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국사 장철환 선생님

아직도 잊을 수 없는 ‘학원’ 선생이 있다. 한국의 학원에선 선생은 필경 선생님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강사라도 불렀다. 일반적인 학교와 차이를 생각해서 그랬을 것이고 상대적인 지위와 존경도 그런 것들이 작용을 했을 것이다. 물론 학원의 강사님들도 질도 우수하고 존경의 대상이 될 만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은 결국 예외적인 케이스에 속했다.

우리가 입시경쟁체제에서 학교를 다닌 한 학원은 존재했던 기억이다. 하지만 그것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아마도 내가 중앙고등학교 1학년을 다닐 때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학원은 안국동에 위치한 “실력센터 , 소규모의 조잡하고, 불결하고, 영세한 학원과 다르게 우선 아주 깨끗하고, 위치가 좋고 (안국동), 규모가 그 당시 기준으로는 큰 편이었다. 그런 것이 좋아서 나는 큰 필요성은 못 느꼈지만 그곳을 한번 다니게 되었다. 영어과목에 등록을 하고 다녔는데, 강사가 아주 수준급이었다. 절대로 지루하지를 않았고 정말 영어실력이 대단한 분이었다. 그러니까 강사 급이 아니고 선생 급이었다. 성함이 100% 확실치 않지만 아마도 김광순 선생님이 아니었을까.

이분은 나중에 정말 우연으로 내가 다니던 중앙고등학교로 오시게 되고 다시 만났다. 그런데 분명히 실력이 대단했던 그 분이 정식 선생님으로 오신 것 같지를 않았고, 역시 ‘강사’로 오신 것을 알았다. 남들은 잘 몰랐겠지만 나는 이미 그분께 배운 적이 있어서 참 반가웠다. 하지만 한 학기가 끝나고 소리도 없이 사라지시고 말았다. 다른 선생님께 물어 보아도 전혀 어떻게 된 것이지 사정을 모르시는 눈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나는 학원에 익숙해 졌는데 내가 부족한 것을 느끼면 그 과목만 가서 공부하는 그런 정도였다.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종합반‘ 같은 것은 한번도 해 본적이 없었다. 제일 성과를 보았던 것은 화학 과목이었다. 정말 나는 그 과목에서 엉기고 있었다. 학교 선생님들께 문제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아마도 나의 기본실력에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을 계속 만회를 못하고 해 메는 식 이었다. 그것을 학원에서 한 학기 배우면서완전히 기초를 잡았고 결과적으로 학교에서도 아주 순조로이 화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중앙고교에는 최 정상급의 화학 선생님 두 분이 계셨는데, 김후택, 박택규 두 선생님들.. 개성과 스타일이 전혀 다르지만 화학 하나만큼은 정말 끝내주었던 “박사” 급들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별명 “깡패” 김후택 선생님.. 수업에 들어오실 때 백묵만 들고 들어오신다.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안 보시고 일사천리로 가르치신다. 그 반대로 박택규 선생님은 마치 대학교수가 되시듯 조직적으로 가르치신다. 특히 영어를 많이도 사용하셨다. 박선생님은 가끔 요새 본 영화 얘기를 곁들이며 수업을 기가 막히게도 이끄신다. 그때 “미리” 들었던 영화들: 신영균 주연의 “빨간 마후라“,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맨발의 청춘” 같은 영화들.. 학생입장불가라서 우리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던 영화들을 그 선생님이 ‘평’ 까지 곁들이시면서 재미있게도 이야기 해 주셨다.

결과적으로 나는 대학입시 때 화학시험을 거의 만점을 맞아서 합격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학원은 비록 영리적인 교육이었지만 필요할 때 잘 쓰면 크게 도움이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강사와 학생들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교육적으로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고, 그것에 대해서 크게 추억이나 존경심 같은 것을 가질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학원의 필요성이 나의 코앞에 다가왔다. 이번에 문교부 유학시험이라는 ‘괴물’ 때문이었다.

그때가 1972년 쯤이었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 바로 유학준비에 들어간 나는 미국유학의 어려움을 전혀 짐작도 못한 상태였다. $$이 제일 큰 문제였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때는 우선 BI (Before Internet) 25년 정도이니까 ‘정보’ 자체가 큰 걸림돌이었다. 그렇게 정보라는 것이 비쌌던 것이다.아마도 지금 그런 것들은 googling 만 잘하면 한 시간도 안 걸릴 것이다. 일일이 관계자, 선배들을 통한 귀동냥으로 들은 ‘도시 전설적인 이야기’ 들이 아주 많았다. 그 중에서도 여권을 받는데 100% 거쳐야 하는 조건 중에 버티고 있던 것이 이것, 문교부 유학시험이었다. 3과목의 시험인데 영어, 국사, 시사 등이 있었다.

영어는 물론 기대를 했던 것이고 나머지는 전혀 idea가 없었다. 세 과목을 모두 통과를 해야 했다. 제일 난감했던 것이 국사였다. 대학입시 때 조금 공부했던 것을 다시 해야 한다니.. 이때 선배들이 말하는 것이 있었다. 이 과목을 집에서 혼자 공부하면 99.9% 떨어진다고.. 이게 무슨 말인가? 그 이유는 물론 나중에 밝혀진다. 문교부 유학시험의 내막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반대로 99.9% 합격을 기대하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유학국사 장철환” 이었다. 요새 일본 드라마의 제목을 빌려서 유학국사의 “수험의 신” 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부랴부랴 이 유학국사 장철환 선생님의 학원을 찾아서 등록을 하고 강의를 듣게 되었다. 맙소사.. 완전히 강의실이 초만원 상태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결과적으로 “미국 유학을 가려면 이곳에 와야 한다” 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곳은 해외 유학희망 생들의 비공식적 집합 소가 된 장소였다. 강의를 들어 보면서 왜 이곳을 거치지 않으면 시험을 pass하기 힘든가 하는 이유도 짐작이 갔다. 이 장철환선생은 그 시험에 대해서는 수험의 신격 이었고 우선 무슨 문제가 날지, 그 답을 어떻게 써야 채점 관들의 ‘비위’을 맞출 수 있는지 그런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서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더 놀란 것은 비록 유학국사시험에 맞추어 공부하는 것이었지만 이 장선생의 국사 실력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그리고 강의스타일이 정말 정열적이었다. 에너지가 어찌나 뜨겁던지 꼭 목욕탕에서나 쓰는 제일 큰 towel을 허리에 감고 들어 오셔서 계속 땀을 닦으시곤 했다. 수준도 높아서 흡사 대학교의 사학과에서 강의를 듣고 있는 기분도 많이 들 때가 있었다. 그 분도 자기의 ‘실력’에 굉장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 것들이 간접적으로 나타나는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강의 도중에 학생들의 출입을 거의 신경질적으로 막을 때였다. 보통 학원에서는 그런 것은 별로 문제가 안 되는데 이분만은 거의 이상할 정도로 반응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심지어 화장실 가는 것까지 신경을 쓴 상태였다. 그것이 그분의 자존심이었을까.. 내가 열심히 가르치는데 어딜 나가냐..어떻게 늦게 들어올 수가 있느냐..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때 늦게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외우는 수준을 훨씬 넘는, 격이 높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또한 이곳은 비공식적인 해외유학지망생들의 집합 소 역할도 했기 때문에 얽힌 이야기도 많았다. 우선 유학에 대한 정보를 많이 듣고 교환을 할 수가 있었다. 때때로 미국의 같은 대학에 갈 사람들도 이곳에서 미리 만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미래 배우자까지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 수도 있었다.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개중에는 이런 목적을 가지도 온 사람들도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나도 이곳에서 만난 ‘남자’를 미국에서 다시 만나게 된 case도 있었으니까.

이런 인연으로 처음 유학시험에서 영어는 떨어졌어도 국사만큼은 합격을 할 수 있었다. 다음에 나머지도 합격은 했지만 이때 비로소 유학국사 장철환 선생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나중에 미국에서 만나게 된 유학생들도 농담으로 유학국사 장철환 선생님을 모르면 아마도 문교부 유학시험을 친 경력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을 할 정도였다. 그들 중에 들은 얘기로, 하도 미국유학생들을 많이 접하다 보니 그들 중에 나중에 ‘대성공’을 해서 귀국을 한 ‘제자’들이 많아서 혹시 무언가 바라는 것이 없으신가 하고 물으면 “조그만 문방구 하나만 차려달라” 고 농담을 하신다고 들었다.

1970년대 말에 이 문교부유학시험은 없어졌다고 했지만 (해외유학자유화), 한때 이 제도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외화를 그런대로 조절할 수 있는 손쉬운 도구로 쓰여졌을 것이다. 그리고 김포공항을 빠져 나오기 그렇게도 어렵던 시절에 이런 추억에 어린 뒷 이야기도 있었던 것이다. 유학국사 장철환 선생님도 이제는 연세가 꽤 들으셨을 듯 하다. 비록 정규학교의 은사님은 아닐지라도 그에 못지 않은 선생님이시지 않겠는가?

 

 

“Heart of Gold” by Neil Young –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