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리 집, 지구 온난화의 첫 희생양들..

지난 3월 26일 토요일 밤에 완전히 ‘열대성’ 폭풍우가 밤새 쏟아졌다. 이제는 이런 흔히 말하는 ‘이상(異常)기후’에 별로 놀라지는 않는다. 이런 ‘이상기후’가 이제는 거의 ‘정상기후’가 되어가고 있으니까.. 기상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global warming의 한 증상일 것이다. 근년에 들어서 3월 중에 거의 이런 것들이 온 것을 기억을 한다. 하지만 이번 것은 그 정도가 심해서.. 천둥과 벼락이 밤새 시끄러웠다. 다행히 바람은 상대적으로 덜 해서 겉보기에 피해는 별것들이 아니었다. 문제는 천둥과, 벼락과.. 우리 집에 있는 super network system lab이었다. 이제까지는 기껏해야 정전으로 인한 불편함 정도로 그쳤었는데 이번에는 power system에 아주 커다란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집 근처 Roswell Road 확장 공사로 electrical power system도 큰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집의 자랑인 super computer network lab의 모든 ethernet ports들이 직격탄을 맞은 셈이 되었다.

처음에는 모든 servers (physical, virtual)/PC들을 reboot하면 (예전과 같이) 해결이 될 줄로 낙관을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우선, ADSL modem(ActionTec)이 완전히 못쓰게 되었고, 그것에 연결이 된 Linksys DD-WRT router의 WAN port(ethernet)가 못쓰게 되었다. 그러니 Internet이 완전히 shutdown이 된 것이다.

3월 26일 벼락의 희생물들.. aDSL modem, dd-wrt Router, VoIP ATA..
3월 26일 벼락의 희생물들.. aDSL modem, dd-wrt Router, VoIP ATA..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줄줄이 그것과 직접 연결이 된 ethernet port가 있는 것들이 다 문제가 생겼다. 제일 가까이 있었던 network switch 들이 제대로 function을 못하고 심지어는 VOIP phone ATA(analog telephone adaptor)와 이번에 새로 산 KVM virtual server (Proxmox PVE) motherboard의 gigabit ethernet port까지 electrical spike을 맞아서 불능이 되어 버렸다. 이것들을 다시 test하고 repair하는 것이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보다는 시간이 문제였다. garage에 있는 server closet과 attic에 있는 mini distribution box를 수없이 들락거리는 것이 웬만한 운동보다 힘 들었던 것이다. 거의 일주일이 걸려서 이제는 조금 안정이 된 셈이다. 이번 사고의 교훈은 간단했다. ‘simple is beautiful‘.. 이제는 복잡한 것이 자랑이 아니고 ‘사고의 원인’이란 것.. network device를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히 하고, 다음은 더 막강한 방어 수단으로 better surge protector를 생각하기로 했다. 이곳의 기후는 이제 더 ‘지구 온난화‘의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드디어..아틀란타에도 봄이..
드디어..아틀란타에도 봄이..

다시 싸늘해진 아틀란타의 3월 말: 일 주일을 넘게 거의 초여름의 맛을 미리 보여주던 날씨가 역시 ‘평균치’를 유지하려는 듯 급강하하여 오늘 아침은 거의 빙점까지 떨어지는 추위가 되었다. 아래층은 결국 central heating이 요란하게 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맑은 날씨에 바람이 없어서 느낌은 역시 봄이다.

오래 전에 고국에서 느끼던 3월의 날씨도 사실 이와 비슷했다. 그래서 이곳 아틀란타는 많은 것이 서울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뚜렷한 4계절, 지형, 나무, 꽃들의 종류 등등이 그렇다. 다만 연 평균기온이 조금 높다는 것인데.. 사실 서울의 평균기온도 그 동안 (30년) 조금은 올랐을 것 같아서 결국은 비슷하지 않을까? 3월 초부터 Bradford pear, 개나리, 진달래, 수선화 등이 이미 다 피고 졌다. 지금은 벗 꽃이 조금씩 선을 보이기 시작한다. 옛날 서울에서 창경원의 벗 꽃놀이가 4월 초에 있었으니까.. 이것도 시기적으로 비슷하구나. 다만 조금 다른 것은 이 아틀란타지역에 너무나 많은 소나무들.. 이것 때문에 이곳의 봄은 꽃가루가 지독하다. 특히 바람이 잘 불지 않으면 완전한 비상사태가 된다. 나는 다행히 꽃가루 앨러지가 별로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거의 한달 동안 고생을 해야 한다. 그것이 5월 중순까지 계속 된다.

하지만 4월과 5월은 역시 찬란한 계절.. 비가 조금씩 오기만 하면 너무나 정서적인, 시적인 계절.. 전 이대음대 교수 김순애씨의 ‘4월의 노래’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추억이 계절이 된다. 언젠가 부터 나는 4월과 5월을 은근히 기다리게 되었다. 특히 최근에 레지오 마리애의 단원이 되어서 그런지.. 특히 성모성월, 어린이 날 (일본의 5월5일 어린이날을 그대로?) 어머니 날(후에 어버이날로 바뀐 것.. 참 마음에 들지 않음) 의 5월 달이 더욱 기다려진다. 그 중에서, 특히 5월 1일은 ‘friends forever’를 생각하게 하는, First of May.. 물론 이것은 The Bee Gees의 1960년대 pop song에 불과하지만 나와 나의 몇 친구들에게는 거의 암호와도 같은 추억의 노래가 되었다. 그래서 5월은 더욱 나에게는 빛나는 달이 되어간다.

 

First of May – Bee Gees, 1969 

이 Bee Gees의 classic을 처음 들었을 때는 가사보다는 감미롭고 신비스럽게까지 느껴진 melody에 매료가 되었었다. 그런 나이였다. 하지만 그 후 그 가사를 음미하면서 이제는 가사에 깊이 빠져든다. 가사와 곡이 어쩌면 그렇게도 멋지게 조화를 이룰까.. 이런 것이 진정한 classic이 아닐까.. 이 곡 뒤에 항상 보이는 흩어져 인생을 살아온 친구들을 생각한다. 그래서 5월1일은 Friends Forever의 날이 되어간다.

4월의 노래 – 박목월 시, 김순애 작곡 

서울 중앙고 1학년 때(1963년) 담임 김대붕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는 곡이라며 가르쳐 주신 또 다른 불후의 명곡.. 어찌 잊으랴. 4월이 되면 어찌나 이 곡을 배울 때가 그립던지.. 또한 타계하신 김대붕 선생님도 함께 그때의 행복하고, 순진 하던 시절의 찬란했던 4월의 봄 동산을 그린다.

 

 

레지오 선서..

어제 드디어 나는 레지오 마리애의 정식 단원이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틀란타 한인 순교자 천주교회 소속,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에서 레지오 입단 선서를 한 것이다. 원래는 지난 주에 할 예정이었는데 그날 감기로 인해서 회합(meeting)을 빠진 관계로 어제 한 것이었다.

레지오의 첫 회합에 참가하기 시작한지 3개월이 넘어서, 대기기간이 지나면 예비단원에서 정단원이 되는 레지오 선서(promise)를 할 자격이 생긴다. 나는 그것을 어제 한 것이다. 비록 간단하게 레지오 교본에 있는 선서문을 읽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에게 이것은 아주 심각한 것이었다.

나는 첫 회합 참가 이후 한번도 선서를 일부러 미루거나 안 하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랜 경험에 미루어 이것도 생각처럼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항상 있었다. 나의 마음이 갑자기 변한다거나, 무슨 사고가 생긴다거나..하는 조금 극단적인 예외의 가능성..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부정적인 생각들이다.

선서를 하기 바로 전에 지도신부님, 안정호 신부님이 들어오셔서 아주 특별한 timing이 되었다. 신부님 보시는 앞에서 선서를 하고 곧 이어서 강복을 받은 것이다. 그곳에 있던 단원들이 조금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런 기회가 많지 않았다고 귀 띰 해 주었다. 이래서 나의 레지오 시작은 아주 좋은 기분으로 시작이 된 셈이다. 게다가 끝나고 나서 근처에 있는 식당에 모두 모여서 즐거운 점심도 즐기고.. 참 좋은 날이었다.

 

지나간 3주는..

거의 3주 만에 이곳을 찾았다. 이 3주는 정말 의외로 조금 긴 듯한 느낌이다. 무언가 쫓기는 듯 하면서도 왜 이렇게 시간이 길까..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지난 1월 9일 밤부터 시작된 이곳의 세기적인 폭설과 강추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거의 1주일 동안 사실 이곳의 모든 것들이 정지된 상태였다. 덕분에 뜻밖의 snow, ice day holiday를 즐기긴 했지만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오랜 만에 찾아온 반갑지 않은 mild depression이 그것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번 것은 전처럼 그렇게 mild한 것이 아니었다. 조금은 ‘고통적’인 것이었다. 그 동안 위로를 받던 “묵주기도의 보호”도 크게 도움이 되지를 못했다. 하지만 역시 처방은 시간과 세월이 아니던가.. 지금은 그 깊게만 느껴지던 수렁 속에서 밝은 하늘이 보인다.

나의 생일과 결혼 기념일이 줄줄이 이어지며 1월 달을 보냈다. 생일의 의미를 나 나름대로 바꾸어서 보낸 것이 얼마 되었다. 나를 낳아준 부모님을 더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나에게 진정한 생일의 의미이다. 일체 선물도 그렇게 반갑지 않게 되었다. 조용히 보내고 싶은 것이다. 딸 둘이 예전과는 많이 덜 하지만,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다. 그것까지 거절하는 것은 조금은 무리다. 이번에는 지난 크리스마스에 받기로 했던 telescope가 out-of-stock이 되어서 나의 생일 즈음에서 받게 되어서 그것을 생일 선물로 받게 되었다. 결혼기념일도 마찬가지다. 25주년, 은혼식 때에는 ‘압력’에 굴복을 해서 그렇게 보냈지만 이것도 나의 스타일이 절대로 아니다. 다행히 30주년에는 무슨 ‘이름’이 없었다. 다음의 큰 것은 50주년이 아닐까? 올해는 31주년이 되었고, 정말 조용히 보냈다.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사실 제일 나에게 중요하게 느껴지던 날은 1월 25일이었다. 그날은 내가 레지오 마리애의 정식단원이 되는 “레지오 선서”를 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역시 사탄은 조용히 있지 않았다. 그날 나는 sick day가 되어서 참석을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레지오에 나가기 시작한지 3개월이 넘은 것이다. 참, 이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렇게 까지 ‘발전’을 하게 될 줄을 몇 개월 전만해도 절대로 예측을 못했으니까. 살면서 가끔 이런 작은 ‘기적’이 있어서 조금은 살맛도 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안다. 정식 단원이 되면 내가 어떻게 변해야 할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난 3주간 그 놈의 mild depression이 나를 괴롭혔지만 아주 무기력하게만 있지는 않았다. 14일에는 처음으로 기후에 의한 화요일이 아닌 다른 날에 모였던 레지오 회합에 참석을 하였다. 그것도 조금은 신선한 느낌이 아닐까? 이래서 군대와 같은 규율이 있는 레지오가 나는 너무나 좋다. 거의 모든 단원(자매님들)이 참석을 하셨다. 15일부터는 뜻하지 않은 home pc accident로 시작된 일련의 major computer work이 시작 되었다. 지금 생각을 하니 이 뜻밖의 일이 나를 mild depression에서 조금 더 빨리 빠져 나오게 하는 힘이 되었던 듯 싶다.

 

아틀란타 Snow day No. 3, 100th blog etc..

frozen Atlanta
frozen Atlanta

아무리 생각해도 snow day가 3일째 계속된 적은 이번 말고 기억에 없다. 1989년 이곳에 이사온 이후에는 없었다. 1993년 3월 달의 storm of the century때도 3일 이상 계속되지는 않았다. 이번은 내일까지 모든 학교들과 대부분 직장이 쉰다고 한다. 그러니 4일 연속의 snow day인 셈이다. 이번에는 눈이 온 이후로 강추위가 계속되어서 길들이 모두 스케이트장으로 변한 탓이다. 제설트럭이 10대밖에 없으니.. 얼음이 저절로 녹기를 기다리는 형편인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것을 가지고 정치화 하거나 불평을 하는 이곳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는 것 같다. 그것이 사실 더 재미있지 않은가? 나도 사실 큰 문제가 없고, 오히려 뜻밖에 완전한 relax를 하게 되어서 고마울 지경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쌀만 있으면 몇 주라도 끄떡없이 나가지 않고 살 수 있으니 더 그렇다. 이곳 사람들은 조금 다를 것이다. 빵과 우유, 야채가 꼭 있어야 하니..

오늘의 blog이 100번째를 넘었다. 2009년부터 조금씩 쓰던 것이 지난해 7월부터는 거의 정기적으로 쓰게 되고 이제 100번째가 넘은 것이다. 남들에게는 큰 숫자가 아닐지 몰라도 나로서는 milestone처럼 느껴진다. 처음에는 한글로 쓰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었다. 영어로 쓰는 것보다 쉽겠지..한 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결론적으로 영어로 쓰는 것 만큼 힘이 들었다. 나의 생각이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영어로 생각하는 습관이 많이 들어있었다. 그런데다 멋진 한글 수식어들을 참 많이도 잊어버렸다. 아마도 내가 한글로 된 책을 별로 안 보고, 2000년이 넘으면서 한글로 된 website도 거의 피한 결과일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아이들 수준의 단어 밖에 생각이 안 나는 것이었다. 영어도 잘 못하고 한글표현도 잘 못하고.. 이제는 영어보다는 한글에 더 신경을 쓰며 살고 있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 한인성당의 레지오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한국 문화’를 더 접하게 되어서 다행이다.

제발트 저, 이민자 들
제발트 저, 이민자 들

얼마 전 정말 오랜만에 Cobb Central Library엘 가게 되었다. 친지가 경영하는 Atlanta downtown에 있는 Kristie란 jewelry store에 computer문제가 생겨서 보아주고 오다가 잠깐 들린 것이다. 작년 여름부터, 집안의 마루를 새로 놓는 일을 시작하면서, 그 때까지 거의 정기적으로 가던 것이 중단되어서 이제까지 온 것이다. 그곳에는 한국에서 출판된 책들이 제법 있어서 새로 나온 책이 있나 보았는데.. 거의 없었다. 이곳도 $$$이 경제사정으로 모자란 모양인가? 그래도 몇 권을 빌려왔다.

한번 빌려 보았던 독일작가 제발트(W.G. Sebald) 저 “이민자 들(Die Ausgewanderten)”, 마쓰히사 아쓰시 저 “천국의 책방“, 그리고 이청준 소설집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등이다. 이 중에 “이민자 들”은 한번 본 것인데 다시 읽고 싶었다. 왜 그럴까? 독일인으로 영국으로 이민을 가서 다른 이민자들을 보면서 쓴 것인데.. 아주 비극적인 이야기들이다. 한마디로”실화보다 더 실화 같은 소설”인데 아주 그 format이 특이하다. 주제는 이민자들이 겪는 ‘고향상실의 고통’이다. 나는 그들이 겪는 고향상실이 어떤 것이지 잘 알고 있다. 어느 민족, 어느 문화권이던 이런 것은 사실 보편적인 것이 아닐까?

A longest day, then snow day 2011..

어제는 모처럼 아주 바쁘게 느껴지는 일요일을 보냈다. 평소 때의 일요일은 조금 relax하는 기분으로 보내곤 하는데, 어제 일요일은 조금 달랐다. 최근에 내가 경험하고 있는 out-of-closet의 한 예라고나 할까.. 처음 가보는 집도 두 군데, 처음 만났던 사람들도 꽤 많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아주 유쾌하고 진땀 나는 경험이 되었다. 단 요새 예외 없이 대부분이 즐기는 karaoke를 제외하고.. 나는 이것에 익숙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Almost empty Atlanta's I-285 morning after snow
Almost empty Atlanta’s I-285 morning after snow

이런 것들과 아울러 이곳의 날씨가 어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치도 어김없이 일기예보가 들어 맞았다. 9시경부터 snow shower/storm(눈보라?)이 이곳 아틀란타 지역에 들이 닥친 것이다. 이 눈보라 때문에 밤에 집으로 돌아올 때 완전히 눈에 쌓인 고속도로 운전을 해야 하는 모험을 하게 되었다. 시카고, 오하이오, 위스컨신에서 살 때는 이 정도는 큰 문제가 못 되었지만 이곳에선 절대로 장난이 아니다. 제설 대비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데다가 지형적으로도 언덕이 많은 탓이다 (아틀란타 메트로는 piedmont, 그러니까 구릉지역에 속함).

어제 낮에는 레지오 덕분에 다시 만나게 된 설재규씨 댁으로 가서 그 집의 home network (주로 adsl modem/wifi router 같은 것들)을 손 보아 주었다. 나는 옛날 생각만 해서 설재규씨가 이런 것들 잘 했으려니 했지만 본인의 말로는 이런 것들을 하지 않은지 아주 오래 되었다고 한다. 이런 류의 일들은 언제나 깜짝 놀라게 하는 복병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번 것도 예외가 아니었다. Earthlink/Netopia combo.. 요새 아직도 이런 구닥다리 broadband supplier를 쓰는 사람도 있다. 그 중에서도 Netopia adsl modem/router가 특이하다. 아주 요상한 setup mode가 있는데.. 이것은 정말 쓰는 사람이 아무리 ‘바보’라도 문제가 없게 만들어 놓았다. 흡사 요새의 Apple computer와도 같다고 할까. 문제는 동시에 두 대 이상의 pc에서 Internet을 쓸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정말, 정말 20세기적 발상이다. 이것을 바꾸려면 dumb mode를 full “bridge mode”로 바꾸면 되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다음에 하기로 하였다.

그것이 끝나고 몇 주 전에 이미 예정된 아틀란타 한인성당 전산팀의 신년 회의/식사 참석차 Dacula, Georgia에 있는 홍보분과위원장 댁으로 연숙과 합류를 해서 설재규씨와 갔다. 그곳은 I-85 Exit 120 근처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최근 이곳은 한인들이 집단적으로 정착을 하는 곳이다. 밤 9시 이후로 예정된 대설 주의보를 염두에 두면서 전산팀 모임이 진행 되었다. 이날의 hostess인 서 안젤라 자매(본당 사목위원)의 power를 보여 주는 듯, 본당의 세 분 신부님께서 모두 오셨다. 그러니 분위기는 자연히 아주 활발하고 무게가 있었다.

이 댁의 지하에는 완전히 꾸며진 Video/Audio/Karaoke시설이 있었고, 한 쪽에는 아주 잘 꾸며진 ‘기도방’도 있었다.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이 회의와 식사가 끝나면서 Karaoke방으로 모두들 모이게 되었는데(사실은 우리 신부님들이 이런 것들을 좋아 하신다고 함).. 나와 설재규씨는 눈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미리 일찍 가자고 합의를 한 상태여서.. 9시 넘어서 조용히 빠져 나왔다. 이때부터 위에 언급한 snow adventure/nightmare 가 시작된 것이다.

20여 년이 넘게 나는 눈이 깊이 쌓인 고속도로를 운전한 경험이 없었다. 어제의 눈발은 흡사 거의 폭우와 같이 쏟아졌는데. 도로는 완전히 눈으로 덥히고, 앞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 중간쯤에 와서는 차기 조금씩 미끄러짐을 느끼게 되었다.다행히 일요일 밤이라서 그런지, 일기예보를 미리 들 보아서 그런지.. traffic은 그리 많지 않았고, 특히 집채만한 대형 트럭들이 거의 보이질 않았다. 시간이 가면서 더 눈보라가 심해지고, 드디어 나는 속으로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그만큼 다급해 진 것이다. 잘못 하다가는 차를 세울 지경이 된 것이다. 이미 도로변에는 세워진 차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ramp에서는 이미 충돌사고로 엉킨 차들을 피해가야 했다. 집 근처의 완만한 언덕들을 천신만고 끝에 기어서 거북이처럼 집으로 goal-in을 하였다. 이때는 정말 ‘만세’를 불렀다. 최악의 상태가 오면 차를 버리고 둘이서 집까지 걸어 올 각오를 했을 정도였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머지 사람들이 걱정이 되어서 연락을 해 보니 아직도 karaoke를 하며 놀고 있어서, 빨리들 출발 하라고 말해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집으로 돌아 갈 때 몇 명은 아주 고생을 하였다고.. 새벽 3시경에 도착한 형제님도 있었다. 신부님들도 역시 눈 때문에 거북이처럼 운전을 하셨다고 한다. 지금 생각을 해 보니.. 이번 모임은 사실 취소하거나 연기를 했어야 했다. 정말 무모한 모험을 한 결과가 된 것이다. 만약에 더 큰 사고라도 있었으면 어쩔 뻔 했을까? 하지만 다행히 이번의 모임은 추억에 오래 남을만한 것이 되었다.

오늘 아침에 밖을 보니 완전히 모든 곳이 깊은 눈으로 덮여있었다. 성탄절의 눈과 더불어 이번 겨울의 제2탄인 것이다. 조금 용기를 내어서 우리 집 “깡패” Tobey(개)를 데리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는데.. 다리가 짧은 Tobey가 가슴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느라 고생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오늘 월요일은 snow day, holiday가 되었다. 대부분 따뜻한 집안에서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뜻밖의 ‘휴가’를 즐길 것이다. 이것이 snow day의 즐거움일까. 겨울에만 있는 뜻밖의 즐거움일지도 모른다.

 

지난 밤에 쌓인 6"의 눈

지난 밤에 쌓인 6″의 눈

Walking Tobey on snow day 2011

Walking Tobey on snow day 2011

 

레지오가 만나게 해 준 세 사람

2010년의 황혼이 뉘엿뉘엿 넘어가는 이 시점에서 올해 나에게 제일 크고, 중요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생각을 해 본다. 그런데.. 그것이 별로 어렵지 않았다. 내가 이곳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자비의 모후 레지오에 예비단원으로 입단을 한 사실이다. 물론 나는2007년 초부터 아내 연숙의 레지오 협조단원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둘이서 묵주기도를 시작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이 나의 매일의 일상생활에서 시간적, 육체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오묘하게 나를 조금씩 바꾸어 주고 있었다.

올해 10월경부터 아주 조그만 일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로 하여금 육체적으로 레지오로 향하게 하고 있었다. 그 결과는 나의 10월 19일 레지오 예비단원으로의 입단이었다. 그때 받은 레지오 단원 수첩으로 기록이 된 나의 ‘활동’을 다시 본다. 비록 예비단원이라 ‘공식적 실적’에는 못 오른다고는 하나 나에게 그런 것은 별 차이와 문제가 되지를 않는다. 비록 그 이후 묵주기도의 횟수가 조금씩 많아진 것은 사실이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금씩 나의 lifestyle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마디로 신선하고, 무언가 생의 목적이 다시 보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우선 새로 적응해야 할 일이, 사람들(형제,자매님들이라고 부른다)을 새로 만나게 되는 일이었다. 지난 10년간 나는 ‘새로 만난 인간’이 거의 없었다. 그런 것을 그저 편안하게 느끼면서 살았다. 심지어는 새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지기도 했다.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피해망상증까지는 안 갔어도 그 근처까지 간 것이 아닌가 나도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런 배경에서 이렇게 새로 만난 사람들.. 내가 변했나.. 모두 그렇게 정답고, 친근하고, 친절하고, 죽마고우를 보는 듯한 기분까지 느끼게 되었다고 할까. 물론 그들이 변한 것이 아니고 무언가 내가 변한 것일 것이다.

그 중에서 내가 속한 곳의 자매님들(내가 유일한 남자단원 임), 대부분 나의 신앙, 인생 선배님들.. 나의 누나를 보는 듯해서 너무나 마음이 편하다. 성모신심으로 완전 무장된 그 자매님들..내가 배울 것 투성이다. 죽은 영혼들을 더 편히 보내드리는 레지오 연도에도 몇 차례 참가를 해서 그 동안 완전히 잊고 살았던 ‘죽음의 절차’를 다시 배우게도 되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3개월이 되어서 정식단원 선서의 절차를 앞두고 있지만, 나는 큰 문제없이 정식 단원이 될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그런 시점에서 나는 레지오가 그 동안 다시 만나게 해 준 세 사람을 생각한다.

첫 번째 사람은 바로 우리 예수님을 낳아주신 성모 마리아님이다. 거의 신화적, 역사적, 성서적, 심지어는 추상적으로만 느껴왔던 마리아님을 이제 나의 어머니로 다시 맞아들이고,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동안 레지오 교본을 혼자서 열심히 ‘독학’을 한 덕분에 나는 모르고 있던 ‘보화’와도 같은 심오한 성모신심을 접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마리아 같은 성인의 저서 (직접, 간접으로)도 읽게 되었고.. 얼마나 내가 성모님을 슬프게 해 드렸는지도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로 돌아갈 마음은 전혀 없다. 어떠한 “무지한 가톨릭 신자, 개신교신자, 개신교 신자와 같이 행동하는 가톨릭신자”를 만나더라도 이제는 자신이 있다.

바른쪽 설재규씨 부부, Thanksgiving dinner Atlanta, 1989
바른쪽 설재규씨 부부, Thanksgiving dinner Atlanta, 1989

두 번째 사람은 본당교우이자 오래 전부터 알던 설재규, 아오스딩 (Augustine) 형제다. 설재규씨는 비록 나보다 나이가 한참 밑이었지만, 내가 이곳 아틀란타에 1989년 직장을 따라 이사를 오게 되면서 거의 처음 만나게 된 정말 오래된 형제님이다. 내가 다니던 직장, AmeriCom Corporation에서 만난 유일한 한국사람이었다. 나는 그때 software engineer였고, 그는 test engineer였는데,. 비록 같은 부서는 아니었어도 곧바로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공통점으로 가깝게 지냈고, 더욱이 그도 우리와 같은 천주교 신자였다. 설재규씨의 부인은 우리부부와 같이 아틀란타 한국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직장도 그렇고 성당, 한국학교도 그렇고 모든 것들이 아주 오래가지를 못했다. 거의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설재규씨와는 무슨 인연이 있는지 그 후의 다른 직장이었던 Scientific Atlanta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물론 다른 부서에서 일을 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남다른 chemistry가 없었나 보다. 별로 더 가까워지질 못했다. 게다가 그 후 우리는 거의 완전히 한인 community와 멀어지게 되었고 서로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레지오 입단을 계기로 아틀란타 본당의 전산팀에 합류를 하게 되었는데.. 글쎄.. 거기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참, 이것도 인연이라면 어떨까? 서로가 젊은 패기는 다 수그러졌고, 조금은 완숙된 심경으로 만나면 이것도 무슨 큰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

세 번째 사람은 역시 본당의 교우,형제님이었던 김찬웅, 베드로씨다. 역시 우리가 아틀란타에 이사오면서 거의 곧바로 만났다. 중앙고 후배 이성풍(aka 윤주 아빠)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분은 그 당시 아마도 삼성 지사에서 근무를 했었던가 했다. 그래서 가끔 윤주네 식구와 더불어 모이곤 했다. 가족적인 분위기가 서로 잘 맞았고, 술도 좋아하고, 노래도 좋아하는 분위기가 우리와도 (비록 내가 나이가 제일 위였지만) 잘 어울린 것이다.

그러다가 역시 우리가 성당과 멀어지고, 설상가상으로 중간다리 역할을 하던 윤주네가 완전 귀국을 하게 되면서 사실상 연락조차 끊긴 채 산 것이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 아내 연숙과 김찬웅씨 부인 안젤라씨가 한인천주교회 레지오에서 만나 베드로씨네 소식을 다시 듣게 되었다. 알고 본즉 베드로씨도 나와 같이 레지오 협조단원이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어제는 서로 부부가 만나서 점심식사까지 하게 되었다. 물론 희망에 베드로씨도 언젠가는 안젤라씨와 같이 레지오를 하면 좋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이고 지금은 ‘해후의 즐거움’이 더 크다.

 

2nd day of Christmas, windy white..

12월 26일 아침, 크리스마스 두 번째 날이다. 이번의 성탄은 의외와 예외가 계속되는 그런 휴일이 되고 있다. 우선 성탄절 당일에 밖으로 나갔다는 사실이 우리 집의 전통을 완전히 무시한 결과가 되었고, 그것이 계속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우리 가족만의 푸근한 그런 날이었는데.. 하지만 이런 것으로 남을 탓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 내가, 우리가 결정하고 행한 일이 아닌가? 올해의 성탄과 같은 추억이 반복되지 않기만 바랄 정도로 나는 기분이 아주 쳐진 상태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일기예보대로 정확한 시간에 눈도 내려서 온 세상이 하얗게 되었는데도 그것이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못 만든다. 나의 마음을 적당히 자제를 못한 순간의 ‘실수’가 나의 가족을 아주 슬프게 만든 결과가 되었다. 나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왜 그것도 성탄 아침에 자제를 못 했을까? 큰딸 새로니에 대한 나의 미안함을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까? 그저 이유가 없었다. 아니 화를 낼 정도의 심각한 이유는 없었다. 정말 미안하다.. 왜 이 나이가 되도록 절제와 자제를 못했을까?

성탄절에 남의 집에 모여서 식사를 하고 노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침부터 눈이 예보된 상태에서 간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내가 바라던 대로 가지를 않았다. 두 가지 마음.. 고래등 같은 ‘사치스러운’ 집에서 white Christmas movie를 연상시키는 광경을 감상하는 것,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type은 절대로 아니었다. 암만 호화스러운 음식이 있어도 오가는 얘기가 그것을 못 따라 가거나, 심지어는 (아니, 거의 매번) 남의 심사를 완전히 뒤틀어 놓을 그런 utterly stupid comment를 들으면서, 내가 왜 이런 곳에 와 있을까 하는 극단적이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이가 먹을 수록 주로 겉멋에 집착하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난감하다. 새해에는 이런 자리를 가급적 피하며 살고 싶은 마음도 없는 것은 아니다.

 

Our cul-de-sac under snow

Our cul-de-sac under Christmas day snow

 

White Christmas, 2010

White Christmas, 2010

 

finally, white Christmas here.. Wisconsin 성모발현 공식인정

Snowing Atlanta on Christmas day
Snowing Atlanta on Christmas day

일기예보가 기가 막히게도 잘 맞았다. 오늘 크리스마스에 아틀란타지역에 눈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정오 무렵부터 비가 조금씩 내리던 것이 시간이 가면서 기온이 떨어지더니 진눈깨비로 변하고 급기야 함박눈으로 변한 것이다. 기온이 그렇게 낮지를 않아서 차도에 내린 눈은 물로 변하고 아직 얼지는 않았다. 오늘 낮부터 친지의 집에 모여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였는데 그곳에서 글자 그대로 white Christmas를 맞은 것이다. 나의 기억에 아마도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추측을 해 본다. 문제는 내일이다. 내일의 기온이 만만치 않게 낮을 예정이어서 이 눈이 녹지를 않을 것이고 그러면 이곳은 차들이 꼼짝 을 못할 것이다. 다행히 일요일이라 큰 문제는 없겠지만 성당에 갈 일이 문제다. 어제 오늘 모두 성탄미사를 빠지는 바람에 내일도 못 가게 되면 조금 문제다.

어제의 New York Times의 주요기사 중에 Wisconsin 성모발현이 교회의 공식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있었다. 머리 속으로 아마도 이것은 미국 ‘본토’에서는 처음 있는 경사가 아닌가 생각이 스쳐갔다.

성모님이 발현한 곳에 세워진 위스컨신주의 성당
성모님이 발현한 곳에 세워진 위스컨신주의 성당

그 동안 미국의 여러 군데에서 성모 발현 소식은 있어왔다. 심지어는 내가 사는 이곳의 근처에 있는 Conyers라는 곳에서도 지난 십 년 동안 성모님이 발현을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몰려간 것을 기억을 한다. 문제는 그런 곳들이 하나도 교황청은 물론이고 현지 교구에서조차 정식으로 조사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성모 발현이 인정을 받기는 그 정도로 ‘하늘의 별’따기 정도인 것이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한국의 나주, 오하이오의 어느 town, 그리고 이 근처 Conyers등등이 있었지만 하나같이 ‘인간들의 장난’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Wisconsin의 성모발현이 공식인정을 받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 동안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기사를 읽어보니 이 발현은 무려 160년이나 지난 오래된 발현이었다. 더 정확히, 1859년에 발현한 것을 지금 인정을 한 것이다. 그 해는 프랑스의 루르드(Lourdes, France)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신 다음해가 아닌가? 어떻게 그렇게 오랜 된 것이 이제 인정을 받게 되었을까?

 

Atlanta’s White Christmas?

미국 west coast를 연일 강타하던 저기압서서히 이쪽으로 밀려오고 있더니, 드디어 1993년 이후 처음으로 white Christmas의 가능성이 점점 확실히 지고 있다. 이것 자체만도 이곳에서는 큰 뉴스에 속한다. 그 가능성이 통계적으로 정말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적인 휴일인 성탄절이라서 교통문제는 큰 문제가 되지를 않을 것이다. 대개가 집안에서 눈을 즐기니까 사실 더 기분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 차로 drive를 한다면 문제가 전혀 달라진다. 눈에 전혀 대비가 되어있지 않은 이 도시는 거의 속수무책으로 하늘만 보며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이제까지의 ‘대책’이었다. 그 만큼 통계적으로 눈의 확률이 낮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 집의 경우에는, 사실 그날 저녁에 가깝게 지내는 친지, 진희네 집, 의 저녁 초대를 받아놓고 있는 상태라서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 중이다 일기예보가 맞는다면 아마도 집으로 돌아올 때쯤 drive하는데 문제가 있을 듯 하다. 그 집이 워낙 고래등같이 크니까, 비상시에는 거기서 잘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탄절을 집밖에서 자는 것이 아주 꺼려진다. 또한 다음날은 일요일, 성당 미사를 가야 하지 않을까?

 

Secret Santa’s, 고백성사, 올해의 마지막 일..

이것이 웬 떡이냐? 이것이야 말로 Santa’s Surprise가 아닐까? 얼마 전에 아래층 마루(IKEA Tundra)를 하면서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hallway의 조그만 closet의 바닥도 갈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는 몇 년(아마도 십여 년?)동안 쌓여 있던 각종 잡동사니가 있었다.

Secret Santa's Surprise
Secret Santa’s Surprise

주로 Halloween decoration stuff같은 것과 겨울용의 heavy jacket같은 것들이어서 평소에는 별로 열어 보지를 않던 곳이다. 그런데 이번에 완전히 그곳의 모든 것들을 다 들어낸 셈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하지 않던 뚜껑도 뜯지 않은 CHIVAS REGAL Scotch Whiskey 한 병이 나온 것이다. 몇 년 동안 나는 이런 술을 사본 적이 없었고, 유일하게 집에서 마시던 맥주도 이제는 거의 사지를 않는다. $$도 그렇지만 이런 것들의 ‘단점’하나가 조금씩 이런 것에 의존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그냥 싫었다. 담배와 마찬 가지다. 조금만 한눈을 팔면 아주 쉽게 습관성이 되어가는 것이 싫은 것이다. 담배를 끊을 때의 trick을 다시 써서, 술은 남의 집에 놀러 가서 ‘얻어’ 먹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대부분 얻어먹는 다는 사실이 ‘치사’하게 느껴져서 피하게 되곤 하고, 설사 피할 수 없게 되더라도 절대로 과도하게 마시게 되지를 않는다. 그런 배경이지만 가끔 정말 외롭게 느껴지거나 할 때, 술 생각이 나곤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결심은 확고해서 ‘절대로’ 술을 사지를 않았는데.. 그런 나를 가상히 여기셨는지.. 이렇게 뜻하지 않게 술병을 발견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Santa할아버지가 주신 것은 아니고, 사실은.. 아마도 작년에 ‘선물’로 받은 것을 그냥 그곳에 넣어두고 완전히 잊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야말로pleasant surprise가 아닐까? 덕분에 올해 겨울 저녁은 조금 훈훈한 느낌을 받으리라 희망을 해 본다.

어제 오후에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거의 20년 만에 아틀란타 순교자 천주교회에서 ‘한국어 고백성사’ 를 하였다. 결론부터 말을 하면, 이것이다. 이것을 잘하고 못하고는 거의 ‘언어’에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얼마나 준비를 잘 했느냐가 더 중요한 관건인 것이다. 그러니까 영어로 하게 되어도 조금은 ‘미묘한 표현의 제한’을 느낄지는 몰라도 시간을 두고 진심으로 뉘우치며 준비를 잘하는 것이 그저 느끼는 대로 말할 수 있는 한국어 고백성사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쉽다는 것이다. 어제의 경우가 그랬다. 모처럼 ‘자유스러운 모국어’로 하는 것이니까 그저 큰 문제가 없을 줄 잘못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과같이 준비를 철저히 하지를 못했다. 신부님께서 그것을 모르실까.. 아닐 것이다. 조금 신부님께도 미안한 심정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사제경험이 적은 ‘막내’신부님, 김영훈 스테파노 신부님에게 성사를 보게 되어서 조금은 다행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이것을 피할 수도 도망갈 수도 없었다. 거의 무조건 나는 고백성사를 해야만 하는 심정이었다. 그저 시작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이제부터 나는 ‘정상적, 정기적’으로 고백성사를 잘 준비하고 잘 할 것이다. 이것도 레지오에 들어가면서 다시 생각한 ‘부산물’중의 하나라고 할까.. 참 성모님의 묵주기도는 오묘하다고 할까.. 정말 모른다.

The last 10% of work takes 90% of time. 이 경험적인 명언이 정확히 도 잘 들어맞는다. 물론 이것은 경험적으로 어떠한 과제를 과소평가 했을 때 꼭 들어맞는다. 년 말을 목표로 하고 있는 아래층 나무 마루 놓기, laminate flooring이 그것 중의 하나다. 비교적 작은 면적의 화장실의 마루가 그것이다. toilet 아래로 마루를 놓는 것이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들었던 것이다. Toilet을 분해, 그것도 완전히 들어내고, drain hole주변으로 동그랗게 cutting하는 것이 당연히 시간이 많이 드는 것을 왜 예측을 못 했을까? 전에 toilet를 바꾸는 것을 해 본적이 있었지만 거의 10년이 되어가서 자세한 것을 다 잊어버린 상태에서는 더욱 그렇다. drain hole에 wax ring도 필요하고, water line plumbing도 다시 해야 했다. 한마디로 조금은 ‘뼈빠지는’ 일 중의 하나다. 하지만 그것을 하고 나니 정말 보람을 느낀다. $$$도 엄청 save했겠지만 이 나이에도 이렇게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더 나를 기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win-win이 아닐까?

 

雜想: 눈발이 흩날리는 일요일 오후에..

눈발이 흩날리는 일요일 오후에..  어느덧 2010년 대림 3주로 접어들었다. 그러니까 대림 초 3개가 켜지는 일요일이 된 것이다. 지난주에는 주일 미사를 빠지고 말았다. 그 전날 아틀란타 한인성당에서 있었던 레지오 마리애 연차 총 친목회에 거의 하루 종일 참석을 한 것이 조금 피곤했다는 것이 핑계가 되었다.

대림 2010 3주일
대림 2010 3주일

물론 핑계에 불과하고, 아침에 조금 피곤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명심을 하고 미국본당의 미사엘 갔고 Panera Bread (Cafe)에 들려서 평상적으로 small breakfast (bagels & coffee)를 즐겼다. 그런데 회색 빛 하늘에서 하얀 것들이 조금씩 내려옴이 보였다. 분명히 눈발이었다. 싸늘한 바람과 함께.. 아.. 기억에 남을 12월이 될 것이라는 예상도 했다. 경험적으로 십중팔구는 싸늘한 비가 올 시기에 어렸을 때 보던12월의 눈은 참 아름다운 느낌으로 과거와 함께 내려오는 것처럼 착각을 불러온다.

여기까지가 즐거운 것이고.. 다음은 다르다. 12월 자체가 완전히 무엇에 밀려가는 무거운 느낌인 것이다. 이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제일 극치는 크리스마스 다음날이다. 그날로 그렇게 떠들고 북적대던 것들이 거짓말같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 그것은 거의 고통이다. 물론 이것은 ‘세속적’인 풍경이지만, 믿는다는 크리스천들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오죽하면 유타주(State of Utah)의 한 주교는 ‘공문’으로 “12월 24일 이전에 크리스마스 기분을 즐기지 말라” 고 말까지 했을까? 나도 사실 이 말에 동감이다. 그것이 진정한 성탄절의 의미일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 공인 교본: 완독(完讀)  어제로 레지오 교본을 한번 다 읽은 셈이 되었다. 비교적 얇은 종이로 된 책이라서 보기보다 분량이 많았다. 거의 500쪽이 넘는 분량이었다. 올해 10월 19일에 아틀란타 본당 꾸리아 소속의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에 예비 행동단원(공식 선서까지 3개월간의 대기단원)이 되면서 받은 책이 바로 이 공식 레지오 교본이었다. 이 책을 받으면서 단원들이나 단장으로부터 아무런 말을 들은 것은 없었다.

레지오 교본
레지오 교본

그저 공식교본이니까 읽어야 한다는 ‘묵언’ 정도만 나 나름대로 느꼈을 뿐이었다. 하기야 정기회합 중에 항상 조금씩 읽고, 돌아가면서 공부를 해 와서 발표하는 것은 보았다.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그렇게 하다가는 시간이 너무나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입단 1주일 뒤부터 미친 듯이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냥 읽는 것은 거의 ‘고문’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지루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든 것이다. 그래서 조금 변화를 준 것이 keyboarding 으로 하는 ‘필사’였다. 한글타자를 치면서 읽는 것이다. 이것은 그냥 읽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이것은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냥 눈으로 읽을 때에 비해서 keyboarding을 하면 오타에 대한 신경이 쓰인다. 그러니까 더 정성을 드리게 되는데, 여기에 글이 의미를 파악하려면 더 ‘머리’를 써야 한다. 조금은 “고행”같은 느낌이 들어서 아주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거기다 다 읽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완전한 나만의 text copy가 남는 것이다.물론 이것은 copyright가 된 것이라 공개는 못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여러 가지로 쓸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읽은 것은 ‘정독’은 절대로 될 수가 없다. 그저 ‘속독’ 정도가 될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읽음으로써 정말 내가 그 동안 가톨릭 신자로써 무심하거나 무식한 것들이 참 많았다는 것도 실감하게 되었다. 나는 이 교본의 ‘역사’는 잘 모른다. 하지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레지오의 90년에 가까운 역사를 고려한다면 이 책이 오랜 동안의 축적된 경험과 지식에 근거해서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심오한 신학적 고찰과 거의 cookbook에 가까운 실제적 방법론이 기가 막히고 교묘하게 접목을 이루고 있는 이 책은 나에게 거의 제2의 성경에 가깝게 느껴진다. 1월 중순에 있을 정식단원 선서 전까지는 ‘완전 정독’을 목표로 삼고 있다. 다른 책들도 이것과 같이 잘 쓰여져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Amazingly Stupid Chinese (Government)…  솔직히 말해서, 나는 ‘듕귁’ 이라는 말조차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하물며 듕귁정부라는 말은 더 좋아할 수가 없다. 더구나 빨갱이 듕귁과 듕귁정부는 지독히도 싫어했다. 각종 이유로 자기네 인민들을 수백만 명이나 굶겨 죽이고 문화혁명이라고 해서 모택동을 신격화하고.. 정말로 그들의 해괴한 행적은 끝도 없었다. 근래에 들어서는, 드디어는 “인민의 적인 자본주의” 를 교묘하게 이용을 해서 흡혈귀와 같이 $$$를 거지같이 모으더니 아주 선진국같이 행세를 하려 든다. 머릿속은 19세기에 머물고 있으면서 21세기의 국제사회를 대하려 드니 문제가 없을 수가 없겠다. 그 “해괴한 행적 올림픽” 중에서 금메달은 “바티칸과 상관없이 가톨릭 신부,주교를 임명하는 것”이고 은메달은 노벨 평화상에 대해서 “몇몇 광대들에 의해서 듕귁은 바뀌지 않는다”라는 듕귁 외무성의 성명이다. 이들은 $$$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진 모양이다. 빨갱이 시절에는 무시무시하게 많은 인구 덕분에 핵전쟁도 무섭지 않다고 떠들더니 이제는 무시무시하게 많은 $$$ 덕분에 국제적인 관행을 마음대로 무시할 수 있다는, 역시 “빨간 짱꼴라” 적 발상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Elizabeth Edwards…  요새는 참 용감한 여성들이 많다. 과거에 비해서 더 많아진 듯 하다. 어떨 때는 남자들 보다 더 용감한 여성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 여성도 그 중에 하나일 것이다. 나와 나이도 비슷해서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이렇게 공적인 인물이 그것도 암과 싸우다 죽으면 더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 모든 사람이 다 미리 알 수 없는 수명을 가지고 살고 있지만 모두들 영원히 살 것처럼 하루하루를 산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내일 이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실감나게 든다. 물론 평균수명이라는 것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통계이고, 나는 그 통계와 전혀 상관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나는 제일 가까운 사람, 나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부터 느끼기 시작을 했고, 지금은 그런대로 유한하고, 비교적 짧은 인간수명을 느끼면서 하루하루 사는 셈이다.물론 이 ‘용감한’ 여성은 암이라는 병에 의해서 더 오래 살 수도 있었을 삶이 끝이 났지만 끝까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용감함을 보여준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 같다.

 

Early Siberian Blast

드디어 온다. 하지만 한 달이나 일찍 온다. 진짜 추위가 Siberian Express.. 라고나 할까. 한반도에서는 Siberian Express라고 하겠지만 여기서는 Canadian Express가 더 맞는 말이다. 기온이 하루 사이에 무려 화씨 20도 이상 떨어지고 있다. 모래 새벽의 기온은 화씨로 15도까지 내려갈 예정.. 화씨로 15도면 섭씨로 얼마나 될까? 아마 영하 10도 정도가 될까? 좌우지간 이곳의 기준으로 보면 엄청난 추위인데, 여기 바람까지 합세하면 wind chill(체감온도?)은 훨씬 더 심할 것이다. 12월의 이곳은 주로 싸늘한 비가 많이 오곤 하는데 12월 초에 이런 것은 나의 기억에도 거의 없는 것이다. 작년에 이런 강추위는 평년대로 1월에 시작이 되었다. 여름이 지독히 더워서 이것은 역시 예상이 되긴 했다. 연평균은 아직도 거의 일정하니까. 이곳이 이 정도면 북쪽지방인 mid west지방은 훨씬 더 추우니까.. 상상이 간다. 이런 것들 때문에 조금은 더 12월에 있는 ‘휴일’의 기분이 나긴 하지만 밖에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조금 괴로울 것이다.

어제는 나에게 조금 이색적이 날이었다. 모처럼 한국사람이 제법 많이 모이는 모임에 참석을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참가한 곳은 아틀란타 “한국순교자천주교회 천상은총의 모후 꾸리아 제13차 연차 총 친목회”란 길고 긴 이름의 모임이었다. 이런 모임의 이름들은 사실 그렇게 생소한 것이 아닌 것이 연숙이 가끔 전에 언급을 했던 이름들이었기 때문인데 내가 그곳에 가게 될 줄은 정말 정말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이것은 조금 신비스럽다고나 해야 할지 나도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다. 지난 10월 말 부터 나가기 시작한 레지오 회합도 이제 거의 2달이 되어오고 조금 성모님 군단 일원으로 조금씩 나의 모든 것들이 조정이 되고 있음을 느끼고, 그런 배경에서 참가한 이 연례행사는 나에게 너무나 은총과 기쁨의 시간을 주었다고나 할까.

이렇게 많은 ‘전우’들을 보게 된 것도 그렇고 막강한 인원으로 같이 바치는 묵주기도는 정말 감격스러웠다. 나는 사실 처음 그런 것들을 보는 것이다. 비록 동료단원들의 친목이 주 목적이겠지만 공식적인 기도, 신부님 참여 등등이 오묘하게 섞이어서 균형을 잘 맞추었다. 이런 모임이 다른 곳에 어디에 또 있을까? 물론 모두가 ‘행사의 프로’가 아니라서 모임의 진행이 100% 매끄럽지는 못한 것이 조금은 아쉽다. 특히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중에 Audio system의 중요성을 이번에 느꼈는데.. 이것에 문제가 있으면 모임의 진행이 얼마나 힘든가를 절감했다. 이런 모임을 준비할 때는 이것부터 미리 점검을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모든 단원들이 열심히 참가를 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닐까?

 

마리에타 2구역

Thanksgiving Day 전날 저녁에는 몇 달 만에 연숙이와 같이 우리가 속해있는 아틀란타 한인천주교회 마리에타 2구역 미사에 다녀왔다. 지난 6월부터 이 구역모임에 참가를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도 못 나가면 올해를 넘기겠다는 생각도 들고 해서 음식 하나를 해서 간 것이다. 이번의 host family 고창민 클레멘스 형제 댁, 나는 이번에 처음 가는 집이었다. 미사를 드리기에 쾌적한 장소를 제공하는 훌륭한 집, 실내 디자인도 멋있는 그런 집이었다. 이 댁의 따님, 고근정양은 10여 년 전쯤 내가 이곳의 한 한글학교에서 잠깐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커서 대학에서 ROTC까지 하는 용감한 아가씨가 되었단다. 참 흐뭇한 기분이었다. 고 형제는 집에서 ‘밀주’를 취미로 담근다고 하는데 그날도 예외 없이 달콤한 포도주와 인삼주가 나왔다. 물론 집에서 담근 것들이다.

마리에타 2구역은 우리부부가 속해있는 아틀란타 순교자 한인천주교회 (이하 한인성당, 본당)의 아틀란타 서북부 suburb (마리에타 포함)를 포함하는 구역system중의 하나다. 이 지역의 특징은 1996년 Atlanta Olympic을 계기로 급 팽창한 아틀란타의 다른 수도권지역에 비해서 이곳만은 아직도 거의 인구변동이 없는 ‘안정된’ 곳에 속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 사는 한인들의 숫자도 그렇게 많지 않고 안정적이며, 그들은 경제적으로 대부분 안정이 됐거나 되고 있는 그런 연령층이 대부분이다.

우리부부는 현재 한인성당 주일 미사는 안 나가고 있지만 이 구역모임에 나간 지는 거의 5년이 되어온다. 사실 이것마저 안 나가면 우리는 완전히 한인성당과의 연결고리가 없어지게 되는 셈이다. 대부분 성당 구역단체들이 그러하듯 이곳도 active한 멤버는 한정이 되어있고 나머지는 가끔 참석하는 정도이다. 이 구역 시스템의 중요한 목적은 역시 교우들간의 친목도모일 것이지만 그 이외의 기능도 아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구역 신자들이 손수 만든 음식을 성당 점심으로 판매해서 본당을 돕는 것 같은 것도 있다.

 

Irish Folk/ Pop/Gospel Singer Daniel O’Donnell의 “St. Francisco의 기도”

 

나에게 이 첫구역모임 참가는 조그만 culture shock이었다. 비록 열 몇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인 것이지만 나에게는 너무 많은 사람들처럼 느껴진 것이다. 이것은 물론 내가 오랫동안 한국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을 거의 의도적으로 피해와서 그럴 것이다. 그 모임에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조바오로씨 부부가 고작이었다. 나이도 우리가 제일 많은 축에 속했다. 이렇게 해서 조금씩 한인성당을 향한 발걸음이 시작된 것이다.

나의 한 달 전 레지오 가입 후에 이렇게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구역형제자매님들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다. 조금은 더 친하게 보인다고 나 할까.. 아니면 착각인가.. 하지만 분명히 내가 조금씩은 변하고 있음을 나는 느낀다. 이번의 미사집전은 올해 이곳에 새로 부임한 김영훈 스테파노 “막내” 신부님이시다. 이분은 30대의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이시고 다른 두 신부님보다 젊어서, 막내신부로 통한다. 말씀을 어떻게나 또박또박 하시는지 흡사 오래 전 국어시간에서 듣던 그런 발음을 연상시킨다. 역시 예수회 신부님이신데 다른 분과는 달리 미국의  Berkeley에서 공부를 하시고 이곳에 처음으로 부임하셔서, 이곳 미국의 사정을 잘 아시고, 특히 언어문제가 없어서 청소년 사목에서 맹활약이 기대되기도 한다. 조금 이색적인 것은 대부분 신부님들이 술과 담배를 하시는데 이 김신부님은 둘 다 전혀 못하신단다. 그런 것들이 아주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래저래 이곳 본당은 참 하느님의 은총을 최근 들어서 많이 받는 것 같다. 특히 주임신부(Pastor)이신 안정호 이시도르 신부님의 지치지 않는 헌신적 사목활동은 떠나신 뒤에도 두고두고 이곳에 깊은 영향을 남기리라 기대가 된다.

우리구역 교우의 연령층은 3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지만 40~50대가 주축을 이루고 있어서 우리는 조금 은퇴세대에 속한다. 유일하게 나보다 나이가 위이신 분은 전 토마스 아퀴나스 형제님이 계신데, 사실상 이 구역을 오랫동안 지키시고 요새는 건강을 이유로 가끔 나오시곤 한다. 이 전 형제님(교우들은 대부분 형제, 자매님으로 불린다)은 조금 독특하신 분이다. 덕수상고, 고려대학을 졸업하시고 학교에서 오랫동안 가르치다가 미국엘 오신 듯한데, 정치적인 성향이 상당히 진보적이고, 따라서 보수세력을 아주 혐오한다. 쉽게 말하면 상당히 좌익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특히 개인적으로 “박정희”를 지독히 혐오하는데, 이것이 지나쳐서 거의 ‘주사파’로 오해를 살 정도의 발언을 하는데 나는 그것이 상당히 듣기가 거북하였다. 참 세상이 많이 좋아지긴 했다. 이런 발언이면 옛날에는 세계 어느 곳에 있던 간에 문제가 되지 않았던가? 나는 개인적으로 아버님이 육이오직후 공산당에게 납북을 당하셔서 김일성이라면 자다가도 이를 가는 형편인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소화가 안 될 지경이다. 같은 신자 입장에서도 그렇다. 조금 다른 사람들의 입장도 생각을 해 주는 것이 어떨까. 사실 거북한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사실 교우들과 어울리게 되면 자기와 입장이 아주 다른, 심지어는 아주 거북한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 ‘다름’을 어떻게 신앙적으로 이해하고, 포용을 하는가 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특히 거북한 것 중에는, 천주교 교리 중에서 분쟁이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파 헤치며 신자들을 괴롭히는  ‘지식인’ 교우들.. 왜 그럴까?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이란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도가 정말로 필요한 교우들.. 다른 쪽으로는 “초자연적인” 신앙과 popular science를 완전히 혼동을 하는 교우도 본다. 도대체 왜들 그럴까? 그럴 때 조금 common sense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런 조금 거북한 것들이 사람이 모이면 꼭 있는 것이므로 이것으로 신앙공동체의 구역모임을 피하면 안 되는 것을 안다. 하지만 가끔 피하고 싶은 때도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구역모임에 나오는 사람의 숫자는 유동적이지만 아마도 거의 고정적인 숫자는 유지하는 것으로 안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조그만 기적일 것이다. 둘 셋만 모여도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지 않았던가? 올해는 아주 기억에 남을만한 추수감사절 이브의 구역미사가 있었고, 성탄절 즈음의 구역모임은 어떨지 조금 기대가 된다. 작년에는 전근섭 형제 댁에서 “100% 세속적”인 모임을 즐겼던 기억이다. 흡사 노래방에 간 것 같은 그런 분위기의 모임.. 하지만 솔직히 나는 그런 분위기가 사실은 별로 재미있지는 않았다. 이것이 아마도 세대차이가 아닐까?

 

Thanksgiving Day eve

비가 오락가락하고 포근한 깊은 가을.. Thanksgiving Day가 내일로 다가왔다. 작년 이맘때도 지금처럼 아주 포근한 날이었다. 우리의 조촐한 가족만이 모였던 휴일이었고 모두 조금씩 요리를 하는 것을 거들었던 기억이다. 그때는 새로니가 Washington DC에서 일을 할 때여서 급하게 왔다가 급하게 떠났는데 올해는 다시 학생이 되어서 거리와 시간 모두 여유를 가지고 집으로 왔다. 하지만 대신 작은 딸 나라니가 처음으로 밖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첫 해가 되었다. 올해 4월에 따로 나가서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끔 집에 오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독립’적인 개인으로 살고 있는데 그런 사실을 본인도 즐기는 듯 하다.

올해의 Thanksgiving Day는 오랜만에 guest와 같이 보내게 되었다. 새로니의 Emory friend인 Galina가 뉴욕에서 현재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 우리 집에 놀러 온 것이다. 식사만 같이 하는 것이 아니고 며칠 동안 우리 집에 머물게 되어서 조금은 신경이 쓰이지만 예년과 조금 다른 휴일이 되어서 흥미롭다. 애들이 어렸을 적에는 이런 때면 한방에 모여서 재미있는 movie같은 것을 보는 것이 즐거움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시절이 거의 먼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사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인생이 아니겠는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집은 이곳의 전통인 turkey요리를 해 왔다. 아마도 그때가 1980년대 초, 그러니까 우리가 Columbus, Ohio에서 살 때였을 것이다. 연숙이 그곳 성당의 원로로 계시던 이봉모 선생님(지금은 고인이 되셨음)의 부인으로부터 recipe를 받아서 첫 turkey 요리를 했던 때가 그때쯤이었고 그 이후로 거의 한해도 빠짐없이 turkey 요리를 했다. 그래서 이제는 추석이나 설날의 한식 전통요리보다 이 turkey 요리에 대한 추억과 애착 같은 것도 생기게 되었다. 가끔 한국 손님들이 참석을 하면 별로 그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본다. 특히 김치를 꼭 같이 찾는 사람들도 있어서 조금 당황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김치와 먹어도 사실 맛이 있었다)내가 개인적으로 turkey 요리를 제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은 사실 결혼 훨씬 전의 일이었다. 1974년 가을의 Thanksgiving Day였나.. 그 당시 알고 지내던 서울사범대 지학과 출신 성성모씨가 Indiana주 Purdue University에 다닐 당시, 그곳에 놀러 갔는데 , 같은 대학의 한국인 유학생 부부의 집에 초대되어 가서 turkey 요리를 푸짐하게 대접을 받았다. 특히 여러 가지 side dish들이 굉장했는데 그 유학생 부인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미국요리를 배웠는지 모두들 혀를 찰 정도였다. 처음 먹어본 것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요리가 잘 되었는지.. 아마도 둘 다였을 것이다.

ANY CHARACTER HERE

요새 며칠 사이 내린 비로 그나마 남아서 안간힘을 쓰며 가을을 지키던 아름답던 황금색 나뭇잎들이 무더기로 떨어져 글자 그대로 “낙엽의 장관”을 이루었다. 특히 우리 집 차고로 들어오는 길은 길이 하나도 안 보일 정도로 낙엽으로 덥혔다. 이들은 해가 다시 나오면 완전히 마르면서 바람에 휘날려 다 없어질 것이다. 그러면 완전한 겨울로 향하는 12월의 입구..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의 시작이다. 천주교 달력에서는 이날이 새해의 시작이 된다. 11월 28일이다.

낙엽, 낙엽, 낙엽...

낙엽, 낙엽, 낙엽…

12월로 들어설 즈음이면 가끔 그리운 곡이 생각난다. 1960년대 말, 대학시절.. 멋진 가사에 매료되어 guitar로 따라 부르곤 하던 Duo Simon & Garfunkel의 rock version “I am a rock”이 그것이다. 그 대학시절, 가끔 지독한 고독 같은 것을 느끼곤 하면 이 노래를 자장가 삼아 들었다. 이 가사의 주인공이 내가 된 듯한 기분으로..특히 친구 유지호와 같이 부르던 것도 즐거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별명 “우중충” 유지호..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까..

 

I am a rock – Simon & Garfunkel

 

천안함 도발사건 이후 다시 이번에는 연평도 포격.. 정말 끝이 없다. 김정일이 “개XX”는 그 괴상하게 생긴 머리”통”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중에 해부를 해서 히틀러와 비교해 볼 만하다. 촌스러운 북쪽 사투리로 “영쩜 영 미리메타라도 조국을 침범하는 원쑤들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북괴왕조의 방송을 들으면 이런 Shakespeare 희극이 역사상 더 있었으랴..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것들과 버금가게 웃기고 한심한 친구들이 바로 대한민국에도 “수두룩 닥상” 으로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금메달 깜은 소위 말하는 “친북 기독교 단체” 들이다. 이 사람들 과연 머리 속이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미국의 이간을 배격하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동족 형제”인 김정일을 사랑하라“고.. 허..여보세요.. 정신 좀 차리십시오.

11월도 어느덧 중순으로..

IKEA Tundra on living room
IKEA Tundra on living room

한달 넘어 질질 끌어오던 living room의 laminate flooring 일이 오늘 드디어 일단 끝이 났다. 7월 달에 처음 dining room으로 시작된 올해 home renovation project중의 하나다. 그 무덥던 7월 달에 처음 시작된 일이 오늘 우여곡절 끝에 두 번째 목표가 달성되었다. 이 clink-and-snap floor는 글자 그대로 아무런 fastener가 필요 없는 정말로 쉬운 것인데, 문제는 그것이 일단 말썽을 부리면 잘 들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 시작할 때 그런 문제점을 알게 되었지만 이번에 다시 알게 된 것은 그것은 나에게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IKEA Tundra 제품자체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번에 다시 정성을 들여서 잘 맞추어 보니 신기하게도 다 잘 들어 맞았다. 힘든 일은 역시 boundary condition, transition같은 것이다. 정확히 치수를 재고 정확히 corner strip을 자르고..하는 것들.. 역시 나는 pro가 아니라 정말 힘든 작업이다. 거의 20년이 되어가는 퇴색해가던 carpet이 이렇게 반짝이는 hardwood floor로 바뀌니 우선 너무나 신선하고 깨끗한 느낌인데, 우리 집의 강아지 Tobey가 앞으로는 바닥이 미끄러워서 고양이 Izzie를 갑자기 ‘공격’하기가 조금 힘들어질 듯 하다.

Glorious neighborhood Fall color
Glorious neighborhood Fall color

빙점까지 내려갔던 날씨가 다시 평균기온으로 돌아왔고, 매일같이 아주 거의 정확하게 가을 평균기온을 유지하고, 나무들도 순조롭게 ‘가을 색’으로 변화되고 있다. 이곳에서 fall color라는 것을 한국에서는 그냥 단풍이 진다고 할 듯하다. 사실 단풍이란 것은 특별한 나무의 이름이 아닌가? 그러니까 fall color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오늘은 너무나 오랜만에 연숙과 같이 subdivision neighbor(동네)를 Tobey와 같이 산책을 하였다. 우리 subdivision은 언덕이 알맞게 있는 산책도로가 있는데 천천히 걸으면 20분 정도 걸린다. 차의 왕래도 아주 적어서 개를 산책시키기에는 정말 알맞은 코스인 것이다. 1992년 부터 이곳에 살았지만 사실 정기적인 산책을 하기 시작한 것은 2007년부터였다. 친구 명성이가 이곳에 잠깐 들렸을 때, 나에게 걷기를 거의 완강하게 권했다. 자기는 거의 매일 걷는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걷기는 했지만 습관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2007년부터는 거의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걷고 있다. 일주일에 두세 번 YMCA에 따로 가서 하는 운동과 이 걷기는 나에게는 유일한 건강보험인 것이다. 연숙은 언덕이 있는 것 때문에 걷기를 꺼려하는 편인데 앞으로는 자주 걷겠다고 한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그렇게 믿지는 못한다. 과거에도 그런 적이 있었으니까. 오늘 본 나무의 색깔은 너무나 찬란했다. 얼마 안 있으면 바람과 비로 인해서 다 떨어질 것이다. 아.. 찬란한 가을이여.. 조금만 더 머물다 가거라.

 

아틀란타 순교자성당 IT support team

어제는 나에게 조금은 특별한 날이 되었다. 나로서는 너무나 오랜만에, “처음 보는 사람들”을, 그것도 한꺼번에 많이 만난 것이다. 그 자리는 한인본당 (아틀란타 한인 순교자 성당) 월례 ‘전산팀‘ 회합이 있었던 곳이다. 전산팀이란 간단히 말하면 IT support team일 것이다. 성당내의 여러 가지 technology: computer, network system, website등등을 개발 관리하는 본당 신자들의 모임인 것이다.

어제 이곳에 나가게 된 것은 역시 최근에 가입한 레지오의 영향이 지대적이었다. 암만 생각해도 레지오를 통한 “오묘한 일련의 사건의 고리”를 느끼게 되고, 이것이 현재 나를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이런 기회를 전 같았으면 무시하거나, 미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전산팀에 나가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레지오의 ‘본당협조’ 활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전에도 자원봉사의 일원으로 본당을 돕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다. 다만 그것을 이루는 다리역할을 못 찾은 것 뿐이었다. 이번에 레지오가 그 다리를 이어준 셈이다. 거의 모든 교회나 성당들이 시대의 흐름으로 IT (Information Technology)의 역할이 필수적이 되었다. 처음 주보 정도를 자체적으로 만드는 것으로 시작해서 신자, 회계관리 같은 것 등도 다 전산화가 되었다. Internet의 일반화로 이제는 website도 필수가 되었다. 이런 것들을 모두 맡아서 전산팀 멤버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특히 성당의 양적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지면서 IT support의 중요성이 그만큼 커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배경을 생각하며 전산팀 회합에 처음으로 참석을 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운영을 하고 있는지 참 궁금했다. 2시간 남짓의 회합은 참으로 유익한 것이었다. 나의 의문점을 거의 다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단체에서 나는 ‘은퇴세대’로 밀려나고 있는 실정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곳은 조금은 그런 rule에서 예외가 아닐까 희망을 해 본다.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IT skill set은 지금 성당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과 많이 중복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현재 당장 도울 수 있는 분야는” physical” computer system, (WAN,LAN) networks, phone system intergration정도가 아닐까 생각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분명해질 것이다.

 

첫 빙점, 슬픈 하루, 501 Must-Read Books

아틀란타 지역에 올 들어 첫 영하의 날씨가 들이 닥쳤다. 평년보다 일주일이 빠르다고 한다. 하도 ‘요상’한 기후가 올해를 기록으로 올려 놓더니 이것 조차 그 중의 하나가 되려나. 오늘 낮에는 잠깐 눈 싸라기까지 내려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단풍도 깊이 들지 않았는데 이렇게 겨울의 맛을 보여 주는 것이다. 밖에서 한여름을 지낸 화분의 화초들을 부리나케 집안으로 옮겨 놓았다. 분명히 날씨는 다시 따듯해 질 것이지만 언제 다시 추워질지 모르는 계절이 아닌가? 작년의 겨울은 정말 추웠는데 올 겨울은 어떨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어제는 연숙이와 같이 하루 종일 우울한 날을 지냈다. 연숙과 가까이 지내던 성당 교우 최희상씨의 대학생 작은 아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청천벽력이라고 하던가? 사고가 난 것이 아니고, 급성 뇌막염이었다. 이병은 가끔 대학교 기숙사의 학생들에게 걸리는 고약한 것이고, 치사율이 정말 믿지 못할 정도로 높다. 거의 아주 급성으로 손을 쓰기도 전에 이런 날벼락을 맞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나 우리에게 가까운 곳까지 온 것이다. 아들을 잃은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우리는 그저 기도로 고인의 명복을 빌고 성모님과 함께 슬픔에 잠겨있는 부모님을 위로해 주시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할 수 밖에.. 인간은 이렇게 나약한 것일까..

501 Must
501 Must

우연히 Costco에서 501 MUST-READ BOOKSdiscount book을 하나 샀다. 나에겐 거의 보물같이 느껴지는 횡재였다. 이런 류의 책이 한국에서 나온 것은 그런대로 많이 기억이 나고, 아직도 몇 권은 아직도 가지고 있다. 이제는 거의 “고서”가 되어가고 있을 정도로 오래 된 것이지만.. 예를 들면 “역사를 움직인 100권의 철학책”, “오늘의 사상: 100인의 100권”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번의 책은 영어권에서 500권이 넘게 각 분야별로 뽑은 것인데, 영국에서 출간된 책이라는 것이 독특하다. 그러니까 조금은 “미국의 입장과 영향”에서 벗어난 것이다. 나의 희망은 이 책의 목록에서 내가 얼마나 ‘무식’하게 살았나 하는 것을 빨리 발견하고, 조금이나마 더 유식하게 살다 갔으면 하는 것이다.

9월의 첫날에..

휴~~~ 지난 밤에 예기치 않게 전기가 나가버렸다. 맑고 써늘한 밤에 전기가 나간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그것도 거의 2시간이 지난 다음에 돌아왔다. 날씨에 의해서 벼락같은 것이 치면 사실 몇 초 동안 깜빡 거리는 것이 보통이니까, 이것은 분명히 그런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99% 짐작에 바로 옆의 Roswell Road 확장 공사에 의한 것일 것이다. 4차선을 거의 8차선으로 확장하는 소위 말하는 Obama’s Economic Stimulus Project의 하나다. 그러니까 ‘공짜’로 연방정부에서 받아서 하는 것이니까 우리의 local tax 는 거의 쓰이지 않는 것이다. 그 정도의 큰 공사라서 분명히 지하로 뻗어있는 고압선을 옮겨야 하고.. 그러다가 앗차! 했을 것이다. 우리 집의 computer network system은 매우 ‘약한’ battery backup (UPS)으로 단전으로부터 보호되어 있다. 주로 잠깐 동안만(최대 10분 정도) 정전을 막아주는 것인데 2시간은 무리, 무리다. 아침에 보니까 network system이 엉망이 되어 있었고 복구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난 몇 달처럼 무더위였으면 아마도 초저녁 잠을 설쳤을 것이지만 다행히 시원한 밤이었다.

9월 1일은 나의 아내 연숙의 생일이다. 나이를 세기는 이제 조금 재미가 없고 그저 우리 집 식구 4명 중 2명은 모두 1월 달에, 나머지 2명은 9월 달에 생일이 있다는 정도지만, 조금 재미있는 사실은 그 같은 달의 두 사람 생일의 날자 사이가 정확히 16일 이라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정말 우연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집에 있었을 때는 조금 시끄럽게 보내야 했다. 아이들이 그렇게 생일이란 것을 즐기는 줄 몰랐다. 너희도 나이가 조금 들어 봐라.. 하면서 세월이 흐르고 지금은 전에 비해서 조금 조용해진 편이고, 사실 조금 편한 기분이다. 그래도 서울에 계시는 처형께서는 꼭 전화를 주신다. 처형 댁도 모두 건강한 나날을 보내시기를 기도해 본다.

얼마 전에 IKEA 에 가서 Tundra Laminate floor package 15개를 사왔다. 일층의 나머지를 모두 나무 마루로 끝내려는 계획이다. 물론 dining room으로 경험이 생겨서 조금 자신은 있지만 반대로 어떤 surprise가 나를 기다리는지 그것도 조금 걱정이 된다. 이런 일들은 언제나 꼭 예상치 않은 ‘복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방과 방으로 연결되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transition handling인데, 내가 pro가 아닌 이상 언제고 나를 괴롭힐 듯 하다.

 

9월은 식구 두 명의 생일도 있지만, 그 악몽의 9/11 terrorist attack 기념일이 버티고 있다. 정말 괴로운 기념일이다. 그렇다고 피하거나 생각을 안 할 수도 없고,사실 그래서는 안될 것이다. 세월이 아직도 그것을 잊을 만큼 흐르지 않았다. 그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의 영혼들을 기억한다. 그 surreal한 느낌을 어떻게 말로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또한 회교도들을 어떻게 보고 생각할 것인가.. 참, 정말 괴롭고 어려운 문제다.

9월 하면 생각나는 노래는 역시 Come September란 노래가 있다. 하지만 가슴에 더 와서 닿는 듯한 9월의 기분은 역시 패티 김의 “구월의 노래” 가 아닐까. 같은 노래를 혜은이도 불렀는데 역시 참 듣기 좋다. 아내 연숙이 대학시절 대학교 정문의 수위아저씨가 당신은 꼭 혜은이를 닮았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나와 직접적으로 노래에 대한 추억은 없지만 간접적인 인연으로 들어 보았다.

Summer Office with Home Cloud

old office before moving
old office before moving

작은 딸, 나라니가 이사를 나가면서 방이 비게 되었다. 그 방은 동북쪽으로 창이 있는, 여름에는 비교적 시원한 방이고 나의 전 office 보다 조금 더 넓다. 단점은 조금 어둡고 겨울에는 조금 더 춥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은 두 딸들이 얼마 동안(mostly during elementary school years) bunk bed를 놓고 같이 자던 bedroom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지난 6월초부터 방을 옮기기 시작해서 거의 한 달을 걸려서 끝이 났다. 이렇게 오랫동안 방을 옮겨 본 적이 없었다. 이유는, 나이에 의해서 느려진 동작, 짐을 정리하는 데 걸린 시간 (이럴 때 많이 버려야 한다),6월 달의 ‘살인적’인 더위.. 등등으로 나름대로 핑계가 있다.

짐을 정리한 것은 단순히 책이나 서류 같은 것들을 내다 버린 것 이외에도 등치가 아주 큰 computer work desk 두 대를 해체하는 작업도 있었다. 이것은 particle board로 만든 정말 신경질 나게 무거운 monster급인데 disassemble자체는 비교적 간단하나 그것들을 garage로 옮기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 평소에 weightlifting이라도 가끔 해둔 것이 이럴 때 톡톡히 도움이 되었다. 그것 두 대가 빠져나가니까 방들이 비교적 크게 보였다.

new 'lawyer' office
new ‘lawyer’ office

이래서 나의 new office는 정말 무슨 lawyer office같이 단정한 desk하나만 중앙에 놓인 그런 아담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monster tube(glass) monitor가 flat screen monitor로 바뀌어서 더 그런 것이 가능했다고나 할까. 3 unit book shelves, drawer chest, file drawer 그것이 전부가 되었다. desk를 벽에 붙이지 않으니까 computer wiring이 조금 문제가 되었다. 절대로 pc box를 desk 옆에 놓기 싫었기 때문이다. 보기에도 그렇고, fan의 소음도 그렇고, desk를 조금씩 옮길 때도 지장이 있다.

Desk 가 과히 넓지를 않아서 가급적 pc peripherals의 크기가 작으면 좋다. pc monitor는 이미 17″로 고정적이고 mouse도 마찬가지다. PS/2 connection도 거의 모두 usb로 대체가 되어서 과제는 조금 간단해 졌다. usb hub을 monitor뒤나 옆까지 끌어오면 된다. 그래서 이제까지 쓰던 ps/2 keyboard를 정말 small footprint usb keyboard로 바꾸었다. 이것은 정말 작아서 보통의 laptop keyboard보다 작다. 나머지 할 일은 video(VGA) 와 usb cabling을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pc box에서 desk/monitor까지는 비교적 가깝지만 만일을 위해서 12′ 정도는 필요하다. usb의 경우는 이미 16′ active extension cable이 있어서 해결이 되었고, 문제는 long VGA cable인데.. 이번에 googling을 해보니 classic한 thick vga cable 외에도 impedance matching vga-to-CAT5 converter가 보였다. idea가 좋았다.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vga cable 대신에 Ethernet cable을 쓰는 것이다. pricing이 눈을 끌었다. $20~$30 range였다. high quality vga cable과 큰 차이가 없었고 cabling range도 보통 20’가 넘는다. Too good to be true.. 임에 분명 하지만 모험을 하는 셈 치고 order를 하고.. 써 보았는데, 역시 too good to be true ..였다. 문제는 connector가 너무나 motion sensitive한 것이다. 조금만 건드려도 video가 흔들렸다. 웬만하면 ..하고 생각했지만 역시 안되겠다 싶었다. 결국은 12′ classic thick vga cable을 쓰게 되었다. 이것은 예상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직 분명하지 않은 것은 혹시 그 converter가 1280×1080이하의 resolution에서는 ok일까..하는 것이다. return하기 전에 한번 test를 해 보아야겠다.

kitchen Summer office
kitchen Summer office

이런 작업이 끝나고 새office에 앉아 보니 경치가 훨씬 좋았고, 조금은 덜 더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미 더워진 날씨에는 새 office도 마찬가지.. 2층 이라 더위를 피할 도리는 없다. 6월 달 거의 3주간 계속 최고온도가 95도(~35C?)였다. 이것은 조금 예상을 했던 것이다. 지난 겨울이 유난히 추웠기 때문이다. 평균온도를 유지하려면 이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피난을 간 곳이 역시 아래층의 kitchen이다. 그곳에는 먹을 것이 옆이 있고,밝고, pc/tv monitor가있다. 그러니까 TV도 볼 수 있고, home server에 있는 video를 볼 수도 있다.

현재 나의 laptop pc는 사실 prime time이 훨씬 지난, 그러니까 ‘고물’에 속한다. 나라니가 쓰던 것을 물려 받았기 때문이다. 겨우 1.5GHz/768MB 정도.. 겨우 mid-size video를 간신히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러니까 desktop replacement로는 사실 horsepower 가 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good news는 이 정도면 소위 말하는network thin client로는 적격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client-server/remote desktop mode를 쓰는 것이다. 물론 network speed가 관건이지만 이미 우리 집은 이미 gigabit Ethernet network이 깔려 있어서 전혀 문제가 없었다.

현재 우리 집에는 physical pc (laptop포함) 7대가 gigabit network에 연결되어서 돌고 있다. 그 중에 3대는 server closet에 있고 하나가 연숙의 office, 또 하나가 나의 office, 그리고 kitchen에 하나, 그리고 나의 mobile laptop이다. Server closet(at garage)에 있는 3대 pc server는 모두 VMware server 가 각종 virtual machine을 가지고 있다.

home server closet
home server closet

여기서 핵심은 이곳 virtual machine에 있다. 나는 99.9% 이 virtual pc를 main desktop pc로 쓰고 있는 것이다. 현재 도합 8대의 virtual machine이 항상 running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Asterisk pbx도 포함되어있다. 이 Asterisk pbx는 우리 집의 phone (including VOIP phones) 전체를 control하고 있다. 나머지는 대부분 Microsoft Windows XP, English & Korean 이고, Ubuntu Linux도 있다. 그리고 각각 virtual pc는 나름대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은 email 전용이고, 어떤 것은 web browsing, 어떤 것은 download전용, media server, Photoshop editing 이런 식이다. 이런 approach의 특징은 무슨 문제가 생기면 (like malware, spam, worm, virus infection etc) 그 특정한 virtual pc를 지우고 다시 만들면 된다. 이것은 사실 요새 많이들 말하는 cloud computing과 다름이 없다. 다만 public이 아니고 private, home cloud인 것이다. 이 home cloud 덕분에 out-of-office에서도 별 문제없이 ‘같은’ computer를 쓸 수가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