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adalupe, Tobey, Bernadette ..

Juan Diego의 망토에 새겨진 과달루페 성모님 상
Juan Diego의 망토에 새겨진 과달루페 성모님 상

¶  Our Lady of Guadalupe:  과달루페의 성모님! 처음 이 성모님 발현에 대한 것을 듣게 된 것은  ‘아마도’ 무척 오래 전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당시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그저 ‘마음 약한 영혼들’이 애타게 찾는 천상의 예수님의 어머니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1989년 쯤 위스컨신 매디슨에 살 적에 한국에서 University of Wisconsin, Madison 위스컨신 주립대로 ‘연수 차’ 오셨던 김희선 신부님 (본명을 잊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께서 멕시코에 다녀 오시면서 과달루페 성모님 상 사진을 선물로 사가지고 오셔서 우리집도 한 장을 받았고 기회가 있으면 벽에 붙여놓기도 했었다. 그 당시 과달루페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신부님으로부터 분명히 들었을 터이지만 역시 ‘관심 밖’이어서 전혀 기억이 안 난다. 그것이 과달루페 성모님에 대한 나의 기억의 전부였다.

25년을 fast forward한 현재는 어떠한가? 오늘이 바로 천주교 전례력으로 ‘과달루페 성모님 축일 feast’로 나는 처음으로 특별히 신경을 써서 뜻 깊게 축일 미사를 맞았다. 그렇게 바뀐 나 자신이 나도 놀랍기만 하다. 세월의 장난일까.. 아니면? 이제는 이 특별한 발현의 배경, 역사, 뜻, 그리고 인류 구원사, 세계사에서의 의미까지도 깊이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 ‘발현 사건’은 알면 알게 될수록 신비롭고 특히 ‘과학과 신앙’의 각도로 깊이 연구한 결과는 가히 놀랍기만 하다. 물론 이 ‘발현’을 ‘믿는다면’ 그렇다는 것인데 지금 나 자신은 100% 이 발현 ‘역사’를 믿는다. 그래서 더욱 놀라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시대 이후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님이 ‘계속’ 인간들에게 발현하시는 첫 번째 이유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같이 자신이 없는 신앙인들을 ‘응원’하시는 그것이 첫 번째 발현 이유가 아닐까?

1531 12 9 지금의 Mexico City 에 발현하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과달루페 성모님이라고 하는데 이 과달루페라는 이름은 성모님 자신이 발현 당시 자신을 지칭하는 ‘단어’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특별한 뜻은 없는 것 같다. 16세기 초 멕시코 지역은, 물론 Aztec 아즈텍 원주민들이 살던 땅이었지만 Spain 에게 ‘정복, 개척’되기 시작했던 때였고, 따라서 가톨릭 신앙이 전해지던 때이기도 했다. 그 당시 Aztec ‘나라’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원시,태양숭배 종교로 통치되던 때였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살인적 희생물’로 바쳐지던 공포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 당시 이들의 태양숭배 인간제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오래 전 Indiana Jones (Temple of Doomed) 영화에 나온 그런 장면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심장을 손으로 꺼내는 끔찍한 장면.. 그런 ‘공포 정치’속에서 살던 원주민들.. 그들에게 스페인 정복자들이 ‘사랑과 자비’를 기치로 가톨릭 신앙을 전하던 때에 ‘과달루페 성모님’이 발현하신 것이다. 발현은 그래서 어떤 원주민 ‘아저씨’ Juan Diego (후안 디에고?) 에게 나타나셨는데 이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지고 유명해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듯 하다. 12월의 추운 날씨에 ‘아저씨’에게 나타나신 성모님은 지역이 피지 않는 장미를 ‘증거’로 Juan Diego에게 주시고 그것을 의심 많은 주교에게 전하게 되었는데.. 그 ‘아저씨’가 그 장미를 tilma(망토) 에 담아 왔고 그것을 주교에게 보여주려 펼치자.. 장미를 쏟아지고.. 그 tilma에는 ‘찬란한’ 성모님의 상이 ‘각인’이 되어 있었다. 선인장으로 만든 그 tilma에 그 유명한 과달루페 성모님의 모습이 그대로 새겨진 것이다.

그것을 보고 어떻게 더 ‘의심’을 할 수 있겠는가? 그 주교님은 그대로 땅으로 쓰러지면 경배를 하고.. 성모님의 요청인 ‘성모님 성당’을 그곳에 짓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과달루페의 역사’가 되었다. 이후 그 ‘성모님 상’에 많은 피해와 위기가 있었지만 모두 ‘기적적’으로 극복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발현 자체도 기적이고 그 ‘상본’이 하나도 변질되지 않고 지속되는 것도 기적이고.. 발현 이후 수많은 원주민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 것도 기적이고… 기적의 집합체인 것이 바로 과달루페 발현이다. 신학적으로도 신세계인 America대륙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성모님 사랑의 배려로 충분히 설명이 되기도 한다.

이런 ‘흔한’ 배경 이야기 보다 나는 그 유명한 성모님 상본이 ‘과학적’으로 분석되고 있는 것, 그리고 그 결과에 더 관심이 많이 간다. 과학적 분석만으로는 기적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설명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종교적 믿음과 ‘수학적’ 과학의 차이이니까 당연한 것이다. 특히 무신론적인 일본인 과학자가 digital image analysis를 통해서 분석한 성모님의 눈동자 속에 반사된 Juan Diego(목격자)와 주교의 모습들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울 뿐이다. 나에게 정말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인류역사에서 성모님 발현의 목적은 분명하고 뚜렷하다는 것.. 특히 초 현대를 살아가는 요새의 인간들에게… 절대로 희망은 있다!

 

¶  Tobey, 10!  12월 9일.. 은 우리 집 수컷 강아지Tobey 생일이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특별한 생일인 10 생일을 맞았다. 이런 중요한 날을 완전히 잊고 넘어갈 했는데 Tobey 오랜 역사를 같이 해온 East Cobb Animal Medical Center에서축하 카드 email 와서 알게 되었고 아하.. 올해가 10 생일이구나..하는 탄식이 나왔다. 10살이면 이제 인간나이로 나와 맞먹는 것이기에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Tobey와 100% 닮은 크리스마스 카드
Tobey와 100% 닮은 크리스마스 카드

우리 집에는 Tobey 대한 크고 작은일화들이 많아서 그것을 기억하려면 한이 없을 정도다. 괴로운 것은 잊으려 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snap 사진을 통해 즐기려 한다. 근래에 들어 많은 사람들이 pet 데리고 사는 것을 감안하면 특히 식구가 적은 우리 같은 곳에서 이런 pet 존재는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어떨 때는 진짜 사람 식구와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해서 이런 pet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보면한심한 듯한눈총을 받는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속으로당신도 한번 길러 보고 말해!’ 라고 하고 싶을 때도 있다.

 

현재까지 Tobey 건강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10살이라는 느낌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본격적인 노년으로 접어 것인데, 주변에서 듣고 보고 것으로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문제들을 생각하며 우울해지기도 한다. 진희네 집의 , ‘공주 하루아침에 눈이 멀었고, 다른 쪽에서는 개가 제대로 걷지를 못한다. 사람은 아프면 말이라도 하지만 애들은 어떨까? 사회적, 문화적으로 이제 개나 고양이 들은 거의사람 같은 식구대접을 받게 되어가고 우리도 차이가 없다. Tobey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사람 못지않게 정말 슬플 같다. 살을 맞이한 Tobey.. 우리와 사는 동안 건강하게 살아다오!

 

Bernadette & Nathan
Bernadette & Nathan

Bernadette.. 버나뎃, 벨라뎃따,  흔히들 프랑스의 루르드 성모님 발현의 목격자 소녀의 이름을 떠올린다. 하지만 여기의 Bernadette는 캐나다에 사는 나의 중앙고 동창 정교성 딸의 이름이다. 인 친구는 매년 꼬박꼬박 크리스마스 카드를 12월 초만 되면 보내준다. 요새 우표를 붙여서 카드를 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련만  이 친구는 고집불통으로 ‘인터넷’을 외면하고 이렇게 고전적인 방식을 고집해 왔다. 오랜 전에는 나도 우편 카드로 답을 하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나중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나의 작은 친 형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언제나 성숙한 친구, 전통적인 천주교인’ 정교성.. Wife를 병으로 잃은 후  재혼한지도 꽤 오래 전인데 이제는 딸 (큰 딸인지 작은 딸인지 확실치 않지만) Bernadette이 결혼을 한다고 결혼 안내장을 동봉해 주었다. 청첩장이 아니고 청첩장을 예고하는 card였는데.. 신부와 신랑감에 대한 아주 자세한 설명이 그곳에 있었다.

신랑감은 테네시주 내쉬빌 출생의 미국인, 그리고 evolutionary biology (진화생물학) 박사학위 소지자 로서 캐나다 시민인 Bernadette을 Toronto의 Royal Ontario Museum에서 post-doctoral research하면서 만났다고 한다. 교성이는 딸이 두 명이 있는데 Bernadette이 장녀인지 차녀인지.. 확실치 않다. 오래 전에 보내준 가족사진이 어디로 갔는지.. 우리 집도 두 딸이고 해서 ‘동지’같이 느꼈는데 이렇게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을 보니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집 두 딸은 요새의 풍조대로 결혼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더욱 부러운 것이다.

신랑이 우리가 사는 인접한 테네시 주 출신이라서 혹시 결혼식을 그곳에서 하게 된다면 이 친구가 미국을 방문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수십 년 만에 다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마 우리 둘은 서로 몰라볼 정도로 변해 있을 것 같은데.. 교성이는 옛날 부터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별로 변하지 않았을 것에 비하면 나는 ‘완전히 변한’ 모습이라서 더욱 그렇다. 하기야 내년에는 더 늦기 전에 캐나다 쪽으로 여행을 할 계획도 있어서 딸의 결혼과 상관없이 한번 보게 될지도 모른다.

친구야.. 정말 축하한다. 정든 딸을 보내는 아비의 심정 나는 현재 상상이 잘 안 가지만.. 어찌 섭섭하지 않겠니?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순리가 아니겠니.. 덤덤하게 행복을 빌어주며 보내렴.. 인자하신 성모님과 주님의 가호가 딸 부부에게 함께하기를 빌어본다.

Readers: Hope, Merton

¶  CROSSING THE THRESHOLD OF HOPE

Scan10105-1 몇 개월 전이던가.. 확실치 않다.. 하지만 6개월은 넘지 않았을 것 같은 느낌. 우리가 다니는 미국 본당 Holy Family CC (Catholic Church)의 성체조배실 (adoration chapel) 에서 비교적 낡은 책 하나를 읽게 되었다. 조그만 책자였는데, 눈에 익은 이름이 보였다. HIS HOLINESS JOHN PAUL II.. 그러니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저자인 책이었다. 제목이 바로 ‘CROSSING THE THRESHOLD OF HOPE” 였다. 직역을 하면 ‘희망의 문턱을 넘어서..’ 정도가 될까. 나 나름대로의 의역은 ‘희망으로 넘어 가며’  조금은 어색한가.. 희망이 없던 사람이 그것을 찾으려 노력하다가 비로소 조금씩 그것을 찾아간다 정도가 아닐까?

성체조배실에서는 주로 성체를 앞에 두고 명상이나 묵상 나가가서 관상까지도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무엇을 하던 사실 제한은 없는 것 같다. 연숙과 그곳을 거의 정기적으로 가게 된 것은 우리가 ‘평일 미사’를 시작하면서였고 평일 미사가 끝난 후에, 필수적으로 일주일에 몇 번을 하는 것은 정하지 않고, ‘가고 싶으면’ 가는 것으로 했는데 의외로 정기적인 것이 되었다. 이 본당의 성체조배 활동은 참으로 활발해서, 우리의 한국본당 순교자 성당에 비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할만 하다. 왜냐하면 순교자 성당에는 ‘성체조배실’이란 것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항상 비어있는 듯한 컴컴하고 춥고, 더운  순교자 성당의 분위기1와 이곳의 24시간 쾌적하게 돌아가는 성체조배실이 있는 미국본당의 ‘눈에 안 보이는 차이’는 아마도 상상을 초월할 듯 하다. 어떤 자매님은 경험적으로 성체조배 활동이 있는 모든 본당의 신심 수준2은 ‘거의 자동적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성체조배 Eucharistic Adoration  란 것이 처음에 너무나 생소했지만 의외로 좋은 ‘선배’들을 만나서 큰 무리 없이 합류가 되었고 이제는 ‘좋은 시간’ 중에 하나가 되었다. 레지오 덕분에 처음에는 ‘기본’ 묵주기도 의무를 채우려 이곳에서 그것을 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만의 ‘묵상, 생각’의 시간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다른 것 중에는 그곳에 비치된 ‘좋은 책’들을 ‘난독’하는 것이다. 거기서 정독을 할 수는 없기에 눈에 ‘꽂히는’ 것을 읽는다. 이런 것들이 우연일 수도 있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지 않게 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여기에 언급하는 이제는 ‘성인’이신 요한 바오로 2세의 책인 것이다.

 처음에 이 책을 접했을 때 직감적으로 ‘괜히 어려운 책을 골랐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교황님이 쓰신 글들은 ‘무조건 어렵다’ 는 선입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분명히 ‘교황 회칙이 어쩌구.. 교회 헌장이 어쩌구..’ 하는 글들이 태반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원인이었을까.. 이 책을 조금 읽으며 나는 너무나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를 않았다. 웬만한 교구신부님3들이 일반 본당에서 하시는 수준의 글들.. 주제 들은 ‘항상 궁금했지만 창피해서 물어보지 못하던 것’들로 꽉 차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우연이었을까.. 내가 이 책을 고르게 된 것이.. 아닐 듯 하다.

그렇게 성체조배실에서 ‘가끔’ 즐기던 이 책이 어느 날 보니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누가 ‘빌려간’ 모양인지.. 아쉬운 마음이었지만 포기를 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다시 그 책이 돌아왔기에 이번에는 never again의 심정으로 그 책의 제목을 적어와서 Amazon.com에서 찾았다. 1994년 발행된 책으로 그러니까 20년이 된 책이었다. 역시 이것도 contemporary classic 영역으로 들어가는가.. 왜 이렇게 세월이 빨리 가는가. 아직도 ‘출판’이 되는 책인 것을 보니 역시 popular classic이 된 듯하다. 거의 free로 사게 된 (shipping & handling + nothing!)이 책.. 나와는 우연이 아닌 인연으로 성체조배실 보다 더 쾌적한 나의 서재에서  ‘정독’을 하게 되었다.  읽으며 ‘남기는’ 방법.. Reading by Typing..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에 있을까? ‘성경필사‘를 하는 이유와는 다른 것이지만 아마도 그 다음으로 좋은 방법이 아닐까? 읽은 후에 다른 ‘영혼’들과 이 생각과 글을 나눈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레지오의 사명‘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 책이 나오게 된 연유, 과정이 머리글에 자세히 적혀있다. 그것을 읽어보니 ‘왜 이 책이 그렇게 읽기 쉽던가?’ 하는 의문이 저절로 풀린다. 1993년 가을 이탈리아의 TV 방송국에서 ‘교황청 역사상 유례없는’ 기획을 했는데.. 교황과 TV인터뷰를 하는 idea였다. 그것도 ‘전세계로 방영이 되는’ 것으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그 당시에도 거의 ‘의외적’인 교황으로 ‘예상을 불허하는’ 교황직을 수행하고 있었기에 이런 제안을 ‘수락’한 것도 전혀 예상 밖은 아니었다고 한다. 교황과 인터뷰를 하려면 아마도 미리 ‘예상적인 질문’ 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 대답, 반응도 예측 불허였을 것이다.

하지만 또 예상을 뒤엎고 이런 기획이 취소가 되었다. 너무나 바쁜 교황의 스케줄 때문이었다고 한다. 연기를 할만한 여유도 없었고.. 그러니까 TV 인터뷰 계획은 ‘물 건너 간 것’이 되었다. 몇 개월 후에 또 다른 surprise가 있었는데, 역시 요한 바오로 2세의 ‘예측 불허’한 행적이었을까.. TV 인터뷰 대신에 ‘서면’으로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교황님의 대답이 왔고 그 결과가 이 책이 된 것이다. 이 책을 보면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질문의 ‘수준’이 거의 예비자 교리공부의 것과 비슷할 정도다. 그러니까 교황님이 직접 지도하는 예비자 교리반 같은 분위기인 것이다.

이 책의 비교적 짧은 질문, 대답 을 읽는 것은 한마디로 즐겁기만 하다. 감히 교황님께 이런 질문이… 가당한가.. 하는 것들이지만 ‘기가 막힌 대답’들이 너무나 놀라운 것이다. 이분의 ‘지식’은 상상을 초월하지만 ‘알기 쉽게’ 설명하는 실력은 더 놀라운 것이다. 내가 제일 놀라워한 질문은 ‘예수님이 진정 하느님의 아들인가?‘ 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우리 교리반 교사들 같으면 어떻게 대답을 했을까? ‘그것도 모르며 어떻게..’ 하지는 않았을까? 아마도 ‘그것은 ‘무조건’ 믿어야 하는 ‘공리’ 중에 하나다’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대답은 그런 것들을 모두 뛰어 넘는 ‘자상한’ 대답들이다. 현재 1/4 정도 typing을 하고 있고, 덕분에 더 빠른 pace로 모두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정독을 하며, 각 질문과 대답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전혀 다른 과제일 듯 하다.

 

 ¶  MERTON by Thomas Merton

Scan10109-1Thomas Merton, 가톨릭 교회, 특히 ‘미국 가톨릭’ 계에서는 너무나 잘 알려진 ‘트래피스트 수사님’..이기전에 bestseller author 인 것을 나는 비교적 근래에 들어서야 알게 되었고 그 분의 사후 posthumous 의 인기와 power를 실감을 하게 되었다. 우선 1968년, 그러니까 아주 오래 전에 ‘선종’한 이 Trappist Monk가  왜 아직도 그렇게 화제이며 유명할까.. 흥미롭지 않은가? 현대판 성 어거스틴, 아우구스티노 라고도 불리는 이분의 일생은 비록 50세를 조금 넘는 비교적 짧은 기간이만 너무나 색채가 진하고 강하고 다양해서 이분의 전기를 쓰는 사람들은 아주 애를 먹으리라 생각이 된다. 50세의 인생을 이렇게 강렬한 후광을 뿌리고 갔다는 것 자체가 ‘멋진’ 것이 아닐까?

The Seven Storey Mountain 칠층산 이란 제목의 ‘자서전, 참회록’이 초기 대표작이지만 그 이후 수 많은 주옥 같은 시집을 비롯한 저서를 남겼고, 사후 이분에 대한 저서는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만큼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수도자’라 할 것이다. 일화에 위에 말한 그의 첫 자서전이 세상에 나온 뒤 1950년대에 많은 ‘건강한 젊은 남자’들이 이 책의 영향으로 가톨릭 수도회에 입회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뒤 주머니에 이 책을 끼고 왔다고 했다. 그 정도면 대강 짐작이 가지 않을까?

Thomas Merton
Thomas Merton

여기서 이들의 공통점은 그 책의 저자도 당시 ‘젊다’라는 것이고 영향을 받았던 이들도 젊었다는 것인데.. 지금 60대 중반을 훌쩍 넘어가는 나는 과연 이것들과 무슨 공통점이 있단 말인가? 나이에서는 전혀 공통점이 없다. 하지만 ‘진리를 찾고 싶고, 그 진리로 생을 살고 싶다.’ 라는 것은 비슷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그들처럼 수도승이 되고 싶지도 않고 사실 이제는 되고 싶어도 될 수도 없다. 그것 빼고 나머지는 나도 ‘진리’를 알고 싶은 것이다.

Thomas Merton을 가장 ‘짧게 소개한’ 글이 있을까? 대강 2~3 페이지 정도로.. 물론 내가 신뢰하는 Wikipedia를 보았지만 그곳은 ‘객관적’인 역사, 사실, 업적 들을 dry하게 기술했을 뿐이다. 그곳에는 ‘주관성’이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다. 그러다가 ‘우연히’ A Thomas Merton Reader란 책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았다. 그 방대한 Merton 저서들을 모아서 500 여 페이지 한 권으로 압축한 편리한 이 책의 서두에 있는 Introduction(by M. Scott Peck) 바로 그것이다. 이 ‘소개장’을 한마디로 줄이면 “Merton은 짧은 글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사람’ .. 이것은 나도 이제 충분히 이해가 가고, 그래서 그렇게 많은 책들이 그를 모든 각도에서 조명하려고 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Merton에 대한 Introduction은 이렇게 시작이 된다. 

It is impossible to adequately “introduce” Thomas Merton. I have a sense I might almost as well attempt to introduce God. This is not because I worship Merton but because he was an extraordinarily complex and complicated man, multifaceted, diverse, and variable. He was one of those occasional people who could be described as “larger than life”.

 

500 페이지의 Reader 어떤 방식으로 읽을까 생각하니 이것이 장난이 아니다. Reading by Typing 물론이지만.. 페이지부터 읽을 것인가.. 아니면 난독random 하게 골라서, 아니면 다른 곳에서도움 받아서 읽을 것인가.. 아직은 전혀 idea 없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나는난독으로 시작할 하다. 나에게 방법이 제일효과적임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1. 한 여름에 순교자 성당 대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해본 사람들이면 이것이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2. 이것은 또한 신자 수와 헌금액수에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3. 예수회신부님들이나 수도회 수사들과 다른 일반 목회자들

Inaugural feast day, John Paul II

st-john-paul-2며칠 전이던가.. 우리의 미국본당의 달력을 보니 10월 22일에 Bl. John Paul II라고 적혀 있었다. 이 달력은 교회달력이라서 일년 열두 달 거의 매일 성인의 feast day가 적혀있다. 매일 미사를 다닌 이후 나는 이렇게 매일 성인의 축일이 있던 사실에 새삼 놀랐고 얼마나 내가 ‘무식한 천주교 신자’였던가 부끄럽기도 하였다. 매일 미사를 다니다 보면 ‘부수입’으로 이렇게 성인열전을 가볍게라도 공부하게 되어서 아주 유익하다.

그런데 오늘 10월 22일 수요일 미사엘 가니 바로 요한 바오로 2세의 ‘첫 축일’ 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며칠 전에 잠깐 본 Bl. John Paul II가 생각났다. Blessed John Paul Second 그러니까 ‘복되신 요한 바오로 2세’의 축일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inaugural feast day, 시성 후 첫 축일이라서 나는 무슨 ‘역사적인 사건’을 겪는 듯 가벼운 흥분이 스며들었다. 올해 부활절 때 시성이 되신 후 첫 축일.. 역시 역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살아 생전에 ‘살아 계셨던’ 교황님이었고 나의 살아 생전에 돌아 가셨으며, 또한 살아 생전에 성인이 되신 것은 나로써는 조금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것이다.

무척 많은 ‘일반 인’들이 이 성인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나도 그들에 못지 않게 이분을 좋아한다. 아니 존경, 아니 공경을 한다. 내가 꿈에도 꿀 수 없는 role model로 삼고 살아간다고 하면 조금 over일까? 2005년 선종을 하실 때, 나는 처음으로 이분에 대해 깊이 공부를 하고 묵상을 하게 되었고 그 당시 나는 이분이야 말로 나의 남은 평생 role model로 삼아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 100% 확신을 하였다. 그 이후 나는 얼음처럼 차갑게 얼었었던 나의 신앙심을 조금씩 녹여 나가기 시작해서 현재까지 계속 그 여파로 녹아가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어떠한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 그리고 세속적인 변화에도 이분만은 변함없이 ‘진실’을 밝히고 선포하실 것이라 나는 믿게 된 것이다. Do not be afraid라는 간단한 명언을 나는 얼마나 좋아했던가?

처음에는 약간 감상적인 기분으로 이분을 존경하기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더 이 성인을 알아가며 인간 요한 바오로 을 ‘절대적’으로 믿고 존경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나를 매료시켰던 면은 이분의 ‘찬란한 지적 은총’이었다. 철저한 신앙적 믿음에 못지 않는 지성의 깊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듯 하다. 한 마디로 ‘공부 잘하는’ 교황인 것이다. 후계 교황인 베네딕트 16세가 아마도 지적으로 이분을 능가할 지도 모르지만 베네딕트 16세는 요한 바오로 2세에 비해서 다른 면이 떨어지는 듯 느껴진다. 절대로 굽힐 수 없는 지켜야 할 ‘진리, 교리’를 지켰고, 세계 정치를 신앙적인 눈으로 설득시켜는 힘은 아마도 이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을 따를 수가 없을 것이다.

오늘 이날을 맞아 ncregister.com에 관련 기사가 실렸는데 Catholics Remember St. John Paul II’s Personal Impact on Inaugural Feast란 제목으로 몇 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이날을 맞아 이 성인에 대해 회고를 하는 기사였다. 평범한 젊은 신자에서 신부님까지 포함 된 이런 개인적 경험 일화를 보면서 1978년부터 2005년까지 이 성인이 세계적으로 미친 영향, 거의 한 세대에 걸친 범세계적인 불굴의 선교는 앞으로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험난하고 어지러운 세상의 등대역할을 하리라 확신한다.

우울한 자비 주일 2014

성인 요한 23세(왼쪽), 성인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요한 23세(왼쪽), 성인 요한 바오로 2세

2014년 4월 27일 일요일.. Divine Mercy Sunday 그러니까 2014년 자비의 주일이다. 교회 전례력으로 매년 부활주일 다음주일이 자비의 주일이지만 올해는 두 명의 새 성인이 탄생하는 날이기도 해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이런 ‘경사스런’ 날 아침에 나의 머리는 복잡하고 우울하기만 할까? 나의 무거운 머리 속은 시성식이 거행 되었던 바티칸 시국과 내가 낳고 자랐던 정든 조국의 남쪽바다, 진도의 상상된 광경으로 가득 차있다. 이렇게 대조적일 수가 있을까?

하느님의 자비가 두 명의 성인을 탄생시켰지만, 하느님의 자비가 철저히 비어있던 불쌍한 곳에서는 죄 없는 영혼들의 울음소리가 끝이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구약성서 ‘욥기, Job’의 절규조차 질리게 할 만한 슬픔이 있을 수 있을까? 짧은 생을 살아야만 했던 순진한 영혼들은 다음에 어떤 ‘생’으로 이어질까..여기에도 하느님의 자비가 관계가 되어 있을까? 나는 믿고 싶다.. 이 어린 영혼들의 ‘지상에서의 삶’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 보다 더 큰 의미를 갖고 있었고 그것이 내세에서 더 큰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세월호 참극 뉴스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더 피할 뻔뻔스러움이 싫어졌다. 아예 슬픈 감정이 더 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주변의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것을 알았다. 피하고 피할 수록 더 불안하고 미안한 심정을.. 아예 100% ‘가슴을 열고 슬픔에 동참하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Vatican youtube site에서는 이곳 시간으로 오늘 새벽 3시에 거행된 두 분 교황의 시성식이 뒤 늦게 stream되고 있고 다른 쪽 CNN에서는 대한민국 prime minister의 사임 뉴스가 보인다. 청와대 바로 직전까지 불똥이 튄 것이다. 현재의 국민적 심리로 보아서 거의 당연한 듯 보인다. 하지만 정치적인 여파는 거기서 끝났으면 좋겠다. ‘박’씨라면 이를 가는 ‘빨갱이’들을 위시한 정적 政敵들이 이런 비극을 ‘이용’하는 것은 절대로 추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심정을 아는 듯, 부활절 때 그렇게 좋았던 바티칸의 날씨도 이번에는 흐리고 가랑비까지 내린다. 내가 그렇게 존경했던 20세기의 진정한 거목, 요한 바오로 2세와, 어렸을 때(1960년) 신문에서만 보고 들었던 요한 23세.. 이제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요한 23세는 카리스마는 없지만 천주교를 21세기로 향하는 발판을 마련한 바티칸 공의회 Vatican II를 과감하게 밀어 부친 실로 큰 일을 하였다. 라틴어로 보던 미사가 지역언어로 바뀌는 등 그는 실로 미래를 향한 초석을 깔아 놓고 간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세속화가 가속되는 초 현대를 이해하고 유럽과 남미에 치중된 천주교를 전세계로 그야말로 세계화, 지구화를 시킨, 날카로운 지성을 가진 카리스마의 인물.. 자기의 조국 폴란드에서 시작, 공산당의 그림자를 지구상에서 몰아내는 시발역할을 하였다. 그의 영향을 받은 ‘젊은 세대’는 서서히 21세기의 신앙 주역을 맡기 시작하게 되었다. 실로 이 두 전 교황은 성인의 요건을 100% 이상 가진 인물 들이었다.

자비는 나의 사명: 성녀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자비는 나의 사명: 성녀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자비의 예수, 상본
자비의 예수, 상본

자비의 주일.. Divine Mercy.. 사실 이것도 ‘성인’ 요한 바오로 2세의 숨결이 느껴지는 그런 축일이다. 자비의 축일의 근원은 요한 바오로 성인의 조국인 폴란드 출신의 ‘못 배우고, 가난한’ 어떤 수녀, 지금은 성녀인 성녀 파우스티나 St. Faustina였다. 20세기 초반, 2차 대전 발발 전까지 살았던 그녀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고 ‘예수님의 자비’를 온 세계에 퍼뜨리라는 사명을 받고 그것을 일기에 모두 적는다. 주위 시기에 가득 찬 동료 수녀들의 방해를 극복하고 그녀의 사명은 세상에 알려진다. 그것이 그녀의 일기였던 ‘자비는 나의 사명‘이란 책이었다. 그 책을 읽어보면 ‘인간을 사랑하고 싶고 자비를 주고 싶은 예수’가 생생하게 묘사되어있다.

2000년 초에 그녀는 동족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 시성이 되었다. 자비의 축일은 사실은 예수께서 그녀에게 지시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세상에 알려진 것은 결국 그녀의 일기, ‘자비는 나의 사명’이었다. 몇 년 전에 나는 이 책을 reading by typing으로 모두 읽어 보았는데.. 신체적인 병고를 무릅쓰고 주위 수녀들의 질시, 방해를 극복하던 그 성녀, 수녀님의 모습들이 머리 속에 그려지곤 했다. 성모님의 발현도 아니고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서 예수님의 심장에서 찬란하게 퍼져나가는 ‘자비의 빛’을 상본으로 그리라는 이야기는 처음에는 잘 믿기가 힘들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나는 다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받은 ‘작은’ 은총일지도 모른다.

세월호, 자비 주일, 두 거대한 교황성인.. 이 세가지는 어떻게 연결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위안을 받고 싶다. 자비가 넘치는 예수님을 필두로 두 분의 성인 교황님들의 전구의 효과 등을 감안한다면 죄 없이 일찍 하늘나라로 간 어린 영혼들과 불쌍한 영혼들은 충분히 위안을 받으리라.. 또한 유족들도 그에 못지않은 천상의 위안을 받으며 슬픔이 치유되리라.. 기도하고 기도한다.

첫 Holy Triduum

Triduum..트리듐, the Three Days: 부활 일요일을 향하는 목,금,토요일 3일을 뜻한다. 다른 말로 Easter Triduum, Paschal Triduum이라고도 한다. 우리말로는 그저 ‘성삼일’ 정도가 될까? 그 첫째 날 목요일이 바로 오늘이다. 그러니까 2014년 Easter season의 절정 문턱에 있는 첫 날이 되는 것이다. 참.. 세월도 빠르지 엊그제 주님 성탄을 향한 대림절을 지낸 기억인데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리스도 교의 결정체인 주님의 수난, 묻힘, 부활을 기리는 바로 그날이 코 앞에 온 것이다.

가톨릭 전례에서 성삼일은 성 목요일, Maundy Thursday, 성금요일, Good Friday 그리고 성 토요일 Easter Vigil 로서 정확한 시작은 목요일 저녁 미사로 시작되어 토요일 미사로 끝난다. 인상적인 것은 시작점인 목요일 마사로 전통적으로 이날 신부가 신자 12명을 뽑아서 발을 씻기는 것이 있고 (세족례) 대영광송이 끝남을 시작으로 오르간과 종 소리가 금지되고 부활아침까지 결혼예식도 금지가 된다. 성 목요일 미사의 마침을 기해서 성전 내부 제단 주변의 모든 ‘장식물’이 모두 철거가 된다 (움직일 수 있는 것들만). 처음에 이런 광경을 목격하며 나는 이런 상징적인 의식들이 하나하나가 모두 성서적, 신학적, 전통적인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하기도 했고, 너무나 인상적이고 충격적이기도 했다. 예수의 수난 passion의 의미를 너무나 극명하게 나타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성금요일 Good Friday는 실제로 예수님이 ‘죽는’ 날로서 전례적인 행사는 거의 없는 것인데 (정확하게 미사는 없는 것이다) 전날 축성이 된 성체를 분배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하며 특히 십자가 경배 veneration of cross라는 것을 통해서 십자가 죽음을 애도하며 부활을 기다리게 된다. 성토요일 밤의 미사는 부활을 기다리는 주제로 깜깜한 밤, 성전의 밖에서 만들어진 ‘촛불’이 성전으로 들어오면 촛불 미사가 진행이 된다. 이런 광경도 너무나 인상적인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원칙적’으로 성삼일을 체험적으로 기리는 것으로 정하고 ‘절대로 빠지지’ 않고 3일 ‘행사, 미사’에 참가를 하였다. 물론 처음에는 큰 부담도 느꼈지만 시간이 가면서 이제는 은근히 기다리게 될 정도가 되었다. 그만큼 우리는 분명히 이 부활의 의미를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내가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 되면서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 생각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름을 절감하게 되었다.

작년 2013년의 성목요일은 나의 첫 체험 시도로 성삼일 시작인 저녁 미사 후부터 시작되는 “감실성체조배”에 참가를 하였다. 목요일 저녁부터 금요일 아침까지 ‘계속’되는 성체조배, Eucharistic Adoration이었는데 한 사람이 계속하기가 쉽지 않아서 1시간 정도로 시간을 정해서 대부분 레지오 단원들이 책임지고 감실을 지키며 성체조배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정 후 1시부터 한 시간 참가했는데.. 그때 내가 받았던 느낌은 글로 쓸 수없이 강해서 오늘까지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는다. 그 이후 나는 내년에도 ‘꼭 참가’하리라 각오를 했다. 그 ‘내년’이 오늘 밤으로 다가온 것이다.

작년 성목요일 감실 성체조배 때에는 그 당시 발견한 Dr Eben Alexander의 The Proof of Heaven이란 신간 NewYork Times bestseller를 읽으며 묵상도하고 했는데, 그때 나는 거의 확신을 하게 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처럼 ‘이성과 신앙’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을 재삼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신경외과의 그러니까 자연과학자인 저자의 ‘간증’이 그렇게 나에게 실감 있게 다가온 사실은 정말 나에게도 뜻밖이었는데 아마도 그 때의 성체조배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 나는 굳게 믿는다. 그 이후 나는 이성과 신앙만이 아닌 ‘과학과 믿음’의 접근 분야에 대해서 거의 일년 동안 공부를 하게 되어서 현재까지 이르렀다. 이것의 출발 점이 바로 작년 성목요일이라서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올해는 ‘첫 성삼일’이라고 이름을 부쳤다. 자세히 말하면 우리의 첫 ‘한인 순교자 성당’ 성삼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 부부가 ‘처음으로’ 한국 순교자 성당에서 부활절을 보내게 된 것이다. 이것도 우리에게는 두고두고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해 본다. 암만 동네의 미국본당에서 긴 세월을 보냈지만 어찌 우리말이 울려 퍼지는 고향 같은 다른 본당과 비교가 되겠는가? 아직도 반반 정도 미국본당과 순교자 성당 본당을 번갈아 가지만 조금씩 순교자 성당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감을 느낀다. 앞날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더욱 더 한국본당으로 가는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추측도 해 본다. 워낙 미국본당에 정이 든 탓에 한국전례문화가 너무나도 생소한 우리 두 딸들을 설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져서 우리의 큰 과제로 남게 되었다.

 

아틀란타 부활 영세식 2014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2014년 부활 영세, 세례식

 

2014년도 부활절 영세식이 4월 12일에 뜻 깊게 막을 내렸다. 천주교에서 영세, 세례의 의미는 아마도 개신교회와 ‘차원’이 다를 것이다. 쉽게, 편하게 하느님을 만나려는 그들과 상징, 과정, 연수, 고행이 따르는 우리 천주교의 하느님 만나는 과정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나와 연숙에게 올해의 영세식은 분명히 다른 해와 다르게 가슴으로 찡~ 함을 느끼게 다가왔다. 영세식이 끝나고 단체사진을 찍을 때 멀리서 몰래 찍은 이들의 모습을 보면 설명이 필요가 없다. 한결같이 행복하게만 보이는 이 모습들.. 나이나 성별에 상관이 없다. 세례를 주관하신 주임신부님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이 아마 그런 모습을 만들었을 것이다.

우리도 30여 년 전을 부지런히 떠올리며 이들의 심정을 헤아렸지만 아무래도 30년의 세월은 조금 긴 것 같이, 자세한 그때의 정경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거의 100% 기억하는 것은 그 때의 우리의 ‘행복한 느낌’이었다. 그 희미한 감정은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 세례자들도 아마 마찬가지의 기억을 갖게 될 것이다.

이번 영세식은 우리에게도 의미가 상당했다. 나와 연숙이 지난 해 8월부터 모두 봉사자란 이름으로 예비자 교리반에 참가하여 무사히 이들을 ‘요르단 강’ 가로 배를 함께 저었다는 느낌이고, 예비자 거의 전부가 끝까지 항해를 했다는 안도감과 자부감등으로 우리가 다시 세례를 받는 것처럼 가슴이 뿌듯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번 교리반 봉사자로 참가해서 우리가 얻은 것은 이 예비자 들에 비해 크게 떨어질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많이 얻고 배웠던 것이다.

대부분의 교리는 수녀님과 신부님이 담당했지만, 우리 부부도 두 번 정도 담당할 기회가 있었다. 지나치게 보수적인 수녀님과 자유분방한 신부님의 스타일은 정말 대조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균형이 잘 이루어졌다고 할까..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신부님 스타일이 훨씬 마음에 들고 효과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맡았던 ‘교리 강의’에서 나는 신부님 스타일 흉내를 잠깐 냈는데, 역시 예상대로 수녀님의 재빠른 질책을 받았다. 아직도 나는 그런 수녀님을 이해할 수가 없지만, 그저 그저 benefit of doubt 만 되 뇌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대상한 예비자들은 거의 ‘고학력, 젊은 층’이 대부분이어서 우리와 호흡이 잘 맞았다. 우리에 비슷한 또래들도 마찬가지로 personal chemistry가 좋았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신과 용기를 주었던 것은 대부분 예비자들이 봉사자들을 격의 없이 믿어주고 사의를 표하는 자세들이었다. 그것도 너무나 신선한 것이.. 요새 ‘젊은 층’을 많이 보았기에 너무나 비교가 될 정도로, 건전한 말투, 모습들.. 보기만 해도 했다. 중장년 층의 예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머있고, 협조적이고, 한마디로 멋진 신사 숙녀들이었다. 이들이 하느님을 찾으려 8개월 동안 눈이오나 비가오나 매주 목요일 밤에 모였다는 것은 속된말로 장난이 아닌 것이다.

10대부터 60대까지 비슷한 비율의 남녀 형제, 자매들.. 우리에게는 모두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영혼들이다. 한창 ‘외우는 공부’가 더 쉬울 듯한 15세의 등치가 큰 소녀, ‘마누라’에게 등을 떠밀려 나왔지만 이제는 ‘교리반 재수’을 끝낼 각오로 참여 각가지 유머로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주던 Clint Eastwood를 연상시키는 60세 형제님, 무게가 실려있는 comment로 일관 한 귀공자 스타일, 옛날 알랑 드롱을 닮은 ‘백수’ 형제님, Tom Cruise를 연상시키는 30대 유학생 화학공학도, 항상 질문이 많고 심각하지만 겸손하기 이를 데 없는 50대 자매님.. 영화배우처럼 멋지게 생기고, 아버님과 같이 교리공부를 한, 멋진 약혼자의 후원을 받았던 (내가 제일 부러운 case) 형제, 20대의 젊음의 향기로 교리반의 공기를 채웠던 몇몇 유학생 자매, 형제들.. 그들을 보면서 우리도 30년 전을 회상하기도 했고, 그들 신앙여정의 앞날을 그려보기도 했다.

이제 세례, 영세식은 끝났지만 사실 학교 졸업과 마찬가지로 이제부터가 진짜가 아닐까? 그러니까 지금부터가 이들의 교회생활의 시작인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 보아서..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속사회를 이들은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20~30대의 젊은 층은 참 길 수도 있는 ‘파도’길을 가야 한다. 중장년 형제자매들.. 이들은 그렇게 시간이 길지 않다. 사실 내가 제일 큰 관심을 갖는 것이 세례를 받을 때까지가 아니고 이들이 ‘무사히’ 세파를 헤쳐나가는 하느님의 지혜를 어떻게 받고 쓸 수 있는가 하는데 있다. 내가 30년의 세월을 ‘실패’로 보냈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이분 들이 ‘하느님’이 생각보다 가까운데 계시며 그들을 지켜 본다는 깨우침을 하루빨리 가질 수 있도록 성모님의 전구를 청해 본다..

 

메주고리예, Medjugorje 2014

메주고리예.. 비공식 성모님 발현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계속, 아직도 정기적으로 발현이 되는 곳이다. 1981년 6월 26일 첫 발현 후 현재까지 계속 이곳에 성모님이 발현을 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믿기 힘들 정도며 놀랍기만 하다.

내가 처음으로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을 안 것은 1989년 6월 인디애나 주 노틀담 대학(Notre Dame University, South bend, Indiana) 에서 열린 성령대회에 가족이 참가했을 당시 그곳 전시장에서 정말 우연히 보고, 구입하게 된 책, 메주고리예 발현 화보였다.

 

메주고리예 발현 화보, 1989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천주교 영세를 받은 지 7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모르는 것 투성이였던 시절.. 하지만 자세히 생각을 하니 1981년 경 뉴스를 통해서 들은 기억은 정말 희미하게 나는 듯 하기도 했다.

medju-2
첫 발현 당시 6 visionaries 들 모습

메주고리예의 위치가 공산권이었던 유고슬라비아 였기에 소련 연방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그곳의 소식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련이 무너지면서 순례자들이 그곳을 방문하면서 점점 자세한 소식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나는 사실 그런 놀라운 발현 소식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성모발현’이란 것을 심각하게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3~4년 전부터 나의 신심적 르네상스를 거치며 비로소 나는 이 ‘믿기 힘든’ 성모발현을 믿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 과정은 조금 복잡했지만 간단히 말해서 지금은 이 성모님 발현이 나의 신심을 굳건히 지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나에게 사도 토마 같은 ‘의심’이 조금이라도 들면 나는 메주고리예 성모님을 생각하며 나를 달래곤 한다.

역사상 성모님 발현은 ‘수 없이’ 많지만 ‘공식화’ 된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과달루페, 루르드, 파티마 같은 classic한 것은 교회에서 정식으로 인정된 곳이지만 그 외에도 ‘수 없이’ 많이 있고, 대부분 신빙성이 아주 높은 case들이다. University of Dayton에서 설치된 세계 마리아 학회의 website (Mary Page)를 보면 아주 매일 일기예보를 하듯이 전세계에서 보고되는 발현 소식을 ‘모조리’ 기록해 두고 있다.

medju-3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은 한마디로 놀랍기만 하다. 1981년부터 현재 까지 33년 동안 ‘계속’ 발현을 하기 때문이다. 성모님이 전하는 얘기는 한결같이 간단하고 성서적이다. 발현 목격자 중에 Mirjana 에게는 한번도 빠지지 않고 매달 2일에 발현을 하는데 이 발현은 비록 사적인 것이지만 미리 예고가 되었기에 많은 순례자들이 성모님을 못 보지만 같이 참석하고 있다. 이런 광경이 이제는 인터넷의 힘으로 편안히 집에서 같이 볼 수가 있지만.. 과연 어떨까.. 믿고 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일 것이다.

천주교 교리에 의하면 성모님은 비록 인간이지만 인간 중에서 아주 독특한 위치와 지위를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하면 성인 중에서 으뜸가는 성인이라고 할까.. 성모님의 그런 위치는 ‘전구자(우리의 기도를 예수님께 전하는)’의 역할을 하는데, 왜 그렇게 33년 동안 특별한 목격자들에게 계속 나타나는 것일까? 정식으로 인정이 보류된 상태에서 교회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사실 그 이유(발현하는)를 나는 조금씩 깨닫게 되어가고 있다. 근래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그것이 아주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에 보이는 비디오는 2014년, 주로  Mirjana에게 발현하는 성모님에 관한 것이다. 이런 비디오는 대부분 메주고리예와 가까운 이태리 순례자들이 주관해서 만드는 듯하고 여기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태리에서 온 듯하다. 발현이 끝나면 곧 이어서 성모님의 message를 각국어로 번역을 해서 발표를 하곤 한다.

 


2014년 12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2014년 10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Dear children, with motherly love I implore you, love one another. May there be in your hearts, as my Son desired from the very beginning, love for the Heavenly Father and for your neighbour in the first place — above everything of this world. My dear children, do you not recognise the signs of the times? Do you not recognise that all of this that is around you, all that is happening, is because there is no love? Comprehend that salvation is in true values. Accept the might of the Heavenly Father, love him and honour him. Walk in the footsteps of my Son. You, my children, my dear apostles, you are always gathering around me anew, because you are thirsty. You thirst for peace, love and happiness. Drink out of my hands. My hands are offering to you my Son who is the spring of clear water. He will bring your faith back to life and purify your hearts, because my Son loves pure hearts and pure hearts love my Son. Only pure hearts are humble and have firm faith. I ask for such hearts of you, my children. My Son told me that I am the mother of the entire world. I ask of those of you who accept me as such to help me, with your life, prayer and sacrifice, for all of my children to accept me as a mother—so that I may lead them to the spring of the clear water. Thank you. My dear children, as your shepherds offer you the Body of my Son with their blessed hands, always in your hearts give thanks to my Son for the Sacrifice and for the shepherds that he always gives you anew. ”

 

2014년 9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2014년 8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2014년 7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2014년 6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message

 

2014년 5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2014년 4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2014년 3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2014년 2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근래에 보기 드물게 ‘실내’에서 발현 하신 것이 특이하다

 

 

2014년 1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

Thanksgiving prayers, 2013

best ever.. roasted, 2013
best ever.. roasted, 2013

Thanksgiving prayer.. 추수감사절 기도.. 수십 년 동안 미국에서 이날을 맞곤 했지만 만찬 식사 table에서 가족 ‘기도’에 관한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명색이 가톨릭 크리스천이었지만 나는 가족들과 함께 앉아 turkey를 앞에 놓고 한 마디도 못하곤 했다. 언젠가 ‘가장’으로 기도를 하라는 연숙의 말에 깜짝 놀라 한마디 했지만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던 ‘어불성설’ 같은 넋두리였고, 아이들도 속으로 웃는 것처럼 들렸다.

가톨릭 신앙인으로 내가 가톨릭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는 ‘자유 기도를 잘 못해도 괜찮은’ 묘한 전통에 있었다. 최소한 개신교인 들에 비해서 그렇다. 그들, 개신교인들은 정말 ‘기가 막히게도’ 잘하고 길게도 한다. 몇 년 전 동창회 모임에서 어떤 개신교 자매님의 식사 전 기도가 거의 30분을 끈 것을 보고 나는 그런 확신이 생겼다. 개신교인들은 자유 기도의 귀재 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 주님’ 하며 남들이 보이게 지나치게 긴 통성기도를 하는 그들을 보면 성경에서 그런 모습의 바리사이 Pharisees 를 질타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물론 모든 개신교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지만 비과학적인 통계에 의하면 천주교인들은 개신교인들의 기도 ‘실력’의 1%도 미치지 못할 듯 하다.

 나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도를 말로 하건 속으로 마음으로 하건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남에게 들리는 기도를 해야 할 때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또다시 강조하지만, 개신교 형제, 자매들은 ‘기도와 성경’의 실력에서 99% ‘본 고향’인 천주교를 완전히 앞지른다. 의식과 전통을 경시하는 그들에게 남은 것은 사실 성경과 기도일 것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들은 정말 기가 막히게 잘 한다.

올해, 오늘 추수감사절 식사는 단촐 하기만 한 우리 식구만 모여서 지난 일년의 ‘은총과 은혜’를 감사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모이기 전에 연숙이 나보고 꼭 식사 전 ‘가장’ 기도를 하라고 귀 띰을 한다. 또 우물거리며 넘기려던 나의 희망은 사라졌지만 올해는 조금 예년과 다르게.. 이것 이것.. 한번 도전해 보자 라는 오기가 조금 생겼다. 이것도 근래 3년간 겪고 있는 나의 faith renaissance 중에 하나인지는 모르지만 작년과 다르게 나의 머리가 굴러가고 있었다. 시간은 2시간.. 어떻게 ‘작문’을 할 것인가.. 차츰 머리가 굳어짐을 느꼈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러다가 머리가 번쩍! 하였다. 아하! 우리 천주교에는 주옥과도 같은 ‘염경念經’ 기도문들이 즐비하지 않은가?

 예전 같으면 이런 ‘알려진 기도문’은 책에서 찾아야겠지만 요새는 internet이 있어서 쉽게 ‘감사기도문’을 찾을 수 있었다. 항상 감사하며 살라는 성경의 말씀은 사도 바오로의 서간에서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 5, 18) 로 잘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자유기도에서 성경을 인용하기는 조금 무리였다. Thanksgiving Day 에 하기 알맞은 것을 찾아내었다.

 

Thank you Father, for having created us and given us in all our joys and sorrows, for your comfort in our sadness, your companionship in our loneliness.

Thank you for yesterday, today, tomorrow and for the whole of our lives.

Thank you for friends, for health and for grace.

May we live this and every day conscious of all that has been given to us.

We pray through Christ our Lord, Amen. +

 

하지만 우리 가족은 절대로 bilingual은 아니기에 우리들이 태어났을 때 얻었던 우리 말로 하는 기도도 필요하였다. 짧고 단순하고 유치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내가 ‘만든’ 것이다.

 

주님, 올해도 저희 가족들에게 건강과 평화를 주심에 저희 모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우리 옆에 없는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 친지들에게도 같은 은총을 주신 것, 감사 드립니다.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Rosary, 묵주(기도)의 성모님

성모발현, 태양의 기적 뒤에 촬영 된 신문사진, 세명의 visionaries. 1917년 10월 13일
성모발현, 태양의 기적 뒤에 촬영 된 신문사진, 세명의 visionaries(from left): Lucia, Francisco, Jacinta 1917년 10월 13일, Fatima, Portugal

Our Lady of the Rosary, 묵주(기도)의 성모님.. 오늘 레지오1 단원수첩을 보니 10월 7일,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 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었고 미국 교회달력은 ‘Our Lady of the Rosary‘ 라고 되어있다. 대강 짐작은 했지만, 달력을 보고 알아 차렸으니 이것을 또 잊고 살았다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오늘 아침의 미국 본당 평일 미사에서도 잊지 않고 아프리카 출신 보좌신부님2 기도 중에 묵주기도를 주도하셔서 10월은 묵주기도의 달 임이 상기가 되었다.

사실 10월을 맞으며 ’10월은 묵주기도와 성모님과 관련된 달’임을 알았고, 공식적으로도 10월은 ‘묵주기도 성월’이라고 불린다. 나의 기억과 알량한 지식이 맞는다면 이것들은 1917년 10월 13일에 당시 사회주의3 독재정부의 교회탄압 속에서 고생하던 포르투갈의 파티마에 나타나신 성모님 발현에서 유래된 것이다. 같은 해 5월 13일 처음 세 명의 ‘목동,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발현하고, 매달 13일째에 계속 발현하다가 10월 13일에 ‘마지막’으로 발현 했을 때 성모님은 자신이 ‘묵주기도의 동정마리아’라고 분명히 밝혔고, ‘작은 자연의 기적4‘ 을 보이기도 했다.

자신이 ‘묵주기도의 성모 마리아’라고 분명히 밝혔으니.. 이것으로 우리는 실제로 성모님이 자신의 자녀, 즉 인간들이 묵주기도를 성모님께 바친다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고, 나아가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는 의미가 포함 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성모님의 발현은 이렇게 ‘실제적’인 사실을 확인하게 해 주는데 최상의 효과가 있는 것 같다. 특히 나에게는 그렇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고, 잘못 되었는지 ‘어머니같이’ 가르쳐 주는 것이다.

나의 묵주기도의 작은 역사가 이제 6년이 지나가고 있는데, 사실 거의 제로에 가까운 기대감을 가지고 시작한 이 작은 ‘사고’는 상상을 초월한 큰 변화를 나에게 주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이 나의 경험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나누어 줄까 하는 방법인데, 사실 이것도 인간적인 고민이다.. 이것 역시 묵주의 성모님의 “힘과 전구(intercede)”를 믿으면 되는 것이니까.

 


 

  1. 레지오 마리애, Legion of Mary ‘성모님의 군단’이라는 아일랜드에서 유래된 오랜 전통을 가진 가톨릭 평신도 단체, 나와 연숙이 현재 속하고 활동을 하고 있는 유일한 신심단체.
  2. 이 신부님의 성모 마리아 신심은 그의 레지오 마리애 경력에 의해서 짐작이 되었었다.
  3. 그들은 교회, 특히 천주교회를 증오하였다.
  4. 태양의 유희, 지상으로 떨어지는, 춤추는 것 같은 것으로 수많은 군중이 동시에 경험을 하였고, 정부기관지에까지 대서특필 되었다.

초가을 비, Pope 2.0

¶  8월보다 더운 느낌의 9월 초의 가뭄을 끝내는 시원한 초가을비가 ‘잔잔히’ 내린다. 9월도 하순으로 접어들고 내일은 9월 22일, 가을의 시작이고 밤과 낮의 시간이 같은 추분 Autumn Equinox 이다. 2013년 올해의 이곳 아틀란타 지역 기후는 아마도 ‘통계적인 평균치’ 에 가까운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온건한’ 느낌을 주었다. 특히 축축하지만 시원했던 여름에는 ‘감사기도’를 드리기에 바빴다. 온갖 지구의 열병에 대한 ‘유언비어’ 속에서 거의 기후 공포증에 시달리던 때, 이런 ‘여유’를 주신 Mother Nature 에 감사를 드린 것이다.

‘통계적 평균치’를 언급하면서, 올해의 8월과 9월이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생각했다. 한마디로 8월의 평균기온과 9월의 평균기온이 비록 평년에 비해서 낮았어도 그 자리가 바뀐 것이다. 통계치를 언급할 필요가 없이, 8월에 a/c(air conditioner)를 사용한 날 보다 9월 사용한 날이 더 많았으면 그것은 완전히 8월과 9월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8월 9월의 합친 기온 평균치는 ‘아마도’ 평년과 같았을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힘일까.. 예년에 비해서 아직도 새파란 주변의 모습이지만 그 만큼 더 빠른 속도로 가을 색, 황금의 빛깔로 변하지 않을까.. 그것에 오늘처럼 내리는 잔잔한 가을비까지 곁들이면 이것이 바로 ‘가을비 우산 속‘ 같은 감정이 되지 않을까..

 

2013-09-21 14.40.52-1

초 가을비가 뒷뜰에 촉촉히.. 멋진 빗소리와..

 

¶  Pope Francis, 교황 프란치스코.. 요한 바오로 2세를 능가하는 역사에 남을 교황이 되시려는가? 교황이 된 뒤 반년이 지나가는 이즈음 그에 대한 시각, 평가와 언론에 비치는 그의 모습들.. ‘놀라움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 싶다. 처음 교황이 되었을 때, 대부분은 조금 실망을 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건강상 이유로 도중하차하신 전 교황, 베네딕트 16세를 계승하는 지도자가 ‘또’ 76세이 교황이라면 얼마 되지 않아 또 ‘건강상’ 문제가 나올 터인데.. 왜 그랬을까? 그렇게 많은 추기경들이 그런 염려를 하지 않고 새 교황을 선출했을까?

 “the church as a hospital in a battlefield, 야전병원으로서의 교회  – Pope Francis

하지만 나이에 맞는 보수성은 취임 초부터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조금씩 ‘프란치스코의 놀라움’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2명의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트 16세 모두 ‘머리가 지독히 좋은, 학자 출신’ 이었고, 그에 못지 않게 ‘보수적’이었는데 현 교황은 그 모든 것도 아니었다. 거의 ‘진보적’이고, ‘머리보다는 가슴’인 그런 교황임이 들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은 올 것이 왔다. 그것도 지독히 큰 것이.. 8월 중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로마, 바티칸에서 예수회의 기자와 장시간의 기자회견을 가지고, 그것이 세계 예수회에서 발행하는 회지에 실리고 미국에서는 America [magazine] 라는 곳에 실렸다. 곧바로 그것은 ‘세속 언론’에 알려지고 ‘폭탄 선언’으로 그것이 묘사되었다. 세속적인 눈은 교황이 ‘세속적 압력에 굴복’하는 식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교적 ‘공정’한 입장의 New York Times는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며 21세기 가톨릭 교회의 ‘고민’을 이해하려 애를 쓰기도 하며, 이번 교황은 잠재적으로 전 2 교황의 보수성향을 견제하며 교회를 ‘모든 사람들의 교회’로 만들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사실 나도 혼동이 오는 느낌도 들지만 사실 나는 희망적이다. 무언가 변하긴 해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Vatican 2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불만을 품고 떠나거나 예전의 가톨릭을 고집하던 사람들은 아마도 지금 돌아가는 ‘사태’에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들 중에는 극단적인 신자들도 많아서 그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는 교회 때문에 현재의 모든 세속적인 문제가 야기되었다고 하기까지 한다. 과연 그럴까? 세속화가 가속되는 것은 사실 현재 교황이 시사하는 대로 ‘고독한 현세인 들을 사랑으로 품지’ 못한 결과는 아닐는지?

Apologetics, 하느님은 있는가?

들어가며

Apologetics.. 아폴로제틱스..흠.. 이 단어를 보면 연관되어 생각나는 것은 apology 아폴로지.. 가 아닐까? apology 하면 우선 사과, 사죄, 변명, 변론 정도의 뜻이다. 여기의 apologetics는 마지막 것인 변론에 가까운 것으로 거의 99% 이것은 ‘자기 믿음, 신앙의 방어, 변론’을 뜻 한다. 이 blog에서는 내가 현재 믿고 있는 가톨릭, 천주교 신앙에 대한 변론을 말한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개신교에서는 이 말조차 ‘구교, 천주교’ 냄새가 난다고 오래 전에 팽개쳤을 지도1 모른다. 이 ‘변론’을 통해서 나는 내가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된 당대의 다른 apologist 변론가 들을 언급하고 나 나름대로 형성을 하게 된 것 (이것도 사실 지금도, 매일 변화, 발전을 해나가고 있다) 을 남기고자 한다.2

 

가까이 온 죽음과 신앙

처음 이 ‘신앙 변론 분야’에 관심을 가졌을 때는 내가 오랫동안 잃어버리고 살았던 가톨릭 신앙을 되찾고자 시도를 할 때였다. 나의 유일한 등대, 나의 분신이셨던 어머님의 타계와 더불어 나는 죽음이란 것을 인생 처음으로 피부로 느끼며 나의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50이 훨씬 넘은 후에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시작했던 나는 한마디로 철부지였다. ‘죽음’의 ‘죽’자만 보면 나는 외면하고 그런 것은 나의 사전에 없다고 피하고 살았고, 죽음에 관련된 어떤 것, 장례식 같은 것도 나에게는 없었다. 죽음은 한마디로 ‘수백 년 뒤에 있을’, 나에게는 그저 ‘추상 명사‘였다.

 인간의 수명을 생각해보니 기껏해야 70~80세 정도였고 그것은 나에게 불과 20~30년 정도의 여유를 주었지만, 20~30년 정도의 세월은 전에 생각하던 것 보다 ‘훨씬’ 짧다는 것도 50년 이상 살아본 경험에 의해서 쉽게 짐작이 갔다. 나의 20~30년 정도 전의 ‘개인 적 역사’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바로 엊그제 같이 느껴지니, 사실 나의 수명은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음은 암만 죽음의 죽 자를 피하려 해도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진리였다.

한마디로 죽음의 그림자는 나를 덮치기 시작하는 것이고, 아니 이제부터는 내일의 태양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몇 안 되는 가족들도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그렇게 과장된 표현이 아닌 듯 싶었다. 이런 것이 지나친 우려처럼 들렸으면 하고 바라고 살았지만, 이제는 그것, 죽음이 진리이고 사실임을 부정할 도리가 없었다.

 

철학적 실존과 죽음

이제는 죽음을 의도적으로 가까이 보려고 노력을 하고, 그 동안 꽤 보아왔기에3 조금은 그 보이는 모습과 배경도 생각하게 되었다. 천차만별의 모습을 한 죽음의 과정, 여정도 알게 되었고, 남아있던 사람들의 모습과 반응도 보게 되고, 그것을 보는 나 자신도 보게 되었다. 이런 노력을 통해서 나는 조금은 냉정하게 죽음을 대하게 되었고, 무조건 피할 때보다 훨씬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죽음의 제일 큰 명제는 이것이다. 죽음은 과연 그 죽음의 주체에게 모든 것의 끝일까? 그 당시까지 신앙심이 거의 사라진 나에게 대답은 ‘죽음은 모든 것의 끝, 깜깜한 암흑‘이란 것이 대답이었다. 모든 것의 끝.. 모든 것의 끝.. 이 거대한 우주 안에 유일한 존재였던 나, 이경우란 생물, 인간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 그러니까 실존이 허무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이 나를 괴롭고 슬프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고통은 사실 젊었을 적, 대부분 10대에 잠깐 찾아오긴 하지만, 사회란 거대한 보호 막 속에서 자연스레 잊게 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나란 사람의 의미는 무엇이고 내가 왜 실존이 되었다가 허무로 사라지는 것인가? 철학적인 문제일 수도 있지만 과연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이 대답을 주었을까? 모두 ‘말의 장난‘에 지나지 않았었을까?

절대로 철학이 이것에 대답을 주지 못함, 그것이 바로 ‘유한한 인간’의 슬픔일 것이다. 이런 ‘안 보일 수 있는 것에 대한 생각들’을 잊고 살 수도 있겠지만, 중년이 훌쩍 넘었던 나에게 그것은 사치였다. 죽음이 striking distance에 왔음을 알기 때문이다. 결정의 순간은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파스칼의 내기, Pascal’s Wager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신앙적 변론들이 있다. 그 중에서 제일 쉽고 그런대로 수긍이 가는 것으로 Pascal(파스칼)의 Wager 란 것이 있다. 여기서 wager라면 ‘도박이나 내기’ 정도의 뜻이 아닐까? Pascal 하면 누구에게나 친근한 이름일 것이다. 그는 신이 있다 와 없다 중에서 어떤 것이 맞는지 ‘내기’를 한다. 내기에 참가를 안 하면 ‘신은 없다’로 간주가 된다. 만약 내가 ‘신이 있다’를 고르고 그런 믿음으로 살다가, 그것이 틀렸더라도, 그러니까 하느님이 없었더라도.. 아무런 ‘손해’보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는 사실 ‘거룩한’ 삶을 살았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실제로 신이 있었다면? 나는 이긴 것이고 내가 가고 싶었던 천국이 나의 것이다. 내가 신이 없다는 것을 선택했고, 없는 것처럼 일생을 살았고 실제로 하느님이 없었다고 해도 내가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만약, 틀렸다면, 그러니까 하느님이 계셨다면.. 나는 하느님을 안 믿는 ‘죄’를 지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간단히 말해서.. 하느님을 믿는 것이 ‘현명’ 한 것이고, 믿어서 손해를 볼 것이 ‘하나도’ 없다는 논리다. 나도 이런 식의 ‘논리’를 혼자서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렇게 ‘현자와 성인’들이 하느님이 있다는데, 그것 믿어 보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것.. 만약 믿었다가 사실이 아니더라도 사실 손해 보는 것은 극소적이 아닐까 하는 지독히 타산적인 생각을 해 본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 논리는 너무나 ‘타산적’인 것으로, 가슴으로 하느님이 믿어지지 않을 때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 외의 훨씬 더 이성적이고 수긍이 가는 변론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주적 이성으로, Cosmological Reasoning

파스칼의 조금은 타산적인 이유보다도 훨씬 이성적이고 심지어 과학적인 논증이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다. 바로 깜깜한 밤에 찬란히 떠오른 달과 별들로 가득 찬 하늘, 막막한 우주인 것이다. 이 ‘우주적 논증’이 내가 얼마 전까지 ‘사랑’하던 것이었다. 종교적 믿음에 회의가 들면 나는 ‘무조건’ 하늘과 우주를 생각했다. 그러면 십 중 팔구 회의감을 무마할 수 있었다. 우주적 논증은 우주 과학 같은 것과 상관이 없는 사람도 쉽게 이해는 할 수 있다.

이 논증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명백한 ‘공리’로부터 출발한다. ‘원인과 결과’, 모든 현상이나 결과는 분명히 원인 제공이 필요하다는 너무도 명백한 이론인 것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를 생각해 보면 인간이 알 수 있는 크기는 무한대에 가깝다.. 무한대가 아니고 가까운 것은 사실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그 한계를 알 수가 없고, 실증적으로 관념적으로도 알 수가 없다. 언제 시작이 되었는지, 어디까지가 우주의 끝인지 ‘모른다.’

그것이 현대인이 종교처럼 신봉하는 기술적 과학의 끝이다. 그러니까 그 끝을 이어 받아 해답을 주는 것이 종교적 신앙인 것이다. 최첨단 기술과학이 밝힌 것은 우주에 시작이 있었다는 것, Big Bang 이론이 있다. 태초에 ‘꽝!’ 하고 gas가 터지고 그곳에서 현재의 모든 우주의 물질들이 생겨났고 그것들이 움직이는 것이 ‘천문학’이 되었고, 생물이 나오며 생물학이 되었다. 그러면 당연한 의문이 생긴다. 그 ‘태초의 꽝!’ 전에는 무엇이 있었나? 그것은 과학이 아니란다. 과학의 영역 밖이란다.

그리고 우주의 크기까지 계산을 해낸 천문과학자들, 크기가 있으면 그 변두리도 있을 것인데.. 그 변두리 밖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도 과학 영역의 밖이란다. 이런 근본적인 과학의 한계를 알면, 사실 누구나 ‘겸허’해 지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머리는 아직도 멀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모르는 것 투성이’에 대한 ‘명쾌한 대답’이 바로 ‘하느님의 만드신 우주와 피조물인 인간’ 설, 바로 종교인 것이다. 그러니까 현재 실험으로 알려진 기술적 과학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과학적 사실보다 엄청 커다란 진리의 일부가 과학인 것이다. 그 진리가 바로 ‘하느님의 세계’를 말하는 종교 신학이 아닐까? 여기까지 모든 것인 ‘과학적 실험’에서 벗어나지만 완벽한 이론과 이성에 부합되는 것 들이다.

 

역사적인 접근, Historical Signs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는 하느님, 그것도 유대교-기독교적인 생각에서 보는 하느님은 어떻게 설명이 될 수 있을까? 하느님을 말하는 ‘믿음 체계, 종교’는 지구상에 얼마든지 많이 있지 않은가? 그 중에서 왜 나는 그리스도교 적인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가? 왜 그것이 나에게 유일한 하느님에 대한 해답이라고 생각하는가? 왜 불교는 아니고, 왜 일본 신도나 이슬람은 아닌가?

이것은 비교적 길지 않은 인간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는 다름아닌 유대-기독교에서 모두 사용하는 ‘구약성경’을 말한다. 이 구약성경은 신앙적인 bible이지만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서’이기에 그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 시작되는 이것은 현대적 세속적 과학적인 ‘보이는 것’을 찾는 관점으로 보면 ‘설화’에 가깝지만 그 속에서 ‘안 보이는 것’을 찾는 것 또한 의미가 크다.

제일 큰 의미는 바로 하느님의 존재와 ‘우주 창조’에 있는데, 모든 것의 시작인 절대 유일 존재, singularity, 시 공간 이전의 창조의 모든 근원이 하느님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계시 받은 것이라면, 그 절대존재, 야훼라고 불리는 그것이 하느님이 아닐까? 물론 이런 접근 방식은 어느 정도 ‘믿음의 문’을 열고 있어야 이해가 가능함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 ‘마음의 문’이 열릴 수 있는 것도 ‘은총’이라고 했는지 모른다.

 

나가며

기독교에는 ‘믿음은 은총‘ 이라는 말이 있다. 은총이란 하느님이 주시는 ‘공짜의 선물’이란 뜻이다. 이 말은 누구나 받는 선물이란 뜻이지만, 인간 고유의 특성인 ‘자유의지’에 따라서 이 선물을 받고, 안 받고 한다. 애써서 거부만 안 하면 받는 선물이 바로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믿는’ 능력인 것이다.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고 또한 하느님이 주신 ‘이성’이라는 인간의 능력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이성이란 것은 신앙적 차원에 못 미치는 불완전한 것일 수 있다.

위에 나열한 여러 가지의 ‘변론, 이유’들은 개개인 마다 다른 의미로 비쳐지기도 하고 이런 이유가 전부가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믿음이란 것이 ‘이성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서 믿음의 부정이 오히려 비이성적임도 보여주기에, 파스칼의 말 대로 ‘믿어서 손해 보는 것이 없다’는 것만 인정해도 어떤 무신론자에게는 거의 천지개벽 같은 변화를 주지 않을까..

 

  1. 추측에 그들은 주로 신앙간증이란 형식으로 이것을 대신하고 있는지도..
  2. 나의 유일한 희망은 이것이 어떤 한 사람에게라도 ‘이 험한 세상이 알고 보면 생각보다 희망적’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 주고 싶은 것, 그것뿐이다.
  3. 주로 장례행사: 장례미사, 연도 등을 통해서.

조선민주주의인민..어쩌구? 위키 빠가!

생전의 구상 시인
생전의 구상 시인

얼마 전에 시작된 아틀란타 순교자성당 2014년 부활영세자 교리반, 수녀님을 돕는 봉사자 역할을 시작하면서 주 교재인 ‘여기에 물이 있다1를 영세 예비자들과 같이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천주교 ‘교리’ 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게 참 ‘부드럽고, 친절하게‘ 잘 꾸며진 책이었다. 어제 교리반에서 공부 한 제2과의 서두에 오랜만에 보는 ‘구상’ 이란 이름이 보였다. 구상(具常) 님은 시인이자 천주교인으로 내가 젊었을 때 그에 관한 기사(글과 사진)들을 여러 잡지에서 많이 보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물론 내가 천주교의 ‘천’ 자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잡지에서 보았던 시인의 얼굴모습도 떠 오르고, 천주교 신앙을 깊은 묵상으로 고백하는 듯한 시와 글도 기억난다. 그것이 전부였는데, 이번에 다시 그 시인의 이름을 본 것이다.

불현듯 그 시인의 근황과 그의 시의 세계2 등이 궁금해 졌다. Quick googling으로 시인이 우리 어머님과 같이 1919년 생이시고, 어린 시절을 역시 우리 어머님 고향인 함경남도 원산 임을 알게 되어 너무나 반갑고, 어렸을 때 아마도 어머님 집안과도 장날에 만났을 수 있다고 상상하기도 했다.3 시인은 우리 어머님 보다 일년을 더 사셔서 2004년에 선종을 하신 것도 이제야 알게 되었다.

한글 Wikipedia로 가보니 아주 실망스럽게 한 페이지도 안 되는 성의 없이 쓰여진 듯 보이는 글이 뎅그라니 보였다. 누가 이 기사의 저자인지 나는 알 길이 없지만 그의 배경이나 학식, 진솔함 등에 관한 추측은 가능했다. 한마디로 빠가.. 그것도 악질 빠기급에 속한다. 빠가. 빠가.. ‘해방 후 194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산4..’ 어쩌구 하는 글 하나로 이 빠가, 젖먹이 같이 유치한 듯 느껴지는 이 편집자가 현재 ‘한글 Wikipedia’의 대표적인 수준이라면 아뿔사.. 이곳도 역시 ‘주사파, 빨갱이’들이 득실 거리는 구나.. 하는 한숨만 나온다. 아마도 이 기사의 저자는 구상 시인이 ‘악질, 반동 천주교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생각한다.. 시인의 형님 신부님과 어머님이 빨갱이들에게 ‘처형’이 된 것을 이 빠가는 아는가? 어떻게 이런 ‘역사 수정주의 빠가’들을 한글 Wikipedia에서 몰아 낼 것인가? 으이구~~ X가 갈린다.

 

  1. 글 차동엽, 그림 김정자, 미래사목연구소 간, 예비신자 교리 & 소공동체 나눔용
  2. 이제는 나에게 시의 세계는 옛날처럼 먼 곳이 아니다.
  3. 그 당시 원산에 살던 사람들은 그런대로 서로 얼굴이 낯 설지 않을 정도로 지냈다고 들었다.
  4. 야 이 빠가야, 어째서 1946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어쩌구란 걸래 같은 말이 관계가 되냐? 구상 시인에 대한 글에, 조선민주주의인민이란 쓰레기 같은 말이 걸 맞냐?

Me, catechist? not exactly..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2014년 부활절 영세 목표’ 예비 천주교 신자들의 교리교육이 2013년 8월 8일에 시작이 되었다. 최소한 미국 내의 본당들은 거의 이즈음부터 예비자 교리과정이 시작되어 내년 부활절 즈음까지 계속된다. 천주교의 전통일까, 개신교에서는 어떻게 예비자의 교육을 시키는지 그 옛날에 본 기억이 있지만 하도 오래 전이라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한 것은 개신교의 전통은 ‘쉽게 쉽게’ 하는 것이라는 것과, 교육과정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총각 시절 잠깐 나간 적이 있었던 어떤 교회에서는 나보고 ‘거저’ 세례를 주겠다고 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나와 연숙은 1981년 가을부터 아주 특수한 상황하에서 예비자 교리공부를 시작해서 다음 해 1982년 부활절 때 영세를 받았다. 당시의 우리 본당이었던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의 한인천주교회에는 규모가 하도 작아서 정식 교리반 코스가 없었지만 그 무렵 신시내티 로 옮겨가셨던 전 주임신부 왕영수 신부님으로부터 직접 교리교육을 받은 것이다. 남들이 들으면 정말 우리보고 ‘행운’이라고 했다. 10명도 안 되는 소 그룹이 신부님과 마주하고 공부를 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조금은 ‘행운’이었다. 왕영수 신부님의 절대적인 헌신적 노력이었다. 신시내티로 부터 콜럼버스까지 2시간 거리를 마다하고 일주일 마다 오셔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30 something의 그 나이에 신앙적 교육을 받는 것은 조금 힘든 상태였다. 머리는 굳을 대로 굳어지고 특히 나 자신은 더욱 천주교 교리가 쉽게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지지를 않았다. 최대한의 노력을 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예비자들에 비해 그렇게 뒤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머리 속에서 돌며 가슴으로 깊이 들어오지 못했다. 그런 때의 비결이 ‘무조건 믿어라’ 였는데, 그 말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연숙은 나와는 전혀 달랐다. 무언가 각오를 하고 노력하는 것이 느껴졌고, 결과는 나와 전혀 달랐다. 신부님 말씀대로 ‘정확히, 깊이’ 잘 받아 들였다고 했다. 우리의 신앙여정은 그때부터 사실 정도와 방향이 갈라지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이 교리공부는 내 가슴에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30여 년 전, 그 때 ‘들었던’ 왕영수 신부님의 교리 가르침을 가지고 30여 년을 버틴 셈이다. 머리로 공부한 것, 거의 다 잊어버려도 하나도 신경을 쓰지 않고, 거의 냉담 상태로 오랜 세월 ‘허송’하다고 최근에 조금씩 고향으로 돌아오는 기분으로 교리란 것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모든 신앙적 여건과 조건이 ‘급속히’ 호전되면서 이제는 교리과정이 ‘소로소로’ 나의 가슴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제야 이해가 가는 것들이 참 많았다. 그것도 ‘완전히’ 이해가 가는 기분이었다.

 3년 전 레지오 마리애 에 입단을 하면서, 다시 교리교육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이유인즉 레지오 단원의 활동사항 중에 ‘교리반 지도’란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가두 선교는 나에게 맞지 않을 것이고 요사이는 그것이 그렇게 효과적이 아닐 수 있기에 더욱 교리반 활동은 나에게 appeal을 하였다. 연숙에게 물어보니..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라는 대답이었다. 교리교사는 아무나 하나.. 하는 식의 반응이었다. 그렇게 오랜 신앙생활을 한 연숙도 그것은 할 수가 없었는지..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완전히 잊고 대신 나는 정식 교리과정은 아니지만 ‘좌우지간 천주교에 대해서 알아보자’ 하는 식으로 공부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과정이 절대로 어렵지 않았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나의 ‘가슴이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길지 않은 ‘귀향’ 과정 끝에 결국 때가 슬그머니 찾아왔다.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께서 나의 사정을 보셨는지, 신부님 1 께서 조용히 부르셔서 우리부부에게 새로 시작하는 교리과정의 봉사자로 수녀님께 추천을 했다고 하셨다. 올해 들어서 새로 오신 수녀님께 완전히 교리반을 일임하신 듯 하고, 예전의 ‘체제’를 완전히 바꾸신다고 했다.

예전의 교리반 director라는 자매님만 남고 종전의 교리교사 제도를 완전히 없앤 것이다. 대신에 수녀님을 돕는 형식으로 ‘봉사자 제도’를 만든 것이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바꾸어야만 했는지 자세한 이유는 잘 모른다. 좌우지간 내가 레지오를 시작하면서 바라던 것이 이루어진 셈이고, 나는 정말로 성모님의 ‘전구’를 더욱 믿고,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에 우리부부는 아틀란타 한국학교에서 ‘아이들을’ 오랫동안 가르쳐본 경험이 있어서 ‘가르치는 것’ 자체는 좋아하고 일반적인 technique도 생소하지 않지만 이곳은 다양한 연령층으로 이루어진 ‘성인 교육’이라서 지난 경험에 의존하는 것은 무리일 듯 싶다.

올해 등록된 예비자 숫자는 기대보다 훨씬 떨어져서 시작 단계에서 10명 내외였는데, 사실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다행이었다. 조그맣게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 ‘봉사자’의 역할은 수녀님의 ‘강의’ 뒤에 있는 나눔의 시간을 이끌어가는 것인데,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아직도 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혀 idea가 없지만 그저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리고 있다. 만약 우리들의 경험담이 필요하거나 교리에 관한 질문이 있으면 그것에 성의 있게 도움을 주려는 각오를 하고 있을 따름이다.

첫날 모인 예비자들은 대부분 30대에서 60대까지 남자들이었고, 부부를 포함한 가족도 있어서 이채로웠다. 대부분이 가족이 신자였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나왔다고 해서, 그들의 가족에 대한 정성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나의 신앙여정을 생각하고, 레지오 단원임을 생각하며 우리는 이들과 같이 기필코 안전하게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도록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고 싶다.

  1. 하태수 미카엘 본당 주임 신부님

멕시코의 성체기적?

지난 주에 멕시코에서 ‘성체기적(Eucharistic Miracle)’이 일어났다고 보도가 되었다. 성모발현 같은 것은 귀에 익지만 성체기적은 상당히 생소하게 들린다. 물론 ‘옛날’에 그런 ‘현상, 기적’이 일어났다고 알려졌고, 기록도 자세히 남아있지만 근래에 그런 것이 있었을까?

성체기적은 간단히 말해서 가톨릭 전례 중의 ‘성찬의 전례’ 때 성체(얇은 조각 빵)가 실제로 물리적으로 살과 피로 변하는 것을 말한다. 상징적으로만 대부분 생각을 하며 성체와 성혈을 먹고 마시지만, 가톨릭 교리는 분명히 그 ‘빵과 포도주’가 ‘살과 피’로 변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니 가톨릭 신자들은 최소한 그런 현상을 ‘상상’이라도 하며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이다.

이번에 멕시코의 ‘사건’은 발생한지 불과 며칠이 되지 않아서 진실 여부는 고사하고 자세한 것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 ‘사건’의 대강 줄거리는 다음과 같이 보도 되었다.

 

지난 7월 24일, 멕시코의 과달라하라(Guadalajara) 대교구 소속 성모마리아 성당의 호세 구디노(Fr. Jose Dolores Castellanos Gudino) 주임신부가 성체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할 때, 번쩍이는 빛과 함께 말소리를 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모이게 종을 쳐라”, “모인 사람들에게 하루 종일 강복을 하겠다. 성체를 모신 작은 감실을 본당 제대 위에 놓아 모든 사람들이 성체조배를 하도록 하라. 커다란 성광(monstrance)을 그 조그만 감실 옆에 놓아라. 감실을 3시까지는 열지 않도록 하라.” “성찬의 전례 때 내가 기적을 보여주겠다.” “이번에 일어날 기적은 ‘동정 마리아가 나타나는 성체의 기적’ 이라고 불릴 것이다. 지금 보여줄 광경을 복사해서 사람들에게 보여라.”

 그 목소리는 계속해서,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게 하는데 이 기적의 소식을 알려주도록 모든 사제들과 이 소식을 나누어라.”

이 소리를 듣고 난 구디노 신부는 “주여, 나는 종입니다.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오후 3시에 사람들이 모였을 때, 그 신부가 감실을 열어 보았을 때 그 성체는 피로 덮여 있었다. 신부님에 따르면, 그 목소리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성체 조배 chapel을 만들고, 과학적 조사를 허용하라고 했다. 이 ‘기적’이 알려지고 나서 곧 대교구 차원에서 조사가 시작되었다.

 

이 기사를 읽고 나서, 나의 생각은 어떤 것일까? 예전에는 믿지 않았거나, 중립적이거나,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충분히’ 사실적이고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그것이 현재 나의 ‘신앙의 정도’라고 하며 조금 이상한가?

여기에 물이 있다.

천주교 예비자 교리교과서 여기에 물이 있다
천주교 예비자 교리교과서
여기에 물이 있다

‘여기에 물이 있다’.. 표지가 노~란 촉감이 아주 부드러운 책의 제목인데, 이 책은 천주교 영세를 원하는 ‘예비자’들을 위한 교리 반 학생용 ‘교과서’이고 내가 가진 것은 ‘교사용’이란 말이 더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학생용 책에다가 교사에게 도움이 되는 것(cheat sheet,해답) 덧붙인 책이다. 잠깐 훑어보면 교과서치고는 정말 부드럽고 읽기 쉽고, 읽고 싶어지는 그런 느낌을 준다.

이것을 어제 연숙과 같이 성당에서 받아가지고 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교리교사의 역할을 ‘조금’ 맡게 된 것이다. 정식으로 는 예비자 교리반의 ‘교리반 봉사자’ 가 되는 것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교리반은 교리교사 여럿이서 책임지고 가르쳤지만 올해부터는 ‘완전히’ 체제가 바뀌어서 새로 부임하신 수녀님이 교리반의 ‘유일한 책임 교사’가 되고 나머지는 모두 ‘봉사자’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우리 부부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교리반 봉사자가 되었는지 아직도 우리는 모른다. 아니 확실치 않다. 어느 날 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신부님(하태수 미카엘)께서 연숙에게 ‘제안’을 했다고만 들었고, 기왕이면 부부가 같이 ‘봉사’를 하라고 하셨다고 들었다. 처음에는 사실 ‘청천벽력’ 같이 느끼기도 했지만, 우리가 속한 레지오(마리애)의 으뜸 사명인 봉사(service), 순명(obedience)을 염두에 두고 생각을 곰곰이 해보니 거절할 명분도 느낌도 없음을 알고 비교적 쉽게 OK를 하였다. 드디어 예비자 교리반이 8월 초에 시작하게 되어서 어제 수녀님을 중심으로 봉사자 모임에 참석하여, 이 책을 받아오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어제 수녀님께 분명히 ‘우리는 왕초보’라고 말씀을 드렸다. 하지만 왕초보라는 말에는 별로 신경을 크게 쓰지는 않으심을 알았고 ‘교리 실력’ 이 전부가 아니라는 느낌도 받았다. 보살핌과 가르치는 방법, 그리고 ‘간단한 정통교리’가 더 중요한 것을 알았고, 자칫하면 쉽게 범할 수 있는 ‘은밀한 개인적 밀착’의 위험성을 수없이 강조함을 듣기도 했다. 모두 이해가 가고, 수긍이 가는 말씀들이었다.

비록 봉사, 순명의 정신으로 (봉사자 역할을) OK를 했고, 이 ‘교리반 봉사’의 과제와 책임이 우리 둘의 신앙생활, 여정에 어떤 의미와 결과를 남길지는 미지수 이지만, 신부님께서 친히 부탁(지시)을 하신 것을 보면 조금은 자신감을 가지고 노력을 해야 하고,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7월 넷째 주, 줄줄이 사탕..

World Youth Day 2013이 표현을 쓰며, 혹시 spelling checker가 불평을 하지 않을까 잠깐 생각하기도 했지만 의외로 깨끗한 ‘하얀’ 반응 (빨간 줄이 없는)을 보였다. 최소한 내가 매일 쓰는 Microsoft Notes가 쓰고 있는 spell-checker engine은 이 표현이 괜찮은 모양인가.. 나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한글사전은 아직도 한반도를 떠난 1973년에 고정이 되어있기에 한글은 항상 나의 관심사일 수 밖에 없다. 줄줄이 사탕은 나와 연숙이 쓰는 우리들의 ‘속어’로써, 무언가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말한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새겨서 들어 짐작을 하곤 할 것 같다.

 2013년 7월 21일로 시작되는 주일.. 무언가 줄줄이 사탕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서, 조금은 미리 숨이 찬 느낌일까, 반은 기대, 반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그런 심정이다. 23일 화요일은 평상적으로 우리의 자비의 모후 레지오 주회가 있는 날이지만 덤으로 그날에는 우리단원 실비아 자매님의 부군 Billie Neal 베드로 형제의 1주기 연도가 있다. 그러니까 미사 후에 연도를 하고, 의례적으로 상주가 준비한 점심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작년 7월처럼 올해의 7월도 세상을 떠나는 영혼들을 보내는 시간을 적지 않게 보내고 있다. 관혼상제 중에서 이 ‘상喪’ 은 우리 레지오 단원들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라 나는 가급적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런 곳을 찾고, 슬픔을 나누는 것은 물론 떠난 영혼과 가족들을 위한 것이지만 다른 쪽으로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되기도 했다.

이틀 후 7월 25일, 목요일은 ‘우리들이 1년 동안 기다리던’ 우리 레지오 단원이었던 고故 은요안나 자매님의 연도가 저녁에 예정이 되어있다. 암으로 오랜 투병을 했던 이 자매님은 운명 직전까지도 레지오 행동단원이었다. 작년 7월 26일 아침에 긴 투병생활을 마감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갔고, 몇 년간의 투병생활에서 보여준 ‘믿음과 활동’의 생활은 우리들과 특히 나에게는 귀중한 교훈이 되었다.

그래서 그 자매님의 영혼을 기리는 연도가 더 빠른 시기에 있기를 기다렸지만 결국은 1년 주기가 되어서 열리게 되었다. 각각 다른 사연과 교훈을 주는 연도들이 많이 있었지만 나에게 가장 ‘가까운’ 연도는 아마도 이 은요안나 자매의 연도일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다음날 7월 26일 금요일은 우리가 속한 천상은총의 모후 꾸리아 주관 2013년 레지오 피정이 시작되는 날이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2박3일 예정의, 집을 떠나는 진정한 피정(retreat)이고, 우리 부부도 올해 처음으로 육체적으로 집을 떠나는 다른 의미의 휴가, vacation가 된다. 집을 밥 먹듯이 떠나며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이런 2박3일의 피정이 별 것이 아니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조금 사정이 다르다.

연숙은 꾸리아 간부이므로 준비와 진행과정을 꿈속에서 볼 정도로 일이 많아서 stress까지 느끼고, 나는 비록 수동적으로 참가하는 단원이지만 ‘간부의 spouse’ 이기에 나에게도 무언가 일의 불똥이 튀는 것은 피할 도리가 없다. 하태수 주임신부님이 같이 retreat center에 기거하며 우리를 지도해 주시게 되어있는데, 이 하태수 신부님의 주일 강론을 가끔 들어보면 우리와 무언가 잘 맞는 느낌이 많이 들고 ‘학구적’인 각도가 많아서, 최소한 지루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부터 1주일간은 사실 몇 년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따르는’ World Youth Day 2013 행사가 브라질 항구도시 Rio de Janeiro의 유명한 코파카바나 Copacabana 해변에서 남미 아르헨티나 출신(브라질의 바로 옆 나라) 출신 새 교황님 프란치스코 교황이 참가한 가운데 펼쳐진다. 조금 있으면 성인이 되실 내가 진정으로 존경하는 요한 바오로 2세, John Paul II, 가 젊은이들에게 ‘다른 희망’을 주고자 1985년경에 시작한 이 ‘멋진 행사’는 이제 관록이 대단하고, 이곳에 참가한 많은 청년들이 나중에는 성소를 받고(하느님의 부르심), 다름 세대의 universal church를 이끌기 시작하고 있다.

역시 요한 바오로 2세의 선견지명이 그 동안 뿌린 씨앗들의 수확을 거두고 있고, 이런 ‘세계적 행사’를 통해서 계속 씨를 뿌리고 있다. 이제는 인터넷 같은 신세대 매체의 도움으로 이들은 아주 효과적인 선교를 하고 있는데, ‘한 물이 간’ 우리 세대에 까지 이렇게 ‘도움’을 주고 있음에 그저 ‘성인이 되실’ 요한 바오로 2세에게 감사를 드린다. 2년 전 스페인 마드리드의 대회도 관심을 가지고 나는 이 의미 있는 행사를 ‘따르며’ 보았는데, 올해는 과연 얼마나 가까이 따르게 될는지는 미지수이다.

무언가 많은 이번 주 일주일이 지나면 7월도 거의 끝나게 된다. 이 아틀란타 지역의 올해 기후가 완전 ‘이상, 이상, 이상’ 해서 한 여름 같은 느낌을 잊을 정도지만 절대로 불평은 없다. 8월이 시작되면 역시 기울어지는 여름이 될 것이고 찬 바람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8월부터는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2014년 부활절 목표로 신 영세자 교리반이 시작되는데 올해부터는 format이 완전히 바뀌어서 새로 부임해 오신 ‘진짜 국산 수녀님’의 주도로 진행이 되고, ‘어쩌다’ 우리 부부도 ‘봉사자’로 ‘곁다리’를 들게 되어있어서 우리부부의 ‘교리실력’에도 많은 보탬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누가 알 것인가.. 어떻게 될는지.. 하지만 우리들의 ‘중재자’, 어머님께 모든 것들이 잘 되도록 부탁해 본다.

A Day in the Life

Florida Keys
Florida Keys

¶  7월도 tipping point를 지나간다. 이제는 서서히 8월을 향해서 ‘쓰러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요새의 한 달의 느낌은 예전의 일 주일 정도라고나 할까.. 어찌 그렇게 세월의 느낌은 나이의 느낌과 비슷할까.. Mother Nature의 축복을 흠뻑 받으며 올해의 여름은 기가 막히게도 시원하고 시원하다. 몇 년간의 갈증을 완전히 복수라도 하듯이 엄청 많은 ‘물’을 쏟아 주셨고,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다.

나머지 여름, 기껏해야 한달 반.. 암만 더워도 달게 받으리라. 그러다 생각하니 그렇게 많이들 가는 여름휴가.. 이제는 ‘휴가’라는 말 조차 잊은 것일까. 연숙도 다 잊은 모양으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우리 집 자체가 summer house같이 느끼는 것일까? 집에 있는 자체가 summer vacation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편하게 느끼면 되지 않을까?

올해는 잠시 잠시, 미국의 ‘최남단’ Florida Key West와, Hemingway의 소설이야기를 향해서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그대로 차를 몰고 집을 떠날까 하는 충동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의 대표작, 중학교 때 영화로 보았던 ‘무기여 잘 있거라 (A Farewell To Arms)’ 그리고 킬리만자로의 눈 (The Snows of Kilimanjaro)등을 최근에 다시 보게 되면서 더 그곳을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리 속에서만 머문 것이 되나 보다.. 그렇게 올해의 여름도 끝날 것인가?

 

 ¶  이동수 목사.. 이동수 선생, 어떨 때는 형제와 같이도 느껴지는 사람.. 하지만 꿈속에서나 보는 느낌으로 오랜 세월을 못 보고 지낸 그런 사람, 어제는 우리 부부가 정말 오랜만에 꿈에서 깨듯이 그 집을 방문해서 부인, 이미섭 선생이 정성스레 마련한 ‘일식’ 점심을 같이 하며 해후를 풀었다. 한마디로 ‘은혜로운’ 몇 시간을 우리들은 만끽하였다.

골방에서 거미줄을 치우며 조금씩 빛을 향해 개미행진을 시작한 지 2년여가 되어가지만 아직도 나는 그 개미행군을 계속하는 느낌이다. 1990년 초, 우리가 아틀란타에 이사온 후 시작한 아틀란타 한국학교에서 우리부부와 그 집 부부는 같은 선생님으로 만났고 그것이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서 우리들은 ‘인연’이 생기게 되었는데 교장문제 같은 하찮은 ‘정치싸움’에 우리는 본의 아니게 휘말리고 결과적으로 다 그곳을 떠났는데, 그 이후로 사실 우리 들은 헤어지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그야말로 생사 여부나 간신히 알 정도로 지내게 되었는데 얼마 전 연숙이 정말 우연히 이동수 목사를 보게 되었고 어제는 집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의 ‘지인’에 속하는 이동수 목사.. 이렇게 다시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은 이제는 절대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세상에는 100% 우연이란 없다는 것을..

 

¶  몇 년 전 우리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얻어온 선교용 CD를 조심스레 rip해서 youtube에 올려 놓았다. youtube 를 배우려 한 목적도 있었지만 내가 들어 본 그 CD는 한국 천주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만든 것이라 아주 professional한 것이라 나도 다시 들은 것도 많은 수준 급이어서 혹시 천주교를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큰 무리가 없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것이 ‘인기’가 있을 것은 절대로 기대하지 않았고, 사실 그랬다. 불과 200 views도 채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찌 문제가 되는가.. 단 한 명이라도 ‘무언가’ 느끼면 되지 않겠는가?

문제는 toxic comments에 있음을 오늘까지 몰랐다.. stupid, toxic, absurd, destructive comments..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의 ‘시간을 죽이는 한가한 인간들’의 넋두리를 그대로 방치한 것이다. comment review & approval을 해야 하는데..하는 후회가 있었지만 늦었다. 어떤 ‘불쌍한 자매님’이 불쌍한 comment를 달아놓았다.

‘교황은 지옥에 있다’라고 시작된 이 Kafka-ish한 느낌은 정말 어찌 처리하는가.. 속으로는 ‘지옥은 당신들… 당신이나 잘하시오..’ 하는 감정도 잠시 치솟지만 그래도 나는 레지오(마리애)의 정신에 조금은 익숙해졌는지 곧바로 평정을 가다듬고 이 불쌍한 영혼을 위한 기도가 생각나면서 ‘아하.. 이래서 우리 레지오가 세상에 필요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아.. 세상에는 참으로 불쌍하고 무식한 영혼들이 많이 있구나.. 하지만 무식해도 바르고 깨끗한 영혼들도 많이 있는데..

 

¶  Coursera: 약 6주전에 성당교우 설재규씨가 이곳, online university course website, coursera.org를 소개해 주었다. 이곳은 전 세계(주로 미국)의 여러 대학 online course들을 online student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비교적 새로운 academic course provider이다. 인터넷을 이용해서 computer로 강의를 듣게 하는 idea는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이렇게 다양하고 세계 굴지의 교육기관 (주로 미국의 대학들)의 course들을 ‘한 곳’에서 제공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다.

각 대학들은 이미 자체 방식대로 그 동안 credit course들을 ‘유료’로 제공을 해 왔지만 이 coursera.org는 ‘기본적으로’ ‘무료’인 것이다. course를 제공하는 학교들과 이것을 한 곳에서 제공하는 coursera 는 어떻게 무료를 가능케 한 것일까? 특별한 ‘광고’들이 보이지 않기에 광고수입은 관계가 되지 않는데,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이 course들의 학생 숫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고, 이것 자체가 각 대학들을 ‘선전’하는 금전적 효과를 노린 것이 아닐까? Open & Free가 새로운 문화로 정착하는 이즈음, 이것도 그런 맥락에서 절대로 이해가 가는 시대를 앞서가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주간 나는 University of Rochester에서 제공하는 Fundamentals of Audio & Music Engineering : Part 1 Musical Sound & Electronics란 ‘거창한’ 제목의 course를 ‘경청’하려고 노력을 해 보았다. 학교 강의실이 아니고 편한 집의 cushy한 환경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사실 oxymoronic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나에게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이 course로 나의 성적표 기록이 남는 것도 아니고 남에게 잘 보이려는 것도, 이제 취직을 하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재미와 보람’만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특별히 이 sound & music course를 택한 것은 내가 이곳을 처음 찾던 날 ‘개강’을 한 것이 제일 큰 이유였지만, course description에 final project로 guitar amplifier를 설계, 조립을 한다는 것이 귀가 솔깃해진 것도 결정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요사이 나는 야마하 ‘통(acoustic)기타’를 guitar pickup과 Beringer amplifier, buzz pedal을 연결해서 쓰는 중이어서 이런 분야에 관심을 둔 것도 또한 이유가 되었다.

이것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 중에는, calculus를 포함한 대학 level 수학을 정말로 많이 잊어 버렸다는 것.. 학교를 떠난 후 이 ‘이론적 수학’을 써볼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는 변명만 찾기에 나는 급급하고 있을 정도로 사실 당황을 하였다. 세월이 그만큼 흐른 것 때문일 것이다. 전기공학과 2학년 수준의 AC circuit analysis도 많이 잊어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생애 전공’이 거의 digital, microcontroller, embedded software였으니, 그 쪽은 정말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편으로는 너무나 ‘향수’를 느끼게 하는 그리움 같은 것도 느껴서 그렇게까지 괴롭지는 않았다.

My current & upcoming courses from Coursera

My current & upcoming courses from Coursera

 

3일 뒤에는 다음 course, Introduction to Guitar가 시작이 되는데, 사실 이것을 ‘청강’해 보려는 것은 과연 진짜 pro들은 어떻게 guitar를 치는가 하는 것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course의 설명을 읽어보면 ‘아마도’ 기타를 처음으로 시도해보는 사람들을 위한 것 같아서 시간 낭비가 되지 않을까 우려도 되지만 무슨 상관.. Free & Open이 아닌가? 3주 뒤에는 올해 나의 진짜 관심사, 이스라엘의 대학에서 제공하는 A Brief History of Humankind인데, 소개 video를 보면 정말 어떤 각도로 ‘인간역사’를 조명하는가가 궁금해진다. 나의 다른 희망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지만 어떨지 모른다.

 

 
A Day in the Life, Beatles, 1967

 

 

 

Holy Family 40th Anniversary

 

 

Dear Father in Heaven,

As we celebrate the fortieth anniversary of the founding of our parish, we thank you for the gifts that you have given us. Most importantly, thank you for the gift of love that brings so many people from such different backgrounds together as one family.

Please help us to learn by your Son’s example to continue to love and care for one another so that we may grow and welcome others into our Holy Family.

We ask this in Your sweet name,

Amen

 

Holy Family statue
Holy Family statue

오늘 2013년 7월 10일은 우리가족의 제1 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 가 본당 창립 40주년을 맞는 날이다. 이를 기념하여 저녁에는 ‘성대한’ 기념 미사와 행사가 열린다. 우리 가족이 이 성당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이제 거의 15년이 넘어가고 있다. 우리 집에서 불과 5마일인 관계로 우리에게는 가장 가까운 parish가 된다.

원래 거의 30마일 떨어진 도라빌(Doraville) 한국 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이 우리의 본당이었지만 1990년대 초에 그곳에서 벌어지고 목격이 된 ‘기가 막히는’ 사건들에 식상을 하고 완전히 주저앉아 (냉담) 버렸다. 그 당시 대신 가까운 미국 본당에라도 나가야 했었지만 최소한 나에겐 그렇게 해야 할 절심함과 신앙심이 결여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참 무책임한 인간이었다. 우리가 ‘애써’ 얻은 신앙을 거의 무시하며 살 태세였고, 속수무책, 수수방관, 그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으로 일관하며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지금 생각을 하면, 나와 연숙은 그런 것에서 의견을 달리했고 최소한 영세를 받은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나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거나 돕지도 않았지만, 반대도 안 했다. 완전히 나는 ‘교회 business’에서 손을 땐 듯 행동을 했다. 그러다가 어떻게 연숙이 미국 본당 Holy Family 성당을 나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위기감을 느낀 연숙이 집 부근을 뒤지며 찾아 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같이 googling의 혜택도 그 때는 기대 못하던 때였으니까…

행동이 빠른 연숙은 곧바로 아이들의 신앙 절차를 ‘최소한’ 빠지지 않게 주말 미사엘 (나를 제외하고) 나가기 시작하고 작은 애 나라니의 첫영성체, 두 아이의 견진성사를 모두 완료하였다. 그 때 나는 ‘돈 버는 가장’의 핑계로 간신히 C&E (Christmas & Easter) 신자로 위태로운 신앙생활로 일관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 Holy Family 성당은 우리 가족에게 다가왔고, 2000년대 중반부터는 나의 ‘완전한 본당’이 되었다. 10년 이상의 냉담을 깨고 그곳에서 Pastor, Father Edward Thein께 고백성사를 보고 최소한 Sunday Catholic 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 전에는 사실 가족들과 미사를 가더라도 나만 영성체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것이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다지 괴롭지는 않았지만 가족들은 그 때가 참 괴로웠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렇게 해서 이곳은 명실공히 우리 가족의 ‘안정하고 안전한’ 신앙의 피난처가 되어갔다. 덕분에 영어미사와 미국인 미사 문화도 많이 익숙하게 되고 미국 천주교와 그 흐름을 간접적으로나마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이것이 발판이 되어서 나는 더욱 자신을 가지고 ‘진짜 본당’인 한국 순교자 성당으로 조금씩 더 관심을 두고 그곳으로 향한 먼 여정의 길을 2011년 가을 그곳 소속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함으로써 디디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 미국본당에서 여러 해 받은 경험들이 씨앗이 되었다.

미국 천주교가 지금 경험하고 겪고 있는 시련들, 이곳에서 고스란히 보고 느낀다. 유럽계 가톨릭 세력의 수축과 히스패닉 계열의 급 성장, 아시아 계의 ‘가톨릭 역수출’ 등등으로 사실 미국 천주교의 입장은 무슨 큰 결정을 해야 할 때가 빨리 오는 듯 하다. 특히 연방정부의 급속한 교회간섭 정책, 대법원의 동성결혼 ‘묵인’ 등은 1970년대 초의 낙태 합법판결의 파장을 훨씬 웃도는 그런 위기감을 주고 있어서 새로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앞으로의 사목정책의 중요성은 더욱 더 높아지고 있다.

나와 연숙은 작년 사순절을 계기로 이곳 미국본당의 ‘매일 미사’를 참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일년이 훨씬 넘게 실행하고 있다. 암만 생각해도 이 ‘쾌거’는 이해하기도 힘들고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것인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해 졌는가.. 암만 생각해도 나는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저, 안 보이는 ‘힘과 손’이 뒤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상투적’인 설명만 되 뇌일 수 있을 뿐이다.

Holy Family 성당과 사제관
Holy Family 성당(left)과 사제관

이곳 미국 본당도 미국 천주교를 반영하듯 Irish, Polish로 대표되는 ‘급속히 쇠퇴하는’ 유럽계 가톨릭은 급속도로 고령화되고 새로운 ‘피’는 역시 ‘다른 곳: 히스패닉, 브라질’로 대표되는 중남미계열과 열기가 느껴지는 아프리카 대륙, 뜻밖의 복병 아시아의 월남(베트남), 필리핀, 한국의 신자들이 그 고령화를 상쇄하듯 메우어주고 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white-power가 이곳에서도 역시 퇴조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미사를 가는 덕분에 이곳의 regulars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고정신자들, 열심한 신자들인 것이다. 역시 여자의 숫자가 압도적이다. 이것은 절대로 놀랄 일이 아니다. 교회로 다시 돌아오면서 이렇게 압도적으로 많은 여성신자의 숫자 (남자에 비해서)에 나는 처음엔 ‘그게 정상이다’라고 일축했지만 지금은 사실 곰곰이 생각하고 연구까지 하게 되었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한 대답은 사실 보기보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 ‘자랑스럽던 남성 동지’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들은 생명의 불멸성을 이미 알고 태어났단 말인가?

 우리가족은 비록 이렇게 두 본당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어정쩡한 모습이지만, 생각해 보면 이런 형태의 신앙생활 그 나름대로 장점과 특징도 없지 않다. 아마도 이곳에 사는 많은 가톨릭 한인신자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 많을 듯 하다. 20여 년 전에 유일한 한인공동체였던 순교자 성당이 ‘90% 이상 망가졌을 때’, 우리는 choice가 별로 없었다. 계속 나갈 것인가.. 아니면 냉담을 할 것인가..

나와 같이 간이 큰지 못한 인간들은 가장 쉬운 방법, 냉담을 택했을 것이고,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 방법을 택했다. ‘분열’의 참담한 파괴 성을 그때 절감을 했지만, 나의 평화가 더 중요했는지 모른다. 그때 backup shelter(다른 본당)가 있었으면 100% 냉담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지만, 이제는 다 역사가 되었다.

 Holy Family 성당은 현재 우리가 사는 East Cobb county에 많은 ‘비교적 안정된’ 한인들의 비공식 피난처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다. 30분 drive거리에 있는 한인 순교자 성당이 조금 멀다 싶으면 10분 거리의 이곳이 항상 우리를 맞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연륜이 쌓이면서 사람들도 익숙해지고, 정도 많이 들었다. 고정적(regular)인 한인 교우들, 물론 여기도 대부분 젊은 자매님들이지만 그들과도 많이 얼굴도 익숙해져서 진정한 ‘영혼의 고향’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혹시라도 안 보이는 얼굴이 있으면 궁금해지기도 한다.

나와 연숙에게 이 Holy Family CC는 신앙의 징검다리 역할을 많이 해주었고, 계속 해 주고 있지만 앞으로는 어떨까.. 우리가 도라빌 한인 순교자 성당에 더 많이 개입이 되면서 조금 생각을 하게 된다. 결론은.. ‘아무도 모른다’.. 이런 것은 정말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 같지 않음을 서서히 알아가고 있기에 더욱 ‘맡기고’ 살기로 했다.

Easter 2013, Proof of Heaven

¶  2013년 3월 31일 일요일, 예수님의 부활 대축일.. 첫 부활로부터 2000년 이상 계속 되풀이 되고 있는 예수를 믿는 기독교의 최고의 축일이다. 재의 수요일부터 40일간 계속된 사순절도 오늘로서 끝이 난다. 지난 목요일부터 시작된 ‘피곤하기도 한’ 각종 의미를 갖는 ‘무거운’ 날들, 특히 토요일 밤의 Easter Vigil 은 영세,견진의식까지 있어서 부활 일요일 아침에는 피곤하기까지 하다. 불과 7~8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식구들이 나를 ‘끌고’ 부활절 미사에 가곤 했는데 그것이 이제는 완전히 반대가 되어서 우리부부가 두 ‘아이’들을 ‘끌고’ 가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 전에는 내가 C&E Christian (크리스마스와 부활 때만 성당엘 가는 신자) 였는데 지금은 우리 두 아이들이 그렇게 되었다.

그래도 오늘 아침에 제 시간에 같이 집에 온 ‘아이’들.. 기꺼이 미사에 참석을 하였다.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그 정도인 것이 조금은 안타깝지만..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고 싶다. 모든 식당들이 문을 닫기에, 언젠가부터 이날도 다른 holiday같이 ‘잘 먹기로’ 하고 fillet minion steak 와 wine으로 이른 점심을 하고 아이들은 집을 떠났다. 엄마의 제의로 매달 넷째 일요일에 집에서 ‘이렇게’ 먹자고 했는데, 의외로 ‘아이’들이 기꺼이 동의를 해서 조금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제는 ‘아이’들이 아닌가.. 그렇게 커버렸나.. 생각하며 세월의 횡포를 생각하기도 했다.

 

뇌전문 외과의가 본 천국
뇌전문 외과의가 본 천국

¶  얼마 전 ‘갑자기’ Costco에서 갔을 때, 우연히 보게 된 책 proof of heaven, 진부하기도 한 제목이었지만 조금 독특하게 기분이 좋은 표지에 끌려서 읽고, 결국은 사게 되었다. 읽기에 부담이 없는 200 page가 안 되는 것도 그렇고, 저자의 경력이 더욱 독특했다. Neurosurgeon, 그러니까 신경외과의 정도가 될까.. 한마디로 뇌수술 전문의인 것이다. 그가 정말로 희귀한 ‘감염’으로 일주일간 사경, coma 끝이 역시 ‘기적적’으로 ‘완전 회생’, 그때 그가 ‘보았던 것’을 적은 것이다.

작년에 나온 책으로 New York Times Best Seller #1, 그러고 보니까 언젠가 뉴스에서 본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이런 ‘현상’을 NDE, Near Death Experience라고 부르는데,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수 없이 이런 사례가 보고가 되고 있고, 일부에서는 본격적으로 ‘과학적’으로 연구까지 한다고 한다. 이 책이 특출한 것은 그것을 겪은 사람 자체가 뇌외과 전문의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 분야의 과학자중의 과학자인 것이다. 그가 비과학적인 것을 겪었으니, 그의 고뇌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과학과, 비과학적 경험을 그는 어떻게 ‘절충, 타협’을 했을까.. 하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지난 금요일 새벽에 예수성체를 지키며 하던 성당 새벽 성체조배를 앞뒤로 나는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이때의 나의 느낌과 경험은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전율과 감동의 연속이었다. 한마디로.. 절대적 하느님의 존재는 이제는 거역할 수 없는 ‘진리’임을 겸허하게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이번 부활에 나에게 주어준 은총임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다. 이것이 65년 만에 알게 된 진리였던가?

꽃샘 추위, 아치에스, 판공성사

¶  꽃샘 추위   3월 25일, 어제는 Palm Sunday였고 드디어 2013년 성주간이 시작되었다. 이번 주에 ‘그 것’이 모조리 있는 것이다. Easter or Paschal Triduum이라고 불리는 성삼일(Holy Thursday, Good Friday, Easter Vigil)에 이어 부활절 일요일.. 조금 생각만해도 숨이 찬 기분이랄까.. 하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모두 일년 내내 기다리던 그 때가 아닐까?

십자가 수난과 부활이 없다면 사실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 성주간에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아니, 사실 지나간 2월 달이 1월 보다 더 추웠고, 지금의 3월 달이 2월 달보다 더 춥다. 오늘은 낮 기온이 화씨 40도(섭씨 5도?)도 안 되는 듯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세상일까? 옛날 옛적 서울에서 살 때 이것을 ‘꽃샘’ 추위라고 했지만 지금 것은 조금 다르다고 할까.

제일 큰 ‘희생물’은 봄을 기다리던 꽃나무들이다. 찬란하게 초봄을 알리던 수많은 꽃, 나무, 잔디들.. 모조리 거의 ‘잠잠’하다. 아니 불쌍할 정도다. 작년을 생각해보니 너무나 대조적, 정말 찬란한 작년 3월 말을 기억하니까.. 방방에 놓여있는 space heater를 ‘거의’ 치우려고 했는데, 그랬다면 정말 큰 실수를 한 것이다. ‘동복’들도 고스란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아마도 아마도 부활절, 4월 초가 되면 정말 봄이 오지 않을까?

 

acies-2013¶  아치에스(Acies)   지난 일요일 3월 17일에는 일년에 한번씩 있는 레지오의 주요 행사중의 하나인 ‘아치에스’ 행사가 열렸다. 아치에스, Acies라는 말은 라틴어로 로마시대 군대의 전투대형을 뜻한다. 레지오 마리애 조직의 원형이 로마 군대의 것을 따랐기에 이것도 그것의 일부인 것이다. 비록 군대식으로 조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조직의 운영에 대한 것이다. 조직의 힘을 모으려면 역시 군대식이 최고일 것이다.

그래서 일년에 한번 거의 군대식으로 모두 모여서 ‘충성 서약’을 하는 것인데, 올해로 나는 세 번째 이것을 맞이한다. 지난 2년 동안 참가하고 보면서 느낌이 참 신선하고, 무엇엔가 끌려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쉽게 말해서 우리의 총 사령관이신 성모님께 충성을 서약하는 것인데, 평소에 잘 못 보던 동료 단원들을 이곳에서 모두 보게 되는 것도 그렇고 함께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아주 감동적이기도 했다.

 

¶  부활절 판공성사   판공성사, 고백성사, 고해성사.. 이름도 다양하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7성사 중의 하나인 ‘성사’다. 그 중에서도 이것은 가톨릭만이 ‘자랑’하는 아주 독특한 것이고, 제일 인기가 없는 성사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자기의 ‘치부, 부끄러운 곳’을 ‘남에게’ 드러내야 하는 것이니. 영화에서 보는 듯이 그렇게 dramatic한 것도 없고,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야기되는 ‘꽤 죄죄’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고백을 할 것인가?

이 성사를 교회에서는 최소한 한 달에 두 번을 하라고(보라고) 하지만 과연 그렇게 따르는 모범신자들이 많이 있을까? 하기야, 주일미사를 빠질 때마다 이 성사를 보는 교우를 보기는 보았지만, 그것은 예외에 속할 듯 하다. 내가 본 많은 사람 중에는 ‘전혀’ 하지 않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일년에 중요한 때 (부활, 성탄 같은) ‘겨우’ 보는 사람들.. 그렇게 이것은 사실 부담스러운 것일까.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는 듯하다. 괴롭게 느껴지는 ‘죄’는 고백을 하면 시원하게 느껴질 것이고, 분명히 사제는 주님을 대신해서 ‘용서’를 하신다. 그러니까 고백성사를 하는 것은 정말 괴롭고 어려운 것이지만 이것을 마쳤을 때의 ‘환희’는 어디에도 비교하지 못한다.

이것을 조금이라도 기억을 하며 다시 성사를 준비하고 한다. 이것이 이 성사의 매력이라고 할까? 나는 최근에 신앙의 르네상스를 맞이하며 일년이 최소한 2~3번은 간신히 유지하고 있고, 사실 나는 이것도 자랑스럽다. 특히 어둡기만 한 고백소에서 하는 것을 피하고 ‘대담하게’ 신부님의 사무실에서 면담하는 식으로 한 것이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올해 부활절 판공성사는 지난 목요일에 ‘가족행사’로 보았다. 연숙의 대녀님인 권 모니카 자매를 대동하고, 게다가 올해는 오랜 지인 설재규씨가 합류를 해서 4명이 같이 보게 된 것이다. 지난 일년간 성사를 못 보았다던 설재규씨가 참가한 것은 나에게 신선한 즐거움으로 느껴졌고,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같이 하게 될 수 있을 것을 꿈꾸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