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eam dream

 
Dream Dream – Everly Brothers – 1960

반가운 꿈, 어제 밤에는 오랜 만에 조금은 뚜렷한 꿈에서 깨어났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꿈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가끔 ‘좋은 꿈’은 다시 꾸고 싶기도 했지만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지는 않고 살았다. 하지만 꿈이란 것, 지금은 과학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99.9% 예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 ‘엉뚱하고, 말도 안 되고, 엉터리’ 같은 주제의 꿈을 예상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오래 된 것이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classic한 것들도 몇 가지가 있고, 나는 그것을 계속 소중하게 기억하며 살고 있다. 대부분 ‘좋은 꿈’ 에 속하는 것들이지만, 어떤 것은 정말 ‘이상한’ 것도 있다. 남들도 그렇겠지만, 좋은 꿈은 대부분 깨고 나면 너무나 깬 것이 아쉬워서 섭섭하고, 나쁜 꿈은 반대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어서 반갑다. 이렇게 꿈도 참 공평한 것이다.

한창 자랄 적에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많이 꾸었는데, 그것은 키가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들어서 좋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나의 키에 별로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물론 떨어지는 그 자체는 대부분 ‘날라서 사뿐하게’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어떤 것은 아직도 생생한 상상할 수 없이 색깔이 ‘진했던’ 그런 ‘초원과 하늘’ 을 본 것인데 어찌나 그 색깔들이 그렇게 ‘찐~’ 하던지.. 지금도 머리에 남아서 다시 한번 보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되었다.

 공상과학 만화, 특히 어릴 적에 완전히 심취했던 ‘라이파이, ‘철인 28호‘, 왕현의 ‘저 별을 쏘라‘ 등의 만화를 볼 당시의 꿈도 기억에 남는다. 그 중에 제일 재미있던 것은 ‘잠자리 채’ 로 ‘잠자리 비행기’를 잡던 꿈이었다. 그러니까 ‘방충망’으로 ‘헬리콥터’를 잡아 채는 꿈이었다. 그 당시 제일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이 ‘잠자리 비행기’ 였는데, 그것을 잠자리채로 결국은 하나를 ‘잡았다’. 잠자리채 속을 가까이서 보니 그것은 아주 ‘작은’ 장난감 같은 것이었고 손으로 꺼내려고 하는 순간에 잠에서 깨었다. 그때 처음, 이런 멋진 꿈에서 잠을 깨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것을 느꼈다. 이런 것이 ‘좋은 꿈’ 중에 하나였다.

 청춘의 절정기에는 ‘성장, 남성 male’ 호르몬(hormone)의 영향으로 많이 ‘이성을 그리는 환상’에 가까운 꿈을 많이 꾸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에로틱 fantasy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남자형제가 없던 나는 이런 것을 그저 속으로만 넣어두고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이제 생각하면 ‘건강’한 방법은 아니었다. 가능한 한 남자 친구들과도 그런 경험을 나누었던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끔 내가 ‘변태’가 아닐까 하는’틀린’ 걱정도 했기 때문이다.

10대에서 20대로 인생의 초기에 해당하던 그 시기다. 그때의 ‘최고’의 꿈은 역시 ‘지적이고, 멋진 여자’가 나에게 은근한 미소를 보내준 그런 류인데, 불행하게도 바로 그 기쁨의 ‘순간’에 깨곤 하였다. 좋은 꿈은 항상 그렇게 깨지곤 했다. 이런 꿈은 결혼 훨씬 후에도 가끔 꾸었고, 결혼 전과 달리 깨고 나면 약간의 ‘죄의식’을 느끼게 되어서 전과같이 기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꿈 자체는 정말 신선하고, 가벼운 흥분을 주는 그런 것이었다.

 20대에 나를 괴롭힌 꿈은 다른 것이 아닌 ‘가위 눌림‘ 이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꿈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꿈을 꾸면서 이것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 당시 시카고에서 알고 지내던 어떤 형 뻘이 되는 일본사람 (히다카 켄조 상)이 듣더니 자기도 똑같은 경험을 한다고 해서 얼마나 ‘안심’을 했는지 모른다. 역시 ‘고민’은 나누어야 가벼워 지는가.. 이 꿈은 무엇인가 악몽에 시달리다가, 목이 조이는 느낌이 들다가 나중에는 몸 전체가 ‘천천히, 완전히’ 굳어져 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미 시작되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그 일본인 켄조 형은 이럴 때, 절대적으로 남에게 알리거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깨어나야 한다고 경고를 하였다.

이런 꿈은 정말 괴로운 것이었지만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부터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해서, 30대에 들어오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의학적인 현상’에 불과하고, 몸이 허약할 때 생긴다고 했지만, 나는 전적으로 다 믿지는 않는다. 과학적인 것 이외에 어떤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꿈이 시작되기 얼마 전에 The Exorcist란 무서운 영화를 보고 일주일 동안 밤에 불을 켠 채로 잔 괴로운 경험이 있어서 혹시 그것도 한 몫을 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나에게는 특기할 만한 몇 가지 ‘악몽’이 있다. 지난 10년 동안 가끔 괴롭힌 것은 갑자기 머리카락이 모두 벗겨지는,그러니까 하루 아침에 ‘대머리’가 되는 꿈이었다. 물론 50대에 들어오면서 빠른 속도로 빠지는 머리카락에 겉으로는 나타내고 싶지 않지만 암암리에 신경이 쓰인 것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대머리가 된 꿈은 꿈 속에서도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깨고 나면 꼭 식은 땀을 흘리곤 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대머리가 되지 않고, 점차 ‘서서히’ 빠진다는 사실만은 이런 꿈에서 깨어나면 나를 조금 위로하곤 하였다.

하지만 진짜 악몽은 이것이 아니다. 이 악몽은 이제 나의 ‘친구’가 된 정도로 역사와 ‘실감’을 자랑한다. 이것은 학교에 대한 것, 그것도 ‘공부, 성적’에 관한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대부분 사람들에게 학교 ‘공부,성적’이 얼마나 필요이상의 스트레스를 주었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특히 이것은 지난 20년 동안 거의 정기적으로 겪는 악몽인데, 악몽의 특징인 “깨어 났을 때의 안도감” 은 이것이 최고다. 1980년 부터 PBS TV에서 재방영이 되었던 The Paper Chase..란 TV시리즈 (드라마)가 있었다. 이것은 원래 1970년대 초에 소설로 나왔고, 곧 영화화가 되고, 1978년부터 CBS TV가 드라마화 한 것인데 한국에서도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란 제목으로 소개가 된 것이다. 이제는 추억의 ‘고전’이 되었고, 특히 1980년, 신혼 초에 콜럼버스(오하이오 주)의 학교근처 1 bedroom Riverview Apartment에서 연숙과 같이 일요일 아침마다 침대에 누워서 빠짐없이 PBS TV로 이것을 보던 것도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Prof. Kingsfield & Hart in The Paper Chase, 1978
Prof. Kingsfield & Hart in The Paper Chase, 1978

이 드라마 첫 회의 에피소드와 내가 겪었던 ‘진짜’ 경험이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인 것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Hart)이 하버드 법대(Harvard Law School)에 ‘간신히’ 들어가서 그 첫 강의에서 겪는 ‘고통’은 가히 dramatic한 것이다. 호랑이 같은, 킹스필드 교수(Prof. Kingsfield)가 모든 것이 준비가 덜 된 신입생(하트, Hart)을 심리적으로 거의 ‘죽이는’ 것이다. 급기야 주인공의 꿈에서 교수가 나타나 ‘진짜로 무덤 속으로 넣는’ 것 까지 경험하는 것인데, 그 정도면 시험과 그에 따른 성적(표)으로 인한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가히 극치의 수준이 아닐까? 문제는 내가 그와 거의 비슷한 꿈을 ‘아직까지’ 거의 정기적으로 지난 30년 이상 꾼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정말 괴로웠는데, 지금은 사실 ‘완전히’ 익숙해져서 견딜 만 하고, 심지어는 꿈에서 깰 당시의 ‘안도감과 기쁨’ 때문에 기다릴 때도 있다. 아~ 내가 지금 학교를 안 가도 된다는 그 사실 하나로 그렇게 기쁘고, 무슨 구원을 받은 것 같은 기쁨까지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나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꿈일 것이라, 체념하면서 오래 살았는데 우연하게도, 가깝게 지내던 서울고, 서강대 출신 최동환 씨가 나와 비슷한 꿈을 꾼다고 들은 후부터 조금은 안심까지 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나의 꿈은 위에 말한 드라마와는 다르게 특별한 교수와의 문제에 대한 것은 아니고, 내가 과목을 듣는데 전혀 공부와 시험준비가 안 되거나, 덜 되었을 때의 그 불안과 고통에 대한 것이다. 연세대 시절에 그런 경험을 몇 번이나 했고, 그 후 미국에서 다니던 학교에서 거의 주기적으로 그런 ‘실화’를 겪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잠재의식에 완전히 뿌리를 잡은 것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잠자고 있는 이 괴로운 잠재의식을 어떻게 없애 버릴 것인가? 나는 모른다.

겉으로만 돌면서 나를 피해가던 종교, 신앙에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그래서 초자연적임을 이제는 믿게 되었고, 그 중에는 꿈도 포함이 되었다. 인생, 역사, 자연, 거기에다 꿈 등이 전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요새는 꿈을 사실 기다리며 즐긴다. 또 하나, 덤으로 나와 같이 나란히 살아가는 나의 인생과 ‘역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립지만 절대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을 꿈에서 기다린다. 그 중에는 나를 거의 잊고 사는 나의 사랑하는 누님과, 천국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나는 오늘, 내일 의 꿈속에서 다시 기다린다.

 

Ohio State, First Years (2)

고윤석씨 부부, 1979
고윤석씨 부부, 1979

고윤석씨는 비록 전기과의 undergraduate에서 공부를 하고 있긴 했지만 사실 그는 나이 때문에 그의 classmate들 보다는 우리들과 더 잘 어울리고 학교의 규칙에 어긋나지만 우리들과 같이 대학원생의 office를 쓰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활발하고 서글서글한 성격의 호남(好男) 이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는 데는 남모르게 힘들어했다. 우선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관계로 상대적으로 수학실력이 같은 학년의 한국학생들보다 떨어졌고, 그 다음은 전공에 대한 정열이 그렇게 많지를 않아 보였다. 그러니까 그 당시 전기과의 직업전망 때문에 이 과를 선택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끔 유근호씨에게 ‘전기’에 대한 정열이 없다고 핀잔을 주곤 했다. 나는 속으로 조금 우스웠다. 내가 보기에는 정 반대로 보였는데..

고윤석씨의 부인은 연대 사학과 출신의 연상이었는데 이것도 역시 고윤석씨의 활발한 성격으로 열렬한 구애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기억에, 유학생들의 파티에 가서 보자마자 춤추기를 청하고, 거의 일방적으로 구애를 한 끝에 결혼을 하였다니.. 나는 조금 상상하기가 힘들지만, 영화 같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녀는 OSU Admissions Office에서 일을 하고 있는 관계로 누가 다음학기에 이 학교로 오느냐 하는 것 뿐만 아니고 대부분 유학생들의 상세한 학력이나 이력 같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부부와 나는 가깝게 지낸 편이었지만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나, 특히 나의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아직도 고윤석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다. 언젠가 편할 때 정식으로 사과를 하려 했지만 그것도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다.

유근호 형과 박호군씨, 1978
유근호 형과 박호군씨, 1978

그리고 생각나는 사람은, 비록 나와 가깝게 지내지는 못했지만 기억에 나는 사람이다. 화학과의 박호군.. 고등학교는 모르겠지만 서울대 출신으로, 거의 영화배우 같은 느낌을 주는 호남형이고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그러니까 거의 ‘이상적인 남자’ 의 표본이라고나 할까? 이분은 내가 입학하자마자 부터 유근호씨 덕분에 자주 보게 되었다. 내가 유근호씨와 가까이 지낸 때문에 사진에도 남아있다. 기억에 유근호씨가 참 이 분을 좋아했었는데 지금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아마도 둘 다 천주교 신자였던 것 같았다. 그래서 더 가까이 지냈는지도.. 그리고 이분의 부인이 남편과 같은 화학과에서 함께 공부를 하던 유학생이었고, 남편은 유기화학, 아내는 무기화학을 한다고 해서 아주 인상적이었다. 얼마 전에 아주 우연히 인터넷 으로 한국천주교 주교회 발행 월간 경향잡지를 보다가 어떤 여자분이 화학에 대한 수필을 쓴 것을 보았는데 저자의 이름이 조금 귀에 익어서.. 약력을 보니 역시 Ohio State 출신이었고, 이분이 바로 박호군씨의 부인인 황영애 씨 (상명여대교수)였던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첫 학기, Winter quarter 나의 ‘기본실력’을 테스트하는 좋은 기회였다. 내가 이곳에서 잘 견딜 수 있는가를 시험할 수 있는 때였다. 내가 좋아하던 나의 passion 이던 control system의 여러 과목을 ‘대거’ 신청, 수강을 하게 되었다. 이것만은 내가 자신을 하던 것들이라 아주 ‘과중’하게 신청을 하고 단단히 별렀는데, 과정과 결과가 아주 ‘참담’하였다. 수강과목이 너무나 많았고, 대부분 ‘어려운’ 것들이어서 겨울을 거의 office에서 먹고 자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한 과목은 결국 withdraw를 하게 되었다. 제일 공을 많이 들인 과목이 digital control system이었는데, 교수가 아주 어려운 사람, Dr. Fenton이어서 사실 A학점 받는 것은 미리 포기할 정도였다. 이것 때문에 나는 사실 classical control system에서 많이 열기가 식었지만, 뜻하지 않게 친하게 된 digital system쪽으로 구미가 당기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이 겨울학기는 유난히도 힘이 들었는데, 공부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나에게는 작은 ‘교통’사고가 있었다. 차 사고가 아니고, 내가 타고 다니던 bike(자전거)사고였다. 이것은 시카고 있을 때부터 타던 그런대로 편리한 12 speed, disc brake이 있었던 것이어서 이렇게 큰 캠퍼스에서는 정말 안성맞춤인 것이었다. 그런데 추운 어느 날 캄캄한 밤에 집으로 돌아갈 때, 학교 내의 어떤 길에서 신나게 달리던 중, 바퀴 밑에 무언가 걸리고, 나는 공중으로 떠서 완전히 얼굴로 아스팔트 도로에 떨어지게 되었다. 너무나 순간적이어서 손을 쓸 수가 없어서 얼굴에 심한 마찰,타박상을 입게 되었다. 정신은 말짱해서 다시 office로 돌아와서 얼굴에 흐르는 피를 씻고 보니, 이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 때까지 office에 남아서 공부를 하던 고윤석씨와 이규방씨가 보고 놀라서 학교병원에 전화를 하고 구급차까지 와서 나는 졸지에 응급실로 들어갔는데.. 여자 의사가 다짜고짜로, “Who is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하며 물었다. 아마도 나의 머리를 의심한 듯 했다. 그래도 정신은 말짱해서, “Jimmy Carter“라고 대답을 하고 얼굴에 상처를 소독을 한 후 나를 내보냈다. 그 상처는 거의 한 달이 갔는데, 붕대를 얼굴에 처매고 매일 학교 식당을 드나드는 것도 웃기고, 그것을 계기로 한 과목을 withdraw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그 해 봄학기 때는 조금 모든 것이 안정이 되어서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 Dr. McGheeAutomata Theory란 과목에서는 100점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Graduate Research Associate (RA) 자리를 소개받게 되기도 했다. 그 자리는 인도 출신의 digital system교수인 Dr. Jagadeesh 가 일하던 OSU 약학대학의 연구실이었다. 그러니까 전기과와 약학대학간의 공동 연구실인 셈인데 그곳엘 가니 전에 말한 김미영씨와 최희경씨가 있었다. 나는 사실 이 연구실에서 석사학위 논문을 쓰게 되는데, 그것이 1979년 여름까지 계속 되었다. 최희경씨는 경기여고, 서울대 약학과 출신의 전형적인 수재 형이고, 그녀의 남편도 경기고, 서울대 출신의 의사로 조금 있으면 OSU로 올 예정인, 부부 둘이 소위 말하는 KS 마크 부부였다. 김미영씨는 최희경씨의 선배였는데 이분도 은근히 공부도 잘하고 노는 것도 잘하는 그런 재주 있는 분이었다. 그 당시는 처녀였지만 1년 뒤에 수학과의 최봉대씨 와 결혼에 골인을 하게 된다.

가을학기가 되면서 비교적 가족적인 분위기의 우리 전기과에도 조금 찬 공기가 느껴지게 되었다. 새로운 유학생들이 도착한 것이다. 경복고, 서울대 출신의 민위식씨, 용산고, 서울대 출신의 박인규씨.. 완전히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이들은 그런대로 reasonable한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절대로 chemistry는 맞지를 않았다. 이것은 참 아까운 노릇이었지만 별 수가 없었다.

Just When I Needed You Most
Randy VanWarmer

1979년 OSU campus를 생각케 해 주는 classic

가을학기가 지나면서 나는 완전히 Dr. Jagadeesh 밑으로(RA) 들어가서 그의 약학대 연구실에서 digital speed control of DC motor 란 주제로 논문을 쓰는 준비를 하게 되었고 실제로 전에 이용한씨가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만들어 놓았던 centrifuge control system을 내가 물려받아 거기에 쓰일 microprocessor-based(Intel-8085) motor speed control system을 design하게 되었다. 이론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이 조화를 잘 이루어야 하는 과제로 논문을 쓰게 되어서 큰 부담이 되었다. 내가 일하던 곳은 약학대학이라는 인상보다 computer lab같은 인상을 줄 정도로 최첨단의 컴퓨터 시설이 되어있었는데, 그 제일 큰 이유는 나의 지도교수의 약대 상대편 교수가 완전히 컴퓨터 ‘광’에 속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는 대부분 mini computer가 단과대학 연구실의 주 기종이었는데 실제로 전기과나 computer science 쪽 보다 더 그런 것들이 많았다. 그 교수는 Dr. Olson이라는 사람인데 어디에서 돈이 그렇게 오는지 계속 새 것만 나오면 사곤 했다. 하기야 이것 때문에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참 덕을 많이 보긴 했다.

온통 낮과 밤을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이때 나는 많이 몸을 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론적인 것과 더불어 실제적인 것을 이때 많이 배우게 되어서 나중에 직장에서 일할 때 두고두고 이것들이 도움이 되었다. 나와는 대조적으로 같이 공부하던 이재현씨는 거의 ‘이론적’인 것에 관해서 논문을 쓰게 되었는데, 아마도 computer hardware쪽에 큰 흥미가 없어서 그런 듯 싶었다. 이런 approach는 나중에 대학에 남게 되면 좋겠지만 실제로 사회에 나가서 일을 할 때 제한을 많이 느끼게 된다. Digital hardware와 일을 하는 것은 밤을 새우고도 결과가 별로 없을 수 있는 고된 일이고, 그것에 맞는 software가 성공을 하면 그것의 ‘임자’가 대부분 ‘칭찬’을 받곤 했다. 이런 것들을 이때 뼈저리게 몸으로 경험을 해서 나중에 나는 완전히(more) software (than hardware)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되고, 나의 lifelong career가 되었다.

김정국 씨, 1979
Computer Science, 김정국 씨, 1979

논문의 결과가 서서히 윤곽을 들어낼 쯤, 1979년 Spring quarter쯤에는 computer science쪽으로 새로운 유학생이 도착하였다. 이름은 김정국씨… 나와 비슷한 나이고 유근호씨와 서울공대 전기과에서 같이 공부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서울공대 전기과 출신인 것이다. 청주고 출신이었으니 얼마나 그때 공부를 잘 했던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오자마자 우리 그룹과 잘 어울리며 가끔 모여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김정국씨는 비록 전기과 출신이었지만 졸업 후 은행에서 이미 전산(computer)쪽으로 경험을 쌓은 경력자였다. 그래서 완전히 computer science쪽으로 공부를 하려고 유학을 온 것이고 그것도 은행에서 ‘보내준’ case여서 우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대강 어떤 일을 했었는지는 나의 매부가 그 쪽에서 일을 해서 짐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김정국씨는 도착 후 일년 뒤쯤에 부인도 뒤따라서 오게 되었고, 나도 그 당시 결혼을 해서 두 couple이 만나서 식사도 했는데, 섭섭하게도 곧 바로 Georgia Tech으로 transfer를 하고 말았다. 우리는 사실 비슷한 나이의 부부여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참 섭섭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인연이 있었는지 우리는 1989년에 아틀란타에서 정말 오랜만의 해후를 하게 되었다. 서로 사는 것이 바쁘다 보니 만날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김정국씨 부인은 다른 인연으로 아틀란타 한국학교 선생님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우리 부부도 그곳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한참 연락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세월의 바퀴 속에서 나중에는 거의 잊고 살 게 되었다. 김정국씨는 안타깝게도 몇 년 전에 비교적 일찍 암으로 운명을 하고 말았다. 비록 가깝게는 못 지냈어도 항상 마음 속에 있었던 김형..이었다. 세월로 보아서도 참 오래 된 ‘지인(知人)’ 이었고, 무엇 보다도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그런 사람이었다.

이렇게 해서 1979년 여름학기가 지나가면서 Master’s degree 과정이 다 끝이 나고 나는 곧 귀국을 하게 되었다. 너무나 몸과 마음이 피곤한 상태여서 어딘가 좀 쉴 곳이 그리웠다. 물론 다시 올 것을 예정하고 돌아갔지만 나이 때문에 결혼을 피할 수가 없어서 거의 6개월을 서울에서 보내게 되었다. 다시 Ohio State로 돌아와서 계속 공부를 하게 되지만 전의 2년과는 완전히 다른 마음과 환경이고 주변의 사람들도 거의 ‘완전히’ 바뀌게 된다. 특히 1980년 유학자유화가 이루어 지면서 ‘대거’의 유학생들이 이곳으로 ‘몰려’오게 돼서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때가 더 좋으냐고 말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good ole days를 그리게 되고, 마음이 편할 정도의 학생 수가 있었던 1980년 이전이 더 그리워 짐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끝)

 

시카고 서울식당, 1974

시카고 서울식당 자리 by Google Street View
시카고 서울식당 자리 (by Google Street View)

가끔 생각한다. 1974년 봄을.. 미국생활 일년이 조금 안 되던 그 해의 초여름, 5월부터 나는 시카고 N. Clark Street 있던 조그만 한국식당, 서울식당이란 곳에서 dishwasher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 해 3월 말에 나는 텍사스주의 달라스에서 홀로 차를 몰고, 전혀 연고가 없던 이곳으로 왔다. 달라스에서 잠깐 알고 지냈던 University of Dallas 유학생, 경기고 출신 유승근 형 그룹 중에 경기고 배형(이름은 잊어버림)이라고 있었는데 그 형의 조언으로 이곳에 혼자 오게 된 것이다. 자기가 여름방학 때 시카고에서 일을 했던 경험을 내게 일러준 것이었고, 그 것이 나와 시카고의 인연을 맺어준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는 사실 유학생들이 여가시간에 할 수 있는 것들이 ‘수두룩 닥상’ 으로 많았다. 비록 이민법에 유학생들의 임시 취업에 제한은 있었지만, 지금에 비하면 거의 자유스러웠다고 할까. 특히 여름방학 같이 긴 기간에는 돈을 꽤 많이 버는 학생들도 많았다. 고국에서의 $$ 송금이 아주 힘이 들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이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일 중에서 제일 손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유학생이면 거의 예외 없이 해 보았던 ‘전설적’인 dishwasher, 그러니까..접시딱기 였다. 이 접시딱기라는 단어를 typing하니까 계속 spelling error가 나와서 살펴보니 사전에 그런 말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유행어, 구어 정도이고 아마도 요새는 그런 말 조차 없어진 것을 느꼈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나?

그 해 3월 말, 음산하게 춥고 눈이라도 올 것같이 흐리던 시카고에 도착을 해서 배형이 가르쳐준 대로 Lincoln Avenue 근처 Cornelia Avenue에 있던 낡은 한국교회를 찾아가서 그 교회의 지하에 있던 “기숙사” 칸막이 방에 짐을 풀고 자세히 살펴보니.. 이것이 바로 아마도 그 당시 서울 청계천변에 있던 봉제공장의 기숙사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곳은 음산하고 습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좁지는 않았으나 완전히 칸막이로 만든 방이라 천정이 서로 다 통해서 서로의 말 소리가 모두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기준으로 말을 해서 그렇고 그 당시 그 젊은 시절에는 그것도 ‘재미’로 느꼈다.

나이들이 거의 내 또래인 남자들이 너 댓 명이 있었고, 놀랍게도 여자도 한 명이 있었다. 나의 바로 옆방에는 농업연수생으로 왔다가 그대로 눌러앉은 청년, 그리고 자동차 정비공으로 취업이민 온 청년, 그리고 아직도 이름이 생각나는 사람, ‘최 식‘씨가 있었다. 이 분은 우리보다 나이가 훨씬 위였는데 아주 정이 많고 친절한 분이었다. 그 당시 많은 시카고의 교포들은 소규모 제철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그 중에서도 템펠 steel이란 곳에 제일 많았다. 이 분도 그곳에서 일을 했었던 듯 싶다. 비록 힘이 든 일이었지만 그 당시 고국의 경제에 비해서 훨씬 많은 보수를 받으니까 사실 모두들 만족스럽게 일들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한국의 경제수준으로 보아서 아무리 이곳에서 고생을 해도 그것은 보람이 있었고, 장래가 밝아 보였다.

나는 비록 수중에 $$은 거의 없었지만 힘차게 잘 구르는 “8기통” 차(’68 Ford XL)가 있었고 한창 젊은 나이로 모든 것들이 새롭고 멋있게 보여서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교회의 지하 기숙사는 월세가 거의 공짜에 가까웠고 식사는 같이 살았던 젊은이들과 어울려서 먹으니 그것 또한 거의 돈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이란 나라의 분위기는 ‘일 없이 놀고 먹는다’는 것이 잘 어울리지 않았다. 무언가 일을 해야 서로 말도 통했다. 그래서 일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달라스를 떠날 때 배형으로부터 시카고의 한 남자를 소개 받은 적이 있었다. 이름은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이성용” 씨가 아니었을까? 우리들 보다 나이가 조금 밑이었던 이민을 온 친구였다. 이미 결혼을 했는데 부인과 합류를 하기 전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 친구의 도움을 좀 받았고, 그 때 배형이 이곳에서 여름방학에 일을 할 때 어울렸던 우리 나이 또래의 여자까지 소개를 받게 되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박영선” 씨였는데, 물론 처녀였고 시카고 영사관 직원의 친척이었다. 그리고, 그 집의 ‘가정부’ 로 일하는 조건으로 미국엘 왔다고 들었다. 그래서 한 번은 그 아가씨의 아파트에 혼자 초대까지 한 번 받기도 했다. 그녀와 배형, 이성용씨가 어떤 관계인지 나는 전혀 아는 바는 없지만 별로 큰 생각 없이 초대를 받았고 대접도 받은 것이다. 후한 대접을 받고 이들 그룹이 아주 가깝게 지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아주 불미스러운 소문들을 듣게 되었고, 나도 거의 봉변에 가까운 일을 당하게 되어서.. 그 때를 생각하면 조금 기분이 아직도 언 짠다. 간단히 말해서 남자관계가 아주 복잡한, “난순이” 형의 여성이라고나 할까… 정서적으로 아주 불안한, 미안한 표현으로 조금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 타입이라고나 할까.. 이 여성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시카고를 완전히 떠날 때까지 계속 비슷한 스토리로 듣게 되었다.

이런 불쾌한 일도 있어서 다 잊고 일을 찾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역시 이성용씨가 도움을 주었다. 처음에는 우리가 묵고 있던 교회의 한 분이 자기가 일하는 곳을 소개 시켜주어서 가보았는데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성용씨가 같이 서울식당이란 곳에 가보자고 해서 가서 주인 아저씨,아줌마를 만나게 되었는데, 일자리가 현재는 없다고 해서 그냥 돌아왔다. 그런데 그 다음날 그 곳에서 일을 하겠느냐고 연락이 와서 그 다음날부터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Clark at Montrose facing North, Chicago

Clark Street는 생각이 났는데 확실히 어디쯤인지 생각이 안 나서 36년도 넘은 기억을 살려서 Google Satellite를 보니 거의 확실해 졌다. 그곳은 Clark & Montrose였다. 이 Google Satellite view를 extreme zooming을 하면 곧 street view가 나오는데.. 나의 짐작이 맞았다. 식당의 입구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필리핀 식당으로 변한 것을 보게 되었다. 식당에서 일을 하므로 parking을 건물의 뒤에 하기 때문에 사실 나는 뒤쪽이 더 기억에 남는다. 정말 작은 식당이었다. dining table이 대강 10개 정도가 되었을까? 그래서 일하는 사람도 극소수였는데 주방장은 주인 남자아저씨였고, 손님은 주로 주인 아줌마가 상대를 했다. 그리고 주방 보조를 Mrs. 안 이란 나와 나이가 비슷했던 ‘새댁’이 보고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거기에 내가 주방보조의 보조로 들어가게 된 것인데 주로 접시를 닦는 것과 청소를 하는 일이었다. 아침 11시부터 밤 11시까지 완전히 12시간의 중노동에 속하는 일이었는데 일주일(6일)에 $120을 받게 되었다. 그러니까… 하루에 $20을 받으니까 시간당 $2 정도인가.. 그 당시 minimum wage가 얼마인지는 몰라도 아마도 이것 보다는 높았으리라.. 하지만 나는 큰 불만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일주일에 $120은 나에게는 상당히 큰 돈이었기 때문이었다. 2주일을 일하고 번 돈으로 나는 그때 처음 나온 ‘personal’ electronic calculator를 Sears에서 $175을 주고 샀다. 그러니까 지금 쓰는 $10짜리 calculator가 처음 나올 당시에는 그렇게 비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작한 일은 나에게 상당히 큰 경험과 교훈을 남겨 주었다. 교훈이란 것은 사람은 ‘일을 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꼭 돈을 번다는 것 보다 인간의 존재는 ‘일’에 의해 더 돋보인다는 평범한 진리랄까.. 내가 그때까지 정말 ‘심각하게’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특히 고생을 해서 번 돈은 쉽게 번 것보다 더 값어치를 느낀다는 사실도 알았다. 여기서 만난 사람, 주인 부부.. 일명 세란이 엄마, 아빠 애석하게도 성함을 다 잊었다. 두 분은 월남에서 군속으로 일을 하다 만나서 결혼을 했다고 했는데, 젊은 아줌마는 무용을 하던 연예인 출신이었고, 아저씨는 훤출 한 키의 멋쟁이였다. 어떻게 그 식당을 시작했는지는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이 부부는 일이 10시 넘어서 끝이 나면 자주, 거의 정기적으로 멋진 옷으로 갈아입고 Chicago downtown으로 drive를 나가서 영화나 공연 같은 것을 보고 왔다. 어떤 날 밤에는 새로 나온 영화 Exorcist를 보고 와선 완전히 공포에 떨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하루 종일의 피로를 푸는 모양이었다. 말이 쉽지 하루 12시간을 그 좁은 곳에서 일을 하며 산다는 것.. 참 힘든 일이었고, 후일 에 나는 식당엘 가면 꼭 그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 얼마나 힘든 일을 하나 생각을 하곤 했다.

설거지만 하루 종일 하다가 나중에는 조금씩 음식 하는 것에 관여를 하게 되었다. 주로 쉬운 것들이었지만 그 당시 등 넘어 보고, 해 본 것들은 지금도 두고두고 도움이 되었다. 특히 만두를 ‘빨리’ 빚는 비결, 비빔밥 재료 준비, 냉면 끓이는 법, 우족 만드는 법.. 등등은 아직도 생각이 난다. 그 식당은 우족이란 것이 유명했는데 불행히도 나는 그것이 비위에 맞지를 않아서 한번도 먹을 수가 없었다. 그 음식을 좋아하는 손님 중에 이지용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당시 이민 초기에 보험(State Farm)을 하던 젊은 남자였고 한국일보같은 신문을 보면 꼭 광고가 나곤 했다. 그는 우족을 좋아해서 자주 오곤 했는데 꼭 주방에 들려서 주인 아저씨와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을 서서 먹곤 했다.

주방 보조였던 Mrs. 안 이라는 여자는 얼마 전에 결혼을 해서 한국에서 온 새댁이었다. 남편의 집안은 그 당시 이미 시카고에 이미 정착을 한 안광순 씨였다. 그 분은 템펠 제철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꼭 Mrs 안을 차로 데려다 주곤 해서 인사도 하곤 했다. 나와 나이가 비슷하고 농담도 잘 통해서 그 분주한 주방 일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중에는 내가 혼자인 것이 측은 했는지 집에 데려다가 손수 밥을 해 주기도 했던, 참 마음씨가 따뜻한 새댁이었다. 하지만 2년 후에 Mrs. 안 부부가 이 서울식당을 인수했을 때, 나의 사소한 실수로 바람직하지 않은 이별을 하게 되었고 그 후로 전혀 소식을 못 들었다. 어떻게 사시는지 가끔 생각이 나기도 한다.

그리고 주인 아저씨의 도움으로 거처를 환경이 조금 밝은 시카고 중앙교회로 옮기기도 했다. 그곳은 Lawrence Avenue에 있었는데, 그 당시는 거의 한인들이 그곳에 없을 때였다. 나는 거기서 우연히 중앙고 1년 선배 박현식 형을 만났는데, 그 때의 이야기는 나의 다른 blog에 자세히 나온다. 그 해 여름을 완전히 그 서울식당에서 지냈는데, 한번은 많이 듣던 남자 목소리가 식당 쪽에서 들렸다. 알고 보니 가수 조영남의 목소리였다. 주인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는 소리였는데, 아마도 전에 이곳에서 식사를 했었고 주인 아저씨와 안면이 있었던 듯 했다. 그리고 기억나는 사람들.. 그때 시카고의 다른 식당, 행복원(Lincoln Ave)이란 곳이 있었는데 그 곳은 밴드가 나오는 큰 곳이었다. 그곳의 밴드 매스터 부부가 밤에 일이 끝나면 이곳에 들리곤 했다. 목소리가 아주 husky하고 부인이 아주 미인이었는데 무슨 미인대회에도 나갔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얘기가.. 연주를 하고 보수를 못 받는 다고 불평을 하곤 했다. 그러니까 관객, 손님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그때만 해도 교민들의 숫자가 그 정도였다. 어느 곳을 가보아도 ‘청중’을 만드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었다.

서울식당의 조금 위로 올라가면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자동차 정비소가 있었다. 이름이 재미있고 따라서 기억하기 쉬웠다. USAKO, 유사코.. 그러니까 미국과 한국(USA & KOREA)이라는 뜻이었을까? 좌우지간 이 정비소의 주인이 서울식당의 단골이었는데, 더 자주 보게 되는 이유는 주인부부의 애지중지하던 딸인 세란이를 이 유사코 사장님의 부인이 babysitting을 하고 있어서 저녁 때 일이 끝난 무렵 부부가 서울식당에 세란이를 데리고 들리기 때문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내차도 가끔 문제가 있을 때 이곳에 맡기곤 했는데, 규모가 생각보다 큰 곳이었지만 손이 모자라면 주인아저씨가 직접 차를 고치기도 했다. 아마도 정비기술을 가진 기술자였던 것 같았다. 주말이면 아주 말끔하게 차려 입고 부인과 같이 식당엘 들리기도 했는데, 남편의 ‘보통’ 모습에 비해서 부인은 약간 남편과 어울리지 않게 ‘세련’된 사람이었던 것이 기억난다.

이렇게 해서 하루 12시간, 6일 동안 일을 하면서 그 해 여름을 보냈다. 그 해는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 나던 여름이어서 더욱 기억이 또렷하다. 처음 해 보는 중노동이었지만 아주 즐겁게 일을 했고, 일의 보람, 일의 중요성, 눈에 잘 안 보이는 곳에서, 뒤에서 일하는 사람들..등등을 일깨워 준 시카고 서울식당, 가끔 회상을 해 본다. 특히 주인 아저씨부부 세란이 아빠, 엄마, Mrs.안, 그리고 가끔 나와서 도와주던 ‘옥분이’ 아가씨.. 그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If you love me (let me know) – Olivia Newton-John, 1974
그 당시의 top ‘country’ oldie, 그녀의 전성시대가 시작되던 때
시카고의 TV 뉴스 앵커 Jane Pauley 와 더불어 하루의 피로를
풀어 주던  멋진 여성들이었다 

 

그 당시 거의 매일 듣던 hit song:
Seasons In The Sun by Terry Jacks

Ohio State, First Years (1)

Ohio "Buckeye" StadiumOhio State University, Columbus, Ohio… 나는 1977년 12월 초에 시카고에서 나의 모든 짐을 Plymouth Fury에 싣고 이곳에 도착했다. 같은 해 9월경에 한번 온 적이 있어서 그렇게 낯 설지는 않았다. 그리고 ColumbusI-80 interstate highway로 지나간 경험이 많이 있어서 더더욱 먼 곳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은 그 해 가을학기, Fall Quarter에 입학을 했어야 했는데 admission office의 사무착오로 한 학기를 기다려야 했다. 대부분의 graduate course가 가을학기에 시작이 되었지만 한 학기 늦는다고 그렇게 불편할 것도 없어서 그냥 한 학기를 편히 쉰 셈이다. 나는 그 당시 그렇게 easy going, 조금 부정적으로 말하면 ‘급할 것 없다’는 자세로 살고 있었다.

OSU의 graduate school로 오게 된 것은 조금은 우연이었다. 특별하게 오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우선 application fee가 없었던 것이 첫째의 인연이었다. 그렇게 내가 $$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그저 그것도 한 가지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이 학교 electrical engineering(EE) program의 brochure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사진 중에 일렬로 늘어선 ‘거대한’ radio telescope (전파 망원경)가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이 EE department의 lab에서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한창 Carl Sagan의 billions of billions of stars.. 에 심취해 있던 시기였고 extra terrestrial(ET)에 관한 것들이 유행하고 있었을 때였다. 이런 것들이 ‘어쩌다’ 나를 그곳으로 가게 만들었다.

이 학교는 그 ‘덩치’가 아주 컸다. 단일 캠퍼스로는 학생 수 50,000 이상인, 아마도 미국에서 제일 큰 캠퍼스에 속했다. (UT Austin이 제일 크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한국유학생들도 만만치 않게 많았을 것이다. 이렇게 큰 학교는 좋은 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점도 있다. 그 전까지 한국유학생이 거의 없었던 학교를 다녔던 이유로 나는 사실 큰 학교가 좋았다. 덜 외로울 거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말을 주위에 하면 즉시로 ‘야.. 외로울 시간이 어디 있냐?’ 하는 직격탄이 꼭 나오곤 했지만.

비록 radio telescope의 사진에 반해서 오긴 왔지만 나의 진짜 passion은 그것이 아니고 (feedback) control system이었다. undergraduate에서 나는 이미 advanced control system에 아주 심취해 있었다. 특히 그 당시는 microprocessor(8080-class)의 등장으로 digital control system의 매력이 상당하던 고조되던 시기였다.

이곳에 오기 전에 나는 OSU 대학원 한국 유학생회장인 김광철씨에게 연락을 해서 수고스럽지만 rooming house(자취방)를 알아 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내가 갈 전기과(Dept of Electrical Engineering)에 있는 한국유학생에게도 연락을 부탁하고 있어서 정착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내가 도착한 날이 12월 초였는데 모든 것이 완전히 얼어붙는 강추위 속에서 OSU campus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Summit street에 내가 살 자취 집으로 가 보니 한마디로 환경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때의 나이에는 사실 모든 것들이 adventure처럼 느껴져서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젊음에 따른 ‘자연적인 낙관성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학기시작까지는 사실 한달 이상이 남아있고 그 나이에 완전한 자유의 12월은 느낌이 아주 좋았다. 도착하자 곧바로 학생회장 김광철씨의 연락을 받았는데, 주말마다 학교체육관에 모여서 배구를 한다고, 그리고 그곳에 전기과 학생들도 나온다고 귀 띰을 해주었다. . Lane Avenue에 있던 실내 체육관(Jesse Owens?) 으로 가 보니 한국유학생들이 나와서 배구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처음 만났던 사람들 중에 전기과에 있던 유근호씨, 이재현씨가 있었다. 그리고 경제학과의 이규방씨도 거기서 처음 만났다.

유근호씨는 나보다 한두 살 위였고, 이재현씨는 반대로 한참 밑이었다. 육사출신의 현역 육군장교인 유근호씨는 성격이 직선적이고 소탈해서 금새 친해질 수 있었고, 이재현씨는 막내 동생 같이 순진한 청년이라 호감이 갔고, 무엇보다도 내가 속한 전기과에 있어서 이들과 더 가까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 이외도 꽤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 중에는 여학생들도 있어서 조금 색다른 느낌도 주었다. 이 당시 한국유학생(대학원)의 숫자는 아마도 100명 정도가 아니었을까. 학생회장 김광철씨도 만났는데 약학대학에 다니고 테니스를 프로처럼 치는 유학생인데 부인도 같이 공부를 하는 유학생부부였다.

이렇게 콜럼버스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12월 달에는 연말과 크리스마스가 있어서 사람들이 모일 기회가 그런대로 많았다. 특히 자주 모인 곳은 Frambese St.에 있는 rooming house였는데, 이곳에 내가 알게 된 유학생들이 많이 몰려 살고 있었다. 여기에는 살았던 사람은 유근호, 안서규, 이규방, 이재현, 국찬표 제씨 등등이 생각난다. 배구를 할 때, 모였다가 우르르 몰려서 그곳으로 가서 놀곤 했다. 나의 자취방은 이곳에서 그런대로 떨어져 있어서 나는 항상 차를 타고 가곤 했다. 이들은 대부분 온지가 한 학기밖에 되지 않아서, 오랜 만에 한국에서 바로 온 ‘싱싱한’ 유학생들과 어울리는 것도 신선하고 색다른 기분을 주었다.

이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들, 이규방 씨와 안서규씨, 나보다 나이는 한 둘이 밑이었던 것 같지만 스스럼 없이 어울렸다. 이규방씨는 대전고, 서울대 경제학 전공이고 안서규씨는 서울고, 서울대 출신으로 이곳에서는 Industrial Engineering을 공부한다고 했다. 그리고 조금은 미지의 인물인 국찬표씨라는 사람, 아마도 경영학 전공이었나. 특히 이 분의 이름이 기억나는 것이 나중에 어떤 사람이 이름을 ‘극장표’라고 농담을 한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부분 미혼이었지만 유근호씨와 국찬표씨는 기혼이라고 했다. 둘 다 배우자들이 이곳에 오는 것을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그때 유학생 연말파티가 두 군데서 있었는데 나는 이 새로 사귄 그룹덕분에 그런대로 어려움 없이 어울릴 수 있었는데, 특히 내가 차를 가지고 있어서 빠질 수도 없었다. 유학생 연말파티에서 인상적인 것 중에는 약학대의 김미영씨, 얌전하게 보이던 분인데 춤을 기가 막히게도 추었다. 여기서는 그날 신시내티에서 올라온 중앙고 후배 토목과 고광백을 만났다. University of Cincinnati에서 transfer를 해서 그날 이곳에 도착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콜럼버스 한인회주최 연말파티도 가보게 되었는데 여기서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교포사회, 한인 교수들을 포함해서 다 보게 되었다. 그 당시 한인회장은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최준표씨였는데, 국악의 퉁소를 독주하는 재주를 보여주었고 특이했던 것은 사회를 이규방 씨가 보았다는 것이다. 이규방 씨는 그 이후에도 이야기 거리가 많이 남아있을 정도로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유근호씨(울고 넘는 박달재)와 안서규씨(댄서의 순정) 모두 나가서 노래를 불렀는데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이들 모두 ‘한국의 냄새’가 물씬 풍기게 놀아서 아주 나에게는 인상적이었다.

Harrison House에서 여자 유학생들과..1977년 12월
Harrison House에서 여자 유학생들과..1977년 12월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여학생들과 어울리기도 했는데, 그 중에 그들이 몰려 살고 있던 Harrison House란 off campus 고층 아파트에 한 그룹이 놀러 가기도 했다. 그것이 기억에 뚜렷한 것이 사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남자 중에는 전기과 이재현씨, 이규방 씨(빠질 수가 없는), 미남형 오용환씨, 그리고 여자 중에는 김영라 씨, 백추혜 씨, 김미영씨, 최희경씨, 김진수씨 등등이 있었다. 김영라 씨는 한국의 박물관장을 역임한 김재원씨의 딸이고 서양미술사를 전공한다고 했다. 백추혜 씨는 이화여대 영양학과 출신, 김미영씨, 최희경씨, 오용환씨는 모두 서울대 약학대 출신이고 전공이었다. 이 중에 최희경씨와 김미영씨는 나중에 내가 약학대학에서 RA(research associate)를 할 때 가까이서 보게 된다.

이 중에 이규방 씨는 학기가 시작되면서 계속 우리들(전기과 유학생들)과 가까이서 어울리게 된다. 공부하러 숫제 우리들이 있는 EE graduate student office로 거의 매일 오곤 했다. 그는 비록 경제학도였지만 우리와 어울리는데 그것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대전고, 서울대, 한국은행을 거친 두뇌형인데, 내가 봐도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었다. 그만큼 말도 많아서 자주 구설수에도 오를 정도였다. 이곳에서의 인연으로 나중에 백추혜 씨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백추혜 씨는 알고 보니 다른 인연으로 아내 연숙과 이대 영양학과 선후배 간이고 조교, 학생 사이로 알고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느낀 것은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흔히 말하는 ‘일류’학교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경기,서울,경복고 출신과 서울대 출신들이 아주 많았던 것이다. 특히 대학교는 서울대가 압도적이었고, 나와 같은 연대출신은 그 당시만 해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2년 뒤, 1980년 유학자유화를 계기로 이런 통계는 많이 바뀌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유근호씨(육사), 이재현씨 (Rutgers)같은 비서울대 출신만 보면 더 가까움을 느끼곤 했다. 그 당시 전기과에는 위의 두 사람 이외에 공부가 거의 끝나가던 이용한씨, 김태중씨가 있었다. 이 분들과는 사실 거의 교류가 없었다. 이용한씨는 내가 나중에 일을 하게 될 약학대학을 통해서 논문을 쓰고 있었다.

1978년 나의 첫 학기는 겨울학기여서 그런지 눈을 동반한 추위가 기억에 남고, Dreese Lab에 있는 EE student office에서 완전히 밤을 지새며 열심히 공부를 하던 것이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식사도 Jones Tower근처에 있던 카페테리아에서 세끼를 먹으니까 사실 우중충한 rooming house으로 자러 가는 것도 사실 귀찮았다. 유근호씨, 이재현씨, 그리고 undergraduate에 있던 고윤석씨 (이들 모두 전기과) 등이 같은 방에서 공부를 했는데 여기에 경제과 이규방씨가 특이하게 우리들과 같이 공부를 하곤 했다. 안서규씨는 Industrial Engineering 전공인데 건물이 바로 전기과 옆에 있어서 가끔 그의 office로 놀러 가곤 했는데, 그 office가 으리으리하게 넓고 커서 무슨 사장실을 연상시켰다. 일개 대학원생이 어떻게 그런 방을 쓰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그는 ‘정치적인 재주’ 를 가진 듯 했다. 우리들과 어울릴 때도 ‘무작정’ 어울리지는 않았다.

다른 과의 유학생들은 식당에서 만나게 되는데 항상 같은 table에 모여서 먹곤 했다. 다른 나라 유학생들도 그들끼리 모여서 식사를 하니까 이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 없었다. 그때, 생각나는 사람들.. 수학과의 최봉대씨, 금속과의 최호진씨, 농업경제과의 노영기씨.. 이중에 최봉대씨는 나중에 약학과의 김미영씨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들은 물론 대부분 미혼자들이고 기혼자 부부들은 거의 학교 대학원 아파트, Buckeye Village에서 살았다. 나중에 나도 이곳에서 살게 되지만 이곳은 값도 저렴하고, 학교 bus가 있고, 주거환경이 아주 좋았다. 우리는 유근호씨가 이곳으로 들어가게 되어서 자주 놀러 가곤 했다.

이중에 생각이 많이 나는 사람, 고윤석씨.. 어찌 잊으랴.. 나이는 나보다 밑이었지만 아주 건장하고 세련된 친구다. 고등학교 때, 조기유학으로 이곳에 와서 지금은 EE undergraduate(학부)의 졸업반이었다. 이미 기혼자였는데, 부인은 연대 출신, 연상의 여인 (나의 연대(사학과) 선배)이었고, OSU의 Admission Office에서 일하고 있어서 우리들의 ‘학벌, 이력, 신상’을 잘 알고 있었다. 나이 때문인지 대부분이 대학원생들인 우리들과 어울리고 그 인연으로 우리가 쓰는 전기과 대학원생 office를 같이 쓰게 되어서 아주 친하게 지냈다. 덕분에 그 부부가 사는 Riverview apartment로 초대를 받아가서 후하게 식사를 하기도 했다.

(계속)

 

그 당시의 즐겨듣던 hit oldie,

Do It Or Die by Atlanta Rhythm Section

 

 

Convergence, 10+ years after..

stupid TV를 안 본지 일주일이 넘었을까? 그리고, 생각한다. 과연 인터넷이 전통적인 의미의 TV service를 점차 죽이고 있는 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나의 생전에 진정한 의미의 인류전체적으로 통신혁명이 일어나고, 그것이 빠른 속도로 진행 중임을 보게 된 것이 조금 흥미롭고, 편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착잡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Telstar – The Ventures

‘6백만 불의 사나이’, Telstar. 소련의 Sputnik에서 시작된 우주경쟁, 세계통신 혁명의 시발점도 되었다. 1962년 AT&T(Bell Lab)제작 6백만 불의 통신위성.. 이론적으로 전세계인구가 실시간 통신권 안에 들어섰다.

 

이렇게 빠른 pace로 바뀌어 나가면 10년 앞도 정확하게 예측하기가 힘들 정도가 아닌가? 나의 ‘한창’ 시대, 그러니까 20~30년 전쯤엔 어땠을까? 기껏해야, 위성통신 덕분에 전세계로 전화나 TV service가 가능해지던 그런 시기였을 것이다. 기억에 Elvis PresleyHawaii 공연이 위성으로 전세계의 tv로 방영된 것이 그 당시에는 큰 뉴스였으니까.

보수와 절대가치의 아성인 가톨릭, 바티칸이 Facebook/Twitter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을 보면 정말 새로운 통신혁명의 깊이가 실감이 간다. 이제는 웬만한 tv program들이 Internet streaming으로 볼 수 있게 되고 있다. 10+년 전쯤에 Scientific-Atlanta에서 일을 할 당시 convergence란 말이 유행했었다. 쉽게 말하면 모든 ‘것’들이 Internet service로 ‘통합’이 될 것이란 말이었다. 그것이 요새는 조금씩 실제로 느껴진다. 사실 telephone과 tv service만 Internet으로 흡수되어도 convergence는 거의 실현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나이 드신 옹고집 어르신들’ 이다. 물론 나의 세대를 포함한 말이다. 어떨 때는 현실을 피하고, 이것만은 옛 것이 좋다고 하는 그들이 Amish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심지어, 옹고집의 아성인 바티칸이 이렇게 현실을 전적으로 포용을 하는 마당에.. 제일 문제는 어중간한 ‘우리 세대’들이다. 옹고집 어르신 세대와 완전히 새로운 문화 속에서 자란 자식세대의 중간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우리세대.. 이 새로운 문화에서 거의 ‘전맹’ 의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닥상’이다. 더 세월이 흐르기 전에 조금은 노력을 하는 것이 바람 직 하지 않을까?

 

Best 5 of ’68’s

가끔 생각을 한다. 내가 살아온 기나긴 세월 중에서 제일 즐겁게 기억이 되는 한 해를 고르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물론 앞으로 그런 질문을 받을 기회는 사실상 없을 듯 하지만, 이 질문은 내가 나에게 하는 것이니까 상관이 없다. 그것은 아마도 흔히 말하는 sixties 중에서도 1968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해는 국제적으로 미국주도의 월남전이 본격적으로 확전(擴戰, escalation)으로 치닫고 있었고, 동서냉전이 언제라도 핵전쟁으로 터질듯한 그런 완전한 미국,소련의 양극체제의 절정상태에 있었다. 그 중에서 우리의 조국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양분되어 양쪽 ‘주인’의 제2차 대리 전쟁이라도 치를 듯 칼을 갈고 있었고… 북녘의 <민족반역자, 전범, 개XX!> 김일성은 4.19혁명 때의 절호의 기회를 잃은 것을 만회하기라도 하듯이 나의 스무 살 생일이었던,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을 보내 박정희를 죽이려 했다.

이런 것들, 즐거운 기억들은 아니지만 그때의 나이가 딱 20세, 그 나이에 그런 것들의 ‘심각성’을 제대로나 알까? 철없고, 걱정 있어도 몇 시간 후에는 잊고, 모든 것이 솜사탕 구름처럼 느껴지는 그런 시절이 아니던가? 그 당시 과연 우리를 걱정이나 우울함에서 피난시켜주던 것들은 과연 무엇들이었을까?

유치하고, 순진하던 나이에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들이, 사실 그렇게 큰 것들이 아니다. 아주 작고, 단순한 것들, 자연스러운 것들.. 그 중에서 제일 자연스러운 것은 아마도 이성에 대한 ‘요상한’ 감정이 아닐까? 사람마다 다 그것을 처음 심각하게 느끼는 나이는 조금씩 다를 것이지만 나는 ’68이 바로 그런 해였다. 이성에 대한 자연스러운 감정, 그것은 흔한 말로 사랑이 아닐까. 마음에 드는 남자친구를 알고 사귀게 되는 것도 그렇지만 그것은 이성을 아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최소한 우리가 겪었던 그 시절, 그때에는.

그 당시 이성을 포함한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곳이라면 그 시절의 다방문화를 빼놓을 수가 없다. 음악감상실, 다과점(빵집) 등도 있었지만 제일 손 쉬운 곳은 역시 다방이었다. 요새야 커피 맛을 따라 가겠지만 그때는 분위기 ‘맛’이 더 중요했다. 여러 세대별로 가는 곳들이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그곳의 공통적인 서비스 중에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휴식공간이었다. 그렇게 해서 경험하게 되는 각종 ‘젊은 음악’들.. 그것이 사실 우리에게는 그 멋 모르던 시절의 생명수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 여러 가지 ‘젊은’ 경험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가 나에게는 1968년, 연세대 2학년 시절.. 그때 ‘일년’의 추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돌아가고 싶은 마음보다는 그저 아름다운 추억으로 ‘즐기고’ 싶은 심정, 그것이다. 나의 주위에서 맴돌던 친구들, 그 중에는 여자들도 있어서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서 ‘반려자로써의 여자’ 같은 생각도 미리 느낄 수 있었다. 비록 학교 공부는 조금 시들해 졌지만 그렇게 큰 후회는 안 한다. 인생 공부로 보충을 했다고 위로를 하니까.

그 당시 다방이나, 음악감상실, 남녀클럽 등을 거치면서 열광하며 듣고 즐기던 주옥 같은 음악들은 그 시대를 반영하듯 거의 미국의 60년대 반전, 반항세대의 음악들이다. Folk, Rock, Psychedelic, Soul.. 등등.. 나는 이런 곡들을 아직도 많이 듣는다. 이런 곡들을 통해서 그 시절을 생각하게 되어서 좋은데, 특히 우울할 때는 아주 특효약이 되었다. 그 시절 우리를 고민과 우울증에서 해방시켜주던 역할을 이 나이에 아직도 하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기도 하다. 나의 Best 5 of ’68 은….

 

 

Daydream Believer – The Monkees

60년대 중반부터 유명해진 그룹, The Monkees는 4명 모두들 독특하게 생긴 모습에다 아주 따라 부르기 쉬운 곡들이 주류인데, Believer 시리즈 2탄인 이 곡은 lead가 Dolentz에서 Jones로 바뀌어서 그런지 아주 느낌도 다르다. 우리가 들을 때는 69년에 더 유명해진 곡이었다. 특히 이 곡이 나올 무렵 VUNC(유엔방송)에서 pop song을 담당하고 있던 여자disk jockey가 이 곳을 무척 좋아했었던 기억이 새롭다.

 

 

Delilah – Tom Jones

고향의 푸른 잔디(Green green grass..)로 미국의 hit chart를 석권한 영국인, Tom Jones의 hit 제2탄.. 이 곡은 사실 어린아이들로부터 나이 든 사람들까지 다 좋아하던 특별한 곡이었다. 아마도 그 주제가 성경의 Samson & Delilah에서 따온 것 같은 느낌을 주어서 그랬을까. 우리가 들었을 무렵에는 국내의 내노라 하는 가수들도 다투어 한국어로 불렀는데, 그 중에서 역시 ‘압권’은 조영남의 열창이 아니었을까?

 

 

Am I That Easy To Forget – Engelbert Humperdinck

미국의 country ‘Release Me‘, 와 더불어 크게 히트한 노래였다. Tom Jones와 쌍벽을 이루던 그 당시 주류를 이루던 folk/rock/soul 같은 것들을 제치고 독특한 vocal로 그들의 genre를 굳세게 지켜서 이제는 거의 classic이 되었다. 그 당시 여자(친구)에게 ‘차였던’ 나의 심정을 구구절절 잘도 표현을 해서 이직도 기억에 남는다.

 

 

Hey Jude – The Beatles

그 많은 그들의 hit song중에서 이 곡은 나에게 a best에 속한다. extra long format도 그렇고, 그들, classic Beatles의 절정기에 부른, 4명만의 독특한 harmony, McCartney의 lead는 비교적 ‘둔탁한’ background instruments와 정말 잘 맞아떨어진다. 특히 stage에서 공연하는 모습을 보면 Yesterday와 버금가는 예술성까지 느껴진다. 그래서 그런지 이 곡을 시도한 국내가수는 그 당시 하나도 없었다. 거의 불가능했으니까.

 

 

Don’t Forget To Remember – The Bee Gees

forget-remember-don’t: 아주 oxymoron적인 제목이다. 이들은 사실 비틀즈와 쌍벽을 이루는 위치였지만 아주 스타일이 달랐다. 미국 blues/rock 영향을 상당히 받은 비틀즈와 달리 이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부드럽고, 목가적인 화음으로 일관을 했다. 그 중에서 이 곡과 First of May는 비슷한 느낌을 주어서 classic의 경지까지 느끼게 한다. Guitar로 따라 부르는 것이 비교적 쉬워서 그 당시 우리들의 기타 standard number였다. 하지만 70년대에 disco로 돌변을 한 그들의 모습에 실망.. 그 이후의 모습은 기억에서 지우고 싶을 정도다.

 

 

오일육(5.16) 군사혁명, 50년 전

5.16 쿠데타 성공 후 서울 시청 정문에 선 장도영(왼쪽), 박정희(오른쪽)

5.16 쿠데타 성공 후 서울 시청 정문에 선 장도영(왼쪽), 박정희(오른쪽)

 

오늘아침, 코앞의 달력을 보니 오늘이 5월 16일이다. 무심코.. 아하.. 박정희의 오일육 군사혁명 기념일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작년 사일구(4.19)가 50년이 되었지..하는 생각이 들면서 곧바로 그러면 올해의 오일육이 50년이 되는구나 하는 조금은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반세기란 기간의 느낌이 그렇지만, 50년이란 것이 사실 그렇게 긴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늙어가면서’ 새롭게 느끼게 되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인간 10진법의 문화에 울고 웃는 사실이 흥미롭기도 하다.

서울시내를 내려다 보며 남산가도를 질주하는 혁명군의 Sherman tank
서울시내를 내려다 보며 남산가도를 질주하는 혁명군의 Sherman tank

작년 4월 19일 나의 blog은 분명히 4.19, 사일구 학생혁명 50주년을 회상하면서 쓴 것이었다. 그때는 내가 중앙중학교 1학년 때였고, 5.16은 그 다음해인 1961년, 내가 중앙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날은 사일구 때와는 달리 아침부터 학교의 문을 아예 열지도 않았다. 사일구 때 최소한 등교를 한 후에 퇴교를 당했던 것에 비하면 더 심각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사일구 혁명은 4월 19일 낮에 그 열기가 절정에 달 했지만 오일육 혁명은 그날 새벽에 이미 일어난 상태였던 것이다.

그때는 ‘아마도’ KBS가 유일한 라디오 방송이었을 것이고, 그 방송에서는 앵무새처럼 군사혁명 공약이 되풀이 되면서 방송이 되었다. 중학교 2학년의 나이에 모든 것들이 다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기억에 제일 먼저 나온 것이 “반공을 제일의 국시로 삼고” 라는 혁명공약이었다. 물론 “국시”라는 말이 확실히 이해는 안 되었지만 “반공이 제일 중요하다” 라는 말로 들렸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제일의 반공국가였는데, 왜 이런 말을 제1의 혁명공약으로 삼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중학교 2학년 ‘어린아이’가 그것이 그렇게 중요했을까? 역시 사일구 때와 마찬가지로 학교를 ‘못 가는’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며 우리들의 영웅, 산호의 라이파이를 보러 만화가게로 갈 수 있는 것만 생각해도 마음이 흥분 되었다. 국민감정을 의식해서였을까, 사일구 때의 계엄령과 다르게 비교적 자유로운 계엄령 치하가 시작되었다 (최소한 아이들의 눈에는).

달력을 다시 보니 역시 5.16에는 아무런 ‘표시’가 안 보이고 그 이틀 뒤인 5.18에는 “5.18 민주화 운동 기념일”이란 표시가 보인다. 그러니까 5.16 ‘군사혁명일’이란 것은 아예 기념일에서 조차 떨어진 모양이다. 호기심이 난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그러니까 언제부터 달력에서 5.16군사혁명 기념일이 없어지고,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이 들어갔을까. 역사는 흐른다. 절대로 멈춘 것이 아닌 것이다.

혁명주체세력 제1인자 박정희 소장, 1961
혁명주체세력 제1인자 박정희 소장, 1961

사일구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좋아하던 “진짜” 탱크가 시내 곳곳에 보였지만 이번에는 아주 평화스럽게 보였다. 처음에는 장도영이란 이름만 요란하게 들렸고 박정희란 이름은 아주 나중에야 들리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우선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사회전체가 아주 ‘질서정연’하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사일구 이후에 하루가 멀다 하고 거리는 데모대로 조용한 날이 없었기 때문일까. 비상계엄령 속에서 데모를 한 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신선한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나는 느낀다. 사일구 이후에 전체적으로 퍼지던 지나친 자유의 공기를. 심하게 말해서 방종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해도 법과 질서가 유지가 될까 할 정도였다. 그 예로 내가 다니던 중앙학교에도 지나친 자유의 표현으로 ‘교장선생, 물러가라’ 하는 데모가 있었다. 사일구의 독재정권 타도가 일반적인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변한 것이다. 그 당시 중앙학교(중, 고교)는 심형필 교장선생님이 계실 때였다. 수학자로서 아주 선비 풍의 나이 지긋하신 선생님에게 ‘비리’가 있다고 데모를 하고 물러가라고 학생들이 요구를 한 것이었다.

물론 나의 나이로는 이해가 되지를 않았지만, 모든 것이 그런 식이었다. 이승만 정권 당시에도 일반적인 시민의 자유는 많았다. 그래도 치안에는 별로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사일구 뒤에는 기본적인 치안에 문제가 보일 정도랄까.. 왜 그랬을까? 결국은 이승만 ‘부패정권’ 뒤에, 거의 통치력이 없는 과도정권에 공권력이 너무나 약했던 것이 아닐까?

5.16 혁명 직후 시청 앞 육사생들의 혁명지지 대회, 1961

제일 극에 달한 것은 사회적인 것 보다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 당시는 자세히 들 알려지지 않았지만 휴전선 너머의 김일성이 이것을 보고 얼마나 침을 흘렸을까 하는 것은 절대로 지나친 걱정이 아니었다는 것은 후세에 다 사실로 들어났다. 과도정권은 분명히 반공정권이었겠지만 극에 달한 자유의 표현은 결국 남북화해, 남북협상이란 말까지 허용하게 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현실적인 반공법 위반이었는데.. 휴전선의 포격사정권에 있던 수도를 가진 정권에게 이것은 정말 위험한 것이었겠지만 일반 시민의 정서는 거꾸로 흐르고 있었고, 결국에는 학생들 조차, “가자 판문점으로!” 라는 꿈을 꾸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조용해 졌다. 우리는 며칠 뒤 등교를 한 후에 긴급 혁명공약을 배우게 되었고, 일년 동안 만끽하던 ‘학원의 방종’을 되 돌려 주게 되었다. 한가지 아쉬웠던 것 중에 하나가, 그 동안 “스포츠 가리” 이발에서 완전히 “삭발”형으로 바뀐 것.. 그러니까..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서 전통대로 머리를 다 중처럼 깎았다가, 사일구가 나면서 ‘자유’가 주어져서 스포츠머리로 바뀌었는데, 다시 원래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목격한 것이 중앙학교 구내에 하나 둘씩 들어섰던 ‘잡상인’들이 없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예들 들면, 이발소, 식당, 문방구 같은 것들이었다. 상인들에게는 큰 일자리가 없어졌겠지만 사실 이것은 잘 된 것 같았다. 학교 밖이면 몰라도 학원 내에 그런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느슨하던 극장의 학생입장도 아주 까다로워져서 웬만한 영화는 거의 다 ‘학생입장불가’가 되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던 깡패들도 줄줄이 잡혀 들어갔는데.. 조금 심했던 것은 일부  ‘정치깡패’들이 사형에 까지 처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대부분 사람의 지지를 받았다.

역사적으로 오일육 군사혁명은 정권이 바뀌면서 해석도 달라지고 느낌도 달라짐을 안다. 군사혁명 10년 뒤인 1971년에는 거의 영구집권체제인 유신정권으로 바뀌고, 그 8년 후인 1979년에는 박정희도 부하에 의해서 사망을 한다. 속담에 “때는 때대로 간다” 라는 말로 그의 공과를 한마디로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세상이 그렇게 간단할까? 한때는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그가 싫기도 했다. 나는 기껏해야 김신조 사건 이후에 대학에 생긴 교련에 대한 반대데모와 3선개헌 반대데모로 학창생활이 끝났지만 아내 연숙은 70년대의 유신체제를 반대한 거센 ‘운동권’에 끼어들게 되어서 모든 현장을 목격까지 했고, 경찰과 정보부의 감시 속에서 살았던 때도 있었다. 이것 때문에 결혼 후에 나는 사실 고개를 못 들고 살았다. 데모만 나면 나는 ‘신나는’ 등산을 즐겼는데 반해서 연숙은 모든 것 잊고 최루탄 연기를 맞으며 살았던 사실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그 운동권 출신들이 줄줄이 현재 모든 정권의 요직에 있다. 심지어 일부는 거의 ‘빨갱이’ 흉내를 낼 정도가 되었다. 오일육에 대한 해석도 극과 극을 치닫고 있다. 그들이 항상 거의 의도적으로 언급을 안 하는 것은 그 동안 그들이 그렇게 동정하던 ‘북녘’ 정권이 어떻게 그들의 ‘인민’들을 통치해 왔던가 하는 사실이다. 박정희의 반대파 탄압을 언급하려면 조금은 그것도 언급하면 조금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어느 정도 먹고 입기 전에는 의미 있는 민주주의를 뒤로 미루겠다는 말은, 그 당시를 살아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 또한 반대로 박정희를 거의 ‘영웅시’하는 극우파들.. 그들이 사실 박정희의 진정한 의도와 업적에 먹칠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시청 앞에서 박정희와 차지철

혁명 성공 후, 시청앞에서 육사생들의 사열을 받는 박정희 소장과 차지철 공수부대장

오일육 혁명 주체, 박정희 소장

이 검은안경 사진은 후세에 남는 오일육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당시의 신문으로 보는 오일육 쿠데타 모습들

 

50년 전의 신문으로 그 당시를 회상하는 것, 조금 감당키 어려운 감정의 복받침과 싸우기도 했다. 글과 사진들.. 확실히 이것은 이제 역사가 되었고, 교과서에서 다시 배울 정도로 오래되었다. 이 신문들을 다시 보며 뚜렷하게 느끼는 것, 당시의 신문들.. 정말 중학교 2학년 생의 한자 실력으로는 읽고 이해하기에 역부족, 그러니까 거의 문맹에 가까울 정도라는 사실..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여기 나온 신문들을 보라.. 얼마나 많은 한자가 섞여 있는가? 또한 한글조차 50년을 거치며 맞춤법이 많이 변했음을 절감하고, 언어의 변천에 50년은 그렇게 짧은 세월이 아니라는 것도 느낀다. 하지만 그것 보다 사진을 보며 더 깊은 생각을 한다. 50년 세월 동안 내가 기억한 모습들은 너무나 현재에 적응이 되었는지, 그 당시의 모습들.. 너무나 꾀죄죄하고, 볼품들이 없다. 물론 그 당시의 유행과 경제수준을 감안하면 조금 이해는 가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 당시 신문의 사진기술에 더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잡한 사진 조판에다가, 50년이 지난 신문지.. 그것이 ‘생생하게’ 보일 리가 만무하니까.

 

오일육 당시 경향신문 석간

오일육 석간지는 유동적인 사태로 군 검열을 받지 않았다.

성공적인 무혈 쿠데타

의외로 평온한 전국 주요 도시의 분위기

서울 주요 거점에 진주한 혁명군들

오일육 낮, 어리둥절한 시민들과 군인들, 세종로,시청 근처

생생했던 역사 현장, 희미한 모습으로

그 당시 모습, 사실 이 사진보다 훨씬 더 깨끗했다

육군사관생도 혁명지지 궐기행진

쿠데타 직후 육사생들의 지지 궐기는 혁명성공의 촉진제였다

시청 앞에 집결한 육사생도들과 장도영 중장

시청앞에서 혁명지지 궐기대회, 혁명의 얼굴, 장도영 중장과 육사생들

5월 17일부터 군 검열받던 신문들

계엄령하에서 언론에 대한 군 검열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서서히 등장하는 막후 1인자 박정희 소장

사실상 쿠데타 주역 박정희 소장, 장도영 중장과 기자회견에서

 


그 당시의 사회정서를 한눈에 보려면 영화광고를 보면 간단하다. 유행과 더불어 그 당시 최고 인기배우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서부영화와 대형 종교영화가 판을 치던 그 시절, 한국의 영화풍토는 지금 수준에서 보면 정말 아이들 장난과도 같았다. 한마디로 유치하게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또한 매력이었다. 여기의 영화광고를 보면서 손쉽게, 구봉서, 최은희, 신영균, 김진규, 허장강, 김희갑, 김혜정 등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당시 그들이야말로 국민배우들이었기 때문이다.

 

쿠데타 당시 상영되던 국산영화들

신상옥 감독이 한국 영화를 주름잡던 그 시절의 영화들

 

 

1970년 4월 13일

On April 13, 1970, Apollo 13, four-fifths of the way to the moon, was crippled when a tank containing liquid oxygen burst. (The astronauts managed to return safely.) — today’s New York Times

오늘 뉴욕타임스 이메일 뉴스를 잠깐 보니 위의 ‘오늘의 역사’ 구절이 눈에 띄였다. 1970년 오늘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 유명한 Apollo 13이 아닌가? 그 중에서도 13이란 숫자가 두 번이나 반복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당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나를 보게 된다..

어찌 잊으랴.. 뚜렷이 기억을 한다. 나는 그 당시 top news였던 아폴로 13호 폭발사고를 전혀 몰랐던 것을 기억한다. 왜 그랬을까? 그 당시 그 뉴스의 심각성을 아직도 피부로 느끼지 못한 것은 간단히 말해서 그 뉴스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70년이면 지금에 비하면 거의 ‘원시적’인 뉴스 매체, 그러니까 신문, 라디오, 흑백 TV가 전부였던 시절이지만 그것을 못 듣고, 보고 하는 것은 특히 그 나이 (20을 갓 넘은)에 힘들었을 것이다.

1970년 4월,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서 운해를 내려다보며..
1970년 4월,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서 운해를 내려다보며..

사실, 그 당시 나는 죽마고우 친구들과 함께 지리산 깊은 산중에 있었다. 그렇게 이유는 간단했다. 그 해 초에 아주 오랜만에 재회를 한 원서동 죽마고우, 손용현과, 다른 원서동 친구, 박창희.. 그리고 나 셋은 아직도 눈이 쌓였던 지리산 능선 종주등반 중이었다. 라디오를 가지고 갔지만 뉴스 같은 것을 들을 정도로 편한 등산이 절대로 아니었다. 예상을 뒤엎고, 지리산 주 능선에는 아주 깊은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서 걷는 자체가 힘이 들고 시간이 걸렸다. 화엄사에서 출발을 해서 노고단을 거쳐서 계속 천왕봉을 향해서 능선을 따라 걷고 걸었다. 그때 처음 주능선 등반의 매력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 유명한 지리산의 운해(雲海)란 것을 눈(雪)과 함께 즐긴 것이다. 그때 생각나는 곳들, 노고단, 토끼봉, 지보등, 세석평전.. 천왕봉에서는 다른 코스로 남원쪽으로 하산을 하였다. 그때만 해도 지리산 등반은 그렇게 흔치 않았던 것인지, 하산을 하니까 경찰에서 나와서 입산 기록부에 우리의 이름을 적기도 했다.

거의 일주일 만에 ‘속세’에 나와보니 참 기분이 달랐다. 그때 처음으로 ‘세상을 떠난’ 경험을 한 것이다. 그 당시 나이에 일주일 동안 세상 돌아가는 것과 차단이 된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었으니까. 일주일 동안의 뉴스 중에 아폴로 13호에 큰 사고가 난 것과, 서울의 ‘와우 아파트’가 붕괴된 것들이 있었다. 사실 와우 아파트 사고가 우리에겐 더 큰 뉴스였다. 그때 서울 시장이 김현옥씨였는데 그 사고를 계기로 ‘불도저’ 스타일의 밀어 부치는 행정에 브레이크가 걸리기도 했다. 그 것이 1970년 4월 이맘때 쯤이다. 조금 후회가 되는 것이 있다면, 지리산 등반은 나와 박창희가 연세대 전기과 4학년 졸업여행(제주도)을 빼먹고 갔다는 사실이었다. 그 당시는 전혀 미안한 마음이 없었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졸업여행이 사실은 더 중요한 것이었다. 지리산 등산이야 그 후에 갈 수도 있었던 것이었지만 졸업여행은 그야말로 딱 한번의 기회가 아니었던가? 이런 후회될 만한 일들이 그 후에도 계속이 되었지만, 어찌하랴.. 그때는 절대로 후회란 것을 생각도 못하던 젊은 시절이었으니 말이지..

그 당시를 회상하면 꼭 생각나는 것이 하나가 있는데.. 지리산의 고요 속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다시 시끄러운 고향 서울로 돌아와서 위의 등산친구 셋이 어느 다방에서 다시 모이게 되었다. 그때 우리의 아지트는 중앙극장의 길과 퇴계로가 만나는 곳에 있는 지하다방(절대로 이름을 잊었다) 이었는데, 손용현이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웃기는 것은 얼굴이 전혀 안 보이고 하얀 셔츠의 상체만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슨 ‘투명인간’ 영화의 그런 모습이었다. 이유는 용현이가 원래 얼굴이 조금 거무틱틱한 편인데, 이번에 지리산 종주등반을 할 때 쌓인 눈 때문에 완전히 타버리고, 그 당시 지하다방들이 대부분 어두워서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박창희가 나중에 와서 똑같이 그것을 보고 한참을 웃었고, 두고두고 그것이 우리의 ‘일화’로 남게 되었다. 그 당시 다방에서는 손용현이 제일 좋아하고, 우리도 열광을 하던 CCR (Creedence Clearwater Revival)의 Who’ll Stop the Rain이 우렁차게 나오고 있었다.

 

Who’ll Stop the RainCreedence Clearwater Revival

 

봄이 오면 산에 들에..

드디어..아틀란타에도 봄이..
드디어..아틀란타에도 봄이..

다시 싸늘해진 아틀란타의 3월 말: 일 주일을 넘게 거의 초여름의 맛을 미리 보여주던 날씨가 역시 ‘평균치’를 유지하려는 듯 급강하하여 오늘 아침은 거의 빙점까지 떨어지는 추위가 되었다. 아래층은 결국 central heating이 요란하게 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맑은 날씨에 바람이 없어서 느낌은 역시 봄이다.

오래 전에 고국에서 느끼던 3월의 날씨도 사실 이와 비슷했다. 그래서 이곳 아틀란타는 많은 것이 서울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뚜렷한 4계절, 지형, 나무, 꽃들의 종류 등등이 그렇다. 다만 연 평균기온이 조금 높다는 것인데.. 사실 서울의 평균기온도 그 동안 (30년) 조금은 올랐을 것 같아서 결국은 비슷하지 않을까? 3월 초부터 Bradford pear, 개나리, 진달래, 수선화 등이 이미 다 피고 졌다. 지금은 벗 꽃이 조금씩 선을 보이기 시작한다. 옛날 서울에서 창경원의 벗 꽃놀이가 4월 초에 있었으니까.. 이것도 시기적으로 비슷하구나. 다만 조금 다른 것은 이 아틀란타지역에 너무나 많은 소나무들.. 이것 때문에 이곳의 봄은 꽃가루가 지독하다. 특히 바람이 잘 불지 않으면 완전한 비상사태가 된다. 나는 다행히 꽃가루 앨러지가 별로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거의 한달 동안 고생을 해야 한다. 그것이 5월 중순까지 계속 된다.

하지만 4월과 5월은 역시 찬란한 계절.. 비가 조금씩 오기만 하면 너무나 정서적인, 시적인 계절.. 전 이대음대 교수 김순애씨의 ‘4월의 노래’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추억이 계절이 된다. 언젠가 부터 나는 4월과 5월을 은근히 기다리게 되었다. 특히 최근에 레지오 마리애의 단원이 되어서 그런지.. 특히 성모성월, 어린이 날 (일본의 5월5일 어린이날을 그대로?) 어머니 날(후에 어버이날로 바뀐 것.. 참 마음에 들지 않음) 의 5월 달이 더욱 기다려진다. 그 중에서, 특히 5월 1일은 ‘friends forever’를 생각하게 하는, First of May.. 물론 이것은 The Bee Gees의 1960년대 pop song에 불과하지만 나와 나의 몇 친구들에게는 거의 암호와도 같은 추억의 노래가 되었다. 그래서 5월은 더욱 나에게는 빛나는 달이 되어간다.

 

First of May – Bee Gees, 1969 

이 Bee Gees의 classic을 처음 들었을 때는 가사보다는 감미롭고 신비스럽게까지 느껴진 melody에 매료가 되었었다. 그런 나이였다. 하지만 그 후 그 가사를 음미하면서 이제는 가사에 깊이 빠져든다. 가사와 곡이 어쩌면 그렇게도 멋지게 조화를 이룰까.. 이런 것이 진정한 classic이 아닐까.. 이 곡 뒤에 항상 보이는 흩어져 인생을 살아온 친구들을 생각한다. 그래서 5월1일은 Friends Forever의 날이 되어간다.

4월의 노래 – 박목월 시, 김순애 작곡 

서울 중앙고 1학년 때(1963년) 담임 김대붕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는 곡이라며 가르쳐 주신 또 다른 불후의 명곡.. 어찌 잊으랴. 4월이 되면 어찌나 이 곡을 배울 때가 그립던지.. 또한 타계하신 김대붕 선생님도 함께 그때의 행복하고, 순진 하던 시절의 찬란했던 4월의 봄 동산을 그린다.

 

 

Catholic Sunday

Advent 2010 (2010년 대림절)…  오늘은 천주교 달력으로 새해가 되고 예수님 탄생인 12월 25일 성탄절까지의 대림절이 시작되는 첫 날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시기인 것이다. 개신교회에도 이러한 시기에 대한 이름이 따로 있는지 궁금하다. 기억에 들어본 적이 없다.예수님 활동 당시 12 사도들의 시대로부터 계속 이어져온 이 Roman Catholic, 천주교의 다양하고 복잡한 역사, 전통들은 알면 알수록 , 더 알고 싶은 것 투성이다. 이날부터 제대 옆에는 대림을 상징하는 4개의 촛불이 세워지고 한 주일마다 초가 하나씩 켜진다. 이것도 천주교의 특징인 ‘상징’적인 의식일 것이다.

2010 대림절 시작, 본당 주보에서
2010 대림절 시작, 본당 주보에서

우리는 주일미사를 집 근처에 있는 미국인 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에서 본다. 이곳도 거의 10년 넘게 다녀서 정이 들었다. 아침 8시 반의 미사에 가면 거의 앉는 자리가 정해질 정도로 익숙한 신자들이 많다. 혹시나 낯익은 얼굴이 안 보이면 신경이 쓰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제는 사실 주임신부님 보다는 부제님 중에 있다. Deacon John이라고 불리는 부제님, full name은 Deacon John Duffield인데 건장한 체구에 단정한 흰머리, 항상 진실된 웃음을 띈, 순진하게도 보이는 얼굴, 그 보다 제일 인상적인 것은 그 ‘경건’한 태도이다. 주임신부님보다 더 경건하게 미사를 돕는다. 이분이 부제가 된 것도 5년 정도 되어간다. 나이도 나와 같고 직업은 사실 nuclear engineer, U.S. navy officer로 nuclear submarine (핵 잠수함)이 전공이다. 그가 이렇게 공학도라는 사실이 나를 참 기쁘게 한다. 가끔 하는 설교도 어찌나 그렇게 틀에 박히지 않았는지.. 진실로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분의 모든 말과 행동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것들.. 흔치 않은 일이다. 사실 속으로 나도 여생을 그분과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내일은 이 미국본당에서 penance service(판공성사)가 있는 날이다. 해가 가기 전에 이렇게 한번 하고 부활절 전에 또 있다. 쉽게 말해서 천주교 특유의 ‘고백(고해)성사’인 것이다. 이것의 중요성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만큼 이 성사를 지키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이것을 하려면 정말 심각하게 자기를 되돌아 보는 ‘양심성찰’을 해야 하니까. 자기의 죄를 찾아 내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거의 2년간 이 성사를 못 보고 있고, 이것이 항상 나를 찜찜하게 한다. 사실 이것을 하려면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영어로 하는 고백성사는 아무래도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니까..

 

I Understand, by G-Clefs…  며칠 전부터 정말 이상하게도 oldies중의 I Understand란 곡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이런 발전이 아닐까.. 년 말이 되어가고, 그러면 분명히 Auld Lang Sine이 불릴 것이다. 그 곡이 background 로 흘러나오는 곡이 바로 G-Clefs가 불렀던 60년대 초의 hit, I Understand (just how you feel) 인 것이다. 그 당시 우리는 이 곡을 부른 group G-Clefs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 이후도 마찬가지.. 이번에 알고 보니 이들은 내가 잘 못 추측한 대로 영국계통의 그룹이 전혀 아니고, 미국의 ‘흑인’그룹이었다. 사실, 적지 않게 놀란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잘못된 사실을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조금 부끄럽기까지 하였다.

이 곡은 미국에서 1961년에 나온 것이지만 우리 때는 거의 1964년경에 많이 알려진 곡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중앙고2 때였다. 년 말에 많이 불렸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확실한 것은 고2때가 끝날 무렵, 그러니까 역시 1964년이 저물 무렵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학급회의, 그러니까 home room이라고 불렀던 그 시간에 모두들 앞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을 했다. 분위기는 완전히 고2때 특유의 감상에 젖은 그런 분위기.. 고3이 되기 전 무슨 전쟁이라도 나가는 듯한 심정으로 이별을 서러워하는 기분에 모두들 휩싸인 것이다. 바로 그때다.. 제일 키가 컷 던 김용만이 G-ClefsI Understand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광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렇다.. 이별을 서러워하던 순진했던 가슴들의 표현이었다. 그 당시 고교2학년은 정말 모두들 문학소년,소녀들이었다. 지독히도 순진하고, 이상적이었던 그 일년.. 그때에 생각하고 꿈을 꾸었던 장차 다가올 인생들.. 과연 어떠한 인생들이었을까? 얼마나 많은 기쁨, 행복, 괴로움, 후회를 만들며 살았을까? 갑자기 지독한 감상에 젖는다.

 

I Understand by G-Clefs, 1961

I understand just how you feel

Your love for me, why not be mine?

It’s over now but it was gr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If you ever change your mind

Come back to me and you will find

Me waiting there, at your comm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I miss you so, please believe me when I tell you

I just can’t stand to see you go

You know

If you ever change your mind

Come back to me and you will find

Me waiting there at your comm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SPOKEN: “I understand just how you feel. Let bygones be bygones. But always

remember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We’ll sip a cup of wine, my dear, for Auld Lang Syne )

I understand

Remembering Mitch Miller, 1911~2010

미치 밀러.. 어렸을 적에 많이도 들었던 이름이다. 그 당시 그의 합창단 (Mitch Miller & Gang)이 부른 영화 주제곡이 있었다. 아마도 중학교 3학년 때(1962년) 쯤이었을까. 그 유명한 “콰이강의 다리” 라는 영화의 주제곡 콰이강의 행진, The River Kwai March. 가사가 있는 노래가 아니고 완전히 남자들의 휘파람 합창이었다. 그들이 바로 Mitch Miller 합창단이었다.

그 당시 그의 합창곡들은 거의 유행가처럼 불려졌었다. 그들의 영향이었을까.. 곧 이어서 한국에도 Sing Along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전석환씨가 이끌던 Sing Along Y (YMCA)도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을까 생각을 한다. 한결같이 노래들은 밝고, 복고적이고, 심지어 가정적이었다. 한마디로 나중에 classic으로 남을 만한 그런 곡들이었다.

99세로 세상을 떠난 Mitch Miller, 많은 사람들에게 추억 어린 주옥 같은 미국적인 노래를 남겨 주었다. 그 많은 곡 중에서 아직도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몇 곡만 고르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고르라면 아마도 다음이 아닐까. RIP.. Mr. Miller….

 

 

콰이강의 행진, 영화 “콰이강의 다리” 주제곡영화속의 거의 비참한 행진과는 달리 아주 경쾌한 곡이다. 그 당시 아주 유행을 한 멜러디, 내가 다니던 중앙중고교에서는 그 당시 이곡을 등교시간에 맞추어 계동골목을 향해서 아주 우렁차게 들려주었다. 그 긴 계동골목을 걸어서 등교하던 우리들은 이것을 들으며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져을 것이다.

 

 

The Yellow Rose of Texas, 전통 미국민요: 텍사스의 전통민요인데, 전설에 의하면 텍사스가 멕시코에서 독립할 당시 텍사스 leader였던 Sam Houston이 전쟁 상대였던 멕시코의 General & President Santa Ana에게 비밀리에 보냈던 (spy?) 텍사스의 여자가 바로 Yellow Rose of Texas였다.

The Ventures, 60/70, 일본문화

얼마 전에 YouTube에서 60년대 Instrumental group, The Ventures를 video clip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정말 감회가 깊다고 할까. 나의 60/70 moment인 것이다. 특히 Ventures가 일본에서 맹활약을 하던 60년대를 생생히 기억한다. 그 당시 (rock) guitar를 배운다고 하면 사실 거의 이들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도 물론 그 중의 하나였다. 그 당시 Ventures는 한국에 한번도 오질 않았다. 그 정도로 우리는 $$$가 없었다고나 할까, 아니면 그들이 그렇게 비쌌던가. 그러니 다 해적판 (그때는 우리나라에 license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LP 로 그들의 연주를 즐기는 정도였다. 그때 나의 주위에는 아주 상당한 수준으로 그들의 연주를 흉내 내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요즈음 일본의 TV drama를 가끔 보면 그 당시 그들의 대중문화를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우리들은 정책적인 반일교육의 영향으로 그런 것들을 거의 모르고 지냈지만 그것은 사실 눈 가리고 아웅.. 식 이었다. 어떠한 식으로든 간접적인 영향은 상당히 받았던 것을 지금에야 실감을 한다. 한국이나 일본에 모두 상당한 미군이 주둔을 하고 이어서 그들로부터 직접 받는 것 이외에 우리는 일본을 통한 여과된 미국문화가 또 유입되고 있었던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 당시 이미 경제발전이 상당히 진행이 되고 있어서 그들이 좋아하는 구미의 연예인들을 마음 놓고 불러다 공연을 시킬 수 있었다.

일제강점의 심리적 영향과 그들의 일방적인 경제부흥은 사실 그들의 ‘왜색문화’를 우위에 있다고 단정을 하고 완전히 차단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일까? 사실은 그 당시 일본문화라는 것은 거의 구미의 것을 흉내 내는 것 정도가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소위 대중음악, 혹은 전통가요라고 하는 트로트풍의 노래들은 사실 일본의 엔카와 같은 것이다. 그 이외에 미국 folk song의 영향을 받은 젊은 층의 노래들 (통기타 그룹이라는) 조차도 일본이나 한국이 거의 같았다. 그러니까 정책적으로 막았다 해도 실제로는 거의 같은 것들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한국의 경제수준이 상당히 나아진 지금에서 조금씩 일본문화가 유입되고 있으나 이제는 사실 그렇게 새로운 것이 들어올 것도 없을 듯 하다. 왜냐하면 원래부터 그렇게 이질적인 것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본과 한국의 ‘숙명적’인 관계라고나 할까. 그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The VenturesForever (and ever) with You를 들으니 기분이 조금 새로워 진다. 60/70의 nostalgic한 기분도 나고 또 다른 미래의 양국관계의 한 chapter가 보이기도 하기 때문일까.

 

 

Forever (and ever) with You – Ventures

 

Ah…Eres tu, 1973..

아주 오랜만에 Mocedades 1973년 히트곡 Eres tuyoutube를 통해서 다시 듣고, 보게 되었다.  이곳을 통해서 이곡이 1973년 Eurovision contest에서 2위를 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그룹이 6인조(여자 2, 남자 4)라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사실 이곡을 처음 들었던 것은 1973년 미국유학 첫해였는데, 아마도 1973년 가을부터 radio를 틀기만 하면 이곡이 흘러 나왔다. Spanish노래가 이곳의 일반 radio에서 이정도로 나오는 것은 그때 당시에도 흔치를 않았다. 어떻게 해서 이곳사람들이 잘 모르는 Eurovision Contest의 곡이 미국 top chart까지 올랐는지 확실치를 않다. 하지만 1973~4년을 생각하면 이 노래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Eres Tu – Mocedades – 1973 

처음 들을 당시에는 Spanish로 불리웠다는 것만으로 짐작을 해서 그런지 그저 남미나 멕시코의 가수가 부른 것이라 생각을 했는데 아주 이후에 그들이 진짜 Spanish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Basque 민족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더 흥미가 간 것도 사실이다.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그룹인지 사진 같은 것은 보기도 힘들었던 시절이었는데, 이렇게 세상이 좋아져서 다시 듣고 볼 수가 있게 되었으니. 참 좋기는 한데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 ‘신비스러움’ 같은 것이 줄어든 기분도 든다.

1973년 미국의 광활하고 끝없는 지평선을 차로 가로 지르면서 거의 매일 들었던 이 노래를 생각한다. 그 당시에 그 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다 무얼 하며 지내는지 같이 궁금해진다. 특히 성성모씨, Prof. John Hahn, 3 nurses at Auburn, Nebraska, Hank Lee at Omaha, Nebraska. 이제는 거의 ‘전설’처럼 느껴진다.

 

Ah… sir Cliff Richard…

Cliff Richard, 아니 더 정확하게는 Sir Cliff Richard, 인도태생의 영국의 국민가수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고 싶은 그는 teen idol이었다. 처음 ‘본’것은 영화에서다. 1964년 명동극장에서  Teenager Story라고 제목이 된 것인데 알고 보니 원래 제목이 The Young Ones였다. 아마도 분명히 일본“아해”들이 그렇게 제목을 바꾸어서 상영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한국에 오기 전에는 별로 그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 당시는 일본이 세계로 통하는 지름길목이어서 많은 것들이 그들의 취향에 좌우되곤 했다. 그때가 그러니까 고2때였다. 한창 팝송에 열을 올리던 시기라 물론 그 영화의 영향은 상당했고 그 이후로 그는 한국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Vision – Cliff Richard

그 영화에 삽입된 거의 모든 곡들이 LP album으로 나왔고 (그때는 copyright, license란 개념조차 없어서 그냥 외국 판을 복사했다) 나도 그것을 샀다.  영화 속의 group sound는 실제로 Cliff Richard와 같이 공연을 하던 The Shadows였는데 그 중에 안경을 낀 남자가 있어서 조금 인상적이었다. 보통 group sound라고 하면 장발에 옷들이 요란했지만 그들은 아주 심하게 말해서 거의 ‘은행원’ 같은 인상이었다. 

그 후로 Cliff Richard는 영화와 상관없이 많은 top chart (물론 미국계가 아니고 유럽계였지만) 에 오르는 주옥같은 recording을 발표했는데 그 중에 Vision이란 것이 있었고 아직도 가사를 완전히 외우고 부를 수 있는 불후의 classic이 되었다. 그 외에도 Bachelor Boy, Congratulation, Tin Soldier, Evergreen Tree, I could easily 등등이 생각난다.

거의 5년 뒤에 그는 일본공연차 왔다가 서울에 잠깐 들려서 이화여대강당에서 한차례 공연을 했다. 1969년으로 기억을 하는데 아주 확실치는 않다. 아마도 1970년일지도… 누가 알면 고쳐주시기 바란다. 가을로 기억을 하는데 정말 그때 그가 그렇게 여고생들에게 인기가 있는지 몰랐다. 관중의 대다수가 여고생들이었으니까. 나는 그때 여자친구가 ticket을 구했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가게 되었다. 여고생들의 ‘괴성’에 정말 시끄러웠지만 사실은 나도 실제인물과 실제노래를 ‘생방송’으로 듣는다는 사실이 가슴이 설레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때 부른 처음 곡이 It’s all in the game이란 미국 country song이어서 조금은 실망을 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거의 우리들이 기대했던 standard selection이어서 정말 좋았다.  The Young Ones, The Day I met Marie, Big Ship 등등이 생각이 나는데 아마도 Vision은 없었던 것 같았다. 사회는 물론 그 당시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던Duo  Twin Folios의 윤형주가 맡았는데 사실 그렇게 매끄럽게 한 진행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때 반주는 역시 The Shadows가 따라와서 했는데 사실 그들의 지나치게  ‘즐거운’ 연주는 조금 버릇이 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우리 같은 ‘촌놈’들에게 이정도의 음악은 과분하지 않겠냐… 하는 모습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은 그 당시 우리나라의 일반 경제수준이 워낙 떨어지다 보니까 국제적인 문화행사에서 아주 ‘죽은 곳’에 가까웠다. 그런 유명한 연예인들을 부르기에 너무나 $$가 귀했던 것이다.

Cliff RichardBeatles같은  다른 영국의 group과는 아주 다른 스타일로 자기만의 fan들을 가질 수 있었는데, 미국에 와서 보니까 그는 완전히 nobody에 가까웠다. 1970년대 말에 잠깐 American style 로 진출을 하려 한 모양인데 역시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인터넷 상으로 감을 잡으면, 그는 사실 미국을 제외한곤 전혀 문제가 없었다. Soccer를 생각하면 비슷하다. 

잠깐 반짝한 연예인이 아니고 정말 자기가 부른 노래들을 믿고 사랑하는 평생가수, 국민적인 가수로 노력을 하더니 결국은 Sir란 작위를 받았고 아직도 concert를 하며 다닌다. 거의 70세가 된 모양인데 전혀 은퇴를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새로 발표하는 노래보다도 왕년에 불렀던 노래를 더 많이 부르고 청중들도 이제는 거의 장년, 노년들로 이루어진 것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활동을 하는지 알 수 있다.

 

Hitching a Ride…

내가 싫어하는 muggy summer pattern이 며칠째 계속된다. 밤에도 덥게 느껴진다. 물론 추위의 ‘조금 귀찮은 느낌’은 없지만 이건 내가 사실 아주 싫어하는 그런 날씨다.  가끔 이렇게 봄/여름의 맛을 미리 ‘강’하게 보여주는 게 이곳 날씨의 특징임을 이제는 확실히 배워 느낀다. 오래 살게 되면 다들 이렇게 배워 느끼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지나치게 ‘한가’해서 느끼게 되는 것일까.. 둘 다 조금씩 진실이 있을거다.

지금 내가 무슨 ‘일’ 을 해야 제일 좋을까? 제일 내가 좋아하고 실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내가 잘 알고 있는 것을 활용 해야 한다. 그게 win-win전략이 아닐까. 10+ 여전 전에 시작 된 Internet의 출현은 처음에 나에게 많은 ‘희망’을 주었다. 무슨 secret treasure같은 그런 것… technology자체도 매력의 우선 이었지만.. 그게 나의 senior year를 해방시킬 수도 있다고 정말 정말 믿었다. 나만 그런 것이 물론 아니었지만 나는 그런대로 그 흐름의 중심에 서서 일을 한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정말 chance가 많았지 않았을까.. 결과적으로는 1%도 나는 살리질 못했다.  drive를 못한 탓일까.. 아니면 내가 나의 technical skill-set 을 너무 과신 했을까..

지금 이 시점에서 과거를 보며 분석하는 게 그렇게 도움이 될 듯 하지 않다. 지금을 시작점으로 다시 시작하면 어찌 될까.. 과거의 좋은 것만 ‘만끽’하고 실수나 아쉬움은 정말 잊는 것이다. 노력을 하면 힘들지도 않을지도.. 시도도 않해 보았다. 나에게 그런대로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들 중에..Internet를 빼고는 많지 않다. 항상 머릿속은 그런 idea로 꽉 차있었다…  아하… 또 듣는다… Hitching a Ride  (Vanity Fair)!…. 용현아.. 오늘은 너의 날이다!

드디어 ‘더운 밤’을 느낀다. electric fan이 벌써 필요한가. 짜증이 난다. 체질적으로 나는 더운 것은 싫다. 추운 게 더운 것 보다 낫다. 물론 ‘이상’ 기온은 분명하지만 이건 싫다. 지난 여름에 감사하게 썼던 tall tower fan이 다시 등장 했다. 이게 연숙이 Costco에서 사온 것인데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연숙의 office에 다시 켜 놓았다. 조금 시원해 진 듯…

CCR night

지난 금요일 저녁에는 예정대로 (갈 마음은 예전대로 별로였지만) 백형 네 부부와 Mable House Amphitheater에서 Creedence ClearwaterRevisited concert에 갔었다.  알고 보니 2명이 original member였고 나머지는 다 그런대로 젊은 사람들이었다. 100%가 다 즐겨 듣던 대 히트곡이라 그거 하나는 정말 감회가 새로웠다. 청중들은 예상대로 거의가 우리 또래의 baby boomer들~~~~~~  CCR concert는 결과적으로 만족했다. 거의 모든 히트곡이 원래가 시끄러운 것이라 더 새로웠다. 하지만 진짜 original에는 못 미친 곡도 많았다. 조금씩 variation (tempo etc)을 주었으면 다 낫지 않았을까. 거의가 같은 시끄러운, 빠른 템포라서 나중에는 조금 지루한 그런 느낌

머릿속은 계속 1969/70년도로 돌아가서 용현이와 어울리던 곳에 머물러 있었다. 확실히 생각나는 것은 1970년 4월초 지리산 등산을 마치고 어느 다방 (우리가 좋아하던 곳.. 이름을 잊었다.. 하느님) 어두운 곳에 앉았는데 용현이의 얼굴이 어둠 속에 묻혀 하얀 와이셔츠만 보였다.. 얼굴이 없는 사람? ㅎㅎ 그때 정말 그 녀석 Who’s stop the rain을 좋아했지.. 나도 그 이후부터 .. 그러니까 그 그룹의 시작은 1969년경이 아니었던가.. 까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