主後(주후) 2013년, 8월 22일

¶  BC, AD, BCD, CE… OH MY!  내가 감사하며 애용하는 Wikipedia 류의 web service는 물론 가끔 donation을 할 정도로 우리들에게 유익한 것이다. 그 옛날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 항상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필수의 서비스인 것이다. 비록 최고의 전문가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대신 충분히 많은 일반인에게 ‘검증’을 받고 있는 지식들이라 생각하는 것 보다 질이 좋음을 알 수 있다. 그 수많은 기사들의 폭과 깊이, 신속한 update등등.. 책으로 된 백과사전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 여기만의 문제가 아니고 모든 soft information에 해당되는 것인데, 지나친 PC (Political Correctness) effect가 여기에도 적용이 되는 듯 하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 ‘좋은 정보’로 취급되는 성향을 이곳에서 이곳 저곳에서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지나친 세속적 편향도 덩달아 춤을 추며 이곳으로 잠입하는 느낌도 든다.

예를 들면 CE 와 BCE의 연대 표기 방식이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AD (Anno Domini)와 BC (Before Christ) 대신 CE(Common Era) 와 BCE(Before Comment Era)로 표기하는 것이다. 해당 기사를 쓴 ‘봉사자’들에 의한 것이 아니고 아예 Wikipedia 자체에서 ‘권장, 심지어 강요’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이것이 쉽게 말하면 PC, politically correct한 것이다. 왜 전통적인 것보다 이런 방향으로 나간 것일까? 이렇게 하면 fund raising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것일 지도 모른다. ‘비신자, 비기독교인, 무신론자’의 숫자가 엄청 많고, 늘어난다고 생각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참 옹졸하기 짝이 없는 ‘새 대가리’ 적 발상이다. 기원 후, 기원 전을 쓰면서 ‘예수님 후’, ‘예수님 전’이라고 생각하며 서기 1968년..을 쓰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는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한번 어깨를 펴고 당당히 써 보자.. “오늘은.. 주후, AD: ANNO DOMINI, 기원 후 2013년 8월 22일!” 참.. 이래서 political correctness가 필요이상으로 욕을 먹나 보다. 

 

¶  GET A LIFE! FACEBOOKERS..: 아주 오랜만에 들려본 the economist 웹사이트 에서 흥미롭고, ‘나의 느낌이 역시 맞았구나..’ ‘I told you so’ 하는 나의 내면의 소리를 확인하는 기사를 보았다. 한마디로 “Facebook에 목매는 인간들아, (진짜) 삶을 살아라!” 인 것이다. 인터넷을 이용해서 ‘대화’를 하는 것과 ‘그 속에서 삶을 사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내가 보기에, 느끼기에도 나는 처음부터 이런 류의 ‘거대한 가짜 삶의 광장’을 제공하는 Facebook에 관심이 별로 없었지만 “기본을 무시한, 잔머리만 굴리는 요새 ‘아이들”의 장난이 거대한 돈과 증권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쓰레기’에 관한 뉴스는 피할 도리가 없었다. 난데없이 전혀 모르는 인간들이 ‘친구 합시다’ 하고 오는 추태에는 진저리가 칠 정도였다. 우리 두 딸들도 peer pressure에 약한지 한 때 빠지더니 요새는 많이 벗어난 듯 하다.

심각한 문제는 아예 그 속에서 완전한 ‘다른 삶’을 사는 인간들인 것이다.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의 실체를 제대로 구별을 못하며 사는 거대한 ‘광고의 밥’ 인 이런 부류의 사람들.. 그야말로 Get a Life! 라고 충고하고 싶은 것이다. 워낙 덩치가 커진 이 Facebook은 드디어 실험용 연구대상까지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결국은 실상이 들어나게 되고, 결과는 그들(ZukerXX & kids)에게 별로 좋지 않은 듯하다.

이 economist의 기사를 읽어보면 아주 조직적인 실험,연구를 한 것인데 결과는 그 곳에서 사는 삶은 한마디로 miserable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곳에 있는 거짓으로 도배가 된 허구의 삶들과 자기 것을 비교하는 자체가 불행인 것이다. 실상과 거리가 먼 자기의 공상을 쫓으며 살려니 결과는 뻔 한 것이다. 설상 가상으로 이제는 NSA의 철저한 감시대상의 제1위에 있는 그들의 privacy는 거의 제로에 가까워지고 있어서 솔직히 말하면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다. 

 

¶  바울라 표 커피: 얼마 전 우리부부의 레지오 마리애 본가인 자비의 모후 단원님 이 바울라 자매님이 조그만 상자를 건네 주셨다. 차량봉사 관계로 자매님을 레지오 주 회합 뒤에 모셔다 드리면 가끔 뒤뜰에서 정성껏 키운 야채나 꽃나무를 즐겁게 나누어 주셨는데, 이번에는 색다른 느낌의 조그만 상자였다. 혹시나 해서 미리 무엇이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커피’라고 하셨다.

이것은 정말로 뜻밖의 느낌이었는데, 물론 내가 워낙 커피를 즐기다 보니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지만, 조금은 미안하기도 하였다. 자매님 식구가 드셔도 됨 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자매님 식구는 별로 커피를 ‘잠’ 때문에 드시지 않는다고 하셨다. 집에 와서 상자를 열어보니 그것은 우리와 친숙했던 Caribou ground coffee pack이었다.

물론 우리가 사서 먹어도 되지만 이런 ‘공짜’ 는 참 즐거운데.. 공짜라서 라기 보다는 그렇게 주신 자매님의 마음이 고마워서 그런 것이다. 매일 아침 나는 칠흑이 간신히 걷힌 이른 아침에 이 커피의 맛을 ‘혼자서’ 음미하며 잠을 깨고 ‘신나게 돌아가는 머리’의 힘을 빌려 나의 생각과 일을 시작한다. 우리는 고마운 자매님의 마음을 생각하기에 그 Caribou Coffee를 ‘바울라 표 커피‘라고 이름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바울라 자매님! 

 

¶  CRAZY NEW NORMAL: BRADLEY MANNING 이 알고 보니.. CHELSEA MANNING? 하도 ‘미친’ 뉴스들이 요새는 ‘대부분 정상’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 희한(稀罕)한 기사에 나는 완전히 오금을 펼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정도로 희한한 CRAZY NEW NORMAL인 것이다. 별로 거대한 정치적인 안목이나 생각 없이 그저 ‘자신의 불만’만 생각하며 1급 국가기밀 수천 페이지를 양심의 가책 없이 여파나 파장에 상관없이 폭로하며 자신의 자격지심을 위로했던 ‘병신중의 병신’처럼 보이던 그 ‘남자’가 갑자기 ‘여자’로 성전환을 한다?

한마디로 정말 이것이야말로 희한 중의 희한.. 희한 올림픽의 다이아몬드 메달 감이다. 하지만 이것이 소위 말하는 ‘이세상의 누가나 평등하다, 절대로 남을 판단할 권리가 없다’ 는 ‘기분 좋은 슬로건’에 목을 맨 신 현세의 일 면이 되어가고 있다. 비겁 자 중의 비겁 자 처럼 보이는 그가 감방에서 여자 대우를 받고 싶은 것일까.. 참 모골이 송연 해 지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다. 

 

¶  RETRO-BLOG, TAKE ME TO 1968!:  근래 들어서 blogging하는 것이 그런대로 자연스레 습관이 되면서 나만의 retro-blogging이란 말이 생겼다. 그러니까 어떤 날, 문득 생각난 것을 쓰다가 다 못쓰고 내버려 둔 것을 ‘후일’에 이어서 쓰게 된 case 가 바로 이것이다. 쓰기 시작했을 때의 생각이 시간이 지나서 조금은 바뀌거나 했어도 생각의 출발점은 간직하고 나중에 읽었을 때 ‘역사적’ 가치가 더 있는 것이다.

특히 바쁠 때, 그런 ‘지나간 블로그’를 더 많이 처리해야 할 때가 많다. 미완성 된 블로그를 나중에 ‘완성’을 시키는 것이다. 현재도 나는 자그마치 5개 이상의 retro-blog과 씨름을 하고 있다. 제일 오래 된 것은 거의 6개월 전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대작’도 있다. 그러니까 나의 ‘역사적 기록’인 memoir인 것이고 그 중에서 연세대 2학년 시절에 관한 회고록이 있다. 대학시절은 누구에게나 그에게 ‘황금기’애 속하기에 이야기도 많고 생각도 많았던 시절이다.

나의 그 때는 20세였던 1968년.. 기억력과 최후의 사투를 벌리며 회고해 내고 있는 이야기들.. 나에게만 의미가 있던 사담들이지만.. 누가 아리오, 그 이외의 관련된 사람들이 보게 될지도. 몇 년 전 일본의 인기 ‘테레비’ 드라마였던 ‘무리한 연애‘ 라는 미니 시리즈를 보면 왕년의 십대의 우상이었던 지금은 환갑이 된 주인공이 택시를 탈 때, 택시 기사가 ‘어디로 모실 깝쇼?’ 하고 물으니 주인공 왈, 무심결에 ‘1968년으로 갑시다!‘ 했는데.. 내가 바로 그 주인공과 100% 같은 심정이다. 비록 북괴 김신조 무장공비 일당이 청와대 근처에서 설쳐댔어도, 정말 걱정, 근심.. 있어도 그 때는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삼일절과 왜(倭)

오늘은 3월 1일, 그러니까 삼일절이다. 왜 이렇게 생소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흡사 무슨 먼~나라의, 먼~옛적의 일로 완전히 남의 것처럼 느껴지고, 곧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에 잠긴다. 무언가 복잡한 심정이 됨을 또한 느낀다. 아직도 달력이 빨갛게 물들어 있음이, 분명히 고국의 ‘국경일’임이 틀림이 없다. 나의 코앞에 걸려있는 달력은 이곳 아틀란타 순교자 한국성당 것인데, 이곳 현지인 미국의 국경일에도 없는 빨간 날짜가 대한민국의 국경일들에는 요란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것이 이곳에 사는 대한민국출신 사람들의 국가의식이다. 이것에도 저곳에도 확실하게 소속감은 못 느끼는.. 그런 어정쩡한 자세.. 이런 자세에서 그들은 과연 삼일절은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일까?

올해는 삼일절 93주년이 된다. 1919년 기미년 삼월 일일, 이 1919년 기미년은 나에게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 나의 어머님이 바로 이해에 태어나셨기 때문이다. 거의 10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 그러니까 살아계셨으면 올해 93세가 되실 것인가. 상고사만큼 오래 된 것도 아니지만, 나로써는 실감나게 상상을 할 수 없었던 오래 전의 역사다. 멀쩡한 독립국가를 꿀꺽해 버린 ‘왜(倭)놈’들과 얽힌 악연의 시절 때의 사건이었다. 93년이 지난 지금, 약한 사람들의 기억력은 희미해지고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소리를 실감하며 산다. 우리 민족에게 증오와 질시, 질투 대상의 화신이었던 일본은 그런 역할을 조금씩 옆 나라 ‘짱깨’ 들에게 물려주려고 하고 있다. 그만큼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과연 삼일절에는 무엇을 생각하며 보내야 하나?

내가 고국에서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삼일절 하루 종일을 거의 경쟁적으로 ‘왜놈 증오’하는 행사로 보냈다. 특히 국민학교 때인,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그것은 거의 광적이었다. 이승만 박사의 반일감정은 보기에 아주 원색적이고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복잡한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특히 정치적으로 필요하면 ‘친일파’를 과감하게 중용을 할 정도였다. 박정희 정권 이후 그런 것은 눈에 띄게 완화가 되었다. 그 이유는 설명이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이후의 정권에선 이런 삼일절 같은 ‘과거사’를 어떻게 대했을 까, 나는 거의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국경일의 위치를 고수하는 것을 보니 조금 의아한 심정이다. 한글날이 없어져서 삼일절도 없어질 줄 알았는데.. 어찌된 일일까?

나는 지난 5년간의 ‘피상적인 일본공부’의 결과(대부분 텔레비전 프로그램), 과거 오해했거나 모르고 지냈던 것들을 지금은 많이 새로 알게 되었다. 특히 각종 전쟁으로 인한 그들 민간인들이 겪었던 고통이 사실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음도 그 중의 하나다. 오랜 기간의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완전히 자만심에 빠진 그들은 근래에 들어서 조금씩 주변의 나라, 특히 한때 그들의 ‘만만한’ 식민지였던 대한민국을 조금은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미국보다 훨씬 전에 버블경제의 충격을 겪었고, 그 후유증이 가시기도 전에 작년 3월의 천재지변으로 다시 한번 충격을 겪으면서 조금은 겸손해졌다고나 할까..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앞으로 한반도와 일본은 어떠한 관계로 이어가게 될 것인가, 혹시 기고만장한 짱깨를 공동의 적으로 의식하게 될 불편한 친구관계가 되지는 않을까?

 

해협海峽을 건너온 멋진 두 곡

한 동안 일본의 테레비 드라마를 download해서 보다가 얼마 전에 거의 우연히 음악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한국이 열심히 copy해서 방송하던 ‘가요 청백전‘ 같은 것, 홍백 가합전(歌合戰)‘ 이란 것을 보았다. 일본의 홍백(紅白)이 한국에선 청백(靑白)이 되었으니 참 바꾸어도 조금 밖에 바꾸지를 않았다. 약간 일본어들이 귀에 이해가 된 지금 노래를 듣는 것도 아주 좋은 공부가 되었다. 왜냐하면 모든 노래들은 ‘가라오께’ 스크린 화면처럼 노래 가사가 subtitle(자막)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도 원어인 일본 어로 나오니까 이건 정말 즉석으로 글과 말을 함께 보고 듣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아직까지 몇 편 안 보았지만, 확실한 것은 역시 우리나라의 트로트(도롯도) 전통 가요라는 것은 100% 일본의 트로트였다. 한마디로 그들이 ‘발명’한 것을 완전히 우리나라에서 ‘전통’ 적인 것으로 만든 것이다. 한마디로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정서가 딱 맞는다고 그렇게 나이가 들면 부르게 되는 우리나라의 트로트 ‘뽕짝’ 가요가 일본 “아해” 들 것이라니 말이다. 짐작은 했지만 그렇게나 똑 같을 수가 없다. 그것들을 들으면 역시 그들도 그들의 ‘전통 정서’에 맞는 모양으로 외국, 특히 서구에서 들어온 노래들과 완전히 대항을 하듯이 암암리에 보호를 받으며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궁금한 것은 과연 어떻게 명치유신 이후,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이런 류의 노래가 들어오고 일본에 정착을 했을까 하는 것이고, 일제시대에 어떻게 우리 노래로 정착을 하고 사랑까지 받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제가 100년 가까이 우리 정서에 살아있는데, 조선총독부, 중앙청을 부수어 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런 것들은 그대로 남겨두고 ‘일제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후세에 역사를 가르치는데 훨씬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그 나머지 노래들(클래식, 록, 팝, 힙합, 인디, 등등)도 한국과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결론적으로 일본이나 한국이나 거의 ‘똑같은’ 노래들을 부르고 있다. 유일하게 다른 것이 ‘고전적’인 전래 음악들.. 한국의 국악과 일본에 그것과 비슷한 것들.. 그것은 역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을 빼면 두 나라가 독특한 것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전통악기는 어떻게 다른지는 그것의 전문지식이 전혀 없어서 모르겠지만, 상당히 다를 것 같다.

 그런 배경으로 그들의 텔레비전 버라이어티 쇼를 보면 거의 완전히 수십 년 전의 한국의 쇼 프로그램을 보는 착각에 빠질 정도다. ‘한국과 일본은 다른 것보다 비슷한 것이 더 많다‘ 라는 나의 생각에 더 무게가 실림을 느낀다. 대부분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면 내 나이에 듣기에 정말 괴로운 것들 투성이인데, 아주 극소수의 것들은 정말 기가 막히게 가슴을 찌르는 듯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두 곡을 뽑아서 여기에 실어본다. 내가 말하는 ‘가슴을 찌르는 듯한 감동‘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아직 일본의 기성 가수들을 잘 모르지만 아마도 여기에 실린 美空 ひばり(미소라 히바리, Misora Hibari) 라는 여자가수는 우리나라의 패티 김이나 이미자 정도의 ‘최고 국민가수’가 아닐까 추측을 한다. 또 하나 곡(千の風, Thousand Wind)의 다른 남자가수는 사실은 클래식 쪽의 성악가가 아닐까 생각이 되고, 아주 젊은 것을 보니 현재 한참 뜨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愛燦燦-美空 ひばり-Misora Hibari

 

千の風-Thousand Wind

 

낙엽을 기다리며..

 

Autumn Leaves – Edith Piaf

Autumn Leaves:  의외로 갑자기 가을의 맛이 눈앞에 다가왔다. 준비도 못한 채 맞게 된 것이지만, 절대로 가을은 반갑다. 황금색으로 바뀌는 나뭇잎을 보는 것도 즐겁고, 차가운 비를 바라보며 움츠려 드는 몸을 따뜻하게 녹이는 진한 커피향도 그렇고, 이것이 앞으로 몇 개월의 비교적 짧은 기간에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은근히 기대했던 비는 끈질기게도 오지를 않는다. 그래서 모든 것이 확률적인 수치로 나오는 일기예보는 해석을 잘 해야 한다. 그 확률이 맞는 확률도 있을 것이고 그것은 역시 개개인 마다 조금씩 다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새 일기예보는 거의 일부러 안 보는 편이다. 기대도 하기 싫고, 미리 알아 보았자 그렇게 이득이 될 것도 없고, 만의 일이라도 비상 적인 일기가 오게 되면 그것은 주위를 통해서 자연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니까 사실 마음이 편하다. 시간적으로 변하는 날씨에 연연하던 때를 생각하면 왜 그렇게 내가 한가했나 하는 후회도 든다.
내가 사는 이곳의 9월은 사과의 계절이다. 그래서 애들이 어렸을 때는 가족적인 연례행사로 과수원을 찾고 했다. 아이들이 다 떠나면서 그런 행사도 시들해지고 작년부터는 가지 않게 되었다. 이곳에 이사올 당시, 그러니까 거의 20년 전만 해도 그렇게 과수원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인구가 늘면서, 특히 한인들이 늘어나면서 조금은 눈에 거슬릴 정도가 되었다. 특히 단체로 버스까지 타고 오는 것을 보면서 완전히 그곳의 맛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 옛날이 그립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자연스러운 세월의 흐름이 아닐까.. 모든 것은 모두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까.

 일본 TV 드라마:  2007년부터 보기 시작했던 일본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들, 특히 그 중에서도 연속극 드라마들 이제는 이미 방영된 것은 다 보아서 새로 나오는 것을 기다리게까지 되었다. 사실상 그것들을 보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프로그램들을 하나도 안보게 되었다. 연숙은 이것을 이해를 못하는 모양이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되었나 하는, 조금은 실망까지 하는 눈치다. 어찌 그것을 이해를 못할까? 같은 드라마를 보아야 그런대로 얘기할 것도 생기고 하니까.. 이곳에서 가끔 모이는 친지들과도 마찬가지다. 모두들 어떤 한국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가지도 신나게 얘기를 나누는데, 나는 완전히 듣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니까..
일본 프로그램을 보기 전에도 사실 나는 한국에서 나오는 것을 아주 가끔 보는 편이어서, 그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것들은 내가 보아도 조금은 이상하긴 하다. 하지만 일본의 드라마를 보는 나는 분명히 목적이 있었다. 그들을 조금이라도 ‘값싸게’ 공부해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인터넷의 덕분으로 가능해 졌고, 최소한 듣는 일본어는 많이 익숙해 졌다. 비록 드라마지만 그들의 문화, 생각, 풍습, 역사 등등을 간접적으로 많이 배우게 되었다. 너무나 그들을 모르고, 무시하며 산 것이 조금은 후회가 될 정도였다. 그래서 올해 초의 지진, 해일, 원전사고 등 재해 때, 그들을 이제까지와는 아주 다른 눈으로 그들을 보게 되기도 했다. ‘증오’의 역사로 점철이 되었고, 철저한 반일교육으로 자란 나로써는 지난 몇 년 동안 많은 것을 새로 보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다행히 대한민국의 경제성장, 정치적인 완숙함, 한류의 파급 등으로 그들도 이제는 거의 친구와 같은 입장을 취하게 되어서, 참 세상을 오래 산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이미 내가 골라놓은 ‘최고의 일본 드라마’ 목록은 계속 불어난다

 평창이씨 시조: 얼마 전에 강원도 평창이 동계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고 들어서, 평창이란 이름이 앞으로 귀에 아주 익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평창 이씨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평창이 본관인 성씨가 다른 것도 있는지는 모르지만 평창 이씨만은 분명하게 그곳이 고향이다. 하지만 평창이씨를 공부해 보면서 평창에 근거를 한 평창이씨는 한가지 파, ‘정숙공파’ 밖에 없고 나머지는 거의 전국에 흩어져 있다. 내가 속한 ‘익평공파’만 해도 그렇다. 나의 바로 위 조상님들의 세거지는 평창이 아니고 평택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평창에 살고 계신 정숙공파 종씨들은 평창이 더욱 알려지게 되면서 조금 더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되지 않을까..

현재 평창이씨는 시조 할아버지 문제로 두 개의 파벌로 갈린 상태가 되었다. 서울 흥인동에 위치한 평창이씨 대종회는 시조 휘 ‘광’ 자 할아버지를 시조로 하는데 반해서, 정숙공파는 독자적으로 그 보다 훨씬 위의 조상인 ‘윤장’ 할아버지를 시조로 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2개의 ‘다른’ 족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대종회에서는 광 할아버지 이전의 역사는 상관이 없다고 보는 것이니까, 최소한 대종회 족보는 전체가 맞는 것이고, 정숙공파 족보는 대종회 족보에 없는 것이 더 들어가 있을 뿐이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숙공파의 족보는 시조인 윤장이 경주이씨에서 갈려 나온 것까지 밝히고 있어서, 이것이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그리고 그렇게 오래 전의 사실을 어떻게 몇 가지 남은 사료로써 단정을 지을 수 있을까? 대종회는 ‘정사’를 고수하는 입장이어서 원래 족보가 출발된 시점에서 어떠한 다른 것도 넣을 수 없다는 보수적인 입장이고 보면 그것도 이해가 간다. 어떤 분들 말대로 사실 그것이 대종회가 갈라질 정도로 심각한 문제는 아닐 것 같다.

 

 

dream dream

 
Dream Dream – Everly Brothers – 1960

반가운 꿈, 어제 밤에는 오랜 만에 조금은 뚜렷한 꿈에서 깨어났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꿈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가끔 ‘좋은 꿈’은 다시 꾸고 싶기도 했지만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지는 않고 살았다. 하지만 꿈이란 것, 지금은 과학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99.9% 예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 ‘엉뚱하고, 말도 안 되고, 엉터리’ 같은 주제의 꿈을 예상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오래 된 것이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classic한 것들도 몇 가지가 있고, 나는 그것을 계속 소중하게 기억하며 살고 있다. 대부분 ‘좋은 꿈’ 에 속하는 것들이지만, 어떤 것은 정말 ‘이상한’ 것도 있다. 남들도 그렇겠지만, 좋은 꿈은 대부분 깨고 나면 너무나 깬 것이 아쉬워서 섭섭하고, 나쁜 꿈은 반대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어서 반갑다. 이렇게 꿈도 참 공평한 것이다.

한창 자랄 적에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많이 꾸었는데, 그것은 키가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들어서 좋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나의 키에 별로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물론 떨어지는 그 자체는 대부분 ‘날라서 사뿐하게’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어떤 것은 아직도 생생한 상상할 수 없이 색깔이 ‘진했던’ 그런 ‘초원과 하늘’ 을 본 것인데 어찌나 그 색깔들이 그렇게 ‘찐~’ 하던지.. 지금도 머리에 남아서 다시 한번 보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되었다.

 공상과학 만화, 특히 어릴 적에 완전히 심취했던 ‘라이파이, ‘철인 28호‘, 왕현의 ‘저 별을 쏘라‘ 등의 만화를 볼 당시의 꿈도 기억에 남는다. 그 중에 제일 재미있던 것은 ‘잠자리 채’ 로 ‘잠자리 비행기’를 잡던 꿈이었다. 그러니까 ‘방충망’으로 ‘헬리콥터’를 잡아 채는 꿈이었다. 그 당시 제일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이 ‘잠자리 비행기’ 였는데, 그것을 잠자리채로 결국은 하나를 ‘잡았다’. 잠자리채 속을 가까이서 보니 그것은 아주 ‘작은’ 장난감 같은 것이었고 손으로 꺼내려고 하는 순간에 잠에서 깨었다. 그때 처음, 이런 멋진 꿈에서 잠을 깨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것을 느꼈다. 이런 것이 ‘좋은 꿈’ 중에 하나였다.

 청춘의 절정기에는 ‘성장, 남성 male’ 호르몬(hormone)의 영향으로 많이 ‘이성을 그리는 환상’에 가까운 꿈을 많이 꾸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에로틱 fantasy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남자형제가 없던 나는 이런 것을 그저 속으로만 넣어두고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이제 생각하면 ‘건강’한 방법은 아니었다. 가능한 한 남자 친구들과도 그런 경험을 나누었던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끔 내가 ‘변태’가 아닐까 하는’틀린’ 걱정도 했기 때문이다.

10대에서 20대로 인생의 초기에 해당하던 그 시기다. 그때의 ‘최고’의 꿈은 역시 ‘지적이고, 멋진 여자’가 나에게 은근한 미소를 보내준 그런 류인데, 불행하게도 바로 그 기쁨의 ‘순간’에 깨곤 하였다. 좋은 꿈은 항상 그렇게 깨지곤 했다. 이런 꿈은 결혼 훨씬 후에도 가끔 꾸었고, 결혼 전과 달리 깨고 나면 약간의 ‘죄의식’을 느끼게 되어서 전과같이 기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꿈 자체는 정말 신선하고, 가벼운 흥분을 주는 그런 것이었다.

 20대에 나를 괴롭힌 꿈은 다른 것이 아닌 ‘가위 눌림‘ 이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꿈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꿈을 꾸면서 이것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 당시 시카고에서 알고 지내던 어떤 형 뻘이 되는 일본사람 (히다카 켄조 상)이 듣더니 자기도 똑같은 경험을 한다고 해서 얼마나 ‘안심’을 했는지 모른다. 역시 ‘고민’은 나누어야 가벼워 지는가.. 이 꿈은 무엇인가 악몽에 시달리다가, 목이 조이는 느낌이 들다가 나중에는 몸 전체가 ‘천천히, 완전히’ 굳어져 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미 시작되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그 일본인 켄조 형은 이럴 때, 절대적으로 남에게 알리거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깨어나야 한다고 경고를 하였다.

이런 꿈은 정말 괴로운 것이었지만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부터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해서, 30대에 들어오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의학적인 현상’에 불과하고, 몸이 허약할 때 생긴다고 했지만, 나는 전적으로 다 믿지는 않는다. 과학적인 것 이외에 어떤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꿈이 시작되기 얼마 전에 The Exorcist란 무서운 영화를 보고 일주일 동안 밤에 불을 켠 채로 잔 괴로운 경험이 있어서 혹시 그것도 한 몫을 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나에게는 특기할 만한 몇 가지 ‘악몽’이 있다. 지난 10년 동안 가끔 괴롭힌 것은 갑자기 머리카락이 모두 벗겨지는,그러니까 하루 아침에 ‘대머리’가 되는 꿈이었다. 물론 50대에 들어오면서 빠른 속도로 빠지는 머리카락에 겉으로는 나타내고 싶지 않지만 암암리에 신경이 쓰인 것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대머리가 된 꿈은 꿈 속에서도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깨고 나면 꼭 식은 땀을 흘리곤 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대머리가 되지 않고, 점차 ‘서서히’ 빠진다는 사실만은 이런 꿈에서 깨어나면 나를 조금 위로하곤 하였다.

하지만 진짜 악몽은 이것이 아니다. 이 악몽은 이제 나의 ‘친구’가 된 정도로 역사와 ‘실감’을 자랑한다. 이것은 학교에 대한 것, 그것도 ‘공부, 성적’에 관한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대부분 사람들에게 학교 ‘공부,성적’이 얼마나 필요이상의 스트레스를 주었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특히 이것은 지난 20년 동안 거의 정기적으로 겪는 악몽인데, 악몽의 특징인 “깨어 났을 때의 안도감” 은 이것이 최고다. 1980년 부터 PBS TV에서 재방영이 되었던 The Paper Chase..란 TV시리즈 (드라마)가 있었다. 이것은 원래 1970년대 초에 소설로 나왔고, 곧 영화화가 되고, 1978년부터 CBS TV가 드라마화 한 것인데 한국에서도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란 제목으로 소개가 된 것이다. 이제는 추억의 ‘고전’이 되었고, 특히 1980년, 신혼 초에 콜럼버스(오하이오 주)의 학교근처 1 bedroom Riverview Apartment에서 연숙과 같이 일요일 아침마다 침대에 누워서 빠짐없이 PBS TV로 이것을 보던 것도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Prof. Kingsfield & Hart in The Paper Chase, 1978
Prof. Kingsfield & Hart in The Paper Chase, 1978

이 드라마 첫 회의 에피소드와 내가 겪었던 ‘진짜’ 경험이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인 것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Hart)이 하버드 법대(Harvard Law School)에 ‘간신히’ 들어가서 그 첫 강의에서 겪는 ‘고통’은 가히 dramatic한 것이다. 호랑이 같은, 킹스필드 교수(Prof. Kingsfield)가 모든 것이 준비가 덜 된 신입생(하트, Hart)을 심리적으로 거의 ‘죽이는’ 것이다. 급기야 주인공의 꿈에서 교수가 나타나 ‘진짜로 무덤 속으로 넣는’ 것 까지 경험하는 것인데, 그 정도면 시험과 그에 따른 성적(표)으로 인한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가히 극치의 수준이 아닐까? 문제는 내가 그와 거의 비슷한 꿈을 ‘아직까지’ 거의 정기적으로 지난 30년 이상 꾼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정말 괴로웠는데, 지금은 사실 ‘완전히’ 익숙해져서 견딜 만 하고, 심지어는 꿈에서 깰 당시의 ‘안도감과 기쁨’ 때문에 기다릴 때도 있다. 아~ 내가 지금 학교를 안 가도 된다는 그 사실 하나로 그렇게 기쁘고, 무슨 구원을 받은 것 같은 기쁨까지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나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꿈일 것이라, 체념하면서 오래 살았는데 우연하게도, 가깝게 지내던 서울고, 서강대 출신 최동환 씨가 나와 비슷한 꿈을 꾼다고 들은 후부터 조금은 안심까지 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나의 꿈은 위에 말한 드라마와는 다르게 특별한 교수와의 문제에 대한 것은 아니고, 내가 과목을 듣는데 전혀 공부와 시험준비가 안 되거나, 덜 되었을 때의 그 불안과 고통에 대한 것이다. 연세대 시절에 그런 경험을 몇 번이나 했고, 그 후 미국에서 다니던 학교에서 거의 주기적으로 그런 ‘실화’를 겪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잠재의식에 완전히 뿌리를 잡은 것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잠자고 있는 이 괴로운 잠재의식을 어떻게 없애 버릴 것인가? 나는 모른다.

겉으로만 돌면서 나를 피해가던 종교, 신앙에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그래서 초자연적임을 이제는 믿게 되었고, 그 중에는 꿈도 포함이 되었다. 인생, 역사, 자연, 거기에다 꿈 등이 전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요새는 꿈을 사실 기다리며 즐긴다. 또 하나, 덤으로 나와 같이 나란히 살아가는 나의 인생과 ‘역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립지만 절대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을 꿈에서 기다린다. 그 중에는 나를 거의 잊고 사는 나의 사랑하는 누님과, 천국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나는 오늘, 내일 의 꿈속에서 다시 기다린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세상..

최근 몇 개월.. 참 세상이 숨차게도 돌아간다.. 특히 세계적인 정치적인 사건들.. 보통 때 상상도 못했던 큼직한 뉴스들.. 누가 이집트가 그렇게 쉽고, 급작스럽게 ‘민주화’가 될 줄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모든 것들이 1월 쯤부터 시작이 되었나? 누가 누가 그 조그만 튜니시아의 한 서민의 “불합리한 공무원의 억압”에 반발해서 분신자살을 한 것이 모든 것의 불씨가 될 줄을 누가 누가 알았겠는가? 역시 침묵의 다수가 그곳에도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요구가 그렇게 오랫동안 잠자고 있다가 그런 계기로 터진 것이다.

리비아의 mad dog
리비아의 mad dog

그곳에 있던 거의 비슷한 수준의 독재정권 국가들..전염병처럼 퍼져나가 제일 큰 나라 이집트까지 퍼졌지만 누가 그렇게 모든 것들이 소설처럼 풀려나갈 줄 알았겠는가? 한국만 하더라도 그런 것들이 수십 년이나 걸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게 쉽게 된 것은 아닐 것이다. 너무나 오래 동안 참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그 다음 차례가 리비아..인데, 안타깝게도 이곳은 이집트와는 조금 다르게 진행이 되었다. 가다피.. 무바락이 그렇게 쉽게 넘어가는 것을 보고 느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 동안 저지른 일과 무수한 적들이 있음을 알고 그렇게 쉽게 항복을 할 리가 없다. 운이 좋았는지 결사적으로 반기를 제압하더니 거의 성공을 할 찰라.. 결국은 나토를 중심으로 최후의 사태를 막으려는 총 출동.. 이런 대형 뉴스들이 끊임이 없다.

 

그것들과는 전혀 종류가 다른 초대형 천재지변.. 일본의 3-11 대지진과 그에 따른 해일(쓰나미), 최악의 원전사고.. 이런 것들이 어찌 이렇게 끊임이 없을까?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젊었을 당시의 초대형 뉴스는 사실 별것이 없었다. 그 동안 나에게 제일 큰 뉴스는 ‘나의 살아 생전에 절대로 넘어가지 않을 것 같던’ 소련연방(그 당시는 소련이라고 불렀음)의 붕괴’였다. 이것을 나는 아직도 믿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그 ‘사건’이후 불가능한 일은 없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확률이 아주 낮아도 절대 제로가 아닌 한 ‘장담’ 못한다는 말이다.

이번 일본의 대형 재난의 경우, 나는 오래 전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며 일본의 재난 뉴스를 보고, 생각하게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2007년 이후부터 일본을 보는 나의 생각이 조금씩 달라진 것이다. 그 해, 그러니까.. 2007년 봄쯤이었나.. 그때부터 나는 아주 우연히, 뜻하지 않게 일본의 TV drama를 한국의 Clubbox 로 부터 download해서 보기 시작하게 되었다. 원래는 그곳을 통해서 아주 가끔 한국의 video를 보긴 했지만 사실 재미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Clubbox중에 “일마래”라는 곳을 우연히 보고 혹시 볼만한 것이 있나..하고 거의 random으로 하나를 골라서 보게 되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거의 classic으로 기억되는 “간호사 아오이(Ns´あおい)”였다.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나에게 항상 관심 밖에 있었던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이 나의 코앞에 다가온 것이다.

항상 복잡한 감정을 유발시키는 나라, 일본의 실상을 가까이서 보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100% 그들의 TV program만 보게 되었다. 재미보다는 공부하는 자세로 보게 되어서, 쉽게 싫증이 나지는 않았다. 그것들을 보면서 잘못하면 아주 큰 오해를 남기고 갈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방적인 반일교육과, 불균형적인 경제격차 등으로 거의 의도적으로 일본을 무관심한 자세로 살아온 것이 조금 후회가 되었지만, 사실 이제라도 알아가고 있는 것이 너무나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특히 나와 같은 세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시기적으로 다행인 것이 그들도 한류의 영향으로 아마도 나와 같이 새로운 눈으로 상대방을 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명언을 상기시킨다. 그 동안 새로 알고, 느끼게 된 오해가 풀린 것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 나는 그들이 2차 대전 중에 민간인들이 얼마나 많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았나 하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상상을 훨씬 넘어서는 그런 고통을 당한 그들.. 우리 민족에게 많은 고통을 준 것은 분명히 사실이지만.. 그것을 주도한 것은 사실 그들의 군국주의자들이 아니던가? 멋모르고 따르던 국민, 신민들을 일방적으로 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도 너무나 큰 고통을 당한 피해자들인 것이다. 그것을 이번 3-11 재난에서 또 생생하게 보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은 그들을 정말 동정적인 눈으로 보며 슬픔을 나누고 싶은 것이다.

 

TIME magazine의 cover
TIME magazine의 cover, 현재 일본인들의 심정을 잘 나타내는..

 

Hyundai Sonata, Yuengling, 김용운 교수, Skeeter Davis

Hyundai SONATA 1 year anniversary:  작년 이맘때 연숙이 현대 Sonata 를 샀다. 그때는 Cash for Clunker program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고 우리 집의 workhorse Plymouth Voyager를 그 프로그램으로 trade-in을 할까..하면서 dealership에 간 것이 화근이었다. 거기서 Sonata를 타 보게 되었다. 그 salesman은 완전한 Sonata 신봉자 (그의 가족이 모두 Sonata customers) 였고,그것이 곧 바로 우리에게 sales로 연결이 되었다. 바로 옆의 Alabama에서 조립된 차였다. 일년째 타 보면서 연숙은 대만족이었다. 이 정도면 한국 차의 미래는 아주 밝다고 할까. 즐거운 일이다.

올해는 예년에 비해서 맥주를 덜 마신 듯하다. 여름의 즐거움은 사실 일을 끝내고 저녁때 마시는 시원한 맥주가 아닐까? 전에 주로 Samuel Adams의 variety 맥주가 정말 좋았다. Micro brewery로 시작한 brand가 이제는 대량생산이 되고 있어서 조금은 매력이 줄었다.그러다가 나에게 가격과 맛으로 딱 맞는 brand가 나왔다. Yuengling이란 맥주인데 Pennsylvania주에서 나온다고 한다. 처음에는 꼭 중국제 같아서 아하.. 이제는 맥주도 중국제품인가..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3개월 계속된 올해의 무더위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올해 더위의 특징은 거의 하루도 여유를 주지 않는 변치 않는 기상 pattern이었다. 그래서 올해에 제일 보기 싫은 사람들이 TV weather person들이다. 물론 그들이 날씨를 만들지는 않겠지만 조금도 ‘과학적인 설명’을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왜 올해는 이런 독특한 pattern이었나 하는 분석의 노력 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같이 home office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닌 출근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얼어붙는 듯한 시원한 곳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면 사실 거의 더위를 느낄 수가 없으니까.

 

김용운 교수의 “한국어는 신라어 일본어는 백제어” 라는 책을 읽었다. 일본어를 읽는 것이 익숙지 않아서 정독은 못 했지만 대강 저자의 얘기는 이해할 수 있었다. 김용운 교수의 책은 1970년대에 수학에 관한 여러 가지 책들을 읽은 경험이 있다. 그때 저자 글의 스타일이 참 좋았다. 어려운 문제를 정말 쉽게 설명을 한다. 그것은 저자가 논제나 문제를 확실히 이해를 한다는 쉬운 증거다. 저자의 폭 넓은 해박한 지식은 참 본 받을 만 하다. 특히 일본출생이라 그런지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깊게 그리고 쉽게 설명을 한다. 신라통일로 일본과 한국의 말이 완전히 갈려 나갔다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조명은 참 흥미롭다.

  • 백강전투 이후 한국어는 신라어 중심으로, 일본어는 백제어 중심으로 발달해 갔다.
  • 지리적으로 중국으로부터 한반도 보다 더 떨어진 일본열도는 자체적인 언어체계를 발전시킬 수 밖에 없었다.
  • 일본어의 문법과 한국어의 문법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비슷하다.
  • 한반도는 중국,한자음운의 영향을 거의 받아들인 반면 일본은 거의 백제어 수준에 머물렀다.

 

얼마 전 중앙고 2학년 때, 그러니까 1964년경을 회상하면서 그 당시 무슨 노래들이 우리들을 즐겁게 했나 생각을 해 보았다. 거의 pop/rock/country 같은 미국중심의 것들이었다. 그 때는 Beatles가 긴 머리에 uniform을 입고 I Want To Hold You Hand를 부를 때였고, hard-rock, psychedelic같은 것은 나오기 전이었다.  맞다.. 그때 미국의 60’s country란 것이 한창 유행을 하였다. 조금씩 전통적인 country song과 현대판 pop이 섞이면서 나오던 것들은 우리들이 듣기에 무리가 없었다. 그 중에서도 Skeeter Davis의 노래들은 여성 취향이었지만 우리” 싸나이”들도 잘 따라 부르곤 하였다. 주옥 같은 그녀의 hit song 중에서 The End of the WorldHe Says the Same Things to Me 는 아직도 노래의 가사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He says the same thing to me – Skeeter Davis – 1962

 

The End of the World – Skeeter Davis – 1962

 

 

The Ventures, 60/70, 일본문화

얼마 전에 YouTube에서 60년대 Instrumental group, The Ventures를 video clip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정말 감회가 깊다고 할까. 나의 60/70 moment인 것이다. 특히 Ventures가 일본에서 맹활약을 하던 60년대를 생생히 기억한다. 그 당시 (rock) guitar를 배운다고 하면 사실 거의 이들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도 물론 그 중의 하나였다. 그 당시 Ventures는 한국에 한번도 오질 않았다. 그 정도로 우리는 $$$가 없었다고나 할까, 아니면 그들이 그렇게 비쌌던가. 그러니 다 해적판 (그때는 우리나라에 license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LP 로 그들의 연주를 즐기는 정도였다. 그때 나의 주위에는 아주 상당한 수준으로 그들의 연주를 흉내 내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요즈음 일본의 TV drama를 가끔 보면 그 당시 그들의 대중문화를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우리들은 정책적인 반일교육의 영향으로 그런 것들을 거의 모르고 지냈지만 그것은 사실 눈 가리고 아웅.. 식 이었다. 어떠한 식으로든 간접적인 영향은 상당히 받았던 것을 지금에야 실감을 한다. 한국이나 일본에 모두 상당한 미군이 주둔을 하고 이어서 그들로부터 직접 받는 것 이외에 우리는 일본을 통한 여과된 미국문화가 또 유입되고 있었던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 당시 이미 경제발전이 상당히 진행이 되고 있어서 그들이 좋아하는 구미의 연예인들을 마음 놓고 불러다 공연을 시킬 수 있었다.

일제강점의 심리적 영향과 그들의 일방적인 경제부흥은 사실 그들의 ‘왜색문화’를 우위에 있다고 단정을 하고 완전히 차단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일까? 사실은 그 당시 일본문화라는 것은 거의 구미의 것을 흉내 내는 것 정도가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소위 대중음악, 혹은 전통가요라고 하는 트로트풍의 노래들은 사실 일본의 엔카와 같은 것이다. 그 이외에 미국 folk song의 영향을 받은 젊은 층의 노래들 (통기타 그룹이라는) 조차도 일본이나 한국이 거의 같았다. 그러니까 정책적으로 막았다 해도 실제로는 거의 같은 것들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한국의 경제수준이 상당히 나아진 지금에서 조금씩 일본문화가 유입되고 있으나 이제는 사실 그렇게 새로운 것이 들어올 것도 없을 듯 하다. 왜냐하면 원래부터 그렇게 이질적인 것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본과 한국의 ‘숙명적’인 관계라고나 할까. 그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The VenturesForever (and ever) with You를 들으니 기분이 조금 새로워 진다. 60/70의 nostalgic한 기분도 나고 또 다른 미래의 양국관계의 한 chapter가 보이기도 하기 때문일까.

 

 

Forever (and ever) with You – Ventur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