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꽃의 추억, Dead Watch Batteries,, Stock/Inflation Woes…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backyard엘 나가니 비록 비는 오지 않았지만 진초록의 한여름 모습이 장관이었다. 특히 거의 매일 피어나는 듯한 선인장 하루살이 꽃들, 그리고 근래에 여름에 만발하는 분꽃의 특히 인상적이다. 비록 가뭄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 애처롭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자연의 섭리라는데…

옛날 옛적, 재동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원서동, 가회동 집 앞마당에 피던 각종 꽃들 중에 분꽃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후 나이가 들면서 한번도 볼 수가 없었는데, 몇 년 전 연숙이 그 씨앗을 구해와서 뿌린 것이 지금은 뒷마당에서 여름한철 만발을 하고 있다. 꽃 자체보다 추억이 더 감미로웠지만 오늘 알고 보니 ‘한방효과’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Wikipedia에는 그 쓰임새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남아메리카가 원산지이며 한국에서는 관상용으로 많이 기르고 있다. 꽃에서는 명반을 매염제로 하여 남색에 가까운 색깔의 염료를 뽑을 수 있다. 씨는 가루를 내어 얼굴에 바르는 분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또한 뿌리에는 이수·해열·활혈·소종의 효능이 있어, 한방에서는 자말리근이라고 부르며 소변불리·수종·관절염·대하 등의 치료제로 사용한다.

 

아침에 손목시계를 차려고 설합에서 꺼내는데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시간을 보니… 1시 34분 24초에 멈추어 있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내가 고른 것, STÜHRLING ORIGINAL 저렴한 가격에 비해 꽤 고급처럼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었고 왠지 재수가 좋아서 오래오래 문제없이 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는데.. 벌써 문제가? 구입할 당시 사진으로 본 것보다 실물의 크기가 너무 큰 것에 조금 놀라긴 했는데 금세 적응이 되었고 점점 정도 들기 시작했는데, 아하~ 아무리 세상이 좋아졌어도 battery문제는 어쩔 수가 없는 모양… 근래에는 electric car, mobile devices 등으로  더욱더 battery가 필수적 제품 요소가 되는 듯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일찍 멈춘 것은 조금 실망이다. 역시 DIY의 정신으로 내가 battery를 교체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전에 쓰던 VICTORINOX의 battery replacement에서 실패를 한 경험이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서, 이번에는 조금 research를 한 다음 시도하는 것이 좋을 듯하고, 이것이 성공하면 VICTORINOX도 재도전해보는 것은 어떨지… 그것이 성공하면 쾌재를 부를 것인데…

 

지난 주일미사에 가지 못한 것 때문인지 오늘의 주일미사가 그렇게 생소하게 느껴졌으니… 장기간 냉담 신자들이 다시 돌아올 때의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옛날에 나도 그랬으니까.. 정든 우리자리도 정겹게 보이고 특히 우리 주변의 고정멤버들의 동향도 관심이 간다.

특히 우리 바로 뒷자리의 고정멤버 자매님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름도 세례명도 모르지만 이제는 눈인사를 넘어서 정식으로 인사까지 나누게 되었다. 그 자매님은 어떤 교우인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는데 물론 시간이 더 지나가면 자연히 의문은 풀어질 것이다.

아가다 자매님 그룹과 두 명의 베로니카 자매님들, 같이 어울리며 아침 coffee를 마셨지만, 역시 나는 조금 외롭기도… 남자라서 그런 것보다 얘기 상대가 없는 듯 느껴지는 것.  이것도 내가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니기에 현재의 상황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예외적으로 오늘은 돌아오는 길에 Sam’s Club엘 들렸다. 명목상 ‘우유’를 사려는 것이 주목적이었지만 다른 ‘필수품’들도 몇 개를 사긴 했다. 이제는 ‘술과 단 것들’을 안 사기로 마음을 먹었기에 나는 살 것이 없었지만 AAA battery는 앞으로 필요한 것들이라 $20 넘는 것, shelf life가 10년을 보증한다는 문구를 보고 사버렸다. 이것은 두고두고 쓰게 될 것이라서 과용한 것은 아니다. 미친듯한 소비품 inflation이 이제는 신경이 쓰이는 것이라서 cash를 쓰는 것도 따라 신경이 쓰인다.

오늘 coffee 모임에서 안나자매가 ‘주식시장이 엉망, 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졌다’고 걱정하는 얼굴에서 비로소 현재의 경제동향의 흐름을 느끼게 되었다. 전문적으로 장기투자에만 전념하는 그들 ‘주식부부’ 가 그런 걱정한다는 것은  정말 문제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도 긴축 긴축을 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무엇을 사고 무엇은 절약해야 하는지 조금 심각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김정훈 부제의 행복한 고민

오랜 만에 ‘초록색 책’을 나의 눈과 손에 가까운 곳에 두었다. 빌려온 지 꽤 시간이 지난 책, 이거 혹시 너무나 오래된 것이 아닌가.. 우려가 되었다. ‘대출기간 초과 과태료’가 붙지는 않을까.. 하지만 ‘나이든 어르신’을 상식적으로 ‘봐 주는’ 우리 고마운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도서실 관리자 자매 형제님들의 얼굴을 생각하며 ‘그래 더 가지고 보자’, 걱정을 접는다.

‘山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초록색의 표지는 고 김정훈 부제의 그림에서 온 것이라 더 친근감이 간다.  1978년 유학 중 오스트리아의 어떤 산에서 실족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던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기’반’ 동창,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 몇 년 전에 빌려와서 ‘독후감’ [첫 편]을 남긴 적도 있었고 이후 계속 읽으며 후편을 쓰려고 했지만 ‘세월의 마술’로 성사가 되지 못했다. 대신 이런 식으로 눈에 띌 때마다 가끔 읽기를 계속한 지 몇 년이나 되었나?

오늘 우연히 펼친 1975년 마지막 부분의 일기가 나의 눈길을 끌었다. 한마디로 정훈이의 ‘행복한 고민’이라고 할까… 이 일기를 통해서 얼마나 정훈이가 한국천주교회의 기대와 희망이었는지 어렴풋이 짐작을 하게 되었다. 본인이 그것을 절감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이렇게 부담으로 느껴졌던 것.. 나는 ‘행복한 고민’이라고 했지만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하기야 항상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었기에 칭찬도 그렇게 기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훈이가 사고로 그렇게 일찍 타계를 안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히 그는 한국천주교회의 ‘거목’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의 서문에 실린  김수환 추기경의 ‘추도사’를 보아도 그가 얼마나 한국교회의 촉망과 기대를 받았었는지 이해가 간다. 애석하기 그지없다. 어떻게 하느님은 그를 그렇게 일찍 데려가셨을까… 분명히 무슨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12월 2일 (1975년)

 

나는 별제(別製)된 인간이고 싶지 않다.

그냥 가만히 놔둔 그런 완전히 보통 사람이고 싶다. 모든 이들의 감시 속에서 – 자신은 엉망으로 감당 못 하면서 – 별나게 고고해야 하고, 상냥한 행동거지, 우아한 품위를 지닌…

모든 이들이 저 아래에서 쳐다보면서 저희들끼리 냉소하며 비웃음과 욕설로 나를 샅샅이 훑어내어 분해하려 한다.

아! 나는 그런 별제된 인간이고 싶지 않다. 무조건,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

엄청난 철학의 이론 – 신학의 체계 – 학문의 상아탑, 한국 교회의 기둥, 서울 교구의 인재,

“장래를 걸고 우리 모두에게 줄 복음을 연구하러 유학갔대. 훌륭히 되어 돌아와서 우리에게 굉장한 걸 줄 거야.”

아! 당장 앞에 다가온 세미나, 그게 도대체 뭐냐?

나는 미사 드리는 사람보다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이고 싶다. 내가 하느님을 모르겠다는 것은 아니다. 절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다. 한 톨 밀알을 조심스레 뿌리고, 조그만 의미를 그냥 혼자서 체득하고 싶은 거다. 가만히 혼자서 하느님을 기리고 싶다는 거다. 아! 나는 조용히 모르면 모른다고, 좋은 건 좋다고, 재미있는 건 재미있다고 하고 싶은데… 왜 모르는 것도 아는 것같이 해야 하고, 좋은 것도 내색을 해서는 안 되고, 재미있을 때도 웃으면 안 된다는 건가?

First of May, 2019

창희야, 용현아 또 일 년이 흘렀구나..

 

‘말대가리’ 용현아, ‘박하사탕’ 창희야.. 또 일년이 흘렀구나. 먼지가 뽀얗게 거리를 덮었던 그 시절 무언가 건설의 굉음 속에서 하루가 모르게 변하던 우리의 거리, 서울거리를 누비던 시절.. 그것도 5월의 서울 퇴계로 거리와 칠흑같이 어둡던 지하다방에서 듣던 불후의 명곡들, classic pop 그 중에서도 어떻게 Bee Geesfirst of may를 잊을 수 가 있으랴… 이제는 절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런 곳이 되었지만, 그래도 뇌 세포가 아직도 그 당시로 꿈속에서나마 보고 느끼게 해 준다.

지난 일년은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하구나. 창희야 LA에서 잘 살고 있으리라 상상은 간다만 용현아, 너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구나. 재동학교, 휘문중고교, 건국대 를 통해서 찾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제는 늦어가고 있다는 생각뿐이다. 그래 늦었어… 상상과 추억 속의 너희들 모습이 나는 사실 더 매력적이니까..

나의 지난 일년이 이곳에 ‘적나라’하게 남아 있지만 그래도 나는 ‘진화’하고 있다는 자부감으로 산다. 나의 북극성은 분명히 같은 곳에 있고 나는 그것을 한번도 놓치지 않고, 잊지 않고 방향을 잃지 않으며 산다. 그것이 나의 나머지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그래.. 그것이 바로 ‘희망’이란 것.. 그것만 놓치지 않으면 내가 태어난 생의 의미는 확실히 구현된다고 믿는다.

그래.. 우리의 50년 전의 아름다운 추억이 머리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한.. 희망은 항상 있는 거야.. 나는 믿는다. 모두들 건강하게 살기를…

5月 – 千鏡子

주로 1980년대 책들, 그것도 거의 ‘대한민국’에서 출판된 책들만 꽂혀있는 bookshelf 가 우리 집에 하나 있다. 거의 ‘고서’에 가깝게 된 이 책들은 분명히 우리 주위의 어딘가에 항상 있었겠지만 나의 관심과 눈을 끈 것은 그리 오래 전이 아니다.

이 책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살 만한 책들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서 ‘선물’로 받은 몇 백 권인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책을 받았을까? 추억을 더듬어 보니 1990년 전후로 우리가 아틀란타에서 처음 살았던 Norcross 에 있는 Four Seasons 아파트 이웃에서 살았던 ‘선경 지상사원’의 wife가 영구귀국을 하면서 우리에게 준 것이었다. 그 집 아이들 (경윤이와 동생)과 우리 집 아이들이 어울리고, 그 집 wife는 알고 보니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창 후배였고, 나의 서울 중앙고 57회 동창 박우윤의 친 동생 임도 알게 되기도 했다.

한글로 쓰인 책을 거의 잊고 살았던 시절에 이렇게 무더기로 얻은 책들, 나는 거의 못 읽고 살았지만 요새 들어서 하나 둘 씩 눈에 뜨이고 어떤 책은 나의 ‘필사’ 원본이 되기도 했다. 완전히 잊고 살았던 1980년대 이후의 조국과 그 냄새가 훈훈히 풍기는 고국문화의 정수인 책들, 이제 남은 시간에 하나 둘 씩 읽는 것도 좋을 듯하다.

오늘 우연히 발견한 책, 천경자 화백의 수필집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선명하고 강렬한 색깔의 그림들과 글들, 이제는 이런 ‘여자’의 글들 나도 익숙해 졌다. 그 중에서도 ‘5월’이란 제목의 글을 읽고 ‘나에게도 5월에 얽힌 romance 가 있었지..’ 하는 아련한 추억을 찾기도 했다.

 


 

5월 – 천경자

 

라일락이 향기를 잃어 버린 밤이다. 장미가 부풀었던 가슴을 헤치고 이제 요염한 자세를 일으키는지 화사한 날개로 숨소리를 덮는 듯 짓눌러 오는 밤, 내 심장의 고동이 어둠 속에서 이따금 날개를 터는 십자매(十姉妹)의 동작과 더불어 호수의 파동처럼 주름을 잡는다.

고요하고 화려한 환상도 무너지고 시든 라일락의 영혼마저 증발하는 것 같은 쓸쓸한 5월의 밤이다.

이렇듯 식물성(植物性)의 생명들이 시들어 가고 또 새로운 생명을 노래도 하고…

5월의 생리(生理)는 슬픔과 환희를 한꺼번에 쏟아 놓는다. 이 밤도 가고픈 옛날의 논두렁 길에선 개구리들이 녹색의 소리로 울어대고 있을 것인데 덧없는 인생이 취한 내 가슴엔 이슬 같은 것이 괴고 있다.

5월은 인생에서 어떤 피하지 못할 인과(因果)를 지어 주는 것 같다. 지열(地熱)에 익은 포플라가 상기한 풋냄새를 피우고 태양의 직사(直射)를 받아 떨어뜨린 선명한 그림자에 바람이 깃들면 5월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도 흔들리기 마련이다. 알지 못할 5월의 회화(會話)에 귀를 기울이고 풀지 못할 인과에 마음을 태워야 한다.

나는 5월이 오면 옛날의 추억을 더듬어야 했고, 내일을 위해서 화필(畵筆)을 들어야 했다.

5월을 불러 누구나 다 아름답다고 한다. 꽃들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견주는 것도 5월이요, 신록들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것도 5월이고 보면 5월의 자연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들은 여인들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그리고 눈물도 얼마나 괴이게 했는지 모른다.

옛날 젊은 시절 어느 5월에 나는 여인네들끼리 가족적으로 들놀이를 가는데 권함을 받아 바람을 쐬러 따라간 일이 있었다. 지금 같으면 소풍을 갔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인생의 시련 같은 것을 단단히 믿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떤 인연의 줄기가 나의 운명 앞으로 뻗어왔다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인네들 가운데는 인텔리 오뎅집 마담 형제 일행과 인생면에서 나와 비슷한 환경의 직업 여성인 Y양도 나처럼 ‘옵서버’ 격으로 얼굴을 내놓고 있었다.

나무 위로 무척이나 왕개미 떼가 올라가는 송림(松林)의 구릉(丘陵)이 목적지었던가 그들과 나는 거기에 올라가서 잡초가 무성한 어느 무덤 위에 앉았었다.

화제는 어느덧 막연한 사랑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나중엔 두 여인이 서로 제각기 자기가 사모한다는 것보다 상대의 이성(異性)이 자기를 사모하여 늘 전화가 걸려온다는 등 아베크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는 등의 이야기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야기라기보다 자기 자랑을 하는 것으로 그들의 표정은 해당화처럼 활짝 피어 있는 것이었다. 여인들이 이야기에 꽃을 피우고 있던 상대방 주인공은 아마도 동일한 남성인 것 같았고 Y양의 것이 농도가 더 짙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뒤로 구릉을 내려와 논두렁에서 와글거리는 개구리를 수십 마리 잡아서 손수건에 싸 들었다.

그 후 그 개구리들은 나의 화재로서 희생이 되었지만 나는 지금도 그 여인네들의 대화가 잊혀지지 않고, 그때의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얘기의 주인공은 나의 애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개구리에 대해서 나의 슬픔을 호소(呼訴)하고 싶지는 아니했지만 개구리들의 녹색의 울음 소리가 나의 심경을 한결 더 구슬프게 울려 주었다. 나는 어쩐지 5월이 오면 개구리의 울음 소리와 함께 마음이 설렌다.

그러나 나는 이 밤에 시든 라일락의 향기를 슬퍼만 할 수는 없다.

내일 아침이면 화사하게 피어났을 장미의 붉은 정열과 견주기 위해서 이 밤이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First of May, 2018

창희야, 용현아 그립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May Day friends: 손용현, 박창희… 용현아, 창희야.. 2018년 5월 1일 다시 한번 정다운 이름들을 조용히 불러본다. 또 일년이 흘렀구나. 또한 우리들 우정의 원년 元年 1970년 5월, 48년 전 “우리들의 오월”로부터는 거의 반세기가 지나가고 있구나. 이제 2년 뒤면 정확히 반세기… 참 우리는 오래 살아왔다. 지나간 일년 너희들 어떻게 지냈는지 이제는 전혀 ‘감’이 잡히질 않고 그림도 그려지지 않으니..  지금 어떤 모습의 얼굴들인지도 모른다. 그저 너희들의 이름과 반세기 전의 우리들의 아름다운 추억만 생생하게 기억할 뿐이다.

너희들은 일년가량 기다려야 하지만 나는 올해 먼저 70이라는 고개를 넘어섰으니 우리들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남아있는 미지의 세월’을 탐험하게 될 듯하다. 몸만 제대로 도와준다면 우리가 앞으로 맞을 이 시간들은 우리들이 70년을 살아온 경험으로 멋진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현재 너희들의 영육간의 건강상태는 전혀 모르지만 나 자신은 최소한 그런대로 영육적으로 ‘정상적, 양호한 상태’라고 말하고 싶다.

1970년 5월과 2018년 5월.. 그 사이에 무엇이 변했을까 새삼스럽게 물어본다. 20이 갓 넘은 시절에서 칠순을 넘은 것도 그렇지만 그 동안 세상도 참 많이 변했구나. 그렇게 찬란했던 당시의 5월의 기억이 이제는 전처럼 찬란하지 않으니 기억력의 한계인 듯 하다. 이제 너희들이 살아온 흔적이나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 것, 그런 것에 더 이상 호기심을 갖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이제 와서 그렇게 중요할까? 나에게는 그 ‘눈물 없던 시절’만 기억할 수 있는 힘만 있으면 족할 것이다. 내년의 5월 1일은 어떤 것인지 그것이 더 궁금할 뿐이다. 부디 건강하게 잘 살아다오, 친구들아.

 

교동학교 , Only God & Spring roll

¶  교동학교 형제  Birthday Party Hangover: 새로 사귄 형제친구, 서울에서 아래 윗동네에 위치한 두 국민학교를 같은 시기에 다니던 동갑을 만난다는 것은 나의 경험으로 참 희귀한 일 중에 하나다. 몇 년 전에 성당에서 우연히 돼지띠 동갑도 만났던 즐거운 경험이 있었지만 곧 헤어지게 되어서 너무 아쉽기만 했다. 왜 이렇게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이 없을까 의아했는데 의문이 풀렸다. 알고 보면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공동체 이곳 저곳에 적지 않게 그들은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나였다. 내가 그들을 못 찾은 것이고, 대부분은 신심단체가 아닌 친교단체에 속해 있었기에 그 동안 그들이 ‘숨어 보였던’ 것이다.

사람은 왜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나이고하 高下 를 막론하고 잘도 어울리던데, 나는 그것이 체질적으로 불편한 것.. 자라난 환경 때문인가?  작년에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고 ‘입회’를 한 60+ group 등대회, 나에게는 한마디로 awakening 같은 것이었다. ‘다른 세계’를 보는 듯한 그 느낌, 아직도 계속되는 것이며 나는 사실 ‘즐거운 우려’의 심정으로 임하고 있다.

동갑류 형제, 자매들을 ‘무더기’로 만나게 된 것은 나에게 timing이 아주 좋았다. 명색이 신심단체라는 곳에서 ugly하고 극단적인 위선을 통째로 경험을 했기에 아예 내숭떠는 모습이 훨씬 적은 친교단체에 신선함을 느끼게 되어서 그런가?

서울 종로구의 노른자위에 위치했던 국민학교, 교동학교 출신, 그것도 동갑의 형제님을 이곳에서 만난 것,  오랜만에 가물에 단비가 내린 듯 신선하고 즐거운 경험이 되었다. 내가 다니던 재동국민학교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 같은 때, 비록 짧았던 시절이었지만 같이 뛰고 놀고 했다는 그 사실만으로 나의 얼굴은 환한 웃음으로 뒤 덮인다.

교동국민학교는 나의 원서동 죽마고우 유지호와 ‘시자 누나’가 다녔고,  천도교 건물, 덕성여대, 우리들의 ‘문화전당’, 문화극장이 바로 앞에 있어서 사실 그 시절 그 주변의 광경들은 꿈에서도 나타날 정도로 익숙한 곳이었다.

나는 나이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꼭 ‘어느 국민학교 나왔느냐’ 는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질문을 하곤 해서 어떤 사람들은 웃기도 한다. 중 고교나 대학교를 묻는 것은 당시의 ‘입시지옥’ 풍토를 생각하면 실례가 될 수도 있지만 국민학교는 전혀 문제가 없는1 순진한 화제가 아닐까?

이렇게 새로 만난 ‘교동형제님’ 의 칠순 생일 party에서 우리 부부는 오랜만에 푸짐한 음식, 술, 얘기를 즐겼는데.. 문제는 남자들만 앉았던 table에서 ‘예의 정치, 시사토론의 함정’에 빠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술을 평소보다 더 마셨던지, 그 다음날은 하루 종일 멍~한 기분으로 ‘반성, 자숙’의 날로 보냈다. 피곤하긴 했지만, 동갑류 모임의 즐거움은 아직도 잔잔히 남고, 무척 오랜만에 느끼는 것, fraternity 형제애, 남자들만이 나눌 수 있는 정은 여자들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하고 깨우치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또 오면 적극적으로 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  Only God & Time:  지난 목요일은 4월 첫 목요일,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저녁 미사 후에 성시간이 있는 날이었고 연도가 있던 날이었다. 전날 ‘음주’의 여파로 꼼짝하기 싫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나가라, 나가라..’ 하는 음성이 계속 들리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사실 이날은 빠질 수가 없었다. 미사나 성시간을 그렇다 치고 연도는 빠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날 연도는 20대 중반의 한창 나이에 ‘요절 夭折’을 한 청년을 위한 것이었다. 그 젊은 나이로 잠자는 중에 사망을 했다는 사실이 사실은 정말 믿기 힘든 것이었다. 사연이야 어떻다 치고 그 부모들의 심정은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사고, 사고 하지만 이런 사고는 부모로써 정말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는 것이다. 나의 딸이 이런 일을 당했다는 끔찍한 상상은 사실 상상을 하기도 벅찬데..

이 부모님들은 사실 우리가 아틀란타로 내려오기 전에 잠깐 살았던 Madison (Wisconsin)에 사셨다고 해서 반가웠다. 물론 우리가 그곳을 떠난 후부터 그곳에 사셨고, 같은 한인성당에도 다녀서 우리가 알고 지내던 분들을 많이 알고 계셨던 인연이 있다.

작년 이맘때에도 비슷한 사고로 아드님을 잃었던 자매님이 있어서 연도를 했지만 사실 어떤 말로도 위로를 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때, 연도의 위력은 참 대단한 것인가.. 그렇게 우리에게도 위로가 되지만 유족들도 마찬가지라 생각 되었다. 그저 생각한다… 왜 그런 고통이.. 그래서 하느님만이 ‘왜?’ 에 대한 답을 가지고 계실 것이라는 것, 또한 하느님의 선물인 ‘시간’이라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  참, 사는 것이 이렇게도 힘든 것인가?

 

¶  Spring roll & wine,  Impromptu style: 어제는 성당 휴무관계로 연기된 레지오 주회합이 있던 날이었다. 화요일에서 금요일로 바뀐 것은 이미 전에 경험을 해서 별로 다른 느낌이 없는 것인데, 어제는 조금 달랐다. 정오 미사 후 맛있고 푸짐한 점심2 생각을 하며 쏜살같이 집으로 돌아오는 대신, 다른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우리에게는 아주 희귀한 것이다. 저녁 초대를 받기는 해도 평일에 점심초대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성당에 부부신자는 많지만 항상 같이 다니는 case는 사실 그렇게 많지 않은데 이 couple이 그 중에 하나다. 우리보다 나이는 한참 밑이지만, 그 동안 우리와 그런대로 ‘웃는 모습’으로 대하던 부부, 요새 보면 전 보다 더 사이가 좋아 좋아 보여서 보기에도 좋았다. 자매님은 본당의 각종 일에 헌신적으로 봉사를 하고, 신심은 참 부러울 정도다.

 

 

전에는 성당 근처에 살았지만 년 전쯤 비교적 먼 곳으로 이사를 갔는데도 불구하고 자주 보는 부부, wife끼리 우연히, 그야말로 impromptu, 지나가는 말로 같이 점심을 먹자고, 그것도 자기의 집에서.. 이런 것도 사는 재미가 아닌가? 거창하게 계획 만들지 않고 스쳐가는 생각으로 마음이 맞는 사람과 식사 하는 것.  비교적 drive 하는데 시간을 좀 걸렸지만 멋진 country club 내에 있는 예쁜 집에서 한가하게 Spring roll 과 wine으로 시간을 보낸 것, 두고 두고 기억하고 싶은 추억이 될 것이다.

 

  1. 하기야 이곳도 그 후에 사립국민학교가 나타나며 조금씩 바뀌긴 했지만…
  2. 우리는 평소에 저녁을 안 먹기 때문에 점심이 제일 양이 많고 푸짐하다.

휴우~ 덥다 더위.. 6월 24일!

¶  휴우~ 덥다 더워.. 6월 24일!  이렇게 쓰고 보니 조금은 웃긴다.. 임마 (이런 말 아직도 쓰나?) 6월도 24일이면 한창 여름이 무르익어가는데 그것이 정상이지, ‘빠가야로‘! 하는 등뒤의 속삭임에 내가 웃는다. 그렇지, 지금은 더운 것이 정상이지.. 그런데.. 92도 라면.. 어떨까? 아마도 옛날 옛적의 대구더위에 비길 수 있겠지. 며칠 계속된 더위지만 극적으로 때맞추어 ‘내가 고친’ 에어컨 바람이 더 나에게는 시원하게 느껴진다. 이럴 때는 물론 오후에 때맞추어 쏟아지는 시원한 소낙비.. 하지만 느낌에 그런 chance는 거의 zero 인가 보다. 아니면 Johnny Rivers 의 60’s classic oldie, Summer Rain을 연상케 하는 그런 추억의 비는.. 어떨까.. 하지만 이것은 거의 꿈같은 이야기다.

 

 

1968년 여름의 추억, Summer Rain – Johnny Rivers 

 

오랜만에 그 동안 바깥 구경을 못하고 살았던 우리 집 두 마리의 ‘재미있는 개’ Tobey & Ozzie, 오늘은 내가 더 쳐지기 전에 용감하게 끌고 동네를 돌았다. 거의 할아버지 나이가 된 우리의 개 Tobey가 언덕을 ‘새로니의 개’ Ozzie를 앞지르며 나를 끌고 올라간다. 얘는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이 동네 언덕을 나와 걸었기에 단련이 되어서 그런지 모른다. 공을 던지면 총알처럼 뛰어가는 다리가 긴 ‘젊은’ Ozzie, 2주째 우리 집에 머물며 자기 엄마 ‘새로니‘를 거의 잊은 듯 잘 지내고 있지만 그래도 밤에 ‘혼자’ 자야만 하는 그 녀석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얼마 전에 이곳을 걸었을 때 내가 열을 받았던 것, TRUMP FOR PRESIDENT, MAKE AMERICA GREAT AGAIN..이란 SIGN이 두 곳에서 나를 자극했던 것.. 오늘도 어김없이 그곳에서 ‘빠가’ 트럼프의 ‘쌍통’을 연상시킨다. 이 두 집이 바로 우리동네의 idiots, white trash인 셈이다. 이곳 East Cobb county는 물론 very conservative한 지역이고 전통적으로 ‘인정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런 ‘잘 사는 Republican white trash’들이 많은 곳이다. 그래서 이런 쓰레기 같은 SIGN을 본 것이 당연한 일이건만.. 나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정도니.. 이건 분명히 내가 over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야말로.. I CANNOT HELP IT.. 어쩔 수가 없다. 도대체 이 덩치 큰, ‘젊은’ 나라는 어떤 쪽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 것인가? 덥기만 한 날씨에 더 열을 받고 있는 내가 한심하기도 하지만.. 그래.. 이래 저래해도..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리라..

 

¶  6월 24일 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  오늘 평일미사를 가면서 6월 24일이 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 (Solemnity of the Nativity of Saint John the Baptist) 임을 매일 복음묵상 ‘newsletter’에서 보고 알았지만, 사실 그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 ‘사건’으로부터 였다. 바로 이날 6월 24일에 발현을 하신 메주고리예 성모님을 이 ‘대축일’ 때문에 집에서 쉬던 (놀던) 그 ‘애’들이 본 것이다. 그 당시 이 발현 과정에서 이날이 ‘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임을 누누이 밝히고 있었지만 그 때 나는 그 말의 의미조차 잘 몰랐다. 이런 생각을 하니, 금요일 평일 미사엘 가면 분명히 세례자 성 요한과 예수님을 비교하는 짧은 강론을 듣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요새 거의 본당신부님 역할을 하시는 방문 신부님 Fr. Joseph, 뜻 밖에도 새로 부임하실 본당 신부님에 관한 얘기를 하며.. 우리의 ‘이해’를 구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사연은 물론 본당 Holy Family 성당에 7월 초에 새로 부임할 주임신부님이, ‘부인이 있고 가정이 있는 남자’ 라는 우리에게는 ‘폭탄’ 같이 느껴지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늘 방문 신부님의 설명과 ‘양해’는 나도 아는 사실이다. 바티칸에 소속된 모든 가톨릭 ‘종파’들이 모두 다른 Rite를 가지고 있는데 현재 우리의 ‘보편 된’ 것이 Latin Rite, 이곳에서는 신부님들이 결혼을 안 하지만 다른 극소수의 종파에서는 성공회같이 결혼을 한다고.. 듣던 얘기다. 이번의 새로 부임할 신부님은 Melkite 에 속한 신부님이라서 신부님들이 결혼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들의 느낌은.. 그래도.. 하필이면.. 왜 그런 ‘소수 종파’의 신부님을 ‘주임신부’로 보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본당 Holy Family는 지역적으로도 보수적이고 Irish Catholic의 전통이 농후한 곳인데.. 아마도 그들 대부분은 불만이 적지 않을 듯하다. 그 중에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상상을 하니 아찔하다. 가족을 주렁주렁 데리고 사제관에서 생활을 하며 가족들과 같이 미사에 들어 온다는 광경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도라빌 순교자 성당에서는 구역문제로 우리는 고민에 빠지고 있는 마당에 이번에는 우리의 피난처 같은 미국본당에 부인, 가족을 동반한 주임신부가 온다는 사실.. 참.. 오래 살다 보니..

 

¶  성모님, 좀 봐주세요..  근래 우리부부와 자주 보게 되고, 예전 보다 조금 더 가깝게 지내는 C 자매님,  순교자 성당에 레지오 member를 중심으로 새로 생긴 Guitar Friends 그룹에도 참여 열심히 guitar도 연습하고, Holy Family 미국본당에서는 거의 매일 미사에 보게 된 멀게도 느껴지고 가깝게도 느껴지는 자매님, stress받는 것이 제일 싫어서 많은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피하며 조용히 살지만 할 것은 다 하며 열심히 사는 자매님.. 왜 하느님은 어떻게 그런 병고를 주셨을까. 병고라면 이미 오래 전에 가족을 통해서 겪을 만큼 겪지 않았을까, 공평하지 않은가? 모든 아픔이 아물어가며 어떻게 다시 이런 고통을 보냈을까? 오늘 아침 미사가 끝나며 어제 doctor visit의 결과가 조금 짐작이 되었다. 우리 부부, 너무나 안쓰럽고, 미안하며, 어쩔 수가 없어진다. 그저 할 수 있는 말은 ‘기도를 더 열심해 해야겠군요’ 정도였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이외에 무엇일까.. 늦은 아침을 먹으며 우리는 생각하고 생각한다. 성모님, 좀 봐주세요…

 

¶  육이오 6.25, 66년:  66년, 허~ 66년이라.. 여기다 6 하나를 덧붙이면 666가 되는구나. ‘악+악+악’, triple ‘악’ 인가? 그래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단어가 육이오, 유기오, 융요 (박정희 대통령의 발음).. 그래, 의식이 살아있는 한 이 단어는 나를 ‘움찔’하게 만들 것이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이제는 ‘사학자’들도 총대를 멜 때가 되지 않았나? 미국의 역사 교과서는 현직 대통령도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 놓는데.. 우리나라의 ‘병신 사학자님’들은 어떠신가? 아직도, 아직도 빨갱이 운동권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가?

 

 

아직도 귀에 생생한, 육이오의 노래

 

요사이 재동 동창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를 읽고 읽고 읽으며.. 다시 느끼는 것, 나도 나도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아니 육이오가 없었으면, 아니 김일성 개XX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나의 인생은 아마도 김정훈 부제의 ‘사직동 김판사댁‘  못지않게 ‘원서동 이정모 교수댁‘ 이란 ‘선망의 눈초리’를 받으며 컸을 지 누가 알랴? 어떻게 육이오의 몇 개월 사이에 한 가정, 한 가족의 운명이 그렇게 뒤집어 질 수가 있을까? 물론 우리보다 더 ‘처참한’ 인생의 역전을 겪었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죄 없는 동포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아니고 우리가 아니다. 우리 집은.. 우리 집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끝나고 저 세상에 가면 나는 반드시 ‘김일성’을 찾아내리라.. 그 개XX를 찾아 내리라.. 아마도 그 아들 김정일 개XX도 같이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을 찾기가 힘들 것이 분명히 그들은 지옥에 있기 때문이다.

 

독후감 讀後感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Part 1

2주일 대출기한이 수개월을 지나가면서 이 책을 우선 반납하여야 한다는 stress를 느끼며 이제까지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 저곳을 훑어보고, 비교적 가볍게 접한 이 책에서 나의 재동 齋洞 동창, 김정훈 부제에 대해서 알게 되고 느낀 것을 정리한다.

신학생 김정훈
신학생 김정훈

이 책을 처음으로 접하면서 제일 궁금했던 사실은 정훈이가 어떻게 그렇게 일찍 타계 他界 를 했던가 하는 것보다는 그가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가, 그의 집안, 가족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신앙, 성소를 가지게 되었는지..그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그가 20대를 훨씬 넘은 시절부터 쓰여진 일기 형식이기도 하고 자기의 생각이 정성스럽게 담겨진 ‘문학적 냄새’가 나는 글로써,  꼼꼼히 ‘정독’을 하지 않는 한 그러한 나의 궁금증에 대한 답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처음 대강 책을 훑으며 느꼈던 감정은 의외로 반갑지 않는 나의 반응이었다. “좋은 집안, 머리가 좋은 덕으로 선택된 선망의 대상으로 어려움과 고민 같은 것 별로 없이 유럽 유학 중, 좋아하는 등산을 하다가 조난사고로 운명”.. 비록 너무나 이른 인생의 비극적인 마감이지만 이러한 피상적인 이력서적인 눈에 쉽게 뜨이는 사실들 만으로는 정훈이 이야기가 왜 이렇게 ‘김수환 추기경의 서문’이 실릴 정도로 큰 화제나 영원히 남을 만한 책으로의 가치가 될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물론 이 책을 계속 읽으며 이것은 나의 ‘너무나 성급한’, 생각임을 알게 된다.

 

¶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 김정훈 유고집의 제목인데.. 과연 이것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이 궁금증은 19 쪽을 보면 간단한 설명이 나온다. 이 대목은 김정훈의 신학교 영적 지도 신부인 Stefan Hofer신부의 추모의 글에 있는데 그 신부님은 김정훈이 조난을 당한 사고 현장에 있었다고 했다.

우리는 별이 총총한 밤에 세르레스(Serles)에 등반하였던 적도 있었다. (중략) 베텔풀프(Bettel Wurf) 정상 정복자가 된 우리는 그 곳의 방명록에 우리들의 이름도 기록하였다. 베드로(김정훈)는 이름뿐만 아니라 한국 말로 무엇인가 썼다. 내가 무엇을 썼는지 그에게 묻자 그는 독일어로 그 밑에 주를 달았다.

산, 바람, 하느님과 나, 김 베드로.”

이처럼 베드로는 단순한 산에의 낭만주의뿐만 아니라 그때 그때의 깊은 종교적 느낌 속에서 산을 찾고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회고’를 보며 생각한다. 정훈이는 진정으로 산을 사랑하고 등반을 했지만 단순히 산이 좋아서, 산이 그곳이 보이고 있어서라기 보다는 깊은 종교적 체험을 통한 등반을 더 사랑하였던 듯 싶다. 나도 대학시절 참 산을 많이 찾아 다녔지만.. 어떨까, 종교적인 체험을 하였던 기억이 거의 없음에 정훈이의 나이에 비해 ‘성숙한’ 인생체험은 더욱 돋보인다.

 

¶ 정훈이의 가족관계는 어떤가? 이것은 사실 기본적인 호기심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재동 동창생이지만 ‘공부를 잘 해서 경기중학교에 갔다’는 사실 이외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재동학교 졸업 후 중학교 시절, 파고다공원 수영장에서 그가 아이(아마도 동생)를 데리고 가는 것을 보았던 기억.. 그것이 전부다. 그러니까 남자 동생은 있었을 듯 하다. 이 책에 가족에 관한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간단히 이곳 저곳에 나오기에 한 눈에, 명확하게 알기는 힘이 들었다. 우선 자신이 묘사한 가정은 204쪽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사직동 김판사네 가정도 한국에서는 신앙으로 가꾸어진 훌륭한 이상적인 가정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일이 잘 풀려 나가지 않는 면들도 보인다. 아이들이 제 발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자기가 사리를 스스로 옳게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는 부모가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들의 인생관과 신앙에 근거해서. 그런데 압도적으로 비중이 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만 손보기가 어려워져 버린 난맥상이 드러나고 있다. (중략) 곧 아버님 돌아가신 지 10년째가 된다. 벌써 그렇게. 강산이 정말로 크게 변했다. 아버지의 그 보화를 캐내어 나눠 줘야 할 큰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는 것이 이 순간 확연해진다. (1975년 3월 10일)

이 글은 1975년 3월 10일 일기에 나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친구 클레멘스의 가정을 부러워하는 글 뒤에 나온 것이다. 그 친구의 가정이 부러운 이유 중에는 ‘아버지가 높은 지위에 있고 건강한 아이들, 높은 교육을 받은 것, 3남 2녀라는 것.. 이런 것과 더불어 잘 화합된 부모의 교육, 그것도 참된 신앙에 의한 것.. 이라는 사실. 아마도 김정훈의 가정도 이에 뒤지지 않았던 이상적인 가정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10년 전에 돌아가신 ‘김판사’ 아버님의 비중이 너무나 컸기에 가정은 ‘난맥상’이 드러났다는 판단이다. 그러니까.. 1965년 경에 아버님이 타계를 하셨으니까, 정훈이 경기고 3학년 때였을 것이다. 혹시 그런 충격이 정훈이에게 깊은 성소의 뜻을 남긴 것은 아니었을까? 사회적 지위가 높고, 신앙심이 깊고, 가정을 사랑하는 아버님을 가진 정훈이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나로써는 부럽지 않을 수가 없다. 분명히 천주교 가정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천주교인이었을 정훈이네 가정, 혹시 대대로 내려온 ‘박해 받았던 가문’은 아니었을까? ‘비중에 컸던 아버지’에 대한 회고는 이곳 저곳에 나온다.

나가이 다카시의 ‘만리무영’에서 여러 대목을 읽었는데 느끼는 점이 많다. 우선 그 글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차분하고, 원만하고, 노력을 기막히게 많이 한 신앙인인 것을 알게 해 준다. 내게 특히 좋게 여겨지는 것은 그 글의 분위기와 저자가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진지하고 신념에 찬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그러하고, 어투며 그 상황까지 어쩌면 그렇게 흡사할까. 공감 가는 점이 정말 많다. 자식에 대한 배려, 아내 생각 등도 아버지 경우와 같다. 동시에 그 사람의 아들들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부쩍 동하는데, 많은 사람이 우리 집안이나 나에게 대해 갖는 기대와 주시도 그런 종류일 것이다. 불쌍하신 아버지, 죽음을 앞두고 아내를, 자녀들을 그대로 놔두고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무슨 생각에 젖으셨을까? 얼마나 우심 憂心 이 크셨을까? (1972년 6월 11일)

위의 일기에서, 아버지가 권해준 책을 읽으며 그 책의 저자가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좋은 점’들을 열거한다. 여기서 보아도 그 아버지는 정말로 존경 받을 만한 가장이었음이 짐작이 된다. 일찍 운명을 하신 아버지, 아마도 불치의 병으로 돌아가신 듯하다. 장남일 것 같은 정훈이, 이때부터 아마도 가장으로써의 기대를 받으며 성장하지 않았을까?

 

¶ 20대를 꽉 차게 살아오던 정훈이의 모습, 언행, 성품 등은 어땠을까? 이것은 친구들이 본 것이 아마도 제일 정확한 것이 아닐까? 일찍 타계한 친구를 보내며 친구 대표 ‘기헌’의 ‘조사’에 잘 묘사되어 있다.

너는 너의 가족들이 기도하며 바랐던 대로, 평소에 너를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과 친구들이 기대했던 대로, 너의 훌륭한 재능과 착하고 인간미 넘치는 성품이 더욱 닦아지고 완성되어 이 한국 교회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어야 하는데.. 이제 겨우 서른 해를 넘기고 가다니.. (중략)

너는 순진하고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사람이었어. 너의 신심 생활의 진보는 언제나 앞서 있었고, 너의 정신적인 사고력은 언제나 예리하게 우리를 압도했었지.

책 읽기를 그렇게나 좋아하고, 깊은 명상과 기도의 생활을 너는 얼마나 사랑했었니? 그러면서도 네 마음은 언제나 뜨거운 인정이 넘치고 있었다. 친구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낀 너였는지 우리는 잘 안다. 모든 친구들에게 한결같이 잘 해 주었어. 특히 괴로운 일을 당하고 있는 친구들에게는 어떻게 해서라도 도와 주고 싶어하던 너였지. 너의 특징인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두 눈을 껌벅거리던 너. 어떻게 해서라도 그 괴로움을 나누고 싶어 너는 애썼지.  (중략) 그러기에 친구이면서도 우리는 너를 존경하였고, 우리를 대신해서 큰 일을 해 주리라 믿었다. (중략) 착하고 아름답게 산 너의 영혼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백 배의 보상을 틀림없이 천국에서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너와 영결하는 이 마지막 순간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1977년 6월 7일, 정훈이를 보내며.. 친구대표 기헌이가)

비록 고인을 기리는 조사이긴 하지만 이 글에서 정훈이의 이목구비, 면모, 표정, 성격 들이 직접 간접적으로 다 보인다. 나로써는 이것이 ‘성인’ 정훈이를 상상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친구들에게 그렇게 기대를 받았던 ‘장래가 촉망되던 큰 재목’ 이었다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 가톨릭 신부와 여성, 신부 지망생 그러니까 신학생이었던 김정훈은 어떤 여성관, 여성 경험을 가졌을까.. 20대 중반의 혈기왕성한 ‘멋진 남자’에게 여성과의 교제가 없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된다. 나와 동갑(돼지띠) 이기에 1970년대 중반의 나를 생각하면 너무나 쉽게 상상이 가는 것이다. 다만 나의 background와 그 이외 많은 것들이 아마도 나와는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었음을 생각한다.

우선 절대자 하느님, 예수님을 자연스레 알고 믿는 그, 완벽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유복한 가정.. 등을 생각하면 정말 ‘자격을 갖춘 멋진 여성’이 그의 주변이 있었을 듯 하다. 다만 이 유고집에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여성, J 라는 여성만이 눈에 뜨인다. 과연 J란 여성은 누구일까? 거의 한 chapter “J와 인생” 이 J 라는 여성에 관한 일기인 것을 보면 ‘신부와 결혼’에 대한 그의 결심에서 가장 심각한 인물이었음 에는 틀림이 없다.

J에 대한 나이, 출신배경, 알게 된 경위 같은 것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집 식구들에게는 알려진 사람, 공개된 데이트였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신부를 지망하는 신학생과 데이트를 하는 여성은 어떤 여성들일까? 결혼을 전제로 할 수가 없는 100% 순수한 지적인 만남이었을까? 계속되는 깊어지는 만남에 자신에게 제동을 거는 자신의 결심도 보인다.

J와의 문제에 단안을 내려야 하고, 내렸으면 확실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

‘그래야 하는 까닭’

1. 실험적인 사귐은 있을 수 없다.

2. 그렇지 않으면 내 자신이 문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하게 됨.

3. 그녀를 위해서도 더 깊어지지 않는 것이 좋다. 실제로 나의 결론은 지어졌는데, 실행은 빠를수록 좋다.

4. 언젠가 끝에 가선 내가 당황하게 될 것이다.

이 문제는 내 햄, 내 의지만으로 될 수 없는 것이니 주님, 빛과 길을 주소서. 이럴 때 주님을 찾는다고 나무라지 마소서.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기에서 그는 ‘조직적’으로 차근차근하게 문제의 본질과 방향을 찾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문제의 심각함과, 어려움을 알고 그는 결국 ‘절대자’의 힘을 기대하고 있다. 그 당시, 나의 모습을 여기에 비추며 돌아본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나는 절대로 혼자였다. 절대자가 절대로 나에게는 없었다. 혼자였던 나는 모든 것을 ‘나침반’이 없이 헤매며 허우적거린 세월들이었다. 나와 정훈이의 20대 중반은 이렇게 하늘과 땅만큼 멀리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마디로 ‘은총을 일찍 받았던’ 영혼이었다.

곧바로 그는 J에게 쓴 ‘헤어짐의 편지’를 쓴다. ;7월 23일자 일기에 편지가 실려있다. 분명하지 않은 것이.. 이 편지는 일기인가 아니면 실제로 J에게 보내진 편지인가 하는 것이다. 이별의 편지, 참 balance와 courtesy, essence가 모두 있는 편지가 아닐까?

J씨 귀하,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있어야 할 순간이고 또 그 때는 빠를수록 좋기 때문입니다. 이런 책이며 글 같은 것이 부질없는 것이고 오히려 없느니만 못한 것이라고도 생각됩니다만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역시 글로 써야 제 뜻을 그래도 명확히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 동안 받은 것에 대해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주로 받기만 하고 드린 것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제가 주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줄 것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의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기존의 길이란 있는 것이 아니라 해도 자기가 뜻을 정하고 온 가능성을 모으고 있는 터에 이와 상치되는 사상 (事象)을 지닌다는 것은 일을 이루지 않겠노라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목표가 확실한데 이런 상태를 계속한다는 것은 저로써 더 이상 용납 못 할 일입니다. 그것은 제 자신과 J씨를 크게 속이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쓰라림만 커질 것입니다. 여기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항상 이것을 알면서도 갈팡질팡하며 생각을 모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기다린 거지요.

지금 이 글월을 쓰면서 저는 이 글의 의미가 엄청난 데 스스로 놀랍니다. 이는 우리의 사귐에 대한 결단일 뿐 아니라 저로서는 제 삶의 의미를 향해 다시 한 번 크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한 때문입니다. 이런 결정이 일방적이고, 제게 있어서는 쉬운 일이고 또 회피가 아니냐고 하지 마십시오. 또 이 일이 그런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고, 단안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냐고 도 하지 마십시오. 제가 얼마나 힘들게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또 그런 만큼 얼마나 정확하게 그 의미를 파악하려 하고 있는지를  J씨라면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일생에 몇 번은 결정을 내려야 할 때를 만나고, 또 한 번 내린 결정은 단호히 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J씨는 제게 너무도 과분하고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두 번 다시 그런 사람은 만나지 못한다.’ 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지금의 제 심정도 몹시 단호함으로 차 있습니다. 아니, 단호하려고 애써 노력하고 있습니다. 학교 주소도 아시고 또 9월에 학관에도 나가겠지만 제게 소식 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언젠가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이 말했다고 한 것처럼 저도 J씨가 그 근본을 향한 고귀하고 투철한 노력을 조금도 흩뜨리지 않고, 그 동안 얘기했던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으며, 용맹스럽게 전진하시기를 진정으로 빕니다.

– 김정훈

이 책은 그 동안의 우정에 대한 저의 기념의 선물입니다. 기꺼이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작별편지를 보면, 그의 확고한 결심을 J에게 전하며 다시는 연락을 하지 말라는 부탁을 한다. 이 정도만 아주 단호한 결심이 아니었을까? 이런 것으로 보아서 J라는 여성은 ‘적극적’으로 정훈이를 만나는 사람으로 느껴지고, 아주 나이에 비해서 성숙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9월에 학관에도 나간’다는 구절을 보아서 이들은 아마도 같은 ‘학관’에 다녔던 것은 아닐까? 학관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대강 그 당시에는 ‘학원’이라는 말을 썼는데.. 학관은 종류가 다른 것이었을까? 마지막 구절에 ‘근본을 향한 고귀하고 투철한 노력을 … 용맹스럽게 전진하시기를..’ 이것으로 J라는 여성도 무슨 뚜렷한 목표를 향한 ‘지식층’ 여성이었을 것 같은 느낌도 받는다.

이 ‘편지 일기’ 이후에도 그는 사실 J를 잊은 것이 아닌 것 같다. 계속 J를 만나며 그녀에 대한 글이 나오니까.. 아마도 서로가 ‘가벼운 마음’으로 ‘결혼의 가능성을 배제한’, ‘진정한 친구’로써 만난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 8월 21일의 일기는 J에 대한 끈질긴 미련과 자신의 필연적인 결심에 대한 분석이 나온다.

J를 본 지 열흘이 지났다. 지난 금요일과 월요일에도 만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하면서도 보고 싶다.

그냥 당겨지는 이 마음은 무엇인가? 왠가? 누가 무엇이라 한다 해도 이런 마음은 참 순수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적 현상이다.

간단한 기록으로 끝나려 했는데 또 길어진다. 내심에 잠겨 있는 것이 들고 일어나는 까닭이다. 파헤쳐 본다는 것도 힘에 겨웁다.  문제는 결단만이 해결의 관건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또한 결단을 내렸으면 책임지고 수행해야 하고, 끝까지 충실해야 한다.

그런데 결혼도 포기하고, J와 같은 사람과의 사귐도 금기(禁忌)인 신부가 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신부행(神父行)을 결심한다는 것은 그만한 의미가 있어서일 터인데 과연 그런가? 어째서 내 단 하나뿐인 인생을 사제에다 걸었는가? 사제가 무엇인가? 그 본질을 분명히 보고 결단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은 비교적 분명하게 문제점들이 드러난다.

내가 보는 신부에 대한 정의, 그 신원(身元)은? 고전적 정의로서는 내게 그 의미가 약하다.

위의 일기로 나는 그가 아직 신부가 되려는 결정을 하지 못한 것을 안다. 하지만 계속 내면적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자연적으로 생리적으로 끌리는 사랑을 느끼는 이성, 그것도 20대 중반의 나이에.. 어찌 간단히 결단을 내릴 수가 있단 말인가? 이 과정에서 김정훈의 ‘결단의 힘’을 볼 수 있다. 한 인간인 여성에 대한 사랑, 관심, 끌림 등과 신부가 되려는 성소의식이 치열하게 싸우는 듯한 몇 개월로 1973년의 마지막을 보내는 김정훈, 드디어 무서운 결단을 내리며 편지를 쓴다. 신부가 된다는 확고한 결심이다.

J씨 귀하.

이 시각을 위해 사귐을 해 왔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저는 초조하리만치 이 순간을 기다려 왔습니다. 뜻밖의 이 글월을 받고 놀라시리라 믿습니다만 끝까지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이 가능한 근거는 우리가 하느님을 지고(至高)로 모시고 있고, 그 동안 J씨나 저나 거짓 한 점 없이 서로 성실하였다는 사실 자체에 있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벌써 짐작을 하실지 모르나 정말 그렇습니다. 결단을 지금 내려야 합니다. 일찍이 저는 신부행(神父行)을 결단했습니다. 설령 각 사람에게 이미 정해진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해도 저의 그 선택에는 후회나 변함이 없습니다. J씨는 제게 너무나도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지난 번에 J씨가 말한 뜻대로 그 동안 우리는 분명 서로에게 성실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는 것 자체가 피치 못할 불성실의 시작입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제가 J씨를 아끼는 그만큼 이 문제는 절실합니다. 이 문제는 누가 무어라 해도, 어떤 식으로 가설을 세운다 해도 사실입니다. 이 점을 항상 의식한 저는 두려워하면서도 이 시각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껏 회피하려 했으나 결단은 있어야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빠를수록 좋을 것입니다. 비참하고 단호한 심정으로 이 글을 씁니다. 저는 이 글을 쓰기가 쉬웠고, J씨는 어렵다고 믿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의 만남, 사귐이 그렇게 순수했던 것처럼 이 시작도 서로에게 순수해야 하고, 전적인 동의로써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J씨는 J씨의 길을 힘차고 명랑하게 가십시오. 저도 제 길을 용기 있게 웃으면서 가렵니다. 이상이 제가 쓰고 싶은 전부입니다. 사실 J씨는 이 글의 진의(眞意)를 잘 알고 계십니다. 저의 집 전화번호도 알고 또 찾을 수도 있지만 저를 찾지 마십시오. 이별은 엄청난 사건이지만 한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저도 결코 J씨를 찾지 않겠습니다.

1973년 12월 26일 김정훈

정중하고 진심이 우러나오는 글이지만, ‘영원히’ 남녀로써 헤어져야 한다는 냉혹한 진실 또한 외면하지 않았다. 미련을 0%도 남기지 않고 그는 ‘결코 J씨를 찾지 않겠습니다.’라는 작별인사로 끝을 내는 그.. 얼마나 괴로웠을 결단이었을까? 그 나이에 나라면 ‘절대로 절대로’ 못하였을 것이고 그렇게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해 1974년 봄 무렵 유럽 유학을 떠나는 그는 아마도 그 때서야 J씨를 조금은 더 쉽게 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남녀관계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니까..  (Part 2로 계속 됨)

 

冊, 山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김정훈 부제 유고집, 1978
김정훈 부제 유고집, 1978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서정적인 시를 연상시키는 이 구절은 사실 어떤 ‘유고집 遺稿集’ 책의 제목이다. 언뜻 들으면 “산에 가서 부는 바람을 맞으며 하느님을 생각하는 나” 정도로 연상이 되기도 하지만 과연 이 책은 어떤 책인가?

주일 전에 아틀란타 도라빌 소재 한인 천주교회, 순교자 성당의 ‘성물방 책 코너 book corner’엘 들렸다가 ‘우연히’ 보게 된 책이었다. 이런 것들이 우연일 것이다. 전혀 계획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연이 정말 우연일 chance는 과연 얼마나 될까?

평소에 보통 나는 성물방엘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예외적으로 10시 반 미사에 맞추어 성당 주차장 교통정리 봉사를 하게 되어서 아침 8시 30분 미사에 참례했어야 했고 12시 45분에 예정된 레지오 꾸리아 월례회의 때문에 ‘장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성물방에 있는 book corner에 들린 것이고 그곳에서 이 책을 잠깐 보고 대출을 받게 받게 되었다.

Scan10020-1이 책이 눈에 들어온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 유고집 저자의 이름, 김정훈, 김정훈 베드로 부제 副祭.. 나의 거의 60년 된 깊숙한 곳 뇌세포에서 이 오래된 이름을 찾아 내었다. 1959년 서울 재동국민학교 6학년 동창이었다. 이 책을 대출 받으며 곧바로 나는 옆에 서있던 연숙을 바라보았다. 서로가 이 책의 제목을 알아본 것이다. 1990년 쯤 아틀란타에 이사 와서 처음 살던 Norcross의 직장 바로 근처에 있던 Four Seasons Apartment.. 우리 살던 아파트 건물 아래 쪽에 한국 상사직원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두 딸이 곧바로 우리 애들과 학교를 같이 가게 되었고 알고 보니 그 집 엄마가 나의 중앙고 동창 박우윤의 여동생이었다. 그 집에 책이 많이 있어서 연숙이 가끔 빌려보곤 했는데.. 그 당시 연숙이 그 책을 보고 ‘나와 비슷한 나이로 일찍 타계한 아까운 젊은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까물거리는 기억..  그 당시 나는 거의 직감적으로 ‘김정훈’이란 나와 동갑인 신부의 이름이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창’일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 책은 곧바로 뇌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아마도 그 당시 연숙은 그 책을 읽었을 것이다.

고 김정훈 부제
고 김정훈 부제

이런 인연으로 이번에 다시 나의 ‘손에 들어온’ 이 책이 우연만은 아니라는 생각, 어쩌면 재동 동창생 김정훈을 다시 발견하게 될 기회라는 ‘사명감’ 같은 것도 느끼게 되었다. 김정훈, 김정훈 부제.. 1960년 재동국민학교 졸업, 1966년 경기중고교 졸업.. 가톨릭대학 신학부 졸업, 인스부르크 대학교 유학, 부제 서품, 1977년 6월 2일 예기치 않았던 등산길에서 조난 사.. 김수환 추기경까지 참석예정이었던 사제 서품을 바로 코앞에 두고 선종.. 흡사 작은 ‘개인 서사시’ 같은 느낌.. 흠~ 30세에 선종..이란 말이 나의 코를 찡~~하게 만든다. 어찌 채 날개도 못 펴고 그렇게 갔단 말인가?

내가 아는 김정훈은 사실 단편적인 평범한 오래 된 동창의 기억 정도다. 나와 ‘친한 친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같은 반이라는 정도지만 이 ‘친구’는 조금 더 기억이 나는 것이.. 6학년 때 ‘아마도’ 전학을 왔던 것 같다. 학년이 시작되고 중간에 들어온 case였던가? 당시 우리 반은 6학년 전체에서 가장 우수한 애들이 몰려있었는데.. 당시 담임 박양신 선생님 왈: ‘김정훈은 공부를 아주 잘한다’는 말로 소개를 했던 것. 아니나 다를까.. 이 애는 기기 막히게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말이 별로 없었고.. 그러니까 나이에 걸맞지 않게 ‘겸손’하다고 할까? 그것이 전부였다. 말썽을 피우지 않으니 크게 기억할 사건이 없는 것이다. 우리 반에는 당시 ‘경기중 지망’ 수재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대부분 집안들이 떠들썩하던 치맛바람이 아니면 아이들이 그다지 겸손한 편은 아니었는데 이 김정훈은 그런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조용히’ 경기중학교에 간 것이다. 그런 사실만 나중에 알았고 곧 잊었는데.. 중학교 당시 나는 이 친구를 서울 낙원동 파고다 공원 (일명 탑골공원) 수영장 앞에서 ‘멀리서’ 보았다. 자기보다 나이 어린 아이를 데리고 수영장으로 들어가던 모양.. 그 이후로 나는 김정훈을 완전히 잊고 살았는데, 다시 이렇게 불현듯 나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죽은 모습’으로…

재동학교 앨범사진
재동 앨범사진

연숙이 처음 이 책을 대하면서 아주 인상적이었던지 나에게 몇 번 언급을 하긴 했지만, 저자 김정훈이 나의 재동학교 동창인 김정훈이라는 100% 확신도 없었고 신부지망생이었다는 말도 나에게는 가슴 가까이 들리지 않았다. 그 당시는 그만큼 성소 聖召 란 말의 느낌도 나는 피하고 싶었던 ‘마음과 가슴이 황폐하던’ 기나긴 시절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아주 아주 달랐다. 두말없이 그 책을 ‘2주 대출’을 받아왔고 관심 있게 이리저리 요모조모 앞과 뒤를 왔다 갔다 하면서 ‘조금씩’ 김정훈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요새 나의 버릇인 ‘난독’으로 거의 한번은 읽은 듯하고 이제는 조금은 체계적으로 읽어볼 까.. 현재의 느낌은 김정훈의 30세가 되어가던 그 당시 그의 생각과 나의 삶을 비교하며 너무나 애와 같은 생각으로 살던  나 자신을 보았다는.. 숨길 수 없는 사실 하나다. 아무래도 하느님을 이미 찾은 그의 인생에 대한 자세를 나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참 너무나 차이가 나는 30세까지의 우리 둘의 인생이었다.

El Niño winter, Advent spirit, 또 찾은 사람..

Still, I'm dreaming of white.. in my old dream
Still, I’m dreaming of white.. in my old dream

¶  El Niño Christmas Holidays   한 마디로 ‘따뜻한 성탄절’을 말한다. 지나간 몇 년간 이곳 지역은 아주 추운 겨울을 경험했지만, 그런 weather system이  Northeast지방(I-95 corridors, New York, Boston)에서는 물러가는 모양으로 National news 에서는 온통 ‘따뜻한 겨울’이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지난 5년간은 이 지역에서는 희귀한 white Christmas도 보았고 고드름과 폭설 같은 ‘북방’에서만 볼 수 있던 것도 보았던 세월이어서 사실 holiday의 기분을 마음껏 느낄 수는 있었다. Northeast 지방에서 그런 기후 pattern이 서서히 물러가는 모양으로, 이것이 ‘엘 니뇨‘ 현상이고 하는지 (따뜻한 태평양 수온), 앞으로 몇 년간은 그쪽 지방은 다시 비교적 조용하고 ‘따뜻한’ 성탄절이 되는가 보다. 우리가 사는 Southeast지방은 3개월 장기예보가 ‘wetter, cooler’ 라고 나와서 겨울이 가기 전에 눈(雪)같은 것을 기대해 볼만하지만  이번 성탄절을 즈음한 날씨는 ‘wet, very warm’이라고 예보가 되어서.. 미리 심리적으로 ‘white Christmas는 물 건너 갔다’ 라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Advent, advent.. waiting & waiting .. with 4 candles

Advent, advent.. waiting & waiting .. with 4 candles

 

¶  Advent spirits, 2015   나의 전통적인 12월은 한마디로 Charles Dickens 의 classic  A Christmas Carol 에 나오는  Christmas Past 라고 할 것이다. 평소에도 “현재보다는 과거”를 더 많이 생각하면 사는 나에게 12월이 되면 어떨 때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감상적 늪에 빠지기도 한다. 설상가상 雪上加霜으로 나이가 ‘고령 高齡’으로 접어들면서는 나이를 더 먹게 되는 년 말이 되면 더욱 축~ 쳐지고, 우울해지기도 하는 괴로운 시기가 되기도 했다. 내가 ‘비정상’인지는 확실치 않아도 분명히 ‘정상적’인 것 같지는 않아서, 나의 감정이나 느낌을 남에게 보이기도 싫었다. 한마디로.. 결국 12월은 심지어 즐겁지 않았던 season으로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년 전부터 ‘서서히, 천천히’ 나는 이런 ‘bad trap’ 에서 벗어나기 시작해서 올해는 현재까지 중에 ‘최고’의 spirit을 찾게 되었다. 그러니까.. Christmas present를 찾게 된 것이다. 거의 “기적”과 같은 이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참 인생이란 오묘하기만 하다.  

예전에 비해서 눈에 띄게 달라진 것 중에는: (1) Holiday decoration은 빨라도 12월 20일 이후에 하고, (2) Christmas carols, movies 같은 것도 그 이후에 즐기고.., (3) 가급적 holiday shopping같은 것을 피하고 정 필요하면 딱 하루 날을 잡아서 하고, (4) 진정한 성탄 holiday는 12월 25일에 시작이 되어, 다음 해 1월 5일 (12 Days of Christmas) 이후까지 지속된다. 작년에 이런 것들을 부분적으로 단행했는데, 결과적으로 너무나 뒤 느낌이 좋았다. 올해는 ‘모두’ 실천을 해 볼 계획으로 오늘까지 Christmas tree 장식 같은 것을 hold해 오고, carol이나 movie같은 것도 안 듣고, 안 보고 있다. 어떨까? 이것은 사실 ‘교회’에서 오랫동안 권장해 오고 있는 것들이지만.. 이제야 그 참 의도를 알 듯한 것이다.

과거에 성탄 전날까지 요란법석 시끌벅적 하다가 성탄 아침에 무섭게 선물을 나누어 뜯어 ‘버리고’, 거의 거짓말 같이 ‘모든 것’이 끝나던 정말 괴상한 풍습..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보냈을까.. 성탄 씨즌이 성탄절부터 시작이라는 간단한 사실을 어떻게 그렇게 외면하며 살았는지.  좌우지간 이러한 것이 그런대로 진정한 ‘대림절의 정신’일 듯하다.

 

¶  염경자 누나   바로 얼마 전에, 나의 2011년  blog post: ‘가회동의 추억‘에 누가 찾아와 댓 글 comment를 올려 놓았다. 알고 보니 그 ‘사연’은 정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가 없었고 꽤 놀라기도 했다. California (LA area)에 사시는 나와 같은 재동국민학교 졸업, 6년 정도 후배, 송요한 씨가 그 주인공인데, 오래 전 가회동에 같이 살았기에 나의 글을 찾았고 본 듯하다. 게다가 레지오 단장을 역임한 같은 천주교 교우.. 그러니까 송요한 형제님, 얼마나 반가운 사실인가?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가회동 내가 살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을 곳에 사셨던 듯하지만 내가 더욱 놀란 것은 내가 살던 ‘주인’ 집의 ‘미인중의 미인‘, 막내 따님 염경자 누나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참, 인연도 묘한 것이.. 송형제의 wife와 염경자 누나가 같은 항공사 스튜어디스 출신이라고 하며 그것도 같은 지역에 사신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렇게 연관이 될 수가 있을까? 그러니까 희미하게 알고만 있던 ‘주인집’ 소식을 조금 더 자세히 들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흠뻑 젖었던 그 당시의 한 가족들을 찾은 것이다. 이것으로 tiny blog의 ‘무서운 위력’을 다시 실감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세월은 흘렀지만 추억과 기억이 변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런 것을 나눌 수 있는 ‘인연의 사람’들을 다시 찾는 것은 오래 산 보람이라고 할 것이다.

재동학교 백승호

어린 시절 친구들을 회상할 때면 그 느낌들이 갖가지임을 느끼곤 한다. 물론 생각만 나도 피하고 싶은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너무나 희미한 기억들이라서 그런지 실제라 기 보다는 파란 담배 연기 속에서 춤추는 듯한 거의 꿈처럼 느껴지곤 한다. 한마디로 더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싶은 친구들인 것이다. 이런 것들을 지금 급속히 저하되는 듯한 기억력과 싸우면서도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나의 blog은 사실 그것을 위해서 시작했고 계속 그런 노력을 돕는 역할을 해 왔다고 생각이 된다. 영어와 ‘한국어’ 사이를 오가며 나의 감정을 알맞게 나타내는 것도 이제는 쉽지는 않다. 사실 머리 속에서 맴도는 어린 친구들은 그 당시의 사진이나 앨범들을 보면 쉽게 알아 낼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다. 분명히 친하게 뛰어 논 기억은 나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이다. 그래도 그 중에는 더 자세히, 생생히 기억이 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백승호의 기억이 유난히 머리에서 맴돈다.

백승호, 재동국민학교졸업앨범에서, 1960
백승호, 재동국민학교
졸업앨범에서, 1960

나의 뇌리에 ‘강하게’ 새겨져 있는 이 백승호는 1958년 서울 재동국민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의 친구였다. 한때 아주 가깝게 지냈고 분명히 서로 좋아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어느새 인가, 우리는 헤어지고 말았다. 웃기는 것은 그렇게 친구였었던 기간이 1년도 채 안되게 짧았지만 아직도 어제 본듯한 기분인 것이다. 원래가 잘 웃는 얼굴의 이 친구, 백승호 6학년 때 헤어지고 말았지만 멀찍이 볼 양이면 저 애는 나의 친구였다는 생각은 하곤 했었다.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백승호는 완전히 나의 시야, radar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대부분의 국민학교 동창들이 바로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다시 연락이 되었던 다른 친구 신문영처럼 이 친구도 거의 꿈같이 연세대 campus에서 보게 되었다. 신문영은 몇 초 정도 잠깐 보고, 혹시 저 친구가 신문영.. 하며 어 떨떨 했었지만 이 백승호는 아예 자주 얼굴이 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ROTC(학훈단, 일명 바보티씨) 생도의 모습으로 자주도 보였다.  

문제는.. 그렇게 나의 눈에 보일 때마다 왜 나는 반가운 마음을 접고 ‘모른 척’을 했었을까? 성격 적으로 그 당시 나의 먼저 나서서 백승호를 아는 척 못했을 것이다. 그저 멋 적은 것이다. 느낌에 어떤 때는 백승호도 나를 보았다고 느꼈지만 확실하지 않다. 만약 그가 나를 알아보았다면 그도 멋 적어서 나를 모르는 체 했을까.. 그것이 아직도 궁금한 것이다.

이런 사연으로 백승호의 image는 이곳 저곳에 남았다. 재동국민학교 5학년 시절의 사진 2장, 재동국민학교 졸업앨범, 하지만, 연세대 앨범.. 을 기대했지만 그는 1966년 입학으로 나보다 일 년 앞서 졸업을 한 듯, 그곳(1971년 앨범)에 그의 모습은 없었다. 사실, 학훈단 베레모를 쓴 모습도 기억을 하는데, 아마도 공학부 토목학과를 다녔던 듯 하다. 더 늦기 전에 그의 살아온 역사를 알고 싶지만, 그것은 너무나 무리한 바램일 것 같다. 하지만 build it, they’ll come의 교훈을 기대하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닐 듯..

 

재동국민학교 5학년 사진, 동그란 표시가 백승호, 1958년

재동국민학교 5학년 사진, 동그란 표시가 백승호, 1958년

 

찾았다! 재동학교 6학년 1반 신문영

나는 몇 개월 전 이곳,   나의 blog에서 연세대 시절을 회상하면서 재동국민학교 동창 신문영을 그의 졸업앨범 사진과 함께 같이 다루었다. 그 많은 재동국민학교 동창생 중에서 신문영은 나의 희석되어가는 뇌리에 뚜렷이 남아있기에 얼마 전에 그로부터 소식을 들었을 때,나는 사실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가 나의 blog을 ‘우연히’ 보았기에 연락이 되었을 것이라 serony dot com blog의 제일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제일 궁금했던 사실들 대부분을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내가 제일 궁금했던 것은 1960년 중학입시에서 어떤 중학교에 갔느냐는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경복중학이었다. 다른 재동 동창 심동섭이 경복으로 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또 다른 동창 조성태, 정세종, 장세헌 등도 같이 경복중학교에 갔다는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 조성태, 정세종은 같은 분단에 있어서 아는 동창들이고, 장세헌은 1학년 때 같은 반인 것만 기억을 한다.

이번에 email로 느끼는 신문영은 솔직하고 직선적인 듯 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중학교 당시 공부를 지지리도 못해서 삼선 고교로 갔다’ 고 하는 것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와 비슷하게 부선망 단대독자(아버지가 없는 외아들)로 군대를 안 갔었다고 했고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고.. 느낌에 아주 ‘정석적’인 인생을 산 듯했고, 명함을 보니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을 한 것 같아서 흐뭇했다.

이 친구를 통해서 재동학교 동창회가 있다는 것도 새로 알게 되었는데, 회장은 김영환, 일년에 한번 정도 모인다고 했고, 거기서 이만재, 육동구 등도 보았다고.. 듣기만 해도 흐뭇하고.. 부럽고.. 꿈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나는 꿈에서만 볼 수 있었던 광경들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모이면 사진이라도 볼 수 있게 되기만 바라지만, 세월의 횡포로 얼굴이나 제대로 알아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신문영을 기억하면 꼭 같이 떠오르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6학년 (1959년) 때 같은 분단 (공부를 제일 잘하던 1분단)에 있을 때 어느 날 이른 아침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에 담임 박양신 선생님이 나와 신문영을 부르더니, 심부름 좀 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듣고 보니, 선생님이 댁에서 가져와야 하는 물건 (서류?)이 있으니 둘이서 곧바로 선생님 댁에 갔다 오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 당시에 우리에게는 큰 일에 속했다. 왜 나와 신문영에게 그런 심부름을 시켰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둘을 믿고 그런 일을 주신 것이 내심 기뻤던 것은 사실이다. 그 시간에 학교를 빠져 나와서 인사동 입구의 선생님 댁으로 가는 것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모험 같고 신기롭게만 느껴져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는 모양이다.

아들 딸 모두 결혼, 손주들까지 있는 신문영, 부럽기도 하고, 보고 싶어 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쉽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반세기가 훨씬 지난 뒤에도 가상적인 해후가 이루어지는 세상이니 이만큼이라도 오래 살았다고 위로를 하며 만족하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을 듯..

터키 멘데레스 수상 서울방문 추억

멘데레스 수상 환영
멘데레스 수상을 기다리며, 1958년 4월 25일

멘데레스 수상.. 엄청 지난 세월에도 그 이름만은 기억을 한다. 멘데레스, 정확히 말하면 1958년 당시 터키 수상 멘데레스, 그가 아시아 순방길에 서울에 들린 것이다. 그 당시에 외국의 수상급이 한국에 온다는 것은 사실 큰 뉴스거리였다. 그만큼 외국에서 올 만한 거물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창 전쟁을 겪은 거의 폐허로 변한 찌들게 가난한 나라에 무슨 일이 있어서 온단 말인가? 설령 누가 꼭 방문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어도 곤란한 것이, 그렇게 높으신 분이 묶을 변변한 숙소, 그러니까 호텔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유일한 호텔은 시청 근처에 있던 반도호텔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추억에, 나는 서울 재동국민학교 5학년이 갓 되었을 때였다. 하루는 담임 선생님 (이원의 선생님) 께서 외국에서 ‘대통령’이 오신다고 하시며 그 나라의 국기를 다같이 그리자고 하셨다. 나라의 이름은 ‘털기‘ 라고 했다. 이것이 조금 웃기는 추억이었다. 도대체 ‘털기’가 무엇인가.. 우리는 한바탕 웃고 그저 ‘먼지 털기‘ 로 연상을 해 버렸다. 국기는 초생 달이 있는 것이었다. 그 당시 우리의 유일한 뉴스의 원천은 이런 식으로 학교에서 듣는 것인데, 신문은 한자가 너무나 많아서 읽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고, 우리들도 그 나이에 그런 ‘정치뉴스’에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털기라는 나라는 정확하게 ‘터키’였고, 신문에서는 한자로 ‘토이기(土耳基)‘라고 쓰기도 한, 육이오 동란 때 유엔군 16개국의 일원으로 전투사단을 보내어 이미 우리땅에서 피를 흘렸던 나라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당시의 세계정세로 미국, 소련의 냉전 하에서 공산진영과 민주진영으로 ‘완전히’ 갈린 상태에서 터키는 우리나라와 같은 쪽에서 빨갱이와 대적한 입장이고 보니, 이승만 대통령과 터키 수상 멘데레스는 자연스레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이다. 그 당시, 미국이 소련 공산주의의 확대를 막기 위한 전략으로 아시아에서는 서쪽 끝으로는 나토, 터키 를 출발로 해서 월남, 자유중국(대만), 한국(과 일본)를 동쪽 끝으로 거대한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 나이에 외국의 ‘우두머리’가 온다는 것과, 그 분을 환영하러 우리들이 거리로 나간다는 사실은 사실 신나는 소식이었다. 우선 거리로 나가려면 학교 공부를 빼먹어야 한다는 것이 제일 신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거리로 나가서 거물급들이 탄 차들을 보는 것도 신났다. 하지만 일단 거리로 나가서 환영을 하려면 그들의 차들이 지나가는 몇 시간 전에 나가서 기다려야 하는 고역을 겪어야 했다. 또한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가도 차들이 지나가는 시간은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았으니, 참 허무하기도 했다. 그 몇 초를 위해서 몇 시간을 목이 빠지기 기다렸으니.. 그 다음날 가도에서 멘데레스 수상을 기다리던 우리들의 사진이 신문에 나왔다고 집에서는 난리가 났었다. 심지어는 내가 사진에 나왔다고까지 했다. 그것이 조금은 우리 집의 ‘역사’가 되어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다. 나는 그 신문을 본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무언가 비슷한 것이 실렸었을 것이라고 짐작은 하면서 54년이 흐른 것이다. 그것을 지금 그 당시의 신문을 다시 보게 되면서 확인을 할 수 있었다. 분명히 우리들이 사진이 나왔고, 그것은 1958년 4월 26일자 동아일보 (나는 경향신문으로 알았다) 였다.

문제는 그 사진을 암만 보아도 나의 존재를 확인 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신문의 사진은 원래 바로 찍은 것을 보아도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아주 해상도가 ‘저질’에 속하는데 그렇게 오래 전의 것은 더 나쁠 것이니 말이다. 또한 그 때의 경향신문을 지금은 볼 수가 없는데, 아마도 그곳에 내가 있는 사진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그때의 생생한 기록과 사진을 찾은 것만 해도 큰 수확인 것이고, 이 사진을 보면서 그 당시 우리들의 ‘꾀 죄죄’한 모습들이 너무나 반가운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그 당시의 그 두 거물 이승만 대통령과 터키의 멘데레스 수상 모두 몇 년 후에 정권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4.19 학생 혁명으로 물러났고, 멘데레스 수상은 같은 해, 군사 쿠데타로 실각, 체포, 나중에는 사형까지 당했다. 참 역사는 이런 것인가.

 

김두철, Ash Wednesday

¶  우등 한번 못해본 서울대 수석합격: 김두철을 다시 찾았다.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창, 3학년과 6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특히 6학년 때는 나와 같은 ‘1 분단’에 있기도 했던 ‘머리 좋은’ 동창이다. 나의 재동국민학교 추억에 관한 blog에서 잠깐 언급을 했었는데, 그 당시에는 100% 나의 머리 속에 남아있던 기억력으로 쓴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의외의 도움(Internet, what else?)으로 그의 이름을 다시 보게 되었다.

1966년 2월 중순경의 일간지는 서울 주요 대학입시 합격자 명단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조그만 기사 중에 김두철의 사진과 이름이 보였다. 그 것이 동아일보였는데, 지금 생각을 해 보니 아주 어렴풋이 그 기사를 그 당시 나도 본 것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반세기가 가까이 되는 엄청난 과거였으니.. 역시 확실하지는 않다. 그 기사는 김두철이 서울대학 ‘전체 수석’ 합격자 였다는 기사였다.

김두철 서울대 입시 전체수석, 1966그는 서울공대 전자공학과를 지망했는데, 거의 만 명이 넘는 지원자중의 수석 합격자였던 것이다. 국민학교 시절, 김두철은 ‘항상 일등, 우등생’이었는데, 아마도 경기중,고에 진학하면서 1등은 별로 못했던 듯, 우등을 못해본 수석합격이라고 기사는 강조를 했다. 본인이 ‘점수벌레’를 싫어 한다고 했지만, ‘의외로 수석’이 되었다고.. 참 이렇게 부러운 친구가 있을까? 그러니까, 별로 ‘노력을 안 했어도’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 아닌가?

이런 심리는 아마도 ‘일류 심리’에서 비롯 되었을 듯 하다. ‘거의 항상 top’으로 일관을 했으니, 크게 자랑스러운 것도 없다는 뜻일까? 평소의 실력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 조금은 거슬리기도 하지만, 어찌하랴.. 그렇게 태어났으니. 이 기사로 나는 그가 나와 같이 ‘납북자’ 가정, 편모슬하의 외아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우리 집과 다르게 그의 어머니는 이화여대 교수(金蓮玉, 당시 41세)였다. 그의 아버님은 서울 공대교수로 재직 중 육이오 동란 시 납북이 되셨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과 참 비슷한 환경이었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그런 것을 전혀 모르고 지냈다. 게다가 기사는 김두철이 절대로 ‘공부벌레’가 아니라는 것으로, ‘산 사나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의 장기는 rock climbing이라고.. 기자조차 부러운 듯이 “힘껏 공부하고 맘껏 노는 화려한 대학생활”을 예상했는데, 과연 그는 어떻게 대학생활을 했을까? 그는 지금 어떤 ‘업적’으로 이름을 ‘크게’ 남겼을까 궁금하다.

 

¶  뼈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차가운 안개 비가 하루 종일 나리는 2월, 중순이 완전히 접히고 하순으로 접어드는 일요일, 무슨 꿈에서 깨어나는 듯이 놀란다. 어느새 2월의 삼분의 2가 없어졌나? Groundhog Day, Lincoln’s Birthday, Valentine’s Day.. 모두 지나갔다. 내일은 President’s Day,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화요일은 Legio (Mariae) Tuesday인 동시에 Mardi Gras, 그러니까 그 다음날 수요일이 중요한 날인 것이다. Ash Wednesday(재의 수요일)인 것이다.

작년에 비해서 올해는 새해부터 거의 예외 없이 high note로 지내왔다. 그러니까, euphoric하다고나 할까? 이 나이에 ‘신난다’는 표현은 어불성설이고, 아마도 ‘잔잔히 들뜨는’ 그런 기분이라고나 할까? 지난 10년간 항상 나는 depression속에서 살았다고 ‘나의 역사’를 만들었지만 지난 한 달여를 보면서 아마도 나는 서서히 그런 길었던 ‘동면’의 기간에서 나오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몇 가지의 ‘단순한 계기나, 이유’로 그렇게 어두운 터널에서 나왔다고는 절대 생각 치 않는다. 그 이상의 무엇이 작용을 했을 것이다. 이것은 나뿐이 아니고 나의 반려자도 같이 느끼는 듯 하니까, 아마도 맞을 듯 하다. 그 이상의 것은 과연 무얼까?

ash-wednesdayAsh Wednesday, 재의 수요일, 2월 22일은 2012년 부활절 (Easter) 전까지 교회력으로 40일간 계속되는 Lent (사순절)의 시작이다. 예수님의 Passion (수난)을 거치며 부활의 절정에 이르는 기독교신앙의 절정기에 속하는 정말 중요한 40일이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개신교는 어떨지 몰라도, 천주교는 아주 ‘겸손, 절제, 회개’로 이 시기를 보내게 되는데, 이제는 나도 조금 익숙해져서 미리 생각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재의 수요일 바로 전날은 Mardi Gras (Fat Tuesday)는 ‘고난의 40일’ 전에 마음껏 ‘세속의 맛’을 느끼자는 축제의 절정인데, 이곳에서는 New Orleans (Louisiana주) 의 Mardi Gras 축제가 유명하다. 재의 수요일 미사에서는 작년의 Palm Sunday에 썼던 palm tree leaves(종려나무 잎)을 태운 것을 기름이나 물에 섞어서 신부님께서 신자들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려주신다. 대부분 저절로 없어질 때까지 이마에 그것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 재는 아마도 이런 뜻이 있을 것이다. 창세기 3장 19절(Genesis 3:19)의 “Remember that thou art dust, and to dust thou shalt return“.. 그러니까 사람은 먼지에서 왔다가 먼지로 돌아 간다는 뜻이 아닐까?

이날로 시작되는 사순절, 40일을 올해는 어떻게 보낼까? 회개와 절제와 고행.. 말은 간단하지만 실제로 하려면 복잡해진다. 회개는 물론 고백성사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할 수 있지만, 다른 것들은 개개인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어느 해에는 좋아하는 커피를 완전히 끊기도 했고, ‘절대로’ TV를 안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의 요점은 역시 왜 그렇게 하는가를 묵상하며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역시 성경을 중심으로 한 ‘영적인 공부’가 중요할 것이다. 또한 나는 레지오 단원이라서 이것 외에도 하려면 할 것이 너무도 많다. 얼마나 의지력을 가지고 실행을 하는 가 그것이 문제일 것이다.

 

연세대학의 추억(1): 졸업 앨범

 

연고전 Classic

연고전 Classic

 

관악산 바라보며 무악에 둘려 유유히 굽이치는
한강을 안고 푸르고 맑은 정기 하늘까지 뻗치는
연세 숲에 우뚝 솟은 학문의 전당. 아~ 우리들 불멸의
우리들 영원한 진리의 궁전이다 자유의 봉화대다.
다함 없는 진리의 샘 여기서 솟고 불멸의 자유의 불
여기서 탄다.

우리들은 자랑에 찬 연세 아들딸. 슬기 덕성
억센 몸과 의지로 열성 진실 몸과 맘을 기울여
연세에 맡기어진 하늘의 사명 승리와 영광으로
길이 다한다. 찬란한 우리 이상 밝은 누~릴 이룬다.

 

연세대 졸업 앨범, 1971년 2월 졸업
연세대 졸업 앨범, 1971년 2월 졸업

너무 너무 오랜 만에 연세대학교 졸업 앨범을 보며 교가 연세의 노래를 듣는다. 얼마나 오랜 만인지는 정확히 그 햇수를 모른다. 다만 1971년 2월 졸업 후에 처음으로 보는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다. 물론 그 오랜 세월 동안 조금은 보았을 것이지만 느낌 상 그렇다는 것이다. 그나마 지난 10여 년 동안 가끔이라도 즐겨 본 졸업 앨범은 거의 국민학교, 중고등학교의 것이었고 이상하게도 대학 졸업 앨범에는 손이 가지를 않았다.

어떻게 나는 이렇게 대학시절의 추억과 그 이전의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 이렇게도 다를까? 그 이유에 대해서 먼저 생각나는 것은, 역시 그 나이의 추억은 그 이전의 추억과 근본적으로 깊이가 다를 것이라는 사실이다. 심하게 말하면 조금은 유치하지만 순진한 추억과 더 성숙하지만 조금은 덜 순진했던 시절의 추억, 그런 차이가 아닐까? 그래서 조금은 더 복잡해진 대학시절의 추억을 글로 간단히 표현하기도 그 이전에 비해서 더 힘들었고, 조금이나마 정신적인 준비도 필요하다고 느껴서 이렇게 계속 미루고 있었다.

이전의 졸업앨범에 비해서 대학의 것이 아주 생소하게 느껴지는 제일 큰 이유는 대부분 ‘생소한’ 모습들이라 그렇지 않을까? 앨범의 주인공들은 같은 학과가 아니면 사실상 전혀 모르는 ‘동문’ 인 것이다. 같은 학과라도 재학생과 복학생(민바리 vs. 군바리 라고 불렀다) 으로 갈라지고 거기다 나이차이까지 있다. 물론 여학생들은 조금 사정이 다르겠지만.. 그래서 대학 앨범을 자주 안보게 되는지 모르겠다. 특히 학교 내에서 활동을 안 하거나 하면 다른 과의 동문들은 이름도 모르고 졸업하게 된다. 입학 동기들의 얼굴은 교양학부의 과정에서 조금 익히고 나머지들은 채플 시간(연세대는 개신교 재단의 학교), 그리고 과외활동을 통해서 보게 된다.

후회스럽지만 나는 연세대학 시절, 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활동을 하나도 한 적이 없었다. 예를 들면, 학생회나 과외 서클(그때는 동아리라는 말조차 없었다) 같은 것들이다. 한때 전통 있는 교내 사진(동호회) 서클인 연영회 의 가입 모임에 가기도 했지만, 그 이후 전혀 나가지 못했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일초도 주저 없이’ 그런 것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하고 싶은 심정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대부분 대학시절의 ‘멋과 보람’을 학교 밖에서 찾으려 했고, 또한 결과적으로 ‘대부분’ 그렇게 되었다. 결혼 후에 ‘아내’ 연숙이 학교 내에서 많은 활동을 했음을 알게 되었고, 그런 교내 활동의 멋과 보람 같은 것도 충분히 실감 하게 되기도 했지만, 재학 당시 나는 그런 교내 활동은 그저 고리타분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이번에 졸업앨범을 다시 보면서 그 오랜 세월 잊었거나 몰랐던 사실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비록 늦은 감도 없지 않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신문영 연세대 졸업사진, 1971년
신문영 연세대 졸업사진, 1971년

신문영, 정말 우연히 이 재동국민학교 동창을 이번 앨범에서 보게 되었다. 일부러 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어쩌다 보게 된 것이다. 신문영은 나의 지나간 재동국민학교의 추억 blog에서 이미 언급이 되었던 바 있었고, 그 후에 또 우연히 googling으로 다시 이 친구이름이 연세춘추(연세대 교내신문)와 연관됨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재학 당시 연세춘추 교내 신문에 관련된 과외 활동을 했던 모양이다. 이런 일들은 대부분 문과대학생들이 하는데 어떻게 상과대학 생인 그가 그곳에 관련에 되었을까? 연대 입학 후에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이 사실 이 교내 신문인 연세춘추였다. 내용도 그렇지만, 외모가 완전히 ‘현대식’이었다. 가로쓰기와 한글전용을 고수한 것이다. 아마도 최현배 님의 영향을 받아서 그랬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남과 조금 다르고, 앞서가는 연세대의 일반적인 모습이 좋았다. 연세대 다닐 당시 (아마도 도서관이 아니면, 학생회관에서) 잠깐 신문영의 얼굴과 완전히 닮은 사람을 보았었는데, 이제야 100% 그의 존재가 이 졸업앨범을 통해서 확인이 된 것이다. 상경대학의 상학과를 다녔고, 연세춘추에 관련된 사진에도 그의 얼굴이 보였다. 1971년 졸업이었으니까 이 친구도 일년 재수를 했거나 휴학 같은 것을 했던 모양이다. 이제 유일한 의문은, 어떤 중,고등학교를 다녔나 하는 것인데, 그것을 알기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연세춘추 1970년 12월 7일자 headline

연세춘추 1970년 12월 7일자 headline

 

박종섭 연세대 졸업 사진, 1971년
박종섭 연세대 졸업 사진, 1971년

꽤 많은 중앙고 동창도 이곳에서 처음이나, 다시 보게 되었다. 대부분 재수 입학을 해서 보통보다 1년이 늦게 졸업을 하게 되는 듯 싶었다. 나처럼 1년을 휴학을 한 경우도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재수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그 중에 경영학과의 이수열과 박종섭이 있다. 이수열은 나의 중앙고 3학년에 대한 blog에 이미 회고한 바가 있다. 졸업식 날 이수열과 같이 사진도 찍어서 사진도 남아있다. 이수열은 중앙고 3학년 때, 이과(理科)로 분반이 되어서 대입준비를 했는데, 어떻게 상경대로 가게 되었는지 모른다. 박종섭은 중앙고 3학년 때 우리 반이었다. 그러니까 역시 이과였는데, 어떻게 이 친구도 상경계열로 가게 되었는지? 특히 박종섭은 국민학교 때부터 나와 같은 학교를 다녔다. 재동국민학교, 중앙 중학교, 중앙 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그것도 졸업동기.. 이 정도면 참 우연치고는 대단하지 않을까? 그것에 비해서 우리는 한번도 친구가 된 적이 없었다. 그것도 참 대단한 인연이다. 박종섭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크게 성공한 동창, 동문이 되었다. 나중에 현대 반도체(Hynix) 의 사장이 되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났는지.. 확실치 않다. 그 이외에도 상학과 권세용, 정외과 구만환, 지질학과 윤병훈 등이 졸업앨범에서 반갑게 보이는데, 이들 역시 얼굴과 이름만 아는 정도다. 기계과의 김영철.. 중앙고 3학년 ‘반창’인데, 사실 연세대 재학 시 그를 본 기억이 거의 나지를 않는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 친구도 세속적으로 표현해서 ‘대성공’을 한 친구로, 동국제강의 사장으로 일을 하고 있다. 중앙고 1년 후배들, 내가 1년을 휴학을 한 바람에 ‘동급생’이 된 친구들이다. 전기과 박창희, 김태일, 기계과 양규식 등… 박창희는 나의 죽마고우로써 후배라는 생각보다는 ‘불알친구’ 라는 생각뿐이다. 김태일, 재학 시 같은 클럽도 하며 친하게 지냈다. 양규식, 재동국민학교도 1년 후배인 활발한 친구, 역시 재학 시 학생회에서 맹활약을 했다. 학훈단(ROTC, 일명 바보티씨)을 거친 모범적인 청년이었다. 무슨 인연인지 오래 전 시카고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아마도 1976년 쯤이 아니었을까? 나중에 들으니 LA로 이사를 갔고, 지금도 거기서 ‘매일’ 동창들과 골프를 즐긴다고..

김상우(옛 김시영), 앨범 사진, 1971년
김상우(옛 김시영), 앨범 사진, 1971년

상경대 상학과 김상우.. 전혀 모르는 이름이다. 그런데 사진을 보고 금새 알아 보았다. 이름이 바뀐 것이다. 그는 중앙중학교를 나와 같이 다닌 김시영 이었다. 어떻게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몰라도 얼굴이 안 바뀌었다. 중앙중학교 3학년 때 나의 다른 친구 이경증과 단짝이던 친구였다. 고등학교를 다른 곳으로 가서 바람과 함께 사라진 친구였다. 그런데 이렇게 졸업앨범에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연세대 시절 사실 그를 캠퍼스에서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김시영이 김상우로 이름이 바뀌었던 친구다. 왜 이름이 바뀌었을까?

건축과의 장학근씨.. 64학번이라고 하니까 나의 2년 정도 연배인 셈이다. 어느 고등학교를 다녔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곳 아틀란타에 왔을 때, 이곳 연세대 동문회의 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의 부인 장(피)영자 동문도 66학번 연세대 기정대 출신으로 나와 사실 입학 동기인 셈이었다. 학번이 거의 비슷한 연대 선배가 이곳에 같이 있다는 것이 반가워서 조금 가까이 지내려고 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이 선배의 얼굴을 이번에 졸업앨범 건축과에서 보게 된 것이다. 이 장 선배는 이곳의 ‘유지’ 격에 속해서 신문에도 자주 나오고, 한인사회의 이곳 저곳에 많이 관여가 된 듯 싶었다. 그러니까, 결혼식, 장례식 같은 데서 꼭 이 장 선배를 만날 확률이 높은 것이다. 오래 전, 이곳의 다른 ‘유지’ 격이었던 김예순씨 (치과의사)의 장례식에서는 ‘울면서’ 조사를 하는 것도 보았고, 다른 연세대 동문 (박만용씨)의 장례식에서도 그를 볼 수 있었다. 전공(건축과)도 충실히 살려서 이곳 주택에 관련된 연방정부의 기관에서 일하고 있다고 들었다.

기계과 민옥기.. 이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나의 졸업앨범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 Ohio State 다닐 때 그를 잠깐 보았다. 역시 같은 기계과에 있었다. 학교 기숙사 버스에서 가끔 보기도 하고 같은 공대라서 얼굴이 익었고, 연세대 피크닉에서도 보았다. 그것이 전부다. 동문이라서 웬만하면 조금 친해질 수도 있으련만.. 전혀 mutual chemistry가 없었을까.. 느낌이 그랬다. 나쁘게 말하면 ‘거만한 표정’ 일 수도 있고, 좋게 말하면, 그저 사람을 피하는 듯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 당시 나와 연세대 졸업동기라는 사실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같은 기계과 출신 나의 친구 김호룡에게 물으니 ‘검정고시 파‘ 라고 기억을 하고 있었고, 그것이 전부였다. 아마도 연세대 재학 당시에도 그렇게 ‘행동’을 했었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김호룡이 간암으로 세상을 떴을 때, 뒤 늦게 그 소식을 확인하려고 이 사람에게 연락을 한번 해 본적이 있었다. 둘 다 연세대 기계과 교수단에 있어서 그리 한 것인데, 나를 전혀 기억조차 못하고 있었다. 나의 그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들어맞았다는 씁쓸한 기분이었다. 어떤 사람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계속)

 

 

연세대학교 전기공학과 졸업앨범, 1971년

 

Mary Hopkin – Those Were The Days – 1968

그 당시 크게 유행하던 British Oldie, Beatles 의 Paul McCartney가 제작한 이곡은 역시 비틀즈의 Apple Record label 판매로  Mary Hopkin 의 debut곡이 되었고, 영국에서 1위 미국에서 2위까지 올랐다. 그 당시를 생각케하는 추억의 노래가 되었다.

Mary Hopkin – Goodbye – 1969

다음 해, 역시 비틀즈의 Paul McCartney 곡으로 Mary Hopkin의 두 번째 hit song이 되었다. 그 후에 다른 hit song 도 있었으나 우리들에게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1950년 생인 그녀는 그 당시를 풍미하던 세계적 fashion model이었던 영국의 TwiggyBeatles에게 소개 했다고 한다.

 

 

용기 형!

김용기, 형.. 형은 내가 서울 재동국민학교 6학년, 형이 경기고 2학년 때, 그러니까 1959년 봄, 우리 집에서 처음 만났다. 참 오래 전이었다. 6학년 학기가 시작된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용기형을 집으로 데려 온 것이고, 그날부터 나는 용기형과 함께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용기형은 그날부터 매일 우리 집에 와서 나의 학교 공부를 도와주는 나의 방문 가정교사가 된 셈이다. 그런 단순한 인연으로 만났던 용기형은 사실 그 후로 우리 가족에게도 거의 친척이상으로 가끔씩 왕래를 하며 지냈다. 우리들이 용기형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1966년 내가 연세대에 입학한 해였다. 그 후로는 완전히 소식이 끊어져서 우리 집에는 거의 ‘전설적’ 인물로 인상이 남게 되었다.

 그 당시 고등학교 2학년생으로 가정교사를 한다는 것은 그리 흔치 않았다. 대부분 방문, 입주 가정교사들은 대학생들의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용기형은 불과 고등학교 2학년 생이었지만, 우선 내가 국민학생이기 때문에 큰 무리가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대한민국의 제일 명문고교인 경기고등학교엘 다니고 있었기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용기형에게도 일을 해야 하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형의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고학생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제사정이 그렇게 이상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왜 어머님이 그렇게까지 나에게 가정교사를 붙여 주셨는지는, 사실 그 당시 나의 학교 성적이 중하위에서 맴돌고 있었던 것이 제일 큰 이유였다. 5학년까지는 그런대로 나를 지켜보다가 6학년이 되고, 중학교 입시를 치러야 할 운명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로는 점점 더 심해졌지만, 사실은 그때부터 이미 ‘입시지옥’이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한창 놀기에 바쁜 그 시절이었지만 어찌 우리들이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할까? 하지만 어머님이 나의 공부를 돌보아 주기에는 너무나 바쁘시고, 누나도 사실 공부에 큰 관심이 없어서 우리 집은 나에게 공부를 분위기를 주질 못했다. 그러니까, 내가 혼자 열심히 한다고 해도, 주위의 ‘놀고 싶은’ 유혹에서 항상 벗어나질 못했고, 그것이 ‘시험위주’의 성적제도에서 항상 중 하위에 머물게 한 것이다. 용기형이 매일 방문 가정교사로 오면서 부터, 바로 옆에 ‘어린 선생님’이 붙어 있으니, 밖으로 뛰어나가 놀고 싶은 유혹에서 비교적 쉽게 벗어날 수 있었고, 곧바로 ‘공부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 ‘노력을 한 만큼 결과가 온다’ 라는 간단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공부한 만큼 성적이 오르는 것이었다. 거의 매일, 하루에 몇 시간은 꼭 용기형과 같이 앉아서 공부를 하니 결과가 안 보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쟁의 흔적이 조금씩 사라지고 나라가 조금씩 안정되던 그 당시부터 과외공부라는 것이 서서히 유행하기 시작했지만, 조직적이고 상업적인 학원 같은 것은 거의 없던 시절.. 하지만 나같이 개인적인 과외공부보다는 과외선생님 댁에 단체로 모여서 공부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예외적으로 행운아였을지도 모른다. 방과 후에 골목에서 뛰어 놀던 즐거움은 조금 없어졌지만, 용기형과 둘이서 그날 학교공부를 복습하며, 다음날 공부를 예습하는 것은 점점 즐거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노력한 결과가 거의 그 다음날 시험에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6학년, 특히 우리 ‘박양신 사단’ 1반은 가히 시험 전쟁터의 현장을 방불케 해서, 다른 반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하루 ‘종일’ 시험의 연속이었는데, 아침 첫 시간부터 시험을 보곤 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 시험에 의해서 곧 좌석의 배치가 바뀌는, 가히 시험 지옥이었던 것인데, 이것은 우리 반 담임 ‘박양신’ 선생님만의 방식이었고 다른 반에서는 이런 방식을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니까 박양신 선생님의 ‘수험의 신’, 에 가까운 선생님이었고, 그렇게 일년 내내 우리는 단련을 받았다.

그 당시 이미 대한민국의 학교들은 대강 일류,이류, 삼류 등으로 ‘일본식’ 등급 (지금에야 깨달은 것이지만)이 형성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대학교에서는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고려대 등이고, 고등학교는 경기고,경기여고, 서울고, 이화여고,숙명여고, 경복고,용산고 같이 거의 서울에 있는 학교들이고, 지방에서도 경북, 경남, 대전, 광주일고 등과 같은 일류들도 있었다. 어떻게 이 같은 학교들이 일류로 평가가 되었는지는 대강 짐작이 간다. 고교는 일류대학에 입학하는 정도를 보면 될 것이고, 대학교는 취직시험에 합격하는 것을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국민학교도 분명히 이런 등급이 있었을 것이다. 일류 중 고교에 합격하는 것을 보면 된다. 하지만 국민학교는 아직까지 별로 등급이 형성되지 않았다. 예외는 덕수 국민학교와 수송, 혜화국민학교였다. 어떻게 이 학교가 그 시기에 이미 일류로 되었는지 과정은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지리적인 여건으로 보아서 ‘부자 집’ 자녀들이 많이 이곳을 다니고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돈을 따라서 ‘좋은 선생님들, 수험의 신’ 들이 그곳에서 가르쳤을 것이다. 좌우지간 이들이 일류 중 고교에 입학하는 것을 보면 가히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런 배경에서 내가 다니던 재동국민학교는 어땠는가? 일류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바로 밑을 맴돌고 있었고, 수험의 신 박양신 선생님이 우리 반을 맡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일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박양신 선생님이 재동국민학교를 1류로 바꾸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내가 졸업하고 몇 년 뒤에는 정말로 일류로 바뀌게 되었다.

 나는 학기 초에 성적이 딱 중간 밑을 맴돌았는데, 용기형과 같이 공부하면서 서서히 오르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거의 10등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반에서 자리를 분단 별로 앉게 되는데 이것이 완전히 성적에 의한 배치였다. 1분단은 거의 10등까지 앉고, 다음의 20등까지는 2분단에 앉는 그런 ‘잔인’한 배치였다. 게다가 1분은 딱 가운데 앉혀서 남들이 ‘우러러’ 보게 만들어 놓았다. 이것의 잠재적인 심리적 효과를 누가 알겠는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자리의 변동이 그다지 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는데, 시험에 의한 성적이 그렇게 자주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용기형은 나와 ‘궁합’ 이 잘 맞아서, 제일 큰 목적이었던 나의 학교 성적이 오르고 해서, 우리 집에서는 아주 후한 대접을 받게 되었고,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형을 아주 친척같이 따뜻하게 대하곤 했다. 용기형은 절대로 얌전한 학생은 아니었다. 깡패와 같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 정도의 ‘깡’은 가진 학생이었다. 용기형이 학교에서 공부를 얼마나 잘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닌 것이 ‘대’ 경기고 학생이니까 그것 만으로 문제가 없었던 것이고, 이때 내가 배운 것은 공부뿐이 아니고, 사실은 조그만 교훈, 모든 일의 결과는 운이나 배경만큼, 노력에도 많이 좌우된다는 간단한 진리였고, 이것은 나중에 내가 사는데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같이 공부하면서 아직도 잊지 못하는 기억에는, ‘선거권, 피선거권 논쟁‘, 그것이 있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복습하며 이런 한자로 된 어려운 정치용어로 용기형과 싸운 것이다. 나는 분명히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말했는데, 용기형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논쟁이었는데, 누가 보아도 이것은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을 잘못 기억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논쟁’ 자체가 재미 있어서 내 고집대로 밀어 붙였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용기형의 ‘깡’을 몰랐기에 계속 ‘똥’ 고집을 부렸다. 결국에는 용기형이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러니까 자기를 무시 본다는 것이었고, 나에게 따귀를 계속 올려 붙였다. 그 당시는 학교에서도 잘못하면 따귀를 맞는 것은 흔했지만, 가정교사에게 따귀를 맞는 것은 절대적으로 이상한 노릇이었다. 내가 자기의 ‘고객, 학생’이라는 사실을 잠깐 잊었던 것 같았다. 나도 기가 막혔지만 이것을 집에다 ‘일러’ 바칠 수도 없었다. 그랬으면 그날로 용기형과의 공부는 끝장이 났을 것이고, 사실 관계도 끊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그냥 조용히 잊고 지나서 말썽은 없었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잊지 못하는 상처로 남게 되었다. 세월이 지났어도 용기형은 미안하다는 말을 한번도 하지 않아서 더욱 아쉬운 기억이다.

 나의 성적은 계속 1분단의 ‘제일그룹’ 을 유지했지만, 사실 나의 성적은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거의 1~2등까지도 하는가 하면 갑자기 10위로 밀려나는 등 그런 식이었다. 이런 상태로 중학입시를 치르게 되었는데, 용기형은 경복이나 서울 중학교에 응시하라고 했지만 담임 선생님은 아주 불안한 표정이었다. 나도 사실 ‘모험’을 하는 것이 싫었다. 안전한 것이 좋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가까운 곳에 있는 사립 중앙중학교에서 무시험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그리로 가버리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정원의 반 정도를 졸업성적만으로 뽑던 제도가 있었다. 시험 지옥에서 쉽게 벗어난 것만 해도 나는 너무 기뻤다. 하지만 역시 용기형이나, 어머니는 두고두고 불만이었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내가 속했던 1분단의 다른 녀석들이 대거로 경기, 서울,경복중학교에 합격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 자신은 후회가 없었다. 재수를 할 가능성보다는 조금은 안전한 것이 편했던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중학교 입시에 재수생은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용기형과 가회동 집에서, 중학교 1학년때 1960년 쯤
용기형과 가회동 집에서, 중학교 1학년때 1960년 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용기형은 가끔 놀러 왔고 고궁 같은 곳에도 같이 가족과 놀러 가기도 했다. 중학교에서 나의 성적이 좋아서 용기형도 안심하는 듯 했다. 어떨 때는 어머니가 용기형에게 나를 데리고 영화를 보게도 했는데, 그런 시간들이 나는 너무도 즐거웠다. 나에게 형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용기형과 대한극장에서 ‘백사의 결별‘ 이라는 요란한 제목의 미국 영화를 보았는데, 로버트 밋첨(Robert Mitchum)과 데보라 카(Deborah Kerr)주연의 2차 대전 영화였는데,그 것을 보면서 내가 하도 형에게 질문을 해서 조용 하라고 핀잔을 받기도 했다. 한번은 용기형을 따라서 경기고교 강당에서 프랑스의 영화,”장 가방(Jean Gavin)” 주연의 ‘잔발잔(Jean Valjean)’을 같이 보았는데, 그 당시 경기고등학교는 정말 부자여서 없는 것이 없었고, 심지어 극장수준의 영사기까지 갖추고, 가끔 영화, 그것도 외화를 학생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용기형은 내가 중학교 2학년(1961년) 때, 경기고를 졸업하고 대학엘 갔는데, 예상을 뒤엎고 서울대가 아닌 고려대엘 갔다. 왜냐하면 경기고생은 거의 서울대를 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더니 그 이듬해 연세대 정외과로 편입을 했는데, 사실 편입이었는지 아니면 새로 신입생으로 입학을 했는지 확실치 않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어렴풋이 형이 대입준비를 하는 과정을 옆에서 보게 되어서, 두고두고 나중에 내가 대입 준비할 때 도움이 되었다. 그 당시의 입시 문화는 거의 100% 일본식이었을 것이다. 입시준비 잡지도 있었는데, 용기형 시절에는 ‘향학‘ 이란 국내 유일의 입시준비 잡지가 있어서 나도 옆에서 훔쳐보기도 했다. 그때 느낀 것이 대학입시라는 것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 정말 ‘전쟁’이었다. 몇 년 뒤에 그 잡지는 없어지고, 새로 ‘진학‘이라는 제목으로 내가 고3때 나왔다.

 그러다가 내가 중앙중학교 3학년(1962년)이 되고, 고교 입시가 다가 왔을 때, 어머니는 다시 용기형을 부르셨다. 나의 학교 성적이 문제가 아니라, 이번에야 말로 ‘일류’ 고등학교로 가기를 원하신 것이다. 나는 그럴 마음이 없었지만, 다시 같이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3년 전과는 아주 달랐다. 용기형은 이미 대학생(연세대 정외과)이 되었고, 나도 이미 꼬마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전과 같은 열기는 사라진 것 같고 공부에 불이 붙지를 않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안전’하게 본교로 진학하기로 결정을 해 버렸다. 이런 나의 결정은 후에도 별로 후회를 하지 않았다. 이미 나는 사학의 명문 중앙에 정이 흠뻑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도 용기형과 의 왕래는 가끔이지만 끊어지지 않았다. 용기형은 언제나 자신의 포부를 숨기지 않았다. 외교관의 꿈인 프랑스 파리에 가는 것이었다. 그 당시만해도 외교 계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입김이 강했다. 꿈이 있고 계속 좇으면 언젠가는 이루어 진다고 믿었다. 우리는 모두 믿었다.언젠가는 유명한 국제적인 외교관이 될 것이라고 (요새로 말하면 반기문 같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잠시나마 용기형이 우리 집에 입주해서 나를 가르치던 시기가 있었다. 기억에 아주 짧았던 기간이었지만, 나와 같이 자면서 공부한다는 것은 참, 흥미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도 용기형은 ‘가르치는’ 데는 이미 김이 빠져있었다. 별로 열기가 없었던 것이다. 학교공부보다는 인생공부를 많이 한 셈이었다. 나는 몰랐지만 그 당시 용기형은 연세대에서 데모를 주동하는 ‘정치 학생’으로 변하고 있었다.

 내가 연세대에 입학을 하면서 이제는 학교에서 만나겠구나 생각을 했지만 용기형은 그곳에서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 용기형은 우리 집에 연락을 하지 않았다. 어머님은 그 이후 항상 ‘얘, 혹시 용기가 죽은 것 아닐까?’ 하시곤 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하셨는지는 이유를 모른다. 그리고 세월은 아주 길게도 흘렀고, 1999년 초쯤에 인터넷의 Yahoo! 같은 search engine과 학교 동창회의 website등을 통해서 별로 기대를 하지 않고 용기형을 찾아 보게 되었다. 운이 좋게 연세대 동창회에서 용기형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고, 전호번호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개인정보’에 대한 보안이 심하지 않아서 가능했던 것이다. 곧바로 어머님께서 그 전화번호로 용기형과 이야기까지 하셨다. 전화번호는 한국산업정보센터 라는 곳이고 용기형은 그곳에서 고문으로 일을 하셨다. 나와는 곧 바로 email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사실, 나도 어머님과 같이 용기형이 ‘죽지나’ 않았을까 걱정을 하던 참에 소식을 들은 것은 너무도 반가운 일이고, 옛날의 추억들이 밀물처럼 나를 덮쳤다.

 email에 있는 사연은 간략하지만 그것으로 대강 용기형의 ‘일생’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60년대 중반에 데모주동으로 몰려서, 군대로 ‘끌려’ 갔고, 복학 후에는 그런대로 ‘조용히’ 직장생활을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프랑스, 파리의 외교관이 되는 꿈은 접은 듯 했다. 용기형 말씀이, 그런 꿈들을 이루지 못해서 연락을 계속 미루었다고, 참 순진한 말을 곁들였다. 고시공부, 동아일보 입사, 국세청 장기 근무, 대경기계 창업, 한국산업정보센터 고문 등으로 이어지고 결혼을 해서 딸, 아들을 두었는데, 따님은 결혼을 해서 미국 LA에 살고, 작은 아들은 그 당시 (1999년)에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용기형의 부인과도 잠깐 전화로 인사를 드렸는데, 까마득한 옛날에 ‘가르쳤던 제자’라고 알고 계셨다.

 하지만 세월의 횡포는 그렇게 그립던 생각을 곱게 보지 않았다. 너무나 긴 세월이 흐른 것이다.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러 온다고 약속을 한 모양이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나에게도 다시 연락을 주지 않았다. 우리가 용기형을 생각하고 안부를 걱정한 것과 같은 정도의 생각을 우리는 용기형으로부터 느낄 기회조차 없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세월의 장난일 것이고, 누구를 탓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답게 추억으로 남겨놓을 것이 있으니 큰 문제는 없다. 연락이 된 후 10여 년이 또 흘렀으니, 용기형도 나이가 거의 70세로 육박을 하지 않았을까? 부디 건강한 후년을 즐기는 용기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다.

 

가회동의 추억

가회동.. 이 이름만 들어도 나는 너무나 진한 추억의 감정에 눌려버린다.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의 대부분을 가회동이 만들어 주었다. 나의 개인 역사에서, 유치하지만 순진하고 희망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찾던 시절..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조국의 현실도 가식 없는 눈으로 지켜 보았던 시절들이었다.

서울 재동국민학교, 1959년

서울 재동국민학교, 1959년: 나는 정면의 본관 건물의 바로 뒷쪽에서 살았다

 

나는 1956년 가을부터 1963년 봄까지 가회동, 재동국민학교 뒷문 쪽에서 살았다. 학년으로 치면 재동국민학교 4학년 2학기부터 중앙고등학교 1학년 초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그곳은 재동과 가회동의 경계선 쯤이었을 것이다. 재동과 가회동은 남북 신작로로 연결이 되어있어서 그 길을 따라 올라가면 지금의 가회동 ‘한옥 촌’이라는 곳이 나오고, 내려 가게 되면 재동으로 이어지면서 창덕여학교를 만나고 다시 가로지르는 더 큰 길을 만난다. 그 당시에는 그 길의 이름들이 없었고, 그저 모두 ‘행길, 한길, 신작로’ 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아마도 율곡로 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자신은 없다.

 우리 집의 본적이 종로구 재동 80번지라서 나는 그곳에 산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본적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랐지만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짐작을 하긴 했다. 그 전에 우리는 원서동에서 살았는데 사실 그곳이 내가 기억하는 제일 오래된 동네다. 아버지가 육이오 동란 초에 납북이 되시고 누나, 어머니와 정말 험난한 전후 시절을 원서동에서 시작을 한 것이다. 이북(원산) 여자였던 어머니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강인한 생활력을 발휘하셔서 원서동에 아주 작은 집까지도 사셨는데, 그것이 도시계획으로 철거를 당하게 되어서 가회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결국 후에 원서동의 “우리 집”은 정말로 철거되고 그 위에는 대로가 생겨서 작았지만 추억이 아롱졌던 집은, 그전까지 원서동을 따라 흐르던 개천이 전부 자취를 감추고 덩그러니 길로 변해버렸다.

놀러온 원서동 친구들 안명성, 김천일과 1962년 2월
놀러온 원서동 친구들 안명성, 김천일과 1962년 2월

원서동 죽마고우들:  새로 이사를 오니까 원서동에서 잔뼈가 같이 굵었던 코흘리개 친구들과 떨어지게 되었지만 생각보다 새로운 곳에 금새 적응이 되었다. 나는 일반적으로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동네친구들을 사귀는 데는 그런 성격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원서동의 친구들은 시간만 나면 ‘장거리 원정’을 오듯이 놀러 오곤 했는데, 그 당시 원서동의 ‘죽마고우’ 친구들; 유지호, 손용현, 박창희, 안명성, 김동만, 최승철, 김천일.. 그 외에도 참 많았다. 우리가 이사온 집은 골목 깊숙이 위치한 아담한 2층 양옥이었는데, 말이 양옥이지 사실은 전통적인 한옥이 아니라는 뜻이고, 지금 생각해 보면 거의 일본식 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 정도로 ‘기둥들이 약하게’ 보이던 집이었다. 2층집과 1층집이 같이 직각으로 붙어 있어서 두 집에 살기에는 아주 좋았고, 화단이 있는 그런대로 커다란(그 당시 나의 눈에는) 마당까지 있었다. 우리는 1층의 방 두 개에 부엌이 딸린 ‘사랑채’에 살게 되었다.

 

원서동 죽마고우 최승철과, 가회동 1960
원서동 죽마고우 최승철과, 가회동 1960

재동학교:집에서는 재동국민학교 4층 건물의 뒷면 거대한 모습으로 보였고, 집 골목이 재동학교 강당을 끼고 있었다.. 그 정도로 가까웠다. 그러니까, 이사오면서 제일 신났던 것은 학교 가는 시간이 5분도 걸리지 않았던 사실이다. 전에 살던 원서동에서 등교할 때는 그때 어린 나이의 걸음으로 30분은 넘어 걸렸을 것에 비교하면 이건 정말 ‘천국’에 사는 기분이었다. 나는 꿈도 못 꿨지만, 그 동네에 사는 어떤 ‘잘살던’ 아이들은 숫제 점심시간에 집에서 식모들에 의해서 학교 교실까지 배달된 따끈따끈한 도시락을 즐길 정도였다.

 

함경도 출신 주인집 염씨 가족:  이사온 집의 주인은 함경도 출신, 그러니까 아마도 육이오 동란 때 피난을 온 집일지도 모르는 나이가 있으신 부모님과 시집간 딸, 고등학생 딸,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있는 지극히 정상적인 가족이었다. 주인 어르신의 성함은 아직도 기억을 한다. 염영혁 선생님, 그 당시는 ‘거의’ 할아버지라고 생각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환갑 정도를 갓 넘기셨을 정도였지 않았을까? 외 아드님은 훤칠한 키의 호남형, 염철호 형이었다. 중앙대를 졸업했다고 들었고, 아이들과 잘 놀아줄 수 있는 그런 쾌활한 미혼 청년이었는데, 대학시절 농구선수였다고 했다. 염철호 형은 나중에 결국은 농구 계로 투신을 해서 방송국에서 농구경기 해설자로 활약을 함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 인터넷으로 형의 소식을 아주 짧게 들었는데, 나이도 많이 드시고, 부인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는, 정말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해 주는 소식이었다.
작은 따님, 염경자 누나는 그 당시 거의 졸업반의 여고생이었는데 공부도 잘하고, 아주 얼굴이 예뻤다. 얼마 뒤에 이화여대를 갔는데, 그 당시 최고로 경쟁이 높았던 영문과에 지망을 했는데, 애석하게 제2지망이었던 사회사업학과에 합격을 했다. 하지만 영어를 아주 잘했고, 한때는 어떤 미군을 집으로 데려와서 영어강습을 받기도 했는데, 영어실력과 뛰어난 미모로 역시 나중에, 그 당시 최고 선망의 대상이었던 항공사 스튜어디스가 되었다.
큰 따님은 그 당시 이미 갓난 딸 둘 (주경아주동원)이 있었는데 남편은 그 당시 육군 대위였다.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놀러 오면 갑자기 집이 떠들썩 해지곤 했다. 나는 특히 그 대위 아저씨를 좋아했는데, 아주 서글서글하고 친절한 ‘군인 장교’ 아저씨였기 때문이다. 이 주인집은 함경도에서 오셨는데, 친척들이 근처에 계셨고, 그 중에는 나와 재동국민학교 동창인 ‘황석기’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그 당시 조금 이상했던 것은 이 주인집이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하는 사실이다. 아무도 바깥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가지고 있던 돈이 상당히 많았던 것일까?

중앙중학교 뒷산 멀리에 보이는 말바위
중앙중학교 뒷산 멀리에 보이는 말바위

 삼청공원 말바위: 이 집이 있던 골목이 그때부터 나의 천국이 되었고, 꿈 많던 소년시절의 주옥 같은 많은 추억이 이곳에서 형성이 되어 이제까지도 내 추억의 바탕이 되었다. 시대적으로 보아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사일구를 거쳐 오일육으로 박정희 대통령까지 이어졌고,학교 학년으로는 재동국민학교 4학년으로부터 중앙고등학교 1학년 초까지였다. 거리적으로 이 학교들은 정말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조금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삼청공원북악산이 있었는데, 이곳들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사시사철 자주 놀러 가던 곳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말바위‘라는 곳은 북악산 중턱에 위치한 곳으로 우리들이 좋아하던 곳이었고, 우리들이 발견한 아주 작았던 비밀의 바위, ‘늑대바위‘도 우리들이 전쟁놀이 할 때마다 찾던 꿈의 거처였다..

가회동 성당: 가회동 큰 길에 나가면 재동학교 주변으로 많은 만화가게들이 즐비했고 그 곳들은 우리들의 꿈의 보금자리 역할을 했다. 삼청동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가회동 파출소가 있었고, 그 옆에는 가회동 성당이 있었다. 나는 지금 천주교 신자가 되었지만 그 어린 시절에 내가 본 성당의 인상은 그리 편한 곳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문 입구부터 ‘무섭게 보이는 외국인 성인’들 석고상들의 모습이 으스스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동네마다 많이 있던 개신교 ‘예배당’은 친근한 인상이었고,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알았는데, 천주교는 도대체 ‘무엇’을 믿는지 확실치 않았다. 그 정도로 대부분 사람들이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가회동 부자들: 그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그때부터 으리으리하게 우람한 기둥을 자랑하는 깨끗하고 커다란 한옥들이 즐비하게 나타난다. 중앙 중고를 다닐 때면 그곳을 지나서 가곤 했는데, 얼마 전에 ‘겨울연가’를 보면서 다시 한번 그곳 들을 보게 되어서 감개가 무량했다. 그 당시 가회동에는 알려진 부자들도 살았는데, 그 중에 화신 백화점 주인이었던 ‘친일파’ 박흥식씨의 집도 그 중에 하나였는데 정말 집이 으리으리하게 컸다. 우리가 살던 집의 뒤에도 아주 커다란 집이 있었는데, 아직도 거기 누가 살았는지 확실치 않다. 가회동에서 재동 쪽으로 내려가면 물론 재동국민학교가 있었고, 조금 더 내려가면 공립 여자학교, 창덕 여중고가 있었다. 이곳은 여자학교라서 보통 때는 못 들어갔지만 무슨 행사가 있으면 그 강당엔 들어갈 수 있었다. 기억나는 것이 사일구 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 전 겨울에 동네 사람들을 이곳 강당에 불러놓고 영화를 보여준 일이었다. 나는 국민학생이었지만 따라 갔는데, 가서 보니 영화는 영화인데, 선전용 기록영화를 보여주었다. 드리마 같은 것은 아니었어도 나는 너무나 재미있게 본 기억이다.

박달근:  그 당시 동네 골목은 우리 나이또래들의 천국이었다. 나이에 거의 상관없이 어울릴 수 있던 곳.. 우리 골목도 그랬다. 코흘리개 꼬마부터 중학생들 까지 모두 어울렸다. 많은 애 들이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이름을 다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이름까지 기억이 나는 애들.. 골목 바로 건너 집에 살던 박달근, 이름이 독특해서 기억을 한다. 나보다 한두 살 밑이었고, 공부도 잘했던 애, 나중에 일류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가슴이 좀 아픈 추억을 남긴 애였다. 나와 보통 애들이 하던 싸움을 했는데, 이 녀석은 나에게 아직도 가슴에 남는 욕을 했다. 그 녀석 왈, “우리 아버지가 (너같이) 아버지 없는 애와는 놀지 말랬어!” 라는 말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나에게는 참으로 슬픈 욕이었다. 그 말로 사실 그 애와는 헤어지게 된 셈이다. 나도 그 녀석과 그 아버지가 보기 싫었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 나와 같이 아버지가 없는 집이 꽤 많았지만 그 골목에는 하나도 없었다. 모두 다 ‘정상적’인 가정이었던 것이다.

이원영:  우리 집에서 두 집 아래에 이원영 이라는 나보다 아마도 한두 살 정도 아래인 애가 있었다. 그 아버지가 어느 중학교 수학선생인가 그랬는데, 정말로 고약한 성격의 남자였다. 항상 아이들을 보면 험악한 얼굴, 짜증난 얼굴이어서 속으로 저런 아빠라면 그렇게 부럽지 않겠다고 생각도 했다. 이원영의 엄마는 정반대로 항상 친절하게 웃는 안경을 낀 지적으로 생긴 다소곳한 엄마였는데.. 나중에 원영이는 경복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왜 그렇게 생각이 나는가 생각을 해 보니, 이유가 있었다. 어떤 명절날 원영이의 친척들이 놀러 온 모양인데, 그 중에 국민학교 나이의 소녀가 있었는데, 그 애가 너무나 예뻐서 그 나이에 처음으로 ‘연정’ 같은 것을 느낀 것이다. 그때 느낀 것이 아하.. 이것이 어른들이 말하는 ‘연애감정’이란 것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그 ‘예쁜 얼굴’의 그 애를 생각하면 생생하게 나의 감정이 기억된다. 이원영은 헤어진 것이 너무나 오래 되어서 별로 그의 생각을 못하고 살았지만, 그는 어떻게 ‘인생’을 살았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최씨 삼형제:  그 아래 한집건너 어느 날, 갑자기 아들 삼형제 집이 이사를 왔다. 최씨 삼형제 집.. “최희천, 최희춘, 최희승“.. 어떻게 내가 그들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는지 나도 놀란다. 그것은 어린 나이의 추억들이 그 정도로 뚜렷하다는 뜻이 아닐까? 그리고 이렇게 오래 살면서도 그 추억들을 소중하게 기억에서 놓치지 싫었다는 뜻일 것이다. 제일 큰 형이 최희천, 나보다 한두 살 밑, 그 아래가 최희춘, 막내 최희승은 한참 아래인 꼬마였다. 그들에게는 누나가 있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한두 살 위였고, 우리또래 아이들이 그녀를 ‘선망’의 눈으로 쳐다 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 집의 ‘주인’으로 이사를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주인이 바뀌고 그 집은 그 많은 식구들이 방하나 문간방으로 옮겼는데, 아마도 사업이 실패를 했을 것이다. 그 아버지는 ‘집 장사’ 라고 들었다. 요새말로 하면 ‘부동산 업자’ 정도가 아니었을까?

큰형 최희천은 과묵하고, 성실한 타입이었고, 그 동생 최희춘은 장난꾸러기였지만 그래서 성실한 애였다. 특히 나를 많이 따랐다. 동네의 애들이 모이게 되면 이들이 항상 끼어서 나를 도와주곤 했다. 특히 생각나는 것은 이 형제들을 포함한 동네 꼬마 일당을 데리고 삼청공원 위에 있는 ‘말바위’에 놀러 갔던 추억이었다. 나는 이 꼬마 ‘소대’를 데리고 흡사 소대장이라도 된 듯이 그들과 이곳 저곳을 놀러 다녔다. 그 중에 말바위를 포함한 북악산 일대를 누빈 추억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아찔하다. 왜냐하면 무슨 사고라도 나면 내가 ‘소대장’이기 때문에 몽땅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시절 그런 것에 크게 관심을 가질 집은 거의 없었다. 사는 것이 더 급한 세상에 귀찮은 꼬마들을 집에서 끌어내어서 놀아 준 것이 더 고마웠을 것이니까..

말바위의 종이비행기:  말바위는 북악산 중턱에 있는 완전히 바위로 된 언덕이고 그곳에서는 서울시내가 거의 다 보였다. 정남쪽으로 남산이 나지막하게 보이고, 그 뒤로 한강, 관악산이 멀리 보이던 우리에게는 거의 환상적인 곳이었다. 아찔한 낭떠러지가 있어서 위험한 곳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그 나이 우리에게는 더 재미를 주었다. 한번은 못쓰게 된 책을 한 권 들고 아이들을 몰고 가서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날렸는데, 골목에서 날리다가 이곳, 거의 완벽에 가까운 ‘비행장’에서 날렸을 때 아이들의 환성을 잊지 못한다. 한번 비행기를 날리면 떨어지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낭떠러지가 있어서 더운 기류를 타게 되면 공중에 오래 머물곤 했다. 그때 한 종이비행기가 완전히 뜨거운 기류를 타고 하늘 위로 올랐다. 그것은 전혀 떨어지지 않고 계속 오르며 북쪽으로 날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그것을 보며 탄성을 지르기 시작했는데.. 결국 그 비행기는 안 보일 정도로 높이 떠서 북으로 사라졌다. 그때 그것을 본 꼬마들.. 아마도 잊지 못할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을 것이다.

 

박달근의 집 앞에서 꼬마친구와, 1962년
박달근의 집 앞에서 꼬마친구와, 1962년

동네 야구:  이 골목에서 나는 야구를 배우게 되었다. 국민학교 때는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은 주로 “찐뽕” 이란 것과, “왔다리 갔다리” 란 것을 했고, 그 때만해도 야구를 하려면 글로브와 ‘진짜 야구공’ 같은 것이 비싸서 아무나 못 하던 시절이었지만, 찐뽕이란 것은 거의 야구와 비슷하지만 모두 맨손으로 받는 것이라 그것을 많이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의 야구’ 가 바로 찐뽕이었다. 이것은 배트도 필요 없이 주먹이나 손바닥으로 공을 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느 날 어머니가 미8군 암시장에서 ‘미제’ 야구 배트와 공을 사오셨는데, 배트는 진짜 “Louisville”이란 상표가 보이는 것으로 신나게 했지만, 공은 조금 이상하게 생겼다. 보통의 공보다 큰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소프트볼 이었다. 소프트볼이라고 하지만 공 자체는 더 단단했고, 배트로 쳐도 그다지 빨리도, 멀리도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안전’한 야구 용이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들이 그것을 좋아할 리가 없었고, 진짜 야구공을 구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일본에서 쓰이던 ‘중경식‘ 야구공이란 것을 써서 ‘진짜 야구’를 하게 된 것이다.

 야구를 할 때 문제는 동네 골목이었다. 그 좁은 골목에서 야구를 하게 되면 언젠가는 ‘사고’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이 사고는 대부분 골목에 있는 집들의 유리창이 깨지는 것들이었고, 가끔가다 공이 사람을 치는 일도 있었다. 또한 가끔이지만 그 골목에 차라도 지나가면 게임은 완전히 올 스톱이 되곤 했다. 그래도 우리들은 악다구니처럼 지치지 않고 즐겼다. 그러다가 바로 코 옆에 있는 우리의 자랑스런 모교 재동국민학교로 야구장소를 옮기게 되었다. 이것은 완전한 야구의 천국이었다. 비록 야구장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널찍한 공간이 그 당시 어디에 또 있었겠는가? 문제는 그곳을 아무 때난 쓸 수 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는데, 학교의 모든 일정이 끝나게 되면 문을 완전히 닫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 학생들이 학교를 다 떠나기 전에나 운동장을 쓸 수 있었고, 일요일은 전혀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나마 우리는 그곳에서 야구 연습을 열심히 하고, 실력도 상당히 발전하였다. 그러면서 다른 팀(동네)들과 시합을 하기 시작했고, 어떨 때는 다른 동네까지 ‘원정’ 경기까지 하게 되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곳은 삼청 국민학교까지 원정을 간 것이었는데, 그 당시 조건은 진 팀이 이긴 팀에게 야구공을 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 자리에서 줄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빚처럼 남게 되어서 꼭 갚아야 했다.

 그 당시에 야구는 상당히 인기가 있었는데, 주로 고교야구가 꽃이었고, 실업야구도 못지않게 인기가 있었다. 내가 다니던 중앙중고등학교는 야구부가 상당히 활동적이었고, 대회에서 가끔 우승권까지 가기도 했다. 그 당시 유명했던 투수 김옥수, Short Stop 하갑득 선배들이 고등학교에서 활동을 했는데, 오후에 학교가 끝나서 운동장을 거쳐서 걸어나올 때면 꼭 그들이 연습을 했는데, 나는 빠지지 않고 그것을 구경하곤 했다. 동네야구만 하다가 그들을 보면 정말 ‘신의 경지’로 까지 보였다. 김옥수 투수의 던진 공을 옆에서 보면 정말 총알같이 느껴지고, 하갑득 선배가 육탄 돌격대처럼 쓰러지며 공을 잡을 때면 그것도 역시 ‘야구의 신’처럼 보였다. 꿈에서도 내가 투수가 되어서 총알 같은 직구와, 기묘한 커브 볼을 던지는 꾸곤 했다. 그 당시 입학시험에는 체력장 같은 시험이 끼어있었는데, 그 중에는 공 던지기가 있어서 이렇게 야구를 했던 것이 나중에 고등학교 시험을 치를 때 큰 도움도 되었는데, 그 당시 나의 공 던지는 실력은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히기 멀리 나가곤 했다. 그만큼 던지는 어깨가 발달이 되었던 것이다.

 오자룡:  이 동네야구를 회상하면서 꼭 생각나는 것, 우리 앞집에 살던 ‘오자룡‘ 이란 아이.. 삼국지의 상산 조자룡의 이름을 따라 지었다고 했나… 나보다 아마 4~5살 쯤 어렸을, 아주 꼬마였다. 야구는 그 나이에 비해서 잘 한 편이었지만 역시 나이가 어려서 실수가 많았다. 어떨 때는 1루에 주자로 나갔다가 홈으로 뛰어 들어오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 팀에 꼭 끼게 된 이유는 그 녀석의 아버지 (그 당신에는 아빠란 말을 쓰지 못하고 꼭 아버지란 말을 써야 했는데, 아빠란 말은 그 후에나 쓰이기 시작했다.) 때문이었다. 비록 대머리 였지만 비교적 젊은 아저씨였는데, 그 아저씨가 야구광이었다. 그래서 자기 아들 ‘오자룡’을 그렇게 참가시킨 것이었다. 우리들은 그것이 너무나도 힘이 되었고, 자랑스러웠다. 다른 아버지들은 전혀 관심도 없었는데, 그 오자룡의 아버지는 시간만 나면 옆에 와서 코치까지 해 주시곤 했던 것이다. 나는 물론 아버지가 없어서 꿈도 못 꾸었지만,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의 진가도 느낄 수 있게 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재동국민학교 운동장이 일요일이라 문을 닫았지만 그 아저씨가 학교 ‘소사’ 아저씨를 구어 삶아서 우리들이 정식 게임을 할 수 있게도 해 주셨고, 게임의 심판까지도 자청하셔서 보아 주셨다. 얼마나 즐거운 광경이고, 추억이 되었던지.. 오자룡, 그 녀석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Oh, Carol by Neil Sedaka

1959년 닐 세다카의 오 캐롤, 이곡은 우리에게는 1960년에 알려지고 따라부르던 노래가 되었다. 하도 따라 불러서, 뜻도 모르고 영어 가사를 모두 외울 정도였다. 가사를 엉터리로 들어서, I’m but a fool이 아앰 빠다빵으로, You hurt me는 유어 할머니로 둔갑 하기도 해서 아주 재미있는 추억이 되었다.

 

미국의 시대: 나는 가회동 시절, 정치적으로는 ‘우리들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 삼일오 부정선거, 학생들이 피를 흘렸던 사일구, 장면 내각 (윤보선 대통령)의 짧았던 1년, 그리고 오일육 군사 쿠데타 (혁명)으로 이어지던 비교적 숨가쁜 변화 속에서 살았다. 비록 육이오 동란은 이미 끝나서 전쟁의 잔혹함은 간신히 비켜 지나게 되었지만, 우리 집처럼 아버지가 전쟁으로 없어진 집도 많았고, 길거리에는 전쟁고아, 거지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는 사실 육이오 전쟁 후의 정말 살기 힘겨운 시절이었다. 철저한 반일, 반공 교육 속에서 위와 아래가 모조리 적국으로 둘러싸인 시절, 그저 믿을 곳이라고는 ‘정의의 십자군’ 미군과 그들의 나라 미국, 그리고 조그만 섬 으로 쫓겨난 장개석 총통의 국민당 정부, 대만 밖에 없었다. 거의 모든 것이 미국의 원조에 의해서 유지되던 그 시절, 내가 다니던 재동국민학교도 전쟁 때 반 이상이 불타버려서, 미군들이 와서 새로 지어주고, 고쳐주었다.

이승만과 멘데레스: 이승만 대통령 재임 시에 나는 국민학생이었는데, 경무대(청와대의 전 이름)와 비교적 가까워서 그랬는지, 가끔 새벽같이 단체로 대통령을 마중하러 나가기도 했다. 제일 기억에 나는 것이 1958년, 5학년 때, 터키의 멘데레스 수상이 왔을 때 환영을 나간 것과, 터키를 방문하고 도착해서 일행이 경무대로 돌아온 때였다. 졸린 눈을 비비며 깜깜한 새벽에 동원되어 나가서 한참 기다리다가, 몇 초 만에 쏜살같이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서 태극기를 흔들면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그때 모습의 사진이 경향신문 조간에 나왔는데, 기적적으로 내가 거기에 찍혔다. 그때의 신문을 다시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조금 묘한 사실은 그때의 그 두 나라의 원수 급, 이승만 대통령과 터키의 멘데레스 수상, 비슷한 때에 대중 혁명으로 실각을 한, 조금은 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Soviet's Sputnik-1, Oct 1957
사상 첫 인공위성 소련의 스프트닉 Oct. 1957

소련의 스프트닉:  가회동으로 처음 이사를 가자마자 전세계적인 큰 뉴스가 터졌다. 그때가 1957년 가을이었다. 공산당 소련이 역사상 최초로 ‘인공위성’, 그러니까 사람이 만든 위성을 쏘아 올린 것이다. 그것이 그 유명한 스프트닉, Sputnik 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사실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 이었다. 비록 지구에서 제일 가까운 우주 궤도였지만 그곳은 분명히 ‘새카만’ 우주 공간이었던 것이고 그곳에 농구공 만한 ‘사람이 만든’ 위성을 쏘아서 지구를 돌게 만든 것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미국도 못하던 쾌거였고, 이때 소련이 이룬 폭발적인 ‘선전효과’는 정말 대단했다. 그들은 분명히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과시하고자 했을 것이니까.. 상대적으로 미국이 당한 ‘수모’도 대단했다. 하지만, 이때의 그런 수치가 미국을 13년 뒤에 소련을 제치고 달에 첫 우주인을 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가회동은 바로 아래쪽에 붙어있던 재동과 더불어, 전에 살던 원서동에 비해서 깨끗한 동네에 속했다. 큰 차이는 원서동에는 그때까지도 초가집들이 즐비했었던 것에 비해 이곳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서울에 웬 초가집? 하지만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하지만 조금 나은 가회동, 재동의 행길(맞는 철자는 한길, 부를 때는 행길이라고 불렀는데, 골목을 제외한 길을 그 당시는 그렇게 불렀고, 종로와 같은 큰길을 제외하고는 길 이름이 전혀 없었다. ) 조차도 지금에 비하면 아마도 ‘난민 촌’을 연상할 정도였을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 수많은 ‘잡상인’들이 거리를 완전히 덮고 지나가는 사람을 상대했다. 특히 국민학교 앞에서 코흘리개들을 손님으로 하는 가게는 정말 다양하고, 조밀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던 곳은 역시 만화가게, 빙수,국화빵 가게 같은 것이었는데, 텔레비전이 없었던 그 시절에 그곳은 우리들 꿈의 전당이었다. 재동학교 앞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렇게 좋던 싫던 나의 어린 시절 6년의 추억을 만들어 준 가회동 시절.. 어찌 잊으랴.. 그때 알고 지냈던 코흘리개 친구들.. 다들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을까 궁금해진다.

 

 

휴~ 덥다, 더워..

올 여름 들어서 첫, ‘강더위’가 시작되었다. ‘강추위’와 비슷한 말 ‘강더위’란 말은 들어본 기억이 없지만 할 수 없이 쓰게 되었다. ‘무더위’ 보다 더 더운 말을 찾기 쉽지 않았다. 지난번 나의 blog에서 요새는 날씨에 대한 뉴스가 조금 주춤 해 졌다고 쓰더라니.. 그새를 못 참고 이렇게 되었다. 지난 4월 달의 날씨에 관한 메가 급 뉴스는 비록 아닐 지라도 이런 찜통더위는 조금 신경이 쓰인다. 바람이 전혀 없이 지독한 습도가 가세한 더위에서 사실 ‘도망’ 갈 곳이 없다. 그늘도 소용이 없으니까.. 유일한 방법은 ‘에너지’를 써서 더위를 ‘뽑아내어야’ 하는 수 밖에 없다. 나는 이렇게 에너지를 써서라도 편하게 살아야 하는 현대문명이 별로 맘에 들지 않지만.. 어찌하랴.. 인간은 이렇게 자꾸만 ‘약해’져 가는 것을..

오래 전 고국에서 살 때, 도망갈 수 없는 더위를 겪었던 기억이 별로 없었다. 그런대로 ‘즐길만한’ 더위였다. 딱 한번 예외는 있었다. 1972년 여름..서울 세운아파트..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잠을 못 잤다. 밤에 기온이 거의 떨어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나중에 ‘열대야’ 라고 부르게 된 것을 알았지만 그 당시는 처음 겪는 현상이라 적절한 ‘용어’도 없었던 것이다. 확실히 무언가 기후의 거대한 변화의 흐름이 있긴 한 것이다.

그 당시 서울에는 아주 고급 사무실과 건물이 아니면 ‘에어컨’ 이란 것이 없었다. 하물며 일반 주택에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전기선풍기만 있으면 대 만족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보다 훨씬 윤택하게 살았던 일본도 별 차이가 없었다. 그들도 역시 전기선풍기로 견딜 만 했다. 그러다가 이곳 미국에 와 보니 이건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실내 여름이 우리나라 겨울 실외보다 더 추운 듯 느껴졌으니까.. 일단 그것에 적응되고 나니까.. 이제는 전으로 돌아가기가 참 힘들어졌다. 그것이 인간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아닌 게 아니라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한다. 분명히 지구는 더워지는 것 같고, 인간은 자꾸 그것을 ‘강제’로 식힌 곳에서 ‘안주’하려고 하고.. 이것도 ‘진화’과정을 통해서 ‘인간 진화가 아닌 퇴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조금은 근거가 약한 걱정 같지만.. 하지만 우선 걱정을 놓자.. 길어야 2개월만 견디면 되니까..

Dan Brown's the Da Vinci Code 2003
Dan Brown’s the Da Vinci Code 2003

THE DA VINCI CODE, 올 여름 들어서 나도 그 ‘흔한’ summer reading을 생각하게 되었다. 왜 여름만 되면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 이것도 혹시 ‘책 장사’들이 꾸며낸 ‘음모’일까? 좌우지간 여름 전부터 요란하게 이번 여름에 읽어야 할 책들이 요란하게 등장한다. 하기야 영화도 마찬가지다. 이때 ‘수입’을 잡아야 타산이 맞게 되어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수시로 책을 읽고 있어서 여름의 독서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하지만 올해는 조금 이색적으로 이것 한 권만은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3년에 나온 책, Dan Brown의 “The Da Vinci Code. 거의 8년이 지나서 읽게 되었다. 이것은 그 후에 Tom Hanks주연의 영화까지 나온 것이다. 이 책은 내가 산 것이 아니고 큰 딸 새로니가 책이 처음 나올 당시에 hard-cover로 산 것이고 작은 딸 나라니까지 읽은 후에 나에게 넘어온 것을 아직껏 읽지를 못한 것이다. 사실은 첫 2페이지를 읽고, 그만 손을 놓았다. 너무나 사람들이 이야기를 많이 해서 사실 흥미가 조금 떨어진 탓도 있었고.. 역시 흥미 위주로 천주교회, 로마 바티칸을 무슨 ‘비밀과 음모의 집단’처럼 매도한 느낌도 받아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저자의 이러한 식의 사실처럼 느끼게 하려는 ‘소설’의 테크닉이 워낙 정교해서 재미가 없을 수가 없을 것이다. 특히 천주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좋은 ‘비방의 재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계속 읽기를 미루는 나를 아이들은 재미있는 듯이 놀려댔다. 한마디로 내가 게으르다는 식이었다. 나중에 아이들이 영화를 보더니 그런 이야기가 없어졌는데, 이유는 영화가 그 소설을 다 망쳐 놓았다는 말투였다. 이것은 이해가 간다. 소설의 그 깊은 뉴앙스(nuance) 가 영화에서 다시 고스란히 재현되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애들은 한결같이 Tom Hanks가 그 주인공인 Robert Langdon의 역할에 잘 맞지 않는다고 우겨댔다. 나는 책도, 영화도 안 보았으니.. 할말이 없었지만 그런대로 짐작은 하겠다. 어떻게 보면 Indiana Jones같은 역할인데.. 그것은 Harrison Ford가 더 적격이 아닐까? 문제는 Ford는 이제 너무 나이가 들었다는 ‘슬픈’ 사실.. 어찌하랴..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문제는 또다시 ‘재미없으면’ 아주 이 책에서 손을 놓을까 하는 것이었다. 다른 ‘더 재미있는’ 잡스러운 일도 많은데 이 책을 끝까지 읽으려면 무언가 ‘동기 제공’ 이 중요한 것이다. 재미 없을 때 손을 놓아버리면 이제는 다시 읽게 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해결책이 생각보다 쉽게 찾아졌다. RbT, Reading by Typing.. 내가 만든 조잡한 말이다. “맹송맹송”하게 눈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다. Computer에서 typing을 하면서 읽는 방식이다. 이런 idea는 사실 성당에서 자주 보는 성서필사에서 찾았다. 성서를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펜으로 종이에다 쓰면서 읽는 것이다. 눈으로만 읽는 것보다 훨씬 집중이 되고 기억에도 더 남는다고 한다.

그런데 요새 손으로 장문의 글을 종이에 쓰는 것은 거의 ‘고문’에 가깝지 않은가?세상이 그렇게 변하고 있다.

그리고 RbT 에는 다른 이점도 있다. 끝이 나면 .’나만의 책’이 하나 남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을 무슨 연구재료로 쓰거나 할 때 인용하기도 너무 쉽고, 나만의 ‘근사한’ 책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 나의 예감은 맞았다. 그냥 눈으로 읽을 때 비해서 속도는 떨어졌지만, 중단되는 ‘사고’는 없었고, 앞으로 없을 듯 하다. 한달 만에 거의 책의 반 정도를 읽게 되었다. 여기에 힘을 얻어 다른 ‘끝까지 읽기 고약한’ 책들도 함께 읽기 시작했다. 역시 속도는 늦어도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계속 읽게 되니까..

현재까지 읽은 이 책, The Da Vinci Code는 비록 가톨릭 신자의 입장에서 염려스럽긴 하지만 소설로써는 최상급이었다. 우선 ‘재미’가 있는 것이다. 읽으며 무궁무진한 상상의 나래를 펼 여지와, 절대로 책 읽기를 중단하지 못하게 하는 절묘한 수법을 쓴 저자를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그 ‘사실처럼 느끼게 한 거짓말들’를 어떻게 이 저자는 생각해 내었을까? 정말 할 말을 잊는다. 이 책을 읽을 때 성가신 것 중의 하나는 ‘불어’ 사용이었다. 배경이 프랑스에 많이 있기 때문이고 여자 주인공인 Sophie Neveu가 프랑스 사람이라서 더욱 그런데 문제는 나는 불어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쓰는 것도 힘들고, 발음에서는 완전히 걸린다. 이것은 거의 나의 complex가 되었다. 우선 제대로 발음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지독히 불편하고 창피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라도 한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재동학교 졸업 앨범, 내가 1954년4월부터 1960년 2월까지 다니던 정든 서울 재동국민학교의 졸업 앨범이 드디어 ‘해체,스캔’이 되어 computer에서 편하게 볼 수 있는 PDF format으로 바뀌어서 ISSUU server에 upload가 되었다. 일반적인 browser의 pdf-reader plugin으로 보는 것 보다 훨씬 느낌이 빠르고, 실제로 ‘책’을 읽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과연 몇 명이나 자기의 얼굴을 이곳에서 보게 될지는 미지수이지만 그래도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한다.

 

우미관, 문화극장, 아데네 극장..

우미관, 문화극장, 아데네 극장.. 1950년대와 60년대를 걸쳐서 내가 즐겨 다녔던 극장들의 이름이다. 나와 비슷한 나이또래로 서울에서 살았으면 분명히 이 이름들을 기억할 것이다. 정확하게 이 극장들의 역사는 잘 모른다. 그저 나의 기억에 항상 그곳에 있었던 것 뿐이다. 더불어 이 극장들은 소위 말하는 일류 개봉관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입장료가 비교적 싼 편이었다. 종로2가 화신 백화점 바른쪽 옆 골목에 있었던 우미관, 낙원동 북쪽, 덕성여대 바로 앞, 천도교회관 바로 옆에 있었던 문화극장, 퇴계로 대한극장 길 건너 편 골목에 있었던 아데네 극장.. 그 많은 극장 중에서도 이 세 극장이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당시 그곳에서 많은, 아직까지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는 주옥 같은 영화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미관과 아데네 극장은 거의 외국영화만 상영을 했고, 문화극장은 거의 국산영화만 상영을 했다. 다만 문화극장은 아주 가끔 연극도 곁들여 보여주었다. 그리고 우미관은 외화를 좋아하는 일반 대중, 문화극장은 한국영화를 좋아하는 일반인 대상이었는데, 아데네 극장만은 조금 특이하게 중고등 학생들이 주 관객이었다. 그러니까 아데네 극장만은 항상 학생입장이 가능하게 검열이 된 영화만 보여준 셈이다. 그 당시 사회, 경제수준으로 이런 중고등학생을 배려한 사업은 지금 생각해도 참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다른 극장은 대부분 ‘학생 입장 불가’ 라는 것으로 ‘성인용’ 영화를 구별하였다. 성인용 영화라 해도 요새 말하는 XXX 급을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고 그저 조금이라도 사회기준으로 보아서 ‘낯을 붉히게’하는 것이 ‘성인용’ 영화였다.

이 세 극장 중에서 내가 제일 많이 가고 좋아했던 곳이 바로 우미관이었다. 이곳이 그 당시 유행하던 미국, 그러니까 Hollywood급의 ‘멋있던’ 영화만 보여주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일류 개봉관이었던 단성사, 대한극장, 중앙극장 같은 곳에서 이미 보여준 것들이 이곳에서 다시 상영되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처음 본 영화가 국민학교 5학년 때 쯤(1958년 쯤) 본”타잔과 잃어버린 탐험대” 라는 영화였다. 그 당시는 서부영화와 타잔 영화가 유행을 할 때였다. 그 많은 것 중에 이것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 영화를 보러 갈 때의 과정이 뚜렷이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그때는 영화가 들어오면 제일 손쉽게 알 수 있는 광고매체가 영화벽보였다. 가게의 벽이나 길거리의 벽에 붙여놓은 poster같은 것이었다. 그때 “타잔과 잃어버린.. 어쩌구” 하는 영화벽보를 보고 그것을 보고 싶었는데.. “타잔과 잃어버린..어쩌구” 하는 제목 중에 “어쩌구” 하는 대목이 한자로 쓰여있었다. 그것이 바로 “탐험대”였는데 그것을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에 와서 극장을 가겠다고 돈을 달라면서 영화 이름을 “타잔과 잃어버린 코끼리“라고 둘러 댔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은 ‘촌스러운’ 영화 제목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보기는 보았다. 그때부터 나는 미국 영화의 마력과 위력에 빨려 들어갔다. 대부분 국산영화는 우리 같은 어린이들이 보아도 유치하기 이를 데 없던 그런 시절이었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비록 개봉관보다는 입장료가 쌌겠지만 우리 같은 코흘리개 국민학생에게는 그것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도 더 싸게 표를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었는데, 바로 가게에 붙여놓은 영화포스터에 따라 나오는 무료입장권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포스터를 붙여놓은 가게에서 아주 헐값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 잔꾀를 동원해서 참 많이 영화를 보았다. TV가 없던 그 당시 만화와 더불어 우리에게 살 맛을 준 것이 이 미국영화들이었던 것이다. 오디 머피, 게리 쿠퍼, 버트 란카스타, 아란 랏드 주연‘베라크루즈’, ‘쉐인’ 같은 서부명화들, 로버트 밋첨 주연의 ‘상과 하’ 같은 2차 대전 전쟁영화들, 그리고 프랑크 시나트라, 케리 그란트 주연의 ‘자랑과 정열’ 같은 유럽풍의 사극영화들..

그때 본 영화들을 미국에 오면서 쥐 잡듯이 찾아서 TV로 다시 보거나, video tape등으로 다시 볼 수 있었는데 그 덕분에 우리 집 식구들, 특히 아이들이 그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보면서 자라게 되었다. 거의 50년대의 영화들이었으니, 아이들에게는 완전히 ‘활동사진’ 류의 화석 같은 느낌이었겠지만 미국의 그 당시를 공부할 수 있게 해준 ‘역사적’인 가치가 없지도 않았다.

아데네 극장 개관 광고, 1961

1961년 12월 초 개관 된 아데네 극장의 광고, 그 당시에는 미국영화 이외에도 가끔 여기에 보이는 유럽쪽의 ‘명화’들도 상영 되곤 했다. 광고를 자세히 보면, 화폐의 단위가 ‘원’이 아니고 ‘환’.. 1962년 화폐개혁 때 ‘원’으로 바뀌었다.

퇴계로에 있었던 아데네 극장은 주로 중,고등학교 다닐 때 많이 갔다. 그곳에서는 주로 외국영화를 많이 했지만 가끔 국내영화도 보여 주곤 했다. 절대로 학교 선생님에게 잡히지 않는 곳이라는 장점이 있어서 아주 어깨를 쭉~~펴고 영화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곳에서 많이 본 영화들은 주로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사극영화들이었다. 아깝게도 그 영화들의 이름이 생각 나지 않는다. 이것들과 대조적인 곳이 바로 낙원동에 있었던 문화극장이었다. 이곳은 정말 ‘서민’의 냄새가 풀풀 나던 곳이었다. 100% 국내 영화만 상영하였고, 가끔 연극도 보여주었다. 나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연극이란 것을 보게 되었다. 주로 국민학교 때 많이 갔는데, 내가 살던 가회동에서 정말 가까운 곳이어서 더욱 편했다.

이곳에는 참 기억에 많이 남는 추억들이 있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그 당시 전쟁 후 가난에 찌들었던 국민들을 즐겁게 해 주었던 코메디 듀오가 있었는데 바로 “뚱뚱이와 홀쭉이“였다. 뚱뚱이는 “양훈”, 홀쭉이는 “양석천” 두 분이었는데 둘 다 우연히 양씨였지만 한자가 같지를 않았다. 이 두 사람이 콤비를 이루어 영화를 많이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 내가 문화극장에서 본 것이 “천지유정“이란 홍콩 현지에서 찍은 코메디 영화였다. 물론 흑백영화였다. 그것을 그때 집에서 밥을 해주며 같이 살던 ‘필동 아줌마’와 누나, 셋이서 아침에 가서 보았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니 또 보고 싶어서 나만 혼자 남아서 또 보게 되었다. 그렇게 보기 시작해서 하루 종일을 보게 되었다. 같은 영화를 계속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더욱 그랬다. 결국은 저녁 무렵에 필동아줌마가 극장으로 들어 와서 나를 데리고 나갔다. 몇 번을 계속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을 정도로 하루 종일 본 것이다. 이것이 두고 두고 우리 집의 얘기 거리가 되었다. 덕분에 그 영화는 아직도 눈에 선할 정도로 뚜렷이 머리에 남아있다. 아직도 나는 이 세 극장에 고마움을 느낀다. 그 가난하고 순진하던 시절 이곳들은 사실 나에게 거의 마음의 등대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Legio Mariae, Power of Google

레지오 교본
레지오 교본

드디어 결정의 순간이 왔다. 어제 연숙에게 돌아오는 주부터 아틀란타 한인성당의 레지오 마리애의 회합에 참석을 하겠다고 “통고”를 하였다. 내가 나의 등을 “칼”로 떠 민 것이다. 이번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간단히 때가 온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거의 3년이 넘게 뜸을 들인 결과인가.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그 동안 협조단원이었고 거기서 더 적극적으로 정식단원이 될 마음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상태로 3년이 지났다. 그 동안은 연숙과 같이 거의 매일 밤 묵주기도를 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아주 간단한 사실이지만 결과는 나도 예상을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묵주기도의 묘미를 1%나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나는 믿게 되었고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협조단원과 정식단원은 아주 다를 것이다. 우선 매주 한번씩 회합에 나가야 하니까. 우선은 그것이 제일 큰 변화일 것이다. 내가 가입하는 쁘레시디움은 현재 모두 자매님들 뿐이다. 아마도 다른 곳도 별로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선 내가 망설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역시 핑계였다. 자매님들만 있으면 어떻고 형제님들만 있으면 어떨까, 그것이 사실 무슨 문제인가? 3개월의 대기기간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끝나면 정식으로 단원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모양이다. 한번 해 보자.. 못 할 것이 무엇이냐.

 

Googling의 위력… 오늘은 아주 우연히 한국에 있는 먼 친척의 이름으로 googling을 해 보았다. 이건 전혀 우연이었다. 나의 먼 친척 동생(1살차), 유명근을 넣었다.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나왔다. 동명이인도 많았지만 “서울농대” 까지 넣으니까 완전히 찾아 내었다. 이것이 Google의 위력이다. 인터넷에 노출된 것은 거의 모두 그 monster server에 다 index가 된 것이다. 나의 어머님 쪽의 가계를 찾는 것은 지금 거의 불가능하다. 모두 이북 원산에 사실 것이니까. 아주 일부만 남쪽으로 내려왔다. 아버님 쪽의 족보를 찾는 것과 병행을 해서 어머님 쪽도 알아보려는 것이다.

다행히 어머님의 사촌 언니일가가 서울에 사셨다. 혈육이 거의 없어서 그런대로 서로 가까이 다닌 것이다. 그 이모님의 자녀 중에 유명근을 Google에서 찾은 것이다. 아주 성공적인 경력이 보였다. 삼성그룹 방계회사의 사장을 역임한 것으로 나왔다. 문제는 어떻게 연락처를 찾느냐 하는 것이다.

마찬 가지로 재동국민학교 시절의 친구 정문신도 이곳에 금새 보였다. 그 동안의 의문들이 모조리 풀렸다. 성동중고를 졸업하고 한양대를 나왔다. 금새 성동고 동기회로 연결이 되어서 거의 순식간에 그가 하나모듈의 사장이란 것, 큰 아들이 얼마 전에 결혼을 했다는 것.. 모두 나왔다. 거의 꿈처럼 느껴졌다. 이런 세상이 된 것이다. 한마디로 조금 무서워진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Madison, Wisconsin에서 만난 중앙고 후배 강태중도 이곳에서 찾은 것이다. 교육학 전공이던 그는 비교적 공적인 삶으로 나온다. 신문의 인터뷰기사에서는 웃음을 띤 그의 얼굴도 보인다. 착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성실한 아빠고 남편이었다. 아들 “참”이의 이름이 생각이 난다. 우리 큰딸과 비슷한 나이였으니 혹시나 결혼이라도 한 것이 아닐까? 인연이 되면 알 수도 있겠지. 그는 중앙대학교의 교수로 재직을 하고 있었다. 너무나 반가웠다.
하지만 충격적인 슬픈 소식도 있었다. 중앙고 은사님, 음악선생님, 고1때의 담임 선생님 김대붕 선생님께서 2003년에 타계하신 것을 역시 이곳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물론 모른다. 최소한 그때쯤 돌아가신 것이다.이럴 수가 있나? 그런 것도 모르고 나는 이곳에서 그 선생님을 추억하는 글도 썼으니.. 내가 한심하기만 하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인터넷의 점진적이고 철저한 확산으로 세상은 많이, 그리고 확실히 바뀌고 있다. 좋건 나쁘건 이제는 피할 수 없는 것들, 어떻게 이것을 유용하게 쓰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더 현명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