 하지만 그 다음의 흡연은 완전히 성공이었고, 그 맛과 멋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다른 ‘성인 식’의 하나였다. 그 이후로 나는 꽤 담배를 많이 피우는 축에 속한 대학생이 되었다12.

 

¶ 담배와 문상희 교수

연세대와 담배..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일화가 있는데.. 이 사실을 모르면 아마도 당시 연세대 ‘남학생’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공개적’인 사실이었다. 당시 신과대학에 ‘문상희’라는 교수가 있었는데 이분이 바로 요새 말로 하면 담배추방운동의 우두머리 중의 우두머리 격이었고, 그 추방 방식이 독특했고 문제가 되기도 했다.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무조건 ‘저지’를 하고 ‘폭행’까지 했다. 자유의 전당이라고 하는 대학 캠퍼스에서 그것도 신과대학 교수가 ‘불심검문’을 하며 ‘폭행’을 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지만 당시에는 사실이었다.

나는 직접 ‘얻어 맞는’ 경험은 못 했지만 실제로 ‘목격’은 했다. 입이 벌어질 정도로 놀랐지만 대학당국에서 ‘아무도’ 그를 제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의 ‘개신교 문화’에서 담배는 ‘지독한 악’으로 여겨졌던 것도 한 몫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심지어는 동료 교수들 조차 그의 제지를 받았다고 했을 정도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문교수님은 ‘선각자’임에 틀림이 없지만 당시에는 ‘빈축과 냉소’의 대상이기만 했다. 제일 ‘우스운’ 사실에는 어떤 신문사 기자가 도서관 앞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이 문교수에게 얻어 맞고 항의를 하니.. 문교수 왈.. 왜 옆에 있는 사람이 담배 피우는 것을 제지 못했느냐고 했다고 한다. 사실인지 과장인지 확인을 할 길은 없지만 당시에는 꽤 유명한 소문이기도 했다.

 

¶  복교생과 재학생, 민바리와 군바리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복교생, 복학생’들이 대거로 들어왔고 그보다는 적은 수의 재학생들이 입영영장을 받고 학교를 떠났다. 다행히 나와 나의 친구들의 대부분은 아직 영장을 못 받아서 큰 변화가 없었다. 나는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호적상 사망으로 처리된 6.25때 납북되신 아버지 ‘덕분’13에 병역법상 ‘부선망 단대독자14 라는 긴 이름의 ‘특혜’가 있어서 영장이 나와도 졸업 후로 입영을 연기할 수 있는 입장이어서 졸업 전까지는 군대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복학생들이 대거 복교를 하면서 순식간에 우리 과의 분위기는 변했으며 완전히 나이별 2파로 나뉘게 되었고, 재학생들은 ‘민바리’, 복학생들은 ‘군바리’로 불리게 되었다. 나이가 거의 2~3년 차이가 나는 두 그룹이 생긴 것이다. 분명히 나이가 위였던 그들이었어도 우리들에게 반말을 쓰지 못했지만 우리들은 깍듯이 선배 대우를 해 주었다. 하지만 같은 고등학교 동창관계가 되면 이것은 완전히 다시 고등학교로 간 기분이 들 정도로 거의 군대식으로 대우를 했다. 나의 경우에는 중앙고 선배(54회 2명, 53회 1명)들이 3명이 들어왔고 우리들은 큰 원군을 만난 듯 그들을 친형들처럼 따르게 되었다. 재학생 중에 중앙고 출신이 5명이나 있어서 총 8명의 ‘중앙고’ 그룹이 형성되었고, 숫자로써도 상당한 세력이었다. 그 3명의 중앙 선배들이 바로 안낙영, 오성준, 최종인 제 형들이었고, 이들과 나는 졸업할 때까지 3년을 같은 전공으로 공부를 하게 된다.

재학생들과 복학생들은 비록 3~4년 정도밖에 나이차이가 없었지만, 생각과 행동은 완전히 서울과 부산처럼 달랐다. 군대를 갔다 온 이유도 있었지만 우선 공부하는 자세가 아주 심각했다. 이 형들은 졸업과 동시에 취직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서 우리 재학생들은 어차피 도중이나 졸업과 동시에 군대를 가야 하기 때문에 조금은 불투명한 미래를 보며 방황하는 기분이었다. 그 당시 나이에서 군대 복무기간인 2년 6개월 (거의 3년)은 참 영원처럼 긴 것처럼 느껴졌기에 더욱 절망감 같은 것도 느끼곤 했다. 그런 환경에서 시작된 나의 2학년 학교 생활은 조금씩 조금씩 학점에 연연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1학년 1학기 때의 ‘땡땡이’의 쓰라린 경험은 잊지 않고 학점의 최소한 하한선은 유지하려 애는 썼다. 하지만 지난 1학년 2학기, 가을학기 때 진정한 공부의 맛을 느끼던 그 당시의 정열은 어쩐지 많이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  중앙고 동창들과 아미고 클럽

당시 나는 주로 중앙고 출신 동창들과 타교 출신 몇몇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화공과의 중앙고 동창 양건주도 있었다. 왜 화공과의 양건주가 전기과의 우리들과 섞이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았으나 그냥 중앙고 출신이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전기과에는 이윤기, 박창희, 김태일, 이상일이 중앙 동창이었지만 사실 박창희 김태일 이상일은 모두 나의 중앙고 1년 후배들 이어서 친구로 지내기는 조금은 거북한 관계였다. 하지만 여기에 중앙 1년 후배였던 박창희가 사실은 ‘옛날’ 원서동에서 잔뼈가 굵었던 죽마고우 친구였기에 아주 묘한 ‘일년 선배,후배’로 이루어진 그룹이 형성된 셈이다. 나는 창희와 직접적인 친구관계여서 큰 문제가 없었지만 나의 동기 친구인 이윤기는 사실 갑자기 1년 후배들과 친구처럼 지내야 하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런 것을 따질 그런 나이들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자연스레 형성된 그룹의 이름의 ‘아미고 클럽’이었다. 아미고는 물론 Spanish로 amigo, 그러니까 ‘남자친구’란 뜻이었다. 아마도 그 시절 유행하던 Jim Reeves의 hit country, Adios Amigo에서 이름을 따 왔을 것이다. 이 클럽에는 타교 출신들도 있었는데, 전라도 유학생 김진환, 강원도 유학생 김철수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리고 이상일은 비록 중앙 동창이었지만 우리 그룹에는 전혀 관계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당시 우리 아미고 클럽은: 화공과 양건주, 전기과 나(이경우), 이윤기, 박창희, 김태일, 김진환, 김철수 등으로 7명이 연세대 캠퍼스에서 만나거나 학교 입구에 있는 ‘굴다리’ 바로 앞에 있었던 ‘빵집’에서 모여서 ‘잡담’을 즐기곤 했는데, 사실 그것이 보기보다는 참 즐거운 시간 들이었다.

 

¶  1968년 봄의 관악산

Scan10308-1그 해 봄에 아미고 클럽 전원이 관악산으로 ‘등산’ 을 갔었는데 그 때의 ‘흑백’사진이 고스란히 남아서 그 당시의 우리들 ‘꽤죄죄’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 당시에 관악산엘 가려면 용산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서 과천 행 시외버스를 타고 갔다.

비록 ‘구제품 복장, 교복’등의 신세에서는 벗어났다고 하지만 당시 대학생들의 복장은 참 가관이었는데, 100% 신사복에서 100% 염색된 작업복까지.. 천차만별이었고 등산복도 마찬가지.. 우리 클럽에서 박창희를 제외하고는 등산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저 허름한 옷들.. 우리들은 그저 ‘잠바’라고 부르던 옷 차림 일색이었다. 외모에 각별한 감각이 있었고 등산의 유행에 민감하던 박창희는 우리가 보기에 완전한 ‘히말라야 등산대’ 옷차림으로 관악산을 올랐다.

 

그때 남은 사진을 보면 ‘진실로, 진실로’ 어제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너무나 그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술에 취하는 것을 경험했다. 관악산 정상 바로 아래 자리를 잡고 신나게 밥을 해 먹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누가 술을 가지고 왔는지 기분에 취해서 멋도 모르고 마신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취해서 돌아오는 시외버스 속에서 너무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사실 그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술에 취하면 기분이 너무나 좋아진다는 사실을 체험하였고, 평소보다 말이 더 많아지고, 피하거나 못했던 말들이 ‘거침없이’ 나온다는 신기한 현상도 알았다.

 

아미고 양건주, 김진환, 김철수, 이경우, 이윤기, 박창희, 김태일.. 과천에서 관악산으로..  1968년 봄

아미고 양건주, 김진환, 김철수, 이경우, 이윤기, 박창희, 김태일.. 과천에서 관악산으로.. 1968년 봄

 

¶  연세대 연영회와 갈월동 양옥

학기 초에 기억나는 것 중에는 학교 내 서클 중에 연영회라는 서클에 가입하려 했던 추억이다. 그 당시에는 요새 흔히 쓰는 ‘동아리’라는 말이 없었고 그저 서클이라고 불렀다. 그 중에 연세대에는 역사가 깊다는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던 연영회(延影會)라고 불리던 서클이 있었고, 나와 양건주가 그곳에 가입을 하려고 그 모임엘 나가게 되었다. 왜 건주와 같이 그곳에 가입하려 했는지는 확실히 기억이 나지를 않지만, 나는 2년 전 입학했을 때 몇 개월간 사진, 카메라 등에 빠져서 살았다. 입학기념으로 어머님이 사주신 일제 Petri 카메라를 가지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곤 했고, 도서관에서 사진 촬영에 대한 책도 많이 대출해서 읽기도 했다. 아마도 그래서 연영회에 관심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학 2학년이니까, 특별활동도 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그 당시 입회신청을 해놓고 기다리니까, 연영회 신입회원 모임을 한다는 공지가 붙어서 읽어보니 ‘갈월동 어느 어느 빵집‘에서 모인다고 했다. 빵집에서 학교서클이 모이는 것이 조금 그랬지만, 아마도 환영하는 의미로 빵을 먹으며 모이나 보다 생각하고 건주와 그곳엘 갔는데, 가 보니 사실은 그곳에서 모임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빵집 근처에 있는 연영회 ‘간부’의 집에서 모인다고 해서 안내를 받아서 단체로 그 집을 찾아갔다. 갈월동 그 빵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근사한 양옥집’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연대생들로 꽉 차있었다. ‘근사한’ 여학생들도 꽤 있어서 흥미진진했는데,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커다란 거실 구석에 완전히 프로 같이 전기기타와 드럼까지 갖춘 rock band가 warming up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도 모두 연영회원이라고 했는데 가만히 그 중의 한 명을 보니 낯이 익었다. 건주는 그를 곧바로 알아보았다. 중앙고 ‘심상욱’이라는 우리의 동기동창이었던 것이다. 그는 우리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는데, 건주가 가서 우리도 중앙고 출신이라고 했어도 그는 우리를 알아 보지를 못했다. 신입회원으로 꽉 찬 모임에서 간부, 임원들이 나와서 연영회 소개를 하고 돌아가며 자기 소개도 하고 했는데, 그 임원들은 새로 가입한 ‘멋진 여대생’들에게 꽤나 관심을 보였다. 사실은 그 여대생들도 그 ‘근사한 양옥집에 근사한 rock band’에 완전히 매료된 것으로 보이긴 했다. 그 모임에서 우리 둘은 뜻밖에 우리의 전기과 복학생, 중앙 선배 최종인 형을 만났다. 그도 사진에 꽤 취미가 있다고 했는데, 군대를 갔다 온 신입회원이 없었던 관계를 그 형은 아주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 그렇게 멋진 모임이었었지만, 후에 우리는 그 모임에 전혀 나가질 못했다. 다른 곳에서 다른 흥미로운 일을 찾아 다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이성에 눈이 뜨이던 시절

아미고 클럽의 남자친구들도 좋았지만 나의 연세대 2학년 시절은 내가 이성에게 완전히 눈을 뜨기 시작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성(異性)에게 크게 끌리는 그런 심정이 없었는데, 이때는 달랐다. 분명히 정상적인 20세의 남성 호르몬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작용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1968년, 연세대 2학년을 그렇게 생생하게 기억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 일년 전부터 나는 조금씩 무언가 여성에게 끌리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었다. 첫 번 것은 TV에서 본 어떤 여자 탤런트를 보고 밤에 꿈을 꾼 것이다. 그녀는 조영일 이라는 인기 탤런트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탤런트 오지명이라는 사람의 부인이었다. 두 번째는 지난 가을학기 때 상도동 종점에서 치과를 다녔는데 그때 거기서 치과의사 조수를 하던 어떤 ‘여성’도 나의 꿈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같았던 내가 분명히 ‘어른’으로 변하는 것을 느끼던 그런 때였던 것이다.

 

¶  남과 여, 윤여숙과 용정애, double date

그 당시 나의 원서동 죽마고우 친구였던 안명성은 한양대 섬유공학과엘 다녀서 나와는 별로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한번 연락이 와서 double date를 하자고 하였다. 솔직히 내가 깜짝 놀랐던 것이, 내가 알던 명성이는 나와 비슷하게 숫기가 없었던 것으로 알았는데 어떻게 여자 2명씩이나 알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두 여자는 한양대학생 용정애 씨, 이화여대 생물학과 여대생, 윤여숙 씨였다. 명성이가 먼저 자기와 같은 대학에 다니던 용정애씨를 알았고, 그녀의 창덕여고 동창생인 윤여숙 씨를 데리고 나오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double date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그 당시 유행하던 불란서 영화 ‘남과 여’를 같이 보았다. 서울 근교의 광릉으로 피크닉도 같이 갔고, 관악산으로 등산도 갔다. 그것이 1968년 봄이었다. 그때 난생 처음으로 여성들과 가까이 어울리면서 이래서 사람들은 결혼을 하는구나 하는 ‘자연의 섭리’를 절실히 실감하기도 했다. 나의 의지도 상관이 없이 여성들에게 ‘무조건 끌리는’ 체험은 사실 나에게 겁을 주기도 했다. 학교 공부가 잘 되지를 않았던 것이다. 바로 6개월 전만해도 나는 공부의 재미에 푹 빠져 있었지만 지금은 정말 자신이 없었다. 학교 공부에 애를 먹기 시작한 것이다.

 

남과 여 (Un Homme Et Une Femme

 

double date는 명성이와 용정애씨, 나와 윤여숙씨가 짝을 되었는데, 그 이유는 명성이가 용정애씨를 먼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놀란 것은 명성이가 여자들을 다루는 자세가 정말 나에 비하면 성숙하고 노련했던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 자기 할 일을 다 잘 하면서 여자와 date를 즐기는 모습이었는데, 나는 정 반대였던 것이다. 내가 알아온 명성이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면을 본 것이지만, 그때의 나이 20세였으니 한창 우리들을 변하고 있었기에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쑥맥’이었던 나는 ‘완전히’ 나의 ‘정상적’인 학교생활의 리듬이 깨어짐을 느꼈고, 학교 공부도 예전처럼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바야흐로 나의 이성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완전히 싹이 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그 윤여숙씨에게 빠진 것이었다. 나이가 우리와 거의 같았지만 학년은 하나 위였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들은 우리들 보다 ‘훨씬’ 성숙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아마도 그런 점을 내가 좋아했을 것이다.

그 때 우리들 네 명은 중앙극장에서 개봉되었던 영화 ‘남과 여’ 를 같이 보았고, 관악산으로 등산도 갔었다. 또한 당시 유원지가 별로 없었던 때 그런대로 갈 수 있었던 ‘광능’이란 곳으로 놀러 가기도 하였다. 그 해의 봄은 정말 찬란한 느낌이었고, 하늘에 떠있는 느낌이었다. 나로써는 아마도 puppy love같은 심정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꿈같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봄이 거의 가던 무렵, 명성이가 나를 보자고 해서 만나니, 그 녀석 왈, 윤여숙씨가 이제 나를 안 만난다고 했다는 통고였다. 쉽게 말하면 나는 한마디로 ‘차인 것’이다. 감정처리에 지독히도 미숙했던 나는 사실 실망보다는 당황 그 자체였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헤어지자는 이유를 안다는 자체가 우습지만 명목상은 그녀의 아버지가 경찰관이었는데, 우리들이 같이 다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참 편리한 이유였다. 물론 내가 싫다는 뜻을 그렇게 나의 체면을 세워준 것이라고 나는 해석했다.

그때 나는 일생 처음으로 동대문 근처의 어떤 술집에서 명성이와 같이 막걸리를 퍼 마셨다. 그리고 비틀 거리며 집으로 왔다. 그래도 그녀는 나보다 성숙했었는지 우리들이 ‘마지막 인사’할 기회를 주는 아량이 있었다. 돈암동 종점 부근에 있었던 한일다방에서 우리는 마지막 대화를 하고 헤어졌다. 그 당시 그 다방에서는 Engelbert Humperdinck의 당시 hit ‘Am I that easy to forget‘ 이 요란하게 나오고 있었다. 완전히 그 때의 situation에 알맞은 제목의 노래였다. 이때 나의 ‘상처’는 두고두고 이성(여자)에 대한 나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전에 나의 다른 blog에서 1968년 당시 나의 죽마고우 친구 유지호를 회상할 때, 윤여숙씨에 대한 나의 ‘선의의 장난’을 언급한 것도 있었다. 사귄 지 불고 몇 개월 만에 이 두 여대생들과는 헤어지게 되었지만 명성이는 저력을 발휘해서 용정애씨와 계속 관계를 유지하는 듯 했고 몇 년 뒤에 윤여숙씨도 잠깐이나마 한번 보았지만 이미 그때에는 나도 전에 비해 훨씬 성숙한 남자로 변해 있어서 아주 유연한 자세로 그녀를 대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  오성준 형과 이대생 김갑귀

오박사, 오성준 형
오박사, 오성준 형

비록 지난 학기에 비해서 공부에 신경을 덜 썼지만 아미고 클럽의 친구들 덕분에 사실 학교생활은 전에 비해서 훨씬 재미있었다. 그러니까 학점에 연연하던 생활보다 훨씬 더 진짜 대학생 같은 느낌도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미고 클럽은 역시 100% ‘거무틱틱하고 냄새 나는’ 남자들 뿐이어서 모이기만 하면, ‘우리도 한번 여성 동무들과 어울릴 수 없을까..’ 하고 성토를 하곤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우리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왔다. 우리의 ‘자랑스런 군바리’ 중앙선배 오성준 형이 구세주처럼 우리 앞에 ‘답’을 가지고 나타난 것이다. 우리에게 형이 아는 친구의 여동생을 소개시켜 주겠다는 믿을 수 없는 희소식이었다.

오성준 형은 자그마한 체구였지만 사교성 좋고 유머러스하고 특히 후배들을 아주 잘 돌보아주는 그런 타입의 사나이여서 우리들이 아주 잘 따랐는데, 그 형의 공군 동료친구가 연세대 뒤에 있는 북가좌동(남가좌?)에 살고 있고 이화여대에 다니는 여동생이 그 집에 살고 있다고, 나와 이윤기를 데리고 그 집엘 가게 되었다. 우리들은 그렇게까지 ‘빨리’ 도와줄 줄은 몰라서 그저 ‘황송하고 고맙게’ 따라갔다. 하지만 그 집엘 가보니 문제의 그 형의 친구도, 여동생도 없었다. 그것은 그 오성준 형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일이나 문제가 있으면 질질 끌며 생각하기 보다는 행동에 먼저 옮기고 보는 그런 시원스런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중에 그 문제의 이대생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아직도 생생한 ‘김갑귀’.. 아니 무슨 여자 이름이 갑귀인가? 한자이름으로 오형의 말대로 ‘갑오년에 귀하게 태어난’ 것인지는 잘 몰랐지만 한번 듣고 ‘절대로’ 잊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 만나보니 이름과는 느낌이 다르게 아주 귀엽게 생겼고, 행동도 귀여웠고, 어리광 부리는 느낌이 절로 흘러 나왔다. 그녀는 이화여대 법대에 다닌다고 했지만 법대 스타일로는 보이질 않았다. 우리들은 그녀에게 우리의 아미고 클럽을 소개하고 거기에 맞는 여대생들 좀 소개시켜 달라고 매달렸다. 이때의 이런 ‘궂은’ 일들은 나와 이윤기가 도맡아서 했는데, 아직도 왜 우리 둘만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덤볐는지 확실치 않다. 지금 생각에, 나는 그 당시 ‘윤여숙 사건’으로 ‘여자 실전 경험’의 소유자가 되었고 그래서 조금 더 성숙해 졌을 것이고 이윤기는 그 당시 연애 같은 것은 안하고 있었지만 원래 cool한 사나이라서 ‘묵묵히’ 여자들에게 관심이 많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 아미고 클럽의 나머지 ‘아이’들은 사실 나보다도 ‘덜 성숙’한 상태여서, 여자들에게 그렇게 목매거나 하지는 않았다.

 

¶  남녀 클럽, 해양다방, 선화공주님

이렇게 우리는 ‘여대생’들을 우리 클럽에 연관시키려 시도를 했고, 결국 ‘착한’ 김갑귀 씨는 자기 과 科 여대생들을 데리고 나와서 meeting비슷한 것을 했는데.. 이대 앞 어느 음식점에서의 그 첫 모임은 아주 어색한 느낌이었다. 남자들 보다 여자들이 ‘훨씬’ 성숙하고, 키가 훌쩍 컸고, 그래서 그런지 나이까지 들어 보였던 것이다. 이런 과정으로 우리는 정기적으로 만나는 것으로 ‘합의’는 보았지만 무언가 ‘화학적, 체감적’인 것이 맞지를 않았는지, 모임 자체가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그 중에 몇 명하고는 따로 만나는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 중에 생각나는 사람이 ‘신인옥‘ 씨였는데 왜 그 사람의 이름과 얼굴까지 기억이 나는지 나도 잘 모른다. 특히 그녀의 pop song에 대한 지식은 상당해서 대화가 아주 재미있었다. 또 한 명, 키가 무척 컸는데 불행히도 얼굴이 아주 못생겼던 그 여대생, 미도파 옆에 있었던 ‘거대한 소파의 운동장’, 삼화다방 에서 만나곤 했는데 그 때마다 주로 이윤기와 같이 만나곤 했다. 하지만 여름방학이 다가오면서 그들과의 만남도 끝이 나게 되었다.

한번 여대생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우리들 (주로 이윤기와 함께)은 그 ‘매력’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김갑귀 씨에게 다시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 그녀가 유일한 ‘여자들과의 통로’였기 때문이었다. 역시 김갑귀 씨는 동정심도 많고 착한 여자였다. 이번에는 숫제 자기의 친한 여고동창생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녀는 창덕여고 출신이었다. 지난번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윤여숙 씨도 창덕여고 출신이어서 나는 창덕여고와 무슨 인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가회동에 오래 살면서 창덕여중고는 나에게 참으로 친숙한 학교이긴 했다. 그 친한 친구가 바로 이선화씨였다. 실은 그 전에 이미 한번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김갑귀 씨와 만날 적에 한번 같이 나온 것을 멀리서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를 ‘공식적’으로 소개를 받게 된 것이다. ‘바보, 선화공주’, 이선화 씨..

이선화씨는 서울간호학교에 다니던 간호원 지망생이었고, 그녀의 간호학교 친구들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해서 우리들은 ‘여자에 대한 제 2차의 도전’을 하게 되었다. 1968년 1학기(봄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명동의 어느 식당 2층 방에서 우리들은 단체로 만나게 되었다. 나와 이선화씨는 구면이었지만 나머지는 모두 처음인 셈이다. 이번에는 지난번 이대생 들과의 모임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나가기 전에 조금 계획을 만들어 놓고 그대로 밀어 부쳤다. 계획이란 별로 유별난 것이 아니고, 만나서 통성명을 하며 시간을 끌지 않고 우리가 미리 생각해 놓은 그룹의 성격과 조직을 ‘알리고’ 밀어 부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첫 모임에서 ‘무조건’ 어떤 그룹이 생기게 하는 그런 ‘선제공격’ 의 치밀한 계획인 것이다.

물론 여자들은 뻥~한 모습으로 당황을 했지만 그렇다고 ‘조직적’으로 반대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 그룹의 습성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명목상 우리들의 남녀혼성 클럽이 생기게 되었는데, 회원은 그날 모인 사람으로 우선 정하고 ‘정기적’으로 만나기로 합의까지 보게 되었다. 한번 모여서 그 정도의 합의는 사실 기대 이상으로 성과가 좋은 것이라고 우리들은 ‘신’이 났었다. 우리가 정기적으로 모이게 된 장소는 국제극장 옆쪽 골목에 있었단 해양다방이었고 우리들은 앞으로 최소한 6개월 이상을 그곳을 ‘아지트’로 삼아 모여서 ‘친목도모’를 이루게 된다. 여름방학이 다가오고 우리는 새 2학기에 만나는 암암리의 약속을 하며 헤어지게 되었다.

 

¶  여름의 설악산과 3도 화상

여름방학.. 1968년의 여름방학은 나에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한 달이 된다. 그 당시를 몇 마디로 요약을 하면, ‘설악산, 축축한 비’, ‘2~3도 화상’, ‘비행기’ 쯤.. 될 듯하다. 방학이 시작되면서 나는 전부터 계획한 대로 죽마고우 안명성과 둘이서 설악산엘 갔다. 물론 ‘등산’을 하러 간 것이다. 친구 안명성은 지금은 산에 대한 취향이 나와 조금 다르지만 그 때는 그것이 큰 문제가 아니었다. 20세의 젊음의 혈기로 아무것도 모른 채 ‘완전 군장’으로 설악산 ‘정복’을 하러 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우리들의 사진에 나타난 ‘꼴’은 등산이 아니라 무슨 하이킹 하는 듯한 모습들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슨 북악산, 남산 보다는 조금 더 심각한 산에 간다는 기분으로 간 것이다. 그 당시 외 설악은 요새에 비하면 거의 처녀 산이나 다름없이 덜 개발이 된 상태였지만 그래도 다른 산에 비하면 ‘하이킹’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코스도 즐비했다. 우리의 복장이나, 장비는 사실 하이킹이나 캠핑에 맞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우리는 버스로 속초로 갔고, 거기서 다른 버스로 외설악의 입구인 신흥사 앞, 설악동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갔을 때부터 설악산은 완전히 ‘장마’ 철로 접어들어서 그야말로 ‘매일’ 비가 왔다. 아마도 해를 못 보았던 기억이니까.. 문제는 확실히 ‘언제’ 우리가 그곳엘 갔는지 전혀 기록이 남아있질 않다는 것이라서 참 안타깝다. 방학이 시작되고 얼마 안 되었으니까 분명히 7월 말 정도가 아닌가 추측만 한다. 캠핑 장비가 별로 없었고, 비가 매일 와서 우리는 할 수 없이 신흥사 입구에 있는 설악동에 즐비한 어떤 여관에서 짐을 풀었고, 날씨로 봐서 우리는 그곳을 base camp로 삼고 매일 ‘출근’을 할 생각을 했다. 그 당시 여관을 잡으려는데 우리는 뜻밖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나의 중앙고 동창 이종원을 만난 것이다. 그는 ‘혼자서’ 그곳엘 왔다고 했다. 게다가 우리와 비슷한 등산객 청년 두 명도 그곳에서 만나 방값도 줄일 겸해서 같은 방을 쓰기로 했다. 그러니까.. 5명의 사나이가 한 방을 쓰게 된 것이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오락가락해서 우리는 거의 비를 맞으며 이곳 저곳 ‘구경’을 갔다. 그것은 진짜 등반하는 등산이 아니고 하이킹 정도에 속했지만 그래도 ‘난생 처음’ 그 유명한 설악산에 왔다는 자부심으로 가지고 즐기려 했다. 구름이 자욱하게 덮인 울산암은 아직도 그 바위들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개울과 바위를 걷던 완만한 계곡들, 물론 모두 구름 속의 모습들이었다. 제일 힘들었던 곳은 바로 여관에서 개울 건너 하늘을 찌르듯이 솟아있던 ‘권금성‘이었다. 바위는 하나도 없던 ‘토산’이었지만 어떻게 경사가 가파르던지 오르는 자체가 고행이었고 비까지 맞으며 오르는 것은 한마디로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그곳에서 고생을 한 것으로 조금은 ‘날라리’ 하이킹한다는 아쉬움’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권금성 입구에 있는 설악천 다리에서 안명성과..
권금성 입구에 있는 설악천 다리에서 안명성과..

그리고 운명의 날이 왔다. 권금성에 갔던 날 저녁, 파김치가 되어서 여관으로 돌아와서 예의대로 저녁 준비를 하게 되었다. 물론 비가 계속 뿌리던 그런 날이었다. 비가 오는 관계로 방 안에서 버너로 식사를 만들고 있는데, 이종원이 우리가 쓰는 것과 다른 종류의 버너를 쓰라고 내어 주었다. 그것은 당시에 많지 않았던 프로판 가스 버너였다. 요새는 보통 집에서 불고기를 식탁 위에서 구어 먹을 때 흔히 쓰지만 그 당시는 사실 새로 나온 것이었다. 문제는 프로판 가스통(카트리지)을 버너의 본체에 충격을 주며 밀어 넣는데 조금 프로판 가스가 새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던 것이다. 가스 통이 장착이 될 때 만약 근처에 불이 있으면 그대로 인화가 되어 폭발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고 나는 생각도 없이 가스통을 밀어 넣었고, 그것은 그대로 옆 버너의 불에 인화가 되어 흡사 전쟁에서 무기로 쓰는 ‘화염 방사기’ 같이 불을 요란하게 뿜어 댔다. 너무나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가스 통에서 뿜어 나오는 불길은 나의 발 등을 태우고, 나의 얼굴을 데어 버렸다. 불과 몇 초가 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나에게는 아주 긴 고통과 충격의 시간으로 느껴졌다. 그 순간에 나의 1968년 여름방학은 완전히 폐허로 변해 버렸다.

나는 순식간에 오른 쪽 발등은 3도, 얼굴은 2도 화상을 입게 되었고, 곧바로 속초 시내로 옮겨졌다. 어느 ‘돌팔이’ 외과의원에 일단 갔는데.. 이곳은 정말 거의 ‘무허가, 돌팔이’ 의사가 진단서를 돈 주고 파는 그런 정말 양심 없는 중년 의사가 있던 곳이다. 그러니 나는 사실 며칠 간 이곳에서 하나도 치료가 안 되었던 괴로운 시간을 보낸 것이다. 명성이가 우리 집에 연락을 해서 누나가 기차를 타고 오고 있었지만 나는 화상의 여파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발과 얼굴은 심하게 부어 오르고 나는 아무래도 발보다는 얼굴에 신경을 더 쓸 수밖에 없었다. 누나는 우리들의 원서동 친척 같은 벗, 시자 누나와 함께 그 먼 길을 중앙선 기차를 타고 왔다. 당시에 속초는 극동항공 쌍발 여객기(아마도 DC-9)가 정기적으로 서울과 연결이 되어 있어서 나는 그것을 타고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하게 되었다. 난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 보았지만 기분은 괴롭고 착잡하였다. 서울에 도착하여 나는 곧바로 청와대 근처에 있는 화상 치료로 유명하다는 ‘목상돈’ 외과 의원에 입원을 하여 집중치료를 받았고, 일주일 가량 입원을 끝내고 퇴원을 하여 그 때부터 통원치료를 받았다. 그렇게 해서 나의 1968년 여름방학이 완전히 끝난 것이다. 정말 악몽 같던 비와 불에 젖은 설악산 여행이었다. 그 당시 그 사고로 인하여 같이 갔던 명성이도 고생 고생하며 집으로 돌아왔다고 들었다.

나의 오른 발등의 3도 화상은 생각보다 심각한 것이었는데 초기에 적절한 치료가 늦어서 잘못했으면 큰일 날 뻔 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는 발 보다는 얼굴에 신경을 더 쓰고 있었다. 나이 20세에 발 등이 중요한가 얼굴이 중요한가는 어려운 질문이 아니다. 하지만 여름 방학이 다 끝날 무렵에는 얼굴이 거의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발등 화상의 영향으로 조금 쩔뚝거려도 나는 사실 하나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여름방학은 ‘완전히’ 끝나가고 있었다.

 

¶  연호회, 본격적인 이성들과의 만남

1968년도 2학기, 가을학기가 시작되어서 학교엘 갔더니 역시 사람들 속에 어울리는 것은 좋은지.. 지나간 여름의 악몽이 조금씩 잊혀지기 시작하고, 여름 방학 전에 ‘급조’ 되었던 우리들의 남녀 클럽에도 나의 사고 소식이 전해 졌는지, 어느 날 연세대 캠퍼스로 이선화씨가 찾아왔다. 나는 그때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꿈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프고 외로움을 느낄 때, 어떤 ‘아련한 여자’가 위로 차 자기를 찾아 온다는 상상은 어느 남자나 하고 있을 것인데, 그런 꿈이 실제로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때 나는 선화씨를 진정으로 가깝게 느끼게 되었고 조금은 의지하는 감정까지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1968년 2학기는 이선화씨와의 짧지 않은 ‘영원히 잊지 못할’ 아련한 추억을 만들게 되는 시기가 되어갔다.

2학기에는 약간의 편입생들이 들어왔는데 그 중 한 명이 우리와 ‘눈이 맞아서’ 어울리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윤인송 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우리의 아미고 클럽에 합류하게 되었지만 우리 클럽에서 ‘탈퇴’한 사람도 있었다. 그가 바로 강원도 출신 유학생 김철수였다. 김철수, 너무나 친근한 ‘교과서적 이름’이었고, 우리들은 정말 왜 그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는지 이유를 모르지만 추측에 그는 여학생들과 어울리는 것이 달갑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해 보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를 참 좋아했고 그가 우리를 떠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슬프게도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내가 알았던 김철수가 실상의 김철수가 아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그는 한때 전기과에서 다른 과로 적을 옮기는 등 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는데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왜..왜..’ 라는 의문만 남는다.

학기가 시작되면서 이선화씨의 서울간호학교 친구들과 국제극장 옆 골목, 경기여고로 가는 길에 있던 해양다방에서 거의 정기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정식으로 클럽의 이름도 ‘연호회’라고 붙였는데, 윤인송의 제안으로 ‘연세 와 간호’ 에서 연 자와 호 자를 따서 붙인 그럴듯한 이름이었다. 이렇게 해서 1학기 때 실패로 끝났던 이대생들과의 클럽 만들기가 이제야 다른 ‘여대생’들과 조그만 성공을 이루게 되었고, 내가 그리고 상상하던 ‘멋진 대학생활’ 이 우리 앞에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이런 즐거움 뒤에는 아무래도 이런 ‘과외활동’이 학교 공부하는 시간을 빼앗는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한창 잘나가던 청춘 20세의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던’ 그런 때였기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연호회 클럽의 여학생들은 모두 간호원 지망생들로, 간호원은 당시 한창 외국으로 잘 나가는 직종이었고 그녀들은 분명히 해외취업이나 이민을 꿈꾸고 있었을 ‘세상을 조금은 냉정하게 보는’ 자세를 가졌음에 비해 우리들 남자들은 모두 ‘병역 미필’의 백일몽을 꾸는 듯한 ‘아이’들이었고 나도 그 중에 하나였다. 장래의 꿈은 그렇게 심각성의 차이가 있었어도 만나기만 하면 우리들은 같은 나이또래의 꿈과 취미를 나누며 장시간 담배연기 자욱한 해양다방에 죽치고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때의 여성동무 6명들, 존칭을 빼면: 이선화, 조인선, 신언경, 이재임(인자), 황인희, 정수임 등이었는데, 이들은 알고 보면 우리 남자들같이 서로 친한 사이가 아닌 것 같고, 우리 클럽에 ‘불려 나와서’ 서로 친해진 듯 했다. 심지어, 어떤 여학생(이재임)은 자기가 어떻게 그곳에 나왔는지 이유도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우리 남자들 에게는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특히 그 중에 정수임씨는 학생이라기 보다는 아예 직장인 같은 인상을 주며 주말에는 ‘경마장’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 생으로 모임에도 거의 빠져서 아직도 그 녀는 무슨 베일에 가린 듯한 추억을 남겼다.

 

연호회 가을산행 관악산 1968

연호회 가을산행 관악산 1968

곡식이 한창 무르익던 가을의 햇볕이 따갑지만 드높은 가을하늘이 파랗던 어느 일요일에 연호회의 첫 하이킹 겸 등산이 한강의 남쪽, 관악산에서 이루어졌다. 그 당시에는 등산 붐이 서서히 일고 있었지만, 주로 ‘남성적’인 북한산 (백운대, 도봉산) 이 인기였고, 관악산은 사실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등산코스로 알려지지 않았었다. 용산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모여서 우리들은 과천 행 버스를 타고 갔는데, 그 당시 우리들은 버스 속에서 서로 어울려 그 당시 유행하던 ‘참새 시리즈‘ 농담 같은 ‘그 나이에 맞는 유치한 이야기들’ 을 하며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언제나’ 프로 산악인 임을 자랑하는 박창희는 역시 ‘너무나’ 멋진 등산복 차림으로 등장했지만 15 나머지 ‘날라리 남녀들’ 은 모두 하이킹 차림으로 관악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그때의 등산은, 주말 경마장에서 일을 하는 정수임씨 빼고 모두 참가를 했던, 지나고 보니 우리 클럽의 ‘유일한’ 산행이었다. 게다가 적지 않은 ‘흑백’ 사진도 고스란히 남게 되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그 당시의 우리들의 갓 스무 살의 젊음을 지켜주게 되었다. 그 사진에 있는 애 띤 모습의 ‘호남 사나이’ 김진환은 비교적 젊었던 나이에 운명을 해서 지금은 없기에, 사진을 보면서 ‘하늘나라’에 있을 김진환의 애 띤 모습을 더욱 안타깝게 그리곤 한다.

Scan10129-1꿈에 그리던 남녀 혼성클럽을 나 자신은 가슴 뿌듯하게 여겼다. 그것을 만드는데 나의 시간과 정성도 많이 들어갔기에 그런 것도 있었지만 정기적으로 그녀들과 해양다방에서 볼 수 있다는 생각 자체로도 행복했기 때문이다. 2학년 2학기, 그러니까 1968년의 가을학기를 나는 사실 공부보다는 연호회 과외활동에 더 신경을 쓰며 지냈는데, 그 시절은 비록 학교 공부에 게을러 몇 년 후에 큰 후회를 하기는 하지만 참 아직도 다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후회 없는 청춘의 시간들이었다. 우리 중에 가장 의젓한 모습의 양건주가 회장을 했는데 사실 그는 나이보다 성숙한 편이어서 이런 모임도 조금은 우리보다 심각하게 이끌어 나갔다. 그래서 여자 회원들이 그를 ‘도사’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 별명은 참 잘 지어졌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우리들이 모이면 대부분은 그 나이에 걸맞게 노래들, 특히 미국 pop song을 즐기곤 했는데, 나는 가끔 그 당시 유행하던 top tune들의 가사를 print(당시에는 등사기로 찍은) 해서 나누어주곤 했는데, 사전에 아무런 이야기도 없이 그런 일을 하는 나를 건주는 사실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듯 했다. 그 때는 내가 그런 그의 태도가 이해가 잘 가질 않았지만 후에 왜 그랬는지 충분히 이해가 갔고, 역시 깊이 생각하는 그의 다른 면을 보는 듯 했다.

 

¶  이윤기의 짝짓기 아이디어

남녀가 모인 클럽이고, 분명히 클럽의 목적은 이름도 그럴싸한 ‘친목도모’였기에 남녀의 개인적인 사귐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았고, 그러면 분명히 예상치 못한 일들이 나올 것도 예측을 할 수가 있었다. 가을 해가 따갑던 가을 어느 날 나와 윤기는 연세대 중앙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다가 조금 쉬려고 담배연기로 앞이 안 보이는 끽연실에서 모였는데 느닷없이 연호회 남녀에 대한 ‘심각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윤기의 말은 직설적으로서, 서로 속으로 꿍꿍대지 말고 아예 미리 ‘짝을 짓자’라는 것이었는데, 처음에는 놀랐지만 충분히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을 두 사람 이상이 동시에 좋아하게 되면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협정’의 골자는 윤기 자기는 이재임(본명: 이인자) 씨와 짝이 되고 나는 이선화씨와 짝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정말 재미있는 이 발상은 나중에 다른 남자들에게도 알려져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나머지 여자들을 ‘골라 잡게’까지 되었는데, 창희는 신언경씨, 건주는 황인희씨.. 등등이었다. 물론 이것은 거의 ‘장난의 수준’에서 이야기가 된 것이지만, 그런대로 이 ‘협정’은 지켜진 듯 하고, 장래에 이 ‘짝’이 결혼까지 이르는 경우도 생겼다.

 

¶  연고전 보다 대지다방

이런 ‘유치한 사건’이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눈에 띄게 이선화씨와 가깝게 느껴지게 되었고, 이것은 상호적인 감정임도 서로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와 선화씨는 ‘정식 데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시절에 정식이라 함은 서로의 집안에 이 사실을 알리고 만나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우리 집 식구들(어머니와 누나)에게 말한 것일 뿐, 선화씨의 집안 사정은 솔직히 확실하지 않았다. 가끔 일요일 일찍 만나서 하루를 마음 놓고 즐긴 기억인데, 그 당시 우리들은 ‘정말로, 진짜로’ 순수한 감정을 나누었던, 하지만 ‘사랑, 연애’란 말이 어울리지 않던 그런 관계였다. 지금도 다시 생각해 본다. 그때 우리들은 과연 ‘연애’를 한 것이었을까.. 아마도 ‘연애’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주말이 아니었던 어느 날에는 선화씨와 연세대 앞에 있었던 2층 ‘대지다방’ (신촌로터리에서 가까운)에서 강의가 모두 끝난 시간에 만나기로 해서 기쁜 마음으로 시간을 기다렸는데, 그만 그날은 연고전 응원연습이 예정된 날이기도 했다.

조금은 미안하지만 그것을 빼먹고 백양로를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예상대로 그날도 체육과 교수(강교수)의 진두지휘로 ROTC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길을 막고 있었다. 사실 그 며칠 전 연습 시에 그것을 보았고 그날은 친구들과 연세대 뒤에 있는 ‘연희고지’를 넘어서 ‘도망’나간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에 데이트가 있던 날은 아주 간교하게 머리를 써서, 죽마고우 유지호의 ‘수도공대’ 학교 배지를 빌려와서 그것을 달고 ‘당당히’ ROTC 스크럼을 빠져나가 대지다방까지 갔었다. 아마 나의 얼굴이 그들(ROTC)에게 잘 알려졌었으면 나는 ‘정학처분’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가끔 나는 기대를 벗어난 ‘악동’기질을 발휘하곤 했는데, 대부분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후회가 없는 것이 아니다. 드높은 푸른 하늘에 펼쳐지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연고전을 마다하고 어둡고 가라앉은, 시끄러운 다방엘 가려고 그런 행각을 했다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두 번 생각할 겨를이 없이 그런 ‘달콤한’ 시간들을 즐기기에 바빴다.

 

¶  연호회지, 국전감상, 동양 TV 견학, 음악감상회

연호회가 확실히 자리를 잡고 정기적인 모임이 활기를 띠면서 무엇인가 기록과 역사를 남기려는 노력이었을까.. 물론 확실한 이유는 기억이 안 나지만 회보를 만든다는 그 자체가 멋진 생각이었다. 남녀가 정기적으로 어두운 다방에 죽치고 앉아서 ‘친목도모’를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보기보다는 즐겁기는 했지만 그런 모임이 오래 갈 수가 없음도 자명했다. 그렇게 해서 연호회보가 탄생했고, 순식간에 글과 시 들을 모아서 주로 나와 박창희가 편집을 해서 지금 기준으로 보면 ‘원시적’인 수준의 철필, 가리방 과 등사기로16 조그만 책자를 낼 수 있었다. 내가 권두사를 쓰고 설악산에서 겪은 화상, 사고를 그린 설악산 등산기, 박창희의 산에 관한 글 ‘악(岳)’ 이라는 글, 주로 여자회원들의 시들이 실렸다.

우리의 회보 발간 자체에 대한 열의는 상당했지만 그것이 우리 연호회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고 시간과 정력이 생각보다 많이 소요되어서 단 한번 발행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아련한 기억 속의 이 ‘회보’는 세월의 횡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지만 가끔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창간호로 끝이 난 연호회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정말 기적적으로 2000년이 되던 즈음 양건주가 그것의 ‘사본’을 나에게 보내주었다. 제일 웃긴 것은 내가 쓴 글을 내가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17이었고 이것이 바로 세월의 장난이었다.

1968년 가을은 유난히도 청명했던 기억인데 그 찬란한 가을에 우리들은 경복궁으로 국전을 보러 가기도 했다. 평소에 나는 국전 같은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이성과 같이 감상한다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있었는지 이렇게 아직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볼 줄도 모르는 예술작품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나는 사실 본격적으로 이성의 존재와 의미에 즐겁게 놀라기도 했다. 한마디로 ‘삶이 신나는, 즐거운’ 시절이 시작된 것이다. 반면에 나의 ‘공부’에 대한 열정은 그에 비례해서 식어 들어가기만 했다.

당시 나의 원서동 죽마고우인 유지호가 잘 알고 지내던 젊은 ‘아저씨’가 동양 테레비에서 엔지니어로 근무를 하고 있었고 우리 연호회 회원들이 단체로 ‘견학’을 할 기회를 만들게 되었다. 내가 중간에서 주선을 한 것이고 이것이 성사가 되어서 나는 내심 자랑스럽기도 했다. 우리들은 흡사 낙도 어린이들이 서울 수학여행 온 듯이 방송국 내부를 흥미 있게 돌아 보았다. 평소 테레비에서 보던 ‘인물’들, 연예인 평론가 등이 연습, 녹화하는 것도 보았는데 기억 속에 당시 잘 나가던 펄 시스터즈가 신나는 soul에 맞추어 춤추며 노래하는 것도 보았고 뉴스 평론가 김용기 씨도 본 기억이 난다.

또한 인상적이었던 것은 방송국 옥상에 있는 ‘거대한’ 마이크로웨이브 안테나였는데.. 그 기술자 아저씨 설명이 방송국의 모든 program이 이 안테나를 통해서 지척에 보이던 남산의 거대한 안테나로 ‘송신’이 된다고 했다. 그것까지는 보통의 설명이었는데.. 그 아저씨 왈, 그 안테나 근처에 가지 말라고, 특히 앞쪽으로 가지 말라고 했는데.. 그야말로 전기통닭 구이가 될 정도로 ‘열’이 날 것이라고 했다. 그 정도로 energy가 큰 것으로 바로 이것이 마이크로웨이브 오븐의 원리였던 것이다.

그 당시 한창 pop song, mostly American 에 심취해 있던 우리들에게 좋은 pop 음악이 나오는 다방에 죽치고 앉아 있는 자체가 즐거움이요 멋이었는데 다방 보다는 우리들만의 음악감상을 할 자리를 마련해서 실컷 좋은 음악을 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의욕도 거창하게 연세대 뒤편에 있는 ‘청송대‘ 숲 속에서 하자는 이야기도 있었다. 같은 과에 있는 김광호가 자기 클럽이 그렇게 했다는 말을 해서 생각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전축’ audio system의 전원을 어떻게 마련하는 가에 있었다. Battery로 가능한 big audio system이 없던 그 시절이었다. 결국은 회원이었던 박창희의 집에서 하게 되었고, 그 집에는 그런대로 멋진 전축이 있어서 큰 문제가 없이 음악감상회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이날 새로 느낀 것은 나로써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모든 회원들이 다 나만큼 pop song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  크리스마스 비밀 데이트, 윤인송의 입대

그 해의 크리스마스는 이런 배경으로 조금은 ‘덜’외로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확실한 timeline은 다 잊었지만 당시 유행하던 (아마도 일본에서 유래 된?) 크리스마스 이브에 ‘길거리’로 나가야만 했던 ‘해괴한’ 풍습은 우리도 피할 수가 없었다. 우리들이 생각했던 idea는 간단히 말해서 남녀 한 쌍이 각기 다른 다방에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난다는 것인데.. 사실 생각만 해도 너무나 멋졌고 모두 동의를 해서 실행이 되었다. 이것은 제비를 뽑아서 정해진 couple이 정해진 다방에서 만나는 그런 것이었다. 다만 누가 누구와 한 쌍이 되었는가가 아직도 확실치 않지만 나는 ‘거의 확실히’ 선화씨와 만났던 것 같다.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난 것이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생했던 시간들이 왜 그렇게  희미해졌을까.. 안타깝다 안타까워..

이 무렵쯤 윤인송이 군대 징집영장을 받고 입영준비를 하는 ‘신세’가 되어서 우리들의 클럽은 조금씩 김이 새기 시작하게 되었다. 하기야 큰 이유가 없었으면 이 나이에 대개 군대를 가던 시절이었고 우리 클럽의 나머지 남자들도 거의 영장을 기다리던 때였다. 그 중에 윤인송이 제일 먼저 가게 된 것이다. 그때가 1968년이 지나가던 연말 연시 즈음이었는데.. 우리 그룹에서 제일 먼저 입영을 하는 case가 되어서 유난히 관심을 많이 받았다. 윤인송도 그것을 의식했는지, 흥분이 된 상태로 년 초로 예정된 입영 날 자를 기다리며 2학년 2학기를 마치고 있었다. 당시 제일 기억이 나는 것 중에는 인송이가 평소와는 다른 의외의 면모를 보게 되었던 것이 있었다. 평소에 여자 회원들과 깊이 사귀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는데 입영날자를 받고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서 이 여자 저 여자와 개인데이트를 하기 시작을 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조용하고 무슨 비밀의 베일에 싸인듯한 모습의 이재임(본명: 이인자, 평창이씨)와 단독 데이트를 했고, 신언경씨의 경우에는 숫제 그녀의 집에 ‘쳐들어가서’ 식사 대접을 받기도 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당신에는 조금 의아하기도 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역시 군대를 간다는 ‘엄청난’ 사실 하나로 모든 것이 이해가 되고 동감도 하게 되었다. 다른 면으로 그는 ‘멋진’ 입영 전야를 보낸 셈이 아닐까? 그런 후 인송이는 1969년이 되자마자 수색 군부대로 입영을 하고 우리에게서 일단 사라졌다.

 

¶  21세 생일, 교육회관 지하다방과 연세춘추

1969년 1월 21일은 나의 21세 생일이었는데 그날 나는 가까운 친구들 (남녀)을 우리 집으로 불러서 식사를 했었다. 그 당시에는 생일을 사람들과 같이 차려먹는 관습은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던 기억인데 어떻게 내 생일에 그들을 초대했었는지 정말 기억이 또렷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대부분 연호회 회원들과 가외로 같은 과에 있었던 다른 중앙고 1년 후배 이상일이 합세를 했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음식을 차렸는지 기억이 희미하지만 아마도 누나가 힘을 썼을 듯 하였다.   당시만 해도 어머님은 밖에서 일을 하실 때였다. 그 추운 겨울에 당시 널리 보급되었던 ‘석유난로’로 마루방을 덥혀서 그런대로 아늑한 분위기였다. 식사도 한식이었지만 풍성하였고.. 그래서 정말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양건주가 무슨 게임을 하자고 해서 모두 더 즐거웠던 기억도 난다. 이채로웠던 것은 많지는 않지만 여대생들이 함께 그 자리를 채웠다는 사실이었는데, 나는 당시에 그 사실 하나 만으로 너무나 즐겁기만 했었다.  그 때는 그런 식으로 나는 본격적으로 이성에 눈이 뜨이던 그런 시절이었었다.그 당시 어떤 ‘여자’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 나는 수십 년 동안 기억하려 애를 썼지만 100% 확실치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재임(이인자)’씨(평창이씨)는 분명히 그 자리에 있었고, 나의 regular 이선화씨가 함께 했었는지.. 나는 그것이 더 궁금하지만 슬프게도 사진도 없고 기억도 확실하지 않았다.

대학 2학년이 끝나가던 겨울방학 중에 나는 친구들과 교육회관 지하다방에서 진을 치고 시간을 보냈다. 당시 겨울방학에는 무슨 여가 활동을 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학구열이 이미 조금씩 시들해지던 시절, 본격적으로 ‘이성’에 눈이 뜨이던 그런 때에 제일 손쉽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은 pop 음악이 멋지게 흘러나오고 여대생들이 복작거리는, 담배연기가 자욱한 ‘지하다방’에 죽치고 앉아서 시간을 죽이는 것이다. 시간이 ‘무한정’ 있다고 생각하며 살던 20대 초의 전형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생각하면 조금 한심한 작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때 내가 낸 기발 난 ‘time-killer’ idea중에 하나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지루한 시간도 ‘죽이고’, 오랜 전(하지만 1년도 안 된)에 한때 ‘빠졌던’ 사람을 볼 수 있게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졌던 것.. ’20대 초 악동’의 장난이었지만 그 후에 후회도 많이 했다. 장난은 결국 ‘새빨간 거짓말’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음모’에 수동적으로 가담해서 ‘공범’이 된 사람들은 양건주와 이윤기 였지만 그들은 그저 옆에서 의아해 하고 놀란 모습만 보여 주었다. 모든 것은 100% 나의 작품이어서 아직도 이 두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이 project의 핵심은 가급적 많은 ‘여대생’을 ‘계속’ 만날 수 있게 하는 것 이었다. 하지만, 순진한 ‘사기’극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능한 많은 여대생들의 주소를 찾아서 ‘연세춘추(연세대 학보)’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낸다. 일종의 대학생들의 pop culture 특히 pop song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제일 ‘잘 나가던’ 유행음악이 무엇인가 ‘취재’를 하는 것이다. 이런 plan은 사실 크게 잘 못된 것이 없지만 우리가 ‘연세춘추 기자’라고 한 것은 ‘사칭’에 속하는 일종의 ‘범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생각할 정도로 머리가 굳어진 나이는 아니기에 ‘거침없이’ 계획을 밀어 부쳤다.

죽마고우 유지호가 열심히 다니던 CCC(Campus Crusade for Christ)란 대학생 선교회 회원들의 주소록을 입수한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들이 침을 흘리던 여대생들의 주소가 빽빽이 실려 있었고, 몇 명의 주소를 고르고 그들에게 연세춘추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다.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연세춘추’의 위력이 있었는지, 초대받았던 몇 명의 ‘여대생’이 담배연기 자욱한 다방으로 하나 둘씩 걸어 들어왔다고, 놀란 것은 사실 우리들이었다. 비록 ‘인터뷰’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당황한 우리 모습들이 우리가 보아도 웃겼다. 다행히 당시 나는 pop song의 ‘권위자’ 급에 속해서 크게 실수를 안 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물어보고 즐겁게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나왔던 ‘여대생’들 중에는 ‘짱!’ 하는 느낌을 주는 무언가 없었다. 그저 ‘시간을 죽인’ 효과만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것이 우리가 원하던 것이었으니까.. 별로 후회는 없었다.

이런 ‘성공적’인 일이 있고 나는 조금 더 ‘대담’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래 전 (사실은 반 년이 조금 넘은.. 당시에는 그 정도면 ‘영원’에 가까운 세월이었다.) 헤어진 나의 첫 date 윤여숙 씨에게 도전을 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성공리에 끝난 ‘연세춘추 인터뷰’의 방법을 써서 그녀를 불러내 보자는 idea.. 얼마나 장난스러운가?  그것이 전부였다. 그저 한번 해보자.. 는 100% 장난이었다. 나의 이런 idea에 두 친구들은 회의적이고 반대를 했지만 나는 밀어 부쳤다. 이런 아이장난에 쉽게 넘어갈 상대가 아니기에 밀어 부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 초대받은 날에 그녀가 ‘출현’을 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나는 대책이 없었다. 그녀와 맞대면한 용기는 제로에 가깝고.. 이런 식으로 만나는 내 자신이 사실 ‘비참’하게 느껴졌기에 속으로 그녀가 안 나타나기만 바랬는데..

약속시간이 되어 다방 문에 출현한 그녀를 보고 나는 완전히 얼어 붙었고 고개를 숙이고 어찌할 바를 몰랐고 옆에 있던 두 친구들은 왜 그러냐고 계속 추궁을 했다. 만날 곳, 좌석의 위치가 지정되어 있기에 우리 옆까지 온 그녀를 나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연세춘추 기자’라고 인사를 못하고 있으니 결국 그녀는 급기야 counter에 가서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이 모습들은 내가 목격한 것이 아니고 옆에 있던 친구들이 본 것이다).. 화가 난듯한 모습으로 counter에 무언가 ‘따지고’ 있었다고 했다. 아마도 우리를 찾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런 모습들은 내가 생각한 그녀의 평소 모습들이 아니라서 나는 놀라기만 했다. 너무나 적극적인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사라지고 나는 다른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경찰관’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만에 일이라도 이런 ‘사기극’이 그녀의 아버지에게 알려지는 날이면… 우아.. 너무나 아찔한 상상이었다. 이런 이후 나는 그녀를 ‘완전히’ 기억에서 잊게 되었고 그것이 나에게 ‘안전’함을 알았기에 이번의 ‘사기극’이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자위를 하기도 했다. 몇 년 후에 (도미 직전) 그녀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 당시의 일을 전혀 기억을 못하는 것을 보고.. ‘연세춘추’ 사건의 배후에 내가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때 내가 ‘진실’을 밝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저 넘치는 시간을 주체 못한 덜 성숙한 ‘아이’의 애교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아~~ 추억이여.. 모든 추억이 이렇게 아름다웠으면..

 

¶  나가며…

2013년 7월 초에 쓰기 시작했던 이 blog.. 일년 반 만에 ‘나가며’ 란 종장을 쓰게 되었다. 짧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오랜 세월과 싸울 줄은 미쳐 몰랐다. 서두에 말했듯이.. 내가 time machine을 타고 돌아갈 수 있는 ‘일 년’이 있다면 서슴지 않고 1968년이라고 말할 수 있기에 나는 더욱 나의 굳어져가는 머리의 기억세포를 짜내었고 그것이 너무나 힘이 들었기에 시간이 갈 수록 더욱 더 쓰기가 싫어지게 되었음도 솔직한 고백이다. 하지만 과정보다는 결과가 더 중요하다. 내가 짜 낼 수 있는 것은 99% 뽑아 낸듯하다. 이제는 ‘가미사마‘의 심판을 기다리는 기분으로 이곳에 홀로 남겨두고 나는 떠난다. Good Bye (forever).. 1968!

 


 

  1. 1966년 입학해서 1학기를 마치고 휴학하고 다음해 2학기에 복교를 하였다.
  2. 요새도 공비라는 말이 있는지조차 나는 확신이 없다. 공비라는 말은 ‘공산당 비적’의 준 말이다.
  3. 대개 소한과 대한이 이때에 걸쳐있다.
  4. 이들은 보통 사람의 능력을 넘는 체력으로 거의 나르듯이 행군을 했다고 한다.
  5.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가 되었다면.. 아마 소규모의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6. 상당수가 살아서 월북을 했을 것이다.
  7. 이때 미국의 미온적인 태도는 박정희의 자주국방 의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게 되고,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는 국가의 존망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어서 3선 개헌으로 시작되는 ‘장기집권’의 명분과 빌미를 주게 된다. 그러니까 김일성 개xx도 박정희 장기집권을 도와준 셈이 되는 것이다.
  8. 부족할 것 하나도 없었던 그 당시 ‘철부지’ 학생들은 거의 문화혁명을 방불케 하는 권위에 대한 도전의식으로 월남전을 기피하고 반대를 했다.
  9. 당시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도 쪼들렸지만 국제적인 입지도 미국의 똘마니 정도, 미국에 완전히 의지하는 약소국가로 취급이 되었고, 반면에 김일성 개xx의 북괴는 의외로 ‘자주국가’로서 제3세계까지 포함한 상당 수의 국가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다.
  10. 담배와 담배연기, 담배 피우는 남자의 모습은 여성들과, 거의 모든 곳(특히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멋진 것으로 묘사되던 시절이었고 여자가 담배를 피우면(할머니는 예외) 그녀는 분명히 화류계로 취급이 되었을 것이다.
  11. 아마도 아리랑 아니면 신탄진이었을 것이다.
  12. 그때 피우기 시작한 담배는 1990년 중반까지 계속 되었다.
  13. 그 당시는 군에 가는 것은 가급적 피하고 싶었던 의무였다. 사실상 군 복무 시 사고로 죽거나 병신이 되는 예도 허다하게 많았다.
  14. 父先亡 單代獨子, 아버지 없는 1대 독자
  15. 창희는 이미 거의 프로에 가까운 요델 산악회의 멤버였다.
  16. 이것이 사실 당시의 유일한 desktop publishing 의 한 방법으로 그야말로 Gutenberg를 연상케 하는 수준이었다.
  17. 권두사가 바로 그것인데.. 당시 유행하던 G-CliffsI Understand란 노래중의”let bygone be bygone“을 유치하게 인용한 글.. 그것을 읽고 누가 이런 유치한 글을 썼을까.. 생각했지만 희미한 기억으로 조금은 귀에 익은 글이라는 생각 끝에 나는 그것이 나의 글이었음을 알고 정말 의자에서 떨어질 정도로 놀랐다.

12월 중순이 넘어가는 날

¶  12월의 중순이 완전히 넘어가는 날, 12월이 기울어가고 성탄을 코앞에서 기다리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질 2013년,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던 세월이었는지 조금씩 정리해야 한다는 심정이 나의 목덜미를 잡는다. 오래 전의 표현을 기억하면 ‘세모歲暮’라고 했던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한 해가 저물어가는 것을 표현한 그 말.. 참 느낌이 좋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것이 과히 반갑지 않다고 느끼며 산 세월도 짧지 않았다. 숫제 그 ‘세모’란 것이 지나가지 못하게 붙잡고 싶은 간절한 심정도 많았다.

하지만 최근부터는 ‘의지적, 나아가 신앙적’으로 담담하게 느끼려고 안간힘을 쓰며 산다. 그러니까 조금은 편해진 기분도 느낀다. 어떤 현상이 자연적인 것이면 그것을 자연의 주인에게 맡기자.. 그것이 내가 보는 세상의 순리인 것이다. 순리에 너무나 도전하는 것.. 문제를 푸는 것보다 더 문제를 만드는 case가 얼마나 많았던가? 오너라, 세월아.. 지나가라 세월아.. 그것이 진리요 순리라면 얼마든지 편하게 받도록 노력을 하리라!

 

¶  올해의 초겨울 날씨 – 아직 공식적인 겨울의 시작, 동지가 이틀 남았지만 현재까지 보아서 올해의 winter season은 지극히 지극히 ‘고전적인 겨울’의 모습들이다. 체감으로 느끼는 추위의 느낌이 오래 전에 느꼈던 그런 겨울의 느낌인 것이다. 아틀란타 지역에 한정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올해의 장기예보가 맞아가는 듯 하다. 평년보다 ‘조금 낮은’ 기온일 것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중순부터 예년에 자주 입지 않았던 비교적 따뜻한 옷들을 입게 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비록 눈 같은 포근한 것은 없었어도 ‘겨울다운 겨울’ 은 너무나 신선하고 편안함을 주는 것이다. 이 지역의 추위는 사실 1월부터 3월까지가 진짜인데 이미 이렇게 싸늘했으니 그때는 과연 어떨까.. 지나간 여름이 너무나 시원해서 그에 맞는 따뜻한 겨울을 예상했는데 어찌된 일인가?

 

¶  레지오 남자들.. 레지오 마리애 남성 단원을 간단히 레지오 남자라고 부른다.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올해는 이 단어가 자주 쓰이고 해서 조금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톨릭 교회 안에서 가장 막강한 조직력을 자랑했다던 레지오 마리애, 기도와 봉사를 목표로 군대처럼 모인 곳이다. 진짜 군대의 근처도 못 가보았던 내가 인생이 저물어가는 이때에 규율과 조직의 힘을 신선하게 느껴보며 살아간다. 이런 조직의 힘이 나에게는 생수와 피처럼 필요하다고 느낀다. 레지오 마리애가 나를 필요로 한 것 보다는 내가 ‘살아 가기’ 위해 더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교회내의 어느 신심단체, 조직들 정작 일이 필요한 곳은 거의 전부가 ‘여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자매님’들이 궂은일, 시간 걸리는 일을 떠맡고 있는 셈이다. 도대체 남자들은 어디에 숨어있는 것일까? 남자들 중에서도 제일 활동적일 수 있는 40~50대들.. 분명히 ‘먹고 살기 위해서’ 신심활동,봉사 등은 엄두도 못 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60대는 어떤가? 그들도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런 것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아마도 ‘즐기는데’ 너무나 바빠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내가 때늦게 절감, 통감한 교훈적 사실은.. 이러한 ‘높은 수준의’ 활동이 그들이 그렇게 시간을 쏟고 있는 경제,사회활동에서 시간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덤의 시간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진리’를 조금이라도 일찍 깨닫는 ‘형제님’들은 일단 ‘성공’한 삶을 살며 마칠 수 있다고 나는 진정으로 믿는다.

 

¶  의미 있는 Blogging의 절묘한 힘을 며칠 전에 ‘또’ 깨닫게 되었다. 가끔 찾아오는 이런 ‘절묘한 순간’들 때문에 귀찮더라도 계속 ‘쓰게’ 되나 보다. 간단히 얘기해서 내가 2년 전 여름에 불평의 마음으로 쓴 blog, ‘알피 램 생애를 읽으며’ 란 것이 인연이 되어서 연세대 전기과 동문을 알게 되었고 그 내가 불평했던 책의 새 번역본이 나오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에서 신화적, 전설적인 인물인 ‘알피 램’의 전기에 해당하는 그 책의 첫 번역본은 너무나 실망적인 것이었고, 은근히 다시 써주기를 바라며 쓴 것인데 그것이 이렇게 기적奇蹟적으로 해결이 된 것이다.

게다가 새 번역을 한 사람이 바로 나의 연세대 전기과 ‘거의 동기’인 ‘김형기 스테파노’ 동문이어서 더욱 이채로웠다. 알고 보니 스테파노 동문은 1967년 가을학기를 나와 같이 공부한 것으로 밝혀져서 한참 반세기전으로 시간여행을 하며 그 당시를 추억하게도 되었다. 김 동문이 어떻게 레지오 마리애에 관한 책을 번역하는 입장이 되었는지 궁금하기만 하고 만약에 레지오 활동에 깊숙이 관여가 되었다면 서로 좋은 의견을 교환할 수도 있겠다는 상상적인 희망의 나래를 펴 본다.

 

친구 정교성의 성탄카드, 너무나 멋지다.¶ 일주일 전쯤.. 캐나다에 거주하는 오랜 친구, 중앙중고 동창 정교성으로부터 성탄 카드가 도착하였다. 이 친구는 내가 기억하는 한 거의 매년 이맘때쯤 카드를 보낸다. 비교적 일찍 보내는 것이다. 얼굴을 맞대고 본지가 수십 년이 되었지만 그저 늙어가는 모습은 쉽게 상상할 수가 있어서 큰 문제는 없다. 보고 싶다.. 보고 싶어.. 할 정도지만 일부러 그를 찾아 갈 여력을 찾지 못한다. 인연이 있으면 ‘죽기 전에’는 만날 수 있겠지 하는 정도다. 요새는 인간관계가 그렇게 정착이 되어간다.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친척, 친지.. 어찔할 것인가.. 나는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은.. 하며 생각하며 살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마음도 멀어져 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는가? 어떻게 그렇게 되어갈까? 최소한 나는 가까운 마음을 간직하는데 상대방이 꼭 그렇지 않은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솔직히 말해서 슬프고 무섭기조차 하다. 고국에 있는 그렇게 다정했지만 긴 세월 떨어져 살았던 인생들.. 아예 나만의 상상으로 다정했던 세월들만 간직하며 나의 인생을 보낼까..

 

¶  갑자기 장례미사, 연도 소식이 잇달아 들어왔다. 작년 여름에 하루가 멀다하고 겪었던 장례, 연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지만 올해는 비교적 조용한 편이어서 이대로 ‘무사히’ 올해를 보내나 보다 했지만 결국은 올해의 마지막 달, 어제와 오늘 연세대 이원선 도밍고 동문의 93세 어머님의 선종으로 연도와 장례미사가 잇달아 있었다. 이 동문의 어머님이 돌아가신 사실은 93세라는 나이도 있고 어느 정도 예측이 된 것이라 크게 놀랄 사실을 아니었지만 이 동문의 나와 비슷한 환경: 홀 어머님, 외아들 등등으로 나의 경험을 되새기며 하느님 품으로 가신 영혼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 동문의 어머님은 우리 어머님보다 2살이 아래였는데 육이오 전쟁에서 군인이던 남편을 잃으셨다고 했고, ‘강철같은 의지’로 4남매를 모두 대학엘 보내셨다고 고인에 대한 추억담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 당시에 그런 여건 (아버지를 잃은) 의 가정이 수도 없이 많았고 대부분 어머니들은 ‘뒤를 봄이 없이’ 자식들을 키워냈다. 그러니까 어찌보면 흔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인 것이다. 하지만 하나 하나를 자세히 알고 보면 모두 다 다른 눈물겨운 이야기들이다. 그런 환경에서는 생존이 제일 우선이고, 나머지 것들은 사실 희생이 되어야 했다. 우리들은 가끔 그런 사실을 깜빡잊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완고한, 고집불통) 만으로 불평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앞뒤를 잘 못보는 불공평한 논리인 것이다. 이원선 동문도 이제는 한 세대가 완전히 지나간 사실을 이번 어머님의 타계로 실감을 할 것이고 ‘자식의 입장에서 완전한 부모’의 입장으로 세상을 보게 될 것을 예상해 본다. 한 세대가 완전히 흘렀다. 다음은 우리들이 갈 차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