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ration Alpha, KNOX LUCAS LEE BERTRAM…

오늘은 8월 초순답지 않게 동이 트기 전부터 상당한 기세로 비가 내린다. 지나가는 열대성 여름 오후의 비가 아니다. 흡사 ‘가을비 우산 속~’ 격에 맞는 그런 느낌을 주는 것, 나쁘지 않구나…  새로운 손자가 태어나는 날과 어떤 관계는 없을 듯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어두운 모습’이 없이 밝게 자라기를…  [나처럼 이상할 정도로 어두운 비를 좋아하지 않으면..]

언제부터인가.. 나의 꿈, 특히 새벽녘의 꿈은 분명한 ‘느린듯한 악몽’임을 알게 되었다. 식은땀이 흐르는 충격적이고 기억에 남는 그런 흔한 것이 아니다. 잔잔하게 느리게 나를 조여오는, 기분 나쁜 것이다. 나는 우울하다, 불안하다, 절대로 행복하지 않다고 나를 세뇌시키는 듯한 ‘반 의식적 꿈’인 것이다. 원인은 분명히 찾을 수 있지만 이 정도로 나를 괴롭힌다는 사실이 나를 실망시킨다. 왜 그렇게 기억에 남는 멋진 꿈들과 생각을 하며 침대에서 일어나는 경험이 요즈음에는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이것도, 이것도 영적으로 분석을 해야 한단 말인가, 피곤하다.

T-0! 결국 8월 10일이 빗소리와 함께 젖어 든다.  산모 나라니는 새벽같이  Piedmont Hospital  분만실  에서 둘째 아들 분만 준비를 하고 있다. 모두들 조금은 긴장하며 text message를 기다리고…  ‘수술’이라지만 한번 경험한 것이어서 조금은 안심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러면 안 되지.  끝까지 기도하는 자세를 놓을 수는 없고, 일단 기다림은 시작된 거니까, 기다리고 지나가기만 기도하자…

현재 시각, 아침 8시 37분에 ‘baby’s born!’ 소식이 왔다… 우리는 마침내 2020년 이후 크게 기대하지도 못하던 후세, 그것도 총 3명의 손주를 갖게 된 것인데, 참 세상은 이래서 덜 지루한 것일까.  여자 동생을 기대했는데, 둘째 남자아기라서 조금은 덜 반갑지만…  로난 Ronan과 낙스 Knox.. 두 개구쟁이 형제들이 ‘터지게 싸우는’ 모습이 어른거린다. 하기야 그것이 더 재미 있는 combo일 듯 하다. 이들은 모두 Generation Alpha [2010년 이후]의 후반 세대들, 과연 이들이 살게 되는 세상은 어떠한 모습일까… 이제 나라니의 [우리들의 무언의 push에 대한] 부담과 스트레스 그리고 초조와 고통은 다 사라지게 되는 것일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산모, 아기가 모두 [아무런 희귀한 surprise없이] 건강하도록,  ‘기도, 기도, 기도..’ 잊지 말자.

원래 아기 이름을 Leo로 정해놓았었는데.. 갑자기 Knox 로 바뀌어서 이유를 물어보니 참, Millennials [Gen-Y]  세대의 장난기인가.. 분만병동에 들어가서 갑자기 생각들이 바뀌었다고.. 시부모 댁은 Leo에 맞추어서 선물 등에 lettering을 해 놓았는데.. 참 버릇이 이렇게 없으니… 나라니 왈, 남편과 의견이 통했다며 둘 다 좋아하는 영화 DEAD POETS SOCIETY 에서 ‘너무나 다정다감한’  Knox Overstreet란 character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 이유의 전부다. 30여 년 전[1989년] 에 Mr. Keating character, Robin Williams 열연의 크게 hit한 영화,  VHS tape으로 당시 자주 같이 보던 것, 비교적 기억이 생생해서 그 Knox의 얼굴을 연상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특히 ‘부잣집 깡패’ 축구선수와 사귀는 여자 아이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다가 ‘무섭게’ 얻어맞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또한 그녀가 있는 학교 교실까지 쳐들어 가서 모두 보는 앞에서 ‘태연하게’ 시 낭송을 하던 그런 그의 행동이 그렇게 매력적이었던가…

나라니, 그 동안 수고 많았다! 고맙고 미안하구나… 오늘 baby와 나라니를 보러 Piedmont Hospital로 가려는 계획은 무산이 되었다. ‘이상한 원인’으로 기침을 심하게 하는 연숙과 통화를 했던 나라니가 오늘 오지 말라고 한 모양이다. 솔직히 그것이 모두에게 편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Judy, 친할머니가 그곳에 갔다고 하니까 우선 가족 방문은 된 것이다. 무언가 무겁게 느껴지던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우리는 이미 70을 훌쩍 뛰어 넘어 80으로 가는 ‘할배와 할매’가 아니냐 말이다. 왜 이렇게 늦은 석양 무렵에 이런 ‘힘든’ 경사들이 한꺼번에 우리를 찾아온 것인가… [10년, 아니 5년만 ‘젊었어도’…]

오늘 병원 산모병동 방문 예정이 사라진 뒤에 남는 여유시간, 그 동안 초조하게 쫓기는 듯한 스트레스가 천천히 사라지고 편안하게 비디오나 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나머지는 갑자기 시원해진 날씨에 이끌려 main shed 바른 쪽의 ‘어둡고 습한 곳’에 관심을 썼다. 하늘을 가리고 있는 커다란 나무 가지들이 그곳을 더욱 습하게 하고 있었다. 전에 연숙이 쓰도록 샀던 ‘cute, but powerful as‘ mini-chainsaw가 적격이어서 몇 가지 나무 가지를 쳤더니 처음으로 하늘이 넓게 보기고, 훨씬 밝아졌다. 시간이 나면 나머지 것들도 자르면 좋을 듯…

다음 달 9월 일 개월이란 ‘길다면 긴’ 시간은 나의 big bumper, buffer, cushion… 하지만 그것 조차 무서운 속도로 나를 향해서 정면 돌파를 하려는 듯 쳐들어, 아니 하루 하루 목을 조이듯이 다가온다. 내가 바로 당장이라도 시작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아~ 잊고 살았던 고향 땅, 한반도, 대한민국, 한국의 ‘각종 연락처’와 연락, 연결이 되어야 하지 않을지… 누구와? 어떻게… 아~ 이것은 생각을 시작조차 피하며 사는 나의 게으른 모습.. 어떻게 이 ‘도전, 산, 난관’을 극복, 정복, 넘어갈 수 있을까? Just Do It… just do it, just do it… stupid!

Morning, Mr. Keating’s Class …

갑자기 다른 세상을 보고 싶었나, 아니면 더위를 조금은 먹었나.. Dead Poets Society 의 Mr. Keating 생각이 났는가… 다른 세상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고 싶으면 그 선생의 시범대로 조금 눈의 위치를 올리면 된다. 변함없이 나의 시야에 고정된 piano위에서, 나의 desk위에서 본 모습들로 나의 노후 된 머리는 조금 청소가 되기를 바라며, 아침의 ‘곡예’는 끝났다.

오늘은 예기치 않던 휴일이 되고 있다. 나라니 네가 안 오기로 계획을 변경을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도 오늘은 외출을 하지 않게 되어서 솔직히 말하면,  편안하고 잔잔한 기쁨의 아침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Independence Day 이후 이곳 open deck에 처음으로 앉아본다. 이른 아침이라 모기도 없고, 조금 덜 습하고 시원한 날씨의 유혹이었나, 앉고 보니 무언가 허전하다. 아~ 올 여름은 이런 자리에서 맥주를 즐길 수가 없구나, 맥주 없는 여름, 전에는 상상도 못했는데… 내가 ‘금주 선언’을 한 탓에 자존심을 지키는 것은 좋은데, 그래도 이런 자리에서 시원한 맥주는 그립기만 하구나. 

오늘 비록 보너스처럼 생긴 여유시간, 벌려놓은 일 때문에 게으름을 즐길 수가 없었다. 마지막 10%의 일이 아마도 90%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50% 시간이 걸릴 듯 보인다. 웬 놈의 자질구레한 hardware [鐵物店처럼]들이 그렇게도 많이 쌓였는지… 귀찮은 것들은 아예 버리고 싶은 유혹과 싸우고 어떤 것은 쓸만한 것이었는데 홧김에 쓰레기 통에 버리기도 한다. 그래, 이런 많은 것들 언제 다시 쓰게 되겠는가? 버리자, 버리자, 홀가분하게 살자…

WYD 2023, World Youth Day 세계청년대회… 우리의 본당, 도라빌 순교자성당에서도 올 들어 계속 예고를 했던 이 행사, 드디어 개막이 되는 모양이다. 한창 더운 8월에 맞추어 시작을 하는 것, 조금은 덥겠지만 이들은 모두 청년들이 아닌가… 아마도 추운 것보다는 더운 것이 더 젊게 느껴질 것 같다. 교황님의 개막식 도착 장면을 거의 우연히 YouTube에서 보게 되었다. Lisbon, Portugal.. 근처에 Fatima, 얼마나 멋진 곳일까… 우리는 언제나 가볼 수 있을까…  우리 본당에서도 17명이나 ‘대거’ 참가한다고 했는데, 그들의 동정이 궁금하구나.. 부럽고…

오늘도 ‘지겨운 shed ‘stuffs’ work’ 후에 이곳 새로 정리된 new family room에서 휴식을 취한다. 이제는’할배’ 들, 나 자신과  Izzie까지 이곳에서 쉬시고…. 로난이 그제 왔을 때 이곳에서 놀았는데 장난감 같은 것이 그대로 남아 있구나..

Picnic Table Torched, Hawk Sighted, 할배 Blues

늦은 오후 ‘열대성’ 비가 지나간 직후 backyard 먼 곳에 있는 birdie apartment (3 rooms) 위쪽에 반가운 모습이 보였다. 급하게 사진을 찍긴 했지만 아주 선명하지는 않았다. 가끔 찾아오는 이 손님은… 그렇구나… hawk (red tailed) 그러니까, ‘매’ 인가? 아마도 요새 급증한 토끼 냄새를 맡았는지… 노루나 사슴도 가끔 보이는 이 동네의 뒷마당들, 그렇게 나무를 자르고 잘라도 역시 아직도 다른 곳에 비하면 거의 원시림 수준인데, 솔직히 나는 이 지역의 이런 모습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구나…

지난 4월초부터 out-of-service 되었던 mini picnic table의 수리가 일단 끝났다. 15+ 년 동안 rotting으로 상傷한 부분을 새로운 lumber로 교체를 하고 paint를 하려는 순간, ‘burning wood’ technique ‘그을음’ 생각이 났다. 이렇게 torching 화염으로 그을린 나무목재의 모습이 멋지기도 하고 습기나 해충으로부터 썩는 것도 지연시키지 않던가? 과연 겉모습은 예상대로 은은한 자연의 느낌을 준다. 하지만 natural elements에 의한 피해 상태는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가봐야 알 것이고, 결국은 paint job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목재에 이런 torching, burning technique으로 수명이나 예술성을 더해주는 것, 이미 일본에서 오래 전부터 쓰이던 것이고 이름도 아예 Shou Sugi Ban [이것의 漢字는 무엇인가] 이라고 있는데 과연 그 역사적 사실이 사실일까? 일본 아해들의 옛 것들은 일단 대륙, 반도에서 건너갔을 것이 거의 분명한데, 아쉽게도 서양 아해들과 먼저 접촉이 된 것은 거의 이런 일본용어와 결부가 되어있으니 더 할말은 없다. 대원군 할배여~  서세동점 西勢東漸 위기의 시대에 어이하여 며느리와 싸우시느라~~ 그 사이 일본아해들은 명치유신으로 눈깜짝할 사이에 근대화를 이루었는데…

‘할배’ 라고 자조 自嘲하는 우리 또래들, 특히 한국의 동창들, 나는 이런 자조적인 ‘꼰대, 할배’라는 말 크게 생각을 하지 않고 듣곤 하지만 한편으로는 소스라치게 놀랄 때도 없지 않다. 정말 우리가 할배, 꼰대들이 되었단 말인가? 그렇게 볼품없을 거라고 상상하며 살던 시절들이 다 지나갔단 말인가? 꿈이라면 깨고 싶지만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확실히 우리들은 심리적으로 ‘젊었던 시절과 할배 시절의 모습들’이 엄연히 동시에 현존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이 사실은 자연스러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최근에 갑자기 늘어난 ‘육체적 일들’, 일이 끝나고 느낌이 확실히 다르다. 비록 일반적인 건강상태가 아주 좋은 것은 사실이라도 작업 이후의 피로감이 회복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슬픈 사실… 전에는 실감을 못하던 현상이 아닌가? 어떤 때는 Tylenol이 그리워질 정도의 피로통증까지 몇 시간 지속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나이 탓인 거다. 쉬면서 relax하면 자연스레 사라지는 현상, 그래 나쁘지 않다. 쉬라는 ‘몸의 충고’가 아닌가.

덕분에 두어 시간 쉬는 동안 새로 단장된 ‘new’ family room의 소파에 늘어지게 누워 TV (주로 YouTube classic movies 주로 film noir)를 보는 재미를 새로 알게 되었다. 이제까지 거의 없었던 나의 모습이라고 할까… 이전까지는 거의 예외 없이 desk에 앉아서 (computer) screen앞서 시간을 보내고 쉬고 했는데…  일단 computer screen에서 떠난 것만 해도 커다란 변화요, 새 세상의 발견처럼 느껴진다. 전혀 나쁘지 않다.

오늘 늘어지게 다리를 뻗고 졸듯 말듯 ‘그래도 전부를’ 본 영화는 1965년 경 James Stewart주연의 The Flight of the Phoenix란 것, 오래 전에 (old tube) TV 에서 보았던 것으로 거의 모든 이야기 줄거리는 기억을 하는 것인데 지금은 YouTube로 ‘거의’ HD 로 보는 것이니 느낌이 정말 다르구나..  사막에 고장으로 불시착한 석유회사 운송기를 필사적으로 수리를 해서 다시 나르게[짧은 거리지만] 하는 ‘믿을 수 없이 기막힌’ 과정을 그린 것이다.  수리를 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수리라기 보다는 아예 기존 ‘철물’을 뜯어서 거의 새로 비행기를 만드는 처절한 노력이 코믹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정확히 1주일 만에 아침미사, gym엘 가는 날..  잠깐씩 ‘쉬고 싶다’라는 무서운 유혹이 넘실거린다. 안 나가는 것 자체가 편하고 행복하게 느껴지는 것, 그것이 유혹이요 공포다. 이것에 잘못 걸려들면 나는 20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모님이시여, 저의 손을 놓지 마세요~~
7월도 20일이라고? 웃긴다 웃겨… 어떻게 벌써 7월의 2/3가 가고 있단 말이냐? 어떻게? 웃기는 건 바로 나다, 그것이 그렇게 새롭고, 놀랍냐, 병신아! 그래도 아직도 아직도 아직도… 열흘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면 어디가 덧나냐?
Sonata Cafe까지 곁들인 오늘의 아침미사와 YMCA gym 외출은 비록 오전 전부가 필요한 외출이었지만 분명히 정신적으로 큰 에너지를 재충전 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 굳게 믿는다.
집에 오는 길에 느낌이 ‘오늘은 외식이나 Kroger에서 무엇이라도 사다 먹자’ 라는 의견을 서로 예상했는데, 의외로 그것은 오산이었다. 대신 집에서 가정주부가 만든 볶음밥 의 멋진 점심 식사가 되었다.

Cancel Days Aftermath, Can’t Die in a Cornfield!

어제 저녁부터 점점 심해진 ‘잔잔한 우울증’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오늘 아침은 고육책으로 잠자리에서 정오가 되어서야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나로써는 가끔 있는 희한하게 보이는 괴벽이지만 하느님이 보시면 측은하게 보실 것이다. 다행히 연숙이 이런 나의 모습에 익숙한지 크게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이런 와중에서 외출, 특히 오늘 예정된 S 베드로 형제집에 놀러가는 것은 물 건너 간 것이 되었다. 또 하나의 cancel 희생물이 생긴 것이다. 우리를 위해서 마련한 자리였는데, 혹시 우리가 무리를 하면 못 갈 것도 없을 듯한데~ 하는 각종 후회의 느낌을 쫓는 것도 피곤할 지경이다. 아~~ 미안해~~~ 잘못했어~~~ 소리를 지르고 싶다.

한편으로 그 집에 놀러 가서 신나게 떠들며 노는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얼마나 신나게 스트레스를 풀 기회가 될 것인가? 특히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도 있으니… 하지만 이제 물 건너 갔다~~

어제 저녁부터 시작된 ‘어두운 밤’ 속에 나는 각종 추억을 더듬느라 바빴다. 어둠 속의 추억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아름답고 감미롭게 남아있던 그 추억들 조차도 모두 어둡고 잊고 싶은 추억으로 변색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정말 슬펐다. 지나간 과거지사, 추억들은 나의 보물, 자랑거리이기도 했지 않은가? 그곳으로 도망, 피난을 가면 나는 편하고 행복하곤 했는데, 이제는 이것조차 이렇게 변하고 있단 말인가? 놀랍기도 하고 사실은 정말 슬픈 것이다.

특히 1973년부터 1977년 간의 추억은 극과 극, 지옥과 천국, 천사와 악마의 경계를 오가는 시절로 다시 재조명이 되는 것이 제일 끔찍하게 놀랍다. 그렇게 ‘멋지고 행복했던’ 추억의 뒤쪽에는 이제까지 잊고 살던 악마의 모습들이 나를 비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개인역사가 세월의 뒤안길에서 퇴색하고 변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사후에 ‘꼭 거쳐야 한다는’  life review가 가까워져서 그런 것은 아닐까?

이런 악몽의 24시간 뒤에 내가 기대하는 것은 물론 밝은 하늘, 웃는 성모님의 위로의 미소, 든든한 하느님의 보호, 은총, 자비 등등이겠지만 현재로써는 전혀 실감이 가지를 않으니~~ 아~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사랑, 현존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무엇을 나의 현재의 어려움을 초래한 것이었을까? 무엇이?

 

이제 조금씩 우리는 일어나고 있다.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내일 저녁의 진희네 그룹의 식사모임부터 약속을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성사생활, 특히 매일미사, YMCA등도 재개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큰 문제가 없다. 앞으로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수요일의 가족모임과 S형제와의 약속도 지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말에 새로니 식구 돕는 것으로 2022년을 안전하게 마감할 것이다. 절대로, 절대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살 수 있다.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뉴스들을 보니 이번의Northeast  snow storm은 거의 50/100년만이라고 나온다. 일기예보가 조금 빗나간 것인가, 아니면 갑자기 일기가 돌변한 것인가… 지역을 보니 대부분 이런 엄청난 일기에 이미 익숙한 곳이라 별로 크게 신경을 안 썼는데, 이제 보니 그것보다 훨씬 심한 모양~~ 피부로 느껴지지는 않지만 2014년 우리가 이곳에서 겪었던 ‘일기, 교통 대란’ 일을 생각하면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다. 좌우지간 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곳의 얌전한 날씨에 계속 감사한다.

지난 밤 (거의 정오까지 계속된) ‘어두운 밤’을 지내며 특별히 집중적으로 추억을 한 것이 1973년 이즈음 때였다. 당시의 유학생, 간호사들, 이제 자세한 것들이 퇴색된 것을 알고 너무나 슬펐다. 그렇게 생생하던 것들이 그 동안 잊고 살았던 탓이기도 하고 나의 뇌세포의 노화가 이유일 것이다. 나의 고백 자전적 수기 ‘Peru, Nebraska’를 제때에 완성을 시켰으면 지금 편안하게 이용을 할 텐데, 조금 늦은 듯하다. 사람의 이름, 얼굴들은 생각이 나는데 timing들이 뒤죽박죽이 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수기를 보충하는 노력을 해 볼까… 야심 찬 생각인가?

You Can’t Die in a Cornfield!  Handel’s Messiah가 거의 영화 주제곡처럼 들리는 1980년 Holiday film, A Christmas without Snow를  또 다시 보며 다시 듣는 말이 오늘은 왜 이렇게 나의 가슴을 울리는가? 그렇다, 그렇다,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여기서 죽을 수 없다, 계속 나아가야 한다.  갖가지 어려움과 사연을 안고 크리스마스 메시아 공연 직전 지휘자이자 그룹리더 (John Houseman 분) 가 중풍으로 쓰러지며 공연이 무산되는 순간 나온 이 외침,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는 이 Nebraska 주의 독특한 지역성 표현 덕분에 순간적으로 해결책이 발견되었던 것, 그렇다 여기서 중지할 수는 없다, 나아가야 한다.

 

Medicare 2023, Good Movies Help

내년도 Medicare handbook이 어제 배달이 되었다. 무심코 뒷전으로 밀어놓았다가 오늘 거의 무심코 열어본다. 현재의 plan, Humana PPO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 보려는 생각이 전혀 없지 않기에 그랬을 것이다. 이런 쪽으로 머리를 잘 굴리는 사람들이 자기의 plan에는 이것, 저것이 ‘무료’라고 거의 자랑을 하는 듯한 모습들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혹시 내가 무엇을 손해보고 사는 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못지 않게 싫다. 조금 더 자세히 무엇이 우리 plan에 있으며, 다른 곳으로 바꾸면 무슨 득이 있는지 호기심도 나기에 올해는 조금 더 공부해 보자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역시 이상한 날인가? 거의 무의식 적으로 손과 눈이 가던 YouTube KBS Docu 대신에 Roku Channel에서 잊고 살았던 오래 전의 영화를 보았다. All the President’s Men.. Robert Redford, Dustin Hoffman.. 아~ 추억이여. 50년 전의 big news, Watergate.. 그 당시의 각종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영화 속의 전설적인 두 신문기자들의 hair style과 멋지게 줄담배를 피워대는 모습, 육중한 고철 typewrite를 두드리는 모습, 역시 70년대의 그것들이다. 물론 이 영화는 그보다 뒤에 나온 영화고, 내가 본 것은 또 그 이후지만 역시 기억은 Nixon의 모습이 어른거리던 1970년대 초, 중반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시작된 Roku free movies에서 그 동안 한참 볼 수 없었던 영화 The Groundhog Day를 찾았다. 게다가 조금 있으면 또 볼 수 없는 영화라고까지 하니… 불현듯 다시 보고 싶은데… 아~ 저녁기도 시간이 다가오니… 어쩔 것인가? 또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의 함정으로 빠진다. 결국은 오늘 저녁기도를 skip하기로 하니.. 오늘은 조금 이상한 날이 되었구나. 하지만 아주 후회는 안 한다. 이런 ‘깜짝 변화’도 필요하지 않을까?

 

Groundhog Day, Farewell Hemingway…

Groundhog Day, 2022… 올해는 잊지 않고 언급을 한다. 오늘 이 유명한 두더지가 자기 그림자를 보았을까? 작년에는 그의 기후예보가 거의 정확히 맞았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이것 거의 ‘복권’추첨을 보는 듯 해서 이제는 재미도 있고.  Bill Murray 주연의 영화 The Groundhog Day가 암시하는 메시지, 매일매일 쳇바퀴 도는듯한 우리의 ‘지겨운 매일’에서 벗어나고 싶은 자극을 받는 위안도 받는다.  1993년 이 midwinter classic film은 이제 아련~ 한 추억거리로 남게 되어, 내가 살아 있는 한 이날은 재미있는 날로 차곡차곡 쌓여갈 것이다. 오늘 이 유명한 두더지는 과연 보았을까?  아~  보았다, 자기의 그림자를 본 것이다. 앞으로 6주 간은 겨울이 계속된다… 허~ 올해도 이것이 맞을 듯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구나.

거의 10도 정도가 올라간 비교적 포근한 날씨일 것이지만 역시 그 뒤에는 빗방울의 그림자가 없을 리가 없다. 구름이 있어야 포근함의 가능성이 있음을 안다. 거의 3한 4온, 그리고 정확한 주기로 찾아오는 비를 동반한 구름들… 그래, 최소한 이 지역 U.S. Southeast 는  Global Warming의 느낌이 없는, 거의 정상적 기후 패턴을 유지하고 있다. 감사, 감사… 하지만 한가지,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눈발을 다시 보는 행운은 있을까, 언제일까, 꿈은 버리고 싶지 않다.

TV news front…  나의 favorite & trustworthy channel은 전통적으로 NBC 인데 이유는 나에게 그들의morning show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마음이 들고 news 보도도 비교적 이성적,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요새는 난항을 겪고 있는데 두 가지 ‘사건’ 때문이다. 하나는 최근에 들어,  “입만 열면 거짓말이 나오는“, ‘개XX DONALD’에 대한 보도를 지나치게 자세히 하고 있는 것[왜 그XX의 새빨간 거짓말을 cover하는지…]이고 다른 것은 ‘중공, 빨갱이 짱깨‘ 들의 다른 fake show, Olympic을 [상업적이 이유지만] 전면 cover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정신건강을 위한 유일한 선택은… 그것들을 아예 ‘꺼버리는 것’,  그렇게 어렵지 않은 선택이다.

 

오늘 이른 아침 TV에서 우연히 잠깐 본 영화에 낯익은 얼굴이 나온다. Rock Hudson, 1957년 개봉된 이 Hollywood 영화, 한글 제목은  ‘무기여 잘 있거라‘, 귀에 익숙한 이 구절.  헤밍웨이의 유명한 소설영화의 제목 A Farewell To Arms..
이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61년 때 학교에서 단체로 가서 보게 된 영화[Rock Hudson, Jennifer Jones] 때문이었다. 중학교 [서울 중앙중학교] 2학년 생이 이 영화를 보았으면 어떤 인상을 받았을까? 그 나이 코흘리개들이 과연 이 이야기를 어느 정도 이해할 것인가? 물론 전쟁의 모습들은 흥미 있게 보았겠지만, 당시 우리의 화제는 한가지였다. 주인공Rock Hudson[ Frederic Henry역] 과 그의 연인 Jennifer Jones[Catherine Barkley역] 가 과연 ‘그것을’ 했을까.. 하는 것이었고 아직도 기억에 뚜렷이 남는다. 원래 소설에는 그렇다고 나오지만 아마도 검열에서 삭제가 되었을 것이다. 좌우지간, 그 나이에 벌써 우리들의 hormone level은 왕성했던 것인가.

나중에 그 영화를 다시 보게 되면서 잠재의식, 기억이 하나 둘씩 되살아 나왔다. 눈이 덮인 높은 알프스 산등성이에서 치열하게 전쟁을 하는 군인들, 폭탄이 떨어지는 병원에 누워서 ‘마지막’ 기도를 합창하는 부상병들, 후퇴하는 민간인들의 처참한 모습들.. 길가에서 군법 즉결재판 후 총살 당하는 군인들,  그 당시 독일, 오스트리아에 맞서서 연합군 측에 가담한 이태리 군인들의 알프스 작전을 포함한  1차대전의 모습을 생생하게 배우게 되었고 요새는 그것, 전쟁의 실제 모습’ 을 직접 경험했던 Hemingway의 생각과 기억을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헤밍웨이의 행적을 묘사한 다른 책[실화]과 영화[실화에 근거한]가 있었던 것은 오늘에서야 비교적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가19살에 혈기왕성한 미국청년으로서 이태리 군대의 위생병, ambulance driver로 참전한 경험은 나중에 그가 쓴 각종  베스트셀러 걸작 소설의 배경이 되는데, 특히 그가 사랑에 빠져서 결혼까지 하기로 했던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또 다른 미국출신 7년 연상의 간호원 Agnes는 위에 말한 영화의 여자 주인공의 model이 된다. ‘무기여 잘 있거라’ 같은 소설과는 달리 실제의 이 연애 스토리는 전쟁이 끝난 후 서로 헤어지는 이야기로 끝이 난다. 그가 나중에 노벨상을 받게 되는 세계적 문인이 되지 않았다면 이런 전쟁중의 사랑이야기는 유명한 것은 고사하고 진부하고 흔한 이야기 중의 하나였을 것인데, 헤밍웨이와 Agnes의 운명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평범한’ 사랑이야기는 1960년 이후에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해서 1990년대에는 책과, Chris O’Donnell, Sandra Bullock 주연의 영화, “In Love and War“로 알려지기도 했다.

헤밍웨이의 운명, 아니 행운은 1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 연합군 측으로 참전한 이태리에 외인부대 위생장교로 참전한 것으로, 그것은 그의 일생을 좌우하는 사건이었다.  위에 말한 Agnes라는 연상의 여인과 흠뻑 사랑에 빠진 것, 그 젊은 나이의 열정은 짐작하고도 남는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탁월한 문필가 자질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이태리 무대가 모든 베스트셀러, 노벨상 등으로 이어지는 행운이 따르지 않았을까? 그 이후에도 그는 각종 분쟁, 전쟁지역을 돌아다니며 ‘아마도’ 이태리 때의 사랑의 경험을 다시 찾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1차대전 말 이태리의 Alps campaign의 시작..

FredericCatherine의 우연한 첫 만남

알프스 산맥 정상으로 쳐들어오는 독일군을 향해 올라가는 이태리 군인들

독일군 spy로 오인되어 총살 위기에 몰린 Frederic 

구사일생으로 위기모면 후 중립 스위스로 탈출하는…

스위스 동네 경찰이 이민관 역할을.. 여권은 검사하지만 속 뜻은…

Catherine은 출산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결국 그는 전쟁과 사랑의 비극을 몸소 안은 채…

Ernest Hemingway

 

Shadowlands, Miracle of Medjugorje

어제 밤에 ‘연속상영’으로 보게 된 Narnia의 저자,  C.S. Lewis의 1993년 자전적 drama film1, Shadowlands 로 나는 인간에 대한 조그만 희망이 되살아남을 느꼈다. 순수하고 지성적, 고전적 사랑의 위력! 영화의 주인공 Jack Lewis는 비록 견디기 어려운 간병과 사별의 고통을 겪었지만 그것이 보여준 진정한 사랑, 그것도 세속적으로 비쳐진 인간상과 영성적, 내면적인 모습이 100% 일치했던 C. S. “Jack” Lewis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교훈이고 모습이었다. 늦은 감은 있지만 그런 것을 배우고, 실천하고 남기고 싶다. 신앙적으로 언행이 일치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인간상, 요즈음에 흔치 않은 것이다.

Joy[Debra Winger]의 불치병이 밝혀진 후 결혼식을 결심하는 Jack[Anthony Hopkins]

아내의 임종을 함께…

 

 

오늘 아침부터는 역시 전에 보았던 또 다른 인간상, ‘메주고리예의 Artie Boyle 기적’,  A Time for Miracles을 다시 보고 있다. 이 ‘영화’는 2000년대 초 성모발현지 메주고리예 에서 일어난 실화의 documentary film이다.  주인공인 Artie[Arthur], 전통적 ‘준 냉담적’인 가톨릭 집안의 가장으로 폐종양으로 위기를 맞는다.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서 친구의 권유로 3명이 메주고리예를 찾고, 십자가 정상에서 기적적, 순간적인 치유를 받는 것, 현재까지 아무런 후유증이나 재발이 없는 전형적인 기적체험을 한 것이다. 나에게는 희망의 자극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도전적 시기를 가고 있기에 이 이야기는 아주 timing이 좋다. 기적, 그것도 초자연적인 기적의 이야기와 증언이 나에게 크게 도움이 된다. 이것도 공동체에서 멀어지지 않으려는 나의 노력의 하나라고 본다. 나는 현재 그렇게 ‘심각한 도전’을 겪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Medjugorje 에서 친구들과 함께, 가운데가 Artie

The Cross Mountain

위의 두 가지 ‘시각적 활동’의 도움으로 놀랍게도 안정감을 되 찾으며,  내친 김에 순교자 성당 ‘본당 봉사자를 위한 영적독서회’를 염두에 두며 ‘신비스런’ 요한복음을 읽게 되었다. 몇 년 전에 Holy Family 성당에서 거주사제였던 ‘젊지만 중후한’ 멋진 아틀란타 대교구 소속 법관 신부님 Fr. Dan Ketter가 열심히 권해주었던 주해 신약성경까지 동원해서 드디어 요한복음을 정성스레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 몇 가지 ‘간단한’ 선택으로 최소한 오늘 하루는 평화의 기쁨을 맛보다니… 정말 간단한 선택이었는데…  부수입으로 어제부터 아팠던 허리의 통증까지 조금은 나아가는 듯 느껴지고…

 

며칠 째 계속 먹었던 ‘쌀밥, vegetable stir-fry 아침’, 조금 지겹다는 불평이 들리는 듯. 오늘은 일상적인 ‘양식’ 아침메뉴로 돌아왔다. 역시 아무리 맛이 있어도 계속 먹으면 별 수가 없는가…  별볼일 없게 보이던 이 ‘양식’ 이 이렇게 새로운 맛인지는…

 

 

1월 중순 쯤이 되면 kitchen TV에는 반드시 이런 멋진 모습의 ambient music 이 Youtube screen에 뜬다. 크리스마스 이후에는 눈 내리는 설경이 창 밖으로 보이는 coffee shop, 이런 것들이 있어서 고민이 있는 하루도 그렇게 괴롭지만은 아닌 걸 거다, 그래… 몸 대신 마음이라도 이런 곳에 갔다고 상상하는 것도 한겨울의 별미다. 비록 작은 화면이라도 상관없다. 머리 속의 화면만 충분히 크다면

어제 아침부터 등쪽 허리부분이 아파오던 것이 점점 아파지기 시작해서 오늘 아침에는 일어나는 것조차 힘이 든다. 이것 또 며칠을 갈 것인가 은근히 걱정이 된다. 어깻죽지 부분이 아니고 허리아랫부분인 것은 나에게는 아주 드문 것인데, 허리를 구부리는 것이 때에 따라서 비명을 지를 정도로 아프니… 이것이 연숙이 주로 아픈 부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것의 특징은 산보를 해도 별 효과가 없는 것이고, 유일한 처방은 허리를 안 구부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비교적 빨리 허리가 아픈 것이 조금 나아지고 있지만 이번에는 연숙에게 감기가 찾아오는 듯싶다. 혹시… 하지만 설마… 그래 오늘 저녁과 내일까지 조금 편하게 쉬면 이런 ‘노인성 불편함’일지도 모르는 것들 현명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내일까지 천천히 쉬고 나면 나의 생일이니… 그날 미역국을 제대로 즐기려면 내일까지 연숙이 나아야 할 터인데… 웃긴다, 미역국 때문에 빨리 완쾌가 되라고… 나도 지독한 인간인가?

 

  1. Youtube에서 볼 수 있음.

Back When We Were…

어제 저녁부터 오랜만에 보기 시작한 DVD 중, Back When We Were Grownups, 예전에 느낀 감정들이 그대로 완전히 살아나온다. 오늘 아침에도 이어서 repeat mode로 아예 계속 보이도록 열어놓았다. 이제야 이 Hallmark movie의 원래 소설 저자, Ann Tyler 에 대한 것도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Wikipedia의 혜택이 없었지만 지금은 문제가 없으니, 또 세월이 흘렀나…

당시 이 영화의 자세한 plot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대강 이야기의 의도는 짐작을 하였다.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으며 살고 싶은  것이 인생이지만 가끔 의도와는 정 반대의 생을 살 수도 있고, 그 안에서 최선을 하는 것도 다른 모습의 인생이라는 사실. 하지만 이 줄거리의 매력적인 50대초 여성[Ann Blyth]의 취향은 나를 철저히 실망시키는 것이어서 영화 뒤의 뒤끝 맛은 언제나 나를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 그 생각이 오늘 다시 보며 그대로 살아나온다. 결국은 그 동안 [지난 영화 이후] 나는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된다.

이 주인공이 정말 좋아하는 남성상은 한마디로, ‘유머러스하고, 웃으며, 항상 움직이지만 심각한 생각은 별로 없는 듯한’ 그런 type이 아닐까? 생의 의미와 깊이 보다는 현상적, 즉흥적인 행복을 찾는 스타일… 나의 type은 절대로 아니다. 그녀는 후자 type의 첫 사랑[Peter Fonda]을 버리고 전자 type을 찾았지만, 그는 이미 아이들이 주렁주렁 딸린 이혼 남,  결국 결혼을 했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곧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이후에 ‘시집의 대 가족’과 함께 열심히 살다가 다시 재회한 첫 남자, 옛 추억의 환상은 있었지만 이미 굳어져버린 인생관은 다시 이별로 끝난다는. ..  내가 주인공이었다면 두말 않고 첫사랑과 재결합을 하지 않았을까?  첫 남자의 type이 그렇게 싫었을까? 그 type이 나와 비슷하다고 하면 나는 더욱 우울해진다.

Blythe Danner as Rebecca, Peter Fonda as Will (her old sweatheart)

 

얼마 전에 발견하고 걷기 시작한 집 근처의 apartment nature trail에서 이 지역의 가을철 명소인  Amicalola Fall (in North Georgia mountain)  과 비슷한 stair structure를 보고 이곳을 Amicalola junior(or baby)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곳은 trail 자체도 멋질 뿐 아니라 급경사로 이어지는 계단은 운동하는 데에도 알맞은 곳이 되었다. 오늘도 둘이서 그곳을 걸었다. 이제는 동네 산책 시간도 따라서 45분 가량으로 늘어나서 아주 적당한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Kitchen range (fan) hood 설치, 교체 작업이 끝나면서 hood 위의 공간이 아주 눈에 거슬리게 되었다. 보통은 그 부분에는 small cabinet이 있는데 우리 집에는 원래부터 그것이 없었던 것, 이제는 조금은 자연스러운 미화 작업을 필요했다. 암만 생각해도 FAUX cabinet door가 제일 어울리는 곳이지만 어떻게 문짝만 달아놓을 것인가? 문짝만 따로 살 수도 있지만 그런 것에 비용이 드는 것은 질색이다. 골치를 쓰고 있는데 하늘이 도와서 마침 안 쓰고 버려둔 furniture에 크기가 거의 맞는 cabinet doors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거의 기적적인 일이었다. 그것도 이미 white paint가 되어 있었으니 이것은 우연인지. 그것을 오늘 마침내 설치를 하였다. 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것, 그야말로 faux cabinet door 덕택이었다.

 

32살에 세상을 떠난다면? 32살에 대한 감각이 희미해졌다. 32살은 몇 년생인가? 1989년 생, 나라니보다 무려 4살 밑이 아닌가? 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젊디 젊은 성당 교우[박영찬 베드로, Johns Creek 구역] 의 연도, 장례미사 공지가 오늘 우리에게 왔다. 너무나 사연이 궁금하던 차에 다행히도 프카 자매가 소식을 주었다. 자매님의 둘째 아들과 축구로 아는 사이였다고… 놀라운 사실은 갑자기 세상을 뜬 사연이다. 배가 아프다며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음날 아침에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우선 놀랍고 슬픈 비보다. 그 부모는 지금 어떤 심경일까? 상상 조차 하기 힘들다. 화요일에 연도와 장례미사가 있다니 그날 가보면 조금 사정을 알게 되겠지..

 

DVD Movies, The Great Work

모처럼 DVD 시절의 classic movie들을 3편1이나 보았다.  거의 20년 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았던 것들 DVD disc들…  이제 DVD player도 옛 것이 되어서 아예 ripped format으로 digitized가 되어 모조리 home server에서 stream format으로 볼 수 있어서 편하긴 하지만 역시 DVD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DVD disc를 들고 player에 손으로 넣어서 보던 것, 모든 가족들이 모여서 glass tube TV로 보던 그 시절들이…

 

Thomas Berry Writing essay의 마지막 부분에 도달한 것, 감회가 새롭다. 오늘 내로 이 전체 course가 끝이 나면, 정리를 하고 싶다. 어떻게 정리, 아직은 idea가 없다. Capra의 사상과 조금 대비하며 공부하는 것도 흥미로운 도전이 아닐까?

결국 코스의 마지막을 넘어서 course survey로 끝맺음을 하였다. 비록 청강하는 것이었지만 중요한 essay와 video는 모두 읽고 보고 공부한 셈이다. 마지막 결론 부분의 video는 The Great Work에 연관된 실제적 결과인 UN 주도하의 Climate Change Conference, Paris Agreement같은 것이 언급되어서 요새 진행 중인 Glasgow COP26 Conference에 더욱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오랜만에 로난이 왔다. 그 동안 크지는 않은 듯하지만 분명히 무엇이 변했을 것이다. 오늘 Atlanta Braves가 World Series에서 우승을 해서 많은 학교가 holiday가 되었다며 따라서 daycare center까지 놀게 되었다고, 웃긴다. 그래서 나라니가 별 수가 없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 되었다. 그래~ 어쩔 것이냐, 이것도 한 때일 것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밖에 없으니…  개인 날씨덕분에 녀석을 데리고 동네를 천천히 걸었다. 나무들은 완전히 깊은 가을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1. To Dance with the White Dog, Back When We Were Grownups, 12 O’Clock High

Busy Twelve Days of …

¶  성탄 12일: 성탄을 기다리는 동안 느끼는 포근함과 설렘의 느낌들이 막상 성탄 season 을 맞으면 약간 피곤함이 느껴지는 바쁨을 느끼는 우리 집 yearly routine을 맞이한다. 오랜 만에 모이는 4명의 가족들이 ‘너무나 자주 만나게 되는 stress’를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머리들이 클 대로 커버린 2딸들과 debating, arguing (even fighting) 하는 것도 피곤하고, 그저 늘어지고 편해야만 할 듯한 때,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집을 들락 날락 하는 것, seventy years의 여파인지 귀찮지 않을 수가 없다. 그저.. 나의 천국인 ‘connected desk’ 에 앉아, 편히 쉬고 싶다라는 ‘Screwtape Letters (Screwtape & Wormwood)’ 의 대화만 나의 귀에 속삭인다. 하지만, 하지만 나도 smarter해 져서 절대로 그런 유혹에 질 수가 없다. 오늘 할 것은 오늘, 지금, 아니 더 빨리 하고.. ‘나에게 내일 아침이 없을 수도 있다’, ‘가슴 속 저~ 깊은 곳에 진리가 있다’ 라는 근래 나의 좌우명을 잊지 말자.

2017년 성탄절 12일은 새로니 생일인 1월 5일까지이며 (이 사실은 절대로 안 변함), 교회 전례력으로 성탄 시기는 1월 8일 ‘주님 세례축일”에 (이것은 매년 조금씩 변함) 끝난다. 그러니까 1월 9일부터 Ordinary Time 연중시기가 시작된다. 휴~~ 이제 모든 것이 끝났구나.. 하지만 2월이 되면 전례력의 절정인 부활절을 향한 long march, lent 사순절이 시작되고..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 역정이었다. 이렇게 일년마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이런 전례 시기, 지금 생각해보면 흥미롭기도 하고, 오랜 세월 이 전례력의 의미조차 잊고 살았다. 지금이라도 깨닫고, 의미를 두며 살게 된 것은 한마디로 은총이다.

올해의 성탄12일 전후를 나는 어떻게 보냈는가.. good, bad & ugly 골고루 있었겠지만 그래도 GOOD 부터 시작하고 싶다…

 

GOOD #1: Mother Nature!

성탄, 연말, 연시.. 이런 때의 날씨는 나의 psyche 에 꽤 큰 영향을 미친다. 다른 말로, 이 때는 cold & nasty한 것이 ‘정상’이라고 믿기에 더욱 그렇다. 이번 season이 바로 right on! Average보다 밑도는 추운 날씨의 연속..  하지만 nasty하지는 않아서 drive하는 데는 no problem! 자주 볼 수 없었던 coat, overcoat, sweater, muffler가 모조리 선을 보인 perfect season이 되었다.

GOOD #2: Family Mass, 3-2-1 Happy New Year!

최근 들어서 ‘가족’이 함께하는 곳에는 ‘절대로’ 빠지지 말자.. 라는 결심에 알맞게 노력을 한 것, 조금은 결실이 보이는지.. 만족스러운 표정들을 느낀다. 나도 좋고 그들도 좋고.. 이것이야 말로 perfect win-win이 아닐까? Organized religion이 귀찮다는 아이들, 이것도 ‘유행’이 되었나..  이번에도 without fail.. 둘이서 Champaign toasting Time Square 3-2-1로 New Year를 맞이 했다. 나는 밤 10시면 꼭 잠을 들기에.. 이렇게 밤 늦게 눈을 뜨고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일 수 있지만 가끔 이런 예외도 알고 보면 보람 있는 것이었다.

GOOD #3(or BAD?): 새로니가 35번째 생일을 맞았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생일을 맞는다는 것은 사실 축복이요 은총이다. 외식을 즐기던 ‘아이’가 언젠가 부터는 우리 집에서 ‘미역국’ 포함한 한식으로 생일을 맞고 있고 엄마도 기꺼이 수고를 한다. 35년이란 세월은.. 사실 미혼임을 알면 ‘우아~ ‘ 할만 하지만 다른 쪽을 생각하면 변한 세상, post-modern culture 의 trend에 입을 다물 수가 없다. 한 세대가 지나면서.. 이런 변화를 바로 우리 집 식구에서 보게 된 것.. 한마디로 mixed feeling일 수 밖에. 35살이면 새로니가 태어날 때 나의 나이가 아닌가? Natural Law란 것을 생각하면…

BAD #1: Freak Accident! 새해 들어서 반갑지 않은 손님, (small) freak accident는 예기치 않는 것 (하기야 accident란 것은 그런 것이지만) 하도 기가 막혀서 생각하기도, 쓰기도 싫지만 분명히 꿈이 아닌 현실이기에 기록에 남길 수밖에 없다. Handyman 기술 영역에 속하는 fixing garage door, 약해진 spring을 replace하려다가 나는 과히 높지 않은 step ladder에서 떨어지고 door와 wall사이에 pin-down (actually hung) 되어서 최악의 사태는.. 상상하기도 싫은 그런 사고를 당한 새해 벽두.. 100% 나의 실수로 생긴 것이니 100% 반성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UGLY #1: Limping Group: 내 시간과 노력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레지오 마리애 단원 활동임을 부인할 수 없고 나는 이것이 제일 ‘자랑스러운’ 나의 일부라고 자부하고 살았다. 그것이 2017년 일 년 동안 ‘치명적, 비극적’인 상처를 연속으로 받았고 아직도 나는 ‘anger, rage‘의 단계를 못 벗어나고 있다. 내가 ‘살아있는 인간들 (2명의 출발해서 지금은 4명으로 증가)’을 ‘죽이고 싶다’는 상상을 그렇게 오래, 심하게 했던 기억이 없었다. 그것이 ‘아직도’ 성탄과 새해를 넘어서면서도 조금도 차이가 없다. 이것은 정말 perfectly ugly, uglier, ugliest 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 (small) group을 다시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가.. 그것이 2018년 내가 생각해야 할 최대의 과제가 되었다.

 

¶  Christmas Hallmark Movies: 올해 크리스마스 시즌도 예외 없이 ‘건강하고 건전한’, ‘가급적 의미와 message가 있는’ 영화를 ‘집에서’ 보게 되었다. Merry Christmas란 말조차 ‘인정없이 내 쫓는 인간들’도 이런 영화는 큰 무리, 생각 없이 즐기는 모양인지 Youtube에 가보면 Hallmark moves들이 적지 않게 모습을 보인다. 누가 이런 것들을 upload하는 것인지, 고맙기만 하다. 분명히 이들은 집에서 TV (cable, streaming)로 record를 해서 upload하는 수고를 하는 것인데.. 나에게는 그야말로 ‘God bless them all!’.  올해는 본 것 중에 두 가지를 기억에 남기기로 했다. 최소한 3번 이상 보았던 것, Christmas Solo,  Sound of Christmas 가 그것이다.

 

Christmas Solo: 어느 작은 고장에 사는 single dad, single mom과 그들의 두 teenager딸들이 그 지역 크리스마스 festival의 singing solo 에 뽑히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십대 특유의 갈등, 특히 ‘이혼한 가정’의 십대가 겪는 고민을 크리스마스 spirit으로 승화시키는 그야말로 멋진 classic, common sense finale 의 영화였다. 이 십대들의 고민과 우정이 그녀들 보호자들의 사랑과 이해에 융합이 되는 모습들은 한마디로 성탄절의 의미를 보여주는 영화였다.

Sound of Christmas: 작년 이맘때 보았던 Hallmark 다른 영화, The Twelve Trees of Christmas에 출연했던 2명의 main actor들이 다른 역할로 나온 이 영화는 작년 것과 거의 비슷한 plot과 background를 가지고 있다. 비슷한 plot: 작년 것은 New York city의 전통적인 도서관이 없어지는 것을 ‘영웅적’인 여성의 노력으로 save한 것, 올해의 것은 역시 유서 깊은 음악학원을, 역시 용감한 여성의 노력으로 부동산 업자로 부터 구하는 내용이다. community의 전통적인 유산을 급변하는 상업적이거나 이기적인 단체로부터 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탄의 정신이었다. 여기 출연한 두 main character들, 연기도 좋았고, 아주 깨끗한 인상의 배우들이었다. 내년에도 이 두 사람이 출연하는 Hallmark Christmas movie가 미리 기다려진다.

Monster Wang

 

Monster Wang, 괴물 왕? 괴물의 왕, King of Monster란 뜻인가? 여기서는 그것이 아니고 1967년 서울에 등장한 괴물, ‘왕마귀’ 를 뜻한다. 이것은 1967년 여름에 개봉된 대한민국에서 처음 나오기 시작한 SF (Science Fiction) 영화 중의 하나고 아마도 최초일 가능성도 높다.

1967년이기에 이 blog post는 Category: memoir 에 해당이 될 듯 싶지만 사실은 daybook쪽에 가까울 정도로 나의 현재 느낌이 더 반영된 것이다.

당시 이 ‘웃기는’ 영화의 제목은 ‘우주괴인 왕마귀‘였다. 왕+마귀: 마귀의 왕이란 뜻인 모양이다. 그 정도로 이 마귀는 악질 중의 악질이 모양인가? 하기야 당시의 우주괴인 宇宙怪人 들이 성질이 온순한 놈을 없었을 것이다. 대도시에 나타나 모조리 파괴하고 나중에는 인간의 영웅들에 의해 쓰러지는 그런 것이다.

1967년 여름이니까, 연세대학에 복학하기 전 무렵이다. 당시 TV를 보던 중에 game show같은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 이 영화에 출연한 cast들이 모두 나와서 ‘청백팀’ 정도로 game을 했었는데 그때야 나는 이런 ‘웃기는’영화가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웃긴다는 뜻은 그 당시 미국영화에 길들여진 우리들에게 이런 C-class의 장남감 영화가 통할 리가 없고, 그저 유치한 저질 comedy급으로 여겨진 것이다.

cast중에 유일하게 기억나는 사람이 아역으로 나온 ‘전상철‘이었다. 이것 정말 의아한 노릇이다. 왜 50년 전의 그 TV에 나온 ‘전상철’을 기억하는 것인지… 나도 모른다. 그가 나와서 말한 내용도 기억에 남는 듯 하니.. 기억력이란 것은 참으로 신비한 것인가…

내가 본 영화도 아니고 이렇게 50년 전 서울에서 TV에 나온 영화의 cast들을 잠깐 본 이영화가 오늘의 Daybook에 소개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전에 겪었던 어떤 웃기지도 않은 해괴한 사건 때문이다 이 해괴한 사건의 주범, 주연을 100% 연상시키는 것이 바로 이 ‘우주괴인 왕마귀’인 것이고 우리는 그 사건 이후부터 그 인간을 ‘왕마귀’라고 별명을 붙여버렸다. 왜 이 왕마귀와 그 주범이 연결이 되는지는 차마 이곳에서도 밝힐 수가 없다. 아마도 그 인간이 죽기 전이라도 이 blog을 본다면 알아차릴 수 있을까.. 하지만 회의적이다. 이런 monster급 인간들이 우리의 아주 가까운 주변에 하나 둘 씩 등장하는 걸 보니.. 우리도 오래 살았구나 하는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잊고 싶다, 왕마귀의 추억을..

 

‘Shane’ day

¶  Shane! Today becomes a Shane day. 추억의 서부영화 Shane, Alan Ladd (당시 우리들은 ‘아란 라뜨 라고 불렀다) 주연의 1953년 George Stevens의 Paramount classic western movie  주인공 이름이 바로 Shane 이다.  지난 밤에 예상했던 대로, 오늘 아침에 몸과 마음이 편치 않다는 애매모호한 이유를 내 세워, 5년 역사를 자랑하는 평일미사는 물론 근래 보기 드물게  아침식사까지 거르고, 모처럼 남아도는 아침 시간을 어떻게 ‘처리할 줄’ 몰라서 desk주위를 모처럼 자세히 살펴보니 저쪽에 SHANE이란 VHS TAPE cover에 쓰여진 빨간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별 생각 없이 그것을 old video-tape player에 넣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았다. 나의 영웅, Shane이 ‘피도 눈물도 없는 비겁한 완전 순 악당 무리’를 모조리 ‘쏘아 죽인 후’ 영화가 끝나며 역시 잔잔한 감동에 휩싸인다. 역시, 역시.. 진리는 이긴다, 하느님은 선이 악을 이기도록 이끄신다…

 

Shane, videotape cover art

이 명화는 어렸을 때 (중학교 1학년이었나..) 가족이 서울 중앙극장에 가서 보았는데, 그 당시 느낌은 다른 서부영화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인데, 왜 그런 인상을 받았을까.. 아마도 ‘Alan Ladd 아란 라뜨’의 인상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는 암만 보아도 그렇게 총을 잘 쏘거나 주먹싸움을 잘 하게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체격도 비교적 왜소한 편이고 얼굴은 여자처럼 곱게 생겼다.

그런 그가 우락부락한 놈들과 주먹싸움을 해서 모두 때려 눕히는 것은 물론 ‘총 싸움’도 거짓말처럼 놀랍게 잘했으니..  지금 가지고 있는 VHS tape은 1990년대에 산 것이고 우리 가족이 모두 보기도 했지만 내가 느꼈던 ‘감동’이 그들에게는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주 원인은 역시 ‘주먹싸움’ 정도가 당시 기준으로 보아도 조금 ‘잔인’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이렇게 다른 것인가.

며칠 전 본 Gary CooperHigh Noon, 2년 후에 나온 이 영화를 보며 나는 나 자신 깊숙한 곳에서 아직까지 ‘이글거리는 분노‘를 삭히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아주 큰 효과는 없는 듯 하다. 그저 이것을 보는 시간 동안만은 그런대로 그 이글거리는 분노를 잠시 잊는 것 뿐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이렇게 내가 오랜 기간 동안 한 ‘악’의 인간(a.k.a. 레지오 미친년)을 증오한 적이 있었을까… 그런 것, 기억에 별로 없는 것 같다. 내가 현재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대리적 복수’로 나의 분노를 삭히며 시간을 보내는 것 뿐이다. 별로 내가 할 수 있는 option이 거의 없는 듯한 것.. 그것이 나를 괴롭힌다.

 

¶  Surviving Tuesday: Crisis Mode를 가동한 우리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 ‘비상사태 선언’ 이후 첫 정규 주 회합을 가졌다. ‘미친X 난동사건’의 여파는 하루 아침에 existential crisis로 이어졌지만 우리를 이끄시는 commander 성모님의 도움으로 다시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One day at a time의 정신으로 우리의 모든 energy를 모으기로 한 자세가 단원들의 얼굴과 행동에 뚜렷하게 보인다. 그 ‘미친X’은 현재도 뒤에서 5살 정도(Trump와 비슷한가) 수준의 그야말로 유치한 장난을 하는 모양인데… 참, 정말 70평생 이렇게 악랄하고, 유치한 모습은 처음 보니까.. 정말 할 말을 잊는다. 나는 결단코 이 인간을 ‘절대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다짐하고 다짐한다. 이것이 내가 성모님께 드리는 선물이기도 하다.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 총사령관, 성모님

 

현재 제일 심각한 것은, ‘실존적 위기’를 느낀다는 사실이다. 나의 존재가 밑바닥부터 흔들리는 느낌, 처음 경험하는 것이다. 나를 7년 이상 ‘진리의 바다’로 이끌어 주던 ‘레지오의 조직’, 그렇게 의지하던 ‘성모님의 인도’ 이런 것에서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에게 실존적 위기인 것이다. 하느님의 현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요사이, 정말 깜깜한 어두운 밤의 연속이다. 빛의 터널 저쪽이 안 보인다. 과연 언제까지.. 이런 모든 실존적 위기를 느끼게 한 장본인은 한마디로 ‘악의 표본’인데, 나를 하느님, 성모님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멀게 하는 것은 분명히 성서적인 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과는 사실 뻔한 것이다. 기다리자, 기다리자, 그리고 기다리자..

 

¶  New Office/Library: 지난 7월 말에 시작된 나의 home office/library의 ‘대 이동’의 첫 단계가 끝이 났다. Furniture를 위시한 stuff들이 겨우 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왜 한달 이상이 걸렸는가 하면, 물건 자체보다는 내가 적응하는데 아직도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2층에 있었던 것이 1층, 그것도 옛날 가족의 보금자리였던 family ‘gathering’ room으로 왔으니 나의 습관상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전에는 office와 small lab desk가 한 곳에 있어서 편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분산이 되었다. 2층 전 office 가 lab space전용으로 바꿀 예정이기 때문이다.  각종 hardware junk들이 그곳에 남게 되는데, 사실 공간은 넓어져도 사용하기에는 불편할 것이다. 이것 역시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다른 관심사는, 1층으로 내려온 office가 겨울에는 역시 2층보다 추울 것이라는 것, 이것은 겪어 보아야만 알 듯하다. 정 불편할 정도로 추우면 이번에는 아낌없이 central heating을 가동할 것이다. 이제 얼마나 오래 산다고 그렇게 $$$을 아끼며 춥게, 덥게 살 것인가… 조금은 더 편하게 살고 싶다.

 

 

Late present, High Noon Lesson

¶  Late Birthday Present: 며칠 전 연숙의 private room office renovation: 즉 painting & flooring 이 다 끝났다. 이것은 사실 몇 달 전에 65세 생일선물로 그녀의 보금자리인 ‘집무실’ 방을 새로 꾸며 주자는 말에서 시작이 되었다. 그것이 우리 집, This Old House, 2층의 모든 방을 새로 바꾸는 것으로 커져서 올해 우리 집 최대의 변화를 주는 것으로 남게 되었다.

모든 labor는 나의 mere body에서 나오는 것이라 돈으로 따지면 사실 ‘재료 비용 expense’만 들면 되지만 70에 가까운 나에게는 사실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job이었다. Muscle, tool 과 skill이 필요한 것은 큰 문제가 없는데 문제는 전보다 굳어진 backbone과 minor hemorrhoid 가 걱정거리였다.

 

 

Flooring job은 특히 lower body에 가해지는 stress가 보통이 아닌 것이다. 하루 일하고 나면 그 다음날은 대부분 쉬어야 할 정도였다. 이럴 때는 일하는 속도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생일인 9월 1일이 아닌 지금에야 끝을 낼 수 있었다. 늦어진 또 다른 이유는 위에 말한 ‘레지오 미친X’ 사건으로 조금 신경을 곤두세운 것인데 사실은 그것은 생각보다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미친 x’이라고 무시하였기 때문에 금새 정상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원래 있던 carpet위에 있는 big furniture들은 사실 위치를 바꾸는 것이 너무나 힘든데 지금의 hardwood(laminate) floor에서는 어린 아이들도 쉽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쉽다. 매끄럽고 차가운 바닥에서 갈팡질팡하는 Tobey를 위해서도 area rug을 빨리 놓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아마도’ 이 집에서 이사를 나갈 때까지는 다시 이런 힘든 일은 다시 없으리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  High Noon’s Lesson: High Noon, Gary Cooper, Grace Kelly, Do not forsake me, oh my darling… Frankie Lane과 비슷한 목소리, Tex Ritter의 bass theme song 이 귀에 쟁쟁하게 들린다. 그렇게 유명했던 50년대(정확히 1952년경) 미국 서부영화의 ‘정수, essence’,  나는 너무 어려서 서울에서 그것을 못 보고 후에 미국에 와서야 TV에서나 볼 수 있었다. 이것이야 말로 글자 그대로, glorious black-and-white, 정말 멋진 흑백영화, Gary CooperGrace Kelly..의 실감나는 연기, 또한 ‘인생에 교훈을 주는’  story line도 멋지고 ‘전통적인 서부영화 backdrop scenery가 거의 없는 영상’도 멋지고 출연 배우들의 모습과 연기들 모조리 기가 막히게 좋았던 그 추억의 영화가 얼마 전 갑자기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나에게 다가왔다.

이 영화에서 Gary Cooper 의 character는 small town marshal,  Mr. Will Kane 인데 이야기의 요점은 이것이다. ‘나에게 갑자기 다가온 위협, 공갈, 협박으로부터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도망가지 마라!’ 이런 것이 아닐까? ‘평화주의자 pacifist, Quaker교도’ 인 약혼자 Amy (Grace Kelly)는 결사적으로 ‘폭력을 피하고자’ town으로부터 도망가자고 주장한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혼자서라도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걸고 ‘괴물 monster’들과 맞서야 하는 것과, ‘좋은 것이 좋고’, 약혼자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도망’을 가야 하는 것.. 이 두 극단의 선택에서 결국 Gary Cooper Will Kane은  목숨을 걸고 monster들과 정면대결하며, 또한 보안관의 의무를 지키고자, 도망가는 것을 포기하는… 이때에 그는 주변에 도움을 청하지만 한 사람도 돕지를 않고 숨어버린다.

 

 

Do not forsake me, My Darling. (High Noon)

 

물론 이런 이야기는 비록 fictional 한 것이지만 우리의 기나긴 인생역정, 또한 매일매일의 일상생활에서도 겪을 수 있는 것이다. 나도 이런 선택의 순간을 최근 며칠 동안 내 눈과 코앞에서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나는 본래 nonviolence 그리고 영화의 Amy, Grace Kelly처럼 trouble이 있으면 피하는 것이 상책.. trouble에 개입이 되면 시간 낭비.. 라는 생각으로 오래 살아왔고 나중에 그런 나의 runaway, inaction에  따른 값비싼 대가 代價 를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도 놀랄 정도로 나는 바뀌어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 정면대결을 하고 그것도 수단과 방법을 다 쓰더라도 이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뀐 것이다. 여기서 지면 후에 아무런 내 삶과 신앙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까운 예로, 얼마 전 일어난 ‘불상사’ (a.k.a 레지오 미친X 난동사건)는 하나의 wakeup call이 되었고, 내 자신에게 엄청난 변화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 정도로 그 사건은 나의 모든 ‘기본적 믿음’을 뒤 흔들어 놓는 ‘더러운 사건’이 된 것이다. ‘신앙적인 악의 실존’을 절대로 실감하고 목격하게 된 것이다. 이 ‘악’과 대결하는 것을 피하는 것은 신앙적으로도 죄와 패배가 됨을 절실히 느꼈다. 특히 그 미친x monster가 범했던 ‘악행’은  accidental, stupid mistake가 아니고 premeditated, intentional 한 것이라는 사실을 100% 확신 했기에 나의 생각은 돌이킬 수 없게, 더욱 굳어진 것이다.

이 ‘더러운 사건’ 이후 모이는 첫 레지오 주회합에는 ‘예상대로’ High Noon처럼 모든 towns’ people (a.k.a 레지오 단원)들은 도망가 버렸고 town marshal인 연숙은 Will Kane처럼 ‘홀로’ 그곳엘 갔고, 즉시 나는 일생일대의 후회를 하게 되었다. 물론 그들은 미친x monster의 ‘썩은 가오‘가 보기 싫어서 그랬을 것이고, 이것이 바로 나의 High Noon moment였구나 하는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그렇게 High Noon 영화의 도망가 숨어버린 towns’ people처럼 비겁한 남자였나..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의 High Noon을 신앙적인 각도로 극복하게 되었고 이제는 후회가 없다. 진정한 악은 ‘나의 악’으로 무찌를 것이다. 그 미친x 불쌍한 영혼을 위해서도 이런 방법을 써야 하는 것이 조금 비참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내가 시작 일이 아니고 그 미친x의 악에서 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High Noon같은 위기에 그 동안 주위에 있던 ‘친구’들은 과연 어떤 모습을 보였나? 예수가 끌려갈 때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 비겁하게 모두 도망 갔던 것처럼, 몇몇 예외를 빼고,  나머지는 모두  ‘비겁하게 포기하며 사라지는’ 모습들… 흙탕물이 튀길까 봐 하루 아침에 겁쟁이가 된 모습들이었다. 진정한 ‘레지오 soldier’들의 모습은 그들에게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일생 일대의 실망감을 금할 길이 없다. 자기의 안전과 체면에만 급급 하는 그 모습들.. 성모님이 뒤에서 보고 계신다면…

내가 사랑하는 성모님의 군대, 자비의 모후에서 나를 멀어지게 하는 것은 100% 분명한 사탄의 짓이다. 그런 사탄은 overwhelming action으로 철저히 제거되어야 한다. 현재 활발히 진행중인 이 미친x  사탄에 대한 ‘뒷조사  background check‘는 계속되고 있고 불원간 세상에 알려지게 될 것이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사실만 보고도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할 지경이다. 어떻게 이런 인간이.. 버젓이..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어떻게 우리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성모님, 당신의 사랑하는 자비의 모후를 도와주세요.. 부탁합니다!

 

deep November, film noir time..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기다리고기다리’) 11월 그것도 중순을 지나가는 그야말로 ‘멋져야 할’ 깊어가는 가을, deep November 가 되었다. 하지만, 올 가을의 최고의 놀라움,  big surprise는 ‘가을비 우산 속’ moment가 ‘전혀’ 없었다는 비극적인 사실이다. 최근의 기억 속에 이렇게 ‘맑은 하늘의 연속’은 처음인 듯 하다. 간단히 말해서 ‘지독한 가뭄’인 것이다. 그렇게 가을 비가 잦았던 지난 해들이 기억에서 희미해지고 숫제 ‘비가 올 때의 느낌’까지 잊어버릴 정도다. 마지막으로 비가 온 것이 그러니까.. 9월 중순 경.. 와.. 2개월 이상 한번도 비는커녕 흐린 날도 별로 없었으니.. 기록적인 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한 여름에 그래도 곧 다가올 ‘가을 비’만 연상해도 기분이 좋아지곤 했었고 romantic 한 기분까지 예상을 했었는데.

지나간 몇 년간 unthinkable becomes realities.. 경험을 꽤 했고 그런 것을 경험하는 이유 중에는 나의 나이 탓도 있으리라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살고 있기에 이런 ‘희귀한 일들’을 경험한다는 것이 조금은 납득이 가지를 않고 조금은 겁이 나는 것을 숨길 수가 없다. Eschatology (종말론) 를 들먹이지 않고 싶지만, 꽤 많은 ‘이성적인 사람들’도 이런 것을 언급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조금 누그러진 기분이 되었지만 Park(GH) & Trump shock는  이 ‘연속적 종말론’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게 되었다. 이제는 다 끝난 것인가? Impact는 완화되고 있지만 여파는 아마도 아마도 생각보다 오래 갈 것이다. Praying Rosary가 더욱 더 필요한 ‘더러운 세상’을 살고 있는 나, 우리들.. 풍요로운 시대를 사는 것인지, 지나간 ‘good ole days’가 다 지나가고 있는 것인지..

오랜 동안 기침감기로 고생을 하던 연숙, 이제 ‘지독한 기침’은 거의 끝났다고 생각되지만.. 정말 이렇게 오래 가는 것 처음이 아니었을까? 아이들이 flu shot을 맞으라고 그렇게 보챘지만 우리는 그 shot의 효과를 기본적으로 과신하지 않기에 거절했지만 혹시 그것을 맞았으면 덜 고생을 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이럴 때 우연히 ‘재발견’ 한 것, 바로 film noir.. 1940년 후반부터 1950년 후반까지 미국 영화계를 주름잡던 B급 영화들.. 오래 전 누나와 서울에서 AFKN을 통해서 보았던 미국영화들.. 대부분이 이 class에 속한다. 한마디로 극장까지 가서 볼 만한 영화는 아니고, 비 오는 음산한 날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서 ‘조그만 흑백 TV’로 보는 것이 제격인 ‘유치찬란’한 영화들이다. 그것들을 YouTube에서 ‘왕창’ 발견한 것이다. 올해 11월에는 이것들이나 왕창 copy해서 두고두고 볼까나.. 하는 한심한 생각이 든다.

 

동심초 同心草, 표류도 漂流島

영화 동심초 신문광고, 1959년 7월 22일자 동아일보

영화 동심초 신문광고, 1959년 7월 22일자 동아일보

 

며칠 전 오랜만에 열어본  KoreanFilm@youtube 에서 머리를 띵~ 하게 만든 영화 제목을 보게 되었다. 다름이 아닌 1959년 멜로드라마 최은희, 김진규 주연 신상옥 감독 영화 ‘동심초 同心草’ 였다. 이 동심초 영화는 당시 대한민국의 유일한 ‘라디오’ 방송 KBS의 ‘초 인기’ 일요 드라마 (당시에는 ‘방송극’이라고 했던) 를 영화화한 것이고, 당시에 어린 나도 ‘누나, 아줌마들’ 옆에 끼어서 같이 들을 정도로 대단한 인기 방송으로 기억을 한다.

그 당시 국민학교(서울 재동 齋洞) 6학년이었던 내가 그런 ‘어른들’ 순정드라마를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당시 자세한 내용은 잘 몰랐지만 항상 흘러나오던 주제곡만은 녹음기처럼 기억을 한다. 당시 최고 인기가수 권혜경씨가 불렀던 그 주제곡이 나는  원로 김성태씨의 가곡인 것을 잘 몰랐다. 아니.. 지금까지도 그 곡이 오래 전부터  있었던 가곡인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니까.. 가곡이 먼저인가, 주제곡이 먼저인가.. 나의 무식의 소치였던 것이다.

이 영화를 거의 surreal한 기분으로 보는 느낌은.. 1959년 당시의 대한민국, 특히 서울을 감싸고 있던 ‘공기, 분위기’ 같은 것이 ‘어른들의 사랑’보다 더 관심이 갔다. 그 당시의 분위기, 공기는.. 어떤 것들일까?

 

당시에 TV가 없었던 때, 유일한 것이 그저 ‘듣기만 하는 라디오’.. 가 전부였다. ‘책보다 읽기 쉬운’ 라디오는 서울에서는 거의 모든 가정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그곳에서 ‘정기적’으로 듣게 되는 ‘드라마’는 참 매력적인 연예 프로그램이었기에 어린 우리들까지 ‘꼽사리’를 끼어서 듣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대부분 여자들 (누나들, 식모 누나들, 아줌마들이 거의 전부) 틈에 끼어서 들었던 기억이 너무나 즐겁기만 했다. 기억나는 것들.. ‘산 너머 바다 건너’, ‘청실 홍실’, ‘동심초’, ‘현해탄은 알고 있다’,  기독교 방송국의 ‘수정탑’, 그 후에 ‘현해탄은 알고 있다’, ‘장희빈’ 등등.. 이 당시의 성우들은 당시 영화배우에 버금가는 최고의 연예인, idol, celebrity에 속했다.

나의 1950년대 향수 nostalgia를 너무나도 자극하는 이런 오래 된 영화들을 다시 보게 된다는 사실 자체에 나는 전율을 할 정도다. 비록 동심초 영화는 처음 보는 것이고, 그 내용의 ‘순진함, 단순함’에 코웃음이 나오지만.. 그것은 내가 인생을 그만큼 오래 살아서 그럴 것이다. 1959년, 내가 재동국민학교 6학년 시절.. 박양신 담임선생의 ‘입시지옥’ 열차를 한창 타며 고생하던 시절이다. 4.19혁명을 향한 이승만 대통령의 최후의 정권유지 안간 힘을 쓰던 시절이었다.

 

이 영화와 비슷한 시대적 배경을 가진 다른 영화 ‘표류도’, 이 영화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근래에 인터넷으로 여러 번 본 기억으로 이제는 친숙하게 느껴진다. 당시의 신문을 보면 역시 1960년 12월 25일 성탄절 때 을지로 국도극장에서 개봉된 영화광고를 볼 수 있었다. 시대적으로 ‘표류도’는 4.19학생 혁명 후, 5.16 군사혁명 전 장면 내각시절인 1960년 말에 나온 것으로 동심초와 거의 비슷한 때에 나온 것이지만 동심초 처럼 라디오 방송 드라마에 근거한 것이 아닌 ‘박경리’ 여사의 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 다르다고 할까.. 아니면 이것도 방송극으로 먼저 소개가 된 것이었을까.. 확실할 것은 나도 모른다.

 

영화 표류도 신문광고, 1960년 12월 25일자 동아일보

영화 표류도 신문광고, 1960년 12월 25일자 동아일보

나에게 이 두 영화가 일깨워 준 사실은, 그 동안 잊고 살아온 자질구레한 시대적 역사보다 더 의미가 있었던 것도 있었다. 당시, 육이오 전쟁이 휴전으로 끝났던 사회적인 배경으로 이 두 영화의 ‘주인공’들, 특히 여성 protagonist들의 모습들이다. 동심초의 최은희, 표류도의 문정숙 씨들이 연기한 그 주인공들의 처지나 배경들은 모두 대학출신의 고등교육을 받은 인텔리 여성들로서, 거의 완전히 나의 어머니의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이 두 영화를 나는 더 자세히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쟁 미망인.. 당시 전쟁으로 남편을 잃었던 여인들이 불리던 이름이었다. 대부분 군인으로 전사를 했던 case였지만 그 이외의 case도 부지기수.. 우리 어머님의 case는 남편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그러니까 납북(당시에는 납치라고 했다) 된 어처구니 없는 시대였다. 대부분 어린 아이들이 있었던 그 여인들.. 전쟁으로 황폐된 땅에서 어떤 도움을 정부로부터 기대를 하겠는가? 친척들의 도움이 아니면 길거리로 나가서 돈을 벌어야 했을 것이다. 영화 동심초에서 최은희, 표류도의 문정숙 모두 그래도 버젓이 자기집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가정을 떠나 살벌한 사회에 뛰어들었던 것인데.. 우리 집의 경우, 그것은 사치였다고 할까.. 자기 집이 없었기에 어린 남매를 데리고 셋집을 전전해야 했던 어머니.. 얼마나 고난의 세월을 보내셨을까?

거의 모든 것을 가장, 남편에게 의지했던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다 전쟁 후의 파탄 직전의 경제 상황.. 그런 것들을 느끼기에 너무나 어렸던 나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피부로 조금 실감하게 되었다. 지금은 ‘상상’으로나마 나의 것으로 실감할 수 있다. 동심초의 주인공 최은희는 경제적 해결을 위하여 양장점을 경영하다가 실패로 빚을 지고 결국은 집까지 팔고 시골의 집으로 내려간다. 그 과정에서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김진규와 사랑을 하는 사이가 되지만 그것조차 미망인과 총각 사이가 주는 사회적인 파장 때문에 실패를 한다. 영화 표류도에서는, 법적인 결혼 전에 아기를 낳고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후, ‘용감하게’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어 다방을 경영하는 고급 인텔리 여성 문정숙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생아라는 낙인이 찍힌 딸 전영선을 데리고 ‘철 없는’ 어머니를 모신 ‘가장’이 된 문정숙, 물장수를 한다고 멸시를 주는 대학동창생들.. 그녀를 동정하다가 사랑하게 되는 동창생 남편 김진규, 당시의 사회적 윤리 도덕을 느끼며 망설이다가 우발적으로 살인을 해서 감옥엘 가고, 병보석으로 출감 후에 기적적으로 김진규와 결혼, 낙도에서 일생처음으로 행복을 맛 보지만.. 병의 악화로 세상을 떠난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이야기.. 나에게는 하나도 낯 설지 않게 느껴지는 이야기들이다.

 

이 두 영화의 공통점 중에 하나는, 자식이 있는 여자가 혼자 살기가 쉽지 않고, 가장 家長 그러니까 남자주인인 남편이 가정에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경제적인 이유가 제일 크지만 그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회적인 여건도 남자 주인이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혼자 된 여자가 다시 남편을 만다 산다는 것은 힘들고 모험이기도 했다. 우리 집의 경우, 어머니가 경제활동을 하셔서 우리 가정을 지켰지만 그 30대 초의 꽃다운 나이에 ‘청혼’이 없었을까? 우리들이 너무 어려서 실감은 못했지만, 재혼의 유혹은 항상 있었을 것이고, 그 중에 한 가지의 ‘일’은 내가 어른이 된 나중에야 다시 깨달은 것도 있었다. 영달이 아저씨.. 경주출신으로 학교 선생님이었던,  잘 생겼던 아저씨였는데, 몇 번인가 우리 집에 그 아저씨의 친구와 같이 ‘초대’된 것을 기억한다. 어떻게 알게 된 아저씨인지 밝힐 수는 없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도 재혼까지 생각이 된 관계는 아니었을까.. 훗날 어머니는 ‘우리남매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하신 말씀을 남기셨다. 당시의 사회적, 윤리적인 상황이 그랬다. 아마도 그때 다른 쪽으로 ‘재가’를 하셨다면 나와 우리 누나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곡선을 탔을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 이후 반세기가 훨씬 넘어가는 지금은 어떤가? 가련한 남편들이 늘어가는 요즈음, 가련한 여인들이 등장하는 이런 이야기는 분명히 ‘고전 중의 고전’으로 그야말로 ‘옛 이야기’일 것이고 나 자신도 그 중에 하나.. 도대체 이 세상은 어떻게, 어데 까지 변할 것인가?

 


영화 동심초, 1959년  

6ㆍ25때 남편을 여읜지 8년. 이숙희(최은희)는 양장점을 하다가 빚을 지고, 출판사 전무 김상규(김진규)가 빚 청산을 도와주면서 둘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상규는 사장 딸 옥주(도금봉)과 약혼한 사이고 누이(주증녀)는 그의 출세를 위해 이 결혼을 서두른다. 숙희의 장성한 딸 경희(엄앵란)는 어머니의 행복을 위해 상규와의 재가를 권유하지만, 숙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관습과 윤리적 도덕관 때문에 갈등한다. 숙희와 상규는 진실로 사랑하지만, 숙희는 헤어지는 길을 택하고 서울 집을 팔아 고향으로 떠난다. 몸 져 누워있던 상규는 이 소식을 듣고 서울역으로 나가 이 여사가 탄 기차를 바라보며 괴로워한다. 

 


영화 표류도 1960년  

사생아인 딸(전영선)과 어머니(황정순)를 부양하며 살고 있는 여인 강현희(문정숙)는 `마돈나’라는 다방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현희는 생활고에 시달리지만 자존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그녀가 사생아를 낳고 다방을 경영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그녀를 무시하려 한다. 강현희는 손님 중의 한 명인 신문사 논설위원 이상현(김진규)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는 그녀의 대학동창과 결혼한 몸이다. 한편 `마돈나’의 단골손님인 젊은 시인 민우(최무룡)는 현희를 좋아하지만 현희가 받아주지 않자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린다. 민우를 좋아하는 다방종업원 광희(엄앵란)는 민우와 하룻밤을 지내고 민우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자 절망하여 현희의 도움도 거절하며 거리에서 몸을 팔다가 정신을 잃고 자살한다.

현희는 사랑과 윤리 사이에서 고민하면서도 상현과의 사랑을 키워나간다. 그러나 상현이 출장 차 미국으로 떠난 어느 날, 손님 중의 한 명인 통역자 최영철(허장강)이 외국인에게 자신을 팔아 넘기는 대화를 듣고 분노하여 우발적으로 화병을 던져 영철을 죽인다. 감옥에 수감되어 병을 앓던 현희는 병 보석으로 풀려나 상현과 함께 외딴 섬으로 내려가 살게 되지만 행복한 시간도 잠시, 병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팔도 사나이’와 원서동 ‘사이다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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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월 21일자 동아일보

얼마 전에 정말로 우연히 1969년 (국산)영화 ‘팔도八道 사나이‘란 것을 YouTube에서 download해서 보았다. 그 당시 1960년대 말, 유행하던 영화, 가요 등에 ‘팔도’란 단어가 붙은 것이 많았다. 팔도란 대한민국 행정구역의 8도를 말하고, 그저 ‘우리나라 전역’을 뜻했을 것이다. 그것의 선두주자가 ‘팔도강산‘이란 영화, 그리고 같은 이름의 주제가였다. 한창 서구, 특히 미국의 유행음악, pop song, pop culture에  심취해 있던 대학생 시절  ‘촌스럽게만’ 느껴지던 그런 영화를 보았을 리가 없었지만 세간에서 많이 유행하던 것들이고 그 주제가를 당시 최고가수 최희준씨가 ‘덩실거리며’ 불러서 기억에는 또렷이 남았다. 다른 쪽으로는 유행어 ‘팔도의 원조’ 팔도강산은 사실 당시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해외수출정책, 외화, 국민소득증대정책 등과 묘하게 엮이기도 했다.

 그런 ‘팔도’란 말이 거의 유행어처럼 다른 영화에도 붙어서 1 나오고 했는데 이 ‘팔도 사나이’도 그 중에 하나였을 것이라 짐작이 갔다.  하지만 정작 이 영화를 보니.. 나의 빠른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팔도 사나이의 팔도는 팔도강산의 팔도와 배경과 의미가 100% 달랐기 때문이다. 당시 액션영화에서 잘나가던 장동휘씨와 새로 나온 신선한 모습의 윤정희, 그리고 조금은 중견배우의 무게가 실려있는 태현실이 등장하며,  ‘싸움질 하는 영화의 고정 급’들이 모조리 출연한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의협심,애국심 있는 깡패들 이야기’영화라고나 할까..

1969년 영화지만 영화 줄거리의 배경은 일제시대(허.. 요새는 점잖게 ‘일제 강점기’라고 하던가..), 고아출신의 싸움 잘하는 소년이 서울 중심가 거리에서 일본 야쿠자, 고등계 형사들과 맞서서 싸운다는 이야기.. 그러고 보니 어디서 많이 듣던 익숙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 이것은 거의 분명히 항일투사 김좌진의 아들, 반공깡패 김두한의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다.  활동무대 중에는 내가 국민학교 시절 많이 갔던, 극장 우미관도 나온다. 그러고 보니, 1980년대의 영화 <장군의 아들2> 도 김두한의 이야기였다. 그러니 아마도 이 <팔도 사나이>는 전설적 ‘정치, 반공깡패’ 김두한 영화의 원조가 될지도 모른다.

 영화자체는 1960년대 말, 대한민국 영화의 수준을 보여주는 정도라고 생각 되었다. 장동휘의 연기도 평균수준.. 조금은 김빠지는 인상도 받았고, 윤정희의 연기도 별로 크게 뛰어나지 않았다. TV 쪽으로 많이 얼굴이 보이던 오지명, 그는 원래부터 액션물에 맞아서 그런지 의협심 있는 깡패 역에 잘 어울렸다. 하지만 일본 깡패들로 등장한 황해, 허장강.. 너무나 맡았던 역과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들의 익숙한 역과 맞지 않아서였을까? 오히려 100% 악역 전문인 ‘장혁’은 오히려 일본 헌병 역에 잘도 어울렸다.

하지만 이영화가 나를 정말로 놀라게 했던 이유는 내 추억의 황금기였던 서기 1969년의 영화라는 사실 보다 이 영화 첫 장면이 찍힌  location에 있었다. 처음 이 영화를 보는 순간, 거의 순간적으로 나는 이 첫 장면이 찍힌 곳을 알게 되었다. 마치 10여 년 전에 TV 드라마 <겨울연가>를 보았을 때, 나의 모교 중앙고교의 웅장한 campus를 순간적으로 알아 보았던 것처럼 이것도 마찬가지다. 그 장면이 찍힌 곳은 나의 어린 시절의 꿈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원서동 이었다. 내가 8살 때부터 10살 때까지 살았던 곳이 이 장면에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나의 가슴을 울렸던 것은 그 오래된 추억만이 아니었다. 그곳 그곳에 나의 집이 없었던 사실이 나를 울리게 한 것이다.

 그 한길에서 장동휘가 싸우던 그 ‘넓은’ 길 그 자리에 바로 우리 집이 있었다. 바른쪽 비원 담 옆에 도열한 집들을 따라 원서동 개천이 흐르고 그 개천과 왼쪽에 있는 집들 사이에 우리 집이 있었다. 이 우리 집은 내가 국민학교(재동) 2학년 이후부터 4학년 1학기까지 살았던 우리가족 3식구가 살았던 유일한 단독 주택이었다. 나의 추측에 아주 헐값으로 그 단독주택을 사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집에는 사연이 있었는데, 그 집은 흔한 말로 ‘도시계획’3에 의해서 나중에 ‘철거’가 되어야 하는 운명에 있었던 것이다. 어머님이 어떤 재주로 그 집을 사셨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셋집이 아닌 우리 집이라는 사실 하나로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 이후로는 세운상가 아파트를 사기 전까지 우리는 전세로 남의 집에 살았다. 이 집에서의 추억은 참으로 거의 사진처럼 선명하다. 개천 옆이라 밖에 나가면 모두 여름 겨울 모두 우리의 놀이터가 기다리고 있었고, 이곳에서 원서동의 죽마고우들이 나에게 많이 생기기도 했다. 승철이네 집, 명성이, 동만이, 창희, 용현이.. 꿈에도 잊지 못할 죽마고우들을 다 이곳에 살 때 만난 것이다.

바른 쪽 전주(그 당시에는 전보산대라고 불렀다) 에 거의 붙어 있는 집이 나의 잊지 못할 죽마고우 박창희, 손용현이 살던 집이었다(창희야, 용현아, 너희가 살던 집이 영화에 나왔다!). 그러니까..그들의 집은 1969년 당시까지 ‘건재’했던 것이다. 또 그 옆쪽으로 초가집도 보인다. 내가 살 당시만 해도 원서동에는 초가집이 참 많았고 1969년까지 그렇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이렇게 ‘복개공사’가 된 원서동을 1967년 경에 마지막으로 보았고 그 뒤에는 꿈에서나 보게 된다. 나의 집이 없어졌다는 사실은 그러니까 나는 이미 알고 있지만, 꿈 속에는 그대로 남아있다. 왼쪽에 무슨 ‘공장’처럼 생긴 건축물이 바로 우리가 어렸을 때 ‘사이다 공장’으로 불리던 곳인데.. 정말 1969년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바로 집 옆에 있던 그곳 공터에서 많이 놀았다. 특히 그곳에 있던 ‘열린 계단’은 내가 ‘낙하산 실험’을 하며 놀던 곳이다. 높은 곳에 오를 길이 없어서 낙하산을 만들어 던질 곳이 없었던 차에 그 열린 계단은 안성맞춤이었다. 그때가 아마 1955~1956년경 이었을까.. 참 오래 전의 모습들이다. 지금 이곳도 ‘상전벽해’가 되었을까? 하지만 걱정은 없다. 나의 머리 속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의문이 남는다. 그 당시 우리들은 ‘공장’을 사이다 공장이라고 불렀는데.. 과연 그곳은 사이다를 제조하던 곳이었을까? 원서동의 역사를 잘 아시는 분들, 향토역사가들 고수들은 아마도 아실지도 모를 일이다.

 

행인들이 지나가는 길 바로 옆의 집이 '창희와 용현이'가 살던 집이었다.

행인들이 지나가는 사진 정 가운데의 집이 ‘창희와 용현이’가 살던 집이었다.

이 모습은 우리집 자리에서 보이는 사이다 공장의 입구의 모습이기도 했다.

이 모습은 우리집 자리에서 보이는 사이다 공장의 입구의 모습이기도 했다.

바른쪽 장동휘씨가 서있는 그 자리에 바로 우리집이 있었고 그 옆으로 원서동 개천이 있었다.

바른쪽 장동휘씨가 서있는 그 자리에 바로 우리집이 있었고 그 옆으로 원서동 개천이 있었다.

사이다 공장 뒤로 '낙하산' 돌계단이 선명히 보인다

사이다 공장 안쪽 사람들이 모인 고 왼쪽 옆으로 ‘낙하산’ 돌계단이 선명히 보인다

원서동 사이다 공장.. 나의 기억 속의 모습도 이 모습이었다.

원서동 사이다 공장.. 나의 기억 속의 모습도 이 모습이었다.


 

1969년 영화 <팔도 사나이>

  1. 예를 들면 ‘팔도 며느리
  2. 이 <장군의 아들>을 만든 개XX는 완전히 X-rated 를 능가하는 섹스 scene을 겁도 없이 보여주었다. 이 미친 ‘제작, 감독’ XX들은 자기 가족, 아이들과 같이 그 영화를 볼 생각을 했을까?
  3. 간단히 말하면 원서동 개천을 복개공사를 하며 개천 ‘위’에 걸쳐진 모든 집을 철거하는 것.

First of May, 오발탄, 5.16 박정희 소장

¶  First of May  뚜루루.. 뚜루루.. 뚜루루루 루루루루.. 아련히 Bee Gee’s의 애수 어린듯한 멜로디가 귀를 울린다. 5월 1일이라는 제목의 이 First of May oldie는 내가 제일 사랑하는 oldie중의 하나다. 왜 이 ‘명곡’의 제목이 5월 1일인지는 가사를 아무리 읽어도 확실치 않지만 분명한 것은 어린, 소싯적의 꿈과 우정이 세월의 여파에도 빛난다는 것으로 나는 ‘아전인수 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하며 산다는 사실이다.

When I was small, and Christmas trees were tall,
we used to love while others used to play.
Don’t ask me why, but time has passed us by,
some one else moved in from far away.

Now we are tall, and Christmas trees are small,
and you don’t ask the time of day.
But you and I, our love will never die,
but guess we’ll cry come first of May.
The apple tree that grew for you and me,
I watched the apples falling one by one.
And I recall the moment of them all,
the day I kissed your cheek and you were mine.

Now we are tall, and Christmas trees are small,
and you don’t ask the time of day.
But you and I, our love will never die,
but guess we’ll cry come first of May.

When I was small, and Christmas trees were tall,
do do do do do do do do do…
Don’t ask me why, but time has passed us by,
some one else moved in from far away.

 

20대 비교적 짧은 시기의 청춘 때 만들었던 작은 우정의 친구들, 청운의 꿈을 안고 헤어졌지만 언제고 다시 어디에선가 만날 수 있으리라는 꿈도 있었다. 특히 이맘때면 창희와 용현이를 곁들여 생각한다. 식구보다 더 가까웠던 죽마고우 친구들.. 순진했던 꿈은 삶의 세파에 시달리고 거의 잊고 살기도 했지만 사실은 뇌리의 깊은 곳에 그 녀석들은 언제나 생생하게 남아서 나를 반기었다.
특히 그 녀석들과 Bee Gee’s 의 이 명곡을 듣던 때 1970년과 불도저의 소음으로 요란했던 서울 거리를 회상한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 속에서도 우리는 우정에 대한 희망은 잊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했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우리의 조국, 우리는 운명을 믿지 않을 정도로 젊었었지만 떠날 수 밖에 없었지..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었을까? 친구여.. 잘들 살게.. 1977, 1988, 1999년을 모두 놓치고, 21세기부터는 해가 가는 것을 포기했지 않은가? 잘들 살게.. 어데서고 언제나 언제나..

 

 창희야, 용현아 그립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 오발탄, 전후 문학, 소설가 이범선 작가의 1950년대 소설작품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은 적이 없었다. 그 당시면 나는 중학교 1학년 정도의 코흘리개로 만화 라이파이에 더 어울릴 나이었기 때문이다. 그 작품이 그래도 그 당시 나의 귀에 익은 것은 역시 같은 제목의 영화 때문이었다. 극장 포스터에도 보이고 신문광고에도 보여서 더 그랬을 것이고.. 무언가 ‘문제 영화’임도 짐작을 하였다. 간단한 역사극이나 순정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 그 당시 사회상을 ‘적나라’ 하게 ‘고발’ 했던 수준 높은 작품이었다.그것을 반세기가 지난 지금 70mm 대형 극장 스크린이 아닌 23″ computer monitor로 보고 있는데 1960대 초 기억에도 생생한 서울의 풍경들이 ‘여과’없이 찍혔던 이 영화를 이렇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작은 기적에 속한다. 분실되었던 original film이었지만 미국 San Francisco영화제에 출품을 했던 덕분에 그곳에서 다시 찾았다고 처음 화면에 나온다. 그때 출품을 안 했었으면 이것은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특히 5월이 코앞에 다가옴과 곁들여서 5.16 혁명 주체 ‘박정희 소장‘이 생각난다. 한마디로 그가 제시하는 5.16 혁명의 명분이 이 영화 오발탄에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시 1960년대 초의 분위기를 충실히 화면에 담은 이 영화는 몇 번을 보아도 ‘수준작’이다. 김진규, 최무룡의 연기도 아주 실감이 간다. 비록 중산층이 거의 없던 그 시절이었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중산층같이 살려고 발버둥치지만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다.

고지식하고 도덕적인 자세로 세파를 헤치려는 김진규와 그런 형이 답답하기만 한 동생 최무룡.. 이들은 기본적으로 착하고 도덕적이지만 그들이 몸담은 ‘서울거리’는 그들을 지옥같이 느끼게 한다. 최무룡이 못 참고 최후 수단을 쓴 것은 결국 ‘오발탄’이 되어 형을 더욱 곤경으로 빠져들게 하고.. ‘가자 가자..’ 를 외치는 정신이상의 어머니, 영양실조 상태로 난산하는 아내 문정숙은 허무하게 죽어가고.. 이것이 그 당시 1960년대 초 서울 장안에서 볼 수 있는 장면들이었다.

이런 모든 비극의 기본 뿌리는 역시 6.25를 겪은 후 썩은 ‘민간’ 정권 하에서 계속되는 ‘절대로’ 희망 없는 경제사정에 있었다. 한마디로.. 돈과 희망이 없었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굶주린 배를 해결하기 전에 의미 있는 민주주의는 무의미하다. 우선 배고픈 것을 해결하자.. 아마도 이것이 박정희 소장의 간단한 혁명 논리였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 충분히 공감을 할 수 있다. 최소한 나는..

 

빨간 마후라 red scarf

1964년 4월 8일자 동아일보 영화 광고
1964년 4월 8일자 동아일보 영화 광고

얼마 전 역시 우연히.. stumbled upon.. ‘재수 좋게’ 이 영화를 정확히 거의 50년 만에 다시 보게 되었다. 이 영화는 1964년 봄에 개봉된 신상옥 감독, 신필름 제작의 전쟁영화로 당시에 장안의 화제를 상당히 끌었고, 흥행도 대 성공이었던 것도 기억을 한다. cast도 당시 최고의 인기 배우들이 등장을 했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전투기, 거의 모두 F-86 Sabre jetfighter 가 대거 등장을 했고 지금 다시 보아도 ‘우습지 않게 보이는’ 정도로 당시로서는 상당한 촬영 기술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혹시 이것도 ‘한국 영상원’ 어쩌구 하는 곳에서 ‘올려 놓은’ 것인가 했지만 정말 다행히도 ‘표준 youtube video protocol’ video여서 부지런히 ‘download’ 를 해 두었다. 이제는 ‘안심하고’ 언제든지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good news였는데 bad news는..  막상 보게 되니.. video quality가 ‘엉망’이었다. 그러니까 VHS video tape보다도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영화 첫 부분에 그 이유에 대한 ‘양해’ 메시지가 나온다. 이것도 역시 빨갱이 탓이었던가.. 신상옥씨가 강제 납북되면서 자신 소장의 original들이 모두 없어졌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 의문은.. 신씨가 납북되면서 왜 그가 만든 영화들을 가지고 갔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발적으로 북을 간 것인가? 좌우지간 여기에 보이는 영화의 video는 영화를 상영하면서 video camera로 찍은 것이 분명했다.

이런 사연을 알고 보니 더욱 이 video가 값지게 느껴졌다. 아차..하면 이것도 못 보고 죽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가끔 이 영화가 생각나곤 하고.. 그 당시 보았던 영화의 장면, 줄거리 등을 머리를 짜내며 생각하기도 했다. 몇 장면과 대사는 아직도 기억을 한다. 또한 당시 인기 4중창단 불루벨즈 가 불렀던 주제곡은 이 영화의 전체적 분위기와 참 잘 어울렸고 또 영화와 별도로 인기곡으로 남게 되었는데.. 사실 그것이 전부였다.

이 영화는 1964년 봄에 개봉이 되었고 상당한 인기였지만 당시 중앙 고교 2학년 생이었던 나는 그렇게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 나이에는 ‘외국영화, 미국영화’가 아니면 모두 ‘촌스럽게’ 느껴지고, 사실이 그랬다. 그 정도로 국산영화의 질은 한마디로 저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빨간 마후라‘ (당시 마후라 란 말은 가벼운 느낌의 목도리란 뜻으로 거의 표준어처럼 쓰였는데 알고 보니 muffler의 순 일본식 발음이었다) 는 조금 달랐다. 우선 당시 우리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박택규 화학 선생님이 이것을 보고 와서 아주 인상적으로 ‘선전’을 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를 보게 된 이유가 됐다.

그 박택규 선생님은 화학을 ‘대학 교수’ 스타일로 ‘강의’하시던 독특한 선생님으로 역시 수년 후에 대학교로 ‘영전’이 되시어 가시기도 했다. 그 선생님은 우리들을 마치 친구처럼 생각할 정도로 화학 과목 이외의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시고 자신이 본 영화 같은 것도 감상을 나누곤 했다. 당시 입시위주의 분위기에서 그런 선생님은 참 드문 case였다. 그 선생님이 알려 준 이 영화 장면들 중에서 ‘최무룡’ 이 수송기에 의해서 ‘기적적으로’ 구출 되는 것.. 그것은 아직도 나의 머리 속에 남아있다.

나중에 직접 이 영화를 보고 느낀 것 중에는 한마디로 모조리 멋진 사나이들.. jetfighter pilot들의 ‘여성 편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이었는데.. 이런 사실은 아마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마찬 가지인 모양으로 1980년대 미국 영화 Top Gun을 보아도 거의 비슷한 것이다. 여자들이 그 조종사들을 그렇게 멋지게 본다는 사실이 미국 영화보다 우리가 훨씬 앞서 이 빨간 마후라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신영균, 최은희, 최무룡.. 이 세 최고 배우가 주름잡는 이 영화는 6.25 전쟁 당시 강릉 공군기지를 무대로 펼쳐지는데 나도 당시의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강릉 공군기지는 나에게도 친숙한 이름이었고 그곳에서 ‘뜨는’ 공군 조종사들을 내가 9살 쯤인가 원서동 살 당시에 가까이 보기도 했다. 물론 그 조종사도 ‘여자’와의 관계로 더욱 우리에게 알려진 case라서 내가 갖는 이들의 playboy인상은 이 영화에서 재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100% 확실한 기억 속의 장면 중에는 최은희가 고급 술집에서 hostess로 아주 취한 상태로 ‘쉬~ 하러 간다’는 말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당시 고2의 나이에 이것은 아직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erotic하게 들렸다. 또한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나고 그룹의 조종사들과 여자들이 모조리 good night ladies’ kiss를 같이 하다가 비행단 최고 상관인 ‘박암’이 자동차 headlight를 키며 노려 보자, 신영균이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이노무 새끼..’ 하며 다가가는 장면.. 50년이 되었지만 생생한 기억들이다.

당시 F-86 조종사들은 아마도 군인들 중에서 최고 ‘엘리트’ 급에 속했을 듯 하다. 왜냐하면 영어에 능통을 해야 미군들에 의해서 훈련을 받는데다가 비행기를 이해할 정도면 rocket scientist는 아니더라도 대학졸업 정도는 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군인들 중에서는 최고의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물론 신영균, 최무룡 급의 미남들을 아니었어도 그것이 큰 문제가 되겠는가.. 하늘을 나르며 조국의 지킨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멋진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을 것 같다. 최소한 그 당시 이 영화를 본 나의 나이 또래는 그렇게 느꼈을 것 같다.

이 영화를 다시 본 느낌은.. 다 좋은데.. 끝 부분이 전체적인 ‘멋진 인상’을 구겨놓았다는 아쉬움이랄까.. 멋진 외국영화를 보다가 불현듯 ‘촌스러운’ 국산영화의 느낌으로 끝을 낸 것이다. 그 장면은 ‘한국적 정서’를 나타내려고 한 듯이 ‘죽은 신영균의 어머니, 한은진’ 이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불현듯 나타난 것인데.. 글쎄, 각본 때문에겠지만 이 장면으로 완전히 ‘멋진 꿈에서’ 깨어난 듯 느껴진다.

 

 영화 빨간 마후라, 1964

 

 

半島の春, 반도의 봄

1941년 영화 '반도의 봄'
1941년 영화 ‘반도의 봄’

얼마 전에 근래 자주 찾아가는 인터넷 ‘한국영상자료원‘에 새로 ‘올라’ 온 옛 영화1가 나의 눈길을 끌었다. 이것이야말로 옛 것 중의 옛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김진규, 문정숙, 최은희, 신영균, 신성일, 엄앵란 등이 주름을 잡았던 신상옥 전성시절 60년대 중반의 차원을 완전히 뛰어넘는 것, 바로 1941년 영화,반도의 봄, 半島の春2 이였고, 여기의 반도는 지리적 반도, peninsula가 아니고 일본이 조선을 칭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완전히’ 일제시대 (요새는 일제 강점기라고 하던가..)에 나온 것.. 그러니까 공식적으로는 일본영화가 아니던가. 물론 ‘조선인’들이 만든 영화니까 일본영화는 절대로 아니다. 영화의 기법, 영상, 배우 등을 보면 사실 내가 보았던 50년대 초의 영화3와 별 차이가 없지만 나에게는 특별히 커다란 감정의 물결로 다가왔다.

나는 일제시대를 겪지 못했지만 나의 부모님 세대는 그 속에서 태어나고 교육을 받고, 결혼을 했었기에 그 시대의 영향을 우리도 간접적으로 ‘고스란히’ 받았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고, 그 ‘숨기고 싶은’ 영향의 원류가 과연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 당시 사회상은 교과서에조차 묘사가 된 것이 없고4, 영화는 커녕 가족 몇 명을 제외한 흑백사진 조차 본 적이 없었기에5

사실 나에게 그 당시는 완전히 ‘미지’의 세계였다. 일제시대에 조선에서 어떠한 ‘말’을 쓰며 살았는지, 그러니까 우리 말과 일본어 등이 어떻게 섞여서 쓰였는지 나는 궁금했는데 이 영화를 보고 조금 이해가 갔다. 일본어를 쓰는 대목에서는 한글 자막이 없었고, 우리말이 나오면 일본어 자막이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역시 그 당시의 공식언어가 일본어 였었다는 것을 이것으로 실감을 하게 된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그런 것을 물어보면 별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는데, 그런 혼합 언어 정책이 그런대로 큰 무리가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영화를 자세히 보면 어떤 부분에서 일본어를 쓰고 어떤 부분에서 우리말을 썼는지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영화의 캐스트나 스탭 진들의 이름을 보면 대부분이 우리 이름이고 간혹 일본 이름이 보이는데, 그것은 1941년 때만 해도 창씨개명6 이 널리 퍼지지 않아서 그랬는지 궁금하다.

3.1운동, 유관순 같은 애국지사에게 행한, 잔학했었다는 일제시대에 대한 ‘일방적인’ 교육을 받고 자랐기에 어렸을 적에는 빨갱이 이상으로 ‘죽음을 불사한 학대’를 ‘매일’ 받았던 것으로 생각을 했다. 나이가 들면서 그것 역시 이승만의 일방적인 반일교육의 결과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 것을 고스란히 경험을 한 어머님께 물어보면, 아주 다른 반응을 보곤 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는 표정이었던 것이다.

그런 각도로 이 영화를 보면 우리의 반일교육이 완전히 일방적이었음을 알게 되는데, 춘향전 영화 같은 ‘민족적’인 영화를 찍는 조선인들의 사랑 이야기가 이 영화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1941년이면 일본제국이 한창 진주만을 습격, 미국에 도전을 하던 살기등등하던 시절인데, 춘향전과 연애를 하는 ‘조센징’ 영화를 찍게 허가를 하였을까..

이 영화에서 일제시대의 다방과 서울의 풍경들이 나오는데,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 부모님들이 어떻게 데이트를 하고, 결혼을 하고 했을 까 조금은 궁금증도 풀리는 듯 했다. 그러니까 백문이 불여일견, 이렇게 보니까 이해가 가는 것이다. 게다가 이 영화를 보면 ‘목포의 눈물‘ 이 아코디언 연주로 구성지게 흘러 나온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한 서린’ 노래도 자유롭게 부르고 듣고 했던 시절이 아니던가?

1930~40년대의 미국영화와 이 영화를 비교해도 사실 기법이나 연기 등이 큰 차이가 없이 보였다. 아마도 그 당시 일본의 영화 수준이 이 정도였을 것이라 추측도 한다. 비록 해방 후, 6.25 동란으로 우리 영화가 타격을 받았을 지라고 그때의 수준이 있었기에 곧 바로 60년대의 영화 전성기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 마지막 장면이 ‘성공을 위해서’ 동경유학을 떠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해방 후 영화에서는 ‘성공을 위해서’ 미국유학을 떠나는 것을 바뀐 것.. 참 시대와 역사의 요술이 아닐까?

 

 spring-peninsular-2서울역, 서울은 케이죠, 경성으로 불리지만 그래도 한글로 쓰였다

 

spring-peninsular-6이 귀여운 여자가 50년대 영화에 많이 출연한 친근한 ‘할머니 배우’ 복혜숙씨였다.

 

spring-peninsular-11이것을 보면 일제시대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 그때도 이런 멋쟁이가 있었구나..

 

spring-peninsular-4너무나 익숙한 50~60년대의 가정집 마당을 연상케 한다

 

spring-peninsular-5학생이 살던 방, 이것도 너무나 친숙한 광경이다

 

spring-peninsular-8영화 속의 영화, 춘향전.. 태극이 선명하고 춘향이도 예쁘다.

 

spring-peninsular-7경양식점, 이런 류의 ‘양식’은 아마도 일본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spring-peninsular-10아저씨와 어르신, 대청마루에 앉은 모습도 전혀 낯설지 않다.

 

spring-peninsular-3당시 소설에 많이 나오는 동경유학생들은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1. 새로 올라온 것 중에 ‘미몽’ 이라는 1930년대의 영화도 있지만 그것은 거의 무성영화 수준이었다.
  2. 이것은 공식적인 영화제목이고 개봉된 이름은 ‘아름다운 청춘’ 이었다고 한다.
  3. 예를 들면 1954년 영화 ‘운명의 손‘이나 ‘과부의 눈물‘과 같은…
  4. 이것은 공산주의와 비슷하게, 완전히 정책적이고 의도적이었다.
  5. 우리 가족은 6.25를 겪으며 거의 모든 역사적 유물들이 분실되었다.
  6. 일본이 정책적으로 조선이름을 일본 식 이름으로 바꾸게 하던 것.

영화 자유부인과 김동원

영화 자유부인, 1956

영화 자유부인, 1956

얼마 전에, 어렸을 적에 귀따갑게 들었던 1950년대 화제의 영화, 자유부인을 기적적으로 보게 되었다. 기적적이란 표현이 과장이 아닌 것이 이 영화는 1956년에 나온 것으로 그 바로 전에 일간지에 연재되었던 같은 이름의 정비석 원작의 신문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고, 그 당시에 불과 국민학교 2~3학년 정도였던 나까지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반세기가 지난 뒤에 실제로 그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surreal한 기분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화제의 단계를 넘어서 그 소설, 영화는 ‘문제작’의 수준까지도 올랐던 것을 기억한다. 모든 것이 ‘자유’라는 단어가 붙었던 그 당시였다. 당시의 이승만 여당도 자유당이고, 대한민국은 자유란 말만 붙으면 모든 것이 ‘멋지게 보이던’ 시절이었다. 거기다 급기야 ‘자유부인’이란 말까지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까지만 해도 “자유와 부인“은 그렇게 잘 어울리지 않던 비교적 엄격한 ‘남녀 유별’의 전통이 있었다고나 할까.. 지금 보면 간단히 말해서 ‘남녀차별, 남존여비’의 전통이다. 나와 같은 세대는 그런 ‘구식 전통’을 보며, 느끼며 자란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 개XX’의 도움으로 6.25 사변을 거치며 거대한 미국의 ‘신식 문화’가 파도처럼 쏟아져 들어오면서, 이런 것들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일까.. 그것을 timing좋게 당시 유명했던 대중 소설가 정비석 씨가 인기소설로 이끌어내고, ‘폭발적’인 화제가 되자 곧바로 영화가 된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서로 바람 피는 대학교수 부부의 주변을 그린 것이지만, 특히 교수부인, 춤바람 난 아내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결과는 비교적 예상하기 어렵지 않게 끝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바람 피는 여자’에 대한 질타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여자의 권리’ 같은 것도 나란히 잘 그려낸 듯 하다.

한태석 역의 김동원
영화 자유부인, 한태석 역의 김동원, 1956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긴장을 하곤 했는데, 이 영화에 보이는 location(로케, 촬영 장소)들이 너무도 눈에 익었던 곳이어서 나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우선 시청과 국회 의사당 주변에서 당시의 차들이 오가는 거리 풍경은 정말 내가 보고 기억한 것과 100% 일치하였다. 특히 행인들의 옷차림: 중절모의 남자, 한복의 여자들을 보면서 ‘맞다, 그때는 그랬다’ 하는 탄성이 나오곤 했다.

시발 택시도 나오기 전 차량들은 거의 ‘미제 시보레’ 급의 세단들과, 일본이 남기고 갔거나, 수입했던 ‘동글 동글한’ 시내 버스들.. 물론 그립던 ‘귀여운 에노 전차’들이 명동, 미도파 앞에서 굴러가는 모습들은 사진처럼 나의 뇌리에 남아있는 것들이었다. 동화 백화점, 남대문 시장입구, 미도파.. 심지어는 화신백화점 옆에 있었던 ‘신신백화점’이 깨끗이도 보인다. 이 영화의 보존 상태는 정말 어제 찍었던 흑백 사진과도 같이 좋았다.

1967년 용가리의 김동원
1967년 대괴수 용가리의 김동원

이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민 이란 남자배우를 보게 되었다. 귀에 많이 남았던 배우였는데, 자세히 보니 참 잘생겼다. 왜 그 이후에 큰 스타가 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모든 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간판배우 박암,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한 그의 연기는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특징이 없다. 여자 주연인 ‘김정림‘.. 정말 모르겠다.. 기억이 ‘전혀’ 없으니까.. 어떻게 그녀가 주연이 되었는지,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도 깜깜 이다. 구닥다리 안경과 새카만 콧수염의 ‘주선태‘.. 좋은 역으로 나오긴 힘든 배우고 배역이지만, 그래도 반가운 얼굴 중에 하나다.

문제는 이곳에 나오는 ‘연극배우’ 김동원.. 나는 그가 이런 ‘대중영화’에 그것도 초창기에 출연했는지 몰랐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설마 저 사람이 내가 기억하는 ‘연극배우’ 김동원은 아니겠지 할 정도로 조금 닮았다고는 생각했지만.. 문제는 머리칼 머리 숱.. 내가 아는 김동원씨의 머리는 절대로 ‘대머리, 반대머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깜짝(cameo) 출연, '아베크 토요일'을 부르는 가수 백설희씨
깜짝(cameo) 출연, ‘아베크 토요일‘을 부르는 가수 백설희씨 당시의 가수였고, 배우 황해씨의 부인이고 전영록의 어머니

나의 머리가 빠지다 보니, 더욱 호기심이 나서 자세히 보게 되었는데.. 분명히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은 ‘연극배우’ 김동원이 분명했다. 그의 머리 스타일은 반 대머리.. 훨씬 이후에 보이는 김동원씨의 모습은 절대로 대머리가 아니고 숱이 많은 모습들이다. 그러면 둘 중에 하나인 것이다. 원래 대머리였고, 그 이후에는 ‘가발’이었을 가능성과, 영화 자유부인에서 ‘역할에 의한 삭발’의 가능성..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있을까? 물론 100% 확신을 할 수 없지만 나는 전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자유부인 이후의 김동원씨, 가발 수준은 정말 수준 급이라고 해야 할 듯하고, 많은 fan들에게는 그렇게 상대적으로 ‘젊은’ 모습을 남기려 했던 그 노력은 참 상당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렇게까지 한 것에 100% 공감을 하지는 않지만, 직업상 어쩔 수 없었을지 않을까.. 그저 benefit of doubt을 주고 싶어진다.

 

춤추는 유부남과 유부녀

춤추는 유부남과 유부녀

명동입구의 양품점 사장으로 연기하는 김동원

명동입구의 양품점 사장으로 연기하는 김동원

동화백화점 경양식집에서 김동원과 김정림, 1956

동화백화점 경양식집에서 김동원과 김정림, 자유부인 1956

 

김동원씨 가족, 1972 동아일보의 약품광고에서 '건강과 행복'을 전하는 듯

김동원씨 가족, 1972
동아일보의 약품광고에서 ‘건강과 행복’을 전하는 듯.. 바른쪽 끝에 가수 김세환씨가 보인다

 

True Love – Bing Crosby & Grace Kelly, 1956
그 당시 유행하던 영화 High Society의 주제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