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두려움, 절망감의 정체와 해답은…

예전, 아니 오래~ 전에 스쳐갔던 생각 중에는 ‘현재가 힘들어도 나이가 들면 분명히 도사나 신선처럼 느끼는 잔잔한 평화, 불안이 없는 지혜와 함께 살 것’이라는 뜬구름 같은 희망이었다. 그것이 지금 눈을 떠보니, 어떻게 되었는가~ 별로 아니 전혀 나이와 편안함은 상관이 없음을 깨닫는다. 나이, 세대별로 그 성질이 달라진 차이뿐이다.  그 중에는 불안과 두려움 같은 것은 끈질기게도 따라오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비록 육신의 건강은 점점 내리막 길을 걷게 되어도 머리 속에 펼쳐지는 세상은 점점 편해질 것이라는 희망, 바로 그 희망을 원하며 살았는데… 결과는 거의 참패에 가깝다.

얼마 전,  ‘강산이 99%  변해버린 고향’ 방문 시, 처조카 딸 수경가 선물이라며 수원근교 미리내 성지 내 성물방에서 건네 준 책에서 이 급한 명제에 대한 분석적인 essay를 읽게 되었다. ‘잊혀진 질문’ 중에 하나로 등장하는 이 질문은 바로 ‘불안과 두려움’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이것과 더불어 ‘희망의 부재’까지 함께 다루었기를 바라기도 했다. 과연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신부님이 제시할 것인가, 궁금했는데 나에게는 50% 정도의 답은 주신 셈이니까, 이번 고국 방문의 성과 중에 하나라고 기억을 할 것이다.

불안, 초조, 두려움 이런 감정들을 ‘특권’이요 ‘에너지’로 승화하려는 신부님의 ‘성경해법’이 과연 나머지 50%의 해답을 줄 것인가?  모든 것, 아니 이 우주의 모든 것 (없는 것도 포함한)은 궁극적으로 내가 보는 세계관 안에서 내가 가진 생각의 눈으로 보는 나만의 실재, 현실이라는 것을 인식하면 분명히 해답은 있다. 쉽게 말하면 ‘세상은 생각하기에 달린 것’이다.  코앞에 다가오는 물리적인 위험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머리 속 consciousness 의식체계, 아니 우리가 ‘상상’하는 세계일 뿐이 아닐까? 성경 속 예수님의 진복팔단 眞福八端 Beatitudes 도 이런 각도에서 보면 전혀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긍정적인 착각의 영역’인 것이다.


 

‘불안’과 ‘두려움’이 끈질기게 따라올 때 극복할 방법은 있는 걸까요?

 

두려움에 대하여 독일 소설가 장 파울이 위트 있는 말을 했습니다.

“소심한 사람은 위험이 일어나기 전에 무서워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위험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 무서워한다. 대담한 사람은 위험이 지나간 다음부터 무서워한다.”

이 말은 그대로 진실입니다.

소심한 사람은 위험을 미리 걱정합니다. “어이쿠, 이러다가 뭔 일 터지는 것 아냐? 어떻게 준비해야 하지?” 그러면서 나름 철저히 준비한답시고 우왕좌왕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위험에 직면하여 공포에 짓눌립니다. “우와, 집채만한 호랑이잖아. 이제 나는 죽었다!” 벌벌 떨다가 그만 위험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대담한 사람은 위험이 지난 다음 사태를 인식합니다. “이거 뭐야? 돌이 굴러 떨어졌잖아! 하마터면 큰일 뻔했네.” 순간적으로 엄습하는 전율에 식은땀을 흘립니다.

결국 두려움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말인 셈입니다.

 

수천 년 철학사에서 근세기에 등장한 실존주의 사조는 철학적 고민의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우주, 자연, 사회 등의 거창한 주제보다 더 시급한 주제가 인간의 실존이며 나아가 인간의 적나라한 감정이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 안에도 여러 색깔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꼽는 인간의 숙명적인 문젯거리가 있으니 바로 ‘불안’입니다. 약간씩 의미상 편차가 있습니다만 두려움, 공포, 염려, 걱정 등을 아우르는 ‘불안’이야말로 인간 심리의 표층과 심층을 장악하고 있는 생존 인자라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 독심술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적중하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줄을 잇고 있는 통계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취업, 인사포털 인크루트가 졸업을 앞둔 대학교 4학년 21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체 응답자 5면 중 4명꼴인 82.1 퍼센트가 졸업을 앞두고 불안함,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끼는 일명 ‘4학년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고 응답했다.”

“24일 구직포털 HR KOREA 는 지사 회원 직장인 31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직장생활 스트레스’에 대해 발표했다. 조사 결과, 응답자의 39.3퍼센트가 미래에 대한 (관한) 불안감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답했다.”

 

편의상 젊은층의 ‘불안증후군’에 초점을 맞춰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안이 습관화된 사람들이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그 강도가 약해지길 기대하는 것은 경험상 무리일 것입니다. 도리어 나름 탄탄하던 사람들조차 은퇴를 기점으로 불안의 늪에 빠지는 경우를 허다합니다. 불안이야말로 예측불허로 찾아오는 불청객이며, 수시로 변색하며 살아남는 카멜레온입니다.

 

그러면, 이 불안의 정체는 무엇이며,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요?

‘불안’이라는 것은 ‘공포’와는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불안’은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감정상태입니다. 눈앞에 주어진 자극이나 위협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생기는 감정을 ‘공포’라고 합니다. ‘공포’는 동물도 느낄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원초적인 본능’이거든요. 쥐는 눈앞에 고양이가 나타나면 공포에 떨면서 안절부절못합니다. 이것은 사고 작용이 없어도 생기는 일종의 반사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안’은 반드시 생각의 결과로써 생깁니다. 자신의 존재와 관련해서 어떤 위기나 피해를 미리 상상하거나 불길한 일을 예상할 때 그 생각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 ‘불안’입니다. 동물은 불안을 느끼지 않습니다. 동물이 미래의 일을 미리 걱정하느라 불면증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동물이 느끼는 것은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변화에 대한 반응, 즉 공포입니다.

그러므로 불안은 인간 고유의 정서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버드대 정신과 교수인 필레이 박사는 수년간의 뇌 영상 연구를 통해 인간이 공포, 불안, 두려움에 반응하는 독특한 방식을 밝혀냈습니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뇌는 아주 작은 위험도 재빠르게 감지하며 ‘원하는 것’보다 ‘피하고 싶은 것’을 우선적으로 처리하도록 진화해왔다고 합니다. 이를 처리하느라 다른 일들을 뒤로 미룬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건 불가능해, 하지만 나는 이직을 하고 싶어”라고 생각한다면 뇌는 이 상충된 메시지를 받고 혼란스러워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불가능해’라는 두려움을 먼저 처리하느라 진정 원하는 ‘이직’을 하려는 에너지를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필레이 박사는 그의 저서 <두려운, 행복을 방해하는 뇌의 나쁜 습관>에서 이것이 바로 뇌가 우리를 과잉보호하는 방식이라 설명합니다.

이 통찰은 우리가 두려움을 처리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됩니다. 그르므로 우리는 ‘나’ 자신의 불안을 들여다보기에 앞서 불안의 작동 방식을 확실히 파악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조금 더 가까이 불안현상을 들여다보기로 하겠습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어떤 것에 위협을 느낄 때, 우리 뇌는 0.01초 만에 두려움의 시스템을 작동시킨다고 합니다. 뇌의 편도체가 위험을 감지하고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는 데 걸리는 시간은 0.01초에서 0.03초. 이후 의식적인 처리가 일어나면서 우리는 두려움과 두려움의 대상을 파악하게 됩니다.

이 두려움은 본래 인간이 진화하는 데 필수 요소였습니다. 두려움을 얼마나 빨리 감지하느냐가 생존과 직결되었기에 뇌는 다른 감정들보다 위협을 먼저 처리하도록 진화한 것입니다.

하지만 역기능도 따랐습니다. 이 예민하고도 무의식적인 두려움에 대한 자각이, 상황을 부정적으로만 파악하고 위축된 반응을 유발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두려움은 단지 이전에 기억된 정보일 뿐’이라는 자각이 중요합니다. 예컨대 어린 시절 물에 빠져 익사할 뻔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 중 더러는 어른이 된 뒤에도 웅덩이의 물만 보면 반사적으로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는 어린 시절 편도체가 물에 대한 두려움을 강하게 학습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뇌에서 일어나는 가상의 반응일 뿐 실제가 아니지요. 다 큰 어른이 웅덩이의 물을 무서워할 이유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생각의 힘만으로도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불안의 작동방식을 잠깐 짚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불안은 없어도 문제고 너무 많아도 문제라는 얘기가 됩니다.

이제 불안의 순기능을 클로즈업해보겠습니다. 심리분석가 프리츠 리만은 ‘불안의 심리’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불안은 우리의 발전에 특별히 중요한 지점들에서 제일 먼저 의식 속으로 온다. 즉 친숙한 옛 궤도를 떠나는 곳에. 새로운 과제를 감당하거나 변화해야 하는 지점에 불안이 온다. 발전, 성장, 성숙은 그러니까 명백히 불안 극복과 깊은 관계가 있다. 어느 연령에서든 그 나이에 상응하는 성숙을 위한 걸음이 있으며, 그 걸음은 있게 마련인 불안을 수반한다. 걸음을 내딛자면 그 불안을 다스려 이겨내야만 한다.”

프리츠 리만보다 앞서 불안의 긍정적 역할을 철학적으로 섬세하게 규명한 사람이 철학자 키르케고르입니다. ‘불안’을 일생의 연구 주제로 삼았던 그는 불안을 도약을 위한 계기로 보았습니다. 사람은 심미적 삶, 윤리적 삶, 종교적 삶의 3단계로 질적 성숙을 이루는데, 불안이 앞 단계에서 다름 단계로 도약하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사람은 본능적으로 심미적인 삶을 산다고 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을 좇아 살거나 환상에 빠져서 삽니다. 삶을 기분풀이로 여기며 쾌락을 탐닉하면서 기분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이것만으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삶은 결국 권태와 싫증에 다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내 무기력한 자신의 눈에 비친 인생은 무상하며 미래는 불안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망합니다. 이 절망은 새로운 삶을 찾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절망의 늪을 넘어 윤리적 삶으로 도약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불안으로 말미암아 이제 두 번째 단계인 윤리적인 삶이 시작됩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쾌락만을 좇아 무비판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보편적 가치와 윤리에 따라 생활하게 됩니다. 사람은 이제 내면의 양심에 호응하고 의무에 성실하려고 애씁니다. 이제 비로소 인간은 ‘되어야 할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 단계도 결국 벽에 부딪치고 맙니다. 높은 도덕에 이르지 못하는 능력의 한계 그리고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무력함을 절감합니다.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이 뜻대로 잘 되지 않고, 또 윤리적으로 산다고 세상이 알아주는 것도 아닌 데다 엉터리로 사는 사람들이 망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맞서서 고뇌하는 인간은 마침내 죄의식과 불안에 빠지고 절망하게 됩니다. 이 불안과 절망이 다시 도약을 만들어 사람을 신에게로 내몬다고 합니다. 이 현실의 모순을 심판해 줄 하느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불안은 종교적인 삶으로 옮겨가도록 사람들을 이끌어줍니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으로서 완전하고 참된 삶은 세 번째 단계인 ‘종교적 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실현된다고 말합니다. 스스로의 결심에 따라 진정으로 하느님을 믿고 따를 때에 인간으로서의 무력감과 허무함을 떨쳐버리고 완성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의 삶으로 옮겨가는 것은 자기 자신의 주체적 결단과 도약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님과 선생님이 아무리 공부하라고 다그쳐도 정작 학생 자신이 공부하려고 하지 않으면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불안의 역기능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첫째로, 불안은 사람을 안절부절 못하게 하여 결국 도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공학기술자 헨리 포드의 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미래를 두려워하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활동을 제한 받아 손도 발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라고 했거든요.

나는 해군 출신입니다. 해군 훈련 과정에서 “퇴함 훈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배에서 물로 뛰어 내려야 할 유사시를 대비하여, 실내 수영장 10m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훈련입니다. 적음을 위하여 먼저 5미터에서 시작해 다음 7미터, 그 다음 10미터 순으로 진행합니다. 전원이 차례로 뛰어내려야 하기에 줄을 지어서 기다립니다. 자기 차례가 오면 다이빙 대 끝에서 서서 오른손은 코를 쥐고 왼손은 낭심을 잡은 채 호흡을 가다듬고 “000 사후생 퇴함준비 끝!”이라고 외칩니다. 그러면 지휘관이 “퇴함!” 하고 명령을 내립니다. 이때 “퇴함!” 이라고 복창하고 뛰어내려야 합니다.

사람은 10미터에서 가장 큰 고소공포를 느낀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높이에서 그냥 뛰어내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 위에는 구대장 몇 명이 지휘봉을 휘두르며 포진하고 있습니다. 훈련생들에게는 10미터 높이도 무섭지만 그 지휘봉도 만만찮게 무섭지요. 그런데 세 명이 끝내 뛰어내리지 못했습니다. 구대장들이 격려를 하고, 협박을 하고, 떼밀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난간을 붙잡고 있는 힘은 여러 장정이 떼어낼 수 없을 만큼 초인적으로 강했습니다. 결국 그 세 명은 석식 열외에다, 완전군장 차림으로 날이 저물도록 연병장을 ‘평화롭게’ 돌아야 했습니다. 이렇듯 두려워하는 마음을 먹으면 발이 땅에 딱 달라붙고, 어떤 외부의 압력에도 요지부동하게 됩니다.

둘째로, 불안은 사람의 심신을 해칩니다. 제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으로 말미암아 죽은 청년의 수가 30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과 남편을 일선에 내보내고, 염려와 불안과 근심에 빠져 심장병으로 죽은 미국 시민이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총탄이 사람을 꿰뚫어 죽인 수보다 불안과 공포가 죽인 사람의 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러기에 넬슨 만델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용감한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을 정복하는 사람이다.”

지지 않으려면 정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두려움을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

리처드 바크는 그의 저서 <날개의 선물>에서 인간이 성취를 향하여 전진하는 과정을 수영장의 다이빙대를 예로 들며 설명합니다.

다이빙대에 처음 도전하는 사람은 우선, 며칠 동안 다이빙대를 올려다 만 봅니다. 이는 올라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생각하는 과정입니다. 그 다음 단계로, 그는 드디어 젖은 계단을 조심조심 오릅니다. 어떤 일을 앞두고 결단을 내리는 단계에 해당하며, 아직 결심을 굳히지는 못한 채 불안 중에 조금씩 전진하는 단계입니다. 셋째 단계로, 그는 높은 다이빙 대 위에 섭니다. 결단 직전, 가장 불안한 단계입니다.

이제 그에게는 두 가지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는 다이빙을 포기하고 내려오는 길로 이는 “패배를 향한 계단”입니다. 다른 하나는 과감하게 물속에 뛰어드는 길로 이는 “승리를 향한 다이빙”입니다. 다이빙대 끝에 선 그는 두려움에 소름이 끼쳐도 두 개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내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면, 후퇴는 이미 늦었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바로 이때가 인생이라고 불리는 다이빙대가 정복되는 순간입니다.

이처럼 불안과 두려움의 다이빙대를 한 번 정복한 사람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높은 데서 다이빙을 즐길 정도가 됩니다. 바크는 책 말미에 이렇게 말합니다.

“천 번 올라가고 천 번 뛰어내리고, 그 다이빙 속으로 두려움이 사라지고 내가 비로소 인간이 된다.”

 

어떻게 하면 이 불안감을 덜 수 있을까요? 나는 인생의 위대한 멘토들의 지혜를 빌리는 것 자체가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방법은 강력한 희망과 꿈으로 불안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몇 년 전 모 방송사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인간의 두 얼굴>은 꿈의 한 모습인 ‘긍정적인 착각’의 효과를 밝혀냈습니다. <인간의 두 얼굴: 착각> 편을 제작한 정성욱 PD는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국내외 책과 논문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러고는 인간의 착각과 행동 사이의 인과관계를 설명해줄 실험을 구상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도화지에 손가락 하나를 없는 손을 그리고, 다섯 살짜리 아이들에게 보여주면서 묻습니다. “10년 후 이 손가락은 어떻게 될까요.” 일부 아이들은 어른들의 예측을 뛰어넘는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손가락이 자라나요!” 라고요. 실험 결과 손가락이 자란다고 대답한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지능지수가 높았다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긍정적 착각입니다. 이는 살아가면서 겪는 실패와 좌절의 상황에서 스스로를 감싸는 보호막 역할을 합니다. 정 PD는 말합니다.

“긍정적 착각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발전시킨다는 결론을 얻었다. 우울증 환자들은 절대 착각에 빠지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주변 상황을 냉철하게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긍정적 착각을 동반하는 희망과 꿈이야말로 ‘실패와 좌절’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감싸는 ‘보호막’ 역할을 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방법은 불안을 신께 맡기는 것입니다.

토론토대학 심리학과 마이클 인즐릭트 교수 팀은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불안과 걱정에 덜 시달린다는 연구 결과를 얻어냈습니다. 인즐릭트 교수는 “신앙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테스트에서 실수를 하거나 잘 모르는 것이 나와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 팀은 그 내용을 2009년 <심리과학> 온라인 판에 발표했습니다.”

한마디로 기도가 불안감을 해소해준다는 얘기입니다. 나 자신 직접 확인해보지는 않았습니다마는, 어떤 사람이 옥중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수없이 기록된 것을 보고 도대체 몇 번이나 씌어 있는가를 세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꼭 365번이 기록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1년 365일 매일 한 번씩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그럴듯한 수치적 일치입니다. 우연이긴 하지만, 신은 불안에 떠는 우리를 최소한 매일 한 번씩 위로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은근히 전해줍니다.

 

뭐니 뭐니 해도 불안을 이기는 최고의 방법은 그 불안을 성장의 계기로 삼는 것이겠지요. 불안하니까 더 준비하고, 불안하니까 더 정진하고, 불안하니까 더 노력하자는 얘기입니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베로니카 웨지우드의 말을 기억해둘 것을 권합니다.

“불안과 무질서는 절망의 징후가 아니라 에너지와 희망의 징후다.”

체념한 사람에게는 불안이고 뭐고 가 없습니다. 불안은 희망을 가진 사람이 누리는 특권, 곧 생의 에너지인 것입니다.

Strange, Manger without Baby

올해 아틀란타 도라빌 순교자 성당, 성탄구유 점등식, 대림절 전야 특전미사 등등을 나는 특별한 이유도 깨닫지 못하고 기다린 셈이 되었다. 대림의 뜻처럼, 그저 그렇게 기다리는 것이 바르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결과는 물론 기대한 그런 모습, 광경이었지만 약간 차질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7시의 공식 시작시간보다 15분 일찍 시작한 것이어서 아차 했으면 시작 부분을 놓칠 뻔 했지만, 행사가 끝나고 나니 그런 것들이 큰 문제가 될 리가 있겠는가?

먼 곳에서 구유를 자세히 볼 수가 없어서 몰랐지만 나중에 보니 구유에는 꼭 보여야 할 ‘아기 예수님’이 없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 아닌가? 하지만 신부님의 간단명료한 강론에서 이것은 의도적인 것, 모두 모두 아직 안 보이는 아기예수를 성탄까지 기다리자는 취지, 의도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의도도 기억에 남을 듯하다.

어둠 속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보는 것도 반갑고 즐거운 것, 하지만 생각보다 교우들의 숫자가 적은 것도 그렇고, 특히 우리 또래의 교우, 친지들의 모습들도 별로 보이지 않았던 것은 역시 세월을 탓해야 할지… 이제는 이런 행사에서도 나는 동년배를 찾고 있으니… 이것, 조금 이상한 것일까, 아니면 인지상정일까… 올해의 대림절을 이렇게 시작한 것, 이제는 조금씩 불편해지는, 어둠을 뚫고 집으로 drive를 하는 것 이외에는 몇 백 번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Dr. Bernardo KastrupBigelow Prize Essay를 읽는다. 이제까지 본 것 중에서 consciousness 주제에 대한 제일 학문적 논문급이라 더 흥미롭다. 예전에는 이 주제는 거의 금기사항이었고, 특히 (자연)과학계에서는 언급조차 못했고, 잘못하면 즉시로 학계에서 파문을 당하곤 했는데 이제는 그때와는 다르게  많이 다른 세상으로 변하고 있는 듯하다. 양자역학의 도움으로, 고전적 물질주의가 완전히 수세에 몰리는 듯하기까지 보이는 것은 놀랍기만 하다. 나는 솔직히 가톨릭 우주관 cosmology 교리부터 출발했기에 물론 이런 추세를 쌍수를 들어 환영하지만, 웃기는 것은 아직도 나 자신이 속으로 Consciousness, After Life 같은 것을 운운하는 것 자체를 피하고 싶은 심정… 이 정도면 현대가 얼마나 순수물질주의에 젖어 있는지 알만 하다. 하지만 나는 노력할 것이다. 의심을 가지고 열린 가슴으로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저 너머에 아롱거리는 다른 세상’에 대한 환상은 피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계속 진정한 진실을 향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어제 늦게 뜻밖에 ‘가정교사’ 인호 형의 카톡소식을 받았다. 소식의 문체에 잔뜩 에너지가 느껴지기에 우선 ‘아~ 형님 건강하시구나~’ 하는 포근한 안심, 안도의 숨이 느껴진다. 소식이 서로 없음을 개탄하는 듯한 느낌이 더욱 반가운 것이다. 몸은 느려져도 머리, 영혼만은 끝까지, 끝까지 건강 그 자체라고 나는 항상 믿었기에, 형님 나이 82세라는 것이 심각하게 다가오질 않는다. 간단히 지난 2년간 우리 가정의 변화 변천사를 알려드렸지만 그 이외는 앞을 기약할 수가 없다. 언제는 형님과의 대화는 이렇게 간단히 끝이 나곤 했으니까… 인호 형, 이번에는 조금 긴 대화를 하며 삽시다!

한국에 계시는 연숙이 쪽 친척들, 특히 형님과 동서형님의 건강상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며 참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이 그렇게 실감이 갈 수가 없다. 그렇게 건강하시던 두 양반, 모두 현재 조금씩은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하니… 형님은 얼굴자체가 너무나 초점을 잃은 듯하게 보인다고.. 동서형님은 다른 쪽, 그러니까 걷는데 문제가 있다고.. 아~ 80대가 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나도 곧 그렇게 될 것일까? 연숙이 ‘이순재’씨는 88세에도 연극 활동을 한다고 몇 번이나 칭찬 말을 하는데 결국은 나이 그 자체보다는 개인적 에너지 차이도 큰 몫을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Joy of Leftovers, Wine & SPAM

몇 년만인가, 우리 집에서(roasted) turkey의 모습을 본 것이… 어제 음식준비를 하면서 몇 번이나 이야기를 했던가, 우리 집에서 추수 감사절의 turkey요리 가 없었던 때가 몇 번, 언제였는가..  이것은 우리의 퇴화되는 기억력의 test였다.  총각시절이었던 1974년 감사절 당시 새로 사귄 성성모형  부부의 초대로 Purdue University 어떤 선배 유학생(심리학 전공) 부부 댁에서 처음으로 각종 감사절 음식을 먹었던 것은 아직도 사진처럼 선명하다. 그 이후로는 1980년 결혼 이후 Columbus, Ohio 한인 성당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연숙이 이봉모씨 부인으로부터 recipe를 구해서 turkey를 굽기 시작한 것, 그것이 거의 끊임없이 근래까지 지속된 것이었다.  최근에는 이런 전통이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올해 기적적으로 다시 되살아난 것이다. 하지만 turkey자체보다 side, stuffing 등이 더 맛있는 것은 아직도 사실이고, 오늘도 그 leftover 가 어제의 main meal보다 더 맛있던 것을 재확인 하는 때가 되었다.

어제 Thanksgiving leftover wine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늦은 저녁의 허기를 이 명콤비 wine & SPAM으로 달랬다. ‘공식 금주’로 이제는 평소에는 이런 사치는 물 건너 간 것이기에 잠정적인 예외인 Thanksgiving 부터 New Years Day까지 이것은 즐거움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빗소리를 꿈속에서 느낄 것 같은 예감이 또 빗나간 것이 조금 아쉽다. 빗소리, 빗소리… 그것을 은근히 기다렸지만 역시 희망과 기대는 그것 자체로 끝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바깥을 보니 약간 물기는 보이긴 했으니까.. 아마도 아주 가느다란 비가 왔다 갔다 했던 모양이고, 오늘도 그런 날로 끝나지 않을까… 주 관심사는 내일의 ‘점등식’의 성사여부지만 현재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온다던 비는 거의 오지 않고, 거의 어제와 같은 holiday 의 느낌이 사라지지도 않은 날이 바로 Black Friday, 나와 아니 우리와는 거의 상관이 없는 ‘그 다음날’ 정도였지만 그래도 모처럼 wine을 마시며 편하게 지내려고 기를 쓴다. 또한 모처럼 아예 침대로 들어가서 긴 낮잠까지 즐겼으니…  이것으로 어제의 ‘덜 즐거웠던 hangover’들을 잊는 기회로 삼는다.

어제는 분명히 모든 것이 ‘천천히, 예정대로, 문제 없이’ family holiday가 되었다. 하지만 무언가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아직도 나의 머리에 앙금처럼 남은 것은 의외다. 별로 즐겁지 않은 감정이 나를 조금 괴롭히고 있으니.. 나의 문제일 것이다. 보기에 다른 사람들은 별다른 일 없이 시간을 즐겼던 듯 하니까… 그것으로 만족을 한다.
복잡하고, 시끄럽고, 솔직히 정신이 없었던 나.. 왜 그랬을까? 모처럼 마시는 ‘술: wine, beer’ 때문이었을까? 아이들 둘이 합세해서 그런가?  두 견공 犬公들이 합세한 것, 내가 원했던 것이지만 생각처럼 쉬운 것도 아니었고, 특히 로난의 ‘신경질적인 모습’은 나를 놀라게 했다. 솔직히 정이 떨어질 듯한 착각에 빠진다. 내가 이런 상황에 잘 적응을 못했던 것으로 결론은 맺자.  은근히 기대를 많이 했던 것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고… 그래, ‘일은 치렀다’로 만족하자… 하지만.. 하지만… 성탄 때로 예정된 2차 모임은 이제 ‘절대로 기대는 하지 말자’로 생각을 바꾼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서 BICS prize winner essay를 읽는다. 특히 Bernardo Kastrup의 것은 정말 인상적으로 학구적인 것이었다. 이런 석학들이 현재 consciousness에 대한 탐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기쁘고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NDE, Swedenborg’s Afterlife, Kastrup, Consciousness…. 모든 것이 함께 나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것들… 이것도 분명히 성모님의 손길의 도움이라는 것을 잊을 수가 없다. 모처럼 맛보는 wine과 SPAM combo 의 즐거움과 함께 나는 Swedenborg [그리고 Helen Keller] 가 20년 이상 왕복했던 사후 死後의 세상을 마음껏 상상한다.

 

Funeral Mass, still shocking & sad… Swedenborg

성당에서 연령행사(연도, 장례미사)가 생겼을 때, 우리에게 참석여부의 기준은 경험적인 것으로, 우선 조문객이 아주 적다는 사실이 미리 알려지면 여건을 막론하고 꼭 참석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상황에 따라 참석여부를 정한다는 것이다. 이번 case는 후자에 속하지만 우리는 두 번 생각도 할 수가 없이 수많은 조문객의 일원이 되었다.

오늘 C 로사 자매님 연도, 장례미사는 당연히 많은 조문객들이 올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는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지만 그래도 놀랄 정도로 성당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우리가 생각한 이유는 C 로사 자매님의 잔잔하고 정직한 성품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무슨 영웅적으로 성당에서 봉사를 한 것 보다는 항상 웃는, 친절한 모습이 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것, 그런 모습이 사라진 것에 따라오는 섭섭함, 슬픔 등이 무언중에 모든 사람들이 진심을 애도를 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이것은 모두가 깨달아야 할 교훈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 자매 죽음의 원인이 너무나 충격적이고 놀라운 사건이라는 것에 사람들의 애도가 더해졌음도 자명한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남편 형제님에 대한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부인 자매와는 느낌이 너무나 다른 것, 어떻게 둘이 부부가 되었는지조차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모르는 것들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가정을 현재의 상태로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도 그  부군 형제님을 멀리서 보면서 그 인상의 음양이 교차하는 느낌을 그에게서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얼마나 충격적인 고통을 현재 겪고 있을까 생각하니 솔직히 말을 잊는다.

그제, 어제 오늘 아침까지 머릿속은 물론 차로사 자매의 얼굴, 모습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느님, 예수님께서 너무하시다는 생각뿐이다. 물론 이런 비극에도 무슨 뜻이 있는 것은 굳게 믿지만 한갓 인간의 능력으로 이런 고통을 쉽게 참는다는 것은 너무한 것이 아닐까? 그래도, 그래도 분노, 슬픔의 고통을 이기고 유족들은 자매님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절대적 희망을 잃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당분간은 어렵겠지~

 

Swedenborg, Swedenborg 지금 거의 우연히 나에게 다가온 이 사람, 그의 경험, 사상, 철학, 믿음.. 등등을 조심스럽게 만져보고 느끼고 공부를 하고 싶다. 분명히 나에게 우리에게 무슨 신비를 가르쳐줄 듯한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이단성’은 100% 항상 조심할 것이고… 저에게 식별의 능력을 주시기를…
Swedenborg Foundation website를 favorite link로 아예 설정을 해 놓았다. 이 topic은 현재 나의 영적 여정의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다만 ‘정통교리성’은 항상 의식해야 할 것이다. 그 외에는 나에게 모든 것이 신비적, 학문적, 혁신적, 미래적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깊이 공부를 할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Another Swedenborg… 분명히 나는 이 사람에 대해서 전에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100% 확실하다. 문제는… 내가 어느 책에서 읽었던 것일까? 혹시 website는 아니었을까, 하지만 책에서 본 것이 더 가능성이 있는데, 도대체 어떤 책에서 보았는가? 아~ 현재 나의 책들이 완전히 혼란한 모습으로 어질러져 있으니… 어떻게 다시 깨끗하게 정리를 할 것인가?

 

어제 찾아낸 Humana plan H5216-XXX-1 PPO, 이제까지의 plan에 비하면 완전히 우리에게 파격적으로 알맞고 좋은 것이었다. 이 plan이 과연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 그것이 조금 궁금하다. Drug plan은 거의 비용의 부담이 사라지고, 치과도 전 것과 비교할 수가 없으니… 아마도 주위에서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은 이런 plan을 말하는 것이었는지도.. 이제까지의 plan이 2019년부터 우리가 가입했던 것을 보면 아마도 지난 3년 동안 새로 나온 것일지도 모르고, 그 동안 내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살았던 것은… 아~~ 나는 왜 이 모양인가? 왜 이렇게 게으른가, 나는?

On Quiet Rainy Autumn Day

예보대로 날씨는 잔뜩 흐리고 포근한 것, 비가 예보되었지만 chance가 높지 않아서 기대를 별로 하지 않았지만 오후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잔잔한 가을비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특히 바쁘지도 않고 졸음을 참는 때, 이 고요한 빗소리와 문 밖 cul-de-sac의 모습은 가슴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고, 이런 시간이 가급적 짧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오늘 본 비는 사실 정말 모처럼 보는 광경이어서 신기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신경질적으로 피하고 싶은 새벽의 싸늘함 대신에 편안하게 포근한 새벽이 좋다. 덕분에 포근했던 이불을 박차고 6시 반이 지나자마자 일어나는 쾌거를 맛보았다. 근래에 나는 분명히 이 칠흑 같은 새벽을 못보고 살았던 것이다. 이것도 현재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게으름의 행진’ 의 일부거나 결과일 것이다.

오늘은 모처럼 ‘정상 외출’하는 날, 아침미사와 YMCA의 일정이 잡혀있고 따라서 ‘제 시간’에 움직여야 하는 조금 귀찮게 느껴지는 날이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를 ‘사회적’으로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과제이기에 가급적 이런 routine은 고수해야 하지 않을까? 노력하는 거다, 노력, 마지막 그날까지…

아침미사, SONATA-CAFE, YMCA, KROGER의 daily routine을 끝내고 집에 와서 모처럼 Kroger fried chicken으로 점심을 채운다. 예전처럼 아주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어도 모처럼 먹는 것이니까 OK.

 

오늘은 비를 핑계로 완전히 ‘일없는 날’로 미리 계획을 했는지, 나도 완전히 손을 놓았다. 그래~ 오늘까지만 쉬자~ 라는 달콤한 유혹을 어찌 피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 그래, 편하고 싶다…

대신 어제부터 시작한 영화 The Exorcist 50주년 이라는 이름과 추억으로 오늘도 계속해서 관심을 갖고, 오늘은 영화 전에 documentary를 다시 보게 되었다. 비디오의 화질이 엉망이긴 하지만 이 영화의 ‘백과사전’격 정도의 자세한 정보와 역사가 그곳에 거의 전부 모여있었다. 과연 올해는 Halloween 전에 이것의 전부를 다시 볼 수 있을 것인가? 솔직히 자신이 없긴 하지만, 누가 알랴?

이 추억의 영화가 나 개인에게 미친 효과, 영향은 사실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해도 큰 과언이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내가, 아니 우리가 Roman Catholic 천주교인을 살아가는 인생도 이 영화가 조금은 도움을 준 것을 알면 조금 나조차 놀라는 것이다. 당시 처음으로 본 천주교, 신부 사제, 수녀들의 모습과 분위기가 나중에 세례, 입교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50년 전의 이 blockbuster movie는 이렇게 해서 나에게는 아직도 관심의 대상이다.

또한 이 영화를 개봉 1년 후에야 실제로 극장에서 본 그 당시의 추억은 또 다른 개인역사의 일부로 남아있다. 그 추웠던 1974년 12월 크리스마스 직전 시카고 downtown 의 극장으로 비롯된 나의 숨기고 싶은 escapade, 이 죄스러운 짧은 실수의 역사를 나는 어떻게 묻어두고 갈 것인가?

 

Goodbye, August 2022…

습기가 완전히 빠져나간 8월 마지막 날 작열하는 태양과 정말 오랜만에 보는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넋을 잃고 보았다. 기온만 조금 더 내려가면 이것이 바로 9월의 세상모습인 것이다. 아~ 구월, 구월, 더운 낮과 시원, 싸늘한 밤이 교차하고 하복에서 동복을 기다리는 하루하루… 런닝셔츠 바람으로 칼 싸움을 하며 놀다가 갑자기 싸늘해진 저녁을 맞아 당황했던 가회동 골목의 9월… 어찌 어찌 그 눈물 없던 시절을 잊으랴…
어제 늦은 오후에는 상당히 비가 많이 내렸다. 뒤쪽의 fence 위쪽이 다음날 아침까지 완전히 젖었다는 것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초여름에는 사실 올해 혹시 가뭄이 오는 것을 조금 걱정했지만 역시 Mother Nature는 아직도 이 지역에 은총을 계속 내려 주시고 있는 듯하다. 물론 다른 곳에서의 재난은 항상 두렵고 미안하지만…  결국 이곳은 알맞은 비와 큰 문제 없는 기후의 은총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결국은 8월의 마지막 날이 되었구나~ 경우야, 한 달을 어떻게 살았니? 나의 ‘친구, 친지’들은 어떻게들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부디 건강하게,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건강을 되찾는 은총과 함께 하고 있기를… 그래, 나보다 약하고, 아픈 사람들을 더 많이 생각하고, 기도하고, 돌볼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은데, 요새는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를 않던 것, 나에게는 사실 너무나 아쉬운 일이고, 심지어 불안, 조바심을 느끼기도 한다. 나에게 그쪽으로 움직일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의 은총이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싶다. [나는 이런 류의 문장은 참 쓰기가 어렵구나, 자연스럽지 못하고, 나의 깊은 생각이 반영되지를 않으니…]

내일은 연숙의 70세 생일이다. 60세, 환갑이란 것이 10년 전, 이제는 소위 말하는 칠순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둘에게 두 번씩이나…  하지만, 사실 지내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잖아?’ 라는 쓴웃음만 나온다. 그래, 요새 70이란 것이 그렇게 의미가 변하고 있으니… 심지어 70이란 사실을 잊고 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지만 그것은 너무하고… 그래서 내일은 모처럼 둘이서 조금 맛있는 외식을 하기로, 편하게, 부담 없이, 우리 방식으로, 조용히 보내기로 의견을 모았으니 됐다, 됐어… 연숙아, 건강하고 행복한 칠십 대를 여행해보자. 갈 때까지, 갈 때가지… 나를 먼저 보내줄 수 있는 여유와 은총을 꿈꾸며…

작년에 자신 있게, 기세 좋게 구입한 책 Jordan Peterson, God, and Christianity  오늘도 계속 읽는다. 그가 Bishop Barron과 그의 Word On Fire Institute 의 주목을 받는 이유와 그의 종교관에 대한 자세한 분석의 시작이다. 이런 최고 지성들의 상호 분석은 한 마디로 눈부시게 신비롭기까지 하다.

 

오늘은 Ozzie가 집으로 돌아가는 날,  산책의 기쁨을 기다리면 사는 녀석을 데리고 걸었다. 짧은 코스로… 하지만 녀석의 행복한 모습은 나를 더욱 행복하게 만든다. 이 녀석과는 어떤 이별을 하게 될 것인가, 미리부터 눈물이 나온다.
새로니, 유나,  리처드가 와서 점심으로 자장면을 먹고 늘어지게 쉬고 갔다. 반갑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그들, 하지만 우리의 식구가 아닌가? 아쉬운 것은 이해를 하도록 노력하는 수 밖에 없다. 타주로 이사를 가더라도, 이곳에 같이 사는 그날까지 나중에 후회가 없도록, 없도록…

 

모처럼 집 앞쪽 front door로 들어오는 walkway 의 pressure washing을 끝내 버렸다. 이것을 생각하면 2018년 7월 경이 생각이 안 날 수가 없다. 그때 구역장을 ‘마지막 chance’라며 겁도 없이 맡아서, 모든 것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에 앞도 안 보고 달렸던 시절, 과정은 좋았지만 결말은 ‘참담하기 까지’ 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후회는 절대로 안 한다.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때 나는 구역모임을 준비한답시고 집 단장의 일환으로 오늘 한 것 같은 대청소를 한 것이다. 이재욱 신부님이 오시던 날이었지… 이제는 모든 것이 추억이고, 개인역사가 되었다. 2018년에는 구역장 연수회도 갔었지.. 그때의 추억도 어찌 잊겠는가?

 

오늘 드디어 shed tool group들이 garage로 ‘첫 입성’을 시작하였다. 시작이 반이라고, 이제는 겨울이 되기 전에 소중한 각종 hardware, tool들이 차고로 들어오게 될 것, 이제는 자신이 있다. 일단 시작된 것, ‘유기적 원리’에 의지하면 된다. 이제는 저절로 알아서 일이 진행되는 것이다. 제일 큰 도전은 역시 tool bench가 아닐까? 현재로써는 구체적인 idea은 없지만 이것도.. 저절로…

 

J. Peterson’s God and Christianity…

‘Jordan Peterson, God, and Christianity’,  이 책을 산지도 일년이 지나갔는데 이제야 겨우 몇 페이지를 읽었을 뿐이다. 관심이나, 흥미가 적어서 그런 것보다는 다른 책들 쪽에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역시 현재 인기가 많은 ‘인기인’ 개인의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 관에 관한 것이라서 우선은 Jordan Peterson 이란 사람을 더 알아야 하는 걸림돌이 있다. 하지만 현재 YouTube를 통해서 지성인 중의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얼마 전에는 완전히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다고 공언을 하였기에 더 이상 이 책을 읽기를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그의 가장 커다란 무기는 역시 그의 ‘첨예한 지성’이고 이 책은 그의 기본적인 성경 해석을 분석한 것이기에 더욱 관심이 간다. 이제 읽기를 시작했지만 현재의 느낌으로는 빠른 시일 내에 완독을 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생긴다.

 

오늘은 짬이 나는 대로 Coursera course를 청강하는 기회를 얻었다. 바로 시작한 것, Atlanta Emory University 신학대학에서 제공하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성서적 기원’이 주제다.  이것에 관심이 간 제일 큰 이유는 구약,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prehistory 선사시기의 학문적 역사적 사실과 구약의 차이, 관계가 궁금했던 것인데, 이것도 역시 과학과 신앙의 대비, 차이, 대결이라고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신기한 광경이 펼쳐진 침실, 해가 중천에라도 뜬 듯한 대낮 같은 밝음, 어찌된 일인가? 시계를 보니 8시가 훨씬 넘었다. 몸이 개운한 듯 느껴진다. 아~ 그렇구나, 평상시보다 거의 한 시간 이상 늦게 일어난 것이다. 평상처럼 깜깜한 속을 어지러운 듯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는 나의 모습이 없어서 편하기도 하고..

너무나 초현실 같이 꾸었던 꿈들도 너무나 선명한데, 이번에는 거의 확실하게 뇌세포에 남아 있다. 우연인가, 이것에 무슨 뜻이 있는 것일까? 100% 분명한 것은 ‘박종섭’이란 동창의 얼굴과 이름 뿐이지만, 왜 그런 꿈을 꾸었는지는 아마도 하루 종일 생각거리가 되지 않을까?

몸이 개운하고 가볍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히 어제 운동한 것과 그 후에 Tylenol 2알의 결과일 것 같다. 과도로 쌓여가는 피로가 어제 절정에 달했고, 오늘 아침의 oversleep으로 풀어졌다고 결론을 내린다.

오늘은 아침 미사를 못하게 되었다. 연숙이 새로니 집에 갈 약속이 되어 있기에 그렇지만,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그 ‘심리적 도움’을 받아 오늘 나도 편하게 피로를 풀게 되었고, 선명한 꿈까지 꿀 수도 있었으니까, 큰 불만은 없다.

그런데… 왜 박종섭인가? 허~ 이것이 문제다. 재동국민학교, 중앙 중고등학교, 그리고 연세대학교까지 같이 다닌 동창은 사실 드문 케이스일 것이지만 그와 친해본 적은 한번도 없으니.. 키가 큰 그룹에 속했던 그와 말도 해본 적도 없다. 나보다는 조금 낫지만 그도 역시 내성적이고 조용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를 기억할만한 것이 거의 없는데, 언젠가 그가 미국에 있는 한국의 Hynix란 반도체회사의 사장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전부인데, 그의 변신이 아마도 나에게는 커다란 놀라움으로 남았던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물론 샘이 날 정도로 부럽고, 다른 쪽으로는 자랑스러운 그런 묘한 심정이었다. 그는 중앙고등학교 3학년 때 나와 같은 반, 그러니까 ‘이공계’반이었는데 어떻게 연세대에서는 인문계 (아마도 상경계) 쪽으로 공부를 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정도면 크게 성공한 동문인데 동창회 쪽으로 그의 이름은 그렇게 자주 등장하지 않는 것도 조금 의아한 사실.

이런 배경으로 그의 모습은 뇌리의 어느 곳에 있었을 터이지만, 왜 그가 오늘 꿈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일까? 정말 우연 중의 우연일까?

 

오늘은 연숙의 스케줄 때문에 부득이 미사를 쉬게 되었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이런 것들도 유연성이 있어야 장기적으로 유리하니까 할 수가 없다. 대신 몇 년 동안 하지 못했던 pressure washer로 집 정문 쪽을 deep cleaning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Hedge trimming 까지 할 수 있었던 것, 오늘의 건조하고 시원한 날씨 덕분이었다.

연숙이 Ozzie를 새로니 집에서 데리고 왔다. 새로니 식구가 내일 여행을 간다고 오늘부터 Ozzie를 봐달라고 한 것, 오늘부터 내주 수요일까지, 짧은 기간은 아니지만 녀석과 매일 산책하는 것도 몸에도 좋으니까…

 

 

Roe v. Wade Collapsing, Erwin Schrödinger, IoT/MQTT

Roe versus Wade, 이제까지 unthinkable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현실로 다가온다는 뉴스를 보고, 정확하게 mixed feeling의 극치를 맛본다. 1973년 이곳에 왔던 그 해 초에 이것이 헌법의 한 조항이 되었던 것, 미국 여성운동의 절정을 이루기도 했던 이것, 낙태법… 50여 년 동안 나는 이것은 나에게 무엇이었던가? 솔직히 한번도 깊이 심사숙고 해본 적이 없었다. 한마디로 ‘나에게 상관없다’라는 자세로.. 1975년 나의 부끄러운 escapade 경험까지 연관이 되어서 잊고 싶기도 했다. 그저 막연히 여성인권을 조금 더 보호한다는 차원 정도였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가 되면서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고… 하지만  진정한 종교, 특히 천주교 신자의 의미를 생각하며 ‘생명의 의미’로 발전하고, 결국은 교회가 고수하는 입장을 이해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나도 pro-life 라고 자처하게 되었다. 그것이 정치계와 연관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하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이런 big news를 보고 뛸 듯이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최근의 ‘DONALD 개XX’들 덕분에 조금 냉정해진 것이다. 하지만 ‘생명 경외’의 기본적인 자세에는 변함이 없다. 문제는 역시  detail에 있는 것이다.

 

Erwin Schrödinger의 묘지석

Erwin Schrödinger: Schrödinger Equation, Quantum Physics에 한때 심취하면서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일명 probability wave equation이라던가? 간단히 말해서 classical physics에서 Newton의 2nd equation이 소립자 세계인 quantum level에서는 이 wave equation으로 바뀌는 것이다. Uncertainty principle에 의해서 모든 입자들의 움직임은 probability wave를 따른다는 것. 크기가 작아지면 일상적인 세상의 모습이 완전히 바뀌는 것, 정말 신비롭지 않은가? 거꾸로 크기가 너무 커지는 초우주 level로 바뀌면 Einstein의 general relativity theory가 모든 것을 설명하는… 그러니까 인간적 눈으로 보는 것은 궁극적인 실재, 현실의 극히 일부에 한정되는 것, 이것을 실감하면 모든 것에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보고 느끼고 듣고… 이런 것들이 세상만사의 진실을 다 설명할 수 없는 것,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을 제대로 사는 방법이 아닐까?

이 뉴턴의 고전물리에 맞먹는 새로운 ‘확율파동방정식’을 유도한 Schrödinger, 그는 물론 이 방정식으로 일약 1930년대 초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Quantum Physics의 거두, 거성으로 길이길이 그 이름이 남는다.

그는 일단 물리학의 거성이지만 다른 물리학 거성을 초월하는 독특한 실재관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철학과 신비주의, 종교, 생명론 등에 첨예한 관심을 가진 ‘가슴이 활짝 열린’ 천재라고나 할까. 그의 강의록 ‘What is Life‘에서 그는 물리학과 생명의 접근을 논하고 있을 정도다.

문제는: 다 좋은데… 알고 보니 그는 간단히 넘어갈 수 없는 개인적인 결함의 소유자였다. 그것도 지나친 것. 이럴 때 그의 모든 업적들은 어떻게 평가 절하가 되어야 할 것인가? 요새 말로 cancel culture가 적용되어야 할 것은 아닐까?

그는 한마디로 pedophile, 그러니까 어린 소녀들과 성관계를 즐겼던 것, 지금 같으면 100년 징역형은 아닐까? 그것도 모자라서, 축첩도 모자라서 아예 집에 본부인과 첩이 함께 살았고, 그 부인은 남편 동료와 관계를 맺으며 살았다고 하니…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기막힌 사실은 이런 해괴한 삶이 그의 과학연구에 커다란 에너지를 주었다는 것. 이제 이 ‘인간’의 ‘파동방정식’을 흠모할 때마다 뒤에 보이는 각종 ‘성관계 장면’이 떠오른다면 어찌할 것인가? 시대마다 독특한 성 문화가 있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예전에는 바람 피우고 축첩을 하고 아이들과 성관계를 맺고 하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관대하게 허용이 되었던 듯한 사실이고, 대신 그 당시에는 동성문화는 완전히 범법취급을 받았지만 지금은 거의 반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양자역학의 기본적인 ‘언어’를 만든 이 천재도 역시 도덕적 시험에서는 완전한 죄인인 것이다. 이런 사실이 서서히 들어나면서 그의 이름을 붙인 각종 장소에서 cancel culture의 영향을 받아 하나 둘 씩 사라지게  되었으니…

그의 고향인 Vienna, Austria 에 있는 그와 wife의 묘소, 그곳에 그의 wave equation이 자랑스럽게 전시가 되고…  그의 또 다른 바람둥이 wife가 제3의 mistress와 합장이 안 된 것, 다행인가 아니면? 되었다면 유례없는 Three’s Company 묘소가 되지 않았을까?

본격적으로 어제 저녁은  a/c 에어컨 계절의 서막을 장식하였고 덕분에 창문을 여닫는 수고를 몇 개월간 잊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늦추려고 했지만, 참 그것은 한마디로 나의 우둔한 생각이 아닌가? 무엇을 위해서 몇$$를 절약하려고… 조금 더 크게 생각하자. 너무나 작은 것에 연연하지 말자… 순리대로 살고, 조금은 나이에 맞는 편안함과 평안함을 추구하자.
지난 밤에는 완전히 열대성 기후를 보는 듯한 ‘습기 찬 대기에 뿌린 약간의 비’ 소리를 들었고, 아~ 이제 서서히 여름이 오고 있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다. 비록 적은 양이지만 축축한 땅의 모습도 반갑고, 다시 출현하는 모기들, 끈끈함 들, 시원한 오후의 소낙비와 옷에 신경 안 쓰는 편안한 낮잠… 등등 모든 몸을 편히 펼 수 있는 모습이 반갑다.  하지만 평년적인 5월은 이것보다는 조금은 싸늘하고 건조한 것, 얼마나 며칠이나 계속될 것인가?

몇 달 만에 체중계에 올라 서 보았다. 평소 체중은 145 파운드를 오랜 세월 유지하고 있었다가 얼마 전 140으로 갑자기 줄었었다. 생각해보니 그 당시에 거의 병적인 식욕감퇴로 고생을 하던 때였기에 당연한 것으로 알았고 이제부터는 140이 정상체중으로 생각하기로 했는데… 다시 오래 전의 것으로 환원을 한 것, 좋은 것인가 아니면 별로? 나의 키의 평균은 사실 140 정도일 듯도 하지만 육체적인 노동이나 운동을 하려면 어느 정도 초과된 체중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현재 나는 아주 활동적인 생활을 하기에 적당한 것이다. 이로서 우리의 식생활에도 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게 되기도 했다.

 

옆집 Dave 집에서 아침부터 요란한 중장비 소리가 나서 보니, 나무를 자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길가 쪽으로 아주 무성하게 자란 삼림을 연상케 하는 키다리 나무들이 잘려나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이런 자연의 모습이 잘려지고 사라지는 것은 조금 슬픈 것 아닐까? 하지만 너무 집 가까이에 서 있는 키다리 나무는 위험한 것이기에 할 수가 없다. 처음에 아틀란타로 이사오면서 놀란 것은 역시 ‘울창한 수목, 삼림’ 그것도 주택과 섞여 있는 것은 장관에 속했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로 키다리 소나무들이 송림을 이루고 있었다. 당시 우리 집을 방문했던 중앙중고 동창생 호룡이가 우리 집 backyard에서  ‘송림욕’을 한다고 할 때 나도 실감을 했었다. 그 당시 backyard는 정말 원시림 송림 그 자체였으니까..지난 30여 년 동안 개발이 가속되면서 모습도 따라 변했지만 그래도 울창한 모습은 인상적이다. 미국의 어느 대도시를 가도 하늘에서 본 모습이 이렇게 ‘시골’처럼 보이는 곳은 눈을 씻고 보아도 없을 듯하다. 언제까지 이렇게 ‘개발’이 될지는 모르지만 적당히 균형을 지킨다면 큰 문제가 없지 않을까?

IoT/MQTT: IoT system에 흥미를 느낀 지도 한참이나 되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니까 ‘무언가 재미있는 것이 나를 기다린다’ 정도가 나의 자세인 것이다. 이런 상태를 나는 상당히 즐기는 편이 아니던가? 실제로 손을 대기 전의 그런 ‘즐거움에 대한 기대’. 이러다가 나의 인생을 수없이 ‘시간낭비’의 피해를 보긴 했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것이 나의 본성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의 매력은 시작하는데 $$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이유도 그렇고, 실용적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으며, 제일 구미가 당기는 것은 ‘머리가 돌아가는 한’ 이것으로 여생을 바쁘게 보낼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이다.

한때 잡초들로 우거진 이 fence부분, 연숙이 깨끗이 정리를 한 후에 드디어 paint가 칠해지고, 이후에 screen 이 복구될 것이다… 보기에 훨씬 정돈된 모습이 되고 있다.

저녁 무렵에 잠시 내린 따뜻한 비, 이후에 backyard의 모습은 실로 봄의 신록  그 자체다. 살아있는 느낌, 깨끗한 모습, 공기조차 꽃가루가 밀려난 것, 역시 비의 도움이었다. 이렇게 주기적으로 내려주는 비에게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인지… 성모님, 감사합니다…

Late, late Daffodils, Teilhard Chardin, Putin

매년 뒤뜰의 Tobey 무덤 앞에서 2월초를 기다리다가 피기 시작하는 수선화, 올해는 무려 2주 가량이나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왜 올해는 이렇게 늦었을까? 다른 곳의 수선화들은 2월 첫 주에 제대로 피었는데… 토양, 일광의 여건이 무엇이 달라졌을까? 옆에서 잠들고 있는 Tobey녀석, 아마도 이것으로 봄이 오는 것도 몰랐을 듯하다. 하지만 늦게라도 피었으니까, 봄은 역시 빠르게 오고 있는 것이다.

 

정리가 안 된 나의 머리 속, 무엇이 이렇게 복잡한가? 며칠 동안hp pc box와 UBUNTU에 시간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이 싫어진 것이다. 아~ 복잡한 세상, 주위, 머리 속 다 지겨워지는 것이다. 시간을 선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일도 못하게 하는 방해꾼으로 서서히 변하는 작은 monster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동기는 Raspberry Pi 로 시작되었지만 또 나는 ‘연필을 깎기’ 시작한 것이다. Stop it, stop it, now! 갑자기 무겁게 느껴지는 남아도는 ‘black hp’ pc box들을 다 치우기 시작하고, 이제부터는 RasPi 한가지만 나의 주변에 둘 것이고 그것만 만질 것이다. 단순하고, 간단하게 살고 싶다. 이제는 RasPi 하나만, 하나만, 하나만…

오늘은 오랜만에 로난이 오는 날이 되었다. 나라니 회사 스케줄과 President’s Day school break로 daycare 가 쉬기 때문에 전에 이미 예정이 된 것이다. 그래, 최선을 다해서 즐기고 즐기게 해주면 된다.

오랜만에 grandparents 집 에서 녀석은 산책 중, 전형적인 남자아이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비가 온 후에 길가에 고인 모든 puddle 고인 물, 시궁창에서 날뛰는 모습, 나도 어렸을 적에 그것이 그렇게 재미있었던 기억, 70년 뒤에도 생생하니…  얼마나 녀석 신이 났을까?

 

어제 오랜만에 박 스테파노 형제와 카톡 인사를 하면서 그의 관심 [과학과 신앙, 종교] 과 나의 그것이 아주 비슷한 것을 확인한 것, 그렇게 반갑고 기쁘다. 그의 생각과 이해는 나의 그것과 중복되는 것들이 꽤 있다. Big Bang Cosmology, Quantum Physics 의 double-slit experiments, entanglement, 카프라 Capra의 동양신비사상 등등..  나는 그에게 내가 심취하는 Teilhard Chardin의 과학적 신앙사상을 언급해서 관심을 이끌어 냈다. 과학과 신앙, 종교가 실재라는 현실을 보는 다른 두 관점이라면, 상이하게 보이는 이 두 종류의 인간이성이 절충을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 논리적으로 보아도 허점이 없다면 이제는 서로 조금 대화를 더 하면 좋지 않을까?  교회는 조금 더 과학사상, 철학을 폭넓게 인정을 하고, 과학계는 그것이 실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만 인정하면 되지 않을까…

Russia Monster, Putin 현재 top news들,  피하고 싶은 것들 중 Donald 개XX 를 제치고 오랜만에 빨갱이들이 top으로 올라섰다. 두 빨갱이 괴수들이 다시 30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역사의 반복인가… 한때 빨갱이들은 북괴와 쿠바 정도로 안심을 했는데…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 바뀌고 있는가. 현재는 Putin이 대표적인 bad guy로 자처를 하는데… 역시 그는 빨갱이 중의 빨갱이임을 재확인하게 되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것에 맞추어 중공빨갱이들이 합세를 하게 되면… 골치 아픈 세상이 오는 것인가?  1930년대 독일어를 쓰는 지역을 모두 자기 것으로 하나 둘씩 먹어 치우던 Hitler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시 하나 둘씩 정치적, 군사적으로 주변 지역을 ‘먹어 치우던’ 그, 그것을 지켜본 이후 세상은 어떤 지옥의 세계를 맛보았던가?  우리 자식세대가 염려가 된다. 하지만 이제 나는 희망을 버리지는 않는다. ‘안 보이는’ 하느님의 인간역사의 개입을 100%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것을 믿는다.

Last Week with Coursera Thomas Berry

Thomas Berry Coursera course의 마지막 주를 지나고 있다. 읽어야 할 것을 필사한 덕분에 Thomas Berry Writings 책의 대부분을 나의 것으로 만들게 되었다. 책들을 읽으며 예전, 특히 2014년 전후에 열을 올리며 읽었던 책들을 꺼내어 그 당시를 회상하는 것, 나에게는 참으로 흐뭇한 시간이다. 그때가 나의 신앙의 차원이 급상승 할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믿게 된’ 것, 아니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 것, 그것이 현재까지 큰 무리 없이 지속된 것은 ‘지식적인 믿음’의 결과가 아닐까? 무조건 믿는 것, 나는 믿지 않는다. 이유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것도 이성적, 과학적인 이유에 근거한 것들 이어야 한다.

Secular Media Blackout, 거의 즉흥적인 나의 반발적 행동이었지만, 의외로 좋은 결과를 나는 즐기고 있다. 아침에 무려 3시간 정도의 아주 평화스럽고 편한 시간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래, 이때 평소에 못하거나 미루어 놓았던 것을 하면 더욱 보람이 있지 않을까? 첫 번째 나의 손이 간 곳은 요즘 들어서 거의 지나치고 있는 아틀란타 대교구 신문인 Georgia Bulletin. 내가 오랜 전 다시 성당 community로 돌아올 무렵부터 관심을 가지고 읽었던 것, 어떻게 된 일인지 Pandemic이후 거의 관심이 떨어지고 front page만 흘깃 볼 정도가 되었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가, 왜 다른가, 물론 우연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럴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연보다는 무엇인가 원인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이 tabloid, 무엇에 홀린 듯 중요한 기사는 다 읽게 되었다. 현재 우리 대교구에 어떤 일들이 있는지 알 수 있는 드문 기회다.

 

어둠 속에서 차갑게 느껴지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는 어둠이 걷히지 않은 아침, 오늘도 나는 가급적 media blackout 속을 지나갈 것이다. 대신 그 시간에 더 많은 글들을 읽을 것이다. 읽었어야 했을 여름목록 책들이 많이 밀려있다. 이제는 겨울목록으로 바뀌어야 할 판…  그렇지만 계속 조금씩이라도 읽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지금의 어려움을 견디어내는 커다란 처방전인 것이다.

어제 순교자 성당, 신임 구 미카엘 신부님과 개인적 대화의 통로 channel을 만들려고 카톡 연결을 시도했다. 놀란 사실: 우선 주보에 연락처 전화번호 대신에 그의 email 연락처가 덩그러니 그곳에 적혀 있었다. 흠~~ 아직 전화가 없으신가.. 그럴 리가 없는데… 할 수 없이 email을 쓰는 수고까지 한 결과는 조금 의외였고 실망까지 하게 되었다. 이전 두 신부님의 활발한 texting 하던 모습과 대비가 되면서, 아~ 내가 완전히 다른 시대감각의 신부님을 대하고 있구나 하는 탄식이 나왔다.  설마 지금 mobile phone에 texting (가급적 kakao) 을 안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나의 문의에 대한 답변의 느낌도 ‘차갑게 간단한’ 것, 허~ 내가 그 동안 spoil 된 것인가, 신부님을 잘못 보고 있었나… 이래저래 전임 이재욱, 이영석 신부님들의 자상한 text message들이 이 싸늘한 가을비 속에서 더욱 그리워진다.

 

 

Assumption & Liberation

 

¶  8월 15일, [대한민국]광복절,  [가톨릭] 성모승천 대축일…  하지만 근래에는 나에게 광복절보다 더 중요한 날이 되었다. 이날은 성모 마리아가 지상의 삶이 끝난 후 육신이 하늘[천국]로 부르심을 받은 날로써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의무 대 축일이다. 올해는 [pandemic] 사정상 대성전 참례는 아무래도 조심스러워 online 대축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래도 이렇게 수동적인 참례라도 큰 걱정 [건강, 경제 등] 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고맙게 생각해야 할 듯하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  교황의 무류성 [papal infallibility]을 배경으로 교회 교의 敎義의 하나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교회가 이렇게 선포한 것으로 우리들은 안심하고 교회 안에서 성모님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1 매일 거의 습관적으로 하는 묵주기도, 그 중에서 오늘을 맞아 영광의 신비 4단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하늘로 불러 올리심을 묵상합시다’ 의 의미를 더욱 일깨운다.

We proclaim and define it to be a dogma revealed by God that the immaculate Mother of God, Mary ever virgin, when the course of her earthly life was finished, was taken up body and soul into the glory of heaven.

오늘 live streaming으로 참례한 순교자 성당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참 좋았다. 큰 기대를 안 하면 이렇던가? 우선 이 방문신부님, 콧수염이 안 보이니 훨씬 보기가 좋았다. 미사 강론을 들으며 나는 눈물까지 흘렸다. 성모님의 고난 중의 희망, 코로사 사태를 가는 우리들에게 정말 본받을 귀감 중의 귀감이라는 것, 가슴 속 깊이 그 성모님의 용기가 나를 일깨운다.

 

¶  어젯밤에는 밖에서 무언가 내리는 듯한 느낌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과연 나가보니 약간의 이슬비가 내린 것이 보인다. 소낙비를 바랐건만 어째 이렇게 가랑비를… 아주 조금… 그래도 땅이 축축한 것은 정말 반갑다. 하늘도 모처럼 구름이 잔뜩 끼어서 비록 기온은 높더라도 시원한 느낌이다. 하루 종일 이런 날씨가 계속되면 얼마나 좋을까?  알고 보니 오늘 기온은 요사이의 그것에 비해서 무려 10도가 떨어진 것이라고 한다. 오늘이 말복 末伏인 것을 감안해서 분명히 최악의 더위는 서서히 우리를 떠날 것이다.

 

¶  S 아오스딩 형제, 참 줄기차고 변함없는 사람, 아침에 카톡 메시지를 보니, 운동하러 Stone Mountain Park에 가니 오늘 무슨 시위가 있다고 문이 닫혔다고 쓰여있었다. 참, 요즈음 들어서 이 친구가 부러울 때가 있다. 자기 하고 싶은 것 주위의 시선에 상관없이 하며 사는 친구…  그래서 요새와 같은 pandemic 하에서는 이 친구가 사는 방식이 나보다 더 심리적으로 건강한 것이 아닐까, 부러운 것이다. 어떻게 그런 삶의 방식을 터득했을까, 이제 어떤 부분은 내가 배우고 싶을 정도다.

 

¶  뜻밖에 집 뒤쪽에 사시는 고국동포 B 선생님 부부가  우리 집 앞문까지 와서 커다란 수박을 주고 가셨다. 물론 처음에는 귀찮아서 door bell 을 무시했는데 또 역~쉬 연숙의 기지와 용기로 큰 실례를 피할 수 있었다.  귀찮은 sales person일 것으로 생각을 했기에 그런 것이지만 가끔 이런 예외도 있긴 하다. 참, 앞 뒷집으로 산지 거의 30+ 년이 가까워 오는 이 인연, 하지만 참 멀게 살아온 야릇한 인연인가? 언제나 나는 이분들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훨씬 가깝게 인생말년을 보낼 수도 있었다는 후회가 남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하며 생각하지만 당장 눈 앞에 안 보이고 잊게 되는 정말 이상한 관계다. 기회가 되면 한 번 술도 같이 하고 식사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오기만 기다린다.

 

  1. 개신교 형제들, 무조건 반발하기 전에 심각한 공부를 조금 더 하고 대화를 하면 어떨지…

Spring Forward Sunday

 

¶  Spring Forward!   지나가는 주중에 줄기차게 내리던 비, 그친 지 며칠 째이지만 하도 많이 내려서 마르는데 시간이 꽤 걸렸지만 오늘로서 완전히 빠삭빠삭한 땅과 하늘의 느낌을 맞게 되었다.

어느새 그 귀찮은 일, 집안의 모든 시계들을 한 시간 앞 forward 으로 돌리는 날이 되었다. 왜 이렇게 귀찮은 법을 만들었지 어떨 때는 은근히 화가 나기도 하지만 나의 힘으로 이것을 바꿀 능력은 전혀 없다. 하기야 이 법에도 의도하는 이로운 목적이 있으니까. 갑자기 저녁 시간이 밝아 진 것 daylight saving 은 사실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bonus일 것이기도 하니까.  이것을 ‘정상’의 시간으로 바꾸는 fall back,  늦가을.. 이제는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세월은 점점 빨라지고 있으니까. 다만, 다음 시계를 바꾸는 그날까지 우리는 어떤 ‘모양새’의 세월을 보낼 까 그것이 궁금할 따름이다.

 

¶  주일미사, 고해성사 깜:  지난 주일 미사에 이어서 이번 주일미사도 사정상 거르게 되었다. 비록 매일미사 참례를 한다고 해도 주일미사는 미사중의 꽃인데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우리도 한심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이 탓’을 안 할 수 없는 그런 처지에 우리가 ‘진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렇게 이상할 것도 없다. ‘그 날’까지 마라톤을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상식에 의거한 현명한 판단을 우리는 매일 아침에 해야 하는 것이다. 요즈음 문제의 주범은 연숙의 불면증이지만 그것 외에도 앞으로 나이에 따른 문제가 없을 리가 없다. 이제 우리의 사회생활은 물론, 모든 신심활동이나 신앙생활도 거의 우리의 건강상태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되기도 한다. 우리들의 비교적 건강함도 무한정 지속될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평화롭게 이성적, 상식적으로 하루하루를 감사하게 보내는 것, 그것이 관건이다.

 

이 사진과 신천지는 무슨 관계?

¶  개신교와 신천지:  요새는 우리 집의 ‘한국소식통’인 연숙을 통해서 그쪽의 소식을 가끔 듣곤 한다. 내가 워낙 그쪽에서 오는 소식을 피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알기에 별로 자세한 소식은 모르지만 요새는 조금 예외에 속한다. 바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이다. 왜 하필이면 그곳이 뉴스의 가운데에 나온 것인가? 그런데 알고 보니 참 기기 막히는 소식은 나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 바로 ‘신천지’인지 구천지인지 하는 걸맞지 않은 이름을 가진 ‘개신교’ [가톨릭이 아니면 일단 개신교라고 생각하고] 사교집단에 관한 것이다.

자세히는 잘 모르지만 그 집단 신도들에 의해서 그 바이러스가 퍼졌다는 것이 골자였다. 그러니 갑자기 뉴스에 나온 것이다.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이번 한국 바이러스 유포의 일등 ‘공범’이 된 셈이다. 하필이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이런 나쁜 뉴스에 연루가 되었는지 한심하기도 하지만, 역시 ‘사필귀정 事必歸正’으로 생각하면 어떨까?

신천지, 이름도 촌스러운 이것에 대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2013년 경이 아닐까? 아틀란타 도라빌 순교자 성당, 하태수 미카엘 주임신부님 재직시절 예비신자 교리반의 [teaching] staff으로 ‘레지오 활동’을 할 때였다. 부활절을 향한 교리반이 과정의 끝머리 즈음에 하 신부님이 특별강의 시간 하나를 추가해서 강론을 하셨는데 그 주제가 바로 ‘사교집단 신천지의 정체’ 였다.

그러니까 이 집단은 새로 등장한 것이 아니었고 꽤 역사가 있었던 모양이다. 예비신자들에게 이들의 정체를 알게 하고 경계심을 일깨워주려는 것이 신부님의 목적이었다.  이들의 특징 중에는 대부분 ‘잘 나가는, 지식적이고 말쑥한’ 젊은이들이 이곳으로 흡수가 되며 이들의 포섭공작이 아주 조직적이라는 것도 있었다. 특히 ‘성경공부’ 같이 하자면서 접근하는 젊은이들은 십중팔구 그들이라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우리 같이 ‘한 물 간 부류’는 사실 그들의 안중에도 없기에 걱정이 전혀 없다. 하지만 교리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문제다. 그들의 언변과 성경지식은 절대로 못 따라가니까. 그렇다. 이것이 바로 개신교의 고민일 것이다. 거의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를 하는 그들, 이제 조금은 자체적으로  ‘교통정리’를 해야 할 때가 안 되었나?  전통과 초대교계를 완전히 버리고 그저 ‘성경유일’로 ‘자기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  문제없는 교황님: 오늘 지난 주일에 이어 다시 교황청 비디오를 보게 되었다. 일요일에 정오에 있는 교황님 주도의 삼종기도의 모습을 보려는 것이다. 이곳에서 교황의 모습을 보고 느낄 수 있고, 그 바티칸 주변에 모인 순례객들의 동정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

지난 주일보다 순례자들의 수는 훨씬 줄어들었지만 아무도 마스크를 착용하지는 않아 보였다. 아마도 바티칸 주변 로마는 그렇게 바이러스가 심하지 않은 모양인가?

하지만 교황의 동정은 지난 주와 달랐다. 삼종기도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video를 통해서 밖으로 방송을 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평상적으로 교황이 군중들을 내려다 보는 것, 바이러스와 큰 상관이 있을까? 하지만 모든 메시지 방송이 끝난 후에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창문으로 나와서 군중들을 축복하는 짧은 시간이 있어서 크게 아쉬움은 없었다.

문제는 이제부터가 아닐까? 분명히 로마 주변에도 감염자 숫자가 늘어날 것이 아닐까?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바티칸의 모든 ‘성사’는 취소가 되는 것은 아닐까? 수요일의 교황님 주재 일반군중과의 만남 시간도 취소가 되었으니, 나머지 행사도 축소가 될 듯..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잊었던 느낌, 가을이 다시..

 

¶  어제 저녁에 backyard에 잠깐 나갔을 때, 아주 오랜만에, 피부에 와 닿는 다른 느낌의 공기를 보았다. 무언가 다른 것, 아하… 바로 ‘가을’이 ‘아주’ 멀지는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이었다. 특별히 대지가 타는 듯이 ‘마르게’ 더웠던 올해의 여름은 인상적이었지만 추분을 며칠 앞둔 때라서 잊혀진 가을의 모습이 그리운 것이다.

달력상의 가을은 추분에서 시작되고 며칠 남지 않았다. 그때로 낮은 하루하루 짧아지기 시작하며 나와 같은 나이의 인간, 피조물들은 어쩔 수 없이 ‘인생의 깊은 가을’로 빠져들어갈 것이다. 모든 것들이 땅으로 떨어지는 계절, 올해는 어떠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인가 미리부터 궁금하다.

 

¶  진실되고 심각한 의미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느님’이라고 불리는 ‘절대’ 를 믿는다 함은 어떤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쉽고 식별할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일초, 하루, 매년 살아가는 것이 ‘믿으며 사는 것’인가? 어렵게 보이지만, 의외로 쉬운 답을 찾으면,  ‘나의 인생은 나에 대한 것이 아니다’ 라는 간단한 것으로 생각의 전환을 하는 것이다. Word On FireBishop  Robert Barron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One of the most fundamental statements of faith is this: your life is not about you. Youre not in control. This is not your project. Rather, you are part of Gods great design. To believe this in your bones and act accordingly is to have faith. When we operate out of this transformed vision, amazing things can happen, for we have surrendered to “a power already at work in us that can do infinitely more than we can ask or imagine.” Even a tiny bit of faith makes an extraordinary difference.

– Bishop Robert Barron (a daily gospel reflection)

 

하루하루, 매달, 매년이 그저 지루하게 느껴지고 사는 것 같지 않을 때 이렇게 조금 깊이 생각하게 하는 말을 들으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 되는가…

한 여름을 가며..

¶  들뜬 기분을 그리워하는 순간을 보낸다. 들뜬 그런 기분을 만끽하고 싶다. 지금 그렇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깊은 마음 속의 강은 잔잔한 평화의 물이 고여있음은 분명하고 그것은 내가 진정으로 만족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위에 흐르는 물은 그렇지 못한 것은, 역시 나는 현재의 시공간에 살아가며 숨을 쉬어야 하는 그런 ‘작은 피조물’임이기에..

그제 아침부터 시작된 ‘변칙적인 일과’가 나를 조금 쳐지게 한다. 이런 out of routine의 시간을 보며 나는 속수무책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규칙적, 의지적 사람’이라던 자부심에는 여지없이 수치감을 남겨주는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비록 이틀을 그런 식으로 ‘낭비’했지만 과연 결과적으로 그렇기만 한 것일까?

한달 반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나의 가슴 깊은 곳에서… 나는 이미 평상적인 일과에서 떠났다! 라고 소리치고 있다. 그래 이런 경험도 하며 다른 여유를 경험하라는 유혹을 받는다. 그래, 이것도 작은 ‘방학, 휴가’라고 생각해라.. 하는 그런 것이다. 그래.. 나도 쉬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나는 너무도 잊으려 발버둥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고 보니 조금 피곤하기도 하다. 모든 것 잊고 ‘다른 식의 날들’을 며칠이라도 보내고 싶은 충동이 든다. 같은 나날들… 이것을 장기간 유지하는 것은, 나의 자랑이 되기도 했지만 반대로  ‘짐’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 우리는 정말 ‘휴가, 신체적 정신적 휴가’를 갖지 못하고 장기간 살고 있다. 이제는 남들과 그런 것으로 비교하고 싶은 마음은 많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조금은 휴가라는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아직도 나는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쉽게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하지만 그래도 그것을 찾고 있는 나에게 성모님은 무엇인가로 답을 주실 것이라 나는 소망한다. 아마도 간단한 답이 아닐지도 모르고 찾지 못할 수도 있을지도..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  지난 몇 개월 동안 ‘미친 듯이’ 나의 에너지를 필요로 했던 것, 그것은 바로 우리 집의 computer system upgrade였다. ‘공짜 system’으로 오랜 동안 편했던 내가 그것들을 $$$으로 사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한 내가 이제는 ‘굴복’을 하게 된 것인가? 불과 몇 푼이라도 그것들, 주로 Windows같은 것들, 돈을 주고 사는 것은 가급적 피하고 살았다. 잘도 견딘 것은 자랑스럽다.

하지만 이제는 세월도 변했구나.. old pirated Vista 가 ‘황혼’을 맞게 되며 대체방법을 찾았지만.. 역시 upgrade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고.. 우연히 ‘사게 된’ 정말 싼 hp pc box들.. 그것이 나의 자존심을 조금은 살려 주었다. 결과적으로 몇 달간 over correction 을 해서 현재 brand new upgraded system을 ‘자랑’하게 되었다. 비록 hardware는 10년 전의 것이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앞으로 5년 정도는 무리 없이 우리 집의 digital information system의 충족시켜 줄 것이다. 

이런 몇 달간의 ‘미친 듯한 세월’이 갑자기 고맙게 끝나 버렸다. DDR2로 upgrade하려던 old system, 또 실수로 잘못 산 것이 계기였다. 이제는 고만하자.. 고만하자… tool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그것을 더 활용하며 쓰는 쪽, 더 productive 한 것에 서 시간을 쓰자.. 머리를 세게 맞는 기분으로 이제는 이것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찾게 되었다.하지만 결과적으로 나(우리)는 크게 걱정 없이 pc system과 backup system을 갖추게 되었으니.. 성모니 감사합니다.

 

¶  7월의 중순을 향하는 며칠들.. 나의 친구 Ozzie가 나의 앞 sofa에서 졸고 있다. 6월에 2주간 우리 집에 머물 때, 이 녀석이 Tobey의 대신으로 나에게 온 것이라는.. 비록 Tobey를 생각하면 너무도 가슴이 쓰려오지만 1년이 지나며 조금은 나아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지만 .. 솔직히 생각하는 것, 그 자체를 나는 아직도 피하고 싶으니.

오늘, 금요일 평상적으로 편하게 아침 미사엘 갔다가 와서 조금은 relax하는 날이지만 3주째 계속 오늘도 외출을 해야 한다. 예랑씨의 어머님이 브라질에서 7월 10일 오후에 선종하셨단다. 그러니까 장례미사가 아닌 연도만 바치러 순교자 성당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아침 잠을 조금 더 잘 수 있다는 매력이 있는 것이 바로 정오에 있는 순교자 성당의 미사지만.. 아직은 익숙지 않다. 그때 그때 보아가며 선택을 하면 되겠지.

 

¶  요새는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 Teilhard de Chardin 의 ‘깊은 초현대 신학’에 빠진 듯한 기분, 꿈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살고 있다. 어떻게 반세기 전, 아니 거의 한 세기 전에 이런 ‘선구자’가 있었나 감탄을 하고 있다. 미래를 정확히 바라보는 신부, 신학자가 아닌가? 현재 ‘지구’가 돌아가는 ‘꼴’을 어떻게 이 예수회 신부님은 감지를 하셨단 말인가?

하지만 무엇보다 나에게는 정말 필요한 답을 준 것 같은 듯 하다. 나는 항상 의문이 있었다. 어떻게 ‘너무도 신비적인 그리스도 신앙과 매일 매일, 아니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월들’을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현재의 세속적인 시공간에서 숨을 쉬어야 하는 신앙인들이 어떻게 2000년 전의 신학을 조화시키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것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못 찾았는데 이 분의 ‘초현대, 진화적 신학’은 정말 명쾌한 방향제시가 아닌가?  세속적 삶을 더욱 더 열심히 살아가는 것, 그것을 이 선구자는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궁극적인 예수님이 오메가가 되어 모든 것을 ‘수렴’하게 하는 찬란한 종말의 세계가 온다는… 와… 정말 장엄한 모습이 아닐까?

올 여름은 이분의 사상에 더욱 더 흠뻑 빠져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슬금슬금 들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요새 나의 ‘유일한’ 즐거움은 바로 ‘이성적이고 신비스런 초현대 신학에 관한 저서들을 필사, typing’ 바로 그것이다. 나만이 가진 비밀, 즐겁게 읽고 typing하고 softcopy를 남겨놓은 일… 이것은 정말 내가 발명한 최고의 즐거움 중에 하나다.

고통스런 책, ‘종교철학’

얼마 전에 아틀란타 순교자성당의 도서실에서 대출한 책, ‘종교철학’1을  읽다 말다 하며 처음으로 ‘번역서가 주는 고통’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 한 마디로 읽는 그 자체가 고통인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나? 손 쉽게 떠오르는 이유는:

 

  1. 책이 다루는 주제, 내용 그 자체가 원래부터 고통스럽게 난해한 것이다.
  2. 그 난해한 주제를 원 저자가 횡설수설, 일부러 난해한 표현으로 독자를 혼동 시켰다.
  3. 역자는 충실히 번역을 했지만 난해한 내용을 거의 ‘직역’수준으로 다루었다.
  4. 역자가 제대로 원 주제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거의 ‘1:1″의 직역의 결과를 낳았다.

 

과연 어떤 것인가? 물론 1~4 가 모두 상호관계가 적은 별개의 것이 아니어서 서로 혼합된 이유가 ‘읽는 고통’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만 집어 내라면 어떤 것을 고를까 하는 과제에 접했다. 정말 ‘머리에 쥐가 나게 하는’ 난해 함의 고통은 아마도 이유 No. 1 이나 2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 것은, 책의 후미에 있는 ‘역자 후기’를 읽으며 내린 결론이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읽는 즐거움’을 준 부분은 바로 이 ‘역자 후기’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저자는 내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거의 미지의 인물이지만 역자는 손쉽게 이해 할 수 있는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이가 나와 거의 같고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등에서 철학전공, 후에 가톨릭 대학교 총장 역임.. 여기서 생각난 것이 ‘아마도’ 나의 국민학교 동창생 ‘김정훈’ 부제와 같은 시기에 유학을 했을 가능성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정훈이가 그 당시 김수환 추기경의 기대를 받았던 ‘장래의 거목’으로 촉망을 받았고 불의의 사고로 요절한 것, 이 ‘오창선 신부’의 미래와 비교하니 다시 한번 김정훈 부제의 부재가 안타깝기만 하다.

 

이 ‘어려운 책’ 중에서 ‘머리에 쥐를 나게 하는 글 중의 압권 壓卷’을 고르라면 다음 글을 뽑을 수 있다.

 

 

‘침묵의 부정적 특성’

침묵의 기도는 일상적 활동과 입에 오르내리는 말들의 관점에서 보면 우선 부정적인 것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획책하지 않음이며 어떤 것에 의해서도 책동되지 않음이다. 그것은 어떤 것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음이며 더 이상 말함의 운동에로 몰아넣어지지 않음이다. 그것은 정신의 고요함이요, 전체 인간의 침묵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침묵하면서 일체의 “어떤 것”, 즉 세계의 모든 사물들과 이름들과 관심사를 파악함 내지 파악하고자 함의 개념으로부터, 말로 나타냄 또는 말하고자 함으로부터 풀어놓을 것이다. 그는 세계를 소유함과 세계에 의해 점령당해 있음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는 욕구들과 그 호기심들이 진정되도록 할 것이다. 그는 아주 평온하고 태연자약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인간이 무 無와 같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위의 글은 내가 추측하기에 거의 100% 직역일 듯하다. 어떨까.. 역자가 조금이라도 풀어서 설명을 할 수 없었을까? 조금 쉬운 말, 부드러운 말로… 더 많은 독자들이 ‘쉽고 빠르게’ 이해를 돕게 노력을 했으면 어땠을까? 아쉽기만 하다.

 

 

‘역자후기’ 중에서

다른 언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데에 따른 어려움이란 새삼스러운 사실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소개되는 작품과 관련하여 옮긴이는 이러한 사실을 개인적으로 깊이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깊은 생각이 독자 여러분에게 조금이나마 전달될 수 있기를 옮긴이는 기대해 본다.

소개되는 작품의 주제는 종교철학이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종교는 어떤 위상을 갖고 있는가? 점차 과학화되고 합리화되어 가는 현대세계 안에서 종교는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성의 광장” 앞에서 종교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이 역자후기의 서문은 역시 ‘번역의 어려움’으로 시작하고 있다. 왜 그럴까? 원저가 워낙 어려운 것이라? 아니면 적당한 우리 말 용어가 없어서?  쉬운 말로 설명을 하기가 힘들어서?  구체적인 이유는 생략되었지만 나는 솔직히 무엇인지 짐작은 한다. 하기야 쉽지 않은 분야, 신학과 철학이 함께 엮인 것이니.. 쉽지 않은 것은 100%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특히 ‘공돌이’로 굳어진 머리로 이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 함은 거의 허무한 명제일 듯 하다. 하지만 노력은 한다. 조금씩 조금씩… 그날까지..

  1. 종교철학, 베른하르트 벨터 적, 오창선 옮김, 1998년 분도출판사

Never Lose Hope

Hope… 희망 希望..  인생의 황혼기, 후반기 중의 한 시점을 살아가면서 이 희망이란 말은 사실 크게 .  생각보다 더 많은 뜻을 함축한 이 희망이란 말, 요즈음 들어서 조금 더 깊고 다르게 생각 하게 되었다. 희망이란 말, 그렇게 단순한 말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은 이번에 ‘우연히’ 읽게 된 Pope Francis (교황 프란치스코) 의 short essay: Never Lose Hope 에서였다.

우리는 ‘희망이 필요하다!’. 허.. 누가 모르나. 희망이 적거나 없으니까 문제가 아닌가? “하느님, 예수님이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시니까 우리는 희망이 있다”.. 는 말, 솔직히 그렇게 실감을 할 수가 없을 때가 너무나 많은 우리의 삶이 아닌가?  그런 먼 미래의 희망들이 절망이나 실망 속에 빠진 우리들에게 그렇게 큰 도움이 될까?

문제의 관건은 역시 ‘믿음’이다. 그것도 무조건 적인 믿음, 바로 그것이 아닐까? 영원한 생명, 절대로 다시는 죽지 않으리라는 엄청난 약속의 희망으로부터 우리는 자기가 처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희망이다.  절망의 순간들 속에 우리는 희망이 있는 영원한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그것이 믿음의 진실인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간단히 보이는 진리가 그렇게도 ‘다루기 handle’ 가 힘든 것일까?

 


 

NEVER LOSE HOPE

POPE FRANCIS

 

Hope never disappoints. Optimism disappoints, but hope does not! We have such need, in these times which appear dark. We need hope! We feel disoriented and even rather discouraged, because we are powerless, and it seems this darkness will never end.

We must not let hope abandon us, because God, with his love, walks with us. “I hope, because God is beside me”; we can all say this. Each one of us can say: “I hope, I have hope, because God walks with me.” He walks and he holds my hand. God does not leave us to ourselves. The Lord Jesus has conquered evil and has opened the path of life for us…

Let us listen to the words of Sacred Scripture, beginning with the prophet Isaiah… the great messenger of hope.

In the second part of his book, Isaiah addresses the people with his message of comfort: “Comfort, comfort my people, says your God. Speak tenderly to Jerusalem, and cry to her that her warfare is ended, that her iniquity is pardoned… A voice cries: ‘In the wilderness prepare the way of the Lord, make straight in the desert a highway for our God. Every valley shall be lifted up, and every mountain and hill be made low;  the uneven ground shall become level, and the rough places a plain. And the glory of the Lord shall be revealed, and all flesh shall see it together, for the mouth of the Lord has spoken'” (Isaiah 40:1-2, 3-5)…

The Exile was a fraught moment in the history of Israel, when the people had lost everything. The people had lost their homeland, freedom, dignity, and even trust in God. They felt abandoned and hopeless. Instead, however, there is the prophet’s appeal which reopens the heart to faith. The desert is a place in which it is difficult to live, but precisely there, one can now walk in order to return not only to the homeland, but return to God, and return to hoping and smiling. When we are in darkness, in difficulty, we do not smile, and it is precisely hope which teaches us to smile in order to find the path that leads to God. One of the first things that happens to people who distance themselves from God is that they are people who do not smile. Perhaps they can break into a loud laugh, on after another, a joke, a chuckle… but their smile is missing! Only hope brings a smile; it is the hopeful smile in the expectation of finding God.

Life is often a desert, it is difficult to walk in life, but if we trust in God, it can become beautiful and wide as a highway. Just never lose hope, just continue to believe, always, in spite of everything…. Each one knows what desert he or she is walking in – it will become a garden in bloom. Hope doe snot disappoint!

The prophet Isaiah once again helps us to open ourselves to the hope of welcoming the Good News of the coming of sal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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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aiah chapter 52 begins with the invitation addressed to Jerusalem to awake, shake off the dust and chains, and put on the most beautiful clothes, because the Lord has come to free his people (verses 1-3). And he adds: “[M]y people shall know my name; therefore in that day they shall know that it is I who speak; here am I” (verse 6). It is to this “here am I” said by the Lord, which sums up his firm will for salvation and closeness to us, that Jerusalem responds with a song of joy, according to the prophet’s invitation…

These are the words of faith in a Lord whose power bends down to humanity, stoops down, to offer mercy and to free man and woman from all that disfigures in them the beautiful image of God, for when we are in sin, God’s image is disfigured. The fulfillment of so much love will be the very Kingdom instituted by Jesus, that Kingdom of forgiveness and peace which we celebrate at Christmas, and which is definitively achieved at Easter…

These are, brothers and sisters, the reasons for our hope. When everything seems finished, when, faced with many negative realities, and faith becomes demanding, and there comes the temptation which says that nothing makes sense anymore, behold instead the beautiful news… God is coming to fulfill something new, to establish a kingdom of peace… Evil will not triumph forever; there is an end to suffering. Despair is defeated because God is among us.

And we too are urged to awake a little, like Jerusalem, according to the invitation of the prophet; we are called to become men and women of hope, cooperating in the coming of this Kingdom made of light and destined for all, men and women of hope…. God destroys such walls with forgiveness! And for this reason we must pray, that each day God may give us hope and give it to everyone; that hope which arises when we see God in the crib in Bethlehem. The message of the Good News entrusted to us is ur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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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was also Isaiah who foretold the birth of the Messiah in several passages: “Behold, a young woman shall conceive and bear a son, and shall call his name Immanuel” (Isaiah 7:14); and also: “there shall come forth a shoot from the stump of Jesse, and a branch shall grow out of his roots” (Isaiah 11:1). In these passages, and meaning of Christmas shines through: God fulfills the promise by becoming man; not abandoning his people, he draws near to the point of stripping himself of his divinity. In this way God shows his fidelity and inaugurates a new Kingdom which gives a new hope to mankind. And what is this hope? Eternal life.

When we speak of hope, often it refers to what is not in man’s power to realize, which is invisible. In fact, what we hope for goes beyond our strength and our perception. But the Birth of Christ, inaugurating redemption, speaks to us of a different hope, a dependable, visible, and understandable hope, because it is founded in God. He comes into the world and gives us the strength to walk with him: God walks with us in Jesus, and walking with him toward the fullness of life gives us the strength to dwell in the present in a new way, albeit arduous. Thus for a Christian, to hope means the certainty of being on a journey with Christ toward the Father who awaits us. Hope is never still; hope is always journeying, and it makes us journey. This hope, which the Child of Bethlehem gives us, offers a destination, a sure, ongoing goal, salvation of mankind, blessedness to those who trust in a merciful God. Saint Paul summarizes all this with the expression: “in this hope we were saved” (Romans 8:24). In other words, walking in this world, with hope, we are saved. Here we can ask ourselves the question, each one of us: Am I walking with hope, or is my interior life static, closed? Is my heart a locked drawer or a drawer o open to the hope which enables me to walk – not alone – with Jesus?….

Those who trust in their own certainties, especially material, do not await God’s salvation. Let us keep this in mind: our own assurance will not save us; the only certainty that will saves us is that of hope in God. It will save us because it is strong and enables us to journey in life with joy with the will to do good, with the will to attain eternal happiness.

Christian hope is expressed in praise and gratitude to God, who has initiated his Kingdom of love, justice, and peace… It will truly be a celebration if we welcome Jesus, the seed of hope that God sets down in the furrows of our individual and community history. Every “yes” to Jesus who comes, is a bud of hope. Let us trust in this bud of hope, in this “yes”: “Yes, Jesus, you can save me, you can save me.”

 

예수회, 이냐시오의 고민

예수회 창시자 성 이냐시오

예수회, S.J.  성 로욜라의 이냐시오,  S.J…. Society of Jesus. 우리에게 비교적 친근한 느낌을 주는 이 ‘가톨릭’ 단체는 과연 무엇을 지향하는가? 이것이야 말로 우문현답 愚問賢答 을 연상하게 하는 질문이지만 실제로 어떤 때는 나도 확실하지 않다. ‘예수회’니까 물론 절대적, 궁극적인 목표는 ‘역사적, 현존’ 예수님일 것이지만 과연 그것을 지향하는 신학적인 철학, 방법은 무엇인가? Wikipedia같은 곳을 보면 ‘공식적인 사실’들이 수 없이 많이 열거되어 있고, 모두 사실적, 객관적, 역사적인 것들이라 왈가왈부를 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내가, 우리가’ 머리로, 가슴으로, 피부로’ 받는 그 느낌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내가 직접 가까이에서 보고 듣는 ‘객체’들에 의해서 좌우 될 것이다. 그 객체는 어떤 것이며 누구인가? 가장 확실한 것은 바로 ‘예수회 사제, 신부, 수도자, 학교’ 같은 것이 아닌가?  내가 학교 같은 단체는 접할 기회는 없지만 사제들은 바로 앞에서 경험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나에게는 예수회의 전부인 것이다.

나의 두 본당 중 영어권 본당의 사제는 오래 전에 결혼을 한 ‘동방교회’ 출신으로 로마교회로 온 신부로 그야말로 ‘교구신부’다. 예수회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하지만 모국어 ‘도라빌’ 본당의 사제는 언제부터인가 교구사제에서 예수회 사제로 바뀌어서 이제는 예수회란 말이 빠지는 것이 이상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정말 가까운 곳에서 ‘예수회’를 느끼며 사는 것이다.

우리들, 평신도들에게 이런 것이 무슨 큰 차이가 있을까?  멀리서 보면 큰 차이는 없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분명히 차이를 느낀다. 예수회 사제, 특히 본당신부는 전통적으로 ‘교구 사목’이 그들의 특기는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큰 차이가 없이 느껴지니까 별 문제는 없다. 오히려 영성적인 측면으로 보면 더 이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이냐시오의 영성을 사목에 주안점으로 삼으면 평신도들은 독특한 혜택을 받지 않을까.  그래서 교구 사목상에도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문제가 있다면 다른 곳에 있는 듯하다. 나는 절대적으로 신학전문가가 아니기에 섣불리 단언은 못하지만 내가 접하는 ‘미디어’ (fake가 아닌 전통적 미디어)를 통한 예수회, 그것도 특히 미국(북미주) 예수회는 더욱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야당과 여당’을 이루는 정치구도와 흡사한가. 한마디로 예수회는 미국의 liberal, democratic, progressive한 것이라면 거의 틀림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것은 미국만의 현상은 아닐 듯하다. 모국도 아마 마찬가지가 아닐까?

미국의 가톨릭 매체들을 살펴보면 이 ‘양극화’가 뚜렷하다. 특히 ‘또라이’ 트럼프가 들어오며 이 현상은 숨길 수가 없는 듯하다.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예수회 프란치스코교황’의 ‘자비’ 선포로 인한 ‘전통 교리의 후퇴’를 우려하는 ‘극단적인 비난’인데, 양쪽의 주장을 들어보면 모두가 일리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아무리 교리, 교의 해도 세상과 세속의 ‘진화’는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 아마도 예수회의 주장일 듯하다.

쉽게 말해서 ‘자비와 정의, 원칙’의 대결인 셈인데, 이들 신앙인들에게는 ‘중도’라는 ‘타협’은 없는 것인가?  제일 심각한 것이 Homosexual 들을 ‘자비’로 받아들이자는 문제다.  또한 Abortion(낙태)에 대한 자세도 그 중에 하나다. 이것도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인가?

그 중에서도 가장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다름이 아닌 대한민국만이 가질 수 있는 ‘사상논쟁’을 빼놓을 수 없다. 예수회 신부들은 여론적으로 보아도 ‘진보적’임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빨갱이’라는 평을 쉽게 받는다. ‘정구사’라는 독특한 약어의 느낌도 다를 것 없이 ‘빨갱이’라고 매도된다. 이것도 타협점이 없는 것일까? 한마디로 주위를 살펴보면 ‘또라이 트럼프’처럼 서로 잇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리기만 했지 절대로 대화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나의 생각은 어떤가? 아무래도 나이 탓, 나의 가족적 역사로 보아서 예수회 같이 무조건 자비는 말하고 싶지 않다. 이유 있고, 정의가 밑받침이 되는 자비와 사랑.. 물론 이것은 쉽지 않은 것이지만 이것 말고는 방법은 없는 것 아닐까?

Conscious of consciousness

 

Max Planck, father of Quantum Physics

 

요새 나는 온통 이 흔해빠진 단어, ‘consciousness,  의식 意識’의 홍수에서 헤매며 사는 느낌이다.  어쩌면 이곳, 저곳, 그곳.. 나의 눈이 가는 곳마다 이 consciousness란 말이 보이는 것일까? 하기야 이것은 우문현답 愚問賢答 식으로 말하면 ‘나의 눈이 가는 곳마다 (대부분 책들) 그것이 보이니까, 아니 내가 그런 것을 내가 의식적으로 읽거나, 보거나 생각하고 있으니까’  정도가 아닐까?

무슨 큰 진리나 발견한 듯한 쾌감이 따라오는 이 최근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나는 ‘절망 뒤에는 반드시 다시 태양이 떠오르는’ 그런 ‘작은 은총’을 느낀다. 죽으란 법은 없는가.. 요사이 나의 ‘독서 관심’을 이쪽으로 이끌어주는 것, 나의 의식적 의지만은 아님을 어찌 내가 모르랴..

과학과 종교, 인간과 하느님, 보이는 현실과 초자연 세계를 연결해 주는 고리, 그것이 바로 consciousness라는 놀랍지만 생소한 idea가 이제는 ‘말이 된다’라는 경지까지 온 것, 그것이 나는 아직도 놀랍기만 하다.

20세기 초의 Quantum theory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한 string theory, multiverse등이나 NDE (Near-Death Experiences)를 통해서 지나간 반세기 동안 그 동안 taboo처럼 취급되던 것들이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다. 드디어 big convergence (science & religion) 가 시작된 것인지는 몰라도 가히 흥미로운 발전이 아닐 수 없다.

끈질긴 materialistic mindset을 가지고 자란 나에게 종교적 신비적인 경험은 사실 말도 안 되는 영역이었지만 근래에 들어서 ‘가슴을 열고’ 본 ‘새로운 현실’은 아주 다른 것임을 알게 되었다.  온 우주가 의식적, 의식으로 가득 찬, 사랑의 시공간이라는 놀라움. 우리의 두뇌에 갇혀있는 포로로 알던 ‘의식’은 그 자체가 자체라는 사실 등등은 아무리 ‘영혼의 밤’ 속에서도 밝은 빛으로 나를 살려준다.

이런 모든 것들은 가히 ‘복음적’이 아닐 수 없다. 태어나면 죽어서 잊혀져야 하는 존재가 실제로는 ‘영원한 존재’라는 조심스러운 나의 희망적 염원이 서서히 실감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예수님의 복음 중 제일 큰 복음이 아닐까?

Kierkegaard to the rescue..

예기치 않은 작은 일 하나로 어제 오후의 기분은 평상적인 평화로운 화요일의 그것과 다른 것이었다. 오랜 만에 마음의 평정이 공략을 받는 듯한 위기감까지 느낀 고요한 화요일 오후, 오랜 만에 openculture website를 들렸다. 이곳이 언제부터 나의 favorite site list에 있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최소한 3년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이곳은 주로 ‘인류 문화적 유산’에 큰 가치를 두고 그 가치를 유지 발전 보급하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그 일환으로 무료나 저렴한 비용으로 online course를 제공하는 information을 싣곤 한다. 이곳의 소개로 내가 ‘들었던’ course도 이제는 몇 개가 된다.

오늘 쳐지는 기분 속에 나의 눈에 들어온 글자가 바로 Kierkegaard란 이름이었다. 한글로는 ‘키에르케고르’ 로 번역되는 이 19세기 덴마크의 국보급 철학자에 관한 course가 그곳에 소개되고 있었다. 게다가 course가 어제인 6월 4일에 시작이 되니, 알맞은 timing이 아닌가?

8주간 계속되는 이 course는 19세기 덴마크 실존주의 신학,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의 성장 배경과 그의 주 관심인 그리스도교적 실존철학, 주관론, 소크라테스의 Irony개념, 그리고 급변하는 세상에서 느끼는 ‘절망감’ 같은 것들을 공부한다.

 

문제는 왜 내가 이 course에 관심이 가는가 하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보아온 이름 ‘키에르케고르’, 그는 과연 누구인가, 왜 많은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이 사람에 관심을 두는가.. 알고 싶다. 피상적으로 이 철학자의 profile을 보면, 우선 그의 철학은 완전히 그리스도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바로 이것이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특히 ‘죽음에 이르는 병, The Sickness Unto Death‘이라는 후기작의 제목은 바로 ‘요한복음 11장 4절1‘ 에서 나온 것을 알고 나서 나는 이번 여름 8주를 coursera 제공, ‘open & free2‘ course를 통해서 이 덴마크 신학철학자에 대해 알아 보기로 결심했다.  

이런 과정에서 기억 속을 헤치고 나온 것이 하나 있다. 1984년 신동아 잡지의 별책 부록, ‘역사를 움직인 100권의 철학책’이란 것, 분명히 ‘키에르케고르’는 그 곳에 소개 되고 있었다. 특히 위에 소개한 ‘죽음에 이르는 병’에 관한 저자의 소개가 그곳에 있었다. 그것을 이곳에 전재를 하여 기억력을 살린다.

이러다 보니.. 온종일 쳐지고 우울한 머리가 한결 가벼워짐을 느끼며,  한결 살맛이 난다. 이래서, 우울할 때 그대로 쳐지고 있으면 하나도 해결되는 것이 없다는 나의 경험철학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키에르케고르(덴마크 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

죽음에 이르는 病 (1849)

 

표재명 表在明 (고려대 문과대학교수 서양철학)

역사를 움직인 100권의 철학책3

 

 

<1>

‘쇠얀 키에르케고르’는 1813년 5월 5일 북 유럽의 작은 나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부유하고 경건한 모직상의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친에게서 풍부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변증력을 훈련 받았고 깊은 시름을 물려 받았다. 코펜하겐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배우고 부친의 뜻에 따라 신학 국가시험에 합격, 왕립전도학교에서 목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한편, ‘소크라테스’를 언제나 염두에 두고 쓴 ‘아이러니의 개념’으로 철학 학위를 받았다. 한때 베를린대학에 가서 ‘헤겔’의 뒤를 이은 만년의 ‘셸링’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1838~39년에 그는 부친의 소년시절에 관련된 비밀을 알게 되어 ‘큰 지진’을 체험하고 죄의식에 눈을 떴다. 이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 ‘레기네 올센’과의 결혼도 포기하고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지냈다.

1846년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악덕 풍자신문 ‘코르사르'(해적)와 충돌하면서 그는 사회와 대중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종교적 저작가로서의 사명에 살 것을 결심했다. 1854년부터는 팜플렛으로 된 ‘순간’으로 덴마크국교회와의 싸움에 나서 순교자의 길을 택했는데, 1855년 가을에 길에서 쓰러져 병원에 옮겨졌으나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11월 11일 42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현대실존사상의 선구적 사상가 철학자라고 한다. 그러나 그 자신은 ‘종교적 저작가’ 또는 ‘그리스도교적 저작가’로 자처했다. 그의 저작활동의 목적은 ‘사람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라는 것을 기술하는 것이며, 낱낱의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있는 곳에서 그 자신의 책임으로 이 문제와 씨름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각 사람에게 ‘단독자 單獨者’의 범주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단독자의 범주는 그의 모든 저작활동이 그것을 축으로 전개된 그의 모든 저작활동이 그것을 축으로 전개된 근본 이념이며, 그리스도교의 결정적 범주였다. 그에게 있어 단독자는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에게 무한한 관심을 가지는 믿음으로 홀로 서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 모두가 나면서부터 그리스도인인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에 이토록 힘을 써야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 물음의 뜻은 ‘그리스도교 세계는 터무니없는 착각이다’, ‘그리스도교 세계는 저도 모르게 그리스도교를 말살시켜 버렸다’는 그의 놀라운 단언에서 밝혀진다.

그가 볼 때 당시의 그리스도교 세계는 ‘데카르트’ 이래의 근대적 합리주의사상이라든가 낭만주의 사상, 특히 그리스도교와 국가를 합리화하고 종교와 국가를 융합시킨 헤겔철학의 영향 아래 그리스도교 본래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미 신앙이 아니라 한갓된 교리와 사상으로 변질된 겉치레만의 것이었다. 그리하여 “신약성서’의 그리스도교, 사도 使徒 들의 그리스도교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행복을 좇아 ‘미적인 것’의 범주에서 사는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착각이요 기만이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 세계에 그리스도교를 이끌어 들이는 일’을 위한 그의 저작활동의 의의와 저작가로서의 사명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그의 정치-사회적 인식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가 자기의 사명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1848년에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을 냈고 파리혁명을 기폭제로 유럽 전역에서는 혁명의 폭풍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덴마크에도 혁명의 여파가 밀려와 절대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로 바뀌면서 시민의 자유와 평등이 널리 보장받는 사회가 되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시대의 유행이 된 사회주의의 이념이나 국민 사회운동이 시대의 구원이 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 같은 것은 낱낱의 단독자를 대중이라든가 그 밖의 유개념의 추상물 속에 묻어버리는 대중화, 평균화의 위험을 촉구하는 것일 뿐이었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민중을 집단의 힘 에로 결속시키는 일이 아니라 거꾸로 그것을 붕괴의 시대의 유일한 고정점으로서 하느님 앞의 단독자로 해체시키는 일이었다. 곧 이 시대의 구원은 각 사람이 ‘자기의 원시성 原始性’에 눈뜨고 ‘1800년을 그것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뛰어 넘어’ 예수와 함께 하는 삶, 곧 신약성서의 그리스도교로 돌아가는 데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각 사람에게 ‘감히 자기 자신이 될 것’ 곧 ‘감히 하느님 앞에서 오직 홀로서는 단독자가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거대한 노력과 이 엄청난 책임을 지고 오직 홀로 서는 특정한 단독자’가 스스로 되려고 했으며 또 다른 사람도 그러기를 원했다. 그는 이것을 ‘그리스도교적인 영웅주의’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영웅주의를 위해 ‘교화와 각성을 위한 그리스도교적이고 심리학적 論述’로서 <죽음에 이르는 병>(1849)을 썼던 것이다.

 

<2>

<죽음에 이르는 병>의 본문은 ‘인간은 정신이다. 그러나 정신은 무엇인가? 정신은 자기다’ 라고 하는 유명한 말로 시작한다. 인간은 ‘정신’으로, 그리고 이 정신을 ‘자기’로 파악한 데 ‘키에르케고르’의 독특한 인간이해가 있다.

‘헤겔’은 정신의 본질을 주관과 객관, 사고와 존재, 이성과 감성, 논리와 자연을 의식적으로 종합하는 ‘절대정신’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는 이 같은 절대정신은 유한한 인간에게는 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유한한 인간의 실존재하는 정신은 영원자의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현실로는 그렇지 못한 자기이며, 영원자가 되는 일을 과제로 안고 있는 자였다. 본래 그렇게 되어야 할 자기가 되려는 자기생성의 무한한 노력 중에 있는 것이 인간 실존의 진실이요, 인간으로서 실존재하는 정신이란 이러한 과제를 자신의 과제로 자각하는 자기, 이 과제를 지금을 사는 이 단독의 자기의 삶을 통해서 실현하려는 자기였다. 자기가 이러한 의미에서의 실존이 되어 있지 못한 상태, 자기의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상실의 상태에 있는 것, 이것이 곧 절망인 것이다.

이러한 절망이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 곧 구제를 위한 첫째 계기가 된다는 변증법적인 성질의 것이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죽음은 일체의 것의 마지막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으로는 죽음조차도 일체의 것의 마지막이 아니다. 죽음이 최대의 위험일 때, 인간은 삶을 희망한다. 그러나 죽기를 바랄 만큼 위험이 클 때, 그리고 죽음조차도 희망이 될 수 없을 때 이것이 절망이다.

절망의 진행과정은 절망의 현상학이 된다. 절망의 강도는 인간의 자기의식의 도 度 에 따라서 높아진다. 곧 ‘자기가 절망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절망’ (영원한 자기를 가지는 일에 대한 무지)에서 ‘자기가 절망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는 절망'(어떤 영원한 것을 가진 자기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것)에로 높아진다. 이것은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에 있어서 정신성의 미적 실존의 단계에 해당되는 ‘재미’를 찾아 헤매는 직접적인 대상의식의 절망에서 윤리적-종교적 실존의 단계까지 이르는 자기의식의 절망이 된다.

윤리적 실존에 눈을 뜬 인간의 절망은 ‘절망하여 자기자신 이려고 하지 않는’ 약한 여성적 절망이 되든지 ‘절망하여 자기자신 이려고 하는’ 반항적인 남성적 절망이 된다. 이 반항적 절망은 자기의식의 강도에 따라 악마적인 반항, 절망적 광포에까지 이른다.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이 현대의 윤리적 상황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소크라테스 적인 윤리적 교정이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주지주의적 윤리는 시대의 구원이 되지 못한다. 인간은 알면서 선을 행하지 않고 부정을 행하기 때문이다. 이 반항하는 인간의지가 죄를 자각하고 그 마음을 돌이킬 때 구제의 길이 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의 계시와 원죄의 가르침의 의미가 있다.

그리하여 <죽음에 이르는 병>의 제2부에서 절망은 ‘하느님 앞에서의 절망’ 곧 죄로 규정되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서는 일, 곧 믿음에 의한 절망의 근절을 말하고 있다.

이 <죽음에 이르는 병>은 그 다음해에 나온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훈련>과 함께 ‘파스칼’의 <팡세>에 비겨지는 그리스도교 변증론의 명저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구명된 그의 인간이해는 그 후의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현대의 실존주의 현상학 해석학 변증법적 신학은 물론 교육학 심리학 문학예술사상의 형성과 전개에 크게 이바지했다.             

 

주요저서

  • Either-Or <이것이냐, 저것이냐>, 1843.
  • Fear and Trembling <공포와 전율>, 1843.
  • Repetition <반복>, 1843.
  • Philosophical Fragments <철학적 단편>, 1844.
  • The Concept of Dread <불안의 개념>, 1844.
  • Stages on Life’s Way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 1845.
  •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철학적 단편에 대한 後書>, 1846.
  • The Present Age <현대비판>, 1846.
  • Work of Love <사랑의 역사 役事>, 1847.
  • Christian Discourse <그리스도교 講話>, 1848.
  • Training in Christianity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훈련>, 1850.
  • Attack upon Christendom <순간>, 1855.
  • The Point of View for my Work as an Author <관점>, 1848.
  1.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2. 이 course는 100% 무료로 audit 청강이 가능하다.
  3. 신동아 1984년 1월호 별책부록

광주의거의 성서적 조명 – 김찬국

올해 5월은 조금 특이하다. 왜 ‘갑자기’ 1980년의 5월이 자꾸만 생각이 났을까? 이제까지 나에게 추억의 5월은 주로 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어린 시절, 철없던 젊은 시절들의 그것이었다. 그때의 5월들은 언제나 나에게 아련하고 짜릿한 기쁨을 주는 그런 시절들이었다. 하지만 올해의 5월은 5월 18일의 그 ‘비극적 사건’ 으로 거의 고정이 되었다. 5.18 광주사태, 나의 기억에 남았던 단어, 광주사태였다. 나의 나이를 감안해서도 더 이상 외면, 미룰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머리를 모래 속에 파묻고 외면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 조금 더 알아보자.. 내가 외면하고 살았던 그것을 하나 하나씩 다시 뒤져보자.. 나의 눈에 1989년 5월호  천주교 잡지 ‘생활성서’가 눈에 들어왔다. 정치적인 시각이 아닌 신앙적, 교리적인 눈으로 본 광주는 과연 어떤 것인가? 최소한 그들은 양심적 진실을 말하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것을 ‘전재’하기로 하며, 내가 잊은 역사를 다시 들쳐내 보기로 한다. 첫 번째 기사가 당시 연세대 부총장 김찬국 교수의 ‘광주의거의 성서적 조명’, 여기에 전재를 한다.

 

 


 

5월이 오면, 우리의 분노와 미움과 원망을 승화시켜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고 그의 구원을 확신하는 신앙의 길을 따라 삶의 새로운 포용력을 키워 나가야 할 것이다.

김찬국

 

 

민족적 수치이자 비극인 광주학살

 

9년 전인 1980년 5월 18일 비상계엄령 전국확대조치에 항거한 광주 학생들의 평화적 시위가 도화선이 되어 피비린내 나는 광주시민 학살사건이 일어난 민족적 수치이자 비극인 당시를 기억할 때 우리 모두 무어라고 해야 할지 할 말을 잃고 만다.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으로 무죄한 학생과 시민들이 비참하게 죽어갔던 것이다. 실로 천인공노할 민족적 대참사였지만 한편 한국인의 민중항쟁역사에 뿌려진 거룩한 의거의 희생이었던 것이다.

이 광주의거로 인한 민족전체의 분노와 탄식의 소리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었지만 군사독재정치를 자행하던 집권자들은 폭동진압이란 명목으로 학살사건을 정당화했고, 시민들의 무죄한 희생에 대한 보상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광주시민들의 명예회복을 해주지 않고 지내온 지 9년이 된 것이다. 더욱이나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사건진상을 밝히는 국회청문회가 열렸었지만 비무장의 학생과 시민에게 발포하여 끔찍스런 사상자를 내게 한 군 작전 책임을 가리는 데 있어서 책임을 회피하고 은폐하고 있는 부끄러운 오늘의 역사의 현장에서 국민들은 또다시 분노와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광주에 5월이 오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 것을 갈망한다면

왜 우리는 죽는가?

정의를 위해 싸우다가 쓰러지는 자들의

죽음에 무슨 남는 게 있는가?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고 일어섰다가

권력자에게 살해당하고 만 자들,

이들 이름 없는 자들이 흘린 피에

누가 있어 과연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 빛고을출판사가 펴낸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1988)에 실린 ‘오월의 묵상’에서 인용

 

이런 기도는 한국인의 탄원시이다. 5월이 오면 김준태의 시 ‘아아,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여’란 탄원시로 한 맺힌 분노를 삭이면서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새 희망과 새 힘을 키우는 다짐을 하게 된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 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타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구약성서의 시편에는 탄식시 또는 탄원시들이 많이 있다. 민족적 수난과 역경에서 하느님께 한을 풀면서 도와달라고 부르짖는 신앙의 시편들이다.

 

“야훼여!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영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밤낮없이 쓰라린 이 마음, 이 아픔을,

언제까지 견뎌야 합니까?

언제까지 원수들의 우쭐대는 꼴을 봐야 합니까?”

– 시편 13편

 

원수로 인해서 박해와 피해를 입고 있는 탄식자의 한풀이 시다. 이 시인은 ‘언제까지’ 란 표현을 네 번이나 쓰면서 하느님의 구원을 호소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신앙의 힘을 키워가고 있다. 이런 탄원시들은 개인작품이지만,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민족의 탄원을 대변하면서 신앙의 힘을 키워나가는 기도문이 되고 있다.

오월 그날이 오면 우리 광주시민 뿐만 아니라 온 국민들이 다 이런 시로써 한을 풀면서 새로운 다짐을 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예언자들도 시적인 표현으로 자기들 당대 국민의 소리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대변하였다.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는 심판예언자였다. 권력형 구조악으로 피해를 입은 약자들의 인권을 대변할 때 분노를 터뜨리며 욕하는 저주의 말로 시작하였다.

 

“저주 받아라!

너희 공평을 뒤덮어 소태같이 쓰게 만들고 정의를 땅에 떨어뜨리는 자들아,

성문 앞에서 시비를 올바로 가리는 사람을 미워하고 바른 말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자들아 너희가 힘없는 자를 마구 짓밟으며 그들이 지은 곡식을 거둬 가는구나

– 아모 5,7-11

 

아모스는 하느님의 심판을 우선으로 하는 사회정의를 강조하였다. (아모 5,18-20).

 

폭군으로서 11년간 남쪽 유다를 통치한 여호야킴(609-598) 왕 때 하바꾹 이란 예언자가 등장하여

 

“야훼여,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이 소리

언제 들어 주시렵니까?

호소하는 이 억울한 일,

언제 풀어주시렵니까?

……

보이느니 약탈과 억압뿐이요,

터지느니 시비와 말다툼뿐입니다.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끝내 무너졌습니다.

못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등쳐 먹는 세상,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 하바 1,2-4

 

이런 탄원의 말로 당시 시대상을 대변하면서 “화를 입으리라”라는 저주의 심판선언을 하고 있다. (2,12-20).

 

 

최고 책임자까지도 마땅히 심판 받아야 한다

 

이스라엘 왕정역사에서 제일가는 폭군으로 유다 왕 므나쎄(687-642)가 있었다. 12살 때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45년간 다스렸는데 우상을 만들어 야훼 하느님께 불충성한 신앙적 배신과 폭력정치를 저질렀는데 후세 역사가인 신명기적 편집자는 므나
쎄 왕을 고발하고 “그가 저지른 죄는 유다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2 열왕 21,17)고 적어 놓았다.

 

“그는 우상을 만들어 유다를 죄에 빠뜨렸다… 므나쎄는 나의 눈에 거슬리는 그 못할 짓을 하도록 이끌어 유다 백성을 죄에 빠뜨린 데다가 무죄한 사람의 피마저 흘려 예루살렘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 2 열왕 21,11-16

 

이 말을 예언자의 말이라고 하면서 쓴 글이지만 후대 역사비평가인 신명기적 편집자의 정확한 역사서술과 평가가 담겨져 있음을 본다. 므나쎄 왕의 폭력정치시대에는 백성들이 입을 다물어버렸기 때문에 반체제인사로서 저항한 예언자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솔로몬 왕도 실은 자기가 왕이 될 때에 찬성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왕이 된 다음에 피의 숙청을 하고 궁전과 성전을 짓는 데에 강제로 국민노동력을 동원하고 세금을 강제로 징수한 죄와 또 이방종교의 신을 예루살렘에 허용한 죄 때문에 후세사가에 의해서 고발이 되었었다. 솔로몬이 죽은 다음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이 되어 (기원전 922) 남 유다의 왕으로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922-915)이 왕위에 올랐다. 르호보암은 원로정치인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젊은 후견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선왕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웠다. 그렇지만 나는 그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메우리라. 선왕께서는 너희를 가죽채찍으로 치셨으나 나는 쇠채찍으로 다스리리라”(1 열왕 12,12-15)라고 했다는 것이다.

후세사가는 르호보암 왕이 끝내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12,15)고 지적하고 있다. 선조들보다도 더 큰 죄를 범하여 ‘야훼께 미움을 샀다’ (1열왕 14,22)고 평가되어 있다.

구약 역사에서 왕정정치가 시작되고 남북분열이 된 다음 북왕국 이스라엘에는 군사 쿠데타가 수없이 일어나 선왕을 죽이고 정권을 잡는 일이 일곱 차례나 있었다. 이런 혼돈이 200년이나 계속되다가 북 이스라엘은 강대국인 아시리아에게 멸망 당하고 말았다. 신명기사가는 왕들의 업적을 평가할 때마다 북 이스라엘의 최초의 왕인 여로보암 왕(922-901)이 저지른 종교죄 (우상신을 섬긴 죄)의 전철을 밟아 죄를 지었다고 명기하고 있다. 폭력정치죄나 우상종교를 허용한 죄는 역사적으로 두고두고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되어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과 자료로 알려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남 유다의 여호야킴 왕 (기원전 609-598)과 예언자 예레미야와의 관계가 예레미야 서에 가끔 나온다. 즉 폭군과 대결한 예언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예레미야는 성전설교에서 당시 사회상을 고발하였다.

 

“너희의 생활태도를 깨끗이 고쳐라. 너희 사이에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여라. 유랑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말라. 이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죽여 피를 흘리지 말라…. 너희는 훔치고 죽이고 간음하고 위증하고 바알에게 분향하고 있다…. 이 땅 위에 나의 맹렬한 진노를 쏟으리라, 아무도 나의 타오르는 분노를 끄지 못하리라” (예레 7,.5-20).

 

하느님은 분노하시는 분으로서 여호야킴 왕의 폭력적 탄압정치와 우상숭배를 심판하신다는 점을 예언자 예레미야 가 대변하고 있다.

 

“그날이 오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야훼의 손에 죽은 시체들이 너저분하게 굴러 다니리라…. 백성의 목자, 민중의 우두머리들아, 너희가 도망쳐도 난을 피하지 못하리라…”

– 예레 25,33-38

 

혹독한 심판의 예언이다.

 

폭군인 여호야킴 이 새로운 강대국인 바빌론의 침략을 받아 굴복했었다가 3년 후에 바빌론에게 반기를 들자 다시 침략을 받아 유다 전국이 침략군에게 짓밟히고 말았다.(기원전 598). 신명기적 역사가는 이런 평가를 남겼다.

 

“이런 일이 유다에서 일어난 것은 므나쎄가 온갖 못할 짓을 하는 것을 보시고 야훼께서 유다 백성을 내쫓으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이루어진 것일 따름이다. 그런데다가 그는 무죄한 피마저 흘려 예루살렘을 피바다로 만들었으므로 야훼께서는 용서하실 마음이 없으셨던 것이다”

– 2 열왕 24,3-4

 

우리가 이런 성서적인 조명으로 광주 민중항쟁을 보면 참으로 하느님은, 무죄한 사람들의 피를 흘려 도시를 피바다로 만든 폭력적 진압을 한 군관계 책임자 뿐만 아니라 이에 관련한 최고 책임자까지도 국민과 역사 앞에서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며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보시는 것이다. 그 해 5월 광주에서 무참히 희생당한 사람들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대열에 나섰다가 총칼로 인한 폭력으로 생명을 잃거나 부상을 당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 가족들의 한을 풀어주고 그들의 정당한 인권이 회복되어 역사에서 그들의 희생 정신이 바르게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광주시민의 희생은 민주화운동의 길잡이

 

“광주에 5월이 찾아오면 들려오는 이 회피할 수 없는 질문에 대답해주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

새 생명의 눈부신 빛 줄기가 이제 세상 구석구석을 비춥니다.

우리는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의 동이 트는 첫 창조를 봅니다. 아멘”

– ‘5월의 묵상’ 중에서

 

 

인간의 비극은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비극자체는 비참한 종말이지만 비극을 극복하고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약동과 희망을 만들어 나가야 할 책임이 살아남은 우리 사람뿐만 아니라 온 겨레에게 지워져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이 예수께서 기득권을 가진 종교인들이 힘을 가진 로마 총독 빌라도를 업고 무죄한 예수를 잡아갔을 때 도피하거나 모른다고 했었고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도 멀리 피해 있었었다. 그러나 예수가 부활하신 다음에 흩어졌던 제자들이 예수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새롭게 받아들여 예수의 교훈과 복음을 널리 펼치는 데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순교까지 하면서 예수의 삶과 그의 교훈을 따라 실천하는 데에 자신들의 삶을 투신했던 것이다.

김준태 시인은 ‘아아,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여’ 란 시를 이렇게 끝맺고 있다.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 가는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자기 희생이며 그의 부활사건은 그의 삶만 아니라 그 자신인 진리의 부활과 희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5월이 다시 오면 우리는 광주의 희생과 새로운 약동을 불러 일으키고 그 수난과 희생을 새롭게 의미화하여 한국 민주주의의 부활과 정의사회의 건설을 위한 기회로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구약의 시편 작가들도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는 신앙에 의한 삶의 길을 보여 주고 있다.

 

“악한 자가 잘 된다고 불평하지 말며 불의한 자가 잘 산다고 부러워 말아라. 풀처럼 삽시간에 그들은 시들고 푸성귀처럼 금방 스러지리니 야훼만 믿고 살아라.”

– 시편 37,1-2

 

“야훼께서는 정의를 사랑하시고 당신께 충성하는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악하게 사는 자는 영원히 멸망하며 악인들은 그 자손이 끊기리라.”

– 시편 37,27-28

 

 

탄원시들은 억울한 일들을 고발하면서 하느님께 분노를 터드리고 구원을 호소하고 마지막에는 하느님께 감사찬송을 드리는 내용으로 끝나고 있다. 시편 13편을 보면 원망하는 소리로 원수를 고발하다가 (1-2절), 다음에는 구원을 호소한다.

 

“야훼 나의 하느님

굽어 살피시고 대답해주소서.

죽음의 잠 자지 않도록

이 눈에 빛을 주소서.

……….

이 몸은 주의 사랑만을 믿사옵니다.

이 몸 건져주실 줄 믿고 기뻐합니다.

온갖 은혜 베푸셨으니

야훼께 찬미드리리이다”

– 시편 13,3-6

 

이런 하느님께 의지하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이 들어주셨음을 확신하고 끝에 가서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감사찬송을 하게 된다. 미움과 원망에서부터 시작했다가 정의의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을 믿고 신뢰할 때 그 원망이 희생으로 바뀌어져서 찬양으로 끝나는 그런 전환을 보게 된다.

5월이 오면, 우리의 분노와 미움과 원망을 승화시켜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고 그의 구원을 확신하는 신앙의 길을 따라 삶의 새로운 포용력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광주에서 무참히 희생당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 가족들의 한을 풀어주고 그들의 정당한 인권이 회복되어 역사에 길이 남아 그들의 희생정신이 바르게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찬양 시편에서 우리가 배우는 바가 또 있다. 시편 33편을 요약해본다.

 

“의인들아 야훼께 감사하며 기뻐 뛰어라.

………….

옳은 사람들의 찬양이라야 기뻐 받으신다.

………….

야훼의 말씀은 언제나 옳은 말씀.

그 하시는 일 모두 다 진실이다.

………….

왕들아 너희가 대군을 거느렸다고 이길 성 싶으냐?

힘 좀 있다 해서 궁지에서 살아날 성싶으냐?

군마만 믿다가는 살아나기 어렵고 대군을 거느렸다 해서 사지에서 벗어나지는 못 하리라.

야훼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은, 그 사랑을 바라는 자들을 자켜보시며…………

우리가 이렇게 당신만을 기다리오니 야훼여, 한결같은 당신 사랑 베푸소서.”

 

여기에서 의인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힘을 키워나가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의인들이 자기교만에 빠져서 하느님의 역사의 심판과 구원을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고 남을 정죄만 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오심’을 기다리게 하는 신앙을 키워주려 하고 있다. 하느님의 오심을 이 5월의 광주와 함께 생각해 볼 때 하느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기초로 하느님의 승리를 의심치 않고 믿고 기다리는 확신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바빌론 군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기 직전인 위기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될 유다 나라의 최후를 앞에 두고서도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여주었다.

 

“나 야훼가 선언한다. 나 비록 이 백성에게 이토록 큰 재앙을 내린다 마는 그만큼 약속한 행복도 모두 베풀 것이다…….. 이 땅에서 다시 밭을 사고 팔게 되리라……….. 이렇게 나는 이 백성의 운명을 회복시켜주리라. 이는 내 말이다. 어김이 없다.”

– 예레 32,42-44

 

 

멸망 후의 회복을 예언한 것이고 약속한 것이다. 예언자의 이런 꿈이 그냥 꿈으로서가 아니라 실현될 약속으로서 이스라엘의 회복과 해방과 재출발을 전망한 것이다.

1989년 5월이 다시 온다. 광주의 5월은 우리 온 국민이 겸허한 마음으로 희생의 피를 기억해야 한다. 군부 독재가 몰고 온 광주시민의 희생은 우리의 의로운 민주화로의 길을 바르게 보여주는 역사의식의 기초가 되고 민주화 운동의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광주의거를 이렇게 성서적으로 조명해볼 때 하느님께서 정의와 자비로써 희생당한 광주시민의 명예의 회복만 아니라 한국 국민 전체의 자유와 정의의 회복을 보여주시리라고 믿는다.

 

김찬국 씨는 연희대 신학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부총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