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란타 성체대회: a p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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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behold, I am with you always, until the end of the age.” (Matthew 28:20)

 

“(보라, 세상이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오 28:20) 위와 같은 올해의 thematic verse를 배경으로, 아틀란타 대교구 주관 2015년 미국 동남부 성체대회 Eucharistic Congress 가 6월 초(6월 5일, 6일)로 다가왔다. 나에게 일년이란 세월이 67마일의 속도로 느껴짐은 작년 성체대회의 기억을 더듬으면 알 수 있다. ‘엊그제’ 같은 느낌이니까..

올해 성체대회의 theme은 ‘I will be with you always‘.. 마태오 Matthew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until the end of age.. ‘세상이 끝날 때가지’ 가 생략된 비교적 귀에 익은 표현이다. 하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은 나에게는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예수님이 항상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는 ‘하느님의 의지’.. 이 말씀이야 말로 ‘복음 중의 복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올해로 어느덧 20주년을 맞게 되어서 누가 보아도 이제 이 연례 대회는 완전히 자리를 굳건히 잡은 듯 하다. 아틀란타가 1996년 올림픽을 주최하며 호경기와 급성장을 예상하던 때, 당시의 선견지명을 가진 Francis Donohue 대주교님의 용단으로 조촐하게 시작 되었지만, 급팽창하는 대교구를 함께 모이게 하고 ‘성소 난’에 봉착한 교회에 돌파구를 제시하는 뚜렷한 목적을 유지하며 건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한때 재정난 (eg. subprime mortgage crisis, housing bubble)으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대교구 여론의 도움이었던가, 난관을 극복하고 예전의 열기를 그대로 간직한 모습으로 건강한 장래를 내다 보게 되었다.

우리가 이곳에 참가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5년 밖에 되지 않지만, 이것도 우리에게는 ‘금자탑’에 속한다. 예상 밖으로 우리에게 이 행사는 큰 은총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의 3만 명이 ‘운집’하는 이곳엘 가면 ‘천주교’가 절대로 ‘소수 종교, 방어적 종교’라는 의심을 말끔히 씻어 버릴 수 있다. 성체 신심이라는 말조차 생소하게 들리던 나에게 이런 대회는 ‘모조리 배울 것 투성이’ 인 기회라서 ‘절대로 참가하자’라는 결심을 하였기에 ‘죽을 정도로 아프지’ 않은 한 이 날을 달력에서 비워 두고 산다.

작년까지는 ‘두말 없이’ 우리의 한국본당 순교자 성당에 ‘묻어서’ 참가하는 것이 ‘규칙’이었지만, 올해부터는 ‘예외’로 바꾸어서.. 단체 행동에서 벗어나 우리들 만의 ‘개인 참가’ 하기로 하였다. 교통편 때문에 가급적 성당 car-pooling이나 bus를 타면 좋겠지만 그것이 실제로 문제가 없지 않았다. 아침에 가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올 때가 문제임을 작년에 bus가 ‘예고도 없이’ 끊어진 바람에 당황한 기억으로 Never Again! 을 되 뇌이며 ‘우리 차’로 자유롭게 가기로 한 것이다. 대부분 교우들이 성체대회의 절정인 closing vigil mass를 기다리지 않고 ‘점심을 먹은 후’ 일찌감치 돌아가는 것이 문제였다. 올해부터는 우리에게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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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congress program을 언뜻 들여다 보니.. 작년과 같은 Hollywood celebrity 급 keynote speaker는 보이질 않는다. 생각하면 이것이 ‘정상’일 듯 하다. 성체대회가 무슨 show나 entertainment는 아니니까.. 하지만.. Not so fast! 다른 의미의 celebrity급 speaker의 모습과 이름이 보였다. 바로.. Father Robert ‘Bob’ Barron!  우아~~ 솔직히 말하면 나에게 Hollywood star급 보다 brainy하고, 현재 미국 가톨릭 계의  ‘급상승’하는 56세 신부님, 바로 Father Barron이 오는 것이다.

월남 신자들은 규모가 커서 자기들 만의 모임이 있지만 우리들은 어차피 English Track에 속한다. 그러니까.. 언어에 상관없이 ‘영어권’의 인물들에 익숙해야 하는데.. 얼마나 많은 한국어 신자들이 이 keynote speaker들을 알고 있을까? 결국은 부지런히 ‘예습’을 하는 수 밖에 없다. 다른 speaker 중에는 Teresa Tomeo, Kerri Caviesel이 포함되어 있는데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Father Barron처럼 익숙한 이름은 아닐 듯 하다. 그래서 올해는 집중적으로 Father Robert Barron에게 관심을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Robert ‘Bob’ Barron, 1959 년 시카고 출생 (56세), 시카고 대교구 신부님, Mundelein 신학교 총장, author, scholar and Catholic evangelist.. 나이에 비해서 화려한 직함을 가지고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가톨릭 신학대가 Thomas Aquinas 토마스 아퀴나스 에 매료되었고 결국 1986년에 신부 서품을 받았다.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Washington DC)에서 Master 학위를 받았고, 1992년에는 프랑스 파리의 Institut Catholique de Paris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외국어로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라틴어에 능통하다고 한다. 얼마 전에 암으로 서거한 시카고 프란시스 조지 추기경은 그를 one of the Church’s best messengers라고 했듯이 그는  초현대 디지탈 미디어를 이용한 많은 저서, video, website, blog, newsletter, podcasts등을 발행하고 있고, 전 세계를 순회하며 인기 있는 강연, 강의를 하고 세속적인 media를 적극적으로 포용하여 가톨릭 교리, 핵심을 전파하고 있다. 그 중에서 2011년에 출시된 10 편 documentary series:  The Catholicism Project 는 미국을 위시한 16 개국 대중적 TV를 통해서 방영이 되었다. 그의 TV program은 1950년대의 Fulton Sheen 대주교 이후에 처음으로 ‘상업적 TV’에서 방영이 된 case가 된다고 한다.

이런 그의 resume를 떠나서, 나는 이 ‘젊고 handsome’하고 머리 좋은 신부님을 언제쯤 알았던가? 아마도 위에 언급된 TV program, Catholicism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program을 본 적이 없다. 얘기만 들었을 뿐이다. DVD를 사기에는 비싼 것들이기도 했고, 그 것이 나올 당시만 해도 나는 별로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Keynote Speaker: Father Robert Barron

Keynote Speaker: Father Robert Barron

그러다가 그의 website: Word On Fire 를 정기적으로 subscribe하면서 그를 거의 정기적으로 접하게 되었고 크리스마스나 사순절 쯤이면 그의 newsletter를 받아 보기도 했다. 그러니까.. 최소한 그의 style은 조금 익숙한 편이다. 하지만 그를 ‘가까이서’ 본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Postscript: May 30, 2015

Never Mind!  오늘 성체대회 website를 우연히 보니.. 이것이 웬일인가? Keynote Speakers 명단에서 Father Robert Barron 이름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완전한 disaster.. 하도 실망을 해서 이곳엘 갈까 말까 생각을 할 정도다. 하기는.. 올해의 여러 가지 느낌이.. 20년 주년 기념적인 이 성체대회에 김이 빠진 듯 한 그런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실망.. 실망..

Mother’s Day 2015

창고처럼 겨울을 난 back porch, 청소 뒤, 때 빼고 광낸 모습..

창고처럼 겨울을 난 back porch, 청소 뒤, 때 빼고 광낸 모습..

 

¶  뜨겁고, 피곤한 big cleanup:  이틀 간 집안 대 청소를 하며 먼지를 꽤나 많이 먹었다. 아마도 몇 년 동안 쌓였던 먼지일 것이다. 또한 무겁기만 한 stuff들을 옮기며 생긴 심한 근육통과 육체적, 정신적인 피로감이, 느닷없이 갑자기 찾아온 early heat-wave와 겹쳐서 나를 더 쳐지게 만든다. Mother’s Day 아침, 며칠 째, 거의 90도에 가까운 ‘고열’로 모든 것들이 따끈하게 달구어 진 느낌이고 이번의 더위는 5월 특유의 dry heat가 아니고 조금은 습한 더위라서 밤에도 더웠다. 처음에는 창문을 그냥 열어놓고 견딜까 했지만 그것이 아니다. 낮에 너무나 근육을 쓰는 일을 했던지 나의 몸이 빨리 식지를 않는 것이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이렇게 일찍 a/c(air conditioner)를 가동했는지.. 우리의 ‘고물, clunker’ 수명을 넘긴 듯한 a/c, 올해도 수고를 많이 해 주어야 하는데.. 과연 올해를 넘길지 궁금하다. 이것은 capital spending에 가까운 ‘거액’을 요구할 터인데.. 이래 저래 ‘피곤하다…’

 

¶  어버이날과 어머니날:  어머니 날.. 나는 어떤 어머니를 생각해야 하나… 나의 어머니, 우리 집 아이들의 어머니, 주변에서 돌아가신 어머니.. 살아계신 어머니.. 오늘 어머니 날 주일 미사에서 ‘이태리 유학’ 하 신부님, 몇 년째 미국사목에도 불구하고 heavy accent로 ‘머더스 데이’를 말하신다. 한국식 ‘어버이’날에 익숙하신지 아버지까지 함께 언급을 하시지만 이곳에는 따로 아버지 날이 있는지 알고 계신지 궁금하다. 비록 부모님을 함께 기리는 ‘어버이 날’의 의도는 좋았을지는 몰라도 어머니와 아버지의 고유한 차이를 무시한 것 같은 ‘어버이 날’ 은 아직까지 생각해도 별로 좋은 idea가 아닌 듯 싶다. 항상 머리 속에 있는 것 같은 우리 어머님을 다시 깊이 생각해 보니, 불현듯 다시 보고 싶다. 비록 하늘나라엘 가면 볼 수는 있을 터이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옆에서 보고 싶은 것이다. 어머님을 제대로 떠나 보내지 못한 후회와 슬픔은 분명히 나의 남은 여생에서 십자가일진대 어떻게 그런 사치스런 바램을 논할 수 있을까. 그저 그저 사랑합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 저를 용서하세요.. 라는 넋두리만 내 입가에서 맴돈다.

 

우리시절의 ‘어머님 은혜‘, 1950년대 동요

 

¶ P 베로니카 아드님들:  오늘 여름 같은 Mother’s Day에 지난 주에 돌아가시고 장례미사를 치른 P 베로니카 자매.. 그 자매님의 두 ‘미혼’ 아들이 ‘감사와 인사’를 하러 난생 처음 순교자 성당에서 미사에 우리와 같이 ‘참여’를 하였다. 분명히 우리 옆에서 미사에 동참을 했지만, 어리둥절하고 확실히 무슨 뜻의 미사인지는 잘 몰랐을 것이다. 그래도 열심히 주위를 따라 일어났다 앉았다.. 심지어는 무릎을 꿇는 등 최선을 보여 주었다. 아마도 아무도 그들이 성당에 처음 나온 사람들인 것을 몰랐을 것이다. 작년 이즈음에는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며칠 전에는 어머니까지 떠나 보낸 후, 처음 어머니 날을 맞는 그들 두 형제를 보니 가슴이 메이지는 슬픔을 참을 수가 없었다. 미사가 끝나고 나서 마침 우리가 속한 마리에타 2구역이 마련한 ‘맛 있는’ 미역국 점심을 하며 생소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대로 사람들과 인사도 나누는 등 coming out같은 느낌의 시간을 보냈는데, 우리의 바램은 큰 형이 언젠가 우리 가톨릭 공동체에 합류해서 신앙의 눈을 뜨는 것인데, 쉽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레지오의 정신, 성모님의 도움으로 불가능한 것은 없을 것이다.

Jesus in Galilee

갈릴래아의 예수님

갈릴래아의 예수님

갈릴래아 호수를 배경으로 계시는 예수님… 이 그림은 기묘한 인연으로 알게 된 배 HC 대건 안드레아 형제님의 작품이다. 몇 년도에 그린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5년 전 이후의 것일 듯 하다. 이 갈릴래아 호수의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온 것은 지난 성탄절 무렵이었다. 배 형제님이 보내주신 성탄 카드에 이 그림이 있었다. 몇 개월 후에는 이 그림이 picture frame용으로 큰 것이 보내져 와서 우리 집 family room 가운데 걸려 있다. 갈릴래아 예수님이 우리 가정을 보살펴 주시기 시간한 것이다.

기묘한 인연.. 정말 기묘한 인연으로 알게 되고 만나게 된 형제님, 나보다 몇 살 위이신 인생선배님이지만 나이보다 젊게 보이는 탓일까.. 어떨 때는 친구처럼 느껴지는 형제님. 이 대건 안드레아 형제님은 우리와 또 다른 ‘묘한’ 인연을 맺고 병상에서 가톨릭에 귀의하고 곧바로 성모님의 품에 안기신 돼지띠 동갑 베로니카 자매님의 친정오빠가 되신다.

 마음의 문을 꼭꼭 닫고 하느님을 거부하던 베로니카 자매님의 오빠로써 꺼져가는 동생의 생명을 보며 무엇을 제일 먼저 생각했을까? 병을 낫게 하고 싶지만 인간의 한계를 아셨는지 곧바로 다음의 세상을 생각하고 ‘불도저’같은 우직함과 사랑으로 동생을, 본인이 믿는 하느님께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우격다짐’이 결실을 보아서 우리와 연결이 되었고 그 동생 자매님을 ‘안전하게’ 하늘나라로 보낸 것이다.

대건 안드레아 형제님은 서울 홍익대 출신 미술 전공이셨는데, 대학 졸업 후에는 ‘상업미술’을 계속하셨다고 했다. 그런 분이 또 다른 묘한 인연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지금은 이렇게 ‘성화’를 그리신다고.. 이 갈릴래아 예수님은 5년 전쯤 사고로 실명의 위기까지 갔던 후에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실명은 면했지만 시력이 평상의 몇 %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런 장애와 싸우며 이 그림을 그렸다. 왜 갈릴래아의 예수님일까.. 대답은: ‘새로 시작하는 인생’ 이라고.. 예수님 부활 후에 제자들을 갈릴래아로 보내셨던 것을 생각한 듯.. 새 인생으로 일생일대의 ‘성화’를 계획하고 현재 진행 중이라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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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해 11월부터 시작된 이런 ‘묘한’ 인연으로 우리는 이렇게 의미 심장한 ‘성화’를 얻게 되었다. 겁에 질린 제자들을 갈릴래아 ‘고향’에서 새로 시작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2000년 굳건하게 지속되는 하느님의 교회.. 바로 그 것일 것이다. 배 대건 안드레아 형제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장례미사, 자랑스런 ‘레지오’

가볍지만, 몇 개월 동안 쳐졌던 나와 연숙의 어깨가 조금은 올라간 날이 되었다. 안도의 큰 숨을 쉴 수도 있었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보람과 은총을 느끼는 하루도 되었다. 몇 개월 동안 우리와 인연을 맺으며 삶을 위한 고통스런 투쟁을 하였던 P 베로니카 자매님, 오늘 조촐한 가족들과 적지 않은 레지오 단원들의 전송을 받으며 하늘나라로 완전히 떠났다. 이번 일을 통해서 ‘달릴 곳은 끝까지 달려야 한다.’라는 레지오 교본의 구절을 굳게 상기하고, 성모님을 의지한 레지오의 막강한 힘을 절실히 느끼는 기회도 되었다.

연도와 장례 미사.. 공식적이고 전통적이며 사랑이 가득한, 정성된 신부님의 자상한 미사집전,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없었다. P 베로니카 자매님은 물론이고 두 아들, 동생 자매님, 가까운 친척들도 같은 느낌이었으리라 생각을 한다. 장지 동행에 각별한 신경을 쓰셨던 Lee’s Funeral Home 이 사장님.. 이번에 처음 가까이 대하는 기회가 되었는데 참으로 자상한 분이셨다. 성당 연령회 분들도 정성을 다 해서 준비해 주셨고, 특히 눈이 시려오는 것은 생소하기만 한 ‘신 영세자’ 베로니카 자매님을 위해서 각별한 사랑으로 참석해 준 자랑스런 우리 본당 레지오 단원님들.. 어느 것 하나 ‘사랑’을 느끼게 하는 하루였다

자매님, 비록 고달픈 인생여정을 보냈어도, 가는 길은 너무나 희망적이고 자상한 여정이 될 것이라 우리들 모두 생각한다. 내가 제일 감동을 받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100% 확신 여부를 떠나서 ‘나는 하느님을 알고 간다’ 라는 천상의 선물을, 그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주고 갔다는 사실이다. 특히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헌신적으로 어머니를 간호했던 큰 아들에게 주고 간 선물도 그것이 아닐까.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와도 같이 느껴지는 ‘묘한 인연’을 음미하며 우선 안도의 큰 숨을 내려 쉴 수 있게 되었고, 남은 유족, 특히 큰 아드님이 하루 빨리 안정이 되고 어머니의 간 길을 거울 삼아 ‘평화’를 찾는 긴 여정을 시작하기를 기도하기로 했다.

R.I.P. 2 ‘Sisters’: 두 자매님을 보내며..

André RieuNearer, My God, to Thee (live in Amsterdam)  

 

지나가는 2주 동안 2명의 ‘자매님’들이 일주일 간격으로 하느님의 품으로 갔다. 한 자매님은 지난 주 일요일에 2시간 drive해서 간, 어떤 funeral home의 chapel에서 ‘개신교’의식으로 치러진 예배에 그 자매님의 ‘고이 잠든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25년 전 이곳으로 이사했을 당시부터 연숙이 알고 지내던 K 자매님.. 나와는 직접 상관이 없다곤 해도 간접적으로 그녀의 삶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연숙보다 몇 살 밑인 나이에 어떻게 벌써 귀천 歸天을 했을까? 우리가 알기에 지난 몇 년 동안 앓아온 당뇨병과 신장  kidney의 기능악화로 투석 dialysis 을 받았지만 근래에는 포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투석을 받는 것은 일시적인 방편이고 결국은 신장 이식을 해야만 살 수 있는데 그녀는 그 투석조차 못 받았던 모양이었다. 나의 어머님도 이런 처지였지만 신장이식을 하기에 너무나 고령이어서 결국은 운명을 하셔서 이런 처지를 뼈저리게 나는 실감한다. 하지만 이 K 자매님은 충분히 나아질 여지가 있었을 텐데.. 장례예배에서 목사님의 말씀이 그녀는 아마도 투석을 제대로 못 받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번지르르한’ 목사의 조사에서 밝히지 못하는 사정을 더 많이 알고 있기에 관에 누워있는 그녀를 보며 깊은 슬픔에 잠겼다. 형제, 자매가 그렇게 많은 그녀가 ‘시골’에 묻혀서 별로 도움을 주지 않는 남편과 살려고 노력을 했던 것을 알기에.. 아마도 주위의 도움은 거의 받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은 모든 것을 포기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의 우려는 아마도 맞을 것이다. 이럴 때 다시 생각한다. 과연 가족이란 무엇인가? 문제가 없는 가족, 가정은 없겠지만 그래도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는 것이 가족들이 아닐까? 사랑하는 방식이 달랐다고 ‘사탕발림’같은 조사 弔詞 eulogy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우습게 들렸고 2시간 집으로 오는 drive길이 너무나 우리에게는 무거운 시간이 되었다. K 자매님, 아마도 이제는 그런 모든 고통을 훨훨 벗고 저 세상에서 힘차게 비상하는 새, 유유히 춤추는 나비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또 다른 자매님, 돼지띠 동갑 P 자매님.. 지난해 11월에 우리와 ‘묘한’ 인연이 되어 알게 된 분.  어제아침, ‘격심한’ 고통에서 벗어나 근래에 새로 ‘사귄’ 성모님의 품에 안겼다. 병 간호에 지친 두 아들, 특히 큰 아들을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온다. 우리 부부는 이 자매님을 천주교로 인도하면서, ‘기적’까지는 안 바랐어도 그래도 평화를 충분히 맛 보시는 충분한 시간을 바랬는데.. 그것이 아무래도 부족한 시간이 되었다. 지난 5개월 우리는 이 분이 하느님을 알게 하려고 레지오의 조직을 통해서 지속적인 노력을 해 왔다. 비록 육체적인 죽음은 맞았어도 영혼은 건강하게 살아 가시리라 우리는 굳게 믿는다. 이 자매님도 알고 보면 참으로 ‘사연’이 많은 인생이 아니었을까.. 오래 전, 소설가 박경리 여사의 대하소설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의 복잡하고 운명적인 인생, 결국 운명은 바꿀 수가 없었던가? 나도 운명이란 것을 어느 정도 믿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결말이 더 나아지는 노력은 어땠을까? 더욱 더 슬픈 것은 작년 이맘때 남편이 거의 ‘같은 병’으로 운명하신 사실..남아 있는 두 아들에게 이런 가혹한 고통이 어디 또 있을까? 그래도, 세상 모든 것을 등지고 마음의 문을 걸어 닫았던 P 자매님, 3월에 하느님께 모든 것을 열고 병원에서 세례를 받았고, ‘베로니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형언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새로 알게 된 천주교 기도문을 열심히 읽고,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천천히 귀천을 하였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 이라는 위령기도문을 믿으며 우리는 이 자매님 먼저 가신 부모님들과 재회를 했으리라 굳게 믿는다.

First of May, 2015

창희야, 용현아 그립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창희야, 용현아.. 친구여, 잊었는가? 1970년, 45년 전 우리의 시대를.. 박창희 손용현 그리고 나 이경우 비록 흔히 말하는 삼총사까지는 아니었어도 원서동 죽마고우 세 악동이었지… 재동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헤어진 우리들, 모두 개천이 고즈넉이 흐르던 비원 옆 담을 끼고 추우나 더우나 밤이 되도록 밖에서 뛰놀던 시절을 뒤로하고 의젓한 대학생으로 우리들 다시 만난 것이 1970년 이 시작되던 때였지. 비록 나와 박창희는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서 이미 만나서 다시 ‘죽마고우’가 되었지만 너는 더 늦게 다시 만나게 된 것.. 거의 기적과 같은 ‘사건’이었어.

그래도 그때부터 우리들은 헤어진 시절을 만회라도 하듯이 열심히 도 자주 만났었지. 비록 우리들 공부는 뒷전이었지만 당시에 사실 제일 중요한 것은 ‘청춘’을 공부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었던가? 그런 우리들 뒤에 두고두고 그 ‘놀았던’ 값을 치르기 했지만 크게 후회는 안 하고 싶구나. 특히 1970년 4월의 우리들만의 1주일간의 지리산 등반, 나는 아마도 ‘죽어도’ 못 있을 것 같다. Pop song에 열광하던 우리들, 멋진 다방을 찾아 어둠 속에서 진을 치고 백일몽을 꾸었던 시절, 찌들었던 연간 소득 수백 불 밖에 안 되던 그 시절이었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 별로 걱정한 적이 없었지.. 항상 우리는 무언가 희망이 있었으니까..

Bee Gee’s 의 ‘명곡’ First of May를 애창하던 그 시절의 화창한 봄날들, 비록 대학 졸업을 앞둔 불안한 시절, 정권연장에 골몰하던 박정희 정권의 하늘아래 있었지만.. 그런 것들 우리에게 그렇게 보였던가? 산과 노래와 멋진 다방들만 있으면 족하던 그 시절을 반세기가 지나가도 똑같은 심정으로 생각한다. 우리들 모두 ‘해외로 해외로..’를 외치면 헤어졌고 결국은 ‘완전히’ 헤어졌지만, 다행히도 우리의 머리 속만은 절대로 헤어짐을 못 느끼며 산다. 특히 나는.. 최소한 일년이 하루 오늘만은 절대로 못 잊는다.

작년 5월 1일 이후, 너희들은 어떤 인생의 변화가 있었는지? 창희는 물론 ‘든든한’ 신앙을 더욱 더 성장시켰으리라 짐작이 되지만 용현이, 너는 정말 알 수가 없구나. 혹시나 어떤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나는 최소한 나의 믿음이 아주 희망적이고, 날이 갈 수록 더욱 희망적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지난 일년 동안 그것이 조금은 더 성숙해 졌다고 자부한다. 나의 세계관은 180도 변하고 있으니까.. 다른 쪽에서 세상을 보는 것, 정말 신기하기만 하구나.

너희들 자식들 모두, ‘정규 코스’를 거치며 살아가는지 궁금한데.. 나의 두 딸들은 그렇지 못해서 우리의 나이 든 인생은 조금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 같구나. 하지만, 이제는 별로 큰 걱정을 안 한다.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우리 부부, 가족 모두 ‘영, 육’ 모두 건강한 편이니까.. 그것이면 족하지 않니? 너희들도 모두 영육간 모두 건강한 나날을 보내기 바란다. 내년 5월 1일에 또 ‘보고’를 하면 좋겠구나. Adios Amigo!

4월을 보내며..

배(해숙) 베로니카.. 자매님.. 지금 조금씩 영원의 세계로 가고 있는가? 작년 11월 이후 이 자매, 그 가족들과 우리는 묘한 인연으로 알게 되었고, 연숙의 지극정성으로 3월에는 세례를 받기도 했고, 기적을 바라는 기도를 열심히 했지만 역시 무리인가? 이 자매를 보면.. 참 인생의 역정은 모두 독특하게 다름을 느낀다. 작년에 남편이 거의 같은 병으로 가시고.. 어찌 운명의 장난인가 이 자매마저 이런 운명의 길을 걷고 계신가? 한때 독특한 고집을 가진 이 자매를 나는 오해할 정도로 ‘호감이 가지’ 않았다. 어떤 분인지도 모르지만 우선은 좋게 보아야 하지만 조금은 ‘이기적’인 듯한 ‘덜 겸손한’ 태도가 나를 실망케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일까? 하지만 내가 그 처지라면 조금은 조금은 더 ‘겸손’하도록 노력하리라는 자신을 추스른다.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나는 최악의 겸손으로 내려 앉는다. 내가 누구를 탓하거나 겸손을 운운할 수 있는가? 이 자매를 보며 나는 나의 엄마를 어떻게 보냈는가 절감을 하며 실망, 고통, 후회의 구렁텅이로 빠져든다. 얼마나 당신의 외아들, 편치 않은 누나를 걱정하며 눈을 감으셨을까.. 나는 사실 이런 상상의 근처도 가기 싫었고, 그런 광경을 애써 잊으려, 없는 것처럼 미화, 청소하며 살았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비열한 수법임을 내가 어찌 모르랴..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가족들을 돌보는 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이나 있었던가?

오늘, 내일 하며 선종기도를 바치고 있는 배 자매..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오빠 형철 형제가 어쩔 수 없이 동생의 곁을 떠났다. 그 운명하는 동생의 모습을 어찌 더 볼 것인가? 이해를 한다. 결국은 기진맥진한 두 아들, 특히 큰 아들 호구.. 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엇인가? 레지오의 조직을 우리는 한껏 이용해서 이 자매를 천주교로 이끌었지만 나의 역할은 아무래도 미미한 것인지도.. 물불 안 가리고 노력하는 연숙이를 어찌 당할 것인가? 하지만 그런 돌파력, 지구력, 조직력 등은 정말 가상하다. 누구도 못 따라갈 것이다. 인정을 안 할 수가 없다. 처음으로 장례의 과정을 우리는 경험할 듯 하다. 비록 식구들이 있다고 하지만 성당과의 관계는 우리가 유일한 연결점이니까.. 어떤 역할이 될지는 미지수지만.. 그저 최선을 다하자. 그것이 나의 현재 조금 긴장되지만 담담한 심정이다.

김대중 redux.. bigotry

인호 형의 email을 받았다. 요새는 column style 글 보다는 현재 시사적인 글들, 그것도 ‘서로 돌려보는’ 류의 글들을 받아보는데, 이런 글을 볼 때마다 나는 곤란한 심정이 들기도 한다. 새로 나온 정보, 뉴스로 보거나 ‘재미’로 보면 간단하게 흘려 보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때도 있는 것이다. 이번에 받았던 글은 대한민국 전 대통령 김대중 씨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email들은 대부분 original 의 출처가 묘연하다. 받은 것을 계속 forwarding을 하면서 분실이 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이런 것으로 보아서 우선 이런 글들은 ‘차가운’눈으로 읽어야 함을 오랜 전부터 나는 배웠다. 의식적으로 ‘의심’을 하는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나를 바보처럼 느끼게 하는 email을 한국의 처형(wife’s brother)으로부터 받은 적이 있었다. 분명히 기억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출마한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직전이었다. 물론 처형은 큰 생각 없이 나에게 forward한 것이었지만 그 글이 나중에 알고 보니 참 의심스러운 것이.. 대통령 선거 직전이라는 timing이었다. 그 글의 주제는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는 것으로 예전에 쓰여진 ‘소설, fiction’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재미 핵물리학자 이휘소 박사를 절묘하게 fiction과 nonfiction으로 접목을 시켜서 Internet으로 ‘뿌린’ 것이다.처음에 나는 그것이 100% 사실인 줄 알았지만 나중에 ‘조사’를 해 보니 대부분이 ‘소설’이었다. 그 글을 읽고 아마도 ‘영웅 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 박근혜씨를 지지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때 나는 인터넷의 함정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완전히 바보로 만들었던 그것들..

이번의 글은 배경이 조금은 다르다. 아마도 지금은 대통령 선거 같은 것이 없을 것이고.. 김대중의 현재의 대한민국 정치에 relevant한 것 같지도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기꾼’이라는 인상을 주게 하는 폭로성 글.. 그것도 김대중 씨를 가장 많이 interview했다는 당시의 도쿄 주재원, 영국출신의 언론인, Henry Scott Stokes의 글이고 보면, 잠재적인 효과는 크고 파괴적이 되지 않을까? 이 글은 첫머리에 밝혔듯이, 그가 지은 ‘어떤’ 책의 일부를 발췌, 번역을 한 것이고 글의 요지는 한마디로, ‘내가 알았던 김대중은 알고 보니 정치적 사기꾼’ 이었고, 그에게 오랫동안 속아온 내가 너무나 한심하다’ 라는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하나도 내세우지 않고 있다.

답답한 마음으로 내가 모르는 사실을 찾기 위해서 wikipedia를 찾았지만 비교적 중립적인 그곳에서도 나는 김대중 씨에 관한 특별한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문제가 되는 광주사태, 노벨상, 평양방문 등에서도 특별한 것이 없었다. 어떤 것들이 ‘사기성’이 있다는 것일까?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정치 소식에서 관심을 접은 나로서 이럴 때.. 나는 참 곤란하다. 근래에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가끔 ‘김대중은 빨갱이’ 라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그런 것이 그렇게 심각하게 정확한 것일까?

최후의 수단으로 나는 ‘폭로자’인 Henry Scott Stokes란 인물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 찾아 보게 되었다. 시작은 물론 liberal의 아성인 The New York Times의 특파원이라는 사실.. 무조건 그의 말을 믿어야만 할 정도이지만.. 자세히 그의 행적을 알아보면 정말 뜻밖의 사실들을 만나게 된다.

미시마 유키오, 자살직전 1970년 11월
미시마 유키오, 자살직전 1970년 11월

제일 먼저 돋보이는 것은: 당시 일본 ‘극단적 극우파’ 미시마 유키오.. 이와의 특별한 관계.. 이것 하나로 짐작이 간다. 극소수, 극단적, 극우파.. 미시마 유키오는 1970년에 자기가 만든 ‘극본, 각본’에 의한 극우파 쿠데타를 시도, 공개할복자살을 한 인물이다. 과거의 일본천황체제로 다시 복귀하자는 것의 그의 의도였다. 2차대전의 과오성을 ‘완전히’ 부인하는 인물.. 그와 친하게 된 Henry Scott Stokes는 어떤 사상인가? 역시 아니나 다를까.. 그는 한 술 더 떠서 ‘일본은 아시아의 희망이었다‘ 라고 주장, 2차 대전은 연합국이 만들어낸 일방적 역사였다고.. 이것이 만약 독일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그는 일찍이 ‘감방’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일본의 아시아 침공, 진주만 공격 등 모두 ‘방어전’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편다. 중국에서 벌어진 ‘남경 대학살’도 조작된 것이라고까지 한다.

이런 경력의 그가 한때 김대중을 ‘보호’하던 입장이었는데 왜 그렇게 방향을 바꾸었을까? 여기에 소개된 글을 보면 대강 짐작이 간다. 극우파, 국수주의적 (fascism)인 그가 ‘평화’를 사랑할 리가 없으니.. 노벨 평화상을 공격하고, 극좌적인 공산당을 좋아할 리가 없다. 그가 느끼기에 김대중의 남북협상이 그의 심기를 틀어놓았을 듯 하다. 그렇다고 그런 것과 상관없는 다른 모든 부분을 그렇게 도매금으로 공격할 수 있을까? 이것을 보면서 나의 생각을 정리하면, 나는 공산당, 김일성 왕조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는 사람이기에, 그의 반공적인 것은 수긍이 간다. 문제는 그의 일본적 극단적 극우, 수정적 역사관 인 것이다. 이런 그의 배경으로 나는 이 글의 거의 전부를 배척할 수 밖에 없었다.

최근 Henry Scott Stokes 인터뷰: 일본은 아시아의 희망이었다..

최근 Henry Scott Stokes 인터뷰: 일본은 아시아의 희망이었다..


 

 

민주화 운동의 투사를 가장한

사리사욕에 눈 멀었던 김대중

전 뉴욕 타임즈 동경. 서울 주재 특파원

Henry Scott-Stokes 기자가 저술한 한 저서

(번역: 라디오 코리아 고문 양준용) 중에서.

 

카멜레온과 같았던 정치인 김대중

김대중 한국 대통령은 2000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해에 한국의 대통령 중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 남북간의 긴장 완화에 공적을 남겼다는 게 수상 이유였다.

그런데 오늘날 남북관계가 조금이라도 개선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어떻든 노벨 평화상이란 상은 적당히 주고 받는 상인 모양이다. 2009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이 상을 받았었다. 대단한 인기를 안고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취임 8개월반만에 이 상을 수상했다. 독일 베를린에서의 연설에서 핵무기 근절을 호소했다는 게 수상 이유였다. 그렇다면 <지상에서 병마를 영구히 추방한다>고 큰 소리를 쳤어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하게 한다.

2013년의 노벨 평화상은 화학무기 금지조약에 의해서 설립된 화학무기 금지기관인 OPCW가 수상했다. 시리아가 화학무기를 포기하겠다고 약속한 직후였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었다. 그러나 시리아의 독 가스 무기의 제거작업은 다만 시작만 했을 뿐 그 작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것인가의 여부는 의심스러웠을 따름이다.

그 전 해에는 유럽 공동체가 수상했다. 그런데 유럽 공동체 역시 경제 파탄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취재를 위해 30회 이상 단독으로 만났다. 아마도 내가 인터뷰한 아시아의 요인들 중에서 가장 횟수가 많았던 것 같다. 김대중씨는 한국의 서남부 전라남도의 하의도 출신이다. 그는 매스컴이 자신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 코미디언들처럼 장면 장면 마다 화장을 바꾸며, 상황에 따라 자신을 변신하는 카멜레온(Cameleon, 주위의 환경에 따라 몸의 색깔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새의 총칭)과 같은 변신의 달인이었다.

전 생애를 통해 가장 극적으로 연출한 것은 그가 한국의 현직 대통령으로 북한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다. 바로 이 북한 방문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민주화 운동의 투사를 가장한 김대중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아직 야당생활을 하던 70년대였다. 그는 미국과 일본에 체재하면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추진하는 한편 인권활동가로서도 활약해 주목을 받았다. 73년 8월 김대중씨는 동경의 구단시타에 있는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행방불명 되었다.

한국 중앙정보부가 그를 납치한 것으로 뒤에 밝혀졌다. 일본의 한 항구를 출항한 화물선에서 그를 수장하려 했지만 바로 그 시각에 군용기가 상공에서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해 의도는 중지되었다. (역자 주:이 주장은 김대중씨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관계자들의 증언으로 이 수장 계획은 사실 무근으로 판명되었다.)

그 뒤 그는 서울의 자택에서 연금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76년에는 <민주구국선언>을 발표, 다시 체포되었다. 80년 2월 사면되었지만 5월에 재 구금 되었다. 바로 이 사건이 원인이 되어 광주사태가 발발했다. 군부가 민주화 요구의 데모를 진압했고 유혈의 참사로 진행되었다.

김대중씨는 미국에 대해 강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군이 한국에 계속 주둔하고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씨의 항의 주장은 과격했고 주목을 끌었다. 한국 국내에서 그만큼 강력한 항의를 주장한 지도자는 아무도 없었다. 나의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인 김대중씨는 민주화 운동의 투사로서의 이미지를 빈틈없이 연출했다.

70년대 후반에 이르러 박정희 대통령이 돌연 암살되었다. 박 대통령은 61년부터 70년대까지 정권을 유지했다. 박대통령의 암살사건 후 권력은 곧바로 신 군부에 넘어갔고 군부가 모든 것을 장악했다. 당시의 군부는 김대중씨를 반군정의 중심 인물로 간주, 적대시하고 제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김대중씨의 자택을 방문했다. 그는 자택연금 상태에 놓여 있었고 군에 의해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뉴욕 타임스 특파원으로 자택을 몇 차례 방문하면서 나는 김대중씨가 뉴욕 타임스 지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른 모든 언론 매체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달랐다.

김대중씨의 자택 밖에는 언제나 보도진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의 특파원이 취재를 위해 방문한 것을 알면 곧장 집안으로 안내되었다. 그의 이 같은 특별한 배려가 미국으로 하여금 김대중 자신의 생명을 구하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감당하도록 한 것이었다. 미국의 민간 조직과 언론이 김대중의 보호세력으로 등장했다. 뉴욕 타임스는 그 선두에 선 모습이었다.

나는 1980년 봄에 서울을 거점으로 해서 동경을 오가며 특파원의 업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씨가 가장 위험한 상황에 부딪쳤을 때에 직접 만나 취재활동을 한 나는 김대중씨를 한국의 민주화 활동의 중심인물로 치켜세웠고, 사설을 통해서도 김대중씨는 어떤 이유에서든 처형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거듭했다.

광주 사건을 사주한 장본인

그러나 김대중이란 인물은 가짜(fake) 인물이었다. 진짜 인물(real person)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사기꾼(imposter)이었고 위선자(pretender) 였다. 언제나 술수를 노리는 연기자였다. 사람들의 속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뒤에서 조종하는데 몰두했다. 측은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도 그의 연기에 놀아난 한 사람이었다. 수 많은 한국인들도 그에게 속아 넘어갔다. 김대중씨의 대단한 능력은 이 같은 그의 술수가 오랫동안 발각되지 않은 채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김대중씨가 저지른 최대의 범죄행위는 민주주의의 대의를 그의 속임수의 소재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광주 사건이야 말로 김대중씨의 기만행위를 그대로 들어낸 사건이었다. 1980년 5월, 김대중씨는 신 군부의 정점에 있던 전두환 세력에 의해 체포되었다. 광주에서 소란 사태가 발생하자 김대중씨는 그 배경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김대중씨가 탐한 것은 권력이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했다. 광주사태가 발생한 시기에 그가 가장 마음을 쏟은 것은 자신이었고 이 광주사태를 이용해서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는 일이었다.

Henry Scott Stokes 편집, '광주 봉기' : 김대중 대통령 서문
Henry Scott Stokes 편집, ‘광주 봉기’ : 김대중 대통령 서문

광주 사건으로부터 20주년을 맞은 2000년에 광주봉기(kwangju Uprising)란 책이 뉴욕의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이 책은 내가 편집한 책인데 당시의 사건 취재에 임했던 10명의 유럽 및 미국의 기자와 10명의 한국인 기자가 집필했다. 이 책의 출간으로 사건 당시에 쓸 수 없었던 사실들이 햇볕을 볼 수 있었다. 공동집필자들은 모두 기꺼이 옛 일을 되새겨 볼 수 있었다.

광주봉기의 참 모습은 <김대중 폭동>이었다. 광주사건은 김대중씨 자신이 민주화의 기수라는 가면을 쓰고 폭동을 사주해서 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폭동이었다. 우리 저널리스트들도 그의 연출에 영락 없이 속은 꼴이었다. 우리들은 꼭두각시(puppet)에 불과했다.

나의 처는 전업주부이지만 예리한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에 그녀는 김대중씨가 깔아 놓은 연극에 놀아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나에게 주의를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광주봉기는 그 발단부터 김대중씨가 깔아놓은 연극이었다.

광주는 김대중씨의 근거지였고 이곳 주민들은 군사정권의 압정에 시달려 왔다. 김대중 때문에 압정에 시달린 것은 아니지만 이 점이야 말로 그의 집권 전략에 꼭 들어 맞는 환경이었다. 광주 사태는 김대중씨가 의도해 온 그대로였다. 나는 <광주봉기>가 출판되었을 당시까지도 김대중씨의 역할이 그렇게 큰 것으로 상상할 수 없었다. 김대중은 봉기가 폭발했을 당시에 투옥된 상태에 있었고 그 이후의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김대중씨의 생명을 구한 것은 그 뒤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로날드 레이건의 측근 관계자들이었다. 1980년 가을, 군을 장악한 전두환 한국 대통령과 레이건 대통령의 측근들 사이에 한 밀약이 맺어졌다. 레이건 신 대통령을 만나는 최초의 외국 원수로 전두환 대통령이 되도록 워싱턴 행 초대장을 받는 것과 수감중인 김대중을 처형하지 않는다는 것을 서로 교환키로 한 약속이 밀약의 내용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사형수 김대중을 처형하지 못하도록 노력한 것은 미국의 일반인들이 당시의 김대중씨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기수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에서의 광란사태가 김대중 파의 리더들에 의해 일어났고 광주가 점거 되었을 때에 서방측 미디어가 한결같이 김대중을 한국의 민주화를 추구한 착한 동아리 (good guys) 로 치켜 세웠었다. 물론 당시의 군부는 사악한 무리(bad guys) 로 그려졌다. 이 같은 <착한 동아리>와 <사악한 무리>의 단순한 이분법은 수년간 지속되었다. 아마 아직까지도 이 이분법이 여전히 살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도 미국에서는 김대중이 한국의 민주화를 꽃 피운 영웅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흔히 있어 보인다. 그러나 김대중은 착한 동아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나는 지금도 후회막급일 뿐이다. 광주에서 300명 이상이 학살 당했다. 시민 뿐만 아니라 군인도 살해되었다. 그 책임은 김대중이 오직 혼자 져야 할 일이었다.

광주사태를 일으킨 사람들, 김대중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김대중이 얼마나 세속적인 지위와 돈에 집착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일족의 축재를 위해 돈줄 만드는데 에 혈안이 되어 있었는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 서방측 저널리스트들에게는 이런 사실을 숨겨왔던 것이다.

저널리스트로서의 과오를 부끄러워 할 뿐

그런데 그의 죄상은 개인 축재보다 훨씬 더 무거운 국가반역죄에 해당되는 매국행위였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북한과의 관계에서 뚜렷하게 들어났다.

김대중씨는 뼈 속 깊은 곳까지 부패해 있었다. 한국의 서민들 사이에서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본명은 김대중이 아니라 돈(금)을 너무 많이 사랑한다는 뜻의 금대호로 불리어야 한다는 죠크가 나돌기까지 했었다.

한국은 어디까지나 중국 문화권에 속해있는 나라이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을 포함해서 역대의 중국과 조선의 권력자들은 횡령이나 착복에 깊숙이 빠져들어 있었다. 김대중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민주화의 기수라는 간판 외에 노벨 평화상이란 명예를 얻고자 그의 부하들을 동분서주케 했다. 그는 물욕과 명예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사리사욕의 화신 그 자체였다.

내가 1968년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 한국은 아직 가난한 국가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현재의 한국을 만든 기초를 구축했다. 박정희 장군은 일본 국내에서 훈련을 받고 만주 국의 군 장교가 되어 있었다. 그는 20년 만에 한국을 현대국가로 변신시키는데 성공했다. 만약 그가 이 때에 암살되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업적을 쌓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6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한국은 끊임없이 위험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실제로 나도 암살 대상자의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특파원의 입장에서 한국의 정계와 군 관계에 관한 공개되기를 꺼려한 많은 것들을 보도해 왔기 때문이다. 한국의 중앙정보부는 나를 총이나 칼로 해치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가장한 환경을 조성해서 죽이려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마이크 맨스필드 주일 미국대사는 내가 한국을 방문할 때 마다 보디 가드의 역할을 담당할 대사관 경호원들을 동행토록 하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그 제의를 나는 거절했지만 암살 위협은 광주사태 이후 상당기간 계속되었다.

오늘날 이런 위험은 이미 사라졌다. 서방측 저널리스트의 생명이 총구의 표적이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당시의 한국에는 독기(toxic air)가 충만해 있었다.

나의 주변 인사 중 한 사람이 오래 전부터 “김대중은 신용할 수 없는 사람이다. 북조선의 포켓 속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북한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지 한국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해 왔다. 나는 “그런 바보 같은 소리가 어디 있어. 그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 온 정치지도자이다. 크리스천이며 선량한 사람이다”라고 반론을 제기해 왔다.

하지만 김대중에 대한 나의 당시 진단은 과녁 밖으로 한참 빗나가 버렸다. 대통령에 당선 되어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그는 자신이 북한의 괴뢰임을 스스로 들어 내었다.

나는 저널리스트로서 자신의 불민했음을 부끄럽게 여길 수 밖에 없다. 정말 부끄럽고 죄송하다는 생각이다.

<역자 註>

이 글을 쓴 헨리 스캇 스토우크스 기자는 어떤 사람인가 간단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부연한다.

그는 영국에서 태어나 옥스포드 대학에서 수학, 1962년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에 입사해서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도 옥스포드 졸업생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옥스포드 제1호 여성 졸업생으로 알려져 있다). 64년 동경지국 초대 지국장으로 임명되었고, 67년 영국의 더 타임즈 동경 지국장, 78년 뉴욕 타임즈 동경. 서울 특파원을 역임.

더 타임즈 특파원 시기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납치사건이 발생한 후 집중적으로 이 사건을 취재했고 뉴욕 타임즈 특파원에 임명된 뒤에는 동교동 취재를 거의 독점적으로 취재한 외신 기자로 명성을 날렸다. 내 외신 기자들의 동교동 접근이 거의 불가능 한 시기에 그만이 김대중씨와 자유스럽게 독점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언론계에서는 그를 동교동 통으로 부른 시기가 있을 정도였다.

일본의 김대중 지지세력에게는 둘도 없는 고마운 파란눈 언론인으로 사랑과 존경을 받았었다.


 

비와 나

2015-04-19 11.46.30-1

집 앞에 내리는 봄비, 그 소리와 모습을 Tobey도 너무 좋아하나..

봄비, 그것도 4월에 촉촉히, 싸늘하게 내리는 비를 나는 ‘아직도’ 좋아한다. 다시 찾아온 4.19 학생 혁명기념일도 거의 잊은 채, 나는 하루 종일 잔잔히 내리는 봄비를, 가라앉지만 포근한 심정으로 바라보며 일요일 오후 시간을 보냈다.  잔잔하지만 쉬지 않고 relentless 내리는 비, weather person들은 분명히 귀찮은 annoying, nuisance 것으로, 미안한 표정으로 비를 예보 하지만 나는 그러한 그들이 이상하기만 하다. 나는 너무나 반갑기 때문이다. 나도 안다. 나 같은 사람들은 역시 ‘소수 minority일 것이란 것을.

내가 언제부터 이 ‘비’를 좋아했던가 생각을 해 본다. 분명한 것은 최소한 나의 사춘기, 황금시절 10~20대에는 ‘절대로’ 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을 귀찮아 했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밖으로 나가는 일이 있을 때, 등산 같은 것을 갈 때.. 이 내리는 비는 사람을 귀찮게 하는 것이었다. 특히 머리 style에 신경을 쓰던 철없던 그 나이에 머리카락에 떨어지는 물은 절대 사절이었다. 그 당시에 자가용은 꿈도 못 꾸었고, taxi를 탈 처지도 아니고 분명히 콩나물 시루 같은 시내버스를 타야 했던 시절.. 비 오는 날은 분명히 구질구질하기만 했다. 물에 떨어지는 우산을 접은 사람들로 꽉 차고 담배연기 자욱한 ‘시내’ 버스 안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가 간다.

세월은 흐르고 머리 스타일에 신경을 쓸 나이가 훨씬 지난 후에, 그것도 공간적으로도 공해로 가득 찬 서울에서 초록색이 감도는 미국으로 완전히 바뀌어서 시내버스를 탈 기회는 완전히 사라지고 ‘자가용’이 필수가 된 곳에서 잔잔히 내리는 비에 대한 생각은 서서히 바뀌었다. 넓은 하늘, 대지에 내리는 비와, 우중충한 urban 도심지의 그것은 분명히 다르다. 귀찮기만 하던 비가 나에게는 이제 ‘진정제’로 서서히 변했고.. 그것이 조금은 지나치게.. 너무나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 나를 연숙은 이해를 잘 못하는 것 같아서 더 이상 비에 대한 말을 안 하게 되었다.

비를 사랑하게 된 것이 정확히 감상적이거나 지리적인 환경에 의한 것일까? 이런 생각도 해 본다. 혹시 나의 성격이나 성질이 조금씩 어둡게 변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걱정을 해 본적도 있었다. 어둡다기 보다는 나이에 따른 ‘내면적 삶’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비가 ‘멋지게’ 내리는 것을 보는 것은 아름다운 꽃을 보거나, 각가지 종류의 새들을 멀리서 보는 것 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 것들이 가진 독특함으로 위안을 받기도 하고, 더 깊은 생각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40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이런 ‘취미’를 가지고 살았고 아마도 ‘그 날’까지도 나는 밖에 오는 비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 같다.

2015년, 4월의 딱 절반..

4월 15일.. 4월의 딱 절반에 도달했다는 것 이외에 다른 뜻이 있을까?  물론 있다.. (income) tax return day 마지막 날이다. 이곳에서 오래 살다 보니 이제는 이런 미국적인 날도 나의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아니.. 이제야 이날의 진정한 의미를 알 것 같은 후회감도 없지 않다. 나는 인생을 남들보다 조금씩 더 늦게 깨닫고 늦게 행하는 그런 삶을 살았다. 어릴 적부터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신체적인 ‘발육’도 남들보다 항상 늦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마도 죽는 것도 남들보다 조금 더 늦게 죽을 것이라고 미소를 지었던 기억이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인생의 막바지에서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았던가.. 주위에 얼마나 본의 아닌 ‘게으름에 의한’ 피해를 주었던가? 할말이 없다.

올해의 부활 주일.. 참 만족스럽게 보람 있게 보냈다고 느낀다. 목요일 부터 일요일 부활까지 우리는 ‘고향’ 순교자 성당엘 갔다. 작년부터 시작된 우리의 새로운 전통이다. 평일미사는 거의 Holy Family엘 가지만 레지오는 물론이고, 가급적 주일미사와 큰 행사는 순교자 성당엘 가려고 하는데.. 이런 format을 성모님은 어떻게 보실까? 큰 이의가 있을까? 현재 우리의 사정에 가정 적합한 방식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심야 수난 감실 성체조배.. 올해도 나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특히 성체가 빠져나간 깜깜한 본당에서 기다리는 그 시간이 나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참… 나도 많이 많이 변한 것이다.. 이렇게까지 될 수가 있을까?

나는 현재 어떠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얼마 전부터 나는 책, Rediscover Catholicism을 읽으며 조금 더 ‘조직적’인 신앙생활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중에 첫 번째가 내가 얼마나 이곳 영성, 신앙적인 곳에 ‘투자’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이것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일 중의 하나다. 계획에 의한 일은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나에게 이것은 고역 중의 고역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제는 느낀다. 이것도 나의 인생에서 풀어야 할, 고쳐야 할 고질적인 습관이기에.. 고쳐야 한다고. 2007년 묵주기도와 성모님으로 근본적으로 바뀐 ‘버릇’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 하나씩 좀 더 나은 (better version) 이경우 빈첸시오를 향해서 노력을 하는 그런 시간, 세월도 그리 길지 않을 듯 하다. 레지오를 중심으로 매일/평일 미사에 ‘쓰이는 시간’.. 이제는 계산을 할 때가 되었다. 시간 상 문제가 없다면 이제는 quality에 신경을 더 쓰면 어떨까?

 

요새 우리 부부의 레지오 활동은 주로 배해숙(베로니카) 자매를 돌 보아주는 일에서 머물고 있다. 지난 11월에 시작된 ‘묘한’ 인연의 배 자매님.. 결국은 3월 15일 ‘극적’으로 병원 침대에서 영세/세례를 하태수 신부님으로부터 받았다. 거의 사경을 헤매는 모습으로 지내던 그 병원.. 당시는 느낄 수 없었어도 참 큰 일이었다. 특히 가족들이 그렇게 바라던 일, 한마디로 연숙이 아니었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 나도 인정을 한다. 나는 옆에서 ‘견습생’으로 함께 하며 이런 과정을 보고 배웠다. 이제는 배해숙 자매가 ‘안심하고’ 하느님께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나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조금은 짜증스러운 행동을 보이는 것에 나도 짜증이 나곤 했지만.. 이것도 견습생으로 나는 배우고 있다. 내가 모르는 연숙의 프로같은 환자간호 솜씨에 모두들 놀라곤 한다. 특히 까다로운 배 자매가 연숙에게는 큰 무리 없이 순종하는 것을 보면 나도 놀라곤 한다. 비록 병원에 입원하면서 더 할 것이 없다고 퇴원을 해서 조금 두려운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는 기도의 순리, 하늘에 맡기는 심정이 되니 다른 기분도 들고 실제로 그녀는 퇴원 후에 더 밝은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나도 놀란다. 최악의 경우야 모두 생각하겠지만.. one day at a time이란 말처럼 조금씩 조금씩.. 살면 되지 않을까?

Longfellow Serenade

Longfellow Serenade – Neil Diamond – 1974

 

롱펠로우 세레나데.. 롱휄로우 세레네이드.. 무척 오랜만에 불러보는 단어들이다. 이 두 단어를 합치면 곧바로 떠오르는 것은 물론 1974년 Neil Diamond의 hit song 일 것이다. 나의 ‘전성기’였던 그 당시는 뇌리에서도 아직도 가장 활발한 부분에 모여있는지 생생하고 흥미롭기도 하지만 사실은 이런 주제의 제목에 도달한 생각의 과정이 더욱 흥미로운 것이다.

‘늙은 두뇌’에는 사실 잡동사니 같은 많은 ‘정보’들이 쌓여있을 것인데, 그런 많은 것들이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이 되면 가끔 기발한 추억을 찾기도 한다. 나이 먹는 ‘즐거움’ 중에는 이런 흥미로운 혜택이 있음을 어떤 사람들이 알까 궁금하기도 하다.

Longfellow Serenade에 도달한 과정은 우습게도 최근 edX online course중에 하나인 MyDante (my Dante)를 ‘청강, audit’ 하는 과정에서였다. 이 MOOC(Massive Open Online Course)  style course 는 Georgetown University (Washington DC) 교수들이 가르치는 것인데 Dante의 classic인  Divine Comedy (신곡, 神曲)를 완전히 digital 형식으로 바꾸어 제공해서 ‘초보자’들도 아주 쉽게 이 ‘거창한 고전’을 접할 수 있다.

내가 이 course에 흥미를 가진 이유는 물론 신학적인 호기심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 course technology가 cutting edge digital (Internet) technology를 적절히 이용한 것에 매료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3세기 무렵에 쓰여진 ‘대 서사시’ 그것도 Italian으로 쓰여진 ‘고물’을 본래 식으로 읽는 것은 아마도 박사학위가 필요할 것처럼 어려울 것이지만, 이 course는 21세기 초현대식으로 접근방법을 바꾸어 놓아서, Dante를 전혀 모르는 나 같은 사람도 감상을 할 수가 있었다.

연옥, 7층산을 바라보는 단테
연옥, 7층산을 바라보는 단테

Dante Alighieri, 단테 앨리기에리.. 단테..라면 사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배웠던 것이다. 단테의 신곡.. 아마도 세계사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 당시의 기억으로는 중세가 끝날 무렵의 이탈리아의 단테가 지었던 거창한 서사시 정도였다. 나아가서 ‘지옥, 연옥, 천국’을 그린 것이라는 기억 정도였다.

나중에 신곡이 Divine Comedy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Divine은 이해가 가는데 왜 하필 Comedy인가 하는 의문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comedy의 뜻이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최소한 ‘웃기는’ comedy가 아님을 알고 웃기도 했다. 그렇게 접하게 된 단테와 신곡.. 추억도 곁들였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적인 느낌보다는 나에게는 조금 절실한 현실로 받아들여졌다. 과연 ‘지옥, 연옥, 천국’이 나에게 지금 어느 정도로 심각한 relevancy가 있는가? 그것도 이제는 ‘소수 종교’로 쳐지는 듯한 천주교의 중심교리, 개신교에서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 연옥 purgatory, purgatorio..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토마스 머튼, 7층산
토마스 머튼, 7층산

얼마 전에 내가 속한 ‘레지오’의 주 회합 ‘훈화’에서 단테의 이야기가 나왔었다. 바로 연옥에 관한 이야기 그러니까 7층산으로 묘사된 ‘일곱 가지의 죄’.. 그 중에서 pride에 관한 이야기였다. pride의 죄를 범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목에 힘을 주며 살았기에 그들의 ‘보속’은 ‘돌이나 납덩어리’ 같은 무거운 짐을 목에 걸고 걷는 형벌이었다. 이것은 나에게 우연이 아닌 듯 싶은 것이 그 전에 Thomas MertonThe Seven Storey Mountain을 알게 될 무렵.. 사실 그 7층산이 단테의 신곡 연옥에서 보여주는 Seven deadly sins임을 알게 되었기에 이제 확실히 ‘점’들이 연결이 된 것이다.  이 일곱 죄는: wrath(분노), greed(탐욕), sloth(게으름), pride(자랑), lust(음욕), envy(시기), gluttony(게걸스러움) 인데 단테는 이것을 연옥의 7 terrace mountain으로 그린 것이다.

이렇게 단테의 신곡을 공부하며 신곡의 역사를 알게 되는데, 신곡은 대 서사시이기도 하지만 이탈리아의 ‘표준어’를 만드는 역할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영국의 Shakespeare 정도 위치를 이탈리아의 단테가 차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신곡은 이태리 어로 읽어야 단테 문학의 정수를 맛본다고 하지만 그에 맞먹는 영어 번역본들도 있다. 그 중에는 19세기 미국의 대표적 시인 Longfellow가 번역한 것도 있는데, 그 번역본이 나올 당시 (19세기 중엽) 미국에서 이 책을 ‘들고 다니는 것’이 지식인들에게는 유행이었다고 한다. 비교적 간추린 것이지만 나는 이렇게 해서 Merton에서 시작해서 Dante로, 거기서 다시 Longfellow까지 갔고 종착역은 역시 우리 시대의 idol이었던 Neil Diamond가 맡아 주게 되었다. 참.. 연상퀴즈의 묘미는 이런 것인가?

Henry Wadsworth Longfellow
Henry Wadsworth Longfellow

그런 과정에서 다시 Longfellow의 대표적인 시를 ‘구경’하게 되었다. 미국 19세기 시문학을 대표하는 그는 미국 Northeast의 정서를 잘 묘사를 하였고 당시에는 꽤나 ‘유행적’인 시인이었다. 요즘 들어서 매일 내리는 4월 느낌의 비를 보며 유심히 그의 시에서 이런 느낌을 150% 느끼게 하는 시를 찾아 내었다.  The Rainy Day.. 글자 그대로 비 오는 날.. 비교적 직설적인 표현의 이 시를 자세히 읽으며 생각했다. 오늘 오는 비의 느낌과 비슷하기도 했지만, 무언가 기억이 나는 시라는 생각이 번뜩 든다. 5분도 걸리지 않았다. 1967-8년 경의 기억이 남아있는 뇌세포에 자극이 갔는데, 아하… 즉시 ‘유영’이라는 단어가 떠 오른다.

영문학과 유영 교수님
영문학과 유영 교수님

유영.. 유영 교수, 연세대 영문과 유영 교수님… 교양학부 과정의 마지막 영어독해 강의에서 유영교수가 가르쳐준 시였다. 그것이 바로 이 시였던 것이다. 이 시의 시작부분이 이 의문의 key였다. The day is cold, and dark, and dreary .. 바로 이 dreary란 단어, 이것이 거의 반세기 동안 나의 깊은 뇌세포에 잠재해 있었다. 유영교수의 이 dreary란 단어의 발음이 너무나 독특해서 우리들 모두 웃었던 기억.. 당시에 이 시를 읽으며 정말 ‘음산한 4월’을 몸이 오싹할 정도로 움츠린 기억.. 그것이 바로 요새 이곳 4월 비의 느낌과 비슷하니.. 참.. 이렇게 해서 오랜만에 따뜻한 ‘아랫목’에서 ‘추억의 백일몽’을 즐긴 날이 되었다.

 

The Rainy Day

by Henry Wadsworth Longfellow

 

The day is cold, and dark, and dreary;

It rains, and the wind is never weary;

The vine still clings to the mouldering wall,

But at every gust the dead leaves fall,

And the day is dark and dreary.

My life is cold, and dark, and dreary;

It rains, and the wind is never weary;

My thoughts still cling to the mouldering Past,

But the hopes of youth fall thick in the blast,

And the days are dark and dreary.

Be still, sad heart! and cease repining;

Behind the clouds is the sun still shining;

Thy fate is the common fate of all,

Into each life some rain must fall,

Some days must be dark and dreary.

 

봉성체 奉聖體, 1년 후

봉성체 봉사자를 구하는 Holy Family 성당의 brochure
봉성체 봉사자를 구하는 마리에타 Holy Family Catholic Church 의 brochure

봉성체 奉聖體, home Eucharistic communion service, ministry 성체를 집으로 모시고 가서 영성체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봉성체 라고 하는데 이것은 Extraordinary Minister of the Holy Communion 라는 평신도 중에서 특별히 선발되고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서류상으로도 본당, 교구, 대교구에 등록을 하여야 하고 대강 3년 정도 유효하다고 한다. 이만큼 사제가 아닌 평신도가 성체를 성당 밖으로 모시고 나가서 영성체 봉사service를 하는 것은 조심스럽고 신중하다고 할까.

4년 전쯤, 말기 암으로 투병을 하던 우리 레지오 단원 은 요안나 자매님이 거동이 불편해져 집에만 있게 되었을 때, 그 자매님에게 성체를 모시게 해 주고 싶다는 일념 으로 연숙이 ‘두말없이’ 봉성체 교육을 받고 교구청에 등록을 했는데.. 좀 늦었던가.. 안타깝게도 한번도 봉성체를 해 주지 못하고 그 자매님은 운명을 하게 되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 이후로는 ‘가능하면’ 늑장을 부리지 않고 성체를 원하는 거동이 불편한 신자들을 찾게 되었고 필요한 곳은 찾아가게 되었다.

5년 전쯤만 해도 나는 ‘성체의 심각한 의미’를 잘 몰랐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성체와 성혈은 100% 예수님의 몸과 피라는 교리상식은 물론 ‘머리’에서는 알지만.. 그래서..어쨌다는 말인가 라는 선에서 멈추곤 하였다. 미사에서 성체, 성혈을 받을(모실) 때에도 ‘의미 있는 묵상’이 별로 쉽지 않았다. 그것은 물론 내가 별로 깊이 생각과 묵상을 안 해서 그런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비롯된 성체,성혈의 신학적, 역사적 의미를 조금 더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한 순간 ‘점들이 연결되는 순간부터’ 나는 거의 무조건 성체의 신비를 믿게 되었다. 의외로 간단한 과정이었을까?

그런 배경으로 봉성체 봉사자인 연숙을 따라다니며 ‘봉성체 동행’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레지오 활동의 일환으로 봉성체 봉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집이나 병원에서 성체를 모시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일년이 넘은,  작년 2월경 부터 우리는 정기적인 ‘화요일 봉성체’ routine을 시작하게 되었다. 실제적으로 우리는 레지오 주회합이 있는 화요일에 정기적인 봉성체 활동을 하고 가끔 비정기적인, 예외적인 봉사를 한다.

이 봉성체 활동을 하며 느끼는 것은 한마디로 가톨릭 신앙에서 얼마나 성체신심이 중요한 가 하는 때늦은 놀라움이다. 1982년 영세를 받고 나서 수십 년이 흐른 인생의 황혼기에 나는 이것을 정말 늦게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성당의 미사를 못 보며 느끼는 이들 봉성체 대상 교우들의 성체에 대한 갈증, 갈망을 느끼고 보며 나는 너무나 많은 은총을 받는 듯 하다. 이 우리의 봉사는 사실 우리가 봉사를 받는 다는 쪽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 정도다. 고령의 봉성체 대상 자매님, 기억력과 씨름을 하시지만 우리들이 가면 ‘일제 시대(요새는 일제 강점기라고 하던가)’에 남편 형제님을 만나게 된 경위를 일본말을 섞어가며 설명하시던 모습을 보며, 이 분들에게 성체 이외에 ‘인간적 대화’가 필요함도 절실히 느낀다. 성체의 ‘기적’까지는 기대 못하더라도 이런 활동이 외로울 수도 있는 그분들에게 다른 기적을 가져다 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우리는 ‘자동차와 다리가 성한 한’ 이 활동을 계속할 것이다.

사순절 판공성사, 2015

또 ‘그것’을 할 때가 다가왔다. 그것.. 판공성사, 고백성사, 고해성사.. 어떻게 표현해도 다 마찬가지다. 결코 쉽지 않은 ‘의무’, 가톨릭 신자의 의무다. 이것도 의무지만 자유로운 의무고 다른 쪽으로는 우리 교회만의 권리, 특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성사의 의미와 특징 (좋은 쪽으로)은 열거하면 한이 없이 많다. Matthew KellyRediscovering Catholicism 책을 요새 다시 읽으며(aka typing) timing 좋게 confession 에 대해서 복습을 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쓰레기로 쌓이는 집이나 차에 비유해서 정기적으로 청소를 하는 것과 비교한다. 많이 쌓이면 그런 사실자체에 둔감해져서 더 많이 쓰레기가 쌓인다고. 자주 하면 할 수록 좋은 것이라고.. 누가 모르나? ‘괴롭게 들어갔다가 날라가는 기분으로 나오는 곳’ , 그곳이 바로 고백성사란 것만 기억해도 좋은 것, 이것 하나,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올해는, 아니 내일로 다가온 이 ‘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을 고백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10중 8/9는 하태수 신부님께 하게 될 듯 한데.. 그것이 상관이 있을까? 모두들 어렵다고 하는 이것, 나에게도 어려운 것인가, 아니면 귀찮은 것인가?

이제는 ‘양심성찰’을 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지난 해 6월이었던가, Conyers의 수도원에서 가진 레지오 피정 때 내가 이것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알쏭달쏭하다. 한 듯하기도 하고, 안 한 듯 하기도 하고.. 하지만 작년 사순절 때는 100% 확실히 했다. 비록 ‘사소한’ 것을 고백한 기억이지만.

 

그 동안 나의 ‘죄’는 무엇이 있을까? 대죄는 물론 없다. 소죄는 있을 듯 하다. 확실히 기억은 안 나지만. 십계명으로 출발하면, 어떤 주일을 거룩하게 안 보낸 것은 확실할 것이다. 제일 쉬운 것이 이것인가? 하지만 이런 것을 하면 내가 만족할 수가 없다. “고백성사 101″을 다시 한번 볼까나..

아마도 십계명에 ‘정면으로 거역’ 된 일을 없을 것이다. 나에게 우상이란 것은, 분명히 없다. 하느님의 이름을 마구 함부로 ‘팔아 넘기듯’ 부른 적도 없다. 주일이나 종교적 축일들을 소홀히 보냈는가.. 다행히 지난 해에 우리는 ‘부지런히’ 주일, 축일을 보냈을 것이다. 부모님을 공경하는가.. 이것은 비교적 쉬운 듯 하지만, 실제적으로 우리는 죽어도 부모님을 잘 모셨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영원히 죄로 고백해야 할 것 중에 하나다. 살인한 적도 없고, 간음한 적도 없다. 훔친 적도 없고, 요상한 소문을 낸 적도 없고 거짓말 증언을 한 적도 없다. 남의 아내를 엿보거나 흠모하거나 사랑한 적도 없다. 남이 잘 사는 것에 질투심을 느꼈을까? 이것은 100% 부인할 수가 있을까? 나는 ‘지나치게 사치하게 잘 사는’ 사람을 가끔 ‘경멸’한 적은 있지만 그 정도로 부러워한 적은 거의 없었다.

 

죄를 안 짓는다는 소극적인 것에서, 과연 적극적으로 ‘선행’을 하고 살았던가? 이것은 자신이 없다. 죄를 피하며 살았을지언정 적극적으로 남을 인간으로 사랑하거나 물질적으로 도와 주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의 ‘재주,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서 효과적으로 사용했을까? 이것도 자신이 없다. 비록 레지오라는 단체에서 ‘봉사’를 한다고 하지만 언제까지나 만족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할 수가 없다.

 

예수님의 사랑의 2계명: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This is the greatest and the first commandment. The second is like it: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 whole law and the prophets depend on these two commandments’(Mt 22:37-40).

“Love is patient, love is kind. It is not jealous, [love] is not pompous, it is not inflated, it is not rude, it does not seek its own interests, it is not quick-tempered, it does not brood over injury, it does not rejoice over wrongdoing but rejoices with the truth. It bears all things, believes all things, hopes all things, endures all things. Love never fails” (1 Cor 13:4-8).

 

지난 해 판공성사 (사순절부터) 이후 나는 어떻게 살았는가? 남이 보기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던가? 고정적인 일상생활의 pattern으로 두드러진 것은 생각이 안 난다. 가깝게 나를 ‘괴롭히는’ 것이라면 ‘겸손하지 않다고 보이는’ 연숙의 행동들에 대한 나의 짜증 정도? 이것도 죄가 될까? 마찬 가지로 두 딸들에 대한 나의 실망감..

하지만 조금 밖으로 눈을 돌리면, 미안한 것들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작년 여름 레지오 회합에서 큰 생각 없이 한 나의 ‘솔직한’ 말 때문에 장 실비아 자매가 퇴단까지 한 것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뜻밖의 일이었고, 나의 말을 너무나 심각하게 받아들인 상대방만 탓하기도 했다. 하지만 원인은 무조건 나에게 있기에 나의 잘못이고 미안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나 뒤 늦게 들었다. 같은 여름 미국성당에서 ‘사소한 고정석’을 빼앗긴 것이 발단으로 ‘터진’ 나의 ‘분노’도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나의 ‘문제’에 의한 것이었다. 상대방이었던 필리핀 자매에게는 너무나도 잘못을 하였다. 기분이 쳐지거나 나의 ‘운전 불능’신세를 한탄하며 연숙의 운전 실력을 100% 매도하는 나날들 또한 어떨까.. 나의 일방적인 잘 못이 아닐까? 이런 것들을 떠나서 나는 언급하기 싫은 ‘잘못’을 했고 현재도 하고 있다. 가슴 속 깊이 잠자고 있는 나의 ‘깊은 상처, 수치’를 건들이거나 하고 싶지 않다. 그만큼 이것이 무서운 것이다.

근래에 너무나 가까워진 수 많은 ‘자매님들’.. 인간의 한 부류로 신선하게 다가온 수 많은 자매님들을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신앙적 동지일 수 밖에 없는 그녀들을 나는 가끔 어떤 생각까지 하며 ‘즐기고’ 있는 것일까? 아직도 나는 여성에게 여자의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은근히 나는 이성들이 많은 곳에서 어떠한 환상적인 생각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생물적’인 충동이 아직도 있다는 사실은 나를 진정 놀라게 한다. 그것 때문이 예전의 ‘환상적 잘못’의 세계로 조금이라도 다가 갈까 봐 조바심도 나는 것이다. 성모님에 의지하는 내가 왜 다시 성모님께 의지하지 않는 것일까? 너무나 수치감을 느껴서 그런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상태를 초월하는 다음의 단계로 성숙해야 한다. 이것을 나는 어떻게 신부님께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오늘 저녁에 예정된 성사에서 풀어야 할 과제가 되었다.

Spring came forever..

Early Spring Bradford Pear

Early Spring Bradford Pear

 

오랜만에 가랑비가 싸늘하게 느껴지는 조용한 점심 식사 전, 오후를 맞이한다. 그렇게 추웠던 올 겨울도 결국은 나와 같이 나이를 느껴는 듯 조용히 물러가고 있다. 이곳 이른 봄의 상징인 Bradford Pear tree의 하얀 꽃이 부끄럽게 피어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무덥게 느껴지는 봄 기운을 맞이 했는지 갑자기 만발을 했다. 뒤뜰을 조심스럽게 보니 거기에는 일년 전에 보았던 노란 개나리가 피기 시작한 모습이 있었다. 내일이 춘분, ‘사철과 책력’의 기억에 봄의 시작인 춘분, 달력에는 그저 Spring begins라고 쓰여있지만 유식한 (천문학적) 표현은 역시.. Spring Equinox일 것이다. 그러니까.. 봄의 계절에 밤과 낮의 길이가 거의 같이 되는 날..

2015-03-19 15.08.49-1올해의 겨울도 작년과 버금갈 정도로 끈질기게 길었던 추위를 느끼게 했다. 20년 동안 ‘동복’이라는 말을 잊은 채 살다가, 태고적에 입었던 ‘진짜 겨울 옷’들이 대거 등장해서 톡톡히 본전을 뽑았다. 아닌게아니라 그런 옷들은 반 세기 전에 고국에서 입었던 ‘골동품’도 있었고 Midwest에서 살 때 (Illinois, Ohio, Wisconsin) 겨울에 입었던 그런 종류였다. 사반세기 전에 이곳에 이사온 이후 거의 한번도 입어본 적이 없었던 것들.. 다행히 대부분 이곳의 더운 공기 피해를 입지 않고 잘도 보존이 되어 있었던 고마운 역사적인 옷들이 올해는 차가운 공기를 맡으며 생기를 찾았다. 이런 연이은 추운 겨울을 보내며 global warming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기도 했다. 느끼는 것은 global cooling같았지만 역시 이것은 지역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일 것이다. 겨울을 완전히 보내며, 작년과 같은 추위와 눈에 의한 ‘대형사고’가 올해는 하나도 없었던 것을 감사 드린다. 눈이 올 때 느끼는, thrill과 dramatic 한 짜릿한 suspense 는 조금 아쉽기도 하지만, never mind, who cares?

초조한 사순절 4주째..

차분하고 경건해야 할 것만 같은 사순절의 한 가운데를 지나면 왜 이렇게 ‘우리’는 초조함을 느끼는 것일까? 평화가 줄어들고 수심과 걱정이 휩싸이는 느낌.. 이번 사순시기는 무엇인가 이런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지만 대부분 나의 탓이기에 할 말이 없다. 내가 그렇게 만든 것.. 이라고 생각한다. 해야 할 ‘중요한’ 것은 계속 뒤로 미루며 사는 것, 왜 나는 진정한 proactive한 인간이 못 되는 것일까? Matthew KelleyThe Four Signs of a Dynamic Catholic에게 오랜 만에 자극을 받는가 싶었지만 다시 주저앉는 나의 모습.. 절제된 자기훈련이 된 하루하루를 살고 싶었고 그렇게 할 희망은 충분히 아직도 있다. 비록 치통에 모든 잘못을 탓하고, 비실비실 잠열에 뒤척이는 모습이었지만.. 훌훌 털고 일어나자! 작년에 비한 우리의 ‘위상’은 하늘과 땅이 아니던가? 최소한 무언가 변하게 될 ‘희망’이 있지 않은가?

진정으로 우리를 초조하게 하는 것은 배해숙 자매의 병세 때문일 것이다. 생각보다 더 약한 모습으로 변하는 자매님, 돼지띠 동갑 자매님.. 놓칠 수가 없다. 우리 부부는 그런 심정으로 지금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얼마 더 오래 살지는 하느님만 아시겠지만 우리의 ‘요구’는 최소한 이 자매님이 짧지 않은 ‘진정 행복한 나날’을 아드님들과 즐길 수 있는 ‘건강한 나날’을 주시라는 것이다. 수 십 년도 아니고 아니 몇 년이라도 좋다. 진정한 행복한 인생이 무엇인지 되돌아 볼 수 있는 건강한 기간, 시간을 주시라는 우리의 기도가 그렇게 무리일까? 아니지요.. 성모님.. 어머님.. 인자하신 성모님, 기도해 주세요.

오늘 예정대로 ‘병원’에서 배 자매님의 세례식이 ‘거행’될 것이다. 분명히 그녀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실 것이다. 그것과 더불어 더 건강한 새 생명이 함께 하시게 되시기를 우리는 기도한다. 하신부님의 배려로 성사되는 이번의 세례식.. 조금 있으면 떠나게 되는 하 신부님, 지금부터 서운하기만 하다. 어쩌면 나와 그렇게 모든 ‘코드’가 잘 맞았는지 아무도 모들 것이다. 이런 신부님 앞으로 나는 다시 못 만날 것이다. 개인적으로 친해지고 싶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다 지나지 않았던가..

afternoon delight, Krispy Kream..

perfect combo: donuts, coffee & banana

perfect combo: donuts, coffee & banana

 

요즈음 우리가 가는 supermarket: KrogerPublix같은 곳엘 가면 나의 눈에 아주 편안하게 들어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Krispy Kream donut box 들이다. 단맛 때문일까.. 아니면 부드럽게 느껴지는 혀끝의 맛 때문일까, 아니면 이것과 곁들여 떠오르는 향기 가득한 ‘새카만’ dark black coffee ‘맛의 모습’ 때문일까? 몇 년 전에 donuts을 먹고 배탈로 며칠을 고생한 이후 이것만은 피하며 살았지만 그런 기억도 희미해 진 요즈음 다시 이 ‘단맛과 coffee’의 유혹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전통적으로 도넛은 거의 이른 아침에 먹지만, 그런 ‘직장 생활’ 시절이 다 지나간 요새, 나는 이것을 거의 혼자 먹는 ‘점심 후 간식’으로 즐긴다. 특히 hazelnut coffee 같은 것을 곁들이면 이것은 나에게 진정한  afternoon delight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afternoon delight이란 말이 귀에 익은 말이고.. 이 말은 오랜 전의 hit  pop song, 노래 제목 임까지도 기억을 해냈다.

태고(太古) 적.. 이런 말이 아직도 쓰이는지.. 그러니까 까마득히 오래 전 이런 제목의 popular tune이 있었고 사실은 그 tune의 일부분은 생생히 기억한다. 누구의 노래였던가.. 이런 것으로 기억력 test하기 좋은가? 우선, 1970년대라는 것은 분명하다. vocalist도 분명히 ‘남자’ 였고… Sebastian이란 이름도 연관된 이 group은 누구인가? 아하! John Sebastian이었던가?  그 다음은 아주 깜깜해진다. googling, youtube’ing time 이 되었다. 결과는 .. 실망적인 나의 기억력. 1970년대는 맞았지만 vocal group이 완전히 틀렸다. vocalist는 남자와 여자가 반반이 섞인 4인조 Starland Vocal Band였다. 내가 왜 John Sebastian과 혼동을 했는지 분명치 않다. 이 두 artists들은 모두 1976년 경에 활동을 했는데 그 당시의 추억이 이제는 까물거리는 ‘태고’가 되어가나 보다. 더 추억을 더듬어 보니.. Afternoon Delight란 노래는 주로 radio를 통해서 들었고, John Sebastian의 귀에 익숙한 노래였던 Welcome back 은 같은 때, TV sitcom ‘Welcome back Kotter‘의 주제곡으로 들었음이 밝혀진다. 이 추억들은 모두 1976년 경.. West Virginia 에서 학교 다니던, 비교적 미성숙한 총각이었던 꿈같은 시절이었다. 나이가 많아지니까 머릿속이 온통 ‘추억거리’로 가득 차면서 가끔 조금 한가한 오후에는 이렇게 ‘유치한, 말도 안 되는’ daydreaming을 즐기기도 한다. 이런 것이 나이 먹음의 즐거움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Afternoon Delight – Starland Vocal Band – 1976

 

 
Welcome Back – John Sebastian -1976

고즈넉한 2015년 1월은..

고즈넉하다:

1. 고요하고 아늑하다.
2. 말없이 다소곳하거나 잠잠하다.

 

이 ‘귀한’ 한글 단어는 분명히 속어나 유행어는 아니다. 조금은 희귀한 말인 것이다. 어디서 이 말을 들었나 암만 생각해 보아도 확실치 않다. 분명히 ‘문어체’인 이 단어는 어떤 ‘고상’한 책에서 보았을 듯 하다. 아니면 고상하고 가슴을 울리는 어떤 ‘서정시’ 에서 였을지도..

한반도에서 태어난 이상, 모르는 한글단어를 들으면 분명히 무슨 느낌을 받는다. 짐작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짐작에도 분명히 ‘고즈넉한’ 것은 ‘잔잔히 조용한, 다소곳한 조용함, 아늑한 조용함’ 그런 느낌을 준다. 나는 올해 2015년 1월을 지내며 계속 이런 ‘고즈넉한 1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의 일월은 추운 겨울과 겹치는 무언가 쫓기듯 바쁜 달이다. 정월 초하루, 새로니 생일, 크리스마스 12일이 서서히 저물고 나도 저물어 가는 듯한 나의 생일의 느낌, 와~~ 오래 살았다는 느낌을 더해주는 결혼 35주년 기념일.. 등등이 조금은 생각을 하게 만들기에 더 부담을 받는가..  그런 일월을 참 많이 보냈지만 올해는 뜻밖에도 ‘고즈넉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잔잔하고 평화스럽게 보낸 듯 하다. 누구에게 감사를 할 것인가.. 나는 안다.

지난 해 11월에 겨울 맛을 단단히 예고하더니 올해의 이곳 겨울.. 하루가 멀다 하고 빙점을 맴돈다. 암만 생각해도 우리가 이곳으로 온 이후 이곳은 분명히 추워졌다. 지구 온난화와 반대인 것이다. 어찌된 일인가? 다행인 것은 그렇게 기승을 부리던 energy cost가 엄청 떨어졌다는 사실.. 세상은 오래 살고 볼 것인가? 이것은 뜻 밖의 ‘하늘의 선물’ 처럼 느껴지기만 한다. 원인은 확실하지 않지만 그것은 큰 상관이 없다.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공짜 선물’도 없을 것 같다.

지난 12월에는 번갯불에 콩 구어 먹는듯한 빠른 속도로 family room flooring 을 비롯해서 그 방을 ‘새 방’으로 꾸며 놓았다. 아마도 현재 우리 집에서 제일 ‘깨끗하고 멋진’ 방일 것이다. 문제는 그곳을 별로 사용할 일이 없다는 사실.. 나의 서재를 그곳으로 옮기려는 계획도 해 보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방의 멋을 사라질 것이라서 망설이게 된다. 임시 서재로 쓰는 방법도 있어서 생각 중이지만.. 어떨지 모르겠다.

 

family room or my study

family room or my study

 

올해의 성탄은 12 days of Christmas의 정신을 150% 살려서 ‘교회의 권고’를 충실히 받아 드리고 실천을 하였다. 과연 성탄의 의미가 무엇일까.. 아마도 처음으로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선물을 주고받고 눈을 기다리는 세속 성탄의 유혹에서 나는 과연 얼마나 벗어 났을까? 내년을 다시 기대해 본다. 더 나은 season이 되기를..

너무나 고즈넉한 1월을 지내면 깜빡 한 것 중에는 나의 연례적인 즐거움인 Davos Economic Forum (DEF)을 ‘관망, 감상’하는 것. Forum이 시작되기 며칠 전에 preview를 하긴 했는데 그만 정작 Forum 3일간을 완전히 놓친 것이다. Archive된 video를 보면 되겠지만 어떨까.. 완전히 거품 빠진 맥주 맛이 아닐까?

1월 중에 또 놓친 것은.. Our Winter Classic Dinner란 친지들의 저녁 모임인데.. 그런대로 역사를 자랑한 것이었지만 이것도 너무나 나이를 먹었는지 올해는 별로 큰 관심이 없는 듯하였다. scheduling상에 문제가 있었고 모두들 그렇게나 바쁜지. 하지만 이것도 세월이 흐르고 있다는 표시인지도 모른다. 세월이 지나면 안 변하는 것을 찾을 수가 없으니까.. 아마도 올해부터 이 모임이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잔잔한 우려를 느낀다.

2014 Atlanta SnowJam
2014 Atlanta SnowJam

며칠 전 1월 28일을 지나며 작년 1월 28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날 낮부터 갑자기 쏟아진 얼어붙는 함박눈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freeway에서 완전히 모든 차들이 ‘얼어 붙어서’ 영하 10도의 밤을 차 속에서 지낸 일.. 그 유명한 2014 Atlanta Snowmageddon, SnowJam 이였다. 그때 하도 고생을 해서 그 이후로는 ‘눈’자만 일기예보에서 들으면 집 밖으로 안 나가기로 생각을 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이 지역에는 한번도 눈이 내리지를 않는다. 앞으로는 어떨까. 2월과 3월도 만만치 않은 snow day들이 있었으니까.

Gas Price: 오래 살다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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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보고 이런 말이 ‘즐거운’ 한숨처럼 흘러 나온다. 집 앞의 BP gas station의 현재 gas price을 보니 조금은 익숙지 않은 숫자.. $1.99란 숫자다. 자동차 기름값.. gas price, regular gas 값 (갤론)이 2불 이하로 떨어진 것이다. 그것도 서서히 내려간 것이 아니고 갑자기 떨어진 것을 보며 느낀다. ‘조금 살겠다..’ 하는 즐거운 모습들을 이곳 저곳에서 볼 수 있다. 드디어 news에도 이것이 등장할 정도다. 언젠가 gas price가 $5을 넘으리라는 예측도 보았다. fixed income에 익숙한 우리로써는 이것은 정말 ‘신나는 달밤’일 수밖에 없다. 근래 몇 년에 걸쳐서 우리는 차를 탈 일이 자꾸만 늘어가고 있어서 ‘기름값’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이렇게 값이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 그 자체가 즐겁기만 하다. 그러면 왜 이렇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인가? 1970-80년대만 해도 수십 년 안에 석유가 고갈 될 것이라는 암울한 예측도 있었는데 어떻게 석유 공급이 늘어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중동이나 외국의 석유에 덜 의존하려는 미국의 발버둥이 효과를 보아가고 있는지 미국내의 석유 생산이 생각보다 많은지도 모른다. 아니면… Why.. why not, why now?  New York Times의 분석기사를 보니 이제 조금 그림이 그려진다.

결론은… 역시.. It’s simple economics.. stupid! 이라고 할까? 간단한 경제원리가 이곳에서도 역시 작용을 하는가? 2009년 이후 최저로 떨어진 원유값, $50/barrel 밑으로 떨어져다. 무려 55% 가 급속도로 떨어진 것이다. 경제적인 이유는 역시 수요와 공급의 기본원칙일 것이다.

공급은.. 미국내의 자체원유 생산량이 지난 6년 동안 거의 2배로 늘어났다. 그 만큼의 국외 원유 (특히 사우디, 나이제리아, 알제리아 등)는 서로들의 경쟁으로 값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수요는.. 유럽과 developing countries들의 불경기로 에너지 수요가 줄었고, 자동차의 energy-efficiency가 크게 좋아진 것으로 예전 같은 gasoline-guzzler (덩치가 큰 고철 같은 차들)를 보기가 힘든 것 같은..

100% 다 믿기가 힘들지만, 사실은 지금 gas값이 내려가고 있는 것은, 이렇게 간단한 수요 공급의 법칙 때문인 것이다. 그러면 결과는? 내가 생각하는 것은 물론 ‘주머니 사정’에 큰 여유가 생길 것이다. $4을 넘던 것이 $2 이하로, 반이 떨어지면 나머지 돈은 분명히 다른 곳에 쓰이거나 저축이 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소비’가 될 것이다. 이런 것에 민감한 ‘정치지도자’들은 이런 것을 절대적으로 환영할 듯.. 특히 지역적으로 예외적으로 추운 겨울을 예상하는 Northeast (특히 Boston같은) 지역은 난방비 걱정이 훨씬 덜 해질 것 아닐까?

국제정치 쪽을 보면: 원유값에 거의 모든 경제를 의존하는 산유국들은 정치적인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 결과는 확실치 않지만 러시아 같은 나라가 제일 큰 피해자가 아닐까. 미국 내의 사정도 비슷해서, 알라스카, 텍사스, 오클라호마, 루이지애나 같은 주도 재정적인 고통을 받지 않을까?

한때 세계경제, 정치까지 영향을 주던 그 유명한 OPEC은 어떨까? 예전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분명히 원유생산을 줄여서 값을 올릴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런 power가 없는 듯 하다. 예전 같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도 conspiracy theory (음모 론)이 있을까? 예를 들면, 사우디 아라비아나 미국이 ‘공모’를 해서 그들의  ‘적국’ 러시아, 이란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 원유값을 내렸다는 음모론.. 사실 1980년대에 급락한 원유값은 ‘소련’을 붕괴시키는데 한 몫을 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가능성은 거의 희박한 것이다. 미국과 사우디가 그런 ‘공모’를 한 예가 없었으니까.

언제 다시 원유값이 예전의 수준으로 오를 것인가? 당장 오를 것 같지는 않지만 올해가 지나가면서 다시 조금씩 오를 것이라는 Wall Street의 전망이다. 예전의 역사를 보면 이것은 오르고 내림을 반복하는 그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석을 보며 생각을 한다. 오래 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1불도 채 되지 않는 휘발유 값을 기억하며 자동차의 나라 미국에서 이 휘발유 값이 미치는 영향력을 다시 실감을 한다. $4까지 치오르는 것을 보며, 이제 ‘자가용’의 시대가 끝이 나는가도 생각을 했다. 다른 나라처럼 대중교통수단의 시대가 올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무섭게 갑자기 늘어나는 원유생산을 보며, 이것이야말로 not so fast..란 말이 어울리는 착각이 아니었을까?

조용한, 너무 차분한 그것..

성탄 씨즌이 고요히 우리에게서 떠나갔다. 나의 결사적인 노력으로 성탄의 느낌을 하루라도 더 느끼려 노력을 하며 살았다. 성탄절 며칠 전부터 시작해서 12일을 더 넘기고 ‘연중시기’가 시작되는 때가지 굳세게 견디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성공’한 것이다. 이제는 죽는 날 까지 이런 나의 ‘새로운 성탄절’ 풍습이 계속될 것이다. 왜 성탄절이 있었으며 그것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계속 생각하는 그런 축제기간이 될 것이다.

요새는 많은 시간을 reading by typing으로 보내고 있다. 두세 권으로 시작한 것이 이제는 거의 10권의 책으로 늘어나고 있고 아마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덕분에 그 동안 녹슬어가던 typing도 놀랍게 발전함을 느낀다. 이런 typing의 느낌, 기분이 너무나 좋다. 목표는 역시 typing을 하며 reading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보다 쉽지를 않다. 조금만 한눈을 팔면 .. reading도 typing도 망치는 것이다. 물론 typing에 더 신경을 쓰는 단계이지만 언젠가는 reading에 더 신경을 쓸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이 ‘습관’의 최대 이점은 어떡해서든지 책 한 권을 그런대로 읽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냥 책을 읽는다는 것.. 요새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너무나 중단이 많이 되는 것이다. 이 노력의 결실로 오늘 드디어 Crossing the Threshold of Hope의 reading by typing이 끝났다. 2개월 정도 걸렸나.. website에 수시로 update를 하던 것이지만 이제는 ‘완전한’ update가 될 것이다.

양양이의 승리 勝利

Tobey의 보금자리 앞에서 시위하는 Izzie, 옆에서 보고만 있는 불쌍한..

Tobey의 보금자리 앞에서 시위하는 Izzie, 옆에서 보고만 있는 불쌍한..

결국은 보금자리를 완전히 빼앗기고.. 그나마도 이불에 누운 것만도 다행..

결국은 보금자리를 완전히 빼앗기고.. 그나마도 이불에 누운 것만도 다행..

 

엊그제 찍은 몇 장의 snap 사진을 보고 한참 웃었다. 꽁꽁 얼어붙는 듯한 추위에 이렇게 웃기는 광경은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 모습은 ‘고양이 Izzie가 강아지 Tobey의 보금자리를 멀쩡하게 차지한 것’이다. 우리 집 ‘터줏대감’ 10살이 넘은 강아지 Tobey와 지독히도 lucky한 ‘집 앞에서 데려온’ 고양이 Izzie 가 추운 겨울을 보내는 이 광경에는 많은 뒤 이야기들이 있기에 내가 만에 일이라도 이들 보다 먼저 세상을 뜬다면 인간 가족 못지않게 이들에게도 반드시 의미 있는 작별인사를 할 것 같다.

가끔 사람을 bite하는 고약한 성미를 가진 Tobey는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 ‘사고’는 더 이상 없지만 ‘전과’의 기억으로 인해서 나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에게는 아직도 ‘찬밥’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Tobey는 나에게 거의 ‘맹목적’으로 의지하는데, 나는 그것이 참 훈훈한 느낌이라서 하나도 귀찮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찬밥 취급하는 나머지 가족들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사랑이 결여’된 것 같은 싸늘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런 중에 갑자기 2006년 경에 우리 집에 고양이가 나타났고 어찌어찌 해서 2009년 부터 우리 집 고정 식구가 되었다. 2006년 6월 경.. 잊지도 못한다. 6월 가랑비가 내리던 날 집 앞에서 아기 고양이 소리가 구성지게 들렸고.. 그런 것은 귀신처럼 신경을 쓰는 연숙이 배고픈 애기 고양이를 집 안으로 불려 들여서 먹을 것을 준 것이 인연의 시작.. 보통 집 고양이인 그 baby는 분명히 누가 버린 듯 했다. 너무나 가슴이 쓰린 것을 어찌할까.. 그래도 혹시나 해서 사진을 찍어 동네에 붙여 놓았지만 아무도 claim을 하지 않았다. 고양이 기를 생각은 전혀 못했지만 이제는 choice가 없어서 기르기로 했는데, 때마침 큰 딸 새로니가 Washington DC job 으로 그곳으로 데리고 가서 살았는데 이곳으로 다시 이사를 오면서 우리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런 ‘비 오는 날의 구출’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 기르게 되었지만 제일 골치 아픈 것이 개와 같이 살아야 하는 기구한 운명이었다. 개와 고양이는 옛부터 유명한 관계가 아닌가? 무척 신경이 쓰였고 accidental bite 전과가 있는 Tobey가 제일 문제로 여겨져서 촉각을 세우고 감시를 하기도 했다. 결국은 몇 번 대형사고 직전까지 갔고 우리는 당연히 ‘전과범’ Tobey만 벌을 주곤 했다. 상대적으로 고양이 Izzie는 더욱 보호와 대접을 받기도 했다.

시간이 가며 Tobey의 attack 회수는 줄어들고 서로의 turf만 침범하지 않으며 ‘평화공존’의 상태를 유지하는데 큰 문제가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사태의 진실’이 밝혀지게 되었는데.. 모든 accident 의 원인은 Tobey가 아니고 Izzie 였다는 사실. 그러니까 고양이가 강아지를 ‘먼저’ 괴롭히고 심지어는 attack한다는 놀라운 사실.. 그것을 참다 참다 강아지가 defensive하게 된 것을 우리는 반대로 본 것이다.

다른 집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 집은 이런 상태에 있다. 한마디로 고양이의 승리인 것이다. 참.. 우리 집에서는 오랜 전부터 고양이란 말을 쓰지 않고 ‘양양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이 연구 대상이다. 어떻게 해서 (누가 먼저) 이런 말을 쓰게 되었는가.. 양양이.. 참 재미 있지 않은가?