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교사 ‘교수 김인호’, 작가 박계형

규수작가 박계형의 저서, 1966년
1966년 규수작가 박계형씨의 책 광고

얼마 전에 1960년대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던 확실한 시기를 찾으려고 옛 신문을 인터넷으로 살피다가 (그의 방문은 1966년 11월 1일경이었다) 또, 정말 우연히 조그만 책 광고를 그곳에서 보게 되었다. 희미한 기억에 남았던 ‘규수 신인 작가, 박계형‘ 이었다. 그녀의 책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 의 광고였다.

그녀의 책들은 여성, 그것도 사춘기 소녀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그 당시에는 거의 뉴스거리였다. 다른 책, ‘젊음이 밤을 지날 때‘ 는 영화화 되었는데, ‘학생입장 절대불가‘ 라서 무엇인지도 모르고 고교생이던 우리들은 그저 침만 흘리던 그런 영화였다. 하지만, 그녀의 젊음, 문학성 등을 떠나서 나는 박계형이란 이름을 다시 보고 너무나 반가운 마음이 든 이유가 따로 있었다.

1965년 경, 내가 중앙고 3학년이 될 무렵에 나를 가르친 가정교사 대학생이 하나 있었다. 그 당시는 그저 형이라고 불릴 정도의 서울 상대생이었는데, 어머님의 동창 아줌마의 아들 이건우 형의 고교, 대학 동창이라고 했다.

그 형들은 서울 명문인 서울고교 동기동창이었고, 서울 상대도 같이 다니고 있었다. 그 형의 이름이 바로 김인호 였는데, 나중에 듣기에 유명한 여자 소설가와 연애하던 사이라고 했다. 사실은 그래서 박계형이란 이름을 기억을 한 것이다. 남자 고교생들이 그런 류의 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박계형 원작 영화, 젊음이.. 1964년 3월
1964년 3월 국도극장 개봉, 19세 박계형 원작영화

그 인호 형과 공부를 한 시간은 불과 몇 개월도 되지 않았지만, 참 기억에 남을 정도로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공부도 공부지만, 여담이 더 흥미롭고 유익한 것이 많았던 것이다. 상대생인데도 ‘과학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는지, 비록 ‘진짜인지, 허구인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첨단적’인 과학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 중에 3가지의 과학 이론은 나를 완전히 압도해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고 나의 친구들에게도 내가 발견이라도 한 듯 자랑스럽게 이야기 해 주기도 했다. 키도 훤칠하게 크고, 아주 호남형인 그 인호 형에게 ‘날리는 소설가 애인’ 이 있다고 들었을 때,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런 멋진 대학생에게 멋진 애인이 없다는 것이 상상이 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가정교사를 못 하겠다고 하고, 대신 다른 ‘서울고, 서울공대’ 동창을 소개시켜주고는 떠났다. 그 형이 바로 나의 다른 blog에서 회상을 했던 서울공대 섬유공학과 송부호 형이었다. 이것은 모두 어머님의 동창 아줌마의 아들인 건우 형이 도와준 덕이었는데, 그 형과도 어머님이 타계하신 이후 소식도 모르게 되었다. 아마도 인호 형, 그러니까 김인호 형과 연락이 닿게 된다면 혹시라도 이건우 형 댁의 소식도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있다.

그래서 박계형이란 이름으로 googling을 했더니, 역시 나의 짐작이 다 맞았다. 1969년에 결혼을 했다고 하고, 계속 ‘인기 작가’로 남았고, 김인호 형은 한양대학 교수로 2008년에 정년퇴임을 했고, 현재 70세에 가깝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의 출신고 서울고 13회 동창회에 가보면 정년퇴임식 사진들이 나오고, 47년 만에 다시 인호 형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비록 나이는 들었어도 그 뚜렷한 이목구비를 어찌 잊으랴.. 이 정도가 되면 김인호 ‘형’은 노력만 하면 다시 연락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고, 더 나아가서 그의 동창 친구 건우 형의 소식도 알게 되지 않을까? 사실은 그 서울고 동창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 건우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알아볼 길이 없다.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안 한다. 기대치를 최소로 유지하는 것이 ‘항상 현명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본 ‘공인’인 김인호 교수는 생각보다 더 유명한 경영학의 권위자였다. 그의 Dynamic Management가 무엇인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아마도 그만이 개발한 새로운 경영학 분야가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이것도 사실 크게 이상하지 않은 것이 나와 공부를 할 당시 ‘공상과학적 논리‘를 많이 폈던 그 형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또한 새로운 사실은 ‘아마도’ 두 분이 모두 천주교 교인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그들의 ‘이름에서 본’ 느낌이다. 인호 형의 이름에는 Stephen이 앞에 있고 (스테파노), 박계형씨의 이름에는 ‘아나스타시아‘ 란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반가운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생각을 한다.

비록 짧았던 인호 형과의 만남이었지만, ‘유명세’ 덕분에 다시 찾게 된 것은 아주 우연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한번의 기억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서서히 사라질 뿐이다. 이것은 물론 6.25 이후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미의회 고별연설에 나온 말이지만, 그 말을 이제야 실감을 한다. 한번의 인연과 추억은 ‘하루 아침에 죽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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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gling 결과, 다음과 같은 ‘인호 형’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빙산의 일각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나에게는 분에 넘치도록 만족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간략하게 요약, 정리를 하면 다음과 같다.

  1. 가장 최근의 것으로 2011년6월에 미국LA를 방문했던 김인호, 박계형 부부에 관한 기사가 있었다. 학회 참가 차(무슨 학회?) LA에 왔을 때, 박계형씨의 인터뷰에서, 씨는 2001년부터 그 전 20년간의 문필공백기를 깨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 그 중에서 ‘환희‘라는 작품은 번역이 되어서 서서히 bestseller로 오르고 있다고 전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아마도 젊은 시절, 인기절정 시절에서 결혼 후 ‘평범한 내조 주부’ 로 변신했고, 자식들이 다 성장한 이후 다시 문단 계로 복귀를 한 듯 싶었다. 그러니까, 그 주부 시절은 아마도 ‘대학교수 김인호’의 부인으로 살았을 것이다.
  2.  나의 큰 관심을 끌었던 소식은 5년 전, 2007년 6월 평화신문(가톨릭 매체)의 기사였다. 이기사는 위에 언급된 ‘번역’된 작품, ‘환희(A Life)’ 에 관한 비교적 상세한 배경을 밝힌다.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영문판으로 출판이 되고, bestseller 1위에 올랐다는 사실도 놀랍다. 하지만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씨의 신앙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평화신문이 가톨릭 신문이라 짐작은 갔지만, 이런 대작이 그녀의 신앙과 결부가 되어있다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녀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일 것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서, 일생의 동반자로 살아온 인호 형도 같은 level의 신앙을 지녀오지 않았을까? 그 옛날, 대학생 시절의 형이 가톨릭인지 아닌지 전혀 기억이 없다. 그 옛날 19세 ‘소녀’로 세간을 놀라게 한 ‘젊음이 밤을 지날 때’ 같은 ‘학생입장 불가’ 급의 책의 저자가 기나긴 여정 끝에 고향을 찾은 것일까?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다 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예수’라는 이름입니다.” 라는 씨의 말이 모든 것을 대변해 준다고 나는 믿는다.
  3.  제일 오래 된 씨의 기사는 10년 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58세였던 씨가 20년의 ‘잠적’에서 나온 때였던 모양이었다. 많은 우리또래의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라도 하듯이, 씨의 문단 등장시의 심경을 들려준다. 한마디로 “제 작품이 부끄러워서 숨고 싶었어요.” 라는 것이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19세의 ‘소녀적 꿈’으로 세상을 그렸던 것이 58세 뒤에 어떻게 보였겠는가? 나는 부끄럽기보다는, 내가 많이 성숙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인터뷰에서 나에게 더 유익한 것을 알게 되 것 중에는, 1969년에 인호 형과 결혼을 했다는 사실, 본명이 ‘박숙자‘ 라는 너무나 평범한 이름이라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